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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라산 백록담을 향하여
- 제주도에는 가끔 갔지만 한라산에 올라 백록담을 못보고 내려오기를 여러 번, 기어코 이번에는 백록담을 보고 오기로 하고 2박3일의 제주도 여행을 계획했다. 인생이라는 게 다 그렇 듯, 다람쥐 채바퀴 돌 듯 돌아가는 세상에 늘 퍽퍽하고 지루하기만 한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고자 군 시절의 동기인 3부부가 의기 투합하여 꽃향기가 그윽한 5월의 어느 날 제주도로 떠났다. 2박3일 중, 한라산 등반은 두 번 쨋날로 정했다. 상판악에서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인 한라산 등반!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잠속으로 빠졌들었는데…. 또드락 뚝딱! 또드락 뚝딱… 고요한 아침공기를 깨고 거실 쪽에서 도마에 칼질하는 소리가 아련하게 귓전을 울렸다. 눈을 번쩍 떠보니 창문너머로 환하게 동이 터오고 아직은 어둠이 채 가시지도 않은 주방에서 식사준비를 하는 아낙들의 조용하면서도 부지런한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덕분에 아침식사는 걸쭉한 전복죽으로 영양을 보충하였는데, 각자가 한라산 등반을 대비하여 두세 그릇씩을 뚝딱 비워 든든하게 속을 채웠다. 해발 1950m의 한라산 정상까지 무사히 갈 수 있을는지 걱정은 태산이면서도 웬 먹을거리를 그리도 많이 준비하였는지? 돼지고기 수육에 홍어회와 양념장류, 각종 나물류, 그리고 금세 지은 밥을 바리바리 배낭에 넣고 그것도 모자라 막걸리에 물까지 챙겨 넣고 보니 배낭무게만 해도 어깨가 묵직하기 그지없었는데, 설상가상 무거운 카메라까지 목에 걸고 보니 아득하기만 했다. 하지만 우리가 누구랴! 한창 젊은 시절에는 웬만한 고지는 단숨에 뛰어오르던 역전의 용사들이 아니던가? 한라산 백록담까지 오르기 위해서 성판악코스를 택했는데 성판악코스는 편도 9.6km 이며 보통 걷는 시간만 4.5시간을 잡아 왕복 19.2km로 총 9시간을 걸어야만 하는 험난한 코스였다. 다행히 코스자체가 완만하다고 하여 한결 마음은 놓였지만 그래도 마음은 놓이지를 않았다. 그렇게 시작한 한라산 등반길, 다행히도 비가 그친 산길에는 시원한 나무그늘과 신선함이 묻어났고 싱그러운 숲속에서 산들산들 바람이 불어와 상쾌하게 발걸음을 시작하였다. 완만한 등산로라고 하지만 제주도 특유의 울퉁불퉁 돌계단으로 이어져 걷기가 만만하지가 않았다. 일행 중, 최 박사는 무릎이 좋지 않아 전 날부터 걱정을 했다. 한라산 등반을 하기 위해 두어 달 전부터 시간이 날 때마다 집근처 야트막한 산을 연습 삼아 오르곤 했다는데 딱 2시간만 걸으면 무릎에 신호가 와서 걱정이 태산이라고 했다. 그런데 막상 등반이 시작되자 제일 앞에서 씩씩하게 오르기 시작하였다. 이름 모를 산새들의 지저귐, 산비둘기 소리가 산중에 울려 퍼지고 가끔은 까마귀가 머리 위를 빙빙 돌면서 환영을 해주었는데, 일행과 뒤질세라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기다 보니 아낙들의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거친 숨소리를 내면서 제주도 특유의 돌계단을 오르다 보면 삼나무 숲이 나오는데 삼나무 숲을 지나니, 해발 1,140m에 위치한 속밭대피소가 나왔다. 세 부부가 조금씩 떨어져 오르고 있었으니 숨도 고를 겸 선두에서 오르던 팀이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일행들과 합류하기로 하였다. 1차 휴식! 달콤한 휴식이었다. 물도 마시고 간식도 먹으면서 재충전을 하였다. 진달래밭 대피소까지 속박대피소에서 1차 휴식을 취한 후 본격적인 오름이 시작되었다. 끝없이 이어진 돌계단과 중간 중간을 이어주는 데크… 그래도 싱그러운 숲내음과 선들 한 바람, 그리고 환영이라도 하 듯 울어주는 산새소리를 동무삼아 꾸역꾸역 오르고 있었다. 이 시기에 한라산에서는 무엇을 볼 수 있을까? 진달래를 볼 수 있다고 하는 소리를 반신반의 하면서 혹, 멋진 진달래꽃밭을 볼 수도 있겠다는 상상을 하기도 하였다. 육지에서는 이미 져버린 진달래꽃을 정말 볼 수 있을까? 강화도 고려산 진달래 능선에서 보았던 붉고 화려한 꽃잎을 상상하면서 오르다 보니 드디어 진달래 밭에 도착하게 되었다. 진달래 밭 대피소 앞에 배낭을 내려놓고 2차 휴식을 취했다. 데크에 다리를 쭉뻗고 털썩 주저앉아 초콜릿을 먹고 있는 최박사의 모습은 마치 몇날며칠 전투를 하다가 지쳐서 휴식을 취하는 곤궁한 병사의 그 모습이라면 과장일까? 물한모금 마시고 다시 기운을 내서 배낭을 짊어지고 올라선 길에서 저 멀리 옅은 구름에 둘러싸인 한라산의 모습이 드러났다. 아스라이 구름에 닿은 길에는 울긋불긋 등산객들이 행렬을 지어 올라가고 있었는데, 평일임에도 산을 찾는 이들이 이토록 많을 줄은 몰랐다. 어쩔 수 없는 60대의 시니어들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오르다가 잠시 뒤돌아보면 짙푸른 녹음이 길게 드리워진 산자락 밑, 서귀포시내가 한 눈에 들어오고 그 끝에는 일렁이는 검푸른 바다가 아찔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수령(壽齡)을 짐작할 수 없는 주목(朱木)이 등산로 양옆으로 이어져 있고 그 중에는 앙상한 가지를 드러낸 채 폐목(廢木)이 되어 고고하게 바람을 견디어 내는 주목도 있었다. 한라산 정상에 가까워오자 가파른 등산로는 테크로 계속 이어졌고 물밀 듯 불어오는 바람이 심상치 않았다. 아! 드디어 백록담이 지척에 보인다. 아! 한라산 백록담 부지런히 발품을 팔아 미리 백록담에 도착한 필자는 속속 도착하는 동료들을 촬영하기 위해 카메라를 들고 입구 쪽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곤한 몸을 이끌고 만면에 미소를 가득 띤 채 드디어 해냈다는 기쁨으로 두 손을 번쩍 치켜들고 마지막 계단에 올라서는 동료들을 일일이 환영하며 사진을 찍었다. 인증 샷을 위해 백록담 표지석 아래로 길게 줄이 이어졌는데, 어찌나 바람이 세게 불던지 황급히 배낭에서 바람막이 옷을 꺼내 입었다. 5월임에도 불구하고 변화무쌍한 날씨가 필자 일행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허둥지둥 인증 샷을 마치고 말로만 듣던 백록담을 보러 조금 위로 올라섰다. 초겨울의 싸늘한 바람이 천둥치듯 불어대는 가운데 백록담을 조망(眺望)할 수 있었으니 역시 변화무쌍한 한라산은 그 높이가 백두산 다음가는 산중의 산인가보다. 바로 밑 양지바른 테크에 배낭을 풀고 가져간 음식들을 꺼내놓으니 이보다 더한 진수성찬이 있으랴! 돼지고기 수육에 홍어, 그리고 막걸리를 곁들인 삼합이 갈증 나고 허기진 배를 채우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올라오면서 고생담을 비롯한 온갖 이야기꽃을 피우며 맛있는 점심식사를 하던 중에 홀로 쓸쓸하게 앉아서 비스킷을 먹고 있는 외국인 청년을 보게 되었다. 세 남자들은 모두 그를 데려다가 음식을 좀 나누어먹이자고 의견을 모으니 마님들께서는 먹던 음식을 어떻게 권하느냐고 반대의 의사를 분명히 했지만 언어구사가 무난한 최용호박사가 다가가서 몇 마디 나누고는 그를 우리 자리로 데리고 왔다. 이번 여행을 계획하고 주도해 온 우리들의 캡틴 海松 김금섭 대장의 사위가 미국인이기도 하거니와 우리의 아이들도 미국의 콜로라도주 덴버에 살고 있기에 혹여 마음이 더 쓰였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자신의 이름을 ‘마이클’이라고 소개한 그 외국인은 아직도 결혼을 하지 않은 스페인 청년이었다. 이것저것 챙겨주니 먹기도 잘하였는데, 아마도 몹시 시장했던 모양이었다. 헌데 그 녀석, 막걸리는 물론 돼지고기 수육을 된장에 꾹 찍어 잘도 먹어댔다. 막걸리 한 잔 쭉 들이키던 마이클이 갑자기 다리에 쥐가 났다며 데크에 벌렁 나가 자빠졌는데, 어찌하랴! 모두가 달려들어 털이 북슬북슬한 그 녀석의 다리를 붙잡고 마구마구 주물러 주었더니 괜찮아 졌다고 하였다. 입식문화에 익숙한 그가 데크에 다리를 포개고 앉아서 음식을 먹다보니 쥐가 난 모양새다. 어쨌거나 밥과 반찬은 물론이고 이것저것 잘 먹으면서 여간 고마워하던 그가 기념사진을 찍겠다고 하면서 두 엄지손가락을 번쩍 치켜들었다. 그 친구를 데려다가 음식을 나누어 먹인 것은 어찌 보면 보잘 것 없는 작은 배려이지만 참 잘한 일인 듯싶었다.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마음으로 우리가 낮선 외국에 여행을 갔을 때를 생각하면서 작은 관심과 배려의 차원에서 나눔은 역시 모두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었다. 