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0여 년 전 버려졌던 그 섬들은 지금도 바다를 지켜보고 있다. 초여름 남해의 햇볕은 뜨겁다. 그래도 6월의 녹음이 있어 섬 구석구석 실핏줄처럼 퍼진 길을 걸을 수 있다. 생명력 넘치는 섬의 신록은 바다와 함께 아스라한 정감에 젖어드는 남해의 풍경을 보여준다. 숲속에서는 나무를 타고 올라가던 담쟁이덩굴이 고개를 살짝 내밀고, 물 댄 논에서는 개구리밥 물풀이 햇살에 반짝인다. 언제 이 섬으로 왔는지 모르지만, 담벼락 옆 텃밭에는 늘씬한 보라색 코끼리마늘꽃이 사람들의 발길을 잡는다.
섬이 버려졌을 당시 적들이 지나간 마을에서 살아남은 백성들은 먹을 것이 없어 적군의 말 똥에 섞여 나온 곡식의 낟알을 찾아 먹었다고 한다. 가난한 이 땅의 백성이 가여워서, 참혹하게 유린당한 산하와 백성의 눈물을 잊을 수 없어서, 단 한 놈의 왜적도 돌려보내지 않으려고 그는 섬 앞바다에서 죽을 때까지 싸웠다.
6년 동안 이 땅에 치욕의 상처와 큰 아픔을 주었던 일본은 명량에서 그에게 대패당한 후 겨울 대비를 위해 남해안 일대에 머물러 있었다. 침략의 원흉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일본군은 철군을 원했다. 조선을 도우러 온 명나라는 싸우지 않고 실추된 위신을 회복하는 것이 먼저였다. 일본과 명나라 사이에 뇌물과 타협이 오간 사실을 안 그는 결전을 벌일 준비와 계획을 세웠다.
드디어 일본군의 정예병 1만2000여 명을 태운 500여 척이 배가 순천을 향해 광양만 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에 맞서 명나라 300여 척, 조선 80여 척, 총 380여 척의 배가 노량해협으로 갔다. 명나라 도독 진린은 하동의 죽도 부근을 지키고, 그의 전함들은 맞은편 남해 관음포에서 일본 전선이 나타나길 기다렸다.
어둠을 타고 노량해협으로 들어오는 일본 배들은 그가 기다리는 줄도 모르고 앞다퉈 다가왔다. 컴컴한 어둠이 깔린 검은 바다에 갑자기 날아드는 불화살이 포물선을 그리자 조용했던 바다는 순식간에 아비규환의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전투는 그날 새벽 2시부터 시작됐다. 포탄과 조총 탄환, 화살이 수없이 오가고, 불길 속에서 일본군의 비명은 밤바다로 퍼져나갔다. 전투는 새벽 일출처럼 일본군의 피로 바다를 붉게 물들이며 낮까지 이어졌다. 그와 조선의 수군은 한 명의 침략자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맹렬했다. 흔히 지휘선은 최전선에서 한발 뒤로 물러나 있는데 이날 전투에서는 그러지 않았다. 일본 전선에 포위된 명나라 도독 진린을 구출하기 위해 그의 배가 앞장서 전선을 돌파하기도 했고, 적선을 추격할 때 선두로 나서기도 했다. 그것은 그의 아들 면의 죽음에 대한 복수 때문만은 아니었다.
일본 전선 200여 척이 침몰하고 100여 척을 포획하는 승리로 전투가 마무리되어갈 무렵, 마지막 저항을 하며 도망가던 일본군의 탄환이 그의 왼쪽 가슴을 뚫었다.
“이 사람의 죽음을 삼가고 삼가 말하지 말고 군사들을 놀라게 하지 마라”
노량해전에서 순국한 그의 시신은 관음포로 옮겨져 이락사에 안치되었다. 그 후 아산으로 운구하기 전까지 3개월 정도 ‘남해 충렬사’의 가묘에 안치됐다.
