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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풋풋했던 여고시절의 희로애락
- 여고 입학하자마자 필자의 단짝이었던 현미는 얼굴도 예뻤지만 배려심도 많아 객지 생활 하던 시골촌뜨기인 나를 인천의 백전화가 있는 대궐 같은 집으로 데려가서 보니 친구 가정환경의 화목함에 감탄하였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만하시며 꽁보리밥과 칼국수로 끼니를 때우던 우리 집과는 정반대로 맛난 음식에 우아하게 홈드레스를 입으신 친구엄마가 어찌나 미인이신지. 그리고 형제들은 얼마나 예쁘고 우애가 좋은지 지금생각해도 어렴풋이 자상하고 화기애애했던 얼굴들이 떠오른다. 향수병에 걸린 필자를 다독이며 이끌어주던 그 친구가 학교졸업 후 동생들을 데리고 시골집에 놀러 왔는데 우아는 도망가 버리고 커다란 양푼에 열무김치와 고추장 보리비빔밥과 팔꿈치로 연기로 인한 눈물을 닦으며 장작불로 미나리부침개를 부쳐 주어도 맛나게 먹어주던 예쁜이들의 안타까운 생각이 떠오른다. 결혼 후 삶에 지쳐 어깨가 축 늘어질 때도 간간히 전화로 위로를 해주던 벗이었건만 한동안 인생의 시련 속에 깊은 쓴맛을 보면서 난 친구와의 연락이 끊어 졌다. “여러분은 똥통학교에 왔다고 실망하지 말고 이제부터 시작이다.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가라”던 교장선생님의 직설적인 말씀에 우린 더욱 흐느끼며 꿈에 부풀었던 여고시절 입학식은 그렇게 눈물바다로 되고 말았다. 시험제였던 인천지역이 우리가 입학할 때는 소위 말하는 ‘뺑뺑이’로 전환하며 우린 최하위 학교로 배정되었기에 ‘안갈 수도 없고 가자니 뭔가 억울하고’ 하는 생각으로 여고시절을 시작했다. 월요일이면 악마의 주초고사가 우리를 괴롭혔고 대학이라는 목표와 함께 책을 베개 삼아 머리에 붙이면 공부를 잘할까 싶어 책을 베고(?) 누웠던 그 시절이 떠오른다. 선생님이 안 보이면 친구옆구리를 찌르며 컨닝을 했던 그때, ‘방학동안 있었던 슬픈 일’의 방학과제를 동생의 마지막 슬픈 모습을 원고지위에 써내려간 나의 사연을 윤리선생님께서는 연로하신 모습으로 서글프게 읽어 주셨다. 선생님과 반 친구들은 모두 눈물바다였고 선생님은 송도유원지로 소풍을 가거나 학교에서 간간이 만나 뵐 때도 항상 따스한 말씀과 격려로 이끌어 주셨다. 그 이후로 선생님 덕분에 난 서서히 슬픔과의 이별을 시작했다. 집에서 도자기 만드는 일을 한다며 항상 도자기 그림을 휴일이면 그린다던 연미, 나의 마음을 위로해 준다며 기타를 가져와 노래를 불러주었던 그 친구는 ‘주부가요열창’이란 프로에 나와 입상을 할 정도로 수준급의 노래를 불러 연미 친구에게 멋지게 잘 보았다며 통화도 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끊어진 소식이 아련하다. 예비고사를 치른 후 일명 ‘땅꼬마’파 다섯명 친구들은 추운 겨울의 크리스마스를 자유공원에 가서 달달했던 연인들이나 친척들한테 장갑 낀 손을 호호 불며 찹쌀떡을 강매 아닌 강매를 하며 한 개 한 개 팔아 모은 돈으로 영종도의 고아원을 방문하였었다.과일과 과자 음료수 등을 사서 무거운지도 모르고 양손가득 몇 박스를 들고 방문하여서는 동생들과 게임도 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과수원길’을 함께 부르고 또 어린동생들에게 재롱도 부리고 함께 놀며 좋은 일을 하자고 의기투합했던 친구들은 지금 전국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그때의 작은 마음으로 요즘엔 독거어르신께 안부전화를 드리며 삶의 소통을 시작하고 있다. 백세시대인생의 굴레를 멋지게 채색하며 살다보니 풋풋했던 여고시절은 삶의 밑거름이 되어주고 인생의 버팀목이었던 은사님, 그리고 친구들아~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그리고 미안하고 보고 싶습니다.