몇 번이고 고맙다고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는 그 스페인 청년을 보내고 나니 내려올 일이 꿈만같았다. 드디어 해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일 터, 육십 고개를 넘어 이제 내리막길에 가속을 붙일 시기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한라산 등반. 그 하산 길에서는 피로가 온 몸을 엄습했다. 아침 여덟시에 시작한 한라산 등반은 오후 6시 30분에 모든 동료들이 성판악 주차장으로 되돌아오므로 써 장장 10시간 30분의 고단한 여정이 끝났다. 고단한 가운데서도 모두가 해냈다는 뿌듯함이 마음을 가볍게 해주었다. 언제 또다시 이 곳을 찾을까마는 명산중의 명산 제주도 한라산을 당당하게 정복했다는 은근한 자부심이 샘솟았다. 거기에다가 날씨까지 좋아서 멋진 백록담을 볼 수 있었으니 얼마나 상쾌한지 모르겠다. 우리 인생에 있어 더 이상 젊은 시절은 돌아올 수 없으나 늘 긍정적인 사고로 생동감 넘치는 삶을 살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 2016-07-07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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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내! 이렇게 참는다] 차이를 인정하고 배려한다
- 결혼한 지 30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사소한 문제로 부딪힌다. 부부 간에 항상 마음이 일치가 되기는 쉽지 않다. 살아온 환경, 습관, 성격, 남녀 간의 사고방식이 서로 다르기 때문일까. 어떻게 조화시켜 원만한 가정을 만들어 갈까 고민해도 매번 크고 작은 소란이 계속된다. 부부 간의 의견다툼이 심해진 것이 최근에 이혼율이 높아진 원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서로가 자기 입장만 옳다고 주장해서는 해답이 없다. ‘화성에서 온 여자, 금성에서 온 남자’라는 책을 재미있게 읽었다. 줄거리는 남자는 화성에서 왔고, 여자는 금성에서 왔는데 서로 마음이 맞아 지구라는 행성으로 거처를 옮긴 이후에 그들은 서로가 다른 행성에서 왔다는 사실을 잊게 되면서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지 못하고 때때로 충돌하게 된다는 것이다. 남자는 문제가 생기면 혼자만의 시간을 갖기를 원하고 다른 사람이 관여하는 것을 싫어한다. 반면 여자는 문제가 생기면 같이 이야기 하는 중에 푼다. 여자는 문제를 이야기하면서 단지 들어 주길 원하지만 남자는 성급하게 해결책을 제시하려고 하여 다툼이 생긴다. 남자는 이성적이고, 여자는 감성적이다. 아내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아침형 인간이고, 정리를 하지 않으면 정신이 어지럽다며 시간이 허락될 때마다 주변을 청소하고 정돈하며, 약속을 하면 시간보다 30분 이상 먼저 가서 기다리고, 한 번에 한 가지 일만 하고, 금전관계에 철저하다. 이중에 금전 문제에서만 일치하고 다른 면에서는 차이가 난다. 그러니 다툼이 있을 수밖에 없다. 저녁에 늦게 자는 것이나, 주변 정돈을 못하는 것이며, 한꺼번에 여러 일을 벌려 놓고 허둥대는 것과, 약속시간에 꼭 맞추어 가는 것, 빨리 식사하는 것 등에 대해 잔소리를 듣는다. 그만 인정하고 살라고 사정해도 에누리가 없다. 아내에게 빚지고 있는 면이 많다. 결혼하여 지금까지 30년 이상 시집살이를 하고 있고, IMF 이후 조기 퇴직하여 프리랜서로 일하다 보니 고정수입이 없어 아이들 교육과 가정살림을 책임지게 하고 있다. 그 와중에 막내는 첼로 공부한다고 유학까지 가 있으니 통 면목이 없다. 지금까지 고생하고 있는 아내는 필자에게 평강공주이다. 역사상 유명한 공주는 선화공주, 요석공주, 평강공주이다. 그중 평강공주를 제일이라고 생각한다. 바보 온달을 인물로 만들었으니까. 필자는 기꺼이 바보 온달이 되고 싶다. 그래서 자기 소개할 때마다 바보 온달임을 알리고 있다. 얼마 전에 친구들과 문화여행 차 평강공주와 바보 온달의 동상이 있는 아차산성에 갔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최선을 다했다. 아차산성에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때까지 평생 평강공주만을 바라보며 한 눈 팔지 않고 살았던 바보 같은 남자 온달과 신분의 차이를 무시하고 가능성만을 보고 결혼하여 온달의 죽음 소식을 듣고 버선 걸음으로 달려 온 평강공주의 사랑 이야기는 감동적이다. 요즘 『화성에서 온 여자, 금성에서 온 남자』를 아내와 같이 읽고 있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며 배려하며 사는 것을 배운다.
- 2016-07-06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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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거 땜에 친구와 의 상한다] 음주한다고 우정까지 저버린 친구가 아쉽다.
- 필자는 중학교를 시험을 치고 입학하는 세대에 속한다. 지방도시에서도 알려진 중학교는 경쟁이 치열하였고, 치열한 경쟁을 통과한 학우들 간에도 출신 초등학교에 따라 서로 지지 않으려는 전쟁이 이어졌다. 필자가 들어간 중학교도 상황은 비슷했다. 중학교에 들어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출신 초등학교가 다른 짝과 심하게 다투다가 수업이 끝나고 교단 앞에 나가 결투를 벌인 적이 있다. 결국 결투는 필자의 승리로 끝났으나 지켜보던 학우들이 초등학교 간 패로 나뉘어 갑자기 싸움을 벌일 기세였다. 이 순간 빨리 행동하지 않으면 큰 패싸움이 벌어질 것 같았다. 필자는 살기 위해 초등학교 출신자들과 함께 교문을 재빨리 빠져나왔다. 하지만 앞으로 어떤 보복이 있을지 모르니 당분간 등교와 하교 때 모두 같이 움직이자고 약속하였다. 초등학교 때 친하지 않은 친구들도 모두가 이렇게 똘똘 뭉쳐 본 적은 처음이었고 갑자기 영웅이나 된 듯 어깨가 으쓱해 졌다. 사나이가 승리하면 이런 기분으로 살아간 다는 것을 일깨워 주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렇게 3 ~4개월이 흐르고 서로의 문화 차이를 이해해 가면서 우리 중학교란 인식이 생기기 시작했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북한에는 핵무기가 있지만 남한에는 중2가 있다는 말이 머릿속에 번쩍 떠오른다. 맞는 말 같다. 지나간 중학교 생활을 보면 철부지였지만 자기들만의 세계에 도치되어 세상에서 무엇이든 무서움을 모르고 행동하는 것 같다. 이렇게 중학교 생활을 마치고 고등학교에 들어가면 달라진다. 타인을 배려할 줄 아는 사고방식을 가지는 것이다. 공부에 지쳐 있는 그룹, 여학생과 돌아다니는 날라리 그룹, 왕자병 그룹 등으로 나누어 졌으나 중학교 시절만큼 세력 다틈은 없었고, 저마다 미래의 자기개발에 신경을 쓰고 있었고, 개중에는 술과 담배를 가까이 하는 학우도 있었다. 친한 친구가 어느 날 질문을 하는데 너는 사회에 나가면 술과 담배를 가까이 할 거냐고 묻는다. 다른 질문은 답이 빨리 나왔지만 이번엔 그렇지 않다. 잠시 침묵과 함께 대뇌가 복잡하게 덜커덩 거리기 시작했다. 왜 이 친구가 이런 질문을 했을까? 예스, 노 둘 중 하나가 답인데 왜 이렇게 말하기가 어려운가?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 사회생활하다 보면 필요하다면 술은 마실 수 있다. 담배는 연기가 싫고, 주머니에 두툼하게 넣고 다니는 것들이 싫어서 안 하겠지만 술은 상대의 마음을 알고자 하거나 서로의 우정을 위해서, 그리고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냐”고 했더니 친구 왈 친구의 우정은 술 또는 담배를 하는 순간부터 끝이라고 한다. 결국 사회생활을 하면서 필자는 담배는 피지 않지만 소량의 술은 마시게 되면서부터 친구와의 우정은 끊어져서 아직까지 연락 두절 상태이고 가끔 다른 친구를 통해서 그 친구의 생활에 대해서 듣고 있지만 너무 고지식하게 살아가는 친구가 어떨 땐 불쌍하게 여겨질 때도 있다. 그렇게 행동해서 잘 나가는 것도 아닌데 그리고 우리의 미래가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친구야 이글 읽으면 연락이라도 해라. 난 언제든지 반갑게 맞아줄 자세는 되어 있단다.
