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기가 막힌 나만의 아지트 대공개] 늘그막에 얻은 내방
- 필자 집 작은방은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나의 아지트이다. 필자는 결혼 후 시댁에서 살다가 아이가 4세 되던 해 분가했다. 서울 장충동 시댁이 저택 같은 큰 집이었지만 독립해서 남편과 아들과 셋이서만 살 수 있다는 생각에 서울 변두리 방 2개짜리 작은 아파트에 망설임 없이 너무나 행복한 마음으로 이사했었다. 시어른 참견 없이 필자가 주체가 되어 가정을 꾸린다는 것에 매우 설레고 기대감에 찼으며 비로소 자기 살림을 하는 어른이 된 것 같아 대견한 마음이 들었던 기억이 생생하게 난다. 실은 친정 가까이 오느라 이 아파트를 선택했지만 이사해 보니 주위에 우리 아들 또래의 좋은 친구도 여럿이고 무엇보다도 북한산 국립공원 밑이라 공기 좋고 환경이 좋아 대만족이었다. 아이가 크면 넓은 집으로 옮길 생각을 하고 살았는데 뜻하지 않게 남편이 보증을 서서 재산을 몽땅 잃는 사건이 있었으므로 그래서 넓은 곳으로 이사하려는 계획은 사라져버렸다. 없어진 재산이 아깝긴 했지만 지금 사는 집에 불만이 없어서 그런대로 지냈다. 방 2개의 작은 아파트긴 해도 거실 유리창 밖으로 보이는 푸른 자연은 집이 작다는 생각을 잊게 해 주기에 충분했으니 아마도 필자는 욕심이 없는 사람임에 분명한 것 같다. ◇내 방이 생겼다- 큰방은 부부가 썼고 작은 방은 아들 방으로 꾸몄다. 그 작은 방에서 무난하게 잘 자란 아들이 5년 전 결혼해 나가서 방이 비었다. 미술을 전공했던 아들은 책과 미술도구 이젤과 아그리파까지 다 두고 떠났다. 물론 쓰던 컴퓨터도 그대로 남았다. 그때부터 필자의 시니어 글쓰기 생활이 시작되었다. 아들 바라기였던 엄마가 걱정되었든지 아들은 심심할 때 하라며 컴퓨터 사용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컴맹이었지만 임자 없는 컴퓨터를 자꾸만 만지다 보니 어느 정도 손에 익숙해지기 시작한 인터넷 세상은 참으로 무궁무진하고 즐거운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었다. 그저 살림하고 아이 키우기만 하던 필자에게 인터넷 메일로 정보가 쏟아져 들어왔다. 시니어라는 단어도 그때 알게 되었고 어느 시니어 포털 사이트에서 초대한 대로 찾아가서 필자는 글 쓰는 사람이 되었다. 글을 써서 송고한 후 채택되면 원고료를 받으니 돈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쓴 글의 대가를 받는다는 게 너무나 신기하고 자랑스러웠다. 글쓰기는 그리 어렵진 않았다. 누구라도 중고등학교 시절에 문학소년 문학소녀의 꿈을 가져보지 않은 사람 없을 것이다. 고교 시절 백일장에서 입상해서 제법 상을 탔으므로 필자도 문학의 꿈을 가졌었는데 대학생이 되면서 재미있는 다른 일이 많았기에 문학소녀의 꿈은 멀리멀리 사라져 버렸으니 우습다. 아들이 떠난 작은 방에서 글쓰기를 열심히 하고 자서전도 한 권 출간하게 되어 남편과 아들, 며느리가 무척 좋아했다. 글 쓰는 엄마가 자랑스럽다고 말해주니 기분 좋고 힘이 났다. 컴퓨터 앞에 앉아 글을 쓸 때면 남편도 방해하지 않았고 그래서 아들이 쓰던 이 작은 방은 누구도 넘보지 않는 나만의 공간이 되었다. 작은 창문이 있는 이 방에서 아들의 옷을 넣었던 작은 옷장과 아들이 쓰던 침대, 아들의 책장을 그대로 필자가 사용했고 자연히 안방과는 이별하게 되었는데 이 나이가 되어선지 남편도 혼자 안방 차지하게 되어서 만족하는 눈치였다. 이 작은 방에서 아들이 남긴 책이나 미술 도구를 보며 귀엽던 어린 시절을 추억해 보기도 하고 살아온 내 인생도 돌아본다. 그리고 많은 생각과 글을 만들어 내고 있다. 필자에게 필수품이 된 컴퓨터와 침대, 작은 옷장과 책장이 덩그런 이 작은 방은 기막힌 나만의 아지트라 하기에 충분하다.
- 2016-09-02 14:14
-
- [브라보가 만난 사람] 온가족과 유럽 미술관을 순례한 미술평론가 이주헌
- 20여 년 전, 미술평론가 이주헌(李周憲·55)은 아내와 어린 두 아들을 데리고 유럽 미술관을 순례했다. 그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은 그동안 14만 부가 넘게 팔리며 대중에게 꾸준히 사랑받았고, 이를 발판으로 그는 미술평론가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결과는 성공적이지만, 당시 기저귀조차 떼지 못한 한 살, 세 살배기 아이들을 데리고 먼 길을 떠났던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1993년 언론사 기자를 그만두고 프리랜서로 활동하던 무렵, 그는 미술평론가로서 대중에게 인정받을 만한 ‘자격’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관련 학위를 더 쌓아 대학교수가 되는 것도 방법이었지만, 그는 ‘책’이 그 자격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미술평론가로서 활동하려면 기반이 되고 신뢰하게 할 만한 계기가 필요했죠. 때마침 해외여행이 자유로워졌는데, 국내에는 서양 미술관을 소개한 책이 단 한권도 없더라고요. 그 전에 일본 서점에 갔더니 그런 책이 10~20권 정도 있었어요. 우리나라 대중에게도 그런 책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했죠. 해외에 가면 유명한 미술관을 안 들를 수 없는데, 그러면 아무런 정보 없이 가는 것보다는 어느 정도는 알고 가는 것이 좋거든요. 그런 면에서 해외 미술관 관련 책을 사람들이 선호할 수 있으리라 믿었죠.” 책을 쓰기 위해서라면 혼자 가거나 미술 관련 전문가와 함께 가는 것이 더 수월하지 않았을까? 온 가족이 함께, 그것도 한 살, 세 살,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손이 많이 가는 두 아이를 데리고 생고생(?)을 자처한 이유가 궁금했다. “여행 가는 사람들을 위해 미술관에 대한 책을 쓰더라도 막상 독자가 미술을 어렵고 낯설게 느낀다면 책에 손이 덜 가리라고 생각했어요. 그때만 해도 미술에 대한 관심은 음악에 비할 수 없이 낮았죠. 무엇보다 미술을 쉽게 접하도록 해야 했고, 그러려면 책을 부드럽게 꾸며야 했어요. 젊은 아빠가 어린 두 아들을 데리고 배낭여행을 가면 당연히 좌충우돌 사고가 생길 수밖에 없잖아요. 누구나 예상하고 재미를 느낄 만한 에피소드들을 넣어 준다면 쉽게 책을 다 읽어낼 수 있고, 다 읽고 나면 미술을 어렵지 않게 느낄 것 같았죠. 물론, 바삐 살며 가족에게 소홀했던 것을 만회하려는 목적도 있었지만요.” ‘미술’, 공부하지 말고, 친구처럼 다가가라 그가 일종의 모험을 감수하며 자신의 체험을 통해 책을 쓴 가장 큰 이유는 대중이 미술에 친근하게 다가가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그러나 여전히 미술을 어렵게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런 이들에게 그는 두 가지를 조언한다. 첫째, 미술을 알려고 하지 말고 먼저 느끼라는 것이다. “중요한 건 느낌이에요. 대부분이 오해하는 게, 예술적 지식이 없으면 작품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아는 게 중요하다고 느끼고 공부부터 시작하죠.