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진주시는 예로부터 인재 배출이 잦았던 고장이다. ‘영남 인물의 절반이 진주에서 나왔다’는 얘기까지 있을 정도다. 특히 충신이 많았다. 고려조부터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구국의 화신이라 일컬을 만한 이들의 비범한 행장이 이 고장에 잇따랐다. 그래 ‘충절의 고장’이다. 오늘날 충의(忠義)의 얼로 빛나는 진주의 각별한 역사성을 웅변하는 명소를 꼽자면? 단연 진주성이 아이콘이다. 임진왜란 때의 전사(戰史)와 의용의 서사를 고이 간직한 진주성을 둘러보지 않고 진주를 얘기한다는 건 어불성설일 수 있다.
진주성은 진주시내 강변에 있다. 성의 남벽 아래로 남강이 굽이쳐 수려한 풍광을 빚어낸다. 강물과 벼랑이 지닌 전략적 가치에 착안해 성을 구축했다. 본래 내성과 외성으로 짜인 이중구조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때 내성보다 규모가 컸던 외성은 스러지고 내성만 남았다. 성곽의 길이는 1790m, 높이는 5~8m에 달한다. 삼국시대 때 토성(土城)으로 축조됐던 진주성이 석성(石城)으로 거듭난 건 고려 말 우왕 때였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도 몇 차례 고쳐 지었다. 따라서 축성의 변천사와 기법을 들여다볼 수 있는 중요 유적으로 평가된다.
공북문을 통해 성 안으로 들어선다. 널찍하고 훤칠한 성내 공간 곳곳마다 잘 단장돼 생경한 기분을 자아낸다. 천년 고성이되 마치 신축한 것처럼 매우 미끈한 게 아닌가. 근래의 복원작업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진 걸 알 만하다. 한때는 고즈넉한 폐허와 잔해 사이에 간신히 존재했겠지만 고칠 것 고치고, 다듬을 것 다듬고, 보탤 것 보태어 회생했다. 복원사업 이전의 성내엔 민가가 가득 들어차 있었다고 한다. 그걸 다 철거해야 했다. 그러니 대대적인 복원사업이 필연이었겠다. 작업자들은 진주성의 본연과 본질에 부합하는 복원을 완수하기 위해 실력을 쏟아부었을 것이다.
성내의 지형은 리듬이 있다. 평지와 경사지, 야트막한 언덕과 구릉지, 그리고 구불구불 이어지며 거대한 타원을 그리는 성곽이 자연스러운 조화를 이루었다. 너른 잔디밭과 다양한 수목들이 초록을 뿜어 소풍과 산책을 즐길 만한 공원으로도 손색이 없다. 그러나 진주성은 어디까지나 역사의 곳집이다. 일쑤 전쟁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친 곳이다. 수성(守城)과 승전을 꾀하기 위한 갖가지 구조물이 즐비한 곳이다. 전투 지휘소로 쓰인 서장대와 북장대, 포를 쏘았던 포루, 전공을 새긴 사적비와 순절의 넋을 기리는 사당 등이 있다. 임진왜란 전문 박물관인 국립진주박물관까지 성내에 있어 답사객들의 호감을 산다.
진주성은 임진왜란 3대 대첩의 하나인 진주성대첩이 벌어진 곳으로 역사에 불멸의 이름을 새겼다. 당시 장수는 진주목사였던 김시민 장군. 1592년 10월 김시민은 전라도와 이어지는 전략 요충이었던 진주를 삼키기 위해 쳐들어온 2만여 명의 왜군을 물리쳤다. 김시민이 거느린 병력은 관군과 의병을 합쳐 3800여 명에 불과했다지. 중과부적 상황이었지만 통쾌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건 김시민의 명민한 지략이 작동해서였다. 이를테면 그는 성 밖에 주둔한 의병들에게 왜군을 교란할 수 있는 교묘한 작전을 전개하게 했다. 성내의 부녀자들에게 남자 옷을 입혀 군사가 많아 보이게 했다. 야간엔 악공들의 피리 소리로 왜군의 심리를 교란시켰다.
지략뿐인가, 김시민은 개혁적 성향의 무장이라서 휘하를 다루는 방법에서도 관행을 타파했으니 매사 솔선수범으로 군대의 사기를 북돋웠다. 신식 병기 동원에도 신경을 썼다. 이래저래 승전은 애당초 떼어놓은 당상 같은 것이었을지도. 하지만 김시민은 전투 막판에 왜군의 총탄을 맞고 순절했다. 그때 나이 38세였다. 그가 숨을 거두자 하늘은 핏빛으로 물들었고, 성내 백성들의 곡소리가 천둥처럼 울려 퍼졌다던가. 비단 김시민을 애도하는 호곡뿐이었으랴. 대첩이 끝난 자리에선 죽은 자들을 끌어안은 산 자들의 오열이 터져 나왔으리라. ‘조선왕조실록’은 당시의 참혹한 정경을 적치여산(積置如山), 즉 ‘시체가 쌓인 모습이 산과 같다’고 기록했다. 서애 류성룡은 ‘징비록’을 통해 ‘사방 30리 안에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해 가까이 가기 어려웠다’고 했다. 진주성은 일종의 성지(聖地)다. 죽음으로써 나라를 지킨 선인들의 역사가 선연한 게 아닌가. 전쟁에 따르게 마련인 지옥의 묵시록을 술회하는 성이라는 점에서는 반전(反戰) 메타포가 응축된 곳으로 읽을 수도 있겠다. 여하튼 전쟁이란 야만의 얼굴을 하고 있다. 수시로 전쟁에 휘말릴 수밖에 없는 게 인간의 슬픈 숙명이지만.
다산 정약용이 극찬한 ‘진주검무’
진주성 남쪽 기슭, 성곽에 인접한 곳엔 촉석루(矗石樓)가 있다. 크고 당당하고 수려한 누각이다. 한때 국보로 지정됐으나 한국전쟁 때 불에 타 지정을 해제했다. 지금의 모습은 1960년의 보수작업을 통해 얻었다. 진주성 아래로 굽이치는 남강과, 저 멀리 산야까지 한눈에 들어오는 진주성 최고의 전망대다. 조선 선비들이 풍류와 사색을 즐겼던 영남 제일의 정자다. 전투 지휘소이기도 했다. 따라서 촉석루 역시 전쟁이라는 부조리극이 낳은 상처의 전시장이기도 하다. 촉석루 아래 강변에선 진주성대첩 즈음 한 여인이 왜장을 끌어안고 남강에 투신 자결, 영원히 남을 충절의 화신이 됐다. 바로 논개다. 진주 관기(官妓)였던 그의 재능은 미색으로 향기를 뿜는 데에만 그치지 않았음인가. 시대를 읽는 냉철한 눈까지 겸비했나? 그는 기꺼이 한 몸 바쳐 한 시대의 참화에 빛을 흩뿌렸다. 촉석루 아래 강변엔 논개가 왜장과 함께 투신한 바위 ‘의암’(義庵)이 있다.
다산 정약용은 어느 날 촉석루에 유람을 왔다가 ‘일개 작은 여인이 왜적의 우두머리를 섬멸하다니 이 얼마나 통쾌한가?’로 시작되는 ‘진주의기사기’(晋州義妓祠記)를 썼다. 논개의 거룩한 행장을 기리는 글이다. 다산이 진주에 와서 탄복한 게 하나 더 있다. 바로 진주에 전승돼 오늘날까지 맥이 이어지고 있는 ‘진주검무’를 보고 찬탄했던 것. 검무는 여성 무용수들이 무사 복장을 하고 칼을 휘저으며 추는 춤이다. 촉석루에 앉아 이 춤을 감상한 다산은 참을 수 없는 흥에 겨웠나? 그는 ‘무검편증미인’(舞劍篇贈美人, 검무를 추는 미인에게 드림)이라는 제목의 시를 지었다. 검무를 추는 여인의 매력적인 자태와 춤사위의 삼엄한 격정을 생생하게 묘사한 명편이다. 무불통지(無不通知)의 석학이었던 다산은 음악과 춤에도 조예가 깊었다. 음악과 악기를 연구해 ‘악서고존’(樂書孤存)이라는 책을 쓰기도 했다. 이런 다산이 진주검무를 시로 써서 극찬했다. 진주검무는 1967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됐다. 초대 예능보유자는 ‘진주권번 출신의 마지막 예인’ 고(故) 김수악이다. 김수악이 소리를 하고 춤을 추면 목석도 들썩였단다. 춤으로 도가 튼 달인이었다. 진주검무의 맥은 오늘날 예능보유자 유영희에 의해 이어지고 있다. 그는 70대에 접어들었지만 예인다운 열정은 여전히 뜨겁다. 춤사위는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었고.
김길수 진주문화원장
“일제강점기 때 기생 단체도 독립운동에 나섰다”
진주의 자연지리 가운데 빼어나기론 단연 남강이다. 시내를 가로지르며 굽이치는 남강의 폭은 넓고 물살은 유유해 아름답다. 예로부터 진주 사람들이 기대어 살아온 생명의 젖줄이다. 진주의 보배에 해당하는 진주성이 남강가에 있는 데에서 알 수 있듯이, 진주의 역사와 문화는 남강과 함께 흘러왔다. 그렇다면 진주의 문화답사 1번지는? 김길수 문화원장은 진주성과 진주성 안에 있는 촉석루를 꼽는다.
“진주성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실로 많다. 그러나 진주성을 찬찬하게 답사하는 이는 드물어 아쉽다. 대체로 촉석루와 논개 유적인 의암만 훑어보고 돌아가는 경우가 많다. 진주성을 한 바퀴 도는 온전한 답사 방식을 채택하면 좋겠다. 성 안에 있는 국립진주박물관 관람과 남강변에 조성된 성 밖 산책로를 통해서도 역사의 숨결을 음미할 수 있다.”
