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봄, 결혼을 하겠다는 아들의 말에 필자의 마음은 쉬지 않고 어디론가 달려갔다. 아들은 2006년 4월에 전신 3도의 화상을 입었다. 주치의는 심한 열에 달궈진 아들의 몸과 마음이 정상으로 돌아오기 힘들 것이라고 했다. 불길을 온몸으로 품은 듯 아들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을 때가 많았다.
어려서는 말수가 적고 차분했는데 그렇게 조용하던 아이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순식간에 불기둥이 치솟는 마음의 병은 착했던 아들을 되돌려주지 않았다.
아들이 그럴수록 필자도 말수가 줄어갔다. 아들의 고통에 어떠한 말도 감히 할 수 없었다. 엄마라도 그 고통은 알 수 없을 거야… 그게 필자의 마음이었다. 조심 또 조심하라고 당부하는 주치의의 말만 되새김질하는 날들이었다.
그런 아들이 어느 날 결혼을 하겠다는 소릴 한 것이다. 꿈에도 생각해본 적 없는 말에 놀라서 아들을 올려다봤다. 환하게 웃는 얼굴이었다. 마치 병이 다 나은 듯 어린아이처럼 밝은 표정이었다.
필자는 덥석 손을 잡으면서 축하한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어깨를 다독여줬다. 그러자 아들은 “잘살게!” 했다. “어떻게 해주면 되지?” 하고 물으니 “엄마, 그동안 제가 너무 속만 썩였지요?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우리가 다 알아서 할게요. 결혼반지는 커플링으로 할 거고 결혼식장은 다 준비되었어요. 청첩장은 300장 정도 만들 거니까 엄마가 필요한 만큼 가져가셔요. 신부 쪽엔 친척이 거의 없어서 제 친구들과 형들만 초청할 거예요.” 집 걱정을 하니 그것도 걱정하지 말란다.
그날은 필자 귀를 의심하면서 눈물만 쏟았다. 필자에게 남은 단 하나의 아들 아닌가! 필자의 친구들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며 축하해줬다. 그리고 드디어 주례도 없이 아들이 신부에게 직접 노래를 불러주며 아주 색다르고 멋진 결혼식을 했다. 이런 걸 보고 꿈같은 일이라고 하던가? 감동에 젖어 아들 결혼식을 무사히 잘 끝냈다.
주치의는 그래도 마음을 놓지는 말라고 당부했다. 그러나 아들과 며느리는 빈손으로 한 결혼이었지만 아무 불평 없이 딸아이 낳고 행복해하면서 잘 살았다.
그런데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작년 5월에 며느리가 폐암 말기 선고를 받고 그 해 12월에 세상을 떠나버렸다.
세 식구 똘똘 뭉쳐 행복을 만들며 살더니… 아내가 가자 아들은 다시 흔들리기 시작했다. 신은 왜 그렇게 가혹한 걸까.
이제 모든 것들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버린 것 같다. 부모에게 손 안 내밀고 저희들끼리 당당하게 결혼식을 올린 이 멋진 커플을 정말 사랑했는데… 부모의 마음을 넘어 존경하기까지 했는데… 또 얼마나 자랑스러웠는데….
그러나 동화처럼 아름다웠던 그날의 한강 선상 결혼식은 이제 영화의 한 장면처럼 필자의 가슴에 아프게 못 박혀 있다.
영화 에서 주인공 톰 행크스가 하얀 깃털이 인도하는 대로 평생 마라톤을 하는 것처럼 강주은도 최민수라는 깃털에 이끌려 전혀 예기치 못한 라이프가 되어버렸다. 처음 만난 강주은은 생각보다 날씬하고 예뻤다. TV에서의 모습은 미스코리아 출신에 상남자 최민수를 주눅 들게 하는 아줌마의 이미지도 있고 해서 크고 강해 보였는데 막상 마주한 그녀의 이미지는 부드럽고 우아했다.
강주은과 인터뷰를 하기 위해 집에서 나설 때 내 아내가 꽃단장을 하고 따라나섰다. 평소 TV를 보면서 강주은에 대해 호감을 가졌던 아내가 나만 보낼 리 없었다. 강주은을 실제로 본 내 아내도 “생각보다 굉장히 말랐네! 내가 만약 TV에 나온다면 뚱뚱이로 비치겠어!”라면서 강주은의 몸매와 우아한 자태에 찬사를 보냈다. 참고로 강주은과 1970년 개띠 동갑인 내 아내도 아직 훌륭한 몸매를 유지하고 있지만 강주은이 자기보다 통통하리라고 생각하고 왔는데 의외라는 반응을 보인 것이다. 사실 강주은과 내 아내의 이미지는 상당히 닮았다.
아내와 인사를 나눈 강주은도 “이봉규씨 와이프와 내가 너무 닮아서 깜짝 놀랐다”고 특유의 과도한 제스처를 했다. 그녀와의 인터뷰는 MBN 프로그램 를 녹화하는 스튜디오에서 방송 전에 이루어졌는데 마침 평소 친하게 지내는 함익병과 홍혜걸이 녹화를 위해 대기실에 있다가 내가 강주은과 인터뷰하는 것을 알고 쳐들어왔다.
그들 부부와 한 달에 한 번씩 댄스파티를 하고 있어서 강주은-최민수 부부도 함께하면 좋겠다고 초대했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동안 여러 번 부부 동반 모임에 나갔지만 어색했다고 털어놓는다. 한국 문화에 어색했던 본인 탓도 있지만 독특한 성격의 연예인 남편과 부부 동반 파티는 쉽지 않았다는 설명이다. 부부에 관한 틈이 보이기 시작하기에 파고들었다. 결혼생활에 대한 평점을 매겨달라고 졸랐더니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그레이드(평점)를 매길 수가 없다는 것.
불편한 결혼생활 덕분에 성장했다
“이 남자가 내 남편이라는 것이 상당한 영광이다. 남편을 통해서 내가 성장했다.” 즉 지금 방송을 하는 것, 한국말을 잘하게 된 것, 공인으로 인정받고 있는 것 등 모두 최민수 덕분이라는 설명이다. 그러면서 불편한 결혼생활 덕분에 자신이 성장할 수 있었고 최민수가 남편이 아니면 오늘의 강주은의 성공을 이끌어낼 수 없었을 거라는 자기 진단이다.
터프하기로 소문난 최민수씨에게 얻어맞을 각오로 평가한다면? 마치 소크라테스의 부인이 악처로 소문났기에 남편이 대철학자가 되었다는 해석이 떠올랐다. 부부 관계는 당사자들만이 알 수 있는 뭔가 있다. 한량 이봉규는 최민수에 대해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강주은의 눈과 심장으로 보면 최민수는 100점을 넘어서서 평점을 매길 수가 없는 것이다. 최민수도 부인의 은공을 높이 평가한다.
언젠가 철학적인 고백을 강주은에게 했다고 한다. “23년을 살고 난 오늘의 최민수가 23년 전으로 돌아가 주은이를 만났어야 한다.” 이 말을 듣자마자 강주은은 “만약 그랬다면 오늘의 주은이는 아닐 것, 평범한 아내가 되었을 거다.” 철학적으로 치고받는 이 부부야말로 부창부수(夫唱婦隨)다. 삼라만상에는 항상 이면이 있기에 반전을 노리면서 파고들었다. “이혼 생각을 해본 적 있나?” “Of course!”라는 강주은의 대답이 1초도 안 쉬고 튀어나왔다. 그러면서 한술 더 뜬다. “결혼식장에서부터 이 결혼이 맞나? 잠깐만요! 다시 생각해봅시다!”라고 설득하면서 결혼식을 취소하고 싶었다는 것. 심지어 결혼 후 한동안 캐나다행 비행기표를 지니고 다닐 정도로 매일매일 친정으로 돌아가고 싶었다는 충격 고백을 쏟아 놓는다.
우리 부부의 사랑은 ‘다른 차원의 사랑’
한 방송에서 “최민수가 이상형이었냐?”는 질문에 “지금은 너무 감사하게 제 이상형의 이상, 그 이상이지만 처음에 만났을 때는 상상도 못했다. 이런 인간이 세상에 있나? 싶었다. 상상 못했던 사람이다”라고 말해 스튜디오를 발칵 뒤집어놓은 적이 있다. 반전도 이 정도면 국가대표급이다. 그녀의 순수한 사랑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그런 만큼 사랑하지 않는 부부가 이혼하는 것에 대해서도 너무나 잘 이해하고 오히려 축하해주고 싶다고 덧붙인다. 이 같은 철학은 부부가 사랑하지 않으면 헤어지라고 평소 주장해서 ‘이혼 예찬론자’ 소리를 듣는 한량 이봉규와 맥을 같이한다.
