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한국 농업·농촌에 대해, 이동필(李桐弼·63) 전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은 간단하게 ‘전환기’라고 명명했다. 자신의 고향이자 농업 현장인 경상북도 의성군에서 농부로 일하면서 느낀 솔직한 속내였다. 그러나 그는 전환기 속에서 맡은 바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고 결과에 책임을 지고자 한다. 장관 자리에서 물러난 후 스스로 돌아보는 ‘마음공부’ 뜨락에 씨앗을 뿌리고 일구는 데 모든 것을 바치고 있는 게 그 증거다. 농촌경제연구원에서 장관을 거쳐 귀향한 후 농부의 삶을 살아가는 그에게서 한국 농업과 농촌이 직면하게 된 현재와 미래의 활로에 대해 물어봤다.
경상북도 의성군은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마늘로 친숙한 도시다. 그리고 지난 2018 평창동계올림픽에서 특별하게 유명해진 지역이기도 하다. 전 국민의 관심을 모았던 컬링 종목의 스타들이 모두 의성 출신이라는 점 때문이다. 의성은 컬링 종목의 스타들을 꾸준히 배출하고 있다. 이제 대한민국 컬링의 수도라고 봐도 좋을 정도로 아낌없는 지원도 이루어지고 있다.
30년 뒤면 사라질 수도 있는 도시
그러나 이처럼 사람들에게 알려진 의성의 대외 이미지와는 달리, 이동필 전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은 걱정이 많았다. 그는 인터뷰를 하던 중 서산대사의 시를 읊었다. ‘환향’이라는 제목의 시다.
삼십 년 만에 고향에 돌아오니
사람은 죽고 집은 부서지고
마을은 황폐화됐는데
청산은 말이 없고 봄 하늘은 지는데
어디서 두견새 우는 소리만
들리는구나
그야말로 막막하다.
“이게 내 심정이에요.”
그의 먹먹한 기분은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들 때문이었다. 그가 장관 퇴임 후 한 명의 농부가 되어 귀향한 의성군은 2016년 ‘중앙 이코노미스트’의 분석에 따르면, 30년 뒤 사라질 가능성이 가장 높은 지역이었다. 그리고 그 자신도 그러한 현실을 체감하고 있었다.
“고령화, 양극화, 그리고 예전 같은 공동체가 스러지고 있다는 점이 문제죠. 연구소나 중앙부처에 있을 때는 망원경으로 세상을 봤지만 현장에서는 현미경 보듯 보이지요.”
장관, 농부가 되다
이 전 장관은 뼛속까지 농업인이다. 그의 경력을 보면 바로 드러나는 사실이다. 농촌지도자였던 아버지를 둔 그는 영남대학교 축산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와 미국 미주리주립대학교에서 농업경제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한국농촌경제연구원에서 30여 년 넘게 근무하면서 농촌의 현실과 문제를 연구하고 대안을 내놓는 일을 했으며 2013년에는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으로 입각해 역대 최장수인 3년 6개월의 시간을 지냈다. 그리고 2016년 9월 5일 퇴임한 다음 날 고향으로 돌아와 2500평(8264㎡)의 땅을 관리하는 농부가 되었다.
“요즘은 아침 다섯 시에 일어나 동물들 밥 먹이는 일로 하루를 시작해요. 온몸이 타박상과 상처투성이예요.(웃음) 며칠 전에는 경운기 사고가 나서 갈비뼈가 부러졌어요. 도처에 해야 할 일이죠. 옛날 방식으로 농사를 하면 힘만 들고 돈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실감했어요.”
귀향할 때 나름 세운 ‘일이삼사 원칙’이 있었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 하루 두어 차례 텃밭을 돌보고, 삼시 세끼 어머니와 밥을 먹고, 사람들이 찾아오면 말동무가 된다’는 것이었다. 3년간 보리·콩·팥·참깨·마늘·양파·옥수수 등 온갖 농사를 다 지어봤다.
그 과정에서 사모님은 반대 안 했느냐고 묻자 퇴직한 그날 밤에 어찌 내려가느냐며 딱 하루 반대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후로는 함께 고생하면서 도와주고 있다 한다.
“가끔 외롭고 답답할 때가 있는데 아내가 그걸 풀어줘요. 신세를 많이 지고 있죠.”
남는 농산물을 판매하는 수고로움은 모두 아내 이정숙 여사가 맡아서 하고 있다. 노모를 돌보고 남편 수발하고 농사일까지 거들며 집안 곳곳을 돌보는 1인 다역을 하고 있는 만큼 이 전 장관은 이런 아내를 인생 최고의 반려자라고 손꼽았다.
고향에 돌아온 그는 먼저 오래된 집을 손보면서 마당에 5평(16.5㎡)짜리 사랑채를 지어 사원재(思源齋)라 이름 붙였다. 농사일하며 이곳에서 책을 읽고 손님을 맞는다. 사원재라는 말은 조상과 부모, 그간 살아오며 도움을 줬던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의리를 잊지 않겠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는 또 40년이 다 된 부친의 생가 마당 한가운데에 작은 정자를 세우고 애일당(愛日堂)이라 이름 지었다. 노모가 황반변성 때문에 눈이 불편하신데 남은 날 하루하루 즐겁게 사셨으면 좋겠다는 뜻을 새겨 넣었다. 이 또한 안빈낙도(安貧樂道)가 아니겠는지.
‘故鄕創生’에 몰두하다
하지만 눈앞의 일을 두고 보고만 있을 수는 없어 종일 흙에 파묻혀 있다 들어오면 너무나 피곤해 바로 쓰러져 자는 현실. 그는 자신의 현재를 춘추전국시대 제자백가 중 농가에 비유했다.
“이 사람들은 농사를 짓는 게 세상 근본 이치란 주장을 했어요. 그런 주장을 갖고 등나라를 갔죠. 그 나라 임금이 너희들의 주장은 뭐냐 물어보니 첫째는 근면 검소해야 한다, 둘째로는 왕과 왕비도 직접 농사를 지어야 한다고 대답했어요. 왕이 그 말을 듣고는 첫 번째는 공감할 수 있는데 두 번째는 못하겠다며 거절했죠.(웃음) 이 사람들은 농업인들과 함께 일만 열심히 하다 보니 자기 사상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지 못했어요. 당시 유가들은, 실천보다 말로 사는 사람들이니까 자신들의 주장을 다 책으로 만들었죠. 나도 이렇게 농사일만 하다가는 정작 농촌의 살길에 대해 글을 써보겠다는 생각은 시작도 하지 못하고 마는 게 아닌가 걱정돼요.(웃음) 이제 좀 바꿔야겠어요.”
그렇다고 그가 다시 정치의 세계로 돌아올 것이라는 얘기인가 하면, 전혀 아니다. 이번 지방선거 때도 얘기들이 있었지만 그는 손사래를 쳤다.
“밖에 나가면 말이 많아 거의 두문불출하고 있어요. 무슨 운동을 하거나 당을 같이 해보자며 찾아오는 이도 있지만, 차나 한잔 먹고 가라며 돌려보내요. 한 눈 팔지 않고 텃밭 일구며 스스로를 돌아보고 평생의 과업인 희망찬 농업, 활기찬 농촌을 만드는 생각을 하기에도 바쁩니다.”
그러고 보니 그의 집에는 신문도 TV도 없었고 라디오 하나만 틀어놓고 있었다. 외부 활동이라면 가끔씩 강의를 나가는 정도다. 요즘 그의 주된 관심사는 ‘지방소멸과 고향창생’, ‘청년창업과 귀농귀촌’ 그리고 ‘농협의 역할’ 등이다. ‘늙고 지친 고향을 어떻게 활성화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화두와 관련한 고민거리인 것이다.
극장 하나 없는 곳, 젊은이들에게 와서 살라 말할 수 있나
“지역발전이라 하면 흔히 돈 버는 얘기만 하는데, 그에 못지 않게 이웃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너그러운 마음과 역량을 갖춘 인재양성, 그리고 생활환경 및 복지 서비스의 질적 개선도 중요하다고 봐요. 의성만 해도 극장 하나 없어요. 그런데 말로만 여기 와서 살라고 권유할 순 없죠.”
사실 농업·농촌 발전을 위해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많은 예산과 인력을 동원해 노력을 하고 있으나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 전 장관은 지역활성화를 위해 일하는 방식을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중앙정부는 지방 분권과 지원체제 정비를 하고 지방에 도전할 기회를 준 후에 결과에 책임지도록 해야 해요. 지역의 특성과 농가를 유형별로 구분하여 맞춤형 정책을 추진하는 것이 자원의 효율성을 높이는 길이거든요. 또한 조건불리지역 직불제도를 개선하여 개발 여건이 불리한 지역에 대해 지원을 차등화할 필요가 있어요.”
그는 농어촌상생협력기금의 조속한 시행과 함께 고향기부금제를 도입할 것을 적극 주문했다.
“무역이득공유제의 대안으로 매년 1000억 원씩 10년간 모으는 농어촌상생협력기금을 조성하기로 했는데 제대로 시행되지 않고 있어요. 당시 한중 FTA 협약 비준을 전제로 여야가 합의한 약속입니다.”
아울러 지방의 역할을 강화하고 주민과 민간 부문의 참여를 촉진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특히 농촌에 젊은 사람들을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스마트팜이나 공동경영체 등을 통해 고부가가치 있는 농산물을 생산하고 가공, 유통, 체험관광 등과 결합한 6차산업으로 매력적인 일자리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도농교류를 하고 귀농·귀촌을 통해 외부 사람들을 불러들이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이런 일들을 책임있게 추진하기 위해서는 지역 스스로 자기들의 문제와 가능성, 부존자원을 기초로 구체적인 목표를 세우고 전략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농가 유형별 육성정책 완성해야
이는 그가 장관 시절에 핵심적으로 추진한 과제 중에서 못 다 이룬 숙원과도 관계가 깊다.
“농정의 새 틀을 짜고 싶었어요. 농업·농촌을 둘러 싼 대내외 여건이 다 바뀌어버린 지금은 그 변화에 걸맞게 정책 프레임도 달라져야 한다고 봤죠. 그중 하나가 농업경영체를 등록하고 이에 기초하여 농가 유형별 육성정책을 추진하는 일이었어요.”
