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물가, 고금리 상황이 장기화되면서 영양실조로 병원을 찾는 국민이 급증하고 있다. 특히 취약계층을 위한 의료급여 수급자와 고령층에서 영양실조 환자가 크게 증가해 서민들의 생활고를 증명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더불어민주당 전진숙 의원(광주북구을, 국회 보건복지위원회·여성가족위원회)이 국민건강보험공단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최근 5년 동안(2019년~2024년 상반기) 건강보험으로 영양실조 진료를 받은 인원은 총 63,274명에 달한다. 특히 60대 이상 고령자는 2019년 4301명에서 꾸준히 늘어 2023년에는 약 2.2배 늘어 9372명을 기록했으며, 올해 상반기에만 벌써 5009명이 진료를 받아 2019년 한 해의 진료 인원을 넘어섰다. 전체 진료 인구의 60%를 차지하는 숫자다. 코로나19 이후 고물가, 고금리 상황에서 회복되지 못한 경제적 어려움이 국민들의 영양 상태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의료급여 수급자 중 영양실조 환자도 최근 5년 동안(2019년~2024년 상반기) 2배 이상 증가했다. 의료급여 환자는 주로 생활이 어려운 저소득층으로, 진료비의 상당 부분을 국가가 부담한다. 의료급여 수급자로서 영양실조로 진료를 받은 인원은 2019년 1,117명에서 지난해 2,408명으로 두 배 넘게(2.2배) 급증했다. 특히 2019년 이후 진료 인원 총 10,076명 중 60대 이상 노년층이 8,531명으로, 그 비율이 85%에 육박한다. 고령 의료급여 수급자의 영양 관리에 국가의 지원이 필요한 상황이다.
전진숙 의원은 “지금 서민들은 단순한 생계의 어려움을 넘어 기본적인 영양 상태를 유지하는 것조차 힘든 상황에 놓여 있다”고 지적하며, “국민 모두가 최소한의 삶의 질을 보장받을 수 있는 세밀하고 촘촘한 복지 시스템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영양실조 진료 현황
조선 가사문학의 대가이자 정치가였던 송강 정철(1536~1593)의 생애는 극적이었다. 삶 전체가 한 편의 파란만장한 인간극장이자, 장면에 따라서는 야유가 쏟아지는 별점 5개짜리 장편영화였다. 생존 당시는 물론 사후까지 부정적이거나 엇갈린 평가가 따라붙는 송강의 캐릭터는 정말이지 독특하다. 그의 문학은 빼어나 찬사가 쏟아졌지만, 정치 측면에선 잔혹해 지탄을 받았던 게 아닌가. 선조의 입에서 “송강이 조선 선비를 다 죽였다”는 한탄이 터져 나올 정도였다.
송강이 태어난 곳은 한양이며, 학문을 닦고 시심을 기른 정신적 고향은 전남 담양이다. 58세 나이로 죽음을 맞이한 곳은 강화도다. 그의 묘소는 충북 진천군 문백면 환희산 기슭에 있다. 원래 경기도 고양에 묻혔으나 1665년 성리학의 거두 우암 송시열의 권유에 따라 현재 자리로 이장하고 사당을 세웠다. 이후 세월 속에서 퇴락한 사당을 현대에 이르러 크게 중건한 게 지금의 정송강사(鄭松江祠)다. 이곳엔 송강의 영정과 위패가 봉안돼 있다. 다시 말하자면 정송강사는 송강의 넋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이다. 이곳 분위기는 여느 딱딱한 사당과 달라 포근한 맛을 풍긴다. 산자락을 움켜쥔 입지라 배후 풍치가 밝다.
송강의 묘소는 정송강사 옆으로 난 비탈길 끝자락에 있다. 묏자리는 문외한의 눈에도 명당으로 보일 만큼 아늑하고 훤칠하다. 우암이 잡았다는 터이니 어련하랴. 우암이 송강의 묘지 이장을 주도한 건 송강의 묘소에 물이 차 고민이라는 후손의 하소연을 접하고서였다. 그런데 우암이 하필 진천을 택해 이장 작업을 한 건 어떤 이유에서일까. 여기에는 일련의 정치적 고려가 있었다. 우암은 영남계 서원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충북 지역에 서원 다수를 건립했는데, 서인의 영수 송강의 묘소를 진천으로 이장한 것도 같은 의도에서였다. 정송강사 남쪽엔 ‘송강정철신도비’가 있다. 비의 총 높이는 3m에 달해 웅장하다. 비문을 쓴 이는 우암이다.
송강은 출세가도를 달린 인물이었다. 그러나 파행이 잦은 질주였다. 당쟁의 이전투구를 조성하거나 휘말려 사실상 안심을 가지고 산 날은 그리 많지 않았다. 조선 최고의 정치적 참사로 평가되는 ‘기축옥사’ 때는 송강이 위관(委官, 재판장)을 맡아 동인 세력의 뿌리를 뽑으려는 의도로 참혹한 피바람을 일으켰다. 1000여 명에 달하는 동인 쪽 사람들을 불귀의 객으로 만들었던 것. 송강 자신 역시 당쟁에 치받혀 부침을 거듭했으며, 수차례 유배지로 쫓겨나기도 했다. 말년의 송강은 강화도에서 가난을 끼고 고독하게 살았다. 친구에게 편지를 써 ‘아무리 둘러봐도 입에 풀칠할 계책이 없다’고, ‘부디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이 대목에서 송강이 청빈을 버릇으로 삼았던 인물임이 드러난다고 보는 눈도 있다. 아무려나 송강은 강화의 누옥에서 홀로 숨을 거두었다. 사인은 영양실조였다고.
송강의 성품에 대해 동시대 학자 기대승은 ‘청결한 수석’에 견주었다. 율곡은 ‘강직하지만 속이 좁아 병통’이라 했다. 선조는 송강을 총애했지만 그가 죽자 ‘독기로 사람을 해친 자’라고 깎아내렸다. 무능한 군주답게 달면 삼키고 쓰면 뱉은 셈이었다. 한편 가사문학으로 조선 문학사에 굵은 획을 그은 송강을 두고서는 찬사가 쏟아졌다. 흔히 조선의 최고 시인으로 윤선도, 박인로와 함께 송강을 꼽는데, 서포 김만중은 송강의 ‘사미인곡’을 중국 굴원의 명시 ‘이소’(離騷)에 빗대어 ‘동방의 이소’라 극찬했다. 송강의 남다른 개성은 당시 문인들이 별 관심을 두지 않았던 한글로 시를 썼다는 데에서도 두드러진다.
송강의 시적 절창은 주로 유배지에서 나왔다. 신세가 궁색해질 때마다 송강은 복잡한 심정을 시에 묻어 다독였던 거다. 그가 매달린 것이 시만은 아니었다. 술이 또한 송강을 삼매경으로 데려가곤 했다. 그는 음주벽으로도 한가락 했다. 대낮 근무시간에 거나하게 취해 사모를 삐뚜름히 걸치고 임금 앞에 나타나기도 했다지. 이런 송강에게 선조는 작은 은배(銀杯)를 하사했다. “이 잔으로 하루 한 잔만 마시라”고 당부하며. 이에 송강은 은배를 망치로 두들겨 사발만 하게 만들어 술을 마셨다던가? 이럴 때의 송강은 익살스런 꾀보다. 정송강사 경내에 있는 송강기념관엔 송강의 유품들이 전시돼 있다. 선조가 내린 은배 한 점도 보인다. 진품은 종가에서 소장하고 있다.
직접 쳐볼 수 있는 대종도 있다
이제 발길은 진천종박물관에 닿는다. 한국 범종(梵鍾, 절에서 쓰이는 큰 종)의 우수성과 예술성을 알리기 위해 2005년 개관한 국내 유일의 종 전문 박물관이다. 진천엔 고대의 제철 유적인 ‘진천 석장리 유적’이 있다. 따라서 진천에선 일찌감치 금속공예의 싹이 텄을 걸 알 만하다. 이 특유한 역사를 배경 삼아 금속예술의 정수인 범종의 모든 걸 보여주는 종박물관이 건립됐다. 직접적인 설립 계기는 범종 제작의 명인 주철장(鑄鐵匠) 원광식(중요무형문화재 제112호)이 만들거나 모은 종 150여 점을 기증한 것이었다.
