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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담회] 시니어 3인의 진솔하고 진지한 대화 '이 시대 孝의 진정성'
- 건강한 가정이 모여 크고 작은 공동체를 이루고 이런 공동체가 모여 국가의 초석이 된다. 하지만 가정 해체가 심심찮게 일어나면서 아동학대, 노인 소외 등 심각한 사회문제로 이어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허물어지는 가정 해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우리 사회의 대안으로는 어떤 것이 있을까. 전문가들은 바로 효(孝)라고 말한다. 이번 호에서는 효를 실천하는 3인이 한자리에 모여 이 시대의 효의 진정성에 대해 진솔한 대화를 나눴다. △ 무크지 을 창간하는 권혁승 백교문학회장(이하 권혁승 회장) △ 효경영의 리더 상훈유통 이현옥 회장(이하 이현옥 회장) △ 교육을 통해 효 문화를 정착시키는 최종수 한국효문화센터 이사장(이하 최종수 이사장) 장소 이투데이 6층 회의실 Q.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전통적 가치 ‘효.’ 요즘 효를 얘기하려면 저마다 답답하다고 한탄합니다. 무엇 때문에 시니어들이 분노하는 걸까요? △ 이현옥 회장: ‘효는 백행지본(百行之本)’이에요.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모든 행동의 근본이죠. 부모가 없었다면 자식들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자신이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위치에 섰더라도 이는 모두 부모의 은덕이죠. 부모 모시는 일을 우선으로 해야 하는데 바쁘다, 먹고 살기 힘들다는 핑계로 찾아뵙는 것은 소홀히 하고 전화 한 번 하는 정도로 생색내는 자식들이 늘어나고 있어요. 죽는 날까지 자식 잘 되기를 바라고 좋은 소식 있기를 고대하며 밤낮으로 자식 걱정을 하는 게 부모의 마음이죠. △ 최종수 이사장: 자식들의 마음가짐을 바로 세우기 위해선 교육이 우선돼야 해요. 옛 서당에서는 과 을 기본으로 어려서부터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기본예절을 가르쳤어요.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아비는 아비답게, 자식은 자식답게 각자 직분에 충실하게 하는 밑바탕에는 효가 자리 잡고 있었지요. 이런 이유로 초·중·고교에서 효와 예절, 질서교육을 강화할 필요가 있어요. 학식을 갖추는 것보다 사람이 되는 게 우선이지요. 이러한 일들을 시작하게 된 게 주위에 있는 문화예술인들이 ‘우리 매일 같은 것만 할 게 아니고, 인성과 효에 대한 공감을 통해 새로운 일을 한번 해보자’고 한 것이 계기가 됐어요. △ 권혁승 회장: 우리나라 효 사상이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고 있고, 한국의 가족주의도 전부 없어져 가고 있어요. 이러한 현상을 두고 ‘가정 파괴’라는 말들을 씁니다. 이는 곧 가정의 예절이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가정의 예절이란 자식이 부모를 공경할 줄 알아야 하는데, 요즘은 어버이날이나 부모 생신날이라 해서 선물하나 사서 주는데 그건 효가 아니죠. 효 사상이라는 것은 한국인의 정신문화라는 것이고, 물질의 교류나 거래는 아니죠. 부모자식 간에 아파트 사주고 비싼 선물 사주고, 물론 그것도 효도의 한 방법 일수 있지만, 한국의 기본 사상이자 문화 사상은 아니라고 봅니다.효의 출발점을 가정의 예절에 두고, 어른을 공경하는 것부터 아이들을 교육해야 해요. 요즘은 어린이 교육이 잘못돼 개인주의나 황금만능주의가 팽배해졌지만, 한국 효 사상이 무너져가는 위기 상황이라고 느끼니 씁쓸하죠. 그러한 문제로 우리(3인)가 모인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웃음). Q. 지금 효는 현실적으로 어떻게 실천되고 있나요? △ 권혁승 회장: 요즘 대다수 부모는 자식에게 의지하려고 하지 않아요. 그리고 자식들은 부모에게 효도하려는 생각을 안 하고 있죠. 효를 바라지도, 하지도 않는 게 현 상황인거죠. 그래도 지금 우리가 하는 효 운동을 계속 꾸준히 전개해야 하는데, 도움이 필요합니다. 각 시·구 문화원에서 부모에 대한 시 낭송회를 1년에 한 번씩 한다든지, 강의를 한다든지 말입니다. 이렇게 효에 대한 교류를 해야 효심이 생기는 것이죠. 젊은이들에겐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고 날마다 반성을 해나가는 것이 효예요. 아이들이 “학교 다녀 오겠습니다”, “다녀 왔습니다” 인사를 하는 것이 기본인데 휙 갔다가 말없이 돌아오죠. 젊은 엄마들도 다 어릴 적 해본 것으로 신경을 못 써서 그렇지 아이들도 실천할 수 있는 것들이에요. ‘효심’. 그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봤어요. 대한민국 국어사전에 이렇게 나옵니다. 첫 번째, ‘효성스러운 마음’. 두 번째, ‘효심은 엄하게 키운 자식일수록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한 법이다’ 그러니 부모가 애를 잘 키워야 하죠. 적당히 키우면 효도가 안 돼요. 불효라는 것은 아이에게만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니고 상대적인 것, 부모자식 간 주고받는 것이거든요. △ 이현옥 회장: 효를 실천하는 방법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해 왔어요. 이기주의와 황금만능의 물신주의는 가정의 안녕과 질서의 근원인 효를 경시하므로 해체되는 가정들이 늘어나고 어린이나 젊은이 할 것 없이 절대가치와 기준이 상실되어가고 있는 현실이죠. 자식을 물질적으로 키우면 그게 효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권 회장 말씀대로 엄하게 키우고 가정에 모범을 보여야 하죠. Q. 지난해 12월 ‘효도계약’을 지키지 않은 아들에게 증여한 부동산을 돌려받을 수 있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습니다. 이 판결을 놓고 가족모임에서 효도계약서를 쓰는 시니어들이 늘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립니다. △ 권혁승 회장: (부모자식 간 효도계약서 등의 문제에 대해서) 나도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 있어요. 한국인은 효에 대해 우리 전통문화, 민족문화로 자부심을 가져야 하는데 개중에는 부모자식 간 효도 계약서를 쓴다든지 하는 문제가 있다고 하는데, 사실상 그런 경우는 거의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그런 몇몇 사건을 미디어에서 너무 부풀리는데, 그런 것을 줄여야 해요. 부모자식 간 화합하고 소통해야 하는데 불화가 있다면 잘못되는 것이죠. 아이들이 자랄 때 가정 예절이나 인성 교육을 해야 하는데 그런 것이 없으니 그렇게 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자식이 잘못했든 부모가 잘못 가르쳤든 소통이라는 것은 쌍방이에요. △ 최종수 이사장: 효도계약서를 쓰고 하는 효는 결코 효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계약을 하는 것도 문제, 그것을 퍼뜨리는 언론도 문제이지만, 어쨌든 그것은 효가 아니고 효가 될 수도 없어요. 중요한 것은 두 분(권혁승, 이현옥)도 그렇지만 자신의 모든 열정과 재산을 털어 효 문화를 전파하는 훌륭한 분들이 계시는데 국가는 대체 무엇을 하는가 생각이 들어요. 지방자치단체 강령에도 효에 대한 지침 등이 있지만, 지나친 복지로 효가 묻히고 퇴색하고 있어요. 노인, 장애인 복지 등을 위한 비용이 당연히 들겠지만, 그중 일부를 효를 위한 예산으로 책정해 정책을 세워야 합니다. 사람들이 효를 통해 그런 노인과 장애인 등을 돌볼 수 있도록 말이죠. Q. 효에 관한 교육과 정책 지원이 줄어들고 있다는데요. △ 권혁승 회장: 예를 들어 우리 어린이나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아버지, 어머니에 대한 시 낭송회를 한다고 하면 그들도 그 며칠 동안은 아버지 어머니 생각을 하지 않을까요? 효가 뭔가 선물만 주는 게 아니라 기본을 익히는 교육을 해야 해요. 이런 말이 적절할지는 모르지만 각 지역마다 문화원이 있어요. 대개 문화 강좌를 한다든가 음악, 미술, 무용 등을 가르치는데 효 문화에 대해서도 강의하면 안 될까 싶어요. 문화원마다 책정된 예산들을 다 그런 예술 강좌에만 써야 할까요? △ 최종수 이사장: 의 독자들의 나이대를 보면 나라 망하고, 6·25사변 나고 배고프고 살기 어려워서 그런 걸 찾을 수 없는 시대였다 할지 몰라도, 그 와중에도 뜻있는 사람들은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어요. 좋은 효자·효부 정말 많습니다. 지금이라도 늦었다는 생각 말고 기본적인 교육부터 해야 하지 않을까요? △ 이현옥 회장: ‘효’를 바탕으로 회사를 경영하다 보니 직원들도 만족해하고, 사고도 발생하지 않아요. 부모님을 모시고 여행을 가는 직원들에게 홍천 대명콘도와 양양 솔비치콘도 숙박을 지원해 줍니다. 1년에 상·하반기 2번 가능하고, 시댁이나 처갓집 식구들도 함께 갈 수 있게 하는데 주로 직원들이 장인·장모를 모시고 가는 편입니다. ‘너희들이 부모에게 잘함으로써 우리 직장도 건전하게 발전이 되는 거다’라고 자주 말합니다. 매년 5월에는 효 문화 확산을 위해 전 직원이 가족을 데리고 세종시에 있는 효림원(효 마을)을 방문해 효심을 나누고 효 문화행사를 진행하죠. Q. 효 문화 확산을 위해서는 무엇을 바꾸어야할까요? △ 최종수 이사장: 효 문화예술 교류 차원에서 학교에 전문 강사가 방문해 효 강의 등을 하는데, 어느 정도 한계가 있지만 꾸준히 진행하고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어머니들의 생각이 좀 바뀌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효에 대해 토론회를 한다고 하면 관심도 없고, 다른 학원에 가라고 하는 등 꽁무니를 빼기 때문이죠. 