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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강선 열차로 강릉까지 114분
- 2017년 12월 22일 경강선 KTX가 개통된다. 이 열차로 기존에 서너 시간 걸리던 서울에서 강릉까지 두 시간이 채 안 되게 갈 수 있게 되었다. 필자는 22일 경강선 개통에 앞서 미리 시승을 할 기회가 있었다. 며칠 전 내린 흰 눈으로 온 세상이 은빛인 설원을 기차를 타고 달려본다는 낭만적인 생각으로 매우 설레고 기대되었다. 정책기자단 26명 기자님들과 같이 떠나게 된 이번 팸투어는 정말 기쁜 일로 필자에게 다가왔다. 이번 팸투어의 취지는 이제 2시간도 채 안 걸리는 시간에 안락하고 쾌적한 열차로 서울에서 강릉까지 갈 수 있으니 굳이 숙소를 그곳에 정하지 않아도 평창올림픽을 하루에 다녀올 수 있다는 점을 알리려는 목적도 있다. 얼마 전 뉴스에서 올림픽 열리는 곳의 숙박업체에서 폭리를 취하려 해 제재해서 정상으로 돌렸다는 소식을 듣기도 했는데 강릉까지 이렇게 빠른 시간에 갈 수 있다면 관람하고 싶은 경기를 숙박하지 않고도 하루에 충분히 다녀올 수 있게 되었으니 반가운 일이다. 오전 10시 50분까지 모이라고 했지만, 기분 좋은 발걸음으로 일찍 서울역에 도착했다. 모임 장소에 가니 이제는 아주 오랜 친구처럼 친숙해진 기자님들과 여러 관계자분들이 벌써 모여서 반가운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11시 반 출발인 열차를 타려는데 깜짝 놀랄 일이 생겼다. 필자도 좋아하는 멋진 음악그룹으로 ‘외톨이야’를 부른 ‘씨앤블루’의 정용화 씨가 우리랑 같이 줄을 선 것이다. 연예인이어선지 그의 모습에서 빛이 나는 듯했고 친절하게 포즈를 취해 필자 일행과 사진도 찍었다. 평창 홍보대사인 용화 씨는 참 빛나는 잘생긴 청년으로 오늘 경강선 시승식을 같이 떠나게 되어 즐거웠다. 그런데 더 놀란 일은 오늘 시승식을 대통령님과 같이한다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참으로 온화한 미소를 지닌 분이었다. 우리 정책기자단과도 한 사람씩 악수를 하고 기념사진도 찍었다. 실감이 나지 않는 꿈같은 일로 대통령님의 옆 옆자리에서 사진을 찍었다. 이렇게 가깝게 대통령 옆에 서서 악수도 하다니 가슴이 뛰고 문재인 대통령은 훌륭한 대통령으로 길이 남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들었다. 경강선에 오른 기자들은 모두 기분 좋은 분위기로 축제인 듯 사진도 찍으며 즐거운 이야기꽃을 피웠다. 자리를 잡은 후 점심으로 ‘강원 나물밥도시락’이 제공되었다. 이 도시락은 평창올림픽을 통해 강원 음식문화를 세계에 알리려는 기회로 삼으려 개발한 영양밥으로 강원도에서 개발한 품종인 오륜쌀과 오륜감자, 특허기술로 만든 참취, 곰취, 곤드레, 어수리와 표고버섯 등이 포함되었다고 한다. 정성이 담긴 도시락을 맛있게 먹었지만 개선되어야 할 점은 음식이 좀 따뜻하게 제공되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후에 뉴스를 보니 대통령도 우리와 같은 도시락을 드셨다고 했다. 창밖의 경치는 지난밤 쏟아진 함박눈으로 온통 은색의 세계였다. 편안한 좌석에 앉아 한 폭의 동양화 같은 풍경을 감상하니 어쩐지 시인이라도 된 듯 무언가 시상이 마구 떠오르는 것 같아 웃음이 절로 났다. 논스톱으로 달린 경강선은 정말 두 시간을 넘기지 않고 강릉역에 도착했다. 강릉역은 이제 평창올림픽 손님을 맞아 각 경기장으로 연결할 수 있도록 준비를 마쳤다. 우리 기자단은 안목항의 커피 거리로 갔다. 작년 겨울에도 이곳에 왔었는데 그때 그대로 깨끗하고 아름다운 바다와 즐비하게 늘어선 커피집의 예쁜 모습이 눈길을 끌었다. 그중에서도 유명한 커피집이라는 산토리노에서 커피 한 잔씩을 마셨다. 산토리노 카페 3층 베란다에서 내다보이는 바다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풍경이다. 이제 경강선 열차로 서울에서 두 시간이면 올 수 있으니 평창 올림픽도 많이 관람하고 또 이렇게 아름다운 바닷가에서 맛있는 커피도 즐기며 행복한 멋진 추억을 많이 만들어 보자.
- 2017-12-21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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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한 여정을 예술로 밟아온 여성들
- 조병화(趙炳華, 1921~2003) 시인은 축시(祝詩)를 통해 여성 조각가 석주(石洲) 윤영자(尹英子, 1924~2016)를 이렇게 예찬했다. 당신 머리엔 조물주로부터 위탁받은 창조물로 가득하고 당신 손과 몸엔 그걸 뽑아내는 기술로 충만해 있습니다 그렇게 당신은 평생을 세월 모르는 불멸의 생명으로 예술을 살아오며, 쉴 새 없이 조물주의 위탁을 만들어냈습니다 ― 조병화, ‘2001년 회고전에’ 중에서 1947~1949년 윤경렬(尹京烈, 1916~1999) 조각가와 윤효중(尹孝重, 1917~1967) 조각가를 사사하고, 1949년 홍익대학교 미술학부가 창설되던 해에 입학해 우리나라 여성 조각인 1호가 된 분이다. “출발점에서 영향을 끼친 ‘윤경렬’은 차분한 인간성을, ‘윤효중’은 힘찬 의욕과 조각가로서의 정열을 불어넣어주었다”고 평론가는 말한다. 1925년 김복진(金復鎭, 1901~1940)이 동경미술학교 조각과를 졸업하고 이 땅에 돌아와 최초로 근대적 양식의 조각을 시도한 태동기부터 오직 조각예술에 헌신해온 일생이었다. 1953~1954년 국전에서 특선, 1955년 문교부장관상을 수상하면서 조각가로서 탄탄한 입지를 구축했다. 서울의 여러 대학에서 제자들을 양성하고,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이 되었으며, 1973~1989년에는 대전의 목원대학교에서 교수, 학장으로 봉직했다. 브론즈와 대리석이 주조를 이루는 그의 조각 속에는 언제나 모성의 따뜻한 혈류가 흐르는 듯하고, 부드러운 곡선미는 보는 이에게 안온함을 준다. ‘기다림’, ‘情’, ‘愛’, ‘律’, ‘靜’이라는 작품 타이틀이 말하듯 여인의 일상을 차가운 돌이나 쇠붙이 속에서 잔잔히 끄집어내어 형상화했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동상(銅像) 등 여성의 몸으로 힘겨웠을 대형 조형물도 곳곳에 남아 조각예술의 위용을 보여주고 있다. 1989년에 제정된 ‘석주 미술상’은 금년 23회까지 꾸준히 후배 여성 예술인들을 격려하고 있다. ‘愛’라는 제목이 붙은[사진1] 여인의 앉은 모습은 조형미가 빼어날 뿐 아니라, ‘오닉스’라 불리는 강도 높은 노란 대리석을 깎아 우아함을 더하고 있다. 속기(俗氣)라고는 찾을 수 없는 정갈한 여인의 자태도 눈길을 사로잡는다. 대리석 작품 ‘가족’, ‘情’을 소장하고 있던 차에 인사동 화랑에서 마주한 이 작품도 기꺼이 소장하게 되었다. 거실 한편 가구 위에 놓고 그녀 어깨의 리듬까지 완상(玩賞)하고 있다. 그는 2010년의 전시도록 서문 ‘예술, 꺼지지 않는 영혼의 불꽃’에서 “제 인생과 작품이 300년이 지난 지금도 잘 보존돼서, 아름다운 선율과 청아한 음을 내고 있는 바이올린 ‘스트라디바리우스’ 같았으면 합니다”라고 말했다. 지난한 예술의 역정을 한평생 밟아온 그에게 다함없는 존경의 염(念)을 올릴 뿐이다. 예수의 탄생에서 부활까지의 이야기는 많은 예술가의 주제가 되었다. 특히 기독교인이나 천주교인들이라면 그 성스러움이 한층 더할 것이다. 고대 성당이나 교회 건물에는 예수, 제자들의 형상이 벽화, 조각상, 벽의 부조, 광창(光窓)을 영롱하게 장엄한 스테인드글라스에 잘 표현되어 있다. 예수의 탄생과 골고다 언덕으로 십자가를 짊어지고 오르는 고난의 순간, 죽음과 부활, 평화의 나팔 등을 작은 브론즈 촛대 네 면 가득 ‘돋을새김’으로 채운 이 촛대 한 쌍은[사진2] 예사롭지 않은 작품임에 틀림없다. 10여 년 전 유명한 건축가 김원(金洹, 1943~) 선생의 대학로 사무실에서, 이 조각가 이춘만(李春滿, 1941~)의 작품들을 보고 한참을 어안이 벙벙한 채 서 있던 기억이 새롭다. ‘광야의 예수’, ‘부처를 닮은 예수’, ‘십자가 예수’ 등 브론즈 작품들의 범상치 않은 형상이 나를 압도했기 때문이다. 질박한 물성을 살린 그의 조형들은 금속을 헤집고 고뇌와 우수에 가득 찬, 그러나 경건한 눈빛으로 보고 있는 나를 부끄럽게 했다. 서울대 조소과와 이화여대 대학원에서 조각을 전공한 이 여성 조각가는 “붓다상이 가지는 실루엣은 지극히 부드럽고 절제되어 금욕과 무소부재(無所不在)함을 드러내고 있다. 부드러운 곡선과 달리, 그리스도 십자가는 단순한 십자 형태로 평화를 상징하는 기하학적 형상이다. 나는 붓다와 그리스도가 드러내는 서로 이질적인 상징성을 작업에 함께 대입시켰다. 정지되어 있으나 끝없는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두 이질적인 상징성을 인체 안에 뚫어진, 혹은 인체를 감싸고 있는 ‘공간’과 만나도록 시도했다”고 작가일기에 썼다. 작품의 형태와 선의 단순성은 인체의 소멸성과 영원성, 망각과 기억,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에 긴장을 더욱 격렬하게 일으킨다고 평자는 말하고 있다. 천주교 박해의 현장, 한강변 절두산(切頭山)에서 이 작가가 조각 설치한 ‘절두산 순교 기념비’ 앞에 서면, 먹먹한 가슴 안으로 오열이 흐른다. 작품을 수집하고자 하였으나 여의치 않아 김원 선생 사무실만 수시로 드나들곤 했다. 이 브론즈의 촛대 한 쌍은 잘 알고 지내는 미술품 수집가의 집에서 만나게 되었다. 인연으로 여기고 있다. 다행스럽게 그분은 작가의 이력을 잘 모르고 있기에 프랑스 촛대와 쉽게 교환되었다. 외국에서 생활하고 있는 아들네 가족이 휴가차 오는 날 커다란 박달나무 탁자 위, 이 촛대에 황촉(黃燭)을 밝히고, 그림자에 묻혀 흔들리는 ‘천사의 평화의 나팔’을 바라보며, 고난을 이긴 환희의 순간을 느껴볼 것이다.