진천종박물관은 크기와 세세함이 조합돼 매우 알차고 흥미진진한 박물관이다. “어, 이런 재미있는 박물관이 있었어?” 감탄이 절로 터진다. 범종의 전시는 물론 범종의 역사, 제작 기술과 과정을 보여주는 다양한 섹션에서부터 세계의 종 전시관, 기획전시실, 타종 체험장 등을 갖추어 관람객을 충족시킨다. 나는 ‘충족’ 정도가 아니라 사로잡혔다. 이 박물관의 핵심 공간은 시대에 따라 변전한 한국 범종의 양상과 실체를 보여주는 1층 전시관이다. 여기에선 범종의 걸작인 성덕대왕 신종(일명 에밀레종) 모형을 비롯해 상원사 동종, 낙산사 종 등 다수의 명품 범종을 볼 수 있다. 중국과 일본의 종도 전시해 비교 감상할 수 있게 했다. 이 모든 종이 원광식이라는 한 개인이 실물 그대로 재현한 복제품이라 하니 경이롭다.
이곳의 종들이 다 그렇지만 특히 성덕대왕 신종 앞에서 눈을 뗄 방법이 없다. 예전 이 거대한 보물을 경주박물관으로 옮길 때 경주시민 10만여 명이 몰려들어 운송 광경을 지켜봤다. 그토록 인기 있으며, 그토록 유서 깊으며, 그토록 빼어난 예술이다. 범종은 종소리의 깊음과 신비감으로 아름답다. 중생의 미망을 일깨우는 소리를 내는 신성한 법구다. 이른바 ‘맥놀이’라는 오묘한 과학을 무뚝뚝한 쇳덩어리에 주입해 부처의 음성, 천상의 소리를 뽑아내다니. 종의 피부에 새긴 조각은 또 어떻고? 사람을 압도하는 저 능란한 세공을 보라. 범종의 과학, 미학, 예술을 만끽할 수 있는 진천종박물관은 기분을 돋워주는 명소다. 야외 광장엔 직접 쳐보라고 만들어놓은 대종 2점이 있다. 종을 치자 웅장한 소리가 울려 퍼지다 그윽한 여음을 남기고 꿈처럼 사라진다. 그러자 가슴에 괸 먼지가 가셨나? 쾌감이 엄습한다.
장주식 진천문화원 원장
‘이상설 기념관’은 건축문화 성지
“올해 진천문화원이 해야 할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 건 ‘보재 이상설 기념관’을 차질 없이 개관하는 데 있다. 계획대로 올해 상반기에 개관되면 곧바로 전국적인 명소로 부각될 것으로 예상한다. 이상설 선생의 삶과 업적을 기리는 갖가지 자료는 물론이고 건축의 미학까지 겸비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진천문화원 장주식 원장의 얘기다. ‘보재 이상설 기념관’은 2023년 10월에 준공식을 마쳤다. 무려 8년여에 걸친 사업으로 결실을 거두었다. 천신만고로 일을 추진한 장 원장의 실력이 마침내 빛을 본 셈이다. 그는 ‘보재 이상설 기념관건립추진위원회’ 위원장이다.
“이상설 선생은 독립운동가 중에서도 우뚝한 인물이다. 항일운동의 선구자이며, 인품과 학식도 빼어난 분이다. 그러나 충분히 조명되지는 않았다. 흔히 헤이그 특사의 일원으로 기억할 뿐이지 않은가. 기념관 개관을 계기로 선생의 업적과 뜻이 널리 선양되길 기대한다.”
건축에 구현된 기법이 특별하다지?
“전통적인 목 구조와 현대적인 철근콘크리트 구조를 융합해 지은 대형 건물이다. 고려 중기에 성행한 주심포 양식도 도입했는데, 이모저모 고도의 기술력이 들어간 건물이다. 이는 사례가 드문 것으로 향후 건축문화의 성지가 될 것으로 전망한다.”
진천 하면 ‘생거진천’(生居鎭川)부터 떠오른다. 진천이 살기 좋은 고장으로 알려진 연유가 있겠지?
“주로 너른 구릉지로 이루어진 진천은 과거부터 농업이 발달했다. 지형 구조상 자연재해도 드물다. 따라서 농사가 순조롭고, 덩달아 인심도 좋을 수밖에. 진천엔 널리 이름난 효자도 많았다. 이 역시 지역에 만연한 후덕한 인정을 웅변한다.”
글로벌 기업들이 입주한 요즘 진천군은 활력이 넘친다. 문화원이 할 일도 많아졌을 것 같다.
“문화 향유 욕구가 강한 청년층이 대거 유입되고 있다. 따라서 우리 문화원은 그들의 요구에 부응할 수 있는 문화 콘텐츠 개발에 나서고 있다. 기존 프로그램을 강화하는 한편 현대적인 문화예술 프로그램을 보완할 참이다.”
진천의 역사 가운데 주목할 만한 장면을 소개한다면?
“신라의 영웅 김유신 장군이 진천에서 탄생했다. 장군은 삼국통일 위업을 완수했는데, 그의 화랑도 정신과 통일 열망이 진천 땅에 이어져 남북통일의 기운이 들끓어오를 경우, 마침내 통일 한국을 이룰 수도 있을 거라고 본다.”
요즘 진천에 떠오른 문화 이슈가 있다면 어떤 것인가?
“백원서원 복원 운동이 펼쳐지고 있다. 이 서원은 조선 최고의 효자 김덕숭 선생을 비롯한 4인의 선현을 배향한 곳으로 ‘충효의 고장 진천’을 상징하는 공간이다. 현재 재원 마련을 위해 주민들도 성금을 모으고 있다.”
장 원장은 백원서원 복원 이후를 생각하고 있다. 전통 서원을 현대적으로 재생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 고민 중이다.
“일종의 장난기로 미술관을 구상했다. 무슨 거창한 뜻을 가지고 설립한 게 아니라는 뜻이다. 그저 사람들이 미술을 즐길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었고, 이왕 미술관을 만들 거면 제대로 해보자는 작정이었지. 회사를 운영하며 얻은 경영 감각이 약간은 있어 자신감을 갖기도 했다.”
이수문(74) 화이트블럭 대표는 중견 기업인 출신이다. 경영에 일가견이 있는 인물. 처음엔 그저 기분에 이끌려 미술관을 착상했다고 하지만 야무진 복안을 가지고 일을 밀어붙였을 걸 짐작할 수 있다. 사실 그는 화이트블럭을 헤이리의 랜드마크로 키우고자 진력했다. 화이트블럭의 행진 방향도 분명했다.
“무엇보다 대중이 쉽게 미술을 향유할 수 있는 공간 조성에 주력했다. 전시 작품도 유명 작가의 대단한 작품보다 대중이 편하게 감상할 수 있는 작품을 골라 기획했다. 한마디로 미술관의 문턱을 낮추고 싶었던 거다.”
레지던시 운영에도 주력했더라.
“신진작가 지원에 일조하고 싶었다. 그림을 팔아 제대로 밥을 버는 작가가 몇이나 되겠나. 그들은 예상보다 어려운 형편에 처해 있다. 미술관 운영자라면 신진을 지원하는 게 마땅하다. 개인 작업실을 마련해주고 전시 기회를 부여하는 일을 어떻게 외면할 수 있을까?”
형편이 어렵기는 사립미술관들도 마찬가지다.
“사립미술관이 수익을 내기는 기본적으로 어렵다. 운영자들 대부분이 고생하고 있다. 허리띠를 졸라매길 거듭하다 마침내 영양실조에 걸리는 형국이지. 화이트블럭만 하더라도 연평균 3억 원 정도의 적자가 발생한다.”
대단한 재력을 보유하지 않고서는 지속할 수 없는 게 사립미술관이다. 그런데 그는 매년 3억의 적자를 보면서도 용케 화이트블럭을 이끌어가고 있으니 저력을 알 만하다.
사립미술관의 생존 대안은 무엇인가?
“내 경우에는 대형화로 길을 모색한다. 현재 내년 개관을 목표로 천안에 미술관을 새로 만드는 중이다. 화이트블럭보다 훨씬 규모가 큰 복합미술관이다. 천안의 핫플레이스로 만들자는 게 목표다. 사람들이 찾아와 서너 시간 즐길 수 있는 공간이 될 것이다. 화이트블럭의 운영 경험을 살려 제대로 해볼 참이다.”
젊어서부터 예술 분야와 인연이 많았다지? 창작 뮤지컬 ‘명성황후’ 공연의 산파역도 했고.
“극단에 섞여 연극을 하거나 나팔을 불며 음악을 배웠다. 그러나 그저 엉뚱한 여기(餘技)에 불과했다. 예술 분야가 잘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딴엔 조금 돕기는 했으나 대단할 게 없다. 아마추어 조기 축구회에서 선수로는 뛰지 못하고 그저 물주전자를 들고 다니는 역할 정도의 일을 했을 뿐.”