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도 맞지만, 그렇다고 아는 만큼 꼭 느끼게 되는 것은 아니거든요. 아이들이 어른보다 지식이 모자란다고 해서 덜 느끼는 것은 아니잖아요. 길가에 핀 꽃을 보고도 어른들은 그냥 지나칠 수 있지만, 아이들은 그 꽃을 보고 강렬한 느낌을 받아 꼼짝을 못할 수 있어요. 아주 좋아할 수도, 슬퍼할 수도 있는데 그게 바로 감상이거든요. 감상이란, 느낌을 얻는 거예요. 내가 어떤 대상을 보거나 듣거나 지각해서 내 마음에서 느낌이 일어나고 그 느낌이 나를 완전히 사로잡는 경험을 하는 거죠.” 그는 미술 감상은 지식을 넓히기 위한 행위가 아닌 느낌을 얻는 과정이라고 설명한다. 지식을 넓히려면 지금 당장 도서관에 가서 열심히 책에 밑줄 긋고 열심히 공부하면 그만이라는 것. “어떤 사람을 아는 것과 친구가 되는 것이 다르듯, 미술을 아는 것과 느끼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며 그는 줄곧 미술을 ‘친구’에 비유했다. 미술을 친구 사귀듯 하라는 것이 그의 두 번째 조언이다. “세상 모든 사람과 친구가 될 수 없는 것처럼 미술 작품도 다 알 필요 없어요. 아무리 인기 있는 사람이라도 내가 끌리지 않으면 사귀지 않잖아요. 피카소나 고흐의 작품처럼 유명하다 해도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굳이 알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돼요. 먼저 내가 어떤 그림에 끌리는지,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 아는 것이 중요하죠. 풍경화든, 추상화든, 인물화든 좋아하는 게 뭔지 알고 그 위주로 즐기고 보면 돼요. 그러면서 내가 공부를 안 해도 점점 아는 것들이 생겨요. 그러다 관련된 글을 읽거나 책을 보면 확 이해되고 더 깊이 알게 되죠. 유사한 작가나 작품도 찾게 되고요. 깊어지면 넓어지는 건 순간이거든요. 미술은 그렇게 다가가고 공부하는 거예요.” 그는 책을 보고 하는 미술 공부는 관념의 연장선이지만, 그림을 느끼고 감상하는 것은 관계의 연장선이라고 설명했다. 그런 점에서 중·장년에게 미술 감상은 친구를 사귀는 것과 같다고 한다. “좋아하는 작품을 발견하는 건, 친구가 생기는 거예요. 나이 들수록 나를 든든하게 하는 것 중 하나가 친구잖아요. 대개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은 힘들고 슬플 때 음악을 듣죠. 그림도 마찬가지예요. 예술의 기본적인 기능이 있다고 하면 그건 ‘위로’라고 생각합니다. 음악을 들으면 기분이 전환되는 것처럼 좋아하는 그림을 보면 힘이 나고 위로받을 수 있어요. 좋아하는 그림 전시가 열리면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는 기분으로 가서 보고, 해외여행을 할 때도 멀리 사는 친구를 보러 가는 마음으로 좋아하는 작품을 찾아가 보면 반갑고 즐거워지죠. 저도 힘들 때 마티스나 케테 콜비츠의 그림을 보면서 용기를 얻곤 해요.” 20년 후, 여섯 가족이 함께한 유럽 미술관 여행 미술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는 그에게 미술은 그야말로 ‘절친’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 그 못지않게 미술을 가장 친한 친구로 만든 이들이 있으니, 바로 그의 아들들이다. 20년 전 함께 여행을 다녀온 두 형제와, 그 이후 태어난 셋째까지 세 아들은 모두 미술을 전공하고 있다. 그는 책이 나오고 20년 후, 세 아들과 아내, 그리고 막둥이 딸을 데리고 다시 유럽 미술관 순례 길에 올랐다. 늘어난 식구만큼이나 이전과는 사뭇 다른 여행이었다. “가자마자 달라진 걸 느꼈죠. 예전에는 제가 짐을 가장 많이 들었거든요. 젖병, 기저귀, 유모차까지 보통 짐이 아닌 데다가, 아이들 자체도 짐이나 다름없었죠. 근데 이번에 가보니 애들이 크고 힘도 세져서 제 짐도 들고 다니고 알아서들 잘 다니니 아주 편했어요. 스마트폰 지도 앱을 보고 저보다 더 빠르게 움직이더라고요. 무엇보다 전에 갔을 때는 밤 문화라는 것을 상상도 못 했는데, 이번엔 유명한 펍(pub)이나 바(bar)에 가서 아이들과 이야기도 하고 즐기니까 진짜 여행 온 기분이 들었어요. 여러모로 아이들이 나와 아내를 케어해 주니까 도움이 많이 됐고, 여행의 질 자체가 달라졌죠.” 그의 이야기를 들은 이들이라면 한 번쯤 그처럼 온 가족이 유럽여행을 떠나면 어떨까 생각해 볼 것이다. 경험자로서 들려줄 수 있는 이야기를 부탁했다. “가족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팀워크’와 ‘프로그램’이에요. 어디를 가서 뭘 즐길 것이냐도 중요하지만, 아무리 좋은 곳에 가도 가족 모두가 행복하게 지낼 수 없다면 의미 없는 여행이 되고 말죠. 가족끼리 가는데 무슨 프로그램을 짜느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자녀들이 크고 나면 각자 취향에 따라 가고 싶고 하고 싶은 게 다를 거거든요. 사전에 가족끼리 합의하고 배려해서 프로그램을 짜면 수월한데, 막상 가서 정하려고 하면 밥 한 끼 먹는 거로도 트러블이 생길 수 있어요. 현장에 가서 이러자 저러자 하지 말고, 미리 양보하는 마음을 갖고 서로를 배려해 플랜을 짜면 기분 좋게 여행을 즐길 수 있죠.” 미술관을 테마로 여행을 갈 계획이라면 유명한 명소보다는 작고 한적한 곳을 찾아갈 것을 추천했다. “루브르처럼 유명한 곳을 가는 것도 좋지만, 그러다 보면 미술관의 참맛을 느끼지 못할 수가 있어요. 관광객이 몰려 복잡하고, 입장하는 데만 시간도 한참 걸리기 때문에 정신없이 관람하고 지치기 일쑤죠. 한적하고 조용한 마을 미술관을 가족과 산책하는 기분으로 간다면 더 여유롭게 여행을 즐길 수 있을 거예요. 최근 자동차 테러가 있긴 했지만, 제가 가장 추천하는 곳은 프랑스 니스예요. 니스에 가면 마티스나 샤갈미술관도 있고 인근에도 좋은 미술관이 많아요. 주변 풍경이나 밤바다도 참 아름답죠. 반대로 조금 복잡하더라도 비엔날레 기간엔 베네치아에 가면 시끌벅적하지만 워낙 보고 즐길 거리가 많아지는 시기니까 한 번쯤 가보면 좋아요.” 그는 유럽 어느 지역을 가도 가 볼 만한 미술관 몇 곳은 있기 때문에 미술관을 테마로 계획을 짜면 여유롭고 감성적인 여행을 즐길 수 있으리라 추천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족이 함께하는 여행을 권하는 데는 ‘편안함’에 있었다. 가족과 떨어져 여행을 가면 서로의 안위를 걱정하고 그리워하는데 그런 염려 없이 함께 좋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라고 한다. 가족과의 추억을 떠올리며 흐뭇한 미소를 짓는 그에게 언제 또 온 가족이 여행을 갈지, 그리고 10년 후에도 책의 개정판이 나올지를 물었다. “글쎄요. 10년 뒤에도 개정판이 나온다는 게 쉽지 않으리라 보지만, 만약 그럴 수 있다면 또 다른 방향으로 꾸며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일단 그 자체로도 무척 고마운 일이고요. 가족 여행은 앞으로도 계속해야겠죠. 근데 아이들이 크고 나니까 각자 바빠요. 친구들과 여행도 가야 하고 자기 계획이 있으니 시간 맞추기가 쉽지 않죠. 그래도 언제든 어떤 형태로든 자연스럽게 또 떠나게 되지 않을까요?”