보물섬 남해군에는 ‘바래길’이 있다. ‘걷기 여행길’이다. 바래길 중 2012년에 개통한 13코스는 ‘이순신 호국길’로 불린다. 특별한 의미를 되새기며 걷는 길이다. 노량해협을 따라 걷다 보면 이순신 장군의 가묘가 있던 충렬사 사당과 만난다. 길은 관음포 해안을 따라 ‘이순신 순국공원’까지 이어진다. 격전지였던 관음포만 외해가 보이는 해안 공원은 ‘호국 광장’과 ‘관음포 광장’으로 나뉜다.
호국 광장에는 장군을 상징하는 조형물과 노량해전에서 전몰한 조․명 연합수군의 위령탑, 도자기 벽화로 만들어진 순국의 벽 등이 있다. 순국의 벽은 50X50cm 크기의 도자기 벽화 3797장을 이어 만들었다. 세계 최대 규모다. 광장 주변은 공원과 공연장이 둘러싸고 있다. 호국 광장에서 관음포 광장 쪽으로 가다 보면 돔형으로 만들어진 영상관이 있다. 118석 규모의 입체 영상관인 이곳에서는 노량해전 영상을 3D 영상으로 보여준다.
관음포 광장은 이순신 장군과 관련된 테마별 체험과 리더십 체험관이 있어 체험과 교육을 동시에 할 수 있는 공간이다. 노량해전이 벌어진 11월이면 ‘이순신 순국공원’에서 호국정신을 기리는 ‘이순신 순국제전’이 격년제로 열린다.
그는 노량해전에서 왜 무모할 정도로 싸웠을까?
노량해전이 있기 1년 전 선조는 일본 계책에 말려 그에게 수군을 이끌고 부산포로 출정할 것을 명했다(정유재란). 하지만 일본의 계략임을 알고 있었던 그는 큰 피해를 우려해 출정을 늦췄다. 이에 선조는 그를 파직하고 한양으로 압송한다. 사실 선조가 명분으로 삼은, ‘임금을 능멸한 죄’는 핑계였다. 조선이 어떤 나라인가. 쿠데타로 건국한 나라다. 더구나 선조는 아들에게 섭정을 시키고, 이 땅과 백성을 버리고 명나라로 도망가려 했던 군주다. 민심이 그에게 향해 있다는 걸 선조는 알고 있었다.
한양으로 압송된 그는 혹독한 문초를 당한다. 선조는 “짐은 다시는 그대를 보지 않았으면 좋겠소“라고 말한다. 그 후 그는 백의종군한다. 처참한 심정으로 수군 진영으로 내려가던 중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모친의 임종 소식을 듣는다. 그때의 심정을 난중일기에 이렇게 썼다. ”하늘이 캄캄했다.“
그해 8월 다시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그는 9월에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13척의 기적’ 명량대첩으로 전쟁의 흐름을 바꾼다. 그리고 10월에 애지중지하던 아들 면이 왜적 손에 죽었다는 비보를 받는다.
그는 전쟁이 끝나면 승패와 상관없이 더는 이 나라에서 살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결연히 싸웠다. 그것은 임금에 대한 충성이나 명예 때문이 아니었다. 생을 연장하고 싶은 몸부림은 더더욱 아니었다. 자신의 뿌리인 이 산하와 백성들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거기에는 개인적인 복수와 일본의 만행에 대한 응징도 포함돼있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잘 알고 있었던 그는 노량해전을 자신의 삶을 마감하는 전쟁으로 생각한 것이다.
6월이다. 남해군 바래길 13코스 ‘이순신 호국길’에서 우리 역사에 드문 위대한 장군이자 휴머니스트였던 그를 만나고 우리 공동체에 대해 생각해보는 건 어떨까! 새벽 5시 23분, 첫 뱃고동 소리가 들려왔다. 바다는 고요했다. 노량 앞바다에서 다시는 분노의 파도가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와 이야기 나누며 ‘이순신 호국길’을 걷는다.