- 2016-07-05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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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편! 이렇게 참는다] 남편 땜에 화난 이야기, 품으며 산다.
- 결혼식에서 말한다. '이 결혼을 통하여 이제 몸과 마음이 한 몸이니 머리카락이 파뿌리가 되도록 서로 사랑하며 살라’고. 그러나 사람들은 사랑하기보다는 싸우며 파뿌리가 되기도 한다. 부부는 한 몸이 되어 자식을 낳고 연대감을 가지며 가족을 보살피고 양육의 의무를 나눈다. 이러는 사이 사랑으로 몸과 마음과 영혼이 한 몸 인줄 알고 일을 벌이면 알 듯 모르겠고 모르는 듯 알 것 같은 상황이 연출된다. 오죽하면 ‘화성에서 온 남자와 금성에서 온 여자’라고 하겠는가. 결혼 초 시집에서 함께 살았다. 필자는 막내 며느리였고 근처에 시누 두 사람이 살았다. 필자는 남편과 7년의 열애 끝에 결혼을 했고 시어머니는 늘 몸이 안 좋았다. 형제가 10명 이었다. 기본적으로 시부모님을 좋아했다. 시아버님의 근면한 모습과 시어머니의 후덕한 부분이 좋았다. 남편을 낳아주신 부모님께 감사했고 온화한 가정의 분위기를 만드시는 분에 안도했다. 그런데 신혼이었지만 남편은 함께 저녁을 먹기 힘들 정도로 귀가 시간이 늦었다. 필자는 종일 시부모님의 손님과 시누들의 접대로 쉴 새 없이 차를 타고 과일을 깎고 식사를 준비하느라 바빴다. 가사 도우미도 있었지만 안방에서 들려오는 ‘아기야’ 소리에 언제라도 튀어나갈 준비를 하고 지냈다. 손님이 많은 날은 방문객이 20여명 일 때도 있었다. 어느 날, 남편이 귀가하자 오늘은 다리가 아파서 힘들었다고 말했다. 그러자 벌떡 일어나더니 엄마에게 가서 따지겠다고 했다. 바짓가랑이를 잡고 매달렸다. 필자가 원하는 것은 한 마디였다. “수고했구나.” 남편이 첫 월급을 가져오는 날이었다. 내미는 봉투가 뜯겨 있었다. 명세표를 보니 돈이 비었다. 순간 필자는 “혼자 벌은 것이니 혼자 쓰든지 다 채우라”고 했다. 미리 시부모 용돈과 자신이 쓸 것을 빼고 남은 금액이라 얼마 되지 않았다. 화를 내어 고쳐졌고 그 후 필자는 살림을 도맡아하기 시작했다. 제할 것도 필자가 했다. 남편은 회식이다 접대다 많은 출장으로 얼굴 보기 힘들었다. 그러다 필자보다 먼저 귀가하면 벼락이 떨어졌다. 육아와 살림과 일을 하는 필자는 늘 종종거리며 다녔다. 동등한 관계를 원하면 대책 없이 하는 말이 있었다.“힘들면 하지 마.“ “남자랑 여자랑 같니?" 그리곤 슬며시 다리 안마를 해줄까 물어오곤 했다. 바꿀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처럼 시간이 지나면서 날선 요구보다 포기를 익히게 된다. 부부싸움이 ‘칼로 물베기’라고 하는 이유는 처음 사랑했던 순간의 떨림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무엇이든 참아낼 수 있으며 오히려 배려를 즐길 수 있게 되기까지 한다. 엄마들이 많은 세월 남편도 품고 자식도 품고 친척도 품고 품으며 살은 과정을 이제 나도 가는 것이다.
- 2016-07-04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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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세대 이야기] 1957년생의 브라보, 마이 라이프 '내 안에 위대한 세상이 있다, 꿈이다'
- 글 신광철 시인, 작가 나를 지배하려 하지 말고 나에게 자유를 주어라. 내 안에는 많은 길과 많은 말과 많은 단어들이 있다. 자유롭게 뛰어놀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목표에 익숙해져 있다. 목표가 없는 삶은 산 게 산 것이 아니라고 한다. 방향을 잃어버린 것을 방황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있다. 인생의 방향은 무엇이어야 할까. 무엇이 되기 위해서, 많은 것을 거머쥐기 위해서, 또는 지배하기 위해서일까. 인생에 목표를 두고 달려왔던 것들을 나열해 보면 단순하다. 대부분 돈 권력 명예 그리고 사랑과 성이 중요한 목표였고, 이것들에 ‘더 많이’라는 구체적 목표 외에는 별 것이 없다. 과연 인생 60을 살아온 지금도 그런가. 그렇다면 그 인생은 올바른 삶인가 묻고 싶다. 내 안에 있는 많은 것들 중에서 내가 진정으로 되고 싶거나 하고 싶은 것이 있을 수 있다. 그걸 꿈이라고 한다. 인생의 방향은 집에서, 회사에서, 학교에서, 종교에서 말하는 꿈이 아니라 바람에도 걸리지 않는 순결한 내 마음이 하고 싶은 것이 진정한 꿈이다. 꿈을 향해 사는 것이 최선이다. 세상에 태어난 진정한 이유는, ‘내가’ ‘지금’ ‘하고 싶은 일’ 을 하는 것이다. 세상이 요구하는 것이 아닌 내가 지금 하고 싶은 그 무엇을 찾아야 한다. 늦은 나이는 없다. 가장 이른 시간은 지금이고 가장 늦은 시간은 다음이다. 더 나쁜 결정이 있다. 포기다. 포기하는 순간 죽은 것이다. 60년 동안 자신에게 물어보지 않았다면 인생에 대한 직무유기다. 행복은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것을 누리는 것이다. 행복을 외부에서 찾는 사람은 영원한 갈증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행복은 내 안에 있는 충만함을 누리는 것이다. 내 안에 있는 꿈을 실현하는 것이 행복이고, 내 안에 있는 따뜻함을 누리는 것이 행복이다. 행복은 긍정의 토대 위에 놓여 있는 온기다. 존재를 존재 그대로 받아들이고, 모자람과 넘침을 받아들이고, 살아 있음을 살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순간 행복이 온다. 젊게 사는 방법은 육체가 젊은 것이 아니라 마음이 시키는 일에 도전하는 것이 젊게 사는 방법이다. 내 마음이 하고 싶어 하는 것을 꿈이라고 한다. 꿈을 나는 등대라고 말한다. 어느 방향으로 걸어가더라도 다시 바라보면 별처럼 빛나는 꿈, 꿈은 그래서 별이다. 인생의 영원한 등대가 꿈이다. 꿈을 향해 한 발씩 다가가는 것이 행복이다. 꿈은 노력하지 않고 다가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꿈은 땀을 기다리고 있다. 꿈은 기도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실천으로 만든 것이다. 나는 감히 말한다, 나 자신에게. 꿈은 이루어서 자신에게 선물하는 것이 인생에 대한 예의라고. 나의 꿈은 글이었다. 글을 쓰고 싶었다. 꿈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다른 것을 버려야 한다. 세상이 요구하는 것을 버리고 글쓰기에 돌입했다. 글 중에서도 시가 쓰고 싶었다. 시는 굶어야 만날 수 있는 세계다. 산업사회에서 가장 변방에 있는 것이 시다. 산업사회는 인간을 도구로 보는 사회다. 생산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인간을 본다. 생산과 관계되지 않은 것은 도태되는 사회가 산업사회다. 시인이 생산하는 시는 돈이 되지 못한다. 교환경제 속에서 시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없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은 재화를 생산하는 굴뚝과의 교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소외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한국인은 빛나는 존재다 그래서 바꾸었다. 