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구 컬렉션계의 대부 혹은 가구 컬렉션계의 1세대. 모두 aA 디자인 뮤지엄 김명한 관장을 지칭하는 수식어다. 그의 컬렉션은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유명하다. 질과 양에서 모두 세계 수준으로 손꼽힐 정도다. 디자인 가구의 컬렉팅은 그에게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진다. 처음엔 단순한 취미로 시작했지만, 새로운 인생을 펼치는 도화선이 됐다. 그 노력의 집약체가 바로 aA 디자인 뮤지엄이다. 그 곳에서 김명한(金明漢·63) 관장을 만났다.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젊은이들이 흔히 말하는 ‘홍대’는 단순히 홍익대학교와 그 앞 거리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신촌과 함께 서울에서 가장 큰 소비의 축을 담당하고 있으면서, 디자인과 출판, 건축 등 다양한 창조물이 샘솟는 곳이다. 이제 지역적으로는 마포구 서교동과 동교동을 넘어 합정동, 창전동에 일부는 서대문구 연남동 일대까지로 그 의미가 확대되기도 한다. 수십 년 전 저잣거리를 축으로 확대된 ‘종로’가 있다면, 지금은 그 역할을 홍대가 해내고 있는 셈이다.
그 홍대의 랜드마크 중에는 aA 디자인 뮤지엄이 있다. 휴일에는 문을 닫고, 오후 5시 전에는 나가야 하는, 으레 생각하는 그런 박물관이 아니다.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밤늦도록 머물 수 있는, 디자인을 손에 쥐고 몸으로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 aA 디자인 뮤지엄이다. 문화를 주도했던 주인공들이 주변으로 밀려나는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현상 속에서도 aA 디자인 뮤지엄은 젊은 디자이너들이 창작을 지속할 수 있는 공간과 영감의 공급처 역할을 하고 있다. 설립자 김 관장은 aA 디자인 뮤지엄의 의의를 이렇게 설명한다.
“개인적으로 홍대에, 젊은이들에게 빚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들을 통해 돈을 벌고 일어설 수 있었으니까. 그래서 그들이 디자인을 느끼고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다들 콘텐츠가 중요하다고 이야기하지만, 사실 그것만큼 중요한 것은 그 콘텐츠를 담을 하드웨어예요. 어린 친구들은 그 하드웨어를 만들 여력이 없으니 그 부분만큼은 기성세대의 책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aA 디자인 뮤지엄은 권위나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젊은이들에게 열려 있는 공간이다. 인터뷰가 진행된 날에도 박물관 공간 한쪽에선 학생들의 전시 준비가 한창이었다. 이뿐만 아니라 그는 한국 디자이너들을 해외에 소개할 여러 가지 수단을 찾고 있고, aA 디자인 뮤지엄과 유사한 상설 전시공간을 유럽에 마련하는 것도 고민 중이라고 했다. 홍대를 지키는 기둥으로 마포 디자인·출판 진흥 지구협의회의 회장을 맡아 서울시와 함께 중소 출판인들의 인프라 개선을 위한 작업을 올해부터 본격 진행할 계획도 갖고 있다.
그의 가구 컬렉션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면 조금 많이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991년 유럽식 레스토랑 ‘아지오’를 열면서 그의 수집은 시작됐다. 그의 공간을 장식할 소품과 가구들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런 그의 노력 때문이었는지 그가 손대는 레스토랑과 카페들은 연이어 성공했다.
“운이 좋았던 시절이었어요. 젊고 순수했고 열정으로 가득한 시기였지요. 똥폼도 잡고 밤새 예술에 대해 이야기했던 시절이었습니다. 당시엔 정원이 있는 레스토랑에 대한 전문가도 없었고, 평론에도 자유로웠던 시절이어서 쉽게 일을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마침 1980년대 후반부터 해외여행 자유화를 통해 외국을 경험한 젊은이들이 그 추억을 공유할 장소가 필요했고, 대표적 여행지인 유럽과 유사한 공간은 그들에게 어필하기에 충분했으니까요.”
그의 공간에 대한 감각과 욕심은 유년 시절의 경험과 맥락을 같이한다. 유복했던 어린 시절 그가 뛰어놀던 정원은 아버지의 정성으로 가득했고, 그가 자란 안동은 미적으로 뛰어난 한옥들이 즐비했기 때문이다.
“어릴 때는 한국전쟁이 막 끝난 시기여서 주택문화라는 것은 찾아보기 어려웠던 시기입니다. 독서와 정원 가꾸는 것 말고는 취미가 없었던 아버님 덕분에 정서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았죠. 디자인 역시 직접 경험하고 체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그의 배경은 ‘경험’을 중시하고, 나누고자 하는 계기가 된다. aA 디자인 뮤지엄이나 제주도에 세운 게스트 하우스 모두 이 맥락에서 출발했다. 수집이 본격화되면서 시작한 것은 공부다.
“유럽의 각국을 다니면서 많이 배웠습니다. 주로 영국과 프랑스, 이탈리아의 경매소들을 많이 다녔죠. 그곳에서 물건을 감정하는 눈을 키우고, 거래 기관과의 신용을 쌓았습니다. 관련 전문서적도 갈 때마다 사들여서 매달 번역해서 읽었고요.”
20년 넘게 진행된 그의 컬렉션은 100여평의 창고 8개를 채울 정도가 됐다. 일본의 업계 관계자가 한국시장 진출을 꿈꾸다 그의 컬렉션을 보고 규모에 깜짝 놀라 포기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다.
“제 수집 스타일은 일본 사람들의 그것과는 조금 다릅니다. 그들이 중요시하는 학술적 가치 말고도 조형적 가치나, 시대적 가치를 갖고 있는 것들도 모았으니까요. 전시만을 고려하는 것이 아니라 라이프 스타일에 맞춘 활용까지 생각하는 것이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죠. 덕분에 컬렉션의 형식이나 아이템들이 다양해졌습니다.”
물론 이런 과정 속에서도 그가 세운 원칙은 철저하게 지켰다. 김 관장 스스로가 정한 약속이다.
“그동안 가구들을 수집하는 과정에서 지켜왔던 원칙이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쓸데없는 경쟁은 피하고, 갖고 있는 능력 안에서만 하자는 것이죠. 기본적으로 수집은 저에겐 사업의 대상이 아니라 취미의 연장선상에 있기 때문에 절대 무리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수집은 3년 전 멈췄다. 그가 아지오나 다른 카페들에서 손을 뗐을 때와 마찬가지로 무 자르듯 그만뒀다. 관리에도 문제가 있었고, 다른 관심사들도 생겨났기 때문이다. 아지오를 그만둘 때도 주위에서 이런저런 만류가 있었지만, 단칼에 실행했던 그다. 지금은 무거운 짐을 벗어던진 것처럼 행복하다고 그는 이야기한다.
수집은 그의 인생 2막의 시작이었지만,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다양하게 확대됐다. 그중 하나가 무크지 ‘캐비닛’과 ‘캐비닛 Jr.’의 출간이다. 캐비닛 창간호는 전 세계 디자이너 20명의 인터뷰를 실었는데, 출간되자마자 업계의 반향을 일으켰다. 외국 기사를 번역한 것이 아닌, 현지에 찾아가 그들과 직접 나눈 이야기와 촬영한 사진을 게재한 잡지는 이전에 없었기 때문이다. 궁금한 사람이 있으면 날아가서 만나봐야 직성이 풀리는 그의 성향이 반영됐다.
또 다른 사업은 그의 디자인 안목과 경험이 집약된 ‘aA 디자인 퍼니처’다. 2011년 론칭해 주목받았던 그의 가구 브랜드 aA 디자인 퍼니처는 최근 경기도 가평에 공방을 열고 새로운 도약을 준비 중이다. 그의 공방은 우리가 생각하는 ‘가구 공장’과는 차이가 크다. 공방이 곧 전시장이 될 수 있는 정갈한 작업환경과 디자이너들이 머물 수 있는 숙소까지 갖추고 있다.
“내 직업에 대한 평가를 상대적 가치로 판단하려 들면 자식에게 내 일을 물려줄 생각을 못 하게 됩니다. 하지만 직업과 일터를 물려주겠다고 생각하면 공간이나 도구 등 모든 것이 달라지죠. 춥거나 덥거나 더럽지 않은, 직원들이 폼나게 일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고 싶었습니다. 위치가 가평인 건 혼자 떨어져 있는 것을 좋아하는 제 성격이 많이 표현된 것이죠.”
그는 이 공방을 통해 디자인 샘플이 탄생되면 소비자들을 고려한 가격을 정해 시장에 내놓을 생각이다.
최근 제주에 세운 게스트 하우스 ‘Jeju in aA’는 다시 한 번 그가 주목받는 계기가 됐다. 워낙 제주가 좋았던 그는 지인들과 편하게 지낼 수 있는 집이 하나 있었으면 했고, 수집한 가구들로 공간을 근사하게 꾸며놓고 보니 많은 사람과 그 경험을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그 목적에 맞게 비용도 저렴하게 책정했다. 주말 가격도 없고, 성수기 가격도 따로 없다. 1년 365일 같은 가격이다. 바가지 상혼이 가득했던 크리스마스나 연말에도 평소 가격을 유지했던 ‘아지오 아저씨’ 김 관장의 고집이다.
“게스트 하우스를 사람들에게 개방하기로 결정하면서 이름을 지었는데, 두 채는 제주 방언으로 게으름뱅이를 뜻하는 ‘간세다리’와 영어로 빈둥거린다는 뜻의 ‘아이들(idle)’입니다. 다른 한 채는 제 손녀의 이름이자 순우리말로 바다를 뜻하는 ‘아라’고요. 이름처럼 젊은이들이 여유를 즐겼으면 하는 마음을 담았습니다.“
이곳에서 조금 떨어진, 성산일출봉 근처에는 미술관을 세울 계획이다. 예기치 않게 제주 제2공항이 근처로 발표되는 바람에 오해도 받고, 계획에 차질이 생겼지만 할 수 있는 만큼 하려고 한다.
그는 두 번째 인생을 준비하는 또래의 중년들에게 미루지 말고 바로 실행할 것을 주문한다.
“돈에 얽매이지 말라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돈은 절대 가치가 될 수 없어요. 대신 자신에 대한 가치, 신념이 있어야 해요. 저는 생일을 챙겨본 적이 없습니다. 매일을 태어난 날이라고 생각하고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농부가 농사를 하루라도 거르거나 미룰 수 없는 것처럼 인생도 똑같다고 봐요. 그렇게 인생을 준비해나가면 어떨까 싶습니다.”
시계의 역사는 인류 문명의 발전과 함께 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초의 시계는 자연이라는 말이 있을 만큼 해가 뜨고 지고 달이 차고 기울고 조수간만의 차이가 생기는 자연의 순행에서 인간은 시간이라는 개념과 함께 이를 물리적으로 표시하는 시계라는 도구를 발명하기에 이른 것이다.
글 장세훈(張世訓) 타임포럼 시계 칼럼니스트
학계에서는 기원전 3000년 전 고대 이집트의 해시계를 시계의 기원으로 보고 있으며, 영국의 전설적인 거석기념물인 스톤헨지 또한 실제 용도는 해시계였다는 주장이 지배적이다. 한편 고대 그리스인들은 날씨가 흐리거나 야간에도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클렙시드라라는 물시계를 발명했고, 1434년 장영실이 세종대왕의 명을 받아 완성한 자격루 또한 물시계의 작동 원리를 응용 발전시킨 것이었다. 이밖에도 모래로 시간의 흐름을 확인할 수 있는 모래시계와 기름의 연소량을 시간 계측에 활용한 램프시계도 중세시대에까지 널리 사용되었다.
