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를 은퇴지로 삼고 살기 시작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이미 10년이 훅 가버렸다.
은퇴 후의 남은 생을 의탁할 곳을 찾는 일은 중요하고도 심각한 문제인데도 필자는 너무 쉽게 즉흥적이고 감상적인 모티브로 결정했다고 주변에서 걱정한다. 그러나 이 경솔한 선택의 결과는 대박이다. 1992년 몸 쌩쌩한 어머니의 90회 생일을 자녀들만 모여 조촐한 파티로 치렀다. 이게 뒤가 좀 켕겨 생일파티 후에 어머니를 모시고 제주도 여행을 하였다. 마침 여행했던 그날은 제주에서 그리 흔하게 만날 수 없는 아름다운 날씨였다. 그것이 필자가 제주에 눌러살기로 한 이유다. 물론 제주의 악천후가 유명한 것을 알지만 산도 있고, 들도 있고, 농촌도 있고, 어촌도 있는 데다 관광지라 도회의 맛도 곁들일 수 있어 도회에서만 살아온 필자의 ‘도회 취향’ 정서에도 권태감을 주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주위 사람들이 우려하는 것은 이뿐 아니다. 미국 갔다가 역이민이란 스토리가 있다는 것과 연고지와 전혀 딴 세상을 선택하였다는 것이다. 은퇴란 말이 필자 귀에 들어오기 시작한 뒤 이를 준비하고 고민한 시간을 필자는 미국서 살았다. 은퇴 후의 생활에 대한 경험담이나 전문가의 은퇴설계 정보도 미국에 있었으니 당연히 그들의 방식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미국의 방식은 바로 65세 은퇴 후에는 지금까지 살아온 환경과 아주 다른 삶을 살아보는 것이다. 가령 도회에서 직장생활을 한 사람은 농ㆍ어촌의 자연을 가까이하는 은퇴 형태를 권장한다. 완전히 다른 새로움에 대한 도전은 조금씩 나태해진 삶을 혁명적으로 재활성화할 수 있는 조건이기 때문이다.
이 조건에 딱 맞는 곳이 제주다. 이곳은 농촌, 어촌에 산과 바다, 신선한 바닷바람이 만드는 자연의 아름다움이 있다. 텃밭과 너른 정원은 일 년 내내 노동을 기다린다. 그리고 필자는 쉬며 일하며 그럭저럭 남의 손 빌리지 않고 일하는 게 좋다.
젊은이들의 액티비티가 활발한 곳이란 점도 무척 매력적이다. 젊은이들의 활동을 보면서 에너지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역이민이고 연고지가 아닌 고장이어서 적응에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필자 의식 속에는 이국에서 살면서 한국의 언어, 전통, 습관, 의식 등 문화에 대한 그리움이 있었다. 고국이었기 때문이다. 하늘의 별이 작게 보이는 것과 같은 이유이다.
제주는 건강 유지의 최고 조건인 물과 공기가 세계 으뜸이라 암처럼 장기 투병해야 하는 환자가 이주해 오는데 대부분 효과를 보고 쾌유하는 모습을 본다. 물론 악천후에 섬이 고립될 수 있다는 점과 병원시설이 마땅치 않다는 점이 건강 위협요소가 될 수 있으나 제주같이 물 맑고 공기 좋은 데서 살면 병원 갈 일도 없다.
그동안 이웃에 육지의 도회에서 은퇴한 시니어들이 있었는데 정착한 사람도 있고, 돌아간 사람도 있다. 필자가 보기엔 낚시, 골프, 등산, 정원 가꾸기 같은 야외활동을 즐기는 사람이 빠르게 정착하고 만족도가 높다. 아웃도어 액티비티가 없는 사람들은 불만이 쌓인다는 말도 많이 듣는다.
아울러 대중교통이 제공되며, 모든 생활에서 타인에게 쉽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주거환경이라는 점도 장점이다.
이런 의미에서 필자는 제주 은퇴에 대만족이다. 완전은 아니지만 선택으로는 최고였다. 다른 분들도 제주로 와 필자처럼 만족감에 빠졌으면 한다.
1964년 경제기획원 사무관을 시작으로 경제기획관, 경제기획국장, 재무부 차관보, 재무부 차관, 한국산업은행 총재 등을 거치며 대한민국 경제발전을 위해 살아온 이형구(李炯九·76) 전 노동부 장관. 대개 한 분야에서 탄탄대로 삶을 산 이들은 자기계발서나 자서전을 쓰곤 하지만, 그는 그만의 방법으로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일생의 사명감을 가지고 쓴 을 통해서 말이다.
글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2008년 이 전 장관이 출간한 에서 그가 제시했던 문제들에 대한 결론이 담긴 책이 바로 이다. 단순 명료한 책 제목만 보아도 이전보다는 더 포괄적이고 굵직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단순히 경제 관련 일을 해왔기 때문에 책을 낸 것은 아니다. 은 그의 인생에 대한 자부심이자 사명감, 후세대를 위한 바람이 담긴 ‘인생작’과 같다. “이제 내 할 일을 다 했다”며 시원스럽게 이야기하는 그다.
“2005년에 세종대학교에서 교수로 지내면서 준비했던 책이 입니다. 번영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조건을 역사, 정책, 문화적 상황에 따라 설명했어요. 그 책을 쓰면서 꼭 그에 대한 결론을 내는 책을 쓰고 죽겠다고 결심했었죠. 한 10년쯤 후에 쓸까 했는데 여러 가지 상황으로 그보다 훨씬 앞당겨 쓰게 됐어요.”
그가 예상보다 책을 일찍 쓰게 된 이유 중 하나가 2008년 리먼브라더스 파산 사태다. 번영학은 신자유주의의 경쟁을 바탕으로 한 시장 논리와 ‘경제하려는 의지(will of economize)’를 바탕으로 한다. 리먼브라더스 사건은 미국의 양적완화 정책으로 시장이 왜곡되면서 신자유주의 경제논리를 무너뜨렸다. 갑작스러운 경제 상황의 변화로 그는 하루라도 일찍 펜을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인위적인 통화 공급으로 인해 신자유주의가 무너져버렸죠. 여러 가지 발전 전략이나 가치에 변화가 오기 시작했어요. 신자유주의의 가장 기본이 경쟁이거든요. 발전하려는 의지가 중요한데, 우리나라로 치면 1970년대 새마을운동을 예로 들 수 있죠. 신자유주의의 경쟁체제를 가지고 개발도상국 시대의 발전의 의지를 접목하자. 거기에 정부의 역할이 조금 확대돼야 한다는 게 번영학의 기본이자 의 결론과 같아요.”
모두 다 한번 잘살아 보세~
번영(繁榮)이란 번성(繁盛)과 영화(榮華)를 이른다. 번성은 객관적으로 번창하고 풍성한 상황, 즉 먹고 입을 것이 넉넉한 경제적 풍요를 의미한다. 영화는 주관적으로 느끼는 호화로움과 영예를 뜻하는데, 객관적인 경제적 의미보다는 사회적 의미의 주관적 상황과 개인의 행복을 뜻한다. 따라서 번영이란 경제적으로 풍족한 조건과 더불어 개인의 영예, 행복이 뒷받침돼야 가능하다 할 수 있겠다. 거기에 현재의 번영이 미래에도 지속 가능할 것이냐에 대한 확신이 뒤따라야 한다.
“만약 내가 현재 연간 소득이 1억원이라 하면, 10년 후에도 1억원이면 되겠어요? 현재보다 발전한 소득수준이 중요합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돈이 많다고 행복한가? 그 돈이 영예로워야 한다는 거예요. 예를 들어 도둑이 훔친 돈으로 잘 먹고 잘산다고 하면 소득 수준에는 문제없겠지만 내 가족이나 이웃에는 떳떳하지 못하잖아요. 나를 번창하게 하는 그 돈이 영예로워야죠.”
그는 상대방에 대한 인정과 관용을 베푸는 것 또한 중요한 덕목이라고 했다. 그래야 개인의 삶의 질 향상은 물론, 공동체의 행복가치를 추구할 수 있다는 것.
“과거에 우리는 너무나도 가난하게 살았잖아요. 하루 한 끼 먹기도 힘들었는데, 그런 내가 삼시 세 끼 챙겨 먹으면 행복하지 않겠어요? 소위 절대빈곤 타파라 하는데, 그저 세 끼 먹는다고 만족할까요? 매일 채소만 먹는 것보단 고기반찬도 먹고 해야 좋을 거 아녜요. 그게 생활의 질이에요. 그러면 내가 좋은 반찬을 배불리 먹는다고 행복할까요? 이웃도 잘 먹고 잘살게끔 관용을 베풀 줄 알아야죠. 그래야 ‘저 사람 참 훌륭하다’는 인정도 받고 개인이 자랑스러워질 수 있는 거예요. 상대에 대한 관용과 인정이 행복 조건의 중요한 가치입니다.”