‘의기 논개’ 역시 진주의 대표 캐릭터다. 논개의 행장이 지역 정서에 미친 영향엔 어떤 게 있을까?
“일개 기녀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건 세계 역사상으로도 논개가 유일무이하다. 나라를 위하는 일엔 신분의 귀천이 따로 없다는 걸 실천한 인물이 논개이자 논개 정신이다. 따라서 지역 정서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를테면 3.1만세 운동 때 진주에선 기생 독립운동 단체가 조직돼 국권 회복에 앞장섰다.”
‘진주검무’는 물론 가무악(歌舞樂)의 대가였던 고 김수악 선생의 예술은 현재 어떤 식으로 전수되고 있는지?
“김수악 선생이 양성한 제자들이 뒤를 잇고 있다. 진주에서 교방예술의 맥이 면면히 이어지는 셈이다. 우리 문화원은 선생의 제자들을 문화학교 강사로 영입해 강의를 맡기고 있다. 향후 ‘김수악 기념관’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도 한다.”
전통 민속이 흔히 현대의 풍속에 밀려 퇴색하고 있다. 반면 진주에선 ‘진주 소싸움’의 명맥이 이어져 흥미롭다.
“농업이 번성했던 과거부터 진주 사람들은 농한기에 소싸움을 즐겼다. 일설엔 진주가 신라와 백제의 경계지역이라 신라와 백제 편으로 나눠 소싸움을 벌였다는 얘기도 있다. 한편 소싸움 무대로 적격인 남강 백사장이 있어 명맥 유지가 가능했던 측면도 있다.”
주요 문화원 사업을 소개해달라.
“외람된 얘기지만 진주문화원은 전국 문화원 중 으뜸이라 자부한다. 지역 문화에 대한 시민들의 식견과 애착을 토대로 인화단결을 꾀해온 결과라고 본다. 중점 사업은 진주의 ‘의로운 정신’을 선양하기 위한 콘텐츠 개발이다. 지속적으로 순절 의병들을 발굴, 연구해왔다.”
타지의 문화원들과 네트워크를 형성해 사업을 추진한다지? 이는 매우 인상적이다.
“순절 의병들을 찾아내고 조명하기 위해 의병 활동이 많았던 전라도의 여러 문화원들과 손잡고 다양한 사업을 펼치고 있다. 어떻게든 의병정신을 선양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아울러 우리 문화원은 전국 각지의 문화원과 자매결연을 맺어 문화예술 교류사업을 하고 있다. 이건 앞으로 더 확대해나갈 방침이다.”
습여성성(習與性成)이라는 말이 있다. 곧 습관이 천성을 이룬다는 말이다. 습관에는 마음의 습관과 몸의 습관이 있다. 두 습관은 서로 연결되어 있지만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큰 스승 퇴계가 마음을 어떻게 다스려 고결한 성품을 갖게 되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논어’ 첫머리에 학이시습지불역열호(學而時習之不亦說乎)라는 말이 나온다. ‘배우고 배운 것을 때때로 익히니 기쁘지 아니한가’라는 뜻이다. 여기서 익힌다는 습(習)의 뜻은 몸으로 실천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퇴계는 살아서도 존경받는 대학자였지만 사후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조선 유학의 큰 별이 되었다. 그의 생애와 생활 습관을 살펴봄으로써 퇴계의 인품이 습관을 통해 어떻게 가꾸어졌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퇴계는 죽는 순간까지 타인을 향한 겸양과 섬김의 자세, 귀함과 천함을 가리지 않고 사람을 대하는 평등사상을 실천했다.
퇴계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은 두 학자가 있는데 성호 이익과 다산 정약용이다. 다산 정약용은 퇴계에 대해 이르기를 “공정한 인물평, 흐트러지지 않는 수양 공부, 겸양의 태도, 연구와 진리 추구, 순수하고 지극한 정성, 바르고 곧고 엄격하고 과단성 있는 점, 이러한 것들이 퇴계를 사숙하고 흠모하는 이유”라고 밝혔다.
퇴계의 어린 시절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부친은 그가 태어난 지 7개월 만에 마흔 나이로 죽고 모친 박 씨는 남은 7남매를 키우느라 농사일과 양잠 등으로 고된 삶을 살아야 했다. 어머니는 자식들을 훈계할 때 남을 위해 희생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과 사람으로서 해야 할 것과 해서는 안 될 일들을 엄하게 가르쳤다. 아버지의 부재는 그를 경서 공부로 이끌었고, 성현들의 가르침을 통해 배운 것을 실천하는 삶을 살았다.
퇴계의 언행록에 그의 습관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데 “새벽에 일어나 반드시 향을 피우고 조용히 앉아 하루 종일 책을 읽으셨다. 한 번도 나태한 모습을 뵐 수 없었다”고 했다. 무더운 여름날 퇴계가 의관을 정제하고 책 읽는 모습을 본 형이 옷을 벗고 시원하게 앉아 공부할 것을 권했지만 듣지 않았다. 혼자 방 안에 있어도 천 사람, 만 사람의 가운데 앉아 있는 것처럼 생각해야 한다며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퇴계의 독서법은 다독이 아닌 정독과 숙독이었으며, 공부의 목적은 사람다운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었다.
공부는 ‘중용’에 나오듯 철저하고 독실하게 했다. 첫째 넓게 공부하고(博學), 둘째 자세히 묻고(審問), 셋째 신중하게 생각하고(愼思), 넷째 바르게 분별하고(明辯), 다섯째 돈독하게 행동하는(篤行) 것을 목적으로 했다. 그는 항상 거경궁리(居敬窮理)하는 자세, 곧 경건함 가운데서 사물의 이치를 찾으려고 했다.
퇴계가 평소에 좌우명으로 삼고 지키려 한 내용이 목판본으로 제작되어 전해지는데, 먼저 간사하고 사악한 생각을 하지 않는 것(思無邪), 자기 스스로를 속이지 않는 것(毋自欺), 홀로 있을 때도 늘 삼가는 것(愼其獨), 공경하지 않음이 없는 것(毋不敬) 네 가지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실천하기 어려운 것이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 자신을 속이지 않는 것이다. 곧 자기 자신에게 진실한 것이다. 퇴계는 공경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갈고닦은 후 이를 근거로 이웃을 편안하게 하고자 했다.
학문을 통해 퇴계가 추구한 것은 경쟁에서 승리도 아니요 지식으로 명성을 얻기 위함도 아닌 오직 사람다운 삶, 향기를 지닌 난초와 같이 인격을 갖춘 모습이었다. 사람에게 부여된 성(性)은 인의예지다. 유학에서 공부란 바로 감정의 발현이 치우치지 않도록 가다듬는 것이다. 모든 상황에서 중용을 유지하며 앎을 몸소 실천하는 사람, 곧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것이 군자이고 성인이다.
퇴계 이황(李滉, 1501~1570)은 조선 전기 성균관대사성, 대제학 등을 역임한 문신이며 성리학을 연구한 성리학자다. 주자는 성리학에다 태극도설에서 말하는 태극과 음양의 이론을 구체화해서 성리학의 우주론, 이기론을 완성한다. 태극은 이고 음양과 오행은 기에 속한다. 이와 기가 합해져서 만물이 태생한다는 이론이다. 퇴계는 주자의 이기론을 연구하여 이를 상위 개념인 우주만물의 근본 원리로 규정하고, 기를 하부 개념으로 분리해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완성했다. 퇴계는 이기론에 근거한 사단칠정론을 통해 인간의 인의예지와 칠정의 발현을 깊이 연구하고 윤리와 도덕을 통한 인간성 회복을 꿈꾸었다.
퇴계의 부부관은 서로 공경하되 친밀성을 잃지 않는 것이었다. 서로를 손님처럼 대하는(相敬如賓) 것이다. 그는 말하기를 “군자의 도가 부부에서 시작된다고 한다. 그런데도 세상 사람들은 모두 예와 존경을 잊어버리고 서로 버릇없이 친하여 마침내 모욕하고 거만하고 인격을 멸시해버린다. 이런 일은 서로 손님처럼 공경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퇴계는 두 번 결혼했는데 첫째 부인 허 씨는 다섯 살과 한 달 된 어린 자식을 남겨두고 세상을 떠났고, 둘째 부인 권 씨는 정신이 온전치 못하여 정상적인 부부생활을 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그런데도 부인을 정성껏 보살피고 공경했다. 순천에 사는 제자 이함형이 부인과 사이가 좋지 않아 혼인하고도 동침하지 않았는데, 순천 집에 가는 제자를 불러 아침 식사를 대접한 후 부부의 도리에 관한 서간을 써주어 부부 금슬을 좋게 하고 자녀를 낳아 행복하게 지내게 했다고 한다.
퇴계는 편지 3154통을 남겼는데 거의가 60세 이후의 것으로 평균 3일에 두 통의 편지를 쓴 것이다. 손자 이안도의 혼인 때도 한 통의 편지를 보냈는데 내용은 “천 번 만 번 경계하거라. 무릇 부부란 인륜의 시작이고 만복의 근원이니 아무리 지극히 친밀하고 가까워도 지극히 삼가야 하는 자리다”라며 부부의 바른 도리를 전하고 있다.
인향만리(人香萬里)라는 말이 있다. 배우고 깨달은 경서의 내용을 좌우명 삼아 덕행일치의 삶을 실천함으로써 우리나라 유학의 큰 스승으로 우뚝 선 퇴계 선생의 인품의 향기가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1801년 강진 동구 밖 주막집의 옹색한 뒷방에 몸을 의탁하는 것으로 귀양살이를 시작했다. 처음 그에게 쏟아진 건 냉대뿐이었다. ‘서학을 믿는 대역죄인’이라는 딱지가 붙은 그를 사람들은 전염병자 대하듯 배척했다. 유배의 시작은 그렇게 비참했다. 그러나 기이하도록 강인한 다산은 운명의 농간에 굴종하지 않는 놀라운 재능을 발휘했다. 유배의 고난을 학문과 정신의 도약대로 삼아 오히려 일취월장했다.
