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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중년·꽃중년 새 바람, 학교 가는 사람들] Part 4. 우아한 인생 2학기, 교양학점 올리기 ②서울시민대학
- 나이 들수록 지식을 뽐내기보다는 지혜(智慧)를 나누고 덕(德)을 베풀었을 때 자연스레 교양이 묻어난다. 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 지혜와 덕은 하루아침에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닐뿐더러, 교과서나 시험도 없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인생의 큰 숙제와 같다. 해결하는 방법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그동안의 소양과 더불어 끊임없이 공부하며 그 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한 가지 더 있다. 바로 체력(體力)이다. 몸이 건강해야 정신과 마음이 건강한 상태로 오랫동안 인생 공부를 해나갈 수 있겠다. 교양 있는 중·장년의 삶을 위해 ‘지덕체(智德體)’를 향상할 수 있는 배움의 장을 살펴봤다. ◇ Chapter 2. 서울시민대학에서 德 학점 올리기 서울시는 시민에게 풍성한 배움의 기회를 제공하고자 ‘서울시민대학’을 운영한다. 2013년 시작해 인문학적 성찰, 시민 민주주의, 삶의 터전, 예술적 감성 등 총 379개 강좌에 교육 인원 2만693명(연인원 8만6363명)이 수강하는 등 인문학 교육을 통해 성숙한 시민으로서 성장할 수 있는 배움의 장을 마련해왔다. ‘서울시민대학’은 시민청, 뚝섬 학습장(방송통신대 서울지역대학), 은평·중랑 학습장, 대학연계 시민대학(14개 대학 학교별 강의장)에서 2016년 상반기 114개 강좌를 3월에 개강하며, 하반기에는 230여 개 강좌로 확대할 예정이다. 서울 시민이라면 누구나 무료로 수강 신청할 수 있도록 서울시 평생학습포털 사이트(sll.seoul.go.kr)를 통해 온라인 선착순 모집한다. 세부강좌는 서울시평생학습포털에서 확인 가능하며, 수강 신청은 3월 8일 10시부터다. 3월 22일 시민청 시민대학부터 강좌별 순차적으로 개강한다. 서울시민대학의 시민청 시민대학은 유명 강사의 재미있는 대중 인문강좌를 들을 수 있고, 은평학습장은 평생교육사, 예술지도사 등 전문가로 성장하고 싶은 시민들에게 전문가 역량 강화 교육을 제공한다. 뚝섬· 중랑 학습장은 평생교육시설이 부족해 학습기회가 적은 일반시민들에게 시민공동체과정, 부모교육 등 생활 속 인문강좌를 진행한다. 또한 시민 누구나 더 가까이 인문 심화강좌를 들을 수 있도록 서울시와 협력을 맺은 대학교 내에서 대학연계 시민대학을 운영하고 있다. 특히 대학연계 시민대학은 2013년 3개 대학이 서울시와 협력운영하여 11개 강좌 365명이 수강했고, 2015년에는 14개 대학 69개 강좌에 2885명이 참여하는 등 8배가량 학습자가 늘었다. 각 대학의 특성을 반영한 다양한 인문 전문강좌에 대해 학습자들의 만족도가 높았던 덕분이다. 이러한 학습자들의 요청에 힘입어 하반기에는 운영대학을 20개 대학으로 확대할 예정이다. 서울시민대학은 학습자에게 배움의 즐거움을 주는 한편, 학습매니저에게 평생교육 전문가로 성장의 기회를 주고, 대학 등 민간 평생교육기관과 협업하는 등 지역사회 환원활동도 해나가고 있다. ‘나를 위한 글쓰기’ 수강생들이 말하는 ‘서울시민대학’ 나를 위한 배움을 통해 만난 ‘진짜 나’ 경희대에서 ‘나를 위한 글쓰기’를 수강한 50대 김혜순씨는 “대학을 졸업한 지 20~30년이 넘은 중·장년에게 필요한 공부를 선택해 들을 수 있었던 점이 좋았다. 대학 캠퍼스를 다시 거닐어 보는 낭만도 만끽하고, 다시 배움으로써 새로운 문화를 접하고 만들어갈 수 있는 기회라 생각한다”며 “중·장년이 30% 정도 되는데, 함께 배우는 분들의 의지는 매우 강했다. 처음엔 문단의 개념이나 글의 전개 방식 등에 대해 전혀 몰랐던 동료가 강의를 거듭하면서 눈에 띄게 발전했다. 칭찬을 많이 받고 글로 상을 받는 분들이 늘어났고, 80세에 가까운 어르신은 구술로 전환하는 방법을 제시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서울시 메일링 서비스를 통해 서울시민대학을 알게 된 60대 김모씨는 “다양한 강좌들이 무료로 진행된다는 점이 정말 좋았다. 강사진과 커리큘럼도 마음에 들었다”며 “앞으로도 이러한 강좌를 지속하고, 많은 이들이 참여한다면 고령화사회를 맞이한 노후에도 건강한 사회 구성원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소감을 말했다. 특히, 그녀는 ‘나를 위한 글쓰기’를 통해 진짜 자기 자신을 만날 수 있었다며 만족감을 드러냈다. “그동안 잊고 지낸 시간을 되새김하며 치유하지 않고 묻어버린 상처와 아픔, 그리고 기쁨도 다시 찾게 됐다. 학기가 끝났지만, 수업 시간 내에 다 쓰지 못한 나의 이야기를 지속해서 써나갈 수 있도록 격려하는 벗이 생긴 점도 감사하다”며 글쓰기를 통해 건강한 삶을 살아가고 싶다고 바랐다. 학습매니저 이서연(52)씨가 말하는 ‘중·장년 학생들의 학구열’ 노력·열정·배려 속에서 발견한 중·장년의 기품(氣品)과 기쁨 서울시민대학에서는 강사와 학습자가 더 잘 소통할 수 있도록 새로운 교육전문가인 학습매니저가 함께하고 있다. 이들은 학습자료 준비, 강의실 및 출석 관리뿐만 아니라 시민대학과 학습자, 교수와 학습자를 이어주는 소통창구 역할을 한다. 학습현장에서 수강생들의 건의사항이나 고충을 듣고 처리하기도 하지만, 수업에 대한 만족도와 반응도 가장 직접적으로 듣고 학습동아리나 커뮤니티 형성을 도와준다. 지난해 홍익대학교에서 학습매니저로 활동했던 이서연(52)씨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그녀는 학습매니저와 담당 교수들이 가장 놀라워한 것은 중·장년 수강생들의 노력과 열정이라 말했다. “교수님들은 학습자들의 진지한 수업 태도에 찬사를 보냅니다. 일반 대학생을 상대로 강의할 때는 정해진 커리큘럼이나 학점 이수를 목적으로 수업을 듣기 때문에 태도나 열정이 덜하다고 해요. 그런데 이분들은 정말 자기가 원해서 스스로 좋아하는 강의를 찾아오신 거잖아요. 수업 몰입도도 대단하고, 예습 복습도 철저하게 해오니 수업의 질도 높아졌죠.” 수업에는 중·장년뿐만 아니라 학생이나 청년들도 참여한다. 소모임을 만들거나 SNS를 통해 젊은이들과 배움을 나누는 등 세대 간 훈훈한 사례도 많다고. 나이가 적고 많고를 떠나 한 학기를 동기라는 이름으로 어우러지며 나아가 인생 선배들의 따뜻한 배려로 함께 한다. “질문이 많아지면 진도가 더디게 나가는 경우가 생겨요. 중·장년 학습자들은 주로 쉬는 시간이나 수업이 끝나고 궁금했던 것들을 털어놓으시죠. 양보하고 배려하는 모습에서 교양과 기품이 묻어나더라고요.” 겉으로는 차분하지만 그 속에는 배움에 대한 열정이 가득했다. 만족스러운 그들의 표정을 볼 때 가장 보람을 느끼는 이씨다. “거동이 불편하신 70대 남자 학습자분이 있었는데, 수업을 빠짐없이 들으셨어요. 같이 수강한 분들이 모두 격려의 박수를 쳐드렸어요. 학습자 자신도 굉장히 뿌듯해하고 기뻐하죠. 마지막 질문은 대개 ‘언제 또 하느냐’예요. 중·장년의 배움에 대한 열정이 식지 않음을 확인하는 순간이죠.”