그는 경영주가 65세 미만이면서 소득이 연 5000만 원 이상인 농가는 규모 있는 농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장기저리 융자와 컨설팅, 경영안정대책 등 맞춤형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후계자가 없는 영세고령농가는 농업 경영에서 은퇴를 유도하여 사회안전망으로 커버하고, 나머지 중간 규모 농가는 가공, 유통, 관광 등을 결합한 6차산업화를 통해 추가적인 소득원을 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농가를 한데 묶어놓고 획일적인 정책을 추진하니 돈은 돈대로 쓰고 손에 잡히는 효과를 못 볼 수밖에요. 이웃인 성주는 참외 하나만 갖고도 잘살아요. 참외 주산지로서 품목이 특화되어 전후방 관련 산업이 발달하고 6차산업으로 수급까지 안정되니 가능한 거죠. 이처럼 지역 및 농가 유형별 육성정책을 완성해야 했는데, 끝장을 못 보고 나온 게 아쉬워요.”
지역의 농업·농촌 관련 사업이 중앙정부에 지나치게 의존하다 보니 천편일률적으로 획일화해 특성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도 같은 문제다. 농촌 중심 활성화 사업을 보면 지역 여건이나 부존자원에 대한 고려없이 주민 의사나 참여도 이뤄지지 않는 상태에서 건물이나 지어놓고 활용을 못해 심지어 전기세도 안 나온다는 얘기를 듣는다는 것이다.
“지역이라는 공간 정책 위에 산업 정책을, 그 위에 사람을 대상으로 한 복지정책이 이루어져야 시너지 효과를 얻을 수 있는데 제각기 따로 놀고 있어요. 그러다 보니 사후관리는 안 되고 지자체는 책임 안 지려 하고…. 지역이 정책을 좀 더 주도하고 책임지도록 추진체계를 보강해야 해요.”
어쩌면 농협이 대안이 될 수도
그는 1·2·3차산업을 융복합해 농가에 높은 부가가치를 제공하고 일자리를 창출하는 6차산업을 주창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가 이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아시아 몬순기후대의 영세소농이란 구조적 특징 때문이다. 여름에 고온다습한 기후 때문에 논농사에 특화하다 보니 계절별 유휴인력이 발생하게 되고, 유휴노동력을 생산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농외소득원을 개발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된 것이다. 농업생산이란 1차산업과 가공이란 2차산업, 그리고 유통 및 관광서비스 등의 3차산업을 결합한 6차산업에서 그 해답을 찾았다.
그렇지만 현실은 생각처럼 간단치 않았다. 그는 지난해 수확한 팥 서 말과 양파 100kg을 팔 곳이 없었던 것이다. “콩 750kg은 다행히 인근 농협에 판매하였으나 시중보다 낮은 가격으로 넘겼어요. 오죽하면 농민들이 농협에 바라는 소망이 수확한 농산물을 제값 받고 팔아달라는 것이겠어요. 농사짓는 것도 힘들지만 판매하는 것은 더 어렵습디다.”
정부는 농협 개혁을 통해 경제사업을 활성화하려고 애쓰고 있으나 아직도 체감하는 성과는 얻지 못하고, 대부분의 사업장들도 적자 신세를 면치 못하는 실정이다. 더구나 농업인의 고령화로 준조합원 수가 늘어나면서 신용사업에 매진하고 있는 상황이다.
“일본은 농협 회원 중 농사를 짓지 않는 준조합원이 정조합원보다 30% 정도 많고, 농협 계통 매장의 농산물 책임판매율이 50%밖에 안 된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농협이 역할을 못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2014년부터 개혁을 시작했어요. 그런데 우리나라 농협은 정조합원이 준조합원보다 훨씬 더 많은데도 농산물 책임판매율은 25%에 불과해 농민들로부터 돈장사만 한다고 비판받는 거예요.”
그는 오랜 연구생활과 장관으로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가감 없이 농협 유통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아울러 고령화로 인한 지방소멸 시대에 있어서 주민들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한 농협의 새로운 역할을 제시했다.
“농협이 지역 단위의 6차산업을 주도해야 한다고 봐요. 경제사업의 수지개선을 위해서는 경영 능력을 향상하고 규모화, 전문화해야 합니다. 인근 지역과 품목을 생산하는 농협과의 통합 또는 사업을 연계하거나 연합사업단을 운영할 수도 있겠지요.”
어째서 농협일까? 그는 지금처럼 개별 농가가 따로따로 로컬푸드니 직거래니 하는 식으로 장사를 하면 비용절감을 고사하고 소비자 신뢰를 얻기 어렵다고 보고 있다. 표준화, 규격화가 곤란하기 때문이다. 개별 농가가 하기 힘든 그 작업을 농협이 해줬으면 하는 의견이다.
“고령화 사회에서 농협은 농기계를 구비하고 영세농들의 영농을 대행할 수도 있습니다. 농촌지역의 교육, 의료, 복지 등 서비스 전달 체계로서 농협의 새로운 역할도 생각해볼 수 있겠죠. 그것이 농협이 살길이에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결국 농협이 대체 뭐하는 곳이냐는 정체성 논란이 심화될 겁니다. 농협이 당면한 현안을 극복하고 지속적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주민들의 걱정을 덜어줄 수 있도록 스스로 혁신하고 노력해야 해요.”
귀농·귀촌, 국가 정책으로 시행해야
이 전 장관은 요즘 세상이 시끄럽다는데 다 잊고 산다고 했다. 해야 할 일이 많아서 그렇기도 하지만 깨끗한 자연환경 속에서 씨 뿌리고 가꾸는 즐거움이 여간 아니라고 한다. 농업과 농촌에서 미래의 꿈을 키우는 젊은이들은 물론 은퇴 후 여생을 편안하게 보내려는 사람들에게도 보람을 느끼는 새로운 삶이 가능함을 농촌이 가르쳐준다고 말했다. 지역의 균형발전은 물론 개개인의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는 귀농·귀촌 정책은 어느 한 부처가 아니라 여러 부처가 협력해 국가 차원에서 종합적으로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금의 농촌은 흡사 요양병원과 비슷해요. 우리 집 왼쪽으로 있는 집 세 채는 빈집이고, 오른쪽의 두 채는 독거노인이 살고 있어요. 소멸위험 지역에서 벗어나는 길은 외지 인구를 유입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러려면 이사비 몇 푼 보태주는 게 자랑이 아니라 이주자들이 필요한 것을 도와줘야죠. 여기서 태어나 20여 년 살았고, 지금 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저도 적응이 쉽지 않은데 낯설고 물선 객지로 이사와서 얼마나 답답한 게 많겠어요? 지역을 찾아 온 외지인을 축복으로 여기고 따스하게 배려하는 너그러운 이웃이 있어야 이곳에 눌러 살고싶은 마음을 불러일으킨답니다.”
그는 귀농·귀촌 통계확립과 관련 정책의 정비, 농촌지역에 대해 1가구 2주택에 추가적인 감세를 포함한 제도정비등과 함께 주민들의 귀농·귀촌자들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제는 청복(淸福)을 위해 노력할 때
오로지 고향의 발전과 활기찬 농촌을 위한 생각에 둘러싸인 그에게서 못다한 책임감과 꺼지지 않은 열정이 보였다. 해야 할 일과 책임이 없다면 그렇게 힘들게 생활할 리가 없다. 그에게 견딤의 비법을 물었더니 정약용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다산 정약용은 복을 열복(熱福)과 청복(淸福)으로 나눴어요. 열복은 출세해 권세를 누리는 것이고, 청복은 청빈한 삶을 통해 욕심과 번뇌를 지움으로써 얻는 복이죠. 다산은 열복보다는 청복을 얻기가 훨씬 힘들다고 말했습니다. 제 인생을 돌아보면, 이미 열복은 과분하게 누린 셈이죠. 이제 마음을 내려놓고 이웃과 더불어 즐겁게 사는 복이 남았습니다.”
청복을 누려보겠다고 다짐했다는 말에서 그가 유독 마음가짐을 강조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더구나 그에게는 아직 풀어야 할 평생의 숙제, 희망찬 농업과 활기찬 농촌을 통해 국민이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보자는 도전이 있다. 도전은 사람에게 살아가야 할 이유를 만들어준다. 그래서 마음의 가치를 알게 된 그는 사람들에게 마음이 만들어내는 위대한 변화에 대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고향창생은 우리들 마음의 재생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내가 살아갈 지역의 미래를 위해, 무언가 하고 싶다는 주민들의 염원이 행동으로 나타날 때 활력은 다시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퇴직 후 숲 생태 해설가로 활동하며 ‘생강’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됐다. 생강(生薑-ginger)의 어원은 정력, 기력이며 신이 내린 정력제라고 할 만큼 효과가 있다. 공자가 생강을 좋아했다고 잘 알려졌으며, 다산 정약용 역시 생강차를 즐겨 마셨다고 전해진다.
생강은 새앙과의 풀이다. 채소 중 뿌리채소며, 약용과 식용으로 쓰이는 다년생풀에 속한다. 지하경이 굵어져서 다육한 괴상(塊狀)이 되며, 특유한 향과 매운맛이 있어 사람들이 애용한다. 이러한 특징으로 음식의 맛을 내는 조미료로 많이 쓰이는데, 생강차는 감기 예방에도 좋다.
생강나무는 봄에 노란 꽃을 피우며 가지와 잎에서 생강 냄새가 난다. 산후 풍에 좋다고 하는 이 나무는 밭에서 나는 뿌리채소인 생강과는 모양이 다르다. 그러나 생강향이 난다는 이유로 '생강나무'라는 이름을 얻게 됐으니 참 신기하기도 하다.
생강나무 가지와 잎을 따서 문질러 보면 상큼한 생강 냄새가 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른 봄에 잎보다 먼저 노란 꽃을 피우는데 산수유나무와 꽃 색깔이 비슷해 혼동하기 쉽다.
김유정의 소설 ‘동백꽃’을 읽으면서 생강나무와 동백꽃과 황매목(黃梅木)이 같은 나무인 것을 알았다. 지난해 3월 김유정 생가를 관광차 찾았을 때, 그 노란 꽃향기가 짙게 풍겼던 기억이 있다.