- 2017-06-15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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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래 부르시는 선생님
- 점심을 먹은 후에는 모두 빙 둘러앉아서 수건돌리기 놀이와 ‘어, 조, 목 놀이’도 했다. 어, 조, 목 놀이는 리더가 종이방망이를 들고 다니다가 한 사람을 지목한 후 어, 조, 목을 몇 번 되뇌다가 ‘어’ 하면 제한된 시간 안에 재빨리 물고기 이름을 대야 하며 ‘조’ 하면 새 이름을, ‘목’ 하면 나무 이름을 대야 한다. 3초 안에 이름을 말하지 않으면 종이방망이로 한 대씩 얻어맞았는데 엉겁결에 ‘조’ 하면 “새!” 하거나 '목’ 하면 “나무!”라고 말하는 아이들이 있어 한바탕 웃음바다가 되곤 했다. 당황한 가운데 터져 나오는 틀린 대답이 하도 우렁차서 우스웠던 것이다. 찹쌀떡먹기 놀이를 할 때는 출발 신호와 함께 일제히 뛰어가 뒷짐을 진 후 쟁반 위 밀가루 속에 감춰진 찹쌀떡을 입으로 찾아서 하나씩 물고 오느라 얼굴이 온통 밀가루 범벅이 되어서 우스꽝스런 모습들이 됐다. 그래도 좋다고 입을 있는 대로 벌리고 웃으며 서로의 옷에 묻은 밀가루를 털어주곤 했다. 보는 사람이 안타까워했던 것은 과자따먹기 놀이였다. 뒷짐을 지고 입으로 과자를 따먹는 놀이였는데 따먹을 만하면 줄을 올리고 입이 과자에 닿을 만하면 줄을 올려 모두의 애를 태웠던 것이다. '선생님 앞에서 어떻게 입을 벌려….' 필자 성격으로는 찹쌀떡먹기나 과자따먹기는 절대로 못할 놀이였다. 선생님들은 자꾸 “너도 해봐” 하시는데 필자는 “싫어요, 저는 못해요” 하며 구경만 했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하라면 하는 거지 ‘못해요’가 가당키나 했던 일인가. 그러나 야학 선생님들은 학생들이 싫어하는 일을 강제로 시키지 않았다. 체육에는 소질도 취미도 없는 필자 같은 사람에게는 너무나 다행스런 일이었다. 그런 필자가 좋아하는 놀이가 있었으니 그건 바로 보물찾기였다. 사각으로 접힌 조그마한 종이쪽지는 소나무 가지 틈 사이에 꽂혀 있기도 했고 나무껍질 속 또는 바위틈에 숨겨져 있기도 했다. 그 속에 적혀 있는 상품 이름이 무엇인가는 둘째 문제였다. 풀숲이나 바위틈에 뱀이 있으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있었지만 보물찾기는 너무 재미있었다. 종이쪽지를 찾아다니는 내내 기대감으로 가슴이 ‘쿵광쿵광’ 뛰었고 긴장감으로 숨이 막혀올 정도로 스릴이 있었다. 필자가 제일 싫어하는 놀이는 달리기였는데 선생님들은 1등을 한 사람에게는 으뜸상, 그다음은 버금상, 그다음은 더 잘함상, 심지어 꼴등한 사람에게까지 애씀상을 주셨다. 모든 아이들에게 빠짐없이 상을 주시면서 소외감을 느끼지 않도록 배려해주신 것이다. 그래서 소풍을 갔다 온 뒤 얼마 동안은 노트를 따로 살 필요가 없었다. 노래부르기 대회를 할 때면 모두들 신이 났다. 특히 선생님들은 다들 노래를 잘 부르셔서 전문 성악가들이 울고 갈 지경이었다. 레퍼토리가 ‘돌아오라 소렌토로’, ‘산타 루치아’, ‘보리수’ 등 이탈리아나 독일 가곡 등이었는데, 한 단계 더 높은 유명 오페라의 아리아, 베르디의 ‘여자의 마음’, 푸치니의 ‘별은 빛나건만’ 등을 폭포수같이 쏟아내시기도 했다. 팝송과 가요는 처음 얼마간은 굉장히 당기지만 어느 새에 싫증이 나곤 했는데 가곡이나 정통 클래식은 언제 들어도 가슴에 와 닿았다. 우리들에게 늘 가곡을 부르도록 지도해주시고 정통 클래식을 감상하는 요령을 가르쳐주시던 선생님들은 아이들의 발성법이 두성법이 아니고 목에서 나는 소리이면 유행가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 것이라며 지적을 해주시곤 했다. 한참 감수성이 예민하고 기억력이 왕성한 10대에 보고 들은 것들은 평생에 걸쳐 영향을 끼치기 마련이다. 이후 클래식 음악은 책과 영화와 함께 필자의 가장 좋은 친구가 돼주었다. ‘어쩜 저렇게 잘 부르실까.’ 특히 필자가 좋아하는 B선생님이 노래를 부르실 때는 눈도 깜짝하지 않고 쳐다보곤 했다. 선생님의 작은 동작 하나하나도 결코 놓치고 싶지 않았기에 필자 눈에는 다른 사람이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오직 선생님만 보였다. 노래를 부를 때 그 선생님을 보면 더 멋있어 보였고 그야말로 꿈속의 왕자님이 따로 없었다.
- 2017-05-29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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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아하니 젊으신 분 같은데…
- 아내가 어느새 일어나 부엌에서 아침식사 준비를 위해서 달그락 거리는 소리에 어렴풋 잠이 깼다. 인천공항 근처에 원룸을 얻어 주 중에는 그 곳에서 생활하다가 주말에만 서울로 올라오는 주말부부 생활도 벌써 9개월째로 접어들었다. 어느 날, 우연히 찾아온 은퇴 후의 삶이 이렇게 바뀔 줄은 나도 잘 몰랐다. 어제는 갑자기 서울에서 해결해야 할 일이 생겨 회사 통근버스를 타고 서울로 올라왔다. 최근 며칠사이 목감기로 인해 깊은 잠을 못 이루고 설치다 보니 늘 피로감이 따라다녔는데, 모처럼 집에 와서 편해진 마음으로 갚은 잠에 빠져들었는데 ‘달그락’ 거리는 소리에 눈을 떠보니 아침이었다. 아내는 이것저것 몸에 좋다는 식재료를 사용해서 정성껏 준비한 아침식사를 뚝딱 차려주었으나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영 입맛이 돌지를 않아 젓가락만 께지락 거리다가 아침상을 물렸다. 식사를 마치고 집을 나서니 오월의 싱그러운 바람이 옷깃에 스민다. 상쾌했다. 지하철을 타고 잠실역에서 내려 지상으로 올라오는 엘리베이터를 타던 중에 한 젊은이와 본의 아니게 입씨름을 하게 되었다. 한 택배회사의 직원인 듯 한 그 친구는 자신의 키보다 높은 4층짜리 카트를 밀고 요란하게 다가오더니 엘리베이터 안으로 급하게 카트를 쑥 들이밀면서 미리 타고 있던 나를 아슬아슬하게 밀치고 들어섰다. “쯧쯧, 조심할 것이지…”은근이 불쾌한 감정이 울컥 올라왔지만 참고 있던 중에 지상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카트를 우악스럽게 내리는 과정에서 나의 팔을 슬쩍 치고 나갔다. 순간 나도 모르게 볼멘소리가 나갔다. “아니 조심을 좀 해서 내려야 하는 것 아니에요?” 정중하게 항의를 했지만 나도 모르게 말꼬리가 올라갔다. 그 친구는 엘리베이터에서 나가다 말고 선채로 나를 한참을 쳐다보더니 “그래서요?” 하고 시비조로 나온다. 그 친구의 말투에 멈칫하다가 “아니, 보아하니 젊으신 분 같은데, 좁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카트를 이동할 때에는 주위 사람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요? 또 볼멘소리가 나갔다.”그래서 어쩌겠다는 건데요. “눈을 아래위로 부라리면서 아예 시비조로 나가는 젊은이를 보면서 참으로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어 더 이상 말을 섞다가는 어떤 봉변을 당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부리나케 그곳을 빠져나왔다. 참으로 세상 말세로다.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라와 스트레스로 돌아온다. 온갖 잡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타인을 배려하기는커녕 아래 위도 무시하고 나대는 이 젊은이의 한심스러운 작태는 앞으로 우리 사회가 안고 가야할 아킬레스건 같은 것은 아닐까? 이런 막돼먹은 현상이 비단 그 젊은이 한사람에게만 국한된 문제일까? 아니면 우리 사회전체에 팽배해진 개인 이기주의와 자기중심적 사고에 함몰된 현실적인 문제는 아닐까? 우려 아닌 우려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상쾌했던 기분은 한 순간에 사라져버리고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회사 통근버스에 올랐다. 통근버스는 새벽공기를 가르며 쏜살같이 잠실대교를 넘고 있었다. 잠실대교 밑의 한강물이 아침햇살에 잔잔하게 출렁거린다. 서울의 거리는 어느새 출근하는 차량들로 꽉 채워졌다. 하루의 출근전쟁이 이미 시작된 것이다. 창밖으로 흐르는 5월의 푸르름이 눈을 호강시킨다. 잠시전의 불쾌하기 짝이 없던 언쟁이 잔상으로 떠올랐지만 상큼한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면서 모두 날려 보낸다. 그래도 이 멋진 세상이 날마다 나를 환영해 주는데, 무엇을 더 바랄 것인가?