예술인들과 많은 교분이 있다지? 특히 화가들의 삶과 생리에 밝을 텐데, 어떤 유형의 작가를 좋아하나?
“미술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내게 무슨 견해가 있겠나? 다만 이건 안다. 이름난 화가의 작품이 반드시 훌륭한 것만은 아니라는 걸. 현재 유명한 작가가 10년, 100년 후에도 명망을 유지할 수 있을까? 난 남들보다 뒤처져 있을망정 뚜벅뚜벅 자신만의 길을 가는 작가에게 신뢰를 느낀다.”
3월 24일은 ‘세계 결핵의 날’이다. 결핵은 에이즈·말라리아와 함께 3대 감염병이다.
특히 우리나라는 결핵 발병률과 사망률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가장 높다. 한국의 결핵 발생률이 높은 이유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잠복결핵’의 영향이 크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최근 질병관리본부가 발표한 ‘2018년 결핵 환자 신고현황’에 따르면 2018년 결핵에 새로 걸린 환자(결핵 신환자)는 2만6433명(10만 명 당 51.5명)으로 이 가운데 65세 이상 노인이 1만2029명으로 전체의 45.5%를 차지했다.
노인층의 결핵은 약 3분의 2이상이 과거에 감염된 잠복결핵이 면역력 저하로 인해 재발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결핵은 전염력이 강하고 서서히 폐를 망가뜨리기 때문에 조기 발견과 꾸준한 치료가 중요하다.
감기 2~3주 이상, 체중감소 있다면 검사 필요
세계보건기구(WHO)는 세계 인구의 약 30%가 결핵균에 감염됐다고 추산한다. 결핵균은 지방 성분이 많은 세포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굵기 0.2~0.5㎛(마이크로미터), 길이 1~4㎛ 크기의 막대기 모양인 결핵균은 다른 균에 비해 증식속도가 매우 느리기 때문에 증상이 서서히 나타난다. 일단 결핵균이 활동을 시작하면 면역세포와 결핵균의 염증반응에 의해 폐에 점차 고름이 생기게 된다. 결핵은 보통 공기를 통해 전염된다. 전염성이 있는 폐결핵 환자가 말을 하거나 기침, 재채기를 하는 경우 결핵균이 포함된 미세한 침방울이 공기 중에 떠다니다가 다른 사람이 결핵균을 들이마시게 되면 폐로 들어가 결핵균에 감염된다.
폐 안에 결핵균이 들어오면 폐 실질(조직)을 녹이면서 괴사(고름)상태가 된다. 이렇게 괴사상태가 되면 결핵균이 활발하게 증식하게 되는데, 이때 기침을 하면 기관지 내부에 있던 결핵균이 대량으로 공기 중에 방출된다. 기침하는 결핵 환자 앞에서 대량으로 흡입했다면 결핵이 옮을 수 있는 확률은 그만큼 커진다.
결핵에 감염된 환자들이 느끼는 특징적인 증상이 있다. 기침, 체중감소, 가래, 무기력감, 객혈 등이다. 평소처럼 식사를 하는데도 체중이 줄고 감기 증상이 2~3주 이상 지속된다면 검사를 받아야 한다.
폐 외 다른 장기에도 발병
결핵은 폐가 아닌 모든 장기에 발병할 수 있다. 신체 부위에 따라 크게 2가지로 나뉜다. 흔히 폐에 생기는 결핵을 폐결핵, 폐가 아닌 다른 부위에 생기면 폐외결핵이다. 폐외결핵 중 가장 흔한 것이 결핵성 늑막염이다. 결핵균이 늑막을 공격해 염증이 발생하고 흉수가 고이게 된다. 이는 호흡을 어렵게 하고 흉통과 마른 기침을 유발한다.
또 림즈절에 결핵균이 침투하면 피부가 붉게 부어오르고 점점 커지면서 심한 통증을 생길 수 있다(결핵성 림프절염). 방치할 경우 피부가 벌어져 고름이 흘러나오게 된다. 만약 결핵균이 대장에 침투하게 되면 결핵성 대장염이 발생하는데 대장에 궤양이 생기고 심각한 설사 증상으로 급격한 체중감소를 가져온다.
김주상 가톨릭대 인천성모병원 호흡기내과 교수는 “폐외결핵은 생기는 부위에 따라 폐결핵보다 훨씬 더 심각한 합병증을 동반하는 경우가 많다”며 “가장 대표적으로 결핵성 뇌수막염과 같은 신경계 결핵이나 심장막 주변에 결핵이 생길 경우(심낭결핵) 심한 합병증으로 높은 사망률이 나타나기도 한다”고 했다.
약 듣지 않는 슈퍼결핵 주의
결핵약에 내성이 없는 환자가 2주 이상 결핵약을 복용할 경우 전염성은 대부분 상실된다. 또 결핵약을 6개월간 꾸준히 복용하면 90% 이상 완치된다. 그러나 결핵약 복용은 말처럼 쉽지 않다. 특히 결핵약을 써도 잘 낫지 않는 슈퍼결핵 환자, 즉 다제내성결핵 환자는 매년 꾸준히 발생하고 있다.
결핵 치료는 6개월간 꾸준한 약물복용이 필수지만 부작용은 환자들의 치료를 방해하는 큰 요인이다. 대표적인 부작용은 간 기능 장애다. 복통, 식욕부진은 물론 심한 경우 황달이 나타나기도 한다. 또한 소화불량, 구토 등 위장장애도 나타날 수 있는데 심할 경우 약제를 추가해 조절한다. 피부발진도 생긴다. 몸과 얼굴에 발진이나 여드름 같은 증상이 나타날 수 있고, 약을 중단할 경우 대부분 사라진다. 혈중 요산 농도가 높아져 팔다리의 통증과 관절통을 유발할 수도 있다. 드물게 시력 손상도 나타나 시야의 중앙이나 주변부가 보이지 않거나 색상 구분이 어려워질 수 있다. 전문의와 상의해야 한다. 또 혈소판 감소증으로 멍이 생길 수 있다. 이런 극심한 약제 부작용을 경험할 경우 치료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대개 초기에 부작용이 많지만 다시 약을 조절해 가면서 먹으면 대부분 조절이 가능한 정도가 된다. 만약 6개월간 복용수칙을 지키지 못한다면 그 결과는 더 큰 위험으로 다가올 수 있다. 일반 결핵은 6개월간 약만 꾸준히 복용해도 완치가 되지만 중간에 약을 끊거나 약의 일부만 복용하면 약제 내성이 생긴다. 약제 내성이 생기면 2차 약제를 투여해야 하는데 약의 수가 늘어날 뿐 아니라 부작용도 더 심해진다. 치료 기간도 2년까지 늘어나게 된다. 심각한 경우 어떠한 약제도 듣지 않는 광범위내성결핵으로 진행할 위험성도 높아진다.
다제내성결핵은 약을 불규칙하게 복용하거나 중단한 경우 약제에 내성이 생겨 발생한다. 특히 결핵 치료에 중요한 약인 ‘아이나’와 ‘리팜핀’ 두 약제에 내성이 생기는데 2차 약을 복용해도 치료 성공률이 50%에 불과하고 완치가 어렵다.
김주상 교수는 “다제내성 결핵환자들 중 전염성이 있다고 판단될 경우 입원격리치료가 적용된다. 이때 입원비는 물론 결핵 관련 치료비 전액을 국가에서 보조해주고 있다”며 “결핵 치료는 늦어질수록 본인뿐 아니라 남에게도 전염될 위험성이 높아지기 때문에 진단과 동시에 치료하는 게 원칙이다”고 말했다. 이어 “다제내성결핵은 항암치료처럼 약을 독하게 먹고 오래 치료를 하기 때문에 환자 본인이 자기관리를 철저히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교수는 “결핵과 면역기능은 깊은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어 당뇨병 등 만성질환자, 습관적으로 음주를 하는 사람, 영양실조에 걸려 면역력이 떨어진 환자,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 감염자 등이 감염 위험이 높다”며 “장기이식환자, 위암· 폐암· 혈액암 등 항암치료를 받는 환자들과 만성 신부전증을 앓고 투석을 하고 있는 환자들도 주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때론 유명인사의 죽음이, 사인이 된 질환에 대한 선입견을 만들어내는 경우가 있다. 최근 재조명되고 있는 프레디 머큐리의 에이즈나 스티브 잡스가 걸린 췌장암이 대표적이다. 콩팥병이나 혈액투석과 관련한 이야기를 할 때, 중장년들은 신부전증으로 유명을 달리한 가수 배호를 떠올린다. 비싼 병원비 때문에 힘들어했다는 사연이 전해지면서 이 병은 집 기둥뿌리 뽑아 병원비를 대야 할 만큼 치료비가 비싸다는 인식을 심어줬다. 하지만 배호는 혈액투석과는 거리가 있다. 그는 1966년 사망했는데, 국내에 인공신장기가 처음 도입된 시기는 1965년 수도육군병원에서였다. 일반인이 쉽게 혈액투석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전문의들 또한 이런 선입견에 반기를 든다. 신장병은 치료비 부담이 크지 않고, 삶의 질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고대구로병원 신장내과 권영주(權映珠·57) 교수를 만나 만성콩팥병 치료에 대해 들어봤다.