시가 돈이 되지 않으니 돈이 되는 글이 필요했다. 내가 하고 싶은 글쓰기를 하면서 내가 즐거워야 한다는 전제가 있었다. 두 접점에서 만난 것이 한국인이었다. 한국인은 독특하고 희귀한 존재였다. 빛나는 존재였다. 파고들수록 깊고 넓은 세계가 있었다. 놀라운 세상이었다. 내가 한국인이어서 한국인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평균대에서 자랑스러운 것을 말하고 싶다. 한국인은 상상하지 못하는 것들을 이루어 냈다. 먼저 세상에서 말을 정리한다는 것은 엄두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불특정하고,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말은 만들어진다. 말은 상당 부분 비논리적이고, 비계획적이다. 하지만 한국어는 체계적으로 정리가 되어 있는 놀라운 언어다. 우리의 말은 중요하고 핵심적인 말은 한 글자로 되어 있다. 얼굴부터 살펴본다. 눈 코 귀 입. 몸으로 들어가 본다. 살 피 뼈 등 배. 자연으로 가면 한도 없다. 강 산 들 물 눈 비 풀 꽃 씨 그리고 땅이 있다. 땅이 한 글자라면 하늘도 한 글자가 되어야 한다. 하늘은 두 글자인 이유가 있다. 의미를 담기 위해서였다. 하늘은 한늘이다. ‘한’은 무한히 큰 공간을 말하는 우리말 한이다. ‘늘’은 과거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영원한 시간으로 우리말 늘이다. 무한공간인 ‘한’과 무한시간인 ‘늘’이 만나 ‘한늘’이 되었고 ‘ㄴ’이 탈락하여 하늘이 되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동물 중에서도 우리와 가까운 것들은 한 글자로 되어있다. 호랑이 늑대 승냥이 고양이 같은 동물은 여러 글자로 되어 있지만 우리와 밀접한 가축은 모두 한 글자로 되어있다. 놀랍다. 원칙을 두고 만들어지지 않았다면 상상하기 어려운 말이다. 가축의 이름을 본다. 소 말 양 닭 개. 모두 한 글자다. 돼지도 가축인데 두 글자다. 돼지는 옛말로는 ‘톳’ 또는 ‘’이라고 했다. 지금도 제주도에서는 토시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돼지는 돼지새끼에서 유래한 말이다. ‘아지’는 동물의 새끼를 말한다. 강아지, 송아지 등이 지금도 사용하고 있는 말이다. 톳과 아지가 만나 톳아지가 도야지로, 도야지가 돼지로 되었다. 곡식도 마찬가지로 우리와 밀접한 곡물들은 보리를 제외한 쌀 벼 밀 콩 깨 등으로 대부분 한 글자다. 다음으로 중요한 말이 두 글자로 만들어져 있다. 상상할 수 없는 일이 한국인에게 잠재되어 있고, 또한 숨어 있다. 우리의 능력을 우리 스스로 깨우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한국인이다. 세계에서 드문 일이, 한국에서는 일상적인 것들이 예상 외로 많은 것에 놀랍다. 나물도 그러한 예 중 하나다. 어느 나라도 들이나 산에서 나는 야생 나무나 풀을 음식의 재료로 상식하는 민족은 없다. 약초로 사용하는 경우는 다른 나라의 경우에서도 찾아볼 수 있지만 전 국민이 산이나 들에서 풀과 나뭇잎을 상시로 뜯어다가 밥상에 올리는 나라는 없다. 가볍게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지만 아프리카나 가난한 나라에서 기아에 허덕이지만 나물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지 못했다. 대다수의 한국인들은 야생하는 나무와 풀들의 약리 성분과 독특한 맛을 알고 있다는 이야기다. 자연에 대한 이해가 깊다는 것을 말한다. 그만큼 한국인은 탐구심이 강하다. 끝까지 파고들려는 기질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기어이 달성하고 마는 강인함이 있다. 나는 한국인에 대한 관심과 연구를 하게 된 계기가 있었다. 인생은 우연이 만든다고 하는데, 어떤 우연은 준비되어 있어 인연과 연결고리를 만들어내는 것을 종종 발견하곤 한다. 그래서 나는 인연은 우연을 가장해서 온다고 말한다. 내가 한국인을 만난 것도 준비되어 있지 않았나 생각한다. 나는 한국인을 만나면서 인생도 달라졌다. 한국인의 놀라운 세계가 나를 흥분시켰고, 나를 즐겁게 했다. 들어갈수록 오묘한 사상과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한 가지만 더 들어본다. 세계 어느 나라의 건국이념이 경계를 허물고 인간 모두를 이롭게 하자는 내용을 가진 나라가 있을까. 한마디로 없다. 다 같이 이롭게 잘 살자는 홍익인간은 인류공존의 기틀을 만드는 초석이 될 건국이념이다. 다시 뛴다, 인생은 육십부터 인생에 불을 질러라. 물론 나에게 하는 말이다. 사람은 독립된 섬이다. 섬과 섬 사이를 오가는 배가 있고, 새가 있지만 인간은 고립되어 있다. 고립을 피하여 배를 만들었지만 외롭다. 사람, 고립된 섬이다. 손을 잡고 있어도 너는 내가 될 수가 없다. 뜨거운 포옹을 하고 있어도 너는 너고, 나는 나다. 그래서 사람은 사랑을 키운다. 그래서 나는 ‘삶아 난 너를 사랑한다’고 선언했다. 내 삶을 내가 사랑하지 않고서 남을 사랑하는 것은 기만임을 알았다. 나를 사랑한 후에 남을 사랑해야 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나를 사랑하는 일이 쉬운 듯 쉽지 않은 일임을 깨달았다. 그러기 위해서 인간의 속성을 알아야 했다. 생명체는 기본적으로 자기보호본능이 있다. 자기보호본능은 지상에서 살아남기 위한 기초적인 방어기제였다. 자기보호본능의 핵심이 이기심이다. 생명체의 기본 속성이 자기보호본능이고, 자기보호본능의 핵심이 이기심이라는 말이다. 인간의 마음 한가운데 기둥처럼 서 있는 것이 이기심이라는 이론이다. 이기심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나를 이롭게 하는 마음이 이기심이다. 경쟁을 통해서 더 많이 가져오는 것이 이기심이다. 경쟁과 싸움이 따른다. 하지만 속을 좀 더 깊이 들여다봤다. 이기심은 적을 만들지만 진정한 이기심은 나를 미워하는 사람을 만들지 않아야 하는 것이었다. 타인이 나를 미워하지 않고 사랑하게 만들면 적이 없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다. 진정한 이기심은 배려와 봉사였다. 또한 꿈을 실현하기 위한 도전이 필요하다. 어떤 길을 가도 내 인생임을 자각하는 순간 두려움은 상당 부분 없어진다. 신에게 기도하는 손보다 실천하는 손이 더 아름답다고 우긴다. 모자라고 어리석은 나 자신을 데리고 사는 것이 힘들지만 인간의 위대함은 모자라고 어리석은 자신을 자각하고 완성을 향하여 한 발씩 나아간다는 데 있다. 욕망이 아름다우면 노래가 될 수가 있다. 꿈이 아름다우면 고난 속에서도 웃을 수 있다. 글쓰기를 인생의 과업으로 설정한 것이 고난으로 안내하고 있지만 즐겁게 가려 한다. 마음이 시키는 일을 하는 만큼 장애를 도전으로 넘어보려 한다. 글쓰기와 한국인에 대한 정체성을 찾아가는 길이 곤란을 안겨 주겠지만 웃으며 갈 것이다. 아름다운 욕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따뜻한 이기심은 배려와 봉사라고 했다. 우리는 진정한 이기심으로 살아가야 한다. 아름다운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노력은 오늘도 계속되어야 한다. >> 신광철 시인, 작가 한국문화콘텐츠 연구소장으로 한국, 한국인, 한민족의 근원과 문화유산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언제나 ‘긍정이’와 ‘웃음이‘를 반려동물처럼 데리고 다니세요”라고 당부하는 문학가이자 한국문화를 연구하는 학자다.
