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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부는 주고 받음이다 Part 3] GIVE만이 기부가 아닌 시대
- 아무 조건 없이 주는 것이 기부라지만, 주는 것이 있는데 받는 것까지 있다면 훨씬 더 좋은 법이다. 이제는 기부도 그렇게 변하고 있다. 100점 만점에 35점. 전 세계 145개 조사 대상국 중 64위. 11월 영국 자선지원재단(CAF)이 발표한 ‘세계 기부 지수 2015’에 드러난 대한민국의 기부활동 성적표다. 기부 액수가 아닌 기부활동에 중점을 둔 이 조사에서 우리나라는 ‘기부에 참여했다’는 응답 비율이 15만 명 중 34%인 것으로 조사됐다. 빼어난 성적표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의미가 없는 것도 아니다. 2010년 동일한 조사에서 ‘기부에 참여했다’는 응답 비율이 27%로, 153개국 중 81위를 기록한 것과 비교하면 7%포인트 오른 수치이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꾸준히 기부활동이 늘어나고 있음을 알려준다. 미국과 영국 같은 선진국에서 기부는 소외된 사람을 위해 자발적으로 실천하는 자연스러운 문화로 자리 잡았다. 아직 우리나라의 움직임은 그에 비해 미미하다고 할 수 있지만, 기부활동에 대한 욕구가 조금씩 사회 곳곳에 나타나고 있다. 매스 미디어와 통신의 발달은 기부의 문화도 새롭게 변화시키고 있다. 과거에는 ‘돈이 있는 사람이 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팽배했던 기부가 이제는 통신의 발달과 함께 일상생활로 침투하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기부는 ‘특별함’이 아닌 ‘일상 또는 습관’으로 다가오고 있다. 과거에 누군가가 좋은 마음으로 기부를 하더라도 ‘이미지 관리를 위해’, ‘미래의 비즈니스를 위해’라는 시선으로 기부를 인식했던 시기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남’이 아닌 ‘내’가, ‘돈’이 아닌 ‘실천’으로 손쉽게 기부를 하고 있다. 2015년, 기부는 어떻게 변화하고 있을까. ‘기부&테이크(Take)’로 진화하는 기부 문화 기부 문화에도 새로운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기부의 형태와 방법이 다양해지고 있는 것. 스마트한 시대답게 소셜 기부와 크라우드 펀딩(Crowd Funding)을 이용한 기부가 늘고 있다. 또한 기부를 한 만큼 원하는 물품을 받을 수 있는 이른바 ‘기부&테이크(Take)’ 형태의 기부가 늘고 있다. 이와 같은 변화는 기부자의 경제적 상황과도 관련이 있다. 아름다운재단 기부문화연구소가 지난해 10월 제14회 기부문화심포지엄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사람들이 기부를 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나의 경제적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몰라서(36.4%·2013년 기준)’였다. 또한 사회복지공동모금회 나눔연구소 연구센터가 올해 발표한 도 이를 뒷받침한다. 자료에 따르면 한국 사회의 개인 기부 참여는 전반적으로 30% 수준을 유지하고 있지만, 경제 여파로 인해 여전히 높지 않은 수준이며, 심지어 감소하는 추세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이유로 소셜 기부는 경제적인 부담이 덜하고, 참여하기 쉬운 형태의 기부 문화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소셜 기부는 SNS상에서 댓글을 달거나 공유를 하면 기부에 참여하게 되는 간단한 방식부터, 특별한 플랫폼이나 애플리케이션(이하 앱) 등을 이용하는 방식까지 다양해지고 있는 추세다. 이러한 소셜 기부는 다양한 캠페인을 홍보하는 데 용이하고, 1원부터 100원까지 소액으로 시작할 수 있어 적은 돈으로도 기부를 실천할 수 있다는 인식을 심는 데 한몫했다. 크라우드 펀딩을 이용한 기부는 대부분 어떠한 물품을 구매했을 때, 그 수익의 일부를 기부하는 형식으로 자리 잡고 있다. 구매자인 동시에 기부자가 되는 셈. 기부에 대한 합당한 보상품을 받고 선행도 할 수 있는 1석 2조의 효과를 누리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비프렌드, 마리몬드 등이 이러한 방식으로 온정을 전하고 있다. 앱을 이용한 방식도 있다. 앱만 설치하고 실행만 해도, 기부자는 자신의 돈을 전혀 쓰지 않고 기부에 참여할 수 있다. ‘빅워크’라는 앱은 자신이 걸어 다닌 만큼 기부가 된다. 앱을 설치하면 GPS를 이용해 사용자의 걸음 거리 10미터당 1원이 기부된다. 이런 소셜 기부와 크라우드 펀딩을 이용한 기부가 사랑을 받는 것은 경제적인 부담이 덜하다는 이유뿐만이 아니다. 기부금이 어떠한 방식으로 어떠한 상황에 놓인 수혜자에게 돌아가는지 직접 확인할 수 있다는 것도 이러한 방식의 기부가 증가하고 있는 까닭이기도 하다. 2014년 위키트리 설문조사 결과, ‘기부를 했을 때 자신이 낸 기부금의 사용 경로와 과정을 알고 싶다’고 말한 응답자는 68%에 달했다. 기존의 전통적인 방식의 기부는 후원단체에 기부를 하면 그뿐, 기부를 한 금액이 어디에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 몰라 기부에 대한 보람을 느끼기 힘들었다. 그러나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해 기부금이 쓰이는 ‘마리몬드’와 하반신 장애 아동을 위해 기부를 하는 ‘빅워크’와 같은 방식은 그 쓰임이 분명해 기부자로 하여금 그 결과물에 대한 보람을 느낄 수 있도록 해준다. 미국의 크라우드 펀딩은 2008년부터 시작돼 공익적 모금에 성공하고 있는데, 필요한 자금을 모아주는 대신 3~5%의 수수료를 받는다. 이후에도 세계적으로 200여 개 소셜 펀딩 업체가 나타나 성공을 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인디고고’와 ‘킥 스타터’가 있다. ‘인디고고’는 2008년 세워진 회사로 전 세계 누구나 모든 분야에 대해 제안을 할 수 있는데, 결과적으로 2만7000여 개의 프로젝트를 성사시킨 바 있다. 2009년 설립된 킥스타터는 7만5000달러의 모금을 해 많은 이들의 꿈을 이뤄주기도 했다. 이들은 매년 모금액이 4배 이상 성장하며 비약적인 발전을 하고 있다. 심영훈 서울시복지재단 자원개발팀장은 “한국의 집단주의 문화와 결합한 소셜 기부가 발전의 궤적을 그려 나간다면 새로운 기부문화로 자리 잡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의 의견”이라며 “쌍방향 소통과 실시간 정보 공유 등 소셜 미디어의 특징과 한국 네티즌들의 적극성, 보상을 통한 참여유도 측면 등을 고려할 때, 소셜 기부는 향후 우리 사회의 새로운 기부 문화 트렌드로 주목받게 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기부 문화 변화의 중심에 신중년 있다 경제적으로 여유롭고, 문화적 욕구가 충만한 신중년들이 기부 문화의 중심에 있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 나눔연구소 연구센터가 올해 발표한 에 따르면, 2011년에 비해 2013년에 전반적으로 기부 참여 비율이 감소했지만, 유일하게 60세 이상의 참여율이 24%에서 25.4%로 약 1.4%포인트 상승한 것으로 조사됐다. 기부나 봉사의 현장에 신중년들의 발길이 늘고 있는 것을 실감하는 곳이 있다. 사람들의 기증품을 팔아 수익의 일부를 기부하는 ‘아름다운가게’다. ‘아름다운가게’의 전승희 간사는 “시간기부나 재능기부의 형태로 자원 활동을 하시는 신중년이 늘어나고 있다”며 “이분들은 장기적이고 정기적으로 참여와 기부를 한다”고 말했다. 신중년의 기부 참여가 늘고 있는 이유에 대해 전 간사는 “사회 참여에 대한 순수한 욕구가 있고, 기증·기부 문화 등의 공익 문화와 가치를 전파하는 데 자부심을 느끼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아름다운가게의 정기 활동자 중 45%가 40~60대 이상으로 절반 가까이 차지하고 있다. 젊은 층에 비해 삶의 변동이 적고 시간적 여유가 있는 신중년이 기부 문화 선도에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선 셈이다. 전 간사는 “신중년층은 재능기부나 참여의 형태로 지역에서 나눔을 실천하고, 지역 커뮤니티 발전에 대한 의견을 참여하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 2015-12-22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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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명철의 스포츠 인물 열전] ‘최고의 스트라이커’ 이회택
- 스포츠 올드 팬들에게 우리나라 축구 선수 계보를 살펴보라고 하면 차범근과 함께 빠뜨리지 않고 등장할 인물이 있다. 스포츠 올드 팬들이 거의 공통적으로 이야기할 한국 축구 선수 계보는 일제 강점기 유일하게 올림픽(1936년 베를린 대회)에 출전한 김용식을 첫머리로 ‘아시아의 황금 다리’ 최정민에 이어 이번 호의 주인공인 이회택(李會澤)을 거쳐 차범근 그리고 신세대 팬들에게 익숙한 홍명보, 박지성, 손흥민 등으로 이어질 것이다. 이회택은 1960~1970년대 한국 축구가 세계무대를 향해 나아가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번번이 좌절했던, 가슴 아픈 시대를 대표한다. 월드컵은 물론 올림픽에도 출전하지 못했고 직계 후배인 차범근처럼 국외 리그에도 진출하지 못했다. 한국 축구 암흑기에 활동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의 모든 올드 팬은 그의 이름 석 자를 한국 축구와 함께 떠올린다. 그리고 생각한다. “이회택이 10년만 늦게 태어났더라면, 아니 요즘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물론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1960년대 중반 이후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축구 팬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다시피 한 이회택. 한국 축구 2세대 스트라이커인 이회택은 요즘 기준으로 보면 큰 체격이 아니다. 1972년 6월 펠레가 이끄는 브라질의 명문 클럽 산투스가 내한해 한국 대표팀과 친선경기를 가진 뒤 찍은 사진을 보면 이회택은 대표적인 단신 공격수인 김진국(프로필 165㎝)과 키가 거의 같다. 이 경기에서 산투스가 3-2로 이겼는데 펠레의 통산 1204번째 골이 나왔고 한국은 이회택과 국가 대표가 된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은 차범근이 골을 넣었다. 한국 축구 스타 계보를 잇는 이회택과 차범근은 이 경기 직전인 그해 5월 방콕에서 열린 제 5회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한국을 준우승으로 이끌었다. 4-1로 이긴 이 대회 예선 B조 크메르(오늘날의 캄보디아)와의 경기에서 이회택과 차범근은 나란히 한 골씩을 기록했다. 그때 기준으로 베테랑인 이회택(26세)과 차범근(19세)의 신구 조화는 축구 팬들의 기대를 한껏 모았다. 동북고 3학년인 1965년 청소년 대표팀에 뽑힌 이회택은 그해 4월 도쿄에서 열린 제 7회 아시아청소년선수권대회에 출전했다. 그러나 한국은 요즘의 시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성적인 예선 1승 3패, 조 꼴찌로 탈락했다. 태국에 0-1, 버마(오늘날의 미얀마)에 0-2, 말레이시아에 0-1로 지고 인도에만 4-1로 이겼다. 