- 2016-08-30 16:29
-
- 일본초등학교 전학 (4)
- 추워지기 시작했다. 일본 애들은 반바지 차림으로 다닌다. 며칠간은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긴 바지를 입고 등교하더니 우리도 그냥 반바지를 입고 다니겠다고 했다. 내가 보기에 무릎이 빨갛게 되면서 추워 보이는 게 안쓰러워서, 저 애들은 어려서부터 습관이 되어 괜찮지만 너희들은 이제껏 긴바지였으니 그냥 그대로 다니면 안 되겠느냐 해도 아니란다. 바람의 아들은 추위를 이겨내야 한다면서... 그 날부터 둘이는 반바지 차람으로 씩씩하게 잘 다녔다. 이제는 말은 일사천리로 잘 했고 우리는 남이 들어서 별로 기분 안 좋은 말들은 한국말로 하는, 그렇게 구분해 가며 할 수 있는 실력이 된 것이었다. 아이들은 선생님께서 사용하는 말과 아이들 끼리 통하는 말에 능통해졌고, 나는 시장에 가서 사용되는 말들과 인사말 그리고 일반 어른들과 하는 말들에는 불편함이 없이 의사소통을 하며 즐겁게 지내게 되었다. 물론 전화도 이제는 무서운 물건이 아닌 영어는 영어로, 일어에는 일어로, 한국말에는 한국말로 구별해서 대답을 할 수 있는 벌벌 떨이 겁쟁이를 면하게 된 것이었다. 혼자 있는 정적을 깨고 사납게 울려대던 전화벨 소리가 그렇게도 겁나더니 언젠가 부터 여유롭게 웃음도 웃어가며 대화를 하게 된 그 기분은 시쳇말로 째지는 기분이었다고나 할까. 모든 새로움에서 부딪혀 가야만 하는 시련은 지나면서 다시 생활화 되어가고, 그것들은 습관이 되어 적응의 길로 발전해 간다는 것을 모든 새로운 것들에서 익혀간다는 즐거움으로 하루하루가 우리에게는 기쁨이었고 그것이 결코 고통이 아니었다. 일본에서 처음 맞는 겨울은 한국보다는 춥지는 않았지만 습해서 조금은 다른 추위를 느껴야 했지만 모든 건 이겨낼 만한 것들이었다. 나와 같은 또래들의 다른 사람들 보다 더 많은 경험을 쌓아가며 살아가는 건 행복한 거라고 무조건 생각을 바꿔가게 하며 아이들에게는 언제나 긍정적이길 원해서 부정적인 일들은 거의 말을 꺼 낸 적이 없었다. 내가 어렸을 때 그저 선생님들이나 어른들은 무조건 ‘일본 놈!’이라고 말했고 고약한 얘기들만 해줬었다. 그 영향으로 나도 그렇게 생각을 굳히고 있어서 일본에 가야했을 때, 우리 아이들이 학교에 가서 엄청 차별을 당할 까 우려되어 마음속으로 은근 걱정이 심했었는데 선생님들이 전연 차별대우를 안 했고, 아이들도 그날로 친구가 되어 주는 친절에 여러 가지 나쁜 개념들을 조금씩 지우고 버리게 되었다. 더군다나 일본에서 그 유명한 왕따 문제에도 걸리지 않고 잘 순조로운 학교생활을 했으니 얼마나 다행이었나! 큰애는 잘못 인식한 단어 하나로 모든 게 다 잘 넘어가버렸고 작은 녀석은 어느 사건을 계기로 그러려고 벼르던 녀석들의 양 코를 죽여 버렸던 것이다. 나중에 얘기하기로 하겠다. 반바지를 입고 다니는 우리 아이들을 보고 모든 엄마들이 감동했고 우리 가족을 진심으로 대하면서 더욱 더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그런 저런 일들로 동네방네 ‘기므꾼쿄~다이(김군 형제)’는 정말로 멋지고, 운동도 잘하고, 인사성 바르고, 성적이 우등이라며 칭찬을 받게 되었다. 한국에서의 전학생이 일본 우에하라초등학교의 유명학생이 되어갔다. 처음 전학해서 운동회가 있었는데 두 녀석은 각 학년 대표 릴레이 선수가 되는 바람에 모든 여학생들의 선망의 눈길을 한 몸에 받게 된 것이었다. 두 형제의 긴 다리에 입은 반바지 차림이 너무나도 핸섬(한싸므)하다나? 정말 다리로 말하면 할 말이 없었다. 일본 사람들은 전체가 다리가 짧았으니까. 한국보다 눈도 안 왔고 춥지도 않아 정말 지내기가 좋은 겨울이었다.
- 2016-08-30 14:15
-
- 시니어와 T.P.O
- 시니어 어르신 한분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건 도서관하나가 없어지는 것과 같은 것이다. 라는 말씀이 있었다. 키워드가 되는 단어 시니어, 도서관을 포털사이트 검색 창에 넣어보고 깜짝 놀래 이런 글을 쓰게 되었다. 도서관에서 학생들이 겪은 내용을 올린 글이었다. 도서관에서 공부하는데 선풍기와 좋은 자리는 무조건 막무가내로 시니어 어른(어린학생들은 이런 단어가 아닌 것으로 표현했음)이 차지하고 어린 학생들에게 불편함을 주어서 상당히 불만을 토로하는 예의없는 어르신들에 대한 성토의 글이었다. 시니어들끼리 있는 자리는 물론 나이대가 다양한 자리에 가게 되었을 때도 학창시절처럼 재밌게 분위기를 여럿이 있을 때 꼭 해도 되는 기분 좋은 유머로 요새 유행하는 여가수의 노래제목처럼 분위기를 CHEER UP~~!! 하는 분이 있는가하면 과거만을 생각하며 대우만 해달라고 하는 에헴만 하는 분들도 생각보다 많다. 옷을 입을 때의 기본원칙을 나타내는 말이 있다. T. P. O(time, place, occasion)의 머리글자로, 즉 옷을 입을 때 시간에 따라 방문하는 장소에 따라, 상황에 따라 착용해야함을 강조하는 말이라 가끔 예능프로 혹은 패션전문가들의 다양한 쇼핑방송, 정보를 주는 방송에서 사회자나 패널들이 말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시니어의 인간관계에서 T. P. O를 무시하면 안될 것이다. 어린 학생들 세계에서만 왕따가 있는 것이 아니라 시니어들 모임에서도 표시나지 않는 그런 분위기가 존재하는 것으로 안다. 친목계에서 조차 모였다하면 돈 자랑 자식자랑과 손주자랑만 하고 남을 위한 배려가 없는 분은 배제하고 다시 친목모임을 재조직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time 아침 아주 이른 시간이고 오밤중이나 새벽시간에도 상대방 생각하지 않고 여럿이 보는 단체 방이나 개인톡방이나 SNS의 새글이나 댓글이나 좋아요 등을 표시하면 무음을 해놓거나 알림을 해제했을 경우 외에는 짧은 소리일지라도 계속 알려주는 소리가 울리는 경우도 있고 문자나 전화를 시간 상관없이 하는 분들의 경우도 민폐가 된다. 어떤 사람은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생활하는 분들도 계시지만 새벽에야 잠을 청하는 분들도 많음을 기억해야 한다. place 장소가 결혼식인데 반바지 쫄 바지에 티셔츠를 입고 오는 시니어를 보고 얼마 전 결혼식을 갔다가 보고 놀랜 적이 있다. 더욱이 신랑신부의 부모님 친구라는 것을 알고 친구를 부끄럽게 만든 일이라고 생각했다. 재활용품 버리러 나오면서 잠옷수준의 옷을 입고 슬리퍼에서 밍크 숄을 두르고 나온 경우를 실제 본적이 있다. 사람들이 대놓고 말을 안 해도 수근거림이 있었다. 다양한 넓이의 아파트에 거주하는 주민이 모여있던곳이라 더 예민하게 보였던 행동이었다. 좌담회, 혹은 세미나 ,강사의 강의하는 장소에서 모인 분들이 개인적으로 할이야기를 계속 속닥거리거나 휴대전화 문자하는 소리와 통화하는 소리는 소리낮추었다고 생각해도 오히려 더 크게 들리는 것을 아셔야 할 것이다. 목소리만이 아니라 제스추어나 음악소리등 남에게 표시 나는 돌출행동은 뭐라고 대놓고 지적을 받지 않아도 우리 모두 조심해야 할 일이다. 그래서 시니어들도 젊은이들처럼 이어폰을 끼고 다니면서 음악 듣는 분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occasion 상황을 잘 맞춰서 행동해야할 시니어들끼리 대놓고 그렇게 살지말라고 야단맞지는 않아도, 모임에서 알게 모르게 왕따당하여 완전히 회원 속에 배제하지는 않아도 중요한 자리 결정적인 상황에 함께 하는 협동적인 모임에 맞는 행동을 하는가. 자신을 돌아보는 T.P.O를 시니어들이 여러카페,클럽,아지트,동아리등의 제목으로 활동하는 온라인모임과 운동하거나 교육내지는 친목 등의 오프라인 모임 모두 적용된다고 본다. 바이블에도 온유와 겸손으로 허리를 동인자는 은혜를 주신다고 했던 구절이 생각난다. 저 자신부터 반성하면서 계속 노력하려고 한다.
