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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나는 뮤지컬 <킹키부츠 >
- 요즘 들어 뮤지컬 볼 기회가 많다. 오늘 관람한 공연은 정말 신바람 나는 노래와 춤의 향연이었다. 제목은 좀 생소한 다. 뮤지컬 티켓을 받아 들고서도 나는 ‘킹키부츠’가 무슨 뜻인지 잘 몰랐다. 부츠라고 하니 구두일 것이라는 짐작만 했는데 카탈로그 사진을 보고서 ‘아-이게 킹키부츠구나’ 했다. 80센티미터의 길이에 강렬한 색상과 아찔한 높이의 킬 힐이 ‘킹키부츠’로 여장 남자들이 신는 부츠의 종류를 말하는 것이라니 범상치 않은 구둣가게 이야기일 것으로 생각되었다. 내게는 영화나 연극, 뮤지컬 공연을 같이 다니는 삼총사 친구가 있다. 이번엔 티켓 값이 무려 14만 원이나 했는데 할인 구매한 티켓이 4장이어서 삼총사 외에 동창을 한 명 더 초대했다. 공연 시작이 7시 30분이라 우리는 5시쯤 이태원 블루스퀘어 공연장 앞에서 만나 오랜만에 경리단 길도 걷고 맛있는 식사도 즐겼다. 시작 시간에 맞춰 공연장으로 가니 주말이어서 그런 건지 뮤지컬 배우들의 인기 때문에 그런 건지 객석이 빈틈없이 꽉 찼다. 얼마 전에 봤던 나 등은 알고 있는 내용이었는데 오늘 관람하는 는 줄거리를 전혀 알지 못해 더 흥미롭고 기대되었다. 스토리는 영국 노샘프턴에 있는 ‘프라이스 & 선 제화점’이라는 구둣가게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였다. 주인공 ‘찰리’는 아버지가 운영하는 구두공장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구두만이 전부인 세계에서 자랐다. 찰리의 아버지는 고급 수제 남성화만 고집하는 사람이었다. 대학을 졸업한 찰리는 여자 친구 ‘니콜라’와 함께 지겨운 시골 마을에서 벗어나 런던에서 새 삶을 시작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새로운 곳에서 짐을 풀기도 전에 아버지의 사망으로 구두공장을 물려받게 된 찰리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다. 고급스럽지만 유행에 뒤떨어진 수제 구두만 고집했던 아버지의 구두공장은 마구 밀려드는 저가 수입 제품 때문에 문을 닫아야 할 형편에 놓여 있었고 오랜 시간 함께 일한 공장 식구들도 해고해야 할 상황에 이르러 있었다. 이때 똑똑한 여직원 ‘로렌’이 새로운 틈새시장을 개척해야 한다고 조언하고 찰리는 망해가는 공장을 다시 일으킬 결심을 한다. 찰리가 아는 사람 중에는 유쾌한 여장 남자 ‘로라’가 있었다. 로라에게서 아이디어를 얻은 찰리는 여장 남자들이 편하게 신을 수 있는 아름다우면서도 튼튼한 ‘킹키부츠’로 공장을 다시 일으킬 계획을 세운 뒤 로라를 구두 디자이너로 데려와 밀라노에서 열리는 패션쇼에 ‘킹키부츠’를 선보이려 한다. 그러나 여장 남자인 로라를 공장 사람들은 탐탁해하지 않았고 사사건건 시비가 붙었다. 그러던 어느 날 로라는 공장 직원인 ‘돈’과 권투시합을 하게 된다. 사실 로라의 아버지는 권투선수였다. 자신을 남자답게 기르려고 어릴 때부터 권투를 가르쳤던 아버지 덕분에 로라는 권투를 잘하게 되었다. 그러나 시합 날 로라는 일부러 돈에게 져주었고 그걸 알게 된 공장 사람들은 로라를 좋아하게 된다.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킹키부츠’로 성공하게 된다는 이야기인데 주인공 찰리 역할은 탤런트 ‘이지훈’이 맡았고 로라 역할은 ‘정성화’가 맡아 열연을 펼쳤다. 정성화는 뮤지컬 에서 안중근 역으로 감동을 주더니 이번 작품에서는 여장을 하고 나와 관객을 즐겁게 해줬다. 특히 로라와 함께 여장 남자로 분장한 엔젤 팀 남자 배우들이 어찌나 예쁜지 나는 그들이 남자라는 사실을 극 중반에야 알았다. 6명의 엔젤 중에 예쁘긴 한데 어쩐지 남자 같은 이미지가 느껴져 옆자리 친구에게 “저기 두 번째 있는 사람은 남자인가봐.” 했더니 “다 남자야.” 해서 깜짝 놀랐다. 여자보다 더 예쁜 남자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허벅지까지 오는 킬 힐의 ‘킹키부츠’를 신고 노래와 춤을 췄다. 그들이 얼마나 열심히 연습을 했을지 짐작이 되었다. 다른 뮤지컬과 다르게 관객들이 소리도 지르고 손뼉도 치며 호응하는 모습이 매우 흥겨웠다. 나와 친구들도 마구 환호하며 신나게 관람했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엔젤 팀의 여장 남자들이 객석을 돌아다니며 관객의 호응을 유도했다. 관객들이 모두 일어서서 몸을 흔들며 손뼉을 치고 있는데 갑자기 누가 내 어깨를 두드려서 돌아보니 예쁜 엔젤들이 지나가며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하이파이브도 하고 객석이 들썩일 만큼 즐거운 시간이었다. 배우들이 객석을 누비고 다니며 관객과 소통하는 모습은 끝까지 많은 감동을 주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함께 공연을 본 친구들에게서 카톡이 왔다. 오랜만에 신나는 공연 봐서 좋았다며 고맙다고 했다. 가을이 오는 길목에서 유쾌하고 신나는 뮤지컬로 우정도 다지고 맘껏 즐거웠던 하루였다.
- 2016-10-14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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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ULTURE] 9월의 추천 전시ㆍ도서ㆍ영화ㆍ공연
- ◇ 전시(Exhibition) 앤서니 브라운 전-행복한 미술관 (Anthony Browne Exhibition-Happy Museum) 일정 9월 25일까지 장소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세계적인 그림책 작가 앤서니 브라운(Anthony Browne)의 기발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그림 200여 점을 만날 수 있는 대규모 전시다. ‘행복한 미술관’이라는 부제로 기획된 이번 전시는 6월 개막 첫 주에 1만여 명의 관객이 다녀갔다. 남녀노소가 흥미를 느낄 수 있는 이색적인 그림들과 더불어 앤서니 브라운의 책들을 마음껏 읽을 수 있는 ‘행복한 도서관’ 코너도 마련돼 있다. 전시장에서 관람한 그림들을 책을 통해 다시 감상할 수 있어 아이들과 함께 즐기기 좋다. 2016 광주비엔날레 ‘제8기후대(THE EIGHT CLIMATE)’ 일정 9월 2일~11월 6일 장소 광주 비엔날레전시관, 아시아문화전당, 무등현대미술관 등 ‘제8기후대’라는 콘셉트로 열리는 전람회인 만큼 전시 공간마다 온도, 밀도, 분위기, 기압 등 다양한 기후 환경을 연출한다. 절제된 색과 요소들로 표현한 이번 공식 포스터에는 예술의 역동적인 움직임과 미래에 대한 가능성이 담겨 있다. 방향성, 발전, 흐름, 변화하는 움직임, 목표를 향한 전진 등을 의미하는 화살표를 통해 ‘예술은 무엇을 하는가?’라는 물음을 던진다. 37개국 97팀(119명)의 다양한 작품을 만날 수 있다. ◇ 도서(Book) 세종의 서재(박현모 외 11명 공저ㆍ서해문집) 여주대 ‘세종시대 문헌연구팀’의 심층해제문 중에서 ‘세종시대를 잘 드러내는 문헌’과 ‘세종을 만든 책’을 선별해 담았다. ‘1부-세종시대가 만든 책’, ‘2부-세종을 만든 책’으로 크게 분류해 등 12권의 책에 대해 이야기한다. 문헌별로 전문가들의 해제와 더불어 그 책이 세종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를 설명한다. 도넛을 구멍만 남기고 먹는 방법(오사카대학 쇼세키카 프로젝트ㆍ글항아리) 도넛을 구멍만 남기고 먹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상식을 의심해 보는 것에서 시작하는 책이다. 수학, 공학, 미학, 역사학, 법학, 화학, 경제학, 정신의학 등 다양한 학문의 관점에서 ‘도넛의 구멍’이라는 개념에 대해 파헤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학문과 탐구라는 영역을 더 흥미롭게 접하고 새로운 지식을 얻을 수 있도록 했다. ◇ 영화(Movie) 평범한 50대 주부가 찾은 인생의 행복 개봉 9월 29일 장르 드라마 감독 미아 한센 러브 출연 이자벨 위페르, 로만 콜린카, 에디뜨 스콥 등 2016 베를린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은 프랑스 신예 감독 미아 한센 러브의 신작이다. 