학생들을 모집하면 3분의 1 정도만 자발적으로 오고, 3분의 1은 학교에서 하라니까 억지로 온 것이고, 또 3분의 1은 참여는 하지만 구실만 있으면 학원에 가거나 빠지려고 해요. 그런 경우에 학생도 학생이지만 어머니들이 적극적으로 인성이나 효, 예절에 관심을 가져야 해요. 인성이 기본이 된 다음에 학력을 쌓아야지 기본도 안 되고 학력만 쌓으니 아이들이 머리만 커지는 것이죠. 효라는 것은 평생 죽을 때까지 해야 하는 것인데, 유가(儒家)에서 배울 때는 부모가 살아 계실 때 모시기를 잘 해야 한다고 하는데, 종교가 달라 많은 부분에 갈등이 생겨나고 있어요. 그런 효가 필요 없다고 하는 단체도 생기고, 내가 효를 안 해도 살 수 있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을지는 몰라도, 효는 우리나라 정서나 젊은이들을 위해서는 꼭 필요한 덕목입니다. 지난해부터 인성교육진흥법을 시행하여 인성교육을 강화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많은 단체가 갈팡질팡하고 있어요. 인성과 예절 교육은 효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권혁승 회장: 효 문화, 이런 운동은 돈이 많다고 할 수 있는 운동도 아니고 시간이 많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죠. 어떠한 소명감에 의해서 하는 것이지 이해타산으로 하는 게 아니에요. ‘기브 앤 테이크’가 아니라 ‘기브’만 하는 거죠. 요즘 부모는 자식의 효도를 바라지도 않고, 자식도 안 하는 상황이지만 결코 포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에요. 효는 어디 내다 팔래야 팔 수 없는 한국인의 아주 기본적인 사상이자 문화 사상으로 한국인만이 가지고 있는 정서니까요. 2018년에 동계 올림픽을 하는데 외국인들이 많이 왔을 때 ‘한국은 효의 나라다’라는 게 선전되면 얼마나 좋겠어요(모두 웃음). △ 이현옥 회장: 생전이나 사후에도 예에 벗어남이 없어야 합니다. 즉, 살아 계실 때도 예를 지켜야 하나 돌아가신 후에도 예를 지켜야 합니다. 어머니의 자식 사랑은 자(慈)라면 자식의 부모 사랑은 효(孝)라고 합니다. 부모는 진 땅을 걸어가도 자식은 마른 땅을 걸어가기 바라는 게 부모입니다. 그래서 전체를 바쳐 희생하는 것이 부모입니다. Q. 효 문화 확산을 위해 인프라 구축이 우선시되려면. △ 최종수 이사장: 정부의 지원도 중요하지만, 그럴 수 있는 분위기가 먼저 조성돼야 합니다. 내가 과천문화원장을 8년 정도 하고, 전국문화원 회장을 4년 동안 했어요. 그러면서 체계적으로 구축하여 효 문화를 선도하려는 효 문화센터를 만들려고도 했죠. 그러나 주변에서 ‘왜 저렇게 판을 벌이나’하고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했어요. 그러니 그런 것을 하려고 해도 먼저 주변의 인식과 분위기를 바꾸지 않으면 안 돼요. △ 권혁승 회장: 국내 효 문화를 바로잡고 육성, 창달해야 하지만 아울러서 교양을 갖출 수 있어야 해요. 효는 한국 고유의 문화예요. 이 문화가 옛날 중국이나 일본에서 온 게 아니죠. 물론 서양에서도 방식이 다를 뿐 효도를 잘 하죠. 영국의 역사 철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그의 책에 ‘인류문화 발전을 위해 한국이 크게 기여한 게 있다. 그것이 한국인의 가족제도와 효 사상이다’라고 썼어요. 그는 이러한 효 사상을 전 세계에 번지도록 해 모든 세계인이 가족을 사랑하는 정신이 퍼졌으면 좋겠다는 뜻을 설파했고요. 소설가 톨스토이도 “불효하는 사람은 벗으로 삼지 말라”고 했어요. 미국연방준비제도 의장을 지낸 버냉키(Bernanke)도 미국 프리스턴대학교 졸업식 축사에서 “이제 여러분은 졸업을 하니 매주 한 번씩 부모님에게 전화해라”라고 말했습니다. 생일에 선물을 사주고 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1주일에 몇 번씩 전화 걸어 안부를 여쭙는 것이 한국 효의 기본입니다. 이러한 점이 전 세계에 한국인이 어깨 펴고 이야기할 수 있는 자랑거리가 될 수 있고, 자부심이라 할 수 있어요. 한국의 효 사상을 세계에 널리 알려서 모든 세계인들이 한국의 효 사상을 본받고 한국하면 ‘아! 효의 나라’라고 생각하도록 만들어야 해요. 더 나아가서는 효 문화를 유네스코 문화재로 등록한다든가, 널리 번지도록 힘써야 해요. △ 이현옥 회장: 이런 분위기를 조성해서 좋은 일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여 정부와 언론이 주목하고, 효에 대한 인식이 관철됐으면 합니다. △ 권혁승 회장: 효에 대한 좌담회는 한국 언론사, 매체 사상 처음 있는 일 아닐까요? 아마 단군 이래 최초일 것 같아요. 오늘로 끝내지 말고 계속 이어갔으면 좋겠어요. (웃음) Q. 효 문화 확산을 위해 어떤 일을 하고 계시나요? △ 최종수 이사장: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의 타고난 소질과 능력을 개발해 나의 길을 찾고 이웃과 사회를 위한 사랑과 봉사가 바로 ‘효’라는 것이죠. 이를 위해 시대에 맞는 효 문화의 창출이 바로 인성 교육의 출발점이라고 보고 한국효문화센터를 2011년 시작했어요. 한국효문화센터는 효에 관련된 교육과 행사로 우리가 실천해야 할 진정한 효가 무엇인지 되돌아보며 자신에 대한 사랑의 첫걸음을 시작으로 하는 인성 교육과 밝고 건강한 사회 구현이 목표예요. 예술단체장들이 효 문화사업을 하면서 학술회의도 하고, 학생들을 모아 토론한 내용들을 토대로 효 문화를 어디서부터 시작을 해야 하는지 단초를 발견했어요. 요즘 고등학생들은 입시에 시달리지만, 그중에서도 고전 등을 훤히 꿰뚫는 학생들이 꽤 있어요. ‘신체발부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라 하지만, 마냥 그럴 것이 아니라 헌혈도 하고 기증도 해서 사회에 돌려주는 것이 낫지 않느냐는 의견도 나왔죠. 그러한 아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우리 시대에 효 문화사업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게 해줬어요. 아이들의 이야기를 토대로 그들의 수준에 맞는 효 문화사업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지요. 그렇게 글짓기, 그림 그리기 대회도 하고, 매년 토론회도 열면서 새로운 것을 찾아가고 있어요. 국내 최대 규모의 ‘효’를 주제로 한 문화축제로 1회성 행사로 할 수밖에 없는 여건이지만 그만큼이라도 확실히 효과가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상을 받는 아이들과 부모님들을 만나보면 그때만이라도 가족끼리 효에 대해 이야기하고, 부모를 생각한다고 하거든요. △ 이현옥 회장: 효 문화라는 건 다들 잘 알고 있지만 실천하는 게 어려워요. 어머니가 살아 계실 적에 특히 5형제 중 셋째인 나를 많이 아끼셨고 사랑을 주셨죠. 공직생활 중에도, 사업을 할 때도 어머니가 편찮으시면 달려가 돌봐드리는 등 장남 역할을 했어요. 고향 마을에 1981년 대덕연구단지가 들어서면서 선산을 세종시 조치원으로 이전해 효림원을 조성했어요. 어머니는 그 안에 있는 농가주택에서 4개월 동안 고생하시다 90세에 돌아가셨고, 5일장을 치렀어요. 매년 시묘살이를 하기 위해 내려갔고 거기 가서도 돌아가신 어머니와 대화도 나누고 3년 탈상을 했는데 마을 회장이나 이장이 그 모습을 눈여겨봤나 봐요. 그러다 매년 추모식을 하면서 마을 사람 100명을 초대해 아이들에게 선물도 주고, 면장 추천을 받은 어려운 학생들에게는 500만원씩 장학금도 수여하는 행사를 진행했죠. 사실 3년만 하고 그만두려 했는데, 막상 해마다 해온 것을 그만두기는 어려웠어요. 나로서는 자식의 도리로 하면 되는 일이었지만, 소문이 나자 군에서 우리 마을을 성균관장에게 추천해 각지에서 몰려와 선전을 해주고, 포상도 받았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마을 사람들이 1만원, 5000원씩 자발적으로 980만원을 모아서 선산 공원 입구에 효비를 들여놓았어요. 마을이 효의 고장이니까 “마을 입구에 ‘효림원’이라고 세워 놨어요. 그때 어머니가 옥색 한복을 입고 꿈에 선명히 나타나시더니 ‘마을에서 이렇게 효비도 세워주고 행사도 열어줬는데, 너도 고마운 뜻을 표시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셨어요. 작은 유통업을 하던 나는 영농조합 농장을 하나 인수했어요. 그곳에서 생산하는 오이, 토마토, 배 등 농산물을 국가유공자 요양원이나 보훈병원, 군부대 등 10여 기관에 기증하고 있어요.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지역의 소득 증대도 되고, 고용창출도 되니 농민들이 굉장히 좋아합니다. △ 권혁승 회장: 7년째 백교문학상 효친문학상 작품을 전국적으로 공모하는데, 글과 시 속에 효 사상, 효심 또는 모정이 깃들어져 있는 작품을 심사 기준으로 삼아 상을 주고 있습니다. 아무리 잘 쓴 글이라도 사친과 관계없는 글은 입선이 안 되죠. 자식들은 부모가 그렇게 사랑을 줘도 사랑인 줄 몰라요. 일상에서 공기를 마시듯 깨닫지 못하는 것이죠. 강릉 시골 마을에다가 사모정 정자를 지었어요. 마을의 쉼터가 되라고. ‘사모정’ 어머니를 생각하는 마음이라 해서, 한쪽에는 도예 조각 하는 교수님의 작품도 세워 놨죠. 정자를 강릉시에 기증했는데 하고 나니까 주변에서 그 정자만 가지고 효 사상이 함양되겠느냐 해서 ‘사친문학상’을 만들라 하더라고요. 그걸 만들어 전국적으로 등단한 문인을 대상으로 작품공모를 하고 있어요. 거기다 이 사상을 전 세계에 알려야 되겠다는 의미를 담아 이라는 책을 만들었어요. 국내 200여 도서관에 비치했고, 영어판을 제작해 65개국 130개 도서관에도 전달했어요. 유엔, 세계은행에도 책이 있어요. 대통령, 교육부장관, 문화부장관 등에게도 돌리고, 오바마 대통령에게도 보냈는데 잘 전달이 됐는지는 모르겠어요(웃음). 작년에 사모정이 있는 공원이 너무 좁다고 해서 확장공사를 1년간 했어요. 높이가 3m인 고석에 ‘효 사상 세계화의 발원지 효향 강릉’이라 쓰고 밑에 영어로도 써놓았어요. 그 옆의 돌에도 효에 대한 글을 영어와 중국어, 일본어로 새겼어요. 오는 9월에 도 창간할 예정입니다.
