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혜숙(趙惠淑·65) 원장의 이력은 다소 특별하다. 전공이나 학위만 보면 남보다 더 공부에 매진한 간호사로 이해되는 정도다. 하지만 앞에 학교 이름을 붙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조 원장은 이화여자대학교 간호학과에 입학하면서 간호사로서 첫발을 내딛는다. 석사과정은 부산대학교에서, 박사과정은 고려대학교에서 졸업했다. 전문간호사 과정인 가정간호교육과정이나 상
고등학교 졸업 전까지 까까머리를 강요당하는 시대를 살아왔다. 이른바 ‘탈개인화 시대’였다. 성장이 필요했던 시절 국부 통치 하를 살던 사람들은 가시적 통제를 받아야 했는데 그것이 바로 탈개인화 현상을 이용한 것이다. 군중 혹은 집단 속에서 때때로 자신의 정체성을 자각하지 못하는데 이 현상이 탈개인화다.
멋 부릴 수 없던 앞머리 1cm 수렁
고등
서울시 교육청에서 중고교생 두발 자유화를 선언했다. 머리 길이 뿐 아니라 염색과 파마도 허용한다. 정말 놀라운 발상이다. 단정한 학생의 모습은 사라지고 온통 멋 부린 울긋불긋 패션을 보게 될 것 같아 걱정이 앞선다. 나는 약간 보수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어서인지 학생은 단정하고 깔끔한 모습이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러고 보니 좀 켕기는 구석이 있기도 하다.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외모나 의상, 소지품, 그리고 관심사 등에 대해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는 경우를 외국 사람들에게서는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많은 사람이 남이 나를 어떻게 볼까,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데에 신경을 쓰고 살지만 실제로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많이 두지 않는 것 같다.
얼마 전까지 나는 수염을 길렀었다. 현직에 있을 때부터 길러
오래전부터 학교에서, 사회에서 배워야 했지만 모르고 지나쳤던 우리 어머니들, 여성들의 출중한 운동 역사가 있다. 바로 한국 최초의 여성인권선언이었던 ‘여권통문’이다. 늦었지만 이 순간 이 역사적 사실을 알게 되시는 분들은 참 다행이다.
120년 전인 1898년 9월 1일, 북촌의 양반 여성들이 이소사, 김소사의 이름으로 ‘여학교설시통문(女學校設始通文)’
50년 전쯤 편지를 주고받았던 짧은 인연에 기대어 그대에게 다시 편지를 씁니다. 그 사이 어떻게 지내셨나요? 벌써 반세기 전의 일이 되어서 그대나 저나 서로의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사이가 되고 말았지만 밤잠을 설치며 한 자 한 자 정성스럽게 편지를 이어가던 까까머리 시절의 기억은 아직 저의 마음 한편에 남아 있답니다.
그때의 청소년들은 참 답답한 오
검정고무신, 아이스께끼, 초가지붕, 푸세식 화장실…. 지금은 까마득한 시절의 우리나라 풍경을 오롯이 기억하는 사람. 1969년 미8군 장병으로 한국을 방문한 스물한 살 청년은 소와 함께 밭을 갈고, 어른을 공경하며 사는 순박한 사람들의 나라가 무작정 좋았다. 미국으로 돌아간 뒤에도 어떻게 하면 한국에 가서 살 수 있을까 궁리하는 날이 많았다. 그리고 마침내
여러 산업 현장에서 카운슬러로 활약하고 있는 신완정(申婉丁·58) 청아신상교육연구소 소장은 원래 직업 전선과는 거리가 먼 주부였다. 남편이 공군 장교로 있었기 때문에 전업주부를 고집했다 해도 큰 걱정 없이 지낼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일찍 결혼했죠. 공군사관학교 생도 2학년인 남편을 만나 임관식 때 약혼했으니까요. 그렇게 평범한 주부생활을 하다 다시 공부
요즘은 장수 시대다. 환갑나이는 나이도 아니다. 경로당에는 입학자격도 없다. 칠십은 먹어야 겨우 명함을 내밀 정도다. 오죽하면 칠십 된 분도 ‘경로당 형님들이 술 심부름 시킨다’고 발을 끊으셨다 하지 않는가? 의학이 발달한 이유도 있지만 그만큼 경제적 풍요가 가져온 혜택을 무시할 수 없다. 이렇게 오래 살 수 있다는 것은 시대를 잘 타고난 행운일지도 모른다
“붉고 통통한 볼에 눈이 맑은 여자 같은 술이여!” 한산 소곡주에 취한 그가 감흥에 못 이겨 한밤중 끼적였다는 한마디다. 주선(酒仙) 이백이 그 모습을 봤다면 그냥 가지 못하고 배틀 한번 붙자 했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다 술 향을 맡았다가 낯선 길로 들어섰다는 허시명(56) 씨. 우리 술 찾아 20여 년간 유랑하듯 전국을 떠돌더니 어느 날 술 얘기 좀 해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