현재 삶의 행복 점수, 70점
행복 가치 추구의 중요성에 대해 역설하는 그에게 자신은 얼마나 행복하다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그는 “70점 정도”라고 대답했다. 이 전 장관은 현실적으로 채우지 못하는 30에 연연하기보다는 소소하게 채워진 70에 만족하는 모습을 보였다.
“글을 쓰는 일도 행복하고, 손주를 보는 것도 즐겁죠. 다들 그런 재미로 사는 거 아니겠어요? 집 근처에 서재를 마련했으니 글을 쓰고 싶거나 책을 읽고 싶을 때는 자유롭게 나올 수 있는데 그런 것도 행복해요. 이번에 책을 내고 동료들이 의견을 내서, 실제 관련 일을 했던 이들 중심으로 한국번영학회를 설립하기로 했어요. 6월에 시작하는데, 내가 일을 벌였으니 학회장을 맡았죠. 근데 뭐 그게 일인가요. 이제 나이 들고 편안한 마음으로 하는 거니까 일종의 놀이인 셈이죠. 아주 즐거워요.”
아쉬운 30점에 대해서도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돈을 좀 더 잘 모아둘 걸 하는 마음은 있어요. 그랬다면 더 의미 있는 일들을 해볼 수 있었을 것 같아요. 봉사나 기부도 그렇고요. 그런데 내가 재벌이나 기업가도 아닌데 돈이 그렇게 많으면 되겠어요? 그리고 이미 지난 일이잖아요. 그냥 살아가는 거예요. 괜찮습니다. 행복이라는 것은 아주 주관적인 평가거든요. 본인이 기준을 잘 설정해서 만족하고 인정하면 되는 거예요. 나보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도 얼마나 많겠어요. 아쉬운 점은 있지만 고맙게 생각해야죠. 나름의 기준은 있어 점수를 매길지는 모르지만, 사실 지금 나이에 그것에 좌지우지되거나 큰 영향을 받지는 않아요.”
현재의 삶이 행복하고 고맙다고 말하던 그는 인터뷰 중 올해 1월 세상을 떠난 어머니를 떠올렸다. 인터뷰 전 날이 바로 어버이날이었기 때문이다. 자식들이 잘해주는 것도 좋지만, 자신이 챙겨드릴 부모님이 이제는 안 계시다는 것이 못내 허전하다고 했다. 해마다 어버이날이면 부모님을 위해 무언가를 해드리려고 노력했던 그다. 그렇지만 마음은 편안하다고. 그가 그럴 수 있는 이유는 부모님 덕분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5년 전에, 어머니는 100세를 사시고 금년 1월에 돌아가셨어요. 아버지 어머니는 1990년대에 고향집을 떠나 서울로 오셨어요. 그때부터 같이 살지는 않았지만 제가 사는 여의도에 집을 마련하시고 생활을 하셨죠. 아마 두 분이 계속 시골에 사셨더라면 부모를 생각하는 애틋한 마음이 적었을 것 같아요. 근처에 사시니 매일 보고 이야기도 하고 무엇이라도 해드릴 수 있었죠. 내가 잘해서가 아니라 그분들이 나에게 그렇게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기 때문에 지금도 마음이 편안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정말 고마운 일이죠.”
진정한 은퇴 라이프의 시작
3년을 투자한 끝에 출간한 . 자기만족만을 위해 썼다면 그만큼 책임감을 느끼며 쓰지는 못했을 것이다. 공동체의 번영과 행복, 후손들을 위한 지침서 역할을 하리라는 바람을 담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주로 대학교 4학년 아이들을 가르쳤는데, 그때도 참 보람 있고 좋았어요. 하지만 내 인생의 가장 큰 보람은 사무관부터 시작해 최고위직에 이르기까지 나라 경제계획에 참여했다는 거예요. 힘든 점도 많았지만 가슴 뿌듯한 일이 더 많았죠. 다른 점에서 볼 때 난 그다지 특별한 사람은 안 되지만, 그만큼 한 분야에서 오랜 시간 많은 일을 한 사람으로서는 특별한 사명감을 느껴요. 개인적으로 나를 위해 했던 일도 아니니 후세대를 위한 무언가를 남겨야죠. 그들이 보고 ‘과거의 경제 계획은 이랬구나. 이러한 이론이 있고 상황은 어떠했구나’라는 것을 알 수 있도록 말이죠.”
그는 자신은 잠시도 가만있는 성격이 아니라고 했다. 실제 일을 할 때도 해외 여러 나라를 다니며 일했고, 테니스와 골프 등을 즐겼으며, 요즘도 중국어를 완벽히 소화하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학원에 다닌다. 하지만 을 세상에 내놓기까지 3년간은 해외 일정이나 모임 등을 자제하고 원고 작성에만 몰두했다.
“책 출간하느라 바빠서 운동도 잘 못 다니고 해외도 거의 못 나갔어요. 대학교에서 정년퇴임을 하고 흔히들 말하는 은퇴 라이프가 다소 건조하긴 했죠. 한편으로는 그 시간이 오히려 나를 더 충만하게 하고 즐거움을 줬는지도 모르겠어요. 최근까지는 원고를 쓸 때가 가장 즐거웠으니까요. 정말 죽기 전에 꼭 하자 하는 것을 이뤘으니, 이제 죽기 전까지는 좋아하는 책도 읽고 여행도 다니며 지내려고 해요.”
노인이 되지 말고, 어르신이 되라
그가 지금까지 낸 책은 모두 경제와 관련된 전문서적들이다. 그 스스로 이야기할 정도로 남들이 선망할 만한 일을 많이 해왔는데도 자서전을 낼 생각은 없다고 한다. 자신을 드러내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노년기 삶에서는 자제해야 한다는 것. 그런 데에는 아내의 조언이 한몫했다.
“아내에게 매일 듣는 말이 ‘노인네가 되면 안 돼요. 어르신이 돼야 해요’입니다. 상당히 좋은 충고라고 생각해요. 노인네가 된다는 게 뭐겠어요. 목소리 높이고 잔소리하고 대접받으려 하고 그런 거잖아요. 다른 사람이 봤을 때 ‘저 사람 참 잘 늙었구나’해야 어르신이 되는 거죠. 전에는 경제정책 운용과 관련해서 정부가 뭐를 한다 그러면 언론에 글도 쓰고 그랬어요. 근데 요새는 그런 것도 안 하고 있어요. 그렇게 떠들어봐야 늙은이 잔소리니까요.”
그는 최근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에 관한 글을 읽고 본받아야겠다고 느낀 점이 있다고 한다. 김 교수의 사위가 쓴 글이었는데, ‘장인어른은 가족 문제나 자식 일에 대해 절대 관여하지 않는다’는 것. 그는 자식이나 손주의 일에 가능한 한 나서지 않고 간섭을 줄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외의 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밥 먹고 생각하는 게 늘 나라 경제 운용에 대한 것이니까, 물론 얘기야 하고 싶죠. 내가 볼 때 잘못됐다고 느낀 것이나 이렇게 했으면 좋겠다는 것이나 왜 없겠어요. 그렇지만 내가 현재의 장관이며 총리며 하는 이들에게 이야기한다고 내 생각처럼 바뀌겠어요? 아니거든요. 결국 잔소리거든요.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내용은 모두 에 담았어요. 거기에 그동안 살면서 쌓은 경험, 지식, 조언 등이 담겨 있으니 자서전과 다름없지요.”
유장휴 (디지털습관경영연구소 소장/전략명함 코디네이터)
복잡하고 궁금한 것은 동영상에 물어본다
무언가 궁금한 게 있으면 이곳저곳을 찾아보다 마지막엔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본다.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는 게 가장 빠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알고 싶은 내용이 생겼는데 주변에 물어볼 데가 없거나 물어봐도 잘 모른다고 하면 답답하다. 그래서 지금까지는 ‘네이버’나 ‘다음’같은 포털 사이트에 물어봤다. 그러나 궁금한 내용을 검색하면 장황한 글과 사진을 만나게 되는데 이해하는 데 만 해도 머리가 아프다.
좀 더 쉽게 알고 싶다면 동영상을 검색하자. 사진과 글보다 훨씬 쉽게 설명해 주기 때문에 이해가 빠르다. 예를 들어 김장을 하다 보면 많은 양의 마늘을 쉽게 까는 방법이 궁금할 때가 있다. 이럴 때 쉽게 마늘을 까는 방법이 궁금하다면 동영상 검색하는 곳에서 ‘마늘 쉽게 까는 법’이라고 치면 해결 동영상이 나온다. 동영상 사이트에는 스테인리스 양푼으로 마늘 까는 법, 전자레인지를 활용해 마늘 까는 법 같은 상상을 초월한 방법들이 공개되어 있다.
마늘뿐 아니라 껍질을 까기 어려운 채소들에 대한 노하우들이 올라와 있다. 아내가 힘들게 마늘을 까고 있다면 남편들이여 동영상을 검색하고 쉽게 까는 방법으로 대신 해주자. 아내의 눈빛이 달라질 수 있다.
손주와 ‘변신자동차’를 가지고 함께 놀 수 있는가?