- 2016-08-22 16:44
-
- [미니 자서전]우물 안 개구리 세상 구경한지 50년 되던 해까지의 얘기
- 나는 수원이란 작은 동네 서둔동에서 살았다. 초등 1학년부터 결혼할 때 까지 이사 한 번 안 하고 컸다. 서둔동에는 서울 농과대학과 진흥청이라는 우리나라의 중요한 곳이 자리하고 있는 관계로 오랫동안 수원의 교육열이나 교육관계의 문제라면 모두 통계로는 전국 1위권이었단다. 수원에서 자라는 동안 연습림이라는 하늘이 안 보이게 빼곡하게 들어선 소나무 밭을 놀이터로 뛰어다니며 그 왼쪽으로 달려가면서 산속에서 나는 따먹는 앵두, 보리수, 오디, 산딸기... 건 다 우리들 것이었고 버섯이라든지 나물들은 우리의 밥상 반찬이었고 화가 나도 서러워도 산 속을 돌아다니며 목청껏 노랠 불러가며 풀었다. 학교 자연시간에 배우면 뭐든지 다 실험할 수 잇는 선이었다. 예를 들어 개미에 대해 배운 날, 나는 쇠로 된 긴 꼬챙이 하나를 들고 산으로 가서 개미 집 구멍에 그걸 깊이 끼워서 위로 세차게 올려 보면서 개미들이 만든 집 구조를 열심히 공부했다. 내 공부를 위해 놀란 개미들이 번데기를 입에 물고 질서정연하게 도망가는 걸 어리석음에 공부하는 거라고 불쌍히도 안 여겼으니... 언딘가로 이어지는 행렬은 대답했고 작은 구멍은 작은 집이었고 큰 구멍은 으리으리한 대궐이었다. 어른이 되어서 ‘개미’ 란 책을 읽으면서 혼자 많이 슬퍼했었다. 하나 밖에 모르는 단순한 애였었다. 그러한 나는 황해도 사리원에서 태어났고 서울대학 축산학과 교수가 아버지로 형제는 5이었고 딸이 넷인 딸부자 집 맏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내가 태어날 무렵에는 화산 목장에서 근무하고 있었고, 어머니는 외갓집에서 출산 주비를 하고 있었다 한다. 임신한 내내 입덧이 심해 고생은 했지만, 낳을 때는 별로 큰 아픔도 없이 세상 구경을 나온 나는 무럭무럭 잘도 자라줬다고 한다. 날짜도 안 잊어버린다며 7월 13일에 사과가 먹고 싶다하니 아버지가 그 당시 근무하던 사리원 중학교 학생들이 익지도 않은 풋 사과를 어디서 구했는지 가져왔더라나? 아마도 아무리 찾아도 사과를 구할 수 없으니 학생들에게 말한 듯하다며, 어머니가 먼 하늘가를 가끔 바라본다. 너무 일찍 가버린 낭군님이라도 생각하는지...‘뭐가 그리 바빠 정년도 못 채우고 갔는지...’ 하며 요즘엔 입버릇이 되었는지 더욱 더 자주 중얼거리곤 한다. 하얀 칼라를 반듯하게 다려 입고 귀밑 2센티미터의 머리로 자르고 다녀야 하는 중학생이 되자 제일 큰 사건은 우리 집 우편함에 연애편지가 다발로 배달되기 시작했다. 그 당시 집배원 아저씨는 노끈으로 묶은 편지 다발을 뒤흔들면서 내 동생들과 일하는 언니를 기쁨의 도가니로 몰아넣으며 소리 지르게 했다. 밤에 그걸 읽어대며 쿡쿡 거리고 신나할 생각으로 달뜨게 하는 편지다발이었다. 정작 읽어야 할 본인은 한 번도 읽은 적이 없다. 그래서 벌을 받는 기분이 가끔 들기도 한다. 내게 중, 고등학생 시절은 길에 다니는 남자들은 나를 그냥 보내면 섭섭했던 듯...했다. 그 당시 내가 친구들에게 즐겨 하는 말은 ‘내가 자기들 말에 홈빡 속아 넘어 갈 듯 순진하게 보이나봐. 병신같이 쉽게 생긴 거지 뭐~~’ 대학에 갈 목적이 서 있던 나는 공부에만 전력투구했다. 정직하게 학교에서 하지 말라는 일엔 눈도 안 돌렸다. 제일 바보라는 모범생으로 6년을 보냈다. 시시콜콜 재미있는 일도 있었겠지만 그저 배우고 공부하면서 먹으면서 지냈던 기억이다. 그러면서 대학생이 되었다. 그야말로 우물 안 개구리 세상에 나와 오만가지 구경에 빠지기 시작한 거였다. 만나는 것, 보는 것들이 다 생소했고 흥미유발에 호기심 난동이었다. 배울 것, 사람 만날 일, 영화와 연극 볼 일, 친구들과 수다를 즐길 일, 숙제할 일, 모르는 곳 찾아다니기...할 일이 너무너무 많아지면서 즐기다 보니 내가 보기에 언제나 오동통했었는데 몰라보게 아주 급 날씬해져버렸다. 더군다나 버스 안에서의 투쟁은 나에게 큰 시련과 고통의 시간이었다. 콩나물시루 버스타기가 다이어트의 주요인이었지만 집에서부터 40여 분을 넓은 대로를 내 맘대로 걸어 다니며 학교를 다녔던 여고 시절 12년간의 여유로움과 조용함을 한꺼번에 몽땅 잃어버렸다. 홍릉과 신촌을 오가는 1번 버스는 S대와 Y대 학생들과 우리들을 가득가득 실어 나르기 바빴다. 완전 짐짝 같았다. 그 속에서의 가지가지 에피소드는 정말로 끝이 없는 얘기 거리다. 그런데 5월부터 데모를 해대는 바람에 휴교령이 내려져 수원 집에 내려오게 되었다. 그러자 어머니가 동생들 뒷바라지로 서울로 가고 그 대신 수원 살림을 내가 도맡게 되어버렸다. 엄격하고 규칙적인 아버지 시중드는 것과 처음으로 두 여동생 도시락 준비와 청소 집안 일 그리고 세끼 밥 해 주는 일이 내겐 버거웠고 힘들었다. 어느 면으로 편했던지 가을이 되면서도 어머니는 내 생활을 되돌려 주지 않아 나는 아닌 밤에 홍두깨 식으로 서울로 통학을 하게 되어 버렸다. 처음 하는 통학생 생활에 어리바리 적응도 어려워 힘 드는 판에, 남학생들은 새로움을 맞아 즐기는 속에 나는 밀려들어 쳐 박히게 되었다. 봄(입학시즌)에는 없었는데 가을바람 부는 계절에 새로운 여학생이 나타났다는 뉴스는 첫 칸부터 입으로, 입으로 소문이 바람보다 빠르게 퍼져가기 시작~통근열차기 시끄러워지고 말았다. E 여대 배지의 위력은 대단했다. 그러나 우리의 S대, Y대, E대 생으로 구성된 코라스(지금은 판코라고 함)라는 클럽의 힘으로 보호를 받으면서 지낼 수가 있어 천만 다행이었다. 클럽 남학생들의 관심어린 보호를 받으며 늦게 타도 자리는 언제나 맡아져 있었다. 그 덕으로 심심한 적도 없이, 내가 일학년이니 모두가 선배님들이라 든든했다. 집에서도 여자들이 많은 나는 남자들의 세계를 처음 새색시 방을 몰래 숨어서 훔쳐보듯 하나하나 알아갈 수 있는 환경에 접했다. 여러 가지 성격의 남자들을 한꺼번에 대해 가면서 생소한 경험들을 했다. 남동생은 한참 아래였고 딱 아버지라는 남자 한 사람이 있던 가정환경 속에서 자라왔던 나에게는 무엇이든 이상하게 느껴졌다. 생각하는 방식이 달랐고, 말도 같은 문장과 단어들이지만 나랑은 완전 다른 반응으로 다가오기도 했고, 이해하기 쉽다가도 어느 순간 완전 이해가 안 되는 부분도 보여 ‘으응?’ 하는 날들이 많았다. 점점 약아져 가는 나를 얼핏 발견하고는 웃기도 했다. 그렇다 해도 나는 어떤 일이든지 면전에서는 아무 것도 트집을 잡는 다거나 이상한 발언을 못하는 성격이라 귀여운 여동생쯤으로 이해해줘서 모든 것들은 다 편하게 넘어갔다. 그렇게 대학 생활은 평탄했고 놀라운 재미는 없었지만 학교에서 교내 활동도 해 가면서 잘 보냈다. 나는 아이들을 사랑하고 아껴주는 선생님의 꿈을 가지고 열심히 실력을 닦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졸업이 가까워 오는 9월 정도에 이력서를 넣었다는 소리와 함께 은행으로 발령이 나 버렸다. 초등 담임 교수님께서 안경 너머로 날카로운 빛을 발하며 기대하고 있었는데 왜 은행으로 가는 거냐며 호통을 쳐서 무서웠다. 그때 내가 좀 더 내 미래에 대해 생각하고 따져보는 똑똑 이였으면 그 교수님 심중의 깊은 뜻을 헤아려 좀 더 신중하게 상담을 해야 하는 것이었는데 그때도 아직 우물 안 개구리였으니 뭘 알았을까? 기껏해야 교수님 말씀을 부모님께 전달하는 정도였으니... 그렇게 선생님 되는 것이 꿈이었으면서도 자기의 갈 길을 부모가 정해주는 대로 걸어가는 멍청이였으니. 그야말로 쉽게 말해서 철이라곤 없는, 쉽게 흘러가는 대로 살아가는 밥통이었던 나였음이었다. 자기주장이 약했고 남이 살아 주는 듯 강 건너 불 보듯 언제나 우물 안 개구리 시절을 못 벗어난 덜 떨어진 상태로 그때 까지도 정신을 못 차렸던 거 같다. 그래도 이상하게 계속 꿈을 꾸면서 이뤄지리란 것을 확신해 가며 살았던 일이 하나 있었다. 어려서부터 일본어에 관심이 많았다. 고모에게 여러 가지 작문을 지어 일본어로 말하는 것을 배워서 외우면서 언제 일본어를 할 수 있을까를 당연한 일처럼 기다리면서 살았던 것이다. 