- 2017-12-18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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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컬처 키워드] 대기만성 스타의 눈물과 영광
- “방송이 너무 안되고 하는 일마다 자꾸 어긋난 적이 있었어요. 그때 간절하게 기도했지요. 한 번만 기회를 주시면 개그맨으로서 온 힘을 다하겠다고 다짐했어요.” 한국 예능계의 최정상에 올라 예능 트렌드를 선도하고 있는 스타 유재석(45)의 말이다. “칸 영화제에 오는 것은 배우로서 로망이다. 연기자로서 오래 일했지만, 칸에 온다는 생각은 꿈도 못 꿨다. 꼭 벼락 맞은 것 같다. 마치 70도 기운 고목에 꽃이 핀 기분이다.” 5월 20일 70회 칸 국제영화제의 레드카펫에 선 중견 배우 변희봉(75)이 한 말이다. 연예계에는 한 작품 성공으로 대중의 사랑을 받다 이내 사라지는 벼락 스타가 적지 않다. 노래 한 곡 히트로 반짝 스타가 됐다가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진 원 히트 원더(One-hit wonder) 가수도 있다. 물론 오랜 기간 대중의 사랑을 받는 거성(巨星)도 있다. 그리고 유재석과 변희봉처럼 오랜 세월 무명을 견디며 포기하지 않고 노력해 스타 반열에 오른 대기만성 스타도 있다. 최근 들어 대기만성 스타들이 대중문화계에서 맹활약하며 경쟁력 있는 연예인으로 주목받고 있다. 1991년 KBS 1회 ‘대학개그제’ 입상을 계기로 연예계에 데뷔했지만, 오랫동안 무명생활을 하며 남희석, 김국진, 김용만 등 동기의 화려한 스타 부상을 묵묵히 지켜봤다. 7~8년 동안 발버둥을 쳤는데도 대중의 눈길을 사로잡는 데 실패했다. 바로 유재석이다. “노력과 실력 부족으로 저에게 온 기회를 살리지 못했기에 포기할 수가 없었어요. 절망도 했지요. 게스트 등 작은 역할이라도 전력을 다하자는 마음으로 프로그램에 임했지요. 그러다 보니 대중과 팬들이 많이 좋아해주셨지요.” 짧지 않은 무명생활을 하며 고생을 하다 스타가 된 유재석은 스캔들 한 번 내지 않는 철저한 자기관리와 항상 남을 높이고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자세, 끊임없는 자기계발과 노력으로 10여 년 넘게 최고의 예능 스타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한 번만 기회를 달라는 소원이 이뤄지고 난 후 만일 내가 초심을 잃고 이 모든 것을 나 혼자 이룬 것으로 생각한다면 세상에서 가장 큰 벌을 받아도 할 말이 없다고 다짐했습니다.” 유재석이 무명생활 탈피 이후에도 방송활동에 전력을 다하는 이유다. 최고의 연기력으로 관객과 시청자에게 믿고 보는 배우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스타가 김명민(45)이다. 김명민 역시 오랜 무명생활을 견뎌내고 스타가 된 대기만성 배우다. “무명일 때 매니저와 코디가 없어 의상 등을 직접 구해 드라마 촬영장에 갔더니 PD가 출연자가 바뀌었다며 집으로 가라고 하더군요. 자괴감으로 죽고 싶은 심정이었지요. 무명의 고통과 가장의 책임 때문에 꿈을 접고 이민까지 갈 생각을 했지요.” 10여 년 동안 단역과 조연을 오가며 무명의 설움을 겪었던 김명민. 그는 드라마 에서 혼신의 연기로 시청자의 박수를 받고 연기대상을 거머쥐며 스타가 됐다. 스타가 된 뒤에도 볼펜을 물며 발성 연습을 하고 캐릭터 소화를 위해 20kg 이상을 감량하는 등 엄청난 노력을 하고 있는 김명민은 “무명의 고통이 저를 늘 노력하게 하는 원동력인 것 같아요. 작품에 임할 때 무명 시절을 생각하며 열심히 합니다”라고 말했다. 1966년 MBC 성우로 출발해 연기자로 전업한 중견 배우 변희봉은 대기만성 스타의 전형을 보여준다. 변희봉은 수많은 드라마에서 개성적인 연기를 보여줬으나 비중 있는 배역을 맡지 못해 스타 반열에 오르지 못했다. 드라마 , 등에서 잡범 등 악역을 연기하고 사극에선 개성 강한 캐릭터를 맡았지만, 대중의 환호를 받지 못했다. 연기에 대한 열정 하나로 포기하지 않고 오랜 시간 수많은 작품을 소화하며 연기자의 길을 묵묵히 걸었다. 이름 없는 중견 연기자는 생계의 위협을 받고 배우 자존심에 상처받기 일쑤다. 변희봉 역시 그랬다. 1990년대 후반 IMF로 방송사들이 제작비 절감을 위해 중견 연기자를 기피하는 바람에 변희봉을 한동안 TV에서 볼 수 없었다. 변희봉을 재발견하고 스타화를 이끈 사람은 봉준호 감독이다. 2000년 를 시작으로 , 등에 잇따라 출연하며 변희봉은 비로소 대체불가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그리고 로 칸 국제영화제 레드카펫에 섰다. 30여 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무명의 고통을 견딘 변희봉은 “봉준호 감독을 만난 것이 고마울 따름이다. 오랫동안 아웃사이더 연기자로 살아왔기에 시청자와 관객의 사랑을 받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잘 알고 있다. 삶이 끝나는 순간까지 내가 좋아하는 연기를 하고 싶다”라며 웃는다. 요즘 에 남편 우효광과 함께 출연하고 있는 배우 추자현(37) 역시 파란만장한 연기 인생을 살아온 대기만성 스타다. 1996년 드라마 로 데뷔한 뒤 등에 출연해 중성적 매력을 발산하며 시청자와 관객에게 존재감을 보여줬다. 하지만 강력한 한 방을 보여주지 못해 스타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고 점차 배역의 비중이 떨어지고 출연 기회가 줄어들었다. “출연 기회가 줄면서 연기자로서 자신감도 사라지고 배우로서 위기감을 느꼈어요. 더는 물러설 곳이 없었죠. 중국 진출은 배우로서 마지막 몸부림이었어요.” 중국으로 건너가기 직전 추자현이 한 말이다. 그녀는 혈혈단신 중국으로 건너가 맨땅에 헤딩하며 단역부터 다시 시작했다. 중국어를 배우고 중국 연기 스타일을 익히며 닥치는 대로 오디션에 임했다. 2005년 을 시작으로 중국 드라마에 본격적으로 출연하기 시작했다. “저는 한국에서 대중의 사랑을 받는 한류 스타로 중국 드라마에 출연한 것이 아니잖아요. 무명 연기자로 중국에 건너와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니며 단역부터 출발했지요. 힘들고 서러워 많이 울기도 했어요.” 추자현은 2011년 중국에서 폭발적 인기를 얻은 의 중국판 드라마 주연을 맡아 한국과 중국에서의 길고 긴 무명 배우의 설움을 털어내며 스타 배우 대열에 합류했다. 회당 1억원을 받는 한류 스타로 화려하게 비상한 추자현은 “한국과 중국에서 관심을 받는 것이 꿈만 같아요. 포기하지 않고 도전했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초심을 잃지 않고 배우로서 임하는 작품에 최선을 다하려고 합니다”라고 각오를 밝혔다. 대기만성 스타들은 죽음보다 더하다는 무명의 설움과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노력해 정상에 오른 만큼, 탄탄한 실력은 물론 철저한 자기관리 능력까지 갖춰 경쟁력 있는 스타로 군림하며 한국 대중문화의 지평을 확장하고 있다.
- 2017-12-18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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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골프화의 용도변경
- 눈이 하얗게 쌓였다. 사람이 많이 지나다닌 길은 눈이 녹고 얼어 미끄럽다. 이웃 할머니 한 분이 길을 걷는다. 미끄러운 길인데 할머니 발걸음은 가볍다. 뒤를 따르던 필자는 미끄러지지 않으려 조심조심 걷는다. 할머니는 여전히 잘 걸어 간다. 미끄러운 길인데 어떻게 저렇게 잘 걸을까? 궁금증이 생겼다. 조금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여쭤보았다. “할머니! 미끄러운데 그렇게 잘 걸어가세요?” 씽긋 웃더니 왼쪽 발을 들어 신발 바닥을 보여준다. 처음엔 무슨 뜻인지 몰라 할머니 얼굴을 쳐다보았더니 털장갑을 낀 손가락으로 신발 바닥을 가리킨다. 자세히 보니 신발이 골프화였다. 골프화 바닥엔 잔디에 미끄러지지 않도록 징을 박아 두었다. 골프화가 눈길을 미끄럽지 않게 걸을 수 있는 신발로 용도 변경한 셈이다. 겨울철에 쓰지 않고 신발장에 보관해둔 골프화의 쓰임새를 새로운 곳에서 찾은 삶의 지혜다. 그 이후로 필자도 사용하지 않고 방치하고 있는 골프화를 미끄럼방지 신발로 신곤 한다. 모양새도 예쁘고 방수 처리가 돼 있어 눈이 녹아 길이 젖어 있는 경우에도 편리하다. 골프를 하는 사람은 대체로 두서너 켤레의 골프화를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겨울 미끄럼 방지 신발로 신어도 전혀 손색이 없다. 일반 의류와도 잘 어울린다. 골프화의 용도변경이다. 카멜레온이 환경에 따라 보호색으로 바꾸는 현상도 같은 의미로 보아도 좋을 듯하다. 동물이 진화함도 환경변화에 살아남기 위한 생존전략이고 용도변경의 하나가 아닐까? 환경이 급변하는 오늘날에 있어서 용도변경은 절실한지 모른다. 사회에 발을 내딛기 시작할 무렵부터 이런 격언을 교훈으로 들으며 성장했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When in Rome, do as the Romans do.).” 환경변화 대응의 필요성을 누누이 들어왔으나 실천에 옮기는 데는 무뎠다. 인간은 변화를 싫어하는 속성을 가졌기에 자기 변신을 꺼려한다. 익숙해진 모습으로 살아가려는 경향이 있다. 과거의 영광에 오래 머물기를 좋아한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 “작심삼일”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인생 1막과 2막의 환경과 삶의 목적이 같을 수 없다, 전반 생이 사회적 성공에 치중한 삶이었다면 인생 2막은 자기 인생의 보람과 의미를 찾는 자아실현의 궁극적 목적을 이루는 시기다. 골프화의 용도변경처럼 인생 2막의 환경과 목적에 맞는 삶으로의 자기 변신, 용도변경의 필요성을 다시 깨닫는다.