요즘은 손자 손녀들과 놀아주려면 배워야 한다. 나이마다 다르겠지만 어린 손자들과 변신 장난감을 갖고 노는데 변신이 쉽지 않다. 갈수록 변신 장난감이 복잡해지기 때문에 아무리 설명서를 읽어봐도 뭐가 뭔지 모르겠고 보면 볼수록 더 헷갈린다. 대부분은 변신 장난감을 가져와서 변신해 달라고 하면 혼자 가지고 놀라며 조용히 뒤로 물러난다.
이럴 때 동영상 사이트를 활용한다. 네이버나 다음도 관련된 동영상이 검색되지만 좀 더 많은 동영상을 검색하고 싶을 때는 세계 최대의 동영상 사이트 ‘유튜브’가 있다. 유튜브에 손자들이 가지고 노는 장난감 이름을 검색해보면 변신 과정이 순서대로 나와 있다. 장난감이 변신되는 과정을 영상으로 보여주고 말로 설명까지 해준다. 혹시 속도가 너무 빠르면 슬로 영상으로도 볼 수 있다. 평소에 손자 손녀들과 놀아주려고 장난감 변신을 해보셨던 분들이라면 바로 검색해서 배워보자. 아무리 복잡한 장난감도 쉽게 따라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노래교실과 헬스, 요가까지 취미문화를 공유한다
지인 중에 유튜브를 잘 활용하는 분이 있다. 그분은 웬만한 궁금한 점은 유튜브에 물어보고 해결한다. 더 나아가서 유튜브로 취미 생활을 한다고 한다. 이분은 노래를 잘 부르고 싶어서 노래교실에 나가서 배우고 싶은데 마땅히 배울 만한 곳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유튜브에 ‘노래교실’이라고 검색해 보았더니 꽤 많은 영상들이 올라와 있어 그곳에서 배우고 싶은 노래를 배웠다고 한다. 유튜브에는 꽤 많은 노래교실 영상들이 있다. 노래교실 선생님들이 노래교실을 홍보하려고 올린 영상인데 열정적으로 수업하는 모습과 수업 내용이 담겨 있어 영상으로만 봐도 충분히 배울 수 있다. 노래를 배우고 싶은데 노래교실이 근처에 없거나 시간이 없는 분들에게는 노래교실 동영상을 추천한다. 그밖에 맨몸으로 하는 헬스, 쉬운 요가 동작, 골프 자세와 같은 취미에 관련된 동영상들이 있다. 물론 심화 학습이나 깊이 있는 배움을 얻기 위해서는 학원이나 배움의 현장을 가야겠지만 기본 동작이나 간단한 방법을 익힐 요량이라면 동영상으로 충분하다.
궁금하면 스마트폰에서 유튜브를 열어라
유튜브는 컴퓨터에서도 가능하지만 스마트폰에서도 바로 확인할 수 있다. 스마트폰에 ‘유튜브 어플’을 설치하면 동영상을 보는 방법은 간단하다. 유튜브 어플에 들어가서 검색창에 노래 제목, 궁금한 내용을 검색하고 마음에 드는 영상을 시청하면 된다.
그런데 스마트폰 화면을 계속 보고 있노라면 눈이 아프고 목이 뻐근하다. 스마트폰 화면을 큰 화면으로 보고 싶다면 TV와 연결해서 사용할 수 있다. 마트나 스마트폰 대리점에 가면 스마트폰과 TV연결선을 별도로 구매할 수 있다. 컴퓨터, 스마트폰, TV 어디서든 영상으로 검색할 수 있기 때문에 궁금한 게 생기면 유튜브라고 하는 지식 창고에서 꺼내기만 한다. 인생 2모작에 필요한 지식과 궁금한 것을 지금 검색해보자!
해마다 새로운 클럽들이 소개된다. 심지어 6개월 주기로 새로운 드라이버가 출시되기도 한다. 클럽 메이커마다 새로운 제품을 출시하면 하나같이 같은 내용으로 광고를 한다. 미스 샷을 해도 공을 똑바로 날려 줄 수 있고 거리도 늘려 준다는 것이다. 과연 광고대로 그 클럽을 사용하면 그럴까?
브랜드별로 클럽을 제조하는 과정은 다를 수 있지만 대부분은 조립하는 곳을 생산국으로 한다. 실제 클럽을 구성하는 헤드, 샤프트, 그립은 거의 중국에서 생산된다고 할 수 있다. 유명 클럽들도 마찬가지다. 단지 부품별로 저비용 OEM 방식으로 생산한 것을 조립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물론 품질을 보증하고 조립하는 데 노하우가 있다고는 하지만 전세계 1억 명이 넘는 골퍼들을 대상으로 정교하게 조립된 것은 아니다. 대량생산을 하기 위한 단순 조립에 지나지 않는다. 대량생산되어 새로 출시된 클럽들이 골퍼 개개인의 신체적 특성과 수준에 맞출 수 없는 제품일 수밖에 없다.
모든 골퍼들은 반드시 자신들의 신체적 특성과 수준에 맞도록 클럽을 피팅해야 한다. 오직 자신만의 클럽이 필요한 것이다. 프로골퍼들은 어느 정도 자신에게 적합한 클럽을 선택하고 피팅할 기회가 있지만 대부분의 주말골퍼들은 클럽을 구입한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현실이다. 경기규칙에서 허용하는 퍼터를 포함한 14개 클럽 가운데 과연 자신의 신체적 조건과 수준에 맞는 클럽은 몇 개나 될까? 한두 개 정도다. 나머지 12~13개 클럽은 전혀 자신에게 맞지 않는 클럽을 가지고 플레이한다고 봐도 틀린 말이 아니다.
클럽을 피팅한다는 것은 골퍼의 신체적 조건과 수준을 고려하여 골퍼가 가진 잠재적 능력을 최대화하여 거리와 방향, 공의 비행고도와 샷의 일관성을 조절하는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함이다. 사용하는 클럽을 자신의 신체적 조건과 수준에 맞는 클럽으로 피팅하기 전에 고려해야 할 요인들은 클럽의 라이 각(Lie Angle), 클럽 헤드의 로프트(Loft), 샤프트의 강도(Flex), 그리고 클럽의 길이(Length) 등을 꼽을 수 있고 이 요인들은 모두 거리와 방향에 직접적 영향을 미친다.
1. 라이 각
정의클럽 페이스에 있는 스위트 스폿의 중심부분을 지면에 수직으로 하고 클럽 헤드의 바닥 부분을 지면에 닿게 했을 때 클럽 샤프트의 중심선과 연결되는 각도
샷의 방향은 클럽의 라이 각에 따라 결정된다. 특히 라이 각은 공을 임팩트하였을 때 클럽 페이스에서 튕겨지며 떠오르는 공의 초기 비행 방향을 결정한다.
임팩트하는 순간 클럽 페이스의 중심 부분에 있는 스위트 스폿 아래 부분이 지면에 닿지 않고 상대적으로 클럽 솔의 안쪽(Heel) 부분이 먼저 닿으면 샷을 한 공의 초기 비행 방향은 표적의 왼쪽을 향하며 클럽 페이스의 위치에 따라서 훅이나 풀 샷이 된다. 이와 반대로 임팩트 순간 클럽 솔의 앞쪽(Toe)이 먼저 지면에 닿으면 공의 초기 비행 방향은 표적의 오른쪽을 향하며 샷의 결과는 슬라이스 또는 푸시 샷으로 나타난다. 즉 사용하는 클럽의 라이 각에 따라서, 너무 세워져 있거나 낮으면 공의 비행 방향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라이 각은 브랜드에 따라서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사용하는 클럽 가운데에서 가장 긴 클럽인 드라이버의 경우 58~59도이며 6번 아이언의 경우는 61.5도이다. 6번 아이언보다 짧은 클럽이면 0.5도씩 높아지고 반대로 긴 클럽은 0.5도씩 낮아진다. 또한 스탠스를 취했을 때 공의 위치에 따라 사용하는 클럽의 로프트도 바뀌고 클럽 페이스의 방향도 바뀌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클럽의 로프트가 커질수록 클럽 페이스의 방향은 표적의 왼쪽을 향하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2. 로프트
정의 클럽 샤프트를 지면에 수직으로 놓았을 때 클럽 페이스의 상대적 각도
날아가는 공의 탄도는 사용하는 클럽의 로프트와 공을 향한 클럽 헤드의 접근 각도에 따라 결정된다. 클럽의 로프트는 어드레스했을 때(static loft)와 공을 임팩트하는 순간(dynamic loft) 다르게 나타난다. 클럽 헤드의 무게와 샤프트의 강도, 스윙 속도에 따라서 공을 향한 클럽 헤드의 위치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골퍼에게 가장 적합한 비행고도는 날아가는 공의 속도와 비례한다. 흔히 클럽 헤드의 속도가 빨라야만 공을 멀리 날려보낼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임팩트 직후 날아가는 공의 속도가 빨라야 하고 공의 비행고도가 적합할 때 오히려 공을 멀리 날려 보낼 수 있다. 즉 사용하는 클럽의 로프트가 낮으면 상대적으로 그만큼 공의 비행고도가 낮아지므로 공을 멀리 날려 보낼 수 없게 된다.