- 2016-06-29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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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독성 인간(toxic people)
- 대인관계는 전 연령대에서 모두 중요하지만 시니어들에게는 특히 중요한 요소이다. 남자들은 나이가 들면서 남성 호르몬이 줄어들어 여성화되어 간다고 한다. 잘 삐치고 잘 따진다며 빠지지 말고 삐치지 말고 따지지 말라, 삐지더라도 삐치더라도 용서하자는 뜻의 ‘빠삐따 빠삐용’이라는 구호가 인기이다. 시니어들은 마음이 여려져서 조그마한 일에도 상처를 잘 입는다. 누가 싫은 소리를 하면 흘려듣지 못하고 다툼이 잃어나거나 마음을 크게 상한다. 그러므로 누가 누구에게 지시하거나 싫은 소리를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군대나 직장에서 떠난 지 오래 된 사람들이다. 특히 남자들은 직장에서의 버릇이 남아서 아내에게 명령하듯 말한다 해서 종종 오해를 사는 경우도 많다. 어느 신문에 ‘유독성 인간(toxic people)’이라는 글이 실렸다. 어느 조직에나 한두 명은 꼭 있다고 한다. 매사에 부정적이고 끝없이 불평한다거나 본인은 영원한 피해자라고 언제나 비난할 대상을 찾는다는 것이다. 늘 자기 견해가 옳고 자기가 제일 똑똑하다는 것이다. 어쭙잖게 교만해서 남들에게 우월감을 갖기도 한다고 한다. 욕심과 질투심에 차서 남 잘되는 꼴을 못보고 남의 흉을 보며 뒤에서 험담하고 대단한 정보인양 떠든다고도 했다. 특히 부정적인 사람은 시비를 걸지 않고는 그냥 못 넘어간다. 찬물을 끼얹는 것이다. 당하는 사람은 기분이 상할 수밖에 없다. 이율배반적인 행동을 하는 경우도 있다.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스캔들로 보이는 것이다.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도 있다. 그렇다고 악한 사람이기보다는 성격이 둥글둥글하지 못하고 ‘모난 사람’이거나 모자라서 ‘못난 사람’으로 봐야 한다. 이런 사람과 대처하는 방법은 되도록 마주치지 말라는 것이다. 무서워서 피하는 것이 아니라 더러워서 피한다는 말이 맞다. 공연히 시시비비를 가리려 해봤자 상처만 입는다. 일반적으로 조직 생활을 해 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가 있다. 조직 생활을 해본 사람은 상하 관계, 수평 관계를 늘 눈치를 살피며 살아 왔기 때문에 무난하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사람은 남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기 때문에 어딜 가나 삐걱대는 것이다. 학생들이라면 학교에서든 집에서든 어른들의 가르침을 받는다. 그러나 시니어들은 누가 가르치는 사람이 없다. 그래서 교만해져도 본인은 잘 모른다. 남들이 은근히 피하는 경우라면 혹시 본인이 유독성 인간이 아닌지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결국 죽을 때까지 못 고친다는 것이다. 인성을 수련하는 방법 중 하나는 책을 많이 읽는 것이다. 책이 스승인 것이다. 인문학 책들이 그렇다. 물론 인성에 도움이 되지 않는 서적만 골라 읽는다면 도움은 되지 않을 것이다. 영화도 좋은 스승이다. 객관적인 시각을 갖도록 해준다. 물론 영화도 여러 가지이므로 흥미 위주보다는 인성에 도움이 되는 영화만 말하는 것이다.
- 2016-06-24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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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니 자서전] 실개천의 삶
- 필자는 1944년 2월 16일 태어났다. 당시는 각박한 삶의 시대이기도 하지만 여명이 바로 문밖인 시기이기도 하였다. 어머니는 “2차 세계대전 막바지로 일제가 최악의 모습을 보였던 시기라 민간의 식량이 부족할 대로 부족했기 때문에 산모가 영양을 충분히 공급받지 못했다. 애를 낳았는데 자라지 못하여 큰 쥐만 하더라”는 말을 곧잘 했다. 좋은 점이라면 출산이 무척 쉬웠다는 것이다. 돌 지나고 6개월이 되어 나라를 되찾았는데 우후죽순의 지도자들과 새로운 정치ㆍ사회 조류가 물밀듯 쏟아져 들어왔다. 급변하는 시대에 걸맞는 야망을 가진 사람들의 시대였다. 우선 산다는 것으로도 허덕이는 서민의 삶은 더 어렵고 고달팠다는 기억이 희미하지만 있다. 특히 대구의 10.1사건 때는 좌파의 폭력을 피하여 한적한 곳으로 피신하는 아버지를 따라 거처를 옮겨야 했었다. 아버지는 한국전쟁 전 해에 병사하고 말았다. 취학 전 여자 아이부터 고등학교 2학년인 아들, 두 딸 아이에 필자까지 네 명의 자녀들이 일터 없는 어머니에게 맡겨진 부양가족이었다. 대구 중심가에서도 더러더러 초가지붕이 보이는 시절 기와집이 필자 집이라 가난에 대한 물질적인 아픔은 없다. 필자의 가난은 끼니를 거르는 가난은 아니었고 문화 욕구에 대한 가난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낀다, 절약한다, 쓰지 않는다는 방어소비에 집착했다. 세금, 교육비, 식비 외에는 돈을 쓰지 않았다. 삶을 지탱할 수 있는 지팡이는 자녀를 지켜내야 하는 모성본능과 체면과 자존심뿐이다. 그래서 어머니는 돈 안 드는 놀이로 우리와 시간을 보냈다. 작은 돌 주워 하는 공기놀이, 반들거리는 흙마당에 가느다란 선을 귿고 하는 땅뺏기, 선교사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은 탄력성 있는 공으로 삼박자 노래 부르며 다양한 모양으로 공차기 등이었다. 다만 책에는 아끼지 않아 집에 책이 풍부했다. 그래서 필자는 동화책은 물론 소설책도 읽을 수 있었다. 아마도 ‘소공자’, ‘소공녀 같은 외국의 책들도 그 무렵에 읽은 것 같다. 책 내용 가운데 무슨 소리인지는 모르는 게 태반이지만 독서는 지루한 시간을 즐거운 시간으로 바꿔주는 마법 상자이었다. 언니는 ‘태양계’란 이름의 동네 구멍가게 겸 책대여점에서 부지런히 신간잡지를 빌려왔다. 필자는 이것도 열심히 탐독했다. 10대를 위한 잡지 ‘학원’은 한 회도 빠지지 않고 읽었다. 연재된 조은파의 ‘얄개전’은 익살스런 행동이 얼마나 기발했던지 지금도 흥분이 느껴진다. 익살의 세상이 휴전 직후의 가난과 닫힌 사회에 답답해 하는 청소년에게 스트레스 분출구 역할을 했다. 이상스러운건 대구 시절 어떻게 넉넉한 책이 주어졌던가 하는 것이다. 한참 성장기의 아동이었을 때 세 끼니의 밥만으로 채울 수 없는 이채로운 먹거리에 대한 허기가 가끔 기억나지만 놀이와 독서에 대한 허기는 없었다는 기억이다. 특히 필자 집은 새 책 살 형편이 아니었는데 무슨 돈으로 책을 샀는지 궁금하다. 고등학교 시절은 격변의 시기다. 3.15부정선거를 고등학교 1학교, 4.19혁명을 고등학교 2학년, 5.16군사쿠데타를 고등학교 3학년에 맞은 것이다. 특 , 5.16군사쿠데타로 집권한 군사정권은 일사천리로 대학입시제도를 무 토막내듯 확 바꾸어버렸다. 