국내에서는 초고교급 실력을 자랑하던 이회택은 이듬해인 1966년 제 5회 방콕 아시아경기대회에 대비한 국가 대표팀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그해에 대한축구협회는 대표팀 선발 문제를 놓고 크게 분란이 일었다. 그 무렵 종종 있는 일이었다. 동남아시아 지역 친선 대회인 메르데카배대회에서 4위, 방콕 아시아경기대회에서 예선 탈락의 쓴잔을 마셨다. 방콕 대회에서는 태국에 0-3, 버마에 0-1로 졌으니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 예선에 대비해 세대교체를 하고 꾸린 대표팀이라고 해도 협회는 할 말이 없게 됐고 이회택은 활약할 기회조차 잡지 못했다. 이제 문제의 멕시코시티 올림픽 아시아 지역 예선이다. 이 예선은 1967년 9월, 일본 스포츠의 심장으로 불리는 요요기 국립경기장(1964년 도쿄 올림픽 주 경기장)에서 벌어졌다. 한국은 이회택을 비롯해 골키퍼 이세연과 수비수 김호, 김정남, 김정석, 공격수 정병탁, 김창일 등 패기만만한 멤버들이 1948년 런던 대회 이후 20년 만의 올림픽 출전에 도전장을 던졌다. 한국은 자유중국(오늘날의 대만)을 4-2, 레바논을 2-0, 월남을 3-0으로 물리치고 같은 3승의 일본과 맞붙었다. 사실상의 결승이었다. 일진일퇴의 숨 막히는 접전 끝에 두 나라는 3-3으로 승패를 가리지 못했다. 이 경기에서 이회택은 0-2로 뒤진 후반 3분, 1-2로 따라붙는 추격 골을 넣었고 가마모토 구니시게(釜本邦茂)는 전반 13분과 후반 21분 각각 선제골과 3-2로 달아나는 골을 기록했다. 1946년생인 이회택과 1944년생인 가마모토의 축구 인생이 이 경기에서 갈렸다. 한국은 필리핀, 일본은 월남과 경기를 남겨 놓고 있는 가운데 한국은 골득실차에서 +7로 +21의 일본에 크게 뒤져 있었다. 일본이 필리핀을 15-0이라는 기록적인 스코어로 이겼기 때문이다. 15골 이상으로 이겨야 한다는 부담 속에 한국은 필리핀을 5-0으로 이긴 반면 일본은 월남을 1-0으로 누르고 본선 티켓을 손에 넣었다. 1969년 10월 서울에서 열린 1970년 멕시코 월드컵 아시아-오세아니아 예선에서 이회택은 가마모토 구니시게와 다시 한 번 겨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가마모토 구니시게는 부상 때문에 출전하지 않았고 한국은 1승 2무 1패로 2승 2무의 호주에 밀려 탈락했다. 이회택은 A매치 32골의 기록을 남기고 그라운드를 떠났다. 1960~70년대 한국 축구의 전반적인 경기력이 조금만 더 높았다면 그의 이력은 올림픽과 월드컵 출전 등으로 더욱 화려했을지 모른다. ◇ 신금단 부녀 상봉에 이은 이회택 부자 상봉 이회택은 할머니의 보살핌을 받고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는 한국전쟁의 와중에 의용군이 돼 북한으로 갔고 어머니는 재가했기 때문이다. 부모의 정을 모르고 자란 그에게 축구는 최고의 친구였고 부자 상봉의 큰 선물까지 안겼다. 이회택은 1989년 10월 싱가포르에서 열린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아시아 지역 최종 예선에서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 이탈리아전 1-0 결승 골의 주인공인 북한 박두익 감독으로부터 네살 때 헤어진 아버지의 생존 소식을 확인했다. 이회택은 이 예선을 3승 2무로 통과해 한국의 세 번째 월드컵 출전을 이끌며 지도자로서도 축구사에 한 획을 그었다. 이듬해인 1990년 열린 ‘남북통일축구경기‘에 이회택은 남측 선수단 고문 자격으로 방북해 10월 10일 평양에서 꿈에도 그리던 아버지 이용진씨와 감격적인 상봉을 했다. 1964년 도쿄 올림픽 때 신금준-금단(1960년대 초반 육상 400m·800m 세계 기록 보유자) 부녀 상봉, 1990년 2월 삿포로 동계 아시아경기대회 때 한필성-필화(1964년 인스브루크 동계 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3000m 은메달리스트) 남매 상봉에 이은 스포츠계 남북 핏줄의 만남이었다. >>>글 신명철 편집위원, 전 편집국장 smc6404@naver.com
- 2015-12-22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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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존경받기 위한 안간힘보다 바른 자세가 더 중요합니다”
- “많이 행복합니다. 지금까지 어렵게 여기까지 왔는데, 작년부터 조금씩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으니까요. 많이 힘들지만 됐다, 더 다른 꿈을 꿀 수 있겠다 싶어요.” 행복하다는 구하주(具河周·69) 뉴시니어라이프 회장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얼굴에서부터 그런 기쁨이 선명하게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니어 교육과 함께 패션과 관광을 잇는 새로운 사업 영역을 준비하느라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구 회장의 남다른 보람과 성취를 만나본다. 글 김영순 기자 kys0701@etoday.co.kr 사진 오병돈 프리랜서(Studio Pic) 사회적기업인 뉴시니어라이프는 시니어들을 위하여 패션과 교육, 공연, 매니지먼트 등 종합적인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시니어 모델 교실, 시니어 패션쇼와 같은 프로그램과 함께 시니어 패션 제품, 시니어 교육 등등의 사업도 전개하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시니어와 패션이라니? 일견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 생각 자체가 편견이라는 것을 구하주 회장과 뉴시니어라이프는 증명해 보이고 있었다. “제가 이 사업을 진행하면서 지금까지를 생각해 보면, 저도 사람들과 함께 똑같이 배우면서 해왔어요. 바른 자세, 바른 마음가짐을 제대로 지키면 인생이 잘 풀리게 된다는 것은 후반기 인생에서 더 중요한 철칙이에요. 바로 그걸 제가 회원들에게 가르쳤다기보다는 회원들과 함께하는 과정을 통해서 경험을 쌓고 배웠다고 생각합니다.” 구 회장은 서울 명동과 압구정동에서 꽤 잘 나가는 패션디자이너였다. 30년 동안 부티크를 운영하며 틈틈이 패션쇼 디렉터와 패션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던 그는 1999년에 실버산업과 노인심리를 공부하게 됐다. 졸업 후 ‘실버산업전문가포럼’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초대 회장을 맡았다. 2006년 킨텍스 국제실버박람회에서 큰 반향을 일으킨 시니어패션쇼를 공연한 후 참가했던 모델들에게 등 떠밀리다시피 해서 뉴시니어라이프를 설립하게 됐다. 60세 넘어서는 자신이 한 살이라는 생각으로 살아야 구 회장은 스스로 잘하는 게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자신이 갖고 있는 열정, 희망, 도전이 20년 전이나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조금도 사그라들지 않았다는 점을 꼽을 수 있었다고 말한다. 아마도 그 원동력이 없었으면 ‘맨땅에 헤딩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사회적기업을 운영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게 시니어 대상 교육이에요. 왜냐하면 본인이 50~60년 동안 자신의 인생을 살아왔고 경험했기에 스스로의 생각을 가지고 계시거든요. 그런데 제가 ‘바꿔야 한다’라고 말하면, 그게 쉽게 바뀌기가 어렵죠. 그래서 저는 60세가 넘었다면, 그때부터 한 살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기분으로 시작해야지 자신의 나이를 의식하면, 아무것도 이룰 수가 없어요. 지금까지 내가 가지고 있었던 습관, 지식, 문화를 포기하고 새로 시작하고 하나하나 쌓는다고 생각하면 100% 성공해요. 과거에서 벗어나야 하죠.” “걸음걸이만 봐도 그 삶과 인격이 보이는 걸요” 200여 명 정도 되는 뉴시니어라이프 회원 대부분은 60대 이상이다. 구 회장은 강의 형식이든 면담 형식이든 일주일 동안 이 모든 회원을 다 만난다고 말했다. 모든 회원들이 공부하는 과정을 쭉 지켜보면서 한 분 한 분을 마음속에 넣고자 한다. 어디를 조정하고 교육하고 도와줘야 하나를 생각하기 위해서다. 구 회장은 워킹에서부터 사람의 마음가짐과 생활태도를 알 수 있다고 말했다. 그것은 워킹 교육을 하는 동안 자연스럽게 발견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걸음걸이가 정신과 육체를 컨트롤하기 때문이에요. 예를 들어 키가 많이 크신 분들은 키가 큰 게 콤플렉스예요. 그래서 자꾸 웅크리게 되고, 어디 가서도 다리를 쭉 못 펴게 되죠. 그러다 보니 걸을 때 이분들은 몸이 먼저 나가요. 몸이 먼저 나가니, 걸음이 균형을 잡아주려고 하면 O자 걸음이 되는 거죠. 그리고 그런 자신의 모습을 알게 되면 우울해지죠.” 신체가 불균형하게 됐을 때, 균형을 잡아주기 위해 그 불균형함을 따라가게 되다 보면 불균형한 모양으로 걷게 될 수밖에 없다. 구 회장은 그렇게 잘못된 걸음걸이에서부터 이유를 알 수 없는 디스크, 어깨 통증 등 질병이 파생된다고 보았다. “우리 대부분은 살면서 내가 제대로 걷는지를 확인해 볼 수 있는 기회도 없고 시간도 없어요. 그러다가 나이가 들면 굳어지고 아픔이 시작돼요. 그러면 병원에 다니면서 검사하고 엑스레이 찍고 찜질방 가고…. 그런데 원인을 잘 모르죠. 나이가 들어 아프다는 건 체형 조건에 끌려 다녀서 나온 결과일 수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에게 병이 찾아오는 게 아니라, 우리가 병을 찾아간다고 표현할 수 있죠.” 나의 노화에 대한 패러다임을 바꿔라, 그래서 50~60세 사이에 자신을 변화시켜라. 그를 위해서 구 회장은 균형 잡힌 몸매와 걸음에 대한 문제를 심각하게 바라봐야 한다고 조언했다. 단호하게 목표를 향하는 시니어들은 너무나 많다 구 회장은 시니어가 대접받으려면 스스로가 정립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것은 조급함과 바쁨을 만들지 않는 생활 태도와 연결되어 있었다. “어떤 분을 보면 하루에 열 가지 이상의 일을 하고 있어요. 왜 그렇게 하느냐, 시니어는 불안하기 때문이에요. 안 해도 불안, 해도 불안. 내가 아프지 않나? 아파서 죽는 거 아니려나? 그래서 병원 가서 이상 없다고 하면 그게 또 이상한 거예요. 나는 분명히 아파야 하는데. 그러면 다른 데 가서 또 검사하고. 나쁜 것에 집착해요. 그리고 남이 뭘 한다고 하면 따라 하려고 하고. 그러다 보니, 나의 것이 없어요.” 확실히 상당수의 시니어들은 자신의 몸이 주는 신호, 주변의 변화에 의해 정서적 혼란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다. 구 회장은 그런 혼란을 겪지 않기 위해서는 목표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정말 내가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선별을 하시라고 말씀드려요. 그래서 저희 교육에서는 내가 어떻게 새 인생을 건강하게 다시 살 수 있을 것인지에 집중합니다. 교육을 할 때는 회원들이 거울을 반드시 보게 해요. 안 보고 싶어도 자신을 보게 하는 거죠. 거울을 보면서 자신이 잘못된 부분을 알게 되면, 스스로 젊어지고 예뻐지고 싶게 돼요. 그리고 노력하죠. 저는 그 순간이 너무 기뻐요.” 구 회장은 어렵고 낯설어하던 회원의 변화야말로 자신의 가장 큰 기쁨이라고 밝혔다. 