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안네 소피 무터(Anne Sophie Mutter, 1963~ )의 바이올린 독주회 맨 앞자리에 김영태 시인과 나란히 앉아, 모차르트의 바이올린 소나타 e단조 k.304를 들었다. 41개 바이올린 소나타 중 유일한 단조의 선율은, 봄밤을 깊은 심연의 사색에 잠기게 하였다.
연주가 끝나고 울퉁불퉁한 돌길을 휘적휘적 걸으며 잠시 하늘을 보았다. 아
불현듯 옛 기억이 떠오르곤 한다. 좋았을 때가 생각나면 크게 문제 될 게 없겠지만 아쉽게도 안타까운 것들이 대부분이다. 하지 않았어야 할 말들, 해야 했지만 하지 못한 행동들, 만나지 말아야 했을 사람들, 겪지 않아도 좋았을 경험들….
무심결에 실수하거나 다분히 고의로 악행을 저지르는 과거의 나와 머릿속에서 마주칠 때마다, 또는 내게 그렇게 하는 다른 누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이 부부를 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깊다.
“죽기 전에 ‘베토벤의 심포니9’, ‘햄릿’과 ‘맥베스’, ‘라이더 스핀’ 등을 발레로 창작하고 싶어요.”
한 남자가 자신의 꿈을 이야기하자, 아내의 목소리가 커진다.
“곧 은퇴하신다더니 또 만들어요? 은퇴 못하겠네. 하여튼 이게 문제야.
1990년대 중반 CF 스타였던 CEO가 있었다. 바로 신홍순 컬처마케팅그룹(CMG) 고문이 그 사람이다. 당시 LG패션 사장이었던 신 고문은 멜빵에 컬러풀한 셔츠를 입고 “패션으로 기억되는 나라를 만들겠습니다”라는 말로 사람들의 시선을 휘어잡았다. 20여 년 동안 패션 업계에 몸담았던 경력, 재즈와 클래식 마니아이자 전문 공연 기획자, 미술 컬렉터, 패션
1946년 양력으로 11월 3일에 태어났다. 경주 외곽에 있는 나원, 외갓집에서였다. 아버지는 나의 출생이 당신의 호르몬 작용의 산물이라 했고, 엄마는 운명이라고 했다. 1947년에 서울로 갔고 1950년 한국전쟁이 나서 다시 나원으로 돌아왔다. 서울에서는 아궁이에 검은색 토탄 가루를 뿌려가며 밥을 짓던 것과 고무줄 장사를 따라다녔던 기억이 희미하게 남아
“나의 실그림은 예술 혹은 창조 자체를 실행에 옮기는 나의 삶이자 나의 우주다.” 여기 자신의 혼을 온전히 실어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열어가고 있는 예술가가 있다. 예순 중반의 나이에 자수를 통한 ‘실그림’이라는 독보적인 영역을 개척하고 있는 손인숙(孫仁淑·64) 예원 실그림 문화재단 관장을 만났다.
글 김영순 기자 kys0701@etoday.co.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 6학년 때 나는 장래 인생의 목표를 세웠다. 어머니나 담임선생님도 같이 소망했다. 그리고 그 장래 목표는 중학교, 고등학교에 이르는 동안 한 번도 변하지 않았다. 중학교, 고등학교 내 생활기록부란을 쓰시는 선생님은 편했을 것이다. 위칸 하나만 쓰면 나머지는 점 두 개로 같다는 표시를 하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된 데에
‘빠빠라빠빠 빠빠빠 달려라 달려 로보트야. 날아라 날아라 태권브이’ 이제는 익숙한 이 멜로디. 1970년대 어린이들의 가슴에 승리의 브이를 그려 넣었다. 이제는 그 어린이들이 모두 성인이 돼 또 다른 어린이들의 아버지,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태권브이를 찾는다. 당시에는 우상, 이제는 추억이 돼 버린 태권브이. 그 역사적인 만화 뒤에는 감독 김청기(金靑基·7
글 유성호 문학평론가·한양대 교수
1945년 8월 15일, 한 사상가의 표현대로 ‘도적처럼’ 찾아온 해방은, 고통스러운 식민지 시대를 살아온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새로운 가능성과 맞닥뜨리게 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우리 근현대사에 가장 중요한 전기를 마련해준 이날은 무엇보다도 그동안 박탈당했던 모국어의 근원적 회복을 가져다주었다. 이때는 일제 강점기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