“일본에선 혈액투석하며 30년 넘게 건강한 분도 많아요.”
만성콩팥병이 절망적인 병은 아니냐는 질문에 이런 답변이 돌아온다. 권 교수는 “실제로 대다수의 사람이 부정적인 선입견을 갖는 경우가 많지만 현실에서는 충분히 관리가 가능하고 금전적으로 부담이 큰 병도 아닙니다”라고 말한다.
고혈압과 당뇨병이 주요 원인
신장병은 대부분 신장을 이루는 기본 단위인 사구체에 이상이 생겨 발생한다. 사구체는 혈액을 여과하는 모세혈관 덩어리다. 이곳에 염증이 발생하는 것이 사구체신염이다. 이 질환은 신장기능을 감소시키면서 만성콩팥병으로 이어진다. 신장기능 이상이 3개월 이상 지속되면 만성콩팥병이라고 부르며, 그 이전에 호전되면 급성으로 구분한다. 이 병을 일으키는 원인은 또 있다. 바로 우리에게 익숙한 고혈압과 당뇨병이라고 권 교수는 설명한다.
“신장이 아주 미세한 혈관으로 이뤄져 있다 보니 고혈압이 신장에 문제를 일으키기 쉽습니다. 또 반대로 사구체신염이 고혈압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거죠. 당뇨병도 큰 영향을 미칩니다. 당뇨병 관리가 제대로 안 되면 신장에 문제가 생기면서 단백뇨가 나타나기도 합니다.”
당뇨병 환자가 가장 주의할 것 중 하나는 방심이라고 권 교수는 강조한다. 인슐린 투여나 약물 복용 등으로 혈당관리를 잘해도, 자각증상 없이 만성콩팥병으로 진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장을 위협하는 또 하나의 복병은 바로 담배다. 혈관에 악영향을 주는 흡연은 손상되기 쉬운 미세혈관으로 구성된 신장에는 상극이다.
노화도 위험요인 중 하나다. 권 교수는 “40세 이상이 되면 신장질환이 없어도 기능이 매년 1%씩 감소하기 때문에 고령일수록 주의 깊게 관찰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식이요법이 치료만큼 중요해
신장기능에 이상이 있는지를 판단할 때 의료기관에선 크레아티닌이라는 성분을 측정한다. 혈중 크레아티닌 농도는 낮고, 요중 농도는 높아야 정상이다. 이 농도를 통해 신장기능의 정도를 5단계로 구분하는데, 3단계 이상을 만성신부전이라 부르며, 가장 심각한 5단계는 신장기능이 정상인에 비해 15% 이하 수준이다. 혈액투석이나 이식수술 등을 고려하는 단계는 5단계다.
권 교수는 “환자가 가장 주의해야 할 시기는 1~2단계”라고 강조한다.
“병의 원인이 무엇인가에 따라 1~2단계에서는 유지가 가능해요. 식이요법을 제대로 따르고 복약을 잘하면 악화되지 않고, 안되어도 절반 정도는 투석이나 신장이식이 필요한 5단계까지 발전하지 않도록 조절할 수 있어요.”
발병했을 때 자각증상은 밤에 소변이 보고 싶은 야간뇨로 나타난다. 신장기능이 저하되면 야간뇨농축기능이 감소해 요의가 자주 느껴지는 것이다.
만성신부전의 치료 과정에서 혈당이나 혈압 조절과 함께 의료진이 가장 주의를 주는 부분은 바로 ‘식이요법’이다.
“만성콩팥병의 정도에 따라 나뉘는데, 1~2단계에선 단백질과 소금을 제한해야 하고, 3단계에서는 칼륨 섭취를, 4단계부터는 인 섭취를 줄여야 합니다. 일상생활에서 어렵더라도 만성콩팥병 치료에서 소금 조절은 심장상태에 따라 필수입니다.”
소금을 피해야 하는 이유를 권 교수는 이렇게 설명했다.
“혈액투석을 받던 환자가 사망하는 원인은 크게 감염과 심혈관 질환 두 가지입니다. 혈압이 높아 심혈관을 보호하기 위해 이뇨제를 쓰는 경우가 많은데, 이뇨제는 마치 젖은 수건을 짜듯 신장에 무리를 줘요. 그래서 이뇨제 투여를 최소화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싱겁게 먹는 게 중요합니다.”
권 교수가 말하는 칼륨 피하는 방법은 이렇다. 야채는 데쳐먹고 줄기 채소는 줄인다. 생야채는 하루 열 잎 이내로 찬물에 오래 담갔다가 먹고, 사과, 호박은 껍질을 벗겨 먹는다. 바나나와 토마토는 피한다.
투석비용 많게는 월 30만 원 정도
신장기능이 정상의 10%로 이하로 떨어지거나 영양실조, 요독증상이 심해지면 병원에서는 신대체요법을 고려한다. 신대체요법이란 환자의 신장기능이 떨어져 신장 대신 혈액 속 노폐물을 배출하는 치료법을 말한다. 투석이나 신장이식이 여기에 속한다.
투석은 크게 두 가지, 집에서 환자 스스로 가능한 복막투석과 의료기관의 장비를 이용한 혈액투석이 있다. 복막투석은 상대적으로 비용이 저렴하고, 병원을 자주 찾지 않아도 되는 장점이 있다. 투석에 필요한 물품만 챙겨 가면 장기 해외여행도 가능하다. 그러나 투석 과정에서 잘못 조치하면 감염 등의 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에 주의가 필요하다.
반면에 혈액투석은 조치를 병원의 의료진이 해주기 때문에 환자의 부담은 적지만 대신 비용이 높다.
가장 중요한 비용 부분은 국민건강보험 혜택을 받게 되면서 환자의 부담이 많이 줄었다. 환자는 전체 치료비의 10% 정도만 내면 된다. 혈액투석 본인 부담금은 월 20만~30만 원 정도, 복막투석은 15만~20만 원 선이다.
신장이식은 가족 중 기증자가 없으면 뇌사자의 신장을 기증받는데, 국내 뇌사자 장기기증이 활발하지 않아 어렵다. 기증자가 나타나면 이식받을 환자 후보군을 등록 시점 등을 고려해 복수로 선정 한 뒤 최종 결정하는데, 처음 후보군에 오르기까지 4년에서 6년 정도 걸린다. 수술 비용은 1500만 원 내외다.
“그래도 심장, 간, 폐 등 주요 장기 중에 기능이 거의 멈춰도 대체 방법을 통해 일상생활이 가능한 것은 신장밖에 없어요. 환자 중엔 투석을 받으면서도 택배일 등 직장생활을 하는 환자도 있습니다. 대체요법을 고려할 정도로 신장기능이 악화되어도 희망을 버리면 안 돼요. 낙담하지 말고 힘을 내셨으면 합니다.”
서울시가 광복 72주년 보신각 타종 행사에 ‘군함도’로 강제징용 갔다 돌아온 생환자를 포함시켰다. 늦었지만 반가운 일이다.