여름은 누가 뭐래도 ‘물의 계절’입니다. 폭염이 시작되면 산과 들로 향하던 발길이 자연히 시원한 바다와 강, 계곡, 연못 등을 찾기 마련입니다. 앞서 나뭇가지를 타고 올라 공중에서 천상의 교향악을 연주하는 등칡꽃을 소개하면서 귀띔했듯, 우리의 삼천리 금수강산에는 땅과 하늘, 바다, 물 등 어느 곳에서든 꽃이 핍니다. 그중 연꽃과 수련을 비롯해 각시수련, 남개연, 어리연꽃, 마름, 자라풀, 통발, 물여뀌, 보풀, 물옥잠, 부들, 갈대 등 다양한 식물들이 저수지나 연못, 늪지, 습지 등에 자생하며 특유의 꽃을 피웁니다. ‘수생식물’이라 불리는 이들 중 어떤 것은 물밑 땅속에 뿌리를 내린 채 잎과 줄기를 물 밖으로 내밀기도 하고, 어떤 것은 잎을 수면에 띄우기도 하고, 어떤 것은 뿌리와 줄기를 수중에 뻗은 채 물 위를 둥둥 떠다니기도 하고, 식물체 전체가 아예 물에 잠겨서 살아가기도 합니다.
그런 식물 중 6월이면 피어나 ‘물의 계절’ 여름이 왔음을 알리는 물풀이 있습니다. 처음엔 암꽃이었다가 그다음 날부터는 수꽃으로 살기에 ‘물의 요정’이라 부르는 순채(蓴菜)가 그 주인공입니다. 지금은 이름조차 생소하지만, 20~30년 전까지만 해도 연꽃이나 수련, 마름처럼 친숙한 수생식물이었습니다. 나물 채(菜) 자가 이름에 들어 있듯, 잎과 줄기 등을 쌈과 국 등으로 식용하거나 약재로 활용했을 만큼 전국적으로 폭넓고 풍성하게 자라던 우리 꽃입니다. 하지만 근대화와 산업화의 여파로 순채가 자라던 저수지, 연못, 물웅덩이 등이 없어지거나 오염되면서 대부분 함께 사라졌고, 일부만 살아남아 멸종위기 야생식물로 지정, 관리되고 있습니다.
물이 흐르지 않고 고여 있는 연못에서 어렵사리 명맥을 이어가는 순채는 고달픈 생존 투쟁의 와중에도 어김없이 5월 말부터 늦게는 8월까지 단아하면서도 품격 높은 홍자색 꽃을 선물처럼 내어줍니다. 꽃자루마다 하나씩 달리는 2cm 안팎의 꽃은 이틀 동안 피는데, 첫날 오전 암술이 성숙한 암꽃으로 피었다가 오후가 되면 물속에 잠깁니다. 그리고 그다음 날 두 배 이상 높게 물 위로 솟아 수술이 가득한 꽃잎을 펼쳤다가 물속으로 잠깁니다. 처음 10개 안팎의 암술이 성숙한 암꽃이었다가 다음 날 20개 안팎의 수술이 암술을 감싸는 수꽃이 되어 수면 위로 높게 오르는 것은, 자기 꽃가루받이를 피해 열성 유전을 막으려는 고도의 생존 본능 결과라고 식물학자들은 설명합니다.
꽃의 크기는 지름 2cm 안팎이고, 각각 3장인 꽃잎과 꽃받침잎이 모두 꽃잎처럼 보이지만, 안쪽의 꽃잎이 바깥쪽 꽃받침잎보다 다소 길어 구분됩니다. 특히 순채의 물속줄기와 꽃줄기, 어린잎은 우무라 불리는 투명하고 끈끈한 액체에 싸여 있는데, 예로부터 약재이자 나물로 쓰였다고 합니다. 다 자란 잎은 길이 6~10cm, 너비 4~6cm 크기의 타원형으로 수면을 가득 채웁니다.
