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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시니어스타협회, ‘퀸스베리 미즈시니어 뷰티어워즈 대회’ 개최
- 한국시니어스타협회(대표 겸 예술감독 장기봉)가 3월 21일 과천시민회관 대극장에서 ‘퀸스베리 미즈시니어 뷰티어워즈 대회’를 개최한다. 퀸즈베리 미즈시니어 뷰티어워즈 대회는 대한민국 50세 이상 여성이라면 무료로 참여 할 수 있다. 본선에 참가한 모든 사람들에게 다양한 상품을 제공하며 상위 수상자에게는 상금이 수여된다. 장기봉 감독은 “지금까지 열려 온 시니어 미인대회는 출연비 요구, 시상 과정의 불공정 등 많은 문제를 야기해 왔으나 이번 대회를 통해 가장 공정하고 아름다운 대회를 만들어 낼 예정이다“라고 말했다. 한편 한국시니어스타협회는 시니어 모델과 시니어 배우를 꿈꾸는 사람이 모인 곳이다. 현재 대한민국 인구의 5분의 1 가까이 차지하면서도 끼인 세대, 주목받지 못하는 세대, 그러나 열정이 넘치고 낭만을 아는 한류의 원조 부모세대가 마음 속 깊숙이 지니고만 있었던 예능 본능을 일깨워 인생 2막을 새롭게 펼쳐 보려고 모였다.
- 2018-01-30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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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월의 문화행사 한 눈에
- 집에만 있지 말고 밖으로 나가보자! 지루함을 날려줄 이달의 문화행사를 소개한다. 리차드 3세 일정 2월 6일~3월 4일 장소 예술의전당 CJ 토월극장 출연 황정민, 정웅인, 김여진 등 셰익스피어의 작품 중 수작으로 꼽히는 ‘리차드 3세’는 인간의 비틀린 욕망이 얼마나 큰 비극을 초래하는지를 보여준다. 10년 만에 연극무대로 복귀한 배우 황정민이 영국판 수양대군으로 불리는 피의 군주 ‘리차드 3세’로 변신해 주목받았다. 몰입도 있는 연기를 위해 황정민을 필두로 김여진, 정웅인, 박지연 등 주연배우를 원 캐스트로 구성한 점도 눈에 띈다. 3월의 눈 일정 2월 7일~3월 11일 장소 명동예술극장 출연 오현경, 오영수, 손숙, 정영숙 등 손자를 위해 평생을 일구어온 삶의 터전이자 마지막 재산인 집을 팔고 떠날 준비를 하는 ‘장오’와 그의 아내 ‘이순’. 3월의 눈 내리는 어느 날 ‘장오’는 집을 떠난다. 올해로 8주년을 맞이한 ‘3월의 눈’은 한국 연극의 산증인인 오현경과 손숙, 오영수와 정영숙이 팀을 이루어 무대에 오른다. 내릴 때는 아름답지만, 한순간 사라지는 3월의 눈과 같은 인생 이야기를 진솔하고 담담하게 그려냈다. 2018 평창 동계올림픽대회 일정 2월 9~25일 장소 강원도 평창, 정선, 강릉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30년 만에 한국에서 열리는 두 번째 올림픽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열리는 동계올림픽으로 강원도 평창에서 개막한다. 2월 9일 오후 8시 평창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펼쳐지는 개막식을 시작으로 25일까지 17일간 설상 7종목, 빙상 5종목, 슬라이딩 3종목 총 15종목 102경기를 놓고 금빛 사냥을 펼친다. 개·폐막식을 비롯한 모든 경기 장면은 TV 중계로 볼 수 있다. 지구: 놀라운 하루 개봉 2월 15일 장르 다큐멘터리, 가족 감독 리처드 데일, 리신 판, 피터 웨버 영국 방송사 BBC가 제작한 초대형 자연 다큐멘터리 프로젝트. 24시간 동안 지구 곳곳에서 벌어지는 신비한 자연과 생명의 기적을 카메라에 담았다. 닥터 지바고 일정 2월 27일~5월 7일 장소 샤롯데씨어터 출연 류정한, 박은태, 조정은, 전미도 등 20세기 러시아 혁명의 순간 운명적인 사랑을 노래한 뮤지컬 ‘닥터 지바고’가 6년 만에 한국 관객을 찾는다. 파란만장한 일생을 살아간 의사이자 시인인 ‘유리 지바고’ 역으로 배우 류정한, 박은태가, 그와의 운명적인 사랑의 주인공인 ‘라라’ 역으로 배우 조정은, 전미도가 출연한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개봉 2월 28일 장르 판타지, 드라마 감독 히로키 류이치 출연 야마다 료스케, 무라카미 니지로, 칸이치로 등 30여 년 동안 비어 있던 가게에 숨어든 좀도둑 3인조. 32년 전에 쓰인 편지에 장난삼아 보낸 답장이 과거와 현재에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깨닫는데…. 일본 인기 추리소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이 영화로 재탄생했다.
- 2018-01-25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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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나기 펀치’의 대명사 유명우
- 1980년대 복싱은 한국의 3대 스포츠 중 하나로 손꼽힐 만큼 인기 스포츠였다. 복싱 경기가 있는 날이면 팬들은 TV가 있는 다방이나 만화방에 삼삼오오 모여 응원했고 한국 선수가 우승하는 날이면 다방 주인이 무료로 커피를 돌리는 소소한 이벤트(?)도 열렸다. 1980년대를 풍미한 복싱 영웅 유명우(柳明佑·54)를 그의 체육관에서 만났다. 상대가 빈틈을 보이면 유명우는 어김없이 ‘소나기 펀치’를 퍼부었다. 정신을 쏙 빼놓는 공격에 상대가 무릎을 꿇고 링 위에 쓰러지면 경기장은 함성과 열광으로 가득 찼다. 14명의 상대를 KO시켰지만 정작 그는 한 번도 링 위에 쓰러진 적이 없다. “링은 눕는 침대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유명우. 163cm의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본인만의 복싱 스타일을 정립하며 세계 타이틀 17차 방어의 신화를 썼다. 한국 프로권투 사상 최다 연승(36연승), 가장 오랜 기간 타이틀 보유(6년 9일), 최단 시간 KO승(1R 2분 46초), 최다 방어 기록(17차). 이 모든 게 유명우가 세운 기록이다. ‘작은 들소’, 세계 정상에 오르다 -1985년 12월 8일 WBA 주니어플라이급 타이틀 매치 (vs 조이 올리보) ‘작은 들소’, 작지만 링 위에 올라가면 들소처럼 매섭게 변한다고 해서 유명우에게 붙여진 별명이다. 중학교 1학년 때 ‘복싱은 멋있는 것’이라 생각하고 무턱대고 권투장갑을 꼈던 그는 1984년 동양 주니어 플라이급 왕좌에 오르고 이듬해 미국 출신의 WBA(세계권투협회) 주니어 플라이급 챔피언 조이 올리보를 대구로 불러들여 챔피언 타이틀을 빼앗았다. “이때 제가 군대에 있었거든요. 군대 복싱부 표어가 ‘지면 죽는다’였어요.(웃음) 전쟁에서 지면 죽는 거잖아요. 물론 복싱이 전쟁은 아니지만 그렇게 비유한 거죠. 챔피언 벨트를 가져오기 위해선 지지 않고 이겨야 하니까 정말 군인 정신으로 싸웠죠.” 조이 올리보는 다양한 공격은 물론 탄탄한 수비 능력을 갖추고 있어 여간 까다로운 상대가 아니었다. 초반 유명우는 올리보를 좌우 연타로 몰아붙이며 쉽게 경기를 풀어나가는 듯했지만 후반에는 올리보의 잽과 스트레이트 연타를 허용하며 고전했다. 15라운드까지 이어진 난타전 끝에 유명우는 판정승을 거뒀다. 하지만 그 기쁨도 잠시 그는 바로 응급실 신세를 졌다. 급하게 마신 물이 복통을 일으킨 것이다. “경기 중에 엄청 갈증이 나더라고요. 그때가 아주 추운 겨울이었는데 입만 헹구고 뱉어야 하는 찬물을 목마르다고 벌컥벌컥 마셨으니 탈이 난 거죠. 경기할 땐 몰랐는데 끝나고 나니 도저히 참지 못하겠더라고요. 기뻐할 겨를도 없이 병원에 갔죠.(웃음) 그래도 처음 챔피언 벨트를 차던 그 순간의 기분은 아직 잊지 못해요. 복싱을 시작할 때부터 꿈꿔온 세계 챔피언 자리에 앉았으니 마치 세상에 다시 태어난 듯한 기분이었죠.” 39전 38승, 그리고 1패 -1991년 12월 17일 18차 방어전 (vs 이오카 히로키) 유명우는 챔피언 자리에 올라 약 6년간 17명의 도전자를 물리치며 무패행진을 이어갔다. 그런 그에게 항상 따라다니는 꼬리표가 있었으니 바로 ‘안방 챔피언’이다. 17차 방어전까지 홈 링에서만 방어전을 치렀다는 이유에서였다. 18차 방어전. 마침내 그의 첫 원정 경기가 일본에서 열렸다. “졌죠.” 그야말로 뼈아픈 패배였다. 첫 원정에서 마치 ‘안방 챔피언’임을 증명하듯(?) 타이틀도 뺏기고 연승가도 또한 36연승에서 끊겼다. 20차 방어전 후 은퇴하겠다는 목표도 무너졌다. 그런 그의 패배에 “석연치 않은 판정이었다. 일본에 돈을 받고 져준 게 아니냐”라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오랜 기간 방어전을 잘 치러왔고 상대도 한 체급 아래의 챔피언이었기 때문에 안일하게 준비했죠. 저 스스로 나태해진 거예요. 