- 2017-12-14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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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젊은 날의 영혼’으로 만난 정미조
- 정미조를 처음 만난 것은 군복무시절이었다. TV커녕 라디오조차 제대로 듣기 어려웠던 그 시절, 편지교제 중이던 지금의 아내가 ‘국군의 방송’에 희망가요를 신청하였다. 그때 방송에 갓 데뷔한 정미조의 감미로운 노래가 나왔다고 기억한다. 방송에서 나와 신청자의 이름을 부르고 노래가 나오자 부대원들의 함성으로 생활관이 발칵 뒤집혔다. 음치인 필자는 너무나 소란스러워 무슨 노래였는지 기억을 못한다. 부대원들과 박수치면서 즐거워했던 일만 생각났다. 아내도 생각이 잘 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정미조가 동갑내기 동갑내기라는 사실을 나중에 알고 더욱 그를 정겹게 느꼈다. 그의 은퇴를 아쉽게 생각하고 속절없이 세월만 흘렀다. 그는 어느 날 홀연히 프랑스로 미술유학 가서 박사가 되고 미술교수가 되었다. 헌데 37년 만에 ‘젊은 날의 영혼’으로 정미조가 돌아왔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반세기 가까운 지난날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12월 10일 마포아트센터는 바깥 차가운 날씨를 아랑곳하지 않고 열기로 가득 찼다. 포스터에 눈길이 멈췄다. 세월은 피할 수 없다. 공연이 시작되자 자리를 가득 메운 관중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그때 그 노래를 들을 수 있을까?’ 아내도 무척 궁금한 눈치다. 정미조의 얼굴은 처음 본다. 데뷔곡 ‘개여울’이 가슴을 울렸다.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 합니까?/ 홀로이 개여울에 주저앉아서 파릇한 풀포기가/ 돋아나오고/ 잔물은 봄바람에 헤적일 때에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시던/ 그러한 약속이 있었겠지요 날마다 개여울에/ 나와 앉아서/ 하염없이 무엇을 생각합니다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심은/ 굳이 잊지 말라는 부탁인지요 ‘첫사랑, 휘파람을 부세요’ 등 귀에 익은 노래가 이어졌다. 새 앨범에 수록한 신곡도 발표하였다. 작사, 작고도 하였다. 청아한 목소리가 변하지 않은 것 같다. 음악의 열정은 젊은 날과 똑 같았다. 그는 결코 녹록치 않았던 프랑스 유학 생활을 털어놓았다. 인간의 땀 냄새가 짙게 베였을 터이다. 가수 은퇴 후 37년이 지난 후에도 복귀를 간절히 바랐던 지인들, 가수 복귀의 조력자에 대해 고마운 마음을 표했다. 관중은 중, 장년층이 대부분이었다. 반세기 가까운 옛날을 되새기고 싶은 세대들이다. ‘격조 높은 공연’은 두 시간에 걸쳐 차분하게 진행 되었다. 아내와 함께 듣고 싶었던 노래는 아무리 기다려도 나오지 않았다. 매번 열심히 박수를 치던 아내도 못내 아쉬움을 달랬다.
- 2017-12-11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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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년 만에 다시 찾은 초등학교
- 졸업 이후 처음이다. 성당도 군부대도 있었지 아마? 큰길 맞은편엔 한때 어머니가 다니셨던 신발공장도 있었고. 지하철 역세권으로 탈바꿈한 지 이미 오래전이라니 제대로 찾을 수 있을까? 이젠 사라졌을 옛날 우리 집 흔적이 아직 남아 있다면 대문 앞에서 찻길까지 그 좁다란 골목길을 따라서 아주 오랜만의 등교를 해보리라. 부산 지하철 2호선 문현역 2번 출구를 나오면서 필자의 발걸음이 미세하게 떨렸다. 헛기침 두어 번으로 호흡을 가다듬어본다. 마치 두 계절을 머금은 듯 선선하면서 차가운 바람은 얼굴을 어루만진다. 3분 정도 걸었을까? 믿기지 않는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그래 바로 여기야.” 오랜 기억 속의 동네 골목길이 여태 저리 버티고 있었다니. ‘딱지치기’와 ‘다망구’ 그리고 ‘오징어달구지’를 하던, 또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유행가를 따라 부르느라 항상 시끌벅적했던 바로 그곳. 그 시절의 주인공들은 지금 무얼 하며 하루를 보내고 있을까? 한구석 기억의 방에 쌓아두었던 옛이야기들이 여름날 분수대 물줄기처럼 솟구쳐 오른다. 필자가 살던 옛집은 자취를 감추었지만. 아마 일요일이었을 듯싶다.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나서 문을 열고 나가보니 친구 녀석이 교회를 가자며 손짓했다. 귓속말로 비밀스러운 약속까지 했다. “오늘 교회 같이 가면 저애 소개시켜줄게.” 녀석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긴 머리의 여자아이가 나무 뒤에서 우릴 훔쳐보며 서 있는 게 아닌가. 세월 따라 빛바랜 골목 담벼락엔 여기저기 상처투성이, 그 흔적들 사이로 혹시나 남겨두었을지도 모를 깨알 낙서들을 찾아 이쪽저쪽 두리번거린다. 빠져나오기 싫은 어둠속 터널 같은 골목길을 나서자 바로 큰길에 이른다. 이젠 좌회전을 해야 한다. 대로변 K은행에서 학교까지 죽 이어진 신작로를 따라 제대로 등굣길에 오르는 순간이다. 기억보다는 가깝게 느껴진다. 여긴가? 좌측으로 키다리 소나무가 있었을 자리엔 브랜드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새로이 오픈한 듯싶은 삼거리 국수집 앞에서 잠시 서성거린다. “그래 맞아, 이 부근에 제법 큰 공터가 있었지.” ‘소차’ 자전거 빌려 타는 맛에 해가는 줄 모르던, 뭉쳐서 야구시합하느라 밥도 거르던 그를 기어코 만나고야 만다. 지금은 흑백사진 속에나 있는 유년의 필자를…. 퀴즈 하나 내련다. 1970년대 대표 주전부리 중 하나는? 호주머니에 쏙 집어넣고 한 움큼씩 꺼내먹기에 그만이었던 것. 바로 배고픈 하굣길의 파란 봉지 ‘뽀빠이’, 빨간 봉지 ‘자야’다. 오물오물거리며 걸어가던 오르막을 지나자 학교 건물이 성큼 다가선다. 뒷산 황령산과 그 자락을 따라 조밀하게 들어선 집들을 배경으로 드디어 모교가 보인다. 높고 선명한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너무나 깔끔한 외관의 부산 문현초등학교. 정문으로 바로 들어서지 않고 담장 따라 한 바퀴 천천히 돌아본다. 그 시절엔 없었던 색깔 예쁜 유치원과 두 팔 벌려 활짝 반갑게 맞이하는 후문. 때마침 지나가던 어린 후배가 찍어준 인증샷은 오래도록 남을 기념작이다. 그런데 시절이 하수상한 탓이라서 6학년 1반 교실을 둘러볼 수가 없어 두고두고 아쉽다. 책·걸상도 어루만져보고 싶고 게시판 그림들도 들춰보고 싶고 또 손가락으로 분필가루도 찍어보고 싶은데 말이다. 아쉽게 돌아나가던 필자의 눈길을 사로잡은 건 본관 우측 앞에 있는 ‘책 읽는 소녀상’이다. ‘독서는 마음의 양식’이라고 씌어 있는 기단석 위로 다소곳하게 앉아 무려 40여 년 동안이나 책을 읽고 있다. 요즘 말로 ‘심쿵’하게 하는 모습이다. 은근한 매력의 향나무 교정 아래로 내려서니 눈부신 햇살도 도리 없이 비켜가는 얽히고설킨 등나무 벤치. 휘감아 도는 바람결에 기꺼이 온몸을 맡기고선 살며시 눈을 감아본다. 6학년 체육시간, 한판 제대로 붙던 날. 운동장 모래판 씨름장엔 팽팽한 긴장감이 샅바 위를 감돌았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우리 모두는 ‘빵’ 터지고 말았다. 한 친구의 엉덩이, 그것도 하필 그곳에 그만 ‘빵꾸’가 나버렸기 때문이다. 평소 까무잡잡했던 얼굴이 홍당무가 되었던 녀석.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까? 혹여 이 글을 보게 된다면 함께 웃어나 보고 좋을 텐데. “야, 원래 구멍 난 바지를 입었던 거냐? 아니면 정말 용쓰려다 그리 된 거냐? 설마 기억조차 못하는 건 아닐 테지?” 잘 그려진 눈금 위로 색깔 선명한 인조 잔디 운동장. 모래먼지 흩날리던 지난날은 찾아볼 수 없는 트랙 주변을 어슬렁거려본다. 소꿉놀이하던 옛날의 모래밭은 오간데 없고 누가 저리 시퍼런 융단을 깔아놓았단 말인가. 그런데 정말 이상하고 말이 안 되는 게 있다. 이리도 무심한 사람이었나? 아니면 기억력이 떨어진 건가? 좀처럼 생각나질 않는다. 겨우 서너 명 정도의 이름만 생각날 뿐이다. 그나마 세월이 흘러 그들과도 연결이 끊겼다. 참 어처구니없는 노릇이다. 헛헛한 걸음으로 정문을 나서면서 다시 사진을 찍어본다. 언제라도 꺼내볼 수 있게 폰 속에 제대로 간직해놓고 싶다. 또 다녀갈 날을 쉽사리 기약하기 어려운 게 우리네 현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나오는데 문득 생각난 곳이 있다. 바로 학교 앞 문방구점. 단 몇 걸음 만에 마주한 그곳은 거의 옛날 그대로의 모습이다. 열린 듯 닫힌 창문을 혹시나 하며 두들겨보는데 잠시 후 인기척이 들려온다. 그분일까? 사실 얼굴도 생각이 나질 않는다. 드르륵 창문이 열리며 맞아주신 분. 그 시절의 주인장이 분명했다. 졸업연도를 밝히니 이내 기억을 더듬으신다. 악수도 청하고 ‘무극노트’도 몇 권 기념으로 산다. 환하게 웃으시며 사진촬영에도 응해주시고 동기들 만나면 안부 전해달라며 사인펜 두 자루를 덤으로 넣어주신다. 마치 고향의 이웃 아저씨를 조우한 기분이다. 어느덧 기울어가는 해. 왠지 자꾸 뒤돌아보게 된다. 누군가 부르는 소리도 없는데 발걸음이 떼어지지 않는다. 어디 근처에서 커피 한잔 할 수 있는 카페 없나? 어쩌면 그 긴 머리 소녀가 거기서 커피를 마시고 있을지 모를 일이고.