- 2016-03-30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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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퇴라이프] 행복한 실버 필수조건은 ‘아내’
- ‘자동차 왕’으로 불리는 헨리 포드(Henry Ford)가 80세 생일을 맞아 열린 축하연에서 “당신이 일생 동안 이루어 놓은 훌륭한 일들 가운데, 가장 크고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고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야 물론 나의 가정입니다.” 인류의 과학사에 남긴 공적으로 노벨 물리학상과 노벨 화학상을 연이어 수상한 폴란드 태생의 여성 과학자 마리 퀴리(퀴리 부인)는 “가족들이 서로 맺어져서 하나가 되어 있다는 것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최상의 행복이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이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그 어떤 부나 명예보다도 가정, 가족관계가 귀중한 것이라는 사실을 웅변해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특히 실버 라이프를 살아가는 남성들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서는 가정, 특히 아내보다 더 소중한 존재는 없을 것 같습니다. 어쩌면 노후에 아내 없이 혼자 살아가는 남성보다 더 비참한 존재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근래에 들어 결혼 생활 20년이 지난 뒤에 하는 ‘황혼이혼’이 급격하게 증가하는 추세입니다. 지난해 통계를 보면 결혼해서 30년이 넘은 부부의 이혼건수가 2004년에 4600여 건, 2009년에 7200여 건이었던 것이 2014년에는 1만300여 건으로 10년 만에 3배 가까이 늘어난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생기는 것일까요?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이러한 헌상은 ‘남은 인생은 남편이 없어도, 아니 남편이 없어야 잘 살 수 있다’는 실버 세대 여성들의 독립선언이 아닐까 싶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남편들은 월급을 가져다 주는 것, 즉 확실한 ‘현금출납기’의 역할만으로 집안에서 왕 노릇을 해 왔습니다. 그러면서 가사노동에서부터 자녀의 육아, 진학, 결혼에 이르기까지 가정에서의 모든 일들은 아내에게 떠맡기고 살아 왔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오랜 유교적 전통과 남성 중심 교육의 결과로 대다수의 아내들은 그것을 당연히, 혹은 거부할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이며 살아 왔습니다. 그러면서 대다수 부부들은 어쩌면 돈보다 더 중요한, 부부간의 대화와 소통 없이 같은 울타리 안에서 동거인 비슷한 생활을 지속해 온 것입니다. 그러다 남편이 직장을 그만두면서, 졸지에 ‘현금인출기’ 기능이 사라진 상태에서, 부부가 집안에서 얼굴을 맞대며 지내야 하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늘어나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전개됩니다. 이런 상황은 필연적으로 남편과 아내의 위상 역전, 혹은 갈등 증폭 현상을 불러오게 됩니다. 평생을 가장으로 군림해 온 남편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건 정말 있을 수 없는, 견디기 힘든 참담한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직장에서 퇴직을 하고 나면 누구나 외롭고 허전하고, 때로는 상당 기간 정신적 공황 상태에서 헤매게 됩니다. 그런 공허함을 해소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아내인데, 정작 가장 필요하고 가장 의지하고 싶은 순간에 아내는 그런 남편들의 언덕이 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무턱대고 그 아내들을 나쁘다고만 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며, 여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는 것입니다. 남편이 월급봉투를 무기로 삼고, 가정의 문제를 등한시해온 긴 세월동안, 아내는 가정 내에서 자기만의 성벽을 굳건하게 쌓아 왔습니다. 그러니 현금인출기라는 유일한 무기마저 잃어버린 남편이 그 두터운 벽을 뚫고 들어가기에는 역부족의 상태가 돼버린 것이지요. 아내 역시 이성적으로는 남편이 안됐다거나, 잘 대해 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는 있지만, 이미 남편과의 사이에 세워진 심리적 장벽은 그 자신조차도 어쩔 수 없을 정도로 높고 튼튼한 것이 돼버렸으니까요. 오히려 은퇴하여 집에 박혀 있는 남편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로 인해 정신질환까지 앓게 되는 여성들의 수도 적지 않다고 합니다. 오죽하면 ‘은퇴남편 증후군(Retired Husbands’ Syndroms)’이라는 생소한 정신질환까지 생겨나게 되었을까요. 이런 상황에서 시작된 부부간의 갈등이 발전하여 급기야 황혼이혼의 폭발적 증가라는 사회문제로까지 비화하게 된 것입니다. 황혼이혼을 당한 남편들의 그 이후의 삶은 거의 오아시스조차 말라 버린 사막에서의 생활에 가까운 것이 되고 맙니다. 노후에 벌어지는 부부갈등의 경우 자식조차도 아버지를 이해하거나 아버지의 편에 서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고 합니다. 아내들이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식들 역시 성장기에 아버지는 ‘돈 버는 기계’였을 뿐, 아버지와 따스한 인간적 교감을 나눠 본 기억이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여성은 남편이 없어도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데 큰 문제가 없지만, 남성의 경우는 배우자 없는 혼자만의 삶을 제대로 유지하는 것이 대단히 어렵습니다. 남편들은 평생 동안 직장생활 말고는 먹고, 입고, 자고, 살아가는 거의 모든 일을 아내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해 왔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런 비극적인 상황을 막고 행복한 노후의 필수 조건인 ‘배우자와의 원만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까요? 제 경험을 토대로 말씀드리자면, 은퇴하기 훨씬 이전부터 남편들이 스스로 현금지급기 역할을 넘어서는, 아내가, 그리고 가정이 필요로 하는 다기능설비(multi-functional equipment)가 되기 위해 노력과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남편들의 발상의 전환이 중요합니다. 다시 말하면 밥해 먹고, 설거지하고, 빨래하고, 청소하는, 소위 3D 업종에 해당하는 가사노동에서부터, 자녀 교육, 진학, 결혼 등의 일들이 결코 아내만의 일이 아닌, 부부가 함께 살아가는 데서 발생하는 ‘공동의 일’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함께하는 것을 생활화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아내도 노후에 남편을 위해 밥 짓고, 설거지하고, 빨래하고, 청소하는 일을 즐거워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절대로 없습니다. 저는 은퇴한 이후로도 상대적으로 아내와의 원만한 관계를 향유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이것은 제가 그런 일들을 잘해서가 아니라, 아내가 평소의 저의 그런 자세와 노력을 인정하고 평가해 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한 가지, 평상시부터 아내와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노력을 해야만 합니다. 자주는 아니더라도 평상시 아내와 함께 외식을 하거나 영화를 보거나 차를 마시는 생활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만약 주말의 취미생활을 아내와 같이 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겠지요. 평상시 주말에 골프 치는 노력과 시간의 절반만이라도 아내를 위해 할애한다면, 노후에 아내가 남편을 배려하는 노력과 시간이 두 배 이상으로 늘어날 것입니다. 요컨대, 갑자기 늘어난, 두 사람이 함께 보내야 하는 시간을 어색한 것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 평상시에 함께 시간 보내는 습관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노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요건인 아내를 곁에 잡아 두고, 변함없이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함께 해로할 수 있기 위해서는 아내가 자신만의 성을 높이 쌓아 올리지 않도록 하는 관심과 배려를 잊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러지 못한 상태로 노후를 보내게 된다면, 무엇보다 아내가 살고 있는 삶의 방식을 이해하고, 인정하며, 아내의 독자적 영역에 간섭하거나 허물려고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은퇴한 이후에도 여전히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아내는 남편의 뜻에 따라서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면, 조만간 황혼이혼 통보서를 받아 들 각오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실버 세대 남성들이여! “형! 남자가 나이 들면 필요한 세 가지가 뭔지 알아? 마누라, 집사람, 와이프래!”라는 실버 보험광고에 등장하는 배우 송재호의 너스레는 결코 너스레가 아닌, 100% 진실이라는 것을 명심하고 삽시다. >> 조용경(趙庸耿) 경상북도 문경에서 태어났다. 경기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법대를 졸업해서 한국은행을 거쳐 포항제철(현 포스코)에서 故 박태준 회장의 비서부장과 홍보부장과 회장 보좌역으로 일했다. 포스코건설 인천 송도신도시사업본부장과 지난 2009년부터 2012년 3월까지 포스코엔지니어링(전 대우엔지니어링) 대표이사 부회장을 지냈다. 현재 포스코엔지니어링 상임고문, 한국트라이애슬론연맹 부회장, (사)글로벌인재경영원 이사장을 맡고 있다.
- 2016-03-21 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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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 투어] Part 3. 당신이 원했던 진짜 여행을 알려 드립니다