한 가정의 아내·엄마이자, 존경받는 교사로 평범하게 살던 50대 여성이 갑작스러운 남편의 고백 이후 불안한 삶 속에서 자신만의 행복을 찾아 나서는 이야기다. 평온했던 일상이 파괴되며 새롭게 다가오는 것들을 마주하는 주인공 역에 세계 3대 영화제(칸·베를린·베니스) 여우주연상을 휩쓸었던 배우 이자벨 위페르가 캐스팅돼 기대를 모았다. 폭탄 달린 경성행 열차에 탄 두 남자 개봉 9월 7일 장르 액션, 드라마 감독 김지운 출연 송강호, 공유, 한지민, 엄태구, 신성록 등 1920년대 말, 일제의 주요 시설을 파괴하기 위해 상하이에서 경성으로 폭탄을 들여오려는 의열단과 이를 쫓는 조선인 일본 경찰의 갈등과 우정을 그렸다. 김지운 감독은 과 에 이어 이번 영화로도 토론토 국제영화제에 초청을 받았다. 김 감독과 네 번째 영화를 작업하는 배우 송강호가 조선인 일본 경찰 역을, 1000만 관객을 돌파한 흥행작 의 주인공 공유가 의열단의 리더를 맡아 미묘한 두 남자의 관계를 연기한다. ◇ 공연(Stage) 부를수록 그리운 어머니의 사랑 일정 9월 10일~10월 30일 장소 국립중앙박물관 극장 용 연출 이종훈 출연 고두심, 김영옥, 이홍렬, 이종원 등 1998년 세종문화회관 초연 당시 전회 매진을 기록한 작품으로, 1990년대 대표 악극 중 하나다. 올해는 원작 내용을 바탕으로 현대적인 해석과 세련된 무대 연출로 50일간 공연한다. 이전보다 젊은 배우들을 캐스팅해 그간의 신파형 악극을 탈피하고, 우리 춤과 노래를 보강했다. 아름다운 초상화에 가려진 욕망 일정 9월 3일~10월 29일 장소 성남아트센터 오페라하우스 연출 이지나 출연 김준수, 박은태, 최재웅, 홍서영 등 오스카 와일드의 장편 소설 을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 불멸의 아름다움을 얻고자 했던 도리안의 삶과 깨달음을 노래한다. 체코 프라하의 이국적 풍경에 몽환적인 색감이 어우러진 포스터가 인상적이다. 20년 전 사라진 그날의 사건 일정 11월 6일까지 장소 충무아트홀 대극장 연출 장유정 출연 유준상, 지창욱, 오만석, 오종혁 등 고(故) 김광석이 불렀던 노래와 더불어 청와대 경호관이라는 인물을 통해 펼쳐지는 미스터리한 전개가 돋보이는 창작 뮤지컬이다. 2013년 초연부터 참여한 배우 유준상과 지창욱을 비롯해 장유정 연출, 장소영 음악감독, 신선호 안무 감독이 함께해 완성도를 높였다. 음악으로 만나는 서울 일정 9월 8일 장소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 연출 황준연 출연 서울시국악관현악단 서울의 620년 역사를 현대적으로 해석한 관현악 연주회다. 북한산, 청계천 광통교 서화시장, 보신각, 전차 등 서울이 걸어 온 자취와 미래의 모습을 담은 음악들을 감상할 수 있다. 자동차가 달리고 고층빌딩으로 가득한 오늘의 서울, 산과 들, 강이 어우러진 옛 한양의 모습을 담았다.
- 2016-09-13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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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로-암(Pro-Am)
- 9월3일 쉐라톤그랜드워커힐 비스타홀에서 열린 2016 코리아 수퍼스타즈 페스티벌에 다녀 왔다. 이 행사의 특징은 프로-암이 주축이며 프로 갈라 쇼도 곁들였다는 점이다. 프로- 암이란 프로와 아마추어가 한 커플이 되어 플로어에서 같이 춤을 추는 것이다. 주로 시범 댄스의 경우가 많지만, 우열을 가리는 경기 대회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점차 프로-암 댄스가 확산되어 가는 추세이다. 다른 경기 대회에도 프로-암부문에 출전하는 사람들이 종종 보인다. 외국의 경우는 일찍부터 성행해 왔었다. 프로-암의 동기는 아무래도 프로와 춤추고 싶은 아마추어가 많다는 얘기이다. 일반인들끼리 추자니 춤의 기량도 떨어지고 무엇보다 커플로 마음이 맞아서 같이 추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시간도 맞아야 하고 경제적인 처지도 비슷해야 바람직하다. 일반인들끼리 파트너가 되면 남들 시선도 의식해야 한다. 둘 사이에 사적인 감정이 오고 갈 수 있다. 그런 면에서 프로-암은 한쪽은 춤을 직업으로 하는 프로이고 기량도 보장된다. 아마추어는 한쪽 파트너 문제가 해결되었으므로 자신의 문제만 거기 맞추면 되는 것이다. 프로-암으로 같이 연습하게 되면 거의 개인 레슨 수준으로 교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기량이 느는 것은 확실하다. 여기까지는 좋다. 그런데 프로-암의 문제점도 많다. 아마추어인 사람의 부담이 너무 크다는 것이다. 물론 경제적인 여유가 있어서 좋아하는 취미에 돈을 쓰겠다는 것은 비난할 일이 아니다. 개인 레슨비용에 더해서 작품비, 심지어 프로의 드레스까지 해주는 경우도 있다. 개인 레슨 후의 식사비는 푼돈이다. 어떤 경우는 플로어에 단독으로 올라가므로 그에 대한 비용을 별도로 내거나 한 테이블 식사비용을 책임지기도 한다. 프로와 같이 춤을 추는 아마추어의 경우, 마치 자신도 프로로 착각하는 사람도 있다. 다른 일반인들을 깔보는 것이다. 물론 남들보다 더 많은 시간을 투자했고 개인 레슨에 준하는 레슨을 받았으므로 더 잘 추는 것은 당연하다. 댄스 경기 대회에서 프로-암으로 출전하면 다른 출전 팀이 많지 않아 단독 우승이나 상위권 성적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자신의 실력이 프로는 아니다. 다른 커플과 경합했을 때 냉정하게 실력만으로 우열을 결정하기도 쉽지 않다. 프로의 경우 프로끼리 또 서열이 있기 때문이다. 아마추어 또한 만만한 게 아니다. 프로 부문 외에 청소년부 장년부처럼 나이별로도 출전 부문이 나눠져 있고, 나이에 관계 없이 출전할 수 있는 부문이 일반부, 아마추어 부문이다. 그중에 아마추어 부문은 중하위 프로 선수 못지 않은 젊은 선수들도 출전하기 때문에 결코 만만치 않은 수준이다. 그러므로 프로가 아니면 아마추어는 아니다. 최소한 여러 부문 경기에 출전하여 경험과 기량을 쌓아야 아마추어 부문에 출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기량도 쌓아야 하지만, 인정도 받아야 한다. 그런 과정 없이 프로-암으로 바로 출전했다고 아마추어를 뛰어 넘은 것은 아니라는 얘기이다. '프로-A'라고 프로와 아마추어의 징검다리 급도 있긴 하다. 이 경우는 두 사람이 프로 못지 않게 열심히 연습해서 장차 프로 선수가 되려는 사람들이다. 둘 다 아직 프로가 아니다. 프로는 프로이다. 직업으로 하는 사람을 말한다. 그러므로 아마추어와 프로의 차이는 엄청나게 크다. 아마추어가 춤을 좀 잘 춘다고 해서 프로는 아니라는 얘기이다. 프로는 생업이므로 매일 춤을 연습해야 하고 당연히 기량도 높아야 한다. 그러나 여가나 취미로 춤을 배우는 사람이 프로라고 얘기할 수는 없다. 우리나라는 프로의 관문이 높지 않아서 라틴댄스 건 스탠더드 댄스 건 5종목을 할 수 있으면 누구나 프로 부문에 출전할 수 있다. 일단 한번 만 출전해도 프로 소리를 듣는다. 그 목적을 위해서 프로 부문에 출전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심사위원들이 보고 있고 관중들이 보고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2003년에 영국에 IDTA 국제댄스지도자자격증 시험을 보기 위해 갔었다. 당시 ‘테크닉 오브 라틴댄싱’의 저자 월터 레어드(Walter Laird)의 비서를 했던 준 먹머르도(June MucMurdo) 여사에게 레슨을 받았다. 시험에서는 커플댄스도 보여줘야 하는데 객지인 런던에서 여자 파트너를 구할 수 없었다. 구한다 하더라도 같이 또 커플댄스 시연에 대한 레슨을 받아야 하고 그 파트너에게 사례를 해야 했다. 그런데 결국 파트너를 구하지 못했고 시험 볼 때 준 여사가 커플 댄스의 파트너 역할을 해줬다. 세계적인 저명인사가 파트너가 되어 주니 커플댄스 점수는 당연히 높게 나올 수밖에 없었다. 별도의 사례를 하려고 했더니 극구 사양했다. 레슨을 해줬으니 커플댄스 파트너가 되어주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었다.