결혼해서 나의 보물 1호와 2호가 태어났다. 그 아이들이 초등학교 다닐 때 그 기회가 온 것이었다. 남편이 일본 주재원으로 발령이 난 것이었다. 마음속에서는 두 가지 갈래 길로 갈팡질팡 이었다. 가자니 4학년이었던 위의 아들이 5,6년 있다가 오면 교육적인 문제로 학교생활 적응문제가 일어날 거라는 우려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일본이란 나라는 어려서부터 ‘왜놈, 아니면 일본 놈..’이라면서 36년간의 설음으로 뭉친 원한 맺힌 선생님들과 부모 그리고 동네 어르신들에게 아주 안 좋은 경험담들을 귀에 딱지 앉을 듯 교육 받으며 살아왔었던 지라 겁도 났었다. 한국을 업신여겨 아이들 마음에 상처라도 입게 한다면 용서할 수 없다는 마음이 서려왔다. 그러나 고집불통인 남편의 우격다짐은 담임선생님과 나는 안중에 없었다. 나의 소원이었던 일본어는 외국인에게 일어를 가르칠 수 있는 일어 교사자격증을 따는 정도의 실력을 쌓게 되었지만, 한국에 왔을 때, 아이들의 학교 문제는 심각했다. 내 꿈은 저절로 이뤄졌지만, 나의 보물 1,2호는 쪽발이라는 수모까지 받아야 할 고생문이 훤하게 열려 있었다. 일본에 있을 때는 오히려 대우를 받아가며 한국인이라는 위상을 빛내며 멋진 형제로 뛰어난 아이들로 칭송 받으며 살아왔는데... 세상에 모국에 와서 더군다나 강남 8학군이라는 학교에 배정을 받았지만 기가 막혔다. 학교에 근무하고 있는 무식한 선생님들이 쪽발이라면서 구박을 일삼았다나? 동생은 중학생이었는데 선배들이 심심하면 교육시킨다며 데리고 가서 때렸다고... 두 형제는 딱 하루 학교 갔다 와서, ‘엄마 완전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기분이야. 어떻게 자기 나라가 더 어렵고 힘든 거지? 이해가 안 돼’ 라며 귀국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미국으로 가는 게 어떠냐는 말을 거역하고, 한국으로 온 것을 내내 후회하는 두 녀석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나 또한 처음이자 마지막 고집을 피워서라도 미국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갈 것을 하는 후회막급한 날들이 쌓여만 갔다. 그때부터 우물 안 개구리가 멋모르고 밖으로 나와 당해 가며 사는 세상은 험악하고 어지러웠다. 어느 것도 상식을 벗어났고, 공중도덕이 없는 세상은 우리 식구를 어느 늪 속에 내동댕이쳐버린 거 같았다. 계속 어처구니없는 일들을 당하면서 많은 것들을 잃어 갔다. 명랑 발랄 했던 우리들의 웃음을, 언제나 즐거웠던 대화를 잃어갔다. 그러나 또 한 편으로는 아주 놀랍게도 똘똘 뭉치는 가족애를 만들어 갔다. 아무도 범접하지 못하게 서로를 사랑해 주고, 이해해 주고 아껴가며 일본에서 배워서 익혀 온 좋은 것들을 잃지 않으려 달팽이처럼 속으로 감춰가며 간직해가며 살아냈다. 우리가 겪어낸 것들을 사랑으로 감싸며 이란 글을 거실에 걸어 놓고 새겨가면서 서로를 아끼고 굳은 의지로 세상과 타협하는 법을 늦으막하게 나마 익혀 가며 깨달아가며 말이다. 서로를 보살펴 주고, 서로의 안쓰러운 눈물 닦아줘 가며 그렇게 아프게 살아가며 덕을 쌓아오고 있었는데 성공을 눈앞에 두고 있던 나에게 청천벽력의 같은 사건이 일어났고 우릴 단숨에 무너뜨렸다. 그 일은 우릴 마구 두들겨 팼다. 깡패가 이유를 묻나 불문곡직하고 두들겨 패면 맞아야 하는 그 공포와 두려움이 가득한 어둠 속 낭떠러지로 밀어 넣어졌다. 우리는 그 나락으로 계속 떨어져 갔다. 나의 1호 보물이 슬어져 갔다. 겨우 남은 2호 보물과 나의 울부짖음 그리고 법이란 것에의 올바름에 억울하기만 한 원통함과 원망, 용서, 거짓말. 진실, 미움, 그리움, 보고픔, 사랑, 하늘, 별, 내 아들.... 내 아들... 나의 인생 50년이 마감되던 날이었다. 1995년 11월 20일 새벽이 나를 개벽시켰다. 우물 안 개구리가 밖으로 나와 처음으로 넋 놓고 있기를 거부했다. 세상 밖의 어지러움 속으로 스며들며 이겨내려 발버둥을 친다. 앞으로 다가오는 날들은 조금 더 똑똑하게 살아봐야지...번데기 밖으로 나온 나비처럼 날아 봐야지... 나비야 네가 허공으로 새 삶을 위해 날아오를 때, 나도 나의 새 삶을 위해 네다리 폴짝 거리며 연못으로 뛰어 들 꺼야...
- 2016-08-19 19:01
-
- 쓰레기를 버리는 마음에 감동
- 일본은 ‘80년대에 가서 주재원으로 살면서도 놀라웠지만 지금도 가끔 들를 때 마다 감동하게 된다. 쓰레기를 버리는 마음이 다르다는 것에 언제나 머리가 조아려 진다. 그들은 자기들이 곱게 정성들여서 쓰던 것을 버릴 때도 우리와 다른 마음으로 버린다. 혹시라도 이 물건이 꼭 필요하지만 아직 장만할 때가 안 되었다든지 또는 무슨 연유가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배려에 가슴 속에 여울지는 따스함에 눈물이 고이곤 한다. 그 물건을 가져가서 쓸 수 있도록 배려하는 마음에 될 수 있으면 깨끗하게, 부끄러움 안 생기고 가져 갈 마음이 생기도록 손질해서 포장을 잘 해서 버린다. 예를 들어 아이들 운동화가 발이 커져서 버려야 할 때는 깨끗하게 빨아서 말린 다음에 비닐봉지에 버리게 된 이유를 곱게 적은 쪽지를 함께 넣어 버린다. 또 이불을 잘 건조시켜서 비닐에 넣어서 내 놓는다든지 전자제품들은 산 날짜와 약간의 고장이 어디에 났지만 수리하면 쓸 수 있다는 쪽지가 붙여져 있는 등 쓰레기로 버리는 마음에도 느껴지는 정성이 보인다. 주택가의 그런 물건들은 외국에서 온 유학생들이나 시골에서 올라온 청소년들의 좋은 필수품들로 대 환영이란다. 일부러 며칠을 그런 물건들을 친구들과 찾아다닌다는 얘기도 들었다. 버리는 사람이나 그걸 잘 사용하려는 사람 각자 버리는 물건에 대해서도 애정을 가지고 있는 그들의 고운 마음씨가 보인다. 그들은 음식물 쓰레기 같은 책임이 따르는 것에는 본인 이름을 기재한다. 가끔 몰래 남의 쓰레기 속에 자기 것을 갖다가 버린다든지 자기 구역도 아닌 곳에 가득 쌓아 놓는 수치스러운 일들을 뉴스를 통해 보노라면 마음이 착잡해지고 우린 아직 선진국 대열에는 자신 있게 설 수가 없다는 수치스러움이 느껴진다. 공원을 산책하면서 애완견들의 분 처리에도 눈살 찌푸려지니... 우리 아파트나 다른 아파트에 드나들면서 자주 느끼는 게시판의 글 중에서 쓰레기 처리에 대한 글을 읽을 때 마다 마음이 착잡해진다. 언제 저런 글귀들이 없는 날이 올까? 또 방송으로 쓰레기 버리는 일에 대해 주의를 안 하는 날이 올까. 많이 생각하게 된다. 유원지나 사람이 많이 드나드는 곳에 가면 언제나 공중 도덕을 무시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하는 어른들이 있다. 정의를 따지는 사람을 만나면 즉시 큰 소리와 함께 멱살을 잡는 소동이 벌어진다. 그런 것들도 없어지길 바란다. 예전에는 길을 가다보면 쓰레기통이 꽤 있었는데 이젠 없다. 알아보니 국민들이 넘쳐나게 버려대는 것도 문제지만, 집 쓰레기를 가지고 나와서 버린다나? 하기는 빌딩 또는 전철역 화장실에서도 가끔 ‘집 쓰레기를 버리는 자는 처벌 받습니다!’ 라고 쓰여 있는 걸 꽤 여러 번 봤다. 어느 사무실에서 ‘왜 한 번도 먹은 적이 없는 귤껍질이 한 봉지가 버려져 있을까요? 5분 전에도 없었는데 지금은 있거든요? 여기 계시는 사모님들 중에 한 분이니 이따가 가실 때에는 제발 가져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나중에 물어 보니 아무도 안 가져가더라고 했는데 그 중 누군가가 ‘공개 할까요 전 알아요?’ 이렇게 우리는 양심을 버리고 살아가야 하는 지요? 소문이 자꾸 나다가 보니 모두가 다 알게 되었고, 그 뻔뻔한 여자는 오히려 ‘어머 직접 말해 주면 가져갔을 텐데 전 그런 말 들은 적이 없어요...’ 인간보다 CCTV가 웃을 일들이 너무 많아서... 내 양심을 똑바로 가지고 사는 세상이 되길 꿈꾸면서.