- “지금까지의 여행이 ‘패키지 여행’에서 ‘자유 여행’으로 변화해 왔다면 앞으로는 자유 여행에서 ‘가치 여행’으로 변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최근 새로운 트렌드를 쫓는 여행가들에게 각광받고 있는 링켄리브(Link&Leave)의 조은철 대표는 여행이 보편화된 문화로 자리 잡은 지금, 여행 트렌드가 또 한 번 전환점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ISG PARIS 그랑제꼴에서 경영을 전공하면서 비즈니스의 꿈을 키운 그는 10여 년 동안의 파리 생활, 뉴욕 교환 학생, 유럽과 중국 주재원을 하며 경험한 4개국 5개 도시에서의 삶을 통해 자연스럽게 여행전문가로 거듭나면서 바뀌는 시대를 체험할 수 있었다. 변화하는 해외여행의 트렌드를 짚어본다. 대한민국 여가와 문화의 핵심에 ‘여행’ 키워드가 자리 잡은 지는 오래됐다. 인터넷 블로그에는 세계 각국에서의 여행 경험이 담긴 블로그들이 넘쳐난다. TV를 켜면 여행을 테마로 삼은 수많은 프로그램을 쉽게 접할 수 있다. 서점가에서 여행을 다루는 콘텐츠는 기본 이상의 세일즈를 보장해주는 아이템으로 공인받고 있다. 또한 몇 년 전까지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만 있었던 항공업계에는 수많은 저가 항공사들이 나타나 폭발적인 성장세를 바탕으로 저마다 고객을 유치하기 위해 경쟁하고 있다. 여행이 일상이 되다 이렇듯 여행 트렌드의 수요는 약해지지 않고 더욱 커지는 모습이다. 지금까지가 양적 팽창이었다면 이제는 질적 팽창으로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흔히 과거에 우리나라에서 해외여행이라고 하면 미국과 일본, 조금 멀리 가면 영국이나 프랑스를 위시한 서유럽 정도가 주로 찾는 나라였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중동의 두바이, 낯설기만 했던 동유럽, 심지어 공산국가였던 중국까지도 친숙한 여행지의 하나로 받아들이게 됐다. 우리의 시야와 경험의 기회가 짧은 기간에 놀라울 정도로 넓어진 것이다. 변화는 여행의 형태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흔히 여행 경험은 여행사에서 일정한 프로그램으로 짜서 진행하는 소위 패키지 여행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이미 해외여행에 ‘익숙해진’ 신중년들에게는 이러한 기존의 패키지 여행에서 느꼈던 것 이상의 경험을 원하고 있다. 테마와 이야기가 있는 여행을 만드는 ‘여행 디자이너’ “중년들은 여행에 국한되지 않고 원하는 바가 다양합니다. 힐링, 체험, 문화, 예술, 미식 등 일상에서 충족하기 어려웠던 것들을 여행을 통해 좀 더 원하는 욕구를 채워줄 수 있습니다. 단순히 보는 여행에서 니즈를 자각할 정도가 되었다는 점은 그만큼 주체적으로 다양한 여행을 경험한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얘기입니다.” 조은철 링켄리브 대표는 개인에 따라, 여행 목적에 따라 그들의 니즈는 천차만별이 됐다고 말한다. 사실 링켄리브 자체가 바로 그러한 다양화된 니즈를 충족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여행 플랫폼이다. 링켄리브는 잇다(link)와 떠나다(leave)를 합쳐서 만든 이름으로, 누구와도 다른 자신만의 테마와 이야기를 원하는 여행자들을 위한다는 콘셉트로 만들어졌다. 그래서 링켄리브에는 테마에 따른 여행의 스토리와 스케줄을 기획하는 ‘여행 디자이너’가 있다. “‘여행 디자이너’는 전에 없던 직업입니다. 창작이죠. 자신의 경험과 전문성을 여행 기획에 녹이고 싶은 우리의 니즈와 ‘나는 어떤 여행을 하고 싶은지’를 점점 자각해서 뚜렷해지는 고객의 니즈를 보았습니다. 이건 제가 4년 전 프랑스 컨설팅 회사에서 하이엔드를 겨냥한 와이너리 투어를 기획하면서부터, 그리고 리서치, 금융과 보험회사에서 BtoBtoC 영업을 하면서 알 수 있었습니다. 확신은 트렌드를 계속 읽으면서 더 뚜렷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특별한 소수를 위한 특별한 여행을 만들다 조은철 대표가 4년 전에 근무했던 프랑스 컨설팅 회사에서는 프랑스 보르도 지방에 샤또를 소유하고 있었다. 여기서 샤또란 우리가 알고 있는 와이너리가 아닌 18세기~19세기 귀족들이 별장 용도로 지었던 곳이다. 그는 샤또를 호텔 시설로 활용하는 프로젝트에서 아키텐 지역의 와인과 힐링 여행을 기획하게 되었고, 기획 후 협회, 동호회, 금융회사에 판매까지 할 수 있었다. 그것이 최초의 여행 디자이너로서 링켄리브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링켄리브 여행 플랫폼은 각 분야의 전문가인 여행 디자이너가 콘셉트가 있는 여행을 기획하고 이 콘셉트에 공감하는 사람들과 함께 여행을 즐기는 것이다. 그래서 각 여행 디자이너는 성별, 연령, 전문 분야, 경험, 성향 등에 따라 여행을 기획하고 있다. 기획된 여행은 디자이너가 여행에 있어 가치를 두는 부문에 중점을 두기에, 상품의 타깃 어디언스는 여행 디자이너와 연령, 성향과 관심사가 비슷한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일반 여행 기획보다 매니아적이고 소수의 니즈를 충족시켜줄 여행 기획이 가능하다는 것이 강점이다. “예를 들어 똑같은 피렌체를 여행할 때, 한 디자이너는 ‘피티워모’라는 패션 박람회와 멋쟁이 남성들의 사진에 관심을 갖고 그를 중심으로 기획을 짭니다. 그리고 또 다른 디자이너는 ‘메디치 가문의 자취’를 따라 그 시대의 문화와 예술에 포인트를 두고 여행의 세계를 펼치는 겁니다. 봄과 가을에는 나오시마 건축 여행과 도자기 기행, 여름에는 라벤더 로드와 프랑스와 독일에서의 시간 여행, 그 밖에 시기마다 가는 패션 여행과 캠퍼밴 여행, 디톡스 리트릿 등 모든 여행이 특색과 매력 포인트가 다릅니다. 사람마다 기호가 다르듯, 매력을 느끼는 요인도 개인의 성향에 따라 다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링켄리브와 연결되어 있는 여행 디자이너는 27명. 음악가, 와인플래너, 셰프, 건축가, 작가, PD, 배우, 기자, CEO 등등 다채로운 경력의 여행 디자이너들이 디자인한 여행지들은 도쿄, 발리, 터키에서부터 포르투갈, 아이슬란드에까지 이른다. 그 다양한 직업군을 봤을 때, ‘맞춤형의 특별한 여행’이라는 말에 수긍이 갈 수밖에 없었다. 시니어의 여행은 행복 그 자체가 되어야 시니어들에게 여행은 그동안 힘들었던 자신의 삶에 주는 선물이다. 자신의 삶을 지탱하기 위해,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조직과 지인을 위해 버텨야 했던 삶에서 그나마 여유가 생긴 시니어는 여행을 통해 지금까지 살아왔던 혹독했던 세상과는 다른 세상을 만나길 원한다. 링켄리브가 시니어 여행자들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도 특별한 경험을 원하는 시니어들의 욕구가 여행을 바꾸는 원동력이 되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50대 이후 시니어들에게 여행은 하나의 큰 행복 요소입니다. 가격적인 면보다는 좀 더 잘 쉬고, 잘 먹고 케어받기를 원합니다. 따라서 여행의 중심이 가격에서 가치 중심으로 변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들이 원하는 가족여행, 친구들과의 여행에 있어서 전문가의 컨설팅 도움이 자신들이 원하는 여행에 더 잘 부합하고 고생의 리스크를 줄일 수 있을 것입니다.” 조은철 대표가 분석한 시니어들이 여행에서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은 무엇인지 궁금했다. 시니어들이 선호하는 네 가지 여행인 혼자 가는 여행/부부 여행/중년 여성들끼리의 여행/손주와 가는 여행으로 분류하여 각각의 재미를 물어봤다. “혼자 가는 여행은 여행 속에서 현지인과 한국인을 불문하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설렘이 있습니다. 혼자이기에 여정도 내 느낌에 따라 변화가 가능하고 한곳에 머물며 현지 문화를 깊이 있게 체험할 수도 있죠.” 부부 여행은 함께했던 일상과는 다른 곳에서 서로를 더 깊이 있게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한다. 여행의 콘셉트에 따라 다른 느낌을 갖겠지만, 성격의 차이가 강할수록 서로의 이해가 필요하다고. 멋진 풍광이 바라보이는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와인과 함께 대화의 꽃을 피운다면 그 동안 잊고 지낸 사랑의 싹이 더욱 피워진다는 것. “중년 여성들끼리의 여행은 정말 재밌습니다. 그동안 자식들을 키우며 힘들게 살아온 날들을 여행으로 보상 받을 수 있습니다. 서로 위로도 받고 순수했던 젊은 학창 시절을 떠올리는 싱그러운 행복감에 젖어들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손주와 함께하는 여행은 정말 특별합니다. 손주와 함께 즐거운 여행을 하며 애정도 싹 틔우고 시간의 제약으로 못했던 인생의 소중한 조언을 ‘새끼 강아지’들에게 줄 수 있습니다. 삶에서 손주와 함께 여행할 기회가 있다면, 인생에서 제일 행복한 순간 중에 하나가 될 것입니다.” 한국인 여행자는 변하고 있다 조은철 대표는 우리나라의 여행 문화가 변화하고 있다는 또 다른 증거로 여행자들의 마음과 태도의 변화를 들었다. “우리는 외국을 여행할 때, ‘미안합니다’, 또는 ‘실례지만’이란 말을 쓰는 걸 종종 듣습니다. 해외에서는 눈을 마주치고 웃는 모습도 너무 자연스럽습니다. 물론 모든 곳이 그렇진 않으나, 특히 유럽에서는 배려와 이해를 바탕으로 한 성숙한 문화가 자리 잡힌 듯합니다. 그러나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가 범죄의 증거로도 채택되는 한국에선 그런 이타심을 갖기란 정말 힘들어 보입니다. 당연히, 나와 내 식구 이외의 사람에 대한 배려란 사치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근래 들어선 여행 에티켓이 좋으신 분들을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어르신임에도 동심의 세계로 돌아간 듯, 해맑은 웃음으로 테이블 매너와 공공장소에서 포토 매너 또한 좋아졌습니다.” 그는 한국인들의 여행 에티켓이 점점 나아져 감을 느꼈으며 그들이 국내의 에티켓 문화를 새롭게 바꿔놓는 중심에 있을 것이라는 확신 또한 들었다고 한다. 그 말에는 축적되는 경험을 통해 보다 성숙한 여행자가 되어가는 한국인의 모습이 들어 있었다. 그러한 변화야말로 기존 여행 패러다임의 대안으로서 가치 여행에 주목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아닐까.
- 2016-02-26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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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 변호사의 상속 가이드] 혼외자녀를 낳은 남편이 이혼하자는데...
- 갑과 을은 1976년 3월 9일 혼인신고를 마친 법률상 부부다. 둘 사이에는 성년인 자녀 3명이 있다. 그런데 갑은 2000년 1월경 집을 나가 그의 딸을 출산한 병과 동거를 시작했다. 을은 갑이 집을 나간 후 혼자서 세 자녀를 양육했다. 직업이 없는 을은 갑으로부터 생활비로 지급받은 월 100만원 정도로 생계를 꾸려갔지만, 갑은 2012년 1월경부터 생활비를 주지 않았다. 생활비를 주기는커녕 갑은 을을 상대로 이혼소송을 제기했다. 당시 63세가 넘은 을은 위암 수술을 받고 갑상선 약을 복용하는 등 건강이 좋지 않았다. 을은 갑과의 혼인관계에 애착을 가지고 혼인을 계속할 의사를 밝히고 있다. 갑이 제기한 이혼소송은 인용될까. 2015년 말 SK그룹 최태원 회장이 혼외자를 언급하면서 배우자와 이혼하겠다고 말하고, 그 배우자는 자신의 잘못이라면서 이혼을 하지 않고 가정을 지키겠다는 의사를 표명해 세간의 화제가 됐다. 이에 대해 텔레비전, 신문 등에서는 최 회장의 이혼을 다루면서 ‘유책주의’라는 말을 여러 번 썼다. 이혼제도에 관한 각국의 입법례를 살펴보면, 배우자 중 어느 일방이 동거·부양·협조·정조 등 혼인에 따른 의무에 위반되는 행위를 한 때와 같이 이혼사유가 명백한 경우 두 가지로 처리된다. 하나는 그 상대방에게만 재판상의 이혼청구권을 인정하는 유책주의다. 다른 하나는 부부 당사자의 책임 유무를 묻지 아니하고 혼인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는 사실, 즉 혼인을 도저히 계속할 수 없는 객관적 사정인 파탄을 이유로 하여 이혼을 허용하는 파탄주의로 대별할 수 있다. 우리 대법원은 유책주의를 원칙으로 하면서도 예외적으로 다음과 같은 경우 유책배우자의 이혼 청구를 허용하고 있다. ①배우자도 혼인을 계속할 의사가 없어 일방의 의사에 의한 이혼 내지 축출이혼의 염려가 없는 경우 ②이혼을 청구하는 배우자의 유책성을 상쇄할 정도로 상대방 배우자 및 자녀에 대한 보호와 배려가 이루어진 경우 ③세월이 감에 따라 혼인 파탄 당시 현저하였던 유책배우자의 유책성과 상대방 배우자가 받은 정신적 고통이 점차 약해져 쌍방의 책임의 경중을 엄밀히 따지는 게 더 이상 무의미할 정도가 된 경우 등이다. 즉 이런 세 가지는 혼인생활의 파탄에 대한 유책성이 그 이혼청구를 배척해야 할 정도로 남아 있지 아니한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다. 최태원 회장 사례에서는 이혼소송을 한다면 최 회장이 혼외자를 둔 유책배우자인 것은 분명해 보이나 대법원이 유책주의의 예외로 인정한 경우에 해당할 것인지가 쟁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위의 사례에서 대법원은 유책주의 원칙을 확인, 갑은 이혼을 청구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즉 갑은 혼인생활의 파탄에 주된 책임이 있는 유책배우자이고, 혼인관계의 여러 사정을 두루 고려해도 을이 혼인을 계속할 의사가 없음이 객관적으로 명백함에도 오기나 보복적 감정에서 이혼에 응하지 아니하고 있을 뿐이거나 갑의 유책성이 그 이혼청구를 배척해야 할 정도로 남아 있지 아니한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위와 같은 대법원의 판례에 비추어 최 회장의 경우는 어떻게 될지 결론을 생각해 보면 어떨까.