'알싸한 그리고 향긋한 그 냄새에 나는 땅이 꺼지는 듯이 온 정신이 고만 아찔하였다.' 여기서 알싸하고도 향긋한 냄새는 바로 생강나무를 말한다. 소설 속 이 꽃이 생강나무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느 산골 마을 소년과 소녀의 순박한 사랑을 토속적으로 쓴 ‘동백꽃’ 속, 알싸한 그 노란 생강 냄새가 콧속으로 스며오는 듯하다. 아마 소설의 배경인 산골 농촌에도 생강은 밭에서 자랐을 것이고, 생강나무 역시 뒷동산에 피어 있었을 것이다.
나 역시 어린 시절로 마냥 줄달음치면서 건강에 좋다는 생강차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우리 집 텃밭의 생강의 모습과 추억이 아련하다. 죽마고우들과 뛰어놀던 뒷동산에 노란 생강나무가 아스라이 떠오른다. 생강의 향긋한 내음이 넘실거리며 풍겨오는 듯 아롱거린다.
언젠가 ‘바람의 딸’로 유명한 국제구호활동가 한비야 씨의 강의를 들을 기회가 있었는데 참 공감 가는 이야기가 있었다. 노후에 가장 행복하게 사는 법 4가지가 있는데 그것이 무엇일까요? 하는 물음이었다. 세 가지까지는 모두가 아는 내용이어서 잘 대답했는데 네 번째는 의견이 분분했다. 그 4가지는 첫째가 돈이요, 둘째가 아내요, 셋째는 무엇인가 할 일이 있다는 것이었다. 마지막 넷째가 무엇일까? 궁금했는데 그것은 ‘혼자서도 잘 노는 법’이라고 했다. 자녀들이 다 출가하여 빈 둥지가 된 집안에 아내와 함께 살아도 어느 정도는 각자의 취미도 있게 마련이다. 또한, 언젠가는 홀로서기를 해야 한다. 노후가 되면 혼자서도 잘 노는 법을 터득해야 행복해질 수 있다. 그것은 각자의 취미와 성격에 따라 다르겠지만 가장 보편적인 방법이 공부이다.
공부라고 하니까 뭐 거창하게 생각될 수 있지만, 자격증을 따거나 시험에 합격하는 그런 것만이 아닌 각자가 좋아하는 분야에 몰입하고 그 분야에 관련된 전공 서적을 읽고 즐기면 되는 것이다. 무엇을 하던 그 분야를 알려면 책을 봐야 함은 당연한 일이다. 누군가 하던 말이 생각난다. ‘머리에 흰 서릿발이 내린 노인이 도서관에서 책을 보는 모습이 가장 아름답다‘고. 이것이야말로 혼자서도 잘 노는 법에 해당한다.
그림을 좋아하면 그림을 그리면서 세계 유명한 화가에 관련된 책을 탐독하고 그림이 전시되고 있는 박물관을 탐방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팝송을 좋아하면 올드 팝부터 현재 유행하는 팝송까지 섭렵하고 특별히 좋아하는 가수들의 콘서트를 참가하는 것도 또 다른 재미가 있을 것이다.
농사를 짓는 사람은 농사에 대해서 공부하는 것이다. 남들이 하는 대로 따라서 하는 어쩔 수 없는 농사가 아니다. 씨앗 한 알을 뿌려도 토양의 질을 달리해서 그 발아를 살펴보고, 기후에 따라 자라는 모양도 관찰해보며, 최적의 조건은 무엇인지 살펴보는 것이다. 이미 연구해 놓은 책들을 탐독하고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는지 다른 방법도 연구해 보는 것이다. 어떤 조건에서 파종하고 물을 주고 거름을 해야 최고의 소출을 낼 수 있는지 찾아보는 것이다.
조선의 실학자 정약용 선생이 18년간 유배 생활을 하며 생계가 어려워 닭을 키우는 아들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어떻게 처세를 해야 하는지 명확하게 나온다.
유형지 강진에서 다산은 둘째 아들 학유가 닭을 키운다는 소식을 듣고 편지를 쓴다. “네가 닭을 기른다는 말을 들었는데, 닭을 기르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이다. 하지만 이 중에도 품위 있고 저속하며 깨끗하고 더러운 등의 차이가 있다. 진실로 농서(農書)를 잘 읽어서 그 좋은 방법을 선택하여 시험해 보되, 색깔과 종류로 구별해 보기도 하고, 홰를 다르게도 만들어 사양(飼養) 관리를 특별히 해서 남의 집닭보다 더 살찌고 더 번식하게 하며, 또 간혹 시를 지어서 닭의 정경을 읊어 그 일로써 그 일을 풀어버리는 것, 이것이 바로 독서한 사람이 양계하는 법이다.”라고 했다. 이왕 닭을 기를 바에야 연구하여 품종을 개량하여 남의 집 닭보다 살찌고 번식력이 강한 닭을 기르고, 여가에 닭 기르는 책인 (鷄經)을 저술하라고 했다.
다산의 글 속에는 행복에 이를 수 있는 비법이 다 들어 있는 듯하다.
미국 어느 대학에서 인생에서 가장 행복하게 사는 법이 무엇인지 조사를 했다. 결과는 ‘공부하는 것’이란 답이 나왔다. 이제 100세 시대가 도래했다고들 한다. 은퇴하고도 50년 가까이 더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다.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할까 고민해야 한다. 제2의 인생을 출발할 때는 될 수 있으면 본인에게 맞는 일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맞는 일이라고 힘들지 않고 고통이 없을 수 없지만, 거뜬히 이겨낼 수 있는 것은 그 일을 좋아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즐거워하고 좋아할 수 있으면 그 어려움은 쉽게 감내할 수 있다. 하고 싶은 일을 찾아 공부하는 것이 인생을 오래 산 사람들이 꼽은 행복의 비결이라 한다. 행복하기 위해 진정 내가 하고 싶었던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 찾아보고 가슴 설레어 보자. 인생이 달라 보일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예로부터 이름을 중시하는 경명(敬名) 사상이 있었다. 따라서 이름은 군사부(君師父)가 아니면 함부로 부를 수 없었다. 이에 따르는 호칭상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웃어른들이 자(字)를 지어주었는데 이렇게 지어진 ‘자’도 친구 등 가까운 사이가 아니면 부를 수 없었으므로, 누구나 편하게 부를 수 있는 호칭이 별도로 필요해 만들어진 것이 호(號)다. 호는 자신이 직접 짓는 자호(自號)가 있고, 친구나 스승이 만들어주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당호(堂號)라 하여 선비들이 사는 집의 호칭, 나아가서 그 집에 살고 있는 주인의 호칭으로 사용한 것도 많다. 먼저 자호의 예로, 우리나라가 배출한 대시인인 미당(未堂) 서정주 선생을 들 수 있다. ‘선진편(先進篇)’을 보면 다음과 같은 얘기가 나온다.
공자께서 지나가시는데, 제자인 자로(子路)가 거문고[瑟]를 타고 있었다. 그런데 그 음악이 군대에서 사용하던 음악으로 북쪽 변방의 살벌한 음색이 있어, 기질이 강맹하였다. 못마땅하게 여긴 공자님께서는 ‘어찌 내 집에서 그런 음악을 연주하는가?’ 하고 나무랐다. 그러자, 그다음부터 다른 제자들이 자로에게 불경스럽게 대하기 시작했고, 이에 공자님께서는 다른 제자들을 타일러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한다.
“자로는 이미 그 경지가 마루에 올라 있다. 다만, 아직 방 안까지 들어오지는 못했을 따름이다(由也 升堂矣. 未入於室也).”
이후, 학문이건 예술이건 어떤 경지를 얘기할 때는, 승당(升堂)과 입실(入室)이란 단어로 표현하기 시작한다. 서정주 선생께서는, 시에 관한 한 자신의 경지는 ‘아직 승당(升堂)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겸손의 의미로 ‘미당(未堂)’이란 단어를 자호로 삼은 것이다.
그다음에는, 당호의 예로 다산(茶山) 정약용의 ‘여유당(與猶堂)’을 들 수 있다. 다산은 자신의 천주교 경력 때문에 많은 박해를 받고 마침내 벼슬을 내어놓고 물러나게 되었다. 잘못하면 또 다른 화를 당할 수도 있는 처지라, 자신의 당호를 노자(老子)의 15장에 나오는 “망설이기를[與兮] 겨울에 살얼음판 건너듯 조심하고, 겁내기를[猶兮] 사방 이웃을 두려워하듯 신중히 하라(여(與)는 코끼리, 유(猶)는 원숭이를 뜻함)”는 내용의 의미를 따서 ‘여유당(與猶堂)’이라 짓고, 조심 또 조심하자는 경구(警句)로 사용했다.
마지막으로, 스승이 지어준 호의 예로 우리가 잘 아는 추사(秋史)를 들 수 있다. 추사의 스승은 북학파(北學派)로 유명한 정유(貞蕤) 박제가(朴齊家)다. 박제가는 연경에 갔을 때 담계(覃溪) 옹방강(翁方綱)의 집에서 강덕량(江德量)이라는 사람을 만난다. 강덕량은 옹방강에게 화도사 사리탑 글씨 탁본의 진본을 준, 유명한 금석학의 대가이자 예서(隸書)에 능한 서예가였다. 그런데 강덕량의 호가 ‘추사(秋史)’였다. 박제가와 강덕량은 서로 마음이 통해 친하게 지냈으며, 박제가는 강덕량이 보여주는 금석 속의 옛 글씨들에 깊이 매료되었다. 연경에서 돌아온 박제가는 16세 소년인 김정희에게 입이 닳도록 강덕량 이야기를 한 뒤, 그를 본받으라는 의미로 ‘추사(秋史)’라는 호를 내린 것으로 보인다. 추사 김정희가 금석학(金石學)과 서예, 특히 그중에서도 예서에 힘쓴 것은 바로 이러한 강추사(江秋史)의 영향인 것으로 생각된다.
조병화(趙炳華, 1921~2003) 시인은 축시(祝詩)를 통해 여성 조각가 석주(石洲) 윤영자(尹英子, 1924~2016)를 이렇게 예찬했다.