72주년 광복절을 맞아 아내와 영화 군함도를 관람했다. 영화에서 본 강제징용도 역사적 사실만큼 끔찍했다. 2차 세계대전 말기 일제는 한 명의 조선인이라도 더 끌고 가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강제징용에 끌려간 조선인은 사람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군수품이고 소모품이었다. 군함도의 조선인들은 날이 채 밝기도 전에 굴속에 들어가 삽질을 시작했고 날이 저물어 삽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맞아가며 가혹한 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흙탕물로 갈증을 달래며 삽질을 했고 영양실조와 질병으로 쓰러지거나 죽어야만 실려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유승완 감독의 군함도는 거기까지였다. 영화는 조선인을 학대한 조선인에게 포커스가 맞춰졌고, 조선인을 배반하고 우롱하는 독립투사에게 맞춰졌다. 일제에 의한 핍박과 역사적 사실의 조명보다 조선인과 조선인이 싸우는 허리우드식 블록버스터가 되고 말았다. 일제 강점기에도 조선인에게 유독 악질적으로 대한 조선인이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렇지만 피해자 입장에서 역사적 사실을 서술할 때는 신중해야 한다. 아무리 재미를 추구해야 하는 영화라 해도 악질적 조선인이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어떻게 이런 자학적 시나리오가 가능했을까. 젊은이들이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덩케르크’에 더 높은 점수를 준 것도, 영화의 기저에 친일적 사고가 깔려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세간의 의혹도 바로 이 때문이다.
전쟁을 위해 강제징용으로 희생된 조선인은 부지기수였다. 한 철도 공사장에서는 철도 교각에 조선인 시체를 넣고 시멘트로 봉하기도 했다. 심지어는 숨이 붙어 있는 산사람까지 생매장을 했다니 공사장은 글자 그대로 조선인의 무덤이었다. 강제징용의 피해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발생했다. 국회에 제출된 자료에 의하면, 1938년 4월부터 1945년 해방 전까지 일제는 국내에서 6956곳의 작업장을 운영했으며, 그 기간 중에 강제 동원된 조선인은 648만 8000명이나 됐던 것으로 나타났다. 당시 조선인구가 삼천만 명이 되지 못했으니 그 숫자만으로 강제징용의 피해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가늠할 수 있었다.
다시 군함도로 가보자. 1890년 하시마(군함도)섬을 인수한 미쓰비시는 전쟁이 한창이던 1940년부터 패할 때까지 강제징용된 조선인들에게 석탄을 채굴토록 했다. 전범기업 미쓰비시는 강제노역으로 캔 석탄을 이용해 전쟁 물자를 생산했고 굴지의 기업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군함도는 잊혀졌다. 강제징용된 조선인들은 군함도를 떠났고, 1974년 지옥 같았던 탄광이 석탄산업의 쇠락과 함께 마침내 폐쇄됐기 때문이다. 조선인의 강제징용 사실을 숨긴 일본은 2015년 7월 군함도 전체를 관광자원화 하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했다. 그동안 강제징용에 대한 보상은커녕 제대로 된 사과도 없었다. 일본의 인접 피해국에 대한 역사인식의 한계가 어디에 있는지 확인할 수 있을 뿐이었다. 위안부 문제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마치 위안부 문제가 그랬던 것처럼 군함도에서 조선인 징용자들이 겪은 고통도 뒤늦게 생존자를 통해 들을 수 있었다. 일제의 강제징용을 고발하고 당시 억울하게 희생된 조선인을 위로하기 위한 ‘강제징용 노동자상’이 서울 용산역 광장에 건립됐다. 그 건립 과정이나 목적이 위안부 소녀상을 빼닮았다. 그러나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군함도에서 희생된 조선인 강제징용 희생자들에 대한 일본의 사과는 없다. 아직 위안부에 대해서도 제대로 된 사과를 하지 않고 있는 일본 정부가 강제징용으로 희생된 조선인에 대해서 쉽게 사과할 것 같지도 않다.
영화 군함도를 관람한 후 일제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역사의식이 부족한 우리에게 일본이 과연 제대로 된 사과를 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드는 것은 나 혼자만의 생각일까. 왜곡된 역사인식으로 인하여 영화가 손익분기점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는 보도가 씁쓸하다.
지난 6월 22일 남부터미널역 ‘팜스 앤 팜스’에서는 계간 문학잡지 제 13회 신인 문학상 시상식이 있었다. 이 자리는 한국시니어블로거협회의 회원인 손웅익씨가 수필가로 등단하는 자리였다.
필자는 한마디로 겉모습도 속마음도 잘난 남자들을 좋아한다. 지휘자 중 가장 좋아하는 불세출의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은 외모 자체가 명품이다. 이에 버금가는 손 수필가님도 외모가 근사하다. 글은 그 사람이다. 그동안 한국시니어블로거협회에 올린 그의 글들이 정말 훌륭했다. 그의 글을 읽다보면 철학자인듯 싶은데 예술가이고 사색가인 듯싶은데 수필가이다. 그의 글에는 철학자의 깊이가 있고 예술가의 향기가 배어있다. 내 평생의 변함없는 친구는 문학과 클래식음악이다. 어려서부터 책을 광적으로 좋아했다. 수많은 문장들, 글들을 접해봤던 필자가 판단하기에 손수필가님의 글은 애저녁에 기성 수필가의 필력이었다. 문학지 어디에 실려도 모자람이 없는 빼어난 문장력이었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라는 나무요, 문학은 고통을 먹고 자라는 나무이다.’
완전 반전이었다. 그의 글을 보고 비로소 알았다. 고생하고는 거리가 먼 귀공자같은 그의 모습 뒤에 숨겨진 비밀을. 그가 청소년기에 어렵게 살았다는 것을. 혹독한 IMF시절을 겪어낸 과정을 읽는 중에는 그에 대한 안쓰러움에 눈물이 났다. 아마도 지고지순한 사모님의 지극한 사랑과 정성이 없었다면 그는 벌써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평생 사모님께 ‘깨갱’ 꼬리 내리고 살아야만 한다.
여차하면 사모님 입장에서는 다 죽어가는 사람을 겨우 살려 놓으니까 은혜도 모르고 큰소리친다고 할 것이다.
인재는 키우는 것이다. 봄날에 손 수필가님께 구체적으로 심사방법을 알려드리고 작품을 출품하실 것을 권유 드렸다. 이쁜 남자는 이쁜짓만 골라 한다. 두말 할 것도 없이 바로 작품을 내었고 일사천리로 작품심사를 통과하여 오늘날의 영광을 안게 되었다. 서리풀 문학회는 서초문화원에서 신길우 교수님께 수필지도를 받고 있는 문하생들의 모임이다. 그 문하생들도 수강한지 몇 년이 되었어도 아직 등단 못한 사람이 수두룩하다. 단 한 번의 심사에 통과된 것은 엄청난 실력자인 손수필가님이 일궈낸 쾌거였다. 그가 수필심사에 통과하였다는 말을 듣는 순간 정말 내 일같이 기뻤다.
그런데 그 순간 프랑스의 샹송가수 에디뜨 삐아프와 이브 몽땅이 연상되는 건 뭐지? 에디뜨 삐아프는 어렸을 때의 극심한 영양실조로 실명할뻔 했고 키가 142센치밖에 안된다. 불우한 환경 속에 내팽개쳐졌던 에디뜨 삐아프는 갖은 고생 끝에 가수로 성공하였다. 이후 여러 명의 남자들과 만나고 헤어졌다. 삐아프가 뼈아프게 키워낸 남자들은 성공한 후에는 하나같이 그녀 곁을 떠나갔다. ‘내가 소설과 영화를 너무 많이 봤나? ㅋㅋ’ 에디뜨 삐아프와 이브 몽땅의 관계는 애정이고 손 수필가님과 애란이는 우정이다.
등단 후 수필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는 그의 얘기에 나는 속으로 ‘앗싸라비아 너무 좋아서 춤을 추고 있었다.’필자는 그가 ‘되면 좋고 안돼도 그만이다.’ 큰의미를 두지 않는줄 알았던 것이다.
시상식에는 수많은 문인들이 참석했고 ‘세컨드 같은 퍼스트’인 손 수필가의 애잔하고 어여쁜 사모님이 동석하였다. 맞다! 유유상종이다. 미남미녀 부모님의 우월한 유전자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잘생긴 장남도 함께 하였다.
그의 수상작 과 은 사랑스러운 사모님과 얼마나 알콩달콩 예쁘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여러사람에게 입이 아프게 자랑하고 있다. 그는 부정하고 있지만. 독자들은 다 알고 있다. 그가 얼마나 재미있고 행복하게 잘 살고 있는지를.
겉모습도 영혼도 아름다운 손 수필가님의 곁에는 늘 행복이 머물러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행복이 달아나다가도 멋진 그의 모습이 보고 싶어서 다시 돌아올 테니까.