사랑하지 않으면서 억지로 사는 부부는 위선이다. 심지어 다른 파트너와 성적 관계를 지속하면서 부부 사이는 억지로 형식적으로 이어가는 것은 대단한 반칙이라는 것이 나의 평소 지론이다. 그런 관점에서 강주은은 지금도 최민수를 진정 사랑하고 있다고 말한다. 거기에 애잔함도 있는 듯. 항상 버림받아왔다고 생각하고 있고 “제발 나를 떠나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는 듯한 표정을 남편에게서 늘 느끼고 있기에 그 마음이 더 끔찍할 수밖에 없다는 것. 아마 이 같은 감정은 동정심을 뛰어넘는 일종의 모성애 같은 것이라고 어렴풋이 판단된다.
그래도 끝까지 확인하고 싶어서 또 물고 늘어졌다. “앞으로도 이혼하지 않고 늙어갈까?”라는 나의 도발에 그녀는 “이제 이 남자를 너무 완벽하게 잘 알아서 어떤 환경에도 잘 살 것 같다. 남편을 죽을 때까지 지켜주고 싶다”고 마음을 모아 대답한다. 자신들의 사랑은 남들이 이해하기 힘든 ‘다른 차원의 사랑’이라고 정의를 내린다. 그러면서 “세상에서 나를 잡아줄 남자는 최민수밖에 없고 마찬가지로 남편을 잡아줄 여자도 강주은뿐”이라고 자신 있게 말한다.
“We earned that!”이라고 환하게 웃으며 말하는 강주은의 큰 입이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영화 에서 주인공 톰 행크스가 하얀 깃털이 인도하는 대로 평생 마라톤을 하는 것처럼 강주은도 최민수라는 깃털에 이끌려 전혀 예기치 못한 라이프가 되어버렸다는 것. 남편 따라 가다 보니 대통령도 만났고 평소 계획했던 것과는 달리 인생이 펼쳐졌는데, 앞으로도 포레스트 검프처럼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할 것이고, 아무 생각 없이 배우는 자세로 살아갈 것이라고 조심스레 전망했다.
이 영화에서 바보처럼 보이는 톰 행크스의 아름답고 순수한 여정과 강주은의 인생이 너무 닮아 보인다. 그만큼 강주은은 맑고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다. 한량의 어른스런 눈빛에 순수한 영혼이 들키기 싫었는지 터프한 모습을 연출하기도 했다. 너무 순수하게만 보이면 왠지 손해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던 모양이다. “사춘기 때 가출한 적이 있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한량 이봉규가 듣기에 강주은의 가출사건은 가소로웠다. 사연인즉, 가출하고 몇 시간 차를 몰고 가다가 문득 어떤 시 구절이 떠올랐다는 것.
“Water water everywhere but not a drop to drink(물은 어디에나 있건만 내가 마실 물은 한 모금도 없구나).”
갑자기 그 시의 구절이 떠오르자 불문학을 전공한 어머니에게 말해주고 싶은 충동을 느껴서 공중전화로 그 시를 낭송하면서 펑펑 울었다는 것. 오히려 어머니가 담담하게 웃으면서 “빨리 집으로 돌아와라!” 하고 다독였다고 한다.
“너는 이마가 제일 예쁜데 왜 가리니?”
고등학교 때 두 번이나 가출을 감행하는 등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겪은 이봉규에게 강주은의 가출담은 귀여울 따름이었다. 그만큼 천진난만한 영혼을 지닌 아름다운 여인이다. 이봉규의 심야데이트에서 그동안 많은 여자 스타들과 인터뷰를 하면서 그녀들의 남편들 중에서 전생에 나라를 구한 인물을 몇 명 봐왔지만, 최민수처럼 처복이 많은 남자도 드물 것이다. 관상학적으로 보면 강주은도 복이 많아 보인다.
그녀의 훤하고 톡 튀어나온 이마와 높은 턱의 선은 일품이다. 때문에 결혼 전 별명이 ‘걸어 다니는 이마’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는 결혼 전 자신의 이마가 못마땅해서 가리고 다니기 일쑤였단다. 그럴 때마다 부모님은 “너는 이마가 제일 예쁜데 왜 가리니?”라고 충고를 하곤 했다. 그런데 최민수도 연애 시절 부모님과 똑같은 말을 하더라는 것.
그때 처음 이 남자가 부모와 똑같이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는구나! 하고 느꼈고, 그게 결정적으로 결혼을 결심하게 된 이유였다고 털어놓았다. 결혼을 결심하게 된 이유도 참 어린아이처럼 순수하다. 그녀가 요즘 시청자들에게 인기를 많이 끌고 있는 비결도 이 같은 순수한 마음이 화면에 그대로 투영되기 때문일 것이다. “여섯 살에 느꼈던 것을 여전히 그대로 느끼고 싶다”는 강주은의 삶은 성공했다. 그녀가 스타라서가 아니라 본인이 꿈꾸던 대로 여섯 살 어린 순수한 감정을 그대로 간직하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발간한 책 를 읽으면 그녀의 순수함의 원천이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있다.
해외토픽 뉴스에서 매우 재밌는 화제를 하나 보았다.
무려 53세 차이의 결혼식이 있었다는 것이다.
요즘 우리나라도 연상연하 커플의 결혼이 보편화 되어 아무도 나이 차 많이 나는 결혼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추세이다.
더구나 프랑스의 최연소 대통령 마크롱은 고교 시절 은사인 24세 연상 선생님과 결혼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예전에는 남자가 두세 살 정도 많은 차이를 적당하게 여겼다.
남자가 나이가 훨씬 많으면 도둑이라는 표현도 하지만 여자가 나이가 많으면 능력 있다고 축하해 준단다.
그래서 신부가 연상인 것이 이상하게 생각되지 않는 세상이 된 것 같다.
친구의 딸 중에도 서너 살 정도 연하의 신랑을 만나 결혼을 했는데 모두 잘했다고 축하해 주었으며 아주 잘살고 있다.
이렇게 여자가 연상인 커플을 많은 사람이 오히려 부러워하기도 한다.
그래도 필자 개인적인 생각은 여자가 너무 나이 많으면 거부감이 들것도 같다.
그런데 저 해외토픽의 소식은 좀 유별났다.
신부는 61세의 할머니인데 신랑은 8살 어린이라는 것이다.
무슨 사연 있겠구나 했더니 역시 깊은 뜻이 있는 결혼식이었다.
8살짜리 신랑의 할아버지가 생전에 61세 할머니와 꼭 결혼하고 싶어 하셨는데 갑자기 돌아가시게 됐다고 한다.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소원을 들어드리기 위해 손자가 대신 나선 것이란다.
흑인인 그들은 조상이 행복하지 못하면 후손도 행복할 수 없다는 신념을 갖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행복하시라고 손자에게 할머니와 결혼식을 올리게 한 것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를 것 같은 까만 얼굴의 귀여운 신랑이 면사포를 쓴 할머니에게 뽀뽀하는 것으로 결혼식이 진행되었는데 그 천진난만한 모습이 안쓰럽게만 느껴졌다.
다행스러운 건 결혼식이 끝나도 혼인신고나, 같이 사는 일은 없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정말 조상을 공경하는 뜻뿐인 이벤트였던 것 같다.
53세 차이 나는 결혼식이라 해서 어떤 가십거리가 있는지 색안경을 끼고 잠시 생각했던 필자는 약간 부끄러웠다.
조상님을 위하는 마음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조상 모시기와 많이 닮았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훈훈해 지면서 그 꼬마 신랑이 훌륭한 사람으로 잘 자라기를 기도해 주고 싶다.
지난해 가을 결혼식이 많은 토요일이었다. 양재역에서 지하철을 탈까하다가 논현동에 있는 호텔 결혼식에 늦지 않으려고 택시를 탔다. 그런데 택시문을 열고 좌석에 앉으려고 하는데 갑자기 운전석에서
“안녕하세요? 오늘 만나 뵈어 반갑습니다. 어디로 모실까요?”
언뜻 백밀러로 비치는 기사님의 얼굴은 백발의 노신사였다. 요즘 택시를 타면 싸움이라도 하고 막 돌아온 사람처럼 화난 얼굴을 하고 있거나, 무뚝뚝하게 아무 말도 안하고 있어서 먼저 목적지를 말하면 마지못해 겨우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예”하고는 운전만하는 기사들이 많다는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특이한 분이라 생각되어 말을 걸었다.
“그 연세에 어떻게 즐겁게 운전을 하세요?”
“아아! 아니예요, 저는 40대 청년인데요....”
마침 주말이라 10분정도 걸릴 거라 생각했던 길이 차가 밀리는 바람에 50여분이 걸렸다. 호텔에 도착할 때까지 그 기사 분은 신나는 말투로 자신이 왜 즐겁게 손님을 대하고, 신바람 나게 운전을 하고 있는지 이야기 해주었다. 그 기사분의 정확한 나이는 36년생이니 우리나이로 팔십 둘이다. 그 나이라면 친구들은 이미 세상을 떠난 분들이 반이 넘고 하루를 어떻게 무엇을 하며 소일할까 고민하거나 갈 데도 별로 없이 쓸쓸하게 지내는 분들이 대부분이다.