일회성 이벤트로 끝나는 시니어 프로그램들과는 달리, 뉴시니어라이프는 분명한 목표를 제공하고 있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패션쇼라는 행사, 그리고 더 나은 모델이 되고 싶다는 소망이 회원들을 변화시키는 힘이다. “패션쇼를 할 때, 회원들을 무대에 세워놓으면 저는 굉장히 색다른 감정을 느껴요. 잘해서 그러는 게 아니에요. 많이 참여할 때는 80명을 쇼에 세울 때가 있거든요. 너무 기특한 거예요. 저분이 팔자로 걸었는데, 턴도 제대로 못했는데, 그 무대 위에서 그렇게 훌륭하게 변화하거나 잘하려고 애쓰는 걸 보면 안쓰럽고 너무 예쁜 거예요.” 광고시장에서 시니어 모델이 인적 자원으로 어필되는 이유 최근 광고 시장에서는 시니어 모델을 많이 기용하는 추세다. 구 회장은 우리나라 광고 시장에서 소비되는 시니어 모델들에게 너무 꾸밈이 많다고 지적했다. 그래서 구 회장은 모델들에게 욕심을 버려라, 예쁘게 멋있게 잘하려고 하다 보면 어색해진다고 교육한다. 나이가 들면 나이가 든 만큼 표정과 모습이 자연스러워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저는 우리나라 광고 시장에 불만이 많아요. 특히 보험회사 광고가 그렇죠. 거기 나오는 할머니들을 눈여겨보세요. 너무 불쌍하거나, 너무 인상이 안 좋거나. 정말 순수하고 인자하며 자연스러운 모델들이 많은데 왜 저런 사람들을 쓰는 걸까. 그 사람들이 생각하는 소비자들의 수준이 그 정도에 있는 걸까. 외국 광고들을 보면 자연스럽게 늙어가는 모델들이 나오거든요.” 수백 억 원으로도 못 받을 선물을 받으며 산다” 구 회장은 패션쇼를 1년에 20회가량 열고 있다. 너무 많지 않으냐고? 되레 많이 하면 할수록 좋다는 게 구 회장의 지론이다. “대충이 아니라 제대로 된 쇼를 하고 싶어요. 시니어들에게 숨골을 틔워주는 일이니까요. 저는 사람이 죽을 때, 들이쉬는 숨을 못 쉬어서 죽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내쉬는 숨을 못 쉬어서 죽는다고 하더군요. 우리가 가슴에 쌓여 있는 숨을 살면서 몇 번이나 내쉰다고 생각하세요? 우리는 위축되고 참고 억압하며 살면서 숨이 계속 쌓이고 쌓여요. 그래서 마침내 그 쌓인 숨을 못 쉬어서 죽는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쇼에 나오면 자신도 모르게 기가 생겨요. 메이크업, 예쁜 옷, 기가 막힌 음악, 나를 봐주는 관중…. 엔도르핀이 올라옵니다. 그러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쌓여 있는 숨을 토해내고, 한이 풀리게 되죠.” 시니어의 우울, 치매, 자살과 같은 어두운 미래를 없애는 풀이로서의 패션쇼. 그것은 구 회장 자신을 위한 힐링의 장이기도 하다. 그 순간이야말로 사회적기업이라는 열악한 상황을 이끌어가는 과정에서 겪는 말할 수 없는 어려움, 땀과 열정과 시간, 그 모든 것이 보상되는 순간이라는 것이다. 구 회장은 그 순간을 수백 억 원을 준다 해도 얻을 수 없는 감정이라고 표현했다. “쇼에 더 많은 사람들이 왔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잘 안 오는 이유가 뭔지 아세요? 꼴 보기 싫어서 안 오는 거예요. 옛날에는 나보다 못났던 친구가 모델을 한다고 하니 심술이 나고. 와서 구경만 하는 것만으로도, 숨을 같이 쉬는 것만으로 달라질 거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내가 건강해지는구나’라는 느낌을 반드시 받게 될 거라고 생각해요.”
- 2015-12-22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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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부는 주고 받음이다 Part 2] TV 속 스타, 나눔의 별로 반짝이다
- 기부나 봉사활동을 하는 연예인의 모습을 달갑지 않게 보는 이들이 있다. 이미지 관리 차원에서 하는 행동이라는 게 그 이유다. 그러나 아무리 이미지를 좋게 하려는 목적이라 해도 수억 원의 금액을 기부하고, 장기를 기증하고, 머나먼 아프리카에 봉사활동을 가는 것은 일반인에게도 쉽지 않은 선택이다. 최근에는 팬클럽 회원들과 봉사활동을 하거나, 목소리 재능기부, 온라인 도네이션을 통해 네티즌과 함께 기부금액을 모으는 등 대중과 함께하는 형태의 선행도 다양하게 이뤄지고 있다. 처음에는 재단이나 기관의 홍보대사, 친선대사 등으로 나눔을 시작했지만 세월이 지나 더욱 성숙한 자세로 선행을 이어오고 있는 연예인들의 모습도 보인다. 1980년대부터 유니세프에서 봉사활동을 해온 배우 안성기(63), 1986년부터 초록우산 어린이 재단과 인연을 맺고 있는 개그맨 이홍렬(61), 그리고 1991년 월드비전 친선대사로 임명된 후 전 세계 아이들을 돕고 있는 배우 김혜자(74) 등. 그들은 이미지 차원을 넘어서 삶의 철학이 담긴 진중한 나눔 활동으로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대중에게 받은 사랑을 어려운 이웃과 사회에 보답하며 훈훈한 에너지를 선순환하고 있는 스타들을 살펴봤다. 이문세X프렌즈 아트 컬래버레이션 가수 이문세(56)는 젊은 일러스트레이터, 캘리그래퍼들과 함께 ‘이문세X프렌즈 아트 컬래버레이션’ 재능기부 프로젝트에 참여해 크리스마스카드를 직접 제작했다. 수익금은 위안부 할머니 후원시설인 ‘나눔의 집’으로 전달돼 할머니들의 생활, 복지, 증언 활동을 위해 사용될 예정이다. 카드는 10월 30일 ‘네이버 해피빈’과 ‘2015 씨어터 이문세’ 수원 공연장에서 시작해, 강남 교보타워 내 하임, 서울역 디트랙스 등에서 판매하고 있다. 네이버 해피빈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300만 원을 목표로 시작한 이 프로젝트는 (11월 11일 기준) 685만여 원을 넘기며 목표액의 2배가 넘는 수익을 냈다. 이문세는 2009년 MBC FM 라디오 의 청취자 461명의 사연을 담아 만든 노래 ‘이 겨울 날 지나간다’의 저작권 기부를 통해 나눔을 실천하기도 했다. 크리스마스캐럴 느낌이 나는 발라드 곡으로, 청취자의 참여로 만들어진 곡이라는 데 의미가 있다. 저작권법에 따라 이문세 사후 50년까지 노래에 대한 저작권과 음원수익금은 서울 사회복지공동모금회가 갖게 되며, 모두 불우한 이웃을 위해 쓰일 예정이다. ‘해밀학교’의 이사장 인순이 ‘거위의 꿈’이라는 노래로 많은 이에게 꿈과 희망을 선사한 가수 인순이(59). 아너 소사이어티(Honor Society, 사회복지공동모금회 1억 원 이상 고액기부자 모임)의 명단에도 이름을 올린 인순이는 각종 봉사활동은 물론 대학생 오케스트라 팀과 재능기부 형태의 ‘지하철 게릴라 콘서트’를 하는 등 다양한 자선 공연도 꾸준히 하고 있다. 대중에게 받은 사랑에 보답하고자 선행을 한다는 그녀는 오랜 고민 끝에 2013년 4월 강원도 홍천의 작은 마을 명동리에 다문화 대안학교 ‘해밀학교’를 설립했다. 2011년부터 3년여간의 준비과정을 통해 다문화 가정 아이들을 위한 배움터를 완성했다. 내년부터는 그동안 시행해온 수업료 면제에 이어 입학금, 급식비, 기숙사비까지 학교에서 부담하는 무상교육을 실시한다. 해밀학교의 이사장 인순이는 “학교를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를 찾고 스스로 좋아하는 일을 찾아 할 수 있는 꿈의 터전을 만들고 싶다. 내가 대한민국에서 겪었던 어려움, 외로움, 고통뿐만 아니라 사랑, 격려, 위로를 나와 같은 다문화 아이들이 알아갔으면 좋겠다”며 많은 아이들이 자랑스러운 한국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힘쓸 것이라는 뜻을 밝히기도 했다. 재능기부, 해외봉사, 장기기증까지… 국민엄마 고두심의 선행 릴레이 1983년부터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의 후원자로 나선 고두심(64)은 2006년 이후부터는 재단 내의 스타서포터즈에서 나눔대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배우 채시라와 함께 재단이 진행한 ‘어른이날(성년의 날)’ 캠페인 CF에 목소리 재능기부에 참여했다. 그녀는 “어린이를 돕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옵션이 아닌 필수”라며 “어른들이 나라의 미래인 어린이들의 든든한 지원자가 되자”고 말한 바 있다. 자신의 모교인 제주여자고등학교에 2억 원의 장학금을 기부하고, 2008년 에티오피아 우간다에 봉사활동을 다녀오는 등 다양한 선행을 펼쳐온 그녀는 1999년 장기기증 캠페인에 참여하며 장기기증 서약을 하기도 했다. 고두심은 한 인터뷰를 통해 “장기기증 서약 이후 건강을 더 생각하며 좋은 마음을 갖고 좋은 생각을 하기 위해 노력한다”며 “나이가 드니까 세월이 인생을 가르쳐 주더라. 어차피 흙으로 돌아가 썩을 육신인데 다른 사람에게 주고 가면 얼마나 좋겠는가. 주위 동료 연예인들에게 기증하라고 자주 권하는데 아직은 무서워서 못하겠다는 사람이 많다”며 장기기증 문화를 알리고 동참하는 이들이 많아졌으면 한다는 뜻을 전하기도 했다. 대한민국 1호 공익신탁자 유동근 올해 7월 배우 유동근(59)은 이철희 분당서울대병원장, 김현웅 법무부 장관, 한비야 국제구호전문가와 함께 국내 첫 공익신탁자가 됐다. 공익신탁은 기부자가 은행이나 단체에 재산을 맡기고 이를 운용해 나온 수익금을 장학, 구호 등 자신이 지정한 공익사업에 사용하도록 하는 제도다. 법무부와 외부 감시인 감독 아래 기부자가 원하는 곳에 정확하게 쓰이고, 적은 금액이라도 사용처가 투명하게 공개된다는 점이 특징이다. 간단한 절차로 ‘나만의 재단’을 만드는 셈이다(법무부 상사법무과에 문의 후 참여). 유동근은 광복 70주년을 맞아 독립유공자 후손의 생계 및 교육 지원을 위해 ‘나라사랑 공익신탁’을 만들었다. (이철희 원장은 ‘난치성 질환 어린이 치료를 위한 공익신탁’, 김현웅 장관은 아동학대 피해자를 지원하는 ‘파랑새 공익신탁’, 한비야씨는 인류애를 키우는 사업에 쓰일 ‘세계시민학교 공익신탁’에 참여) 그는 2008년 숭례문 화재 당시 복원 성금으로 1억 원을 기부한 바 있다. 연예계 선행 바이러스 정애리의 ‘하래의 집’ 연예계 기부천사 정애리(55)는 아프리카 구호활동, 몽골 기아체험, 동남아 쓰나미 피해 지역 방문, 도시락 캠페인, 생명의 전화, 연탄은행 홍보대사, 월드비전 친선대사 활동 등 다양하고 끊임없는 선행을 펼치고 있다. 그녀는 2004년부터 SBS 사회공헌 프로젝트 프로그램 에 참여하며 매년 후배 연기자들과 아프리카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2009년에 함께 아프리카에 다녀온 배우 장서희는 “연탄 나르기 봉사활동을 끝내고 드라마 촬영장에 온 정애리 선배의 모습을 보고 나도 아름다운 일을 많이 해야겠다고 생각했다”며 정애리의 선행이 좋은 본보기가 되었다고 이야기했다. 2005년에는 17년간의 봉사활동 경험을 바탕으로 쓴 에세이 를 펴내며 인세 수익금 1억 원 전액을 정읍의 ‘사랑의 나눔의 집’에 기부했다. 책에는 그녀가 직접 운영하고 있는 고아시설 ‘하래의 집’에 대한 이야기도 담겨 있다. “지상에서 굶는 아이들이 없는 그날까지 최선을 다해 봉사할 것”이라며 책을 펴낸 소감을 전한 그녀는 책을 통해 ‘하래의 집’에 대한 이야기와 나눔의 의미를 설명했다. 김자옥 재단 ‘공주는 즐거워’ 프로젝트 지난해 11월 안타깝게 우리 곁을 떠난 배우 김자옥을 추모하고 평소 어려운 이웃을 돕고자 했던 그녀의 뜻을 기리는 ‘김자옥 재단’이 내년 1월 설립된다. 기아대책 홍보대사활동, 사랑 나눔 한복 패션쇼 참여 등을 비롯해 2007년에는 배우 주현, 전무송, 나문희 등과 함께 출연료 전액을 어려운 이웃에게 기부하는 도네이션 드라마 (KBS 2TV)에 출연하는 등 다양한 나눔을 실천했던 그녀다. 고 김자옥의 남편인 가수 오승근은 “생전 어려운 이들을 위해 선행을 많이 한 아내의 뜻을 이어가고 싶다”고 재단 설립 배경을 설명했다. ‘김자옥 재단’은 배우 강부자를 비롯한 동료 연기자들이 동참해 장애인 시설 등을 찾아 봉사활동과 재능기부 등을 할 계획이다. 김자옥 재단은 적극적인 사회 참여를 원하는 40~60대 여성들이 불우한 청소년들의 멘토로 활동할 수 있는 ‘공주는 즐거워’ 프로젝트를 첫 공식 활동으로 기획하고 있다.