특히 원정 시합 땐 상대를 확실하게 제압하지 못하면 이기기 어려운데 제가 완벽하지 못했어요. ‘타이틀을 돈 주고 팔아먹은 거 아니냐’라는 억측들이 있었는데 자신의 명예가 걸린 타이틀을 어느 누가 돈을 받고 넘기겠어요.(웃음) 당시엔 그런 소리를 들으면 속상했는데 그만큼 절 아꼈기 때문에 큰 아쉬움에서 비롯된 말이라고 생각해요.” 첫 패배 후엔 속상해서 복싱을 그만둘까 했지만 오기가 생겨 재시합 신청을 했다. 단 협회는 이오카 히로키의 2차 방어전 이후에 다시 붙을 수 있다는 조건을 걸었다. 중간에 이오카 히로키가 질 경우 타이틀을 빼앗기기 때문에 유명우 입장에서는 다시 붙는 의미가 없었다. 내심 이오카 히로키를 응원했다고. “다행스럽게도 히로키가 2차 방어전까지 성공하더군요. 고마웠죠.(웃음) 만약 중간에 빼앗겼으면 복싱을 그만뒀을 거예요. 다음번 만날 땐 정말 죽이겠다는 생각으로 매일 아침 관악산 정상을 뛰어올라갔어요. 체력을 기르면서 만발의 준비를 했죠.” 1년 뒤 챔피언 재탈환을 위해 똑같은 장소, 똑같은 상대와 다시 만났다. 위험한 순간도 있었다. 경기 도중에 상대방 팔꿈치에 맞아 눈썹이 찢어진 것이다. “피가 많이 나면 경기가 중단돼요. 그때 꽤 많이 찢어졌는데 시합 도중에도 계속 걱정이 되더라고요. ‘이렇게 경기가 허무하게 끝나면 안 되는데…’ 하면서요. 다행히도 피가 많이 나지 않아 무사히 경기를 끝낼 수 있었어요.” 경기 결과는 12라운드 판정승. 1년 만에 타이틀 재탈환에 성공했다. 이후 1차 방어전을 치르고 WBA에 벨트를 반납, ‘영원한 챔피언’이라는 명예를 선택하고 은퇴했다. 가장 고통스러운 건 체중 감량 시합을 하고 나면 얼굴에 멍이 들어 퉁퉁 붓는 건 당연한 일이다. 1차 방어전 땐 귀를 맞아 고막이 파열됐다. 복부에 정타를 맞으면 숨이 턱턱 막힌다. “3차 방어전 때 마리오 데 마르코 선수랑 시합하고 나선 정말 챔피언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싶었어요. 1라운드부터 15라운드까지 서로 주먹만 주고받았는데 시합 끝나고 소변을 보니깐 혈뇨가 나올 정도로 굉장히 힘든 시합이었죠. 그만큼 치열했고 복싱 팬들이 가장 열광한 경기였어요.” 사실 맞는 것보다 더한 고통이 있었으니 바로 체중 감량이었다. 유명우는 은퇴 후 음식을 맘껏 먹을 수 있어서 행복했다고 말한다. 지금 그 당시처럼 체중을 감량하라고 하면 돈을 줘도 안 하겠단다. “제가 선수 시절 평소 몸무게가 60kg 정도였어요. 시합을 하려면 49kg까지 빼야 하는데 감량의 고통이 제일 힘들었죠. 식이조절에, 운동을 해도 안 빠지면 사우나 가서 남아 있는 수분까지 다 빼야 했어요. 어떤 선수는 이뇨작용을 도와주는 약도 먹고 그야말로 마지막엔 살과의 전쟁이 아니라 수분과의 전쟁이었죠. 그때 정말 먹고 싶은 것은 고기도 밥도 아닌 물이에요.” 돌까지 씹어먹는다는 20대 중반, 눈앞에 펼쳐진 음식을 먹지 못한다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24시간 코치가 붙어 있진 못하잖아요. 그럴 때 페트병에 우유나 콜라를 넣어서 향만 느끼자 하고 입에 가져다 대요. 그러면 그게 자제가 되겠어요? 막 먹어버리는 거죠.(웃음) 신기한 게 먹은 만큼 체중계 바늘도 움직이는데 그럼 코치한테 바로 들켜서 혼났죠.” 1차와 2차 계체량 측정에서 모두 통과하지 못하면 챔피언은 타이틀을 박탈당하고 논타이들전 같은 경우엔 핸디캡이 주어지기 때문에 계체량은 매우 중요하다. “체중 감량이 힘들어서 중간에 도망친 적이 있어요. 한국 타이틀 매치를 앞두고 잠적한 사건인데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그래선 안 될 짓이었죠. 한편으론 제가 다시 마음을 다잡고 복싱을 하게 된 계기이기도 하고요. 그 사건으로 제가 유일하게 못해본 게 한국 챔피언이에요.” ‘작은 들소’ 유명우 vs ‘짱구’ 장정구 인터넷 포털에 유명우를 검색하면 연관 검색어로 장정구 선수가 뜬다. ‘마징가 Z vs 로봇 태권V, 사자 vs 호랑이’처럼 복싱 팬이라면 1980년대 쌍두마차를 이룬 유명우와 장정구 둘의 대결을 꽤나 손꼽아 기다린 듯하다. 아쉽게도 장정구가 은퇴할 때까지 경기가 성사되지 않아 둘의 대결은 머릿속으로만 상상할 수 있다. “제 경기는 MBC, 장정구 선배는 KBS에서 중계했어요. 이때 누가 중계권을 가져갈 것이냐의 문제도 있었죠. 협회 입장에서도 두 챔피언이 붙으면 한 명의 챔피언을 잃게 되니까 하지 말자는 말도 있었고요. 붙었다면 아마 제가 졌을 것 같아요.(웃음)” 2017년 3월 1일, 3·1절을 기념해 독도 사랑을 일깨우고 비인기 종목으로 전락한 권투를 되살려보자는 취지로 유명우, 장정구의 대결이 독도에서 열리는 듯했다. “어디서 소식을 들었는지 일본 복싱 관계자들에게서 연락이 오더라고요. 분쟁 지역에서 그러면 안 되지 않냐, 진행하면 교류는 끝이다. 이런 식으로요. 사실 저야 상관 안 하지만 후배들에게 피해가 갈까봐 포기했죠. 참 안타까워요.” 복싱 사랑은 여전했다. 다시 태어나도 복싱을 하겠다는 그는 현재 자신의 별명을 딴 ‘버팔로 체육관’과 ‘버팔로 프로모션’을 운영 중이다. 새로운 한국 챔피언을 육성하는 게 목표라 한다. “요즘엔 체육관에 올인하고 있어요. 저보다 훌륭한 챔피언을 꼭 배출해내야죠!”
- 2018-01-17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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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울수록 그 향이 짙어지는 매화(梅花) !
- 눈 내리고 내려 쌓여 소백산 자락 덮여도 매화 한 송이 그 속에서 핀다 나뭇가지 얼고 또 얼어 외로움으로 반질반질해져도 꽃봉오리 솟는다 - 도종환의 ‘홍매화’에서 정초가 지나면서 계절은 겨울의 한복판으로 접어들지만, ‘꽃쟁이’들의 마음은 벌써 춘삼월이 코앞에 다가온 듯 들뜨기 시작합니다. 지구온난화 등의 여파로 시절을 착각한 복수초나 노루귀 등의 야생화들이 여기서 불쑥 저기서 불쑥 한 달여나 이르게 꽃망울을 터뜨리기 때문입니다. 그중 엄동설한에 피는 모습이 어색하지 않은 꽃이 있습니다. 바로 매화(梅花)입니다. 눈 속에 피는 꽃, 즉 설중매(雪中梅)의 그림에 익숙하고, ‘매화는 일생 춥게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梅一生寒不賣香)’는 등의 찬사에 너무 길들어서 매화란 으레 한겨울에 피는 꽃이란 선입견이 강하게 박혀 있기 때문일지 모릅니다. 실제 ‘따듯한 남쪽 나라’ 제주도에선 1월이면 팝콘 터지듯 가볍게 터진 하얀 매화꽃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습니다. 뭍에서도 최근 수년간 이상 난동으로 경남 양산 통도사의 유명한 홍매(紅梅)인 자장매(慈藏梅)가 1월부터 홍색 꽃을 피워 많은 인파를 불러 모으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전남 순천에는 아예 음력 12월이면 피기 시작해, 음력 섣달의 한자 말인 납월(臘月)을 붙여 ‘납월홍매화’란 이름으로 불리는 매실나무가 있습니다. 금전산 금둔사 경내에 있는 홍매화 6그루가 그 주인공으로, 해마다 양력 1월 말부터 3월까지 개화해 남녘의 봄소식을 가장 먼저 알려준다는 말을 듣습니다. 30여 년 전 인근 낙안읍성에 있는 600년 된 홍매화의 씨를 받아다 키운 것인데, 지금은 어미 납월매가 고사해 이 6그루가 마지막 남은 토종 납월매일 것이라고 합니다. 여하튼 납월매가 됐든, 수령 360여 년의 자장매, 또는 뜻밖에 핀 동네 매화이건 정월은 추위가 뼛속 깊이 스며들수록 그 향이 코를 찌를 듯 짙어진다는 매화꽃을 찾아다니며 즐기는, 이른바 ‘탐매(探梅)’가 시작되는 달입니다. 그리고 그 여행길은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란 말처럼 쉬 끝나는 게 아니라, 봄철 내내 이어집니다. Where is it? 매실나무가 국내에 들어온 건 약 2000년 전. ‘정원수로 심기 위해서’라는 게 국가생물종정보시스템의 설명이다. 당연히 오래된 매실나무가 많고, 이른바 유명한 고매(古梅)를 찾아다니며 즐기는 탐매 순례도 오래됐다. 수령 600년을 넘었다는 순천 선암사의 선암매(仙巖梅), 장성 백양사의 고불매(古佛梅), 양산 통도사의 자장매, 구례 화엄사의 흑매(黑梅) 등이 애호가들이 즐겨 찾는 매실나무다. 통도사엔 자장매 외에도 이름난 매실나무가 2그루 있는데, 일주문에 들어서면 먼저 보이는 만첩홍매와 분홍매가 그것이다. 유서 깊은 고불매와 선암매는 담양 계당매(溪堂梅)와 전남대 대명매(大明梅), 고흥 수양매(水楊梅)와 더불어 ‘호남 5매’란 명성을 얻고 있기도 하다. 이밖에 김해의 와룡백매(臥龍白梅)와 강릉 오죽헌의 율곡매(栗谷梅), 산청의 남명매(南冥梅) 등 수령 100년 이상 된 고매가 전국에 200여 그루 넘게 산재해 탐매객들의 발길을 붙잡는다. 최근에는 열매인 매실 수확 등을 목적으로 심은 대규모 매실나무들의 연륜이 쌓여 봄마다 농원 일대가 거대한 매화동산으로 변모하면서 수많은 인파가 찾는 매화 축제가 열리기도 한다. 전남 광양과 경남 양산의 매화 축제가 대표적이다.