시계의 역사는 이토록 오래되었지만, 근대적인 개념의 기계식 시계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건 17세기 중반부터다. 물리학 및 관측천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기계식 시계의 이론적 토대인 진자의 등시성 원리를 16세기 말에 발견한 것을 기점으로, 네덜란드 태생의 물리학자 크리스티안 호이겐스는 이를 최초로 시계에 적용해 시계 제작의 패러다임을 바꾸었다. 그가 1675년 개발한 진자시계는 후대의 과학자들과 시계 제작자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고, 그들의 손을 거치며 점차 다양한 종류의 시계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18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는 탁상시계와 휴대가 간편한 회중시계가 유럽의 귀족과 부유층을 중심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이러한 현상은 한편으로는 시계가 인류의 생활 깊숙이 뿌리내렸음을 의미했다. 물론 그 시절만 하더라도 휴대용 시계는 일반 서민들은 쉽게 볼 수조차 없는 사치품이었다. 유명 시계 제작자들은 주로 왕가나 귀족들을 위해서만 소량씩 주문제작방식으로 시계를 제작했고, 긴 체인을 연결해 양복 포켓 안에서 수시로 꺼내 볼 수 있는 회중시계는 특권층의 권력을 과시하는 수단이 되면서 귀금속 케이스로 제작한 시계들이 각광을 받았다.
한편 회중시계는 기술적으로도 당대 시계제작자들의 도전정신을 자극했다. 크기가 큰 추시계류와 달리 회중시계는 부품들의 사이즈부터 매우 작고 더욱 정밀한 가공이 요구됐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마이크론 단위까지 정확하게 측정, 절삭할 수 있는 기계들이 앙트완 르쿨트르 등 몇몇 선구적인 인물들에 의해 19세기 초반에 개발되었다.
프랑스에서 주로 활동한 스위스 태생의 시계 제작자 아브라함 루이 브레게는 18세기에 등장한 가장 중요한 시계 제작자이자 시계 역사상 어쩌면 가장 영향력 있는 발명가 중 하나로 손꼽힌다. 최초의 셀프와인딩(로터의 회전에 의해 자동으로 태엽이 감기는 형태의) 시계였던 퍼페추엘(1780년)을 비롯해, 훗날 브레게의 상징이 된 정교한 패턴의 기요셰 다이얼(1786년)과 파랗게 열처리를 한 브레게 핸즈(1783년), 충격 흡수장치인 파라슈트(1790년), 브레게 헤어스프링으로 불리는 탄성과 내부식성이 탁월한 밸런스 스프링(1795년), 그리고 지지대 역할을 하는 케이지 안에 끊임없이 밸런스 휠을 회전시켜 중력을 상쇄하는 혁신적인 설계의 투르비용(1801년)에 이르기까지 현대 기계식 시계 제조의 기틀이 되는 여러 중요한 발명들이 브레게 한 사람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브레게는 회중시계 시대를 앞당긴 인물이면서 훗날 손목시계의 등장까지 예견한 진정한 의미의 천재였다.
20세기로 접어들면서 시계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변화가 가시화된다. 바로 회중시계에서 손목시계로의 세대교체가 그것이다. 최초의 손목시계에 관해서는 여전히 의견이 분분하지만, 1904년 루이 까르띠에가 친구인 조종사 산토스 뒤몽을 위해 제작한 까르띠에의 ‘산토스’를 최초의 현대적인 손목시계로 꼽는다. 케이스 모서리를 둥글린 사각에 가까운 케이스, 두툼한 러그, 착용감을 고려한 아담한 사이즈는 산토스를 당시의 어떠한 시계와도 차별화시켰다. 까르띠에는 또한 제1차 세계대전에 투입된 프랑스의 전투 장갑차에서 착안한 아이코닉한 사각시계 ‘탱크’를 1917년 탄생시켜 일찍이 손목시계 제조사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이후 IWC, 론진, 호이어(태그호이어의 전신) 등 여러 제조사들이 손목시계 제조에 발 빠르게 합류했다. 특히 롤렉스는 세계 최초의 방수 케이스인 오이스터(1926년)를 비롯해, 오토매틱 무브먼트인 퍼페추얼(1931년), 자정 무렵 날짜창이 자동으로 변경되는 시계 데이트저스트(1945년), 최초의 다이버 시계 서브마리너(1953년) 등 몇몇 선구적인 발명으로 손목시계 시대를 앞당긴 동시에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시계 브랜드로 거듭나게 된다.
손목시계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군용시계로 인기를 모으면서 대중적으로 더욱 많이 알려지게 됐다. 종전 직후인 1950년대에는 이미 스위스 시계업계가 주류로 군림했다. 1960년대 말까지 스위스 시계 산업은 전례 없는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했고 시계는 더 이상 사회 고위층만의 전유물이 아닌 대중도 향유할 수 있는 수준으로 내려왔다. 하지만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본의 세이코를 필두로 한 쿼츠시계의 광풍에 밀려 스위스 시계 산업은 1990년대 초까지 기나긴 암흑기에 접어들게 된다. 기계식 시계와 달리 수정자와 배터리로 작동하는 쿼츠시계는 적은 제조비용으로 훨씬 더 많은 시계를 생산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 특유의 정확함으로 소비자들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1990년대에는 쿼츠시계에 싫증을 느낀 사람들이 기계식 시계를 찾기 시작했고 2000년대 접어들면서 기계식은 쿼츠와 사이좋게 시장을 양분할 만큼 다시 예전의 선호도를 되찾는다. 각종 컴퓨터와 스마트폰이 일상의 주축이 된 요즘 수백 년 방식 그대로 제작되는 기계식 시계가 다시 높은 인기를 누리는 현상은 어찌 보면 난센스처럼 보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기계식 시계를 선호하는 이들이 많다는 것은 쿼츠시계에서는 느낄 수 없는 기계식 시계만의 예스러운 감성과 장인정신, 그리고 예술성 때문이 아닐까 싶다.
좋은 시계란 무엇인가? 명품 시계에도 트렌드가 존재하는가?
좋은 시계의 기준이란 어찌 보면 상대적이고 자의적인 개념이다. 기술적으로나 미적으로 그리 훌륭하지 않은 시계일지라도 한 개인의 관점에선 충분히 최고의 시계로 비칠 수 있다. 또한 소중한 추억이 담긴 시계라면 가격대를 떠나서 그 자체로 특별한 가치를 갖게 마련이다. 특정 시계에 ‘명품’이라는 수식을 붙이는 것 또한 조심스러울 때가 많다. 그럼에도 현실에는 주저 없이 명품으로 분류할 수 있는 시계들이 분명 존재한다. 단지 고가라서, 다이아몬드로 화려하게 장식을 해서, 누구나 알 만한 유명 브랜드라서 꼭 명품이 아니라, 정제된 디자인과 오래 봐도 질리지 않을 클래식한 다이얼, 우수한 설계의 무브먼트와 같은 요소들이 명품 시계를 규정하게 한다.
세상 돌아가는 순리가 그렇듯 명품 시계 시장에도 소위 말하는 트렌드라는 게 있다. 가령 2000년대 초·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사이즈가 크고 대담한 디자인의 시계들이 세계적인 인기를 누렸다. 당시만 해도 신생 브랜드였던 위블로, 벨앤로스 등이 이러한 트렌드에 힘입어 시계 업계에 완전히 자리를 잡는가 하면, 전통적으로 빅사이즈 시계를 브랜드의 개성처럼 강조해온 IWC, 파네라이 같은 제조사들도 엄청난 혜택을 입었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 명품 시계 업계의 트렌드는 과거로의 회귀로 규정지을 수 있다. 빅사이즈 트렌드에 대한 반발로 시계 사이즈를 다시 줄이기 시작한 제조사들이 늘어났으며, 지나치게 화려하고 스포티한 디자인 대신 단순하면서 고전적인 디자인이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뿐만 아니라 아예 수십 년 전의 헤리티지 모델을 현대적으로 복각하는 것도 업계의 주류로 자리를 잡았다. 반면 블랙, 화이트 다이얼 일색인 고급 시계 업계에 최근 들어서는 블루, 그레이, 브라운, 옐로 등 다양한 컬러가 도입되고 있으며, 단순히 색만 입히는 차원이 아니라 기요셰, 그랑푸 에나멜링, 핸드 페인팅 등 다양한 전통 다이얼 제작 기법까지 적용해 주목을 받고 있다.
특히 바쉐론 콘스탄틴, 파텍 필립, 까르띠에, 반클리프 아펠, 예거 르쿨트르, 율리스 나르당, 샤넬 같은 제조사들은 자체적으로 양성한 전문 에나멜러와 인그레이빙 장인, 주얼리 세팅 장인들을 활용해 다이얼에 예술성을 가미하는 ‘메티에 다르(Metiers d'Art)’ 시계들로 고급 시계 제조의 또 다른 예술적인 경향을 선도하고 있다.
시계와 사회성
시계를 순수하게 취미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사회적 신분과 지위를 과시하는 수단으로 여기는 이도 적지 않다.
소위 명품으로 분류되는 고급 시계 소비자들 중에는 해당 시계에 담긴 진정한 가치나 스토리텔링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해당 브랜드가 사회적으로 환기하는 아우라와 이름값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다.
고급 시계가 사회 통념상 일반 소비재가 아닌 사치재로 통하기 때문에, 종종 신문의 사회면이나 방송에서는 부정부패한 방식으로 돈을 축적한 이들이 가진 재산을 은닉하기 위해 혹은 불법 로비를 위해 고급 시계를 구입하고 선물했다는 식의 가십성 기사도 종종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의 시계가 어찌 수천, 수억 원에 달할 정도로 고가일 수 있는지에 관해 묻기에 앞서 우리는 해당 시계가 지닌 본연의 가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시계 칼럼니스트로서 스위스 주요 시계 브랜드들의 시계가 제작되는 매뉴팩처(공장)를 방문할 기회가 있는데, 매뉴팩처 투어를 거치는 동안 가장 먼저 드는 생각 중 하나는 이토록 복잡하고 정교한 과정을 거쳐 제작된 시계가 비싸지 않을 이유를 발견하기도 힘들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의 고급 시계에 지불하는 금액 속에는 해당 브랜드의 오랜 역사와 전통, 제조 노하우가 담겨 있는 데다, 기계식 시계의 경우 수백 개의 작은 부품들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설계되어 조립되고 나아가 각각의 부품들을 사람 손으로 일일이 다듬고 장식을 하기 때문에 주변의 흔한 대량생산형 저가 시계들과는 확연히 다른 프로세스로 완성됨을 알 수 있다. 오랜 경력과 출중한 실력을 가진 시계제작자를 가리켜 ‘마스터(장인)’라고 칭하는 것도 고급 시계 제조의 배경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시계는 분명 재화만 있다면 사고팔 수 있는 물건이지만, 때로는 돈이 있어도 살 수 없는 시계들도 있다. 하이엔드 시계 제조사들 중에는 시계를 단지 판매 목적이 아닌 브랜드가 지닌 기술력과 추구하는 가치를 최대치로 구현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실험적인 시계를 제작하는 곳도 있다. 까르띠에가 2009년에 선보인 유니크 피스 ‘아이디 원(ID One)’과 2012년에 발표한 ‘아이디 투(ID Two)’가 그 대표적인 예로서, 시계 제조 방식에 새로운 혁신을 도모하고 궁극적으로는 더욱 완벽에 가까운 시계를 만들겠다는 의지를 반영한 결과라 할 수 있다.