- 2015-12-18 0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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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천 도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팔십처럼만! <상상 팔십(常常 八十)>의 저자 김혜원 인터뷰
- 저자 김혜원은 1935년에 태어나 서울대 사범대를 졸업해 선생님이 됐고, 한 남자의 아내가 되어 네 아이의 엄마, 손녀 아린이의 할머니가 됐다. 누군가의 아내, 엄마, 할머니보다는 ‘김혜원씨’로 불리는 게 좋다는 그녀는 올해 80세를 맞아 그동안 고민해온 인생의 의미와 행복을 담은 에세이 을 펴냈다. 서울구치소와 청주여자교도소에서 재소자 교화활동을 하며 느낀 점, 장기기증 서약의 의미, 삶에 대한 성찰과 애정 등이 담겨 있다. Interveiw. 의 저자 김혜원 작가 팔팔했던 시절 삶은 당연히 살아지는 것이었지만, 팔십이 되니 하루하루가 기적이라고 한다. 군더더기가 다 떨어져 나간 ‘참[眞] 나’에 대한 탐구야말로 나이 듦의 열매라고 말하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책 제목의 의미 첫 글자 상은 ‘항상 상(常)’입니다. ‘상’을 연거푸 써서 ‘항상’ 또는 ‘늘’의 뜻을 강조하려 했습니다. 팔십은 문자 그대로 올해 제 나이 80세고요.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 모르지만 현재의 강건함을 항상 유지하면서 살고 싶다는 희망을 뜻합니다. 책에 드러낸 나의 삶과 꿈에 대한 열정을 마치 여덟 살 아이와 열여덟 살 청춘처럼 간직하고 싶다는 소망도 담겨 있습니다. 희망독자를 두 돌 지난 손녀로 지정한 이유 요즘은 책이 흔해진 반면, 책 읽는 사람은 감소한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습니다. 귀한 나무의 희생으로 탄생한 내 책이 인쇄물 공해로 작용하는 건 아닐까 두려움이 앞섰습니다. 그 두려움을 넘어서는 당위성을 찾고 싶었죠. 그때 떠오른 이유 하나, 손녀 아린이에게 나를 기억케 하고 싶은 욕망입니다. 그가 커서 이 글을 읽으며 할머니의 기쁨과 슬픔, 절망과 성취감을 느끼고 천국에 있는 나를 잠시라도 그 애 가까이로 불러내준다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할머니’가 아닌 어떤 호칭으로 불릴 때 가장 기분이 좋은가? 한국 사회는 직위나 직급을 딴 호칭을 사용하다 보니 전업주부로 살아온 여성에게는 마땅한 호칭이 없죠. 그래서 편의상 젊어서는 ‘아가씨’, 중년에는 ‘아주머니’, 중년 이후에는 ‘할머니’라고 불리는 게 아닐까요. 나는 아린이 할머니임에는 틀림없지만 늙었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에게도 ‘할머니’로 취급 받고 싶지는 않아요. ‘할머니’라는 호칭 속에는 대가족제도 속에서 지녔던 존경과 사랑의 이미지보다는 늙어 무능하고 시대에 뒤처지는 존재라는 비하의 그늘이 어리기 때문입니다. 엄연히 등단한 작가이니 ‘김 작가님’ 또는 ‘김 선생님’으로 불리고 싶습니다. 아니면 ‘김혜원씨’도 좋습니다. 장기기증 서약의 계기와 지금의 심정 오랫동안 사형수와 재소자 교화활동을 하며 눈뜨게 된 세상이 있습니다. 비록 끔찍한 범죄로 극형을 받는 이들이지만 참회와 반성을 통해 장기기증이나 시신기증을 하며 아름답게 삶을 마무리하는 모습을 보았던 것입니다. 죽으면 한 줌의 재가 되거나 땅에 묻힐 덧없는 육신이 산 사람들에게 유익을 끼칠 수 있다면 그들을 교화했던 내가 장기기증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장기이식을 받는 사람일지라도 적지 않은 비용 부담에 시달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장기기증 서약과 동시에 장기기증운동본부에 소액의 후원금도 내고 있습니다. 젊어서는 이런 점에 착안하기가 어렵지만 살 만큼 산 노년이라면 삶을 어떻게 마무리 짓고 갈 것인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죽음을 생각한다는 것은 끔찍한 게 아니라 지금 주어진 삶을 더 소중하게 여기고 현재에 최선을 다하고자 하는 성찰을 줍니다. 서울구치소에서 사형수 교화 활동을 하던 때 가장 기억에 남는 일화 서울구치소에서 만난 최초의 사형수는 1975년에 17명의 무고한 생명을 살해한 사형수 김대두였습니다. ‘살인마’였던 그와의 만 1년간의 경험은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때까지는 엘리트 의식에 젖어 네모반듯한 모범생 생활을 지향했는데, 우리 사회의 어둡고 음습한 구석을 보고는 경악했습니다. 그 충격은 위로만 향하던 마음의 눈을 아래로도 뜨게 했고 삶의 자리를 좀 더 낮은 곳에 깔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는 처절한 반성을 통해 새 사람이 되었고 서울구치소에 수많은 선행 미담을 남기고 1976년 12월 28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평생 그를 잊을 수 없습니다. △김혜원 작가 저서 , , , 등.
- 2015-12-18 0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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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투어] 용문산 용문사, 만추 여정 느끼기 제격
- 용문사 가는 도로변,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가 도로 양 편으로 길게도 이어진다. 우수수 낙엽이 떨어져 만추의 여정이 가득한, 휘어진 길. 그 뒤로 아스라이 옛 추억 한 자락이 떨어지는 낙엽 위로 오버랩된다. 형형색색으로 변한 산야 속에 유난히 노란 단풍잎이 눈을 시리게 한다. 이렇게 도로변에 은행나무를 심어 놓은 것은 용문사에 노거수 은행나무가 성성하게 버티고 있음을 알려주려 함이었으리라. ◇ 단풍 든 한적한 산길에서 만난 정지국사부도 용문사의 가을은 화려하다. 해마다 이곳의 아름다운 가을을 만나기 위해 많은 행락객들이 찾아든다. 주차비(소형 3000원)와 입장료(성인 2000원)를 내고부터는 누구나 걸어야 한다. 입구 쪽에 단풍 든 공원 앞으로 2007년에 개관한 양평 친환경 농업박물관(용문면 신점리 508-10, 070-7715-3796, http://sam.go.kr)이 있다. 옛 성루를 연상케 하는 한옥 모양의 박물관 앞으로 분수가 솟구친다. 유치원생들은 그 모습을 보고 즐거운 비명을 지른다. 아이들 눈 속에는 감성이 많이도 묻어 있는 듯하다. 실내에는 양평역사실과 친환경농업실이 있고 사찰요리를 만들어보는 체험 등을 할 수 있다. 주변의 공원에는 아이들 취향인, 귀여운 조형물과 시비 등이 많이 눈에 띈다. 사자상 양 귀 쪽으로 수도꼭지를 달아 놓은 모습도 해학적이다. 다리를 건너면 일주문이지만 이번 여행길에는 곧추 정지(正智)국사부도 팻말(0.5㎞)을 따라 걸음을 옮긴다. 산길은 큰 도로와는 달리 한적하다. 아직 걸음이 서투른 유치원생들과의 눈높이 대화가 싱그럽다. 부도까지 올라가야 하는 길목은 붉은 단풍이 에워싸고 있다. 우선 정지국사탑비를 만난다. 비문은 권근이 지은 것이라지만 글자가 거의 마모되어 버렸다. 80m 정도 오르면 정지국사부도(보물 제531호)가 홀로 있다. 정지국사(1324∼1395)는 황해도 재령에서 태어나 고려 충숙왕 복위 1년(1332), 8세 때 장수산 현암사로 동진출가(童眞出家)했다. 바로 선을 닦다가 능엄경을 배워 깊은 뜻을 깨달았다고 한다. 공민왕 2년(1353)에는 무학과 함께 원나라로 가서 지공을 스승으로 한 나옹의 제자가 되었다. 1356년, 귀국해서는 은둔하면서 수행에만 힘썼다고 한다. 천마산 적멸암에서 “나는 간다”는 말을 남기고 법랍 54세로 입적했다. 제자 조안이 이곳에 부도와 비를 세웠고, 나라에서는 ‘정지국사’라는 시호를 내렸다. 생전에 개풍 영천사의 대장경을 용문사로 옮겨 봉안했다고 한다. 사찰 쪽으로 내려오는 길목에는 무수한 돌탑이 있다. 넓은 터에는 ‘산사무공(山寺武功)’이라는 손 글씨가 쓰여 있다. 