- 2017-12-26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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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체 사진작가가 된 前 지구과학 선생님 이경훈씨
- “학교는 왜 그만두셨어요?” “8월에 미국에서 있었던 개기일식이 보고 싶어서요.” 정년퇴임 2년여를 앞두고 명예퇴직을 선택한 전 부산과학고등학교 이경훈(李京勳·60) 선생님의 입에서 터져 나온 말이 놀랍고 신선하다. 새 학기가 시작될 무렵, 하산하듯 선생 자리에서 물러났단다. 은퇴를 앞두고 고민이 많았을 텐데 답변 한번 간단하다. 통쾌함도 몰려온다. 걱정 따위는 잊고 내가 즐기는 삶, 내가 소중한 삶을 살아가는 얘기를 들어봤다. 좌우명 ‘놀자’, 백발소년(白髮少年) 이야기 “개기일식 날짜가 딱 여름방학 끝나고 2학기 개학하고 나서였거든요. 어쩔 수가 없었어요. 제 인생 좌우명이 ‘놀자’거든요(웃음).” 개기일식을 이런 것 저런 것 신경 안 쓰고 보고 싶었다고 했다. 날짜도 조금 애매하게 걸려 있었다. 그렇게 과학 선생님으로서의 인생을 마감하고 신나게 개기일식 여행을 준비했다는 이경훈씨. 부산지부장으로 있는 (사)아마추어 천문학회 회원 48명과 함께 미국 아이다호로 개기일식을 보러 다녀왔다. “이번 개기일식은 2분 16초 동안 진행됐거든요. 이 짧은 시간 동안 알차게 촬영을 하기 위해 두 달 동안 계획을 세웠어요.” 달이 해를 가리는 개기일식이 일어나는 동안 사진과 동영상을 동시에 찍어야 하기 때문에 실제로 기다려왔던 그 순간을 만끽할 만한 여유가 없다. “개기일식을 볼 때보다 준비할 때가 더 좋아요. 현실로 닥치면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서 계획했던 것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아요.” 하늘을 바라보고 관찰하는 일도 좋지만 새로운 장비를 장만하고 여행을 준비하는 기간이 즐겁다고. 사실 간단하게 ‘개기일식 때문이었다’고 은퇴 이유를 밝히긴 했지만 결정이 어렵지는 않았을까? 현직과 전직의 차이, 정년퇴직으로 누릴 수 있는 금전적 차이가 꽤 크다. “3월에 학교를 그만뒀어요. 은퇴가 한 2년 반 정도 남아 있었을 때죠. 계속 과학고등학교에서 근무했으면 연봉이 대략 1억이 넘어요. 제가 2년 반을 일찍 그만둬서 명예퇴직수당이 한 5000만원 조금 안 됩니다. 임용과 관련한 문제가 있기는 했지만 다른 건 모르겠고 개기일식이 정말 너무 보고 싶었어요.” 그렇다면 훌쩍 떠나버린 선생님의 빈자리에 대해서 학생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교직에 있던 시절 이경훈씨는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깨나 누렸던 선생님이었다. 친구처럼 함께했던 선생님과의 갑작스런 이별을 학생들은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궁금했다. “학생들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몰랐어요. 그런데 아마 알았을 거예요. 제가 나중에 자유로워지면 뭘 할 거다, 이런 얘기들을 자주 했어요. 과학고등학교 아이들이라 한마디 딱 던져도 눈치를 잘 채거든요. 깜짝 놀랐겠지만 ‘아, 이 선생님 같으면 그래서 은퇴했을 거야’라고 짐작을 했을 겁니다.” 백발의 이경훈씨는 철없는 소년처럼 생글생글 잘도 웃으며 얘기한다. 인생의 좌우명이 ‘놀자’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선택이고 즐거운 소풍 길이었으리라. 사업가 집안에서 선생님을 꿈꾸다 이경훈씨가 만약 선친의 뜻을 거스르지 않았다면 부산 지역에서 이름 높은 기업 대표가 돼 있었을지도 모른다. 부모님을 비롯해 친척 대부분이 국제시장에서 철물, 전기와 관련한 사업을 했고 지금도 부산 지역에서 다양한 기업을 거느리고 있는 사업가 집안이다. “우리 집안과 친척들 중에서 사업을 안 하는 사람은 저 하나밖에 없습니다.” 어렸을 적 이경훈씨는 사업하는 부모님을 보며 자랐다. 선친이 운영하던 사업은 바로 위 누님 내외가 이어받았다고 한다. “제가 뭘 보고 컸냐면 월말이 되면 직원들에게 급여 챙겨주려고 돈 세는 모습과 부도였어요. 부도나면 집안 여기저기에 빨간 딱지가 붙잖아요. 그걸 보며 사업은 ‘내가 할 일은 아니구나’ 생각했어요. 그때가 중학교 2학년이었습니다. 물론 장사를 했으면 잘했을 거예요. 하기 싫어서 그렇지(웃음).” 사업가가 힘들다고 생각했던 것은 한 번쯤은 찾아오는 ‘고비’ 때문이다. 고비에 대처할 자신이 없어 일찌감치 사업은 내 길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 “그럼 뭘 할까 고민하다 선생님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중학교 올라가서 과학에 대한 흥미도 좀 생겼고요. 선생님이란 직업이 나빠 보이지 않았어요.” 사업도 사업이지만 대단하게 치열한 삶을 살아본 적이 없고 그렇게 사는 것도 싫다고 했다. “공부를 해본 적이 없어요(웃음). 그냥 교실에만 앉아 있으면 어느 정도 성적이 나오잖아요. 공부를 치열하게 했으면 성적이 더 나왔겠죠. 그럼 인생 진로가 바뀌었을 거고. 만약 그랬으면 대단히 피곤하게 살았을 가능성이 커요.” 공부를 좀 더 잘했다면 사회적 지위는 더 올라갔겠지만 본인이 원하지 않는 삶을 살았을지 모른다. 놀면서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정도의 직업을 가진 사회 구성원으로 사는 것도 나름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경남고등학교에 응시했다 떨어져서 부산사대 부속 고등학교에 들어갔어요. 중간 정도의 성적을 유지했어요. 고3 때 대학 진학을 결정해야 하는데 아버지가 그러는 거예요. 사업을 이어받으려면 관련되는 학과를 가라고요.” 사범대 지원을 못하고 부산 수산대학교(현 부경대학교) 식품공학과에 진학했다. “1학기 다니고는 몰래 자퇴했어요. 그리고 한두 달간 입시준비 뒤 부산대학교 사범대학에 합격하고 나서야 부모님께 말씀드렸습니다.” 대학교에서도 자신의 성적과 상황을 받아들이며 진로를 결정했다. 그렇게 전공과목으로 선택한 것이 지구과학교육학과였다. “내 인생 최고의 선택이 대학교 때 지구과학을 선택한 것입니다.” 지구과학이 천체 사진에 빠져들게 하다 지구과학교육학과에 들어가면서부터 자연스럽게 천체 사진에 눈을 뜨게 됐다. 본격적으로 뛰어든 계기는 바로 핼리 혜성 때문이었다. “1986년에 핼리 혜성이 한국에 왔었어요. 모교였던 부산사대 부고에서 교편을 잡고 있으면서 대학원을 다니고 있을 때였어요. 학부생들이랑 같이 핼리 혜성 찍겠다고 다대포도 가고 금정산성도 오르고 그랬죠. 차가 없어서 많은 장비들을 짊어지고 버스 타고 다녔어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천체 사진을 찍었습니다.” 천체 사진을 찍으려면 천체망원경이 필요했다. 중등 교사를 하는 동안 학교와 정부 지원 예산을 적절하게 지원받아 천체망원경을 구입해 학교에 비치했다. “선생님들이 예산을 잘 안 써요. 돈 세고 계산하는 거 귀찮으니까요. 연말이 되면 다른 과에서 돈을 안 쓰니 돈이 남죠. 그래서 선생님들에게 이번에 안 쓰시면 천체망원경 하나 사겠다고 말하고 장만했습니다.” 연말이 되면 천체망원경 한 세트 사고 카메라도 샀다. 학교를 옮길 때마다 천체망원경을 구입하고 학생들의 천체 동아리 활동을 이끌었다. 지금도 그렇게 만난 제자들과 자주 연락을 하며 지내고 있다. 학교를 그만두고 난 뒤 그는 천체 사진을 찍고 또 천체 사진 찍는 방법 등을 가르치는 일을 한다. 학교 과학 선생님 자리에서는 물러났지만 그때와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과학을 대하고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그렇다면 천체 사진의 매력은 무엇일까? “대상에 대한 매력이죠. 별에 대한, 우주에 대한. 우선 별을 좋아하지 않으면 천체 사진에 관심이 생길 수가 없죠. 과학 중에서도 아마추어라는 이름으로 다가갈 수 있는 분야가 천문학밖에 없습니다. 과학 이론이나 지식으로 접근하는 게 아니고 미적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천체를 ‘아름답다, 정말 보기 좋구나’ 이렇게 볼 수도 있는 거죠.” 아마추어 천체 사진가들 중에는 천문학적인 과학 지식과는 상관없이 미적 대상으로만 접근하는 사람도 많다. 이경훈씨는 취미로 찍기도 하지만 주로 전문 사진을 찍고 있다. 과학 정보를 얻기 위한 데이터 중심의 천체 사진은 하드디스크에 저장해놓는다. 이렇게 저장된 사진과 영상들은 필요할 때 과학 자료로 쓰인다. 미치지 말고 서서히 중독돼라 “경북 영천에 보현산 천문과학관이라고 있거든요. 바로 그 건너편에 제 개인 천문대를 만들려고 올 초에 땅을 좀 매입했어요. 개인 공간에서 별이나 원 없이 봐야죠.” 천체 사진을 찍는다고 해서 이것이 수익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일종의 인류를 위한 봉사 같은 것. 수익을 생각해 영천에다가 개인 관측지를 만들 생각이다. 전문적으로 별을 관찰할 수 있는 천체 펜션도 생각 중이다. “별을 보러 온 사람들은 통제된 숙박을 하게 될 겁니다. 먹는 것도 통제를 받고 자는 것도 통제받고요. 별을 보기 위한 게 목적이니까. 와서 먹고 자기 위한 게 목적이 아닌 거죠. 먹고 잘 시간에 별을 봐라, 뭐 이런(웃음).” 펜션 관리를 하는 대신 천체와 관련한 고급 정보를 주고 가이드도 해줄 생각이다. 장비가 없는 사람들한테는 장비도 대여해주고 말이다. 천체 사진이나 천문학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 당부할 게 있단다. 갑자기 매료돼 미쳐서 달려들지 않기를 말이다. “제일 경계하는 게 미치는 거예요. 미치면 빨리 떠나요. 대체로 그래요. 너무 치열하게 하지 마라. 쉬엄쉬엄 여유를 가지라고요. 같이 시작한 사람들 중에 남아 있는 사람이 없거든요.” 2035년 9월 2일 우리 만나자! “은퇴하고 나니까 남는 건 시간, 모자란 건 돈이에요. 2019년과 2020년 칠레에서 개기일식이 있는데 한 번은 갈 거예요. 2024년에는 미국에서 개기일식이 있습니다.” 한반도에서도 개기일식을 볼 수 있는 날이 있다. 바로 2035년 9월 2일. 제자들을 비롯해 강연회에서 만난 교육생들과 이날 만나자고 이미 약속했다. “이때 개기일식이 평양을 지나 동해안, 그리고 DMZ박물관을 지나갑니다. 통일이 되면 평양 가서 볼 거고, 안 되면 동해안 DMZ박물관에서 봐야죠. 2004년부터 개기일식 관련 수업을 학생들과 할 때마다 2035년 개기일식 시뮬레이션을 했어요. 그때마다 얘기했죠. 만나자고요.” 물론 제자들이 그 약속을 평생 간직할 거라고 기대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2035년이 되면 한국의 개기일식에 관한 뉴스가 나올 테고 제자들의 기억이 봉인 해제되듯 살아날 거라 생각한다. “2035년 9월 2일 DMZ박물관에서 만나자고 했는데 다들 올 거예요. 근데 당일 출발하면 동해에서 길이 막혀서 못 들어올 거예요. 그래서 저는 적어도 4~5일 전에 캠핑카 타고 가서 천체망원경 몇 대 깔아놓고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그때가 되면 제자들이 애기들 데리고 오겠죠?” 이경훈씨가 팔십이 되기 전이니 정정하게 제자들과 해후하지 않을까? 얼마나 많은 제자가 모일까? 사뭇 궁금해진다.