강진군 도암면 귤동마을 만덕산 기슭에 있는 다산초당. 다산은 강진에서의 귀양살이 18년 중 10년을 이곳 다산초당에서 보냈다. 사무치는 고독을 피할 수 없는 게 유배다. 고결하고 개결한 풍모를 유지한 다산이었으나 때로 서러워 대성통곡을 했던가 보다. 이런 시구(詩句)가 있다. ‘취하여 산에 올라 목메어 우니/ 울음소리 푸른 하늘에 울려 퍼지네.’
그러나 다산은 자폐적 감상이나 자기연민에 젖어 지낼 나약한 사람이 아니었다. 잠시잠깐 외로움과 설움에 잠길망정, 그건 지나가는 바람 같은 것에 불과했다. 그는 유배의 불운을 공부로 집어삼켜 해치웠다. 책상다리를 하고 일단 서책 앞에 앉았다 하면 일어날 줄 모른 다산이었다. 오죽했으면 방바닥에 눌려 닳은 복숭아뼈에 세 번이나 구멍이 났겠는가.
이런 공부벌레가 드물다. 이런 기적적인 학문의 포식자가 다시없다. 이토록 초인적인 정진을 통해 다산은 이곳에서 학문과 사상을 정점까지 끌어올렸다. 다산초당은 이른바 ‘다산학’의 산실이며, ‘조선실학’의 태실이다. 불후의 명저 ‘목민심서’, ‘흠흠심서’, ‘경세유표’를 비롯해 자그마치 500여 권에 이르는 갖가지 경집과 문집이 이곳에서 생산되거나 기획되었다. 그 다산성과 품질의 우수성은 세상을 경악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다산이라는 거목의 전모를 헤아리기란 어쩌면 가당치 않을 수도 있다. 이런 얘기도 있지 않던가. ‘다산을 모르는 사람도 없지만, 다산을 아는 사람도 없다.’
다산초당은 원래 고산 윤선도의 가문인 해남 윤씨네 소유의 산정(山亭)이었다. 그런데 다산의 어머니가 윤선도의 증손인 공재 윤두서의 손녀였다. 이런 연고로 다산이 다산초당에 거처하게 됐던 거다. 다산초당은 중앙에 있는 본채 초당과 좌우편에 있는 동암과 서암으로 이루어졌다. 동암에는 ‘보정산방’(寶丁山房)이라 쓴 편액이 있다. ‘정약용이라는 보배가 머문 산방’이라는 뜻을 지닌 이 편액은 추사 김정희가 썼다. 다산보다 24세 연하였던 추사는 경학을 배우거나 차를 나눔으로써 다산과 교제하며 지냈는데, 편액으로 흠모의 마음을 전한 셈이다.
유배라는 궁지에 몰렸으나 다산은 많은 제자를 양성했다. 당대의 걸출한 인물들과의 교유도 활발했다. 특히나 절친하게 지낸 승려 둘이 있는데, 저 아래 해남 두륜산 일지암에 머물렀던 초의선사와 여기 만덕산 백련사의 주지였던 혜장이 바로 그들이다. 다산초당은 이렇게 학문 전당이자 담론과 우정이 오고간 사교의 장이기도 했다. 진흙을 딛고 올라오는 연꽃처럼, 고통스러운 유배를 차라리 자양으로 삼아 삶다운 삶의 정상으로 날아오른 다산의 행장이 선연하게 서린 유적지라는 점에서 성스럽기까지 하다.
그런데 다산초당의 특별한 가치가 또 하나 있다. 다산이 이곳에 조선 원림의 상징이라 일컬을 만한 정원을 조성했다는 게 그렇다. 유배객이 정원을? 언뜻 낯설게 들린다. 다산은 수원의 화성(華城)을 설계한 건축공학자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초당 일곽의 조경에 무신경했을 리 없다. 유배의 갑갑한 심사를 해갈하기 위해서라도 정원 조성이 필요했을 테다. 다산은 우선 연못을 파고 뒷산의 물을 끌어들여 작은 폭포를 만들었다. 연못 가운데에는 갯가에서 모아 가져온 괴석들로 석가산(石假山)을 만들어놓고 ‘진짜 산보다 더 낫다’고 흡족해했다. 연못 주변엔 관상수를 심고 곳곳에 화단을 만들어 화초를 가꾸었다. 다산의 시를 보면 초당에 심은 식물 수가 30종에 달한다. 그렇다면 지금의 정원이 다산 생시의 바로 그 정원? 초의선사가 그린 ‘다산초당도’와 비교하면 더러 다르다. 예컨대 원래 연못은 상지와 하지 두 곳이었으나 지금은 하나뿐이다. 초가였던 집들을 기와집으로 복원한 건 내내 입길에 오르고 있다.
답사 Tip
다산초당 들머리에 다산박물관이 있다. 다산의 친필 간찰과 다양한 유물들을 볼 수 있다. 다산초당에서 천년고찰 백련사로 이어지는 오솔길도 빼어나다. 다산이 자주 걸었던 길이다. 거리는 약 1km.
“새벽이나 늦은 밤에 방이 찬가 따뜻한가 항상 점검하고 요 밑에 손을 넣어보고 차면 항상 따뜻하게 몸소 불을 때드리되 이런 일은 종들을 시키지 않도록 해라. 그 수고로움도 잠깐 연기 쏘이는 일에 지나지 않지만, 네 어머니는 무엇보다 더 기분이 좋을 것인데, 너희들도 이런 일을 즐거이 하지 않느냐?”
조선 후기 대실학자 다산 정약용이 천리 먼 길 유배지로 떠나 살면서 지아비로서의 애틋함과 가족을 향해 노심초사하던 내면을 담은 편지는 지금 읽어도 절절하다. 당시 유배지 강진에서 남양주 마재마을까지 한없이 느릿한 방식으로 아들을 향한 끊임없는 부성을 전했다. 지금처럼 이메일이나 스마트폰, SNS 등으로 빠르게 마음이 전송되는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 방법이었을 텐데.
경기도 남양주는 다산 정약용의 고향이다. 이곳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고, 후에 18년의 유배 생활에서 돌아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살았던 곳이다. 다산을 생각하면 다산초당이 있는 유배지 전라도 강진을 먼저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물의 고장으로 알려진 남양주는 팔당 호숫가에 위치한 다산의 생가와 다산유적지가 있어서 인문 여행지로 의미 있다. 그리고 주변에 북한강과 남한강의 두 물줄기가 부드럽게 합쳐져 만나는 곳, 두물머리의 수려한 풍광이 곧잘 그곳으로 발걸음을 이끈다.
결국은 만나는 인연, 두물머리
새벽길은 언제나 상쾌하다. 남양주로 향하는 길에 들러보는 두물머리의 새벽. 두물머리는 금강산에서 발원한 북한강이 양수리 남한강에서 합류한다. 그렇게 되기까지 중간에 여러 경로의 길을 돌고 돌지만 결국은 하나가 되는 인연이다. 어떻게든 서로 만나게 되는 자연의 순리처럼 강줄기가 만들어낸 새벽 풍경은 신비롭다.
어스름한 두물머리의 새벽 공기는 쾌청. 이른 아침에 피어나는 물안개 속에서 400년 나이 먹은 느티나무가 두물머리의 파수꾼처럼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날씨에 따라 멋진 일출을 보지 못하면 어떠랴. 강 건너 산을 감싼 물안개 사이로 뱀섬이 아련하며 가슴이 저릿저릿하다. 그 너머로 유려한 곡선으로 겹겹의 능선이 아스라하다. 빳빳한 자세로 돛을 세운 황포돛배가 오롯하다. 어슴푸레한 여명의 안개 범벅 속에 파묻혔던 시간을 가끔씩 떠올리는 기억의 공간으로 만들어두는 일, 짜릿하다.
두물머리의 새벽 의식은 길지 않다. 이윽고 서늘함이 가신 물길 따라 산책하다 보면 주변에 전망 좋은 브런치 카페도 있어서 여유롭게 쉬어볼 만도 하다. 일상에 브레이크가 걸려버린 요즘, 새벽길 달려와 반길 두물머리가 있다니. 머잖아 연꽃의 운치를 보여줄 차례다.
인문 여행지 남양주 마재마을
자동차로 15분 정도 더 달리면 남양주의 다산 생가가 금방 나타난다. 소박한 듯 기품이 느껴지는 생가 뒤편에는 다산 묘소가 있다. 정쟁에 휘말려 강진 유배 생활을 했지만 다산은 이곳에서 났고, 생을 마감한 곳도 여기다. 남양주의 아들이다. 다산의 5대조부터 자리 잡고 살았던 땅이다.
다산유적지에는 다산기념관, 다산문화관, 실학박물관, 거중기, 다산 문화의 거리가 자리를 잡고 있다. 주변으로 다산생태공원과 남양주 8경이 둘러 있고, 자연 속으로 북한강 자전거길이 이어져 있다. 산과 강으로 어우러진 다산 생가를 중심으로 슬로시티 남양주의 팔당 다산길을 라이딩 행렬이 시원하게 휙휙 지나간다. 팍팍한 일상을 벗어나고픈 언택트 여행자들이 넉넉히 위안을 얻는다.
또한 손 타지 않은 자연 마을답게 북한강을 앞에 두고 남양주 유기농테마파크가 조성돼 있어 들러볼 만하다. 우리의 24절기에 따른 농사와 의식주 문화를 알 수 있는 생활의 면면이 전시되어 있다.
문 밖으로는 야외 공연장과 동물 체험장, 체험실, 카페테리아 등이 갖추어져 있어 가족 단위 방문객이나 연인들로 가득하다. 당연히 슬로시티 남양주의 농작물 체험 농장이 많다. 그중에 딸기농장에 가면 유기농 딸기를 직접 따서 다양한 요리 체험을 할 수 있다.