당신 머리엔 조물주로부터 위탁받은
창조물로 가득하고
당신 손과 몸엔
그걸 뽑아내는 기술로 충만해 있습니다
그렇게 당신은 평생을
세월 모르는 불멸의 생명으로
예술을 살아오며, 쉴 새 없이
조물주의 위탁을 만들어냈습니다
― 조병화, ‘2001년 회고전에’ 중에서
1947~1949년 윤경렬(尹京烈, 1916~1999) 조각가와 윤효중(尹孝重, 1917~1967) 조각가를 사사하고, 1949년 홍익대학교 미술학부가 창설되던 해에 입학해 우리나라 여성 조각인 1호가 된 분이다. “출발점에서 영향을 끼친 ‘윤경렬’은 차분한 인간성을, ‘윤효중’은 힘찬 의욕과 조각가로서의 정열을 불어넣어주었다”고 평론가는 말한다.
1925년 김복진(金復鎭, 1901~1940)이 동경미술학교 조각과를 졸업하고 이 땅에 돌아와 최초로 근대적 양식의 조각을 시도한 태동기부터 오직 조각예술에 헌신해온 일생이었다. 1953~1954년 국전에서 특선, 1955년 문교부장관상을 수상하면서 조각가로서 탄탄한 입지를 구축했다. 서울의 여러 대학에서 제자들을 양성하고,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이 되었으며, 1973~1989년에는 대전의 목원대학교에서 교수, 학장으로 봉직했다. 브론즈와 대리석이 주조를 이루는 그의 조각 속에는 언제나 모성의 따뜻한 혈류가 흐르는 듯하고, 부드러운 곡선미는 보는 이에게 안온함을 준다. ‘기다림’, ‘情’, ‘愛’, ‘律’, ‘靜’이라는 작품 타이틀이 말하듯 여인의 일상을 차가운 돌이나 쇠붙이 속에서 잔잔히 끄집어내어 형상화했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동상(銅像) 등 여성의 몸으로 힘겨웠을 대형 조형물도 곳곳에 남아 조각예술의 위용을 보여주고 있다. 1989년에 제정된 ‘석주 미술상’은 금년 23회까지 꾸준히 후배 여성 예술인들을 격려하고 있다.
‘愛’라는 제목이 붙은[사진1] 여인의 앉은 모습은 조형미가 빼어날 뿐 아니라, ‘오닉스’라 불리는 강도 높은 노란 대리석을 깎아 우아함을 더하고 있다. 속기(俗氣)라고는 찾을 수 없는 정갈한 여인의 자태도 눈길을 사로잡는다. 대리석 작품 ‘가족’, ‘情’을 소장하고 있던 차에 인사동 화랑에서 마주한 이 작품도 기꺼이 소장하게 되었다. 거실 한편 가구 위에 놓고 그녀 어깨의 리듬까지 완상(玩賞)하고 있다. 그는 2010년의 전시도록 서문 ‘예술, 꺼지지 않는 영혼의 불꽃’에서 “제 인생과 작품이 300년이 지난 지금도 잘 보존돼서, 아름다운 선율과 청아한 음을 내고 있는 바이올린 ‘스트라디바리우스’ 같았으면 합니다”라고 말했다. 지난한 예술의 역정을 한평생 밟아온 그에게 다함없는 존경의 염(念)을 올릴 뿐이다.
예수의 탄생에서 부활까지의 이야기는 많은 예술가의 주제가 되었다. 특히 기독교인이나 천주교인들이라면 그 성스러움이 한층 더할 것이다. 고대 성당이나 교회 건물에는 예수, 제자들의 형상이 벽화, 조각상, 벽의 부조, 광창(光窓)을 영롱하게 장엄한 스테인드글라스에 잘 표현되어 있다. 예수의 탄생과 골고다 언덕으로 십자가를 짊어지고 오르는 고난의 순간, 죽음과 부활, 평화의 나팔 등을 작은 브론즈 촛대 네 면 가득 ‘돋을새김’으로 채운 이 촛대 한 쌍은[사진2] 예사롭지 않은 작품임에 틀림없다. 10여 년 전 유명한 건축가 김원(金洹, 1943~) 선생의 대학로 사무실에서, 이 조각가 이춘만(李春滿, 1941~)의 작품들을 보고 한참을 어안이 벙벙한 채 서 있던 기억이 새롭다. ‘광야의 예수’, ‘부처를 닮은 예수’, ‘십자가 예수’ 등 브론즈 작품들의 범상치 않은 형상이 나를 압도했기 때문이다. 질박한 물성을 살린 그의 조형들은 금속을 헤집고 고뇌와 우수에 가득 찬, 그러나 경건한 눈빛으로 보고 있는 나를 부끄럽게 했다. 서울대 조소과와 이화여대 대학원에서 조각을 전공한 이 여성 조각가는 “붓다상이 가지는 실루엣은 지극히 부드럽고 절제되어 금욕과 무소부재(無所不在)함을 드러내고 있다. 부드러운 곡선과 달리, 그리스도 십자가는 단순한 십자 형태로 평화를 상징하는 기하학적 형상이다. 나는 붓다와 그리스도가 드러내는 서로 이질적인 상징성을 작업에 함께 대입시켰다. 정지되어 있으나 끝없는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두 이질적인 상징성을 인체 안에 뚫어진, 혹은 인체를 감싸고 있는 ‘공간’과 만나도록 시도했다”고 작가일기에 썼다. 작품의 형태와 선의 단순성은 인체의 소멸성과 영원성, 망각과 기억,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에 긴장을 더욱 격렬하게 일으킨다고 평자는 말하고 있다.
천주교 박해의 현장, 한강변 절두산(切頭山)에서 이 작가가 조각 설치한 ‘절두산 순교 기념비’ 앞에 서면, 먹먹한 가슴 안으로 오열이 흐른다.
작품을 수집하고자 하였으나 여의치 않아 김원 선생 사무실만 수시로 드나들곤 했다. 이 브론즈의 촛대 한 쌍은 잘 알고 지내는 미술품 수집가의 집에서 만나게 되었다. 인연으로 여기고 있다. 다행스럽게 그분은 작가의 이력을 잘 모르고 있기에 프랑스 촛대와 쉽게 교환되었다.
외국에서 생활하고 있는 아들네 가족이 휴가차 오는 날 커다란 박달나무 탁자 위, 이 촛대에 황촉(黃燭)을 밝히고, 그림자에 묻혀 흔들리는 ‘천사의 평화의 나팔’을 바라보며, 고난을 이긴 환희의 순간을 느껴볼 것이다.
장수는 누릴 수 있으면 축복이고 누릴 수 없으면 재앙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장수하라는 말이 달갑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나이가 들수록 건강은 나빠지고 삶의 질은 하락한다고 생각하기에, 차라리 병들기 전에 깔끔하게 죽는 게 좋다고 솔직하게 고백하는 사람들도 있다. 국내 장수학계의 전문가인 박상철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뉴바이올로지 전공 석좌교수는 그런 생각이 틀렸다고 지적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백세를 만나봤을 그가 밝히는 얘기는 충격적인 사고의 전환을 요구했다. 고령화시대 백세청풍(百世淸風)의 기운으로 장수하는 사람들의 패러다임을 박 교수의 시각으로 들여다봤다.
박상철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뉴바이올로지 전공 석좌교수는 2000년에서 2009년 사이에 국내 최초로 백세인구를 조사한 결과를 발표해 장수에 대한 인식을 획기적으로 바꾼 인물이다. 그가 백세인구를 조사하게 된 이유는 매우 현실적이고 당연한 인식으로부터 시작됐다.
“사람이 늙으면 신체기능이 점점 떨어지는데 아주 늙었을 때는 어떤 모습일까, 그때가 되어도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고 독립적으로 사는 게 가능할까? 저는 그것이 가장 큰 의문이었습니다.”
‘100세 정도 되면 생활이 형편없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박 교수는 막상 조사를 하면서 강렬한 충격을 받았다.
만나자마자 힘자랑하던 백세인
“전남 곡성에서 만난 홍순갑 어르신은 당시 102세였는데 만나자마자 힘자랑을 했습니다. 마당에서 팔굽혀펴기 100개를 하고 계시더군요. 구례 산동면에 사는 101세 임종철 어르신은 뵈러 갔는데 지게를 메고 오시더군요. 그리고 손자가 100세 어르신을 모시는 게 아니라, 100세인이 쉰 살 손자를 데리고 살고 있었습니다. 더 기가 막힌 분은 쇼지 사부라 박사입니다. 102세 때, 저녁에 식사를 하다가 이 양반이 갑자기 한국말로 ‘한국에서 왔습니까?’ 하고 묻더군요. ‘예’라고 대답하니 ‘그럼 우리 한국어로 이야기합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65세 정년에 딱 퇴직하여 ‘한글을 배워야 한다’ 싶어 한글을 배웠고 80세에는 중국어를 배웠습니다, 100세 때 러시아어를 배웠고 104세 때 브라질에서 이분을 초청했는데 그때부터 포루투칼어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90대가 인터넷을 하는 마을
박 교수가 조사를 시작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만난 국내 장수인들은 대략 250여 명에 이른다. 백세인들의 사례를 보니 나이를 무색하게 만드는 새로운 깨달음이자 분명한 성공 좌표들이었다. 나이가 들어도 젊었을 때와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은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새로운 공동체마저 만들고 있었다.
“도쿠시마에 가미가쓰라는 마을이 있습니다. 이 마을에,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에 농업학교를 막 졸업한 젊은 사람이 농협의 직원으로 들어갑니다. 가서 보니 마을 주민이 2000명인데 65세 이상이 1000명이 넘었던 겁니다. 50% 이상의 인구가 노인인 초고령 마을이었습니다. 그런데 노인들은 자주 티격태격 싸웠고 일을 하지 않으면서 손쉽게 얻으려고만 했습니다. 모습이 보기 좋지 않아 ‘우리 일을 합시다’라고 말하며 사람들을 설득했습니다. ‘도쿠시마 산속 마을에 있는 재료들로 일본 요리 장식용 패키지를 만들자’는 게 그의 생각이었습니다.”