- 2017-12-22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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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공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찾아서
- 1865년 세상 빛을 본 동화 는 루이스 캐럴의 대표 작품으로 세월이 흘러도 사랑이 식지 않는 고전 중 하나다. 시대를 막론하고 잊을 만하면 앨리스 신드롬이 부는 것을 보면 대단한 작품임에는 틀림없다.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되고 새로운 형태의 예술로 끊임없이 재탄생하는 . 이번에는 미디어 아트의 옷을 빌려 작품이 탄생했다. 로 향하는 토끼굴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경험하고 싶다면 서울숲으로 향해보자. 미디어 아트로 새롭게 태어난 앨리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展 (이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展)이 서울숲 갤러리아포레에서 내년 3월 1일까지 열린다. 이번 은 루이스 캐럴의 , 시리즈를 현대적인 시각으로 표현해낸 새로운 콘셉트의 전시다. 동화의 새 지평을 열며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는 불멸의 명작, 루이스 캐럴의 ‘앨리스’ 시리즈. 그동안은 책, 애니메이션과 영화 등 2차원에서만 봐왔던 앨리스를 현대적인 감각으로 제대로 해석했다. 개성 넘치는 삽화 작가, 감각적인 연주자와 설치 작가, 영상팀 등 총 23개 팀이 저마다의 ‘앨리스’와 ‘원더랜드’를 창조했다. 감상의 한계를 뛰어넘어 앨리스의 기상천외한 모험을 직접 체험할 수 있도록 표현했다. 앨리스와 원더랜드를 신비로운 영상, 음악, 그리고 빛으로 담아낸 이번 전시는 , , ,
- 2017-12-11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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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광석화 같았던 나고야 성의 축성과 폐성
- 정유년인 올해는 정유재란(1597.1~1598.12) 발발 420주년이다. 임진왜란으로부터는 427주년. 임진왜란이 치욕의 역사였다면, 정유재란은 왜군이 충남 이북에 발도 못 붙인 구국승전의 역사다. 그 전적지는 진주, 남원, 직산 등 삼남지방 곳곳에 있지만 옛 자취는 찾기 어렵다. 뚜렷한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은 왜군이 남해안을 중심으로 농성하던 성터들이다. 주로 경남 중동부 해안에 밀집한 왜성 터들도 오랜 세월 허물어지고 지워져 갈수록 희미해져간다. 왜성이라는 이유로 사적지 지정이 해제된 탓이다. 근래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그 중요성에 눈을 떠 옛 모습대로 복원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는 아직도 방치되어 있다. 치욕의 역사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다. 더 늦기 전에 지금 모습이라도 남겨둬야 한다. 더 사라지고 훼손되기 전에 역사 현장 보전의 필요성을 일깨우고, 정유재란의 역사적 의미를 천착하기 위해서라도 그 흔적을 돌아볼 필요가 있어 에 게재하기로 한다. 임진·정유 국란의 왜군 출진기지는 규슈(九州) 서북 해안 나고야(名護屋) 성이다. 일본 중부의 중심도시 나고야(名古屋)와 구별하려고 히젠(肥前)이란 옛 지명을 붙여 ‘히젠 나고야’라 불리는 곳이다. 사가(佐賀) 현 가라쓰(唐津) 시에서 버스를 타고 해안선을 따라 40여 분 달리면 닿는 요부코(呼子) 포구 언덕 위에 있다. 굴곡이 심한 해안선 깊숙한 만(灣)에 얼마든지 배를 숨길 수 있고, 조선과의 거리가 제일 가까운 지리(地利)를 고루 갖추어 옛날부터 왜구의 소굴로 유명했던 곳이다. 26년 만에 다시 찾아본 나고야 성은 그때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흘러간 옛 노래 ‘황성옛터’를 연상시키는 무너진 성벽이 옛날 그대로였다. 일본이 군신으로 떠받드는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의 글씨로 ‘名護屋城址’라고 쓴 비석도 같은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헛꿈을 조롱한 쇼와(昭和) 시대 하이쿠 시인 아오키 겟토(靑木月斗)의 시비도 같은 자리에 있었다. 수십 년이 걸린 성터 발굴·복원사업이 끝났다지만 겉보기에 변한 것은 없었다. 주말 낮인데도 탐방객 발길이 뜸해 적막하기만 했다. 성터 입구에 자리 잡은 박물관과 그 앞에 조성된 상가만이 옛날에 없었던 건물이다. 도고 헤이하치로 글씨로 된 성적(城跡·성터) 비는 1930년, 겟토의 시비는 1940년에 세워졌다. 그러나 두 돌의 언어는 사뭇 다르다. 도고의 비에는 옛 성터라는 글자뿐이지만, 그것이 세워진 시대와 세운 자의 뜻에 히데요시의 대륙 정복 야망을 그리는 마음이 오롯이 드러나 보인다. 1930년이라면 일본의 만주 침략 야욕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대다. 내무성이 그 돌을 세우면서 러일전쟁 영웅에게 글씨를 부탁한 가슴 밑바닥에는 일본인들이 ‘역사상 최고의 영웅’으로 추앙하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존숭하는 뜻이 꿈틀거렸으리라. 1940년에 세워진 겟토 시비는 히데요시의 망상을 비웃는 것 같다. “다이코가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지만 바다에는 안개만 자욱해.” ‘다이코(太閤)’란 천황을 대신해 나라를 다스리는 관백(關白) 자리를 아랫사람에게 물려주고 상왕처럼 물러앉은 이를 말한다. 히데요시는 조카(秀次·히데쓰구)에게 양위한 뒤에도 만사를 제멋대로 한 사람이다. 그런 권력자가 아무리 대륙 진출 야망으로 용을 써도 그 꿈은 안갯속에 가물가물하다는 뜻으로 읽히지 않는가. 실제로 성터에서 바라본 현해탄 바다에는 쓰시마의(對馬島) 모습조차 어렴풋했다. 26년 만의 탐방객을 놀라게 한 것은 성터에 우거진 고목나무 가지에 달려 있는 올레길 리본이었다. 처음 눈에 띈 것은 천수각 가는 길가 나뭇가지에 달린 것이었다. 반가워 카메라를 들이대니 일본인 탐방객이 “그게 무엇이기에 사진을 찍느냐”고 물었다. 한국 제주도 올레길 표시라는 말에 그들은 “천수대 터에도 많다”고 알려줬다. ‘제주 올레가 일본과 몽골에 수출되었다더니 여기까지 왔구나’ 싶어 너무 반가웠다. 그의 말이 맞았다. 금빛 찬란한 천수각이 있었다는 천수대 터에는 쇠막대기로 만들어 세운 올레 표지물도 있었다. 나중에 알아보니 가라쓰에서 규슈 서북단 히라도(平戶) 섬에 이르는 해안선 구간에 올레길이 조성되어 한국인 여행객에게 인기가 있다 한다. 나고야 성을 찾아가는 도로표지판마다 한글이 병기된 것도 그래서구나 싶었다. 7년 동안 나라를 풍전등화처럼 위태롭게 했던 왜란 출진기지가 평화의 길이 된 것을 400여 년 세월의 작용이라고만 보아 넘기기에는 좀 미진한 뒷맛이 남았다. 임진왜란 400주년 기획 시리즈 취재 차 나고야 성에 갔던 1991년에는 유적지 발굴사업이 한창이었다. 옛 성터를 정비해 관광자원으로 삼기 시작한 때여서 일본인 관광객 발길이 잦았다. 그 르포기사가 신문에 보도된 것을 계기로 국내에서도 차츰 관심을 갖는 사람이 늘어 규슈 관광의 인기 코스가 되었으니, 세월의 두께를 새삼 음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모습 그대로 두는 것이 역사의 참뜻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생각에서 무너진 성을 보존하기로 했습니다.” 그때 특파원을 안내해준 진제이(鎭西) 초(町·일본의 행정구역 단위) 직원은 복원사업이 현상을 그대로 두고 발굴만 하는 것이라 했다. 히데요시 이후 염전·반전사상의 결과로 폐허가 된 성을 그대로 두는 것도 역사의 뜻이라는 것이었다. 정작 옛 자취를 찾게 된 것은 나고야 성 주변에 촘촘히 자리 잡았던 130여 개 번국(藩國)의 진터다. 독재자 히데요시는 휘하 영주[大名]들에게 전쟁기간 중 출진 병사들을 거느리고 성 아래 대기하도록 요구했다. 출진 후의 병력보충 병참 등 임무를 강제했기 때문에 전국의 영주들은 수많은 예비 병력을 거느리고 눌러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진터들은 전후 폐허가 되었다가 사유지로 바뀌어 흔적마저 감추었다. 1970년대부터 시작된 복원사업의 큰 틀은 그 땅을 사들여 옛 모습의 윤곽을 복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박물관을 지어 전쟁의 배경과 경과, 그리고 양국 평화의 지향점을 모색하고 홍보하자는 것이었다. 나고야 성은 축성과 폐성이 모두 전광석화 같았다. 