- 2016-09-12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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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의 변화가 된 이 한권의 책] 월터 레어드(Walter Laird)의 테크닉 오브 라틴댄싱(Technique of Latin Dancing)
- 2003년이니 스포츠 댄스를 배운지 10년쯤 되었을 무렵이다. 당시만 해도 댄스에 대한 이미지도 아직 개선되지 않았었고, 스포츠댄스를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스포츠 댄스를 가르친다 하여 등록했으나 배우다 보니 스포츠 댄스가 아닌 포크댄스였다. 지터벅 같은 사교댄스를 가르치기도 했다. 3년쯤 지나자 그 강사 밑에서는 더 배울 것도 없고 지루해 하던 차에 집이 이사 가면서 집근처 다른 문화센터로 옮겼다. 이 강사는 스포츠 댄스를 제대로 배운 사람으로 덕분에 많이 배웠다. 그러나 강사의 동작을 따라 하는 교습 방식이라 늘 이론에 목이 말랐다. 그런데 “춤은 몸으로 하는 것이지 이론은 필요 없다”며 이론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다시 다른 사정이 있어 다른 곳으로 옮겨 라틴댄스를 배우게 되었다. 내가 전체 회장이 되면서 강사와 가까워졌다. 어느 날 강사의 차 안에서 표지도 없이 너덜너덜한 상태로 굴러다니는 책 한권을 발견하고 호기심 있게 봤다. 스포츠 댄스의 모든 종목과 모든 동작이 남녀 스텝 따로 자세히 나와 있는 책이었다. 다만, 영어로 되어 있고 각 스텝이 차트 방식으로 정리 되어 있었다. 중국 무술 영화에서 비장의 기술을 적어 놓은 책 같은 영감을 받았다. 비기가 적혀 있는 책을 습득하기만 하면 산 속에 들어가 혼자 연마하여 중원의 일인자가 된다는 중국 영화가 많았다. 그 책에 대해 강사에게 물었으나 영어가 약한 강사는 더 얘기해줄 것이 없다고만 했다. 다만 그간 원어인 영어로 하자니 혀도 안돌아가고 수강생들도 못 알아들으니 춤 동작은 번호로 통 했었다. “자이브 1번부터 10번까지 해 보세요” 식이다. 이 책을 보니 동작의 이름이 명확하게 나와 있었다. 영어에는 자신이 있던 터라 책을 빌려 탐독했다. 그러나 절대 다른 사람들에게는 공개하지 않는 조건이었다. 일종의 비밀서책인 셈이다. 이 책 덕분에 인터넷에 내 이름으로 댄스에 대한 칼럼을 올리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그 당시만 해도 댄스를 말로 풀어주는 칼럼이 없었던 것이다. 어느 날 이 강사가 압구정동에 있는 한 강사를 소개시켜줬다. 이 책을 공부해서 댄스의 본고장 영국에 가서 세계적인 강사에게 레슨을 받고 국제 댄스 지도자 자격증을 따 온다는 프로그램이었다. 표지도 떨어져 나가 그간 제목도 모르던 이 책이 월터 레어드가 쓴 ‘테크닉 오브 라틴댄싱’이라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룸바, 차차차, 자이브, 삼바, 파소도블레의 남자 동작, 여자 동작의 모든 스텝, 타이밍, 박자, 다리 위치, 발바닥 사용법, 액션 명칭, 회전량, 선행 동작, 후행 동작 등이 나와 있다. 이 책을 통째로 달달 외우고 각 스텝을 몸으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처음에는 희망자가 10명이 넘었으나 갈수록 사람이 줄어 6개월이 지난 후에는 여자 프로 선수 한명과 나만 남았다. 영어로 배우는 수업도 어려웠고 매일 개인 레슨 방식으로 이론을 배운다는 것이 쉽지 않은 노릇이었다. 결국 두 명이 대망의 영국 유학길에 올랐다. 런던의 100년 넘은 유서 깊은 ‘쌤리 댄스스쿨’이란 곳이었다. 세계 챔피언 급의 유명 선수들이 와서 연습하고 배우고 하는 곳이다. 내 담당 강사는 쥰 먹머르도(June MucMurdo)라는 70대 할머니였다. 월터 레어드가 1961년에 라틴댄스를 세계에서 최초로 체계화 하여 이 책을 만들 때 옆에서 타이핑하던 비서였다고 했다. 댄스도 같이 배워 그 당시 이미 댄스계의 유명인사이며 세계적인 댄스 강사였다. 그런 사람을 스승으로 두고 배운다는 것은 내 댄스 인생에서 큰 영광이었다. 실제로 자격증 시험 과정에서 커플댄스 시연이 있는데 그 선생이 내 파트너가 되어 같이 5종목을 다 보여 줬다. 그리고 조목조목 각 세부 동작에 대한 이해를 묻는 실기와 이론 시럼을 무사히 마치고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다. 같이 갔던 여자 프로 선수는 영어가 약했기에 책 하나를 통째로 외우는데 애를 먹었다. 새벽6시부터 밤 12시까지 학원에 나가 스텝을 익히고 책이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열심히 공부했으나 시험 보름을 앞두고 정신 장애를 일으켰다. 너무나 육중한 스트레스를 이겨 내지 못한 것이다. 영어로 된 책을 머리로 이해해야 하는데 그냥 외워서 하려니 몸 따로 이론 따로 였다. 유사한 동작들이 서로 엉켜 머리가 백지가 되었다고 했다. 우여곡절 끝에 그녀도 시험을 보고 왔다. 영국에서 돌아오자마자 필자는 댄스 이론가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월터 레어드의 ‘테크닉 오브 라틴댄싱’ 책을 완벽하게 공부하고 온 최초의 동호인이라 자신감이 넘쳤다. 전국 유명 인터넷 댄스 카페에 필자 이름으로 된 방에 댄스 칼럼을 올렸다. 업계 유일의 전문잡지 ‘댄스스포츠코리아’에 편집 기자로도 활동했다. 필자 이름으로 된 댄스 책을 그 후에 5권 냈다. 모두 월터 레어드의 책이 바탕이 된 것이다. 이 책은 필자의 인생 이모작에서 확실히 내 인생을 바꿔준 책이 되었다.
- 2016-09-05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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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뮤지컬 브로드웨이 42번가
- 뮤지컬 애호가가 아니라도 ‘브로드웨이 42번가‘라는 제목은 누구나 알 수 있을 만한 작품이다. 미국 브로드웨이에서 처음 공연된 후 5,000회 이상의 장기 공연, 토니상 9개 부문 수상 등 흥행성과 작품성을 갖춘 기념비적 뮤지컬로 세계적으로 유명해 졌고 우리나라도 1996년 초연 이래 20여 년 동안 꾸준히 사랑받으며 무대에 올려졌다. 이번에 국내 초연 20주년을 기념하여 예술의 전당에서 다시 공연을 시작했다고 한다. 로열석의 티켓이 생겨서 친구와 보러 가기로 했다. 먼저 브로드웨이 42번가를 생각하면 현란하고 숨 가쁘게 펼쳐지는 탭댄스가 그려진다. 수십 명의 무희들이 일사분란하게 타닥타닥 타다닥하며 굴러대는 발소리는 참으로 유쾌하고 가슴을 시원하게 해주어서 벌써부터 기대감에 부풀어 공연 날을 기다렸다. 무대는 예술의 전당 토월극장이었는데 가보니 공연장이 필자 맘에 딱 들었다. 항상 공연을 가게 되면 좌석 때문에 불편한 점이 많았다. 소극장도 그렇지만 세종문화회관이나 큰 규모의 공연장도 앞자리 사람의 머리에 무대가 가려져 이쪽저쪽 사이로 관람하느라 신경 쓰인 적이 많았는데 예술의 전당 토월극장은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아도 좌석의 경사가 커서 앞사람에 가려 공연 보는 게 힘들 염려는 전혀 없었다. 모자를 즐겨 쓰는 필자는 연극이나 영화관에 가면 뒷사람에게 영화가 시작되면 모자를 벗을 테니 안심하라고 미리 말해 준다. 앞자리 사람의 머리와 모자 때문에 화면이나 무대가 가려지는 걸 경험했기 때문에 배려를 안 할 수가 없다. 토월극장에서는 필자와 필자친구 모두 모자를 벗지 않고 관람할 수 있어 좋다고 웃었다. 역시 뮤지컬의 시작은 막을 반쯤만 걷고 신나는 음악에 맞추어 수십 명의 다리로만 연기하는 탭댄스였다. 야망과 능력이 출중한 연출자, 이미 한 물 갔는데도 거만한 여주인공, 그 여주인공의 복잡한 남자관계, 청순 발랄한 새내기의 출현, 삼각관계와 오해, 여주인공의 발목 부상으로 공연이 중지될 위기, 이로 인해 예상치 않게 행운을 잡아 하루아침에 스타가 되는 새내기 등 뻔한 내용이지만 익숙한 음악과 경쾌한 춤이 관객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화려한 의상과 무대, 다이내믹한 탭댄스, 주옥같은 뮤지컬 넘버로 펼쳐지는 브로드웨이42번가에 이번엔 탤런트 송일국 씨와 이종혁씨가 더블 캐스팅 되었다. 여주인공도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뮤지컬 배우 김선경 씨와 최정원 씨다. 오늘 무대엔 송일국 씨와 김선경 씨가 열연을 펼쳤다. 송일국 씨도 노래를 두 세곡 했는데 역시 전문 뮤지컬 배우와는 많이 달랐지만 연기를 잘하니 보기에 괜찮았다. 송일국 씨는 ‘줄리안 마쉬‘라는 뮤지컬 연출자로 분했다. 브로드웨이 최고의 연출자 줄리안에게 ‘프리티 레이디’라는 작품은 꼭 성공시켜야 할 중요한 공연이다. 그는 여주인공으로 도로시를 캐스팅하면 10만 달러를 투자하겠다는 장난감회사 사장 에브너의 제안에 이제는 한물간 여배우인 도로시를 주인공으로 정한다. 자신이 투자자를 끌어들였다고 자만한 그녀는 거만하기만 하다. 브로드웨이 댄서가 되려고 시골에서 상경한 페기는 두려움에 주춤거리다 오디션 기회를 놓치지만 그녀의 춤을 본 안무가가 재능을 발견하고 코러스로 채용한다. ‘프리티 레이디’ 연습중 주인공 도로시가 넘어져 부상을 당하고 도로시의 부상이 페기 때문이라고 오해한 줄리안은 그를 해고시킨다. 실망한 페기는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기차역에 가는데 도로시 역할을 대신할 사람은 페기뿐이라는 단원들과 뒤늦게 오해를 푼 줄리안이 설득에 나서 공연은 무대에 올려 질 수 있게 된다는 신데렐라 같은 이야기가 펼쳐졌다. 계속되는 무더위에 지쳤던 몸과 마음이 신나고 즐거운 음악과 춤을 감상하며 다 사라진 듯하다. 어쩌면 주연 조연 모두 탭댄스와 연기를 그리도 잘 하는지 그들의 노력이 눈에 보이는 것 같다. 아직도 수십 명이 똑같이 맞춰 발을 구르던 탭댄스의 타닥타닥 경쾌한 리듬이 귓가에 맴돌고 있다.
