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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세대 이야기] 1954년생 말띠들의 거침없는 질주, 그룹사운드 '겨울나무'
- 그룹사운드 ‘겨울나무’가 있다. 아니, 있었다. 어림 40년 전이다. 밴드를 그룹사운드로, 보컬을 싱어로, 기타리스트를 기타맨으로, 콘서트를 리사이틀로 부르던 시절이었다. 우리는 4인조 그룹을 결성했다. 나는 기타를 치며 싱어로 활동했다. 비틀스는 당시에도 전설이 되어 있었고, ‘딥퍼플’과 ‘시시알’, ‘박스탑스’, ‘산타나’ 등이 빚어낸 선율이 지구촌을 뒤덮고 있을 때였다. 우리는 1974년 겨울 고향인 작은 읍내에서 처음 공연을 했다. 그러나 이를 기억하는 사람은 세상에 몇 명 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우리가 만들어낸 선율은 누군가의 가슴에 아직 남아 있을 것으로 믿고 있다. 그럼 영화 ‘즐거운 인생’의 줄거리보다 훨씬 오래된 이야기를 펼쳐보겠다. 어깨너머로 배운 ‘슬픈 악기’ 기타 어릴 적, 기타는 슬픈 악기였다. 어른들은 기타로 뽕짝조의 옛노래를 뜯었다. 나도 기타를 배우고 싶었다. 어깨너머로 보고 있다가 음 자리를 짚어 흉내를 내자 마을의 (다리가 아파 늘 휠체어를 타고 다니던) 아픈 형이 한번 배워보라 했다. 주법도 익히지 않고 바로 ‘생일 없는 소년’과 ‘애수의 소야곡’을 따라서 쳤다. 디마이너(Dm)의 슬픈 곡들이었다. 국민학교 졸업 무렵에 몇 곡을 익혔다. 작은 손을 꼼지락거리며 기타를 튕기면 지나가던 사람들이 걸음을 멈췄다. 그러나 내 기타 실력이 별 것 아니라는 것을 이내 알았다. 팝송 열풍이 불어왔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기타 소리를 들으니 기타는 더 이상 슬픈 악기가 아니었다. 특히 전자기타에서 뿜어 나오는 다양한 음색은 나를 다른 세계로 끌고 갔다. 중학교에 들어간 후로는 기타를 치지 않았다. 그러다 고등학교 때 다시 기타를 쥐었다. 잊고 있던 기타를 다시 껴안게 된 연유가 있었다. 문학의 밤이 열린 어느 가을날이었다. 저마다 한껏 말[言]에 멋을 부린 시를 낭송했다. 계속 듣다 보니 지루했다. 1부가 끝나고 초청손님으로 한 남학생이 나오더니 들고 온 기타를 튕기며 글렌 캠벨의 ‘타임’을 불렀다. 모두 ‘타임’ 속으로 우아하게 빨려 들어갔다. 문학은 개뿔이었다. 한순간에 팝송이 장내를 압도했다. 나는 순간 다시 기타 치며 노래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곧바로 기타교습소에 등록했다. 비로소 디마이너(Dm)의 ‘슬픈 기타’에서 벗어나 다양한 리듬과 코드를 익혔다. 3개월 정도 학원에서 배운 뒤에는 홀로 음악책을 뒤적이며 노래를 찾았다. 나는 작곡하며 노래도 하는 싱어송라이터를 꿈꿨다. 4인조 그룹사운드 탄생의 전말 대학 입시에 예상대로 낙방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책은 손에 잡히지 않았고 사는 게 시시해 보였다. 그때 집에서 튕겼던 기타소리가 울 밖으로 넘어갔고, 자연 음악 친구가 생겼다. 우리는 자주 만나 기타를 치며 듀엣으로 노래를 불렀다. 그 친구는 드럼도 잘 두드렸다. 어느 날 친구가 (혹 내가 먼저 말했는지도 모르지만) 그룹사운드를 해보자고 했다. 서로의 눈에서 불꽃이 일었다. 여름 끝자락에서 또 한 명의 음악 친구가 나타났다. 그는 읍내 고등학교 밴드부 출신으로 채보(採譜) 능력이 출중했다. 레코드 음반에서 나오는 노래를 오선지에 그대로 옮겨 우리 앞에 내밀었다. 우리는 비틀스처럼 멤버를 기타(퍼스트, 세컨드)와 베이스, 드럼으로 구성하기로 했다. 그때부터 우리는 상상 속에서 살았다. 장발 단속에 걸릴지라도 머리를 결사적으로 기르고, 공연 막판에는 ‘딥퍼플’처럼 드럼과 기타를 부숴버리자며 낄낄댔다. 그룹사운드 이름은 ‘겨울나무’로 정했다. 그러면서 겨울에만 나타나 공연을 하고 홀연 사라지는 신비의 그룹이 되자고 했다. 또 삭풍이 부는 벌판에서도 봄꿈을 장만하는 겨울나무처럼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자고 했다. 첫 공연은 연말쯤 하기로 했다. 꿈은 부풀어 올랐지만 현실은 막막했다. 우선 퍼스트를 맡을 만한 기타맨이 있어야 했다. 나는 싱어였으니 당연히 세컨드 기타를 치며 노래해야 했다. 또 퍼스트를 감당하기에는 내 실력이 턱없이 부족함을 알고 있었다. 퍼스트 기타는 아무나 맡을 수 없었다. 간주 또는 후주에 애드리브(즉흥연주)를 구사할 수 있어야 했다. 우리는 기타맨을 널리 구했다. 하지만 기타도 귀한 시절이었으니 기타맨이 나타날 리 없었다. 그러다 누군가 희소식을 전했다. 미8군 무대에서 활동하는 기타맨이 고향에 내려와 어슬렁거린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하늘이 내려준 인물이었다. 우리는 기타맨을 찾아 나섰다. 그의 집은 멀었다. 전주에서 버스로 한 시간쯤 가야 했다. 들녘에 우람하게 정미소가 서 있었고, 기타맨은 그 집 아들이었다. 우리 얘기를 들은 그는 기타는 만지지만 무대에 설 만한 실력이 아니라고 했다. 