인구 20~30만 명의 거대한 병영도시 나고야 성은 번개같이 건설되어, 또 그렇게 해체당하는 비운을 맞았다. 최고 권력자가 사라지고 세상이 바뀌면 어느 나라 어느 시대에건 일어나는 일이다. 그러나 그처럼 철저하게 무참하게 파괴된 일은 흔하지 않으리라. 일본 통일의 꿈을 이룬 히데요시는 조선과 명나라를 손아귀에 넣어 동아시아 패권을 잡겠다는 망상으로 1590년부터 대륙 침략을 꿈꾸기 시작한다. 중국은 물론 인도까지 영토를 넓혀 부하들에게 봉토를 나눠주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그 계획에 비판적이던 동생 히데나가(秀長)가 죽고, 천금보다 귀히 여기던 외아들 쓰루마쓰(鶴松)마저 잃어 심신이 극도로 피폐했던 1591년 8월, 그는 규슈 지방 영주들에게 ‘대륙 경영 사업’ 개시를 선언하고 적지에 출진기지를 건설하라고 명령한다. 당시 일본에 와 있던 포르투갈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의 에는 그때 일을 이렇게 묘사했다. “관백(히데요시)이 조선으로 가장 쉽게 건너갈 수 있는 항구가 어디인지를 묻자 가신들은 나고야로 불리는 아름다운 항구가 있는데, 수천 척의 선박이 안전하게 출입할 수 있는 곳이라고 대답했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전국의 영주들을 나고야에 집결시키도록 명령했다. 그리고 각자의 부담으로 궁전과 해자와 저택으로 꾸려진 화려하고 넓은 성채들을 조속히 축조하되, 교토에 지은 것보다 뒤떨어지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문장에서 주목할 것은 교토에 뒤지지 않는 화려한 궁전과 성채를 영주들 각자의 부담으로 건설하라는 ‘후신(普請) 명령’이다. 후신이란 불교에서 민간에 널리 시주를 청해 불당이나 탑을 짓거나 수선하는 사업이란 뜻이지만, 절대 권력자가 영주들에게 갖가지 토목·건축사업을 시킨 일을 뜻했다. 나랏돈은 10원도 쓰지 않고 국책사업의 돈과 인력을 영주들에게 부담시켰으니, 아무리 봉건시대이라지만 어떻게 그런 횡포와 전제가 있었는지 흥미롭다. 프로이스는 영주들이 꼼짝 못하고 명령을 수행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다른 영주들에게 뒤지지 않으려는 경쟁심이었다. 작업 중 사소한 부주의를 저지르면 감독들에게 공개적으로 질책을 당하게 되고, 그것이 관백에게 무능력자로 낙인찍혀 추방당하거나 재산을 몰수당할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축성 책임자는 히데요시의 오른팔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공사 책임자는 뒷날 이 지역 영주가 된 데라자와 히로타카(寺澤廣高)였다. 원래 있었던 가키조에(垣添) 성을 헐어 규모를 크게 확장하고, 사방 3km 이내에 130여 번국 영주들의 진영(陣營)을 건설하는 일본 역사상 초유의 대토목 공사였다. 성 공사는 착공 6개월 만에 완공되었고, 영주들의 진영이 완성되는 데는 8개월이 걸렸다니 얼마나 공사를 서둘렀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본성 공사는 규슈 지역 20여 명의 영주들이 비용과 공력을 분담했고, 나머지 공사는 각 영주들 책임 아래 시행되었다. 해발 89m 나지막한 구릉 꼭대기에 혼마루(本丸)를 짓고,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5층 규모의 천수각을 세웠다. 그 아래로 니노마루, 산노마루 등 부속시설과 병사를 배치하고, 주변에 견고한 석축을 쌓아올려 난공불락의 요새를 만들었다. 외성은 주변에 해자를 둘러 외적의 침입에 대비한 전형적인 왜성이었다. 성의 총면적 50만 평은 일본 최대의 오사카 성에 버금가는 규모였다. 성의 크기만 그런 게 아니었다. 그 시대 인구 30만을 가진 도시는 오사카 말고는 없었다. 성내에는 히데요시의 측실(廁室)을 위한 사찰과 다실, 전통 가무극 ‘노(能)’ 공연장까지 있었다. 그 시대에 그려진 병풍도에는 성내의 건물 약 70여 동, 그 아래 조카마치(城下町)의 일반 백성 주택과 점포 260여 동, 진영 시설 70여 동 등 400여 동의 건물이 그려져 있다. 나고야는 외국인 왕래가 잦은 국제도시이기도 했다. 병풍도에는 명나라 사절단 40여 명과 포르투갈인 등 260여 명의 통행인이 그려져 있는데, 이 가운데는 조선에서 잡혀온 포로들을 사들여 해외로 팔아넘기는 노예 상인들도 있다. 일본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돌아온 정희득(鄭希得)은 실기(實記) 에 “나고야 거리에서 마주친 사람의 반 이상이 조선인”이라고 썼다. 그들 대다수가 붙잡혀간 사람들이었다. 통행인 가운데는 남자들 소매를 잡아끄는 유녀(遊女)의 모습도 보인다. 해안 거리에는 유곽과 술집이 줄지어 있고, 각 번의 진에서는 수많은 사졸이 할 일 없이 소일하고 있었다. 노예장사로 재미를 본 외국인들도 돈을 풀어 즐거움을 샀을 것이다. 발굴 작업 중 천수각 주변에서는 금박기와편이 많이 출토되었다. 벽면뿐 아니라 기와에도 금박을 입혀 금빛으로 번쩍이는 건물이었던 것이다. 이런 성의 건설과 전쟁 수행에 시달린 일본 민중의 고난이 기록으로 남았다. 병력 1만5000명을 할당받은 사쓰마(薩摩) 번(藩·제후가 통치하는 영지)의 경우 7000명이 넘는 아시가루(足輕·보병)와 6000명이 넘는 인부를 징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들은 모두 농·어업에 종사하는 백성들이었다. 갖가지 무기와 장비, 병량과 말먹이, 군수품 및 병선 조달과 운용도 백성들 몫이었다. 백성들 고난은 그것으로도 모자랐다. 히데요시는 곧 조선으로 건너가겠다면서 중간에 머물 이키(壹岐) 섬과 쓰시마(對馬島)에도 성을 쌓고 궁을 지으라는 명령을 내려 부하들과 백성들을 괴롭혔다. 이키 섬에는 아직도 그때의 성터가 뚜렷이 남아 있다. 백성들의 피땀을 짜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을 ‘아방궁’을 지은 것이다. 침략군 출진은 1592년 3월이었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1번 대부터 하시바 히데카쓰(羽柴秀勝)의 9번 대까지 총출진 병력 15만8800명, 출진을 도운 예비부대와 병참요원 등을 합친 총인원은 30만5300명으로 기록돼 있다(역사군상 시리즈 ). 비탈진 구릉 도시에 인파가 북적거렸을 날에 비해 오늘의 정적(靜寂)과 정일(靜逸)은 너무 대조적이다. 히데요시는 침략군이 떠난 3월 26일 교토를 떠나 4월 25일 나고야에 착진(着陣), 1년을 머물며 전쟁을 지휘했다. 그 기간 협상 사절로 온 명나라 유격 심유경(沈維敬)을 접견하기도 하고, 여러 장수들이 조선에서 보내오는 보고서와 진귀한 전리품을 받아들고 천하를 얻은 듯 기고만장했다. 심유경의 거소는 명군 유격이 머물던 곳이라 ‘유게키마루(遊撃丸)’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런 영화의 무대였던 나고야 성은 전후 곧바로 참담하게 해체되었다. 히데요시가 죽고 가스미가세키 패권 전쟁에서 승리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전투에 공을 세운 데라자와 히로타카에게 히젠 나고야 땅을 영지로 주었다. 성을 축조할 때 공사 총감독으로 기여하고 조선에 출병한 공로까지 인정한 것이다. 데라자와는 1602년 나고야 성을 허물고 가라쓰 해변에 자신의 성을 축조했다. 조선 침략의 상징물인 그 성을 허문 것은 일개 영주의 결정이 아니었다. 조선과의 무역 재개와 친선관계의 필요성을 절감했던 이에야스는 성을 허물어 전쟁에 반대했던 자신의 뜻을 널리 알릴 필요가 있었다. 전쟁 기간에 아버지와 남편을 잃었거나 오래 빼앗겼던 민중은 전쟁에 치를 떨었다. 7년 동안 헐벗고 굶주린 것이 모두 전쟁 탓이라 여겼던 민중의 염전사상(厭戰思想)은 하늘을 찔렀다. 반전사상과 염전사상은 지금 허물어진 성터 위에 아기 불상의 모습으로 남았다. 데라자와는 그렇게 허문 성석과 건물의 자재를 고스란히 자신의 성 쌓기에 사용했다. 마쓰우라(松浦) 강이 바다로 흘러드는 나지막한 구릉 위에 한껏 멋을 부려 쌓아올린 가라쓰 성은 멀리서 보면 학이 나래를 펴고 춤을 추는 모습을 닮았다고 해서 무학성(舞鶴城)이라 불린다. 그렇게 헐린 나고야 성은 얼마 후 일반 민중의 공격으로 또 한 번 상처를 입는다. 1637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기독교 탄압과 가혹한 조세가 원인이었던 시마바라(島原) 민란 때였다. 성터 입구 ‘나고야 성 박물관’ 현관 앞에는 제주도 돌하르방 부자가 서서 탐방객을 맞아준다. 일본인들은 이 낯선 ‘수문장’ 앞에서 반드시 발길을 멈추고, 더러는 기념사진을 찍기도 한다. 이 박물관의 성격이 ‘일본열도와 조선반도의 교류사’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출입문을 들어서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전시물이 한국 고미술의 상징인 반가사유상 복제품이다. 7세기 중국과 조선반도 문명의 영향을 받아 일본에 처음 율령 국가가 세워졌다는 설명문이 그 아래 붙어 있다.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것이 거북선 모형이다. 실물보다 많이 축소된 것이지만 여수나 통영에서 본 것과 다르지 않다. 문을 들어서 처음 맞닥뜨리는 공간에 자리한 거북선 옆에는 당시의 일본 전함 아타케부네(安宅船) 모형과 두 나라 병기, 무복, 전황도 등이 전시되어 있다. 객관적인 시선으로 전쟁을 조명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 2017-12-06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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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월의 추천 전시, 도서, 영화, 공연