다산 생가인 여유당에 들기 전 앞마당엔 수원성 축조 과정에 쓰였던 당시 실제 크기의 거중기를 만나게 된다. 실학정신의 실천을 엿볼 수 있는 역작이다. 여유당은 정갈한 한옥이다. 여유당(與猶堂)이라는 당호는 노자(老子)의 ‘도덕경’에 나오는 말로 ‘여(與)함이여 겨울 냇물을 건너듯이, 유(猶)함이여 너의 이웃을 두려워하듯이’라는 글귀에서 따온 말이라고 한다.
관료로서 나라의 부패를 꾸짖던 검소함이 담긴 여유당이다. 고택의 구석구석을 살피다 보면 다산이 유배 시절 가족들과 떨어져 살았던 세월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조선 후기 실학을 집대성하고 500권이 넘는 저서를 남긴 석학이지만, 아버지나 지아비로서의 간곡한 면모를 알 수 있는 기록도 제법 남겼다.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1801년 전라도 땅 강진으로 유배될 당시 다산의 나이가 40세였다. 아비로 인해 벼슬길에도 오를 수 없는 자식들을 위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간절하고 세세하게 편지로 소통했다.
부모 곁에 두고 가르칠 수 없어 노심초사하는 아비의 마음이 느껴진다. 친구 사귀는 법, 글을 읽고 쓰고 생각하는 방법, 정보의 중요성, 밭을 가꾸고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일, 인간관계, 술맛을 아는 것, 잘못을 꾸짖거나 칭찬하기, 부모를 위한 생각 등을 세밀하게 전한다. 정약용은 당대 대학자이기도 했지만 자상하고 정이 넘치면서도 깐깐한 아버지이기도 했다.
아직도 효를 강조하고 자식 걱정에 노심초사한다고 누군가는 ‘꼰대’라 말할 법도 한 세상이다. 하지만 시대를 앞서간 선구자의 말씀은 200년이 지났어도 지당하기 그지없다. 아는 만큼 보이고 아는 만큼 받아들이는 것이라 하니 이해와 해석은 각자의 몫일 뿐.
다산의 저서 ‘유배지에서 보내는 편지’는 어린이용으로도 출간되어 있으니 부모의 마음을 전하는 독서로도 좋을 듯하다. 아이들이 어릴 적 읽었던 책이어서 오래전 기억이 난다. 200여 년 전의 내용이지만 시공을 넘어서 부모 자식 간의 소통 능력은 이 책으로도 충분하다 하겠다.
“몸져누운 아내가 해진 치마를 보내왔다. 천 리의 먼 곳에서 본마음을 담았구려. 오랜 세월에 붉은빛 이미 바랬으니 늘그막에 서러운 생각만 일어나네. 재단하여 작은 서첩을 만들어서는 아들 경계해주는 글귀나 써보았네. 바라노니 어버이 마음 제대로 헤아려서 평생토록 가슴속에 새겨두거라.”
유배 시절 아내 홍 씨가 보낸 빛이 바랜 다홍치마 여섯 폭을 받아 들고 그리움에 슬퍼하며 치마를 잘라 두 아들을 위한 서첩을 만들어 보낸 것이 ‘하피첩’이다. 삶을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철학과 인생의 지침을 담은 아버지의 마음이었다. 그리고 혼인을 하는 외동딸에게는 남은 치마폭에 ‘매조도’를 그려서 보냈다. 아버지의 마음이 담긴 이런 선물을 받아 든 자식들의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멀리서나마 지아비에게 사랑을 전하는 부인 홍 씨의 마음도 헤아려보게 된다.
이 땅의 대석학, 다산
생가 옆에 자리한 다산기념관과 다산문화관은 다산의 삶과 사상을 한눈에 살필 수 있는 곳이다. 다산기념관에는 다산의 친필 서한 간찰(簡札), 산수도 등과 대표적 경세서인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사본이 전시되어 있으며, 특히 실물 4분의 1과 2분의 1 크기의 거중기와 녹로가 눈길을 끈다.
200년 전 조선의 위대한 학자를 현대적 시각으로 재조명한 모습을 볼 수 있는 다산문화관, 그리고 맞은편의 실학박물관은 2개 층으로 전시실과 북 라운지가 있다. 천천히 빠져 들어가는 시간이다.
실학박물관 옆의 돌계단을 오르면 다산정원이 푸르게 펼쳐진다. 평화로운 정원을 거닐며 역사 속 대석학의 인간적 고뇌와 철학을 마음에 담는다. 빠르게 변해버린 현대의 가족 간에 부모와 자식으로서 꼭 짚어볼 만한 메시지를 전한다. 200년이 훌쩍 넘은 지금 다산 정약용 선생의 마당에 와서 비로소 알아가는 그분의 인간미와 지적(知的) 서사, 과연 그분이 꿈꾸던 세상이 되었는지.
남양주 마재마을을 다녀와서 오래전 책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1권을 들췄다. 남도답사 1번지로 꼽았던 전남 강진을 초반에 소개할 때 다산의 이야기를 읽은 기억이 있어서였다. 유홍준 교수는 그분을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 다산 정약용을 어떻게 말할 것인가 무던히 고심했다. 사실 나 또한 이 시대 대부분의 지식인처럼 다산 정약용을 존경하고 사모한다. 만약 단군 갑자 이래 이 땅의 가장 존경받을 인물을 꼽는 한국갤럽의 사회조사가 있다면 ‘학삐리’ 사회에서는 그분이 단연코 1등을 차지할 것이다.”
마재마을에서 만난 조선 최고의 대학자 다산 정약용, 계절의 푸릇함과 함께 느닷없는 배움의 욕구가 부활하는 순간이었다. 코로나19 때문에 푸르러가는 시절을 놓칠 뻔했다.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다산로 747번 길 11(마재마을)
임철순 언론인ㆍ전 이투데이 주필
20년간 국내외 문화재를 펜화로 그려낸 김영택 화백이 전시회 1주일 전인 1월 13일 76세로 타계했다. 서울 관훈동 인사아트센터에서 1월 20일 시작된 ‘김영택 펜화전’은 주인공 없이 2월 15일까지 열린다. 전시에는 고인의 펜화 작품 40여 점과 함께 펜촉 등의 유품이 출품됐다.
나는 개막 다음 날 찾아가 펜촉을 사포로 갈아서 0.03㎜ 굵기로 수십만 번 세밀한 점과 선을 그어온 열정과 섬세함을 잘 감상했다. 대장암으로 투병하면서도 화업 30년을 결산하는 전시에 공을 들인 고인은 한 인터뷰에서 “펜화와 함께한 삶 자체가 축복이었기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지내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전시에는 ‘질사모’ 회원들과 함께 갔다. 질사모는 불세출의 테너 베냐미노 질리(Beniamino Gigli, 1890~1957)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질리를 사랑하는…”이라고 소개하면 사람들이 발음만 듣고 철학도 모임인 줄 아는 경우가 많다. ‘질사모’는 음악으로 시작됐지만 문학 미술 등 문예 전반에 대한 애호와 감상, 지식과 정보를 공유하는 동호인 단체다.
하여간 질사모 단톡방에 그의 죽음을 알리자 여러 반응이 올라왔다. “화가들은 자기 전시회 기간에 영면하는 걸 큰 복으로 알았다지요?” 처음 듣는 말이었다. “서예가는 붓 잡고 선종하시고요.” 이건 서예가는 아니지만 붓 잡고 끼적거리는 나 들으라고 한 말이다. “저는 임종처를 벌써 정해두긴 했는데 어떻게 될는지….” 죽는 장소까지 정해두었다니 어딘지 자못 궁금했다. “불교에서는 강의 도중 쓰러지는 걸 학문열반(學問涅槃)이라고 합니다.” 정말 그런가? 잘 모르겠지만 그렇다면 그런 줄 알아야지 뭐.
내가 “그러면 언론인은 어떻게 해야 된대유?” 하고 물었다. 그러자 한 사람이 신문을 읽다가 가라고 했다. 실제로 “나는 신문 읽다가 신문을 쥐고 가고 싶다”고 한 분이 있다는 것이다. 신문기자(교열)이면서 소설가 수필가였던 민기(閔幾, 1925~2018) 씨의 말이라고 한다.
듣고 보니 그럴 법하긴 했지만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가수가 혼신의 힘을 다해 공연 중 무대에서 쓰러지고, 미술가가 화폭에 마지막 붓질을 하다 숨을 거두고, 시인이 독자들 앞에서 시 낭송을 하다 떠나가는 건 그런대로 폼 나고 그럴듯해 보인다. 그러나 신문 읽다가 가는 건 신문기자 아니라도 누구나 그럴 수 있지 않나? 아무래도 좀 없어 보인다. 방송기자가 방송 중 마이크 앞에서 죽는 것과는 질과 결이 다른 것 같다.
그러면 의사가 수술 중 죽는 건 어때? 안 좋지. 환자한테 큰일 나지. 판사가 재판 중에 죽는 건? 장사꾼이 흥정 중에 죽는 건? 목사가 침 튀기며 설교하다가 죽는 건? 수사관이 피의자 심문 중에 죽는 건? 선생님이 화가 나 학생을 훈계하다가 죽는 건? 요리사가 신나게 칼질을 하다가 죽는 건? 이탈리아 폼페이의 유적 중에는 자위하던 중 화산재가 덮쳐 죽은 남자도 있던데 그런 건?