까르띠에처럼 시계 제조 기술을 극한으로 밀어붙인 예가 있는가 하면, 바쉐론 콘스탄틴이나 반클리프 아펠처럼 최상의 예술적인 시계를 완성하기 위해 전통 공예 장인이 최소 2주에서 길게는 몇 달간에 걸친 수작업으로 완성한 유니크 피스들도 있다.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부 시계애호가 및 수집가들 사이에서는 열렬한 지지를 받는 MB&F, 그뤼벨 포시, 로랑 페리에 등의 독립 시계브랜드들과 필립 듀포, 카리 보틸라이넨과 같은 존경받는 독립 시계 제작자들의 시계도 매우 한정된 수량만 제작되기 때문에 돈이 있어도 구하기 어려운 시계로 손꼽힌다. 이러한 귀한 시계들은 차후 소더비나 크리스티 등 세계 시계 경매에 출품돼 애초의 금액대를 훨씬 상회하는 경매가에 낙찰돼 화제가 되기도 한다. 예술 작품도 마찬가지겠지만, 흔히 볼 수 없어 희소하고 기술력과 예술적 표현의 한계에 도전한 마스터피스급 작품들은 반드시 그 가치를 인정받게 마련이다. 고급 기계식 시계가 세계 주요 경매에 단골손님이 된 것도 하나의 완성도 높은 시계는 예술품과 동등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러한 귀한 시계를 향유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떤 부류일까? 물론 기본적으로 부(富)도 따라야겠지만, 단지 부유해서만은 가질 수 없는 탁월한 감식안과 시계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열정, 그리고 좋은 시계를 가치에 맞게 즐길 수 있는 애티튜드(자세)를 지닌 자야말로 진정한 주인이 아닐까 싶다.
>> 장세훈 타임포럼 시계 칼럼니스트
타임포럼 주 필진으로서 시계 각 분야의 뉴스 및 심층 리뷰와 칼럼을 담당하고 있으며, 매년 바젤월드, SIHH, 워치스 앤 원더스 등 주요 시계 박람회를 취재해 기사화하고 있다. 또한 일본의 시계 전문지 스페셜을 번역 보완 출간한 를 감수 및 추가 저술했으며, 주요 시계 제조사와 대표작을 선별한 e-북 를 저술했다.
>> 타임포럼 소개
2006년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시계에 관한 한국에서 가장 큰 규모의 커뮤니티로 성장했다. 10만 명에 달하는 회원들이 직접 시계 구입 후기와 착용 소감, 다양한 질문과 답변 등을 주고받음으로써 시계에 관한 국내에서 가장 독보적이고 방대한 정보 인프라를 구축하고 있다.
홈페이지: http://www.timeforum.co.kr
‘빠빠라빠빠 빠빠빠 달려라 달려 로보트야. 날아라 날아라 태권브이’ 이제는 익숙한 이 멜로디. 1970년대 어린이들의 가슴에 승리의 브이를 그려 넣었다. 이제는 그 어린이들이 모두 성인이 돼 또 다른 어린이들의 아버지,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태권브이를 찾는다. 당시에는 우상, 이제는 추억이 돼 버린 태권브이. 그 역사적인 만화 뒤에는 감독 김청기(金靑基·74)가 있었다. 일흔을 넘긴 나이지만 아직까지 왕성하다. 그에게 욕심이 아닌 꿈 그리고 한국 만화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본다.
내년이면 벌써 불혹이다. 사람이냐고? 그게… 사람은 아니고 키가 장장 56m에 달하는 로봇이다. 그러니까 올해 39세. 사람으로 따지면 아직 청춘 그 자체지만, 로봇들 사이에서는 원로 스타이자 대선배님인 ‘로보트 태권V’다.
지난 7월 24일은 태권브이의 39번째 생일이었다. 서울 피규어 뮤지엄W에서는 태권브이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자리를 마련했는데, 1층 전시장을 태권브이 캐릭터로 가득 채웠다. 그런데 점점 재미있는 상황이 벌어졌다. 태권브이가 처음 나왔을 1970년대에는 상상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태권브이의 피규어와 영화 필름을 들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성인들(요즘은 ‘키덜트’라 부르는)도 보이고, 아들의 손을 잡고 온 40대 아버지의 모습도 보인다. 이들 모두 1970년대, 그 시절엔 태권브이에서 눈을 떼지 못했던 어린이들이었으리라. 이들은 한 사람을 기다리며 얼굴에 드러나는 기대감과 설렘을 감추지 못했다.
‘나는 화백이오’라고 온 세상 사람들에게 표현을 하는 듯 베레모를 쓴 노신사가 등장하자 이들의 시선이 그에게 쏠린다. 바로 ‘태권브이의 아버지’ 김청기 감독이다. 들뜬 것은 그들뿐만 아니었다. 김 감독도 들뜬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말 기분이 너무 좋아요. 이렇게 제 작품을 기억해주고 아직까지 찾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말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 오니 제가 다시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 창작은 늙지 않는다
부천에 있는 작업실에서 만난 김 감독은 색다른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수묵화가 바로 그것. 그런데 특이한 것은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수묵화 사이로 태권브이가 의연하게 솟아 있는 점이다. 고전과 현대의 조화. 일흔 넷의 나이에도 트렌드에 뒤처지지 않는 감각은 바로 꾸준한 창작 활동에 있었다.
“창작을 하는 것은 유일하게 제가 젊다고 느끼게 해주는 순간이에요. 창작과 생각이라는 것은 언제든지 할 수 있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더 좋은 창작물을 만들기 위해 노력합니다. 창작이란 경험과 실패를 딛고 일어나야 멋있고 참신한 것이 나오니 말입니다. 요즘은 상식을 뛰어넘는 엉뚱함이 있어야 합니다. 고정관념에 사로잡히면 절대로 눈에 띄지 않습니다.”
그래서일까. 만화 감독이라는 세계에서 도태되지 않기 위한 노력은 끝이 없다. 트렌드와 시대 흐름을 분석하는 데 시간을 아끼지 않는다. TV와 드라마, 책 등을 꾸준히 보면서 ‘왜 인기가 많은지’ 또는 ‘어떤 매력으로 대중에게 다가가는지’에 대한 분석 말이다. 이 모든 것들이 대중의 요구를 파악해 그에 맞는 창작을 하는 밑거름이 되기 때문이다.
“수묵화도 새로운 창작을 하는 재미있는 일 중 하나예요. 하지만 제 꿈은 따로 있죠. 어린이뿐만 아니라 남녀노소가 모두 즐길 수 있는 실사애니메이션 합성 영화를 만드는 것이에요. 우리나라에서도 디즈니의 같은 영화를 만드는 것이 목표입니다.”
◇ 태권브이도 벌써 불혹이야
“저는 태권브이를 기획할 때 이렇게까지 재평가를 받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어요. 재평가 받고 새롭게 만들어지는 것을 보면 항상 뿌듯합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더 잘 만들 걸 그랬네요.”
1960년 만화가로 입문한 김 감독. 1976년 ‘로보트 태권브이’가 탄생하기 전까지 그는 TV 광고나 프로그램 타이틀 로고를 그리곤 했다. 그러나 그가 꿨던 꿈은 그것이 아니었다. 장편 만화를 그리는 것. 이나 같은 일본 만화가 당시 어린이들을 사로잡던 시절. 대한민국 만화감독 김청기는 위기감과 절박함을 느꼈다. 일본의 문화에 우리나라 문화가 잠식될 수 있다는 우려에서였다.
그 시절 김 감독이 기획했던 태권브이는 그처럼 대한민국 만화 감독으로서의 자존심이 달린 문제였다. 그렇게 태어난 태권브이는 일본 만화에 빼앗겼던 대한민국 만화의 자존심을 회복하는 데 초석이 됐다. 이렇게 감독의 혼과 작가정신이 담긴 태권브이에 대한 반응이 움트기 시작하면서,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생겨났다. 밤낮없이 태권브이 작업에 몰두하던 시절이었다. 피로가 몰려와 실수로 주인공 훈이의 얼굴을 약간 찌그러지게 그린 것이다. 작은 선의 변화도 실제 만화에서는 윤곽선이 크게 보이기 때문에 꽤나 큰 실수였다. 그런데 이런 단순한 실수도 대중은 심오하게 해석했다.
“당시 피곤이 몰려와 실수를 한 것이었는데, 혹자는 ‘훈이의 얼굴이 찌그러진 것은 작가의 심오한 의도가 들어 있는 것’이라고 해석하려고 하더라고요. 이제야 고백합니다만 그것은 단순한 실수였습니다. 하하.”
◇ 1970년대와 현재
김 감독은 1970년도를 돌아보면 어찌 만화를 그렸나 싶다. 요즘은 케이블TV를 통해서 수많은 만화영화를 볼 수 있지만, 그 당시에는 TV조차 보급이 많이 안 됐던 시기 아닌가. 또, 그 당시 부모들의 인식은 ‘만화영화는 아이들 공부에 방해가 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만화가는 사회적으로 지탄의 대상이었다. 김 감독은 그때 회의감 때문에 펜을 놓고 싶었다고 술회했다. 하지만 40년이나 지난 지금. 그 어린이들이 한 아이의 부모님이 됐다. 김청기 만화를 향유했던 그들은 이제 아이들의 손을 잡고, 태권브이가 있는 곳을 향한다.
“그 당시 어린이들을 생각하면 참으로 불쌍해요. 이렇다 할 문화 콘텐츠가 전무했으니까요. 그런데 이제는 그 어린이들이 커서 태권브이를 보는 것을 넘어 캐릭터까지 구매를 하고 있어요. 정말 감회가 새롭습니다.”
◇ 멈추지 않는 도전, 그리고 로봇
김 감독은 자신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준비를 차근차근 해나가고 있다. 첨단 기술을 사용해 완성도 높은 실사애니메이션 합성 영화를 만드는 것이다.
김 감독은 이런 영화를 만들기 위한 인프라가 부족했던 1980년대 실사애니메이션 합성 영화의 시초격인 를 제작한 경험이 있어 자신감도 넘친다. 아직 가제지만 제목도 정해놓았다. ‘RG로봇’이 바로 그것이다. 그는 이 영화에 거는 기대가 상당하다. , 등 성인들도 좋아하는 일본 만화가 전 세계를 강타하는 요즘. 한국에서도 어린이에게만 국한된 영화가 아닌 성인도 좋아하는 만화 영화를 만들어 보겠다는 심산이다.
“사실 우리나라의 만화영화는 너무 어린이들에게 편중돼 있는 실정입니다. 이제는 그것을 넘어서야 합니다. 타깃을 조금 더 다양화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내년 여름 개봉을 목표로 ‘RG로봇’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저는 시나리오와 기획, 스토리보드 구성을 맡고 있죠.”
김 감독의 욕심은 끝이 없다. 그러나 만화에 대한 욕심이 열정으로 보이는 것은 김 감독의 깊은 고민이 그 꿈에 비치기 때문일 것이다.
베이비붐세대의 맏형, 1955년생. 그들은 어떻게 살아왔으며 모든 것이 격변하는 2000년대를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그들의 신념과 가치관, 그리고 맏형으로서 지탱할 수 있는 원동력은 무엇일까? 1955년생의 대표주자를 만나 그들의 삶과 미래를 파악해보기 위해, 먼저 그 첫 주자로 진수희 前 보건복지부 장관을 만나봤다. 새누리당의 브레인인 여의도연구소 소장으로서 17, 18대 국회의원을 역임하며 NGO시민단체 선정 국정감사 우수의원에 6년 연속 자리매김한 그녀는 제48대 보건복지부 장관까지 거치면서 자신의 길을 탄탄히 쌓은 1955년생 대표주자다. 그녀가 말하는 삶과 미래의 이야기.
사진 최유진 기자 strongman55@etoday.co.kr
오랜만에 다시 보게 된 진수희 전 장관의 모습에 조금 놀랐다. 그녀가 과거에 공직에 있었을 때, 항상 정장을 반듯하게 입고 어딘가 경직된 모습으로 사안에 대해 얘기하는 모습이 아직도 인상 깊게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선글라스를 낀 채 캐주얼하게 옷을 입고 정동극장에서 만난 그녀의 모습은 한층 자유롭고 부드러워 보였다. 정치에서 물러난 후 뭔가 달라진 것일까? 영화광이기도 한 그녀는 얼마 전 개봉한 을 보고 오는 길이었다.