- 2016-07-08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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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원마을 관악 사랑] 참 아름다운
- 서울 관악구민이 된지 30년이 훌쩍 넘었다, 젊은이가 많이 살면서 서로 인사를 나누는 고향처럼 느껴지는 아담한 아파트에서 산다. 은퇴 후 시간 여유를 이용하여 이 골목 저 거리 삶 길을 찾아 정을 쌓고 있다. 앞으로 재미있게 살아갈 관악사랑 이야기를 펼친다. 관악산이 포근히 감싸는 천혜의 자연을 자랑한다. 관악산은 송악·감악·운악·화악산과 더불어 경기 5악의 하나로 그 위용을 자랑하면서 관악구를 포근히 감싸고 있다. 연주대(629m) 정상에는 암자가 제비집처럼 앙증맞게 추녀 끝에 매달려 있다. 서울대 입구, 사당과 과천은 등산객으로 날마다 붐빈다. 울창한 숲 덕분에 여름철에는 에어컨이 필요 없을 정도로 시원하다. 계곡에서는 물놀이장이 열려 어른과 아이들의 천국이 된다. 서울·관악산 둘레길이 잘 꾸며져 언제든지 산책하기 좋다. 아침마다 경쾌한 음악소리에 맞춰 체육공원에서 열심히 운동을 한다. 서울에서 제일 공기 좋은 곳이다. 불편함을 무릅쓰고 전원을 찾아 멀리 떠나야 할 이유가 없다. 정문을 나서면 바로 관악산 가는 능선이다. 교육환경이 최고로 좋다. 집주위에는 초·중·고등학교가 연이어 있고, 가까운 곳에 대학교가 있다. 한곳에서 오래 사는 덕분에 아들과 딸은 전학 한번 없이 교육을 마쳤다. 결혼 후에는 가까운데서 살고 있다. 오순도순 정을 나눌 수 있어서 정말 좋다. 올해 쌍둥이 손주가 아들이 다녔던 초등학교에 입학하였다. 아들과 손주는 도시에서 보기 드문 ‘초등학교 부자동문’이 되었다. 앞으로 30년 관악에서 더 재미있게 살아야할 이유가 생겼다. 손주를 정성껏 돌보자. 올바른 시민으로 기르는 인성교육 첫걸음이다. 오순도순 분위 좋은 전원마을이다. 관악에는 구청, 평생학습관 등에서 열리는 사회교육이 활발하고, 도서관 운영은 최고수준을 자랑한다. 청운의 꿈을 불태우는 젊은이가 많아 생기가 넘치는 곳이다. 늦었던 사회개발도 경전철 등 발전에 불을 댕기고 있다. 또한 골목길, 고갯길, 사이길 등 도시화가 덜 된 ‘시골길’이 많다. 정이 넘쳐 활기 찬 골목길이 있는가 하면 인적이 뜸해 정을 그리워하는 고갯길도 있다. 도심 같지 않는 포근한 사이길이 있다. 다른 곳에서는 주민 간 통행 문제로 다투는 일이 종종 있으나 이곳은 오히려 이웃과 상생하는 정이 넘치는 곳이다. 인적이 드문 고갯길에는 벽화 그리기 등 도시미화와 도심 속 산골 체험마을로 특성화해 발전시키고 있다. 아담한 사잇길은 전혀 도심 속 같지 않는 곳이며 외부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시골 이웃마을 다니듯 어르신이나 아이들도 부담 없이 다닐 수 있는 도심 속 아담한 정원이다. 30여 년 정을 나눈 따뜻한 이웃이 있다. 아담한 동네 약국은 언제라도 문을 열 수 있어서 ‘연휴 중 당직’ 같은 요란스러운 제도가 필요 없는 곳이다. 마을 주민이 안심하고 찾는 곳이다. 단지 내 인테리어 업체는 만물을 수리하는 곳이다. “불러만 주세요, 언제나 달려갑니다!” 500 세대 ‘안전 지킴이’다. 주민이 두 발 뻗고 잠을 잘 수 있도록 한 고마운 곳이다. 부동산 중개사무소는 어려운 시기에 하루도 빠짐없이 즐거운 표정으로 일하는 모습이 아름답다. “안 좋을 때일수록 더 열심히 일해야지요!”
- 2016-07-08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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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타라이프]가슴으로 낳은 아이 키우는 연예인‘입양’ 편견을 깨다
- 글 배국남 대중문화 평론가 knbae24@hanmail.net 1987년 부산에서 쌍둥이로 태어난 지 3개월 만에 각각 미국과 프랑스로 입양된 사만다 푸티먼과 아나이스 보르디에가 4년 전 SNS를 통해 극적으로 재회한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를 보면서, 그리고 “저 역시 입양아로서 살아온 삶에 대해 긍정적이었고, 아나이스 역시 입양의 어두운 면이나 슬픈 이야기들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저희는 대부분 좋은 시간을 보냈다”는 사만다의 말을 들으면서 우리의 입양 현실에 시선이 향한다. 보건복지부가 최근 발표한 입양 현황 통계에 따르면 2015년 한 해 국내 법원에서 국내외 입양을 허가받은 아이는 1057명에 달했다. 이 가운데 국내 입양은 683명으로 2014년의 637명보다 약간 늘어났지만, 국외 입양은 374명으로 2014년의 535명에 비해 줄었다. 국외 입양아 현황을 보면 미국이 전체의 74.3%로 가장 많고 이어 스웨덴(9.6%), 캐나다(5.9%), 노르웨이(2.7%) 순이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2001년 4206명이던 입양 아동은 2003년 3851명, 2006년 3231명을 거쳐 2013년 2652명으로 크게 줄었다. 그리고 2014년 1172명, 2015년 1057명으로 감소하는 등 입양이 활발하지 못한 상황이다. 입양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 역시 크게 개선되지 않고 있다. 이런 가운데 아이들을 입양해 행복한 가정을 꾸려 입양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며 국내 입양을 활성화하는 데 일조하는 연예인들이 있어 눈길을 끈다. 차인표-신애라 부부, 중견 연기자 송옥숙, 탤런트 이아현, 개그맨 엄용수, 연극배우 윤석화, 가수 조영남, 개그우먼 이옥주 등이 자녀를 입양해 키우는 대표적인 연예인들이다. 여러 아이를 입양해 건강하고 행복하게 키우고 있는 브래드 피트-안젤리나 졸리 부부 등 할리우드 스타들이 일반인의 입양에 대한 인식 전환에 크게 기여한 것처럼 입양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이 엄존하는 한국에서도 차인표-신애라, 이아현 같은 대중의 시선을 받는 연예인 스타들이 입양 문화 활성화에 일조하고 있다. 자녀를 가슴으로 낳아 키우는 연예인들은 입양은 특별하거나 칭찬받을 일이 아니며 입양으로 인해 오히려 자신과 다른 가족이 더 행복해졌다고 입을 모은다. “정민이(큰아들)에게 하나님이 우리를 부모로 선택하게 했듯 둘째 예은이, 셋째 예진이는 우리가 입양한 것이 아니라 정민이와 다른 방법으로 이 아이들이 우리를 부모로 선택했습니다. 입양은 가정이 절실하게 필요한 아이에게 울타리를 쳐주는 것이며 새 가족과 사랑을 나누는 것입니다. 새 가족이 생기면서 아이가 사랑을 알게 되고 다른 가족들도 입양한 아이로 인해 많은 것을 깨닫습니다. 입양한 예은, 예진으로 인해 가족들이 더 행복해졌어요.” 두 아이를 입양한 차인표-신애라 부부의 말이다. “결혼 전 입양을 해 아이를 키우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가슴으로 낳은 아이도 배 아파 낳은 아이와 똑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둘째를 입양하고 키우면서 정말 좋았어요. 그래서 셋째도 입양을 하게 됐지요.”신애라의 말이다. 신애라의 적극적인 입양 의사에 남편 차인표를 비롯한 다른 가족들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입양단체 관계자들은 스타 부부 차인표-신애라의 두 아이 입양은 많은 사람들에게 입양에 대해 관심을 끌게 하고 국내 입양 활성화에 크게 기여했다고 말한다. “입양했다고 하면 왜 칭찬받는지 솔직히 저는 반감이 듭니다. 내 딸들은 나를 있게 해준, 살게 해준 사람들입니다. 딸들이 아니었으면 너무 힘들어서 내가 지금 어떤 모습일지 상상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2007년 첫째 딸 유주(9)를, 2010년 둘째 딸 유라(6)를 입양한 탤런트 이아현이다. 이아현은 입양은 특별한 일이거나 찬사를 받을 일이 전혀 아니라고 했다. 혈연에 대한 집착, 법과 제도 문제 등 한국에서 입양이 활성화하지 못한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자녀들을 입양한 연예인들은 강연과 홍보대사, 그리고 방송 등을 통해 입양에 대한 인식 전환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펼치기도 한다. 입양한 아이를 잘 키워 결혼까지 시킨 코미디언 엄용수는 방송 등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녀 셋 중 둘이 ‘가슴으로 낳은 애들’이다. 피 한 방울 섞이고 안 섞이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사랑으로 가족을 이루면 되는 것이다”라며 입양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설파한다. 입양 홍보대사로 활동하는 연극인 윤석화는 방송 등 대중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우리가 유교적인 사상이 많고, 국내 입양에 대한 편견이 아직도 많은 것 같아요. 외국의 사례나 제 개인적인 경험으로 보면, 정말 아이들이, 생명이 크는 것은 사랑이 가장 우선이고, 오히려 DNA(혈연)보다 더 중요한 게 사랑이고, 환경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아직도 많은 아이가 해외로 입양 가고 국내 입양이 잘 안 된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안타깝죠”라며 국내 입양이 활성화했으면 하는 바람을 강력하게 피력한다. 입양 문화가 이전보다 개선됐다고 하지만 장애아나 혼혈아 입양을 꺼리는 인식은 여전하다. 2015년 한 해 장애나 건강에 이상이 있는 아동 중 국내 입양은 24명이었지만, 해외 입양은 99명이나 됐다. 정부가 해외 입양을 통제하지 않았던 시기인 2002년에는 해외로 입양 간 장애아가 827명에 달했고 국내 가정에 입양된 장애아는 16명에 불과했다. 필리핀계 혼혈아를 2007년 입양해 가정을 이룬 중견 연기자 송옥숙은 “입양한 아이가 혼혈이냐 아니냐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고 혼혈아에 대한 사회의 시선에 개의치 않았다. 아이가 건강하고 행복하게 자라는 것만이 중요했다”고 말하며 장애아나 혼혈아에 대한 입양이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했다. 입양아 가정에서 고민이 많은 입양 공개 여부에 대해서도 연예인의 역할이 커지고 있다. 자녀를 입양한 연예인들 대부분은 외국처럼 입양 공개에 대해 찬성하고 있다. 가수 조영남은 “아이를 입양한 것은 세상의 빚을 갚는 심정이었어요. 아이를 공개 입양한 것은 입양 문화에 대한 인식을 바꿔보려고 한 거예요. 결과적으로 입양 사실을 공개함으로써 아이를 밝게 키운 것 같아요”라고 했다. 차인표-신애라 부부는 “저희가 얼굴이 알려진 사람이기 때문에 비밀 입양이라는 게 거의 불가능합니다. 비밀 입양은 아이에게 그늘을 만들어 주는 것 같아요. 부모야 본인이 선택한 거지만 아무 잘못도 없는 아이들은 비밀 입양을 할 경우 숨겨야만 하는 음지가 생기는 것이지요”라며 입양 공개 찬성 이유를 밝혔다. 개그맨 엄용수는 여섯 살 때 입양해 2007년 결혼해 가정을 꾸린 딸 엄현아(35)씨가 아이를 낳고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며 입양은 세상에서 가장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이라고 다시 한 번 깨달았다며 더 많은 사람이 입양에 대해 긍정적인 인식을 했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입양은 버려진 아이를 데려다 키우는 게 아니라 소중하게 태어난 생명을 하나의 인격체로 키워내는 것이다. 모든 아이들은 따뜻한 가정 안에서 사랑을 받으며 성장할 권리가 있고, 어린아이들을 사회적 인재로 키워내는 것은 어른들의 몫이다. 입양은 내 삶에 가장 잘한 일이다.” 2003년 공개 입양으로 아들 매튜를 가족으로 맞은 영화배우 故 김진아가 생전에 나와 인터뷰하면서 한 말이다.