Where is it?
북쪽의 강원도 고성과 속초에서 시작해, 중부의 충북 제천, 남으로는 경남 합천, 그리고 제주도에 이르기까지 10여 곳 정도의 몇몇 오래된 연못이 순채의 자생지로 남아 있다. 제주의 경우 북제주의 선흘곶자왈을 비롯해 김녕, 동복, 덕천, 남제주의 하천과 신풍 등 6곳의 연못에 순채가 자라고 있어 비교적 만나기가 수월한 편이다. 자생지의 수는 적지만 자생지에 서식하는 개체 수는 풍부해, 찾아가기만 하면 만나기는 어렵지 않다.
우포늪. 한여름의 수면으론 온갖 수생식물들 너울거려 초록 융단을 펼쳤을 테지. 이제 초가을이다. 시들거나 저물거나, 머잖아 다가올 조락을 예감한 식물들은 벌써 초록을 거둬들인다. 초록에서 쑥색으로, 약동에서 침잠으로, 그렇게 한결 내향적인 풍색을 드러낸다. 그러고서도 장엄한 건 광활한 늪이기 때문이다. 몽환적이기까지 한 건 어디서고 좀체 볼 수 없는 이채로 아롱져서다.
우포늪은 국내에서 가장 큰 자연 내륙 습지다. 이 습지의 매력은 축구장 210개를 합친 것과 맞먹는다는 담수 규모에만 있지는 않다. 늪가에, 늪 위에, 늪 속에 수많은 생명이 씨억씨억 거센 숨을 쉬며 살아간다는 것, 즉 생태의 보고라는 데에 진정한 갈채를 보낼 수밖에 없다. 자그마치 1000여 종에 달하는 동식물이 분포한다는 게 아닌가. 이 희귀한 가치를 인정받아 1998년, 국제적으로 중요한 습지에 관한 협약인 람사르협약 보존습지로 등록되었다.
늪가로는 둘레길이 가지런히 펼쳐진다. 도보로 혹은 자전거를 대여받아 타고 우포늪의 전모를 둘러볼 수 있게 해두었다. 늪 들머리에 조성한 우포늪 생태관을 비롯해, 우포늪 생태체험장, 우포생태촌, 산토끼 노래동산, 잠자리 나라 등 체험공간도 다양하다. 늪의 드높은 가치에 걸맞은 보존과 활용에 공을 들인 흔적이 완연하니 다행스럽다.
과거의 우포늪은 참 보잘 게 없었다. 계모에게 구박받는 콩쥐처럼 무시되고 괄시받았다. 늪이란 한마디로 물에 젖어 있는 땅. 해서, 사람들은 우포늪을 쓸모없는 땅으로 여겼다. 툭하면 공장이나 농경지 조성을 위해 매립해버렸고 갖가지 생활 쓰레기를 늪에 묻었다. 1990년에는 늪 인근에 쓰레기 매립장을 건립하려다 중단되기도 했다. 우포늪의 생태와 경관이 살아나기 시작한 건 보호구역 내 사유지 20만 평을 정부가 사들여 보존에 발 벗고 나선 1998년부터였다.
“나를 제발 가만히 내버려둬!” 자연은 그렇게 외칠 테지만 사람의 귀는 어두워 들리지 않는다. 여차하면 파고 묻고, 뭉개고 찢는다. 자연 말살을 일삼는 인간의 인위는 이미 고약한 습이 되었다. 그러나 인간의 겸손하고도 적절한 개입은 썩 긍정적인 효과를 거둔다. 인간에 의해 자연이 입은 상처를 인간이 나서서 보듬는 일은 모처럼 자연으로 돌아가는, 자연과 어울려 살고자 하는 인간 내심의 표출일 수 있다. 인간 자체가 또 하나의 자연임을 자각하는 조짐일 수도 있다. 우포늪의 회생은 어쩌면 인간의 회생이기도 하다.