자신의 형이 미8군 무대에서 활동한 것이지 자신은 아니라고 했다. 그 겸손이 더 맘에 들었고, 그가 기타맨임을 의심치 않았다. 그 집에서 한 밤을 자며 밤새 설득했다. 그렇게 퍼스트 기타맨을 얻었다. 4인조 그룹사운드가 결성되었다. 1974년 12월 첫 리사이틀 하지만 사람은 있는데 연주할 악기가 없었다. 자신의 악기는 자신이 구해야 했다. 기타맨은 형 것을 빌려 쓰기로 했지만 나는 전자기타를 구할 수가 없었다. 그만그만한 살림에 모두가 가난했던 시절이었다. 전자기타는 구경하기도 힘들었다. 전자기타를 찾아 읍내를 뒤졌지만 헛수고였다. 공연 날짜는 다가오지만 정작 악기가 없으니 가슴이 타들어갔다. 누가 전자기타를 빌려준다면 세상 끝까지라도 달려갔을 것이다. 그런 어느 날 전자기타를 집에 ‘모셔놓고 있는’ 선배가 있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뛰었다. 선배의 집은 읍내에서 20리쯤 떨어져 있었다. 초겨울 가을걷이가 끝난 들녘을 지나 묻고 물어서 그 집을 찾아갔다. 선배는 집에 없었다. 대뜸 이 집에 기타가 있느냐고 물었다. 선배의 아버지는 날 한참 노려보더니 외양간을 가리켰다. 외양간을 살피니 정말 전자기타가 있었다. 그러나 목이 부러진 채 소 여물통 옆에 나뒹굴고 있었다. 아마도 일은 하지 않고 기타나 튕기는 자식이 꼴 보기 싫어 아버지가 부숴 버렸을 것이다. 갈 때는 몰랐는데 읍내로 돌아오는 길이 무지 멀었다. 들녘에서는 삭풍이 불어왔다. 그리고 하늘에서 눈이 왔다. 눈물이 났다. 1974년 성탄절 즈음에 우리는 읍내 우체국 앞 예식장을 빌려 공연을 했다. 예식장 입구에 현수막을 걸었다. ‘그룹사운드 겨울나무 리사이틀’이 펄럭였다. 하지만 무대 위는 초라했다. 전자기타를 구하지 못한 나는 통기타를 멨고, 역시 베이스기타를 구하지 못한 친구는 색소폰을 들고 무대에 섰다. 나는 통기타로 코드를 짚으며 ‘Have ever seen the rain’, ‘Beautiful brown eyes’, ‘Help me make it through the night’ 등 10여 곡을 불렀다. 전자음에 맞춰 미친 듯이 노래하고 싶었는데, 그날 공연은 너무도 촌스러웠다. 베이스가 없으니 고음이 공중으로 떠다니고 음악은 거칠고 소란스러웠다. 그래도 그룹사운드 공연을 처음 본 읍내 젊은이들은 곡이 끝날 때마다 환호했다. 처음으로 하객 아닌 관객을 맞아들인 예식장 주인아저씨도 박수를 쳤다. 그렇게 70여 명이 모인 자리에서 첫 공연을 마쳤다. 나는 전기 대학 시험을 치르지 않고 후기 대학에 응시했다. 나만 아니라 첫 번째 음악 친구도 후기 대학에 입학했다. 나는 서울, 그는 이리(익산)에서 대학에 다녔다. 그리고 이듬해 우리는 다시 모여 연습을 했다. ‘겨울나무’가 되었다. 공연장소로 읍내 극장을 빌렸다. 원래 멤버에 색소폰과 클라리넷이 추가되었다. 겨울나무 공연 소식은 별 볼일 없는 읍내의 심심한 겨울철에 최대 관심사로 떠올랐다. 요즘 말로 ‘빅 이벤트’였다. 연습 장소로 자원봉사자들이 몰려들었다. 서로 포스터를 붙이고 공연 티켓을 팔겠다고 나섰다. 젊은 사람들이 한데 모이니 별별 일들이 많이 벌어졌다. 함께 포스터를 붙이겠다고 나간 남녀 한 쌍은 훗날 열애 끝에 결혼을 했다. 그러자 여러 말들이 나왔다. “포스터를 역 앞에 붙이랬더니 으슥한 하천에는 왜 갔을까. 포스터는 안 붙이고 서로 입술만 붙였고만.” 그해 ‘겨울나무 리사이틀’은 극장 좌석이 거의 찰 정도로 관객들이 많았다. 서울에서 빌려온 악기와 장비는 제법 섬세하고 육중했다. 우리는 열심히 연주하고 노래했다. 공연이 끝날 때까지 무수한 얘깃거리가 많지만 당시 일은 이쯤에서 줄인다. 그 후 겨울나무 공연은 멤버가 바뀌면서 여러 해 동안 이어졌다. ‘겨울나무’ 싱어로서의 자존심 군대에 가고 취직을 하며 우리는 흩어졌다. 그러나 겨울이면 겨울나무가 됐던 그 시절을 어찌 잊을 것인가. 어쩌다 멤버들이 만나면 음악 얘기로 술자리가 길어졌다. 우리는 한 번도 제대로 된 유료 공연을 해본 적이 없고 또 음반을 낸 적도 없었다. 그런데도 음악적 자부심은 하늘을 찔렀다. 우리가 계속 음악을 했으면 오늘날 조용필이나 전인권은 없었을 것이라고 큰소리를 쳤다. 서로의 음악성을 치켜세워주며 언젠가는 꼭 제대로 공연을 해보자고 했다. 그래서 겨울나무를 세상에 알리자고 다짐했다. 헤어지면서는 꼭 이런 말을 했다. “겨울나무 리사이틀 한번 해야지. 각자 집에서 연습하자고. 그날을 위해서.” 그러나 모진 세월은 우리를 떼어 놓았다. 다들 바쁘게 살았다. 그런데 우리는 뜻밖에, 어쩌면 극적으로 지난해 다시 모였다. 지금도 왕성하게 음악활동을 하고 있는 후배(겨울나무 2기 출신)가 자신들의 동호회 공연에 우리를 초청했기 때문이었다. 2014년 10월 ‘비바앙상블 콘서트’ 무대에 오르게 된 것이다. 우리는 후배의 지하 연습실에 모였다. 기타맨(김홍선)만은 전주에서 올라오지 못했다. 주유소를 운영하는 녀석은 정말 가고 싶지만 마누라가 ‘허락’하지 않아 합류가 어렵다고 했다. 약속하면 늘 늦는 또 한 녀석은 연습 날만은 총알처럼 달려왔다. 우리는 술을 한 잔 걸치고 연습을 시작했다. 베이스 소리가 가슴을 쳤다. 