“제 별명 알푼수(알면 알수록 푼수)에요”
“요즘은 조용히 지내는 편이에요. 주로 중고등학교 오래된 4인방 단짝 친구들과 만나며 시간을 보내고 있죠. 희한한 게, 이 친구들과 점점 가까워지는 느낌이에요. 10년 전만 해도 만나면 뭔가 미묘하고 서로에 대해 완전히 열지 못한다는 느낌이 있었는데 지금은 모든 걸 털어놓고 얘기하는 사이가 됐죠. 자연스럽게 그리 되더라구요.”
시간이 흐르면서 달라졌다는 건 그런 생활적인 면도 있을 것이다. 예전에 만났을 때보다 지금이 훨씬 부드러워졌다고 말하자 웃으며 대답했다.
“언론을 통해서 절 보면 날카롭고 차갑다고 하지만 직접 만나면 푼수끼도 있다고 하고 그래
요. 제 별명이 알푼수(알면 알수록 푼수)거든요.”(웃음)
어렸을 때부터의 꿈, 기자
1955년 생, 진 전 장관은 대전에서 7남매의 여섯 째, 딸 중에선 막내딸로 태어났다. 중학교, 고등학교 때 서울을 가고 싶었지만 이미 그녀의 형제자매들이 모두 서울로 간 상황이어서, 아버지가 다 보낼 수 없다 하여 대전에서 계속 공부해야 했다. 그러나 대학교는 어쨌든 서울로 가야 할 상황이 됐고, 대개 여자들은 이화여자대학교를 가는 걸 목표로 삼았지만 그녀는 연세대학교를 선택했다.
“공부는 반에서 한 5등 내외였어요. 우리 때 대학 진학률은 높지 않아서, 고3 때 부지런히 공부하면 대학 갈 수 있었거든요. 그런데 담임 입장에서는 연세대를 간 선배가 없어서 연세대에 나를 지원한다 해도 갈 수 있을지 안 될지 확신이 없어서 안 써주려고 했어요. 그래도
난 바락바락 가겠다 하여 마침내 갈 수 있었죠.”
연세대에서 그녀가 선택한 학과는 사회학과였다. 어렸을 적부터 기자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기자가 되어 사회의 부조리를 없애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곤 했다. 그러나 그녀는 연구원, 교수라는 연구직을 거쳐 국회의원, 장관의 길을 걷게 됐다. 그녀의 삶은 자
신이 바라는 걸 못 이뤘다고 할 수 있는 걸까?
성공한 삶의 기준은 아이들의 눈
“사실 제 삶이 기자가 되고 싶다는 꿈과 비슷한 행보였지 않았나 싶어요. 기자를 꿈꿨던 것과 삶의 커리어가 비슷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살면서 제가 하고 싶었던 걸 하려고 노력했다고 판단해요. 성공이란 표현까지 쓰긴 그렇지만.”
그녀는 삶의 성공 기준을 돈을 많이 벌고 무언가를 물려주려고 하고 그런 게 아니라 ‘우리 아이들에게 엄마라는 사람이 어떻게 기억되느냐’가 성공의 기준이라고 밝혔다. 자신이 판단하는 게 아니라 자신을 보는 아이들이 판단하는 게 더 옳다는 것이다.
“제가 판단이 흐려질 때면 그런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아이들이 나를 보며 바르게 살려고 하게 만들고자 하는 걸. 제 자식들이 엄마처럼 살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건 싫었어요.”
그녀는 자신이 치열하게 살았다는 말을 듣기도 하지만 순간순간 열심히 산 것뿐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그 ‘열심히’라는 것에는 모종의 자기반성적 측면이 꾸준히 따라다니고 있었다. 정치인이라면 수없이 내놓는 도서 커리어에서도, 그녀는 지금껏 단 한 권의 책만을 썼을
뿐이었다. 장관직을 수행한 이후 내놓은 가 그것이다.
“당시에는 복지 차원에서 매우 중요한 시기였어요. 그래서 복지에 대한 고민을 담은 책을 내놓을 필요가 있었죠. 사람들에게 읽히지 않을 책은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부끄럽거든.”
열심히 살았다는 그녀의 말은 돌아가고 싶은 시절이 있느냐는 질문에 대한 정직한 답으로도 확인할 수 있었다.
“돌아가고 싶은 시절? 별로 없는데…, 제가 다니던 때는 툭하면 휴강에 휴교에 서슬퍼런 시절이라 대학 4년간 공부를 잘 못했던 거 같아서 돌아간다면 그 시절로 가고 싶어요. 굳이 꼽자면 여행 많이 가고 싶다는 생각 들고.”
74학번 대학생 진수희에 물었다. 그녀는 한달 2만~3만원을 주는 입주과외를 하는 등 과외아르바이트를 해야 하는 가난한 고학생이었다고 회고했다. “입주과외는 대학생이 과외 학생의 집에 상주하면서 학습과 생활 전반을 살펴주는 방식이지요. 1970년대에는 대학생 수가 적었고 마땅한 사교육 인프라도 구축되어 있지 않던 터, 주로 정부의 고위 관료나 기업가들이 이런 식으로 대학생을 고용해 자녀들을 교육시켰던 시절이었습니다.”
아직 자신의 집을 갖지 않은 그녀는 집 외에 소유하고 싶은 것에 대해 묻자 ‘내 일, 내 시간’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쯤되면 진 전 장관의 삶에 대한 애착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지 않을까.
곡절 속에 키워온 어울림과 개척정신 그녀의 삶은 일견 순탄했던 코스로 보인다. 그러나 대
학생 시절엔 아버지가 사업 사기로 인해 집안이 몰락했고 그로 인해 경제적인 고생에 시달려야 했다. 1955년생들이 이후의 격동하는 시대 속에서 겪어야 했던 곡절 또한 그녀에게 어김없이 찾아왔던 것이다.
“1955년생의 특징이라면, 다형제들이 많다는 걸 들 수 있겠네요. 그리고 시골 사람들이라는 것. 장·단점이 있는데, 장점이 많다고 생각해요. 우선 형제자매들이 많은 가족 안에서 자라는 게 좋아요. 독선적이지 않을 수 있고 서로 어울릴 수 있는 방법도 알게 되고. 그리고 우리 부모 세대가 어려운 세대다보니 각자 알아서 커야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자율성과 개척정신,절실함을 갖게 됐죠. 뭔가 이뤄야 한다는 마음을 품을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어요.”
그녀는 요즘 세대는 부모들이 여유가 있다 보니 절실함과 자율성이 다소 약하다고 지적했다. 잘 살아 보겠다는 치열함과 절박함의 원초적인 힘이 사회에 더 기여한다는 자부심. 그 자부심에서 1955년생답다는 증거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못 이룬 꿈 완성시키고 싶어
진 전 장관은 앞으로 대학교에서의 강의는 3년 정도 더할 예정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뒤로, 다시금 자신의 중심을 여의도로 옮기고 싶다는 생각을 밝혔다.
“국회의원을 두 번 하면서 정말 하고 싶고 해야 했던 것들 중 못한 것들이 있습니다. 너무 큰 얘기일 수도 있겠지만, 정치를 바꾸는 일을 좀 하고 싶어요. 초선 재선일 때는 뭣 모르고 분위기에 휩싸이는 정치를 했었어요. 우리 정치가 욕을 먹을 때 저도 그 일원이었던 게 부끄럽기도 하고 죄송스럽기도 하고. 세 번째 기회가 온다면 뭔가 더욱 의미 있는 기여를 하고 싶다는 욕심이 있어요.”
그녀는 2012년 총선 때는 공천 과정에서의 불공정함으로 인해 기회를 가질 수 없었다고 말했다. 민심의 선택을 받지 못한 거였다면 억울하지 않겠지만 그렇지 않았다는 것. 만약 다시 정치의 기회가 온다고 했을 때, 그녀는 다시 복지를 파고들 것이라고 밝혔다.
“정책적으로는 고령화와 저출산 등 복지 쪽에 여전히 관심이 많아요. 특히 보건복지부 장관을 하면서 통계 수치 두 개가 저를 괴롭혔어요. 바로 저출산율과 노인자살률이었죠. 그런 데다 고령화는 너무 빠르게 진행되고 있으니….”
그녀 개인적으로, 다시금 보다 넓은 자리로 가고자 하는 사명감이 확고한 것처럼 보였다.
“이제 제 아이들은 자기들이 알아서 다 커 갈 때니까, 제삶 자체가 중요한 때가 온 거 같아요. 제가 오랫동안 있었던 영역에서의 마지막 도전을 통해서 사회적으로 기여를 하고 싶습니다.”
어째서 1955년생인가? 지금 1955년생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베이비붐 세대의 맏형 격이기 때문이다. 1955년은 전쟁이 끝나고 인구가 본격적으로 팽창하기 시작한 해였다. 이들은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되던 1962년에 학교에 입학면서 사회와의 만남을 시작했다. 이후 군사정권의 폭압이 극심해지던 1970년대에 20대를, 산업 현장의 역군이 되어 곳곳을 누비던 1980년대에 30대를, IMF체제의 가혹함을 가장으로서 부딪쳐야 했던 1990년대에 40대 시절을 보낸 1955년생의 삶은 한국 현대사의 가장 치열했던 시기를 가장 치열하게 맞섰던 모델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한국사회의 무게중심이 된 1955년생들이 겪어야 했던 삶의 궤적.
우리나라 전체 인구의 15% 가까이 되는 거대 인구집단이기도 한 1955년생은 720만 명 베이비부머 중에 65만 명을 차지하고 있다. 그들은 이미 학계와 문화예술계에 거대한 집단으로 포진한 것은 물론, 대기업의 전문경영인으로도 그 목록을 채우고 있는 중이다.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신동빈 롯데 부회장, 박용만 두산그룹 회장, 소설가 양귀자, 가수 하춘화, 탤런트 홍요섭, 김기문 중소기업중앙회장, 담철곤 오리온 회장, 유경선 유진그룹 회장, 최경환 경제부총리, 김창수 삼성생명 사장 등등. 그들이 태어난 1955년은 아직 한국사회가 전쟁의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때였다. 물론 전쟁이 끝났다고 하는 사실에서 오는 희망이 있었기에 베이비부머들은 탄생할 수 있었다. 그러나 1인당 국민소득이 고작 65달러였던 생활은 가혹할 수밖에 없었고 아이들은 ‘전쟁으로 인해 무너진 가족을 세우려는’ 부모 세대의 본능에 의해 태어나던 시절이었다.
#따뜻했던 도시락의 추억
1960년대 초는 혁명이다 쿠데타다 하며 불안했던 시대였다. 하지만 1955년생들이 그게 어떤 의미인지 깨닫는 건 보다 머리가 굵어져야 가능할 일이었다. 1955년생들에게 1960년대는 학교를 처음 가서 생활하게 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그들이 접하게 된 국민학교(현재 초등학교)의 내밀한 세계는 사회만큼 복잡하지 않았다. 당시 1955년 생들의 기억 속에서 학교는 도시락에 대한 기억과 함께 한다. 봄 ·여름· 가을에는 뽀얀 도시락보를 풀고 노란색 도시락 뚜껑을 열어 밥과 반찬을 먹으면 되는 일이지만 겨울에 기온이 내려가면 조개탄 난로 위에 도시락을 겹겹으로 9층탑을 쌓았다. 수업 중에도 면장갑을 3겹으로 끼고 도시락을 바꾸어 주었던 친구들도 있었다.
도시락을 열면 노란 도시락통 바닥에 누룽지가 보인다. 여기에 김치 국물을 부어서 숟가락으로 ‘닥닥’ 소리 내며 긁어 먹었다. 반찬은 무장아찌와 무말랭이가 대부분이었다. 좀 산다는 친구들은 계란 프라이를 넓게 펴서 도시락 위에 올렸다. 그리고 위에서 내려 잘라가며 먹는 모습이 그 얼마나 부러웠던지. 소박한 도시락은 1955년생들의 기억을 꽉 채우는 행복이고 추억이었다.