- 2016-07-04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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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주 병법 PART2] 문화가 변해도 손주 돌봄은 역시 격려와 인정이 최고
- 장영희 동년기자 bravopress@etoday.co.kr 요즘 ‘손주 얼굴을 보는 값’을 내야 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만남에 식사값을 내야 하고, 데리고 나온 자녀에게 차비를 쥐어주기도 한다. 이런 시대에 손주의 교육에 참여한다는 것은 감히 그런 마음을 품을 수 없다. 외할머니가 손자를 아기 때부터 다섯 살 때까지 보살폈다. 왕자 기르듯 받들면서 길렀다. 아이를 바라보고 있다가 뭐든지 가져다주었다. 여섯 살 아이를 밥도 먹여 줬다. 외동딸에 손자가 태어났으니 오죽한가. 거기에 아들 내외는 맞벌이를 하니 미안한 마음에 벌벌 떨었다. 나는 못마땅했지만 내가 맡아 키우지를 않으니 손자교육에 간섭하지 않았다. 외할머니가 몸이 안 좋아져 손자를 돌보지 못하게 되었다. 손자에게 말했다. “성범아, 아파트에 동네친구들 있지? 이 사탕 좀 친구들에게 나눠 줄까?” 무슨 좋은 생각이 있을까. 길에서 만나거나 집으로 갖다 주든지 그렇게 해보자고 했더니 쟁반까지 가지고 온다. 냅다 밖으로 나갔다. 강아지도 따라 나선다. 그때 네댓 살 여자아이가 엄마와 걸어온다. 얼른 다가가서 망설이지 않고 반지사탕을 준다. 그런데 손자는 처음 해보는 일이라 내가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일단 처음에 성공을 했다. 그러더니 옆 라인으로 간다. 현관문에서 ‘딩동’ 누르고 뭐라고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힘차게 내려왔다. 이제 두 번째도 성공했다. 이번에는 어린애를 안은 남자군인을 만났다. 이미 탄력이 붙은 손자는 다가가서 “이 사탕을 드리고 싶어요” 웃음까지 띠고 상냥하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현관문을 쾅 닫고 들어간 그 집에서 아이 울음소리가 났다. 왜 울지? 그 집에는 아이가 둘이니. 사탕이 하나밖에 없어서 우는 것은 아닐까. 손자는 금세 알아듣고 다시 문을 두드렸다. 사탕을 주고 보무당당하게 내려온다. 울음소리는 그쳤다. 마치 온 동네를 돌아다니라고 해도 다닐 기세다. 마지막으로 1층을 두드렸다. 손자 이름을 아는 걸로 봐서 아는 집인 듯했다. 그 집안으로 들어오라 하니 신발을 벗고 강아지와 함께 들어선다. 그 집 할머니와 딸과 주고받는 소리가 들린다. “너 혼자 왔니?” 이렇게 묻는 소리가 들리고, “바래다줄까?” 5분이 지나도 나오지 않았다. 살짝 걱정이 되었지만 밖에서 기다렸다. 드디어 손자는 나왔고, “이야, 우리 범이 최고다. 할머니도 못하는 일을 네가 해냈구나.” 입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며, 마치 개선장군처럼 집으로 왔다. 아들에게 전화로 이야기했더니 며느리에게 전해졌다. 아들은 “엄마 잘했어요” 며느리는 퇴근해서 하는 말이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셨어요?” 입이 쩍 벌어졌다. 손자가 밖에서 놀고 있는데 또래의 아이가 집으로 들어오고 싶어 해서 들어오라고 했다. 그래서 집에서 놀다가 그 집으로 손자는 다시 놀러갔다. 그랬더니 며느리가 퇴근해서 하는 말이 “어머니 그러시면 안 돼요” 이런다. 퇴근길에 돼지고기 한 근을 사서 그 집에 갖다 주고 왔단다. 약속을 해서 가야 하고 불쑥 아이만 보내는 것이 아니란다. ‘내 생각은 그럴 수도 있지’ 인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요즘 문화가 변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우리 손주가 얼마나 성장했는지 알기나 혀’ 이 생각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남의 집을 혼자 방문해서 1시간 정도 머물렀다. 내가 데리고 나올 때 그 집 주인은 “아이가 정리정돈을 잘 하네요” 기분 좋은 소리를 한다. 남의 집에 혼자서 오랫동안 머물다 오는 일도 손자가 처음 해본 일이다. 새가 둥지를 떠나 날기를 연습하는구나 ! 상봉역에서 전철을 타고 춘천역에 내려 놀이방에 도착했다. “우리 집까지 걸어갈까?” 손자에게 의견을 물으니 좋다고 한다. 집까지는 1.5km정도 되는 거리다. “그런데 할머니가 집으로 가는 길을 모르는데 너 혹시 아니?” 그랬더니 앞장을 선다. 고사리 손으로 내 손을 잡고, 혼자서 설명을 한다. 나무가 많은 집이 나오고, 그 다음에 닭을 기르는 집이 있다고 했다. “할머니가 닭 구경하고 싶다” 했더니 조금 기다리라며 닭장 앞에서 수탉이 몇 마리, 모이를 쪼아 먹는다느니 싸움을 한다느니 하며 이야기한다. 빵집에서 손자가 좋아하는 오징어먹물 빵도 샀다. 길을 건너 방앗간에서는 한참 동안이나 기름을 짜는 풍경, 자루에 담긴 고추를 구경했다. 김을 구울 때 바른 들기름을 여기서 샀다고 했다. 통닭집을 지나 손자의 얘기를 들으면서 기웃거리며 왔다. 아침에 놀이방에 갈 때 배웅하는 이가 있어야 된다. 오는 시간에도 마중하는 이가 있어야 한다. 아니면 버스가 그냥 아이를 태우고 놀이방으로 간다. 그래서 오후 4시 버스를 정확하게 기다려야 한다. 잠시 잠이 들거나 하면 일이 커진다. 쓰레기를 버리러 갈 때도 손자가 올 때까지 일부러 기다렸다. 분리수거한 몇 개의 백을 들고 손자에게 말한다. “너 쓰레기장 어디인 줄 아니?” 씽씽카 고리에다 그중 하나를 걸더니 앞장을 선다. 한참을 가야 했다. 며느리가 퇴근해서 왔다. “오늘 범이 일 좀 시켰다”했더니 “어머니 잘하셨어요” 속으로 별일이네 했다. 아이에게 천천히 이야기로 설명하면 된다. 할머니생각은 이런데 어때? PX매점에 갈 때도 할머니가 이것을 사고 싶어. 달팽이크림이 필요해. 너는 뭘 고르고 싶은데. 분명한 의사표현을 하고 이것을 사야 하는 이유를 말한다. 좀 시간이 걸릴지라도. 새로운 과자가 나왔는데 사볼까. 지금 콧물이 나기 때문에 아이스크림을 사지 않아야 된다는 것도 스스로 결정하도록 기다렸다. 아들은 나를 만날 때마다 다른 아이들보다 1년이 늦는다고 조바심쳤다. 내가 3개월 동안 춘천을 다니며 내 교육방법대로 아이와 자연스럽게 지냈다. 며칠 전에 아들이 와서 하는 말. “엄마 이제 범이가 아이들과도 잘 어울리고, 정상이래요.” 결국은 아이가 ‘혼자서도 잘해요’가 되었다. 이런 행동은 내가 두 아들을 길러 봤고, 지금 현재 제 몫을 해내는 어른으로 성장시킨 체험이 있어서다. 문화가 변해도 아이들을 키우는 근본은 스스로 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인정하는 것이다.