사용하는 클럽의 로프트는 날아가는 공의 빠르기를 고려하여 선택해야 하지만 스윙 방법으로 공의 비행고도를 높이려고 의도하면 오히려 나쁜 스윙 방법을 구사하게 되는 점을 주의해야 한다. 예를 들면, 공의 비행고도를 높이려고 임팩트 순간 상체를 표적 반대 방향으로 기울이며 올려치면 그립 끝보다 클럽 헤드가 먼저 임팩트 구간을 지나게 돼 공의 비행고도가 너무 높아지고 반대로 상체 위주로 다운 스윙하거나 공에 대한 클럽 헤드의 접근 각도가 너무 가파르면 공의 비행고도는 낮아져 멀리 날아지 못하게 된다.
3. 샤프트 강도
정의스윙 속도에 의해 만들어진 힘이 클럽 샤프트에 가해져서 샤프트가 휘어지는 정도
모든 샤프트의 강도는 표준화되어 있지 않아 자신에게 적합한 강도의 샤프트를 찾으려면 시행착오를 겪어야 한다. 샤프트는 스윙하는 도중 3가지 다른 방향으로 휘어진다. 클럽 헤드에 연결되어 있고 클럽 헤드의 무게가 상대적으로 클럽의 다른 부분보다 무겁기 때문에 임팩트를 하는 과정에서 그립과 헤드 사이의 샤프트가 공 쪽으로 휘어지고(bow), 그립보다 헤드가 먼저 공을 지나가며 샤프트가 휘어지며(bend), 샤프트 자체가 원통형으로 되어 헤드가 임팩트 구간을 지날 때 뒤틀리는(torsion) 현상을 보인다. 제조과정에서도 스틸 샤프트는 일정한 품질관리가 가능하지만 그라파이트 샤프트는 아직도 품질관리에 어려움이 따르기 때문에 샤프트마다 휘어지는 정도를 예측할 수 없는 실정이다. 흔히 샤프트가 스윙 빠르기에 비해 강하면 슬라이스가 생기고 공의 비행고도가 낮아지며, 공의 방향이 푸시 샷이 되고 반대로 샤프트의 강도가 약하면 훅이 되고, 공의 비행고도가 높아지며, 풀 샷이 되기 쉽다고 하지만 브랜드마다 실제 샤프트의 강도가 달라서 일반화하여 적용하기 어렵다. 날아가는 공의 비행고도를 스윙 방법으로 조절하기보다는 시행착오를 하더라도 자신에게 적합한 샤프트를 찾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4. 길이
정의클럽 헤드의 솔(sole)에서 그립 끝까지의 길이
어드레스 자세(posture)는 스윙할 때 몸의 균형을 유지케 하여 일관되고 반복할 수 있게 하는 중요 요인이다. 만약 사용하는 클럽의 길이가 자신의 신체적 조건에 부합되지 않아 길거나 짧으면 일관된 자세를 유지할 수 없어 반복할 수 없는 스윙을 하게 된다. 클럽의 길이가 길면 공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어드레스하게 되어 척추가 세워져서 스윙 플래인이 낮아지고 (flat), 반대로 짧으면 공에 가깝게 어드레스하게 되어 상체를 앞으로 굽히는 정도가 깊어져서 가파른(upright) 스윙 플레인을 하게 된다. 두 자세 모두 스윙 중에 몸의 균형을 깨뜨려 일관되고 반복할 수 있는 스윙을 방해한다. 어드레스 자세가 올바르면 이어지는 스윙 동작은 마치 연쇄반응을 하듯이 연결되므로 올바른 스윙은 어드레스 자세에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클럽의 길이는 올바른 스윙 메카닉을 결정한다.
이제라도 올바른 스윙 습관을 익히고 지금보다 더 높은 수준의 골프를 즐기려면 자신의 클럽들을 점검해보는 것이 중요하다. 정확한 클럽 피팅은 적어도 3일 정도가 소요된다. 하나의 클럽을 피팅하는 데 소요되는 시간은 약 90분이다.
>> 박영민 전 고려대학교 교수
국내 골프칼럼니스트 1세대. 고려대와 한국체육대에서 교수로 재직했으며 1980년대 초부터 방송 해설은 물론 일간지, 스포츠지 등에 많은 칼럼을 연재했다. , 등 저서 다수.
박세리가 1998년 ‘맨발 투혼’을 발휘한 US 여자 오픈 우승을 비롯해 4승을 올리는 장면을 TV로 보고 골퍼의 꿈을 키운 박세리 키즈들은 2016년 현재 미국 여자 프로골프투어를 휩쓸고 있다.
오는 8월 리우데자네이루 대회에서 112년 만에 올림픽 무대로 돌아오는 골프 종목에서는 세계 랭킹 15위 안에 드는 선수는 한 나라에서 최다 4명까지 출전할 수 있다. 한국은 이변이 없는 한 여자부 4명의 출전이 확실시되고 있고 유력한 금메달 후보국이다. 박세리가 일궈 놓은 성과다.
2010년 밴쿠버 동계 올림픽 피겨스케이팅 여자 싱글 금메달리스트 김연아의 뒤를 잇는 김연아 키즈들은 2018년 평창 동계 올림픽에서는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하겠지만 현재 초등학교 5, 6학년들인 임은수(12, 서울 응봉초) 김예림(12, 군포 양정초) 유영(11, 과천 문원초) 등은 올림픽 메달리스트로 성장할 가능성이 꽤 크다. 이들은 대체로 김연아의 초등학교 시절 기술 수준에 올라 있고 2022년 베이징 동계 올림픽에서 기량을 꽃피울 나이가 된다. 최근에는 이세돌과 인공지능 알파고의 대결로 이세돌 키즈들이 나올 터전이 마련됐다. 그런데 40여년 전에도 ○○○ 키즈가 있었다. 이제 그 ○○○을 찾아서 시간 여행을 떠나 보자.
‘이에리사 키즈’ 붐
1973년 한국 스포츠를 화려하게 장식한 건 여자 탁구였다. 1967년 여자 농구에 이어 한국은 여성을 앞세워 세계 무대에 다시 한 번 ‘스포츠 코리아’를 알렸다.
1973년 제 32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는 4월 5일부터 15일까지 유고슬라비아 사라예보에서 60개국이 출전한 가운데 열렸다. 한국은 김창원 대한탁구협회 회장을 단장으로 총감독 이경호, 남자 코치 김창제, 여자 코치 천영석으로 코칭스태프를 구성했다. 남자 선수로는 홍종현 최승국 김은태 강문수 이상국이, 여자 선수로는 정현숙 이에리사 박미라 나인숙 김순옥이 출전했다.
여자 단체전은 예선 리그를 펼친 뒤 예선 A, B조를 통과한 4개국이 예선 전적을 안고 돌려 붙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B조에 속한 한국은 이에리사와 정현숙을 단식, 이에리사와 박미라를 복식에 기용하는 전략으로 스웨덴, 유고슬라비아, 서독을 잇따라 3-0으로 완파한 뒤 중국과 피할 수 없는 일전을 벌이게 됐다. 한국은 1, 2번 단식에서 이에리사와 정현숙이 중국의 정후아잉과 후유란을 각각 2-1로 꺾으며 기선을 제압했다. 한국은 3번 복식에서 이에리사-박미라 조가 중국의 정후아잉-장리 조에게 0-2로 졌으나 4번 단식에서 이에리사가 이 대회 단식 챔피언인 후유란을 2-0(21-15 21-18)으로 눌러 우승으로 가는 최대 고비를 넘었다.
결승 리그에서 한국은 헝가리와 일본을 각각 3-1로 물리치고 예선 리그를 포함해 8전 전승으로 세계 여자 탁구 정상에 올랐다. 1956년 제23회 도쿄대회에 처음 출전한 이후 17년 만에 거둔 값진 성과였다. 이 대회에서 한국은 여자 단체전 우승 외에 여자 단식에서 박미라가 3위를 차지했다.
여자 탁구가 중국을 누르고 세계 정상에 올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전국 방방곡곡 탁구장은 탁구를 치려는 청소년들로 넘쳐 났다. 글쓴이가 살던 서울 변두리 동네에는 1980년대까지만 해도 가장 목이 좋은 네거리 빌딩 2층에 탁구장이 있었다. 20여년 전까지만 해도 서울 시내 한복판 광화문에 ‘고려탁구장’이 있었는데 점심 시간에는 가볍게 땀을 흘리려는 직장인들로 빈 탁구대가 없었다. 세계탁구선수권대회 여자 단체전 우승의 주역 ‘이에리사 키즈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에리사가 처음 라켓을 손에 잡은 건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3남 5녀 가운데 일곱째인 이에리사는 일찌감치 뛰어난 탁구 실력을 보였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전국선수권대회 초등부 우승을 차지하더니 충남 홍성여중 1학년 때 참가한 전국종별대회에서도 눈에 띄는 플레이를 펼쳤다. 서울 문영여중 손병수 코치는 이에리사를 눈여겨보고 서울로 전학을 권유했다. 아버지 이승규 씨는 딸의 서울행을 처음에는 반대했지만 곧 허락했다. 이에리사는 중학교 3학년 때인 1969년, 언니와 오빠가 있는 서울로 전학해 본격적으로 탁구를 시작했다. 언니가 싸다 준 점심, 저녁 도시락을 먹으면서 수업이 끝난 뒤 하루 6시간 강훈련을 한 번도 거르지 않았다.