물론 동네 어른들이 단번에 그런 일을 하겠다고 했을 리가 없다. 겨우 3명이 시작했는데 이게 팔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물건이 팔리자 할머니들이 서로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주문을 뺏어가려고 했던 거죠. 젊은 사람이 70~80세 사람들의 싸움을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그래서 이 사람이 꾀를 냈죠. ‘주문은 인터넷으로 받아가시오’라고. 그러자 처음에는 어르신들이 무슨 인터넷이냐며 난리를 쳤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딱 버텼고, 2년이 지나니 70~90대 마을 주민들이 컴퓨터를 하게 됐어요. 세계 최고령 인터넷 마을이 돼버린 거죠. 그렇게 해서 마을이 발전한 지 30년 이상이 됐습니다. 다른 지역에서 흉내를 내려고 해도 게임이 되지 않습니다.”
‘고령화 사회가 되면 돈이 많이 든다.’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하며 걱정하고 있다. 박 교수는 반대로 생각한다. 저비용 장수사회를 만들면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이다. 장수인이 건강하게 일하며 생산 인력으로 생활할 수 있으면 되는 일이다. 앞서 소개된 고령화 마을의 기업화가 그 좋은 모델이란다. 그는 확신에 차서 말했다.
슈퍼 노인의 시대가 오고 있다
“‘나이가 들어도 잘 살 수 있는가?’ 있습니다. ‘나이가 들어도 당당할 수 있는가?’ 있습니다. 우리가 나이가 들면 생기는 많은 문제점들만을 생각했었는데 위에서 소개한 분들을 보면 안 그렇습니다. 그러니 패러다임을 바꿀 때가 온 거예요. ‘패러다임 시프트(어떤 한 시대 사람들의 견해나 사고를 근본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테두리로서의 이론적인 틀이나 체계)’가 일어나야 합니다.”
박 교수는 ‘지금 놀라운 시대가 오고 있다’고 강조했다. ‘슈퍼 노인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일본이나 유럽에는 100세인의 육상대회가 생겼습니다. 영국의 파우자 싱은 102세의 나이에 마라톤 풀코스를 8시간에 걸쳐 완주했습니다. 그는 단축 마라톤인 10km를 1시간 30분 만에 완주하기도 했습니다. 나가오카 미에코라는 100세 할머니는 수영 마라톤 1500m를 완주했습니다. 미국 돌푸드 사의 데이비드 머독 회장은 94세 때, 캘리포니아의 자기 목장에서 아침마다 한 시간씩 말을 타고 다녔습니다. 지금은 99세인데 아직 회사를 경영하고 있습니다.”
100세 장수가 보편화되고 있는 현실은 여러 통계 지표로도 증명되고 있다.
제대로 장수하며 일하는 사람들
빠른 속도로 인간의 평균수명이 늘어나고 있다. 평균 수명이란 것은 어디까지 갈 것이냐. 실제 사람들이 많이 죽는 나이인 최빈사망연령은 0세부터 100세까지 중에서 사람이 가장 많이 사망하는 연령의 개념으로 평균수명보다 더 길다. 최빈사망연령은 1950년부터 계속 늘어나고 있다. 우리나라 평균수명은 82세, 최빈사망연령은 90세가 넘었다. 이제 고령사회에서는 실제 사람들이 제일 많이 죽는 나이가 중요하다.
“최빈사망연령 표준편차를 보면 옛날에는 10년 정도였는데 지금은 6년입니다. 죽어가는 사람들 나이의 표준편차가 작아진다는 것은 죽는 사람들 나이의 차이가 없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장수의 보편화’가 이뤄지고 있는 겁니다. 옛날에는 특별한 사람들이 장수했는데 지금은 ‘somebody’가 아닌 ‘everybody’입니다.”
100세가 넘는 인구는 일본이 6만 명이지만 우리나라는 3000여 명이다. 미국은 7만 명, 중국은 5만 명 정도다.
단순히 나이를 먹는 게 아니라 건강한 노인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도 주목할 지표다.
“옛날에는 70이라는 나이는 죽어야 할 나이였죠, 지금 70이란 나이는 일을 못해서 안달 난 나이입니다, 저도 70입니다. 기가 막힌 이야기죠. 건강한 노인의 숫자가 압도적으로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죠.”
그는 건강한 노인에게 ‘dependent Life(의존적인 삶)’를 가지게 하지 말고 ‘Independent(독립된)’할 수 있게끔 제도적인 문제를 바꾸어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제대로 장수시켜버리자.’ 그러면 병원비가 안 듭니다. ‘장수인은 일을 시켜버리자.’ 그러면 복지비용도 안 듭니다. 이게 제 주장입니다.”
무조건 부지런하라
박 교수는 사람이 아무리 늙어도 변하지 않는 두 가지가 있다고 말한다.
“첫째는 그 사람의 목소리입니다. 20대 때 헤어진 애인이라도 딱 들으면 ‘아, 그녀’라고 생각이 납니다. 그다음에 변하지 않는 것은 ‘성격’, 즉 마음 씀씀이입니다.”
박 교수가 제시한 사례들 덕분에 백세가 되어도 인생은 젊을 때와 다를 바 없이 살 수 있다는 것은 잘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제는 구체적인 방법을 들어봐야 할 때다. 건강하게 장수하기 위한 기본적인 방법론을 묻자, 박 교수는 다산 정약용의 이야기를 꺼냈다.
“다산 선생이 18년간 유배생활을 하면서 동네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그때 만난 사람이 황상(黃裳, 1788~1870)이란 사람입니다. 이분이 글을 잘 쓰셨는데, 라는 문집에 다산 선생과의 일화가 나옵니다. 다산 선생이 이분에게 ‘공부하라’고 말해서, ‘내가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할 수 있습니까?’ 물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다산 선생이 한 말씀이 세 글자였습니다. ‘부지런해라, 부지런해라, 부지런해라.’ 사실 장수라는 것도 이 3근계(勤戒)가 그대로 적용됩니다. 장수도 그냥 이뤄지지 않습니다. 건강장수라는 것은 다 부지런해야 일어날 수 있습니다. 많은 장수인들에 대해 연구할 때, 무엇을 먹느냐, 어떻게 생활하느냐가 주로 거론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전 세계 공통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장수는 성실한 사람, 부지런한 사람의 것이었습니다.”
백세라도 사랑할 수 있는 세상을 꿈꿔라
부지런하라는 것은 무언가를 실행하라는 말과도 같다. 박 교수는 그 실행 부분을 간단하게 세 가지로 나눠서 설명했다.
“‘무엇이든 해버려라.’ 나이가 들었다고 핑계대지 마라. 못할 이유가 뭐 있냐. 그리고 나이가 들면 ‘받으려고 하지 마라, 줘라.’ 마지막으로 나이가 들면 ‘배워야 한다.’ 배워야 줄 것도 생기고 할 것도 생긴다.”
‘하자, 주자, 배우자. Do it, Give it, Prepare it. 行之 與之 習之.’ 그가 던지는 장수시대의 실천강령이다.
백세인들에게서 ‘움직이고(動), 적응하고(應), 머리를 쓰며(判), 느끼고(感), 절제(適)’라는 공통점이 발견됐다고 한다. 그는 “장수를 위해서는 유전자, 성격, 환경 등의 자연적 요인도 중요하지만 운동, 영양, 관계, 배움, 참여 등의 생활습관이 특히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 중 ‘관계’가 가장 중요한 비결인 것 같다며 여기에는 부지런함이 포함된다고 했다. 결국 나이가 들수록 의존적인 사람이 되지 말고 스스로 독립하고 사회에 기여하는 존재가 되는 게 중요하다.
“백세인들 중 고혈압, 관절염, 위장병이 있는 분들이 많아요. 그런데 당뇨는 거의 없어요. 당뇨는 생활습관 질환인데, 결국 장수와 생활습관도 연관이 있다는 거죠.”
“98세에 시집을 내서 100만 권이 팔렸다는 시바타 도요 할머니가 쓰신 시 중 ‘비밀’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99살이라도 사랑도 하는 거야, 꿈도 꿔, 구름도 타는 거야’라고 말합니다. 100세가 돼도 연애하면 안 되겠습니까? 김형석 교수가 올해 한국 나이로 98세이신데, ‘뭐가 가장 하고 싶으냐?’ 물었더니 ‘연애하고 싶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런 마음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박상철 (朴相哲) 교수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생화학 전공으로 의학박사학위를 받았고 1980년부터 2011년까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생화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과학기술부 우수 연구센터인 노화세포사멸연구센터와 서울대학교 노화고령사회연구소 소장을 역임했다. 가천의대, 이길여 암·당뇨연구원장을 거쳐 현재 대구경북과학기술원 석좌교수, 서울대학교 노화고령사회연구소 고문으로 있다. 주요 저서로 등이 있다.
명칭이 항상 헛갈리는 곳! 은평한옥역사박물관이 맞는지 아니면 은평역사한옥박물관이 제대로 된 이름인지? 여러분은 어떻게들 알고 계시는지요? 오늘은 작심하고 그를 만나러 왔다. 그러나 그를 만나려면 삼가야 할 순서가 있다는 생각이다. 먼저 싸리문을 열고나 보자.
조선의 3대로를 아시는가? 큰길을 따라 서발, 북발, 남발의 삼발로가 조직되었으니 그중 한양에서 의주까지의 서로(서발)는 기발(말을 타고 이동)에 해당되는데, 바로 이곳 박물관 인근을 경유했던 것이다(구파발, 지명의 유래). 때문에 입구에서 처음으로 만나는 조선의 역참제도에 대한 내용은 빼놓을 수 없을 터이다.
유리판 아래로 생생한 발굴 현장을 재현해놓은 김자근동 묘를 스릴 있게 체험하는 잔재미도 느껴보며(현재 유적 발굴 과정에 있는 서울 은평구 이말산에서 발굴됨), 세종의 6남 금성대군(단종 복위에 가담했다가 32세의 나이로 죽임을 당함)을 모신 사당인 금성당(실제는 은평뉴타운 우물골 소재) 코너에선 무속신앙, 즉 샤머니즘에 잠시 빠져보기도 한다. 2층의 한옥 상설전시관으로 오르다 보면 계단길 벽면으로 전국의 한옥촌을 사진으로 만나볼 수 있으며, 한복체험 코너에선 끼리끼리 방문 인증샷도 남길 수 있다. 멀리서 온 객을 위한 대접이 이만하면 융숭한 편이다. 자, 이제 헛기침 한번 해볼 차례다. 그가 버선발로 반겨줄지 모를 일이다.