- 2016-06-29 2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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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 이주! 찬성 VS 반대] 이제는 삶의 쉼표를 찍을 때
- 제주의 자연은 아름답다. 문 열면 멀리 눈 덮인 한라산이 보이고 집앞 텃밭에는 노란 유채꽃이 물감을 뿌려 놓은 듯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마음만 먹으면 조금만 나가도 바닷물에 발 담글 수 있고 좋아하는 낚시도 원 없이 할 수 있는 섬, 제주. 그런데 남자는 제주살이를 끝까지 찬성하고 여자는 반대하고 있다. 남자는 자기가 평생 꿈꾸던 일이라 하고 여자는 답답해서 섬에서 못 살겠다고 한다. 필자가 알고 있는 구본홍(63·남·정년퇴직·광명시)씨는 작년부터 제주살이 하고 있다. 그는 모 중소기업의 이사 직함을 끝으로 꽃중년이라 불리는 61세에 정년퇴직했다. 퇴직하자마자 오라는 회사가 있었지만, 과감하게 거절하고 아내와 함께 제주행을 선택했다. 그곳에 가기까지 아내와의 견해차가 많아 쉽지 않았다. 지금껏 쉬지 않고 달려온 자신에 대한 보상으로 현재는 놀멍쉬멍 느린 삶을 즐기고 있다. 하지만 그의 아내 김옥녀(60·여·주부) 씨는 아직도 낯선 곳에 대한 적응이 쉽지 않다고 말한다. 제주 이주를 찬성하는 남자 죽을 때까지 일만 하다가 생을 마칠 것인가? 어느 정도의 여력이 된다면 남은 생을 갈무리하며 건강하고 즐겁게 사는 것도 바람직한 일이다. 구본홍 씨의 퇴직 후 남은 재산은 중형 아파트 1채와 퇴직금. 그리고 다달이 나오는 연금이 있다. 지금껏 성실히 살아온 결과다. 욕심을 버리니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다고 한다. 들어보니 앞으로 20년 후까지의 계획도 구체적으로 세워놓았다. 제주에 아무 연고도 없는 사람이 텃밭이 있는 시골집을 보증금 2천만 원에 1년 치 집세를 선납으로 200만 원을 주고 얻었다. 살아보니 자신의 적성에 딱 맞는다고 한다. 가능하면 제주에서 오래 살고 싶단다. 전입신고도 마쳤다. 제주도민이 되면 비행기요금 할인을 비롯해 여러 가지 혜택이 주어진다. 온 지 일 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마을 사람들과 형님 아우하며 잘 지내고 있다. 비록 외지인이지만, 현재 그 마을에서 제일 어리기 때문에 어른들이 막내라고 챙겨주고 있다. 섬이란, 원래 타지사람을 ‘육지 것’이라 배척하는 경우가 있는데 성품 좋은 60대 젊은 부부가 마을에 들어와 나이 든 이웃을 잘 도와준다고 칭찬이 자자하다고 한다. 남자가 제주이주를 찬성하는 이유는 드디어 사람 사는 것 같다고 한다. 친구들도 모두 부러워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낯선 타지에서 살아가는 비결은 잘난 체 있는체하지 않고 다가가 도움을 받을 생각보다 내가 먼저 도울 것이 없는지 찾아보는 것이라고 한다. 마을 어른들한테 잘하다 보니 이 집은 채소와 과일 생선 등을 이웃 사람들이 건네주는 것만으로도 넘치고 있으니 생활비도 서울살이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이 적게 든다고 한다. 다만 남자는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만 석 달에 한 번 여자는 특별한 일이 없어도 답답함을 풀기 위해 1달에 한두 번 서울에 다녀온다고 한다. 앞으로는 두어 해는 유유자적 지내다 원하면 일을 할 수도 있다고 한다. 제주도는 일손이 부족해 부지런하면 남녀노소 수입을 낼 수 있는 일거리가 많다. 부인의 말로는 남편이 요즘은 갯바위 낚시에 재미 들려 시도 때도 없이 고기를 잡아 오기 때문에 가끔은 손질하기 귀찮을 때도 있다고 행복한 푸념을 한다. 제주 이주를 반대하는 여자 현재 사는 집의 위치는 제주시 구좌읍 한동리. 올레길 20코스 중간쯤이다. 15K 이내에 성산리 일출봉과 함덕 해수욕장이 있다. 공기 좋고 조용한 건 좋지만, 제주살이를 불편해한다. 이유는, 물론 제주에도 문화공간이 있긴 하지만 도심처럼 가까운 곳에 있지 않고 지인들과의 잦은 만남을 가질 수 없어서이다. 그 가운데 제일 불편했던 경우는 꼭 참석해야 할 일이 있어 김포행 비행기를 타야 하는데 기상악화로 결항이나 출발시각이 지연될 경우다. 김포에서 제주까지 비행시간만은 1시간 정도 걸리지만, 출발부터 도착지까지는 총 4시간 정도 소요되니 힘들다. 그 외에 금융기관과 대형마트, 편의시설이 적고 멀리 있어서 도심 같으면 5분 거리인 것을 차를 타고 가야 하는 게 힘들다고 한다. 여자는 반대하는 입장이지만, 만약 남편이 끝까지 우긴다면 평생 가족을 위해 살아온 사람이니 양보할지도 모르겠다고 한다. 아무튼, 둘만의 시간이 많다 보니 부부간의 정은 더 깊어지는 거 같다고 한다. 남자는 제주도가 좋다고 무작정 내려와서 대문 굳게 닫고 자기만의 성안에서만 살면 이웃의 곱지 않은 시선과 외로움 때문에 몇 달도 버티지 못하고 떠나는 경우가 생긴다고 한다. 제주의 슬픈 역사인 4·3사태를 보면 그들이 왜 외지사람들한테 ‘육지 것’이라 하는지 이해된다. 제주에서 태어났어도 본적이 육지이거나 아버지 대에 제주에 이주했다면 수십 년을 살아도 제주도민으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한다. 타지에 살면서 부딪치는 경우도 있겠지만, 아름다운 자연풍광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견딜 만한 가치가 있는 땅이다.
- 2016-06-28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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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독성 인간(toxic people)
- 대인관계는 전 연령대에서 모두 중요하지만 시니어들에게는 특히 중요한 요소이다. 남자들은 나이가 들면서 남성 호르몬이 줄어들어 여성화되어 간다고 한다. 잘 삐치고 잘 따진다며 빠지지 말고 삐치지 말고 따지지 말라, 삐지더라도 삐치더라도 용서하자는 뜻의 ‘빠삐따 빠삐용’이라는 구호가 인기이다. 시니어들은 마음이 여려져서 조그마한 일에도 상처를 잘 입는다. 누가 싫은 소리를 하면 흘려듣지 못하고 다툼이 잃어나거나 마음을 크게 상한다. 그러므로 누가 누구에게 지시하거나 싫은 소리를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군대나 직장에서 떠난 지 오래 된 사람들이다. 특히 남자들은 직장에서의 버릇이 남아서 아내에게 명령하듯 말한다 해서 종종 오해를 사는 경우도 많다. 어느 신문에 ‘유독성 인간(toxic people)’이라는 글이 실렸다. 어느 조직에나 한두 명은 꼭 있다고 한다. 매사에 부정적이고 끝없이 불평한다거나 본인은 영원한 피해자라고 언제나 비난할 대상을 찾는다는 것이다. 늘 자기 견해가 옳고 자기가 제일 똑똑하다는 것이다. 어쭙잖게 교만해서 남들에게 우월감을 갖기도 한다고 한다. 욕심과 질투심에 차서 남 잘되는 꼴을 못보고 남의 흉을 보며 뒤에서 험담하고 대단한 정보인양 떠든다고도 했다. 특히 부정적인 사람은 시비를 걸지 않고는 그냥 못 넘어간다. 찬물을 끼얹는 것이다. 당하는 사람은 기분이 상할 수밖에 없다. 이율배반적인 행동을 하는 경우도 있다.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스캔들로 보이는 것이다.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도 있다. 그렇다고 악한 사람이기보다는 성격이 둥글둥글하지 못하고 ‘모난 사람’이거나 모자라서 ‘못난 사람’으로 봐야 한다. 이런 사람과 대처하는 방법은 되도록 마주치지 말라는 것이다. 무서워서 피하는 것이 아니라 더러워서 피한다는 말이 맞다. 공연히 시시비비를 가리려 해봤자 상처만 입는다. 일반적으로 조직 생활을 해 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가 있다. 조직 생활을 해본 사람은 상하 관계, 수평 관계를 늘 눈치를 살피며 살아 왔기 때문에 무난하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사람은 남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기 때문에 어딜 가나 삐걱대는 것이다. 학생들이라면 학교에서든 집에서든 어른들의 가르침을 받는다. 그러나 시니어들은 누가 가르치는 사람이 없다. 그래서 교만해져도 본인은 잘 모른다. 남들이 은근히 피하는 경우라면 혹시 본인이 유독성 인간이 아닌지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결국 죽을 때까지 못 고친다는 것이다. 인성을 수련하는 방법 중 하나는 책을 많이 읽는 것이다. 책이 스승인 것이다. 인문학 책들이 그렇다. 물론 인성에 도움이 되지 않는 서적만 골라 읽는다면 도움은 되지 않을 것이다. 영화도 좋은 스승이다. 객관적인 시각을 갖도록 해준다. 물론 영화도 여러 가지이므로 흥미 위주보다는 인성에 도움이 되는 영화만 말하는 것이다.
- 2016-06-24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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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나는 왜 저 인간이 싫을까?'..싫은 사람 대처 이렇게 하라
- ‘나는 왜 저 인간이 싫을까?’는 일본의 정신과의사 오카다 다카시의 책이다. 그가 쓴 ‘나는 왜 혼자가 편할까’, ‘아버지 콤플렉스 벗어나기’, ‘엄마라는 병’, ‘나는 왜 적응하기 힘들까’, ‘나는 상처를 가진 채 어른이 되었다’ 등 이미 비슷한 종류의 책들이 이미 국내에 소개됐다. 이 책의 원제는 ‘인간 알레르기(Human Allergies)이다. 저자는 다른 알레르기처럼 사람은 사람을 싫어하는 심리적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구조가 들어있다고 주장한다. 그 메커니즘을 알면 인간관계가 쉬워진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테마의 책이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 혼자서 살아가기 힘들고 따라서 사람들과의 관계가 중요하다. 그런데 그 중에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만, 싫은 사람도 분명히 있다. 그냥 싫은 것도 문제이지만 도저히 같이 지낼 수 없을 만큼 싫은 사람도 있다. 이것이 문제인 것이다. 내가 힘이 강하고 법이 허용한다면 그 사람을 내 속이 풀리도록 응징할 수 있지만, 내가 힘이 더 약해서 자칫 응징하려 했다가는 내가 다칠 수도 있고 상대방을 힘으로 응징한다 해도 법적인 책임이 뒤따른다는 문제도 있을 수 있다. 집단생활에서는 싫어도 같이 해야 하니 집단생활 자체가 싫은 경우도 있다. 그 사람이 싫어 회사나 동호회를 내가 떠난 경우, 처음은 안 그랬으나 끝이 안 좋았던 경험, 한번 싫은 사람은 끝까지 싫은 경우, 어떤 점이 싫으면 그 사람의 모든 것이 싫어지는 경우, 좋은 점보다 나쁜 점들이 많이 보일 경우 등 싫은 사람이 있으면 괴롭다. 싫은 사람 중에는 도저히 같이 어울릴 수 없는 사람, 도무지 이해라 수 없는 사람, 매사에 반발심이 들게 하는 사람, 아무리 노력해도 도저히 좋아지지 않는 사람, 별 이유 없이 싫은 사람 등 싫은 사람도 정도에 따라 등급이 있다. 문제는 생판 모르는 남일 경우도 있지만, 가까운 가족이나 동료, 친구 중에 이런 사람이 있으면 싫어도 자주 마주쳐야 하니 괴로운 것이다. 내 안에 문제가 있는 경우도 있다. 내 옆에 있는 사람이 언젠가는 배신할 거라는 생각, 사촌이 땅을 사면 배 아픈 것처럼 성공한 사람은 운이 좋아서 성공했다고 보는 생각, 사람들 앞에서 내 약점을 보이고 싶지 않아 하는 생각, 나는 내 능력만큼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고 있다는 불만과 그런 생각 등이다. 저자는 이런 현상을 ‘인간 알레르기’라고 봤다. 그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이해하고 극복해나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 마음 속에 ‘자기 회복 장치’가 있는데 단계별로 심리 전략을 세워보라는 것이다. 1단계는 우선 몸과 마음을 편하게 갖는다. 잠도 충분히 자고 허기지지 않도록 밥도 제때 먹어야 한다. 몸 상태가 안 좋으면 짜증이 쉽게 난다. 그리고 가볍게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보는 방법, 자신의 말을 잘 들어 줄 사람에게 얘기해서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으로 대처한다. 싫은 사람이 내게 한 말이나 행동을 자기비하나 죄책감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권력 남용’, ‘인신공격’ 등 객관적인 단어로 정의 내리는 방법도 써보라고 한다. 2단계는 사실과 추측을 정확히 구별하고 확대해석하지 말라는 것이다. 남들은 생각보다 나에게 관심이 없는 경우도 많다는 사실도 알아 둬야 한다. 3단계는 내가 싫어하는 사람을 머릿속으로 해부해 보라는 것이다. 좋은 점이나 그럭저럭 받아들일 수 있는 점보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점이 더 압도적으로 강하다면 중이 절을 떠나듯이 내가 떠나라는 것이다. 4단계는 나를 돌아보는 것이다, 내게 상처 준 사람, 과거에 싫어했던 사람등과 연상하여 싫어하는 경우도 많다는 것이다. 내가 바뀔 수 없다면 물리적으로 거리를 유지하는 방법이 낫다. 5단계로는 심리적 ‘안전기지’로 나를 믿어주는 사람을 만들거나 ‘공감 능력’과 ‘자기 성찰력’을 키우는 노력을 하라는 것이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즐거운 일을 함께 하는 습관과 기회를 만드는 것이 요령이라고 주장한다. 대인관계에서 자꾸 남들과 부딪치게 되거나 싫은 사람이 많다면 이 책을 읽어볼 필요가 있다. 원래 꼴불견인 사람도 많다. 싫은 마음을 유발하는 것이다. 그러나 내게도 문제는 없는지 성찰해볼 필요가 있다.