서른살 때부터 운전을 했으니 50여 년간 택시를 운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부터 20년전 환갑이 지나면서 택시운전은 물론 세상이 싫어졌다고 했다. 손님들이 보기만 해도 짜증스럽고, 운전은 갈수록 하기 힘들어지고, ‘왜 나만 이런 힘든 일 하고 살아야 하는가?’하는 자학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운전대를 던져버리고 무작정 쉬면서 산에도 가고, 없는 돈에 해외로 놀러 다니고, 좋아하지도 않았던 술도 마음껏 마셔보기도 했다. 그러나 무작정 놀고먹는다는 게 점점 힘들기 시작했다. 몸이 좋아지고 마음이 편해지기는커녕 몸에는 전에 없었던 당뇨와 고혈압이 생기고 얼굴의 표정은 점점 어둡게 변해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더구나 운전대를 놓은 지 6개월이 지나니 오라는 데도 없고 갈 데조차 없어지면서 세상과 격리되어 나 혼자라는 것을 몸소 체험한 것이다. 운전이야말로 다양한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최고의 기회라는 소중한 사실을 알게 된 어느 순간 손님들이 그리워지기 시작했고, 일의 소중함도 서서히 알게 되었다. 그리고 어느 날인가 ‘아하, 그렇구나! 내 생각을 먼저 바꾸자’를 마음먹었다.
“아하, 그렇지! 모든 게 내 탓이다. 내가 모든 걸 내려놓고 거꾸로 생각하자. 세상의 주인은 남이 아니고 바로 나다. 나를 바꾸어보자!”
그분의 행복의 개념도 욕심에서 봉사로 바뀌기 시작했다. 이후 그분은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변화의 시작을 하기로 하고 부인에게 무조건 존대말을 쓰기 시작했다.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어요!’로 긍정의 하루하루를 시작, 평소에는 거들떠보지 않았던 집안 청소를 도와주는 작은 일부터 했다. 나이가 들수록 더욱 거리감응 느껴왔던 할머니는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고, 외출할 때는 연인들처럼 늘 손을 잡고 다니게 되었다.
1년만에 다시 완전히 놓았던 택시운전대를 잡게 되었는데, 서울에서 가장 친절한 기사가 되겠다고 마음을 먹고 시작한지 벌써 20년째라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이미 손자들까지도 모두 대학생이 되고 아무 할일도 없을 나이지만 지금 집안에서의 위치가 상당히 달라졌다. 한때는 자식들이 언제 용돈이라도 듬뿍 주려나 기다리기도 했고, 자주 찾아주지 않는 자식, 손자들이 야속하가도 했지만 지금은 거꾸로 며느리나 손자들에게 가끔 용돈까지 주다보니 당당한 아버지, 할아버지가 되었다.
덕분에 지금은 심각했던 당뇨도 다 없어졌고, 팔순이 넘은 나이에도 믿기지 않을 만큼 5,60대 건강을 유지하여, 지난해 말 종합검진에서 거의 만점을 받았다. 오히려 의사들이 “이처럼 건강한 비결이 도대체 뭐예요?”하며 묻더라고 자랑을 했다.
정말 ‘아하, 그렇구나!’라는 말 한마디의 효과는 만병통치약이요, 자신을 변화시켜 세상을 바꿔나가는 대단한 역할을 해낸 것이다. 그날 택시에서 내리는 순간 하루하루 신나게 택시에 실어 나르는 긍정바이러스의 힘은 더욱 크게 느껴졌다.
한때 홍콩 감독 허안화(1947년~)에 관한 국내 평가는 “여러 장르를 아우르며 실망과 환희를 동시에 안겨주는, 높낮이가 심한 연출자”였다. 그러나 필자는 (1997)과 같은 범작에서도 실망한 적이 없다. 서극, 담가명 등과 함께 1980년대 홍콩 뉴웨이브를 이끌었던 허안화는 진중한 사회파 드라마에서부터 액션, 시대극, 멜로를 아우르며 홍콩과 홍콩인이 처한 현실을 이야기하는 저력을 발휘해왔기 때문이다.
특히 모녀의 20년 세월을 그린 (1990), 치매 노인을 둔 가정 이야기를 맏며느리 중심으로 그린 (1995), 매염방의 연기로 영원히 기억될 (2002)만으로도 그가 영화계에 남긴 선물과 성취는 이미 넘친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여류라는 수식어를 자랑스럽게 쓸 수 있는 몇 안 되는 감독 중 한 명인 허안화가 마지막 연출작으로 생각했던 (2011)는 평단과 대중의 찬사를 얻었다. 이로 인해 허안화의 은퇴 심경을 번복하게 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제13회 전주국제영화제 폐막작으로 처음 소개된 는 제68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 제48회 금마장영화제 감독상 등을 받았고 2012년 제84회 아카데미영화제 외국어영화상 부문 홍콩 영화로 선정되었다.
는 단 한 명의 악인도 등장하지 않는, 그래서 절정도 극적 엔딩도 없는 담백한 영화다. 그렇다고 지지부진하고 무의미한 일상 묘사에만 머무는 심심하고 지루한, 소위 예술 영화인 체하는 작품도 아니다. , , 과 마찬가지로 보통 사람의 삶과 인간관계를 깊이 사색할 수 있는, 그러나 감동을 강요하지 않는 수채화 같은 영화다. 겸손하고 진지한 현실 응시와 표현력이 영화의 미덕임을 확인케 하는 작품인 것이다. 이런 영화를 계속 내놓는 허안화의 뚝심과 이 같은 소재에 제작비를 대는 홍콩 영화계의 인프라가 존경스럽고 부럽다.
는 홍콩의 최고 스타 류더화(유덕화)가 제작을 자처하고 시나리오에 감동받아 주연까지 요청한 작품이다. 홍콩 누아르의 청춘 아이콘에서 진지한 소품에 돈을 대는 제작자로 성숙한 류더화를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주윤발, 양조위, 여명, 양가휘 등 홍콩 남성 스타들은 어쩐 일인지 도무지 나이를 먹지 않는데, 특히 1961년생인 류더화는 대학생 역할을 맡아도 빠져들 만큼 늙은 티가 나지 않는다. 에어컨 수리기사로 오인받을 정도로 허름한 잠바와 배낭 차림으로 나오는 에서도, 노총각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2012년 부산국제영화제 폐막작으로 상영된 (2012)에서는 조연으로 잠깐 출연하는 등 역할의 크고 작음을 문제 삼지 않는 류더화 같은 스타 제작자가 있어 홍콩 영화계의 미래가 밝아 보인다.
는 시리즈와 등을 제작한 홍콩의 유명 영화 프로듀서 로저 리의 개인사를 바탕으로 했으며, 로저 리가 직접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했다. 혈연으로 맺어진 식구만을 가족으로 여기는 편협한 사고가 고령화 사회의 걸림돌이 될 것임을 새삼 깨닫게 해준다.
어머니를 비롯한 온 가족이 캐나다로 이민을 간 후 혼자 홍콩에 남은 영화 프로듀서 로저 리 (류더화 분)는 잦은 중국 출장 등으로 바쁘게 산다. 그런 그를 돌보는 것은 60여 년 전부터 그의 집에서 일해온 늙은 가정부 타오지에(예더셴 분)뿐. 어느 날 뇌졸중으로 쓰러진 타오지에는 로저의 짐이 될 수 없다며 요양원을 고집한다. 자기 집안 식구를 4대나 모셨으며 자신을 키워주기도 했던 타오지에를 보러 이따금 요양원을 찾는 로저와 양아들 노릇을 해주는 그에게 감사함과 미안함을 느끼는 타오지에와의 이심전심. 그리고 두 사람 눈에 비친 요양원 노인들의 일상.
출장에서 돌아와도 이렇다 할 말 한마디 건네지 않고 타오지에가 자신의 식성에 맞춰 요리해주는 각종 해산물 요리와 우설 찜을 먹기만 하는 로저. 그는 먼지 하나 없이 집 안을 쓸고 닦는 타오지에를 늘 제자리에 있는 가스레인지 혹은 청소기 같은 존재로 여기는 게 아닌가 싶다. 그러나 이는 그의 무심한 성격에서 기인했던 것일 뿐, 타오지에가 요양병원에 입원한 후 로저는 따뜻한 본심을 드러내길 주저하지 않는다.