노을빛 치마에 새긴 가족사랑
슬하에 자식 아홉을 두었던 그, 그러나 그중에 여섯이 그만 병사하고 마는데 자식을 먼저 보내는 어버이의 그 마음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을까? 어디 그뿐인가?
“누리령 산봉우리는 바위가 우뚝우뚝, 나그네 뿌린 눈물로 언제나 젖어 있네.
월남리로 고개 돌려 월출산을 보지 말게, 봉우리 봉우리마다 어쩌면 그리도 도봉산 같을까.” 유배길에 전남 영암의 월출산을 바라보며 두고 온 집과 가족을 그렸을 그의 마음이 그대로 묻어나 있는 시다. 그러나 그는 지금 가는 이 길이 무려 18년간이나 지속되리라고 짐작조차 했을까? 참으로 헛헛한 독백이 아닐 수 없다.
“주인 없는 초당엔 적막만이 가득하고, 처마 끝에 방울방울 낙수지어 반기는가?”
지금으로부터 약 20여 년 전, 친구와 함께 초당에 들린 적이 있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길을 더듬어 그를 만나러 갔던 그 길, 한적한 초당 대청에 걸터앉아 낙수에 손 비비며 그가 만들었다는 연못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던 기억이 오버랩된다.
부부간의 애틋함, 자식을 향한 아비의 마음은 옛사람이라고 다를 리 없고 오히려 더하면 더했지 뺄셈은 전혀 아니라는 생각이다. 유배생활을 하던 그는 부인이 보내온 치맛자락을 재단하여 두 아들과 그 후손들이 간직하도록 아비의 당부를 글로 표현한 서첩을 만드는데 그중 3첩이 남아 있다(국립민속박물관 소장). 또 남은 천으로는 시집가는 딸에게 매화나무 가지 위에 두 마리 새가 앉아 있는 '매화병제도'를 그려줌으로써 다복한 가정을 꾸미고 집안이 번창하기를 기원했다. 바로 아버지의 이름으로.
“내가 강진에서 수년간 유배 중일 때, 부인 홍씨가 해진 여섯 폭 비단 치마를 보내왔다. 세월이 오래 흘러 붉은색이 퇴색되었다. 네 첩의 글을 만들어 두 아들에게 보내고, 남은 천으로 작게 장정하여 딸아이에게 보낸다.”
짐작하셨겠지만 오늘 필자가 만나러 온 분은 다산 정약용 선생이다.
하피첩, 은평에 오다
은 노을 하, 치마 피, 엮을 첩의 의미로 부인이 시집올 때 입고 온 붉은 치마가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색이 바랬음을 은유한 것으로 지어미에 대한 지아비로서의 마음이 절절하게 느껴진다. 그리 넓지도 않고 그렇다고 비좁지도 않은 기획전시실, 그 공간의 범위로는 감히 재단할 수 없는 선생의 마음과 정신은 결국 오랜 유배생활을 이겨내고 고향(남양주시 능내리)의 품으로 돌아오게 되고, 만년에도 저술을 놓지 않았던 선생은 회혼일(결혼 60주년 기념일)에 그만 세상을 떠난다. 생의 마직막엔 곁을 지켜준 부인이 있었으니 선생의 임종은 외롭지 않았으리라. , , 등 다산 사상의 핵심은 사회 현실을 바탕으로 제도와 법을 맞도록 바꾸자는 것이 그 골자로 정치 및 행정체제, 형률제도, 경제제도, 생산기술, 군사제도 등 제반 영역을 포괄하는 것이다. 선생이 저술한 책은 모두 503권이라고 한다. 인고의 세월 동안, 그리고 말년에도 평생 붓을 놓지 않았던 선생!
나는 어떤 남편이고 어떤 아버지인가? 또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본 기획전은 6월 11일까지 이어지며 문의는 은평역사한옥박물관으로 하면 된다.
윤문상(59) 전 교육방송공사(EBS) 부사장은 대한민국의 숨 가쁜 교육현장을 유아교육에서부터 초·중·고 교육에 이르기까지 생생하게 담아온 현장 PD 출신이다. 그는 2016년 2월 교육방송 부사장을 퇴직하고 새로운 인생 2막을 준비하고 있다. 그의 인생 2막 계획은 6개월씩 타국에서 생활인으로 살아보기다. 이를 통해 “인생 리타이어가 아닌 리셋을 해보겠다”는 계획이다. 2016년 하반기는 대만에서 생활했고(4~10월), 2017년 상반기는 베트남에서 한국어와 언론학을 강의하며 거주할 예정이다. 마침 방학을 틈타 잠깐 한국에 머물고 있는 그에게 인터뷰를 청했다.
김성회 CEO리더십연구소장
퇴직 후 여행은 많은 사람들이 세우는 계획이지요. 관광이 아닌 6개월씩 다른 나라에서 살아보기식 ‘생활 거주’는 흔치 않습니다.
“6개월씩 타국에서 살아보기 프로젝트는 나를 객관적으로 파악하기 위한 강제적 공간 이동을 해보자는 의미에서 시작됐어요. 단지 타이어를 바꿔 끼는 리타이어가 아니라 처음부터 새롭게 리셋하고 싶었어요. 의식을 바꾸기 위해선 본인의 자발적 노력뿐 아니라 공간을 바꾸는 것도 필요하다는 생각에서요. 타국 거주의 강제적(?) 환경 설정으로 리셋한 것이지요. 버스를 타는 사람은 버스 안에선 자세히 볼 수 있지만 바깥 풍경은 자세히 보지 못합니다. 달리는 버스 밖에서 보면 안은 들여다보지 못하지만 객관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객관적 보기가 절실히 필요했던 이유가 있었습니까?
“퇴직 후 인생 2막 하면 기존에 하던 것의 연장선으로 강도-속도만 늦추는 것을 말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저는 과거의 경험과 지식을 연장하는 수준이 아니라 완전히 새롭게 시작하고 싶었습니다. 앞으로도 30, 40년 이상 일을 하고 살아가야 할 것이기에 ‘새로운 시작은 새 무대’에서 시작하고 싶었습니다. 익숙한 서울의 아파트 방에 앉아서 머리로만 생각을 하는 것과 말 설고 사람 설고 풍경 낯선 외국에서 생각하는 것은 다르잖아요. 한국에선 아무래도 한계가 있어요. 반면 외국에 갔을 때는 친한 사람도 없고, 언어와 문화 등 많이 불편하지만 원점에서 시작해 나를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보게 되지요. 외국에서 생활인으로서 살아보니 단지 출장이나 관광으로 접하던 것과는 달리 새로운 것을 느끼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본질적으로 나에 대해서도 깊이 성찰해보게 되더군요.”
리타이어와 리셋은 어떻게 다른가요?
“리셋은 한마디로 원점에서부터 새롭게 하는 적극적, 원초적 환골탈태라고나 할까요. 리타이어가 같은 트랙에서 속도만 늦추는 소극적 의미라면 리셋은 속도와 방향, 관점 이것들을 총체적으로 합쳐 객관적으로 보자는 의미예요. 그러기 위해 내가 나를 객관적으로 보는 것이 필요하지요. 한국이라는 익숙한 환경에선 내가 잘 아는 사람, 나를 잘 아는 사람만 만나게 돼 나를 있는 그대로 파악하기 힘들어요. 객관적으로 본다는 것은 조직 브랜드, 계급장을 떼고 자연인으로서 자신만의 정체성, 주제 파악을 하는 것입니다.”
리셋은 의식과 환경을 함께 바꾸는 것이군요. 월화수목금금 열정적으로 일한 분들일수록 ‘관성의 법칙’에서 벗어나기 힘들어하시던데요.
“하하. 군대 속담에 ‘졸병보다 제대병이 더 마른다’는 말이 있는데요. 퇴직자들에게 갑자기 시간이 주어지면 자율적 관리를 하지 못해요. 제 경우엔 마인드 세팅을 이렇게 했어요. ‘브랜드 없는 사무실에서 봉급 받지 않고 일할 뿐이다. 초조해하지도 말고, 시간에 끌려가지도 말고 시간을 자유자재로 끌었다 놓았다 하는 여유’를 갖자고요. 현직에 있을 때는 시간에 나를 맞췄지만, 이제 나에게 시간을 맞추자고요. 여기에 환경 리셋 작업으로 ‘6개월 낯선 국가에서 살아보기ʼ를 더한 것이고요.”
‘살아보기’ 리셋 경험 국가로 베트남과 대만 등을 선택한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기본적으로는 한국어, 언론학을 강의하며 생활인으로서 거주 환경이 마련될 수 있는 곳을 골랐지요. 엄밀히 말해선 자기성찰뿐 아니라 세상 관찰에도 목적이 있습니다. 인생 2막 프로젝트를 위한 사전 심층답사라고나 할까요. 4차 산업혁명 시대가 도래하는데 한 템포, 아니 반 템포라도 빨리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하지 않으면 힘은 두 배가 들면서 성과는 반 토막이기 쉽습니다. 아시아에서 사업을 할 경우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미리 준비하는 것이지요. 예를 들면 ‘호치민이라는 도시가 이런 발전 단계에 있는데 미래에는 어떻게 바뀔까, 무슨 씨앗을 뿌리고 어떻게 활용해야 할까’에 안테나를 세우고 관찰하고 통찰해보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노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미리 생각하고 준비하는 것이지요. 앞으로 기회와 잠재력의 나라인 탄자니아나 가나 등 아프리카 대륙으로도 가보고 싶습니다.