그 옛날 광경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저 아래에서 무엇인가 복받쳐 올라왔다. ‘노래들은 그대로 있는데, 우리는 이렇게 흘러왔구나.’ 이곡 저곡을 연습하다 사랑과 평화의 ‘어머님의 자장가’와 전인권이 부른 ‘사랑한 후에’ 두 곡을 부르기로 했다. ‘사랑한 후에’는 음이 높았다. 원곡대로 씨마이너(Cm)로 부르면 높은 음이 (‘라’ 음보다 반음 높은) Bb까지 올라갔다. 멤버들이 무리라며 키를 내리자고 했지만 내 자존심이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반(半)음에 목숨 거는 것이 싱어 아닌가. 세월이 흘렀어도, 세상이 변했어도 나는 겨울나무의 싱어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음이 나왔다. 40년 만에, 환갑에 올라선 무대 마침내 공연 날이 밝았다. 나는 아내가 골라준 선글라스를 끼고, 소주 한 병 하고도 넉 잔을 마시고 무대에 올랐다. 술은 두려움을 쫓고 고음을 지르는 데 도움을 줬다. 그렇다고 너무 마시면 아예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과거에는 소주 한 병이면 적당했지만 요즘 소주는 도수가 약해서 반 병쯤 더 마셔야 했다. ‘사랑한 후에’는 첫 음을 제대로 질러야 무리 없이 소화할 수 있었다. 멤버들 모두 잔뜩 긴장한 채 나를 봤다. 나는 씩 한번 웃어주고 내질렀다. ‘긴 하루 지나~고 언덕 저 편에~’ 우리는 해냈다. 600여 명의 관객들이 환호를 보내주었다. 그 속에는 아내도 있었다. 그렇게 별렀던 겨울나무 공연을 실로 40년 만에, 그리고 환갑에야 할 수 있었다. 그럼 겨울나무 멤버를 소개하겠다. 드럼 은희문(익산LED산업단지개발 대표), 건반 김동원(BCP경영기술컨설팅연구소 대표), 알토색소폰 노희천(비바색소폰앙상블 단장), 그리고 싱어 김택근이다. 베이스는 따로 초빙한 정종호 씨가 맡았다. 그리고 우리가 살던 고향은, 아니 우리 그룹사운드의 활동 무대는 정읍시 신태인읍이었다. 한때 4만 명에 육박하던 고향 신태인은 속절없이 쇠락하여 이제 인구가 만 명도 되지 않는다. 우리는 아직도 겨울나무가 되고 싶다. 그리고 초청공연이 아닌 우리만의 리사이틀을 꿈꾸고 있다. 그리고 꼭 공연 말미에 기타와 드럼을 부수고 싶다. 우리는 아직도 시퍼렇게 살아 있다. 그룹사운드 ‘겨울나무’가 있었다. 아니 지금도 있다. △김택근(金澤根) 언론인·시인 언론인 김택근 필자는 1954년에 태어나 전북 정읍시 신태인읍에서 자랐고 동국대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83년 박두진 시인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경향신문 문화부장, 종합편집장, 경향닷컴 사장, 논설위원을 역임했다. 2010년 출간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의 대표 집필자로 알려져 있다. 저서로는 , 산문집 , 동화집 등이 있다.
- 2015-06-02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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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발! 대발!!] 1950년 6‧25 수당 = 2013년 택배로 받은 ‘명예’
- 차라리 악몽이었다면 꿈에서 깨기라도 했을 것이다. 1950년 6월 25일 그 날은 꿈이 아니었다. 언제 깨어날지 모르는 악몽의 연속이었다. 중학생부터 신체 건강한 남성이라면 모조리 사선을 넘나들어야했다. 떨리는 손으로 총을 잡았고, 밤하늘의 별 속에 가족을 그리며 하루하루를 버텼다. 그 후로 60여 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들이 피 흘려가며 지켜낸 그 땅에서 올림픽과 월드컵이 성공적으로 열렸다. 또한 눈부신 경제성장으로 이제는 세계를 호령하고 있다. 그들이 일궈낸 토양에서 값진 결실을 수확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국가를 수호한 공로를 인정받아 이제 ‘영웅’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영웅들은 자신들이 수호한 국가가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미소가 끊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전쟁 영웅들의 모습이 밝아 보이지 만은 않았다. 10일 서울 종로의 6ㆍ25전쟁유공자회에서 만난 그들의 목소리는 격앙돼 있었다. ◇ “영웅이라는 기장을 택배로 받았습니다. 이게 영웅을 대접하는 방법입니까?” 전국 약 18만 명, 서울시 3만540명. 6ㆍ25참전유공자의 수다. 지난해 11월 서울시를 포함해 전국 지자체에서는 이들에게 ‘호국영웅기장’을 수여했다. 서울시는 시의 3만540명의 참전유공자 중 참전유공자회 250명을 포함, 총 350명의 참전유공자를 시에 초청해 ‘호국영웅기장’을 수여했다. 전수식에 참여하지 못한 참전유공자들에겐 서울지방보훈청에서 따로 전달하기로 했었다. 