올 것이 왔다 싶었다. 화장실에서 평소와 다른 시커먼 그것을 보았을 때 말이다. 심상치 않다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인과응보라고 생각했다. 그때 그가 떠올린 것은 그동안 살아온 자신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생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의사는 그의 병이 위암이라고 했다. 고려대학교 구로병원에서 만난 오성표(吳聖杓·68)씨의 이야기다. 그리고 그는 상부위장관외과 장유진(長有鎭·40) 교수를 만나 두 번째 삶을 시작했다.
일반적으로 암 환자가 자신의 병을 인정하기까지는 여러 가지 과정을 거친다. 자신의 병을 부정하며 진단을 탓한다. 그렇게 여러 병원을 전전하기도 한다. 그러고 나서는 자신의 처지에 대해 분노하면서 다양한 감정의 기복을 반복한다. 그러나 오성표씨는 크게 놀라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암인지 알기 2년 전쯤에 집안에 힘든 일이 있었어요. 그러니까 2011년쯤이었습니다. 그때 실의에 빠져 매일 술로 살았거든요. 잠이 오질 않으니 자기 전 소주를 들이켰고, 새벽에 잠에서 깨 맨정신이 되면 또 괴로운 생각밖에 들지 않았어요. 그래서 아침 5시부터 안주도 없이 강소주를 마시기 시작했죠. 그런 생활을 2년 가까이 했으니 몸이 온전할 것이라는 기대는 별로 없었어요.”
게다가 흡연도 문제였다. 아내와 자녀의 잔소리는 수십 년째 이어졌지만 끊기가 힘들었다. 오랜 삶을 살아오면서 몇 번의 위기가 있었고, 그 어려움 속에서 그에게 힘이 되어준 것은 담배밖에 없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씨가 놀라지 않았던 데에는 주변 지인들을 통해 위암을 간접적으로 경험했던 이유도 있었다. 먼저 병을 경험한 선배(?)들은 위암은 이제 치료가 가능해진 병이라고 했다.
몸이 보낸 구원의 신호
그렇게 지내다 혈변을 몇 차례 확인하곤 동네 병원에서 위암 진단을 받았다. 다행히 암의 진행이 심각한 상태는 아니었다. 두 곳의 종양 중 하나는 초기 상태였고, 다른 하나는 1기에서 2기로 막 넘어가려는 상태였다. 의학적으로는 어렵지 않은 상대였다.
어떻게 보면 그의 몸이 ‘혈변’이란 신호를 보내준 것은 행운일지도 모르겠다. 위암은 대부분의 경우 초기에 자신의 존재를 알리지 않고 조용히 성장하기 때문이다. 위암 초기에 나타날 수 있는 증상은 소화불량이나 복부의 불편감 정도라서 대수롭지 않게 넘기기 쉽다. 결국 정기적인 검진 정도가 일찍 발견할 수 있는 방법인데, 오씨는 검진을 적극적으로 챙기기 어려운 자영업자라서 이 점에서도 불리했다.
그렇게 불행 중 다행으로 암의 존재를 알게 된 오씨는 지인 소개로 고려대학교 구로병원을 찾는다. 수술 날짜를 결정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오씨의 운명을 좌우할 수술 집도의 장유진 교수를 만난다.
장유진 교수는 서울삼성병원 안지영 교수, 보라매병원 안혜성 교수와 함께 우리나라 위암 분야 여성 외과의사 1세대로 꼽힌다. 그전까지는 남성 의사의 전유물이었던 셈이다. 흔치 않은 여성 외과의사에게 몸을 맡기는 것이 어렵진 않았을까 괜한 염려를 하자, 대수롭지 않다는 오씨의 대답이 돌아온다.
“큰 걱정은 하지 않았어요. 여자 의사도 이런 수술을 하는구나 했죠. 얼마나 잘하시길래 여자 의사가 이런 수술을 하실까 하며 별 걱정 안 했어요.”
장유진 교수도 같은 대답을 한다.
“처음 부임할 때 병원 내부에서도 비슷한 걱정을 했죠. 혹시 환자들이 거부감을 보이면 어떻게 하나 하고 말이죠. 하지만 괜한 기우였어요. 환자분들은 선입견에서 훨씬 자유로워요. 어차피 이름을 보고 미리 성별을 짐작하고 오시기 때문에 처음 대할 때 어색함은 없었죠. 오히려 여자 의사라서 꼼꼼하게 더 잘해줄 것이라는 기대가 큰 것 같아요.”
수술 난이도 높인 심방세동
하지만 순조로울 것만 같았던 수술에 문제가 생겼다. 외과의들이 꺼려하는 상황 중 하나였다고 장 교수는 설명했다.
“위의 상태는 그렇게 나쁜 편은 아니었어요. 위의 벽은 모두 5개 층으로 이뤄졌는데, 그중 큰 것이 안쪽에서 3개 층까지 자리를 잡고 있는 상태였죠. 암이 발생한 위치도 모두 아래쪽이어서 위 전체를 잘라낼 필요 없이 3분의 2 정도만 절제하면 됐어요. 그런데 문제는 부정맥으로 인한 심방세동이었죠. 심장이 떨면서 피떡이 만들어질 수 있어 피가 굳지 않도록 항응고제를 드셔야 하는데, 수술 부위가 아무는 것을 방해할 수 있는 상황이었죠. 출혈이 계속되면 상황이 좋지 않으니 주의해야 했어요.”
그리고 2013년 9월 9일 그는 수술대에 올랐다. 오씨는 그날을 자세히 기억했다. 워낙 겁이 없고 담담했던 그도 그날만큼은 겁이 덜컥 났단다.
“수술실 바닥은 모양에 신경 쓰기보다 청소하기 쉽도록 되어 있잖아요. 수술 도구들도 많고요. 그것을 보니 예전에 갔었던 소 도축장이 생각나더라고요. 묘한 기분이 들면서 진짜로 내가 수술을 한다는 실감이 났죠. 그리고 마취에 잠들었다가 깨어나 보니 수술 후더라고요.”
수술은 복강경 수술로 진행됐다. 복강경 수술은 끝에 수술 도구가 달린 기다란 막대만을 몸속에 넣어 집도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개복 없이 4cm 이하의 크기로만 절개하면 충분하다. 절개 부위가 적어 환자의 회복은 빠르지만, 아무래도 평범한 개복 수술에 비해 까다롭기 때문에 외과의사의 섬세함이 필요한 수술 방법이다.
장 교수는 수술 과정에서 정확한 범위의 림프절을 절제하고 출혈부위를 최소화 하기 위해 주의를 기울였다고 말했다. 수술은 기대했던 대로 성공적이었다. 걱정했던 출혈도 없었고 회복도 빠르게 이뤄졌다. 항응고제도 다음 날부터 정상적으로 투약할 수 있었다.
위암 수술의 성패는 조기발견
대체 위암은 왜 생기는 것일까? 위암은 한국인에게 가장 흔한 암종 중 하나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국민관심질병 조기위암 통계자료를 보면 위암 환자는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2011년 5만1584명에서 2015년 7만1564명으로 5년 새 약 39%가 증가했다. 또 2015년 기준, 60대가 31%(2만2245명)로 가장 많았고 70대와 50대가 그 뒤를 이었다.
위암의 원인으로는 몇 가지가 지목되고 있는데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것이 소금이다. 실제로 서구식 식생활을 하는 나라에 비해 한국과 일본의 위암 환자 비중은 높은 편이다. 찌개, 김치 같은 고염식이나 젓갈 등의 염장 음식을 즐기는 식습관 때문이다. 직화나 훈제 같은 조리법도 위암 발생 가능성을 높인다는 발표가 있다.
위암 발병은 여성에 비해 남성이 두 배 정도 많은데, 상대적으로 음주 과정에서 짜고 자극적인 음식 섭취가 많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다. 장유진 교수는 여성호르몬인 에스트로겐과의 관계에 주목하고 있다. 젊은 여성은 비슷한 연령의 남성이나 갱년기가 지난 여성보다 위암 발병률이 낮은 대신, 암이 발생하면 치료가 어려운 ‘반지고리형 암’인 경우가 많다. 의학계에선 이 원인을 여성호르몬으로 지목하고 있다.
장 교수는 위암으로 인한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정기적인 검진을 통해 조기발견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강조한다.
“위암은 초기에 발견하는 것이 제일 중요해요. 1기 정도에만 발견되면 우리가 완치라고 부르는 5년 생존율이 97%까지 올라가요. 국가에서도 국가암조기검진사업을 펼치고 있으니까요. 적어도 2년에 한 번은 위내시경으로 위 상태를 확인해보시는 것이 좋습니다.”