어린 시절부터 관절을 못 쓰게 된 나이에 이르기까지, 결혼도 하지 않고 로저의 가족을 돌봐온 타오지에에겐 로저 가족과의 관계가 전부다. 노인병원에서 잠시 외출 나온 타오지에는 그동안 보관해온 소중한 물건들을 로저에게 보여준다. 그녀가 평생 간직해온 것은 로저와 함께 찍은 옛날 흑백 사진, 로저가 아기 때 입었던 옷과 장난감, 그리고 자신의 첫 월급봉투 등이었다.
자신과 함께 시부모를 봉양해준 타오지에를 병문안하러 온 로저의 어머니는 로저와 단둘이 지내게 되었을 때 이런저런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무조건 베풀기만 했던 타오지에의 행동과는 대조되는 행위였다. 즉 로저에게 타오지에라는 존재는 어머니보다 더 가까운, 자신을 속속들이 알고 이해해주는 또 다른 어머니였던 것이다. 이는 로저가 누이에게 하는 말에서도 확인된다. “내가 아플 때 타오지에가 나를 돌봐줘 살아났는데, 이제 내가 그녀를 돌볼 수 있어서 다행이야.” 누이는 오빠에게 “어린 시절 유독 오빠만 챙겼던 타오지에가 서운했어. 그러나 나도 타오지에가 키워줬으니 장례식 비용만큼은 내가 부담하게 해줘”라고 말한다.
이처럼 로저의 가족은 타오지에의 헌신에 깊이 감사해하며 그녀의 노후를 책임지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특히 로저는 타오지에가 퇴원해서 살 집은 물론 요양병원 비용까지 알아서 준비한다. 형제의 결혼식 피로연에 타오지에를 데려가 함께 가족사진을 찍는다거나, 자신이 제작한 영화 발표회장에 타오지에를 초청해 그녀에게 기쁨과 자랑스러움을 느끼게 해주기도 한다.
모자지간이나 다름없는 로저와 타오지에의 관계 못지않게 이 영화에서 비중을 차지하는 장면은 두 사람 눈에 비친 요양병원 노인들과 직원들의 일상이다. 정초 연휴 때도 병원에 남아 있는 노처녀 최 간호사(진해로 분). 아들에게 전 재산을 준 뒤 버림받았음에도 아들만 기다리는 어머니와 그런 어머니에게 화를 내면서도 모시러 오는 딸. 깊은 병에 걸린 딸과 그 딸을 보러 오는 어머니는 병원비 걱정 끝에 말없이 사라진다. 타오지에에게 돈을 빌리곤 하는 노인의 에피소드도 가슴 뭉클하다. 빌린 돈으로 젊은 여자를 사러 간다는 사실을 알게 된 로저가 돈 빌려주지 말라고 하자 타오지에는 이렇게 말한다. “할 수 있을 때 하는 게 좋지.”
에피소드의 주인공들은 삽화처럼 간간이 등장할 뿐이지만, 관객들이 그들의 전 인생을 짐작할 수 있을 만큼 풍부한 이야깃거리를 남긴다. 류더화와 예더센을 제외한 요양원 노인들은 비전문 연기자들이며, 요양병원 묘사는 거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 같다. 여기에 유머와 페이소스가 곁들여진 소소하면서도 세심한 묘사가 더해진다.
커튼으로 가림막을 한 조그만 방들이 다닥다닥한 한 서민요양병원 스케치는 에서 여주인공 손 여사의 이모와 이모부의 요양원 생활을 떠올리게 한다. 사실 는 의 자매편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소재와 묘사의 연관이 많아 보이며, 절제된 카메라워크와 단정한 화면구성 또한 그러하다.
1961년생인 류더화와 1947년생인 예더센은 (1985)에서 모자 지간으로 호흡을 맞춘 이래 여러 차례 모자지간으로 출연한 바 있어, 에서의 호흡이 자연스러웠고 각종 연기상으로 그 보답을 받았다. 1992년 공리가 로 여우주연상을 탄 이래, 예더한은 19년 만에 중국어권 여배우로 두 번째 베니스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유명 감독과 배우의 우정 출연도 이야깃거리에서 빼놓을 수 없다. 로저가 중국 출장에서 영화 일정을 의논하고 함께 술을 마시는 영화인들로는 , 시리즈의 서극 감독, , 등의 제작자 시남생, , 등으로 유명한 감독이자 배우인 홍금보인데 이들이 자신의 이름으로 출연했다.
인생에서 유머를 빼놓을 수 없다.
심각한 사람과 만나면 시간이 아주 길게 느껴지고 그 시간과 공간이 아주 견디기 힘든 경우가 있다. 선배의 결혼식, 선배는 평소 존경한다는 교수님에게 주례를 부탁드렸다.
모두들 실력자로 존경은 하지만 주례 부탁은 그 교수님께 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살짝 유머를 곁들인 주례가 좋다고 그렇게 제안을 했건만 강의시간에 다 견뎌보고도 그 교수님에게 부탁을 드리다니…. 강의시간에도 정말 힘들었는데 왜! 왜! 왜!
그 자리에 모인 우리 모두가 두고두고 한마디씩 했다.
기차를 타고 가던 어느 날의 이야기다.
안경을 쓰고 양복을 잘 차려입은 어르신이 옆자리에 앉았다.
어아~~!! 거의 숨도 쉬기 어려울 만큼의 카리스마에 덩치까지 있는 아저씨였다.
그렇게 한 시간 이상을 힘들게 앉아서 가던 중 어르신의 핸드폰 벨이 울렸다.
각을 딱 잡고 있던 아저씨의 핸드폰에서 의외로 트로트 음악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필자는 긴장이 풀리고 편안해졌다.
그 어르신도 자주 보는 구멍가게 아저씨처럼 편안하게 느껴졌다.
유머 있는 삶.
필자는 웬만하면 남을 편안하게 대해주고 즐겁게 사는 것을 추구하는 편이었다.
학창 시절에는 어디를 가도 늘 즐겁게 분위기 띄우곤 했다.
어른이 되어서도 기쁨과 사랑이 넘치는 분위기를 완성시키는 여자였다.
그런데 환갑 나이를 넘긴 요즘에는 왠지 우울하고 마음 한구석 슬픔이 존재한다.
아무에게도 말 걸기 싫고 모임도 꼭 가야 할 경우 외에는 가기가 싫다.
두 아들 다 결혼시키고 아픈 환자를 돌봐야 하는 날들이 이어져서 그런가?
그렇다고 필자 인생이 언제는 편안했나?
나이 드는 게 편안하다고 누가 말했던가.
모두들 노후 준비, 건강, 경제, 친구를 강조한다.
필자는 여기에 푼수끼와 주책스러움도 필요하다고 본다.
푼수 같은 마음으로라도 매일 즐거움이 있었으면 한다.
나이만 들고 심각한 사람 가까이 하기 싫다.
그래서 필자는 드라마와 예능 프로그램을 즐겨 본다.
나이 들수록 흐트러짐과 유머도 익혀야 한다.
허허실실 살아가는 인생을 꿈꾼다.
그녀는 뽀얗고 하아얀 뭉게구름 같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색다르고 기발한 발상이 피어오른다. 집중해서 듣자니 성자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다. ‘이상희 헤어팝’의 이상희(李相熙·56) 원장. 직업은 미용사인데 그녀 인생에서 봉사를 뺀다면 삶이 심심할 것만 같다. 손에 익은 기술을 바탕으로 모두가 더불어 사는 세상을 꿈꾸니 말이다. ‘누군가를 돕는다’란 말에 백만 개의 하트풍선이 ‘뿅뿅’ 터지는 그녀의 환한 얼굴과 마주했다. 어찌 웃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루하루가 감사한 사람입니다
“지금도 하루하루가 감사해요. 저는 되게 감사한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다. 잠시 망설이더니 ‘감사’라는 단어를 꺼낸다. 열 손가락이 성한 가운데 기술을 배운 것도, 그 기술을 가지고 다른 사람한테 해줄 수 있는 게 있어서 감사하단다.
“미용기술을 배울 때 돈만 벌기 위해 시작한 것은 아니었어요. 한 달에 네 번 봉사를 간다면 나머지 시간은 봉사를 가기 위해 미용실에서 일하는 시간이라 생각하거든요. 제 이름이 서로 ‘상’에 빛날 ‘희’거든요. 말 그대로 상희답게 사는 거죠.”
어려운 이들을 만나면 뭔가 해줄 수 있어 좋고 자신이 운영하는 미용실에서 후배들이 잘 배우고 성장해나가는 것도 참 좋은 일이라고. 이상희 원장을 만난 것은 5월 말. 본인 스스로가 정한 인생의 안식년을 시작한 지 한 달이 채 안 된 시점이었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은데 미용실을 계속하면 쉴 수 없겠더라고요. 원래 하던 넓은 미용실을 4월 30일까지만 하고 5월 1일 철거했어요. 저와 오래 일했던 디자이너들이 일할 곳을 마련해 지금의 아파트 상가로 옮겼어요. 이성적으로는 이제 내가 하고 싶은 일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철거하던 날 잠이 안 오더라고요. 안식년이라 해도 두 손 다 노는 게 아니라 그런지 다음 날부터는 잠이 너무 잘 왔어요.”