- 2016-09-02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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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세대 이야기] 1955년생, 나의 글쓰기는 혼자 밀크캐러멜 먹기
- 글 한만수 소설가 어린 시절을 보낸 충북 영동은 워낙 산골이라서 전국적으로 소문난 난시청 지역이다. 1시간 거리에 있는 대전이며 김천만 가도 몇 개의 라디오 프로가 나오지만 영동은 FM 주파수 하나만 간신히 잡힌다. 그 시절 라든지 라는 심야 방송이 유행했었다. 별도 새도 잠든 한밤중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듣는 프로그램은 내게 신세계였다. DJ의 감미로운 목소리도 좋았지만 시청자들이 보내는 엽서의 내용이 가슴의 심장 박동 수를 빠르게 했다. 쿵작쿵작하는 트로트 선율에 길들여져 있던 내게 ‘상하이 트위스트’ 라든지 ‘울리불리 트위스트’, 톰 존스의 ‘킵 온 러닝’ 같은 신나는 노래는 가슴을 확 트이게 하는 청량음료였다. 그 밖에도 비틀스, 롤링스톤스, 사이먼 앤 가펑클 등의 목소리는 14세 중학생의 가슴 깊은 곳에 흐르는 감성의 강물에 뜨겁게 소용돌이쳐갔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서커스단이 들어왔다. 가수가 엘비스 프레슬리 흉내를 내며 ‘하운드 독(Hound dog)’을 불렀다. 가수가 무대에 섰을 때 막 밀크캐러멜 포장을 뜯고 한 개를 입에 넣었다. 가능한 한 아껴 먹으려고 밀크캐러멜을 천천히 빨았다. 노래가 끝났을 때는 언제 먹었는지 열두 개의 캐러멜을 모두 먹어 버렸다. 그는 다른 가수들처럼 마이크 앞에서 얌전히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요란한 밴드 음악에 몸을 맡기고 ‘개다리춤’을 추면서 부르는 노래는 완전히 충격이었다. 소풍을 가면 기껏해야 남진의 ‘님과 함께’를 함창하면서 손뼉이나 치고 있던 그 시절. 도시학생들처럼 나팔바지를 입고 야외전축에서 흘러나오는 팝송에 맞춰 개다리춤과 트위스트를 추었다. 친구들 앞에서 미친 듯이 몸을 흔들어 되긴 했지만 성격은 지극히 내성적이어서 글쓰기를 좋아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시절 나는 아무도 모르는 광기를 품고 있었다. 나만 광기를 품고 있었던 것은 아닐 것이다. 그 시절은 요즘과 달라서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내야 살아갈 수 있는 시대다. 부모님에게 상속받을 유산도 없었지만, 세상은 어차피 혼자 살아가야 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자라던 시대라서 모두들 미래에 대한 광기를 품고 있었을 것이다. 작가가 되겠다는 결심을 처음 한 것은 중학교 2학년 때이다. 백일장에서 ‘운동장’이란 제목으로 산문을 써서 당선된 날 밤이다. 우등상도 아니고 모범상도 아닌 그저 글 잘 써서 받은 상은 집에서 별로 환영을 받지 못했다. 혼자 밤중에 상장을 쓰다듬으면서 이다음에 작가가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작가가 되겠다는 결심은 은행원이 되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은행배지를 양복 재킷 깃에 찬란하게 달고, 잘 마시며 잘 먹다가 군대를 갔다. 군대에서는 졸병 시절부터 우연찮은 기회로 선임들의 펜팔편지, 혹은 연애편지를 대필해 주기 시작했다. 글은 쓰면 쓸수록 는다. 편지를 잘 쓴다는 소문은 금방 퍼져 나갔다. 동기들이 그늘 밑에서 휴식을 취할 때 나는 연애편지를 대필했다. 일요일에도 동기들은 화장실 뒤에 숨어 과자를 나누어 먹을 때 나는 나무 그늘 밑에서 선임이 사다 준 초코파이를 먹으면서 편지를 썼고, 동기들이 칼바람을 맞으며 얼차려를 받을 때 나는 내무반 페치카 옆에서 편지를 썼다. 어느 날 문득 중학교 2학년 때 작가가 되겠다는 결심을 했던 것이 생각났다. 그때부터 시간이 있을 때마다 소설을 썼다. 지금 생각해 보면 소설이라 할 것도 없다. 연재 형태로 써서 내무반에 돌렸는데 세월이 고래심줄처럼 질길 때여서 나름 인기는 있었다. 전역을 하고 복직을 했지만 작가의 꿈은 버려지지 않았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사표를 내고 절간에 들어가거나, 어떤 소설가처럼 영등포역 근처 닭장 방을 한 칸 얻어서 글을 쓰고 싶었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못했다. 결정적으로 직장을 그만두고 작가의 길을 걷게 된 것은 나이 36세 때이다.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꾸준히 습작을 하고 있던 어느 날 원치 않은 부서로 발령이 났다. 그날 혼자 술을 마시면서 고민을 했다. 새로운 임지로 가면 똑같은 날이 계속될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출근을 하고, 때가 되면 보너스를 타고, 또 한 해가 가고, 결국 나이가 들면 퇴직을 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남은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아주 싫었다. 고생이 되더라도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쓰면서 남은 생을 살면 적어도 후회는 하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초등학교에 다니는 자식 형제가 눈에 걸렸다. 전업주부로 사는 아내의 얼굴도 지워지지 않았다. 이튿날 나는 임지로 전출 인사를 하러 가는 대신 사직서를 제출했다. 사직서를 제출하기까지는 갈등이 파도처럼 끊임없이 밀려왔다. 막상 사표를 내니까 오히려 초연해졌다. 나름대로 열심히 일했지만 지점장은 형식적인 반려와 함께 사표를 받아들였다. 서운함보다는 내 판단이 옳았다는 것을 뼈가 저리도록 느꼈다. 세월은 결코 움켜잡을 수가 없고, 흘러간 세월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 만약 그때 상사들이 사직서를 반려했더라면 나는 지금쯤 은퇴자로 아파트 경비를 서고 있거나, 등산복을 입고 산에 오르거나, 선글라스 쓴 얼굴에 강아지를 끌고 공원 산책을 하며 물에 물탄 듯 술에 술탄 것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산골 고등학교 출신의 사직서는 대학을 졸업한 지점장의 눈에는 퇴직금 청구서 그 이상의 의미는 없었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그 점이 내게 축포를 터트려 준 셈이다. 직장을 그만두고 가장 어려웠던 점은 경제적 곤란이다. 그다음으로 새털처럼 많은 시간을 다스릴 수가 없었다. 서른여섯 살이 되도록 타인의 시간에서 살아왔던 탓에 내가 직접 시간을 조정하는 것은 쉽지가 않았다. 마음은 어서 빨리 글을 써야 경제적인 문제가 풀린다는 생각을 하고 있지만 현실은 그걸 허용하지 않았다. 매일 집에 있으니까 아침부터 술을 마셔도 되고, 새벽까지 마시고 늦잠을 자도 되는 생활이 이어졌다. 나는 결국 1년 만에 서울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시절에는 자식들을 서울로 유학 보내지 못해 부모들이 안달을 하던 시절이다. 책 한 권 없는 내가 글을 쓰겠다고 고향에 내려가니 모두들 수상쩍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내 어린 시절의 영혼을 나누어 가졌던 초등학교 동창들도 모임을 하고 있었지만 나에게 가입 권유를 한 것은 무려 4년 쯤 뒤다. 무엇보다 힘들었던 것은 생존해 계시던 아버님의 절망과, 형제들의 보이지 않는 무시였다. 글을 쓴다는 것은 사서 고생을 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형제들의 눈에는 내가 글을 쓰기 위해 직장을 그만두었다는 것은 그저 핑계일 뿐일 것이다. 무슨 횡령이나, 사고를 쳐서 잘린 것이라고 자기네들끼리 단정을 지었던 것 같았다. 