그러나 전수식에 참여하지 못한 참전유공자에게 ‘호국영웅기장’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잡음이 생겼다. 이들에게는 우체국 ‘택배’로 기장을 수여 했기 때문이다. 서울시뿐만 아니다. 전국 지방지자체 또한 직접 수여하지 못한 참전유공자에게 일제히 택배로 기장을 배달했다. 기장을 택배로 받은 6ㆍ25 참전유공자회의 신영식(80)씨는 목소리를 높였다. “이게 국가에서 6ㆍ25참전용사를 기리는 방식입니까? 어떻게 영웅의 상징인 기장을 택배로 보낼 수 있어요. 이것은 영웅을 기리는 것이 아니라 영웅을 욕보이게 하는 겁니다. 서울시에서 많은 인원들을 수용 못한다면 구 단위에서라도 단체의 장이 직접 전달해 줘야 하는 것 아닙니까?” 서울시가 지난해 11월 21일 배포한 보도자료에는 ‘호국영웅기장’에 대해 이렇게 써 있다. ‘호국영웅기장은 정전 60주년을 기념해 6ㆍ25참전유공자의 희생과 공헌을 기리고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전하기 위해 처음으로 제작됐다.’ 기장을 수여함으로써 6ㆍ25참전유공자에 대한 희생과 공헌을 기린다는 국가보훈처 취지는 뜻 깊다. 그러나 자리를 빛내지 못한 참전유공자에 대한 존경과 감사를 표하는 방식은 일부 참전유공자들의 공분을 사기 충분했다. 택배로 기장을 받은 신씨도 실망감이 큰 듯, 기장에 대한 넋두리를 이어갔다. “영웅이라는 호칭은 나라를 위해 애쓴 사람한테 쓰는 것이에요. 저는 이번에 6ㆍ25참전유공자에 대한 국가의 처세가 잘못된 것 같아요.” 수여식에 참여하지 못한 6ㆍ25 참전유공자에게 택배로 기장을 보낸 보훈처의 선택은 불가피했을지도 모른다. 약 3만명이나 되는 인원을 모두 수용하기에 벅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보훈처에서 선택한 택배라는 방식은 많은 유공자들을 화나게 했다. 꼭 택배여야만 했을까? 신씨의 말대로 시에서 수여하지 못하면 '구' 또는 '동' 단위 지자체에서 수여하는 정성이라도 보였다면 어땠을까? ◇“명예수당 18만원으로는 손자 과자 값도 안돼” 6ㆍ25참전유공자회에서 만난 참전유공자들은 한 목소리를 냈다. 국가를 위해 사선을 넘나든 사람들을 홀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20세 때 군대에 입대해 5년 동안 군생활을 하면서 6ㆍ25전쟁을 겪은 장인준(83)씨. 장씨도 불만을 털어놨다. “사실 보훈정책만으로도 고맙긴 해요. 그러나 항상 어떻게 보상을 해주겠다는 말만했지 실질적인 보상이 없어요. 물론 월 18만원이라는 명예수당이 나오기는 하지만, 이것 가지고는 손자들 과자 값도 안돼요. 저희는 건강해서 여기에 나오기라도 하지. 사실 보면 건강이 안 좋은 사람들이 더 수두룩하다니까. 그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기초 생활 정도만 될 수 있게 보상을 해줬으면 좋겠어요.” 장씨가 제안한 수당은 약 50만원이었다. 손에 잡히는 월급이나 수당 없이 사선을 넘었던 전쟁 당시를 생각해 보면 장씨가 제안한 액수는 그들에게 정당한 요구일지도 모른다. ◇“6ㆍ25참전용사는 할인 혜택 해당이 안 됩니다.” 장인준 씨와 마찬가지로 20세에 입대해 5년간 군복무를 한 이동진(83)씨. 지난해 대구에서 6ㆍ25참전용사로서 자존심에 상처가 난 기억이 있다. 국가 유공자 할인이 된다고 들어간 음식점에서 6ㆍ25참전용사는 할인혜택에 해당이 되지 않는다고 했기 때문이다. 이씨는 그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6ㆍ25참전유공자가 혜택이 안 된다면 누가 되냐고 물어봤더니, 4ㆍ19나 5ㆍ18 유공자가 해당이 된다고 하더라고요. 내가 무엇을 위해 목숨을 걸었나 생각해 본 순간이었습니다. 과연 6ㆍ25때 국가를 빼앗겼다면 4ㆍ19나 5ㆍ18이 있었을까요?” 실제로 6ㆍ25참전유공자들이 사회적으로 명예와 대우 그리고 자긍심을 느끼기는 쉽지 않다. 입장료나 교통수단 할인과 같은 기본적 혜택이 축소되고 있기 때문이다. “교통이라도 할인이 됐으면 좋겠어요. 버스, 열차, 공원에서도 아무 혜택이 없는데 이게 무슨 유공자에요? 지하철에서 6ㆍ25참전유공자입니다. 표 주세요라고 하면 어리둥절하게 직원이 쳐다봐요. 참 허무합니다.” 장인준 씨는 이 정도의 대우라면 후세대들이 국가를 위해 몸 바쳐 헌신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들을 보는 젊은 세대들의 시선에서도 존경심이나 따뜻함을 느끼지 못한다고 한다. 6ㆍ25참전유공자들은 국가를 수호한 결과가 허무하다. 나라를 위해 헌신한 보훈 가족들을 섬기겠다는 취지에서 만든 국가 보훈처. 국가 보훈처의 공식블로그 ‘훈터’에 게재돼 있는 글이 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단재 신채호 선생이 한 말이다. 과거가 없이는 현재가 없다. 그들의 고귀한 희생에 보답하는 길이 무엇인지 생각해 볼 일이다. 지금 정부와 사회가 살아있는 역사를 잊으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도 말이다.