- 2016-08-08 16:30
-
- [브라보가 만난 사람]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상자’- ‘난곡동 수호천사’ 주사랑공동체 이종락 목사
- “우리 모두 위험에 처한 아기들과 이웃을 위해 기도합시다.” 영화가 끝나고 한 관객의 말에 극장은 어느새 예배당이 되었고, 관객들은 한참동안 그곳에서 두 손을 모아 기도했다. 낙태를 결심했던 한 여성은 눈물로 참회하며 아기를 낳겠다고 마음먹었고, 시한부 선고를 받은 말기 암 환자는 생을 마감하는 그날까지 어려운 이웃을 돌아보며 살 것을 다짐했다. 영화 가 불러온 변화였다. 엄밀히 말하면, 주사랑공동체 이종락(李鐘洛·62) 목사가 만든 ‘베이비박스’가 일으킨 기적과도 같다.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2007년 12월 강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어느 날 새벽, 대문 앞에 정체 모를 굴비상자가 하나 놓여 있었다. 비릿한 향이 코끝을 자극했고, 그 냄새를 맡은 길고양이들이 상자 주변을 서성거렸다. 뚜껑을 열어 본 이종락 목사는 가슴이 철렁했다. 상자 속에 든 것은 바로 갓난아기였기 때문. 하마터면 추위에 동사하거나 길고양이들의 위협을 받았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도 잠시, 어쩌면 더 많은 생명이 위험에 빠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찔해졌다. 길거리에 방치된 생명을 구하기 위한 해결책이 필요했다. 그러던 중 이 목사는 체코의 ‘베이비박스’ 소식을 들었고, 2009년 12월 가로 70cm, 세로 45cm, 높이 60cm의 베이비박스를 직접 만들어 서울 난곡동 주사랑공동체 교회외벽에 설치했다. 보온효과가 있는 따뜻하고 푹신한 베이비박스에 아기가 들어오는 순간 교회 내부의 벨이 울리도록 설계했다. 막상 그렇게 마련해 놓고도 그 벨이 울리지 않길 바랐던 이 목사다. “제발 어린 생명이 버려지지 않길, 그러나 버려질 수밖에 없다면 차라리 이곳에 넣어 주길 기도했어요. 호기심에 사람들이 박스 문을 열어 벨이 울리곤 했는데 처음 아기가 들어온 것은 3개월 만이었어요. 이제 막 태어난 아기가 탯줄을 달고 있었는데… 그 심정은 말로 표현 못 해요. 그래도 길 가에 버려지지 않고 베이비박스 문을 열고 우리에게 와준 것에 감사했죠.” 아이를 낳은 우리 아이들, 손가락질보다는 따뜻한 손길로 한국의 베이비박스 소식을 접한 미국 서던캘리포니아 영화예술학교 학생들이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 는 2013년 미국에서 먼저 개봉했다. 50개 주 870개 극장에서 500만 관객과 만나며 제9회 샌 안토니오 기독교독립영화제 대상, 제5회 저스티스영화제 영화상을 받는 등 반응이 뜨거웠다. 이 영화를 계기로 애틀랜타주에 베이비박스가 만들어졌고, 인디애나주에서는 병원과 경찰서 등 공공기관에 베이비박스를 의무적으로 설치토록 한 법안이 나오기까지 했다. 한국에서는 올해 ‘서울국제사랑영화제’ 개막작으로 첫선을 보였고, 최근까지 몇몇 소극장에서 상영하고 있다. 영화를 본 이들은 이종락 목사의 헌신에 감탄하고 대단한 일을 했다며 박수를 치지만, 그는 너무나도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라고 설명한다. “베이비박스 사역은 목사 개인의 계획이나 목적으로 이만큼 온 것이 아니에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다 보니 여기까지 올 수 있었죠. 가령 물에 빠진 사람을 보면 건져야겠다고 생각하고, 불이 난 것을 보면 신고하는 게 맞잖아요. 길 가에 버려진 아기들을 어떻게 그냥 두고 보겠어요. 당연히 보호하고 구해야죠.” 단 한 명의 아기라도 더 살리기 위해 만든 베이비박스이지만 처음 이 사실이 매스컴을 탔을 때만 해도 곱지 않은 시선에 몸살을 앓아야 했다. 미혼모들이 무책임하게 아기를 유기하게 조장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독일의 경우, 100개가 넘는 베이비박스가 있지만 1년에 겨우 한두 명의 아이밖에 들어오지 않는 것을 보면 꼭 그렇다고 볼 수도 없었다. 게다가 2012년 출생신고를 의무화하는 입양특례법이 개정된 이후에는 베이비박스를 통해 들어온 아기가 4배 가까이 늘어났다. “입양특례법이 실행되기 전 2년 7개월 동안은 76명의 아기가 들어왔는데, 그 이후에는 1년 5개월 동안 305명이 베이비박스에 남겨졌어요. 정상적인 경우라면 아이를 낳고 출생신고를 하는 게 별거 아니지만, 미혼모나 특히 미성년자들에겐 큰 부담이죠. 그래서 산부인과를 가지 못하고 몰래 출산을 하게 되고, 베이비박스에 아기를 맡길 수밖에 없는 겁니다.” 무엇보다 아기를 두고 가는 미혼모 중 60% 이상이 미성년자라는 사실이 가슴 아픈 이 목사다. 부모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자기가 낳은 아이를 버릴 수밖에 없었던 어린 미혼모들. 그는 이러한 상황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는 부모세대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우리나라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성교육을 하는 경우가 드물죠. 자신이 가진 성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알게 된다면 아이들도 그러한 행동을 잘 절제할 수 있어요. 그래도 일이 벌어졌다면 그땐 그들을 보호하고 이야기를 들어줘야죠. 우리 아이들이잖아요. 하지만 대부분 어른들은 학생이 임신했다고 하면 행실이 바르지 못하다며 손가락질하죠. 그게 다 우리 사회의 ‘체면 문화’가 만들어낸 현상이라고 생각해요. 미성년자가 아이를 가지면 주변 사람의 시선 때문에 수치스러움을 느끼고 숨어버리게 되죠. 그러다 우울증을 겪거나 자살 등 극단적 선택을 하게 되고요.” 이 목사는 미혼모들이 찾아오면 “열 달 동안 아기를 지키느라 고생 많았다. 훌륭하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아기와 함께 자살하려고 결심했던 엄마들도 많았지만 다행스럽게도 마음을 돌려 자신을 찾아와 귀한 두 생명을 살릴 수 있어 감사하다는 이 목사다. 그와의 대화를 통해 다시 아기를 키우겠다고 데리고 간 미혼모도 150여 명이다. 그런 미혼모들을 위해 분유, 기저귀, 생활비 등을 지원해 주고 주사랑공동체에서 자격증 공부를 하며 취업을 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이 목사는 어린 엄마들을 향한 따뜻한 손길이 그들의 부모세대로부터 뻗어 나왔을 때 진정한 위로와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인생 후반전에 행복 더하기 ‘입양’ 그동안 베이비박스 문을 통해 세상의 품에 안긴 아기는 올해 900명을 넘어서 이제 1000명에 가까워졌다(2016년 7월 8일 기준 979명). 이 목사는 모든 아기의 베이비박스 일지를 쓰고 당시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긴다. 키울 수는 없지만 애정을 담은 엄마의 손편지도 함께 보관한다. 이는 부모가 다시 아기를 찾고자 할 때 귀중한 자료가 된다. 가정의 품으로 돌아가면 좋겠지만,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좋은 양부모에게 입양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한다. 이 목사도 그중 9명의 아이를 입양해 사랑으로 키우고 있다. 그가 입양한 아이들은 장애가 있거나 전신마비, 다운증후군 등을 앓고 있다. 아이 한 명을 양육하기도 힘들다고 말하는 사회에서 손길이 많이 필요한 아이들을 키우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닐 것이다. 