- 2017-05-29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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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 데서나 시끄러운 사람들
- 필자는 시끄러운 것을 참지 못한다. 음식점이나 술집, 당구장에서 옆자리가 시끄러우면 집중이 안 되고 화가 난다. 그냥 못 들은 척하라는데 그게 안 된다. 일반적으로 남자들은 한꺼번에 여러 가지를 못 한다고 한다. 대화를 하는데 옆자리가 시끄러우면 말해야 할 것을 까먹기도 하고 대화 상대자의 말을 제대로 들을 수 없어 화가 나는 것이다. 못 들은 체하려 해도 큰 소리가 나는 쪽으로 귀가 열린다. 그러니 대화가 중단될 수밖에 없다. 손님이라면 누구나 다 같이 돈 내고 그 공간을 이용할 권리가 있는데 소음 유발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막걸리나 소주 같은 싼 술과 싼 안주를 파는 술집은 대부분 시끄럽다. 손님 중에는 점잖고 조용한 사람들도 있지만 교양 없는 사람들도 있는 것이다. 시끄러운 손님들 몇 테이블이 있으면 순식간에 분위기가 도떼기시장처럼 된다. 이런 곳에서 술을 마시다 보면 스트레스가 풀리는 게 아니라 오히려 스트레스가 더 쌓인다. 같이 소리를 지르다 보면 싸움이 나기도 한다. 한창 젊을 때는 싸움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이가 들다 보니 필자가 피해야지 하게 된다. 그래서 술집을 들어갈 때 시끄러우면 아예 발길을 돌려 다른 곳으로 간다. 당장 시끄럽지 않아도 테이블에 빈 소주병이 잔뜩 올라가 있으면 주의 대상이다. 단체 손님들도 역시 주의 대상이다. 단체 손님들은 말소리도 시끄럽지만 박수까지 치면서 난리를 칠 때도 있다. 이런 술집에 들어갔다가 그냥 나올 때는 주인에게 시끄러워서 못 앉겠다는 이유를 말해준다. 우리나라 술집 주인들은 주변 손님들 생각하지 않고 떠드는 사람들을 자제시키지 않는다. 손님이 떨어져 나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자 같은 손님을 보면서도 뭔가 느껴야 한다. 늦은 시간의 당구장도 그렇다. 술을 1차 마시고 온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다. 한 당구대에 여러 명이 같이 당구를 치는 경우, 승부욕이 더해져 한 큐마다 괴성이 터져 나온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태도는 전혀 없다. 이런 사람들 때문에 미성년자들에게도 개방된 당구장이 건전하게 발전할 수 없다. 청소년들이 어른들의 이런 모습을 보고 뭘 배우겠는가. 전철 안에서 큰 소리로 통화하는 것도 우리 사회에서는 어느 정도 용인되어 있는 편이다. 공공장소에서는 통화를 자제하라는 포스터를 아무리 붙여놔도 소용없는 것이다. 큰 소리로 통화하는 사람에게는 대놓고 눈치를 줄 수 있다. 그러나 작은 목소리로 소곤소곤 오래 통화하는 사람에게는 조언하기가 참 그렇다. 귀에 거슬리는 건 마찬가지인데 말이다. 아예 전철 안에서를 못 하도록 조치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맨 끝 칸에서만 통화를 허용하든지 해서 불편함을 줘야 한다. 그렇게 하면 불편함 때문이라도 전철 내 통화를 포기할 것이다. 우리나라 음식점들은 소음에 대한 배려가 전혀 안 되어 있다. 대부분의 서민 음식점들은 인테리어에만 신경을 쓴다. 벽면도 천정도 소음 흡수가 전혀 안 되니 소리가 그대로 반사되어 돌아온다. 천정을 좀 높이면 소음이 올라갔다 내려오면서 어느 정도 흡수된다. 벽면이나 유리창도 반듯하게만 할 것이 아니라 소음을 어느 정도 흡수하는 자재를 쓰거나 입체적으로 만들어야 한다. 물론 비용이 더 들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소음 공해’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봐야 할 때다. 선진국으로 가기 위해서는 더더욱 고민해봐야 할 사항이다. 어느 대체의학자가 쓴 책을 보니 이렇게 시끄러운 사람은 심장에 문제가 생겨 일찍 죽을 확률이 높다고 한다.
