[오늘의 한 컷] 1972년 오늘, 남북적십자회담

기사입력 2021-08-30 18:11 기사수정 2021-08-30 18:16

서로 다른 이해를 확인한 날

▲남한적십자사 대표단을 맞이하는 북한 관계자의 모습.(국가기록원)
▲남한적십자사 대표단을 맞이하는 북한 관계자의 모습.(국가기록원)

29년 전 오늘, 1972년 8월 30일은 평양 대동강문화회관에서 남북적십자회담 제1차 본회의가 열린 지 이틀째 되는 날이었다. 분단 이후 첫 공식적인 남북대화가 이뤄지자 많은 사람이 감격했으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남북적십자회담은 1000만 남북 이산가족들의 재결합을 주선하기 위해 남과 북의 적십자 간에 열린 회담이다. 1971년 8월 12일 최두선 대한적십자사(한적) 총재의 ‘남북이산가족찾기운동’ 제의로 성립됐다.

1945년 국토 분단으로 한반도에는 1000만 명이 넘는 이산가족이 발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53년 7월 휴전 이후 이산가족의 고통을 해소하기 위한 노력을 꾸준히 전개했으나 북한과의 직접 교섭에 실패했다.

남북적십자는 이산가족의 확인, 상봉, 재결합 등을 의제로 삼아 서울과 평양에서 교대로 회담을 개최했다. 그러나 회담은 북한적십자회(북적)의 정치문제 제기로 실질적으로 해결을 보지 못하고 수많은 회담 중단사태만 거듭해오고 있었다.

이에 1954년부터 적십자사 국제위원회의 중개를 통해 ‘남북자 송환교섭’을 전개했다. 하지만 이 교섭에서도 납북자 일부의 생존을 확인하는 대답만 들은 채 귀향 희망자들을 데려오지 못했다.

제자리걸음이던 이산가족상봉은 1970년대부터 물꼬를 튼다. 1970년 8월 15일 박정희 전 대통령은 ‘평화통일구상’ 선언을 발표했다. 통칭 ‘8‧15선언’으로 불리는 이 선언은 남북간 군사 대결을 지양하고, 인도적 문제 해결의 의지가 있음을 밝혔다.

‘8‧15선언’ 후 1년 만인 1971년 8월 12일, 대한적십자사 최두선 총재는 특별성명을 발표했다. 최 총재는 “남북이산가족들의 비극은 금세기 인류의 상징적 비극”이라며 “남북통일이 단시일 내에 이뤄지기 어려운 현실에서 적어도 1000만 이산가족들의 실태를 파악하고 소식을 전해 주며 재회를 알선하는 가족찾기운동이라도 우선 전개할 것”을 북한에게 제의했다.

남측의 ‘남북적십자회담’ 제의에 북측은 그 해 8월 14일, 평양방송으로 이를 수락하고 “가족만이 아니라 친척‧친우까지 포함해 그들의 자유 왕래를 실현하자”고 역제의했다. 이에 따라 그 해 8월 20일부터 9월 16일까지 판문점에서 다섯 차례 파견원 접촉이 이뤄지고, 판문점에서 예비회담을 여는 데 합의했다.

남북적십자 본회담을 개최하기 위한 예비회담은 1971년 9월 20일부터 1972년 8월 11일까지 판문점 중립국 감독위원회 회의실에서 개최됐다. 남북적십자에서 각각 5명의 대표가 참가한 가운데 총 25회 열렸다.

예비회담에서는 본회담 장소, 일시, 의제, 대표단 구성 등을 논의했다. 초기에는 순조롭게 진행됐으나 정치적 문제가 불거져 교착 상태에 빠졌다. 북측이 이산‘가족’을 찾아주기도 전에 ‘친우의 자유 왕래’를 요구한 것이다. 이는 훈련된 공작원을 대량으로 남파해 남한의 정치적 혼란을 초래할 수 있어서 국제 적십자활동의 기본 원칙인 ‘정치적 중립’ 위반이었다.

이에 남북적십자사는 비공개 실무회의를 통해 적십자회담과는 다른 정치적 대화 통로를 마련하는 데 동의했다. 그 결과 남측에서는 이후락 정보부장이 평양을 방문하고 북측에서는 박성철 부수상이 서울을 방문했다. 그리고 자주, 평화, 민족 대단결의 통일 원칙을 주요내용으로 하는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됐다. 정부 간 관계가 부드러워지자 적십자 예비회담도 급진전돼 1972년 8월 11일 예비회담을 모두 마무리했다.

국토분단 27년 만에 처음 이뤄진 남북대화라는 기대 속에 본회담이 진행됐다. 본회담은 서울과 평양에서 모두 7차례 개최됐다. 1차 본회담은 평양에서, 2차 본회담은 서울에서 개최됐다. 분단 후 첫 남북대화라는 감격에 축제 분위기에서 진행됐으나 차츰 이산가족 문제 해결에 남북 간 인식 차이가 있음이 드러났다.

남측은 정치성을 배제한 다음 ‘가족찾기사업’을 전개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북측은 가족찾기사업의 선결조건으로 반공법‧국가보안법 철폐, 반공교육과 반공정책 중지 등 적십자사 권한 밖인 정치적 요구들을 내세웠다. 결국 돌파구를 찾지 못한 본회담은 1973년 8월 28일 북한의 전면 대화 중단 선언과 함께 단절됐다. 이후 남측이 몇 차례 회담을 이어가고자 했으나 교섭이 반복해서 결렬됐다.

최근에는 이산가족 당사자들이 가족을 직접 찾아 나서는 경향이 많아지고 있다. 이산가족찾기운동은 1970년대부터 지금까지 여러 갈래로 발전되고 있다. 하지만 정부와 적십자를 통한 방법은 기대하기 힘든 상황이다. 현재는 민간단체를 통하거나 개별적으로 가족을 찾는 방법만 통용되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2018년 8월 남북정상회담 이후의 화해 분위기 속에서 금강산 이산가족 상봉 행사가 개최됐으나, 이를 마지막으로 당국 차원의 교류는 전면 중단됐다. 현재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과 남북관계 경색으로 인해 당분간은 이산가족 상봉 성사 가능성이 낮은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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