지금은 사정이 바뀌었지만 아직까지 가족들에게 그 시절에는 왜 나를 그렇게 대했냐고 묻지를 않았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까 나라도 가족들과 같은 시선으로 못마땅해하고 동네 사람들 보기에 창피했을 것 같았다. 글을 써서 먹고산다는 것은 생각처럼 쉽지가 않았다. 원고가 완성돼서 출판사에 우송하면 대답이 없다. 기다리다 못해 전화를 해 보면 “원고는 좋지만 우리 출판사와 색깔이 다르다”라는 무성의한 대답을 수없이 들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식으로 문학수업도 들어 보지 못한 내가, 간신히 소설 쓰는 것을 배워서 출판사에 제출했으니 채택되지 않는 것이 당연했지만 그때는 피를 말리는 고통의 연속이었다. 그 무렵 ‘천리안’ 이라는 PC통신이 생겼다.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새로운 것들에 대한 목마름이 강하다. 태블릿 PC도 일찌감치 구입을 했다. 스마트폰의 웹 활용법이라든지, 내 또래 사람들은 상상도 못할 액정 태블릿에 대한 관심도가 높은 것도 성격 탓이다. 그 당시도 나는 보기 드물게 16비트 중고 컴퓨터와 ‘도트프린터’를 가지고 있었다. 서울에서 내려갈 때 청계천 전자상가에서 산 것으로 워드 기능은 있는데 통신을 할 수가 없었다. 통신을 하려면 단말기가 있어야한다. 담뱃값이 없어서 100원짜리 환희를 피우고 있는 내게 통신을 할 수 있는 단말기는 그림의 떡이다. 그런데 어느 날 동생이 집으로 왔다. 한국통신에서 ‘하이텔’ 이라는 통신을 개설하면서 농민후계자들에게 단말기를 한 대씩 대여해준다는 것이다. 천리안이며 하이텔 통신은 문학의 아웃사이더였던 내게 밀크캐러멜 같은 것이었다. 내 시야는 PC통신으로 인하여 전국적으로 넓어졌다. 동호회에 가입을 하고, 작품을 평하고, 가끔은 회원들을 영동 산골로 불러 내려서 밤을 새우며 문학을 토론하고, 소설을 이야기하고 시를 논했다. 유니텔이라는 통신회사가 생겨나면서 통신업계는 3파전이 됐다. 더불어서 대학생과 전문가들 전용이던 통신 세대는 고등학생부터 일반 직장인들까지 넓어졌다. 통신이 보편화 되면서 유료소설 사이트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통신에서 익명으로 글을 올리던 작가들은 급속하게 유료소설 사이트로 편입이 됐다. 나는 유료사이트에 글을 쓰면서 두 마리 토끼를 노렸다. 연재가 끝나면 종이책을 내겠다는 계획이다. 통신으로 보는 문장과 종이책으로 보는 문장은 여러 부분으로 많은 차이점을 보인다. 통신 세대들의 가독률쪽에서 보면 종이책의 문장은 무겁다. 나는 그 점을 재미와 신선한 스토리로 보완 하며 내 존재감을 드러냈다. 컴퓨터가 ‘286’으로 진화를 하면서 윈도라는 것이 생겼다. 윈도는 과거 텍스트 위주의 통신에 새로운 바람을 집어넣었다. 초등학생들까지 키보드를 두들기면서 유료소설 사이트는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PC통신에 연재를 하던 작가들은 모두 자기만의 숲에 고요히 잠겨들었지만 나는 본격적으로 종이책을 출간하기 시작했다. 거의 10년간 하루 12시간 이상, 많을 때는 14시간 동안 손가락에 굳은살이 생기도록 키보드를 두들겼다. 통신에 연재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늘어난 필력이 있었기에 시간이 없어서 글을 못 쓰면 못 썼지. 스토리가 이어지지 않아서 글을 못 쓴 적은 없었다. 글쓰기에 대한 자신감이 붙을 무렵 서서히 회의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빵을 살 생각으로 소설을 쓴다는 것은 다이아몬드로 연탄집게를 만드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가라면 적어도 펄 벅의 같은 소설을 써야한다는 사명감 같은 것이 어깨를 짓누르는 날들이 하루가 다르게 크기를 더해갔다. 나는 2002년 5년 정도 기한을 잡고 현대사 반세기를 배경으로 한 장편소설 집필에 들어갔다. 계획과 다르게 12년 6개월 만에 원고지 2만5000매 분량의 15권짜리 이 완간됐다. 교보문고 광화문점에서 2015년 1월에 ‘작가의 만남’ 행사를 가졌다. 많은 분들이 참석을 해서 성황을 이루었다. 하나같이 “이제 그만 쓰고 쉬어라, 쉬는 것이 어려우면 몇 년 쉬고 다시 시작하라”는 등 그동안의 여정을 치하했다. 나는 그 다음 날 새벽 6시 20분에 컴퓨터 앞에 앉았다. 을 쓰면서 창작노트에 메모해 두었던 장편소설 를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도 나는 소설을 쓰고 있다. 내게 소설을 쓰는 시간은 밀크캐러멜의 맛을 아무도 모르게 음미하는 시간들이다. 내 사직서를 선뜻 받아 준 상사분들에게 땡규!를 보내면서.
- 2016-08-26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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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 올해 ‘0’세가 된 현경 교수와 결코 ‘가볍지 않은 우문현답’
- “현경 교수를 인터뷰하시겠습니까?” 지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순간 멍해졌다. 그녀는 유명인사다. 세계인을 상대로 여성과 환경, 평화를 말한다. 이념의 장벽을 쌓지 않는 종교학자로 180년 역사의 미국 유니언신학대학(Union Theological Seminary in the City of New York, UTS) 아시아계 최초의 여성 종신교수이기도 하다. 고로 1년의 반 이상은 미국 뉴욕에 있으니 지금이 아니면 인터뷰가 어렵다는 뜻이었다. 현경(玄鏡·60). 인생을 두고 영광스러운 자리가 전화 한 통화로 시작됐다. 당황스럽긴 했지만 대답은 예스! 그렇게 세기의 지성을 만났다. 운명처럼 말이다. 서울 종로구 부암동에 무슨 일이… 현경 교수를 처음 만난 장소는 서울 종로구 부암동 주민센터였다. 부암동은 서울 중심에 있지만 고즈넉할 뿐만 아니라 70년대 모습이 남아 있는 곳이다. 그런데 그녀를 만난 지난 6월 30일은 고즈넉한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풍악대가 동네를 돌아다니며 풍악을 울리고, 화선지에 먹으로 그림을 그리는 퍼포먼스가 주민센터 앞에서 행해지고 있었다. 이날은 부암동 신축 건물과 관련해 건설업체 예지학과 주민 사이에 경관 훼손 및 조망권 침해와 관련한 공청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무엇보다 신축 건물이 세워진 곳은 현경 교수 집 바로 옆이었다. “우리 집 위치가 부암동의 자궁이고 바람골이에요. 이렇게 모든 기운을 막는 건물을 지을 거라고는 상상 못했습니다. 이 집의 기운이 매우 좋아서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여성학자나 예술가에게 유산으로 이곳을 작업 공간을 남기고 싶었어요. 부암동의 흐름을 완전히 끊는 명백한 ‘건축 테러’라고 생각해요.” 미국에서 주로 생활하는 현경 교수는 공사 진행상황에 대해 잘 몰랐다고 한다. 여름방학에 집에 돌아왔다가 사태에 직면하게 된 것. 방학 동안에도 강연활동에, 신학자로서 설교, 설법하는 시간도 모자란데 이날만큼은 부암동 주민으로서 분주하게 뛰어야만 했다. 일반인은 이해 못 할 ‘기독교불자’ 그녀의 이력을 보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기독교불자’라는 말이다. 평범한 지식으로 유일신을 믿는 기독교는 다른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다. 물과 기름 같은 종교를 합친 말이 특이했다. 일반적인 사고로 이해할 수 없는 경지라 조심스럽기까지 했다. “난 기독교불자예요. 기독교신학자이고 목사 안수과정을 다 끝냈어요. 불교 법사도 받았죠. 이제 나는 종교의 틀과 이름을 벗어난 거 같아요. 교회에서 설교 할 때는 기독교신학자로, 불교 수양회를 할 때는 불교 법사로서 얘기하죠.” 기독교에서 바라보는 시각이 편하지 않을 것 같다며 우려 섞인 얘기를 건넸더니 그건 그들의 문제일 뿐이라고 답했다. “사실 진보적인 교회도 내 입장을 받아드리기 어렵죠. 내가 불교 법사가 됐으니까요. 그런데 종교 간의 대화는 열린 기독교에서 얼마든지 받아드릴 수 있어요. 21세기는 종교의 틀을 벗어나야한다고 생각해요. 종교가 아니고 영성입니다. 여성운동 관점에서 보면 현대의 모든 고등 종교는 가부장적입니다. 