위암은 거의 대부분 수술로 치료한다. 위의 일부를 잘라내는 경우도 있고 위의 위치가 상부에 있거나 암의 진행 상태가 심각한 경우에는 완전히 잘라내기도 한다. 최근에는 전통적인 항암 치료제나 표적 치료제가 활용되기도 하지만 위암의 특성상 수술이 가장 확실한 치료법으로 평가되고 있다. 소위 ‘약빨’이 잘 듣지 않는 것이 그 이유다.
위암은 많이 발생하는 만큼 치료 수준도 높다. 환자가 많다 보니 의료 현장의 전문의들 경험이 많아 국내 의사들의 위암 수술과 치료 실력은 세계적으로도 손꼽힌다. 그래서 장 교수는 위암 판정을 받으면 반드시 수술 전문가, 특히 소화기외과의와 상의할 것을 권한다. 치료 과정이 수술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만큼 외과가 차지하는 비중이 85%나 되기 때문이다. 이 밖에 소화기내과와 종양내과 전문의들도 치료에 참여한다. 장교수는 수술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으로 수술을 차일피일 미루면 병만 키울 뿐이라고 덧붙여 말했다.
활동적 생활로 긍정적 마음 갖게 돼
흔히 위의 일부나 전체를 잘라내면 잘 먹지 못한다는 편견이 있는데, 실제론 그렇지 않다. 오씨의 경우처럼 3분의 2 정도 잘라낸 사람도 일반인과 비슷한 식사량을 보인다. 오씨 역시 그랬다.
“수술을 하고 나서 처음 한 달 정도는 죽 같은 것만 먹었죠. 하지만 이후부터는 예전처럼 식사를 했어요. 지금까지 평소와 다름없이 살고 있어요. 사실 어려운 수술도 했고, 위의 절반 이상을 잘라냈는데 그 전과 달라진 것을 잘 모르겠어요.”
병원에서도 위암 수술을 하고 난 뒤 환자들에게 잘 먹을 것을 권한다. 영양분 흡수가 원활하지 않을 수 있어 철분 결핍성 빈혈이나 비타민D 부족으로 인한 골다공증도 걱정해야 한다. 장 교수는 “수술 후 석 달 동안은 영양실조가 일어나지 않도록 관리를 잘해야 해요. 그래서 무리한 저염식, 특히 소금을 아예 안 쓰는 금염식은 말리죠. 일단 잘 먹는 것이 중요하니까요. 수술한 환자는 가만히 있어도 살이 빠지는데 입맛까지 잃으면 문제가 많아집니다. 그렇게 3개월 정도 안정이 되면 금염이 아닌 저염식 식사를 권하죠”라고 말했다.
물론 오성표씨의 삶에 변화가 없는 것은 아니다. 술을 줄였다. 그렇게 즐기던 술은 이제 아주 특별한 날에만 한두 잔 마신다. 그리고 새벽에 운동도 시작했다. 특히 다시 시작한 일은 그가 긍정적인 마음을 갖는 데 도움이 됐다. 그가 지금 하는 일은 차에 이런저런 생활용품을 싣고 경로당이나 마을회관 등을 다니면서 장사를 하는 것. 옛날로 치면 보부상 같은 일이다. 워낙 활동적인 일이다 보니 건강에도 많은 도움이 된다고. 특히 여러 사람들과 만나 대화를 나누는 일이 가장 즐겁다고 했다. 요즘은 그가 입버릇처럼 말하는 게 있다. 교수님은 술은 위암의 직접적인 원인이 아니라고 했지만 술에 의지했던 그 시절이 자꾸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다.
“특히 친구들을 만나면 늘 말해요. 아무리 속상해도 빈속에 강술은 먹지 말라고요. 안주 ‘좋은 놈’으로다가, 밥하고 같이 먹으라고요.”
우리나라 집값이 가장 비싼 곳 중 하나인 서울 강남 도곡동의 타워팰리스 아래 편의점에는 경제서적과 재테크 책이 가장 많이 팔린다고 한다. 재테크법도 산수나 국어처럼 배워야 하는데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기 때문이다. ( 에서 인용)
못생긴 사람보다 예쁜 사람이 화장을 더 많이 한다. 성형외과가 밀집해 있는 곳도 땅값 비싸고 부자들이 많이 사는 서울의 강남이다. 학교 시험도 자신 있는 과목에서 틀리면 더욱 안타까워한다. 이러한 현상을 미루어볼 때 부자가 책을 더 많이 보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부자들 중에는 ‘독서’가 첫 번째 취미인 사람이 많다. 투자의 귀재로 불리는 워렌 버핏도 보통 사람의 5배나 책을 읽는다고 한다. 빌게이츠도 자신을 독서 중독자라고 얘기했다. 독서를 가난한 사람의 돈 안 드는 취미로 얕잡아보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가을은 천고마비의 계절이자 독서의 계절이라고 예전부터 일컬어왔다. 공부는 학교 다닐 때나 하는 것이지 직장에 들어가면 피곤하다는 핑계로 책과는 담을 쌓는 사람이 많다. 책을 보지 않는 사람의 미래는 없다. 독서는 마음의 양식이다. 양식을 먹지 않고 쓰는 글은 영양실조의 글이다.
성공한 사람의 서재에는 많은 책들이 꽂혀 있다. 새로운 지식을 끊임없이 보충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성공한 사람은 아니지만 서점에 한 달에 한 번은 가서 전공 분야의 새로운 책이 나왔나 점검한다. 변화되는 흐름을 알기 위함이다.
책읽기도 습관이다. 습관은 반복된 오랜 행동이다. 독서 습관을 위해 6개월 동안 4만 2,195페이지의 책을 읽기로 하고 동네 도서관과 약정을 한 뒤 독서마라톤에 출전했다. 한 달이 지난 지금 1만 5,600페이지의 책을 읽었다. 출퇴근 전철 이용시간 두 시간을 게으름 피우지 않고 열심히 읽은 결과다. 외출할 때면 작은 가방 속에 읽을 책 두 권을 꼭 넣고 다닌다. 책의 장르는 서로 달라야 지루하지 않다.
인생은 연습이고 훈련이라는 생각을 언제나 진실처럼 믿고 있다. 독서 또한 반복 훈련을 통해 글 읽는 속도가 빨라짐을 느낀다. 책 읽는 재미도 솔솔 느낀다. 저자는 혼신의 노력으로 책을 쓴다. 저자의 직접 경험 또는 지식을 간접으로 얻는 데 들어가는 비용은 책이 가장 저렴하다.
필자는 일정 속도로 책을 읽지 않는다. 어느 부분은 세 번 네 번 반복해서 읽는다. 저자의 서문과 목차는 적어도 두 번은 읽는다. 저자소개도 눈여겨본다. 대략의 내용을 미리 파악하는 데 중요하기 때문이다.
요즘에는 독서의 계절이 따로 있다는 말이 맞지 않는 것 같지만 이 가을 어느 풀밭에 앉아 책 읽는 사람들을 보면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다.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보니 완연한 가을이다. 하늘도 높고 맑다.
‘영화 같은 삶’이란 말이 가장 어울리는 예술인, 변종곤(67세). 극사실화의 대가인 변종곤은 사물(오브제)을 활용한 아상블라주와 조각의 영역을 넘나들며 독보적인 예술 세계를 구축했다. 그를 만난 브루클린 코블 힐의 스튜디오는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 그의 삶과 예술이 고스란히 담긴 박물관이었다. 로버트 드 니로 주연의 영화 이 인기를 끌면서 가장 뉴욕스러운 곳으로 자리매김한 코블 힐에서 울고 웃으며 변종곤의 삶과 작품 세계를 이야기했다.
그는 1978년 나이 스물아홉 최초의 민전인 제1회 동아미술대전에서 대상을 수상하면서 신예 화가로 급부상했다. 고교시절부터 신문사 후원으로 개인전을 열었고 대학 졸업 후에는 현대미술운동의 구심점이었던 ‘에콜 드 서울’의 일원으로 활동을 했던 그로서는 어쩌면 때늦은 수상이었다. 그는 “당시 유일한 미술인 등용문이었던 국전은 시대정신을 담은 작품을 제대로 평가해 주지 않아 아예 출품을 하지 않았다”고 토로했다.
동아미술대전은 그에게 구세주였던 동시에 파란만장한 삶의 신호탄이었다. 미군 철수 후 황폐화된 대구 앞산 비행장을 사진보다 더 사실적으로 그린 대상작품이 문제였다. 군사정권의 서슬이 퍼렇던 그 시절, 용납되기 어려운 작품이었다. 미군이 버리고 간 혼혈아들이 거리를 방황하는 모습에 분노해 그린 작품이었다.