- 2017-05-25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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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은 것이라도 실천하는 삶
- 매주 월요일 10시부터 12까지 이웃에 사는 사람 10 여명이 모인다. 정기적으로 만나고 있는데, 이 모임에는 한 가지 특징이 있다. 처음에는 기록을 남겨 모두 블로그를 써 보자는 취지였다. 다섯 번의 블로그 교육을 마친 후 무엇을 할까. 영화를 보고 명대사와 명장면 감독의 의도를 알아채고 우리가 생각하는 관점을 자유토론으로 한다. 이 번 주 영화는 ‘나, 다니엘 블레이크’였다. 주인공은 40년 목수로 살다 심장병이 악화되어 실직했다. 생계급여를 컴퓨터로 신청하는 절차가 까다로워 좌절하지만 같은 처지의 이웃을 도우며 비인간적인 관료사회를 위해 투쟁한다. 이 영화를 본 후 느낀 점은, 노년은 개선할 사항이 있으면 적극적으로 건의하여 개선되도록 하자. NGO 활동도 해보자. 기록을 남기자. 혼자의 힘으로는 어려울 수 있지만 ‘분당월요블로거’ 모임이 힘을 합치면 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갖게 되었다. 격주로 포토에세이를 한다. 주변에 사물을 호기심을 갖고 관찰하며 사진을 찍고, 에세이 형식으로 글을 쓴다. PT에 띄워 돌아가며 발표한다. 사진과 글에 대해 서로 의견을 나눈다. 그래서 11월까지 계속하며, ‘포토에세이그룹’에서 ‘문득’의 제목을 달고 포토에세이 책을 내기로 한다. 오후에 ‘내이야기를 통한 책쓰기’ 나 누구지? 를 알아야 다음 글을 쓸 것이 아닌가. 지금 여섯 명이 4회 차 진행하고 있다. 책을 쓸 때 다섯 명이 돕는 사람이 있으면 제대로 쓴 책을 낼 수 있다고 하지 않는가. 교정도 서로 돕고, 8월말에 출판기념회를 목표로 한다. 모인 사람 가운데 전문가가 있어 서로 강의자와 수강자가 된다. 결론은 그 동안 해보고 싶었던 것을 발표하며 실천에 옮긴다. ‘인생은 B to D’라는 말로 시작한다. ‘탄생(Birth)’을 의미하는 B와 ‘죽음(Death)’을 의미하는 D의 사이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것은 ‘선택(Choice)’을 의미하는 ‘C’다. 오늘이란 시간은 자신이 선택할 수 없지만 아침에 일어나 시작하는 일들의 선택은 자신의 몫이기 때문에 앞으로 남은 삶에서의 선택도 매우 중요하다. 선택이 중요하며, 실천하는 삶은 더 값지다. 경봉(鏡峰) 스님은 ‘삶은 한 마당 연극’으로 사람은 누구나 한 권의 연극 각본을 가지고 태어나는데, 그 각본의 저자와 연극 무대의 감독과 주인공도 바로 ‘나’라고 설파했다. 삶이라는 연극에서 내가 주인공으로 중요한 것처럼, 부모나 친구의 삶에서는 부모와 친구가 주인공으로 소중한 존재다. 그래서 서로 신뢰하고 배려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가까운 곳에 사는 사람들의 모임이 가고 싶은 곳이 됐다. 그렇다! ‘삶’은 잠시 머물다 가는 것이고, 흐르는 세월은 붙잡을 수 없다. 살아 있는 동안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어도 죽을 때는 티끌 하나도 못 가지고 가는 삶을 생각하며, 자신에게 “축복받고 태어난 삶을 건강하고 아름답게 마감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질문을 던져본다. 혼자서는 엄두가 안 난다. 서로 토닥이며 도우며 공동체 삶을 꿈꾼다. 그래서 우리는 작은 것이라도 실천한다. 그래서 실천하는 삶은 아름답다.
- 2017-05-24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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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밴드 ‘철없는 아빠들’, 꼰대요? 우리 인생 사전에는 없습니다!
- 매주 목요일 저녁. 기타 가방을 메고 드럼 스틱을 든 남자 다섯이 남양주의 한 대형 가구 상점에 출몰한다. 한두 번이 아니다. 이곳에 모여든 기간만 5년째, 이미 수십 년 전부터 같은 목적으로 수도 없이 만나왔다. 이들 중에는 40년이 더 된 사이도 있다. 으슥하고 인적 드문 곳에 자꾸 모여드는 이유는 철들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라고? 매주 같은 시간, 조건반사처럼 만나 연주하고 노래한다는 5인조 밴드 ‘철없는 아빠들’이다. 연습이 시작되면 철없는 아빠가 아닌 20대 꽃미남 밴드 시절로 돌아가는 것만 같다. 철없을 때 만난 친구들입니다! 하나, 둘 매장 셔터가 내려지고 어둠이 내려앉은 남양주 가구거리에서 기타 튜닝 소리가 울려 퍼진다. 철들 생각 없는(?) ‘철없는 아빠들’이 모인 곳은 베이스 기타 장시영씨가 운영하는 가구 매장. 이곳에 ‘철없는 아빠들’만의 전용 연습실이 있다. 