#어렵고 가혹했던 시절을 맞이하다
그러나 현실이 추억만큼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았다. 한국전쟁 후 급격하게 늘어난 베이비 붐 세대가 학교에 입학하기 시작하자 턱없이 부족한 학교와 교육 인프라는 이들을 감당하지 못했다. 한 학급 학생을 80명에 달할 정도로 과대 편성했기에 한 학급이 오전에 수업을 받고 하교하면 다른 학급은 오후에 학교 수업을 시작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또한 형제가 많았던 까닭에 집에는 항상 먹을 것이 부족했다. 돈벌이를 위해 부모들은 집밖을 나서야 했고 가정에서는 ‘따뜻한 관심’보다는 ‘당장의 효과가 큰 매질’, 혹은 ‘무관심’이 흔히 있었다. 교육적 환경으로 보면 그리 긍정적이지 못한 상황이었다.
시험을 보고 들어간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는 보다 단단해진 군사정권의 세뇌적 교육 정책으로 인해 일본 군복 같은 교복을 입었고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는 교련복을 입고 군사 교육을 받아야 했다. 매스 게임, 인원 동원 등등 살벌한 행사들이 일상에서는 자연스러운 일로 받아 들여졌다. 또한 데모에 참여한 고등학생들은 수배령이 떨어져 전국을 숨어 다녀야 했다. 이렇듯 현재 한국 사회의 주역들을 낳고 무게중심이 된 1955년생들에게는 역사의 가혹한 면모들이 담겨 있다.
#치열하게 싸웠기에 보람 있었던 청춘
그러나 불행과 부족함은 반대급부로 기쁨과 보람, 행복의 폭을 넓히기도 했다. 1955년생들은 이 나라가 굶주림으로부터 벗어나는 원동력이 됐던 세대이며 나라가 발전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그 혜택 또한 누렸던 이들이기도 하다.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의 말기로 치닫던 시대 속에서 가장 치열하게 싸워야 했던 이들도 당시 10대 후반, 20대 초반이었던 1955년생들이었다. 또한 속도가 붙기 시작한 경제성장이라는 절대 화두 속에서 이들은 청춘을 불살라야 했다. 학교와 직장 곳곳에서 수많은 좌절들이 있었던 만큼 수많은 성공과 빛나던 순간들 또한 존재했다.
1970년대에는 학생과 직장인으로 반분되었던 이들 대부분이 본격적인 직장인이자 생활인으로 통일되기 시작한 1980년대는 사회 전면에 등장한 1955년생들의 가치를 증명하듯 한국 경제가 가장 폭발적으로 성장하던 시기였다. 1955년생들은 한국에서, 그리고 세계 곳곳에
서 활약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과거처럼 배고프지 않았다. 그들의 뜨거운 노력은 올림픽 개최라는 상징적 장면과 군사정권의 퇴장이라는 사회적 변화로 나타났다. 그래서 1990년대는 그동안의 고생에 대한 보답처럼 다가오는 듯했다.
#삶을 흔든 IMF체제의 잔인한 칼날
그러나 붕괴는 마치 자연재해처럼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IMF체제가 닥쳐 온 것이다.
IMF체제가 시작된 1990년대 중·후반 당시 1955년생들의 나이는 40대 초반 즈음. 사회적으로는 중견이고 일에서는 조직의 무게중심이 될 나이대다. 그러나 IMF체제는 정리해고와 명예퇴직으로 이들을 직장에서 내쫓기 시작했다.
실직자가 된 가장의 권위는 순식간에 추락했고 고전적인 의미의 가족은 해체됐다. 특히 가족의 가치를 믿으며 자라 사회적 성공의 한가운데에 섰던 1955년생들에게 냉정한 경제논리에 의한 가족의 해체는 더없이 충격적인 일이었으리라. 사방에서 단두대의 칼날이 번뜩거리는 것처럼 변한 세상에서 이들은 길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운이 좋아서든 능력이 좋아서든 잔인한 서바이벌 게임에서 가까스로 살아남는 데 성공한 이들은 마침내 어렸을 적 만화나 소설에서 본 공상과학의 상상력 속에서 나오던 ‘21세기’를 맞이하게 됐다.
# 1955년생, 제2청춘 시대가 온다
한 사회학자는 1955년생들이 부모 봉양을 당연시하는 마지막 세대이고 자식들에게 부모대접을 못 받는 최초의 세대’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1955년생들이 ‘낀 세대’임을 증명하는 간결한 설명이 아닐 수 없다. 한국 현대사에 기록된 가장 뜨거운 순간들의 주역이었던 1955년생들은 이제 본격적인 은퇴기를 맞이하고 있다.
수많은 현대사의 곡절만큼이나 쉽지 않게 살아온 세대였다. 그러나 지표로 증명되는 대한민국의 발전상은 바로 1955년생들의 활약에 힘입은 결과다. 그리고 이 결과는 그들이 고통에 맞서 희망을 꿈꿀 수 있었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들이 처음 세상을 직시해야 했던 1960년대, 1970년대의 가혹함 때문일까? 살아남는 것 자체가 어려웠던 시절의 기억은 그들이 IMF체제라는 잔인한 시험을 치르고도 살아남아 지금 은퇴 이후의 삶을 말할 수 있게 만드는 힘이 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한 힘은 1955년생의 미래가 어둡다고 할 수만은 없게 만든다. 이미 웬만한 어둠은 충분히 치르고 올라온 이들이다. 또한 성장하는 한국 사회와 궤를 함께 한 이들은 교육 수준이 높을 수밖에 없으며 배움에 대한 본능적인 체질을 갖고 있기도 하다. 1955년생들의 행복을 위한 새로운 도전은 이제부터 시작인 것이다.
금융권 생활 20년, 돈 냄새를 누구보다 잘 맡는 사람이 있다. 퇴직 후 10년, 불운의 연속으로 실패에 쓴 맛을 본 사람이 있다. 두 사람이 아니다. 우여곡절 끝에 NGO단체 (사)러브 월드에서 삶의 보람을 찾고 있는 박근배 사무국장이다.
그는 자신을 한때 ‘잘 나갔던 사람’이라고 자신있게 표했했다. 그러나 전혀 거만하거나 거북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높은 곳에서 사람들을 내려다본 경험도, 바닥에서 헤메던 경험도 있던 사람의 여유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는 은행연합회에서의 20년 직장 생활에 회의를 느끼거나 후회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 시절이 내 삶에서 가장 화려한 날이라고 표현 할 뿐이다.
◇ 잃어버린 10년
지지리도 운이 없었다. 박씨의 퇴직 후 10년은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가장 잘 어울릴 것이다. 지난 10년 간 3차례의 사업에서 실패해 악몽 같은 시간을 보낸 탓이다.
2003년 은행연합회에서 나온 후 그가 도전한 첫 사업은 골프연습장. 골프마니아다운 야심찬 행보였다. 그러나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골프 프로 티칭 자격증까지 보유하고 있었지만, 경영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호기롭게 시작했던 골프 연습장은 얼마 되지 않아 폐업을 하게 된다. 씁쓸한 결과였다.
가장 운이 없다고 할 수 있는 것은 두 번째 사업이다. 2007년 그가 시작한 것은 공교롭게도 수고기 수입 사업이었다. 소고기 수입 회사의 문을 연 지 얼마 되지 않아 전국적으로 촛불시위가 확산됐다. 박씨에게는 악재였다. 대한민국 사람 그 누구도 수입 소고기에 눈을 돌리는 사람이 없었다. 2007년을 회상하며 말을 이어나가던 박씨의 얼굴에 허탈한 미소가 번졌다. 그 모습에 기자도 말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태국 골프투어회사 경영은 불운의 마침표였다. 그가 태국에서 골프투어회사를 차린 지 얼마 되지 않아, 태국은 반정부 시위로 몸살을 앓았다. 시위는 과열양상을 보이나 싶더니 이윽고 유혈사태까지 벌어져 한국발 태국행 비행기는 파리만 날리게 됐다. 태국을 찾던 관광객들은 인도네시아나 필리핀, 말레이시아 등으로 발길을 돌렸다. 부푼 꿈을 안고 찾은 태국도 그에게 재기의 발판이 되지는 못했다.
그야말로 잃어버린 10년이었다. 은행연합회에 재직하면서 모은 돈도 모두 날려버렸다. 정신적으로 힘든 나날들이었다. 오직 신앙에 의존해 극복 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로 수년이 흘렀다. 그때는 절망의 기운으로 몸서리쳤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값진 경험이 됐다.
“‘아 이게 하느님의 뜻인가’하고 받아들이게 됐어요. 그러면서 깨달았죠. 나이가 들고 이 세상을 뜨면 가지고 가지도 못할 돈. 이것을 쫓는 것이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요.”
◇ 주는 것? 얻는 것이 더 많은 NGO 활동
박씨에게 3번의 쓰디쓴 실패 경험은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을 하게 만들어줬다. 그중에는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나’라는 자문도 있었다. 그 심오한 질문에 대한 해답은 지난해 필리핀에서 얻을 수 있었다. 그가 찾은 그곳의 여름은 태풍 하이옌 피해로 아수라장이었다. 특히 많은 사람이 얽히고설킨 집단 이재민 수용소는 처참함 그 자체였다. 그 처참한 광경을 보고 다짐했다. 이들에게 삶의 터전을 마련해주고 미래를 위한 인프라를 구축하는 일을 해야겠다고 말이다.
박씨는 다짐을 실천하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 그 활동 범위 또한 국내·외를 넘나들었다. 국내에서도 이주 노동자들을 위해 팔을 걷어붙이고 있다.
이주노동자와 다문화 가족들이 한국어 교육과 건강 검진까지 받을 수 있는 토털 케어 센터가 바로 그것이다. 자원 봉사의 현장에서 봉사의 혜택을 누리는 사람들이 활기를 찾고 미소가 번지는 것을 볼 때 덩달아서 기쁨을 느끼게 되는 것이 바로 NGO 활동의 매력이라고 그는 얘기한다.
박씨가 NGO 활동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다. 베푸는 것만으로 보람을 느꼈다면 결코 이 일을 오래 지속하지 못했을 것이다. 봉사와 온정이 전해지는 현장에서 삶의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가 배울 수 있는 것. 살아가는 힘과 원동력을 얻을 수 있는 것. 그것이 박씨가 손을 놓지 않는 이유다. 자신의 힘을 보태고자 날아간 필리핀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보탠 힘보다, 더 많은 힘을 얻어 돌아왔다고 말한다.
“동남아 봉사활동을 가면 오히려 배우는 것이 더 많습니다. 항상 눈에 보이는 결과가 있어야 감사할 줄 알았던 저였는데 그것이 행복의 발목을 잡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동남아 사람들의 순수한 모습과 넉넉하진 않아도 작은 것에 감사할 줄 아는 모습. 이것을 보면서 진짜 행복함이란 무엇인지 다시 한 번 배우게 됐습니다.”
◇ 영혼이 즐거워야 인생이 행복하죠
“제가 러브 월드 활동을 하면서 느낀 것은 저와 함께 하는 사람들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하다는 거예요. 이것으로 보람을 느끼는 사람이 저뿐만이 아니라는 것이죠. 또 나로 인해 행복해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깨달은 후에는 영혼이 즐거워집니다. 이게 바로 행복한 인생인가 봅니다.”
박씨는 행복은 영혼의 즐거움에서 오는 것이라고 말한다. 산전수전 다 겪은 그에게 돈은 이제 전혀 보람의 기준이 되지 못한다. 적어도 금융권에 다닐 때까지만 해도 쌓여가는 통장의 잔액이 보람의 척도이자 행복의 척도였지만 말이다.
그가 영혼을 즐겁게 하기 위해 선택한 것은 NGO 활동. 삶의 보람을 찾은 덕분인지 몇 년 전까지 실패의 구렁텅이에서 허덕인 사람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을 만큼 밝고 패기가 넘친다.
그가 보람 있는 인생 후반전을 살고자 하는 신중년들에게 하는 조언이 있다.