무공 템플스테이가 펼쳐지는 곳이며 108탑을 조성하는 듯하다. ◇ 국내에서 가장 큰 용문사 은행나무는 단풍 들기도 더뎌 조금 더 내려오면 용문사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이다. 경내의 건축물과 함께 단풍 든 용문산(1,157m)이 한눈에 조망되는데, 무엇보다 커다란 은행나무(천연기념물 제30호, 높이 50m, 둘레 12.3m)에 눈길이 머문다. 신라의 마의태자가 나라를 잃은 설움을 안고 금강산으로 가던 도중 심은 것이라고도 하고 의상대사의 지팡이가 뿌리가 내려 이처럼 성장한 것이라고 전해오는 국내에서 가장 큰 은행나무다. 수령이 대략 1100여 년에서 1500여 년으로 추정된다. 정미의병 때 톱을 댔더니 피가 났고, 불을 질렀을 때도 이 은행나무만 타지 않았던 신목(神木). 노익장을 과시하듯 잎이 무성하고 주변 나무들보다 단풍도 더디 든다. 경내 약수에 목을 축이고 잠시 둘러본다. 이 사찰은 진덕여왕 3년(649)에 원효대사가 창건한 천년고찰. 진성여왕 6년(892)에는 도선국사가, 고려 공민왕 때는 나옹선사가 여러 차례 중수를 거듭했다. 세종 29년(1447)에는 수양대군이 어머니 소헌왕후 심씨의 원찰로 삼으면서 대대적으로 중건했다. 조선 초기에는 절집이 304칸이나 들어서고 300명이 넘는 승려들이 모일 만큼 번성했다고 한다. 그 후 왜군이 전소시켰고 6·25 때도 파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찰을 비켜날 즈음, 찻집 솔내음, 다래향에서 맛있는 대추약차의 그윽한 향내에 취해보거나 용문산 정상까지 산행을 해도 된다. ◇ 상원사에 오르면 속세의 번뇌가 한순간에 사라지는 듯 굳이 산행을 안 해도 된다. 찻길이 잘 나 있기 때문. 상원사 입구임을 알려주는 거대한 석불부터는 민가가 사라진다. 울창한 숲 사이로 차 한 대가 갈 수 있는 임도 운전이 아슬아슬하지만 잠시 차를 멈출 수 있는 공간이 반갑다. 시원한 물줄기가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그곳에도 아름답게 단풍이 들었다. 물소리, 새소리, 단풍 숲까지 어우러져 사랑스러운 길이다. ‘무릉도원’이 여기구나 싶을 생각이 절로 드는 곳. 찻길이 끊어지는 곳에서 누군가 정성스레 가꿔 놓은 텃밭, 작은 연못, 깎아지른 듯한 언덕에 잘 쌓은 돌담이 해사한 웃음으로 반긴다. 돌계단을 따라 경내에 들어서면 마당 한가운데 3층석탑을 에둘러 대웅전, 선방으로 이용되는 청운당, 요사채인 제월당이 있다. 대웅전 뒤쪽으로는 삼성각이다. 절 마당, 트인 공간 저 멀리 용문산 능선이 파도처럼 일렁인다. 상원사는 창건 시기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유물로 미루어 고려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때 보우선사(1301∼1382)가 여기 머물며 정진했다고 전해온다. 조선 태조 7년(1398)에 조안선사가 중창했으며 무학대사(1327~1405)가 왕사에서 물러나 이곳에서 수행했다. 또 효령대군(1396~1486)은 원찰로 삼았다. 세조 8년(1462)에는 세조가 피부병을 고치러 찾아왔다가 중창불사를 했다고 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다 순종 원년(1907)에 왜병이 이 지역에 집결해 있던 의병을 소탕하기 위해 불을 질러 법당만 남겨놓고 모두 타 버렸다가 1918년에 복원했으나 6·25 때 모두 불타 버렸다. 이후 1969년이 되어서야 주지 덕송이 초막삼간을 짓고 복원에 착수, 1970년에 주지 경한니가 복원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상원사에서 눈길을 끄는 것이 있다. 사자석상을 닮았지만, 정확한 형태가 아닌, 예사롭지 않은 조형물이다. 땅속에서 나온 유물들을 한데 조합해서 만들어 놓은 것이란다. 또 사찰 내에는 철조 여래좌상(경기문화재자료 제119호)이 있다. 상원사 가까이 있는 윤필암은 고려 중엽 모덕이 창건했으나 한국전쟁 때 소실되어 터만 남아 있다. ◇ 보릿고개 연수리 정보화 체험마을의 돌담 따라 걷기 상원사에서 내려오면 ‘연수리 보릿고개 정보화 체험마을’을 만난다. 연수리는 연안마을과 장수마을을 합해서 만들어진 지명이다. 예로부터 장수하는 사람이 많아 ‘장수골’이라고 불렸다. 현재 보릿고개마을은 성공한 정보화마을이다. 다양한 체험거리는 계절에 맞추어진다. 봄에는 산나물 채취, 냉이 캐기를 하고 여름에는 계곡에서 물놀이를 즐긴다. 가을에는 밤 줍기와 등산을, 겨울에는 청국장 만들기 등의 체험을 한다. 담벼락에 벽화를 그리고, 돌담장에 형형색색으로 색칠해 볼거리를 준다. 사계절 체험객들이 줄을 잇는다. 특히 슬로푸드 음식체험이 인기다. 보리떡 직접 만들어보기, 지천에 난 쑥을 직접 뜯어 쑥떡 만들기, 농민들이 재배한 국산 콩으로 두부 만들기, 잘 익은 호박으로 호박밥 지어 먹기 등. 체험객들이 늘 찾는, 성공한 체험마을이다. 마을을 비켜 용문으로 오는 동안에도 눈이 시리다. 곳곳에 멋지게 지은 전원주택들이 구슬처럼 박혀 이국적인 모습을 자아낸다. 그리고 경기도 영어마을 양평캠프도 있다. 실제 미국 버지니아의 마을을 재현한 이국적인 캠퍼스다. 그래서 와 등 드라마 촬영지로도 이용되었다. 학습 목적이 아닌 관광객들은 6000원이라는 입장료를 감수해야 한다. 용문면에도 할 거리가 있다. 레일바이크(031-775-9911, http://www.yprailbike.com)를 탈 수 있다. 용문면 삼성리∼양평읍 원덕리까지 왕복 6.4㎞ 구간이다. 또 용문장날(5일, 10일)도 볼만하다. 국철이 생기면서 장날은 제법 구색을 갖춰가고 있다. 지역에서 나오는 가을 특산물을 파는 할머니들의 모습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 Travel Tip - 주소 용문사 경기 양평군 용문면 신점리 625, 문의 : 031-773-3797, http://www.yongmunsa.org 상원사 양평군 용문면 연수리 220-5, 문의 : 031-773-4634 보리울체험마을 문의 031-774-7786, http://borigoge.invil.org 기타 문의 양평군청 문화관광과 : 031-773-5101 - 찾아가는 방법 자가용 서울 → 6번국도 이용 → 마룡교차로에서 341지방도로로 좌회전 → 덕촌삼거리에서 직진 → 용문산 관광단지 주차장 대중교통 수도권전철 중앙선이 용문까지 운행(2009년 12월 개통)되고 있다. 용산역~용문역(05:20~22:58) 약 1시간 30분 소요. 용문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용문사, 연수리행 등 각 방향 농어촌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문의 용문시외버스터미널 : 031-773-3100, 용문역 : 031-773-7788 - 추천 맛집 용문산 입구에 중앙식당(031-773-3422), 한마당식당(031-773-5678), 용문산식당(031-773-3434) 등 산채요리 음식점이 있다. 그외 용문에서 다소 떨어져 있지만 무쇠솥에 오랫동안 달여 낸, 국물 진하고 고기 넉넉한 고바우집(031-771-0702, 설렁탕)을 비롯하여, 이북식 만두가 맛있는 회령만두국(031-775-2955)이 괜찮다. 용문읍에 있는 강원식당(031-773-4459, 막국수, 묵채밥 등)도 괜찮다. - 주변 볼거리 용문산에는 용계, 조계골(신점1리)이 있다. 또 용문면에서는 레일바이크(031-775-9911, http://www.yprailbike.com)를 탈 수 있다. 2010년 5월 3일 개장되었고 용문면 삼성리에서 양평읍 원덕리까지 왕복 6.4㎞ 구간이다. >> 이신화 여행작가 이립(而立)에 여행작가로 시작해 어언 지천명(知天命)에 다다랐다. 그동안 ‘걸어서 상쾌한 사계절 트레킹’, ‘대한민국 100배 즐기기’, ‘on the camino’ 등 여행서 총 14권을 출간했다. ‘인생이 짧다’는 것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여 지난해 홀로 197일간 30개국의 유럽 배낭 여행을 했다. ‘살아 있을 때 떠나자’가 삶의 모토다.
- 2015-11-27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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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ditor's Pick] 밥심보다 빵심이 필요할 땐?