머리가 하얗고 배가 나오고 손자까지 본 할아버지들이지만 연습실에 들어서는 순간, 나이는 숫자놀이에 불과하다. 드럼 치는 김영석(55)씨를 제외한 네 명은 58년 개띠로 김종민(리드기타), 한동호(보컬·기타), 이인섭(건반), 장시영(베이스)씨다. 초등학교, 고등학교, 군대 친구, 와이프의 대학 후배까지 제대로 얽히고설키다 밴드까지 만든 멤버다. 장시영 원래 어렸을 때부터 알고 있었던 사이예요. 기타 치고 음악 하는 거 좋아해서 갓 스 무 살 때부터 다들 밴드 경험이 있죠. 다시 음악을 하게 된 건 인생이 너무 지루한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어요. 김종민 술 먹고 밴드 불러서 노래를 부르다 보니 저희도 잘할 거 같더라고요. 차라리 우리가 모여서 밴드를 하자! 그때가 아마 서른세 살이나 서른네 살이었을 거예요. 아내들이 돈 안 벌고 맨날 음악만 하니 철없다고. 그래서 팀 이름이 ‘철없는 아빠들’이 된 겁니다. 김종민씨가 다시 기타를 잡게 된 건 장시영씨 때문이었다. 김종민 이 친구(장시영)가 원래 군대 선임이었어요. 제대하고 8년쯤 지났을 때 저에게 게리무어(Gary Moore)의 ‘스틸 갓 더 블루스(Still got the blues)’를 들려줬어요. 그걸 듣고 정말 나자빠진 느낌이었습니다. 없는 형편에 게리 무어가 쓰던 기타를 샀어요. 심취해서 계속 기타를 치고, 그전보다 더 잘하고 싶어졌어요. 그러다 그룹을 만들겠다 했을 때 인섭이가 합류했습니다. 지금은 건반, 관악기, 퍼커션에 코러스까지 담당하는 이인섭씨. 밴드에 들어올 당시 다룰 줄 아는 악기가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건반을 치더니, 플루트에 코러스까지 넣을 줄 아는 밴드 알짜배기로 성장했다. 이인섭 피아노 전공자처럼 할 수는 없어요. 주로 기타 코드를 보고 연주하고 전주곡 같은 것이 있으면 열심히 배우려고 하는 거죠. 어린 시절 만난 사이이다 보니 각자의 직업도 다양하다. 보컬 담당 한동호씨는 부동산임대업을, 기타 치는 김종민씨는 외국계 자동차 회사 이사다. 베이스 장시영씨는 얘기했다시피 가구업을 하고, 건반 이인섭씨는 성형외과 의사, 드럼 치는 김영석씨도 개인사업체 대표다. 매주 모여 연주 연습을 하다 보니 나이를 어디로 먹는지 다들 잘 모르겠다고 입을 모은다. 장시영 흔히 얘기하는, 고리타분하게 남의 일에 참견하는 꼰대 성향은 없어요. 음악 하는 친구들과 대화하고 항상 웃고, 즐거운 시간을 보냅니다. 그러고 싶어서 음악을 하는 거거든요. 생활이 힘들다거나 경제적인 부분에 대해서 서로 대화하지 않아요. 이들의 전용 연습실은 방음 시설과 장비 면에서 전문 밴드의 것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는 수준이다. 장시영 집사람은 제가 여기서 연주하는 걸 좋아해요. 아내는 음악에 둘러싸여 살아왔기 때문에 음악이라면 긍정적이죠. 연습실 만들 때 배려를 많이 해줬습니다. 한동호 그 전에는 돈을 주고 연습실을 빌려서 사용했어요. 그런데 왜 이곳으로 왔냐면 저희가 매번 전문 연습실을 사용했던 것이 아니거든요. 방음이 안 돼 있으면 시끄러우니까 장소 구하기가 어려웠어요. 여기는 방해가 안 되니까 좋죠. 김종민 에피소드가 있어요. 송파의 한 지하 연습실에서 연주를 하는데 교회에서 예배 보던 분들이 찾아와서 시끄럽다며 저희더러 마귀라고 하더라고요. 정말 그곳에 교회가 있는 줄 몰랐어요. 드나드는 길이 달랐어요. 그래서 더 열심히 연주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정말 웃겼어요(웃음). 남양주 연습실에 온 이후로는 누구 눈치 볼 일 없이 음악에 몰두할 수 있어서 좋다. 지금까지 철없는 아빠들이 연주했던 음악은 약 150여 곡. 공연을 통해 관객들에 연주 실력을 검증받은 바 있다. 올 가을쯤 장시영씨의 처제가 소속해 있는 밴드와 같이 공연할 계획이라고. 장시영팀은 자작곡도 있고 해서 10월이나 11월 초에 공연할 생각으로 공연장을 알아보고 있습니다. 언제까지 연주할 수 있을까? 장시영씨는 이 질문에 대한 고민을 해봤다고 한다. 그때 한 생각은 밴드 중 누군가가 흥을 잃을 때 연주가 멈출 것 같다고. 장시영 우리가 언제까지 이 흥을 유지할까. 우리 중 누군가가 흥을 잃을까 걱정입니다. 어떠한 계기가 됐건 흥을 잃을까봐요. 독려를 많이 해주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당장은 그 ‘흥’이라는 것이 떨어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듯싶다. 지금 그들의 흥이라면 70이 돼도 80이 돼도 끄떡없을 것 같다.
- 2017-05-23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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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른
- “어 흠”한다고 “네 이 놈”한다고 우긴다고 떼쓴다고 어른인가요? 이해해 주고 포용해 주고 배려해 주고 사랑해 주셔야 어르신이지요.