아무래도 신문기자는 책상에 앉아 뭔가 쓰다가 죽는 게 좋을 것 같다. 근데 무슨 글을 쓰지? 자신의 삶에 대해 쓰는 게 좋겠지. 선비들 중에는 묘비나 묘표(墓表), 묘지명(墓誌銘)을 미리 써놓은 사람이 많다. 생전에 만든 자기 무덤을 수장(壽藏) 또는 생분(生墳)이라 하고, 무덤에 묻을 묘지명을 살아 있을 때 쓴 것을 생지(生誌)라고 한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문집에 실을 ‘집중본’(集中本)과 무덤에 묻을 ‘광중본’(壙中本) 등 두 가지 자찬(自撰) 묘지명을 남겼다. 광중본은 “간사하고 아첨하는 무리들이 기세를 폈지만/하늘은 그로써 너를 곱게 다듬었으니/잘 거두어 속에 갖추어 두면/장차 아득하게 멀리까지 들려 올리리라”로 끝난다. 서계(西溪) 박세당(朴世堂, 1629~1703)은 주자학을 비판하며 경전과 노자 장자를 재해석했던 분답게 자신의 묘표를 이렇게 썼다. “차라리 외로이 살면서 세상에 구차하게 부합하지 않을지언정 ‘이 세상에 태어났으니 이 세상 사람답게 살면서 남들로부터 좋은 사람이라고 여겨지면 그걸로 옳다’고 하는 자에겐 끝내 머리 숙이지 않겠으며 마음으로 항복하지 않겠다고 여겼다.”
우리나라 언론인 중에도 자신의 사망기사를 써놓은 사람이 있긴 하다. 그런데, 공개된 기사를 읽어보니 산에 가서 실종되는 내용인 데다 너무 소설적이어서 현실성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게다가 그 사망기사가 나온 지 벌써 10년이 더 지났으니 새로 써야 하지 않을까 싶다.
모범 사례는 미국 칼럼니스트 아트 버크월드(Art Buchwald, 1925~2007)다. 2007년 1월 18일 뉴욕타임스 인터넷판에는 “안녕하세요? 아트 버크월드입니다. 제가 조금 전에 사망했습니다”라는 동영상이 올라왔다. 1982년 퓰리처상을 받은 그의 칼럼(주로 정치풍자)은 전 세계 500여 개 신문에 실릴 정도로 평가가 좋았다. ‘워싱턴의 휴머니스트’로도 불려온 그는 40년 넘게 미국 대통령을 포함해 워싱턴 정가의 엘리트 계층을 풍자한 칼럼으로 인기를 끌었다. 그의 글을 실으면 신문의 품격이 높아진다는 말까지 있었다.
그는 당뇨병이 악화해 한쪽 다리를 절단하고도 신장투석을 거부한 채 워싱턴의 호스피스 시설에서 죽음을 맞는 과정을 특유의 유머러스한 필체로 소개했다. 그런 칼럼니스트가 마지막 순간까지 유머를 잃지 않으면서 본인의 사망 소식을 알린 것이다.
글은 해학과 풍자가 넘쳤지만 그는 보육원에서 어린 시절을 보낼 만큼 불우했고 어머니는 평생을 정신병원에서 살았다. 우울증이 심해 자살충동을 느낀 적도 있었지만 스스로 잘 이겨냈다. 한 인터뷰에서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글쎄, 잘 생각은 해보지 않았지만 아마 다른 사람을 웃게 만들기 위해 태어난 것 아닐까요?”
스스로를 객관화할 수 있고 유머의 힘을 잘 아는 게 언론인 아닐까. 가만있어도 나이 한 살 더 먹는 설날을 앞두고 이렇게 죽는 이야기를 한 건 좀 거시기하지만, 아트 버크월드 같은 해학과 여유를 갖게 되기를 나도 바라고 있다.
임철순 언론인ㆍ전 이투데이 주필
어린이 여러분, 우리나라 위인 알아맞혀 보세요. ㅇㅅㅅ은? 이순신, ㄱㅈㅎ은? 김정희, ㅈㅇㅇ은? 정약용…, 한글 자음 초성만으로 의사소통을 하거나 퀴즈를 주고받으면 재미있어. 초성놀이는 활용빈도가 점점 높아지고 있지. 애정을 담아 건네는 농담이나 군색한 처지의 변명에도 효과적이잖아.
어떤 남자가 짝사랑하는 여자한티서 이런 문자를 받았대. “ㅊㄲㅃㅇㅇㅅㅅㄱㄱㅍㅌㄷㅈㅌㅂㅎㅅㅅㅇㅅㅊㅊㅈㅍㅋㅇㅍㄲㅈ.” 드디어 내 맘을 받아들였구나 싶은데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뜻을 알 수 있어야지. 다른 사람한테 물어보니 “참깨빵 위에 순 쇠고기 패티 두 장 특별한 소스 양상추 치즈 피클 양파까지”였대. 한동안 유행하던 패스트푸드사의 CM송 가사였다는군. ㅋㅋㅋ. 이걸 죽여, 살려?
2020년을 보내면서 나도 그 여자 본받아 초성 위인열전을 만들려 함. 근데 뛰어나고 훌륭한 위인(偉人)이 아니라 일 저지른 위인(爲人), 즉 장본인들이여. 선정기준은 많아. 아시타비(我是他非) 금시작시(今是昨是)라고 난 항상 옳고 넌 틀렸다는 자, 손 뒤집어 구름 만들고 손 엎어 비를 만드는 번운복우(飜雲覆雨, 두보의 시에 나오는 말)의 사기꾼, 진실을 말하는 사람들에게 정신적 고통을 가한(이건 정경심 교수 재판부가 한 말) 위인, 공개념도 없이 공직을 맡고 있거나 탐내는 가짜, 불량품 재고 창고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녀석, 다리를 뻗으면 누울 자리가 생긴다는 신념과 지조로 세상을 사는 얌체, 품위는 개뿔, 뭐든 마구 써대거나 내뱉는 막말 양아치, 아무리 뜯어봐도 한마디로 왕싸가지…. 이렇게 기준이 많지만 사실은 내 맘대로여. 내가 경멸·타기하는 자들. 남녀 불문, 여야 불문에 안주 불문이여.
이 글을 쓰면서 발견한 건디, 매국노 이완용은 ㅇㅇㅇ이더군. 그러니까 “응응응” 하다가 나라를 팔아먹은 건가 하는 생각이 듦. 아무리 초성만이라도 사람은 이름을 닮는 게 아닐까. 아니야. 나는 알다시피 ㅇㅊㅅ인디 그러면 내가 서울시장 나온다는 안철수여, 축구선수 이천수여? 다 안 맞잖아. 하여간 가나다의 역순, 다나가 순으로 한번 위인들 열병(閱兵)을 해볼까. 여기 실명이 등장하는 분들께는 한사코 죄송·미안하지만 대의를 위해 한번 눈감아주셨으면 함.
△ㅎㅇㅎ=현재 국회의원이여. 똑같은 ㅎㅇㅎ 초성자에 개그맨 황연희가 있지. 요즘은 활동이 뜸하지만 잘 웃기고 재치가 좋아. 근데 이 의원님은 다른 방식으로 웃기고 있음.
△ㅎㅈㅍ=빨간색을 디게 좋아하고, 말을 함부로 하는 게 주특기. “이 사람과 한 번 틀어지면 너무 피곤하고 힘들다. 기억력도 좋고 집요해. 누가 이 사람과 맞서면 ‘안 싸우는 게 상책’이라고 말린다.” 이런 말을 한 사람이 있더라.
△ㅊㅁㅇ=단연 2020년의 대스타. 정호승의 시처럼 ‘산산조각’이 난 꼴이 되긴 했지만, 이 사람 사는 동네에서는 인기가 대단해. 앞으로 어디까지 뻗어나가 뭘 칭칭 감아댈 덩굴인지 알 수 없어.
△ㅊㄱㅇ=없는 일을 있게 만드는 달인. 재판 받다가 다른 일정 있다고 조퇴를 시도할 만큼 국사에 충실한 사람, 최경원 전 법무부장관, 최기영 전 과기부장관도 ㅊㄱㅇ인디, 이 사람도 나중에 장관 되는 거 아녀?
△ㅈㄱ=이름이 외자인 사람은 노출되기 쉽지.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 용주(龍洲) 조경(趙絅, 1586~1669) 선생도 ㅈㄱ이긴 하지만 내가 뽑은 위선자와 달리 이분들은 학문 연구와 직언으로 유명했어.
△ㅇㅎㅊ=50년 집권론을 부르짖은 사람이야. ㅇㅎㅊ 중에 유명한 사람은 이환천이라는 시인인데, 시가 재미있고 촌철살인이여. 다음은 그의 작품 ‘문제’. “가나다라/마바사아/자차카타/파다음이/뭔지아니?/답은‘하야’” 이건 원래 박근혜 전 대통령 때 쓴 거지만 지금도 착용감이 좋아.
△ㅇㅈㅁ=싸움닭같이 전후사방 안 싸우는 사람이 없어. 참 바빠. 신경림의 시에 ‘목계장터’라는 게 있는디, 이곳은 牧溪(목계)지만 나는 木鷄(목계)라는 장터에 보내주고 싶어. 이 목계가 뭔지 궁금하면 찾아보셔. 아니 검색하지 말고 사색부터 해보셔.
△ㅇㅇㄱ=불량품 창고가 우리나라 도처에 있다는 걸 잘 알려준 사람. 이걸 다 빨리빨리 처분해야 하는디 참 걱정이야, 그치? ㅇㅇㄱ ㅇㄴ, 이게 뭐어게? “어이가 없네”야. 하는 짓이 정말 어이가 없어.
△ㅇㅁㅎ=와인의 아름다운 향기를 잘 아는 국회의원. 할머니들한테 참 유명한 사람. 이름을 일본어로 읽으면 미카인데, 원래 일본에서 온 이름인지 우리 고유의 이름인지는 잘 모르겠어. 프로골퍼에도 ㅇㅁㅎ이 있지.