‘집 떠나면 고생’이란 말도 있지 않습니까. 막상 타국에서 사실 때 생각과 생활이 많이 달랐을 것도 같습니다만…
“외국에 살아보니 일단 퇴직했다는 사실을 저절로 잊어버리게 되더군요. 낯설고 어색한 환경에서 하나부터 열까지 스스로 해결해야 하니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었어요. 대만에선 대학에서 언론학과 특강을 하는 한편 6개월간 랭귀지센터에서 중국어 공부를 했습니다. 말하자면 선생님과 학생 역할을 동시에 한 셈이지요. 큰 사무실, 비서와 기사 딸린 임원생활을 하다가 작은 책상에서 중국어 기초부터 배우고, 북적거리는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하나부터 열까지 다 아내와 함께 해내야 했지요. 불편하기도 했지만 신선하다는 느낌이 더 컸어요. 특히 젊은이들과 함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이제는 대만을 가이드 없이 자유자재로 돌아다닐 수 있으니 그것만 해도 큰 소득 아닙니까. 성장과 발전이라는 불편함을 통해 익숙함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큰 소득은 아내와 동지애로 끈끈하게 뭉치게 된 것입니다. 이역만리에서 한 지붕 아래 같이 사는 네이티브 한국인은 우리 둘밖에 없으니 무슨 일을 하더라도 의논하고 의지할 수밖에 없더군요(웃음).”
윤 부사장의 지인들은 그의 성공력을 넘어 성장력의 원천으로 독서를 꼽는다. 동기들 중 차장, 부장 승진은 가장 늦었지만, 임원 승진은 제일 빨랐던 역전의 힘은 바로 독서력에서 나왔다. 낯선 것을 이질감보다는 호기심으로 수용했고 그 기저에는 책이 자리한다.
신입사원 시절부터 월급의 10%는 무조건 책 사는 데 쓰셨다면서요.
“네. 솔직히 말하면 직장생활 초년병 시절 10년간은 불평쟁이였어요. 늘 사표 던질 타이밍만 재며 불만이 가득한 채로 보냈어요. 그러다가 ‘이래선 안 되겠다’ 변화해야겠다고 결심을 하게 됐는데 책이 계기가 됐어요. 당시 월급이 40만원 정도였는데 4만~5만원은 꼭 책 사는 데 썼지요. 독서에 빠지다 보니 현재의 불만을 한 걸음 뒤에서 보고, 또 한 치 더 깊이 보게 되더군요. 사고력, 판단력을 넘어 힐링의 치유력을 줬다고나 할까요. 상계동 집에서 서초동 직장까지 두 시간 이상 지하철을 타고 다녔는데, 매일매일 정거장 숫자나 세면서 가는 것이 참 지루했습니다. 어느 날 문득 지하철을 도서관으로 만들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후 독서삼매에 빠져 지하철역을 몇 정거장 후딱 넘길 때의 기쁨은 뭐라고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제 인생에 영향을 끼친 , , 등 수백 권은 20년 동안 모두 지하철에서 읽은 책들이랍니다. 나중엔 누군가 집에 와서 다양한 책들을 보더니 ‘교수 같긴 한데 전공을 모르겠다’고 말하더군요(웃음).”
독서삼매에 빠졌던 이유가 궁금합니다.
“PD란 직업의 숙명 같아요. 여러 분야의 사람을 만나야 하는 직업상 필요에 의해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누구를 만나러 갈 때 그 사람과 관련한 책을 미리 읽는 것이 기본 예의란 생각을 한 게 독서의 직접적 동기였습니다. 라는 책은 과학 관련 내용이라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어려운 용어나 이론이 나올 때마다 그 부분을 쉽게 풀어쓴 책들을 다시 사서 읽으면서 진도를 나갔지요. 1년 뒤에 보니 관련 서적 50권 정도를 읽었더라고요. 극구 언론을 기피해 30분 내에 인터뷰를 끝내는 조건으로 겨우 인터뷰를 했던 어느 교육 전문가와 서로 좋아하는 책 관련 대화를 하다가 친해져 6시간 정도 대화를 했던 일도 있습니다. 책은 사교력뿐 아니라 판단력, 자신감도 키워주지요. 위로 올라갈수록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예측력과 큰 그림에 대한 파악력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윤 부사장은 ‘독서력은 퇴직 이후에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퇴직자들의 공통 트라우마는 ‘할 일이 사라졌다’는 목표 상실이다. 거기서 스트레스가 생긴다. 이럴 때 관심 주제를 정하고 2주 내에 관련 책 몇 권 읽기 등으로 목표 설정을 해놓으면 성취감뿐 아니라 정신건강과 목표관리에도 좋다”며 책은 시간 관리, 스트레스 관리의 해결책이자 좋은 친구라고 덧붙였다.
최근 1년 새 부모상을 잇달아 치렀다는 그는 삶과 죽음에 대해 깊이 사유하며 ‘어떻게 죽을 것인가’는 곧 ‘어떻게 살 것인가’와 통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삶의 마지막을 미리 생각해봄으로써 남아 있는 현실을 좀 더 소중하게 느끼는 계기가 됐다고 한다.
죽음에 대한 준비란 어떤 의미인가요?
“‘죽음’ 하면 먼 일이라 생각하기 쉬워요. 그리고 ‘임종의 사전 준비’ 하면 상조회사, 묘자리 예약 등을 퍼뜩 떠올리는데요. 진정한 죽음의 준비는 세대 간 대화라는 생각을 했어요. ‘아버지(할아버지)는 누구이고, 어떤 고민을 해왔으며, 이렇게 살아왔다’를 책이든 뭐든 다양한 형식을 통해 들려주고 공유하는 것이지요. 어느 학교, 어느 직장 어느 직급까지 올라갔다는 이력서 상의 궤적을 넘어 한 인간 고유의 고민, 즉 삶의 흔적을 나눠주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본인에 대한 파악부터가 필요해요. 후손이든 누구든 대화를 나누려면 스스로를 알아야 하지 않겠어요. 기억을 되살리고 기록을 남기는 것, 생을 마무리하는 인간의 의무이자 권리라는 생각을 부쩍 하고 있습니다.”
존경받는 어른이란 무엇일까요?
“‘노인 하나가 사라지면 도서관 하나가 사라지는 것과 같다’는 말이 생긴 것은 그만큼 지혜의 기록화가 필요하다는 의미의 반증이라고 봅니다. 주관적 기억이 아니라 객관적 기록으로 남길 필요가 있다는 거지요. 우리나라가 현재의 부강한 국가가 된 것은 그냥 저절로 된 것이 아닙니다. 이 과정을 경험하지 못한 다른 세대, 다른 국가에게 이 무형의 자산을 무형의 기억이 아니라 유형의 기억으로 알려야 합니다.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든 기성세대는 충분히 자신감과 자부심을 가질 근거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조선 후기 실학자 다산 정약용이 유배생활 18년 동안 500여 권의 저서를 남긴 것은 사헌부 기록만으로 세상에 알려지는 것보다, 자신을 정확히 알리고 싶다는 강한 욕구 때문이었다”며 “일부 젊은 세대들이 기성세대를 꼰대라고 무시하고 폄하하는 것은 ‘잔소리만 많고 구체적이고 객관적인 기록’은 남기지 않은 원인일 수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마지막 질문인데요. 인생 2막의 기준을 속도보다는 방향에 두고 말씀하시는 것이 인상적입니다.
“하하. 네, 맞습니다. ‘거리두기’를 통해 보다 객관적으로 보고,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을 깊이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진짜 의미가 있고 재미있었던 것이 무엇이었나, 어떻게 살아야 하나 돌아보고 있습니다. 생각해보니 중요한 것은 시설이 잘된 회의실에서 하는 대규모 회의도, 큰 예산이 들어가는 사업도 아니더군요. 의견이 맞는 사람들과 가치 있는 성과를 하나하나 이뤄간 것이었습니다. 인생 2막은 일의 규모나 외형보다는 삶의 질에 무게중심을 두고 싶습니다. 진정한 삶의 성과는 ‘어디까지 올라갔나’보다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을 했는가’에 있지 않겠습니까.”
점심에 만나 시작된 인터뷰가 끝났을 때는 어느덧 땅거미가 지는 저녁시간이었다. 귀갓길, 저 멀리 있는 입간판 글씨가 선명하게 보이고, 코앞의 버스정류장 노선안내 글씨가 희미하게 보이면서 읽히지 않았다. 요즘 부쩍 심해진 원시(遠視)의 증상이었다. 예전이라면 ‘노안(老眼)’의 시그널로 심란했을 텐데 문득 마음이 편안해졌다. 나이듦이란 가까이 보기보다 멀리 보기의 장점, 이점이 있는 것 아니겠는가. 무엇이 정말 중요한지는 한 발짝 떨어져 거리두기, 멀리 보기를 할 때 보다 더 잘 보일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김성회 CEO리더십연구소 소장
연세대학교 졸업. 경영학 박사.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겸임교수. 리더십 스토리텔러. 세계일보에서 CEO 인터뷰 전문기자로 활약했다. 세계경영연구원(IGM)과 삼성경제연구소 등에서 강의했다. 저서로는 , , 등이 있다.
경기도 남양주시에는 다산 정약용의 유적지가 있다. 유적지 내에는 그의 생가인 여유당과 선생의 묘가 있고 다산 문화 관, 다산 기념관등이 있다. 참다운 지식인을 대표로 하는 남양주시가 교육의 도시로 거듭난다.
다산 정약용, 한국학의 바다라 일컫는 조선후기 최고 ‘실학의 집대성자’라고도 한다. 19세기초 실학파의 철학적인 입장을 확립한 다산은 ‘다산 학’이라는 거대한 실학의 봉우리인 자신만의 독창적인 학문을 완성한다. 또한 천연두 예방법에 대한 체계적인 글을 썼던 의사이기도 하지만 르네상스적인 인물 이었다고 한다. 그의 관심은 놀라울 정도로 다양한 영역과 주제들에 이르렀다.
민중의 편에 섰던 그는 선구적인 사상가이며 저술가였으며 법학 가였다. 시인이면서 음악학자 또한 조선의 차 문화에 활력을 일으킨 조선 차의 연구자로 풍류를 즐기기도 했다. 그러나 다산은 단지 꿈꾸는 자만이 아니고 구체적이고 실천 가능한 해결책을 모색했다. 결국 오랜 세월 속에서 각고의 노력과 탐색으로 독창적이고 새로운 사회에 대한 비전이 탄생할 수가 있었다고 한다.