모든 어려움을 감수하고 행복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30여 년 전, 심각한 장애를 갖고 태어난 둘째 아들 ‘은만’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의 사랑하는 보배 은만이 덕분에 생명의 거룩함, 소중함을 깨닫고 배웠어요. 몸을 움직이거나 말은 못하지만 그 아이는 눈빛으로 이야기하죠. 그 눈을 바라보면 인생은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며 사는 게 아니라는 것, 하루를 만족하고 현재를 감사히 여기고 이웃을 사랑해야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어요. 지금 9명의 아이를 입양했지만, 몇 명 더 입양하고 싶어요. 그만큼 삶의 보람과 행복이 더 커진다는 것을 알았거든요.” 입양 절차가 복잡하고 기준이 까다로운 국내에서는 입양 의사가 있던 이들도 그 과정을 견디지 못해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어려움은 있겠지만, 이 목사는 자녀들을 장성시킨 중·장년에게 입양을 적극적으로 권하고 있다. 아이를 키워 본 부모라면 알 것이다. 건강하고 훌륭하게 자란 아이들이 삶에 얼마나 큰 보람과 기쁨을 주는지 말이다. 그런 점에서 입양은 자신의 무언가를 할애하는 것이 아닌 인생에 행복을 더하는 일이라고 한다. “어제 다섯 명의 아이를 입양한 70대 중반의 교수님이 다녀가셨어요. 그분 말씀이 입양을 하고 인생이 달라졌다는 거예요. 아이들이 다 크고 출가하면 부모들은 외롭고 쓸쓸해지는데 그럴 틈이 없는 거죠. 나도 우리 첫째 딸이 자랄 땐 모르는 것도 많고 정신없이 지냈어요. 이제는 더 능숙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키울 수 있어 좋더라고요. 특히 갱년기 주부들은 우울증을 앓기도 하는데, 입양을 계기로 다시 사랑으로 아기를 키우다 보면 그 아이가 주는 기쁨으로 삶이 더 행복하고 즐거워질 거예요.” 1000명의 부모, 하나뿐인 부부 를 본 관객이라면 이종락 목사의 아내 정병옥 여사에게도 아낌없는 박수를 보낼 것이다. 아이들을 돌보고 이 목사를 내조하느라 힘들고 고단할 텐데, 영화 속 그녀는 늘 명랑한 목소리로 따뜻한 미소를 머금고 있다. 그는 그런 아내가 있었기에 수많은 생명을 지킬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 목사에게 아내는 늘 고맙고도 가장 미안한 존재다. “밤낮 안 가리고 아이들을 보살피고 키우느라 서로 대화할 정신이 없었어요. 지금은 우리가 해오던 일들에 담당자도 따로 두고 아이들도 많이 커서 조금 여유가 생긴 편이에요. 나는 그전에 참고 인내했던 마음이 많이 다독여졌지만 아내는 오히려 그런 점들을 드러내고 이야기하죠. 가끔 짜증을 부리거나 화를 낼 때도 있는데, 그만큼 내가 이 사람을 고생시켰다는 생각이 들어 측은하기도 해요.” 1000명에 가까운 아이들의 부모이자 수호천사 역할을 해온 부부이지만, 정작 남편과 아내의 모습으로 서로를 마주했던 시간은 적었다고 한다. 무심하고 소홀했던 지난날은 묻어두고, 매주 목요일을 휴일로 정해 단둘이 뜻깊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동안 낯간지러워 못했던 애정 표현도 이제는 자주 하려고 노력한다는 이 목사다. “아내는 나중에 하늘나라에 가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큰 위로를 받을 거예요. 하지만 그것 외에 지금까지 내가 남편으로서 잘 해주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노력하고 고마움을 표현해야죠. 무뚝뚝한 경상도 남자라 ‘사랑한다’는 말도 제대로 못 했었는데, 요즘은 달라졌어요. 아내가 안 좋은 이야기를 하더라도 마지막엔 내가 ‘아이 러브 유’라고 말하죠. 처음엔 서투르고 어색했는데, 그렇게 표현하는 것도 버릇이 되면 괜찮더라고요. 물론 서로 잔소리도 하고 툭툭거리기도 하는데 알고 보면 그게 바로 오랜 세월을 함께한 부부의 두터운 사랑이고 정이죠.”
- 2016-07-28 10:38
-
- 입을 최대한 잘 이용하는 국민
- 일본 사람들은 입이 하는 일은 말 하는 것과 먹는 일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우선 모든 말들을 정해서 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아침, 점심, 저녁에 마주치면 정해 놓은 인사들을 항상 주고받는다. 서로가 만나면 으레 하는 말이기 때문에 쑥스럽지도 않고 민망스럽지도 않다. 그냥 웃으면서 아니면 모른 척하면서 지나는 일이 없다.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도 친절하게 높고도 밝은 톤으로 인사말을 건넨다. ‘오하요~’ ‘곤니찌와’ ‘곤방와’ 멋진 말을 걱정하며 궁리하지 않아도 좋다. 물론 우리에게도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건강하세요?’ ‘오, 좋은 일 있어요?’ 등등 많다. 그렇게 우린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그날 기분에 따라 아니면 상대방에게 맞는 인사말을 고르든지 만들어서 하게 된다. 자유로운 성격이 나타나는 우리다. 그러나 일본 사람들은 아니다. 정해져 있는 말을 어느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주고받는다. 어느 면으로 정말 편하다. 그 말을 하고 지나가면 누가 뭐라 시비도 안 걸고 서로 유쾌하게 지나가니 말이다. 바빠도 무슨 일이 생겨도 그 인사를 하고 지나가면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더 좋다. 지극히 평등하다. 또 어른 아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다 통한다. 지위가 높던지 낮던지 통상의 인사말은 그걸로 족하다. 물론 시대극을 보면 다르지만 내가 하는 얘기는 어디 까지나 우리 모두의 평상인들을 대상으로 얘기하는 것이다. 그 인사를 하면서 편안하고 가볍게 웃어주면 서로가 좋은 것이다. 필자가 무슨 일을 열심히 하고 나면 ‘오쯔까레사마데시다’ 라는 수고했다는 인사를 해 준다 피로가 풀려가는 기분이 들고 뭔지 고맙고 힘이 나는 듯한 기분에 휩싸이게 해주는데 충분한 말이다. 미용실에 가서 머리손질을 하고 나가는 한 사람의 손님에게도 미용사 전원이 정중하게 큰 목소리로 소리쳐 준다. 처음에는 어찌나 큰 인사 소리에 어리둥절하며 순간 부끄러운 기분도 들었지만 얼른 ‘하이하이, 아리가또우고자이마스’ 라고 인사를 하게 되어버린다. 얼른 웃으며 대답하게 하는 위력을 지닌 밝고도 큰 목소리의 정해진 인사다. 그런 식으로의 인사가 일본에는 너무도 많다. 처음엔 별 웃기는 민족이 다 있네 했지만 그 모든 것들이 완전 몸에 배어 생활화되어있는 그들의 행동에 조금씩 긍정적인 요소가 생겼다. 그들은 그렇게 자기를 예의 바르게 항상 연습하며 살아가는 국민성을 가지고 있는 게 약간 부러워졌다. 처음엔 별 희한한 형식적인 말들을 멋대가리 없이 잘도 지킨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떤 틀에 박힌 말들을 주고받는 사이 깍듯한 예의를 몸에 익히게 되는 거 같았다. 아무렇게나 입에서 나오는 대로 하다 보면 실수가 생기는 법. 그러다 보니 국민들에게 개돼지...운운하는 상황이 벌어진 게 아닐까? 그들은 그 자리 그 자리에 꼭 필요한 말들을 정해 놓고 앵무새처럼 전 국민이 지켜 나가는 게 놀랍다. 정해진 인사들을 주고받으니 서로의 잘잘못을 들춰내지도 않는다. 최소한의 예의들을 지켜갈 수가 있는 말들이 전부 있으니 말이다. 거기에 비하면 우린 정해져 있는 인사들도 태반이 안 지키며 적당히 얼버무리며 살아가는 기분이 든다. 같은 입을 가지고 있으면서 너무 아끼는 기분마저 들 때도 있다.