- 2017-05-16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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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이 든 부모를 사랑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하여
- 브라보마이라이프 동년기자 2기 출범식에서 의례적인 선물처럼 건네받은 책이 바로 기시미 이치로가 쓴 라는 책이다. 바쁜 일상과 맞물려 책은 한동안 거실 한 귀퉁이에 처박혀 버렸고 잊을만한 시간에 ‘독후감’ 이라는 것을 써야 한다는 당부의 말이 떠올라 먼지를 뒤집어 쓰고 책상밑에 팽개쳐 졌던 책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첫장을 넘기면서 격한 공감과 함께 책 속으로 빠져들면서 단숨에 한 권을 통독해 버렸다. 아들러 심리학의 권위자인 기시미 이치로가 ‘나이 든 부모와 어떻게 지낼 것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직접 자기 삶에서 체득한 심리학적 고찰을 바탕으로 제시했다. 평균 수명이 늘어나며 '나이 든 부모와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화두는 개인을 넘어 사회 문제로 확대되고 있다. 저자인 기시미 이치로는 젊은 나이에 뇌경색을 앓아 재활 중에 죽음을 맞이한 어머니를 목전에서 경험하고 삶의 궤도가 전혀 새로운 방향으로 전환하는 계기를 맞이한다. 그리고 돌아가신 어머니의 나이를 지나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자신에게 인생이란 어떤 것인지 나이가 들어가는 것은 어떤 것인지 사유(思惟)하는 계기를 경험한다. 부모님 두 분을 병수발 했던 저자이기에 현실에서 직접 맞닥뜨리게 되는 사소한 부분을 언급할 때 크게 공감하게 된다. 별것 아닌 일이지만 우리가 실제로 부딪치게 되는 것은 항상 작고 사소한 것들임을 감안하더라도 경험담에서 나오는 이야기가 귀를 기울이게 만든다. 저자는 어머니의 병수발과 아버지의 치매로 인해서 ‘나이든 부모’ 와 살며 그들을 이해하는 일이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당부한다. 매우 뻔 한 소리 같지만 실제로 해 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조언이라는 것을 조금만 읽어보면 알게 된다. 부모님도 몸이 아파 누군가에게 의지해서 생활하는 것이 처음이고, 그런 부모님을 지켜보며 직, 간접적으로 간호해야 하는 자식들도 처음인 것은 마찬가지이다. 그래서일까 고령화 사회로 접어드는 우리 사회에서도 더 이상 병간호에 대한 책임을 가족에게만 지어서는 안 된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아픈 사람도 그 사람을 지켜봐야 하는 가족 누구도 죄인이 아니지만 사랑으로 시작한 일이 한 가정을 파탄 내는 경우를 우리는 종종 보게 된다. 결국은 가족이라고는 하나 그것 또한 인간관계이다. 후회를 하지 않게 되게끔 ‘하루하루 이 사람과 사이좋게 생활하자’ 라고 끊임없이 생각하는 것이 존경입니다.(P.104). 병이 든 상태가 가장 낮은 위치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P.117). 자식 눈에 아무것도 안하고 하루를 보내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부모님의 현재가 불행한 것은 아니니까요.(P.127),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일본의 철학자 기요카즈는 그의 저서 『끊을 수 없는 생각』에서 “무언가 하지 않고도 그저 가만히 옆에 있어주는 것이 얼마나 힘이 되는지 우리 사회는 잊고 있다” 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 말에 극히 공감이 가는 것은 나에게 있어 2년 전 103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신 어머님을 떠올리게 된다. 어머님은 90의 중반까지는 비교적 정신적으로 건강 하게 사셨으나 그 이후에는 오락가락하는 정신과 육체적인 피폐로 인해 병원과 요양원 신세를 지게 되셨다. 불완전한 모습의 어머니이지만 살아 계실 때에는 마음의 많은 위안이 되었고 형제, 자매들을 잇는 끈이 되어주셨다. 어머님이 돌아가시자 허탈함에 우울한 감정이 지속되기도 하였거니와 형제, 자매를 이어주던 끈도 끊어지고 말았다. 본문에서 아버지에게 “하루 종일 이렇게 주무시기만 하니 제가 안와도 되겠네요.”라고 하자 아버지는 “그런 게 아니야, 네가 옆에 있으니까 안심하고 잠드는 거야”(P.147),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드는 건 생산성으로만 가치를 측정하는 이 사회가 낳은 문제이기도 하다. 부모님을 떠올렸을 때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후회’ 다. 언제나 더 상냥하고 친절하게 대해 드려야지 싶다가도 내 기분에 따라 행동은 확연히 달라진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이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화는 보통 지르고 난 뒤에 후련한 마음이 드는 경우가 있는데 반해, 부모님과의 갈등은 내가 화를 내고 돌아서는 순간부터 후회가 밀려온다는 것이다. 화를 낸 상대는 나지만 속이 후련하기 보다는 “조금만 더 참을걸. 하는 죄책감이 물밀 듯이 밀려온다. 순간적으로 화가 끓어오르더라도 부모님과 사이좋게 지내고 싶다면 가능한 권력 싸움에서 물러나야 한다. 사이가 좋아지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쓸데없이 에너지를 낭비하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을까?(P.173). 누군가와의 관계를 개선하고 싶다면, 상대의 표면적인 말과 행동만 받아들이지 말고 좋은 의도를 발견하도록 노력해야 한다.(P.180). 진지하되 심각해지지 말라 부모님을 간병하는 일은 진지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심각해 질 필요는 없다. 진지한 것과 심각한 것은 다르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부모님을 보살필 때에는 다치지 않도록 온 신경을 집중해서 배려할 필요가 있다. 간병이 힘들다고 미간에 주름잡고 한숨을 쉴 필요는 없다. 그런 심각한 표정을 짓는데 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간병하는 일이 얼마나 큰일인지 부모님이 알아주었으면 하고 바라기 때문이다. 둘째는 다른 형제들이 간병의 고단함을 알아주길 바라기 때문이다. 물론, 간병이 큰일이긴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에 내색할 필요는 없다. 간병이 힘든 일이란 걸 다른 이에게 과시하기 시작하면 간병하는 사람은 진지해 지기 보다는 심각해지고 만다. 여건상 103세에 세상을 뜨신 어머니께서 생전에 계실 때는 나는 한참 사회활동을 하고 있을 때였다. 하루 온종일 두서너 평의 작은방에서 보내셔야 했던 어머니는 가끔씩 전화를 하셨다. 대화 내용은 뻔했다. 어머니의 생각 속에 잠겨 있는 말들을 반복해서 하시곤 했는데, 한창 일처리에 바쁜 상황에서 계속해서 어머니의 얘기를 들어 드릴 수는 없었다. 얼마나 답답하고 아들이 그리웠으면 그랬을까? 하는 생각은 수없이 했으나 현실은 바쁘다는 핑계로 대충 얼버무리고 끊곤 했다. 그 때를 생각하면 뒤늦게 후회가 참 많이 된다. 그 상황에서 어머니의 얘기를 들어드리는 일 말고 더 급한 일이 무엇이었을까? 뒤늦은 반성을 해 보지만 어머니는 이미 안계시니 그립기 짝이 없다. 이제 어머니의 나이를 향해 쏜살같이 흘러가고 있다. 그러니 어차피 사람은 늙어 갈 수밖에 없고 ‘나이 든 부모를 사랑할 수 있습니까’ 라는 화두는 결국은 나의 문제로 대두 되고 있다. 이 한권의 책을 통해서 나이 든 부모를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을 사회는 물론 우리 모두가 자각하여야 할 듯하다.