국가고시 점수를 개별 대학 입시에 100% 반영하고 각 대학은 오로지 체력장과 면접만 시행했다. 그런데 필자는 제도 변경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체력장의 한 과목에서 완전히 빵점을 먹은 것이다. 할 수 없이 대구 한 대학의 약학과에 진학했다. 그러나 서울로 진학하고 싶어하는 열망은 잦아들지 않았다. 결국 다음 해에 서울 연세대학으로 튀었다. 약학과 팔촌쯤 되는 화학과였다. 필자는 18년 동안 내륙의 소도시 대구서 살았다. 어디 여행간 적도 없었다. 그러니 대처에 대한 선망이 강할 수밖에 없다. 필자는 원래 가족과 함께 대구의 교회를 다녔는데 서울로 옮기면서 교회도 다른 곳으로 옮겼다. 교회를 옮기자 가슴에 한 줄기 신선한 바람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필자는 YMCA에서 하는 ‘대학생을 위한 기독교 사상 강좌’를 들었고 일요일에는 연세대학 교회를 출석했다. 당시 필자는 서울에서 얻을 수 있는 것들에 가슴 벌렁거렸다. 기독교가 기성복이 아닌 시대별 노력과 아픔 및 정서를 담아 걸어왔다는 것, 큰 테두리에서 문화와 사회 및 역사를 배경에서 성장했다는 것이 이해되기 시작하였다. 이 이해는 인간, 고고학에 대한 호기심을 안겾줬다. 또 종교와 인간관계, 역사를 만들어 가는 인류 복합체로서의 인간, 생각하는 존재로의 인간 등 참으로 많은 분야의 인문학적인 호기심도 갖게 했다. 전공이 화학인데 인문학에 홀딱 반하였으니 이 노릇을 어쩌란 말이냐. 그렇다고 또 전공을 바꿀 수도 없다. 이미 약학과에서 화학과로 한 번 바꿔서다. 덕분에 대학의 전공 성적표는 엉망이다. 이 성적표 때문에 졸업 후 20년 동안 대학을 말하지 않는 결백증이 있었다. 71년 4월 5일 식목일 공휴일에 결혼했다. 그리고 80년엔 아프리카 수단에서 1년 간 살게 된다. 고온 건조한 나라 수단은 정부의 정체가 공산국가인지 자본주의 국가인지를 구별할 필요가 없는 산업의 불모지대다. 수단은 남북한 공관이 공존하는 나라다. 포장되지 않은 고속도로를 달리다보면 소나 양같은 동물들이 차에 치여 죽은 모습을 쉽게 보는데 단 시간에 건조되어 부패하지 않고 박제가 된 모양을 본다. 중동에서 제왕이라도 죽으면 그날로 매장하는 문화는 과학적인 이유가 있다. 그 척박한 땅, 공기 중에도 물기라고는 없는 갈증의 땅 바위틈에서 자라나는 초록의 생명체를 볼 수 있는데 생명력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실감하였다, 생명의 주인은 따로 있다는 생각을 해다. 사람은 태양열에 지치고, 영국의 지배 200년 동안 문명인의 안면무치 이기심에 착취당하면서 비옥한 땅이 물을 만나지 못하여 석녀처럼 생산이 불가능한 지독한 가난으로 기력이 없다 아이들의 손으로 밀쳐도 무너질 것 같다. 개를 싫어하는 무슬림의 나라에서 들개들은 늘씬하게 잘난 모양이고 기름기까지 돈다. 떼 지어 다니는데 들개 떼가 수단인보다 더 위풍당당해 보인다. 우습게도 한 대접의 물로 목욕하는 물이 귀한 나라, 상수도도 전기도 없는 그 곳에서 필자는 공짜로 미터기 없는 전기 물 풍족히 쓸 수 있었다. 핫(hut)이라는 원두막만한 집에서 살고 있는 원주민의 땅에서 필자의 사택은 큰 저택쯤으로 여겨진다. 지금도 필자 아이들은 수단에서 살았던 집이 가장 훌륭한 집이었다고 이야기한다. 이태리 가구를 갖추고, 에어컨이 방마다 있으며, 냉장고에 냉동기까지 구비한 그 사택은 원주민의 생활상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주거환경이었다. 필자가 근무한 곳은 나일의 지류인 백나일의 물을 인공수로로 끌어들여 사탕수수 농사를 짓고 설탕까지 생산하는 그 나라 기간산업체였다. 인공 수로에서 쉽게 낚시한 물고기로 회도 뜨고 매운탕도 만들어 먹었다. 한국인들이 낚시하는 것을 보고 수단인들도 낚시하기 시작하였는데 수단인들의 극성스런 낚시가 시작되고 두어 달 지나니 수로에는 거의 고기가 낚여지지를 않았다. 무계획 노획이 자연을 해칠 수 있다는 걸 확실하게 볼 수 있었다. 이어 미국에서 이민생활이 시작됐다. 우선 유학이 아니고 이민으로 미국 땅을 밟는다는 것부터 필자 속은 무척 상했다. 그리고 미국은 필자 꿈 실현의 땅이 아닌 생존의 땅으로 전락했다. 선배들이 버리라는 학력, 경력, 배경이 낯섦에서 버틸 수 있게 하는 유효한 수단인 것도 알게 됐다. 필자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육체노동의 미숙함이다. 해보지 않았던 일을 한다는 것이 가장 어려운 숙제였다. 바느질이 필수인 세탁소를 인수했을 때도 필자는 재봉틀에 실 꿰는 법도 모르는 상태였다 인계한 전 주인이 어쩌려고 무조건 가게를 사느냐고 더 걱정을 하였다. 기술을 쉽게 익히지 못하면 그 자리에서 가스실로 데려갔다는 유대인 집단수용소 체험기가 필자를 독려했다. 하지 못하면 죽으리로다란 명제 앞에 누군들 해내지 못하겠는가. 두 아이들의 똘망거리는 눈망울도 필자의 용기에 보탬이 되었다. 덕분에 필자는 주민의 95%가 백인인 부촌에 세탁소를 소유하게 되었다. 다는 아니지만 미국 사람들 중에 좋은 사람도 많았다. 특히 한 남자 단골손님은 하루 12시간 주 6일을 일하는 필자를 안타깝게 생각하여 우호적이었다. 필자 글씨체와 암산 실력이 학력을 증명해주었기 때문이다. 이 손님에게서 “네 나라에서는 화이트칼라 잡을 가졌을 거야”라는 말을 종종 들었다. 남편과 큰 소리로 다툼하는 현장을 본 이 손님은 남편에게 “ 내 아내는 일하지 않으면서 가사 도우미를 두는데 하드워킹 아내에게 무얼 불평하느냐” 하는 내정간섭에 가까운 일격을 날리기도 했다. 백인이건, 흑인이건, 교육 수준이 높든 아니든 미국 남자는 여자와의 다툼은 꺼렸다. 일종의 배려였다. 이런 작은 차이가 신사문화를 이루는 근본이 아닌가 생각하였다. 오랜 동안 일만 하자 피로가 누적되기 시작하였다. 그래도 아침 일어날 때의 피로는 첫 손님이 내미는 달러에 확 가셨다. 난산의 아이도 돈을 보이면 달려 나온다는 유머가 생각났다. 1994년 남편이 준비도 이별사도 없이 떠나버렸다. 시폰처럼 흰 눈이 투명한 3월의 어느 일요일, 늦은 기상을 하고 나와 대화를 나누는 중 목이 깔깔하다고 물 가지러 간 사이 심장마비의 공격을 받고 평화의 나라로 갔다. 필자는 남들의 두 배에 이르는 노동에 시달렸으니 10년 미리 은퇴하여 문화적인 욕구를 채우리란 약속을 자신과 가족과 하였다. 그러나 남편 떠나고 4 년 후에야 가게를 팔았다. 남편 보내고 금방 가게 처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놈의 돈 때문이다. 가게 처분하고 파트타임 일했다. 여유 시간에 시립대학에서 강의도 들었다. 이런 학구적인 활동이 경직된 내면을 많이 부드럽게 만들어 주었다. 머리가 멈추고 손발만이 분주하였던 시간이 머리와 손발이 함께하는 시간으로 전환하였다. 그리고 필자가 공부와 일을 병행하는 바로 그 시기에 영원히 걸 프렌드를 못 만날 것 같던 두 아들이 차례로 결혼했다. 드디어 형식도 내용도 필자 혼자가 된 것이다. 미리 계획하고 준비한 대로 은퇴 후 제주도로 갔다. 역이민이라고 말하는데 필자는 그냥 이사한 기분이다. 여기서도 저기서도 마이너리티인 필자에게 어디고 완전한 행복의 파라다이스는 없다. 두 땅 서양과 동양의 지구촌 마을이 필자의 삶터다. 더 넓어 좋고, 더 다양하여 좋고, 더 배워야 하여 좋다.