- 2017-12-11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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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원식이 만난 귀촌 사람들] 충북 보은군 산골 폐교에 사는 원덕식·노정옥씨 부부
- 시골에 내려가 살기를 원하는가? 그러나 시골에 거처를 마련할 실력이 여의치 않은가? 빈손인가? 걱정 마시라. 찾다 보면 뾰족한 수가 생긴다. 일테면, 재각(齋閣)지기로 들어앉으면 된다. 전국 도처에 산재하는 재실, 재각, 고택의 대부분이 비어 있다. 임대료도 의무적 노역도 거의 없는 조건으로 입주할 수 있다. 물론 소정의 면접은 치러야겠지만 당신이 남파된 간첩이 아닌 한 딱지맞을 일은 없다. 폐교를 빌려 쓰는 방법도 고려할 만하다. 서양화가 원덕식(46)씨는 산골 폐교를 빌려 살고 있다. 귀촌한 지 어언 6년이 지났다. 그녀 곁엔 동화작가 노정옥(49)씨가 그림자처럼 동행한다. 이들은 서울에서 뜨거운 연애를 하다 부부 사이로 발전했다. 결혼식은 이곳 폐교 운동장에서 치렀다지. 귀촌의 첫 장을 혼례로 기록한 셈이다. 원씨 내외는 별반 손에 쥔 것이 없는 채로 산골에 들어왔다. 맨몸으로 신접을 차렸다. 온몸을 다해 귀촌 초기를 개척했다. 수천 평 부지에 들어앉은 낡은 폐교를 부부 단둘이 덤벼들어 단장을 하길 날마다 반복했다. 첫해 엄동엔 난방이 안 돼 냉장고보다 찬 사택에서 덜덜 떨며 밤잠을 자야 했다. 살을 에는 추위를 덜기 위해 방 안에 텐트를 치고 선잠을 잤다는 게 아닌가. 도깨비 나올 듯 뒤숭숭한 교사를 고치고 때우고 꾸미고 칠하는 일도 고스란히 부부의 몫이었다. 강철 같은 기세로 운동장을 뒤덮고 우르르 들솟는 풀들을 뽑는 일은 신역이 자심한 반면 좀체 표가 나질 않더란다. 이래저래 고역에 고난에 고심이 첩첩 겹쳤겠지. 신혼의 달콤한 훈김이 시련을 덜어줬을 법하지만, 제주도로 유배를 당한 추사도 아닌 것을, 어쩌자고 으스스한 폐교에 둥지를 틀었단 말인가? 원씨의 얘길 들어볼까. “시골생활을 경험한 적이 없어서 처음엔 많이 염려했어요. 과연 잘 살 수 있을지, 견뎌낼 수 있을지 내심 걱정이 많았죠. 하지만 그런 근심에 사로잡힐 겨를조차 없이 온갖 일에 매달려야 했어요. 사람이 살 수 있도록 시설을 고치거나 운동장의 풀을 뽑아내는 일들이 화급했으니까. 몸으로 부닥쳐야만 하는 그런 일들은 예상보다 훨씬 힘들었어요. 그러나 잘 견디며 지내왔어요. 남들이 보기엔 무모하거나 철없는 귀촌일 수 있겠지만 저희에겐 뚜렷한 목적이 있었으니까요. 폐교의 너른 교실 공간을 손질해 미술 작업실로 쓰자, 그것으로 작품에만 매진할 여건을 조성하자는 게 귀촌 동기였거든요.” 글쟁이에겐 골방에 컴퓨터 하나면 그만이지만, 화업(畫業)엔 널찍한 공간 확보가 필수다. 서울의 임대료는 비싸다. 화가들이 그래서 흔히들 교외나 시골에 작업실을 마련한다. 폐교를 임대해 활용하는 이들도 많지만, 수년 안짝에 철수하는 사례도 흔하다. 원씨 내외도 초기 한때엔 서울로 되돌아가는 문제를 놓고 갈등을 했더란다. 주거 환경이 너무도 열악하고, 덩치 큰 폐교의 안팎을 보수하는 일이 버거워서였다. 그러나 서서히 자리가 잡혀 이젠 정착에 이르렀다. 부부는 미친 듯이 창작에 진력할 작정이었다. 남편은 글을 쓰고, 아내는 그림을 그리는 일을 치열하게 하자는 게 귀촌의 목적이자 초야에 건 약속이었던 것. 그러나 다소 길이 달라졌다. 마을 주민들을 끌어들인 ‘생활문화공동체사업’을 펼쳤다. 관이 행하는 마을 사업 공모전에 응모, 지원 대상으로 선정되면서부터였다. 부부는 마을 안길에 미술 조형물을 설치했다. 교사 안에 소규모의 농업박물관도 개설했다. 주력 사업은 주민들에게 그림 그리기나 시 쓰기, 도자기 만들기 같은 걸 가르쳐 전시회를 여는 일이다. 반응도 성과도 좋았다지. 소외된 촌로들을 공방으로 끌어들이다 주민의 대다수는 노인들. 평생을 두더지처럼 땅을 파며 살아온 농부들. 그들에게 글과 그림이란 생판 생소한 딴 세상의 물건이기 십상이다. 실상이 그렇지만 노인들은 손수 만든 작품으로 전시회까지 여러 차례 흐뭇하게 치렀다. 도시에 번성한 문화 예술은 좀체 시골에 손을 내밀지 않는다. 원씨 부부의 행장은 이 점에서 가상하다. 소외된 촌로들의 고즈넉한 삶을, 파묻힌 기층문화를 수면 위로 돋우는 역할을 했으니 말이다. 눈여길 건 노인들을 모아들인 원씨 부부의 출중한 사교 능력. 그들은 배타적이거나 고독한 노인들을 폐교의 공방으로 자연스럽게 끌어들였다. 처신을 어떻게 했기에? “시골 어머니들의 삶은 참 고달파요. 겨울 한철을 빼곤 늘 농사일에 매여 살죠. 새벽에 들에 나갔다가 저물어서야 귀가하는 일상을 지켜보면 안쓰러워요. 얼굴엔 주름투성이이고, 손발은 갈퀴처럼 거칠고, 벌레에 물린 자국으로 온몸이 얼룩지고, 그러면서도 강인하고 씩씩하고요, 가슴 찡해지는 모습이죠. 그런 어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자주 접촉하고 수시로 스킨십을 하고 그랬어요. 애교도 부리고, 장난도 치고, 옥희씨! 순자씨! 그렇게 이름도 불러드렸고요. 스스럼없이 다가가 다정한 관계를 맺었어요.” “예술을 한다고 외돌아 앉아 오불관언식 처세를 했다면 미운털이 박혀도 야무지게 박혔겠죠? 이웃을 마주칠 때마다 인사만 참하게 잘해도 기특하다는 평이 돌아오는 게 시골이죠. 툭하면 벌어지는 마을 술판에서의 호출에도 가급적 득달같이 달려가는 게 현명한 처신이고 말이죠.” “술자리 참석은 남편의 전공 분야입니다(웃음). 마을의 갖가지 경조사에도 부지런히 찾아다녔어요. 내 부모 대하듯 어르신들의 얘기를 경청하고 존중하는 버릇도 남편의 처신에 배었죠. 괜한 참견이나 잔소리에도 토를 달기는커녕 고맙게 받아들였어요. 덕분에 소통이 쉬웠던 것 같아요. 음, 복된 관계랄까, 일찌감치 저희는 자식처럼 따뜻한 대접을 받으며 살아왔어요. 이런 정황 하에 마을공동체사업을 원활하게 전개할 수 있었습니다. 흔히들 시골의 부당한 텃세를 운운하지만 저희는 그런 조짐조차 느끼질 못하고 지냈어요. 텃세란 귀촌자의 처신 여하에 달린 문제이지 않겠어요?” “세태란 야박해서 내 안의 이기적 유전자를 발동하지 않고선 남에게 당하거나 밀리기 십상이죠. 날이면 날마나 피 튀기는 복싱이 벌어지는 게 서울이라는 사각 링일 뿐일까? 시골의 풍정은 안도해도 좋을 만큼 평온한 거예요?” “도시의 인간관계란 대체로 메마른 계산 중심으로 흘러요. 시골은 좀 달랐어요. 그 머릿속에 계산이 전혀 없는 건 아니겠지만, 시골 할머니들의 태도엔 순응이랄까, 순수랄까, 그런 기본 정서가 농후하게 서려 있어요. 그러나 내면엔 아픔, 슬픔, 상처가 가득 고여 있죠. 개인의 꿈은 접고, 고단한 시골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억지로 살아온 한평생에 관한 한(恨)! 할머니들의 이 억압된 꿈과 깊은 한을 주제로 한 그림 작업, 요즘 저는 거기에 몰두하고 있어요.” 원씨는 알아주는 눈들이 많은 화가는 아니다. 주변의 촉망을 한 몸에 받는 일은 아직 벌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기죽을 여자도 아니렷다. 그림을 평생의 본분사로 삼았으니 말이다. 그녀가 진정 남김없이 열정과 깡을 다해 작업에 임하는지는 그녀 자신만이 알 일이겠지만, 미술을 위해 귀촌을 결행했으니 그녀 내부엔 나름 큼직한 사이즈의 포부가 들어 있을 테지. 최근엔 해외 아트페어에서 할머니들의 고달픈 노년에 서럽게 잔존하는 여성성을 주제로 한 작품 몇 점이 팔려나가기도 했다. 그녀는 이를 의미심장한 신호로 읽는다. 비로소 작풍의 방향을 찾았다는 안도감에서다. 아울러 이를 귀촌의 선물로 간주한다. 마을 할머니들과의 애정에 찬 교제의 산물로 여긴다. 상처에서도 애틋한 싹이 돋고 잎이 나오고 꽃이 핀다 자연으로부터도 많은 걸 얻었다. 다채로운 걸 느끼고 배우고 담았다. 자연이란 흔연한 사랑을 닮아 조건 없이 준다. 수업료를 받지 않고 강좌를 펼치며 음성을 내지 않고도 메시지를 전달한다. 산봉우리에 오르면 그 높음을 배울 수 있으며, 물길을 만나면 그 맑음을 배울 수 있다. 소나무에서는 그 푸름을, 달에서는 그 밝음을 배울 수 있다. 한적한 시골의 삶에도 남모를 부침이 있고 일희일비가 교차하는 법. 갈등과 괴로움 없이 삶을 건널 수 있던가. 마음이 쑥대밭처럼 뒤엉킬 때면 원씨는 자연 풍경에서 위안을 얻는다. 그게 자연의 품에 안겨 살아가는 귀촌 생활자의 특권이라는 것. “사람을 보듬어주는 자연을 느끼며 살아가는 게 만족스러워요. 도시에선 좀체 만나기 어려운 새소리, 물소리, 달과 별, 숲과 적막, 이런 것들이 들끓던 고민들을 순식간에 잊게 해주는 거예요. 작업이나 일로 힘들었던 하루가 저문 깜깜한 밤에 운동장에 나가면 허공에 모인 별들이 빛을 뿜어요. 초롱초롱 빛나는 그 별들을 바라보면 저절로 피로가 가시고 근심이 달아나요. 남편과 다투고 난 뒤의 상심도 씻겨나가죠.” “자주 다투세요? 이는 우문이리. 밑바닥까지 드러난 감정 충돌이 잦은 게 부부 사이라서. 결혼 자체가 짐이나 멍에일 수도 있고요. 그럼에도 왜들 결혼을 할까(웃음).” “소소한 다툼이 생기곤 해요. 이건 어쩌면 긍정할 만한 기회이기도 해요. 서로 간에 미처 몰랐던 상대의 새로운 면을 발견하는 기회이기도 하니까. 오해에서 벗어나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는 찬스이기도 하고요.” 고적한 시골에서 날마다 24시간 부부가 붙어 사는 삶엔 창작만큼이나 각별한 재능이나 내공이 요구될 수도 있겠지. 사람이란 천성적으로 ‘삐딱이’가 아니던가. 본능의 밑뿌리인 에고이즘과 ‘귀차니즘’이 불러들이는 불협화음으로 소소한 상처를 주고받는 게 부부 사이 아니던가. 그러나 상처도 인간 내부의 자연이다. 