- 2016-06-24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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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니 자서전] 교사에서 시인으로
- 가난은 나의 스승 지난 세월에 살아온 길을 이야기한다고 생각하니 나이가 들었다는 걸 실감한다. 한편으로는 살아온 길을 돌아보는 계기가 된다. 전쟁 직후 태어나 1960년대 중고등학교에 다녔고, 70년대 초에 대학을 다녔다. 이후 80~90년대 비약적인 경제 발전으로 이제는 세계 10대 경제 대국이 되었다. 가장 빈곤한 나라에서 태어나 가장 급속한 발전으로 세상을 놀라게 하는 그 시간을 모두 경험한 세대다. 이런 삶을 살아온 세대가 세계적으로도 거의 없을 것 같다. 한국 민족이 가진 넘치는 정과 근면함이 지금의 조국을 만들어 간 원동력이라 생각한다. 그렇게 가난은 벗어났고 이제는 어디를 가도 한국이 낯선 나라가 아닐 정도로 발전했다. 필자 역시 보편적 가난을 겪으며 학창시절을 보내며 교복과 교과서만 있으면 만족해야 했다. 요즘 아이들 어려서부터 여기저기 학원을 가야 하고, 문제집과 참고서가 산더미 같이 쌓여 있는 걸 보면 격세지감이 든다. 당시 필자에게는 참고서나 문제집은 사치품이었다. 교과서만으로도 충분히 수업할 수 있었던 당시의 교육제도가 감사했다. 물론 그 시대에도 과외나 학원은 당연히 있었지만 필자에게는 먼 나라 이야기일 뿐이었다. 가끔은 지금도 나처럼 그렇게 학교 다니는 학생들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때와는 달리 열등감에 시달릴 것 같아 마음이 쓰인다. 그래도 가난했던 그 시절이 그립다. 그때는 사람들의 마음이 지금처럼 각박하지 않았다. 경제적으로는 아주 힘들었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늘 넉넉했다. 작은 일에나 큰일에나 함께 울고 웃을 수 있는 정이 기본이었기에 가능했다. 친구들과 뛰놀던 뒷동산이 지금도 가끔은 생각난다. 위로 오빠들만 셋이고, 밑으로는 여동생이 둘이 있었다. 따라서 오빠들의 행동에 많은 영향을 받아 여성성이 전혀 없다. 더욱이 오빠들이 다정다감하지도 않고 무뚝뚝했는데 필자는 그것을 그대로 닮았다. 놀이해도 남자들이 하는 놀이를 더 많이 했던 것 같다. 동네 아이들과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갖가지 놀이를 하면서 보낸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 지난해 어느 봄날 유튜브로 ‘고향의 봄’을 들으며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 대궐 차리인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라는 가사를 따라 부를 때 그 옛날의 뒷동산이 눈에 보이는 듯 눈물이 흘렀다. 그렇게 한참을 울고 나니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이었다.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 늘 그 자체가 카타르시스의 효과를 준다. 필자가 초등학교 2학년 어느 날 아침이었다. 학교에 가려고 나와 보니 비는 주룩주룩 내리는데 우산이 하나도 없었다. 오빠들이 먼저 학교 가면서 다 갖고 갔다. 구석에 찢어진 비닐우산이 있기에 그걸 들고 갔는데 바람에 뒤집혀서 쓰나 마나 했다. 그렇게 해서 학교에 도착해 보니 지각까지 했다. 조용한 교실 문을 들어갈까 말까 하다가 살그머니 열었는데 웬걸 모든 눈이 필자를 향하고 있었다. 지극히 소심한 필자는 그 자리에서 연기처럼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 이후 비라는 소리만 들어도 경기가 날 정도였다. 그토록 비를 싫어했던 필자가 사춘기가 되면서 빗소리가 좋아졌다. 싫어했던 그 부피보다 몇 배는 더 좋아한다. 그래서 비 오는 날이면 우산을 들고 혼자 나무가 많은 길을 걸으며 혼자 빗소리를 음미한다. 그 맛은 언어로 표현하기 힘들다. 세상이 다 필자 것처럼 여겨진다. 어려서부터 교사를 생각하다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범대학에 입학했다. 여자 직업으로는 최고라는 어른들의 말씀이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어왔었기 때문에 다른 직업은 생각한 적도 없었다. 당시는 교사라는 직업이 지금처럼 최고 인기 직업이 아니었다. 경제가 엄청난 기세로 성장할 때여서 일반 회사원보다 비인기 직업이었다. 보수도 그렇고 업무 환경으로도 매우 후진적이었기 때문이다. 함께 입학한 남자 동창 중 교사로 남은 사람은 20%가 채 안 되었다. 그만큼 대우가 학교보다 월등하게 좋은 곳으로 빠져나가던 때였다. 사명감으로 한다고는 하나 일단 눈에 보이는 것에 움직이게 된다. 그런 분위기에서 대학생은 되었지만 머리로 생각했던 캠퍼스의 낭만을 즐기는 것이 필자에게는 어쩌면 사치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스스로 자신을 옭아매는 삶이었다. 돌아보면 그 시간이 인생에 주어진 가장 밝고 환한 시간이었는데 필자는 즐기는 걸 몰랐고 언제나 기계처럼 살아왔다. 사람이 기계처럼 산다는 걸 뒤늦게 더 깨닫게 되었지만 성격상 주어진 책임에만 충실한 기계였다. 자신의 감성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대학 생활은 더 많은 고민으로 채워지는 시기였다. 당시 집에서는 누구든 고등학교까지만 학비를 대주고 대학부터는 알아서 가야 했다. 오빠들도 다 그렇게 다녔고, 필자 역시 대학은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벌어서 다녔다. 그것이 자유를 빼앗기는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하면 생각의 틀이 굳어졌기 때문이지 환경이 필자를 누르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졸업 후 고등학교 국어교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첫 발령지가 충북 옥천군이었다. 생전 처음 접하는 시골 풍경이 생소했지만 그곳은 잠재했던 감성을 꺼내주었다. 마음 깊은 곳에 숨어있었던 정서를 맘껏 풀어낼 수 있었다. 풋내기 교사를 맞아주는 학생들과 동료 선생님들의 아낌없는 격려와 배려가 삶의 기쁨을 주었다. 그중에서 학생들과의 만남이 참 좋았다. 필자를 잘 따라주고, 순수한 여고생의 감성이 한없이 즐겁게 했다. 국어 과목은 여고생들에게는 남다른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문학 작품을 공부할 때는 꿈속에서 헤매듯 빠져들었다. 가끔은 밖으로 나가 함께 시와 소설을 이야기하면서 수업할 수 있었다. 지금 학생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낭만적인 시기였다. 사과 꽃이 필 때는 사과밭으로 가서 자연과 함께 호흡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포도 철에는 포도밭으로 달려갔다. 필자에게 참 유익한 시기이었다. 조금은 느슨하게 살아가는 법을 배웠고, 자연이 주는 선물을 조금씩 맛보아 알게 되었다. 지금 부족하나마 시를 쓸 수 있는 감성을 일깨워준 고마운 곳이다. 언제나 다시 달려가고 싶은데 언젠가 가보니 아주 많이 변해서 그 맛을 느낄 수가 없었다. 더 깊은 속으로 들어가면 맛볼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다시 도전하는 삶 결혼하면서 교직을 떠났다. 그렇게 갑자기 전업주부가 되면서 마음의 고통이 많았다. 늘 단순하게만 생각했던 필자의 행동이 후회됐지만 그런 모습 보이기 싫어서 가정에 더 충실했다. 그렇게 전업주부로 17년을 살면서 아들 하나를 키워 중학생이 되었다. 아이가 중학생이 되고 나니 삶은 참 무료했다. 그리고 우울했다. 40세가 넘은 그 시기에 인생 좌표가 어딘지 돌아보면서 그동안의 삶이 무척 우울하게 보였다. 그런 필자를 보던 남편이 대학원 입학을 권유했다.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일을 제안하는데 처음에는 거절했다. 40세가 넘은 나이에 어떻게 20대 학생들과 같이 공부를 하겠느냐고 했다. 하지만 결국 남편의 적극적 후원을 힘입어 1993년 가을에 대학원에 입학하고 5년 동안 모든 과정을 마치고 학위를 취득했다. 그 시기 필자는 다시 젊은이로 돌아갈 수 있었다. 도서관에 가는 날이 빈번해지고 발표 수업이 많았기에 자료 준비를 위해 책과 씨름해야만 했다. 암기해야 할 외국어 공부는 예전과는 달리 보통 어려운 게 아니었으나 몇 배의 노력으로 해냈다. 그런 노력은 할수록 더 힘이 났다. 즐거웠다. 그리고 행복했다. 필자는 행복과 즐거움을 주는 젊은이들과 계속 만나고 싶어 혜전대, 한서대, 경원대 교수까지 됐다. 필자가 전업주부로 사는 동안 학교 환경도 완전히 달라졌다. 실제 시간은 17년이지만 사회와 학교 환경의 변화는 30년쯤 지난 것 같았다. 사회 자체가 급속도로 변화하는 중이었고, 가치관도 하루가 다르게 확확 달라지고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어지러웠다. 가정이라는 테두리에서 조용하게 살았던 필자가 급변하는 사회에 적응하기가 쉽지는 않았다. 그래서 필자는 젊은 학생들과 교류할 수 있는 장을 많이 만들었다. 대상 학생들이 고등학생에서 대학생으로 바뀌었지만 젊음 안에 있다는 것, 그들과 함께 호흡을 맞춰가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어느 날 문득 생각난 것이 필자가 고등학교 때 장래 희망에 교수라고 썼던 것이 생각났다. 결국엔 강단에 섰다는 생각이 들어서 혼자 웃었다. 창작과 신앙의 길 전공이 현대시였기 때문에 작품 활동을 하는 것이 정도여서 학위를 마치면서 바로 시로 등단했다. 어려서부터 글 쓰는 것을 막연하게 동경은 했지만 등단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가끔 수필을 쓰면 좋겠다고 생각만 했었는데 시를 쓰게 되었다. 창작이 고뇌의 산물이긴 하나 아주 조금씩 그 맛을 알아가고 있다. 모든 창작이 다 힘든 과정을 거쳐야 하듯이 시 역시 그렇다. 필자는 아직도 갈 길이 먼 초보에 지나지 않지만 작은 희열을 알아가면서 보람도 느낀다. 나이 들어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라 더욱 애정이 간다. 이제 강의는 끝내고 창작만 남았다. 필자와 끝까지 함께 갈 절친한 친구다. 하나의 작품을 쓰기 위해 생각하고 삶을 반추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내면을 볼 수 있어서 좋다. 필자에게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앙이다. 대학 재학 중 친구의 권유로 시작된 신앙생활은 삶의 근간이다. 중학교 1학년 때 짝으로 만나 친구는 대학교까지 10년간 같은 반, 같은 과여서 언제나 붙어 다녔다. 그가 내게 하나님을 알려주었고, 대학 3학년 때부터 교회를 다녔지만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것은 한참 후였다. 하나님이 필자를 만나 주시면서 필자의 사고 체계가 바뀌었다. 아니 지금도 변화되는 과정이다. 인생의 윤택함이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으면서 마음엔 여유가 생긴다. 삶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가치관이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삶을 이끌어 주시는 분이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걸 깨달은 후부터 진실로 평안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사람이 애쓰고 힘써서 쌓은 것이라고 해도 하나님 없이 이루어진 것은 언제나 불안하다. 하지만 하나님 안에 있을 때의 평안은 세상에서 누리는 편안함과는 비교할 수 없다. 하나님은 필자 인생의 전부다. 가장 의미 있는 삶으로 이끌어 주시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바울이 했던 것처럼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는 고백이 저절로 나온다.