그런데 그 안식년이란 것 말이다. 대부분 휴식을 염두에 두고 설계를 한다. 이상희 원장은 그 하고 싶다던 일(?)에 더 빠져보려 미용실 운영 대부분을 후배 디자이너들에게 맡겼다. 벌여놓은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 당장 앞두고 있었던 새터민 결혼식에 피부 관련 사업, 매달 있는 봉사, 새로운 봉사, 미용인의 처우 개선 등 쌓이고 쌓인 일을 보니 이게 안식년인가 싶다.
봉사와 업(業)이 하나인 인생을 구상하다
전라북도 정읍 출신인 이상희 원장은 성공하려고 미용계에 입문했다. 미용실에 갔더니 기술을 배우면 서울도 갈 수 있고 해외도 갈 수 있다고 말해줬다. 솔깃한 말에 응시한 미용 자격증 필기시험에 떡하니 붙었고 곧바로 실기시험을 준비했다.
“학원 안 다니고 미용실에서 연습했어요. 고등학교 친구들 데리고 가서 머리 잘라주면서 두세 달 정도 훈련했고 합격 1년 정도 후에 상경했죠.”
서울에 오자마자 당시 유명했던 미용실에 취업한 이상희 원장은 일주일을 못 다니고 그만뒀다. 줄지어 서 있는 거울에 헤어디자이너의 이름이 아닌 번호가 붙어 있었다.
“큰 미용실 가야 성공한다기에 들어갔는데 거기선 사람 이름을 부르지 않았어요. 적응하기 힘들더라고요. 제가 시골 애였지만 자존감은 있었거든요.”
서울살이 초반 20대의 이상희는 걷기도 많이 걸었다. 집이 있던 상도동을 지나고 한강다리 건너, 숙대, 남대문시장. 어떻게 살 것인가 고민했다.
“신호등 앞에 있는데 파마가 막 말아지는 거예요. 다시 미용을 해? 돈 많은 남자 만나서 미용실을 열어? 가난해서 걷고 고민하면서도 걷고. 그렇게 내린 결론이 나를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실력을 키워 성공하겠다는 거였어요.”
머리 자르는 미용기술 외에도 머리를 올리는 ‘업스타일’에 ‘메이크업’ 기술도 할 수 있어야 했다. 다니던 미용실 원장과 선배, 동료에게 양해를 구해 시간을 마련했고, 잘살던 친구에게 학원비를 부탁해 메이크업 학원에 등록했다. 선후배 관계가 수직적이고 딱딱하던 시대였지만 업무시간을 배려받고 학비문제를 해결해나가면서 더욱 완벽한 미용사로서 비상을 꿈꿨다.
“후배들에게 돈과 시간이 없어서란 변명을 하지 말기를 당부해요. 꼭 해야 할 일이고 열정이 있으면 누구든 도울 테니 도움을 받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라 해요.”
20대는 미용사 이상희로서 삶을 채우는 시간이었다면 30대는 그것을 바탕으로 존중하고 돕고 깨치며 살아갔다.
‘높임말’과 ‘봉사’는 철칙
서른 살의 나이, 자신의 이름을 단 미용실을 열었다. 개업과 함께 이상희 원장이 철칙으로 삼았던 두 가지가 있다. 그 첫 번째가 직원들 사이에 높임말 사용이었다. 당시는 손님이고 미용사들이고 서로에게 함부로 하던 시절이었다.
“저희 때는 디자이너와 스태프가 같이 앉아 밥도 안 먹었어요. 솔직히 미용기술에는 차이가 있지만 사람 차이는 없잖아요. 그래서 오픈할 때부터 높임말을 사용했어요. 혹여 함부로 하는 손님이 있으면 더 예의를 갖춰 말했어요. 구두며 유니폼도 갖춰 입었습니다. 그렇게 분위기를 바꿨어요.”
두 번째는 바로 봉사다. 한 달에 한 번은 전 직원이 봉사하기로 했다. 좋은 기술을 가지고 있으니 그것을 좋은 일에도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종교, 지역 그 어떤 것도 따지지 않고 손길이 필요한 곳을 찾아 어려운 이웃과 얼굴을 마주했다.
“처음 찾아서 봉사했던 곳이 가난한 마음의 집이라는 곳이었어요. 1990년대에는 메이크업이 아주 강할 때였어요. 장애우들이 저희를 보고 놀라서 숨는 거예요(웃음). 그래도 몇 번 가니까 친해졌어요. 봉사하다 보니 새터민과도 연결이 됐어요.”
어렵던 시절 동료들과 친구의 도움으로 메이크업을 배운 것이 두고두고 고맙다는 이상희 원장. 좋은 마음이 모여 얻은 기술이기에 봉사를 할 때 더없이 기분이 좋다.
“미용실 열고 1년쯤 돼서 어떤 손님이 저에게 도움을 요청했어요. 러시아 여자와 함께 한국으로 들어온 탈북민이 결혼식을 하는데 메이크업해줄 사람이 필요하다고요. 제가 메이크업을 한다는 걸 몰랐던 손님인데 말입니다. 당연히 좋다고 했죠.”
봉사한다는 게 알려지면서 놀이처럼 재미있고 기획력 있는 봉사가 이어졌다. 정부 지원이 어려운 틈새 청소년들을 위해 일일찻집을 열고, 산골 아이들을 위해 자전거도 사주고 고아원에 세탁기도 기증했다.
“손님들에게 이건 꼭 약속했어요. 우리 미용실에 와서 머리를 하면 그 일부는 다른 사람들 위해 쓰인다고요. 제가 그렇게 좋은 일을 하면 이곳에 오시는 분들이 복을 받는 거잖아요.”
‘K뷰티’와 ‘뷰티엔젤’ 봉사의 중심에 서다
2000년대 중반에는 한·일 미용인 간의 세미나가 자주 있어서 일본에 갈 기회가 많았다. 그때 일본의 성년의 날과 우리나라의 성년의 날에 대한 의문과 고민이 일었다.
“일본에 갔는데 일본 젊은이들이 기모노를 많이 입더라고요. 예쁘기도 하지만 그 나라 문화잖아요. 그런데 일본의 ‘성인식’은 공휴일인데다가 자치단체에서 큰 잔치를 열어요. 기모노 입고 화장과 머리를 하고. 이 모든 게 다 미용실에서 이뤄지는 거예요.”
함께 일본에 방문하고 온 미용실 원장들에게 우리 청년들을 위한 성년의 날을 특별한 날로 만들자고 제안했다. 메이크업과 머리손질은 미용실에서 도움을 주고, 한복은 당시 이상희 원장이 다니던 우석대학교 최고경영자과정 ‘미르’에서 만난 지인이 공급해주기로 했다.
“연세대학교 다니는 손님한테 학교 대동제 때 성년식을 열어주겠다고 제안했어요. 단, 스마트폰으로 한복 입은 사진을 찍어서 SNS에 올리는 학생들에게만 기회를 주기로 했어요. 2011년 5월에 이틀 동안 저희가 준비한 성년식에 300여 명이 참여했어요.”
이 행사를 계기로 K뷰티디자인협회의 시초가 된 한국업스타일협회를 창설했다.
“일본에 같이 다녔던 미용인에게 한국으로 돌아가서 좋은 일도 하고 미용실 손님도 우리 손으로 오게 하자고 말씀드렸어요. 한국업스타일협회는 이후 좀 더 의미를 넓혀 지금의 K(Korea)뷰티디자인협회가 됐습니다.”
이상희 원장의 또 다른 활동 영역은 뷰티엔젤이다. 미용실 개업 초기 직원들과 다니던 봉사가 주위 미용인들과 함께하는 한국미용봉사회로 이어지다가 누구든 함께 참여하는 연합봉사 형태의 ‘뷰티엔젤’로 탄생했다. 한국 봉사는 물론 캄보디아 미용기술 지원봉사를 이어가고 있다.
“‘미르’의 박문희 원장님이 의료진하고 캄보디아 봉사를 간다고 머리를 하러 오셨어요. 제가 ‘의사들은 너무 좋겠다, 다른 나라 가서 봉사도 하고’ 그랬더니 너무 좋아하시는 거예요. 봉사를 하게 된다면 저는 미용을 가르쳤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그게 진행이 됐어요. 그쪽 아이들 미용기술 가르칠 생각을 시작하니까 잠이 안 왔어요.”