굶주리고 헐벗던 시절, 그의 할머니는 대문을 항상 열어 두셨다. 밤낮으로 몰려오는 거지와 한센인을 귀한 손님처럼 맞이하고 밥상을 차려냈던 할머니. 부처님과 예수님은 물론이고 달과 해와 별, 그리고 서낭당의 고목과 바위에도 두 손 모아 절을 했던 할머니였다. 그런 할머니의 극진한 보살핌 덕분에 촉망받는 화가로 성장한 그에게 내팽개쳐진 아이들의 상황은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그때부터 그의 시선은 소외되고 버려진 사람과 사물, 그리고 사회 부조리에 고정되어 버렸다.
그 당시 북한은 그의 작품을 칭송하면서 우리 정부와 미국을 비판하는 대남방송을 계속해댔다. 표현의 자유는 고사하고 장발과 미니스커트조차 허용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언론 탄압에 맞서 언더우드 타자기를 초사실적으로 그린 작품을 비롯해 사회·정치적 이슈가 담긴 작품을 연이어 발표하자 정보기관의 압력과 사회의 불편한 시선이 쏟아졌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1981년, 배낭 하나에 1인용 전기밥솥과 화구, 그리고 작품 몇 점을 챙겨 야반도주를 하듯 예술적 망명을 했습니다. 미군은 싫었지만 ‘크리스티나의 세계’를 그린 앤드루 와이어스와 히피문화에 끌려 미국을 택했지요.” 그는 긴박했던 상황을 회상했다. “그때는 여권 발급받기가 정말 어려웠습니다. 이문희 대주교께서 위험을 감수하시면서 도와주신 덕분에 가능했던 미국행이었습니다.”
미국의 삶은 기대와는 전혀 달랐다. 그를 아꼈던 변종하 화백(전 국전 심사위원)의 도움으로 비가 새는 할렘의 다락방이었지만 숙소를 마련할 수 있었다. 그때 만난 한대수(가수·사진작가) 부부는 미국생활의 안내자였다.
지하철 비용을 아끼면서 걸출한 화가들을 배출한 아트 스튜던트 리그(ASL)를 다녔다. 체류 비자를 유지하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다. 물감 사는 것도 부담되자 거리에 버려진 물건들이 작품의 소재로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연탄재조차 재사용했던 가난한 나라에서 온 예술인에게 깨어진 바이올린은 아름다운 인체였고 고장 난 시계의 톱니바퀴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주인 잃은 인형에서는 못내 그리운 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런 오브제를 서로 결합하고 극사실적인 그림을 그려 넣은 변종곤의 아상블라주는 이때 시작됐다.
아트 스튜던트 리그의 교수와 작가들은 그의 실력과 경력을 높이 평가해 줬다. 하지만 그가 굶주리는 것을 알아채지는 못했다. 결국 영양실조와 과로로 쓰러졌다.
“의식을 되찾으니 호주머니에 작가들이 몰래 넣어 둔 수백달러가 있었어요. 호의는 고마웠지만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습니다. 그 돈을 되돌려주려 했지만 아무도 받으려 하지 않았어요. 그 돈을 테이블 위에 던져 놓고 뛰쳐나왔습니다.” 변 화백은 30년도 훨씬 더 지난 일을 이야기하면서 눈물을 가누지 못했다. “그 일이 있은 후 학교에 나가지 않고 일자리를 찾았습니다.” 화가는 먹고살려고 고귀한 손을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신념을 접어야 했던 순간이었다.
그는 “한대수 부부가 애써 생선가게에 일자리를 찾아줬지만 벌레 하나 죽이지 못하는 나에게 펄떡이는 생선을 자르는 일은 지옥 그 자체였다”고 했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난방도 수도도 없는 싸늘한 할렘의 다락방에서 소리를 질렀다. “신이시여, 저를 얼마나 위대한 작가로 키우시려고 이런 고난을 주십니까?” 뼛속을 파고드는 추위에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도 그림을 그렸다. 유일한 낙이었다. 밤새 그린 그림을 생선가게 벽에 걸어 놓고 보면서 현실을 잊으려 애썼다.
3개월 쯤 지난 어느 날, 가게를 찾은 한 신사가 벽에 걸린 ‘할렘가 풍경’을 보고는 가게 주인에게 누가 그린 것인지 물었다. 그의 작품인 것을 알고는 가게 주인도, 신사도 놀랐다. 그 신사는 리버데일 갤러리의 헬무트 지츠위츠 대표로 미술계의 마당발이었다. 비린내 나는 작업복을 당장 벗고 따라 오라고 했다. 그날부터 갤러리에서 일을 돕고 그림도 그리면서 망가진 몸과 생활을 추스를 수 있었다.
지츠위츠 대표는 그의 작품을 눈 높은 미술 애호가들에게 선보였다. 언더우드 타자기 그림 등 몇 작품이 거래되면서 3만달러를 손에 쥐게 됐다. 뉴욕의 웬만한 아파트를 사고도 남을 큰돈이었다. 리버데일신문은 ‘한국에서 사라진 화가, 미국에서 성공하다’라고 대서특필했다. 드디어 미국에서 새로운 별로 떠올랐다.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 기념 재외작가 초청 전시회에 ‘굿모닝 미스터 오웰’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던 백남준 비디오아티스트와 함께 초대됐다. 금의환향이었다. 그는 이때 인형의 몸통에 섬뜩한 소리를 내는 시계를 얼굴로 결합한 아상블라주 등 상상을 뛰어넘는 작품을 선보이면서 국내 미술계에 큰 충격을 던졌다.
명성이 높아지면서 든든한 후원자가 생겼고 귀족생활이 시작됐다. 최고급 백화점인 버그도프굿맨 미용실의 VIP고객이 되었고 휴가는 프랑스의 아름다운 고성(古城)에서 보냈다.
하지만 귀족생활은 시작부터 파탄이 예정되어 있었다. 아름다운 센트럴파크가 아니라 쓰레기 나뒹구는 할렘을 고집스레 그리니 후원자도 수집가도 몇 년간 참다가 결별을 선언했다. 변 화백도 라면조차 눈치가 보여 마음 놓고 먹을 수 없었던 생활에 동화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을 예견했던 지츠위츠 대표는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그를 반겼다.
그는 괴로움과 외로움이 극에 달할 때면 여행을 하고 극사실화를 그렸다. 10여 년 전 그는 미국 서부 사막을 미친 듯 돌아다녔다. 버림받은 인디언 원주민에서 자신의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그때의 영감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 ‘굿모닝 아메리카’이다. 흑백기념사진 같은 침울한 인디언 군상과 황금빛의 샤넬 향수병을 대비해 그린 이 작품은 미국 사회의 모순을 날카롭게 드러낸 걸작으로 찬사를 받고 있다. 샤넬의 회장이 스튜디오에 찾아와 값에 관계없이 사겠다고 제안했지만 그는 팔지 않았다. 분신을 팔 수는 없었다.
관심을 끄는 또 다른 작품은 포스코가 소장하고 있는 고 박태준(朴泰俊. 1927~2011) 명예회장의 초상화다. 인물이 화면의 왼쪽 가장자리에 그려져 박 회장의 겸손함을 저절로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철의 정밀성과 전진을 상징하는 18세기 독일 시계가 가운데 더 크게 그려진 이 작품은 초상화의 한계를 넘어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은 물론 미국의 주요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는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등 세계 주요 언론을 통해 수시로 소개되고 프랑스의 마리 로지에 감독이 제작한 그의 다큐멘터리가 MoMA(뉴욕현대미술관)에서 상영되는 등 국내보다는 미국과 프랑스에서 명성이 더 높다. 2011년 프랑스문화원과 브루클린의 인비지블 독 아트센터가 공동 주최한 ‘30주년 개인전’은 관람객이 인산인해를 이루어 경찰이 교통정리에 나서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변 화백의 스튜디오에는 그의 영혼이 담긴 작품과 억대를 호가하는 귀한 책을 비롯한 수만 가지 오브제가 발 디딜 틈 없이 진열되어 있다. “이 오브제를 보면 심장이 뜁니다. 오브제는 고유한 기운이 있고 이야기도 합니다. 나 자신도 하나의 오브제이기 때문에 같은 공간에 사는 동료라 할 수 있습니다.” 그의 독창적인 작품과 진귀한 오브제를 보다 널찍한 공간에서 세계인들이 온전히 공유할 수 있는 날이 하루 빨리 오기를 기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