첫째, 자신을 위한 삶을 살라는 것이다. 그 동안 가정을 위해 너무 많은 부담을 짊어지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긍정적인 생각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보람된 일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그에게는 NGO 활동이었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또 다른 무엇이 될 수도 있다.
둘째, 예전의 지위나 기억들을 내려놓는 것이다. 퇴직 이 후는 그야말로 인생 후반전이자 새로운 인생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속된 말로 ‘잘 나갔던’ 때를 기억하며 상대방이 그때의 지위로 생각해주고, 행동해 주길 바란다면 보람 있는 일을 찾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을 수 있을 거란 것이다.
인생 후반전을 행복하게 살고 있는 박씨. 그가 러브월드 활동을 하면서 생긴 철학이 있다. 항상 가슴과 머리에 새겨 놓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그리고 죽을 때 가져가는 것은 오로지 육신뿐. 보람 있는 삶을 살아 멋진 이름 남겨놓고 가자.’
인생2막, 시니어들의 모델 진출이 활성화되고 있다. 광고에서 런웨이까지 시니어 모델들의 역할이 두드러지고 있고 그 수요도 늘어나는 시점이다.
꽃중년들이 일어날 시기가 찾아왔다. 물론 늦지 않았다. 주목해야 할 교육과정과 선발대회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알아보기로 했다.
시니어모델의 시작 ‘뉴시니어 라이프’
2007년에 시니어 모델사업을 시작해 교육과정이나 인프라가 상당한 곳이다. 서울시설공단과 함께하는 청계천 패션쇼를 비롯해 독일, 연변 등 해외무대에서도 나름 지명도가 높다. 강남캠프, 일산캠프, 성북캠프 총 3개의 교육장을 운영하고 있으며 3~4년차 수강생들이 많이 포진된 것이 특징이다.
‘행복한 패션기업’이라는 비전을 가지고 구하주 디자이너가 설립한 이곳은 교육, 공연, 모델, 제품 사업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주목할 점은 시니어 관련사업의 연령대를 낮추고자 노력한다는 점이다. 60대 기준에서 50대로, 베이비부머를 위한 콘텐츠를 만들겠다는 목표를 잡은 것.
뉴시니어라이프 구다원 국장은 “통상 시니어나 실버의 구분이 없이 관련 사업들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신중년세대들이 완벽히 적응할 만한 콘텐츠가 부족한 것이 현실”이라며 “편하고 하기 쉬운 부분에 초점을 맞추는 것도 중요하지만 질적인 측면에서 완성도를 높이는 교
육을 만들어 가는 데 주력할 시기”라고 말했다.
또 “우리는 관련 교육기관 중에 가장 역사가 오래된 만큼 모델 인프라나 활동 영역에서 독보적인 성과를 보이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녀는 시니어 모델 전문 프로그램에 대한 자부심이 넘쳤다.
뉴시니어라이프에는 경력 3년차 3인방 모델이 유명하다. 이들은 50대, 60대, 70대로 구성됐으며 나이차와 관계없이 친구처럼 편한 모습을 보였다.
맏언니 이오영(70)씨는 지난 세월 외국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남편이 외교관이었기 때문이다. 남편의 퇴직으로 한국에 다시 정착하게 되면서 느낀 외로움을 모델 워킹을 통해 극복했다고 한다.
“손주들이 좋아해서 너무 즐겁고 행복하다. 모델 워킹을 교육받으며 새로운 삶을 얻는 것 같다”는 그녀의 미소에서 넉넉함이 느껴졌다.
특히 “그동안 관절염으로 고생했는데 자세 교정을 통해 건강해졌다”고 말했다.
평범한 전업주부로 살아온 권혜영(62)씨는 모델수업을 통해 성격이 달라졌다. “그동안 자녀들 뒷바라지하느라 시간적 여유가 없었고 선천적으로 내성적인 성향을 가졌었다”는 그녀는 “모델 워킹을 통해 활기찬 모습으로 바뀌어 놀랍다”고 언급했다.
또 “많은 사람들 앞에서는 무대의 긴장감이 있다”며 “이런 긴장감을 통해 에너지와 용기를 잃지 않아 신난다”라고 말했다.
김경순(54)씨는 3년 전 수강생으로 들어왔지만 이제는 보조강사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체형관리와 건강 관리, 순식간에 찾아오는 갱년기 우울증에 이만한 프로그램은 없다고 생각한다”며 “보조강사로 도움을 줄 수 있어 그 행복은 배가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특히 “큰언니와는 나이차가 많이 나지만 같은 관심사로 친구가 될 수 있다”며 자신감을 내비쳤다. 그녀는 지난 30여 년간 골프용품 사업에 매진하며 꾸준한 마라톤으로 몸매 관리를 해왔다고 한다.
뉴시니어라이프 패션쇼 교육은 기초, 전문, 워킹클래스 총 3개 파트로 나눠진다.
기초과정은 50세 이상을 대상으로 4개월(주1회 3시간)간 진행되는데 기본교육, 패션쇼 준비, 패션쇼 공연 순으로 진행된다.
수료 후에는 시니어패션쇼 공연활동에 참가 할 수 있다. 전문과정은 기초과정을 이수한 수료자를 대상으로 6주(주1회 5시간)동안 전문모델교육을 받게 된다. 전문과정을 마치면 본격적으로 시니어모델 활동(광고/사진/패션/미디어/이벤트) 및 시니어모델 워킹강사로 활동할 기회가 주어진다.
워킹클래스 역시 기초과정을 이수한 자를 대상으로 매주(주1회 3시간) 수업이 진행되며 준비훈련을 통해 시니어패션쇼에 올라서게 된다.
재충전의 다크호스 ‘강남시니어플라자(시니어모델워킹)’
“강남시니어플라자의 모델 워킹반이 재미있다고 입소문이 나고 있다” 이 한마디를 듣고 찾아가봤다.
교육은 올해 시작돼 기간이 길지는 않지만 열정 가득한 수업이 매력적인 곳이다. 강남권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 시니어들도 주목하고 있어 분기별로 진행되는 수강신청을 빠르게 해야 한다.
수강생들에게 무대의 현장감을 전달하기 위해 강사 채용에 신경을 쓴 흔적도 보인다.
지난 10년간 패션모델로 일했던 모델 워킹반 이나영 강사는 “시니어를 대상으로 하는 모델 워킹수업은 현 시대가 요구하는 여러 측면을 만족시킬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녀는 현재 대학 강단에 서고 차밍스쿨을 운영하고 있지만 시니어 모델 교육에도 남다른 열의를 보였다.
그녀는 “고령화 시대에 접어든 우리나라 시니어들의 건강, 자신감 그리고 열정을 심어주는 데 큰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며 “우선적으로 소통을 통해 새로움 아름다움을 찾는 것에 주안점을 두고 가르치고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수강생들의 만족도는 어떠할까.
우선 모델 워킹반 수강생 대표를 맡고 있는 홍의정(66)씨는 “나이가 들면 걸음걸이로 나이를 가늠할 수 있다고 하는데, 저는 여기서 배운 올바른 자세 교정으로 뒷모습은 아직도 아가씨 같다는 말을 자주 듣곤 한다”며 자신감을 내비쳤다.
“모델워킹을 하면서 10년은 젊어 진 것 같다”는 그녀의 말에 생기가 돌았다. 그녀는 젊은 시절부터 워킹이나 모델 활동에 관심이 많았지만 잠시 꿈을 포기하고 살았다고 한다.
하지만 지인으로부터 모델 워킹을 배울 수 있는 프로그램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수강신청을 한 후 본격적으로 활동에 집중하고 있다.
김쏙니(64)씨는 “40년간 강남에 거주하며 강남시니어들의 꽃이라 할 수 있는 모델워킹반의
시작과 함께해 개인적으로는 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그녀는 “모델 워킹반에서 재충전의 시간을 갖게 돼 행복하다”며 “앞으로도 꾸준한 활동을 통해 긍정적인 자세로 나이도 몸도 늙지 않는 건강관리에 매진하겠다”며 건강과 미모 두 마리 토끼를 잡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강윤순(64)씨는 “처음에는 습관이 되지 않아 어색했지만, 수업을 통해 건강한 습관으로 자리
잡게 되어 좋았다”고 소감을 밝혔다. 또 “외부 시니어패션쇼에도 용기내서 참여하니 보람차
고 톱 모델 못지않게 나도 멋진 여성이 된 것 같다”는 말도 했다.
시니어 모델 워킹 클래스는 기초와 프로 2단계로 나눠지는데 각각 6개월씩 주1회 수업이 진행된다.
기초과정의 경우 초반 3개월은 자세교정과 기본 워킹을 중심으로 모델로서 가져야할 태도에 대해 교육받고 후반3개월은T자형무대,원형무대등모델워킹실습을받게된다. 프로과정은기초과정 수강한 자를 대상으로 진행되며 본격적으로 패션쇼에 참가하기 위한 전문적인 교육으로 구성된 상태다.
미즈실버코리아 2014
올해 시니어모델을 위한 유일한 선발대회는 미즈실버코리아뿐이다. 시장이 좁기 때문에 경쟁률도 만만치 않다. 참가대상은 50세 이상 여성이라면 누구나 가능하지만 태생적인 아름다움이나 시간을 거스르는 안티에이징이 관건은 아니다.
주최측은 “자신이 살아온 인생 속에서 묻어나오는 경험과 연륜이 몸에서 절로 발현되는 아름다움을 미의 기준으로 삼았다”고 강조했다. 심사 역시 수상자의 삶의 역사, 건강, 지속 가능한 아름다움, 사회봉사에 가장 큰 방점을 두고 있다.
지난 2002년 전주의 한 복지가가 소외된 노년층의 꿈과 미소를 되찾아주기 위해 만든 순수한 목적의 이벤트성 대회로 시작했지만 사단법인 세종문화원과 서울공연 예술센터가 주최하고 보건복지부와 문화예술계의 후원을 받는 큰 규모의 행사로 변모하게 됐다. 대회수상자들에게는 다양한 대외활동 기회가 주어진다.
우선적으로 수상자들은 한류 ‘뷰티 퀸’으로 데뷔하며 방송 MC와 쇼호스트, 연기 등의 분야로 나갈 수 있다. 시니어 뷰티 리더로서 사회봉사활동과 주부 모델, 미즈 모델, 실버 모델로 활동하며 각 단체 및 업체들과 연관된 평생 교육프로그램에도 지도자로서 발돋움할 수도 있다.
“시니어 모델이 된다는 생각으로 무대에서 연습을 해보니 가슴이 벅찰 정도로 희열이 느껴진다. 이제는 프로 모델로 거듭나고 싶다.”
미즈실버코리아 참가자 김지영 (61)씨는 이 같은 포부를 갖고 있었다.
지난 세월동안 육아용품과 화장품 사업에 인생을 바쳤던 그녀는 이번 선발대회를 통해 제2의 인생을 새롭게 설계하고자 마음먹은 것.
그간 사업적인 영역에서 힘써왔다면 이제부터는 제대로 된 모델로서 성장하고 싶다는 말이다.
“탄탄한 몸매를 가꾸기 위해 틈틈이 피트니스센터를 다녔고 화장품 관련업계에 종사했던 만큼 미를 가꾸는데 남다른 소질이 있죠.”
당당한 그녀의 말투에는 내달 진행될 선발대회의 승패와 관계없이 뚜렷한 목표가 보였다.
김지영 씨는 “우선적으로 시니어 모델로서 TV광고나 지면광고, 또 패션쇼 등에 참여하고 싶다”며 “저를 써주신다면 그에 합당한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자신감을 내비쳤다.