종교에서 지혜와 전통은 배우고 가부장적인 고루한 전통은 이제 버려야 해요. 그래야 종교도 진화가 되죠. 종교가 강물이라면 강 밑에 도도히 흐르는 지하수가 영성이라고 생각해요.” 현경 교수는 현재 종신교수로 있는 미국 뉴욕 유니언신학대학에서 '아시아여성 해방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세계교회협의회 총회에서 아시아 여성의 영성문제를 제기하고 여성을 억압하는 남성위주 신학을 비판해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여성의 시선에서 종교와 사회를 바라보고 활동하며 자신 있는 여성의 삶을 말하고자 한다. 그래서 그녀의 종교 철학에는 ‘여신’이라는 표현이 쓰인다. “나는 ‘여신’이라는 존재 혹은 기호를 만들어서 여성의 내적 지혜 혹은 신성에 관해 설명합니다. 여성이 너무 낮게 살지 말고 스스로 여신으로 살자는 의미죠, 여자들이 자기를 찾고 싶은데 뭔가 좀 당당하면 “나쁜 여자다”, “마녀가 좋다” 혹은 “공주다”, “아줌마다”라 말하면서 세상이 단정 지어 버리잖아요. 그런데 우린 다 여신이에요. 가장 깊은 신성과 우주가 우리 안에 들어와 있어요. 뭐 유치하게 남자와 동등함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 아니잖아요, 30대는 조금 힘들어요. 그런데 40대가 되면 조금 바라보는 시선이며 생각이 나아지죠. 그런 면에서 나는 여자가 40, 50대가 굉장히 예쁜 거 같아요. 60대도 예쁘잖아요?“ 여성으로서 환경과 평화를 이야기하다 현경 교수는 종교학자, 교수라는 직업 이외에 여성으로서 환경과 평화에 대한 문제에 대해 실천하고 움직이는 사람이다. 우선 그녀가 말하는 에코페미니즘, 환경 여성해방운동은 무엇인가. “환경과 자연해방, 환경의 문제와 여성문제가 근본적으로 철학적으로 연결돼 있다고 보는 거죠. 자연해방과 여성해방이 같이 가야 한다는 거죠. 에코페미니즘은 1974년 프랑스의 여성 철학자 프랑스와즈 드본느(Francoise d’Eaubonne·1920~2005)가 만들어낸 말이에요. 환경운동과 여성운동을 합쳐서 만든 말이에요. 나는 ‘살림이스트’란 말을 만들었어요. ‘살림살이’라는 뜻도 있고 자신과 타인, 지구를 살리는 일도 ‘살림’입니다. 내 안의 신성을 돌보고 내 이웃, 사회, 지구 전체 등 주변의 생명체들을 돌보는 게 바로 ‘살림’이죠. 공격과 충돌이 아니라, 상생과 대화를 믿는 게 바로 ‘살림이스트’, 한살림운동이나 여성 환경운동연대가 다 에코페미니스트고 살림이스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름과 겨울방학 때 현경 교수는 주로 여성· 환경· 평화운동을 하는 사람들과 많은 일을 한다. “2015년에는 전 세계 노벨평화상 받은 여성평화운동가 30명과 함께 평양에서 경의선 육로를 통해 한국으로 걸어왔던 ‘위민크로스 DMZ(Women Cross DMZ)’ 걷기행사를 했어요. 그 전에는 달라이 라마(達賴喇嘛), 아크비숍 데스몬드 투투(Archbishop Desmond Tutu) 등 노벨 평화상 수상자들과 20년 동안 전 세계 분쟁지역을 다니면서 평화의 다리를 놓는 일을 했어요. 멕시코의 치아파스, 북아일랜드, 캄보디아, 남한과 북한,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등 여러 분쟁지역을 다니면서 어떻게 하면 서로 평화를 만들 수 있을까 같이 나누는 일을 주로 했어요.” 편견을 이겨내는 삶 이렇게 활달하고 시원하고 생각을 표출하는데 스스럼없는 현경 교수지만 많은 편견을 이겨내고 살았다. 1989년부터 7년간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 교수로 재직할 당시 그녀의 교수실에는 전 세계를 돌면서 수집한 여신상이 방 한가득 꾸미고 있었다. 그 방에서 학생들과 쌓은 추억을 되살리며 황홀했다고 회상했다. 그러면서도 종교적 입장이나 반제도적 성향으로 비춰졌던 자신의 행동 때문에 학교와 마찰은 피할 수는 없었다고 했다. 하지만 현경 교수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버텼다. “세 가지 방법이 있어요. 첫째, 완전히 깎으면서 도가 트는 방법. 두 번째, 아예 안 깎고 내 멋대로 사는 방법, 그리고 세 번째는 그냥 욕먹어가면서 적당히 사는 거예요. 대신 욕먹을 때 상처받지 말아야죠. 그냥 저들은 나를 오해할 권리가 있고 나는 해명할 의무가 없다고 말이에요. 그냥 그들의 생각이고 나는 내 생각이고 이렇게 생각하면 편해요.” 모든 게 좋아 보이는 뉴욕 생활도 사실은 만만치는 않다고 했다. “아무래도 뉴욕의 백인 학교에서 교수를 한다는 건 인종차별주의라든가 백인들의 문화적인 제국주의와 부딪히지 않을 수 없어요. 그런데 어떤 방식으로든지 잘 싸워가면서 살아가는 거죠. 자기 삶을 사랑한다는 것은 맷집이 키우는 거라고 생각해요. 맞게 되면 내가 이렇게 했으니까 맞는 거구나. 단 상처 받지는 말아야죠, 그렇다고 매를 맞지 않기 위해서 내 말을 안 할 수 없잖아요? 내 목소리를 내면서 매를 안 맞으면 제일 좋겠지만, 매를 맞게 되면 기꺼이 맞고 또 확 풀고 살아요.” 현경 교수가 처음으로 사람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영성과 종교적 관념을 얘기하는 그녀와는 또 다른 이미지였다. 이에 현경 교수는 “당연히! 안 그러면 어떻게 살아남았겠냐”며 교수가 되고 박사가 되는데 수석으로 들어가 수석으로 나왔기에 맷집도 필요했고 패기도 필요했다고 말했다. 한국애서 현경은 ‘빡’세게 살아야 했다 그녀의 경력을 보면 그 누가 봐도 ‘나쁘지 않은 삶을 살았네’라고 생각할 것이다. 수학의 전 과정을 수석으로 들어가 마쳤다는 그녀가 좀 얄밉게도 느껴졌다. “난 공부 잘하는 사람이 아니었어요. 원래의 꿈은 예술가였다. 미술이건 무용이건 연극이건. 그런데 아버지의 사업이 망했어요. 매번 꼴찌만 했는데 생존 때문에 공부 열심히 했죠. 학교도 못 가게 생겼더라고요. 그래서 하루에 4시간만 자고 공부했어요. 전액장학금 받으려고. 그래서 내가 중학교 때부터 박사학위 받을 때까지 학비를 한 번도 내 본 적이 없게 된 거예요. 대학을 들어가선 학생운동을 만났고 그땐 그럴 수밖에 없던 시절이니까. 인문계열로 들어가서 하고 싶은 공부 다 하고 3학년 때 신학전공하고, 철학를 부전공했으니 철학적 신학을 공부한 거죠.” 뉴욕에서의 삶, 교수, 학자 그리고 탱고 그래도 종신교수로서의 삶은 행복하다. 죽을 때까지 가르칠 수 있고 세계에서 모인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는 자체만으로도 좋다. “제가 가르치는 것이 불교와 기독교의 대화, 아침의 불교 명상, 신비주의와 현명의 영성, 에코 페미니즘과 지구 영성, 종교와 평화 등입니다. 내 과목이 재미있는 것은 내가 그냥 교수가 아니더라도 일생동안 그 분야에 관련한 책을 보면서 살고 싶어요. 근데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하면서 가르치면서 그걸로 돈을 버니까 너무 괜찮은 거죠. 그리고 뉴욕에서 저는 끊임없이 공부해요. 미술사를 공부하고, 문학 클럽에 들어가서 한 달에 한 번씩 세계고전을 계속 읽고 아르헨티나의 탱고를 배워요. 너무 예뻐요, 정기적으로 배우러 다녀요. 내가 즐겁자고 하는 거죠. 부에노스아이레스에 갔을 때 완전히 반해서 배워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늙은 여자가 추기에 딱 예쁜 춤이 탱고인 거 같아요. 젊은 여자들은 잘 이해 못할 거 같아요.” 뉴욕의 삶이 너무 빡빡해 보였다. 쉼 없이 가르치고 공부하고 또 뭔가를 배우는 바쁜 삶의 연속 같았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정말 열심히 일하죠. 새벽에 일어나서 명상하고 학생들 가르치고요 그런데 금요일 오후부터는 모든 걸 닫아요. 인터넷도 안 해요. 그리고 주로 자연에서 시간을 보내요. 등산을 한다든지, 운동은 한다든지, 바다에 간다든지 일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자연 속에서 많이 쉬려고 해요.” ‘졸혼’ 그녀, 몇 살이 됐건 연애하고 살아야지 현경 교수의 결혼 생활에 대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무척이나 사랑했던 사람과 결혼해 10년을 살았고 이혼이 아닌 ‘졸혼(卒婚)을 했다. “서울대 학생이었는데 노동운동, 농민운동을 하던 사람이었어요. 