△ㅇㅅㅁ=이세민? 당 태종의 이름도 아니고 영세민과도 무관해. 검찰의 은행계좌 추적 정보에 일가견이 있고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에 해박, 아니 각박한 사람이여. 나는 해박(該博)을 각박(刻薄)으로 읽곤 하거든. 아는 게 많으니 곡학아세, 사기 치기도 유리하겠지.
△ㅅㅎㅇ=목포는 항구라는 걸 잘 아는 전직 국회의원. 남동생이 죽었을 때 어디까지나 침착 냉정을 잃지 않는 차분함이 참 인상적이었어. 내 한국일보 입사 동기에 손홍익(孫鴻翼)이 있었는디, 지금은 어디서 무얼 하는지 궁금해지네. 송희영 전 조선일보 주필도 잘 있겠지?
△ㅂㅊㅎ=국토는 좀 아는디 교통은 몰라. 모르는 거 또 있어. 너무 바빠서 자동차 압류되는 것도 모르고 세금도 못 냈지. 야당 반대로 청문보고서가 채택되지 않았는데도 임명된 스물여섯 번째 장관님. 못사는 사람이 미쳤다고 장관하려 하겠어? 혼자 다 해요.
△ㄱㅇㅁ=초성만 같을 뿐 사실은 두 사람이여. 한 사람은 국회의원이고 다른 한 사람은 국회의원 되려다 실패했어. 내가 보기엔 오십보백보. 개그맨 강유미는 인터뷰 잘하던데, 이 두 사람은 입만 열면 시끄러워져.
△ㄱㅇㅈ=머리는 감고 사나? 난 화가 수필가 미술사학자였던 근원(近園) 김용준(金瑢俊, 1904~1967)의 글을 좋아하고 한문학자인 김언종 고려대 명예교수를 잘 알지만, ㄱㅇㅈ이라는 초성이 참 아까워. 왜곡과 억지로 언론인 행세를 하니, 에구 쯧쯧.
△ㄱㄴㄱ=ㅈㄱ, ㅊㅁㅇ의 똘마니라지? 똘마니는 서럽지만 더 빛을 볼 날이 있을 거야. 똘마니니까 짧게 쓰자.
이 밖에 ㄱㅌㄴ, ㅈㅊㄹ, ㄱㄷㄱ, ㄴㅇㅁ, ㅇㅇㅈ, 이런 정계 인사들과 ㅇㅅㅇ, ㅅㅈㅊ, ㅈㅎㅇ, ㅈㅈㅇ, ㅂㅇㅈ, 이렇게 장래가 촉망되는 검사들이 제제다사(濟濟多士)야. 인물이 너무 많아 다 못 쓰겠음. 천자문에 나오는 대로 ‘준예밀물 다사식녕(俊乂密勿 多士寔寧)’, 재주와 덕이 뛰어난 사람들이 힘써 일하고 많은 인재가 있어 나라가 편안한 상황 아니겠어?
근데 어떤 기자가 쓰기를 “내 평생 검사(檢事) 이름을 이렇게 많이 알게 될 줄 몰랐다”고 말한 사람이 있다지? 장·차관 이름도 기억하기 어려운데 평생 검사랑 맞닥뜨릴 일 없는 사람들이 검사장, 차장검사, 부장검사 여러 명의 이름을 알게 되다니.
초성만 써놓고 봉게 나도 누가 누군지 정말 헷갈린다. 그나저나 이놈의 컴퓨터는 왜 한글 자음만 치면 무조건 영어 알파벳으로 돌아가지? 한글이 알파벳의 종속 문자냐? 글쓰기 불편해서라도 내년엔 이런 거 좀 안 썼으면 정말 좋겠구나야.
임철순 언론인ㆍ전 이투데이 주필
“아침 뉴스쇼를 보는데 구역질이 났다. TV를 끄고 싶다. 보고 싶지 않고 듣고 싶지 않다. 그래도 켜놓는다. 저것들의 사악함에 치가 떨리지만 지켜본다.” 어떤 칼럼니스트가 페이스북에 쓴 글이다. 그 기분을 완전히 이해하고 충분히 공감한다. 그래서 구역질에 대해 찾아 공부하면서 이리저리 생각해보게 됐다. 고치는 방법까지 연구하지는 못했다.
구역질은 구토와는 좀 다르다. 속이 메스꺼워서 구토하려 하는 상태가 구역질이다. 바꿔 말하면 욕지기(토할 듯 메스꺼운 느낌)다. 오심(惡心)도 비슷한 상태다. 위가 허하거나 위에 한(寒)ㆍ습(濕)ㆍ열(熱)ㆍ담(痰)ㆍ식체(食滯) 따위가 있어 가슴속이 불쾌하고 울렁거리며 구역질이 나면서도 토하지 못하고 신물이 올라오는 게 오심이다. 이 단계를 넘으면 반위(反胃), 구역질을 해 위에 들어갔던 음식이 입으로 다시 올라오게 된다.
욕지기가 나서 몸이 괴롭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세상을 향해, 지 몸에 대해 욕지거리를 하게 된다. 그런데 경남 통영의 욕지도 출신 언론인은 즤네 고향의 거리 이름이 욕지거리라고 하더라. 그럴듯한 농담이지만 고향을 그렇게 욕보이면 되겠나. 욕지(欲知)는 불교 화엄경 구절에서 따온 좋은 말인데.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유배 시절 시에는 울다가 앓다가 딸꾹질에 구역질에 대낮에도 이불을 끼고 방구석에 엎드려 있는데, 강진 사람 윤시유(尹詩有, 1780~1833)가 목이 긴 술병에 석 자가 실히 되는 농어를 들고 와 손수 회를 떠주어서 함께 먹고 즐겼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배부르고 취한다고 병이 나으랴만 당장의 괴로움을 그렇게 해서 잠시 잊었다고 한다.
구역질이라는 거부반응은 신체적 원인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이유에서 빚어지는 현상인 경우가 많다. 단종실록엔 단종이 즉위하던 해에 “내가 본래 구역질이 심하다”며 자주 통곡했다는 기록이 있다. 열두 살 소년이 실록의 표현대로 혈기가 아직 충실하지 못한 탓이겠지만, 재위 3년 만에 비극적으로 몰려나야 했던, 소위 계유정난(癸酉靖難)의 한 조짐으로 읽힌다.
명종~선조 연간의 학자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1554~1637)은 절친했던 대암(大庵) 박성(朴惺, 1549~1606)이 타계하자 아래와 같은 제문(祭文)을 지어 애도했다. “아, 슬픕니다. 공은 악을 미워하기를 악취와 같이 여겨 구역질을 했습니다. 더불어 눈 마주치기를 부끄러워하고 혹 서로 가까워질까 두려워했는데, 지금 혼이 올라간 하늘에서도 저들의 추악함을 차마 보실 수 있겠습니까?[嗚呼哀哉 公之疾惡 如臭斯嘔 羞與交目 恐或相狃 今也魂升 能忍彼醜]” 미추(美醜)와 은원(恩怨)의 시비가 없다는 저세상에서도 더러운 꼬라지는 못 볼 만큼 개결(介潔)한 분이라는 말이다.
구역질은 트림, 재채기, 기침, 하품, 기지개와 함께 자연스러운 신체반응이지만 점잖은 자리나 어른 앞에서는 조심해야 한다. ‘예기(禮記)’ 내칙(內則)에 “부모나 시부모가 계신 곳에서는 (…) 감히 구역질하고 트림하며, 재채기하고 기침하며, 하품하고 기지개 켜며, 한 발로 기울여 서거나 기대지 않으며, 곁눈질하여 보지 않으며, 감히 침을 뱉거나 코를 풀지 않는다”고 나와 있다. 추워도 감히 옷을 껴입지 않으며, 가려워도 감히 긁지 말라니 하지 말라는 게 너무 많다.
이덕무(李德懋, 1741~1793)의 문집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의 동지(動止)에도 하지 말라는 행동이 참 많다. 그러니까 글 제목이 그렇게 돼 있겠지만.
-남이 보는 앞에서는 가려운 데를 긁지 말고, 이를 쑤시지 말고, 귀를 후비지 말고, 손톱을 깎지 말고, 때를 밀지 말고, 땀을 뿌리지 말고, 상투를 드러내지 말고, 버선을 벗지 말고, 벌거벗고 이[蝨]를 잡지 말고, 잡은 이를 화로에 던져서 더러운 연기가 나지 않게 하며, 손톱에 묻은 이의 피를 씻지 않아 남이 추하게 여기게 해서는 안 된다.
-말할 때 몸을 흔들지도 말고 머리를 흔들지도 말고 손을 흔들지도 말고 무릎을 흔들지도 말고 발을 흔들지도 말며, 눈을 깜빡이거나 눈동자를 굴리지도 말고, 입술을 삐쭉거리거나 침을 흘리지도 말며, 턱을 받치지도 말고 수염을 쓰다듬지도 말고 혀를 내밀지도 말고 손바닥을 치지도 말고 손가락을 튀기지도 말고 팔뚝을 뽐내지도 말고 얼굴을 쳐들지도 말며, 자리를 긁지도 말고 옷을 끌어 잡지도 말며, 부채 머리를 거꾸로 던지지도 말고, 허리띠 끝을 돌리지도 말라.
구역질에 관한 대목도 있다. “거울을 늘 손에 쥐고 눈썹과 수염을 매만지며 날마다 고운 자태를 일삼는 자가 있는데, 이런 짓은 부녀의 행동이다. 옛날 어떤 천부(賤夫)가 거울을 보고 찡그리기도 하고 웃기도 하는 등 온갖 모습을 짓다가 남의 이목을 기쁘게 할 수 있는 태도를 택해 습관적으로 용모를 꾸미는 일이 있었는데 남들은 그를 사랑했지만 그 같은 사람은 나를 구역질나게 만드는 존재다.”