그해 5월 이에리사는 전국학생종별대회 개인전 우승을 거머쥐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이 그해 11월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제23회 전국남녀종합선수권대회에서 일어났다. 이에리사는 학생부에서 일찌감치 우승하더니 일반부에서도 연승 행진을 이어 갔다. 결승 상대는 베테랑 김인옥(한일은행)이었다. 두 선수는 경기 내내 접전을 펼쳤다. 이에리사는 1-1로 맞선 3세트에서 21-19로 이겨 세트 스코어 2-1로 승리했다. 15세 소녀가 자신보다 7, 8세 많은 선배들을 모두 누르고 종합선수권을 차지하자 탁구계는 발칵 뒤집혔다. 학생부에서 우승한 뒤 바로 다음 날 일반부에서 우승했으니 더욱 그럴 만했다.
탁구 올드 팬들은 기억하겠지만 이에리사의 플레이 스타일은 남자 선수로 보면 한참 후배인 김택수와 비슷했다. 여자 선수라고는 믿기 어려운 강력한 드라이브를 구사했다. 지금이야 드라이브가 일반적이지만 당시 여자 선수가 힘 있는 드라이브를 구사하는 경우는 보기 힘들었다. 이에리사는 드라이브를 앞세운 공격적인 탁구로 국내 무대를 휩쓸었다. 국내 선수권자가 된 이듬해인 1970년 국내 대회 7관왕에 오른 데 이어 국제 무대에서도 맹활약했다. 제10회 아시아탁구선수권대회 주니어부 단식 우승을 차지했고 단체전 우승을 이끌었다. 어느새 이에리사는 한국 여자 탁구의 미래를 상징하게 됐다. 그리고 불과 3년 뒤 이에리사는 한국 여자 탁구를 세계 정상에 올려놓았다. 그의 나이 19세 때였다.
어린 나이에 정상에 오른 뒤 쉽게 무너지는 선수들이 종종 있다. 그러나 이에리사는 세계선수권대회 단체전에서 우승한 뒤에도 국내 최강자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국내 최고 권위의 탁구 대회인 종합선수권대회에서 7연속 우승했다. 이에리사의 7연속 우승 기록은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다. 국가대표선수로도 꾸준히 활약했다. 1975년 캘커타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 출전해 단체전 준우승을 이끌었고 1976년에는 서독오픈에서 개인전 우승을 차지했다.
탁구인 이에리사가 위대한 까닭은 1973년 대회 이후 한국 선수가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하기까지 14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1987년 제39회 뉴델리 대회에서 양영자-현정화 조가 여자 복식 정상에 오르면서 한국 여자 탁구의 세계선수권대회 금메달 흐름이 이어졌다. 1991년 일본 지바에서 열린 제41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남북 단일팀 ‘코리아’가 여자 단체전에서 우승하기까지는 18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이에리사는 남북 여자 탁구 선수들 모두에게 '우리도 세계 정상에 설 수 있다‘는 희망을 밝힌 대선배였다.
2003년 용인대학교 교수로 임용된 것을 시작으로 2005년 여성 스포츠인으로는 처음으로 태릉선수촌장을 맡았고 2014년에는 역시 한국 여성 체육인으로는 처음으로 아시아경기대회(인천) 선수촌장을 지냈다. 이에리사는 제19대 국회의원까지, 여성 체육인으로서 최초 기록을 여럿 갖고 있다.
탁구, 전국민이 열광한 생활스포츠
탁구만큼 국민들에게 친근한 스포츠가 있을까. 1973년 여자 단체전에서 세계 정상에 오르며 전국적으로 탁구 열풍이 일더니 1986년 서울 아시아경기대회에서는 탁구로 온 나라가 들썩거렸다. 너도나도 탁구장으로 가거나 틈만 나면 드라이브를 하는 폼을 잡기도 했다. 서울 아시아경기대회가 초반의 열기를 뿜고 있던 1986년 9월 24일 서울대 체육관에서는 한국과 중국의 탁구 남자 단체전 결승이 벌어졌다.
한국은 첫 두 단식에서 안재형(뒷날 중국 탁구 선수 자오즈민과 한중 수교 전에 결혼)과 김완이 천신화와 후이준을 나란히 2-0으로 꺾고 앞서 나가기 시작하더니 내처 4-1까지 리드를 이어 갔다. 그러나 6번 단식부터 내리 3게임을 내줘 게임 스코어 4-4로 역전 위기에 몰렸다. 9번 단식에서 후이준과 맞선 안재형은 첫 세트를 듀스 접전 끝에 25-23으로 딴 뒤 세트스코어 2-1로 이겼다. 한국은 4시간 30분이 넘는 대혈투 끝에 세계 최강 중국을 무너뜨렸다. 중국은 1985년 현재 세계선수권대회 남자 단체전에서 3연속 우승을 포함해 통산 10번의 우승을 기록하고 있었다.
여자 단체전에서는 중국을 꺾었지만 남자 단체전에서 중국을 물리치리라고 내다본 이는 거의 없었다. 서울대 체육관은 열광의 도가니였고 숨 막히는 접전 끝에 세계 최강 중국을 꺾는 장면을 TV로 지켜본 국민들은 환호 또 환호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탁구는 세계선수권대회를 연 지 62년 만에 정식 종목으로 채택됐다. 서울 올림픽 여자 복식에서 양영자-현정화 조는 중국의 자오즈민-천징 조를 2-1로 꺾고 올림픽 여자 복식 초대 챔피언이 됐다. 남자 단식에서는 유남규가 김기택을 3-1로 따돌리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다시 한 번 전국적으로 탁구 열풍이 불었다.
>>>글 신명철 편집위원, 전 편집국장 smc6404@naver.com
이태문 동경 통신원 gounsege@gmail.com
NHK방송문화연구 미디어연구부를 책임지고 있는 하라 유미코(原由美子, 1962년생)의 까무잡잡하고 야무진 얼굴에서 관리직의 연륜과 함께 충만한 생명력이 느껴진다. 주위에서 엄격한 상사, 철저한 커리어우먼이라고 부를 만큼 한 마디로 일밖에 몰랐던 전형적인 ‘일벌레’로 해외 출장도 잦았다. 주로 미국과 유럽 등을 많이 다녔지만, 정년을 앞두고 10년 정도는 한국, 중국, 몽골 등 아시아 지역으로 출장을 많이 갔다. 특히 한국과 관련해서는 양국 방송에 대한 공동 연구, TV 방송 제작 심포지엄 등에 참가하기 위해 대구, 경주, 제주도 등 각지를 돌았다. 미디어연구부의 업무 때문에 한국의 일본 연구자들과 동아시아, 일본 드라마 등을 조사하고 분석하기 위해 자주 한국을 방문했으며, 사람들과의 교류도 활발했다. 그러다가 쉰 살 무렵 부장을 맡아 현장을 다니는 일보다는 자료 수집과 분석, 조사 등 주로 의자에 앉아 하는 일이 많아졌는데, 가끔 서서 일할 때 다리의 힘이 풀려 휘청하는 등 하반신 근육이 많이 약해진 자신을 발견하고 크게 깨달았다. “사실 20년쯤 전에 수면 부족, 스트레스 등으로 가벼운 안면 마비 증세가 생겼지만 꾸준한 운동 덕분에 많이 좋아졌어요. 앞으로 더 나이를 먹을 텐데, 제대로 서지도 못하거나 일상생활에 불편을 느끼는 일이 더 많아질 걸 생각하니 더 심각해지기 전에 무슨 수를 써야겠다고 다시 한번 마음을 굳게 먹었죠.”
파도와 호흡하는 서핑에 빠져
그래서 58세 때 도전한 것이 서핑이다. 처음에는 근력을 키우기 위해 노를 젓는 타입의 서핑으로 시작해, 현재는 자신의 다리 힘만으로 파도를 타고 방향을 바꾸는 본격적인 보드를 즐기고 있다.
“건강을 위해 스포츠클럽에서 요가와 스트레칭, 체조 등을 해 왔고, 아울러 스탠딩 서핑도 했는데 사실 말이 파도타기일 뿐 스탠딩 서핑은 노를 젓기 때문에 파도가 좀 있으면 할 수 없다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죠. 그래서 이왕 하는 거 어떤 파도든 그 속에서 파도와 호흡하는 본격 서핑으로 바꿨답니다.”
하라 유미코는 줄곧 살던 도쿄(東京)의 집과는 별도로 일본의 대표적인 서프 포인트이자 수많은 서퍼와 서핑 동호회가 즐겨 찾는 가나가와현(神奈川縣)의 치가사키(茅ヶ崎)시에 별장까지 마련할 정도로 서핑의 매력에 흠뻑 빠져 지내고 있다.