상처에서 애틋한 싹이 돋고 잎이 나오고 꽃이 핀다. “허황한 욕망과 소비 중심으로 바쁘게 돌아가는 서울에서 살았다면 부부 관계가 한결 단조로웠을 것 같아요. 귀촌 덕분에 남편의 내면을 더욱 깊이 있게, 또는 성숙한 눈길로 바라보게 되었죠. 남편은 섬세하고 다정해요. 욱하는 성질은 좀 있지만 독한 게 없어요. 요리도 잘하고, 늘 내 편이라는 게 고맙고 좋아요. 자연이 주는 안정감 같은 걸 남편에게서 느낍니다.” “두 분, 가진 것 없이 귀촌을 해 온몸을 쓰는 노역으로 폐교를 가꿔 활달하게 살아가고 있어요. 소박하고 간소한 살림, 수굿한 태도, 긍정심, 이런 것들이 보기에 좋아요. 소유에 대한 예찬과 경쟁이 극에 달한 이 세속에서 그렇게 순하게 살기란 쉬운 게 아니라서.” “틀에 박히지 않으면서 하고 싶은 걸 하며 사는 삶, 돈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삶을 살고 싶었어요. 그게 어느 정도 가능하다는 걸 귀촌을 통해 확인하고 있지요. 점점 더 미니멀한 삶으로 가고 있으며, 미래에 대한 불안감도 줄어들고 있어요. 훗날에 어떤 결과가 기다리고 있을지 모를 일이지만, 여러모로 여전히 불편하고 어려운 점들이 많지만, 원하는 방향으로 이행하는 이 과정엔 회의가 없습니다.” 원씨의 언어는 정밀하거나 기민한 맛을 결여한 대신 유연하고 온순해 평화롭다. 아둔한 나의 머리엔 잡념이 술렁인다. ‘돈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삶’이 과연 실현 가능할까, 불가능할까. 인간이 자유로울 수 있는 존재이기나 할까.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 , 등의 저서가 있다.
- 2017-12-11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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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들이 소곤댈까? 홍콩의 밤거리엔?
- 해외여행에 익숙지 않은 초보 배낭 여행객들에게 홍콩은 매우 적격한 나라다. 중국 광둥성 남쪽 해안지대에 있는 홍콩은 1997년 영국령에서 반환되어 국적은 중국이지만 특별행정구다. 다른 자본주의 체제가 적용되는 ‘딴 나라’다. ‘별들이 소곤대는 홍콩의 밤거리’라는 오래된 유행가를 흥얼거리면서 그 속으로 들어가 보자. 병 고쳐 달라 기원하면 낫게 해줄까? 웡타이신 사원 홍콩의 주룽반도(九龍半島)에서 가장 크고 유명한 도교 사원이 웡타이신(黃大仙)이다. 원래는 중국 광저우(廣州)의 황사에 있었는데 1912년 현재의 장소로 이전해 일반인에게 공개된 것은 1956년부터다. ‘웡타이신’은 우리말로 황대선이라는 인물을 뜻한다. 그는 원래 저장성의 한 지방에서 살던 양치기 소년. 15세 때, 정제된 황화수은을 질병 치료 약으로 만들어 인술에 많은 공적을 쌓았다. 그래서 이 사원은 병 치료에 도움을 주는 신앙처로 알려지게 된다. 모습은 여느 사원과 비슷하다. 각자의 소원과 병 치료를 기원하는 제수를 놓고 향초를 피우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는다. 사원 안은 눈이 매울 정도로 향내가 진동한다. 특히 사원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대나무 산통을 이용해 행운의 점(산통점)을 친다. 일을 그르칠 때 쓰는 ‘산통 깨다’라는 표현은 바로 이 ‘산통점’과 관련해서 생겨났다. ‘산통(算筒)’에 대나무를 잘게 잘라 100개 정도를 넣고 산통의 막대가 나올 때까지 흔들고 막대가 나오면, 막대와 같은 번호의 종이와 바꾼다. 점쟁이는 그 내용을 설명해준다. 하지만 점괘가 나와도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니 그림의 떡이나 다름없다. 또 이 사원에 들러 꼭 찾아야 할 곳은 뒤쪽의 정원. 황대선이라는 이름이 선명한 정원은 연못과 함께 꾸며져 있어 주변 고층 아파트의 삭막함을 무색케 할 정도로 아름답고 정적이다. 홍콩 영화 속 주인공처럼 침사추이 거리 헤매보기 주룽 지구의 침사추이(尖沙咀)는 홍콩 최대 번화가다. 고층빌딩 숲, 옛 향기가 가득 배인 칙칙하고 좁은 골목들. 오래된 재래시장과 파도처럼 일렁대는 사람들의 왁자한 소리의 물결. 과거와 현대를 아우르는, 영화 같은 매력이 폴폴 넘쳐나는 곳. 홍콩 누아르 영화 속에서 이미 친근해진 풍경이 반갑다. 해안 산책로를 따라 영화의 거리가 조성되어 있다. 할리우드 스타의 거리를 모티브로 만든 ‘스타의 거리’다. 2003년에 시작해 1년 뒤인 2004년부터 공개되었다. 너비 4~5m, 길이 440m로, 9개의 붉은 기둥에 홍콩 영화 100년사가 기록되어 있다. 또 영화를 찍고 있는 감독의 조형물, 이소령 동상 등이 눈요기를 시켜주고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길바닥에 새겨진 영화인 명판들. 이연걸, 홍금보, 임청하, 양조위, 오우삼, 서극, 매염방 등 국제적으로 친숙한 홍콩 스타들의 손도장과 사인들이 거리를 장식했다. 이름만 새겨진 배우는 스타 거리가 조성되기 이전에 죽은 사람들이다. 이곳이 유난히 좋은 이유는 주변 바다 풍치가 덧대어져 있기 때문이다. 유람선과 고깃배가 떠다니고 바다 너머로 홍콩섬 금융가의 건물들이 뾰족하게 올라가 있는 주변 풍광이 매력적이다. 이외에도 미술관, 우주박물관, 시계탑, 문화센터 등 볼거리가 풍부하다. 특히 주룽반도의 랜드마크 역할을 하는 시계탑(높이 44m)은 1910~1978년 중국과 유럽을 오가던 시베리아 횡단 열차의 출발역이었던 주룽역 앞에 서 있던 것. 조화롭지 않은 듯 조화를 이루고 있는 침사추이가 매력적이다. 홍콩의 부자 동네, 리펄스 베이 침사추이에서 리펄스 베이(Repulse Bay)로 가려면 일단 홍콩섬으로 들어가야 한다. 페리호와 해저터널을 이용하는 방법이 있다. 홍콩섬은 홍콩 개항 이후, 상업 및 정치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했다. 홍콩섬에서 가장 높은 산, 빅토리아 피크(554m) 고갯길을 넘어서면 차창 밖 모습이 조금씩 달라진다. 빽빽한 건물 대신 초록색 산과 바다가 어우러지고, 띄엄띄엄 고층 아파트가 그림처럼 들어앉아 있다. 한눈에 봐도 예사롭지 않은 건축 형태가 자연과 잘 어울리고 있다. 이곳이 바로 리펄스 베이다. 성룡 등 홍콩의 유명 인사들이 주로 사는 부촌이다. 길 끝나는 바닷가 끝에 틴하우(天后) 사원이 있다. 사원 앞에 틴하우 여신이 해탈의 미소를 건네고 있다. 산정이 아니라 바다와 눈높이가 같다. 1865년에 세워진 도교 사원은 독특한 중국 건축 양식을 전하는 지붕의 곡선이나 조각 등이 그대로 남아 있다. 이 사원엔 바다의 수호신인 ‘쿤암(Kwun Yum)’과 틴하우를 모시고 있다. 젊은 나이에 요절한 틴하우 여신은 뱃사람들이 복을 빌면 소원을 들어주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사람들을 구해준다고 믿었다. 또 건너가면 젊어진다는 장수교와 손으로 문지르면 재물복을 준다는 정재신(正財神) 석상, 만지면 3일 안에 인연을 만들어준다는 인연신이 있다. 특히 인연신 앞에서는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떨어질 줄 모른다. 유럽 거리 걷는 건가? 스탠리 마켓과 머레이 하우스 리펄스 베이 해변을 벗어나 찾아갈 곳은 스탠리 마켓(Stanley Market)이다. 스탠리 메인 스트리트를 중심으로 150여 개 가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시장 거리다. 마치 서울의 이태원동과 같은 분위기다. 마켓 거리는 고급 제품을 파는 곳이 아니다. 반면 스탠리 베이 쪽으로 방향을 돌리면 확연히 모습을 달리한다. 아기자기한 유럽식 바와 식당, 숍들이 해변을 따라 이어진다. 세계 음식점들이 즐비하고 외국인도 많이 눈에 띄어 이국적인 풍치가 연출된다. 아기자기한 바와 레스토랑에서는 커피 한 잔, 파스타, 피자 한 조각으로 여행객들을 유혹한다. ‘만(灣)’ 형태의 넓지 않은 바다를 따라가면 머레이 하우스(Murray House)를 만난다. 옛 센트럴에 위치한 1844년대 식민지시대 건축물을 1991년 그대로 옮겨다 놓았다. 40만 개의 벽돌로 지어진 이 건물을 분해해서 옮긴 후 재조립했다고 한다. 아직도 총탄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건물은 딱히 멋은 없지만 홍콩에서 가장 오래된 식민지시대 건물이라는 데 의의가 있다. 현재는 레스토랑과 홍콩해양박물관으로 이용된다. 머레이 하우스 앞 바닷가 쪽의 정자와 옹기종기 매여 있는 조각배의 풍치에 반한 여행객은 그 순간 긴장을 스리슬쩍 내려놓는다. 홍콩 야경 보고 레이저 쇼 보니 기분 최고, 맥주 한잔 어때? 홍콩 여행에서 야경을 빼놓을 수 없다. 야경을 볼 수 있는 전망 포인트가 여러 곳 있다. 그중 홍콩섬의 빅토리아 피크는 야경 보는 인기 뷰포인트. 홍콩의 가장 높은 전망대로 서울의 남산타워, 63빌딩이라고 이해하면 될 듯하다. 산정에서 바라보는 야경도 훌륭하지만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전망대에 올라서야 완벽하게 멋진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 특히 이곳의 명물로 꼽히는 것은 피크 트램. 1888년부터 긴 세월 동안 가파른(373m) 산등성이를 오르락내리락하고 있다. 어느 순간 건물이 거꾸로 서 있는 듯 몽롱해진다. 