- 2016-07-25 12:26
-
- 한국의 미래는 아이들의 울음소리에 달렸다
- 한국이 출산율을 높이고자 최근 매년 10조 원 이상을 쓰는데도 출산율은 2015년 기준 1,24명으로 1.3명의 벽을 뚫지 못하고 있다. ‘1960년 합계 출산율(여성 1명이 평생 동안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평균 자녀수) 6.0명→1990년 1.5명→2013년 1.22명→2015년 1.24명인 것이다. (2015.1.11.통계청‧‧보건복지부 잠정집계) 삼성경제연구소에 따르면 이대로 가다간 2100년 인구는 지금의 절반인 2,468만으로 줄어들 것이란 예상이다. 심지어 2500년에는 중남미 소국인 바하마 인구수준인 33만 명 수준이 될 것이란 최악의 시나리오를 내놨다. 전문가들은 취업-결혼-첫 출산-둘째 출산으로 이어지는 연결고리가 끊어졌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문제가 심각하다. 아이를 낳아 기를 수 있는 환경이 안 되는 것이다. 옛날에는 남편은 벌고 아내는 아이를 기르는 것이 보편화 되어 있었다. 아니면 할아버지 할머니가 함께 살면서 자녀를 봐주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은 혼자 벌어 집 장만하기가 요원하다. 둘이 죽자 하고 벌어야 집도 마련할 수 있다. 핵가족 시대가 된 요즘 아이만 덜컥 어른들에게 맡기기도 여의치 않다. 그나마 국공립 어린이집은 경쟁이 치열할 정도다. 아는 지인 중 한 사람이 의대를 나와 고향에 가서 산부인과를 개업하고 고향에 봉사하고자 했다. 그런데 몇 년 만에 접고 올라와야 했다. 아기를 받아본 것이 몇 명 안 된다는 것이다. ‘이래 가지고야 입에 풀칠하기도 어렵다.’라는 그의 말이다. 어느 TV에서는 일부 산부인과는 폐업하고 피부과를 개업하였다며 비싼 산부인과 기계가 먼지가 쌓인 채 덮여 있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시골 마을에 아기가 없다. 노인들만이 마을을 지키는 시골이 늘어난다. 그러다 보니 폐교도 늘어난다. 어린 학생들로 넘쳐나야 할 학교가 전교생 다 합쳐 4명이라는 뉴스를 보며 마음이 아프다. 그 학교도 6학년 두 명이 졸업하면 조만간 문을 닫을 것이라 한다. 출산에 따른 가족계획표어를 살펴보면 격세지감을 느낀다. 1963년 ‘덮어놓고 낳다 보면 거지꼴 못 면한다’ 1966년 ‘3명의 자녀를 3년 터울로 35세 이전에 단산하자’ 1971년 ‘딸·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1980년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 1986년 ‘하나로 만족합니다. 우리는 외동딸’, 1990년 ‘엄마건강 아기 건강 적게 낳아 밝은 생활’ 등 이었다. 2004년 “아빠! 하나는 싫어요. 엄마! 저도 동생을 갖고 싶어요.”라는 내용의 가족계획 표어가 선보였고, 2006년 “낳을수록 희망 가득 기를수록 행복 가득”으로 보다 적극적으로 출산을 장려하는 내용으로 변했다. 2010년대 ‘하나는 외롭습니다. 자녀에게 가장 좋은 선물은 동생입니다.’라는 표어와 ‘아들딸 구별 말고 많이 낳아 잘 기르자!’ 하는 표어가 등장했다. 출산장려에 나선 보건 복지부가 전 국민에 출산장려 공모를 시행하기에 이르렀다. "자녀는 평생 선물, 자녀끼리 평생 친구." 이 표어가 2014년 7월 제3회 인구의 날에 보건복지부가 실시한 출산장려 국민표어 공모전에서 우수작으로 선정된 작품이다. 물론 표어가 출산장려를 촉진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노년인구는 늘어나는데 생산인구가 줄어든다는 것은 심각한 일이다. 가분수 형의 인구구조로는 밝은 미래를 기약할 수 없다. 지금이 그 전환점인 것만은 확실하다.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모든 여건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이제 그 몫은 정부에 있다. 여건만 되면 더 낳겠다고 한다. 국가가 그들에게 믿음을 주어야 할 차례다. 국가가 아이들을 키워준다는 믿음이다. 그래야 아이 울음소리가 도심 한가운데서 부터 저 지리산 꼴짜기 마을까지 우렁차게 울려 퍼질 것이다.
- 2016-07-20 16:04
-
- [BOOK Interveiw] <무심한 듯 다정한>의 저자 정서윤 작가와 어머니 최순이씨의 이야기
- 길고양이로 살다 입양된 순돌이와 저자의 어머니가 진정한 가족이 되어가는 과정을 3년에 걸쳐 기록한 사진 에세이다. 저자에게 순돌이는 막내 동생처럼 귀엽고, 자식들이 장성한 뒤 헛헛한 일상을 보내던 어머니에게는 손주처럼 사랑스러운 존재다. 의 저자 정서윤 작가와 어머니 최순이씨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Q. 고양이(순돌이) 사진을 찍다가 어머니의 모습이 담긴 책으로 펴내기까지 A. 저자: 길에서 만난 순돌이에게 가족을 찾아주고 싶었지만 남루한 모습에 다 큰 고양이라 입양처를 찾기 어려웠습니다. 결국, 5개월 동안 거의 매일 밥을 챙겨주다 가족이 되었습니다. 사랑을 주고받는 가족이 생기면서 순돌이가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고, 상대적으로 입양이 힘든 성묘(成猫)도 충분히 사랑스럽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순돌이가 엄마랑 보내는 시간이 많다 보니 자연스럽게 둘이 함께 촬영한 사진이 많아졌습니다. 그러면서 엄마를 담은 사진이 거의 없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깨달았습니다. SNS에 순돌이와 엄마의 일상을 기록했더니, 많은 사람이 좋아해주었습니다. 결과물들이 모여 책으로 만들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막연하게 했었는데, 마침 출판 제의가 들어왔습니다. Q. 책 제목이 담고 있는 의미 A. 저자: 엄마도 고양이도 겉으로는 무심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엄마는 가족을 위해 늘 묵주 기도를 하고, 순돌이도 무심한 척하지만 가족 곁을 맴돌며 소소한 애정 표현을 합니다. 겉으로는 무심하게 대하지만, 속마음은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나타내고 싶었습니다. 그런 엄마와 고양이를 설명하는 가장 적절한 표현일 것 같습니다. Q. ‘(책에서)순돌이와 예정된 이별을 생각하면서 엄마와의 이별을 생각 못했다’는 깨달음이 준 변화 A. 저자: 무엇보다 엄마, 순돌이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엄마는 몇 년 전부터 허리가 안 좋아 오랜 시간 차 타는 것을 힘들어합니다. 그래서 멀지 않은 맛집이나 카페에 함께 다니기도 하고, 주말이면 성당 미사 후 단둘이 점심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눕니다. 일상에서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하며 소소한 추억을 쌓고 싶습니다. 그러나 마음만 앞섰지 현실에서는 내 생활이 바쁘다는 핑계로 엄마와 순돌이를 많이 챙기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Q. 순돌이와 딸이 닮은 점 A. 어머니: 순돌이는 순하지만, 때로는 새침하고 예민합니다. 이런 점이 딸이랑 닮았습니다. 순돌이는 잠을 잘 때면 저를 찾는데, 늦둥이로 낳아 제법 컸을 때까지 제 곁에서 자려 하던 딸이 떠오릅니다. 어른이 되고도 악몽을 꾸면 제 품을 파고들던 딸이 생각납니다. 이제는 손주들도 다 장성해서, 순돌이는 제게 어린 손자 같습니다. 딸은 직장 일로 바쁘고, 남편과는 별다른 대화가 없습니다. 그래서 집안은 대체로 조용하고 특별히 웃을 일이 없지만, 순돌이의 재롱을 보면 웃음이 납니다. Q. 노년기에 반려동물을 키워서 좋은 점 A. 어머니:외출하고 돌아오면 누구보다 먼저 달려와 반겨줍니다. 장성한 딸은 늦게 들어오고, 무뚝뚝한 남편과는 별다른 대화가 없는 덤덤한 집안 분위기에 순돌이가 있어 웃을 일이 있고, 순돌이 이야기로 대화가 됩니다. 늘 곁을 맴돌고 내 옆에서 잠자는 순돌이가 좋습니다. 희한하게도 순돌이는 자기 주인(딸)을 더 좋아하지만 잠은 꼭 제 곁에서 자려 합니다. 가족이 식사할 때면 자기도 간식을 달라 보채고, ‘까까’라고 말하면 다 알아듣고 달려옵니다. 동물이지만 정을 나누고 사니 이런 모습들이 다 예쁘고 그렇게 좋을 수가 없습니다. (무엇 때문에 좋은 게 아니라) 그냥 내가 키우는 동물이니 좋습니다. >>정서윤 작가 대학에서 특수교육을 전공하고 현재 부산에서 장애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2013년부터 순돌이와 노모의 일상을 사진으로 기록하고 있다.
- 2016-07-18 14: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