그녀는 “모델 활동과 함께 제 인생의 장기적인 목표는 우리 시니어들을 위해 운동이나 화장법, 패션 등을 가르치는 강사로서 나아가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당신이 이제 막 인생 후반전에 도착했다고 상상해보자. 나름 모든 준비는 끝마쳤다. 은퇴를 대비해 자산은 확보했고 자식들과의 관계도 나쁘지 않으며 즐길 수 있는 취미와 친구들도 갖춰졌다. 이제 삶을 즐기기만 하면 될 것 같다. 그러나 잠깐, 도리어 당신이 착실하게 준비했다고 결론 내린 것들로 인해 당신의 나머지삶이 어려워질 수도 있다는 상상을 해본 적 있는지? 그럴 리 없다고? 전문가들은 그럴수 있다고 말한다.
생애 설계에서 중요한 것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확실히 파악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일에 맞는 계획을 세우는 것이다. 계획을 세운 다음에는 실현시킬 수 있는 인프라를 갖춰야 한다. 인프라 중에서 특히 중요한 것이 재무, 승계, 관계, 일, 보람, 건강이다. 인생 후반전을 좌우하는 6대 키워드를 차근차근 파헤쳐본다.
도움말 강창희 트러스톤 연금포럼대표, 박기출 삼성생명 은퇴연구소 소장, 이상건 미래에셋 은퇴연구소 상무(가나다순)
10억대 이상 자산가라면 “부동산 팔아 금융자산 만들어라”
대한민국 1% 부자도 인생 후반전 재무 리스크를 벗어나기 어렵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자산가들은 돈 버는 데 온 힘을 쏟으면서 쓰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 준비가 안 되어 있기 때문이다. 60세가 됐을 때 번 돈이 모자란다면 거기에 맞춰 사는 것을 배워야 하고 부자라면 아름답게 쓰는 법도 배워야 한다. 그러나 자신의 형편을 생각하지 않고 남들 눈을 신경 쓰다 무리한 길에 발을 들여놓는 이들의 불행한 사연은 볼 때마다 안타깝다.
목돈이 있는 사람들은 은퇴 연령이 점점 빨라지고 있는 데다 저금리 시대에 투자처를 찾기도 쉽지 않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그런 질문들에 대해 강창희 트러스톤 연금포럼 대표는 부동산 자산을 서서히 줄이고 금융 자산을 늘려야 한다고 조언한다. KB금융지주경영연구소 ‘2014 한국 부자 보고서’에 따르면 금융자산 10억 원 이상 자산가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한국 부자의 총자산 구성비를 살펴보면 △부동산 자산 54.1% △금융 자산 39.6% △기타 자산(예술품·회원권 등) 6.3% 등인 것으로 나타나 부동산 비중이 높았다. 이러한 자산의 부동산 쏠림현상은 고도 경제성장기와는 달리 ‘부동산 불패 신화’가 끝난 지금은 잠재적인 위협요소가 되고 있다는 점에서 노후에 독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또한 나이가 들수록 소득의 기회가 줄어들 뿐더러 노후자금 및 의료비용 지출이 늘어나게 돼 결국 부동산을 처분할 수밖에 없으며 그렇게 매물화 되는 부동산은 부동산 가격시장에 악순환을 몰고 올 수 있다.
이상건 미래에셋 상무는 “연령이 높아질수록 금융자산 비중이 줄어드는 현실과는 반대로 노후
생활에 적합한 금융자산 수요는 증가할 수밖에 없다”며 “고령화 사회에 대비해 적절한 가계자산 정책과 관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자식이 가업 승계할 자질이 되는지 냉정히 판단해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로마 제국의 16대 황제로 스토아학파의 철학자였으며 의 저자로 역사에 남게 된 성군이었다. 그러나 그의 뒤를 이은 황제이자 친아들이었던 콤모두스는 잔인한 폭정, 무능함으로 문제만 일으키다가 결국 암살당한다. 아버지와는 정반대의 업적만을 남긴 아들은 이후 전개되기 시작한 로마의 멸망을 열어젖힌 것으로 평가된다.
이렇듯 내가 세운 집안의 미래를 자녀가 완전히 보장해주진 않는다는 건 이미 수천 년 전부터 입증된 얘기다. 이상건 상무는 노후에 도달하면 가업을 자식에게 승계할 것인가, 아니면 장기적으로 매각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자식에게 승계할 경우에는 가업에 대한 보람이나 자긍심을 심어주는 것에 중점을 둬야 한다. 그러나 자식의 자질이 부족하면 전문경영인을 두거나 매각하는 방법을 심각하게 고려해야 한다. 수십 년을 일군 사업을 자식이 한순간에 망쳐 놓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실제 일본 가업 승계의 경우 아들 가운데 물려줄 인재가 없다고 판단되면 딸을 매개로 데릴사위를 들여 가업을 물려주기도 한다. 마땅한 대안이 없다면 장기적으로 매각 계획을 세워 정리 작업에 서서히 들어가는 것도 생각해봐야 한다.
부부와 자녀 관계 모두 새롭게 바라보라
한국영화의 거장 박찬욱 감독이 “좋아 죽겠다”고 극찬한 영화가 있었다. 그 영화는 바로 2002년에 나온 박진표 감독의 . 70대 노인들의 사랑을 직설적으로 다룬 이 영화는 주인공들의 나이와 노골적인 묘사로 인해 화제와 논란을 일으켰다. 이 영화에 비난을 퍼부었던 이들은 ‘다 늙어서 노인들이 추잡하게 논다’라는 논리를 내세웠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그러니까 그런 비난을 하던 이들도 나이가 들면서) 영화의 가치는 재평가 받았다. 이러한 재평가는 시대가 노후 행복을 보다 풍요롭게 바라볼 수 있을 정도로 성숙했다는 의미도 될 것이다.
건강한 부부관계는 노후 행복의 지름길이다. 인간 수명이 길어지면 자녀 양육 이후 부부만 남게 되는 시기도 길어지는데, 이런 상황에서는 친밀감과 화목함을 키워주는 부부간 성생활이 더욱 중요해지기도 한다. 은퇴 후 자식들을 출가시키고도 부부가 최소 30년 이상 함께 붙어 살아가야 하는 까닭이다.
특히 남자가 은퇴하면 집안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서로 다툴 여지가 많아질 수 있다. 남자들은 그동안 많은 시간을 함께 하지 못했던 아내와 외식도 하고 여행도 하며 오순도순 느긋한 노후를 보낼 거라 기대하지만 그것도 딱 한 달이다.
나이가 든 아내들은 이러저런 취미활동을 하느라 예전처럼 남편을 돌보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내는 친구를 찾고 남편은 아내랑 함께 하길 원한다. 이런 경우 아내는 남편이 재취업이나 창업으로 새로운 제2의 인생을 걸을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내조해야 한다. 지금껏 가장으로서 경제를 책임지기 위해 평생을 바친 만큼 남편 인생 이모작을 위한 좋은 후원자가 되어야 한다는 얘기다. 남자도 집에서 아내에게 기대려고 하기 보다 평생 현역으로 산다는 마음으로 온전한 자신을 위해 새로운 일을 찾아 나서는 노력이 필요하다.
자녀 관계도 만만치 않다. 요즘 같은 저성장시대에는 그만큼 청년층의 성공 기회가 적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자식들이 성공에 대한 기대치를 낮추고 ‘결핍의 시대’에 적응할 수 있도록 부부가 소신을 갖고 자식 교육에 나서야 한다. 예컨대 경제적으로 무리해서 외국 MBA코스에 무작정 보낸다거나 억대에 이르는 결혼 자금을 무턱대고 지원해줘서는 안 된다. 자칫 젊은이들이 냉혹한 이 사회에서 물러터진 자세로 경쟁력을 잃어 도태될 수도 있다.
박기출 삼성생명 은퇴연구소 소장은 신중년들은 미혼자녀와 대화 시간이 짧고, 성인자녀와의 교류빈도도 낮을 뿐만 아니라 자녀와의 소통에 어려움을 느끼는 비율이 높다는 점에서 자녀와의 관계가 취약하게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은퇴 후 일은 필수 과제
똑같은 노후자금을 갖고 있더라도 일이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크다.
소일거리라도 하는 사람은 마음이 덜 불안하다. 하지만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사람은 괜한 욕심을 내거나 겁을 내기 십상이다.
강창희 대표는 3번의 정년에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첫 번째가 고용의 정년, 두 번째가 일의 정년, 세 번째가 인생의 정년이다. 젊은 시절부터 일하던 자신의 주 업종에서 은퇴(고용의 정년)한 이들은 ‘일의 정년’에 적응해야 한다. 대략 60~70세로 은퇴했지만 재취업이나 창업을 통해 제2의 인생을 펼쳐야 한다. 이에 덧붙여 강 대표는 100세 시대에는 공부-취업-공부-재취업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재취업 전의 공부란 단순히 학문과 기술만을 뜻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할 수 있는 사회 공동체 안에서의 생활을 포함한 모든 활동이다. 강 대표는 “수입을 위한 일을 하든, 자기실현을 위한 일을 하든, 아니면 사회환원적인 일을 하든 준비가 필요하다. 재테크가 아니라 평생현역이라는 마음가짐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박기출 소장은 단순히 생활 유지가 아닌 즐거움을 유지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게 필요하다고 말한다. 또한 그 즐거운 일에서 경쟁력을 갖춰야 한다고 조언했다. 일에서의 그러한 추구가 재무적인 면에서나 관계적인 면에서는 물론, 건강까지 도와줄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박 소장은 “당장 즐거운 일을 할 수 있다고 한다면 정신건강부터가 튼튼해질 수 있다”고 진단했다.
보람 있는 일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현명하게 수입을 관리할 수 있다는 점에서 평생현역이야말로 최고의 노후대비책이다.
박기출 소장은 은퇴자들이 여가생활을 하는 주된 목적은 소득수준에 상관없이 건강을 유지하는 데 있다고 지적했다. 여기에 재미와 즐거움, 의미 있고 보람 있는 삶을 찾고자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성기 시절 시장 독과점을 통해 악착같이 돈을 벌어서 실리콘밸리의 악마라고도 불렸던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회장은 마이크로소프트의 리더 자리에서 물러난 이후자선사업에 공을 들이기 시작했다. 특히 아프리카 같은 저개발국가에 쏟아붓는 애정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여서 기부액은 2007년 이후 280억 달러에 달하고 있다. 또한 엄청난 고가였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노트와 그자신이 보고 감명 받은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의 강의 영상 저작권을 사서 일반인에게 무료로 공개한 것은 그의 기부행위가 단순히 돈만 많이 내놓는 게 아니라 인류를 위한 봉사정신에 기반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는 일화들이다.
건강관리는 곧 돈이다
중세 유럽에서는 ‘죽음의 춤’이라고 불리는 그림들이 유행했었다. 부자, 수도사, 농부, 귀족 등 각계각층에 속하는 사람들이 죽음을 상징하는 해골과 어울려 춤을 추는 모습을 그린 이 기이한 그림들은 실은 전 유럽을 휩쓸었던 흑사병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던 때를 은유하고 있다. 해석하자면 ‘죽음의 춤’은 흑사병-죽음은 부자와 서민, 왕과 하층민 등 계층을 가리지 않고, 심지어 때와 장소도 가리지 않고 갑작스럽게 찾아온다는 걸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건강관리는 재무나 자산 관리와 연결된다.
건강관리를 하느라 생활비가 줄어들지 않는다는 얘기다. 나이가 들면 당연히 아픈 데가 많아지지만 보험 등을 제대로 들지 않았다면 과도한 비용이 들어가기 마련이다. 또한 건강관리를 잘못해 큰병이라도 걸리면 모든 ‘은퇴 준비’가 허탕으로 돌아간다.
건강문제가 해결되지 못한 채 장기화되는 것도 경계해야 할 부분이다. 이상건 상무는 40대부터 건강을 위한 금연이나 절주를 비롯해 꾸준한 운동을 병행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경제적 어려움이야 수입에 맞춰 지출을줄 여가며 노후를 보내며 지낼 수 있다지만 건강을 잃는다면 평생을 질병과 싸워야 하는 고독한 현실이기에 예상보다 훨씬 힘든 시간이 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100세 시대 시니어 혼자서도 안전하게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복지정책이 가능한걸까.