“예순 살때 정년 퇴직을 하고 현재는 계약사원으로 일주일에 세 번 출근해 근무 중인데, 도쿄의 집은 화, 수, 목 근무 때 사용하고 치가사키의 집은 금요일부터 월요일까지 이용해 몸과 마음에 휴식을 주면서 심신의 피로를 풀고 있어요.”
서핑을 위해 바닷가 입지를 충분히 살린 세컨드 하우스는 그야말로 그녀의 제2 인생이 꽃을 피우는 곳, 의외로 서핑을 시작하는 중장년들이 많아 서핑 이외에도 그들과의 교류도 삶의 원동력이 된다고. 아울러 스탠딩 서핑은 복근을 사용하고 노를 젓는 근력을 키우지만 본격 서핑의 전신 운동에는 미치지 못하며, 무엇보다 파도를 타면서 자연과 한몸이 됐다는 쾌감은 말로 형용하기 힘들 정도로 짜릿해 정말 배우길 잘했다고 덧붙였다.
모전여전, 다시 찾은 건강 만끽
하라 유미코에게는 어머니(1931년생)와 여동생(1959년생)이 있다.
어머니는 일흔 살 때 지금까지 꾸려오던 양품점을 접자 급격하게 체력이 쇠약해지고 각종 노인병으로 고생했다고 한다. 원인도 모른 채 살이 쭉쭉 빠져 체중이 35㎏밖에 되지 않은 적도 있었고, 급기야 정신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하지만 유미코의 극진한 간호와 꾸준한 치료 덕분에 현재는 체중을 55㎏까지 회복했으며, 건강도 되찾아 무엇보다 기쁜 일이라고. 치가사키에서 누리고 있는 제2의 삶에 맞춰 어머니를 노인요양원으로 옮겼으며, 매주 주말 시설을 찾아 오붓한 시간을 즐기고 있다. 건강이 회복된 어머니는 평일에는 노인시설에만 있지 않고, 치가사키에 있는 대학의 공개 강좌를 듣거나 문화센터에서 캘리그라피까지 배우고 있어 지난 10년간 투병 생활을 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며 유미코는 혀를 내둘렀다. 뭐든지 열정적으로 그리고 철저하게 살아간다는 점에서 아마도 모전여전일지 싶다. 미술을 전공한 여동생은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 현지 일본 요리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 친구와 함께 리옹에서 레스토랑을 경영하고 있다. 화가에서 요리사로 변신해 자신이 만든 음식 맛을 보기 위해 찾아주는 손님들과 나누는 행복한 시간이 벌써 16년이 넘었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고 했듯이 이렇게 세 모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와 삶을 놓치지 않고 알뜰하게 만끽하고 있다고 하겠다.
62세 홍일점 바다에 서다
서핑 동호회의 회원은 대개 50대 초반의 중년들이 많은데, 인생의 선배 하라 유미코는 바닷가에서 서핑을 즐기는 유일한 고령의 여자라는 점에서 홍일점. 평일의 바닷가에는 젊은 사람들이 드문 반면, 의외로 중장년층 서퍼들이 꽤 많다고 한다. 골프처럼 필드에 나갈 때마다 돈이 드는 운동과 달리 서핑은 바다와 파도, 그리고 바람을 느끼고 이용하는 공짜 운동이라는 점도 매력이다. 서핑은 매년 3~4월 봄에 시작해 11월 말까지가 시즌으로, 파도를 타지 않을 때에는 유연성과 근력을 키우기 위해 체조 등으로 몸을 만들어 둔다고 한다. 그리고 한 달에 한 번은 바닷가 구석구석을 청소하는 크린 캠페인에 참가하는 바다 사랑도 실천 중이다. 이어 유미코는 파도의 속성을 알고, 파도를 다스리는 게 아니라 파도에 몸을 맡긴 채 호흡할 수 있게 되면 먼저 일본 바다를 두루 섭렵한 뒤 세계 곳곳의 유명한 서프 포인트를 찾아가 서로 다른 색깔을 지닌 파도를 직접 맛보고 싶다며 눈을 반짝거렸다.
허벅지는 제2의 심장
끝으로 일에 매진하면서 건강을 잃었다가 어렵게 되찾은 경험이 있기에 유미코는 이런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좀 더 빨리 했으면 생각하지만, 절대로 늦은 것이란 없습니다. 단지 안 할 뿐이죠. 생각이 있다면 행동에 옮길 것, 이걸 명심했으면 해요. 파도타기를 통해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자연의 섭리에 맞춰 산다는 가르침을 배웠는데, 일할 때 몰랐던 근육과 신경 등 여러 문제도 알게 되었고, 몸을 움직이면서 크고 작은 문제도 해소되고 몸도 부드러워지고 훨씬 가벼워졌어요. 친구들과 맛있는 것을 먹고 즐길 수 있기 위해서는 몸의 건강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특히, 제2의 심장이라는 허벅지를 지금부터라도 단련해 두면 제2의 인생이 든든해질 겁니다.”
사전적 의미의 내숭은 ‘겉으로는 순해 보이나 속으로는 엉큼하다’다.
김현정 화가, 그녀는 청춘의 속내를 내숭을 떨지 않고 작품 속에 고스란히 드러냈다.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얇은 한복 속의 여인의 자태는 예쁘다기 보다는 무척 매혹적이다.
인사동에 가면 꼭 들리는 갤러리 몇 군데가 있다. 그날 갤러리 이즈에서 예정에 없던 전시를 만났다. 마치 전시장이 아니라 백화점 세일 장소처럼 관람객이 많았다. 동양화가 김현정씨가 그림 속의 한복과 같은 차림으로 관람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수많은 전시장을 찾았어도 이런 풍경은 처음이다. 전시의 타이틀은 '내숭쟁이 놀이공원'.이며 모든 그림에 작가가 들어있다. 작가는 서울대학교대학원 미술대학 동양화과 출신이다. 2011년부터 현재까지 국내와 외국에서 수많은 전시를 열었으며 큰 상을 여러 번 타기도 했다. 어린 나이로 미국 뉴욕에 있는 메트로폴리탄에서 초대전시를 할 정도로 세계가 인정한 그녀다.
지금까지 본 전시 가운데 그림의 소재가 매우 파격적이다. 작품의 주제는 ‘내숭’이다. 내숭을 떨기는 쉬워도 드러내기는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작가는 자신의 일상을 거침없이 자유자재로 화폭에 옮겼다고 한다.
화장하는 모습, 범퍼가를 타는, 말을타고 달리는, 오토바이를 타고 햄버거 배달하는, 역기를들고 운동하는, 포장마차에서 떡볶이 먹는, 골프가방을 메고 가는, 당구 하는, 쇼핑하는, 자장면 먹는 등등 여러 모습이 있다.. 20대 청춘의 발랄함이 화폭마다 넘쳐났다. 이런 그림들이 전시 때마다 거의 매진된다니 대단하다.
여성은 속마음 감추고 잘 보이고 싶거나 혹은 남도다 돋보이고 싶을 때 내숭이라 하고 남성의 경우에는 허세라 한다. 내숭에 대한 뉘앙스는 엉큼함보다 귀여움이 들어있지만, 남성의 허세는 자신을 강하고 유능하게 보이게 하려는 것 같다. 내숭이나 허세는 개인차가 있기 마련이다. 둘 다 사회적인 틀을 벗어나기 싫어서 하는 일종의 방어적인 행위일 수도 있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때로는 약간의 내숭과 허세를 떨 때가 있다. 그러나 자주 하다 보면 그 사람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기 마련이다. 내숭의 가면과 허세의 가면을 쓰고 계속 살아가야 한다면 이 얼마나 피곤한 일인가. 그런 의미에서 고정관념을 벗어던진 김현정의 작품은 관람객들한테 억압된 속내를 잠시나마 풀 수 있게 대리만족을 할 수 있게 한 유쾌한 전시였다.
나 또한 그녀의 발랄 유쾌함이 너무 부러웠다. 앞으로 그녀의 전시가 열릴 때 응원하러 반드시 찾아 갈 것이다.
10년 전쯤 동문회 송년회에서 대선배 한 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경제학 교수님으로 장관급 고위직까지 지내고, 70대 중반에 본인 말로 ‘백수’ 생활을 하는 분이었지요.
“65세에 대학에서 정년 퇴임하고, 석좌교수 예우를 받으며 70세까지 일하다 몇 년 전 은퇴를 했다. 평생 교단에서 ‘노동은 고통(PAIN)’ 이라는 마르크스 경제학을 사실이라 믿고 가르쳐왔는데, 최근에서야 노동은 행복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집에서 보내는 하루하루가 정말 재미없고 외롭다. 현재 일하고 있는 후배들! 가능한 한 오래 버텨라! 직장에서 나오는 순간 행복과도 이별이다.”