- 2014-04-21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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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취미로 시작한 공예… 이젠 돈으로 살 수 없는 귀한 유산"
- 17일, 대전에서 홍성으로 내려가는 길에 봄비가 제법 많이 내리기 시작했다. 약 1시간 20분 정도 차를 몰고 가다 보니 도로변에 '충남도 무형문화재 제31호 댕댕이장 보유자'라는 표지판이 보인다. 홍성군 광천읍 신진리 246-2번지. 바로 댕댕이장 보유자인 백길자(66)씨가 살고 있는 집이다. "글쎄… 열 세 살 때부턴가… 그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해오니까 이렇게 문화재도 되고 그런거지 뭐, 특별한 재주가 있거나 그런 건 아니에요(웃음)." 처음 만난 순간부터 백씨의 얼굴에는 수줍은 웃음이 떠나지 않는, 시골 동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꾸밈 없는 모습 그대로였다. 잠들어 있는 손자가 깰지도 모른다며 기자를 작은 작업실로 데리고 가는 모습도 영락없이 인자한 할머니의 모습이다. "충남 당진이 고향인데 1948년에 7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어요. 당시 집에는 이모, 사촌 등 16명인가 18명이 들락날락하는 대식구여서 항상 많은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았죠. 그래도 가난하지만 화목했어요. 전 위로 오빠가 셋이라 맏딸 노릇을 했는데 낮에는 밭 매고 밤에는 모시 삼아 짜고 철마다 바느질해서 옷 만들고 했죠." 백씨가 댕댕이와 인연을 맺은 것은 북창국민학교를 다닐 때부터였다. 당시 그가 살던 마을 뒷산에는 댕댕이풀이 많이 자라고 있었는데 당시 마을어른들은 농사를 지으면서 댕댕이덩굴을 채취해 생활용구를 만들어 자급자족했던 것이다. 손재주가 좋았던 백씨의 아버지도 취미 삼아 댕댕이덩굴과 인동덩굴로 바구니를 만들었는데 백씨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아버지가 짜다 남겨둔 댕댕이바구니를 엮어 올라가며 곧잘 따라 하곤 했다. 그후 국민학교를 졸업한 후 아버지를 도와 댕댕이덩굴과 인동덩굴을 끊어서 삶고 눈을 따서 각종 공예품을 만드는 기술을 자연스럽게 익히게 된다. "당시 식구들이 열 명이 넘으니 집은 찢어지게 가난했죠. 40원짜리 플라스틱 바구니조차 사서 쓸 엄두가 나질 않았으니까. 그래서 뒷산에 널려 있는 댕댕이덩굴을 잘라다가 바구니를 만들었죠. 그런데 웃긴 건 제대로 배우지 못해 결혼 전까지 바구니의 바닥부터 몸통까지는 짤 수 있었는데 마무리를 익히지 못했던 거예요. 그래서 나중에 시집 간 뒤 친정에 와 아버지에게 마무리 하는 방법을 배운 후 그때부터 혼자 댕댕이덩굴로 바구니를 만들기 시작했죠." 백씨는 1973년 당시로는 조금 늦은 27살의 나이에 홍성군 우체국에서 집배원을 하던 김성환씨와 선을 봐 결혼을 하게 된다. 재미있는 것은 두번 만나고 결혼을 했는데 처음 만난 날 약혼을 하고 두번 만난 날 결혼을 하게 됐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참 말이 안 되지. 두번 만나서 결혼을 하다니 말이야. 그래도 남편이 둘째였기 때문에 시집살이 하지 않고 단둘이 사니까 오붓하니 좋더라고(웃음). 결혼 후 이곳 광천으로 왔는데 광천에도 지천에 댕댕이덩굴이 자라고 있어서 심심풀이로 바구니를 짜기 시작했죠. 댕댕이덩굴로 바구니를 만들려 해도 농사일 하다 보면 1년에 한, 두 개 만들기도 쉽지 않아요. 그래서 시간이 날 때마다 하니까 질리지가 않더라고." 백씨가 충청남도 무형문화재 제31호 댕댕이장의 기능보유자로 인정된 것은 당시 홍성의 한 동네에 살던 충청남도 무형문화재 제2호 지승제조장 최영준 보유자에게 지승공예를 배우면서 인연을 맺었기 때문이다. 백씨가 지승을 배우고 있을 때 최씨가 방송사나 신문사에서 취재를 나오면 항상 댕댕이장에 대해 소개해 주었던 것이다. "최영준 선생님이 나를 많이 챙겨줬죠. 항상 댕댕이장을 어떻게든 문화재로 만들려고 노력했는데 그러다가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1992년부터 1995년까지 전국을 대상으로 짚이나 풀로 만든 공예에 대해 조사를 한 적이 있었어요. 그때도 조영준 선생님이 조사자이던 김삼대자씨에서 나를 소개해줬는데 그 결과 댕댕이 덩굴을 소재로 공예품을 만드는 곳은 제주도와 충청도에 불과하다는 것이 알려졌죠." 국립문화재연구소는 당시의 조사를 토대로 댕댕이덩굴을 사용해 공예품을 제작하는 기술은 육지에서는 백씨가 유일한데, 이것은 제주도 무형문화재 제8호로 지정된 정동벌립을 만드는 기술과 일치한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백씨가 바로 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지정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사실 당시 조사자이던 김삼대자씨는 1998년 처음 백씨의 작품을 보고 옛날 전통방식을 그대로 재현하지 않아 문화재로 지정될 수 없다는 통보를 내렸던 것이다. "그때는 무형문화재가 되리라곤 생각도 하지 않고 그냥 집에서 쓸 물건 만들려고 나이롱 끈을 넣고 했는데 그걸 보더니 이건 아니라고 말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때부터 오직 댕댕이덩굴로만 작품들을 만들기 시작했죠. 