- 맛집 투어를 하는 이들 못지않게 동네 유명 빵집들을 한꺼번에 둘러보는 ‘빵집 순례객’이 늘고 있는 요즘. 빵 굽는 내음이 솔솔 풍기는 서울 마포구 일대의 빵집 네 곳을 소개한다. 글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 3色 공간의 매력, 프랑스 빵 공장 ‘퍼블리크(Publique)’ 프랑스 밀가루를 사용한 프랑스 전통 빵을 판매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세이글과 빵드퍼블리크는 퍼블리크의 대표 건강빵이다. 천연발효종을 이용하고, 자동차 운전대처럼 큼직하다는 것이 공통점이지만 호밀의 함유량에 따라 세이글(호밀 100%)은 단단한 질감에 탄맛과 신맛이 나고, 빵드퍼블리크(호밀 80%)는 부드러우면서 강한 신맛이 난다. 한때는 상수동 가게에서 빵 굽는 모습을 볼 수 있었지만, 현재는 광흥창 공장에서 그날 구운 빵을 받아 판매하고 있다. 달콤한 디저트 에끌레르도 선물용으로 인기다. 주소 서울 마포구 독막로15길 19 운영시간 11:00~22:00 (일요일/공휴일) 11:00~19:00 문의 02-333-6919 ◇버터의 풍미가 가득한 크루아상 전문 베이커리 ‘르뾔이따쥬(Le Feuilletage)’ 크루아상처럼 앙금이나 크림이 들어 있지 않은 빵일수록 그 맛을 결정하는 데는 버터가 한몫을 한다. 프랑스에서 공수해온 고급 버터 3종(이시니, 엘레앤비르, 에쉬레)을 사용해 모양은 같지만 각기 다른 맛과 향의 크루아상을 굽는 곳이다. 에쉬레 버터가 들어간 빵은 진하고 깊은 맛이 나고, 이시니 버터가 들어간 빵은 가볍고 깔끔한 맛이 특징이다(엘레앤비르는 그 중간 정도). 특히 에쉬레 버터는 에 소개된 재료이기도 하다. 대개 빵은 아침에 한 번 구워 하루 동안 판매하는데, 오전 10시께 방문하면 모든 종류의 빵이 진열된다. 주인장이 직접 1년에 3~4회 프랑스를 방문해 구입해오는 38가지의 다양한 티도 준비돼 있으니 곁들여 맛볼 것을 추천한다. 르뾔이따쥬는 오픈된 주방에서 베이킹 수업도 진행하고 있다. 전화 상담 후 신청 가능하다. 주소 서울 마포구 토정로5길 30 운영시간 8:00~22:00 문의 070-5022-1142 ◇맛과 정성으로 경쟁하는 동네빵집의 자존심 ‘롤앤브레드 리퀴드(Roll&Bread Riquide)’ 번화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롤앤브레드 리퀴드는 그 규모는 작지만 내공 있는 빵맛을 내는 곳이다. 여느 빵집과는 다르게 커피나 음료를 판매하지 않고 오로지 빵 본연의 맛에만 집중하는 것이 특징이다. 매장의 반 이상을 차지한 주방에서는 시간대별로 맛있고 건강한 빵이 구워진다. 빵 별로 나오는 시간이 조금씩 다르지만 모두 진열된 모습을 보려면 오후 1시 이후에 가는 것이 좋다. 모든 빵은 건포도 발효종과 요구르트 발효종, 신안천일염과 호주산 천연 버터로 맛을 낸다. 대표 메뉴인 탕종호밀빵은 크랜베리, 건포도, 오트밀, 해바라기씨, 호두 등 영양가 있는 재료가 호밀(함량 60%)과 어우러져 구수하고 건강한 느낌을 준다. 탕종호밀빵의 ‘탕종(湯種)’이라는 말은 쫄깃한 식감을 위해 끓는 물로 밀가루를 반죽하는 제빵 기술이다. 같은 방법으로 만든 탕종우유식빵도 촉촉하고 부드러운 식감으로 인기다. 롤앤브레드 리퀴드의 모든 식빵은 촉촉하고 연한 식감을 유지하기 위해 자르지 않은 상태로 판매하고 있다. 커팅을 원하는 경우엔 카운터에 요청하면 된다. 주소 서울 마포구 와우산로29길 34 운영시간 10:00~21:00 문의 02-334-1500 ◇할머니의 손맛처럼 친근한 ‘베이커리 봉교’ 창업 당시 제빵사의 외할머니 이름 ‘봉교’를 따서 이름 지었다는 베이커리 봉교는 투박하지만 그리운 할머니의 손맛처럼 정겨운 빵집이다. 저온에 장시간 숙성해 부드러운 식감을 자랑하는 스콘은 봉교의 효자 메뉴다. 스콘과 어울리는 산딸기 잼, 살구 잼, 블루베리 잼 등도 직접 만들어 판매한다. 스콘을 비롯해 부드러운 우유크림이 가득한 우유크림빵, 치아바타 삼총사(콩콩 치아바타, 치즈 치아바타, 올리브 치아바타), 벌꿀로 맛을 낸 꿀 바게트 등은 오전 11시 이후에 가면 모두 만나볼 수 있다. 인기 제품은 일찍 동이 나기 때문에 저녁 7시 이전에 가는 것이 좋다. 주소 서울 마포구 독막로19길 46 운영시간 8:00~21:00, 매주 월요일·매월 첫째 일요일 휴무 문의 02-322-7062
- 2015-11-12 0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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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대공감]韓·美·日의 웃음코드...유재석-오브라이언-아리요시의 공통점
- 개그맨 유재석이 연일 화제다. 한동안 주춤하다 싶더니 종편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호사가들을 분주하게 만든 데 이어 가요제라는 형식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공중파 방송사들이 자료 영상을 종편 채널에 제공 또는 판매하지 않는 것은 유재석을 빼앗긴 데 대한 복수’라는 다소 선정적인 내용의 기사가 눈에 띈다. 유재석이 대단한 능력자임은 익히 알았지만 거대 방송사들이 치졸한 복수극을 마다하지 않을 만큼 영향력이 큰 줄은 미처 몰랐다. 글 김유준 프리랜서 dongbackproject@gmail.com 일본에서는 아리요시 히로이키(有吉弘行)라는 코미디언이 득세하고 있다. 어떤 이는 연수입이 5억 엔이라고 하고 어떤 이는 10억 엔이 넘는다고 할 만큼 채널을 가리지 않고 맹활약 중이다. 개그 스타일은 유재석과 정반대다. 독설이 거침없다. 우리나라에서라면 수갑을 찰 만한 성희롱도 서슴지 않는다. 미국의 코미디언이며 방송 진행자인 코넌 오브라이언은 우리나라에서도 인기 높다. 코미디 프로그램의 작가 출신으로 현상을 비트는 지적 유머가 장기로 알려져 있다. 유재석과 아리요시 히로이키, 그리고 코넌 오브라이언. 코미디 스타일은 제각각이지만 세 명에게는 공통점이 많다. 첫 번째는, 세 명 모두 한때 코미디언으로서 몹시 힘겨운 시기를 보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그 역경을 너끈히 뛰어넘었다. 유재석은 10년 넘게 무명이었다. 이따금씩 정보 프로그램에 출연할 기회를 잡았을 때는 선천적 방송 ‘울렁증’ 때문에 더듬거리기만 하다가 속절없이 마이크를 내려놓아야 했다. 라는 옛날 프로그램에서 에피소드들을 과장을 섞어가며 재미나게 풀어내지 못했다면, 아마도 우리는 그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아리요시 히로이키는 데뷔와 거의 동시에 스타덤에 올랐다. 여느 일본 코미디언들이 으레 그렇듯 데뷔 초창기에는 고생이 심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사루간세키(猿岩石)’라는 이름으로 코믹 듀오를 이루고는 1996년부터 히치하이크로 세계 여행하는 방송프로그램에 출연해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그때의 이야기를 쓴 책이 250만 부, 음반이 120만 매 판매됐다. 나중에 아리요시는 방송에 출연해 “믿거나 말거나 경제 효과 1조 엔”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 후로는 지독한 내리막길이었다. 인기가 한 번 추락한 이후 7년 가깝게 섭외가 없었다. 아리요시는 “사루간세키 시절에 번 돈을 모두 까먹은 시점이 되고서야 슬슬 출연 섭외가 들어오기 시작했다”고 털어놓았다. 다시 찾아온 기회를 아리요시라는 똑똑한 코미디언은 두 번 다시 놓치지 않았다. 나라별 다른 코미디 스타일 코넌 오브라이언은 뒤늦게 위기를 맞이했다. 출발은 거짓말처럼 순조로웠다. 유명 코미디 프로그램 과 인기 애니메이션 등에서 방송작가로 활약하다가 소질을 인정받고 방송 진행자로 데뷔한 이후, 미국 코미디 프로그램 하면 으레 떠오르는 늦은 밤의 토크 프로그램( )을 잇따라 맡으며 승승장구했다. 그러다가 자신을 키워준 방송사 NBC로부터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았다. 또 다른 코미디언인 제이 레노의 프로그램을 신설하며 의 방송 시간대를 맡기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NBC가 의 방송시각을 60년 만에 변경한 까닭은 단 하나, 시청률 때문이었다. 쇼를 맡은 지 1년도 되지 않은 시점에서 그와 같은 모욕을 당하고 오브라이언은 방송 하차를 결심했다. 계약 조건 때문에 한동안 방송 활동을 할 수 없었음에도 자존심을 꺾지 않았다. 오브라이언은 쇼를 그만두고 방송 대신 전국 투어를 선택했다. 성공적일 것 같지 않던 코미디 여행은 결국 대성공을 거뒀다. 트위터 같은 SNS가 홍보에 큰 몫을 담당해준 덕분이었다. 현재 오브라이언은 케이블 방송사 TBS에서 를 진행하며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다. 두 번째 공통점은 그들이 현재 한미일 세 나라를 각각 대표하는 코미디언이라는 점이다. 이 점에 관해서는 더 이상 설명할 필요도 없다. 세 번째는 그들이 현재 한미일 세 나라의 코미디 스타일을 대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글의 진짜 주제는 바로 이 세 번째 공통점에 관한 짧은 생각이다. 유재석은 점잖다. 코미디언이라면 한 번쯤 겪을 법한 스캔들을 단 한 번도 거치지 않았다. 오히려 주위에 미담만 가득하다. 최근에만 해도, MBC의 에 방영돼 화제가 된 일본의 우토로 마을에 10년 전부터 몰래 기부해왔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또 한 번 우리를 놀라게 했다. 방송 진행 스타일도 마찬가지다. 동료 선·후배 코미디언들은 그가 “게스트들을 놀랍도록 배려한다”고 입을 모은다. 오랫 세월 동안 ‘질 안 좋은 친구’처럼 코미디 뒤꽁무니를 쫓아다녔던 주먹질이나 성적 비하 발언은, 그의 프로그램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다. 여타 코미디언과 다르게 유재석은 우격다짐이나 욕설 한마디 없이 우리들을 웃긴다. 유재석은 보기 좋은 일만 하고 듣기 좋은 말만 하면서도 얼마든지 방송을 재미있게 이끌어갈 수 있음을 보여주는 희귀한 모범답안이다. 남자들에 관한 은밀한 주제를 거침없이 드러낸 같은 프로그램이 실패한 것은, 유재석의 그런 이미지와 동떨어졌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스튜디오 안에서의 얌전한 방송이 강호동에게 맞지 않는 것처럼, 음담패설을 늘어놓으며 패널이나 방청객의 치부를 드러내는 방송은 유재석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그가 오랫 동안 인기 정상에서 내려오지 않는 것을 보면 우리는 아마도 그가 만들어내는 ‘지저분하지 않은 웃음’이야말로 제대로 된 웃음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거침없는 입담, 그러나 점잖다 일본인들은 딴판이다. 아리요시 히로이키가 그의 표현대로 ‘지옥에 떨어졌다가’ 다시금 인기를 얻게 된 계기는 ‘별명’이다. 동료 선·후배들에게 별명을 붙여주면서 인기가 급상승한 것이다. 코미디언이 지어낸 별명이 얌전해서야 인기를 끌기 어려울 터. 그의 입에서 작렬하는 별명은 상대의 얼굴이 벌게질 만큼 공격적이었고, 그래서 웃겼다. 심지어 아리요시는 일본 방송계의 원로 여성 진행자 구로야나기 데쓰코(黑柳徹子)에게 ‘똥할매’라는 놀라운 별명을 선사하기까지 했다. 이라는 토크 프로그램을 40년 가까이 진행해온 전설적 진행자의 면전에서 원초적인 욕지거리를 퍼부은 것이다. 모든 사람이 배꼽을 잡는 가운데 80세가 넘는 할머니만 웃지 못했다. 그렇다고 방송에서 대놓고 화낼 수도 없는 노릇. 할머니는 다만 “별명이 아니라 그냥 욕일 뿐”이라고 볼멘소리를 했다. 다시 스타덤에 오른 뒤 아리요시의 거침없는 입담은 더욱 불을 뿜었다. 함께 진행하는 여성 아나운서에게 통통하다는 이유로 “돼지새끼”라고 욕을 퍼부었으며, 미모가 좀 떨어지는 아나운서에게 “얼굴은 못생겼는데 가슴은 크다”고 놀려댔다. 남자 연예들에게는 더 매서웠다. ‘쓰레기’ ‘똥’ ‘바보’ 같은 욕지거리가 입에서 떨어질 날이 없었다. 그럼에도 일본 시청자들은 그를 사랑한다. 이 글을 쓰기 위해 그의 코미디를 유심히 살폈다. 아닌 게 아니라 아리요시는 무척 재미있다. 눈살이 절로 찌푸려질 만큼 폭언을 일삼지만 웃음을 선사하는 코미디언으로서의 임무도 잊지 않는다. 폭언을 들은 상대는 그냥 웃고 만다. 스스로의 설명처럼 아리요시는 영리하게도 “한계를 아슬아슬하게 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일본 사람들이 생각하는 한계와 우리의 그것은 판이하다. 아리요시가 일본에서의 잣대를 그대로 유지했다가는 우리나라 프로그램에서 입도 벙끗하지 못할 것이다. ‘구구이 비점이고 자자이 관주’라는 의 표현을 빌려 쓰면, 아리요시의 멘트는 ‘구구이 폭언이고 자자이 성희롱’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어쨌든 웃긴다. 그래서 일본에서 인기가 많다. 우리나라 시청자들이 ‘웃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과 달리, 일본 시청자들은 ‘어쨌든 웃기면 된다’고, ‘웃기지 못하는 얌전한 코미디보다는 웃기는 욕지거리 코미디가 더 낫다’고 여기는 듯하다. 이를테면 웃음의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이랄까. 코미디는 언제나 사회현상이 주제 코넌 오브라이언이 선사하는 웃음은 한국과 일본의 코미디와 성격이 좀 다르다. 그의 코미디는 언제나 사회 현상이 주제다. 그것도 남녀 사이의 자잘한 연애나 동료 연예인들의 잡다한 경험담 따위가 아니라 제법 굵직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화제가 코미디의 소재가 된다. 그러므로 그의 코미디가 유재석이나 아리요시의 코미디보다 수준 높다고 판단하는 것은 섣부르지 않을까 싶다. 일상의 사소한 웃음을 이야기한다고 해서 코미디의 핵심인 풍자가 부족하다고 단정 짓기도 어렵고, 신문 앞면에 날 법한 사회현상을 다룬다고 해서 풍자가 넘치리라 지레짐작하는 것도 성급하다. 분명한 것은 정치적, 사회적인 이유와 관습으로 우리와 일본 사람들에게 풍자가 제법 부족하다는 것, 그에 비해 미국인들은 ‘지적인 피해의식이 있는지’ 의심될 만큼 풍자에 집착한다는 것, 그리고 코넌 오브라이언이 사회현상을 꼬집고 비트는 풍자에 재능이 넘친다는 사실이다. 얼마 전 인터넷에서 화제가 됐던 다트머스 대학 졸업식 연설은 그 진수라 할 만하다. 하버드 대학 출신인 오브라이언은 그 연설에서 자신의 지적 유머감각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현실을 비판함과 동시에 사회로 진출하는 젊은이들을 격려하고 고무했다. 그러면서 웃음을 선사했다.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미국인들이 추구하는 유머의 최고봉이었다. 우리에게는 웃음이 필요하다. 그 웃음을 선물하는 작업은 대우받아 마땅하다. 유재석과 아리요시와 오브라이언은 각자의 스타일대로 그 작업을 성공적으로 이끌며 우리에게 웃음을 주고 있다. 한미일의 웃음 코드는 세 코미디언의 차이점만큼 크게 벌어져 있지만, 모두가 웃음을 원한다는 사실에서는 크게 차이가 없다. 어떤 코미디가 더 수준 높은지 따지는 것은 나중 일이다.