특히 피크 타워 바로 옆, 사자 정자는 환상적인 야경을 볼 수 있는 명소다. 또 승강기를 타고 타워 꼭대기 층인 스카이 테라스로 올라가면 더 넓게 조망할 수 있다. 야경을 보는 데에도 피크 타임이 있다. 오후 8시부터 약 20분간 심포니 오브 라이트(Symphony of Lights) 레이저 쇼가 펼쳐진다. 좀 더 가까이 다가서야 한다. 영화 거리와 이어지는 시계탑 근처, 연인의 거리에 마련된 2층 뷰포인트가 명당자리. 바다 건너 홍콩섬의 금융가 건물에서 뿜어대는 광선에 취하는 홍콩의 밤이다. 이런 날, 침사추이 밤거리로 들어가 몽콕 야시장에서 야식을 사먹는 재미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Travel Data 교통편 대한항공, 아시아나 항공, 캐세이패시픽, 타이항공 등에서 매일 인천~홍콩 간 직항편을 운행한다. 2014년부터 제주항공, 진에어와 같은 저가 항공사도 직항편을 운항 중이다. 3시간 30분~3시간 50분 소요. 현지 교통 정보 홍콩 공항에 도착하면 공항고속전철을 타고 20~30분 만에 중심가인 주룽반도와 홍콩섬에 갈 수 있다. 시내를 여행할 때는 배(스타 페리)와 2층 버스, 전차(트램) 등 다양한 교통수단을 이용하면 된다. 옥토퍼스 카드라고 불리는 교통카드를 이용하면 지하철, 배, 전차, 버스 등을 모두 이용할 수 있다. 화폐 단위 홍콩 달러(HKD)를 이용해야 한다. 마카오에서는 홍콩 달러를 사용할 수 있으나 거스름돈은 현지 화폐인 파타카(Pataca)로 받을 수 있다. 화폐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음식과 숙박 정보 홍콩 음식은 우리 입맛에 잘 맞는다. 완탕이 유명하고 시장통에만 가도 먹을 게 지천이다. 유명 호텔 숙박은 몇십만원대이지만 5만~8만원 선에 이용할 수 있는 곳도 있다. 주룽반도 쪽이 가격이 저렴하다. 특히 1928년 문을 연 페닌술라 호텔(香港半島酒店)은 세계 10대 호텔 중 하나로 꼽힌다. 또 40여 년의 전통을 지닌 만다린 오리엔탈 홍콩(mandarin oriental Hong Kong)은 미슐랭 스타(Michelin Star)를 받은 호텔로 10개의 레스토랑, 스파 및 피트니스 센터를 갖추고 있다. 가격은 70만~80만원대다. 물가 정보 홍콩은 면세가 되는 품목들이 대부분이다. 의류, 가방, 시계 등은 한국보다 다소 저렴하다. 그러나 주류, 담배 등의 품목 몇 가지는 한국보다 가격이 더 높고 세금을 부과한다. 전체를 합치면 홍콩 물가는 서울과 비슷하다. 날씨와 옷차림 정보 홍콩의 12월은 평균 최저기온이 15.9℃, 평균 최고기온이 20.2℃로 우리나라 가을과 비슷하다. 일교차가 작아 낮이나 밤이나 서늘하고 쾌적하다. 가을 옷 위주로 챙기고 머플러 등을 준비하면 된다. 시니어 한 달 여행 포인트 홍콩과 마카오(澳門)는 빼놓을 수 없는 밀접한 여행지다. 홍콩 항에서 뱃길로 40여 분(약 60㎞) 달려가면 마카오다. 또 홍콩과 인접한 도시가 심천이다. 홍콩의 지하철(MTR)이 주룽의 홍함에서 중국 국경인 광둥까지 국철(KCR)로 연장되지만 통과하려면 비자가 필수다. 심천은 경제특구 지역으로 새로 생긴 신흥도시. 건물들도 깨끗하고 홍콩보다 물가도 싸다. 매우 좁은 도시여서 여유롭게 여행을 즐기면 된다.
- 2017-12-11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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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타 라이프] 2017년 정유년 대중문화 트렌드와 스러진 별들
- 2017년 정유년의 한 해도 저물고 있다. 올해는 국정농단으로 헌정 사상 처음으로 현직 대통령이 헌법재판소에 의해 파면되는 초유의 일이 벌어져 5월 9일 조기 대선을 통해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가 19대 대통령에 당선돼 취임하는 등 격변의 한 해였다. 대중문화계 역시 세월호 특별법 서명, 야당 후보 지지 등의 이유로 송강호, 정우성, 김혜수 등 수많은 연예인을 포함한 박근혜 정부의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와 김여진, 문성근, 김미화, 김제동, 김규리 등 82명의 연예인을 좌파 연예인으로 규정해 여론 조작, 방송계 퇴출 등을 시도한 이명박 정부의 국정원 보고서가 공개돼 큰 파문이 일었다. 또한 사드로 촉발된 중국 당국의 한한령(限韓令·한류금지령)으로 대중문화 산업계가 직격탄을 맞는 등 크고 작은 일이 많았다. 2017년 대중의 눈길을 사로잡고 유행을 선도한 대중문화 트렌드와 키워드는 무엇일까. 우선 영화계에선 역사적 사건과 인물 등 실화를 소재로 한 영화들이 쏟아져 흥행에 성공한 것이 가장 눈에 띄는 트렌드다. 한국 민주화에 큰 역할을 한 광주 5·18 민주화운동을 다룬 , 병자호란 당시 고립무원의 남한산성을 소재로 한 김훈 작가의 동명 소설을 영상화한 , 2007년 미 의회 공개 청문회에서 일본군 위안부 사죄결의안 통과에 결정적 역할을 한 이용수 할머니의 가슴 아픈 실화를 모티브로 한 , 일제 강점기 일본 하시마 섬에 강제 동원된 800여 명의 조선인 참상을 다룬 , 3·1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일본으로 가 항일운동에 매진했던 독립운동가 박열을 전면에 내세운 , 1986년 명성황후 시해범을 죽이고 사형선고를 받는 등 청년기의 김구 선생을 다룬 등 많은 영화가 역사적 사건과 인물을 다뤄 눈길을 끌었다. 가 1218만 명의 관객을 동원해 한국 영화로는 15번째 1000만 영화로 등극하는 등 역사적 사건과 인물을 다룬 실화 영화들이 흥행도 호조를 보였다. 올해 방송 드라마의 가장 큰 특징은 ·· 등 검사나 변호사, 재벌 등 권력과 자본의 탐욕과 비리를 다루거나 · 등 언론계를 조명한 작품들과 을 비롯한 갑질을 소재로 한 드라마들이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거나 화제가 됐다는 점이다. 이들 드라마는 지도층의 부패가 심각하고 갑질이 심화하는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줬다. 대중문화계의 큰손으로 등장한 20~40대 여성들의 절대적 지지로 영화와 드라마에서 남자 스타들이 압도적 흥행 성적을 거둔 것도 2017년 대중문화계를 지배한 트렌드 중 하나다. 1218만 명의 관객을 동원한 송강호 주연의 , 718만 명이 본 현빈, 유해진 주연의 를 비롯해 ··· 등 올해 들어 흥행 상위를 차지하는 영화들이 한결같이 남자 주연 영화였다. 드라마 역시 마찬가지다. 케이블 TV 드라마 사상 최초로 20%대를 돌파한 공유 주연의 (tvN), 28% 시청률을 기록한 지성 주연의 (SBS), 20%대를 유지한 남궁민 주연의 (KBS2) 등 성공한 드라마 모두 남자 주연 작품이다. 대중의 관심이 높은 예능 프로그램은 (SBS), (MBC에브리원), (JTBC), (JTBC2), (JTBC), (OLIVE), (KBS1), (TV조선) 등 외국인 출연 예능과 (채널A), ·(tvN), ·(TV조선), ·(E채널), ···(SBS), (KBS2), (KBS드라마), (MBN) 등 연예인의 남편, 아내, 자녀, 부모 등이 출연한 연예인 가족 예능이 대세를 이뤘다. 또한 내일을 위해 오늘을 희생하지 말고 지금의 삶을 즐겁고 행복하게 살자는 ‘욜로(YOLO)’와 혼술·혼밥 등 급증하고 있는 ‘1인 가구’의 문화가 예능 키워드로 등장해 (SBS)에서부터 (MBN)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예능 프로그램의 소재로 활용됐다. 2017년 대중음악계는 신세대 가수와 아이돌 그룹의 1970~1990년대 히트곡 리메이크 열풍이 강타했다. 양희은이 1991년에 불러 인기를 얻은 ‘가을 아침’과 1970년대 정미조가 불러 히트한 ‘개여울’이 올해 아이유의 노래로 재탄생해 음원차트에서 1위를 차지하는 등 큰 인기를 얻었다. 아이유는 9월 발표한 리메이크 앨범 ‘꽃갈피 2’에서 정미조의 ‘개여울’, 소방차의 ‘어젯밤 이야기’, 김건모의 ‘잠 못 드는 밤 비는 내리고’ 등 1970~1990년대 히트곡을 완성도 높게 리메이크해 큰 관심을 모았다. 걸 그룹 마마무의 솔라도 김도향의 ‘바보처럼 살았군요’, 여진의 ‘그리움만 쌓이네’, 해바라기의 ‘행복을 주는 사람’ 등을 리메이크한 앨범을 발표해 젊은층뿐만 아니라 50~60대 중장년층의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올해 대중음악계를 관통한 리메이크 트렌드는 젊은 세대에게 과거의 명곡들을 소개하는 동시에 중장년층에게는 추억을 선물하는 효과가 높아 대중음악의 수용층을 확장하는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세대 간 이해의 접점을 확대했다. 1996년 H.O.T. 데뷔를 시작으로 젝스키스, S.E.S., 핑클 등 1990년대 중·후반 본격화한 아이돌 그룹 시대는 2000년대 들어 2PM, 슈퍼주니어, 원더걸스, 소녀시대 등 2세대 아이돌 그룹 중심으로 세대 교체가 됐다. 올해 들어 원더걸스, 씨스타 등 많은 아이돌 그룹이 해체되고 소녀시대의 멤버 서현이 탈퇴하는 등 2세대 아이돌 그룹들이 본격적으로 퇴장했다. 올해는 방탄소년단, 트와이스, 여자친구, 블랙핑크 등 2015년 전후로 데뷔한 3세대 아이돌 그룹이 국내 음악계를 평정하고 K팝 한류를 이끄는 주체로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연예계에 안타까운 일도 많았다. 