다양한 관목들이 늘어서 숲을 이룬 오솔길로 늪의 향이 번진다. 비릿하고 축축하고 퀴퀴하나 늪의 원초적 향이니 별미가 아니랄 것도 없다. 늪가엔 억새와 줄풀과 창포와 마름이 지천이다. 싹눈처럼 앙증맞은 개구리밥과 생이가래는 물 위에 동동 떠 낙원을 누린다. 늪 속엔 검정말과 통발, 나사말 같은 식물들이 산다지.
생명들은, 풀들은, 물 위에 있거나 물속에 있거나, 지독히도 빛의 유혹에 약하다. 한사코 태양을 향해 손을 뻗는다. 한줌의 햇살이라도 더 부여잡으려는 갈망으로 생명을 지속한다. 물과 태양과 땅, 늪가와 늪 안의 식물들은 이 셋과 굳건히 연결되었다. 늪이란 그래서 명백한 생명의 전당이다. 외면적으로는 고요히 닫힌 세계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생명들의 소용돌이로 들끓는다.
그럼에도 ‘늪’이라는 단어는 웬일로 어둡게 쓰이는가. 침체의 늪이니 망각의 늪이니 불륜의 늪이니, 한 번 빠지면 물귀신에게 붙들린 듯 영영 헤어나지 못할 곤경에 처한 상황을 흔히들 ‘늪’을 갖다 붙여 은유한다. 몸부림칠수록 더욱 가라앉는 나락을 ‘늪’에 비유한다. 이는 얄궂은 곡해에 가깝다. 늪은 생성과 생동과 창의의 도가니가 아니던가. 거기엔 침체도 망각도 불륜도 없다. 늪은 헛되이, 신의 이름을 구슬프게 부르지도 않는다.
도시의 난리통 속에서 ‘늪’에 빠진 그대여, 우포늪으로 오라. 그 생명의 숲을 보라. 진흙탕에서 피어나는 연꽃처럼, 오직 말짱한 낯으로 핼꼼 웃는, 저 식물들의 환희를 보라. 나의 것이 아니었던 질척한 욕망일랑 늪가에 내려놓고, 그대여, 저 재기발랄한 물풀의 생의(生意)를 가슴에 채우라.
탐방 Tip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둘러볼 수 있다. 대개 우포늪생태관 인근 무료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탐방을 시작한다. 탐방 둘레길인 ‘우포늪생명길’의 총연장은 8.7km. 30분에서 3시간 30분까지, 코스에 따라 탐방 소요시간은 다양하다.
불[火]의 계절 여름입니다. 붉은 태양이 땅 위의 모든 것을 태울 듯 이글거리는, 사계절 중 불의 기운이 가장 성한 시기입니다. 그런 화기(火氣)를 달래려는 듯 사람들은 너나없이 물가를 찾습니다. 계곡으로, 강으로, 바다로 갑니다. 장맛비는 물론 소낙비라도 내리면 금세 사위를 삼킬 듯 사납게 질주하는 계곡물과 흰 이빨을 드러내며 달려오는 성난 파도….
여름이면 만나곤 하는 성난 물의 모습은 여름이 곧 불과 물이 정면으로 맞서는 계절임을 일깨워줍니다. 그런 7~8월 불과 물이 상극(相剋)하는 틈새에서 피는 각별한 꽃이 있습니다. 태양의 열기를 온몸으로 받아 식히려는 듯 그늘 한 점 없는 연못, 흐르지 않는 저수지에 커다란 이파리를 잔뜩 깔고 보랏빛 영롱한 꽃을 피우는 물풀이 있습니다. 바로 100년 만에 꽃을 피운다는 가시연꽃입니다.