- 2016-02-15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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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 착한 ‘치매 장모’와 사는 ‘이쁜 사위’
- 100세 시대, 치매는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불청객과도 같다. 이 달갑지 않은 손님을 맞았을 때는 누구나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절망에 빠지게 된다. 20여 년간 수많은 환자를 진료해온 킴스패밀리의원·한의원 김철수(金哲秀·62) 원장도 예외는 아니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장모의 치매는 그에게도 큰 충격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지금, 김 원장은 “나는 치매랑 친구로 산다”고 말한다. 노년의 불청객인 치매를 가장 가까운 친구로 맞이할 수 있었던 그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2009년 어느 날 장모에게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휴대전화 너머 들려온 목소리는 장모가 아닌 한 남성이었다. “할머니께서 집을 못 찾으시네요.” 깜짝 놀란 김 원장은 곧장 서울아산병원으로 장모를 모시고 갔다. 검사 결과, 치매 초기라는 것. 자신이 의사이면서도 ‘노안을 너무 과하게 진단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할 정도로 장모의 치매를 바로 받아들이기는 힘들었다. “평소 단정하시고 영민하신 장모님이었기 때문에 더욱 갑작스럽게 느껴졌어요. 그래도 정도가 심하지 않아 약을 타서 드시게 하고 이전과 똑같은 일상을 지내시도록 했죠. 이후로는 아내가 1주일에 한 번씩 방문했고 저도 자주 인사드렸어요. 그렇게 한동안은 조금씩 불안해도 평범한 생활을 하실 수 있었죠.” 자존심과 자립심이 강했던 장모는 바쁜 자식들이 행여 마음이라도 쓸까 봐 스스로 조심하며 조용히 잘 지내셨다. 이러한 생활은 치매 진단 후 3년 정도까지 가능했다. 2012년 초봄, 장모의 증세가 심상치 않아졌음을 느꼈다. 매주 찾아뵀는데도 “왜 요즘은 얼굴을 안 보이느냐”며 역정을 내시는 모습은 낯설게만 보였다. 깔끔했던 집안 곳곳은 쓰레기가 쌓이기 시작했고, 정성스레 키운 화분들은 메말라갔다. 그의 입에서 짧은 탄식이 새어 나왔다. “이제 올 것이 왔구나.” 아찔함에 몸서리칠 시간도 잠시, 집중적인 간병계획이 필요했다. 치매, 어린아이가 되어가는 병 치매 증상이 심해진 장모와 한집에서 지내면서 갈등은 하나둘씩 생겨났다. 집에 보내달라며 화를 내고, 불안해하는 장모를 위해 김 원장 부부는 자신들이 쓰던 안방을 내어 드렸다. 내 집으로 편하게 생각하시고 가족 구성원으로서 존재감을 확실히 느끼게 해드리기 위함이었다. 가족들은 조금씩은 불편했지만 그런 생활에 적응해야만 했다. 하지만 스트레스를 받는 것은 장모도 마찬가지였다. “온전한 어머니라도 갑자기 딸의 집에 와서 지내려면 불편할 것 아녜요. 그런데 늙고 치매에 걸린 장모님에게 갑작스러운 변화와 적응은 시련 그 자체였겠죠. 몇 가지 인지능력이 떨어졌을 뿐, 당신의 자존심이나 가치관 등은 정상이라 느끼기 때문에 가족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을 늘 미안해하셨어요. 그래서 설거지나 청소를 하시며 그런 마음을 덜어보려 하셨는데 그게 갈등의 불씨가 되어버렸죠.” 인지능력이 떨어진 장모가 설거지해놓은 그릇은 제대로 헹궈지지 않아 끈적거렸고, 음식물 쓰레기와 일반 쓰레기가 뒤섞여 집 안에는 하루살이가 날아다녔다. 집안일을 절대 하지 마시라 해도 소용이 없었다. 틈만 나면 설거지에 집착해 부엌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는 통에 아내의 언성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모녀의 마찰은 점점 거세졌고 급기야 장모가 울고불고하며 감정이 격해졌다. “치매 환자 입장에서는 자신은 정상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 자신이 설거지를 해내지 못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거죠. 그런데 그런 행동을 했을 때 갈등이 생기니 서운한 마음이 생기고 감정 컨트롤을 하지 못하게 되는 겁니다. 아내 입장에서는 어머니의 달라진 모습에 혼란을 느낄 수밖에요. 치매로 인해 벌어진 일들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정상이었던 과거 모습에 대한 기대 때문에 그런 변화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던 거죠.” 김 원장은 장모의 행동을 안타까워하면서도 속상해하는 아내를 보며, 치매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이해가 급선무라는 것을 느꼈다. 어린아이라면 실수를 하더라도 쉽게 이해할 일을 어른인 치매 환자에게는 너그럽지 못한 경우가 많다. 그는 치매 환자를 어린아이라고 생각하고, 그의 눈높이에서 상황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조언한다. “‘왜 이것도 못하지?’라고 생각할 게 아니라, ‘아! 이것도 할 수 있구나’라는 관점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정상적이었을 때의 모습을 기대하기보다는 치매 환자니까 제대로 기능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오히려 무언가를 해냈을 때 감탄하는 쪽으로 바꿔 나가야죠. 그렇게 되면 아이가 하나둘씩 해나갈 때의 기쁨처럼, 치매 환자가 스스로 행동하는 것 하나하나에 감사할 수 있어요. 그렇게 될 때 가족도, 환자도 편안해질 수 있고요.” 환자의 스트레스가 완화될 때까지 참아주고 기다려주면서 반복적으로 상황을 리마인드시키는 과정이 중요했다. 그런 우여곡절을 거쳐 설거지에 대한 집착이 줄어들면서, 빨래를 개거나 파를 다듬는 등 비교적 단순한 일을 하나둘씩 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일들은 치매환자로 하여금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줘 긍정적인 모습으로 변화하게끔 도움을 준다. 장모 덕분에 친해진 치매라는 친구 그 이름도 ‘굳세어라’ 장금순(85)인 장모는 평생을 굳세게, 활동적으로 살아오신 분이었다. 그런 장모가 꼼짝없이 집에서만 있게 됐으니, 오죽 답답했을까. 장모는 매일 안부 전화를 했던 아들에게 당신 집으로 보내달라며 떼를 쓰곤 하셨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자 아내는 어머니의 집을 처분해 단념시켜야겠다고 결심했다. 아들과 딸의 설득 끝에 어머니는 자신의 전부라 여겼던 집을 내려놓기로 했다. 마음은 먹었지만, 크나큰 아쉬움과 존재감 상실로 하염없이 울기도 하고, 실신까지 하며 힘겹게 집을 떠나보낼 수 있었다. “마음이 상하지 않으시도록 계속해서 설명하고 위로해 드렸죠. 하지만 이해를 못 하고 저에게 아내가 집을 팔아먹었다는 이야기를 하시는가 하면 심지어 집을 빼앗겼다고까지 생각하셨어요. 우리 부모세대는 특히 집에 대한 애착이 강한데, 의식이 멀쩡한 상태라면 모를까 치매로 판단력이 흐려진 뒤에는 집착만이 남을 수 밖에요. 그럴 때마다 우리 부부는 집을 팔고 난 돈을 넣어둔 통장을 펼쳐 보여드리며 이 돈으로 여생을 건강하게 사실 수 있도록 약속드린다고 거듭 말씀드렸어요. 한 달 정도 지나 안정을 찾으셨죠.” 현실적으로 치매 환자의 경우 집뿐만 아니라 독립적인 경제활동이 거의 불가능하다. 그런 탓에 김 원장의 아내는 일찍이 어머니의 도장, 통장, 보험, 부동산 서류 등을 공동 관리하기 시작했다. 상당히 민감한 문제라 공동 재산관리에 대해 운을 떼기는 쉽지 않았지만, 다행스럽게도 장모는 흔쾌히 승낙해주었다. 이러한 상황 등으로 자칫 오해로 번져 간 갈등이 생기기도 하지만, 김 원장의 가족은 치매 덕분에 가족애가 더 끈끈해진 계기가 됐다. “지방에서 사는 처남도 평소보다 자주 올라와 이전보다 가족끼리 대화하고 마주할 일이 많아졌어요. 특히 우리 부부가 장모님에게 하는 행동을 보고 두 아들이 어른을 대하고 효를 실천하는 방법을 간접적으로 깨닫게 됐죠. 아내와 저도 20~30년 후 우리의 모습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치매에 대한 경각심을 느끼고 인생을 더욱 신중하게 살아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어요.” 애매한 치매 등급 테스트, 웃지도 울지도 못해 어쩌면 이들 가족이 치매를 안고도 행복할 수 있었던 것은 ‘장모의 예쁜 치매’ 덕분일지도 모르겠다. 흔히들 대소변을 못 가리거나 욕을 하고 호통을 치며 주변 사람들을 괴롭게 하는 것을 ‘미운 치매’, 인지기능은 떨어지더라도 전두엽의 손상이 적어 감정 조절이 잘 돼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경우를 ‘예쁜 치매’라고 이야기한다. 이는 평소 선하고 즐거운 생각을 많이 하는 긍정적 생활이 영향을 끼친다. 그렇기 때문에 치매 환자가 밝고 낙천적인 마음을 지닐 수 있도록 곁을 지키는 가족들의 따뜻한 배려와 사랑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치매 이후에도 늘 긍정적으로 무엇이든 하고자 했던 장모는 학교에 보내달라고 이야기했다. 아내는 건강보험센터에 의뢰하고, 요양원과 보호센터 등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하지만 치매 등급 테스트에서 너무나 정확하고 똑똑히 대답하신 탓에 등급이 애매하게 나와 시설에 보내드리긴 어려웠다. 어머니의 상태가 좋아 다행이지만, 원하는 바를 들어드리지 못해 속상했던 아내는 김 원장에게 “우리가 예쁜 치매 병원을 차리자”는 말까지 하게 됐다. “예쁜 치매 병원을 운영하는 것은 제 꿈이기도 해요. 아직은 여건상 당장 실현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늘 마음에 간직하고 있죠. 저는 가정의학과 전문의로 의사생활을 시작했고, 아내의 제안으로 한의학 공부를 해서 한의사가 됐어요. 처음 가정의학과를 전공한 이유도 환자의 질병을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보기 위해서였거든요. 거기에 한의학도 전공하게 됐으니, 또 다른 시각을 가질 수 있게 됐죠. 양의학과 한의학의 융합을 통한 진료와 치료를 해왔고, 앞으로도 그런 관점에서 치매를 연구하려 해요. 무엇보다 치매 환자를 믿고 편하게 맡길 수 있는 병원을 만드는 게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시간이 흐른 뒤에야 담담히 조언하는 그이지만, 치매를 빠르게 인정하고 대처하는 것에는 묘안이 없다고 설명한다. 누구나 치매를 인정하긴 어렵고, 적응하는 데는 얼마간의 시간과 시행착오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치매 가족을 두고 의사로서 치매를 연구한 그의 온기 어린 조언이 치매를 겪게 될 이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란다.