큰 사랑을 받던 스타들이 숨져 대중의 곁을 영원히 떠났다. KBS2 주말극 촬영을 끝낸 지 얼마 안 된 4월 9일 중견 스타 김영애가 췌장암으로 66년간의 삶을 마무리했다. 46년간 연기자 생활도 끝나는 순간이었다. “연기는 내게 산소이자 숨구멍 같은 의미예요. 배우가 아닌 나를 생각할 수가 없어요. 다음 생에 태어난다면 다시 배우를 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할 정도로 천생 배우였던 김영애는 20세에 연기를 시작해 , , , , , , , 까지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에서 정교한 연기력과 빼어난 캐릭터 창출력으로 시청자와 관객에게 감동을 줬다. 와 사극 등에서 보인 강렬한 카리스마 연기에서 영화 의 일상적 연기까지 스펙트럼 넓은 연기로 관객과 시청자에게 기쁨을 준 중견 배우 윤소정은 패혈증으로 6월 16일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73년의 삶 중 연기자로 살아온 세월이 55년에 이를 정도로 윤소정에게 있어 배우라는 직업은 삶의 전부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57년 동안 연극무대에서, 스크린에서 그리고 TV 화면에서 빛나는 조연 연기와 사투리 연기로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냈던 중견 배우 김지영도 폐암으로 2월 19일 79년간의 삶을 마감했다. 2017년 10월 30일에는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영화와 드라마에서 빼어난 연기를 선보이며 왕성한 활동을 펼친 김주혁이 교통사고로 사망한 것이다. 김주혁은 선 굵은 연기로 대중의 사랑을 받았던 김무생의 아들로 1998년 SBS 탤런트로 연예계에 데뷔한 뒤 드라마 , , , , 영화 , , 등 수많은 작품에 주연으로 나서 아버지를 능가하는 인기를 얻었다. 20년간의 배우생활을 마감하고 세상을 떠난 김주혁의 나이는 45세였다.
- 2017-12-11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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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광석화 같았던 나고야 성의 축성과 폐성
- 정유년인 올해는 정유재란(1597.1~1598.12) 발발 420주년이다. 임진왜란으로부터는 427주년. 임진왜란이 치욕의 역사였다면, 정유재란은 왜군이 충남 이북에 발도 못 붙인 구국승전의 역사다. 그 전적지는 진주, 남원, 직산 등 삼남지방 곳곳에 있지만 옛 자취는 찾기 어렵다. 뚜렷한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은 왜군이 남해안을 중심으로 농성하던 성터들이다. 주로 경남 중동부 해안에 밀집한 왜성 터들도 오랜 세월 허물어지고 지워져 갈수록 희미해져간다. 왜성이라는 이유로 사적지 지정이 해제된 탓이다. 근래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그 중요성에 눈을 떠 옛 모습대로 복원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는 아직도 방치되어 있다. 치욕의 역사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다. 더 늦기 전에 지금 모습이라도 남겨둬야 한다. 더 사라지고 훼손되기 전에 역사 현장 보전의 필요성을 일깨우고, 정유재란의 역사적 의미를 천착하기 위해서라도 그 흔적을 돌아볼 필요가 있어 에 게재하기로 한다. 임진·정유 국란의 왜군 출진기지는 규슈(九州) 서북 해안 나고야(名護屋) 성이다. 일본 중부의 중심도시 나고야(名古屋)와 구별하려고 히젠(肥前)이란 옛 지명을 붙여 ‘히젠 나고야’라 불리는 곳이다. 사가(佐賀) 현 가라쓰(唐津) 시에서 버스를 타고 해안선을 따라 40여 분 달리면 닿는 요부코(呼子) 포구 언덕 위에 있다. 굴곡이 심한 해안선 깊숙한 만(灣)에 얼마든지 배를 숨길 수 있고, 조선과의 거리가 제일 가까운 지리(地利)를 고루 갖추어 옛날부터 왜구의 소굴로 유명했던 곳이다. 26년 만에 다시 찾아본 나고야 성은 그때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흘러간 옛 노래 ‘황성옛터’를 연상시키는 무너진 성벽이 옛날 그대로였다. 일본이 군신으로 떠받드는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의 글씨로 ‘名護屋城址’라고 쓴 비석도 같은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헛꿈을 조롱한 쇼와(昭和) 시대 하이쿠 시인 아오키 겟토(靑木月斗)의 시비도 같은 자리에 있었다. 수십 년이 걸린 성터 발굴·복원사업이 끝났다지만 겉보기에 변한 것은 없었다. 주말 낮인데도 탐방객 발길이 뜸해 적막하기만 했다. 성터 입구에 자리 잡은 박물관과 그 앞에 조성된 상가만이 옛날에 없었던 건물이다. 도고 헤이하치로 글씨로 된 성적(城跡·성터) 비는 1930년, 겟토의 시비는 1940년에 세워졌다. 그러나 두 돌의 언어는 사뭇 다르다. 도고의 비에는 옛 성터라는 글자뿐이지만, 그것이 세워진 시대와 세운 자의 뜻에 히데요시의 대륙 정복 야망을 그리는 마음이 오롯이 드러나 보인다. 1930년이라면 일본의 만주 침략 야욕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대다. 내무성이 그 돌을 세우면서 러일전쟁 영웅에게 글씨를 부탁한 가슴 밑바닥에는 일본인들이 ‘역사상 최고의 영웅’으로 추앙하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존숭하는 뜻이 꿈틀거렸으리라. 1940년에 세워진 겟토 시비는 히데요시의 망상을 비웃는 것 같다. “다이코가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지만 바다에는 안개만 자욱해.” ‘다이코(太閤)’란 천황을 대신해 나라를 다스리는 관백(關白) 자리를 아랫사람에게 물려주고 상왕처럼 물러앉은 이를 말한다. 히데요시는 조카(秀次·히데쓰구)에게 양위한 뒤에도 만사를 제멋대로 한 사람이다. 그런 권력자가 아무리 대륙 진출 야망으로 용을 써도 그 꿈은 안갯속에 가물가물하다는 뜻으로 읽히지 않는가. 실제로 성터에서 바라본 현해탄 바다에는 쓰시마의(對馬島) 모습조차 어렴풋했다. 26년 만의 탐방객을 놀라게 한 것은 성터에 우거진 고목나무 가지에 달려 있는 올레길 리본이었다. 처음 눈에 띈 것은 천수각 가는 길가 나뭇가지에 달린 것이었다. 반가워 카메라를 들이대니 일본인 탐방객이 “그게 무엇이기에 사진을 찍느냐”고 물었다. 한국 제주도 올레길 표시라는 말에 그들은 “천수대 터에도 많다”고 알려줬다. ‘제주 올레가 일본과 몽골에 수출되었다더니 여기까지 왔구나’ 싶어 너무 반가웠다. 그의 말이 맞았다. 금빛 찬란한 천수각이 있었다는 천수대 터에는 쇠막대기로 만들어 세운 올레 표지물도 있었다. 나중에 알아보니 가라쓰에서 규슈 서북단 히라도(平戶) 섬에 이르는 해안선 구간에 올레길이 조성되어 한국인 여행객에게 인기가 있다 한다. 나고야 성을 찾아가는 도로표지판마다 한글이 병기된 것도 그래서구나 싶었다. 7년 동안 나라를 풍전등화처럼 위태롭게 했던 왜란 출진기지가 평화의 길이 된 것을 400여 년 세월의 작용이라고만 보아 넘기기에는 좀 미진한 뒷맛이 남았다. 임진왜란 400주년 기획 시리즈 취재 차 나고야 성에 갔던 1991년에는 유적지 발굴사업이 한창이었다. 옛 성터를 정비해 관광자원으로 삼기 시작한 때여서 일본인 관광객 발길이 잦았다. 그 르포기사가 신문에 보도된 것을 계기로 국내에서도 차츰 관심을 갖는 사람이 늘어 규슈 관광의 인기 코스가 되었으니, 세월의 두께를 새삼 음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모습 그대로 두는 것이 역사의 참뜻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생각에서 무너진 성을 보존하기로 했습니다.” 그때 특파원을 안내해준 진제이(鎭西) 초(町·일본의 행정구역 단위) 직원은 복원사업이 현상을 그대로 두고 발굴만 하는 것이라 했다. 히데요시 이후 염전·반전사상의 결과로 폐허가 된 성을 그대로 두는 것도 역사의 뜻이라는 것이었다. 정작 옛 자취를 찾게 된 것은 나고야 성 주변에 촘촘히 자리 잡았던 130여 개 번국(藩國)의 진터다. 독재자 히데요시는 휘하 영주[大名]들에게 전쟁기간 중 출진 병사들을 거느리고 성 아래 대기하도록 요구했다. 출진 후의 병력보충 병참 등 임무를 강제했기 때문에 전국의 영주들은 수많은 예비 병력을 거느리고 눌러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진터들은 전후 폐허가 되었다가 사유지로 바뀌어 흔적마저 감추었다. 1970년대부터 시작된 복원사업의 큰 틀은 그 땅을 사들여 옛 모습의 윤곽을 복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박물관을 지어 전쟁의 배경과 경과, 그리고 양국 평화의 지향점을 모색하고 홍보하자는 것이었다. 나고야 성은 축성과 폐성이 모두 전광석화 같았다. 인구 20~30만 명의 거대한 병영도시 나고야 성은 번개같이 건설되어, 또 그렇게 해체당하는 비운을 맞았다. 최고 권력자가 사라지고 세상이 바뀌면 어느 나라 어느 시대에건 일어나는 일이다. 그러나 그처럼 철저하게 무참하게 파괴된 일은 흔하지 않으리라. 