그 사람에 대해 표현하라면 그 당시에는 예수와, 체 게바라, 안드레아 보첼리를 섞어 흔든 사람이었다고 말해요. 7년 동안 연애를 하고 결혼했고 10년을 살았어요. 학생운동을 하다가 둘 다 납치되고 고문당했는데 저와 남편은 심리적으로 굉장한 트라우마를 받았고, 나는 그 경험으로 완전히 전사가 돼 나왔어요. 고문 없는 세상, 독재 없는 세상을 만들고 싶었어요. 그런데 남편은 그러지 못 했어요 그러면서 남편은 강성인 사회운동가에서 말도 못하게 보수적인 기독교 목사가 됐어요. 많이 사랑하지만 도저히 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 결혼한 지 10년 만에 정리를 했죠. 아이도 낳을 수 없었어요. 서로 조율이 안 되는 상황에서 아이를 낳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어요, 나는 이렇게 기도를 해요. 내가 그 사람을 열여덟 살에 만났는데 어린 시절 내 영혼과 내 모든 것을 다 바쳤던 애인이자, 친구이자 동지였던 그런 사람이랑 젊은 여성이 할 수 있는 가장 열렬한 연애를 했던 거 같아요. 첫사랑이었어요. 그래서 결혼할 수 있게 해줬던 하나님께 감사드린다고. 이후 결혼을 졸업했어요. ‘졸혼’을 했어요. 결혼은 인생에 있어서 한 번으로 족한 거 같아요. 세계는 넓고 남자는 많다. 그래서 세계의 아름다운 남자들과 연애를 하면서 살았죠.” 문득 30대 때 현경 교수가 궁금해졌다. 여전사로 느껴지고 혼자 인생을 짊어진 것 같은 느낌이지만 쉽지 않은 삶은 아니었을까? “그 나이 때 이 세상 욕은 다 먹고 살았어요. 마녀다, 이단이다 온갖 얘기 다 듣고 살았죠. 이혼했기 때문에 이혼녀 주홍글씨도 달고, 이혼했으면 불행해야 하고 어디 구석에 숨어서 죄인처럼 살아야 하는데 불행하지도 않고 더 예뻐지고 연애하고 결혼도 안하고 말이죠. 많은 사람들이 칼을 던졌어요. 그런데 자기가 행복한 사람은 ‘칼’을 안 던지고 잘하고 있다고 말해 줬고, 무척 부러워했어요, 자기가 불행한 사람은 나를 너무 미워했죠. 온갖 욕을 하면서. 결국은 맷집을 기르는 수밖에 없죠(웃음). 저는 이제 0살입니다. 120까지 살 거예요 아직도 현경 교수에 대해 어렵게 느낄지 모를 독자에게 한 말씀 부탁했다. 그녀가 아무리 괴짜 같아도 우리 독자들과 동시대를 살아 온 친구이자 연인이지 않은가. “나는 지난 60년을 나한테 가장 진실한 것이 무엇인가, 그 목소리를 따라서 파란만장하게 살아왔어요. 산전수전, 공중전, 핵전쟁까지 겪었어요. 한국에서 60이 돼서 환갑이 된다는 것은 육십갑자가 끝나는 거잖아요? 근데 나는 전생이 끝난 사람입니다. 이제부터 살아야 하는 60년은 제 삶이 컴퓨터 프로그램이라면 완전히 새롭게 리셋 했어요. ‘0세’이라고 생각해요. 새로운 삶은 치유자, 치유적 예술가 그리고 영적 안내자로 살아가고 싶어요. 여태까지 그걸 준비하는 과정이었죠. 지난 3~4년 동안 독일에서 자아초월심리학을 배웠고 행할 수 있는 자격도 얻었어요. 이제 더 많은 시간을 종교, 영성, 예술, 사회운동, 치유, 이런 걸 다 종합해서 내 내면의 문제와 사회변혁이 분리되지 않는 예술 그리고 영성이 분리되지 않는 개인적인 치유와 사회적인 치유가 분지되지 않는 그런 에너지를 만들어 내고 싶습니다. 그 에너지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일을 하면서 앞으로 60년을 살고 싶어요. 하늘이 허락하는 한 120세까지 살고 싶어요.” 그녀와의 시간은 어려우면서도 낭만적이었다. 사실 ‘어디서부터 어떻게’라는 생각에 조급했고 이 방대한 얘기를 어떻게 풀 수 있을까 고민했다. 사실 그녀와 한 이야기는 인터뷰에 써놓은 것보다 더 오묘하고 깊다. 인터뷰라기보다 돈 주고도 못 사는 가르침의 시간이었다. 가을로 접어든 뉴욕의 어딘가에서 멋진 남자와 탱고를 추고 있는 그녀를 생각하며…
- 2016-08-23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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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댄스스포츠의 새 장을 열다 - 제1회 대한민국 댄스스포츠 쇼 댄스축제
- 댄스스포츠의 새 장을 열다 - 제1회 대한민국 댄스스포츠 쇼 댄스축제 8월13일 이천 종합운동장 눈높이 배드민턴 경기장에서 ‘제 1회 대한민국 댄스스포츠 쇼 댄스 축제’가 펼쳐졌다. 댄스스포츠란 왈츠, 탱고, 퀵스텝, 폭스트로트, 비에니즈 왈츠의 모던 댄스와 자이브, 차차차, 룸바, 삼바, 파소도블레의 라틴댄스를 말한다. 총 10종목이다. 댄스스포츠는 생활체육으로도 즐기지만, 엘리트 체육의 요소도 있어서 경기대회와 쇼 댄스처럼 공연 부문도 있다. 그나마 본격적인 댄스스포츠를 감상할 기회는 경기대회에 가서 선수들의 경연을 보는 것이다. 그러나 경기 대회는 나름대로 불문율이나 금지 규정이 있다. 한 세기 전에 댄스스포츠를 체계화시킬 무렵 자연인이 길을 걷듯이 춤을 추게 하자는 ‘자연 가로 운동’ 이 동시에 공감을 얻었다. 그때까지는 서커스나 발레 선수나 하던 춤 동작을 지양하고 일반인들도 할 수 있도록 위험한 동작들은 규제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두 발이 바닥에서 동시에 떨어지면 안 된다는 규정 등이 생겨났다. 발레에서는 허용되는 리프팅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댄싱 위드 더 스타’라는 인기 TV 프로그램이 있었다. 세계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프로그램이다. 댄스스포츠 선수와 파트너로 인기 연예인, 스포츠 스타 등을 등장시킨다. 이 프로그램이 댄스스포츠 붐 조성에 큰 역할을 했다. 그런데 여기 나오는 댄스가 바로 쇼 댄스이다. 정통 댄스스포츠에 쇼 적인 요소를 가미 시킨 것이다. 금번 이천에서 열린 제 1회 대한민국 댄스스포츠 쇼 댄스 축제는 김태희 조직위원장(이천시 댄스스포츠연맹회장)이 ‘댄싱 위드 더 스타’ 우승자 박지우, 전 모던 챔피언, 발레의 김인선, 이천시 댄스스포츠연맹 부회장 최준혁, 창작댄스의 마정순씨 와 함께 댄스스포츠의 새로운 장을 열고자 기획한 것이다. 바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댄싱 위드 더 스타’에서 보여준 쇼 댄스 방식에 단체 댄스인 포메이션까지 합류시켰다. 정통 댄스스포츠와 가장 다른 점은 파트너를 들어 올리는 리프팅 동작들이 많이 나왔다. 그동안 경기대회에서는 못하게 했던 동작들을 마음껏 하게 한 것이다. 여성 파트너들이 머리를 묶지 않고 찰랑거리는 생머리로 출연한 것도 볼만했다. 원래 한국 여성들의 윤기 흐르는 모발은 서양 여자선수들이 가장 부러워하는 부분이다. 특별 초청 공연으로 파트너 빅터키즈카와 시범댄스를 보여준 한아름 선수의 찰랑거리는 긴 생머리는 이날의 백미였다. 이날 출연한 14팀의 기량은 모두 훌륭했다. 쇼 댄스는 세구에 방식으로 여러 종목의 춤을 섞어 스토리텔링으로 엮어야 호평을 받는다. 그러나 일부 정통댄스스포츠만을 고집했던 선수들은 아무래도 호응이 적었다. 이날 수상자들의 상금 명목은 ‘작품비’였다. 50만원에서 250만원까지 푸짐하게 받아 갔다. 앞으로 댄스스포츠 선수들은 안무 구성에 좀 더 연구가 필요하게 되었다. 단순히 경기대회에 출전하는 것 말고도 시범이나 공연을 위한 쇼 댄스도 관심을 둬야 할 것이다. 그래야 작품성도 풍부해지고 댄스스포츠에 대한 관심도도 높아질 것으로 본다. 첫 대회라서 다소 미흡했던 점은 있었다. 경험이 쌓이고 명성을 더 해가면 해결될 문제들다. 팸플릿 후면에 더 나은 발전을 위한 관객조사 란이 있었다. 겸손하게 시정 사항을 받아들여 내년에는 보다 나은 축제를 준비하겠다는 자세이다. 그러나 그만하면 잘 했고 시작이 중요하다. 댄스스포츠의 고정관념을 벗어나 새로운 시도를 했다는 점에서 크게 박수 칠 일이다. 정통 댄스스포츠는 일부 엘리트 선수들이 경기장에서나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던 일반인들에게 한층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축제의 장이 된 것이다. 해를 거듭할수록 성황을 이루면 방송매체에서도 관심을 갖고 올 것이다. 오후 3시부터 시작된 쇼 댄스 축제가 2시간 동안 물 흐르듯 잘 진행되었다. 사회, 조명, 음악 등, 나무랄 데가 없었다. 인구 20만밖에 안 되는 이천시에서 이만한 축제는 대단하다.