- ◇exhibition 다빈치 얼라이브: 천재의 공간 일정 2018년 3월 4일까지 장소 용산 전쟁기념관 기획전시실 예술, 과학, 음악, 해부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인류사적 업적을 남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생애를 색과 빛, 음향으로 재조명한다. 전시는 ‘르네상스, 다빈치의 세계’, ‘살아있는 다빈치를 만나다’, ‘신비한 미소, 모나리자의 비밀이 열린다’ 등 총 3개의 섹션으로 나뉜다. 제1섹션에서는 실물 크기로 재현한 다빈치의 발명품을 직접 만지고 체험할 수 있다. 이밖에 베네치아에 보관된 ‘비트루비우스의 인체비례도’를 이해하기 쉽게 설명한 영상을 볼 수 있다. 다빈치의 걸작으로 꼽히는 ‘모나리자’에 관심이 있다면 제3섹션을 확인하자. 세계적 미술 감정 기업인 뤼미에르 테크놀로지가 모나리자 원화를 10년간 분석해 밝혀낸 25개의 비밀을 공개한다. 당시의 색감을 그대로 복원해 재현한 진짜 모나리자를 감상해보자. 더 아트 오브 더 브릭 일정 2018년 2월 4일까지 장소 아라아트센터 전시회의 주인공인 네이선 사와야는 세계 최초로 오직 ‘레고’만을 사용해 작품을 만드는 예술가다. 지구본, 전화기 등 아기자기한 생활 소품부터 인체의 다양한 움직임을 표현한 작품까지 약 100만 개의 레고를 사용해 제작한 총 100여 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연인(키스)’, 에드바르트 뭉크의 ‘절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오귀스트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등 유명 예술가들의 대표작도 만나볼 수 있다. 전시품 관람 이후엔 레고를 활용해 작품을 직접 만들어보는 체험 공간도 마련되어 있다. ‘디 아트 오브 더 브릭’전은 세계에서 꼭 봐야 하는 10개의 예술 전시 중 하나로 소개되었으며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과 버락 오바마로부터 극찬을 받기도 했다. ◇book 나무를 심은 사람 (장 지오노 저·나무생각) 늙은 양치기 엘제아르 부피가 매일 100개의 도토리를 심으며 기적의 이야기를 만들어나간다. 황량했던 언덕이 생기를 되찾고, 말라버린 하천에 물이 흐르기 시작한다. 우리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게 무엇인지, 진정으로 옳다고 믿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무언가를 처음 시도하는 사람의 용기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깨닫게 해준다. 환자 혁명 (조한경 저·에디터) 현직 의사가 기존의 의료 상식에 반기를 들었다. 환자를 향해 ‘자기 병에 더 큰 관심을 가지라’고 잔소리하는 저자는 ‘약과 병원에 의존하지 말고 건강 주권을 회복하라’고 주장한다. 성인병 치료의 열쇠는 환자에게 달려 있다며 스스로 건강을 지킬 수 있는 쉬우면서도 다양한 ‘혁명’을 제시한다. ◇movie 스타워즈: 라스트 제다이 ‘스타워즈’ 시리즈가 첫선을 보인 지 40년이 되는 올해 또 하나의 시리즈가 탄생했다. “선과 악의 전쟁, 거대한 운명이 결정된다”는 문구가 눈에 띄는 이번 영화는 비밀의 열쇠를 쥔 ‘레이’를 필두로 ‘핀’, ‘포’ 등 새로운 세대가 중심이 되어 운명을 결정지을 빛과 어둠, 선과 악의 대결을 보여준다. 이번 영화는 ‘레아 공주’ 역으로 얼굴을 알린 캐리 피셔가 지난해 작고하기 전 연기한 시리즈로 그의 마지막 ‘레아 공주’를 감상할 수 있다. 전편에서 감독으로 활약한 J.J. 에이브럼스가 제작에 참여하고 향후 시리즈 3부작 연출이 확정된 라이언 존슨이 연출을 맡았다. 개봉 12월 14일 장르 액션, SF 감독 라이언 존슨 출연 마크 해밀, 캐리 피셔, 아담 드라이버 등 아들에게 가는 길 코다(CODA, 청각장애인의 정상인 아이) 가정의 한 장애인 부부가 아들을 키우면서 겪는 문제를 다룬다. 아들의 미래를 위해 시골 할머니 댁에 보내지만 떨어져 지내는 만큼 아이와의 거리도 멀어진다. 진심으로 다가서려 하는 부모와 자신의 말을 듣지 못하는 부모가 답답한 아이. 자식은 어떤 존재이고 부모는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 묻고 가족 해체가 가속화하고 있는 이 시대에 가족의 소중함을 제대로 느끼게 해준다. 이 영화로 2016년 제17회 장애인영화제에서 우수상, 관객심사단상을 수상한 최위안 감독은 장애인에 대한 인식 개선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개봉 11월 30일 장르 드라마 감독 최위안 출연 김은주, 서성광, 이로운 등 ◇stage 빌리 엘리어트 2010년 한국에서 최초로 초연된 뮤지컬 가 7년 만에 다시 한국 무대에 오른다. 1980년대 영국 북부 탄광촌이 배경이다. 복싱 수업 중 우연히 접한 발레를 통해 꿈을 이뤄가는 소년 ‘빌리’의 여정을 보여준다. 장소 디큐브아트센터 일정 2018년 5월 7일까지 연출 스테판 달드리 출연 천우진, 김갑수, 최정원 등 블라인드 시각을 잃은 후 세상과 단절된 청년 ‘루벤’과 몸과 마음이 상처로 가득한 여자 ‘마리’가 만나 마음으로 서로를 느끼며 교감을 해나가는 사랑 이야기다. 오로지 마음으로만 교감하는 둘의 관계를 통해 우리가 진정으로 봐야 하는 본질이 무엇인지 질문하게 만든다. 장소 수현재씨어터 일정 2018년 2월 4일까지 연출 오세혁 출연 박은석, 이재균, 김정민, 정운선 등 거미여인의 키스 남성 2인극으로, 이념이 다른 두 주인공인 몰리나와 발렌틴이 감옥에서 만나 서로를 이해하며 다가가는 슬픈 사랑을 연기한다. 몰리나 역은 배우 이명행과 김호영이, 발렌틴 역은 송용진과 김선호가 지난 공연에 이어 재연을 확정했다. 장소 아트원씨어터 2관 일정 2018년 2월 25일까지 연출 문삼화 출연 이명행, 이이림, 김주헌 등 타이타닉 타이타닉 사건이 발생한 지 105년, 브로드웨이 초연 20년 만에 한국 무대에 상륙한다. 영화가 이 사건의 비극적인 사랑에 집중했다면 영화보다 앞서 제작된 뮤지컬 은 배가 항해하는 5일 동안의 사건과 인물들의 모습을 그려냈다. 장소 샤롯데씨어터 일정 2018년 2월 11일까지 연출 에릭 셰퍼 출연 김용수 왕시명 이상욱 등
- 2017-12-04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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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동엽문학관, 그곳에 시인이 살고 있다
- 목적지는 충청남도 부여다. 그곳에서 태어나고 묻힌 시인 신동엽을 만나기 위해서다. 서울남부터미널의 왁자지껄한 분위기는 여행의 설렘을 더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알록달록한 단풍잎은 가을을 보내기 싫다는 듯 나뭇가지 끝에 겨우 매달려 몸을 흔든다. 두 시간 정도 지났을까, 호젓한 부여에 도착했다. 부여시외터미널에서 신동엽문학관까지의 거리는 멀지 않다. 5분 정도 이정표를 따라 걷다 보면 신동엽의 시 ‘껍데기는 가라’의 한 구절을 써놓은 게스트하우스 담벼락이 눈에 들어온다. 이는 문학관에 거의 다 도착했다는 의미다. 100m도 채 지나지 않아 신동엽문학관과 신동엽 생가가 모습을 드러낸다. 2013년 개관한 문학관과 복원된 생가는 서로 다른 매력을 보여주지만, 함께 어울려 신동엽 시인에 관해 이야기한다.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 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신동엽, ‘껍데기는 가라’ 신동엽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껍데기는 가라’는 1967년에 발표됐다. 이후 ‘참여시의 절정’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비로소 문단의 조명을 받았다. 같은 해에는 4800행에 달하는 장편서사시 ‘금강’을 팬클럽의 작가기금을 받아 발표한다. 깔끔한 외모의 젊은 국어선생님이었던 신동엽은 평소에도 인기가 높아 여학생들로부터 편지를 많이 받았다. 그런 그를 보고 아내인 인병선 여사가 화를 많이 냈다고 한다. 