- 2016-06-22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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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 “행복추구 모든 것 <번영학>에 담았죠” -3년 걸쳐 인생 역작 펴낸 이형구 전 노동부 장관
- 1964년 경제기획원 사무관을 시작으로 경제기획관, 경제기획국장, 재무부 차관보, 재무부 차관, 한국산업은행 총재 등을 거치며 대한민국 경제발전을 위해 살아온 이형구(李炯九·76) 전 노동부 장관. 대개 한 분야에서 탄탄대로 삶을 산 이들은 자기계발서나 자서전을 쓰곤 하지만, 그는 그만의 방법으로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일생의 사명감을 가지고 쓴 을 통해서 말이다. 글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2008년 이 전 장관이 출간한 에서 그가 제시했던 문제들에 대한 결론이 담긴 책이 바로 이다. 단순 명료한 책 제목만 보아도 이전보다는 더 포괄적이고 굵직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단순히 경제 관련 일을 해왔기 때문에 책을 낸 것은 아니다. 은 그의 인생에 대한 자부심이자 사명감, 후세대를 위한 바람이 담긴 ‘인생작’과 같다. “이제 내 할 일을 다 했다”며 시원스럽게 이야기하는 그다. “2005년에 세종대학교에서 교수로 지내면서 준비했던 책이 입니다. 번영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조건을 역사, 정책, 문화적 상황에 따라 설명했어요. 그 책을 쓰면서 꼭 그에 대한 결론을 내는 책을 쓰고 죽겠다고 결심했었죠. 한 10년쯤 후에 쓸까 했는데 여러 가지 상황으로 그보다 훨씬 앞당겨 쓰게 됐어요.” 그가 예상보다 책을 일찍 쓰게 된 이유 중 하나가 2008년 리먼브라더스 파산 사태다. 번영학은 신자유주의의 경쟁을 바탕으로 한 시장 논리와 ‘경제하려는 의지(will of economize)’를 바탕으로 한다. 리먼브라더스 사건은 미국의 양적완화 정책으로 시장이 왜곡되면서 신자유주의 경제논리를 무너뜨렸다. 갑작스러운 경제 상황의 변화로 그는 하루라도 일찍 펜을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인위적인 통화 공급으로 인해 신자유주의가 무너져버렸죠. 여러 가지 발전 전략이나 가치에 변화가 오기 시작했어요. 신자유주의의 가장 기본이 경쟁이거든요. 발전하려는 의지가 중요한데, 우리나라로 치면 1970년대 새마을운동을 예로 들 수 있죠. 신자유주의의 경쟁체제를 가지고 개발도상국 시대의 발전의 의지를 접목하자. 거기에 정부의 역할이 조금 확대돼야 한다는 게 번영학의 기본이자 의 결론과 같아요.” 모두 다 한번 잘살아 보세~ 번영(繁榮)이란 번성(繁盛)과 영화(榮華)를 이른다. 번성은 객관적으로 번창하고 풍성한 상황, 즉 먹고 입을 것이 넉넉한 경제적 풍요를 의미한다. 영화는 주관적으로 느끼는 호화로움과 영예를 뜻하는데, 객관적인 경제적 의미보다는 사회적 의미의 주관적 상황과 개인의 행복을 뜻한다. 따라서 번영이란 경제적으로 풍족한 조건과 더불어 개인의 영예, 행복이 뒷받침돼야 가능하다 할 수 있겠다. 거기에 현재의 번영이 미래에도 지속 가능할 것이냐에 대한 확신이 뒤따라야 한다. “만약 내가 현재 연간 소득이 1억원이라 하면, 10년 후에도 1억원이면 되겠어요? 현재보다 발전한 소득수준이 중요합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돈이 많다고 행복한가? 그 돈이 영예로워야 한다는 거예요. 예를 들어 도둑이 훔친 돈으로 잘 먹고 잘산다고 하면 소득 수준에는 문제없겠지만 내 가족이나 이웃에는 떳떳하지 못하잖아요. 나를 번창하게 하는 그 돈이 영예로워야죠.” 그는 상대방에 대한 인정과 관용을 베푸는 것 또한 중요한 덕목이라고 했다. 그래야 개인의 삶의 질 향상은 물론, 공동체의 행복가치를 추구할 수 있다는 것. “과거에 우리는 너무나도 가난하게 살았잖아요. 하루 한 끼 먹기도 힘들었는데, 그런 내가 삼시 세 끼 챙겨 먹으면 행복하지 않겠어요? 소위 절대빈곤 타파라 하는데, 그저 세 끼 먹는다고 만족할까요? 매일 채소만 먹는 것보단 고기반찬도 먹고 해야 좋을 거 아녜요. 그게 생활의 질이에요. 그러면 내가 좋은 반찬을 배불리 먹는다고 행복할까요? 이웃도 잘 먹고 잘살게끔 관용을 베풀 줄 알아야죠. 그래야 ‘저 사람 참 훌륭하다’는 인정도 받고 개인이 자랑스러워질 수 있는 거예요. 상대에 대한 관용과 인정이 행복 조건의 중요한 가치입니다.” 현재 삶의 행복 점수, 70점 행복 가치 추구의 중요성에 대해 역설하는 그에게 자신은 얼마나 행복하다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그는 “70점 정도”라고 대답했다. 이 전 장관은 현실적으로 채우지 못하는 30에 연연하기보다는 소소하게 채워진 70에 만족하는 모습을 보였다. “글을 쓰는 일도 행복하고, 손주를 보는 것도 즐겁죠. 다들 그런 재미로 사는 거 아니겠어요? 집 근처에 서재를 마련했으니 글을 쓰고 싶거나 책을 읽고 싶을 때는 자유롭게 나올 수 있는데 그런 것도 행복해요. 이번에 책을 내고 동료들이 의견을 내서, 실제 관련 일을 했던 이들 중심으로 한국번영학회를 설립하기로 했어요. 6월에 시작하는데, 내가 일을 벌였으니 학회장을 맡았죠. 근데 뭐 그게 일인가요. 이제 나이 들고 편안한 마음으로 하는 거니까 일종의 놀이인 셈이죠. 아주 즐거워요.” 아쉬운 30점에 대해서도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돈을 좀 더 잘 모아둘 걸 하는 마음은 있어요. 그랬다면 더 의미 있는 일들을 해볼 수 있었을 것 같아요. 봉사나 기부도 그렇고요. 그런데 내가 재벌이나 기업가도 아닌데 돈이 그렇게 많으면 되겠어요? 그리고 이미 지난 일이잖아요. 그냥 살아가는 거예요. 괜찮습니다. 행복이라는 것은 아주 주관적인 평가거든요. 본인이 기준을 잘 설정해서 만족하고 인정하면 되는 거예요. 나보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도 얼마나 많겠어요. 아쉬운 점은 있지만 고맙게 생각해야죠. 나름의 기준은 있어 점수를 매길지는 모르지만, 사실 지금 나이에 그것에 좌지우지되거나 큰 영향을 받지는 않아요.” 현재의 삶이 행복하고 고맙다고 말하던 그는 인터뷰 중 올해 1월 세상을 떠난 어머니를 떠올렸다. 인터뷰 전 날이 바로 어버이날이었기 때문이다. 자식들이 잘해주는 것도 좋지만, 자신이 챙겨드릴 부모님이 이제는 안 계시다는 것이 못내 허전하다고 했다. 해마다 어버이날이면 부모님을 위해 무언가를 해드리려고 노력했던 그다. 그렇지만 마음은 편안하다고. 그가 그럴 수 있는 이유는 부모님 덕분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5년 전에, 어머니는 100세를 사시고 금년 1월에 돌아가셨어요. 아버지 어머니는 1990년대에 고향집을 떠나 서울로 오셨어요. 그때부터 같이 살지는 않았지만 제가 사는 여의도에 집을 마련하시고 생활을 하셨죠. 아마 두 분이 계속 시골에 사셨더라면 부모를 생각하는 애틋한 마음이 적었을 것 같아요. 근처에 사시니 매일 보고 이야기도 하고 무엇이라도 해드릴 수 있었죠. 내가 잘해서가 아니라 그분들이 나에게 그렇게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기 때문에 지금도 마음이 편안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정말 고마운 일이죠.” 진정한 은퇴 라이프의 시작 3년을 투자한 끝에 출간한 . 자기만족만을 위해 썼다면 그만큼 책임감을 느끼며 쓰지는 못했을 것이다. 공동체의 번영과 행복, 후손들을 위한 지침서 역할을 하리라는 바람을 담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주로 대학교 4학년 아이들을 가르쳤는데, 그때도 참 보람 있고 좋았어요. 하지만 내 인생의 가장 큰 보람은 사무관부터 시작해 최고위직에 이르기까지 나라 경제계획에 참여했다는 거예요. 힘든 점도 많았지만 가슴 뿌듯한 일이 더 많았죠. 다른 점에서 볼 때 난 그다지 특별한 사람은 안 되지만, 그만큼 한 분야에서 오랜 시간 많은 일을 한 사람으로서는 특별한 사명감을 느껴요. 개인적으로 나를 위해 했던 일도 아니니 후세대를 위한 무언가를 남겨야죠. 그들이 보고 ‘과거의 경제 계획은 이랬구나. 이러한 이론이 있고 상황은 어떠했구나’라는 것을 알 수 있도록 말이죠.” 그는 자신은 잠시도 가만있는 성격이 아니라고 했다. 실제 일을 할 때도 해외 여러 나라를 다니며 일했고, 테니스와 골프 등을 즐겼으며, 요즘도 중국어를 완벽히 소화하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학원에 다닌다. 