- 2015-10-19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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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손인숙 예원 실그림 문화재단 관장, 실로 그려 나가는 실그림 인생
- “나의 실그림은 예술 혹은 창조 자체를 실행에 옮기는 나의 삶이자 나의 우주다.” 여기 자신의 혼을 온전히 실어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열어가고 있는 예술가가 있다. 예순 중반의 나이에 자수를 통한 ‘실그림’이라는 독보적인 영역을 개척하고 있는 손인숙(孫仁淑·64) 예원 실그림 문화재단 관장을 만났다. 글 김영순 기자 kys0701@etoday.co.kr 사진 전재현 사진 작가 손인숙 관장의 작품들은 한국과 프랑스 수교 130주년을 기념해 9월 18일부터 6개월 동안 프랑스 국립 기메박물관에 초청 전시돼 독특하고도 아름다운 한국의 멋을 서구의 예술 애호가들에게 펼쳐 보일 예정이다. 지금까지 작품 한 점 팔지 않고 이 같은 영광이 오기까지 그가 감내해야 했던 고통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삶과 예술혼이 하나로 어우러진 자기절제와 수행으로 작업정신을 펼쳐나간 실그림 거장. 예원(藝園)의 삶이 작품보다 더 감동적이다. 전통 자수의 현대적 계승을 통해 일가를 이룬 손인숙 관장과의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그의 손을 보게 됐다. 고사리 같은 손이다. 그러나 그 손이 만들어낸 예술 세계는 고되고 독보적인 영역에 있었다. 실그림이라는 그 예술 세계는 손 관장의 어머니 직계로 3대째 이르는 대를 잇는 길이기도 했다. 실그림 예술 세계의 알파이자 오메가, 어머니 “외할머니는 못 뵈었습니다. 저를 실제로 가르친 건 어머니였죠. 아버지는 제가 고등학교 1학년일 때 돌아가셨고…. 하지만 어머니는 교육자여서, 제 소질을 계발하기 위해 제가 학교를 갔다 오면 따로 숙제를 내주곤 했어요. 그림을 그리게 한 거죠.” 손 관장의 어머니는 초등학교 교사로 평생 교편을 잡았던 분이다. 자수 스승이었던 어머니는 손 관장의 유년 시절부터 함께 수를 놓았고 어떤 문양인지, 어떤 색을 고를 것인지 항상 옆에서 눈으로 가르쳐주었다. 매일 매일 틈 날 때마다 수를 놓으며 지냈던 일상의 잔잔한 시간들. 일상의 사색과 자수를 대하는 자세를 배우는 인고의 시간들이 그의 작품의 원천적 에너지인 동시에 자수와 자신이 일체가 되는 아우라로 계승됐다. “나에게 자수란 어느 한 땀도 사색이 반영되지 않는 것이 없으며, 어느 한 땀도 내 몸속으로부터 나가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이렇듯 나의 자수에 대한 기본적 세계관은 어머니로부터 비롯됐고 주변 사물에 색과 힘을 불어넣어 줄 수 있는 자수에 대한 나의 항해 또한 어머니로부터 출발했습니다.” 손 관장의 어머니는 변화할 미래를 예견하기도 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일찍이 미래에는 문화전쟁이 온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혜안이 있으셨어요. 어머니 말을 당시에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이해합니다. 계속적으로 문화를 창조해야 생존할 수 있는 현재가 됐기 때문이죠. 그때 어머니는 저에게 한국의 문화를 세계 최고로 만들어라, 교수도 하지 말고 인간문화재도 하지 말고 일에 미쳐 최고의 작품을 만들어 세계와 공유하라고 충고했습니다.” 한국과 프랑스 수교 130주년을 기념하는 예술가가 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서 자수를 전공하면서부터 꿈을 현실로 만드는 작업을 시작하게 됐고 자신감이 생겼어요. 그렇게 하다 보니 오늘이 왔습니다.” 오늘이 왔다는 것은 그가 갖게 될 영광에 대한 표현이었다. 올해한국과 프랑스의 수교 130주년이 된 걸 기념해 프랑스 국립 기메박물관에서 그의 250여 작품을 6개월 간 전시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전시회의 제목은 다. “결국은 미쳐서 해야 하는 겁니다. 똑같은 걸 만드는 건 누구나 하기 때문이죠. 나만의 세계가 있어야 해요. 제가 여기까지 올 때는 고통을 즐겼다고 보면 돼요. 고통을 고통이라고 생각했다면 답이 없었을 겁니다.” 손 관장은 작품을 하면서 밖을 나가본 적이 없다고 밝혔다. 출입을 삼가고 작업에 몰입하면서 보낸 시간은 하루에 13시간. 기메박물관의 전시 허가가 난 다음에는 사람들을 만나야 했기 때문에 그게 불가능해졌다고 하니 박물관 전시라는 사건은 공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그를 만나고 싶었던 이들에게도 다행인 일이지 싶다. 내년까지 이어지는 전시가 프랑스에 이어 영국까지 추가 예약돼 있다. 세계 인류를 위한 문화를 공유한다 손 관장의 작품 세계는 실그림을 축으로 해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로 채워지고 있다. 불교미술, 인물화, 풍속화, 민화, 산수화, 서예, 한방문화, 추상화에 이르는 그 수는 어림잡아 20여 가지. 그중에 건축까지 들어 있다니 그가 추구하는 예술적 자유로움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으리라. 그렇게 만들어지는 작품들 중에는 20년째 작업하고 있는 것들도 있다. 그야말로 예술가로서의 강렬한 자의식과 가치 부여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들이다. 그는 조각 장인·옻칠 장인·매듭 장인·배접 장인 등 각 분야 전통 장인과 30여 년 동안 한 팀처럼 작품을 함께 만들어왔다. 자수는 그가 하지만, 목공예와 결합하거나 노리개에 응용하는 등 퓨전 작업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 그의 자수 작품은 목공예·목가구·보자기·장신구·함·병풍 등 21가지 장르를 넘나들고 있다. “다시 태어나도 이 일을 할 거예요. 사실 이게 고통이지만….” 그렇게 고통스럽다면서 어째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대답 또한 너무도 예술가다웠다. ‘제가 못 다한 게 너무 많아서’라는 것이다. “이걸 제 것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모두 다 한국 문화에 기여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세계 인류의 문화를 만든다는 차원에서 생각하고 있어요. 그래서 개인의 소유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생각은 또한 제 어머니의 철학이기도 해요.” 그는 아직도 깊이 못 들어간 장르가 있다고 아쉬워했다. 그래서 다시 태어나면 그 못 해 본 걸 완성해보고 싶다는 것이다. 전통에 도전, 전통 자수를 뛰어넘다 이렇듯 자유롭게 사고하고 도전하는 손 관장에게 전통이란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 것일까? “전통은 나에게 무의식적인 소재의 바다였고 의식적으로 넘어야 할 산이었으며 긴 시간의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의 대상과도 같았습니다. 동시에 나를 있게 한 존재의 근원이기도 했죠.” 악귀를 물리치고 복을 불러오는 전통 자수 문양은 그 숫자의 한계가 있었으므로 그는 좀 더 다양한 문양을 새겨 넣기도 했다. 머릿속에 떠오른 복잡하고 섬세하며 화려한 감성은 바로 색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형태뿐 아니라 패턴의 느낌만으로도 다양함이 가능하다는 것이 그녀가 다다른 예술적 지점들 중 하나였다. 그러면서도 작품 표현에서 전통 복식, 목공예, 불화와 같이 종래에 있었던 수많은 전통 예술들이 그의 예술 세계 속에서 차용됐다. “전통을 전통으로만 보면 오늘이 없어집니다. 전통에 도전해 자신만의 색을 마련할 수 있어야 예술이죠.” 그의 작품들 중에 가장 강렬하다는 평가를 받는 작품들은 풍경화와 추상화, 그리고 그 중간쯤에 위치한 순수 창작 실그림들이다. 특히 마치 캔버스에 그림을 그린 것 같은 추상 작품들은 그녀가 색을 다루고 형상을 파괴하면서 실의 질감을 파격적으로 과감히 살리고자 한 결과물일 것이다. 힘들다고만 생각하면 끝이 없어 손 관장은 작업을 하면서 가장 힘든 때를 작업하는 장인, 즉 파트너들과 호흡이 맞지 않을 때를 꼽았다. 그가 추구하는 방향으로 함께 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 때. 이는 공동 작업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점이다. 그러나 손 관장은 ‘힘들다’는 감정에서 멈추지 않았다. “저는 힘들다는 생각을 반대로 생각하는 습관이 있어요. 힘들다고만 하면 끝이 없습니다. 그러니 그 힘듦을 즐겨야 합니다. 과거에 물난리가 나서 작업장이 잠긴 적이 있었어요. 기가 막히잖아요? 하지만 그때 저는 손해를 손해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그 일을 마음에서 던져버렸죠. 오너인 제 입장에서 함께 일하는 그분들과 같이 힘들어 하면 안 되죠. 정말로 힘들면 그만두면 됩니다. 그리고 모든 일에 대해 토막을 잘게 끊어서 크게 붙인다는 생각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과연 오너다운 말이랄까, 그는 자신을 오너로서 대함에 있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다양한 장르를 실험하느라 다양한 장인들과 함께 해야 하는 그의 작업 특성상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는 인터뷰 내내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감사를 표했다. “제가 하는 작업은 저 혼자서 될 일이 아니에요. 그래서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 자꾸 감사해요. 가족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일상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힘을 놓지 않고 살았다 “자수는 나입니다. 그리고 자수는 우주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나의 우주란 사실은 나의 일상이며 내 사고들의 집합체입니다. 이런 생각으로 자수를 시작했습니다.” 손 관장이 자신의 작품 세계의 시작을 설명하는 말에서, 예술가의 가족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예술계의 신화랄까, 예술가가 작품에 몰입해 완전히 빠지면 뒤에 남는 예술가의 가족들은 불행해진다는 이야기. 손 관장의 가족들은 그를, 쉬지 않고 만들고 있는 우주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남편은 내 예술을 기꺼이 이해해줘요. 그리고 엄마가 하는 일을 보는 딸 둘도 너무 착하고. 심지어 시댁에서도 제가 하는 일을 인정해주었죠.” 손 관장의 예술은 남편과 자식에 더해 친정과 시댁 모두가 인정하고 지원해줘 만들어질 수 있었다. 흔치 않은 집안이다. 그리고 그러한 환경이 만들어낼 수 있는 아름다움을 이제 세계가 인정하기 시작했다. “저는 한 번도 일상적으로 작아 보이는 것들을 가볍게 본 일이 없다고 생각해요. 그 어떤 것이라도 눈에 들어오는 것들을 내 감성으로 사로잡는 일을 소홀히 한 적이 없었어요.” 그가 설명하는 일상적이고 작아 보이는 것들에 대한 감수성에는 ‘유혹이란 상대에 대한 배려로부터 나온다’는 걸 증명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런 충실함은 한눈에는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도 완성돼 있어야 한다는 그녀의 철학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손 관장에게 후계자에 대해 물어봤다. 그는 실그림이라는 영역은 후계자 양성이 어려운 분야라고 선선히 밝혔다. “요즘은 둘째 딸이 내 작업을 도와주는 중입니다. 뭔가를 만드는 건 아니고 우선 제 일을 지원해주는 거죠. 4대째 예술가의 기질이요? 그건 두고봐야죠(웃음).” 그는 오전 3시부터 새벽을 열며 새벽빛을 고민하다가 상념에 한 땀을 시작하면서 일상적 우주를 어떻게 실그림으로 표현할 것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자문하고 있다. 한순간에 깨닫거나 진보하는 것이 없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실그림으로서의 예술에 대한 질문은 아직 시작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의 작품세계에 반해 예원 실그림 문화재단 이사장직을 흔쾌히 맡은 이기수 전 고려대 총장은 수서에 자수박물관을 짓는 데 힘껏 돕고 있다. 조만간 착공될 계획이란다. 손 관장이 사는 서울 강남구 개포동 경남아파트 1층의 60평쯤 되는 갤러리에는 그의 작품과 자수 관련 민속품이 빼곡하게 모여 있다. 2009년부터 이곳에는 수많은 사람이 찾아와 그의 작품을 감상하고 작가와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됐다. 해외에서 더 알아주는 팬클럽이 생길 정도다. 이제 우리나라 자수예술의 미를 한 단계 높이고 세계인이 모두 함께 느끼고 좋아할 수 있는 보편적인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킬 것이라는 그의 약속을 입증한 셈이다.