일본 통일의 꿈을 이룬 히데요시는 조선과 명나라를 손아귀에 넣어 동아시아 패권을 잡겠다는 망상으로 1590년부터 대륙 침략을 꿈꾸기 시작한다. 중국은 물론 인도까지 영토를 넓혀 부하들에게 봉토를 나눠주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그 계획에 비판적이던 동생 히데나가(秀長)가 죽고, 천금보다 귀히 여기던 외아들 쓰루마쓰(鶴松)마저 잃어 심신이 극도로 피폐했던 1591년 8월, 그는 규슈 지방 영주들에게 ‘대륙 경영 사업’ 개시를 선언하고 적지에 출진기지를 건설하라고 명령한다. 당시 일본에 와 있던 포르투갈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의 에는 그때 일을 이렇게 묘사했다. “관백(히데요시)이 조선으로 가장 쉽게 건너갈 수 있는 항구가 어디인지를 묻자 가신들은 나고야로 불리는 아름다운 항구가 있는데, 수천 척의 선박이 안전하게 출입할 수 있는 곳이라고 대답했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전국의 영주들을 나고야에 집결시키도록 명령했다. 그리고 각자의 부담으로 궁전과 해자와 저택으로 꾸려진 화려하고 넓은 성채들을 조속히 축조하되, 교토에 지은 것보다 뒤떨어지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문장에서 주목할 것은 교토에 뒤지지 않는 화려한 궁전과 성채를 영주들 각자의 부담으로 건설하라는 ‘후신(普請) 명령’이다. 후신이란 불교에서 민간에 널리 시주를 청해 불당이나 탑을 짓거나 수선하는 사업이란 뜻이지만, 절대 권력자가 영주들에게 갖가지 토목·건축사업을 시킨 일을 뜻했다. 나랏돈은 10원도 쓰지 않고 국책사업의 돈과 인력을 영주들에게 부담시켰으니, 아무리 봉건시대이라지만 어떻게 그런 횡포와 전제가 있었는지 흥미롭다. 프로이스는 영주들이 꼼짝 못하고 명령을 수행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다른 영주들에게 뒤지지 않으려는 경쟁심이었다. 작업 중 사소한 부주의를 저지르면 감독들에게 공개적으로 질책을 당하게 되고, 그것이 관백에게 무능력자로 낙인찍혀 추방당하거나 재산을 몰수당할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축성 책임자는 히데요시의 오른팔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공사 책임자는 뒷날 이 지역 영주가 된 데라자와 히로타카(寺澤廣高)였다. 원래 있었던 가키조에(垣添) 성을 헐어 규모를 크게 확장하고, 사방 3km 이내에 130여 번국 영주들의 진영(陣營)을 건설하는 일본 역사상 초유의 대토목 공사였다. 성 공사는 착공 6개월 만에 완공되었고, 영주들의 진영이 완성되는 데는 8개월이 걸렸다니 얼마나 공사를 서둘렀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본성 공사는 규슈 지역 20여 명의 영주들이 비용과 공력을 분담했고, 나머지 공사는 각 영주들 책임 아래 시행되었다. 해발 89m 나지막한 구릉 꼭대기에 혼마루(本丸)를 짓고,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5층 규모의 천수각을 세웠다. 그 아래로 니노마루, 산노마루 등 부속시설과 병사를 배치하고, 주변에 견고한 석축을 쌓아올려 난공불락의 요새를 만들었다. 외성은 주변에 해자를 둘러 외적의 침입에 대비한 전형적인 왜성이었다. 성의 총면적 50만 평은 일본 최대의 오사카 성에 버금가는 규모였다. 성의 크기만 그런 게 아니었다. 그 시대 인구 30만을 가진 도시는 오사카 말고는 없었다. 성내에는 히데요시의 측실(廁室)을 위한 사찰과 다실, 전통 가무극 ‘노(能)’ 공연장까지 있었다. 그 시대에 그려진 병풍도에는 성내의 건물 약 70여 동, 그 아래 조카마치(城下町)의 일반 백성 주택과 점포 260여 동, 진영 시설 70여 동 등 400여 동의 건물이 그려져 있다. 나고야는 외국인 왕래가 잦은 국제도시이기도 했다. 병풍도에는 명나라 사절단 40여 명과 포르투갈인 등 260여 명의 통행인이 그려져 있는데, 이 가운데는 조선에서 잡혀온 포로들을 사들여 해외로 팔아넘기는 노예 상인들도 있다. 일본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돌아온 정희득(鄭希得)은 실기(實記) 에 “나고야 거리에서 마주친 사람의 반 이상이 조선인”이라고 썼다. 그들 대다수가 붙잡혀간 사람들이었다. 통행인 가운데는 남자들 소매를 잡아끄는 유녀(遊女)의 모습도 보인다. 해안 거리에는 유곽과 술집이 줄지어 있고, 각 번의 진에서는 수많은 사졸이 할 일 없이 소일하고 있었다. 노예장사로 재미를 본 외국인들도 돈을 풀어 즐거움을 샀을 것이다. 발굴 작업 중 천수각 주변에서는 금박기와편이 많이 출토되었다. 벽면뿐 아니라 기와에도 금박을 입혀 금빛으로 번쩍이는 건물이었던 것이다. 이런 성의 건설과 전쟁 수행에 시달린 일본 민중의 고난이 기록으로 남았다. 병력 1만5000명을 할당받은 사쓰마(薩摩) 번(藩·제후가 통치하는 영지)의 경우 7000명이 넘는 아시가루(足輕·보병)와 6000명이 넘는 인부를 징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들은 모두 농·어업에 종사하는 백성들이었다. 갖가지 무기와 장비, 병량과 말먹이, 군수품 및 병선 조달과 운용도 백성들 몫이었다. 백성들 고난은 그것으로도 모자랐다. 히데요시는 곧 조선으로 건너가겠다면서 중간에 머물 이키(壹岐) 섬과 쓰시마(對馬島)에도 성을 쌓고 궁을 지으라는 명령을 내려 부하들과 백성들을 괴롭혔다. 이키 섬에는 아직도 그때의 성터가 뚜렷이 남아 있다. 백성들의 피땀을 짜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을 ‘아방궁’을 지은 것이다. 침략군 출진은 1592년 3월이었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1번 대부터 하시바 히데카쓰(羽柴秀勝)의 9번 대까지 총출진 병력 15만8800명, 출진을 도운 예비부대와 병참요원 등을 합친 총인원은 30만5300명으로 기록돼 있다(역사군상 시리즈 ). 비탈진 구릉 도시에 인파가 북적거렸을 날에 비해 오늘의 정적(靜寂)과 정일(靜逸)은 너무 대조적이다. 히데요시는 침략군이 떠난 3월 26일 교토를 떠나 4월 25일 나고야에 착진(着陣), 1년을 머물며 전쟁을 지휘했다. 그 기간 협상 사절로 온 명나라 유격 심유경(沈維敬)을 접견하기도 하고, 여러 장수들이 조선에서 보내오는 보고서와 진귀한 전리품을 받아들고 천하를 얻은 듯 기고만장했다. 심유경의 거소는 명군 유격이 머물던 곳이라 ‘유게키마루(遊撃丸)’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런 영화의 무대였던 나고야 성은 전후 곧바로 참담하게 해체되었다. 히데요시가 죽고 가스미가세키 패권 전쟁에서 승리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전투에 공을 세운 데라자와 히로타카에게 히젠 나고야 땅을 영지로 주었다. 성을 축조할 때 공사 총감독으로 기여하고 조선에 출병한 공로까지 인정한 것이다. 데라자와는 1602년 나고야 성을 허물고 가라쓰 해변에 자신의 성을 축조했다. 조선 침략의 상징물인 그 성을 허문 것은 일개 영주의 결정이 아니었다. 조선과의 무역 재개와 친선관계의 필요성을 절감했던 이에야스는 성을 허물어 전쟁에 반대했던 자신의 뜻을 널리 알릴 필요가 있었다. 전쟁 기간에 아버지와 남편을 잃었거나 오래 빼앗겼던 민중은 전쟁에 치를 떨었다. 7년 동안 헐벗고 굶주린 것이 모두 전쟁 탓이라 여겼던 민중의 염전사상(厭戰思想)은 하늘을 찔렀다. 반전사상과 염전사상은 지금 허물어진 성터 위에 아기 불상의 모습으로 남았다. 데라자와는 그렇게 허문 성석과 건물의 자재를 고스란히 자신의 성 쌓기에 사용했다. 마쓰우라(松浦) 강이 바다로 흘러드는 나지막한 구릉 위에 한껏 멋을 부려 쌓아올린 가라쓰 성은 멀리서 보면 학이 나래를 펴고 춤을 추는 모습을 닮았다고 해서 무학성(舞鶴城)이라 불린다. 그렇게 헐린 나고야 성은 얼마 후 일반 민중의 공격으로 또 한 번 상처를 입는다. 1637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기독교 탄압과 가혹한 조세가 원인이었던 시마바라(島原) 민란 때였다. 성터 입구 ‘나고야 성 박물관’ 현관 앞에는 제주도 돌하르방 부자가 서서 탐방객을 맞아준다. 일본인들은 이 낯선 ‘수문장’ 앞에서 반드시 발길을 멈추고, 더러는 기념사진을 찍기도 한다. 이 박물관의 성격이 ‘일본열도와 조선반도의 교류사’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출입문을 들어서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전시물이 한국 고미술의 상징인 반가사유상 복제품이다. 7세기 중국과 조선반도 문명의 영향을 받아 일본에 처음 율령 국가가 세워졌다는 설명문이 그 아래 붙어 있다.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것이 거북선 모형이다. 실물보다 많이 축소된 것이지만 여수나 통영에서 본 것과 다르지 않다. 문을 들어서 처음 맞닥뜨리는 공간에 자리한 거북선 옆에는 당시의 일본 전함 아타케부네(安宅船) 모형과 두 나라 병기, 무복, 전황도 등이 전시되어 있다. 객관적인 시선으로 전쟁을 조명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 2017-12-06 09: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