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곡의 원류를 찾아 세검정에서 거슬러 오르다
시작점은 종로구 신영동에 있는 세검정이다. 세검정은 조선 시대에 손꼽히는 경승지였다. 이름에 대해서는 몇 가지 기록이 남아있는데 이곳에서 칼을 씻어 인조반정을 도모했다는 이야기와 실록이 완성되고 난 뒤 사관이 그동안 기록한 사초를 이곳에서 물로 씻었다 하여 이름이 붙여졌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과거에 세검정은 선비들이 즐겨 찾는 명승지였다. 많은 이들이 풍류를 즐기고 시원한 물소리를 감상하기 위해 찾았는데 특히 비 오는 날이면 콸콸 쏟아져 내리는 물줄기를 보려는 이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다산 정약용 또한 비 오는 날이면 벗들과 함께 이곳을 즐겨 찾았다고 한다. 지금은 빼곡한 집들을 배경으로 겨우 연명하다시피 하는 실개천이 흐르고 있을 뿐이다.
백사골에 자리한 경치 좋은 산천
자하슈퍼를 기점으로 숨차게 오른다. 산허리를 가득 메운 집들, 그 사이로 난 좁은 골목길을 걸으며 좀체 숲이 나올 것 같지 않다고 중얼거리는 찰나에 삼각산 현통사가 나타난다. 주변에 널찍널찍한 바위와 아름드리나무가 서 있다. 숲의 관문이다. 현통사 우측에 난 길을 한 걸음만 들어서면 숲이 시작된다. 작은 개울에 쌓아 올려진 것 치고는 꽤 높은 축대가 세워져 있어 예전에는 많은 물이 흘렀음을 유추할 수 있다.
개울가를 따라 걷다 보니 어느새 시야가 트이는 넓은 공간에 다다른다. 백석동천(白石洞天)이다. 산천으로 둘러싸인 경치 좋은 곳에 흰 돌이 많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백석동천에는 추사 김정희의 별장터였다는 집터 흔적과 연못, 정자 터가 남아있다. 집터 맞은편 산 중턱의 흰 바위에는 월암(月巖)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고 계곡 위로 좀 더 걸어 올라가면 커다란 바위에 백석동천이라는 이름자가 선명한 것을 볼 수 있다.
조선 최고의 예술인이 바로 이곳에서 숲의 향기에 취하고 물소리를 벗 삼아 시를 짓고 그림을 그렸으리란 상상은 주변을 바라보는 눈길을 더욱 세심하게 만든다. 계곡은 별서터와 두 마애각자를 포함하여 사적 제462호로 지정되어 있다.
첩첩산중처럼 골이 깊지는 않으나 숲의 맛은 온전히 살아있다
백사실 계곡은 한양 도성 북서쪽 성벽 밖, 조선왕조의 주산인 북악산 작은 줄기와 이어져 있다. 출입금지였다가 2006년에야 개방되었고 그 이후로 사람들이 알음알음 찾아오고 있다. 계곡의 가장 큰 매력은 한 걸음만 들어왔을 뿐인데 도시라는 사막에서 마주친 오아시스처럼 물이 흐르고 초록이 넘실댄다는 것이다. 먼 곳으로 떠나는 것만이 여행이 아니다. 이렇듯 도심 한가운데 짧은 나들이에서 삶의 여유를 찾을 수 있다면 이 또한 근사한 여행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