- 2016-02-15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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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ather x Son, 환상 콜라보레이션
- 신중년이라면 성공적인 자식과의 관계가 이런 것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성인이 된 아들과 같은 패션을 공유하며, 길거리를 활보하고, 집에 와서는 아들의 고민을 상담해줄 수 있는 친구 같은 아버지가 되는 것. 그리고 내 젊은 시절의 이야기가 자식의 미래에 커다란 멘토 역할을 하는 것 말이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 부모자식 관계가 되기란 ‘하늘의 별 따기’인 것도 누구보다 잘 알 것이다. 여기 두 남자가 있다. 아들보다 옷을 더 잘 입는 아버지와 아버지의 무너진 자존감을 세워주는 아들이다. 지난해 3월 서울패션위크, 최수혁씨는 아버지와 함께 서울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를 찾았다. 대한민국의 패션 피플이 모두 모인다는 그 주에 아버지와 함께 멋지게 빼입고 부산에서 상경한 것이다. 그곳에 입장하기 전 최씨는 지인으로부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듣는다. “수혁아, 아마 너와 아버지에게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질 거야. 준비 단단히 해라.” 지인의 이야기에 콧방귀를 뀐 최수혁씨와 그의 아버지 최용환씨는 인생에서 믿기지 않는 경험을 한다. “사진 한 장만 찍어도 될까요?”, “여기서 포즈 좀 취해주세요.” 지인의 말이 맞았다. 믿기지 않지만 이 부자(父子)의 사진을 찍기 위해 두 줄, 세 줄의 카메라 라인이 생긴 것이다. 그리고 연신 플래시가 터졌다. 이 부자의 패션은 SNS를 타고 네티즌 사이에 큰 화제가 됐다. 무엇보다 아버지인 최용환씨는 이탈리아의 ‘중년 멋쟁이’로 소문난 이탈리아의 패션 에디터 닉 우스터(Nick Wooster)에 버금간다며 찬사가 쏟아졌다. 아들은 아버지의 조언을 받아 옷을 입고, 아버지는 옷을 구매할 때 아들 것까지 두 벌을 맞춘다. 패션에서 전혀 거리낌이 없으며, 세대 차이도 느껴지지 않는다. 수혁씨가 아버지에 대해 거리낌이 없는 것은 ‘함께 살며’ 비밀까지 터놓는 친구 같은 아버지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들의 친구들과 맞담배를 피우며, 노래방에서 함께 즐기는 아버지는 영락없는 친구다. 함께 살기? 이들처럼만 한다면 인생, 재미있게 살 수 있다. 섹스 이야기를 하는 부자 “아들에게 그래요. ‘야동’ 보지 말라고요. 그것은 판타지잖아요. 섹스는 서로가 좋아야 하는 것인데 야동을 보고 배우면 파트너는 전혀 좋지가 않거든요.” 아들인 수혁씨는 깊은 고민이 있을 때 집에 빨리 들어가고 싶다.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상담하는 것도 좋지만, 인생의 깊은 이야기는 함께 사는 아버지에게서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고민을 털어놓는 아들에게 아버지 용환씨는 결코 충고를 하거나 가르치려 하지 않는다. 경험에서 우러나는 스토리텔링과 조언이 있을 뿐이다. 그 고민의 소재 또한 다양하다. 부자지간에 다소 불편할 수도 있는 성생활에 대한 이야기도 아버지는 스스럼없이 한다. “아들과 벽 없이 지내려고 노력해요. 벽 사이엔 거짓이 있으니까요. 아들과 친구가 되려면 제 모든 것을 꺼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비밀이 없어야 둘 사이에 거짓이 없어지지 않겠어요?” 그래서 아버지 용환씨는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보여줄 것’과 ‘안 보여줄 것’을 가리지 않고, 모두 아들에게 털어놓는다. 그것이 설령 자신이 부끄러워했던 ‘흑역사’라도 말이다. 그것이 옳고 그른지는 아들이 판단할 몫이라고 생각하는 아버지 용환씨. 아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배울 것이 있다면 배우고, 잘못된 것이라면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교장선생님이셨던 아버지 밑에서 6남매 중 막내로 어려운 것 모르고 자랐죠. 제가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다 됐어요. 아버지는 제가 아무리 말썽을 피워도 뭐든지 해주셨죠. 철이 없던 저는 아버지와의 관계가 소원해지고,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는 그것이 너무나 후회가 되더라고요. 제 아들에게는 그런 아버지가 되기 싫었습니다. 꼭 친구 같은 아버지가 되고 싶었죠.” 사실 아버지 용환씨가 아들의 친구들과 맞담배를 피우고, 그들의 친구 같은 아버지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젊은 날의 그들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혈기 왕성했던 젊은 시절, 아버지 용환씨는 소위 한가닥했던 ‘놀아본 아버지’였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다닐 때는 학교 창문을 180개 정도 깼어요. 자해 시도까지 한 적도 있었죠.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아들에게도 이 이야기는 해줘야겠어요. 놀아봐야 인생을 알거든요.” 윈-윈의 관계라 함께 살아 좋다 “아버지와 같이 살면 좋은 점요? 제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거예요.” “함께 사니 무엇이 좋으냐?”라는 기자의 질문에 돌아온 수혁씨의 답변이 조금은 의외였다. 워낙 빼어난 패션 센스로 기자를 놀라게 했던 탓에 ‘아버지의 패션 센스를 배울 수 있을 것’이라는 답을 예상했기 때문이다. 그의 답변은 소금 간을 하지 않은 음식처럼 조금은 싱거웠지만, 담백하고 영양가가 있었다. 그리고 가족과 함께 살고 싶은 신중년이 들어야 할 이야기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그의 말 속에 담긴 의미는 ‘경청’이었다. 여러 관계에서 지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그것은 바로 소통의 시작이자 성공적인 관계의 출발점 이었다. 우리네 자식들도 배워야 할 점은 있다. 바로 부모 세대의 자존감과 자신감을 북돋워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아들 수혁씨가 아버지를 ‘SNS 핫 피플’로 만들고 싶었던 이유도 이와 같다. 자신에게는 최고의 ‘패션왕’인 아버지의 축 처진 어깨를 보기가 싫었던 것이다. 계속되는 사업 실패로 자신감이 바닥으로 떨어진 아버지를 위해 아들 수혁씨가 패션 사진 촬영을 제안했다. 일종의 아버지 ‘기 살리기 프로젝트’였다. “비슷한 나이대의 중년 중에 아버지의 패션은 독보적이라고 생각했어요. 아버지는 물론 아니라고 손사래를 쳤지만요. 확신에 차서 아버지께 제대로 빼입고 사진 한번 찍자고 했어요. 그리고 SNS에 사진을 올렸는데 저보다 아버지에 대한 반응이 더 폭발적이더라고요.” 처음엔 어색해하던 용환씨도 이제는 적극적으로 변했다. 길거리에서 사진을 찍어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사업 실패로 떨어진 자신감이 아들 덕분에 생겼어요. 이제는 부산 서면(西面) 길거리를 돌아다니면 저를 알아보고 사진 찍자는 젊은이들이 많아요. 정말 놀라운 일이죠.” 함께 살고, 함께 입고, 함께 사업한다. 아버지 용환씨의 패션 철학은 뚜렷하다. 바지의 길이는 복숭아뼈 아래로 내려가는 법이 없고, 바지의 통은 항상 7인치를 유지한다. 옷을 살 때는 사이즈보다는 디자인이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고, 합리적인 가격이어야 한다, 어떨 때는 옷값보다 수선비가 더 많이 나올 때가 있다. 옷은 몸에 꼭 맞게 입어야 한다는 그만의 철칙 때문이다. “아들이 갓 성인이 됐을 때 옷을 입고 나가는데 너무 짜증이 나더라고요. 옷을 너무 못 입어서요. 내가 ‘이렇게 입으라’고 조언을 하면, 자기 뜻대로 입으려고 고집을 피우기도 하고요. 지금은 그때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부끄러워합니다. 참으로 우습죠.” 이런 아버지의 패션 센스를 보고 자란 덕분인지 아들 수혁씨도 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했다. 패션 디자인을 전공한 것은 아니지만, 이제는 아버지와 함께 손을 잡고 패션 사업에 뛰어들었다. 아버지와 패션 사업을 같이한다는 게 궁합이 잘 맞을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젊은이들보다 더 젊게 옷을 입는 아버지 덕에 그런 걱정은 이미 날려버린 지 오래다. 그리고 역할도 뒤바뀐 듯하다. 마케팅과 디자인은 아들이 맡고, 모델은 아버지다. 참으로 비범한 사업이다. “아버지와 함께 살면서, 아버지는 항상 옷을 살 때 제 것까지 두 벌을 맞추셨죠. 이제는 그 옷을 입고 함께 사업을 하려 합니다. 아버지의 ‘Father’와 아들의 ‘Son’을 결합해 ‘Fason’이라는 이름을 내걸었어요. 늘 아버지와 함께하니 힘도 두 배가 됩니다.” 이 부자는 묘하게 닮았다. 여유로운 행동이나 꼿꼿한 자세. 그리고 서로에 대한 배려까지. 함께 살기란 닮아가는 것이다. 무의식 중에 서로를 배려하고 닮아가려 한다는 것. 그것은 가족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함께 산다면 가족의 얼굴을 보라. 함께 살며 닮아 있는 것은 이 부자만의 이야기가 아닐 터이니.
- 2016-01-21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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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 정퇴자, 조퇴자, 졸퇴자가 말하는 독서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이야기'
-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나 그에 대한 생각들을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신중년 우리들의 생각도 좋지만 젊은 사람들은 현재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할 때가 있다. 여기 세 사람이 있다. 젊은 사람들과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토론을 한다. 그들이 은퇴와 퇴직 이후 얻은 삶의 즐거움은 여기에 있다. 그들은 이 내용들을 이란 책에 담았다. 정퇴자(정년퇴직), 조퇴자(조기 퇴직), 졸퇴자(졸지에 퇴직) 세 명이 모였다. 인터뷰를 하기 위해 모인 그들은 어김없이 전날 토론한 책 이야기로 말문을 연다. “어제는 동화책을 읽고 토론을 했는데 새롭더라고요.” 책을 읽고, 쓰고, 말하는 것을 배우기 위해 문을 두드린 곳은 숭례문 옆 ‘숭례문학당’. 책을 내보고 싶다는 꿈을 좇아 모인 것이 이렇게 인생을 바꿔놓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기업연수원에서 기업교육을 담당하다 조기 퇴직하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경희대에서 경영학을 가르쳤던 최병일(崔炳一)씨. 그도 책을 내는 것이 꿈이었다. 하지만 글쓰기의 기초가 전혀 안 된 자신을 발견하곤 한겨레문화센터의 글쓰기 과정에 등록한다. 거기에서 배운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낀 그가 소개를 받은 곳은 바로 숭례문학당. 즐거운 인생의 시작이었다. 수산회사, 무역회사, 교육회사 등 중소기업에서 다양한 경력을 쌓았지만, 부도를 맞은 회사와 함께 파산한 윤석윤(尹錫潤)씨. 졸지에 퇴직자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거기에서 무너지지 않고, 교육회사의 경험을 바탕으로 강사 활동을 하던 그였다. 동경하던 것은 책을 쓰는 것도 아닌 글쓰기. 그가 찾은 곳도 한겨레문화센터였다. 그곳에서 인연을 맺은 최씨가 비슷한 꿈을 가지고 있던 윤석윤씨에게 숭례문학당을 추천한다. 