그후 2000년에 무형문화재 지정을 위해 다시 심사를 받을 때 그 김삼대자씨가 조사위원으로 또 온 거예요. 그러면서 2년 동안 내가 작업한 것 들을 보더니 감탄을 하더라구요. 그러더니 돌아갈 때 내가 꼭 무형문화재 보유자로 만들어주겠다고 하더니 결국 그 해 무형문화재 보유자가 될 수 있었죠." 백씨는 지금도 그녀의 아버지가 만든 채반을 유품처럼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아버지의 채반을 보며 그것처럼 멋진 제품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요즘도 시간이 날 때마다 자리에 앉아 댕댕이덩굴을 간추린 다음 채반이나 소쿠리, 시루밀과 같은 전통적인 생활용품 뿐 아니라 화병이나 삼합상자나 오합상자 같이 댕댕이로 만들지 않았던 다양한 작품까지 만들어보며 전통문화 보존에 힘쓰고 있다. "52년 동안 댕댕이를 손에 놓지 않고 살아왔는데 안타까운 것은 우리 남편이 이수자가 됐을 뿐 댕댕이장을 배우려는 사람들이 없다는 거예요. 요즘 같은 시대에 댕댕이공예품보다 좋은 물건들이 넘쳐나니까 굳이 배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래도 댕댕이공예품에는 돈으로 값 매길 수 없는 소중한 그 무언가가 깃들어 있는 것 같아요. 때문에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취미라도 좋으니 댕댕이장을 배우러 왔으면 좋겠어요. 그런 언제든지 기쁘게 반기며 함께 앉아 댕댕이덩굴을 엮을 수 있죠. 그런 날들이 앞으로 많았으면 좋겠네요(웃음)." 글·사진=최신웅 기자 홍성 댕댕이장이란 2000년 9월 20일 충남도 무형문화재 제31호로 지정된 홍성 댕댕이장은 댕댕이 덩굴의 줄기를 이용해 생활용품을 만드는 기능이다. 일찍부터 우리나라에서는 댕댕이 덩굴을 이용한 수저집·바구니·채반 등 생활기물을 만들었으나, 현재는 기능이 단절될 위기에 처했다. 1992년부터 1995년 사이 전국을 대상으로 한 국립문화재연구소의 짚·풀공예 조사에서 댕댕이덩굴을 소재로 공예품을 만드는 곳은 전국에서 제주와 홍성뿐이었다. 홍성에 거주하는 기능보유자 백길자씨는 댕댕이장 뿐만 아니라, 싸리·보리짚·밀대 등 풀공예 전반에 걸쳐 솜씨가 뛰어난 재주꾼으로 알려져 있다. 도움말=충남도청 ▶댕댕이 덩굴 댕댕이 덩굴은 한자로 용린(龍鱗)·상춘등(常春藤)·목방기(木防己) 등으로 불리며 경남지방에서는 장데미 또는 장드레미, 제주지방에서는 정당·정등·정동 등으로 불린다. 그 줄기는 내구성이 강하고 탄력성이 매우 좋으며 축축한 상태에서는 잘 구부러지는 특징이 있다. 줄기 직경이 2㎜ 미만이기 때문에 공예품을 만들면 그 짜임새가 섬세하고 고운 질감을 준다. 길이가 3m에 달한다. 잎은 어긋나며 3~5개의 맥이 뚜렷이 드러나 있다. 줄기와 뿌리를 잘라서 햇볕에 말린 목방기(木防己)는 방기 대신 한약재로 해열·이뇨·신경통에 쓰고 있다. 항우도 댕댕이덩굴에 넘어진다"는 옛말은 작고 보잘것없다고 해서 깔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리킨다. 대전일보 최신웅 기자
- 2014-03-26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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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웃 도배 봉사에 자선공연도 하는 최준갑 집배원
- “벽지가 뜯어지고 장판이 찢어졌는데도 생활이 어려워 그냥 주무시는 걸 지나치지 못하겠더라고요. 동료 집배원들과 도배도 해주고장판도 교체해주면 정말 좋아하십니다. 새 집으로 이사 온 것 같다고요.” 20일 우정사업본부에 따르면 강원도 강릉우체국 최준갑(54) 집배원이 어려운 이웃을 찾아 도배와 장판을 교체해주기 시작한 것은 2005년. 이전에도 우편물 배달업무를 하면서 종종 주민들에게 작은 도움을 주기는 했지만, 강릉우체국 ‘한마음봉사단’ 단원으로 활동하면서 본격적으로 나눔을 실천했다. 최 집배원과 한마음봉사단은 매월 한 차례 강릉시 옥계면과 구정면 등지의 홀로사는 어르신들을 찾아 집 안 도배를 하고 장판을 교체해준다. 무너진 지붕이나 담장을 수리하고, 생활이 어려운 홀몸노인들에게는 연탄과 기름을 지원해주기도 한다. 비용은 집배원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은 기금으로 충당한다. 그는 노래밴드 활동을 하면서 복지시설을 찾아 어르신들이 좋아하는 옛날 가요를 부르고 연주를 하는 자선공연도 하고 있다. 관할구역 관공서에 갈 때에는 단순히우편물 배달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 주민들의 행정민원을 대신 전달해주기도 한다. 그렇다고 최 집배원이 본연의 업무를 소홀히 하는 것도 아니다. 지난해 강릉 경포대해수욕장에 설치된 ‘느린우체통’도 그의 아이디어다. 관광객들에게 1년 뒤 편지를 배달해 추억을 선사하는 ‘느린우체통’은 지역의 마스코트가 됐다. 최 집배원은 이 같은 봉사활동으로 오는 21일 ‘2013년도 올해의 집배원 대상’을받는다. ‘집배원 대상’은 우정사업본부가 업무에 충실하면서 우편서비스 향상과 사회봉사활동에 기여한 집배원을 선정해 격려하는 상이다. 지난 1985년 집배원이던 형의 모습을 보고 집배원이 됐다는 그는 “남들 모르게 좋은 일을 많이 하시고 저보다 훨씬 더 훌륭하신 집배원이 많은데, 부족한 제가 상을 받아 송구스럽다”면서 “이웃들과 기쁨과 슬픔을 나누는 집배원인 것이 행복하다”고 말했다. 한편 ‘올해의 집배원’ 시상식에서 금상은 황경두(서귀포우체국)·김문규(구미),은상은 안병준(안양)·박준혁(서울도봉)·박성용(대전), 동상은 간정길(동전주)·장기(서광주)·권이현(여의도)·장승렬(부산진) 집배원이 받는다.