- 2015-10-07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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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ML 칼럼] 이[齒]에 대하여
- 고재종은 농사를 지으며 시를 써온 전남 담양 출신의 시인입니다. 그의 빼어난 작품 중에서 ‘한바탕 잘 끓인 추어탕으로’부터 먼저 읽어보겠습니다. 길지만 전문을 인용합니다. 우리 동네 성만 씨네 산다랑치논에, 그 귀퉁이의 둠벙에, 그 옆 두엄 자리의 쇠지랑물 흘러든 둠벙에, 세상에, 원 세상에, 통통통 살 밴 누런 미꾸라지들이, 어른 손가락만 한 미꾸라지들이 득시글벅시글 거리더라니, 그걸 본 가슴팍 벌떡거린 몇몇이, 요것이 뭣이당가, 요것이 뭣이당가, 농약물 안 흘러든 자리라서 그런가 벼, 너도 나도 술렁대며 첨벙첨벙 뛰어들어, 반나절 요량을 건지니, 양동이 양동이로 두 양동이였겄다! 그 소식을 듣곤, 동네 아낙들이 성만 씨네로 달려오는데, 누군 풋배추 고사리를 삶아 오고, 누군 시래기 토란대를 가져오고, 누군 들깨즙을 내오고 태양초물을 갈아 오고, 육쪽마늘을 찧어 오고 다홍고추를 썰어 오고, 산초가루에 참기름에 사골에, 넣을 것은 다 넣게 가져와선, 세상에, 원 세상에, 한 가마솥 가득 붓곤 칙칙폭폭 칙칙폭폭, 미꾸라지 뼈 형체도 없이 호와지게 끓여 내니 그 벌건, 그 걸쭉한, 그 땀벅벅 나는, 그 입에 쩍쩍 붙는 추어탕으로 상치(尙齒)마당이 열렸는데, 세상에, 원 세상에, 그 허리가 평생 엎드렸던 논두렁으로 휜 샛터집 영감도, 그 무릎이 자갈밭에 삽날 부딪는 소리를 내는 대추나무집 할매도, 그 눈빛이 한번 빠지면 도리 없던 수렁 논빛을 띤 영대 씨와, 그 기침이 마르고 마른 논에 먼지같이 밭은 보성댁도 내남없이, 한 그릇 두 양품씩을 거침없이 비워 내니 봉두난발에, 젓국 냄새에, 너시에, 반편이로 삭은 사람들이, 세상에, 원 세상에, 그 어깨가 눈 비 오고 바람 치는 날을 닮아 버린 그 어깨가 풀리고, 그 핏줄이 평생 울분과 폭폭증으로 막혀 버린 그 핏줄이 풀리고, 그 온몸이 이젠 쓰러지고 떠나 버린 폐가로 흔들리는 그 온몸이 풀리는지, 모두들 얼굴이 발그작작, 거기에 소주도 몇 잔 걸치니 더더욱 발그작작해서는, 마당가의 아직 못 따 낸 홍시알들로 밝았는데, 때마침 안방 전축에선, 쿵짝 쿵짝 쿵짜자 쿵짝 네 박자 속에 사랑도 있고 눈물도 있고 이별도 있다고 하며, 한번 놀아 보장께. 기필코 놀아 보장께, 누군가 추어대곤, 박수 치고 보릿대춤 추고 노래 부르고 또 소주 마시니, 세상에, 원 세상에, 늦가을 노루 꼬루만 한 해 넘어가는 줄도 모르고 한바탕 잘 노니, 아 글쎄, 청천하늘의 수만 별들도 퉁방울만 한 눈물 뗄 글썽이며, 아 글쎄, 구경 한번 잘 하더라니! 절로 흥이 나고 즐거운 이 시의 세 번째 연에 상치(尙齒)마당이 나옵니다. 상치는 이를 받들어 모시는 것이니 나이든 노인들을 위해 베푼 잔치마당을 말합니다. 가을철 미꾸라지 보양식으로 한데 얼려 흥겹게 한때를 보내는 마을공동체의 존노상치(尊老尙齒) 전통이 핍진하고 약여합니다. 예로부터 “조정에서는 작위만한 것이 없고 마을에서는 나이만한 것이 없으며 세상을 돕고 백성들의 어른 노릇함에는 덕망만한 것이 없다”[朝廷莫如爵 鄕黨莫如齒 輔世長民莫如德]고 했습니다. 신라 3대 유리왕부터 16대 흘해왕 때까지 썼던 왕호 ‘이사금’은 이가 많은 사람, 즉 연장자는 성스럽고 지혜로운 사람[聖智人]이라고 한 데서 유래된 치리(齒理)라는 말입니다. 유리왕과 탈해왕이 서로 왕위를 양보하다가 이가 더 많은 유리왕이 먼저 즉위한 다음부터 왕을 이사금으로 불렀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흥겨운 상치모임이라도 이가 없으면 저작(詛嚼)을 할 수 없습니다. 못된 사람을 일러 불치인류(不齒人類), 사람 축에 들지 못한다는 말도 하지만 이가 없으면 사람 축에도 끼지 못하는 것일까요? 이 없는 입으로 한없이 오물오물하며 식사를 하던 시골 할머니들 생각이 납니다. 그런 분들의 고통과 불편을 스스로 낙치(落齒)의 나이가 돼서야 알았으니 이가 나는 것도, 이가 빠지는 것도 다 인간이 철드는 일 중 하나인가 봅니다. 견마지치(犬馬之齒)란 개나 말처럼 헛나이를 먹었다고 겸손하게 하는 말인데, 지금 이 나이가 견마지치가 아니기를 바랍니다. 지금은 의술이 발달해 치아를 때우고 새로 해 넣고 교정하는 일이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예전엔 이가 빠지면 그저 잇몸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지난해 어금니 한 개 빠지더니/올해는 앞니 한 개가 빠졌다/어느새 6, 7개가 빠졌는데/그 기세가 줄어들지 않는구나.” 당송 팔대가 중 한 명인 한유(韓愈·768~824)의 시 ‘낙치(落齒)’ 중 일부입니다. 마지막은 이렇게 돼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네/이가 빠지는 건 수명이 다한 거라고/나는 말하네. 인생은 유한한 것/장수하든 단명하든 죽는 건 마찬가지.” 여섯 수로 이루어진 다산 정약용의 시 ‘노인일쾌사(老人一快事)’에도 치아 이야기가 나옵니다. 다산은 첫 번째 시에서 “늙은이 한 가지 유쾌한 일은/민둥머리가 참으로 유독 좋아라”라고 합니다. 이어 두 번째 시에서 “늙은이 한 가지 유쾌한 일은/치아 없는 게 또한 그 다음이라”고 한 다산은 마지막에 “유쾌하도다. 의서 가운데에서/치통이란 글자는 빼버려야겠네”라고 합니다. 이가 다 빠졌으니 이제 아플 일도 없다는 말입니다. 이 빠지는 게 유쾌할 리 없지만, 이렇게 달관과 해학적인 태도로 세상을 살아가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이는 건강과 노화, 두 가지를 알려주는 인체 측정장치입니다. 노(老)를 쇠퇴나 쇠약이 아니라 노숙과 노련으로 해석하려 해도 빠진 이가 새로 날 수 없고 만든 이가 온전히 내 이와 같을 리 없습니다. 한국인들은 참 악착같이 살아왔습니다. 악착도 이와 관련된 말입니다. 작은이 악(齷)과 이 마주 붙을 착(齪)이 합쳐진 악착의 본뜻은 ‘작은이가 꽉 맞물린 상태’ ‘앙다물어 이가 맞부딪히는 상태’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이를 앙다물고 악물고 살아온 게 아닐까요? 그러나 이제 나이 들고 여유가 좀 생겼으면 달라져야 합니다. 재미있는 시를 많이 쓴 오탁번 시인은 ‘문학청춘’ 올해 여름호에 발표한 ‘늙은이애’에서 이렇게 말했더군요. ‘애늙은이’라는 말은 있는데/‘늙은이애’라는 말은/왜 없을까//콩팔칠팔/흘리고 까먹고/천방지방 하동하동/나는 나는/늙은이애!//‘늙은이애’라는 말을/국어사전에 등재는 하지 않고/국립국어원은/낮잠 주무시나? 이가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늙은이애’처럼 살아가는 게 보기 좋을 것입니다. 각자무치(角者無齒), “뿔이 있는 건(동물) 이가 없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가 없는 분들은 뿔이 있다고 생각하고 각자 자기 분야에서 두각(頭角)을 나타내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너무 서두르거나 다투지는 말고!
- 2015-10-02 10: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