그런데 왕 앞에서 구역질 핑계를 댄 사람이 있었다. 성종 때의 병조참판 김순명(金順命, 1435~1487)은 유명한 술꾼이었나보다. 성종이 아침부터 비틀거린다고 지적하자 “신은 평소 구역질이 나서 숨이 막혀 얼굴로 올라와 그런 것이지 술에 취했던 게 아닙니다”라고 변명했다. 그러자 성종은 “거의 넘어질 뻔한 걸 내 눈으로 봤다”면서 “병조는 직임이 가볍지 않으니 이 뒤로는 몹시 취해 직무를 게을리하지 말라”고 훈계했다는 기록이 있다.
11년간 일기를 써서 널리 알려진 미암(眉庵) 유희춘(柳希春, 1513~1577)은 가문의 생활수칙이라 할 수 있는 ‘정훈(庭訓)’ 내편(內篇)에 이렇게 썼다. “무릇 존자(尊者) 앞에 앉을 때에는 반드시 머리를 조금 낮추고 머리를 들지 않는다. 비록 방기(放氣, 방귀)는 소리 없이 내더라도 구역질이나 트림이나 재채기나 기침이 나오면 머리를 돌려 피해야 한다.” 해도 괜찮은 게 있으니 그나마 참 다행이다. 소리만 내지 않으면 어른 앞에서 방귀를 막 뀌어도 되는가보다(근데 냄새는 어떡하지?).
이덕무도 ‘해도 된다’를 넘어 하라고 권장한 게 많다. 앞에 인용한 그 글이다. “글을 읽다가 옛 사람이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하고 정의를 위해 강개한 나머지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일이 적힌 대문을 만나면, 마땅히 비장강개한 마음으로 눈물까지 흘리면서 자신이 그 일을 당한 것처럼 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의 설화로만 보지 말고 두고두고 생각하여 비록 나라에 몸은 바치지 않았을망정 나라에 난리가 나거든 정의를 위해 절개를 지키고, 죽음으로써 나라의 은혜를 저버리지 않을 것을 기약해야 한다.”
그런데 구역질을 어떻게 참고, 눈물을 어떻게 만들어 내나. 그게 맘대로 되는 건가. 어쨌든 뉴스를 보고 구역질을 하는 사람이여, 잘못되고 추하고 더러운 것은 계속 구역질하며 미워하시되 정의를 위해 눈물을 흘리고 죽음으로써 나라의 은혜를 갚도록 노력해보시게나.
코로나19의 위세가 대단하다. 바다를 찾으려는 여름휴가 계획이 어그러졌다. 그래도 집에서 방콕만 하면서 휴가를 보내기에는 가는 여름이 너무 아깝다. 집에서 멀지 않아 숙박은 필요 없지만 생각할 테마가 있으면서 한적한 곳을 물색하던 중 천진암이 떠올랐다.
천진암은 천주교 발상지로 알려진 곳이다. 발상지란 역사적으로 큰 가치가 있는 일이나 현상이 처음 나타난 장소를 말하는데 천주교란 서양 종교인 서교다. 우리나라 그것도 깊고 깊은 산골이 발상지라는 데 의문을 평소 갖고 있었다. 이번 기회에 소상하게 알아보고 싶었다. 거기에 100년에 걸쳐 3만 명을 수용할 대성당을 건립한다는 사실도 방문의 구미를 당겼다.
천진암은 이름이 말해주듯 원래 불교 사찰이 있던 곳이다. 주소로는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우산리다. 우산리는 좁은 계곡 탓으로 논밭이 거의 없다. 지금은 이런 계곡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아 펜션이나 음식점이 성행하지만 과거 농경시대에는 아주 드물게 집들이 있었던 곳이다. 사람이 살아야 길이 넓어지고 교통이 발전한다. 이런 후미지고 한적한 곳에 하루는 족히 걸어야 당도할 천진암에 사람들이 모여서 천주교 교리에 대한 강학을 했다는 것은 놀랍지만 당시의 시대상에 주목해야 한다.
천주교 박해가 심하던 시절이라 남들의 눈을 피해야 하는 절박함이 있었지만 사찰에서 왕명을 어기는 위험한 천주교 강학을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장소를 제공한 스님들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좋게 말하면 종교간 우애라고 하지만 발각되면 목숨을 잃을 위험한 행동을 할 때는 다른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문헌을 찾아보니 조선 정부는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배척하는 정책을 시행했기 때문에 사찰은 수탈의 대상이 되어도 제대로 항거하지 못했다는 기록을 찾아내고 수긍을 했다. 꼬리가 길면 밟힌다. 천주교 탄압인 ‘신유박해’ 때 천진암 스님들도 처형당하고 천진암도 불태워졌다. 안타까움은 순교한 분들은 이름이 남아 후세에 추앙을 받고 있으나 장소 제공으로 목숨을 잃은 스님들은 아무 기록조차 없다는 것이다. 슬픈 일이다.
불태워진 천진암 터는 오랫동안 사람들의 기억에서 멀어져가고 농경지로 개발되어갔다. 1960년대에 와서 남종삼 성인의 후손인 남상철 회장이 다산의 기록에서 천진암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불교 사찰 목록을 조사하고 노인들의 증언을 통해 천진암 터를 찾았다. 그 뒤 토지를 매입하여 성역화 사업을 시작하였다고 천진암 성지 유인물에서 밝히고 있다.
천진암 성역화를 위해 한국천주교회 창립선조 다섯 분의 시신을 이장하여 이곳에 모셨는데 천진암 강학을 주도한 이벽, 한국인 최초로 영세를 받고 서울 서소문 형장에서 참수 순교를 당한 이승훈, 천진암 강학회에 참석하고 신해박해에 순교한 권일신, ‘유한당 언행실록’의 저자이며 신유박해에 순교한 권철신, 다산 정약용의 형으로 알려진 정약종, 이렇게 5분의 시신이 각기 다른 곳에서 이장되어 모셔져 있다.
한민족 100년 계획으로 30만 평 부지에 3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성당을 짓고 있다. 100년에 걸친 공사 끝에 2079년에 완공되면 세계적인 관광명소가 될 것임에 틀림없다. 1985년부터 시작된 공사가 아직도 기초 터를 단단히 다지는 중이라고 한다. 지금 터 다지기 공사를 하는 사람은 완공된 성당의 모습을 볼 수 없고 완공된 성당을 보는 사람은 기초 터 닦는 현장을 보지 못한 사람들이다. 지금 여기서 일하는 사람은 자신이 못 볼 건물을 짓고 있다. 나 아니면 안 되기 때문에 내가 꼭 이루고야 말겠다는 단기완성에서 벗어나 후손에게 완공하도록 배턴 터치를 하는 모습은 느림의 미학을 보여준다.
사실 건축 공사에서 100년은 너무 긴 시간이다. 이익을 추구하는 보통의 건설 회사라면 이렇게 느리게 공사하다가는 다 망하고 만다. 고층 아파트를 지을 때의 공사기간은, 1개 층을 짓는 소요 일수를 1개월로 본다. 30층이라면 30개월이면 충분하다는 계산이다. 천진암을 가 볼 때마다 느끼는 감정이지만 도대체 일을 하는 건지 마는 건지 눈으로 봐서 진전이 없다. 빨리빨리 문화에 익숙한 우리들에게 느린 변화는 또 다른 생각을 불러온다.
천진암 계곡으로 들어가면 그 끝은 천진암 성지다. 관통하는 길이 없으니 들어갔던 곳으로 되돌아 나와야 한다. 단순히 지나가는 목적으로 가는 차량이 없으니 길은 복잡하지 않다. 10여 km에 달하는 계곡이 깊어서 늘 맑은 물이 흐른다. 계곡이 좁아 농토가 별로 없으니 계곡물은 언제나 깨끗하다. 이 물은 팔당댐으로 흘러들어가 서울 시민의 식수로 사용된다. 천주교 신자라면 성지순례 차원에서 찾아가 보길 권한다. 천주교 박해에 대한 역사 공부를 더 한다면 방문의 의미는 더 커질 것이다.
강진은 여행기의 베스트셀러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속 남도의 첫 번째 답사지다. 유배의 땅 강진으로 표현되는 곳, 오롯한 멋과 함께 풍미의 고장 남도답게 먹거리가 풍성하다. 맛과 멋을 찾아 떠나는 남도 여행, 전남의 끝자락인 강진의 자연에 흠뻑 빠져본다.
도심을 떠난 느낌을 단번에 느끼고 싶다면 강진의 백운동별서정원이 만족감을 높일 것이다. 서원의 시초라는 백운동서원이 아니라 백운동정원이다. 담양의 소쇄원, 완도의 부용동과 함께 호남의 3대 정원으로 불린다. 별서정원은 벼슬을 떠나 시골이나 산속에 집을 짓고 자연과 벗하며 살고자 만들어 놓은 정원을 말한다. 그 이름답게 산중에 감추어진 별천지다. 호남 전통 별서정원의 원형이 잘 보전된 곳으로 아름드리 동백나무와 작은 계곡이 안온한 느낌을 자아낸다. 왕대 숲에 불어오는 바람과 월출산의 정기가 마음을 청순하게 한다.
정원이 세간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은 다산 정약용에 의해서다. 유배 중에 제자들과 함께 월출산을 등산하고 난 뒤 백운동 정원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다산의 제자 가운데 이담로의 6대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곳에서 하루를 지낸 다산은 정원에 흠뻑 빠져들었다. ‘백운동 12경’을 뽑아 그의 제자 가운데 한 명인 초의선사를 불러 그림을 그리게 한 후 그의 시와 함께 ‘백운첩’으로 남겼다. 정원을 둘러보다 보면 곳곳에 다산의 경(景)을 칭하는 안내판과 시를 볼 수 있다.