- 2016-06-24 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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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니 자서전] 교사에서 시인으로
- 가난은 나의 스승 지난 세월에 살아온 길을 이야기한다고 생각하니 나이가 들었다는 걸 실감한다. 한편으로는 살아온 길을 돌아보는 계기가 된다. 전쟁 직후 태어나 1960년대 중고등학교에 다녔고, 70년대 초에 대학을 다녔다. 이후 80~90년대 비약적인 경제 발전으로 이제는 세계 10대 경제 대국이 되었다. 가장 빈곤한 나라에서 태어나 가장 급속한 발전으로 세상을 놀라게 하는 그 시간을 모두 경험한 세대다. 이런 삶을 살아온 세대가 세계적으로도 거의 없을 것 같다. 한국 민족이 가진 넘치는 정과 근면함이 지금의 조국을 만들어 간 원동력이라 생각한다. 그렇게 가난은 벗어났고 이제는 어디를 가도 한국이 낯선 나라가 아닐 정도로 발전했다. 필자 역시 보편적 가난을 겪으며 학창시절을 보내며 교복과 교과서만 있으면 만족해야 했다. 요즘 아이들 어려서부터 여기저기 학원을 가야 하고, 문제집과 참고서가 산더미 같이 쌓여 있는 걸 보면 격세지감이 든다. 당시 필자에게는 참고서나 문제집은 사치품이었다. 교과서만으로도 충분히 수업할 수 있었던 당시의 교육제도가 감사했다. 물론 그 시대에도 과외나 학원은 당연히 있었지만 필자에게는 먼 나라 이야기일 뿐이었다. 가끔은 지금도 나처럼 그렇게 학교 다니는 학생들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때와는 달리 열등감에 시달릴 것 같아 마음이 쓰인다. 그래도 가난했던 그 시절이 그립다. 그때는 사람들의 마음이 지금처럼 각박하지 않았다. 경제적으로는 아주 힘들었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늘 넉넉했다. 작은 일에나 큰일에나 함께 울고 웃을 수 있는 정이 기본이었기에 가능했다. 친구들과 뛰놀던 뒷동산이 지금도 가끔은 생각난다. 위로 오빠들만 셋이고, 밑으로는 여동생이 둘이 있었다. 따라서 오빠들의 행동에 많은 영향을 받아 여성성이 전혀 없다. 더욱이 오빠들이 다정다감하지도 않고 무뚝뚝했는데 필자는 그것을 그대로 닮았다. 놀이해도 남자들이 하는 놀이를 더 많이 했던 것 같다. 동네 아이들과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갖가지 놀이를 하면서 보낸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 지난해 어느 봄날 유튜브로 ‘고향의 봄’을 들으며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 대궐 차리인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라는 가사를 따라 부를 때 그 옛날의 뒷동산이 눈에 보이는 듯 눈물이 흘렀다. 그렇게 한참을 울고 나니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이었다.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 늘 그 자체가 카타르시스의 효과를 준다. 필자가 초등학교 2학년 어느 날 아침이었다. 학교에 가려고 나와 보니 비는 주룩주룩 내리는데 우산이 하나도 없었다. 오빠들이 먼저 학교 가면서 다 갖고 갔다. 구석에 찢어진 비닐우산이 있기에 그걸 들고 갔는데 바람에 뒤집혀서 쓰나 마나 했다. 그렇게 해서 학교에 도착해 보니 지각까지 했다. 조용한 교실 문을 들어갈까 말까 하다가 살그머니 열었는데 웬걸 모든 눈이 필자를 향하고 있었다. 지극히 소심한 필자는 그 자리에서 연기처럼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 이후 비라는 소리만 들어도 경기가 날 정도였다. 그토록 비를 싫어했던 필자가 사춘기가 되면서 빗소리가 좋아졌다. 싫어했던 그 부피보다 몇 배는 더 좋아한다. 그래서 비 오는 날이면 우산을 들고 혼자 나무가 많은 길을 걸으며 혼자 빗소리를 음미한다. 그 맛은 언어로 표현하기 힘들다. 세상이 다 필자 것처럼 여겨진다. 어려서부터 교사를 생각하다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범대학에 입학했다. 여자 직업으로는 최고라는 어른들의 말씀이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어왔었기 때문에 다른 직업은 생각한 적도 없었다. 당시는 교사라는 직업이 지금처럼 최고 인기 직업이 아니었다. 경제가 엄청난 기세로 성장할 때여서 일반 회사원보다 비인기 직업이었다. 보수도 그렇고 업무 환경으로도 매우 후진적이었기 때문이다. 함께 입학한 남자 동창 중 교사로 남은 사람은 20%가 채 안 되었다. 그만큼 대우가 학교보다 월등하게 좋은 곳으로 빠져나가던 때였다. 사명감으로 한다고는 하나 일단 눈에 보이는 것에 움직이게 된다. 그런 분위기에서 대학생은 되었지만 머리로 생각했던 캠퍼스의 낭만을 즐기는 것이 필자에게는 어쩌면 사치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스스로 자신을 옭아매는 삶이었다. 돌아보면 그 시간이 인생에 주어진 가장 밝고 환한 시간이었는데 필자는 즐기는 걸 몰랐고 언제나 기계처럼 살아왔다. 사람이 기계처럼 산다는 걸 뒤늦게 더 깨닫게 되었지만 성격상 주어진 책임에만 충실한 기계였다. 자신의 감성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대학 생활은 더 많은 고민으로 채워지는 시기였다. 당시 집에서는 누구든 고등학교까지만 학비를 대주고 대학부터는 알아서 가야 했다. 오빠들도 다 그렇게 다녔고, 필자 역시 대학은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벌어서 다녔다. 그것이 자유를 빼앗기는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하면 생각의 틀이 굳어졌기 때문이지 환경이 필자를 누르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졸업 후 고등학교 국어교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첫 발령지가 충북 옥천군이었다. 생전 처음 접하는 시골 풍경이 생소했지만 그곳은 잠재했던 감성을 꺼내주었다. 마음 깊은 곳에 숨어있었던 정서를 맘껏 풀어낼 수 있었다. 풋내기 교사를 맞아주는 학생들과 동료 선생님들의 아낌없는 격려와 배려가 삶의 기쁨을 주었다. 그중에서 학생들과의 만남이 참 좋았다. 필자를 잘 따라주고, 순수한 여고생의 감성이 한없이 즐겁게 했다. 국어 과목은 여고생들에게는 남다른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문학 작품을 공부할 때는 꿈속에서 헤매듯 빠져들었다. 가끔은 밖으로 나가 함께 시와 소설을 이야기하면서 수업할 수 있었다. 지금 학생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낭만적인 시기였다. 사과 꽃이 필 때는 사과밭으로 가서 자연과 함께 호흡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포도 철에는 포도밭으로 달려갔다. 필자에게 참 유익한 시기이었다. 조금은 느슨하게 살아가는 법을 배웠고, 자연이 주는 선물을 조금씩 맛보아 알게 되었다. 지금 부족하나마 시를 쓸 수 있는 감성을 일깨워준 고마운 곳이다. 언제나 다시 달려가고 싶은데 언젠가 가보니 아주 많이 변해서 그 맛을 느낄 수가 없었다. 더 깊은 속으로 들어가면 맛볼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다시 도전하는 삶 결혼하면서 교직을 떠났다. 그렇게 갑자기 전업주부가 되면서 마음의 고통이 많았다. 늘 단순하게만 생각했던 필자의 행동이 후회됐지만 그런 모습 보이기 싫어서 가정에 더 충실했다. 그렇게 전업주부로 17년을 살면서 아들 하나를 키워 중학생이 되었다. 아이가 중학생이 되고 나니 삶은 참 무료했다. 그리고 우울했다. 40세가 넘은 그 시기에 인생 좌표가 어딘지 돌아보면서 그동안의 삶이 무척 우울하게 보였다. 그런 필자를 보던 남편이 대학원 입학을 권유했다.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일을 제안하는데 처음에는 거절했다. 40세가 넘은 나이에 어떻게 20대 학생들과 같이 공부를 하겠느냐고 했다. 하지만 결국 남편의 적극적 후원을 힘입어 1993년 가을에 대학원에 입학하고 5년 동안 모든 과정을 마치고 학위를 취득했다. 그 시기 필자는 다시 젊은이로 돌아갈 수 있었다. 도서관에 가는 날이 빈번해지고 발표 수업이 많았기에 자료 준비를 위해 책과 씨름해야만 했다. 암기해야 할 외국어 공부는 예전과는 달리 보통 어려운 게 아니었으나 몇 배의 노력으로 해냈다. 그런 노력은 할수록 더 힘이 났다. 즐거웠다. 그리고 행복했다. 필자는 행복과 즐거움을 주는 젊은이들과 계속 만나고 싶어 혜전대, 한서대, 경원대 교수까지 됐다. 필자가 전업주부로 사는 동안 학교 환경도 완전히 달라졌다. 실제 시간은 17년이지만 사회와 학교 환경의 변화는 30년쯤 지난 것 같았다. 사회 자체가 급속도로 변화하는 중이었고, 가치관도 하루가 다르게 확확 달라지고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어지러웠다. 가정이라는 테두리에서 조용하게 살았던 필자가 급변하는 사회에 적응하기가 쉽지는 않았다. 그래서 필자는 젊은 학생들과 교류할 수 있는 장을 많이 만들었다. 대상 학생들이 고등학생에서 대학생으로 바뀌었지만 젊음 안에 있다는 것, 그들과 함께 호흡을 맞춰가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어느 날 문득 생각난 것이 필자가 고등학교 때 장래 희망에 교수라고 썼던 것이 생각났다. 결국엔 강단에 섰다는 생각이 들어서 혼자 웃었다. 창작과 신앙의 길 전공이 현대시였기 때문에 작품 활동을 하는 것이 정도여서 학위를 마치면서 바로 시로 등단했다. 어려서부터 글 쓰는 것을 막연하게 동경은 했지만 등단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가끔 수필을 쓰면 좋겠다고 생각만 했었는데 시를 쓰게 되었다. 창작이 고뇌의 산물이긴 하나 아주 조금씩 그 맛을 알아가고 있다. 모든 창작이 다 힘든 과정을 거쳐야 하듯이 시 역시 그렇다. 필자는 아직도 갈 길이 먼 초보에 지나지 않지만 작은 희열을 알아가면서 보람도 느낀다. 나이 들어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라 더욱 애정이 간다. 이제 강의는 끝내고 창작만 남았다. 필자와 끝까지 함께 갈 절친한 친구다. 하나의 작품을 쓰기 위해 생각하고 삶을 반추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내면을 볼 수 있어서 좋다. 필자에게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앙이다. 대학 재학 중 친구의 권유로 시작된 신앙생활은 삶의 근간이다. 중학교 1학년 때 짝으로 만나 친구는 대학교까지 10년간 같은 반, 같은 과여서 언제나 붙어 다녔다. 그가 내게 하나님을 알려주었고, 대학 3학년 때부터 교회를 다녔지만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것은 한참 후였다. 하나님이 필자를 만나 주시면서 필자의 사고 체계가 바뀌었다. 아니 지금도 변화되는 과정이다. 인생의 윤택함이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으면서 마음엔 여유가 생긴다. 삶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가치관이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삶을 이끌어 주시는 분이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걸 깨달은 후부터 진실로 평안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사람이 애쓰고 힘써서 쌓은 것이라고 해도 하나님 없이 이루어진 것은 언제나 불안하다. 하지만 하나님 안에 있을 때의 평안은 세상에서 누리는 편안함과는 비교할 수 없다. 하나님은 필자 인생의 전부다. 가장 의미 있는 삶으로 이끌어 주시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바울이 했던 것처럼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는 고백이 저절로 나온다.