최씨가 2011년 초 그곳에 들어간 지 한 달 뒤였다. 책을 읽고, 서평을 쓰고, 토론을 하는 것은 사실 그들에게는 생소한 방식이었다. 생소함을 이겨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 방식에 순응하고 따라가는 것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방식은 그들의 삶을 바꿔놓았다.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뽐내 남들에게 생각을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의 차이를 이해하는 방식에 매료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윤석윤씨는 결심했다. 이곳에서 2년만 공부에 투자해보겠다고. 그리고 5년이 지난 현재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젊은 시절보다 더 다양한 영역에서 그들은 빛나고 있다. 국책연구기관과 민간연구기관에서 32년간 연구원 생활을 했던 윤영선(尹永善)씨. 사실 그가 숭례문학당과 인연을 맺은 것은 두 명에 비하면 가장 최근이다. 2014년 12월 31일 정년퇴직을 한 뒤, 지난해 1월 이곳에서 공부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가 이곳을 찾은 이유도 두 명과 다르지 않다. 책을 내보고 싶다는 것. 단지 그 꿈을 위한 열정이 발을 이끌었다. 두 명보다는 시작이 늦은 탓에 그들보다는 아직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서서히 활동이 늘어나고 있다. 그런 외부활동보다 더욱 자신의 변화를 감지하고 있는 것은 내면의 변화다. 자신감은 말로 할 수도 없고, 사람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생겼다. 몇 십 년간 사회생활을 하며 굳어진 습관들이 서서히 변화하고 있는 것. 이들은 모두 신중년들 또한 똑같이 변화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한다. 책을 읽으면 말이다. 그러나 눈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읽고, 발로 뛰었을 때 비로소 변화를 얻을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시대의 변화에 맞춰 자신도 변화하는 것. 그리고 열린 사람이 되는 것. 그것들이 바로 행복하게 사는 방법이라고 그들은 당당하게 이야기한다. 독서를 하고, 토론을 해야 하는 이유 세 명 모두 숭례문학당에 대해 하는 공통적인 말이 있다. 이곳은 토론을 할 때 정답도 없고, 정답을 찾으려고 하면 안 된다는 것. 그저 자신이 책을 읽고 느낀 것에 대한 생각을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곳이라고 말이다. 윤석윤씨는 이곳에서 토론을 할 때 ‘나이와 계급장을 모두 떼는’ 대화의 장이자 아고라라고 얘기할 정도다. 그래서인지 이들은 유독 ‘경청’하려 한다. 20~30대의 사람들과 생각을 이야기하면서,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상대방을 납득시키려고 하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와 살아온 환경과 배경이 달라 생각이 다를 뿐, 틀린 것은 없다고 생각하게 됐기 때문이다. 그런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던 근저에는 ‘인문학’이 있었다. 숭례문학당에서는 대부분 인문학 책을 읽고, 서평을 쓰고 토론을 한다. “인문학은 역사, 철학, 문학이 있죠. 여기에서 많은 문학책을 읽고 공부하니, 세상을 사는 다양한 사람을 이해하려면 문학책을 읽어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기상천외한 캐릭터를 간접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죠.”(최병일) 토론의 매력은 소통과 대화다. 그리고 그 속에 배려가 존재한다. 토론은 2시간. 각 10분의 발언권이 주어진다. 꽤 긴 시간 같지만, 막상 토론에 들어가면 토론자들이 느끼는 시간은 10초와 같다고 한다. 그만큼 이곳은 지혜의 나눔에 목마르다. 그리고 치열하다. “나눔이 없는 독서는 무엇인가 부족하더라고요. 독서토론은 제 생각을 나눠주고, 남의 지혜를 얻을 수 있으니 더욱 좋은 셈이지요. 또 나이가 많거나, 지위가 높다고 발언권이 더 주어지는 것이 아니니 정말 평등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생각을 경청하면서, 제 생각의 깊이가 그보다 깊지 않다고 생각하니 한없이 겸손해지고, 공부에 더욱 매진하게 됩니다.”(윤석윤) 이들은 독서토론이 신중년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는 이유를 계속해서 토해냈다. 특히 젊은 사람들과 토론하면서 그들에게서 인정받을 때의 희열은 퇴직 이후 떨어졌던 자존감을 회복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2030세대에게 인정을 받고, 책 친구와 말 친구가 생겼다는 것. 그것은 60년 이상 살면서 굳어진 생각의 패러다임을 깨버릴 수 있는 힘이었다. “저도 처음에는 어색했어요. 토론을 한다는 게 부담스러웠거든요. 상대방의 반응에도 민감했고 말이에요. 나이 먹고 젊은이들 사이에서 실수하는 것 아닐까 생각도 했죠. 그런데 여기서는 평가라는 게 없더라고요. 그저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뿐. 자연스럽게 저도 젊은 친구들의 생각을 수용하게 됐습니다. 어쩔 땐 젊은 친구들이 그래요. ‘선생님, 이번 토론 꼭 나오셔야 된다’고 말입니다. 재미있어요. 그들과 친구가 된 것이.”(윤석윤) “다른 것은 다 제쳐두고, 행복해요. 행복해졌어요.”(윤석윤) “은퇴 후 소속감이 없고, 고독감이 와서 두려웠어요. 지금은 그런 것을 느낄 틈이 없습니다. 삶의 자신감도 생겼어요. 밤을 새워가면서 책 읽는 것이 매우 즐거워요. 마음에서 오는 자긍심 때문인 것 같아요. 제 인생의 최고의 시기가 온 것 같습니다.”(윤영선) “예전에는 일이 없으면 초조했는데, 지금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요. 제가 하고 있는 일과 일 사이의 공백기는 책으로 채우면 되니까요.”(최병일) 독서 공부가 인생을 바꿨다 이제 그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타인에게 독서와 토론의 즐거움을 전한다. 독서토론 강의를 나가기도 하고, 토론 진행자를 양성하는 과정을 열기도 했다. 경희대학교에서 경영학을 가르쳤던 최씨는 과목과 강의 방식을 180도로 바꿨다. 경영학에서 독서토론, 생각과 표현이라는 과목으로 말이다. 재미있는 것은 최씨 수업에 대한 학생들의 평가도 확실하게 바뀌었다는 것이다. 학생들이 자유롭게 토론하도록 분위기를 조성하고, 피드백 정도만 하는데도 학생들의 반응이 뜨거운 것. 이러한 반응에 용기를 얻어 생산성본부, 학교 도서관 등의 초청 강의도 줄을 잇고 있다. “2015년은 태어나서 가장 많이 강의를 한 해예요. 특히 기업에서 강연을 하고 느낀 점은 신중년들이 변화에 대해 갈증을 느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고민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책을 권하고, 숭례문학당을 소개했더니 회사 다니는 것도 즐겁고, 책에 지출하는 비용도 늘어났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삶이 조금 더 윤택하게 변했다며 고맙다고 했습니다. 제가 겪었던 것을 똑같이 상대방이 느끼니 이보다 좋은 게 있겠어요?”(최병일)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한다. 은퇴 후 인생에서 미래가 보이기 시작했다고 말이다. 공부를 하는 은퇴자에게는 정년이 없다는 것이다.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부족함을 느끼게 되고, 그 부족함을 채워줄 책은 무궁무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강의와 토론을 하면서 느낀 젊은이들은 신중년의 지혜를 얻고 싶어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게 맞물려 그들을 찾는 사람이 늘고 있다.
- 2016-01-20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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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부는 주고 받음이다 Part 5] 국립중앙박물관에 유물 1719점 기증한 최영도 변호사
- 민주화를 위해 독재정권에 각을 세웠던 그다. 그의 아버지도 그랬고, 그의 아들도 그랬다. ‘3대가 시위 투쟁 집안’이라는 기사까지 났다. 그랬던 그가 20년 넘게 모은 토기 1582점을 국가에 기증했다. 그것도 모자라 그 이후 모았던 토기들도 다섯 차례 더 기부했다. 토기가 부업이라면 청동 수저 수집은 취미 같은 것이었는데 그것마저 모두 내놓았다.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최영도(崔永道·77) 변호사를 수식하는 단어는 다양하다. 인권변호사로 유명하지만, 1971년 사법파동의 주역으로 찍혀 1973년 유신 때 재임명 탈락 전까지는 법복을 입고 판사로 활동했다. 또 민주화 운동에 앞장선 젊은이들을 위해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다 민변의 창립발기인이자 회장을 맡았고, 참여연대의 공동대표,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까지 맡는 등 다양한 활동을 해 왔다. 문화예술 분야에서는 클래식 음악에 관한 에세이를 엮은 와 유럽 미술관들을 다룬 등 여러 저서를 내기도 했다. 그의 이름이 더 널리 알려지게 된 사건 중 하나는 2001년 평생 모아온 토기를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 일이다. 모두 6차례에 걸쳐 토기 1668점과 청동 수저 51점 등 도합 1719점의 유물을 기증했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는 그의 이름으로 된 기증실에 약 60여 점의 토기가 전시되어 있다. 수집 과정과 기증 후의 이야기까지 엮어 이라는 책도 냈다. 토기 박물관 만들자 결심해 수집 시작 그가 유물 수집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1973년 해직판사가 돼 변호사 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다. 처음엔 백자 연적이나 유병(油甁)과 같은 도자기 소품을 모으다 고미술 시장에서 만난 후배의 권유로 토기에 관심을 갖게 됐다. 가치 있는 토기들을 모아 박물관을 건립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것도 그즈음이다. “당시만 하더라도 투박한 토기는 청자, 백자 등 다른 유물들에 비해 박물관이나 학계의 관심을 받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외국인들이 사들여 해외로 유출하고 있었죠. 그래서 토기들을 수집해 박물관을 차리고 싶었습니다. 판사복을 벗었으니 평범한 법률가로 남겠다 싶었는데 인생의 목표가 생겼던 것이죠. 아내가 대찬성을 해줘 즐겁게 수집할 수 있었습니다.” 토기는 멀게는 신석기 시대부터 삼국 시대를 거쳐 조선 시대까지 오랜 기간 우리의 삶과 함께했다. 현재는 장례 때 많은 토기를 부장품으로 넣는 것이 유행했던 가야 때 것이 가장 많이 남아 있고, 장묘제도의 변천으로 부장품을 적게 넣어 출토가 적은 고려, 조선 시대 토기가 가장 보기 힘들단다. 그가 기증하기 전까지 국립중앙박물관도 고려, 조선 시대의 토기는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 거의 없었을 정도. 수집가들의 기증문화가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단면을 보여주는 사례다. 물론 이러한 수집은 쉽지 않았다. 포기해야 할 것도 있었다. 라운딩 한 번 나갈 돈이면 저렴한 토기 1~2점은 살 수 있었기 때문에 골프도 끊고, 술도 줄였다. 인사동과 장안평을 샅샅이 뒤지느라 1000원짜리 감자탕으로 끼니를 때울 때도 많았고, 차에서 전투식량으로 요기를 하기도 했다. 