평생 일의 노예처럼 살아온 분들의 노후생활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몇 분의 말씀 후에 제가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대선배님 말씀에 한편으로 안타까움을 느끼게 됩니다. 많은 사람이 평생 일에만 매달려 살고 있지만, 돈과 일만으로 인생의 행복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돈 버는 일은 중요하지만, 젊은 시절부터 이해관계로 연결되지 않는 인간관계와 취미를 가꾸는 노력도 긴요하다고 봅니다. 저는 몇 년 전부터 야생화를 촬영하는 취미를 가지고, 그걸 좋아하는 사람들과 친구가 되어 가족 같은 사랑을 나누고 있습니다. 힘든 일이 생겨도 ‘뷰 파인더’ 속에서 야생화를 들여다보는 순간 행복감에 도취하게 됩니다. 저는 은퇴를 해도 야생화와 카메라와 그 친구들이 있기에 삶이 무료하거나 지루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살 것 같습니다.”
사전을 찾아 보면 취미란 ‘인간이 금전적 목적이 아닌 기쁨을 얻는 활동’이라고 정의되어 있습니다.
대우증권이 2014년 말에 50세 이상의 주요고객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시니어 노후 대비 실태보고서’ 는 비교적 여유가 있는 시니어들에게 가장 후회스러운 일은 ‘평생 동안 즐길 수 있는 취미를 갖지 못한 것’ 이라고 했습니다.
또 미국의 금융전문가인 웨스 모스는 46개 주에서, 1400명의 은퇴자를 대상으로 ‘행복한 은퇴생활의 조건’을 조사하여 “행복한 은퇴자는 3~4개 정도의 취미생활을 즐기고 있다”는 결과를 얻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취미가 없는 인생은 향기가 없는 꽃과 같다’고 얘기했습니다. 향기가 없는 꽃에는 꽃과 나비가 꼬이지 않습니다. 당연히 그 인생은 무료하고 외로울 것입니다. 나이 들어 새롭게 시작한 취미활동을 통해 주변 사람들에게 삶의 향기를 전해 주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사진을 통해 만나게 된 류신우 토목기술사(1943년 생)는 은퇴한 이후, 2003년부터 건강을 관리하기 위해 카메라를 손에 잡았는데, 이제는 토목 전공이 아니라 사진 전공이라고 할 정도로 사진촬영은 생활의 일부분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틈틈이 지난 10여 년간 찍어온 사진파일들을 정리하여 국제사진예술연맹(FIAP)이 인증하는 국제사진공모전에 출품하고 있습니다.
FIAP는 유네스코가 세계에서 유일하게 NGO기관으로 승인한 예술단체인데, 그는 지난해 8월 이후 지금까지 국제사진 공모전에서 293점의 작품이 수상 혹은 입선의 영예를 안았습니다.
아직 우리나라에는 국제사진예술연맹의 사진작가 칭호를 받은 사람이 없는데, 앞으로 소정의 기간이 경과하면 류신우씨는 우리나라에서 FIAP가 인정하는 사진작가 제1호가 될 전망입니다.
그는 “일을 할 때는 늘 사람과의 경쟁에서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지내 왔는데, 사진은 경쟁 상대가 없어서 좋았다. 마음에 드는 피사체를 만나 렌즈로 들여다보면서 피사체와 나 사이에 서로 감정이입이 되고 있다고 느끼는 순간 커다란 희열을 맛본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는 “몸이 아파도 카메라만 들면 힘이 저절로 솟구친다. 앞으로도 건강이 허락하는 날까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좋은 작품을 많이 만들고 싶다.”고 얘기합니다.
어떤 사람은 ‘좋은 취미는 인생의 오아시스’ 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척박한 사막에 도전하는 것은 그 속 어디엔가 오아시스가 있다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좋은 취미는 사막보다 더 외롭고 혹독할 수 있는 노년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 줍니다. 이런 취미는 사람을 살리는 취미이기도 합니다.
제가 일을 통해 알게 된 H 회장(1946년 생)은 비교적 규모 있는 중견 건설기업을 운영하던 중, 국제금융위기 여파로 자신이 평생 일구어 온 모든 것을 다 잃어 버렸습니다.
그는 부도 위기에 몰리자, 자기가 사는 집까지 포함, 100억원에 가까운 사재를 몽땅 털어서 회사를 정리하고, 전 가족이 수년간 월셋집을 전전한 양심적인 기업인이었는데, 부도 이후 1년이 지난 어느 날, 연락을 해 왔습니다.
송파의 어느 포장마차에서 만난 초췌한 모습의 그와 소주 몇 병을 비우면서 위로를 한답시고 한 말이 “사진을 배워라. 사진에 심취하게 되면 그 속에서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뒤로 몇 년이 흐른 지난해 11월 경, 그로부터 SNS를 통해 연락이 왔습니다. 그는 허리를 다쳐서 수술을 받고 병원에 있다면서, 자신은 수년 전 사진을 배웠고, 이제는 사진이 가장 소중한 인생의 반려가 되었다고 하더군요.
최근에 만난 그는 사진을 시작한 이후로, 어린 시절 살았던 시골장터가 생각나 전국의 오일장과 그 속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을 테마로 사진을 찍고 다닌다며, 최근에는 6개월 코스의 사진스쿨에도 등록을 했다고 했습니다.
그는 “한때 극단적인 생각을 해보기도 했지만, 사진을 통해 만나는 사람들을 보면서 삶이 얼마나 소중하고 엄중한 것인가를 느끼게 되었다. 사진이 나를 살렸다.”고 얘기하더군요.
가끔 SNS를 통해 대하게 되는 그의 작품들 속에는 고달픈 삶 속에서 쓰러지지 않고 버텨내는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가 담겨 있음을 절절하게 느끼게 됩니다.
저 역시 사진이라는 취미활동을 통해 은퇴 이후의 삶을 재미있고, 윤택하게 보내고 있습니다.
저는 2003년부터 야생화 사진촬영에 취미를 붙이게 되었고, 급기야는 그 재미있는 골프마저도 끊어 버리고, 역시 사진을 좋아하는 아내와 함께 주말이면 짐을 싸 들고, 카메라 메고, 차를 몰고 꽃을 찾아 전국의 강산을 헤매고 다니는 생활을 해 왔습니다.
수년 전부터는 아내가 야생화 대신 새를 찍기 시작해 요즈음은 함께 다니는 빈도수가 많이 줄어들기는 했지만, 그래도 60 중반을 넘어서 주변으로부터 “사는 모습이 참 보기가 좋다” 는 얘기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아마도 부부공동의 취미생활을 통해 얻게 된 소득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야생화 촬영을 통해서 얻게 된 또 한 가지는 꽃과 사진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이해관계를 떠난 만남이었습니다.
2005년 봄, ‘들꽃마을’ 이라는 야생화 사진 동호회를 통해 맺어진 사람들과의 인간관계는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가족 이상으로 끈끈한 정을 나누는 관계입니다.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과 이런 인간관계 속에서 살아간다는 게 제게는 정말 감사하고 행복한 마음입니다.
이란 책(부제 : 날마다 즐거운 생활)을 펴낸 고민숙 작가는 “취미는 혼자이면서도 혼자이지 않은 듯 즐길 수 있었던 일상의 재미난 놀이” 라고 정의하고, “취미의 발견이란, 나를 발견하고, 주위를 발견하고, 일상을 발견하는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시니어 세대의 많은 분들이 스스로 취미를 발견하고, 그 취미 생활을 통해 누군가에게 새로운 ‘취미 발견’의 동기를 부여해 줄 수 있다면 그 시니어라이프야말로 참으로 행복하고 보람 있는 삶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앞으로 저는 손자들이 야생화를 바라보며 그 강인한 생명력을 배울 수 있도록, 그리고 사진이라는 취미를 통해 어려서부터 스스로의 삶을 윤택하게 가꾸어 나갈 수 있도록 기회 있을 때마다 제 목숨보다 더 소중한 현우와 승우에게도 사진찍기를 가르치려고 합니다.
>> 글 조용경(趙庸耿) 포스코엔지니어링 상임고문
경상북도 문경에서 태어났다. 경기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법대를 졸업하고 한국은행을 거쳐 포항제철(현 포스코)에서 故 박태준 회장의 비서부장 홍보부장과 회장 보좌역으로 일했다. 포스코건설 인천 송도신도시사업본부장과 포스코엔지니어링(전 대우엔지니어링) 대표이사 부회장을 지냈다. 현재 포스코엔지니어링 상임고문, 한국트라이애슬론연맹 부회장, (사)글로벌인재경영원 이사장을 맡고 있다.
중년이 좋아하는 아이돌. 잘못 생각하면 짧은 치마로 무장한 여자 아이돌을 쫓아다니는 삼촌 팬으로 오해할 수 있다. 그러나 중년의 음악애호가, 특히 색소폰 마니아들 사이에서 아이돌을 꼽자면 단연 강기만(姜其滿·40)씨다.
글·사진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강기만씨는 알려진 명성에 비해 늦깎이 데뷔를 한 음악가다. 애초 직업은 군인이었다.