백운동정원은 정원 자체의 정취뿐만 아니라 차의 산지이기도 하다. 백운동 옥판봉에서 나는 차라는 뜻의 백운옥판차가 바로 이곳 백운동 정원 왕대밭에서 자라는 차나무에서 생산되었다. 다산이 굳이 다도에 조예가 깊은 초의선사를 불러 백운동 정원을 그리게 한 것은 이곳에서 나는 차의 풍미를 함께 나누고 싶다는 의미를 담고 있으리라.
좋은 차가 나오는 차의 산지임을 증명하듯 가까이 월출산 자락에 대규모 녹차 밭이 있다. 정원에서 나와 작은 오솔길을 지나 차밭으로 향한다. 바위산의 웅장함을 그대로 드러낸 월출산과 그 아래 펼쳐진 차밭은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비경이다. 낮과 밤의 일교차가 크고 안개가 많은 곳에서 재배하는 차가 떫은맛이 적고 강한 향이 난다. 백운옥판차의 명성을 잇듯 좋은 차가 월출산 자락의 정기를 흠뻑 머금고 자란다.
자연 여행을 꿈꾸는 강진의 두 번째 여행지는 강진만 생태공원이다. 갈대숲 우거진 데크길을 2.8km 걷는다. 햇살이 뜨거울 법도 한데 갈대숲이 불어다 준 바람 몇 점에 땀이 식는다.
갯벌 흙이 드러난 곳에서 칠게와 짱뚱어를 관찰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여름에 짱뚱어는 가장 활발하게 움직인다. 갯벌 학습장이 따로 없다. 덩치가 비등해 보이는 짱뚱어 두 마리가 등지느러미를 곧추세운 체 으르렁거리며 싸우질 않나 제법 덩치가 큰 짱뚱어 한 마리가 풀쩍 뛰어오른다. 점프는 수컷의 암컷에 대한 구애 행동이다. 갯벌 흙 사이에 짱뚱어 집들이 볼록볼록 솟아있다. 슬금슬금 칠게도 드나들고 짱뚱어도 드나드는 저 집은 과연 누구의 집일까 궁금해진다. 칠게가 원래 집주인, 짱뚱어가 뺏는 경우가 대부분이란다. 게의 날카로운 집게발도 짱뚱어에겐 소용이 없다. 갯벌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이렇게 재미있다니, 더운 여름날인데도 호기심에 오래도록 갯벌을 바라본다.
◇강진 추천 맛집
청자골종가집
강진의 대표 맛집으로 꼽힌다. 방석만 있는 덩그러니 놓인 방에 착석하면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잘 차려진 상이 상째로 들어온다. ‘이 정도는 돼야 남도의 한정식이지’ 하는 생각을 하며 식탐 삼매경에 돌입. 홍어삼합이 첫 타자, 톡 쏘는 맛이 그리 강하지 않아 부담스럽지 않다. 육회를 한 점 집어먹고 새우 버터구이를 하나 집어 든다. 각종 나물과 찬에 멈추지 않는 손, 따뜻하게 내온 불고기와 녹차 물에 밥을 말아 보리굴비(부세) 살 한 점을 얹는다. 밥도둑이 따로 없다. 강진군 군동면 종합운동장길 106-11
다온식당
가볍게 아침을 먹기 적당한 가정식 백반이다. 조갯국에 계란말이, 부담이 없다. 엄마가 차려주는 집밥이 떠오른다. 강진군 대구면 수동길 17-7
임철순 언론인ㆍ전 이투데이 주필
대한민국 사람들은 기회만 있으면 건배사를 외친다. 함께 외치며 안면을 익히고, 친목을 다지고, 우의를 키운다. 요즘은 연말연시도 아닌 데다 그놈의 코로나 때문에 행사와 회식이 줄어 건배사 외칠 일이 거의 없다. 그래도 끊임없이 새것은 나온다. 만들 건 만들어야 되나보다.
얼마 전까지 “나라도”를 선창하면 “잘하자”로 답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라꼴이 맘에 들지 않는 사람들의 건배사일 것이다. 내가 가장 최근에 들은 것은 ‘정경심’이다. 조국 전 장관의 부인 정경심 교수가 석방된 이후에 나온 거 같은데, 말이 재미있다. “정, 정치 이야기(정경심 이야기?) 하지 말고, 경, 경제문제 따지지 말고, 심, 심각한 이야기 하지 말고” 이런 뜻이다. “정경심!” 하고 외치면 “아멘!”으로 받는다. “아, 멘트 좋다!” 그 말이다. “멘트 좋다!”는 “멘트 좋~고!”일 수도 있고, “멘트 쥑이네”일 수도 있고, “멘트 끝내준다”일 수도 있지.
모임에서건 카톡방에서건 정치나 종교 이야기 꺼내면 골 아파진다. 최근엔 ‘4·15 부정선거’ 주장을 퍼뜨리거나 윤미향 사건을 계기로 친일과 토착왜구를 시비하는 사람들 때문에 서로 피곤하고 어색해지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그딴 이야기 하지 말자고 나온 게 ‘정경심’이다. 정말 필요한 건배사 아닌가. 애들 울거나 떼쓸 때 “뚝!” 하고 말리는 것 같은 효과를 거둘 수도 있겠다.
건배사는 원래 중·노년의 몫이다. 젊은이들은 이런 거 말고도 할 일과 놀 거리가 많은데 굳이 건배사를 찾을 필요가 없다. 시니어들이 즐기는 건배사는 나이야 가라, 백두산(백 살까지 두 다리로 산에 가자), 청바지(청춘은 바로 지금부터), 9988234(99세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2~3일 앓고 죽자), 이기자(이런 기회를 자주 갖자), 이런 것들이다. 늙기 싫고 병들어 아프기 싫은 마음이 담긴 건데, 이런 말을 모르는 사람들은 삶의 진도가 늦는 걸 반성하라.
시니어들이 모이면 뒤풀이와 건배사까지 해야 모임이 끝난다. 코로나 이전 상황이겠지만 어떤 사람이 지하철 풍경을 써놓은 인터넷 글이 재미있다. “산악동호회 한 열댓 명 탔는데, 동호회 회장이 산만 타고 뒤풀이 빠짐. 어떤 아줌마가 회장에게 ‘위하여 해야지’라며 스피커폰으로 전화기 켜놓고 ‘위하여 좀 혀~’ 하자 그 사람이 ‘나 지금 지하철이라 힘들어’ 그랬더니 열댓 명이 몽땅 ‘지하철이라 힘들어~!’ 하고 소리침. ㅋㅋㅋ”
시니어들이 애용하는 건배사엔 ‘노발대발’도 있다. “노인이 발기해야 대한민국이 발전한다”는 말인데, “노발!” 하고 외치면 “대발!”로 받는다. 노인은 발광하거나 발작하거나 발발거리며 (남의) 발목이나 걸지 말고 발기나 잘되면 제일 좋겠지. “노인이 발전해야…”라고 하는 건 아무래도 어색하다. 역시 발기가 가장 잘 어울리는 말로 보인다.
그런데, 지난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 11주기에 이 건배사가 등장했다. 봉하마을 추도식이 끝난 뒤 노 전 대통령 부인 권양숙 여사가 여권 인사들과 오찬을 할 때 “노발대발”을 외쳤다고 한다. 앞에서 설명한 그 노발대발이 아니라 “노무현 재단이 발전해야 대한민국이 발전한다”는 뜻이었다. 본인이 주도한 건지 참석자들과 함께 외친 것뿐인데 그렇게 보도된 건지는 모르겠다. 노발대발 건배사는 같은 날 다른 지역의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 모임) 회식에서도 나왔다. 여기서는 ‘노’가 ‘노무현 재단’이 아니라 ‘노무현 정신’이었다고 한다.
노발대발은 노동자단체도 많이 쓴다. “노동자가 발전해야 대한민국이 발전한다.” 또는 “노총이 발전해야 대통령도 발전한다.” 이런 식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10월 24일 노동계 대표단을 청와대로 초청한 만찬행사에서도 이 건배사가 나왔다. ‘노발대발’은 한국노총이 제작하는 노동 전문 팟캐스트 방송의 이름이기도 하다. ‘노동자 편파방송’이라는 슬로건 아래, ‘갑에 치이고 삶에 지친 2천만 노동자들과 함께하는 방송’을 표방하고 있다.
노발대발로 다른 말은 없을까? 인터넷 뒤져보니 이렇게 변형해서 외친 사람들도 있긴 있더라. “노가리만 풀지 말고/발바닥 불 나게 일해(뛰어)/대한민국/발전시키자”, “노력하고 노력하라/ 발바닥도 건강하게/ 대단한 성과와/ 발전을 위하여.” 그러나 좀 억지스럽고 어색한 건 사실이다.
노발대발은 원래 성이 나서 화를 내고 또 크게 낸다는 반복 표현이다. 다산 정약용의 ‘여름에 술을 대하다’[夏日對酒]라는 시에는 “자식 놈이 그제야 노발대발하면서”[兒乃勃發怒]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발발노(勃發怒)가 곧 노발대발이다. 활발(活潑)보다 활발발(活潑潑)이 더 생동하는 것처럼 노발대발보다 더 생생한 표현 같다. ‘勃’은 노할 발, 발끈할 발, 일어날 발 자다.
노발대발을 바꾸어 대발노발이라고 하면 어찌 될까? 대한민국이 발전해야 노(노무현 재단이든 노동자든 노숙자든 노래방이든 노인이든)가 발전한다는 뜻이 되겠지. 케네디가 취임연설에서 그랬잖아? “Ask not what your country can do for you – ask what you can do for your country.”(조국이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 묻지 말고,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물어라.) 그가 처음 창안해낸 건 아니라는 말도 있지만, 길이 기억되는 역사적 명연설이다. 바로 그런 것.
하지만 즐겁자고 외치는 건배사를 가지고 이것저것 따질 거 있나? 코미디하자는데 왜 다큐를 찍느냐고 시비 거는 사람들도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