- 2014-03-21 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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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양 캘린더]부산 남구 용호동 ‘W’ 등 전국 4354가구 청약시작
- 3월 둘째 주에는 전국에서 총 4354가구가 청약에 들어간다. 수도권에서 인천 부평 ‘래미안부평’이 지난 2012년 1차 분양 이후 2차분 124가구를 분양한다. 지방에서는 부산 남구에 대단지 주상복합 아파트 ‘W’(1488가구)가 청약을 시작하고 △충북 충주 ‘충주지웰’(602가구) △대구 동구 ‘율하역엘크루' (329가구) △경북 경산 ‘경산신대부적지구우미린’(445가구) △대구 달성군 ‘엠코타운더솔레뉴’(1096가구) △경남 창원 ‘신화하니엘더마린’(270가구) 등이 청약을 시작한다. 한국토지신탁은 충북 충주시 대소원면 본리 642번지 일대에서 ‘충주지웰’ 아파트를 신규 분양한다. 지하1층, 지상15층, 8개 동, 총602가구 규모에 전용 59㎡의 소형 타입으로만 구성됐다. 단지가 들어서는 충주첨단산업단지에는 액정·디스플레이 전문제조업체인 리비콘과 핀란드에 본사를 둔 글로벌 밸브 전문 생산업체 메쪼발스톤 등 2개 기업이 1043억원대 투자를 결정하는 등 다양한 기업의 투자와 입주가 이어질 전망이다. 분양가는 3.3㎡당 평균 618만원으로 책정됐고 입주는 2016년 4월 예정이다. 청약일정은 11일 1순위, 12일~13일 3순위 접수를 진행하며, 19일 당첨자를 발표한다. 계약은 24일부터 26일까지 3일간 진행된다. 아이에스동서는 3월 부산 남구 용호동에서 주상복합 아파트인 ‘W’를 선보인다. 지상 69층, 4개 동, 총 1488가구 규모에 전용 98~244㎡의 중대형으로 구성된다. 건물 높이가 246m에 달해 전체 가구의 98%에서 바다 조망이 가능하다. 최장 120m의 동간거리 확보로 단지 내 개방감을 높일 예정이다. 상업시설은 대형마트, 문화시설 등 다양한 시설을 유치할 예정이다. 광안대교를 통해 센텀시티 내 롯데백화점, 신세계백화점까지 쉽게 이동할 수 있으며 이기대자연공원과 황령산, 용호만 바닷가 등을 끼고 있어 쾌적한 정주환경을 제공할 예정이다. 대연고, 동천고, 중앙고, 배정고, 예문여고 등 학교에 배정받을 수 있다. 분양가는 3.3㎡당 평균 1400만원대로 책정됐으며 입주는 2018년 4월 예정이다. 청약일정은 12일 1순위, 13일 3순위 접수를 진행하고, 19일 당첨자를 발표한다. 계약은 24일부터 26일까지 3일간 진행된다. 대우조선해양건설이 시공하는 대구 동구 용계동 ‘율하역엘크루’가 청약접수에 들어간다. 엘크루는 지하 1층, 지상14층, 8개 동, 총329가구 규모에 전용59~84㎡의 면적대로 구성된다. 대구지하철 1호선 율하역이 도보 3분, 롯데시네마가 도보 5분, 롯데쇼핑프라자가 도보 5분 거리에 위치한다. 안일초, 반야월초, 신기중, 안심중, 정동고 등이 인접해 있다. 단지 앞에 율하천수변공원, 금호강변공원 등이 조성 중이다. 분양가는 3.3㎡당 평균 약 784만원으로 책정됐으며 입주는 2015년 12월 예정이다. 청약일정은 12일 1순위, 13일 3순위 접수를 진행하며 19일 당첨자를 발표한다. 계약은 24일부터 26일까지 3일간 진행된다. 우미건설은 경북 경산시 압량면 ‘경산신대부적지구우미린’의 분양을 시작한다. 지하1층, 지상20층, 6개 동, 총445가구 규모에 전용 73~84㎡의 중형으로만 이뤄졌다. 대구지하철 2호선 영남대역이 인근에 위치해 대구 시내로 10분 대에 이동할 수 있다. 단지 바로 옆 초등학교가 신설될 예정이며, 압량초, 경산과학고, 영남대도 가깝다. 또 단지 인근 대형마트 및 우체국, 면사무소, 파출소 등 각종 편의시설이 인접해 있다. 분양가는 3.3㎡당 평균 659만원으로 책정됐으며 입주는 2016년 5월 예정이다. 청약일정은 12일 1순위, 13일 3순위 접수를 진행하며 19일 당첨자를 발표한다. 계약은 25일부터 27일까지 3일간 진행된다. ◇당첨자 발표(3개) △부산 해운대 ‘타워마브러스 해운대’ 오피스텔(10일) △부산 강서 명지지구 ‘명지협성휴포레’(12일) △경기 화성 동탄2신도시 ‘반도유보라아이비파크3.0’(14일) 등 3곳이 청약 당첨자를 발표한다. ◇계약(7개) △부산 해운대 ‘타워마브러스 해운대’ 오피스텔 △대구 북구 ‘칠곡금호신도시서한이다음’ △강원 영월군 ‘영월미소가’ 공공임대 △부산 기장군 정관지구 ‘정관신도시이지더원5차’ △경북 예천군 ‘우방아이유쉘’ B4-2블록과 B5-1블록 △충북 충주 ‘연수계룡리슈빌II’ 등 7개 단지가 계약일정을 진행한다. ◇모델하우스(4개) 오는 14일 4개 사업장이 모델하우스를 오픈하고 손님맞이에 나선다. 코오롱글로벌은 서울 성북구 돈암동 ‘돈암정릉하늘채’의 모델하우스를 오픈한다. 지하4층, 지상16층, 10개 동, 총629가구 규모에 전용59~113㎡로 구성된다. 이중 조합원 분을 제외한 257가구가 일반분양분이다. 모델하우스는 서울 강북 미아동 66-6번지에 마련된다. 대연마루 지역주택조합이 부산 남구 대연2지구 일대에 들어서는 ‘대연마루월드메르디앙’ 모델하우스를 오픈하고 첫 조합원 모집에 나설 예정이다. 지하2층, 지상24층, 8개 동, 총 564가구 규모에 전용 59~84㎡의 중소형으로 구성된다. 모델하우스는 부산 해운대구 우동 639-1번지에 마련된다. 호반건설은 광주 동구 월남동 ‘월남2지구호반베르디움’의 분양을 시작할 예정이다. 지하 1층, 지상 16~20층 12개 동, 총 784가구 규모로 전용 59~78㎡의 중소형으로만 구성된다. 광주 서구 쌍촌동 956-7번지에 마련된다. 파라다이스글로벌은 충남 계룡시 엄사면 ‘엄사지구계룡파라디아’ 임대 아파트의 모델하우스를 오픈한다. 총 938가구 규모에 전용 84㎡의 단일면적으로 구성된다. 모델하우스는 대전 서구 가수원동1326번지에 마련된다.