- 2016-08-17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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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루즈 여행
- 말이 씨가 된다고 8년 전에 친구들과 지나가는 말로 이야기한 크루즈 여행을 친구 3가족과 같이 6월 초에 다녀왔다. 8년 이상 적금을 들어 준비한 것이 중도에 포기하지 않은 큰 요인으로 작용했다. 처음에는 알래스카로 가기로 했다가 우여곡절 끝에 서지중해로 변경되어 10일 동안 이탈리아의 밀라노로 비행기로 가서 배로 제노아, 로마, 시칠리아섬, 몰타, 스페인의 팔마 드 마요르카, 발렌시아, 프랑스 마르세이유를 여행했다. 하나 여행사를 통해 갔는데 10명이상이 안 되면 어렵다는 것을 힘들게 부탁해서 6명이 갔다. 돌아와서 만난 지인에 의하면 현지로 가서 크루즈 선박사와 직접 거래하면 좀 저렴할 것이라고 하니 의향이 있는 분은 알아보기 바란다. 승객과 승무원을 합쳐 5,000명이 탑승한 14만톤급 배 프리지오사는 아파트 17층 높이로 거의 움직임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럽게 운행되었다. 전날 과제를 처리한다고 밤을 새웠고 6월 초에 있는 많은 약속과 행사를 포기했다. 다른 일정과 겹쳐 많은 대가를 치르며 다녀 온 셈이다. 배에는 숙박시설, 식당, 공연장, 수영장 등 모든 시설이 있어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배에 있을 때는 잠을 줄이고 시간을 최대로 활용하여 춤 배우고 공연 보며 수영하고 헬쓰하며 수시로 식사하고 차 마시는 등 세상일을 잊고 자유롭게 보내는 호사를 즐겼다. 그러다 보니 돌아 올 때가 되니 너무 힘들어 병이 날 정도가 되었다. 그래서 10일 이상 크루즈 여행은 무리라는 이야기도 나왔다. 밤새 배로 가다가 기항지에 도착하면 현지 투어를 다녔다. 크루즈 여행은 배에서 숙식이 가능하고 시간을 경제적으로 활용하여 여행하는 것이 가능하여 미국과 유럽에서는 많이 이용한다고 한다. 같이 간 친구들도 일정조정으로 힘들어 했지만 다들 잘 다녀왔다고 이야기한다. 그동안 열심히 살아온 자신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하며 즐겼다. 어느새 회갑을 맞이한 친구들과 남은 삶은 여유롭고 품위있게 살자는 것에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70세까지 5년마다 다른 곳으로 크루즈 여행을 가기로 약속했다. 목표를 정하면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한다. 두고 볼 일이다.
- 2016-08-16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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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엠티의 성과
- 필자가 이끄는 댄스스쿨 동아리가 있다. 시니어들 중심으로 모인 댄스 동아리이다. 커플 댄스의 특성 상 남녀 성비가 반반은 되어야 하는데 남자 회원 찾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여기저기 광고하면 사람들이야 많이 오겠지만, 인성이 가장 중요하다며 회원 추천에 다른 회원 전원 추천의 방식을 고수하다 보니 회원이 안 늘어 고민 중이었다. 기존 회원들도 워낙 바쁘게 활동하는 시니어들이라 강습에도 자주 빠졌다. 댄스스포츠 여러 종목을 돌아가며 가르치다 보니 취향에 안 맞는 춤 종목에는 안 나오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3명 이상이 안 되면 무조건 휴강이라는 강경책을 썼다. 그렇게 휴강과 강습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불금인 금요일 오후에 강습이 끝나는데 대부분 여자들이라 뒤풀이도 없이 각각 헤어지는 것이었다. 그러고 나면 나까지 시들해져서 그만 둘까 생각 중이었다. 그런데 필자의 마음을 읽었는지 그날은 회원들이 뒤풀이를 자청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이니 사양하지 않았다. 그때 필자가 일박이일 엠티를 제안했다. 여러 동호회를 경험해 본 결과 엠티를 한번 하고 나면 회원들의 결속력이 강화된다는 것을 알고 추진해보자고 했다. 그러나 우선 회원 수가 너무 적었다. 고작 서너 명 이었다. 그 정도로는 별의미가 없어 보였다. 그래서 엠티 날짜를 잡아 놓고 회원 배가 운동을 하기로 했다. 관심을 가지면 확실히 결과가 달라진다. 회원들과 필자도 여기저기에서 노력한 덕분에 엠티 참가 신청자가 9명이나 되었다. 다음은 장소였다.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에 주말이면 주말농장에 가야 한다는 한 회원에게 엠티 장소를 알아보라고 했으나 여러 가지 문제에 부딪쳐 진전이 없었다. 그래서 주말 농장을 엠티장소로 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아직 초창기라 너무 초라하다며 고사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설득을 하다 보니 결국 승낙을 얻었다. 그래서 7월 4일부터 5일까지 일정을 잡고 실행에 옮겼다. 평소 강습 때보다 더 많은 인원인 9명이 엠티에 참가했다. 배우자가 있는 여자들이 외박을 한다는 것도 걱정하던 부분이었다. 그러나 오히려 남자들이 아내를 설득하는 데 애를 먹었다고 털어 놓았다. 바야흐로 여성 상위시대인 것이다. 회원들이 요리에 한 가닥 한다는 사람이 몇 있었다. 요리 강의를 하는 사람들이다. 기본적으로 여성들은 식사 준비라면 선수 급들이다. 그러니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며 식사 준비를 하는데 마치 큰 레스토랑의 주방 같아 보였다. 보통의 시니어 여성들은 집에서 평생 식사 준비한 것에 지쳐 밖에 나가면 그런 일을 기피한다. 그러나 아직 서먹한 사이이고 나이 차이도 조금씩 있다 보니 솔선수범이 되는 모양이었다. 엠티의 백미는 먹고 마시고 밤늦도록 이야기꽃을 피우는 것이다. 알코올 덕분에 평소 말수가 적은 필자도 입을 여니 청산유수 말이 잘 나왔다. 서로 평소 흉을 보던 부분도 터놓고 얘기하니 오히려 매력이나 개성으로 이해하게 되고 오해도 풀렸다. 유머 이야기 중에 누군가 재미있는 얘기를 했다. 비뇨기에 문제가 생긴 한 남자가 비뇨기과를 찾았다. 담당 의사가 여자였는데 바지를 내려 보라고 했다. 남자가 놀라서 “지금이요?” 하고 물었다. 의사가 “네!”하고 대답하니 남자가 “여기서요?” 하며 놀란 기색을 보였다. 의사는 “네!”하고 강경하게 말했다. 누군가 이 얘기를 듣고 “정말요?” 하며 물었다. 별로 우스운 얘기는 아닌데 술도 좀 걸쳤겠다, 이런 얘기가 스스럼없이 나오는 것이었다. 이런 얘기 정도는 할 수 있는 나이가 시니어이다. 모두 배꼽을 잡고 웃었다. 그 다음부터는 “지금이요?”, “여기서요?”, “정말요?”가 유행어가 되었다. 어떤 일이든 어떤 상황이든 하시라도 써 먹을 수 있는 유머였다. 그래서 건배사로 확정했다. 건배 제의하는 사람이 “지금이요?” 하면 나머지 사람들이 “여기서요?” 하며 까르르 웃었다. 다 같이 “정말요?” 하며 마무리 하는 것이다. 일박이일에 4끼의 식사를 같이 했다. 회원 농장에서 숙박을 했으므로 숙박비도 안 들었다. 농장의 유기농 채소도 무상으로 제공 받았으므로 예산을 크게 절감할 수 있었다. 회원들의 표정은 아쉬움에 가득했다. 서울은 낮 기온 섭씨 34도로 폭염의 절정을 이루었다는 뉴스를 들으며 다시 서울도 돌아왔다.
- 2016-08-08 16: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