- 2016-06-22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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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제] 클라스 그랜 마 (class grand ma) 올치 할머니
- 며느리는 아기를 맞이하는 첫 작업으로 아기 방을 꾸몄다. 첫 아기가 성별이 중요하지 않았겠지만 아기를 모실 방을 꾸미기 위하여 성별을 알아야만 했다. 탄생 전의 아기 성별이야 식은 죽 먹기 의술이다. 아기궁의 주인은 왕자였고 아기방은 은은한 푸른색의 세상이 되었다. 천장에는 하늘의 별이 반짝인다. 요람의 모서리에는 늠름한 장군의 천리마가 아기를 호위할 모양이다. 아기 방은 화려하다 하지만 태어날 아기는 낯선 보모의 손에 맡겨져야 한다. ‘풍요한 물질의 환영’은 있지만 세상과의 첫 만남은 시간당 노동을 계산한 보모의 손에 맡겨져야만 한다. 피뿐인 송편이 아닌가. 손자 키워주겠다고 선심 쓰지 말라는 주위 사람들의 충고를 뭉개버리고 아기를 키우기로 했다. 좀 늦은 듯한 산모의 나이라 친구들로부터 물려받은 아기 가구, 장난감 옷 그리고 물려받은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젊은 엄마가 사들인 아기용품이 아기가 태어나기 전부터 집안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유치원 하나를 세워도 부족하지 않은 아이 물품이라 필자는 절대 물건으로 손자 사랑을 표현하지 않으리라 미리 결심했다. 아이와 함께 행복하려고 필자가 동심으로 돌아갔다. 아이가 지루해하지 않고 즐기는 놀이를 늘 생각했다. 배터리 장착하여 가볍게 터치만 하면 노래하고, 돌아가고, 달리는 플라스틱 장난감을 뒤로했다. 사람과 사람이 하는 놀이만을 고집했다. 아들 세대에서도 밀려버린 필자 어린 시절에 하였던 비가공의 놀이를 했다. 술래잡기, 땅 뺏기, 헌 신문 조각내기, 구슬치기, 딱지놀이 모래성 쌓기, 의자 이어 전차 놀이, 나뭇가지 멀리 던지기, 장님놀이, 다섯 알 가지고 노는 공기놀이를 했다. 아이가 자란 후에는 설날의 민속놀이, 제기차기, 윷놀이도 했다. 부모가 아이에게 배려하는 플레이 데이(play day)는 아이가 다른 아이 집에 가서 놀기도 하고 다른 집의 아이가 우리 집에 와서 놀기도 하는 날이다. 플레이 데이로 우리 집에 온 아이들과도 손자와 하였던 놀이를 했다. 인종이 다른 아이들도 많이 즐겼다. 신선하고 인간 냄새나는 놀이가 테크닉을 주제로 한 놀이보다 아이들의 동심에는 더 잘 어울린 것 같다. 손자가 유치원에 다니고부터 학교가 파한 후 학교 운동장에서 놀이할 때면 손자반 아이들과 함께 부러진 나뭇가지 모아 높이 쌓기 경쟁을 하기도 했다. 이런 놀이로 정이 들어 여러 인종의 아이들이건만 필자를 부를 때는 손자가 부르는 “올치 할머니”라 정확한 발음으로 부른다. 미국 학교에서는 반의 학부모 중에서 반 전체의 아이들에게 엄마 역할을 하는 사람을 클래스 맘으로 정하여 한 해 동안 담임교사를 보조하게 한다. 그런데 하루는 손자의 클래스 맘이 필자가 운동장에 크게 사각형의 그림을 그리고 네 모서리를 한 사람씩 차지하여 작은 조약돌을 엄지와 검지로 튕겨 땅뺏기 하는 모양을 보더니 “너 클래스 그랜마다”란다. 처음 이 놀이를 할 때 흙에는 세균이 있다고 생각하는 아이들 엄마가 저개발형 놀이라 비웃지 않을까 염려하였다. 야만인들이나 하는 게임을 한다고 손자를 따돌리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컸다. 예상외로 아이들도 좋아하지만 학부모도 얼굴 찡그리지 않아 얼마나 다행스러웠는지 모른다. 세 해가 후딱 흘렀다. 지난 2월 손자를 데리려 학교엘 갔다. 공기의 드나듦도 관리하겠다는 묵직하고 문틀에 꽉 끼였던 교문이 열렸다. 백인 아이, 남미 아이, 중국 아이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오면서 필자를 보더니 ‘웰컴 올치 할머니’를 합창한다. 픽업 나온 보호자들도 필자 손을 툭툭 치고 지나갔다. 이 정도면 명예 클래스 그랜마였다고 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닐 것 같다.
- 2016-06-15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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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육문화] 나이 59살 10년
- 100세 장수시대가 우리 앞에 활짝 열렸다. 덕분에 ‘인생은 60세부터’라는 말이 일반화하고 있다. 하지만 그곳은 건너기 싫은 강이다. '고령자'가 싫어서 59세에서 나이 먹기를 멈추고 젊은 오빠인 양 10년을 살았다. 삶길 어언 70년! 살길 30년을 아름답게 살고 싶다. 학생 시절에 읽은 어느 유명 여류작가의 ‘29세 10년’이라는 글귀가 실감 나게 다가왔다. “25세부터 노숙미를 자랑하려고 29세 행세하였으나 막상 그때가 되니 불효하는 노처녀가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음부터는 나이가 겁나서 35세까지 29세로 10년을 살았다”라는 줄거리였다. 50대까지 삶은 희망이 있었다. 샛별 보고 출근하고 달을 벗 삼아 집을 찾으면서 열심히 살았다. 은퇴 후 생활이 안락하리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 너머에는 뛰어넘기 어려운 절벽이 버티고 있다. 노인생활의 문제점을 세계에서 제일 많이 안고 있는 게 한국이다. 아들보다 어린 청년들과는 취업 전선에서 맞서야 하는 기막힌 처지에 놓였다. 50대 초반 사회에서 은퇴가 시작되나 국민연금 지급은 오히려 65세로 늦춰졌다. 은퇴는 일찍 오고 복지는 오히려 늦어는 어려움에 부닥쳤다. 그래서 60대 되는 것이 매우 싫어졌다. 그냥 59세로 작정하고 살았다. 평균수명은 매년 늘어나 세계 최고수준인데 지하철을 공짜로 타는 ‘지공거사(地空居士)가 돼려면 65세 이상이어야 한다는 기준도 문제다. 한창나이를 왜 ‘고령자’라고 하는가? 지하철을 타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경로석 앞에서 서성인다. “그 자리에 앉는 것이 젊은 세대에 대한 배려다”는 이야기에 공감한다. 곤란하지 않게 알아서 처신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얼굴에는 주름이 깊어가고 행동은 굼떠졌다. 나이를 속일 수 없는 증표가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60대 중반 은퇴 후에는 자원봉사와 사회교육에 참여하면서 보람차게 살고 있다. 도시락으로 점심을 들면서 즐겁게 자원봉사하시는 사람들도 만났다. 그들에게 숭고한 인간의 모습을 보았다. 필자는 평생교육에 참여해 사회에 공헌하는 방법을 익혔다. 이제는 사회에서 터득한 귀중한 경험을 사회에 되돌려야 할 때가 되었다. 평생교육 참여는 스스로를 발전시킨다. 평생교육도 그동안 많이 변했다. 얼마 전까지는 취미, 여가 활용 등 시니어의 은퇴 후 생활교육이 주를 이루었다. 이제는 일자리 창출, 창업 위주로 청장년 교육처럼 교육과정이 변하고 있다. 시니어도 새 삶을 찾아야 한다. 50대처럼 살아온 10년이 훌쩍 지나가고 있다. 70세로 훅 뛰어야 할 때가 다가왔다. 두려워하지 않고 새 삶을 떳떳이 맞이할 것이다. 안락한 은퇴생활만 기대하기는 너무 젊다. 30년 살길이 바로 내 앞에 있다. 희망을 설계하고 즐겁게 살고 싶다.
- 2016-06-14 14: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