- 2014-03-10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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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고] 정택화씨 별세 - 정연근씨 부친상
- ▲정택화씨 별세, 정연근(내일신문 기자)ㆍ연도(DIC 근무)ㆍ경숙(밀양우체국 보험설계사)씨 부친상=9일5시15분 부산성모병원, 발인 11일9시, 051-933-7482
- 2014-03-10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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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평·고덕 래미안 분양꽃 피었습니다
- 삼성물산이 ‘래미안 부평’과 ‘고덕 래미안 힐스테이트’를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봄 분양시장에 뛰어든다. 모두 1000가구가 넘는 랜드마크급 대단지인 데다 입지·상품 특장점이 뚜렷해 많은 관심을 끌 것으로 보인다. 5일 삼성물산에 따르면 인천시 부평구 부평5구역으로 재개발한 ‘래미안 부평’은 7일부터 분양을 시작한다. 지하 3층, 지상 최고 33층 18개동 총 1381가구 규모다. 일반분양분은 전용면적 84㎡ 77가구, 114㎡ 47가구로 구성됐다. 단지 인근에 서울지하철 7호선, 1호선 부평구청역이 있다. 경인고속도로 부평IC, 외곽순환도로 중동IC를 이용하면 서울과 수도권으로 이동이 쉽다. 부평구청과 우체국 등 관공서가 가깝고 롯데백화점, 롯데마트, 이마트 등 쇼핑시설도 갖춰져 있다. 삼성물산 관계자는 “단지 주변에 1만2000여명의 근로자와 수천 개의 협력업체를 바탕으로 인천 경제의 견인차 역할을 하고 있는 한국GM 부평공장과 각종 기업들이 자리 잡고 있어 배후 주거지로도 각광받고 있다”며 “이미 공사 마무리단계로 분양 후 6개월 후인 9월경이면 입주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이달 말 분양 예정인 고덕 래미안힐스테이트는 서울 강동구 고덕동 시영아파트를 재건축한 아파트다. 삼성물산과 현대건설의 공동사업지로 지하 3층, 지상 최고 35층 51개동 전용면적 59~192㎡ 3658가구로 구성됐다. 이 중 전용 84~182㎡ 1114가구가 일반분양된다. 고덕 래미안힐스테이트는 고덕동에서 5년 만에 나오는 새 아파트다. 지하철 5호선 고덕역을 도보로 이용 가능하고 천호대로, 올림픽대로를 통해 서울 전 지역으로 이동할 수 있다. 주변에 고덕산, 고덕천, 한강시민공원 등이 인접해 있다. 강동구 내 전통적 학군 선호지역으로 학부모들의 관심도 높다. 명덕초교, 묘곡초교, 명일중, 광문고 등으로 도보 통학이 가능하며 배재고, 명일여고, 한영외고 등 명문고교가 가깝다. 인근에 유흥업소나 유해시설이 없으며 사설 학원시설도 잘 형성돼 있다. 회사 관계자는 “3월 분양하는 2개 현장은 입지가 좋아 이전부터 꾸준히 관심을 받았던 만큼 정식으로 모델하우스를 열기 전부터 관심 고객들의 문의가 이어지고 있다”며 “올해 삼성물산의 첫 분양 단지라는 상징성과 고객의 기대치가 높아진 만큼 상품과 마케팅 등의 차별화에 노력을 기울일 것”이라고 말했다.
- 2014-03-05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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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라인 와글와글]이상적 배우자 직업 공무원·교사, 미래가 불안정해서…
- ○…경기 불황이 이어지면서 남녀 모두 장래 배우자의 이상적인 직업으로 공무원이나 교사를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네티즌들은 “사회가 재벌 위주 경제구조로 돌아가니 중산층은 몰락하고, 빈곤층은 늘어 가고. 급기야 월급 200만원 받는 공무원이 최고 직종”, “4년제 대학을 졸업한 32살의 공무원. 연봉 5000만원, 재산 2억5000만원 가진 남자와 결혼? 꿈도 꾸지 마라”, “여자 27~28살에 연봉 4000만원, 자산 1억5000만원 가진 여자도 없다. 결혼은 다음 생애에 해라”, “여성들이 말하는 공무원이란 동사무소, 시청, 우체국 공무원이 아닌 판검사나 외교관을 말하는 것이다”, “결혼 적령기에 자산 2억원 넘는 공직자는 존재할 수 없다”, “결국 서로 바라는 건 돈 많은 안정적인 직업”, “공무원 선호현상은 나라 경제가 불안정할 뿐만 아니라 미래도 암울하다는 의미”, “기초기반 경제가 두텁고 필드에서 땀흘리는 전문기술직 노동자가 대우받는 날이 와야 한다” 등의 비난을 쏟고 있다.
- 2014-01-02 16: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