캄보디아 봉사는 이상희 원장 인생에 새로운 전환점이 됐다. 20년 넘게 많은 사람을 도우며 살아왔지만 처음의 그 에너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캄보디아 봉사를 앞두고 느꼈어요. 왜 잊고 있었지? 친구 한 명의 도움으로 내가 20대를 살았는데 지금 못할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가난해도 여자가 기술을 배우면 자식교육 시킬 수 있고 생활고에서 나아지니까 공부는 늦게라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지금까지 두 번의 캄보디아 미용기술학습프로그램을 통해 20명을 지원했다. 학비뿐만 아니라 숙식과 생활보조금까지 지원하는 사업이라 매년 할 수 없다고 한다.
“캄보디아 아이들과도 약속한 것이 있어요. ‘너희가 성공을 하면 한 사람을 가르쳐라.’ 그게 약속이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캄보디아에 미용실 오픈을 생각하고 있어요. 그곳 아이들이 일할 수 있는 곳을 만드는 거죠.”
‘미용복지사’라는 직업 멋지지 않나요?
안식년이라는 본인의 결정과는 무관하게 하는 일이 너무나도 많다. 매달 13일 레드엔젤(청년응원단체)과 함께 K-컬처 콘서트를 개최한다. 2~3개월에 한 번씩은 다른 봉사단체와 연합활동도 한다. 캄보디아는 물론 올가을 새터민 합동결혼식도 계획 중이다. 미용인으로서의 고민도 남다르다.
“미용은 보건의 개념도 있지만 지금 사회에서는 복지의 개념입니다. 형편은 되는데 거동이 힘들어서 미용실에 못 오시는 경우가 있잖아요. 현재 미용은 이동 미용이 안 됩니다. 환자 외에는요. 미용복지사가 필요한 세상입니다.”
미용사의 새로운 직업에 대한 아이디어일 뿐 아니라 고령화 사회 시니어들의 복지에 대한 깊은 배려가 담겨 있다. 이외에도 한류로 인해 유입되는 외국 여행객에게 보다 친근하게 한국 문화를 알릴 수 있는 ‘뷰티존’을 만들어 세계에 한국 문화와 아름다움을 알리고 싶단다. 미용실을 작은 평수로 옮기면서 ‘손아당(蓀雅堂)’이라는 공간도 만들었다. 뜻 맞는 사람들이 모여 봉사에 관한 아이디어를 주고받는 허브 역할을 하게 되기를 바라면서.
“근데 저는 생각하는 게 예쁜 거 같아요. 끊임없이 꿈을 꾸는 거 같아요. 내가 만일 미용 일에서 손을 뗀다면 내 직함을 뭘로 하지? 뷰티풀 라이프 디자이너 이상희로 불리면 어떨까 하는데 되겠죠?”
뷰티풀 라이프 디자이너를 꿈꾸는 그녀의 입에서는 이쁘다(예쁘다)라는 말이 참으로 많이 흘러나온다. 자주 쓰는 단어에는 그 사람의 평소 모습이 담겨 있다. 그녀의 이쁜 마음이 영원하길 지지하고 응원한다.
자신의 무게, 즉 자아라는 의식의 무게는 지구의 무게보다 무겁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무게는 얼마나 될까? 결혼한 지 40년째에 접어드는 지금도 아내가 생각하는 가장의 책임과 무게는 남편이 생각하는 책임과 무게와는 많이 다른 것 같다. 가끔 가장의 권위를 존중해 달라고 하면 지금 같은 시대에 무슨 권위가 필요하냐고 되묻는다.
아내에게 농담으로 “당신과 결혼해서 정년퇴직할 때까지 사글세나 전세 한 번 살게 한 적 없었소!” 하면 아내는 “고마워요” 하기는커녕 “난 결혼 전에도 사글세나 전세로 살아본 적 없어요. 늘 우리 소유 집에서 살아왔어요” 한다. 8촌 이내 친척 모임에서 누나들 소개로 아내와 맞선을 봤다. 그 뒤 아버지께서 집안을 알아보시고 좋다고 하셔서 7남매 장남 역할을 잘해보겠다는 생각으로 결혼을 했다. 필자는 결혼 전에 이미 방 두 개짜리 13평 아파트를, 당시 현금 20만원과 19년 분할상환 융자조건으로 확보하고 있었다.
아내가 첫딸을 출산했을 때는 겨울이었다. 울산에서 해 뜨기 전에 집을 나서 쇠를 다뤄 화물선 만드는 조선회사에 8시까지 출근했고, 퇴근은 해가 진 후 한참 지나서 했다. 매일 매일이 피곤했다. 그날 저녁에도 깊은 잠에 빠져 있었는데 한밤중에 딸아이가 계속 울어댔다. 좀처럼 떠지지 않는 눈을 비벼대며 자는 아내를 흔들어 깨워 “여보, 아이가 계속 울어대니 좀 달래시오” 했다. 그러나 여전히 딸아이가 울어대는 통에 할 수 없이 일어나 앉았다. 일어나 보니 아내는 일어나 아이를 달래기는커녕 돌아누워 쿨쿨 자고 있었다. 순간 무시당했다는 감정이 일어나면서 화가 솟구쳤다. 피곤한 가장의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아내가 미워 상당히 아프게 얼굴을 때려버렸다. 그러자 아내는 벌떡 일어나 자는 사람에게 왜 그러느냐고 대들었고 밤새 언쟁을 했다. 그 후 아내는 필요할 때마다 그날의 일로 두고두고 공격을 해오곤 했다. 산후 몇 달간 쏟아지는 잠을 야속하게도 몰라줬다는 것이었다.
첫째에 이어 둘째, 셋째가 태어날 때마다 가장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기 위해 자녀들에게 여러 보험을 들어줬다. 또 7남매의 장남이다 보니 동생들 학비에 결혼식 등 돈 쓸 일이 끊이지 않아 목표한 저축과 목돈 모으기가 어려워 아내가 힘들어했다. 어느 날인가 여동생 결혼식을 마치고 피곤한 상태에서 집으로 가다가 가전제품을 파는 상점에 들어가 세탁기를 즉흥적으로 샀다. ‘이렇게 열심히 힘들게 직장생활을 하면서 과연 남는 게 뭔가?’ 하는 생각과 함께 아내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어 뭔가 보상을 해주고 싶었다. 그때까지 아내는 손빨래를 했던 것이다. 갑자기 배달된 세탁기에 아내는 눈을 크게 뜨고 “갑자기 무슨 세탁기예요?” 하며 놀랬다.
결혼 10년째가 되니 아이들 나이가 10세, 8세, 5세가 됐다. 당시 회사가 특별교육이라는 명목으로 책상을 치우고 교육을 시켰다. 150여 명이 제자리에 못 돌아올 위기에 처했을 때 필자는 그야말로 시베리아 벌판에 홀로 서 있는 듯한 고독과 아픔을 느꼈다. 마치 홀로 지구를 짊어지고 있는 사람처럼 가장으로서 무거운 마음뿐이었다. 나라는 존재 가치와 능력에 대해 자괴감이 몰려왔고 아내에게는 표현할 수 없는 외로움이 필자를 오랫동안 포박했다.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가장으로서의 책임은 더 강해졌다. 역설적으로 표현하면 아내와 하고 싶은 것들을 과감하게 실천하기 시작했다. 결혼 25주년 때 하와이를 가자고 하자 아내가 킬리만자로를 등정하고 싶다고 했다.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5000미터 높이 이상의 눈 덮인 킬리만자로 산 정상까지 가고 싶다고 해서 3주간 아프리카 사파리 여행 겸 떠났다. 그리고 아마추어로서는 가장 높은 곳에 오를 수 있다는 킬리만자로 산의 두 봉우리(해발 5685미터 길만스포인트와 5895미터 우후르피크)도 등반했다.
지금은 정년퇴직한 지 9년째다. 6시 반에 출근해서 아침식사를 하고 조찬회의를 하던 생활을 10년도 더 넘게 해서 그런지 지금까지도 느긋하게 늦잠을 자거나 아침 일찍 일어나도 다시 누워 휴대용 라디오를 들으면서 유유자적하는 게 좋다. 가능하면 하고 싶은 일들을 다양하게 즐기려고 한다.
아내와는 가끔 언쟁도 하는데, 아내는 필자가 권위적이라며 불평을 하고 필자는 가장의 권위를 좀 존중해 달라고 한다. 아내와 감정 대립을 할 때면 필자는 침묵 상태로 들어간다. 일상생활은 하면서 상당 기간 아내와 말을 삼가는 것이다. 필자 의견을 주장하고 설득시키려 하거나 이기려 하면 감정의 회오리와 더 큰 혼란에 빠지는 것을 반복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른바 묵언수행 또는 침묵피정 같은 행위를 자처하는 것이다. 그러다 며칠이 지나면 침묵으로 부족하니 스킨십이 많아지고 급기야 터져 나오는 웃음을 서로 참지 못한다. “내 스킨십에 눈물 좀 찔끔 흘려줘야 하는 거 아냐?” 하면 아내는 “아직도 너무 권위적이십니다요!” 한다.