유물의 해외 유출을 막기도 했다. 1983년 인사동에서 백제토기 ‘쇠뿔잡이항아리’를 만나 반했지만, 200만 원이라는 비싼 가격에 망설였다. 그러다 평소 눈독을 들이던 프랑스 외교관이 곧 사갈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듣고, 돈을 마련해 갈 테니 항아리를 숨겨 두라고 부탁해 겨우 확보하기도 했다. 감정방법부터 관리방법까지 이론 익혀 초창기부터 박물관 건립을 고려했기 때문에 수집 형태도 남달랐다. 개인적 기호와는 무관하게 시대, 지역, 기형, 문양 등 4가지 기준을 놓고 학술적 가치까지 고려해 수집했다. 학술적 가치가 있다면 싼 것도 모았고, 상품가치가 없을 수 있는 파편도 사들였다. 수집을 위한 연구와 노력 덕분에 토기와 관련한 전문적인 지식도 얻었다. 토기를 감정하는 나름의 7가지 방법을 터득해 진위뿐만 아니라 학술적인 분류까지 할 수 있게 됐다. 예를 들어 토기를 보면 살짝 혀끝을 그릇에 대보는데, 진품인 경우 토기 내부에 다공층이 있어 혀가 잠깐 달라붙는다고. 그때 나는 기분 좋은 곰삭은 냄새는 즐거운 덤이다. 토기를 구입하면 경질토기와 연질토기를 구분해 각각의 특성에 맞게 세척하거나 건조하는 방법도 익혀야 했다. 실제로 그가 기증한 유물 1719점에 대한 초록을 제작할 때, 박물관 측과 유물 분석에 대한 수십 건의 이견이 있었지만 몇 건을 제외하곤 대부분 그의 의견이 받아들여졌다. 2010년 발간된 이 은 그가 제안한 분류법대로 편집됐다. 그렇게 20년 이상 수집이 진행돼 고미술 시장에서 더 이상 사고 싶은 토기를 보기 어렵게 되자, 본격적인 박물관 건립을 추진했지만 현실은 쉽지 않았다. “서울 인근에 소박하게 아이들이 와서 보고 갈 수 있는 규모의 박물관이 되려면 300억 원 이상 필요하겠더라고요. 제 돈으로는 어림도 없어 대기업이나 정부에 모아놓은 것을 모두 무상 기증할 테니 토기 박물관을 지어 달라고 요청했지만 퇴짜 맞기 일쑤였습니다. 그렇게 끌어안고 고민만 하다가 국립중앙박물관 측에서 여러 차례 요청이 와 기증을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기증을 결심하게 된 계기 중 하나는 모아놓은 토기들에 대한 걱정이 너무나 컸던 것도 있다. 혹시 사고라도 당하게 되면 그 토기들이 어떻게 될까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실제로 그는 해외를 나갈 때, ‘내게 문제가 생기면 토기들을 국·공립 박물관이나 대학 박물관에 무상기증을 하라’는 내용의 유서를 반드시 남겨놨다고 했다. 여행을 할 때마다 유서를 쓰고 찢기를 반복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횡단보도에서 이러다 교통사고라도 당하면 토기들은 어떡하나 하고 똑같은 걱정을 반복하다, 아끼는 것일수록 박물관에서 오래도록 전시돼야 한다는 생각으로 기증 결심이 섰다고. 오래 관리되고 기억되길 원해 기증 선택 기증처가 국립중앙박물관이 된 것은 그전부터 이어오던 인연 때문이다. 1997년 국립중앙박물관 토기 전시회에 44점을 찬조 출품한 것이 계기가 됐다. 그 이후 국립중앙박물관이 지금의 위치인 용산으로 이전을 계획할 때, 기증관 구성을 의욕적으로 추진하면서 최영도 변호사 측에 제안해 기증이 이뤄졌다. 물론 다른 박물관에 비해 뛰어난 국립중앙박물관의 유물 관리, 전시 능력도 매력적이었다. 그는 이 과정을 국립중앙박물관으로부터 “선택받았다”라고 표현했다. 2001년 기증 후에도 그의 토기 수집에 대한 습벽은 쉽게 멎지 않았다. 그만해야지 싶다가도 좋은 유물이 나타났다는 전화에 흔들리기도 했고, 궁금해서 일단 보면 지갑 열기를 멈추지 못했다. 아예 눈을 닫으려고 하면, 상인들이 토기를 들고 사무실로 들이닥쳐 외상으로 맡기고 갔다. 이렇게 토기들이 더 모여 몇 차례 계속 기증하길 반복했다. 한눈에 반한 토기를 만나면 며칠이고 침대에 두고 끌어안고 잘 정도로 사랑이 남달랐던 그다. 때문에 시집보낸 딸처럼 토기들이 눈에 아른거릴 법도 한데, 기증한 지 10년이 넘은 지금도 잘했다 싶단다. “평생을 바쳐 모은 수집품들이 주인을 잃고 나서 허망하게 시장에서 뿔뿔이 팔려 나가거나, 풍비박산이 나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또 사설 박물관도 후대로 넘어가면 초심이나 전문성을 잃는 사례가 있습니다. 때문에 기증문화의 발전은 문화유산의 보존을 위해 중요합니다. 유물은 국가와 국민의 소유이고, 수집가들은 그것을 잠시 맡아 두는 창고지기일 뿐입니다.” 모든 토기를 기증하고 나서는 기쁨과 해방감을 함께 맛봤다고 말했다. “무거운 관리 책임에서 벗어났다는 생각에 어깨가 가벼워짐을 느꼈습니다. 수집은 명예인 동시에 속박이라는 것을 느꼈고, 모두 다 기증하고 나니 마음이 가볍고 자유로워졌습니다. 박물관에게 고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쉽게 기증 결정할 수 있게 제도 개선돼야 해외 미술관을 돌며 관찰해 이를 엮어 책까지 발간한 그이기에 기증문화에 대한 의견은 현실적이다. 특히 기증을 하는 것만큼이나 기증을 받는 쪽의 태도 변화도 절실하다고 이야기한다. “학계나 관련 기관에서는 수집가나 고미술 상인을 낮춰보거나 신뢰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수집은 단순히 돈을 주고 가져오는 것 이상으로 복잡하고 신중한 과정을 거치는데, 직접 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그런 과정을 거친 만큼 수집품에 대한 지식과 애정 또한 상상 이상입니다. 그런 ‘귀한 자식’을 받아주는 일인 만큼 받는 쪽에서도 애정을 갖고 기증품을 다뤄줬으면 합니다. 전시 과정에서도 기증자에 대한 부각이나 배려가 고려된다면 보람도 느낄 수 있고, 기증에 대한 동기유발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기증자들이 스스로를 박물관의 ‘가족’이라고 생각하고 소속감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해외 미술관이나 박물관의 경우 기증자의 이름이 잘 보이도록 크게 써 놓거나, 아예 액자에 새겨 넣기까지 하는 경우도 있다. 최영도 변호사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의 기증자 대표로 기증 후 몇 년간 추대 받아 활동하기도 했고, 국립현대미술관과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서 기증과 관련한 강연 등의 요청이 와 이런 의견들을 밝힌 적도 있다고 했다. 최영도 변호사는 문화 발전을 위한 제도적 장치 마련이 절실하다고 조언했다. “수집가라고 모두 다 엄청난 재산가는 아닙니다. 수집을 위해 평생의 재산을 바치는 경우도 허다한데, 이런 경우 기증 후에는 생계를 걱정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우려가 기증에 장애가 될 수도 있는 것이죠. 때문에 수집가들을 위한 세제 혜택이나 연금제도의 도입 등을 고려해야 합니다. 세제 혜택 제도는 기증품에 대한 평가가 어려워 법까지 만들어 놓고 시행하지 못한다니 답답할 노릇입니다.” 특히 세제 혜택 마련의 걸림돌이 되고 있는 기증품에 대한 가치평가와 관련해선 전문가들이 머리를 맞대면 될 일이라고 강조했다. “관과 학계, 업계, 수집가들로 구성된 공동평가기구를 만들어 기증품의 가치를 정확하게 평가할 수 있게 된다면 세제 혜택뿐만 아니라 기증을 후원할 수 있는 다양한 길이 열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 2015-12-31 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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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 조용경&오선희 부부, 사진과 놀다
- 은퇴 후 늘어난 시간에 취미생활을 하면 상실감 해소와 부부 관계 개선에 좋다고들 하지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그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닌 일을 훌륭하게 해내고 있는 남편 조용경(趙庸耿·64), 아내 오선희(62·吳仙嬉) 부부는 야생화 사진과 새 사진을 찍으러 국내외 산과 강을 찾아다니며 더없이 풍요롭고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사진과 함께하는 은퇴 후 삶의 즐거움, 그리고 부부가 함께 누리는 행복의 비결을 살펴봤다. 글 김영순 기자 kys0701@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강원도 춘천에 있는 김유정문학관을 가기 전에 있는 삼포교차로에서 좌회전을 하자마자 산으로 둘러싸인 아담한 전원주택이 나타난다. 건설업계에서 30년 동안 활동했던 조용경 전 포스코엔지니어링 부회장과 아내 오선희 부부의 집이다. “부부는 시소를 함께 타는 것이죠. 내가 올라가면 다음엔 아내를 띄워줘야 하잖아요. 내 과거를 버리고 나니 조금은 편해지더군요. 제가 내려놓는 훈련을 하는 동안 적응의 시간을 기다려주는 아내가 있어 고맙고 든든합니다.” 부부는 시소를 함께 타는 사이 새 전문 사진작가이기도 한 아내인 오선희씨처럼 사진으로 은퇴 후 새로운 삶을 유유자적 누리고 있는 조용경씨에게 요즘 삶의 에너지와 영감을 주는 것은 두 명의 손주들이다. 그는 라는 제목의 에세이를 블로그에 올리면서 손주들을 위해 할아버지의 추억을 기록하는 일도 하고 있다. 에세이는 세상 그 어떤 순간보다 행복한 찰나를 담아낸 가족사진, 손자 사진들과 글로 만들어져 큰 울림과 흐뭇함을 선사하고 있다. 조용경씨는 이를 손주에게 할아버지가 남겨주는 영원한 선물이라고 믿으며 훗날 가족 자료로 남기는 것을 지상 목표로 삼고 있다고 한다. 조용경, 오선희 부부는 손주들과 함께 자주 시간을 보내며 사회활동에 바쁜 부모들이 채워줄 수 없는 부분을 담당해왔다고 생각한다. 나이를 먹어가며 가족 내에서도, 사회에서도 새롭게 역할을 정립해야 하는 입장에 처하게 됐는데, 조부모로서의 활동이 삶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b>아내와 손잡고 산과 강을 휘젓고 조용경씨는 1993년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에 머물 때 6개월 동안 사진 아카데미를 수강했다. 주로 실기 수업이었는데, 학교에서 20㎞ 정도 떨어진 베니스 비치에 가서 망원렌즈로 사람을 촬영하곤 했다고 한다. 마리화나를 피우는 사람들로 붐비는 곳이었는데 그때 촬영한 사진이 학교 캘린더에 실려 작품료로 25달러를 받게 됐다. 사진가로서 프로페셔널이 될 수도 있었던 인생의 한 분기점이었으리라. 그가 피사체 가운데서도 유독 야생화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꽃을 좋아하는 아내의 영향이 컸다. 어느 날, 아내가 가꾼 마당의 꽃들이 비로소 그의 눈에 들어왔다. 꽃에 사진기를 들이대며 촬영하던 그는 어느새 아내의 손을 잡고 꽃을 찾아 전국 곳곳을 다니기 시작했다. “강원도 정선 석회암 지대의 동강할미꽃이나 바닷가 바위틈에 피는 해국에서 놀라운 아름다움을 발견했어요. 흙 한 줌 안 되는 곳에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올려 꽃을 피우는 동강할미꽃이나 절절 끓는 바위 위에서 염분과 비바람에 시달리며 꿋꿋하게 견디는 해국을 보면 감동스럽지요. 그 모습을 보면서 왜 나만 힘들다고 불평해 왔는지 싶더군요.” 꽃과 눈높이를 맞추자 지나온 세월이 보였다 그는 하기 싫은 작업을 억지로 하면 진정한 작가가 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자신이 원하는 걸 쫓는 우직함 역시 사진을 하는 작가가 갖춰야 할 덕목 중 하나라고 확신하게 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꽃을 찍기 위해 자신이 찍을 꽃에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주기로 했다. “꽃을 제대로 찍으려고 꽃과 대화를 했어요. 눈높이를 맞췄죠. 그런데 이름도 모르는 야생화를 찍기 위해 이렇듯 공을 들이는데, 그간 내가 회사 직원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그만한 정성을 갖고 대했는지 반성이 되더군요. 사진을 하다가 사람 소중한 것을 배웠어요.” 새치름하게 고개를 떨구고 있는 오대산의 흰금강초롱꽃, 강원도 매봉산의 솔나리, 강원도 홍천의 깽깽이풀, 선운사의 꽃무릇, 한라산의 노란제비꽃, 태백산의 참기생꽃, 함백산의 투구꽃…. 우리나라 자연 곳곳에 숨어 있는 들꽃을 찾아내 가장 아름다운 자태를 포착해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한 꽃을 200장, 300장씩 찍어 그중 최고의 컷을 뽑아낸다. 