- 2017-05-11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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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동안 잊었던 어머니의 음성
- 지난 4월 14일 이투데이 신문사에서 자매지 제2기 동년기자단 발단식이 있었다. 1기 때보다 더 체계적이고 철저한 준비로 보다 성숙된 모습을 보여준 이 자리에는 지난해 4월 선발되어 활동해온 1기 기자들과 2기로 선발된 40여 명의 기자들이 자리를 함께했다. 이투데이 총괄 대표 및 이투데이PNC 대표, 브라보 편집국과 임직원 모두는 따뜻하고 친절하게 동년기자들을 맞이해주어 분위기가 훈훈했다. 지난해와 달리 의자 배열도 회의식으로 배치해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인사를 나눌 수 있도록 배려해 화기애애한 시간을 만들어줬다. 총괄 대표님께서는 축사를 시작으로 글쓰기에 관해 조언을 해주셨다. 글쓰기는 특별히 잘 쓰려고 애쓰는 것보다는 일상의 이야기를 평범하게 쓰는 것이 가장 좋다고 하시는 말씀에 많은 공감이 됐다. 특히 대표님이 하신 말씀 중에 인상적인 내용이 있었는데 그것은 요즈음 나이 드신 어머님을 만날 때마다 녹음을 하신다는 말씀이었다. 순간 필자의 귀가 쫑끗 서며 정신이 번쩍 들었다. 대표님이 어머님을 만날 때마다 녹음을 하는 첫 번째 이유는 어머님의 삶을 알아가기 위함이고, 두 번째 이유는 어머님의 음성을 영원히 간직하기 위해서라고 하셨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가슴이 먹먹해지며 필자의 어머니가 생각났다. 애써 어머니의 음성을 기억해보았지만, 들려오기는커녕 아득히 먼 이야기처럼 아스라한 느낌만 몰려왔다.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고 어머니가 너무 보고 싶었다. 필자는 미국에서 지내는 동안 정신없이 바쁜 삶을 살았다. 가게를 비울 수 없어 아침 새벽에서부터 저녁까지 일만 했다. 그러던 중에 한국에 계신 어머니가 운명하셨다는 통보를 받았다. 때마침 비자 문제로 한국을 드나들 수도 없을 때였다. 딸이 비보를 전해줬다. "엄마! 놀라지 말아요. 진짜 놀라지 말고 차분하게 들어요. 외할머니, 그러니까 할머니가 오늘 아침에 돌아가셨어요."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두 다리의 힘이 풀렸고,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그저 멍하니 앉아 달려갈 수 없는 처지를 한탄할 수밖에 없었다. 장례식이 치러지는 4일 내내 필자는 전화통만 붙잡고 있었다. 국제전화로 생중계 듣듯 어머니 마지막 가시는 길을 전해 들어야 했다. 이제 영영 헤어져 뵙지 못할 어머니께 인사도 못 드린 불효자가 되어 몇 날 며칠을 눈물 속에서 보냈다. 그리고 그 시간들은 저 혼자 무례하게도 흘러갔다. 필자의 어머니는 팔십 평생을 병원에서 사셨다. 아버지로부터 받은 지독한 정신적 충격으로 사시는 내내 고달픔의 연속이셨을 것이다. 우리 집 다섯 자식, 작은집 네 자식을 어머니는 자신의 호적에 올려야만 하셨다. 돌아가시기 몇 년 전부터는 요양원에서 생활하셨고 우리 집 5남매는 그곳에서만 엄마를 만나야 했다. 돌아가시기 5년 전, 한국에 잠깐 방문했던 필자는 엄마에게 거의 매일 찾아갔다. 어머니는 실내에서만 생활을 하셔서 그런지 얼굴은 하얬고 약물에 중독되어 퉁퉁 부어 계셨다. 몸은 날로 여위어갔지만 만날 때마다 둘째 딸인 필자의 두 손을 꼭 잡고 자식들 걱정에 여념이 없으셨다. 그러고는 마지막에는 꼭 " 나 좀 살려다오! 나 좀 데려가줘!" 하셨다. 그 말씀은 가슴에 꽂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하필이면 기억하는 게 어머님의 슬픈 음성뿐이다. 필자는 마음이 아팠지만 고개를 숙인 채 엄마를 자리로 조용히 안내하고는 살금살금 도망치듯 요양원을 빠져나왔다.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창문 너머로 엄마의 모습을 훔쳐봤다. 어머니는 어느 날 필자가 사다 드린 새 옷을 갈아입고 챙 달린 흰 모자를 쓰신 채 자리에 누워계셨다. 몸이 불편하신지 얼굴을 찡그리신 채 인상을 쓰고 두 눈만 껌뻑거리고 계셨던 어머니. 필자는 무거운 마음으로 독하게 돌아섰는데 그때 그 모습이 영영 마지막이 되고 만 것이다.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죄책감을 안고 필자의 고향인 충남 부여, 엄마를 모신 곳으로 달려갔다. 엄마의 다정했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아버지와 함께 나란히 누워 계셔서 외롭지는 않을 것이라고 애써 위로하며 눈물만 남기고 그 자리를 떠나왔다. 그때만 해도 엄마의 여린 음성이 어렴풋이 들려오는 듯했다. "괜찮다. 나는 이제 편안해. 걱정 말아라. 아버지가 영원히 내 곁에 있으니까." 대표님의 말씀을 듣다가 왜 필자는 그런 생각을 못했을까, 어머님의 음성을 녹음해둘걸 후회가 되었다. 늘 바쁘다는 핑계로 엄마를 잊고 산 세월이 죄인처럼 느껴졌다. 이제라도 가끔씩은 어머니와의 추억을 되새기며, 하늘 어딘가에서 필자에게 건넬 착한 우리 어머니의 음성을 어렴풋이나마 느끼며 살아야겠다. 바람이 불고 비까지 내리는 날이었지만 동년기자단 발단식에 참석하기를 참으로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2기 기자들과 인사를 나누고 지난 1년 동안 서로의 글을 보며 삶을 공유하고 정을 쌓아온 1기 기자들과도 얼굴을 마주하는 행복한 시간이었다. 더불어 필자의 감성을 일깨워주신 총괄 대표님의 감동적인 말씀에 감사드린다. 임직원분들의 친절함에도 고맙다는 말을 전해드리고 싶다. 저 하늘에서도 영원히 내 삶의 주춧돌이 되어주실 우리 엄마를 기리며….