연필화를 수년간 그려온 아내는 최근 수채화를 배운다. 어느 날은 아내가 표본 책을 가지고 오더니 “선생님에게 큰 스케치북에 표본 그림을 모두 그려보겠다고 했어요” 한다. 필자는 “잘했소! 하다가 못하면 가장인 내가 다 해줄게요” 했다. 그러자 아내는 “어휴! 또 도졌네요, 그 병이!” 한다.
나방을 고운 시선으로 본 적 있던가? 여름밤, 밝은 조명 주위로 크고 작은 나방이 몰려들면 무서웠다. 누군가는 살충제를 들고 나와 연신 뿌려대기도 했다. 어린이용 애니메이션 의 사오정 입에서 나오는 나방은 그저 웃음거리. 더럽고 지저분하고 방해되는 날개 달린 벌레. 인간사 속 ‘나방’이란 정체의 위치가 그러했다. 허운홍(許沄弘·64)씨가 나방의 생활사에 대해 관찰하고 알리고 의미를 부여하면서 차갑던 시선에 조금씩 꽃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주부 허운홍, 나방에 빠지다
세상에는 별의별 사람이 다 있지만 ‘나비’가 아닌 ‘나방’을 연구하고 그 매력에 푹 빠진 사람이 있다니! 대학 교수라면 이해가 갈 것 같다. 자연계열과는 거리가 멀던 주부가 ‘나방생활사 전문가’로 불린다. 바로 허운홍씨 얘기다. 우선 허운홍씨에 대해 간략히 소개하자면, 10여 년 동안 직접 채집해 길러낸 나방이 2000여 마리 900여 종에 이른다. 이렇게 채집한 나방은 손수 표본으로 만들었고 올해 초 광릉수목원에 기증했다. 나방뿐만 아니라 파리와 벌들의 표본도 함께 기증해 시민에게 내줬다. 서강대학교 사학과 출신, 곤충과는 멀던 삶. 나이 오십 넘어 그 작고 날라 다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돌볼 것 많은 주부생활 대부분은 오래전부터 자식도 남편도 아닌 나방을 중심으로 돌고 있다. 그녀는 왜! 수많은 곤충들 중 나방에 빠지게 된 걸까?
“전업주부로만 살아왔어요. 대학 졸업하고 친구 소개로 만난 남편과 곧바로 결혼했거든요. 뭐든 해보려고 했는데 생각대로 잘 안 풀렸어요. 그런데 뭘 하고 살 것인가는 늘 고민했죠. 그러다 1997년에 남편이 교환교수 자격으로 영국에 가게 됐어요. 그곳에서 처음으로 생태학과 만났어요.”
영국에서 생태학에 눈뜨다
가족과 함께 간 영국 케임브리지. 그곳이 나방 연구에 힘을 실어주는 도화선 역할을 했다. 케임브리지는 지식이 넘쳐나는 곳이었다. 도시의 한가운데는 대학교와 도서관으로 가득 차 있었고 배울 것이 널려 있었다. 학업에 대한 갈증과 궁금증이 많았던 허운홍씨는 케임브리지 개방대학에서 관심 있는 것이 있으면 뭐든 찾아서 수강신청을 했다. 천문학에 미술사, 영국사 강의도 들었다. 그중에 생태학도 있었다.
“생소했어요. 식물에 관한 걸 배울 수 있다기에 수업을 들어보기로 했어요. 그때까지 에콜로지(Ecology·생태학)란 단어조차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학교였지만 수준은 남달랐다. 생물학, 곤충학, 천문학 전문가가 한 학기 동안 전문적으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숙제도 내주었다. 무엇보다 허운홍씨가 놀란 것은 학문을 대하는 영국인의 자세였다.
“천문학 공부를 하는 사람들은 은하계를 볼 수 있는 필름과 슬라이드 장비를 가지고 있었어요. 옷은 정말 허름하고 냄새가 날 정도였는데 슬라이드는 다들 가지고 있더군요(웃음). 생태학 수업을 같이 듣는 분과 영국의 유명한 습지에 간 적이 있는데 차 트렁크에 장화며 쌍안경, 돋보기 등 없는 게 없더라고요. 저는 운동화 신고 뒤따라갔거든요. 문화수준인 거 같았어요. 그게 제가 느낀 차이였어요. 특히 연세 드신 분들이 많았는데 다들 너무나 열심히 공부하셨어요.”
지식이 넘쳐나는 영국에서 소녀처럼 공부할 수 있었던 시간은 잠시였다. 1998년 한국에 IMF 위기가 와서 1년도 채 못 되어 돌아와야만 했다. 조금 더 영국에 빨리 가서 공부를 시작했거나 더 오래 있었다면 뭔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늘 아쉬움이 남는다.
벌 대신 나방을 선택했다
“그렇게 한국에 돌아왔는데 1999년에 길동생태공원이 문을 열었어요. 2008년까지 생태안내 자원봉사를 하면서 곤충 생태에 더 깊은 관심을 갖게 됐어요.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일을 하다 보니까 정말 열심히 공부했어요. 영국에 있을 때 교수님이 소개해준 책도 해석해서 보고 말이죠. 사실 벌을 더 연구하고 싶었어요. 벌이 선구적으로 하고 있는 일을 사람들이 배워가는 것 같다고 생각했거든요.”
정자은행의 시초였을 것 같은 여왕벌의 저정낭, 말벌의 독특한 아파트 생활 등 벌들의 사회생활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그런데 꿀벌과 말벌을 제외한 대부분의 벌이 나무줄기 속, 집 틈 등 눈에 보이지 않는 지하생활을 해 포기했다.
“그래서 나방으로 돌아섰습니다. 처음에는 이쪽 분야 전공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미 다 연구한 줄 알았어요. 그런데 연구가 전혀 안 돼 있었어요. 도감 대부분이 일본 책을 베낀 거였어요. 영국에 있을 때도 생태학 교수가 일본 책만 소개시켜줬죠. 그때까지 한국 책은 없다고 했어요.”
2007년부터 중부지방을 기점으로 발이 닿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든 나방 애벌레를 채집하고 인공으로 키워냈다. 수백 회 반복한 끝에 2012년과 2016년에 1권과 2권을 발표했다. 나방의 탄생과 변화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국내 최초의 도감이다.
새로운 나방 찾아 순천으로 남하(南下)하다
현재 허운홍씨는 남편과 순천에서 살고 있다. 서울 생활을 접은 이유는 나방 때문이다.
“중부지역 쪽에서만 주로 채집했어요. 친정이 밀양이라 그곳에서도 좀 했고요. 그렇게 900종을 채집했으니 새로운 곳에서 채집을 해보려고 순천에 왔어요. 이곳에 친척 한 명 없는데 찾다 보니 여기까지 왔어요(웃음). 남쪽은 사는 식물이 달라요. 그래서 나방도 다른 종이 나와요. 예덕나무, 푸조나무 이런 것들은 서울에 없어요. 제주도에서도 살아볼까 생각했는데 여기랑 식물이 비슷하고 섬이라 한계가 좀 있죠. 이곳에 훨씬 생물이 더 다양하게 있어요. 지리산도 가깝고. 내려와서 70~80여 종을 찾았습니다. 백운산, 제석산, 조계산, 봉화산 등 순천 쪽 산은 거의 다 다니고 있어요.”
지금도 매일 주위 산을 오르고 반가운 마음에 애벌레를 채집하고 관찰하는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어느 대학 박사, 교수 같은 명함은 없지만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열정과 노력으로 살아가고 있다.
“교수 몇 분이 와서 학교에 들어와서 공부하면 어떻겠느냐고 한 적이 있어요. 공부를 하면 채집을 못하지 않냐 물으니까 채집할 시간을 주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제가 채집하러 나가면 새벽 6시에 나가서 왕복 6시간, 6시간 채집해서 한두 종 추가해요. 어떻게 공부하면서 할 수 있겠어요? 안 해본 사람들 생각이죠. 벌레들이 생각처럼 쉽게 찾아지지 않아요.”
허운홍씨는 78세까지 2000종의 애벌레를 채집해 나방 성충으로 키워낼 꿈을 가지고 있다. 그때가 되면 지금까지 모아둔 자료를 가지고 대학에서 공부하고 싶다.
“채집 생활을 모두 끝마치고 나면 나방을 생활사별로 정리하고 싶어요. DNA 검사를 비롯해서 종합적으로 연구하고 싶은데 눈이 괜찮을지 모르겠어요.”
시력이 너무 떨어져서 의사에게 조심하라는 경고를 들었다. 원시가 너무 빠르게 진행되지만 하는 일들을 멈출 수 없단다.
“제가 78세까지 2000종을 채집하겠다고 허풍을 쳐놔서요(웃음).”