그래서 좋은 작품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는 수많은 노력과 수고를 필요로 한다. 옆에서 아내인 오선희씨가 그의 말을 거들었다. “꿈이 있다면 알래스카에 가서 흰 올빼미를 찍고 싶어요. 기다리고 기다리며 생명과 교감하는 수많은 작업을 통해 나를 찾는 시간을 갖게 됐어요. 찍으면 찍을수록 자아가 풍성해지는 느낌이 듭니다.” 흔히 ‘뱁새’로 불리는 붉은머리오목눈이. 나뭇잎 밑에 숨어 까만 눈동자를 빛내는 모습이 사랑스럽다. 덕소에서 촬영한 오색딱따구리의 색도 곱다. 오선희씨는 “돌아보지 않아 그렇지 우리 주변에 예쁜 새들이 많다”고 했다. 이 부부에게 시대가 변하고 나이를 먹는다는 건 크게 의미가 없었다. 사진 가방을 메고 들로 산으로 쏘다니는 그들은 오히려 상상력과 호기심이 나날이 커져만 간다고 했다. 야생화 사진에서 기다리는 삶을 배웠다 나이를 먹어 사진을 하니 좋은 점이 무엇일까? 그는 우선 주말마다 산으로 들로 헤매고 다니게 되니까 운동량이 적지 않아서 자연스럽게 운동이 된다는 점을 꼽았다. “그리고 카메라를 메고 나가면 그 순간부터 세상의 모든 스트레스를 깡그리 잊게 된다는 점이 참 좋습니다. 무엇보다도 좋은 건 인내를 배우게 된다는 점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어느 정도는 다 ‘빨리빨리병’에 걸려 있는데, 야생화 사진은 기다릴 줄 모르는 사람은 절대로 좋은 작품을 만들 수가 없거든요. 저도 그전에는 성격이 꽤 급한 사람이었는데, 스스로 생각해도 사람이 참 많이 됐다고 생각합니다.” 사진에 빠져 주말이면 몇 박 며칠 집을 비우는 부부들이다. “그러다 보니 며느리들이 우리를 보려면 미리 전화하고 와야 해요. 우리가 너무 바쁘거든요. 다른 부모들은 자주 왕래 안 해서 걱정인데 우리는 그런 걱정 없어요” 하며 오선희씨가 말을 덧붙였다. “아내와 함께하는 시간이 급격히 늘어났음에도 오히려 대화가 단절되는 경우가 있지요. 부부가 매일 비슷한 상황에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소재가 반복되거나 단답형으로 대답하게 되죠. 이렇게 은퇴 후 부부가 함께하는 시간은 늘었음에도 서로에게 집중하지 않으면, ‘침묵’으로 부부 사이의 골이 더 깊어질 수 있어요. 은퇴 후 더 이상 나눌 대화가 없는 무미건조한 부부가 되고 싶지 않다면 공동의 취미생활을 만들어 보는 것을 추천해봅니다.” 마지막까지 함께 하는 사람이 누군지 생각해보길 서로 많은 시간을 같이 다니다 보면 아무래도 대화의 기회도 많아지고, 더구나 같은 취미 활동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는 폭이 넓어지게 되기 마련이다. “부부가 함께 운동을 즐기거나 동호회에 가입하고, 악기를 배우거나 동물을 키우고, 봉사활동에 참여하면 자연스럽게 공통의 대화 주제가 생겨 관계 개선에 도움이 되거든요. 부부 사이에서도 서로를 배려하고 예의를 지키려 노력한다면 대화의 질도 높아지고 더욱 가까워질 수 있어요. 하루에 한 번씩 ‘고맙다’거나 ‘미안하다’, ‘사랑한다’ 등의 마음속에 있는 말을 밖으로 꺼내 표현해 보세요. 마지막까지 함께하는 사람이 누군지 생각해보세요.” 말로 표현하지 않았을 때보다 속마음을 표현했을 때 부부의 관계가 더욱 가까워진다고 말하는 아내 오선희씨의 말 속에는 뼈가 숨어 있었다. 이들 부부에게도 늘 밝은 날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아내는 일생 동안 나의 허물과 부족함을 모두 받아주었다”라고 털어놓는 조용경씨의 말처럼 아내에게 남편은 서운함을 많이 안긴 사람이기도 했다. 부부는 2005년, 들꽃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들꽃마을(www.flover-vill.net)’에 가입한 다음 주말마다 들꽃을 찾아 전국의 산과 들을 다니기 시작했다. 일반 회원 2000명, 정회원 100명이 활동하고 있는 들꽃마을 회원들과 어울려 다녔다. 그 때문에 좋아하던 골프는 포기했다. “들꽃을 만나러 다니면서 생명의 존귀함에 대해 더욱 많이 생각하게 됐다”고 그는 말한다. 날이 맑은지 흐린지, 빛의 방향이 어디에서 오는지에 따라 카메라에 포착되는 들꽃의 모습은 달라진다. 그는 답답하고 서글퍼질 때 주말마다 들꽃 촬영을 나가면 그동안의 답답함과 아득함을 잊고 마음이 정화되는 것 같다고 말한다. 세상이 참 아름답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된다고. 평생을 홀로 있게 했던 아내와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진 것도 큰 보람이다. 현장에서는 각자 촬영에 몰두하느라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않지만, 이심전심 통하는 게 많아졌다고 한다. 그동안 개인전도 했고, 매년 연말에는 사진으로 달력을 만들어서 지인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했다. “은퇴한 우리들에게 ‘행복한 삶’의 제1조건은 ‘아내와 함께 화목하게 사는 삶’이 아닐까 합니다. 욕심이 많아 크든 작든, 삶의 목표를 설정하고 사는 것이 좋습니다. 아무래도 생활이 더 활기차죠. 은퇴 후 부부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의 공통점은 나누고 나쁜 점은 모른 척 덮어주는 것입니다.” 공감하면 행복해져요 “행복해지는 법을 찾은 것은 어느 날 갑자기 눈뜨자마자 엄청난 용기가 솟아나서도 아니고 누군가가 알려줘서도 아니었어요. 처음엔 단순히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손대기 시작한 사진, 아내를 위해 카메라 들어주기, 사진 올리기, 동호회 사이트 회원들과 커뮤니티 등등 이런 ‘딴짓’ 속에서 행복의 단서가 보였어요. 내가 무얼 할 때 즐겁고, 무얼 잘할 수 있는지를 정확하게 알아내는 과정 속에서 말이죠.” 그는 아름다운 야생화를 찍을 때처럼 아내와 같은 생각, 감정을 가지고 계획을 세워보려고 노력한다. 함께 목적지, 가는 방법, 하고 싶은 일 등을 적으며 여행 준비를 하는 것도 좋다. 그리고 출사를 다녀온 후 찍은 사진을 정리하고 느낌을 적는다. 두 부부는 이런 활동을 같이 하면서 공감의 폭이 넓어지며 행복을 느낄 수 있었다. 그 과정 속에는 서로를 아끼고 보듬으며 살아가는 부부의 진심이 오롯이 녹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인터뷰 내내 좋은 사진이 주는 감동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게 해줄, 그리고 ‘좋은 작품을 나누니 행복하다’라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를 깨닫게 해주는 부부였다. 큰 욕심 없이 나누면서 살고 싶다는 부부의 살아가는 모습을 함께 하고 나니 마음 한쪽에 뜨거움이 느껴진다. 단풍이 물들어 가는 가을의 어느 날, 큰 수확을 얻고 돌아가는 기분이다.
- 2015-12-22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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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천 공연]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찾아서 <위대한 캣츠비 리부트>의 배우 이병준 인터뷰
- 뮤지컬의 원작 웹툰 의 제목을 보면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소설 가 떠오른다. 웹툰 작가 강도하는 “소설과는 무관한 내용”이라며 “이야기와 동물 의인화 설정을 마치고 고양이가 들어간 제목이 잘 떠오르지 않던 찰나, 욕실에 있는 갸스비(GATSBY) 스킨로션이 눈에 띄었다. 즉흥적으로 G를 C로 바꾸면 재밌겠다는 생각에 타이틀을 정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야기는 다르지만, 소설과 웹툰만큼 많은 이의 기억에 남을 뮤지컬이 되길 바란다는 배우 이병준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Interveiw. 의 부르독 배우 이병준 극중 배역 ‘부르독’은 어떤 인물인지 성경에 나오는 고린도전서의 말씀처럼 오래 참고, 시기하지 않고, 자랑하지도 교만하지도 않으며, 모든 걸 감싸주는 것이 참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르독은 페르수와의 만남을 통해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사랑에서 진실한 사랑으로 가고자 노력하는 인물입니다. 극의 전반부에서 부르독은 전처에 대한 미련을 간직한 채 사랑이 없는 부부 관계 속에서 상대방에 대한 의심을 품습니다. 중반부터는 페르수를 알아가면서 사랑은 결국 자기중심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아끼고 이해하며 모든 걸 감싸주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갑니다. 그는 진정한 사랑이란 서로의 마음이 일치해야 함을 깨닫고 집착보다는 상대를 존중하는 모습으로 변화합니다. ‘사랑에 대한 질문과 답을 찾아가는 중년 남자 부르독!’ 이런 인물이 아닐까요? ‘부르독’을 연기하면서 가장 고민한 부분 순수한 사랑, 욕망에 얽힌 사랑, 이기적인 사랑, 무조건적인 사랑 등 수많은 사랑 중 어떤 것이 부르독과 가장 밀접한 관계가 있는지 그 연결고리를 찾는 것이 첫 과제였습니다. 연습이 진행되면서 조금씩 그 답을 찾을 수 있었고, 답은 의외로 쉬운 곳에서 나왔습니다. 정답은 ‘진실’이었죠. 진정한 사랑의 가치를 알게 해주는 것은 그 무엇도 아닌 진실입니다. 답을 찾고부터는 진실하게 연기하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것임을 염두에 두고 작품에 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부르독의 사랑이며, 처음부터 끝까지 무대에서 고민하고 또 고민해야 할 부분입니다. 부르독과 닮은 점, 차이점 부르독과 이병준의 삶에서 닮은 점은 극의 중반부와 종반부에 나타나는 사랑에 대한 개념이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저 역시 사랑은 이해와 존중이 우선이라고 생각하며, 지금까지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물론 사랑 그 자체는 당연한 거고요. 차이점은 결혼은 두 번이 아니라는 거죠. 기억에 남는 대사 2막에 나오는 “그 아기 내 아이로 키우겠소, 당신이 낳은 자식이면 내 자식이나 마찬가지요. 피한방울 섞이지 않아도 내겐 중요하지 않아”라는 대사와 그 장면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부르독이 가장 고민하고 가장 아파하면서 내린 결정이기에 진정성이 보이는 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함께한 후배 연기자들과의 호흡 후배들의 열정에 먼저 박수를 보냅니다. 짝짝짝! 많은 배우들과 작업해봤지만, 이번에 함께한 배우들은 작품에 대한 애정이 정말 남달랐습니다. 명칭만 후배이지 제가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작품에 임하는 자세부터 열정까지 서로를 아끼고 배려하는 모습은 호흡과도 일치하겠죠. 정말 좋았습니다. 관람 후 얻어갈 수 있는 메시지 사랑입니다. 아마 이 작품을 보고 나갈 때, 사랑하는 사람끼리 왔다면 손을 꼭 잡고 나갈 겁니다. 공연 중에는 서로의 어깨를 살포시 붙일 겁니다. 아프지만, 예쁜 게 사랑이니까요. 크리스마스나 연말에 관람하게 될 관객들은 2015년의 그날을 잊지 못할 것입니다. △배우 이병준 뮤지컬 , 연극 , 영화 , 드라마 등 출연 △공연 소개 만화가 강도하가 인터넷 포털사이트 다음에 웹툰으로 연재한 를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 뮤지컬 는 원작의 주요 골격과 설정만을 남겨 두고 새로운 이야기를 펼친다는 의미에서 ‘리부트’라는 말을 사용했다. 뮤지컬에는 캣츠비, 하운두, 페르수, 선 등 4명의 청춘과 부르독, 몽부인 등 중년 남녀가 등장해 뜨겁고도 아픈 사랑을 노래한다. 공연 뮤지컬 장소 대학로 유니플렉스 1관 일정 ~ 2016년 1월 31일 연출 변정주 출연 이병준, 정동화, 강기둥, 손동운, 이규형, 김영철 등
- 2015-12-09 08: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