2m에 이르는 거대한 이파리로 1년 중 가장 강한 여름 불의 기운을 받고, 뿌리로는 강 대 강(强 對 强)으로 맞서는 물의 기운을 흡입해서인지, 생김새는 물론 꽃이 피는 과정 등 모든 것이 예사롭게 않습니다. 먼저 그 이름은 온몸에 가득 가시가 박혀 있어 함부로 다가가 멋대로 휘저을 수 없는 존재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이파리(앞면뿐 아니라 물에 잠기는 뒷면까지)는 물론 줄기와 뿌리, 꽃받침까지 식물체 전체에 길게는 1cm쯤 되는 가시가 촘촘히 나 있습니다. 전초에서 가시가 없는 부분은 꽃잎과, 가시가 송송 돋은 열매 안에 든 완두콩 모양의 씨앗뿐입니다.
가시만큼 위압적인 것은 커다란 이파리입니다. 보통 가시연꽃이 자라는 수면은 그 잎으로 뒤덮일 정도로 개체마다 여러 개가 달릴 뿐 아니라, 타원형의 잎 하나가 어른 한 사람을 휘감을 만한 크기까지 자라납니다. 한해살이 물풀이 한두 달 만에, 줄기는 어른 엄지손가락보다 굵고 잎은 2m까지 크려면 하루에 무려 20cm씩 자라야 하기에 그 과정이 눈에 보인단 말이 나올 법합니다.
이렇듯 까칠한 가시연꽃이지만, 그 꽃은 모두를 단숨에 사로잡을 만큼 매력적입니다. 물론 꽃이 피는 과정도 촘촘한 가시나 넓은 잎에 못지않게 기이합니다. 생살을 찢는 고통 속에 새 생명을 낳듯, 가시연꽃도 가시가 촘촘히 박힌 봉오리로 역시 가시투성이의 두꺼운 잎을 뚫고 올라와 지름 4cm 안팎의 꽃을 피웁니다. 꽃은 오전에 열었다가 저녁이면 오므리기를 사나흘 되풀이하다 물속으로 들어가 씨앗을 생성하는데, 꽃봉오리가 맺혔다고 해도 수온과 수심, 기후와 일조량 등이 맞아야 열리기 때문에 활짝 핀 모습을 보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까다롭기로 치면 개화(開花)보다 씨앗의 발아(發芽)가 훨씬 정도가 심합니다. 계명대 김종원 교수에 따르면 ‘자연 상태에서 가시연꽃의 종자 발아율은 4% 이하’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낮은 발아율이 역설적으로 가시연꽃의 기적을 만들어냅니다. 즉 발아가 안 된 씨앗이 수년이든 수십 년이든 발아력을 유지하다가 수온과 기후 등이 최적의 조건이 되면 발아해서 뿌리를 내리고 커다란 잎을 펼치고 마침내 꽃을 피우는 것이지요. 휴면 상태의 씨앗 속에 내재된 생명이 되살아나며 ‘백 년 만에 피는 꽃’이라는 신화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실제 2010년 강원도 경포호에서 가시연꽃이 나타나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는데, 연원을 추적한즉 1960년대 농경지 개간 이후 휴면 상태에 있던 가시연꽃의 종자가 습지 복원 사업으로 생육 조건이 맞자 반세기 만에 다시 발아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Where is it?
가시연꽃은 발아도, 개화도 까다롭지만 그렇다고 1급수 청정지역에서 자라는 것은 아니다. 큰 잎에서 알 수 있듯 영양분이 풍부한 수질, 즉 적당히 부영양화(富營養化)된 연못에서 잘 자란다. 최대 자생지로는 경남 창원의 우포늪이 꼽힌다. 우포늪을 둘러싸고 있는 마을 이름이 아예 가시연꽃마을인데, 가시연꽃 등 우포늪의 수생식물을 그대로 재현해놓은 생태체험장도 있다. 수도권에선 경기도 시흥의 관곡지가 유명하다, 충남 홍성의 역재방죽공원과 부여의 궁남지, 강원도 강릉의 경포호 등 전국적으로 20여 곳에서 자란다. 진못(사진) 등 오래된 연못이 많은 경북 경산과 영천에도 자생지가 여럿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