신동엽은 자신의 작품인 오페레타 ‘석가탑’을 무대에 올리고 다음 해인 1969년, 국민방위군(1951) 때 감염된 간디스토마가 간암으로 악화되어 만 39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신동엽문학관은 한국을 대표하는 건축가 승효상의 작품이다. 시간이 지나가면서 낡아가는 자연스러운 문학관의 모습이 신동엽의 시를 닮았다. 마치 종이를 바른 듯한 느낌의 외벽에는 여백이 넘치고 내부는 외부로 자연스레 연결된다. 진보적인 시인이었던 신동엽. 이곳을 순례하는 자들의 발길은 여전히 잦다. 전시관에서는 시인의 육필 원고를 비롯해 인병선 시인과 주고받은 편지와 사진, 즐겨 읽던 책, 교무수첩, 신분증 등 다양한 유품을 관람할 수 있다. 그와 관련한 자료들은 시간이 많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유가족의 노력으로 잘 보존되어 있다. 전시관을 다 둘러봤다면 옥상정원으로 올라가봐야 한다. 푸른색 기와의 신동엽 생가를 한눈에 넣을 수 있다. 신동엽이 자라고 신혼생활을 했던 생가의 앞마당 웅덩이는 지금은 풍성하게 자란 잔디가 그 자리를 메꿨고 초가지붕은 기와로 바뀌었다. 세월이 지나면서 시인이 살던 집은 조금씩 모습을 바꿨지만, 생가 안의 물품은 그 시절 그대로다. 가지런히 놓여 있는 흰 고무신과 책상 위의 잘 익은 감을 보고 있으면 마치 시인이 살아 돌아올 것만 같다. 방문 위에 걸려 있는 목판에는 인병선 시인의 작품 ‘생가’가 새겨져 있다. “있었던 일을 늘 있는 일로 하고 싶은 마음”이란 구절에서 너무 빨리 세상을 떠나버린 남편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이 느껴진다. 우리의 만남을/ 헛되이/ 흘려버리고 싶지 않다// 있었던 일을/ 늘 있는 일로 하고 싶은 마음이/ 당신과 내가 처음 맺어진/ 이 자리를 새삼 꾸미는 뜻이라// 우리는 살고 가는 것이 아니라/ 언제까지나/ 살며 있는 것이다. ―인병선, ‘생가’ 관람 정보 주소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신동엽길 12 전화 041-833-2725 관람시간 09:00~18:00 (11월~3월은 17:00까지) 휴관일 매주 월요일, 명절 입장료 무료
- 2017-11-29 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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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북선의 고향 ‘여수’
- 정유년인 올해는 정유재란(1597.1~1598.12) 발발 420주년이다. 임진왜란으로부터는 427주년. 임진왜란이 치욕의 역사였다면, 정유재란은 왜군이 충남 이북에 발도 못 붙인 구국승전의 역사다. 그 전적지는 진주, 남원, 직산 등 삼남지방 곳곳에 있지만 옛 자취는 찾기 어렵다. 뚜렷한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은 왜군이 남해안을 중심으로 농성하던 성터들이다. 주로 경남 중동부 해안에 밀집한 왜성 터들도 오랜 세월 허물어지고 지워져 갈수록 희미해져간다. 왜성이라는 이유로 사적지 지정이 해제된 탓이다. 근래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그 중요성에 눈을 떠 옛 모습대로 복원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는 아직도 방치되어 있다. 치욕의 역사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다. 더 늦기 전에 지금 모습이라도 남겨둬야 한다.더 사라지고 훼손되기 전에 역사 현장 보전의 필요성을 일깨우고, 정유재란의 역사적 의미를 천착하기 위해서라도 그 흔적을 돌아볼 필요가 있어 에 게재하기로 한다. 거북선 없는 이순신, 이순신 없는 거북선, 거북선과 이순신 없는 임진왜란. 이 세 가지 가정 가운데 어느 것 하나도 성립될 수는 없다. 이순신이 없었으면 거북선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거북선이 없었으면 이순신이 빛나기 어려웠던 것처럼, 그 둘이 없었다면 임진왜란은 너무도 부끄러운 국난이 되었을 것이다. 거북선이 이순신의 창제냐 모방이냐, 이런 논란은 아무래도 좋다. 중요한 것은 이순신이 거북선을 만들어 남해바다의 제해권을 틀어쥐었던 사실이다. 조선수군이 왜 수군을 만나는 대로 때려 부수어 병참선을 차단해줬기 때문에 조선은 망국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또 한 가지는, 큰 그릇을 알아보고 발탁한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의 혜안이었다. 아무리 훌륭한 장수라도 이순신이 그때 그 자리에 있지 않았다면 무슨 쓰임새가 있었겠는가. 서애는 이순신을 발탁하기 위해 온갖 지략을 다 썼다. 종6품 정읍(井邑) 현감을 정3품 전라좌수사로 등용해 남해바다를 맡기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 가정만은 상상하기도 싫다. 전라좌수사는 지금으로 치면 전라도 동쪽 해역을 책임지는 해군 함대 사령관이다. 해역이 넓은 경상도와 전라도에는 각각 좌우 수사를 두었다. 충청, 경기 같은 곳에는 한 사람에게 책임을 맡겼다. 남해는 그만큼 중요한 바다였다. 지금도 낙하산 인사라는 게 있어 종종 물의가 일어나지만, 생각보다 합리적인 사회였던 조선시대에 일곱 계단을 한꺼번에 뛰어오르는 인사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위관장교가 일거에 별 둘의 장군이 된 벼락출세를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우의정 겸 이조판서 류성룡의 이순신 발탁인사 안이 올라가자 조정은 벌집을 쑤신 듯 시끄러웠다. 물리치라는 상소가 빗발쳤지만 임금의 신임이 깊었던 류성룡이 있어 인사는 성사되었다. 육군에서 뼈가 굵은 장수를 해군제독에 발탁한 것도 신묘한 인사였다. 이순신이 전라좌수영에 부임한 것은 임진왜란 발발 14개월 전인 1591년 2월이었다. 다른 수군 장수들이 무사안일로 날밤을 보낼 때 그는 왜적과 싸워 이길 궁리에 골몰했다. 좌수영 관할 지역인 오관(순천·보성·광양·흥양·낙안) 오포(방답·여도·사도·녹도·발포)를 순회하면서 전쟁 대비 태세를 점검하고, 전선 건조와 수리를 서둘렀다. 서류상의 명단뿐인 수군 병력을 실 전력으로 만들고, 전술 개발과 군기 확립을 위한 훈련을 서둘렀다. 그 가운데 거북선을 건조한 일은 장비가 적토마를 얻은 일에 비유될 일이었다. 거북선이 왜군에게 얼마나 무서운 배였는지 증명하는 기록들이 이를 뒷받침한다. “…이윽고 적선(거북선)은 어립선(御立船)을 향하여 쳐들어와 활을 마구 쏘아 우군을 죽였으며, 웅수(熊手)로 우리 배를 끌어당기고 연초호(煙礁壺)를 발사해 우리 배를 불태웠다. 이리하여 적에게 배를 빼앗긴 자도 있었으며 바다에 뛰어든 자도 있었다. 적이 이런 사람들을 창으로 찌르고 긴 칼로 쳐 죽이고 활을 쏘아 우군 전사자가 50여 명에 이르렀다.” 라는 일본 문헌에 전해져 오는 사천해전 상황이다. 어립선이란 사쓰마(薩摩) 영주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기함을 말하며, 웅수란 자루가 긴 낫, 연초호란 폭탄 비격진천뢰를 뜻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기함의 피해가 이런 상황이었으면 다른 배의 사정은 볼 것도 없는 일이다. 거북선은 적진에 돌진해 부딪쳐 깨트리는 돌격전함이었다. 조총 위주의 단병접전((單兵接戰)을 주 전술로 삼는 왜 수군으로서는 어떻게 해볼 방법이 없었다. 좌우 양현에 열둘, 이물(선수)에 둘, 고물(선미)에 하나씩 화포구를 두어 포나 활을 쏠 때만 창을 열고, 볼일이 끝나면 닫아버렸다. 사격 목표를 찾을 수 없는 적선의 조총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두껍고 단단한 선재를 사용해 웬만한 포화에도 끄떡없었다. 이라는 일본 문헌에는 “적의 배 가운데 전체를 철판으로 싼 것이 있는데, 우리 대포가 그 배를 부술 수가 없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무서운 용머리와 좌우 양현에서 불을 뿜고, 지붕이 쇠 송곳으로 된 철갑선”이라고 표현되었을 만큼 거북선은 그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처음 거북선을 출동시켜 시마즈 군을 깨트린 사천해전 후 임금에게 보고한 장계 에서 이순신은 거북선의 성능을 이렇게 자랑했다. “신은 섬 오랑캐 왜놈들이 쳐들어올 것을 염려하여 거북선을 만들었습니다. 앞에는 용머리를 달고, 그 아가리로 대포를 쏘았습니다. 등판에는 쇠못을 박았습니다. 안에서는 밖을 내다볼 수 있어도 밖에서는 안을 들여다볼 수 없습니다. 비록 왜적선이 수백 척이라 할지라도 그 가운데로 쳐들어가 포를 쏠 수 있습니다. 이번에는 돌격장이 타고 나왔는데 먼저 거북선으로 하여금 전선 가운데로 돌진시켜 천(天)·지(地)·현(玄)·황자(黃字) 등 여러 총통을 쏘았습니다.” 