하지만 을 세상에 내놓기까지 3년간은 해외 일정이나 모임 등을 자제하고 원고 작성에만 몰두했다. “책 출간하느라 바빠서 운동도 잘 못 다니고 해외도 거의 못 나갔어요. 대학교에서 정년퇴임을 하고 흔히들 말하는 은퇴 라이프가 다소 건조하긴 했죠. 한편으로는 그 시간이 오히려 나를 더 충만하게 하고 즐거움을 줬는지도 모르겠어요. 최근까지는 원고를 쓸 때가 가장 즐거웠으니까요. 정말 죽기 전에 꼭 하자 하는 것을 이뤘으니, 이제 죽기 전까지는 좋아하는 책도 읽고 여행도 다니며 지내려고 해요.” 노인이 되지 말고, 어르신이 되라 그가 지금까지 낸 책은 모두 경제와 관련된 전문서적들이다. 그 스스로 이야기할 정도로 남들이 선망할 만한 일을 많이 해왔는데도 자서전을 낼 생각은 없다고 한다. 자신을 드러내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노년기 삶에서는 자제해야 한다는 것. 그런 데에는 아내의 조언이 한몫했다. “아내에게 매일 듣는 말이 ‘노인네가 되면 안 돼요. 어르신이 돼야 해요’입니다. 상당히 좋은 충고라고 생각해요. 노인네가 된다는 게 뭐겠어요. 목소리 높이고 잔소리하고 대접받으려 하고 그런 거잖아요. 다른 사람이 봤을 때 ‘저 사람 참 잘 늙었구나’해야 어르신이 되는 거죠. 전에는 경제정책 운용과 관련해서 정부가 뭐를 한다 그러면 언론에 글도 쓰고 그랬어요. 근데 요새는 그런 것도 안 하고 있어요. 그렇게 떠들어봐야 늙은이 잔소리니까요.” 그는 최근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에 관한 글을 읽고 본받아야겠다고 느낀 점이 있다고 한다. 김 교수의 사위가 쓴 글이었는데, ‘장인어른은 가족 문제나 자식 일에 대해 절대 관여하지 않는다’는 것. 그는 자식이나 손주의 일에 가능한 한 나서지 않고 간섭을 줄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외의 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밥 먹고 생각하는 게 늘 나라 경제 운용에 대한 것이니까, 물론 얘기야 하고 싶죠. 내가 볼 때 잘못됐다고 느낀 것이나 이렇게 했으면 좋겠다는 것이나 왜 없겠어요. 그렇지만 내가 현재의 장관이며 총리며 하는 이들에게 이야기한다고 내 생각처럼 바뀌겠어요? 아니거든요. 결국 잔소리거든요.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내용은 모두 에 담았어요. 거기에 그동안 살면서 쌓은 경험, 지식, 조언 등이 담겨 있으니 자서전과 다름없지요.”
- 2016-06-15 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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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휴가지에서 생긴 일] 설악산 옥녀탕에서 이런 일도.
- 요즘은 다들 형편이 좋아졌는지 휴가철이나 무슨 때만 되면 외국으로 나가는 사람들로 인천공항이 북새통이 된다고 한다. 소시민인 필자는 아이가 어릴 적부터 어른이 되어 더는 아빠 엄마와 휴가를 같이 보내려 하지 않게 되었을 때까지 여름휴가나 겨울휴가 여행을 국내, 특히 동해안으로 갔다. 우리나라 곳곳 다 아름답지만, 그래도 한계령을 넘어 설악산으로 가는 구불구불 길이 좋았다. 고개 넘어 맞닥뜨리는 동해의 탁 트인 파란 잉크 빛 바다와 특히 내가 좋아하는 먹거리 해산물이 풍부하다는 점이 그곳을 여행지로 꼽는 첫 번째 이유였다. 가수 양희은 씨의 노래처럼 한계령은 나에게 어서 오라고 손짓하는 것만 같아 정답고 한계령 올라가는 길에 있는 한옥 민박집이나 바람불이라 불리던 계곡 야영장은 우리 가족에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남겨주었다. 지금은 어딜 가도 호텔이나 콘도, 화려한 리조트로 쾌적한 숙박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우리 가족은 텐트를 준비해 자연 속에 머무르는 방법을 택했는데 남편이 아들에게 숲 속에서 지내는 낭만을 알려줘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고 나도 도심과 다르게 밤하늘의 쏟아질 듯 촘촘히 빛나는 별빛을 볼 수 있고 풀벌레 소리 들리는 야외가 마음에 들었다. 아들이 고사리손으로 제 아빠를 도와 텐트 치는 걸 보는 것도 대견하고 즐거웠다. 아무튼, 우리 가족은 아들이 서너 살 무렵부터 차에 온갖 캠핑 장비를 싣고 여행을 떠났다. 엄마인 나는 휴가 동안 먹을 밑반찬이며 간식까지 완벽하게 준비해 바닷가에서 회를 사 먹는 일 외에는 집에서와 똑같이 먹을 수 있도록 준비했다. 요즘은 어디를 가도 그 근처의 특산품이 무언지 맛집은 어디 있는지 찾아다니며 식도락을 즐기지만, 그땐 왜 그리 힘들게 양념 하나까지 준비했는지 아마 그게 현명한 아내와 엄마의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 우습기만 하다. 자청해서 고생한 거지만 그런 게 또 즐거웠고 준비하는 동안 행복했었다. 승용차에 텐트며 오색파라솔 달린 테이블, 온갖 캠핑 장비를 갖추고 떠나는 날은 가족 모두 들떠서 가슴이 설레었다. 설악산으로 가는 길로 미시령과 한계령이 있는데 미시령 쪽도 휘몰아치는 물살이 시원한, 계곡을 끼고 달릴 수 있는 멋진 길이지만 주로 한계령을 지나서 갔다. 한계령은 필자가 정말 좋아하는 곳이다. 꼭대기에 있는 한계령 휴게소는 그림처럼 아담하고 경치가 좋아 마음에 들었다. 가끔은 온통 안개에 휩싸여 한 치 앞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일 때도 있긴 했지만 대부분 맑고 청량한 공기와 둘러 보이는 경치가 너무나 멋졌다. 짙은 갈색의 휴게소 건물도 운치 있고 안으로 들어가 테라스의 나무로 된 테이블과 의자에 앉아 강원도 명물 음식을 맛보는 것도 큰 즐거움이었으며 특히 테라스 끝쪽에서 사진을 찍으면 구름 위에 떠 있는 듯 정말 멋진 풍경의 사진이 되어서 매번 그 자리에서 사진을 찍곤 했다. 그래서 설악이나 동해안에 갈 때는 항상 한계령을 거쳤는데 요즘은 빠른 길이 생겨서 한계령 고개를 넘는 차량이 많지 않다는 소식이 들려 어쩐지 애잔하고 마음이 쓸쓸하다. 한계령에 오르기 전 초입에 시원한 물줄기가 모여 옥빛의 깨끗한 연못을 이룬 옥녀탕이라는 계곡이 있는데 그곳에 나는 재미있는 추억 하나가 있다. 어느 해인가 설악산으로 휴가를 갔을 때였다. 시끌벅적한 동해안 대진항의 분위기도 만끽하고 맛있는 회와 싱싱한 해산물 구경도 실컷 하는 등 좋은 시간을 가졌으며 다음날은 그곳에서 좀 떨어진 동명항이라는 작은 포구에도 들러서 또 다른 맛과 즐거움을 느끼기도 했다. 그런데 정작 설악산에서는 너무나 피곤했다. 모든 사람이 다 여기로 모인 듯 인파에 뒤덮여 온통 계곡이나 길이 복잡하고 소란스러웠다. 여행 마지막 날에 나는 몸과 마음이 지쳐서 몹시 피로함을 느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예외 없이 한계령을 지나 구불구불 산길을 내려오다가 옥녀탕 앞에 이르렀다. 여기서 잠깐 쉬어가자고 내려서 보니 정말 맑고 깨끗한 계곡 물이 있었다. 필자는 물을 너무 좋아한다. 수영을 그리 잘하는 것도 아니면서 물만 보면 뛰어들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설악산의 계곡에서 실망했던 마음이 옥녀탕을 보니 다 풀어지고 티셔츠와 핫팬츠 차림이었던 나는 옥녀탕 물속으로 뛰어들고 말았다. 정말 시원하고 기분이 좋아서 두 팔로 물을 휘휘 저으며 수영을 했다. 남편이 그만 나오라고 손을 흔들었는데 그때 지나가던 순찰차에서 마이크로 “옥녀탕에 계신 분 빨리 나오세요, 들어가면 안 됩니다.” 라는 소리가 들렸다. 주변에서 쉬고 있던 관광객들도 웃으며 빨리 나오라고 손짓을 해 댔고 누군가는 휘파람까지 불었다. 깜짝 놀라서 재빨리 나왔는데 어찌나 부끄러웠는지 모른다. 그곳에 들어가면 안 되는 줄 몰랐고 주변 어디에도 들어가지 말라는 안내판이 없었다고 변명처럼 중얼거렸다. 벌금이라도 내야 하나 걱정했지만, 경찰관을 태운 순찰차는 자리를 떴다. 그저 산에서 내려오는 물이 있는 설악산 계곡이니 들어가도 괜찮을 줄 알았는데 순찰차의 경고를 듣고는 이름 있는 계곡에 무단 침입한 건 잘못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에 있던 많은 관광객에게도 무척 부끄럽고 미안했던 기억이 난다. 자연을 아끼고 보호해야 하는데 깨끗한 물이라고 텀벙 뛰어들다니 너무 철없는 행동을 했다. 그후에도 휴가 갈 때 올 때 그곳에 들러 보았다. 들어가지 말라는 팻말이 없어도 물에 들어간 사람은 없으니 많은 사람은 나처럼 지각없지는 않은 모양이다. 그때를 생각하면 반성도 되고 너무 창피하지만, 그래도 나는 설악산 옥녀탕에서 수영해 본 사람이라는 생각에 즐거운 미소가 떠오른다.
- 2016-06-07 10: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