“원래는 군에 있었죠. 2013년 대위로 제대를 했습니다. 색소폰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부대 근처에 학원이 있어서였어요. 늦게 데뷔를 했지만, 나름의 장점이 있습니다. 인격적으로 완성이 된 이후 음악에 접근했기 때문에 어릴 때 기술적으로 접근하는 친구들에 비해 해석력에 차이가 있죠.”
만학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2010년 1집 를 발표했다. 그리고 4집까지 연이어 앨범을 세상에 내놨다. 학습서 을 비롯해 책도 4권이나 집필했다. 호주 현지에서 한국인이 설립한 호주기독교대학(Australia Christian College)에서 실용음악과 학과장을 맡고 있기도 하다.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그의 이름을 딴 색소폰도 출시됐다.
연주가로서의 활동만큼이나 강기만씨가 잘 알려진 것은 그의 SNS 동호회 ‘색소폰 랜드’를 통해서이다. 네이버 밴드에서 규모가 큰 색소폰 모임 중 하나로 전국에서 회원만 4600명에 달한다. 별도의 여행이나 골프 동호회는 물론 지역별, 종교별 모임까지 있을 정도다. 6월25일에는 전국모임이 속리산에서 개최될 예정인데, 참석 예정인원만 250명 정도 된단다.
“회원들의 색소폰에 대한 사랑은 대단합니다. 대부분 50대 이상의 시니어 회원으로 구성되어 있어요. 들어와 보시면 아시겠지만, 매일같이 회원들의 연주영상이나 게시물이 엄청나게 올라옵니다. 다들 전국에서 열정적으로 연습하고 있죠.”
그의 추산으로 전국의 색소폰 동호인 숫자는 30만~40만명. 악기가 팔린 것만 100만대 정도 된다고 어림잡아 계산한다. 동호인들을 위한 각종 경연대회도 각 지역에서 활발하게 개최되고 있는데, 평균적으로 100팀 정도가 출전한다고 한다. 강기만씨는 이런 대회의 단골 심사위원이다.
그의 특별한 활동 이력 중에는 라디오 DJ가 있다. CTS 기독교 방송 라디오에서 매주 월요일 1시에 를 진행한다. 색소폰이 주제가 되어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것은 처음일 것이라고 그는 이야기한다. 그가 이런 활동에 매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색소폰 연주가로 대중적인 인지도를 쌓는 일은 너무나 어렵습니다. 음지에서 연주를 하다 포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팬들의 사랑을 통해 제가 연주 이외의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만큼, 후배들도 그 길을 갈 수 있게 열어주고 싶은 마음이 큽니다. 제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에서 후배들의 비중이 큰 것도 그 때문입니다.”
시니어들에게 색소폰이 사랑받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이에 대해 강기만씨는 재미있는 답을 내놓는다.
“아마 외로움이 아닐까 싶어요. 중년 이후에 찾아오는 외로움을 음악으로 해소하려는 시니어들이 많은 것 같아요. 또 색소폰 자체와 연주하는 모습에서 풍기는 멋진 모습이 주목받게 해 주니까요. 색소폰이 갖는 특유의 음색도 시니어들에게 어필하는 매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음악을 시작하려는 시니어들에게 조언을 부탁하자 그는 색소폰을 시작하려면 먼저 좋은 스승을 찾아, 충분한 연습을 하는 것이 정도(正道)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남의 연주를 많이 듣는 습관이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악기에 대한 얘기도 꺼내놓았다.
“색소폰을 시작하는 시니어들이 쉽게 빠지는 함정이 두 가지가 있어요. 첫 번째 비싼 악기로 부족한 음악적 소양을 보상받으려는 심리가 있죠. 하지만 비싼 장비를 갖는다고 실력이 나아지진 않습니다. 연습만이 살 길이죠. 두 번째 함정은 반주기에 너무 의존한다는 것이에요. 적당한 레슨 없이 반주기만 틀어놓고 연습하는 것은 음악을 예술이 아닌 게임으로 변색시키는 것이죠. 타이밍에 맞춰 음계를 내놓는 것이 아니라 리듬에 운율과 감정을 실을 수 있어야 진정한 연주가 됩니다. 연륜과 열정이 묻어나올 수 있는 연주를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언제부턴가 ‘실버타운’은 슬그머니 사라지고 ‘시니어타운’이라는 새로운 용어가 등장했다. 최근 퇴직자를 대상으로 하는 주거 강의 중에 실버타운과 시니어타운의 차이를 질문했던 적이 있다. 대부분의 수강생들은 그 차이를 모르겠다고 했고 일부는 실버타운은 문제 있는 시설이고 시니어타운은 믿을 만한 시설이라고 알고 있다고 했다.
여기서 정답은 똑같은 시설을 지칭하는 용어라는 것이다. 그동안 ‘실버타운’이 여러 가지 부정적인 문제를 야기 시키니까 개발업자들이 새로 만들어 낸 용어가 ‘시니어타운’이다. 호박에다가 줄을 그어 수박과 헷갈리게 만든 꼴이랄까.
우리나라에는 1990년대 초반에 소위 실버타운이 수입되었다. 그 당시 필자가 운영하던 건축설계사무소에는 실버타운 사업을 하겠다는 사람들의 출입이 많았다. 그들은 하나같이 경치 좋고 공기 좋은 산 속에 거창한 실버타운을 개발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당시만 해도 실버타운에 관한 서적도 없었고 자문을 받을 전문가도 국내에 거의 없었다. 필자는 일본 서적을 번역해서 모 대학원에서 사용하던 교재를 어렵게 구해서 연구했다.
1980년 대 후반부터 시작된 신도시 건설이 불러온 건설 붐은 1900년 대 중반까지 온 나라를 공사판으로 만들었다. 그에 편승해서 실버타운 바람도 불었다.
충남 예산에 실버타운을 기획하고 있던 의사를 따라 조찬포럼에 간 적이 있다.
그 곳에 모인 의사들은 머잖아 인간수명 150세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는 주제로 열띤 토론을 벌였다. 평균수명이 75세 정도였던 그 당시로선 좀 허황된 이야기를 하는 자리라고 느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참석한 실버타운 기획자들은 앞으로 우리나라가 노인 천국이 될 것이므로 대규모 실버타운이 필요하다는 의견들을 쏟아냈다.
미래 장수사회의 주거대안으로 떠오르던 실버타운은 그러나 정착되기도 전에 IMF와 함께 몰락했다. 개발되었거나 진행되던 여러 곳이 IMF로 부도가 났다. 그 당시 부도가 난 서울 근교 실버타운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근처에 골프장과 스키장이 있는 리조트 인근 산속에 덩그러니 서 있는 시설이었다. 겨울에 난방도 안 되는 시설에서 노인 몇 분이 식당에 모여서 직접 밥을 해 드시고 계셨다. 개발업자가 부도를 내고 도망가서 입주 보증금을 돌려받을 수 없는 어르신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고통의 나날을 보내고 계셨다.
2000년 대 들어 고급 실버타운 붐이 일었다. 과거와 달리 이번에는 도심 내에 프리미엄 시설로 개발되었다. 명칭도 시니어타운으로 바꿔 불렀다. 고소득층을 대상으로 하는 이런 시설들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는 듯했다. 그러나 최근 뉴스를 보면 일부 시설을 제외하고 입주율이 저조해서 운영에 상당히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한다. 어떤 곳은 운영회사가 관리비를 유용해서 단전 단수를 겪기도 하고 퇴소하려고해도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해서 그냥 그곳에 살 수 밖에 없다고 하니 답답한 노릇이다.
실버타운, 시니어타운은 노인복지주택의 별칭이다. 건축법에서 공동주택이 허용되지 않는 지역에 허가를 받을 수 있고 공동주택에서 규정하고 있는 부대시설 조건들도 완화된다. 외관과 내부는 공동주택과 다를 바 없다. 결국 이러한 법의 허점을 이용해서 쉽게 허가받고 나서 운영을 재대로 안하니 피해는 입주자에게 돌아가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필자는 우리나라 실버타운의 태동기부터 지금까지의 생생한 현장을 함께했다. 가장 안타까운 것은 앞으로 상당기간 우리나라에서 실버타운이 정착하기 힘들 것이라는 사실이다. 지금까지 만들어 놓은 부정적인 이미지를 신뢰로 되돌리지 못한다면 실버타운은 영원히 외면 받을 것이다.
실버타운은 배려[配慮]의 시설이다. 땅값과 공사비를 계산하고 분양가를 계산해서 산술적 차익을 남기는 개발 프로젝트가 아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90년 대 중반에 실버타운 바람이 불 때 필자도 개발 업자의 요청으로 전국을 돌면서 현장답사를 했었다. 그러나 설계검토만 수십 건 했을 뿐 실제 실버타운개발로 이어진 프로젝트가 없다. 그 때는 개발 업자들에게 이용만 당했다고 억울해 했지만 지금은 가슴을 쓸어내린다. 그 때 필자가 실버타운을 설계했더라면 아마 지금 건축 인생에 있어 가장 부끄러운 프로젝트로 남아있을 가능성이 많다. 그 당시 개발업자들도 그러했지만 필자도 ‘배려’가 무엇인지 그 개념조차 알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