남양주시의 다산 문화 관에는 그에 대한 많은 저서들로 간단한 소개가 있으며 직접 체험 가능한 체험학습도 있다. 다산 기념관에는 수원 성 축조 과정에 쓰였던 거중기, 녹로 그리고 유배생활을 했던 강진, 다산 초당의 축소 모형 등이 전시되어 그의 위대한 업적들을 한눈에 볼 수가 있다.
그는 출세가도를 달리던 명문가의 고위관료였지만 반대파의 모함으로 억울하게 남녘의 외진 곳에 유배를 간다. 그러나 신세한탄이나 절망을 하지 않으며 오히려 어떠한 굴욕과 탄압 속에서도 용모를 단정히 하고 의로움에 기 죽지 않으며 마음만은 자유를 만끽하며 당당하게 살아간다.
산수를 벗삼아 하염없이 시간을 보내거나, 때로는 핍박을 받는 백성들을 향한 한없는 사랑으로 펼쳐낸 국가의 총체적 개혁서인 ‘경세유표’와 ‘목민심서’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익숙하게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그러나 부패하고 썩어가는 국가의 현실을 새롭게 바꾸고, 허물어진 주춧돌을 단단히 하는데 평생을 바친 다산에게 돌아온 것은 18년동안의 혹독한 유배생활뿐이었다.
그는 고향에서는 죽기 전까지 ‘먼 미래를 기다린다’는 사암(俟菴)이라는 호를 좋아했다고 한다. 그가 끔찍이 사랑했던 두 아들에게 보냈던 편지의 내용을 기술해본다.
“지식인이 세상에 전하려고 책을 펴내는 일은 단 한 사람이라도 그 책의 값어치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으면 해서이다. 나머지 욕하는 사람들이야 신경 쓸 것 없다. 만약 내 책을 알아주는 이가 있다면 너희들은 그가 나이가 많은 사람이라면 아버지처럼 섬기고, 설령 적대시하던 사람이라도 그와 결의형제를 맺어야 한다.”
이러한 내용이 근간이 되어 남양주시가 교육의 도시, 문화의 도시로 거듭나기를 기대해본다.
올해 7월 초에,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빌 게이츠(60)와 ‘투자의 달인’ 워런 버핏(85) 버크셔 해서웨이 회장의 우정이 화제가 됐습니다. 게이츠가 블로그에 올린 글 ‘배움과 웃음의 25년’을 통해 아버지뻘인 버핏과의 인연을 소개하자 많은 사람들이 억만장자들의 사귐과 도타운 우정에 감동했습니다.
버핏을 처음 만난 1991년 7월 5일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게이츠는 그가 자신과 아내 멜린다의 삶을 모든 면에서 좋게 바꿔놓았으며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이 웃을 수 있게 도와줬다고 말했습니다. ‘아버지 같은 존재’ 버핏처럼 사려 깊고 친절한 친구를 둔 것은 행운이라는 말도 했습니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워런이라면 어떻게 할까?” 자문해보면 최선의 해답이 나온다고 합니다. 25세의 나이 차는 두 사람에게 아무 문제도 되지 않습니다.
독일 바이마르시의 바이마르 극장 앞에는 괴테(1749~1832)와 실러(1759~1805)의 동상이 다정하게 서 있습니다. 괴테가 열 살 많고 성장배경과 문학관도 판이했지만 둘은 격의 없이 지냈고, 서로 다르기 때문에 서로 끊임없이 자극을 주면서 세계문학사에 불멸의 업적을 남겼습니다. 특히 괴테는 실러를 많이 도왔습니다.
퇴계 이황(1501~1570)과 고봉 기대승(1527~1572)은 26세나 차이가 났지만, 1558년부터 퇴계가 타계한 1570년까지 12년 동안 사단칠정론을 중심으로 편지를 주고받으며 세계 유학사에 길이 남을 논쟁과 우정을 펼쳤습니다.
우리는 흔히 친구라고 말하지만 이와 비슷한 단어에 붕우(朋友) 벗 동무가 있습니다. 지기(知己)라는 말도 친구와 뜻은 같습니다. 그런데 朋은 뭐고 友는 뭔가? 원래 朋은 동사(同師), 스승이 같은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복수, 집단개념이 들어 있는 단어입니다. 友는 지동(志同), 뜻이 같은 사람이라는 의미로 만들어진 말이라고 합니다. 특히 屮(왼손 좌)+又(오른소 우) 형태로 이루어진 友라는 글자는 두 손이 서로 협력하듯 친하게 지내며 도우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벗과 동무는 순수한 우리말이지만, 동무는 잘 아시다시피 공산당이 사용하면서 거의 죽은 말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동무는 참 좋은 말입니다. 글동무 길동무 꿈동무 노래동무 놀이동무 배움동무 소꿉동무 씨동무 어깨동무 책동무... “어깨동무 씨동무”로 시작되는 전래동요에서 씨동무는 씨앗처럼 소중한 동무라는 뜻입니다. 농사 지어 먹고살던 농경시대에 씨앗처럼 소중한 것은 없었겠지요. 지금 시니어들에게는 산행동무 골프동무 당구동무 술동무 여행동무 낚시동무 서예동무 사이클동무 조깅동무 트레킹동무, 이런 동무들이 있을 것입니다.
뜻이 같고 마음이 통하면 자꾸 보고 싶어집니다. 두보의 시에 나오는 춘수모운(春樹暮雲), ‘봄날의 나무와 해질 무렵의 구름’이라는 말이 멀리 있는 벗을 그리는 마음을 담은 성어로 널리 쓰이고 있습니다. 당 시인 위응물(韋應物)의 ‘추야기구원외(秋夜寄邱員外)’도 음미할 만합니다. 동무생각을 잘 표현한 아주 유명한 시입니다. “懷君屬秋夜(회군속추야) 이 가을밤 그대 그리워 散步咏凉天(산보영량천) 서늘한 날씨에 거닐며 시를 읊네. 山空松子落(산공송자락) 빈 산에 솔방울 떨어지니 幽人應未眠(유인응미면) 숨어사는 그대도 잠 못 이루겠지.”
논어 첫 대목의 공자 말씀 중 두 번째 문장이 바로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유붕자원방래 불역낙호), “벗이 먼 곳에서 찾아오니 즐겁지 아니한가” 아닙니까?
연암 박지원은 “벗이란 동거하지 않는 아내요, 동기가 아닌 아우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는 “벗은 제2의 나”라는 말도 했고, 담헌 홍대용에게는 “그대와 나눈 대화가 10년 독서보다 낫소”라는 말도 했습니다.
소중한 벗에 대한 지극한 정성과 간절한 그리움을 표현한 글로는 간서치(看書癡)로 잘 알려진 이덕무(李德懋)의 문장이 최고라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만약 나를 알아주는 한 사람의 벗을 얻게 된다면, 나는 마땅히 10년간 뽕나무를 심고, 1년간 누에를 쳐 손수 오색실을 물들이리라. 열흘에 한 가지 빛깔을 이룬다면 50일에 다섯 가지 빛깔을 이룰 수 있으리. 따뜻한 봄볕에 말린 다음, 아내에게 부탁해 백 번 정련한 금침으로 벗의 얼굴을 수놓게 하리라. 그런 후 귀한 비단으로 장식하고 오래된 옥으로 축(軸)을 만들어 높은 산과 양양히 흐르는 강물 사이에다 펼쳐 놓고 말없이 마주보다가 뉘엿뉘엿 해 질 녘에 품에 안고 돌아오리라.” 정말 대단한 정성 아닙니까?
벗은 왜 소중할까?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자 나의 스승이 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에 나오는 ‘익자삼우 손자삼우(益者三友 損子三友)’의 개념 중에서 정직하고 성실하고 박학한 벗이 바로 나의 스승이 될 수 있는 친구입니다. 그 반대로 나에게 해로운 벗은 편벽되고 굽실거리기 잘하고 빈말 잘하는 사람입니다.
중국 명나라 때의 양명학자인 이탁오(李卓吾)는 라는 책에서 “스승이 될 수 없다면 친구도 될 수 없다”는 말을 합니다. “내가 말하는 스승과 친구란 원래 하나이니 어떻게 두 가지 다른 의미가 존재하겠습니까?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친구가 바로 스승인 줄은 알지 못하니, 이리하여 네 번 절한 뒤 수업을 전해 듣는 사람만을 스승이라 하지요. 또 스승이 바로 친구인 줄은 모르고 그저 친교를 맺으며 가까이 지내는 자만을 친구라고 일컫습니다. 친구라지만 네 번 절하고 수업을 받을 수 없다면 그런 자와는 절대로 친구하면 안 되고, 스승이라지만 마음속의 비밀을 털어놓을 수 없다면 그를 또 스승으로 섬겨서도 안 됩니다. (중략) 스승이 될 수 없다면 친구도 될 수 없는 것입니다.” [若不可師 卽不可友]
그렇게 스승이 될 수 있는 사람이 형제라면 얼마나 다행스럽고 좋겠습니까? 아버지와 함께 당송 팔대가로 꼽히는 소식(蘇軾)-소철(蘇轍)은 떨어지기를 아쉬워하며 평생을 함께하려 했던 형제이면서 친구이면서 사제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정약전(丁若銓)-정약용(丁若鏞) 형제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둘 다 유배지에 있을 때 흑산도의 형 약전이 숨지자 다산 정약용은 두 아들에게 이런 편지를 보내며 통곡했습니다. “하늘도 땅도 무너지도록 원통히 부르짖으니 나무나 돌도 눈물을 흘리는데 하물며 무슨 말을 하랴? (중략) 지금 그분을 잃었으니 이제는 터득하는 바가 있어도 누구를 향해 입을 열 것이냐? 사람에게 지기가 없다면 진작에 죽느니만 못하다. 아내가 나의 지기가 되지 못하고 아들도 나의 지기가 아니며 형제와 일가도 모두 지기는 아니다.”
법구경에는 “나보다 나을 게 없고 내게 알맞은 길벗이 없거든 차라리 혼자 가서 착하기를 지켜라. 어리석은 사람의 길동무가 되지 말라”[學無朋類 不得善友 寧獨守善 不與愚偕]는 말이 나옵니다.
그러니 스승을 찾듯 친구를 찾아야 합니다. 친구에게서 배우고 친구에게 가르침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나에게 있는가, 늘 생각해봐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