행복한 노후란 어떤 것일까? 젊었을 때 나라와 자식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한 노인들이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배려 해 주는 것이 국가가 할 일이다. 죽지 못해 사는 노인들, 죽음을 기다리는 노인들이 넘치는 사회를 두고 어떻게 선진국이니 복지국가를 말할 수 있겠는가?
노인복지법은 노인의 질환을 사전에 예방 또는 조기 발견하여 질환 상태에 따른 적절한 치료, 요양으로 심신의 건강을 유지하고, 노후의 생활안정을 위하여 필요한 조치를 마련함으로써 노인의 보건복지 증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한다.
특히 1981년도 노인복지법이 제정되면서 노인문제에 대한 제도적 접근이 이루어지기 시작해서 1999년에 이르는 동안에도 수차례 개정이 이뤄졌다.
구체적으로 우리나라의 노인복지와 사회정책을 뒷받침하는 법률들은 저출산고령사회기본법(보건복지부·여성가족부),노인복지법, 고령친화산업진흥법, 고령자 고용추진법(고용노동부)등이 있다. 공통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내용은 고령사회의 복지, 보건. 의료, 노인주거 및 교육문화, 소득보장, 고용촉진, 재정운영 및 관련 산업의 육성 지원 등을 담고 있다.
현재 우리 나라에서 실시하고 있는 이러한 각종 노인복지서비스 프로그램은 노인복지법에 의해 규정되고 있다.
경로주간, 경로우대제, 노인복지상담원 배치, 노인요양시설 입소, 노인 건강진단, 가정돌보미 서비스, 경로당·노인교실 등 여가시설 지원, 노인 적합직종 개발 등 노인일자리사업, 노인복지시설 설치 등 노인복지법에 의한 노인복지 프로그램이 있다.
고령화시대에 맞춘 복지정책 패러다임을 고령친화산업, 정년퇴직자 재취업 활성화, 노후 소득 보장 등을 마련해가고 있다.
그래서 시니어들은 역할 상실, 수입절감, 조기퇴직, 노후생계대책의 미흡, 건강악화 및 질병발생, 부양 및 주거문제, 여가문제, 고독감과 소외 등의 문제가 등장했다.
그러므로 노인들을 무기력한 의존적 존재로 혹은 보호와 복지의 대상으로만 간주하기보다는 건강하고 활력 있는 독립적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복지정책이 마련돼야 한다. 복지대상이지만 사회발전에 공헌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존재로 인식하는 시니어문화의 형성과 확산이 필요하다. 노후에 빈곤 없이 편안하게 살도록 만드는 것이 국가경쟁력을 높이는 길이어서 더욱 그렇다.
노인복지법, 종합적 재정비 필요해
그러나 노인복지법상의 문제점은 생활보호법과 의료보호법 등과의 경계가 뚜렷하지 못하고, 이러한 법률들이 노인복지법의 기본권적인 성격을 약화시키고 있다. 노인복지법은 노인복지의 전 분야를 망라할 수 있도록 노인복지의 특성을 살려가야 한다.
우리나라의 노인복지법은 시설에 수용된 노인들을 위한 복지비용에 대한 언급만 있을 뿐 생활보호법 이상의 실효를 거둘 수 있는 규정은 없다. 또한 「예산의 범위내에서」 라는 단서가 붙어 있는 것도 국가의 예산이 부족할 경우 노인복지에의 투자가 우선순위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내포하고 있다.
특히 노인 건강진단은 의료보험법이 아닌 노인복지법에 근거해 65세 이상 노인의 건전한 노후생활보장 사업의 일환으로 1983년 별도로 실시된 사업이다, 이러한 노인건강진단은 노인병의 조기발견과 예방치료를 함으로써 노인의 건전한 노후생활을 보장한다는 목적으로 실시되고 있으나, 전 노인을 포괄하지 못하고 있다. 1차 진단과 2차 진단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못해 형식적인 사업에 그치고 있는 측면이 있다.
그리고 노인여가 서비스 프로그램인 경로당(노인정),노인교실 등 여가시설에 너무 낮은 지원을 하고 있어 지원책을 완전히 재검토, 과감한 행정적·경제적 지원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현장 사회복지 담당자들의 의견이다. 노인들의 쉼터인 ‘경로당’은 전국에 6만2천여개가 분포해 노인 98명 당 경로당 1곳 꼴로 운영되고 있다.
노인정에 무료하게 앉아 있는 노인들이 갈 곳 없어 배회할 수 밖에 없다. 이들을 위한 문화· 봉사· 일거리 등 다양한 프로그램 개발과 전문 요원 배치에 대한 장기적 정책방향이 재설정될 필요가 있겠다.
김한표 새누리당 의원은 ‘경로당 활성화’를 위해 노인들의 노후생활 지원책으로서 경로당 내 일자리 마련 및 봉사 프로그램 등을 국가 차원에서 지원하는 법안을 지난 5월 발의했다.
이는 매해 1곳 당 국가 예산이 총 4700억원 투입되는 것에 비해 경로당이 상당히 비효율적으로 운영되고 있음을 나타냈다.
또한 노인복지주택은 고령화에 얼마나 대처하고 있는가? 극소수만이 누리는 노인주거복지시설은 여전히 높은 보증금과 매달 지불해야 할 사용료의 부담이 만만치 않은 시설이다. 하지만 그저 분양형과 임대형 사이에 노인복지법을 교묘히 빠져 나가는 무책임한 논란으로 본다면 실버타운사업 전반에 대한 제대로 된 재점검을 하지 않게 되면 자칫 한계에 부딪칠 위험성이 있다.
2008년 정부가 ‘노인 장기요양보험’ 제도를 시행하면서 수혜자는 35만명이다. 2008년 17만명에서 출발해 덩치를 두 배로 키웠다. 2010년 530만명이던 65세 이상 노인은 2020년 770만명, 2030년에는 1200만명 가까이 늘어난다. 17년 후면 요양보험 대상자가 2배 이상 증가할 거란 뜻이다. 서비스 확대를 위한 제도 개선도 줄줄이 예고돼 있다. 지난 7월 등급판정의 점수기준을 완화하고 치매특별등급을 신설해 13만명의 노인에게 추가서비스를 제공한다. 이렇게 되면 2017년 수혜자는 53만명까지 늘어난다. 커진 덩치에 걸맞은 인프라는 구축돼 있는가. 정부 앞에는 숙제가 놓였다.
노인복지제도 전반에 대한 종합적 안목 없이 개별 정책을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급조해왔기 때문이다. 정부 편의로 양산한 누더기 노인복지제도 탓에 어르신들만 힘들다는 지적까지 나온다.
아직 그림의 떡이라 보는 실버타운(노인복지주택)은 고령화에 얼마나 대처하고 있는가? 극소수만이 누리는 실버타운은 여전히 높은 보증금과 매달 지불해야 할 사용료의 부담이 만만치 않은 상품이다. 월 200만원에서부터 400만원 이상 지출해야하는 실버타운은 어쩌면 더 안정적인 성장으로 가기 위한 일종의 성장통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저 분양형과 임대형 사이에 노인복지법을 교묘히 빠져 나가는 무책임한 논란으로 본다면 이번 기회에 실버타운사업 전반에 대한 제대로 된 재점검을 하지 않게 되면 자칫 한계에 부딪칠 위험성이 있다. 고령화로가는 성장통이냐 한계냐에 기로에 서 있는 한국적 실버타운이 황혼마을로 가기 위해 숨고르기가 시작됐다.
1990년대 중반부터 민간 자본에 의해 하나씩 생기기 시작한 실버타운(구체적 표현으로는 유료 노인복지주택)은 초창기에는 도심의 복잡함을 벗어난 전원형 실버타운이 다수를 차지했다. 시간이 흐르며 교통, 의료, 문화 시설 같은 도시 인프라를 누리고 싶어 하는 시니어들이 늘어남에 따라 현재는 전원형 실버타운보다는 도심형 실버타운이 트렌드다. 그러나 전국 노인복지주택 25개와 노인공동생활 125개를 포함한 노인주거복지시설은 20년이 되어도 논란은 끊이질 않았다.
실버타운은 사실상 시니어가 머무는 마지막 집이다. 실버타운에서 일반 집으로 돌아오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버타운은 꼼꼼히 따져서 입소해야 한다.
실버타운에는 임대형과 분양형이 있다.
분양이나 임대계약서에는 반드시 입소조건, 입소비용(월 사용료)에 관한 내용이 포함되어야 한다. 그동안 명확한 법적 근거 없이 행해졌던 분양형 실버타운에는 안전장치 없이 산 넘어 산인 격으로 총체적 문제 투성이가 되었던 것이다.
실버타운은 상당수가 고급형 실버타운임을 어필하려고 한다. 시니어 입장에서는 얼마 남지 않은 삶의 시간을 보다 풍요롭게 보내고 싶어서 자신의 재산 상당분을 실버타운에 투자하고자 하는 생각이 있을 테니, 실버타운 쪽에선 그에 걸맞는 서비스를 제공해주겠다는 콘셉트를 지향하는 건 당연한 얘기다. 그러나 제대로 준비가 갖춰지지 않은 채 양산된 실버타운의 문제점들이 무수히 보고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실버타운은 사회복지사업법 내 노인복지법 제31조, 시행규칙 14조에 따라 구분된 노인주거복지시설 중 양로시설과 노인복지주택에 속해 있지만 별도의 규정은 없다.
실버타운을 1980년대 요양원 수준의 제1세대 노인복지주택, 2000년대 초반에 등장한 제2세대 닭장식 노인 전용 아파트에 이어 제3세대형은 최첨단의 주거·의료·문화·휴식·레저 복합형 타운하우스로 구분하는 전문가들이 적지 않다.
실버타운이 일반화된 것도 아니고, 입주비용이나 생활비가 일반거주에 비해 효율적이거나 비용 절감적이라는 면에서 크게 인기를 끌고 있는 상황도 아니고, 선진 고령화 국가의 성공적인 모델들이 우리나라에 정착되지 않은 면도 있지만, 고령화의 급속한 진전이 되는 상황을 염두에 두고 예상해 보면, 어느 순간에는 갑자기 입주가 몰릴 가능성도 없지 않을까?
사이버대학의 실버산업 전공 교수는 “시니어는 여가, 건강관리, 안전 등이 주요 관심사인데 실버타운이 필요한 서비스를 모두 제공하는 추세다. 2026년경 노인 인구가 20%에 육박하는 초고령화 사회를 눈앞에 둔 우리나라도 실버타운 수요가 늘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실버타운 운영주체는 누구냐?
실버타운은 일단 노인복지시설이다. 노인복지시설이라 함은 당연히 운영주체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실버타운은 흔히 입주자에게 ‘분양되는’ 개념으로 운영된다. 아파트처럼 분양이 이뤄짐으로써 실버타운은 개별 소유권을 인정하는 공간이 되고, 그렇게 되면 시설주체가 무의미해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건설회사는 실버타운을 짓고 입주자에게 분양을 한 다음 돈을 챙겨 운영에서는 손을 끊는 경우도 발생한다. 이러한 법적인 차원의 문제가 계속되자 노인복지법 개정안을 요청하고 있다.
건설사 입장에서도 실버타운은 이제 진입하기 어려운 영역이 됐다. 2010년에 도시·군계획시설의 결정·구조 및 설치기준에 관한 규칙 107조가 개정되면서 분양과 임대를 목적으로 하는 실버타운은 사회복지시설에서 제외됐다. 따라서 2010년 이후에 지어지는 실버타운에는 건설사들이 그 전까지 누렸던 전기세 감면, 취·등록세 면제 등의 혜택들이 사라졌으며 이로 인해 지난 3년여 동안 신규로 실버타운을 짓겠다는 건설사는 단 한 곳도 없는 상황이라고 한다.
기업이나 개인들도 실버타운에 주목하고 진입했다가 시기상조라 판단하고 한발 물러서 있는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