- 2017-04-17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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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취미를 직업으로 살리기 위한 10계명
- 조수경 ㈜글로벌아너스 대표 ‘취미생활을 즐기면서 돈도 번다.’ 이보다 더 행복한 직업이 또 있을까? 앙코르 커리어에서는 자기 이해를 바탕으로 자기에게 맞는 일을 찾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래서 취미를 통한 창직이야말로 자기에게 제일 잘 맞는 일을 찾을 수 있는 아주 좋은 방법이다. 필자가 운영했던 연세대, 이화여대, 항공대 중장년 아카데미에서도 취미를 통한 창직이 많이 이루어졌다. 그중 항공대 ‘드론 활용 창업 과정’에서는 드론(drone)을 취미로 좋아하는 시니어분들이 대거 참여했다. 교육 이후 드론과 연계해 창직을 하신 분들이 많았는데 자신이 좋아하는 취미로 일을 가져서 그런지 누구보다도 열정이 넘치는 삶을 살고 계신다. 하지만 무턱대고 취미를 직업으로 삼았다가는 실패하기 십상이다. 취미가 수익까지 가져다주는 성공적인 직업으로 연결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1. 취미와 재능은 별개임을 인식하라 사람들은 흔히 자기가 좋아하는 것과 타고난 재능을 혼동한다. 내가 춤을 좋아한다고 해서 댄서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과 타고난 재능을 확실히 구분할 수 있어야 돈까지 벌 수 있는 직업을 만들 수 있다. 2. 잘할 수 있는 분야를 찾아라 좋아하면서 자신이 잘할 수 있는 분야를 찾는 것이 취미를 통한 창직의 핵심이다. 좋아하기만 하고 잘할 수 없다면 수익을 창출하기가 어렵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면서도 잘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객관적인 기준을 갖고 제대로 파악하라. 3. 열정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지식과 전문성을 갖춰라 취미를 열정적으로 하는 것과 그것을 성공적인 직업으로 바꾸는 데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노래를 취미 삼아 열정적으로 한다고 해서 다 가수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직업이 되기 위해서는 상당한 수준의 지식과 전문성을 갖춰야 한다. 4. 작게 점진적으로 시작하라 창직은 무에서 유를 창조해나가는 것이기에 리스크가 존재한다. 그래서 우선 수익이 있는 다른 일을 하면서 작게 점진적으로 접근하기를 권한다. 필자가 아는 ‘아더’라는 정신과의사 선생님은 탱고를 너무 좋아해 의사로서 일을 하면서 댄스치유학회도 만들고 탱고 강사도 하면서 점진적으로 접근해 현재는 탱고업계에서 자리를 잡았다. 5. 경력과 경험을 최대한 활용하라 시니어의 최고 자산은 수십 년간의 경험과 경력이다. 취미를 통한 창직에서도 최대한 자신의 경험과 경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 성공 가능성이 높아진다. 실례로 항공대 ‘드론 활용 창업 과정’의 교육생이었던 드론활용연구회 유진철 대표는 대안학교 교장으로서의 경력을 활용해 자유학기제와 연계해 드론 교육 사업을 하고 있다. 교육시장을 잘 알기에 다른 분들보다 빠른 성공이 엿보인다. 6. 고객을 이해하라 비즈니스에 대한 기본은 나를 필요로 하는 고객을 이해하는 것이다. 취미로 사진을 하던 은퇴자들이 설립한 장애인 전문 사진관 ‘바라봄 사진관’은 언론에 많이 보도되고 크라우드펀딩이 성공하는 등 사업이 번창하고 있다. 장애인인 고객을 잘 이해하고 배려한 것이 성공의 핵심 키다. 7. 시장 공략은 창의적으로 하라 취미를 통해 창직을 하더라도 남들과 똑같이 시장에 접근하면 실패하기 십상이다.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발상의 전환으로 틈새시장을 찾아 공략해야 실패 가능성을 줄일 수 있다. 필자가 진행한 중장년 아카데미 교육생이었던 ‘미벨의 감성 여행 스토리텔러’ 박미종 대표는 은행 지점장까지 지낸 분인데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스토리가 있는 ‘스페인 여행 이야기’를 만들어 사업을 시작, 제2의 인생을 멋지게 살고 있다. 8. 반 박자만 앞서가라 취미를 통한 창직을 제대로 하려면 시대의 흐름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좋아하는 마음에 너무 앞서가면 시장이 형성되기 이전이라 때로는 고객을 확보하기가 쉽지 않다. 필자가 드론 활용 창업 과정을 할 때도 한국은 드론시장이 형성되는 초기였기에 이 부분을 강조했다. 창직을 하려면 5년 정도만 앞서가라. 그렇게 반 박자 앞서갈 때 성공 가능성은 더욱 커진다. 9. 커뮤니티를 최대한 활용하라 취미를 통한 창직은 커뮤니티 활동을 열정적으로 하다가 직업으로 발전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동호회는 취미 교류의 장인 동시에 정보 교류의 장이다. 활발히 교류하다 보면 정보도 얻고 그 커뮤니티 사람들이 고객이 되기도 한다. 종종 창직의 기반도 마련된다. 10. 인내하며 실패를 즐겨라 취미를 통한 창직은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릴 수 있다. 어떤 분은 재즈를 너무 좋아해 직장생활을 하면서 수십 년간 투잡으로 공연을 뛰다가 은퇴 후 전업 재즈 가수가 되었다. 이렇게 취미를 통한 창직은 때로는 수십 년이 걸릴 정도로 시간이 많이 필요할 수 있다. 하지만 즐기면서 할 수 있기에 실패해도 계속 시도하다 보면 어느덧 창직의 길로 들어서 있을 것이다. 취미를 통한 창직은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자신감을 갖고 앞으로 나아가보자. Bravo Your Life!
- 2017-04-10 17: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