경조사는 못 다녀요
나방 애벌레 채집에 집중하는 기간은 4월 말부터 9월 말까지. 10월에도 밖을 나선다. 비가 오는 날은 사진을 정리하고 그 외 모든 시간은 산 이곳저곳을 다닌다. 나방 엄마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 같다.
“특히 표본작업을 할 때는 강의나 다른 일들은 하지 않아요. 6월에도 성남에서 토크쇼에 와달라고 했는데 거절했어요. 일단 채집이 시작되면 사람도 안 만나요. 친인척 결혼식도 안 가요. 장례식에는 꼭 가죠. 그 외에는 아무 곳도 안 가요. 쉽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정말 집중이 필요하거든요.”
사람들은 올해 채집을 못하면 내년에 하면 되지 않느냐고묻는다. 애벌레를 집으로 들여와 길러보니 매년 나는 종들이 다른 것을 알게 됐다. 한 해 거르면 영원히 못 보는 개체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여름 여행도 포기했다. 이런 허운홍씨. 가족들과 친구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우리 가족은 서로 관여 안 해요. 예전에 아들들은 ‘엄마 나방이 날라 다녀요, 번지수를 잘못 찾았나봐요’ 그러기도 했어요. 손자들은 벌레들에게 너무 관심이 많죠. 친구들은, 제가 경기여고를 나와서 수준이 있거든요(웃음). 동기 모임도 미술관, 박물관 이런 곳에서 하니까 제 생활을 이해해요. 가끔은 제 남편 대단하다고 해요. 벌레 키우는 여자랑 이혼 안 해주고 산다고요.”
그래도 주부로서 최소한의 원칙은 있다. 새벽에 나갔다 저녁이 돼서 집에 오면 남편 먹을 반찬은 꼭 만들어놓는단다. 남편이 반찬투정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지만 그렇게 하는 게 마음이 편하다.
정중하고 예의바르게 자연을 만나다
채집할 때 가방 안에 뭐가 있을까 궁금해 열어봤다.
“물, 카메라, 우산, 비닐, 샬레(실험도구인 납작한 원통형 용기), 가위는 3개 정도 꼭 넣고 다녀요. 작업하다 가위를 떨어뜨려서 찾으려고 보면 뱀이 있다거나 보이지 않은 곳에 떨어져 못찾을 때가 있거든요.”
가위를 여러 개 가지고 다니는 것은 ‘식물에 대한 예의’라고 했다. 잎사귀나 가지를 깨끗하게 잘라주지 않으면 병이 들 수도 있고 끝이 갈라져 보기에도 좋지 않다. 식물을 공부하는 사람들의 기본은 가위를 이용해 가지를 잘라주는 것이란다.
“사람 좋을 대로 하면 안 됩니다. 식물 입장도 생각해봐야죠.”
올해 허운홍씨의 나이는 64세. 적지 않은 나이에 매일 새벽 나방이 될 애벌레 채집을 위해 길을 나선다. 집안일하다 생긴 손가락 관절염에 점점 나빠지는 눈, 매일 걸어 다녀 굳은살 박인 발은 물론이고 어깨 통증도 달고 산 지 오래다. ‘가지에 손만 닿으면 되지’ 싶어 병원에는 가지 않는다. 어디서 오는 사명감일까.
“여섯 시간을 찾아 헤매야 한두 종을 찾는다고 했잖아요? 10년을 이렇게 찾은 것입니다. 만약 다른 누군가가 나방생활사 연구를 한다면 제가 지금까지 했던 것 이상의 시간을 투자해야 하잖아요. 누가 하겠어요. 제가 할 수밖에 없죠. 결과물에 비해 시간이 너무 많이 요구됩니다. 누구든지 하고 싶다면 가르쳐주고 싶지만 돈도 안 되는 것을 누가 하겠어요.”
보물찾기, 퍼즐게임 그리고 컬렉션(?)
요즘도 매일 나방 애벌레를 찾아 곳곳을 돌아다니는 허운홍씨는 이를 두고 ‘보물찾기’라고 표현한다. 숲속을 헤매다 눈앞에 새로운 종의 애벌레가 보이면 날아갈 듯 좋단다. 그 시기가 지나 겨울이 되면 또 다른 재미, ‘퍼즐게임’에 돌입한다.
“겨울에는 동정(생물의 분류학상 소속이나 명칭을 바르게 정하는 일)을 해요. 표본한 것을 쫙 펼쳐놓고 종류를 구분해요. 애벌레 사진 찍어놓은 것과 성충 표본을 보면서 일본 책을 가지고 이름을 찾아요. 밖에 나가는 건 보물찾기, 동정은 퍼즐게임 그리고 모으면 컬렉션이에요. 재밌는 일이 아주 많은 저만의 취미입니다.”
78세가 되면 소속된 학교도 단체도 없지만 나방 아줌마의 멋진 퇴임식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 말에 “2000종 채우면요!” 한마디 외치며 산속으로 걸어갔다.
필자에게 정기적으로 음악회에 초대하는 이가 있다. 보통 20만 원짜리 로열석이다. 몇 명을 데려 와도 좋다는데 늘 혼자 간다. 몇 번은 지인들을 초대하여 갔으나 펑크 내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다. 급한 일이 생겨 못 간다는 데야 할 말이 없다. 어떤 이는 길이 너무 막혀 화가 나서 그냥 집에 돌아간다는 것이었다. 예술의 전당 앞이 늘 교통이 막히는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다. 제 시간에 가 주는 전철이 있는데 왜 굳이 차를 끌고 와서 막힌다고 필자에게 화를 내는지 모를 일이었다. 20만 원짜리 티켓이지만, 공짜라서 사람들이 노 쇼(No Show)를 우습게 안다. 20만 원짜리 초대석을 펑크 내고 나면 필자에게 표를 준 사람에게 미안한 일이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아예 혼자 간다. 가장 확실한 사람은 필자 혼자인 것이다. 필자가 초대해서 간 사람들은 사실 필자에게 표를 준 사람에게 진 빚이다.
자녀의 결혼식을 호화판으로 치르는 사람도 많다. 호텔 결혼식장에서 하객이 1천명이 넘는 대규모 결혼식도 종종 있다. 그 많은 사람들은 다 빚이다. 그 사람들이 청첩장을 보냈을 때 역시 봉투를 들고 가야 하는 것이다. 그 사람들의 자녀 결혼식 뿐 아니라 지계 가족 장례식까지 연락 받으면 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한꺼번에 갚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두고두고 빚을 갚아야 하는 것이다.
식사를 하고 어떤 사람이 식사비를 혼자 냈을 때, 그 당시는 고마운 일이지만, 결국 빚이다. 매번 그 사람에게 얻어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매번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두 번에 한 번은 대접해야 빚을 갚는 것이다.
술집마다 돌아다니며 파인애플을 깎아 한 조각 건네며 팔아달라는 외국인이 있다. 분명히 외국인인데 유창한 한국말로 그런 일을 하는 것을 보면 한국인들의 빚에 대한 심성을 꿰뚫고 있는 것이다. 한 조각 얻어먹으면 그게 다 빚이다. 한번은 그냥 받아먹지만, 다음에 또 와서 한 조각 건네면 파인애플을 사주게 된다. 파인애플이 귀한 과일도 아니고 당장 마트에 가면 사 먹을 수 있지만, 빚진 게 있으니 그 사람이 파는 파인애플을 팔아주는 것이다.
빚이 있다면 두 다리를 똑바로 뻗지 못하고 자는 사람이 충청도 사람이란다. 빚은 곧 스트레스인 것이다. 오늘날 가계 빚이 엄청나서 금리가 조금만 올라도 큰일이라는데 어떻게 빚을 안고 편안히 살아가는지 모르겠다. 사금융을 쓰면 이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금방 감당하지 못할 수준이 된다는데 여전히 사금융은 판을 친다.
더 크게 보면 이제껏 별 고생 없이 이만한 위치에서 노년을 보내게 만들어준 우리 사회에도 빚이 있는 셈이다. 제 딴에는 노력을 했다지만, 운이 좋았을 뿐이다. 부모를 잘 만났거나 인맥, 학맥을 통해 한 때 잘 나간 덕분에 집도 사고 좋은 시절 보낼 수 있었던 것이다. 반면에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 사람들도 다 잘 되었으면 좋을 텐데 여전히 고전하고 있다면 그 사람들에게 미안해야할 일이다. 그래서 해야 할 일들이 사회적 공헌이다.
자칫 하느님 앞에 모두 죄인이듯이 모든 사람들은 빚이 있다는 소리로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결혼식 청첩장처럼 직접적으로 요구 받아서 갚는 빚이 아니라 스스로 알아서 빚을 느긋하게 갚는 행위도 협의적 사회적 공헌이라 볼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