수백 척의 적진 한가운데로 돌진해 대오를 흩트리며 좌충우돌 적선을 깨트리고 불 지르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통쾌하다. 에 수록된 그림을 보면 거북선은 용머리가 두 개나 달린 기괴한 모습을 하고 있다. 위의 것은 화포구로 쓰였고, 아래 것은 적선을 당파(撞破)하는 데 쓰였다. 크고 단단한 용머리로 적선을 들이받아 옆구리에 구멍을 내는 용도였다. 이순신은 마치 전쟁이 터질 날을 알고 준비한 사람 같았다. 때맞추어 거북선을 건조하고 포격실험을 마친 것이 왜적 침입 하루 전날이었다. 에는 거북선 건조 이야기가 몇 번 나오는데, 임진년(1592년) 2월 8일 “거북선에 쓸 돛베 29필을 받았다”는 게 처음이었다. 4월 11일 일기에는 “순찰사(이광)의 편지와 별도의 목록을 순찰사 군관 남한이 가져왔다. 이날 비로소 돛베를 만들었다”라고 썼다. 거북선 제작에 상부의 지원이 일부 있었음을 짐작케 하는 단서다. 3월 27일에는 “거북선에서 대포 쏘는 것을 시험했다”라고 씌어 있었고, 4월 12일에는 “거북선에서 지자포, 현자포 쏘는 것을 순찰사 군관이 살펴보고 갔다”라고 썼다. 상급관 인사의 임석으로 보아 공식 사격훈련으로 볼 수 있다. 거북선 제작 총책은 조선기술이 뛰어난 군관 나대용(羅大用)이었다. 좌수사로 부임하자마자 전선(戰船)부터 살펴본 이순신은 크게 낙담했다. 장부에는 분명 30여 척의 전선이 있는 것으로 적혀 있었지만, 실전에 쓸 수 있는 것은 5척을 넘지 않았다. 180년 전 태종 때 있었다는 귀선(龜船) 만들기로 작심한 계기일 것이다. 그때부터 이순신은 전선 건조에 심신의 에너지를 쏟아 붓는다. 좌수영 산하에는 선소(船所)가 셋 있었다. 좌수영 본영 선소, 순천부 선소, 방답진 선소. 이 세 곳에서 각각 한 척씩 거북선을 만들기로 하고, 그 책임을 나 군관에게 맡긴 것이다. 물론 판옥선도 같이 만들었다. 그리하여 임진년 5월 경상우수사 원균의 요청을 받고 24척을 거느리고 출전할 수 있었다. 거북선은 목질이 단단하고 두꺼운 목재를 사용해 돌격선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다. 거북선의 바닥재는 소나무, 비자나무, 굴피나무, 졸참나무, 느티나무 등 목질이 단단한 목재였다. 충격에 강한 설계와 나무못을 쓴 것도 배를 한층 견고하게 했다. 전문가들의 비교연구에 따르면 목재의 두께에도 큰 차이가 있었다. 우리 판옥선 두께는 4치[寸]였다. 왜선 아타케부네(安宅船·3치)보다 한 치가 두꺼웠다. 골조를 요철(凹凸)로 짜 맞춘 목공기술도 한몫했다. 배 바닥이 회전에 용이한 평저선이어서 첨저선인 왜선에 비해 속도는 다소 느려도 방향 회전이 빨랐다. 왜선들은 속도가 빠른 대신 배를 돌리려면 회전 반경이 커 행동이 둔했다. 돛의 성능도 달랐다. 외돛배인 왜선은 순풍에만 쓸 수 있었지만, 거북선과 판옥선은 쌍돛배여서 역풍에도 사용할 수 있었다. 일본 문헌 는 “조선 사람의 해전은 육전과는 크게 다르다. 또 배가 크고 빠를 뿐 아니라 누각과 뱃전까지도 튼튼하고 두꺼워 우리 배가 부딪치면 모두 부서진다”라고 기록했다. 는 “조선수군의 배가 쇠로 포장되어 포로도 파괴할 수 없었다”라고 했다. 그들이 무서워한 또 다른 무기는 조선의 화포였다. 특히 구경이 13cm나 되는 천자총통이 발사하는 대장군전, 대완구가 쏟아내는 비격진천뢰의 살상력은 엄청났다. 직경이 30cm 가까운 비격진천뢰는 철구 안에 화약과 쇠 파편이 들어 있어, 왜선 갑판에 떨어져 폭발하면 수많은 적병이 죽어나갔다. 조선 판옥선과 거북선은 그런 총통과 천뢰를 사방에서 발사해 적선이 접근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지금 남아 있는 선소 유적은 순천부 선소와 방답진 선소뿐이다. 본영 선소는 좌수영 본영이었던 진남관(鎭南館) 바로 아래 있었는데, 지금은 매립되어 ‘이순신 광장’이 되었다. 순천부 선소는 여수시청에서 남쪽으로 한 블록 거리의 해안, 가막만이 북쪽으로 깊숙이 파고든 만(灣)의 안쪽에 자리 잡고 있다. 당시는 여수가 순천부 관할이어서 그렇게 불렸는데, 고려 때부터 배를 만들고 수리하던 곳이어서 지금도 ‘선소마을’로 통한다. 방답진 선소는 돌산도 군내리 방답진 터에 아직 유허가 있다. 선소마을은 참으로 오묘한 지리를 가진 곳이었다. 이른 아침 숙소를 나와 택시를 타고 10여 분 달렸을 뿐인데 운전기사가 “다 왔소” 했다. 바다가 보이지 않는 곳에 선소가 있으랴 했더니, 바로 길 건너 숲속에 선소 유적이 숨어 있었다. 바다가 마치 호수 같았다. 사람이 가랑이를 벌리고 선 형상의 여수반도 한가운데, 국소에 해당하는 입지가 참으로 절묘했다. 남쪽으로 돌산도, 백야도, 개도 같은 섬들이 점점이 떠 있어 가막만 전체가 호수 같은 바다였다. 국소에서 또 하나의 작은 반도(망미산 돌출부)가 뻗어나가 선소 바다를 완전히 가려준다. 바다에서 보면 뭍이고, 뭍에서 보면 호수 같은 바다를 끼고 있다. 해발 100m도 채 못 되는 망미산은 이순신이 기마병을 훈련시키던 곳이다. 장군은 산 정상에 동백말채를 꽂아두고 “이 말채가 살아나면 내 영혼도 살고, 죽으면 내 영혼도 죽은 것이다”라고 했다는데, 지금도 살아 있으니 민족의 태양이 된 까닭을 알겠다. 선소마을 방문자를 처음 맞아준 것은 거북선을 만들던 굴강(掘江)이었다. 오목한 항아리 안처럼, 둘레에 석축을 쌓고 입구만 열어놓은 장난감 같은 항구 수면이 아침 해에 반짝이고 있었다. 강당 서너 개 넓이로 보아 거북선과 판옥선을 동시에 건조할 수 있는 규모로 보였다. 굴강 왼편으로는 근래에 복원했다는 대장간, 그 옆으로 세검정과 군기고가 자리하고 있었다. 대장간은 선재를 자르고 깎고 다듬는 연장을 만들던 곳이고, 세검정은 선소 지휘부, 군기고는 무기창고로 쓰였다 한다. 특이한 것은 세검정과 군기고의 기둥과 서까래, 마루, 문짝 등이 모두 검정색이라는 사실이다. 선소 위치가 쉽게 눈에 뜨이지 않게 하려는 배려 같았다. 세검정 앞 해변에는 계선주라는 돌기둥 하나가 외로이 서 있다. 배를 매던 용도라고도 하고, 벅수 역할까지 겸하던 것이라고도 한다. 돌장승 벅수는 선소마을 입구 도로변과 마을 안길에도 여러 기가 서 있다. 모두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왜적과 잡귀의 근접을 퇴치하려는 민간신앙과도 무관치 않으리라. 여수는 이순신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곳이다. 출셋길에 들어 국난의 전쟁을 맞은 곳이고, 가장 오래 머문 곳이었다. 소문난 효자였던 그가 어머니까지 모시고 와 가까이에서 자식의 도리를 다하려고 애쓴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여수 곳곳에 그의 발자취가 남아 있다. 여수 버스터미널에서 진남관이 있는 도심부로 이어지는 간선도로 이름이 ‘좌수영로’다. 국보 304호인 진남관을 지나칠 수는 없었다. 성종 시대 수군절도영을 둔 이래 고종 대에 이르기까지 400년 넘게 여수는 남해 방비의 중심지였다. 그 본영이 진남관이다. 1599년에 지어진 좌수영 객사 건물로, 현존 관아 건물로는 가장 크다. 이순신 시대에는 그 아래 망해루가 좌수영 본영이었다. 진남관 길 건너에는 고소대(姑蘇臺)가 있다. 바다를 굽어보는 언덕은 좌수사의 장대로도 쓰였다는데, 지금은 유명한 타루비(墮淚碑)와 좌수영대첩비가 있는 곳이다, 보물 1288호로 지정된 타루비는 글자 그대로 눈물을 흘리는 비석이라는 뜻이다. 좌수영 수졸들이 장군의 붉은 마음을 잊지 말자고 돈을 모아 세운 비석이다. 그 뜻이 비문에 선명하다. “영하(營下) 수졸들이 통제사 이순신 공을 위하여 짧은 비석 하나를 세우고 타루(墮淚)라 이름 하나니….” 졸병들이 사령관의 충절을 기려 불망비를 세운 일이 우리 역사에 있었던가! 타루비 옆에는 보물 571호로 유명한 좌수영대첩비가 서 있다. 광해군 시대에 세워진 이 비석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기로 이름났다. 높이 3.6m에 폭이 1.3m다. 비문은 이항복이 짓고 글씨는 명필 김현성이 써서 더욱 돋보였던 이 비석과 타루비는 명량대첩비와 함께 1942년 철거되어 행방을 모르다가, 광복 후 경복궁 근정전 앞뜰에 파묻힌 것이 발견되어 제자리로 돌아왔다. 진남관 뒷산은 종고산(鍾鼓山)이다. 여러 전설을 품은 여수의 진산인데, 특히 이순신과 관련한 전설로 유명하다. 무음산이란 별명을 가졌던 이 산은 난리 때 3일간 울었다 한다. 그 까닭은 이순신의 한산대첩을 알린 낭보였다는 설도 있고, 노량해전에서 순국한 비보를 전한 울음이었다고도 한다. 진남관에서 200여 m 바다 쪽으로 내려서면 바로 이순신 광장이다. 한 손에 칼, 한 손에 북채를 든 거대한 동상에 ‘민족의 태양’이라는 후세인의 헌사가 적혀 있다. 로터리 건너 바다에 면한 실물대의 거북선 모형은 방문자들의 촬영 욕구를 자극한다. 광장을 돌아 다시 북쪽으로 방향을 틀면 우리나라 최초의 이순신 사당으로 유명한 충민사(忠愍祠) 입구다. 1601년 이항복이 선조에게 품신해 통제사 이시언(李時言)이 세운 최초의 이순신 사당이다. 그의 부장 이억기(李億祺), 안홍국(安弘國)까지 함께 모셔져 있다. 장군이 가장 신뢰했던 이억기는 장군이 영어의 몸이 된 사이 칠천량 해전에서 순국했다. 선조 어가를 호종해 의주까지 갔던 안홍국 역시 안골포 해전에서 산화한 충신이다.
- 2017-10-08 1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