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바다 앞에서 돌아보는 인생은 초라하지 않다

입력 2025-10-17 07:00

[민간정원 순례] 전남 담양 죽화경


전남 담양에 있는 죽화경(竹花景) 정원엔 수국이 아주 많다. 흔전만전한 수국의 개체수로 개성을 돋워 독보적인 정원이라는 평판을 얻었다. 매년 한여름엔 ‘유럽수국축제’가 열린다. 올해는 ‘여름 눈꽃정원 플라워 쇼’란 부제를 붙이고 제전을 펼쳐 성황을 이루었다. 하얀 꽃송이들 소담스레 만개하면서 최고조에 달한 꽃 군무로 정원이 통째 환했으리라. 이제 계절은 어느덧 가을 입구. 수국이 누린 절정의 한때는 저물었다. 그러나 유럽수국은 오래가는 꽃이다. 꽃도 잎도 아직은 싱그러운 편이라 반갑다.

정원으로 들어설 때면 좀 들뜬다. 마치 오랜만에 얼굴 보기로 한 친구가 기다리고 있는 찻집 문을 열 때처럼. 사실 꽃이며 나무며, 다들 알고 보면 이미 구면이다. 세상을 살면서 자주 만나는 것 중 하나가 식물이지 않던가.



방문객 많은 죽화경의 나무들 역시 사람이라는 익숙한 생명체에게 호의를 느끼고 있을 법하다. 정원 초입부터 줄느런한 수국들의 화사한 표정을 무언의 환영사로 읽어도 무방하리라. 수국나무들은 저마다 부푼 풍선처럼 둥글고, 사람의 얼굴만큼 큰 꽃떨기를 매단 채 바람결에 살랑인다. 그 모습이 꽃다발 선물을 내밀며 상큼하게 인사하는 사람을 연상시켜 첫눈에 마음이 간다. 이럴 땐 교감이랄까, 뭔가 나무와 통한다는 느낌이 든다.



어릴 적엔 나무를 무감각한 타자로만 알았다. 나이 먹으면서는 달랐다. 식물에게도 나름대로 보는 눈이 있고, 내심이 있고, 감정이 있다고 여기게 되었다. 허심탄회하게 사귈 만한 이웃쯤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삶을 위험하게 만드는 과욕을 다스리는 데 식물의 조용한 관조가 요긴하다는 생각을 굳히기도 했다. 이건 어쩌면 살면서 얻은 가장 가상한 개안(開眼)에 속할지도 모른다.

수업료 한 푼 치르지 않고 좋은 삶의 지혜와 기술을 배울 수 있는 교실. 그게 꽃과 나무이며, 정원과 숲과 자연이다. “자연은 가장 위대한 도서관이다.” 헤르만 헤세가 남긴 말이다. 어디에 머물든 헤세는 자연을 실감하기 위해 매번 정원을 꾸려 애지중지 가꾸었다. 정원을 생필품으로 삼았다.



죽화경엔 300여 종의 식물이 있다. 수국만 해도 다양하다. 그중 압도적인 종은 눈 내린 양 여름철의 정원을 하얗게 물들이는 유럽수국이다. 목수국 또는 라임라이트라고도 불린다. 개화 초기엔 연초록을 머금었다가 만개할 때엔 희디흰 빛을 쏟고, 끝판엔 다시 연초록으로 돌아가는 개량종 유럽수국의 조상은 중국수국이다. 즉 수국의 원산지는 중국이다.

당나라 시인 백거이는 수국의 고아한 자태와 향기를 신선의 면목으로 본 시를 지었다. 조선의 대석학 다산 정약용도 수국을 좋아해 시의 소재로 썼다. 유배지에서도 수국을 가꿔 완상하며 허전한 심사를 달랬다. 쉽고 따뜻한 시를 써 삶의 피로를 씻어주는 이해인 수녀도 수국을 노래했다. 수국꽃을 ‘푸른 한 다발의 희망’으로, ‘이웃들의 웃음’으로 바라본 시를 내놓은 바 있다. 수국의 뜻과 이미지를 족집게처럼 온당하게 집어낸 셈이다.

정원을 걷는다. 동선을 이룬 오솔길 양쪽으로 수국이 연달아 펼쳐진다. 수국 숲 사이로 오솔길이 수줍게 스며드는 형국이다. 발길은 자주 멎는다. 소로를 오가는 사람들에게 길을 비켜주기 위해서다. “날 좀 보소!” 눈짓으로 외치는 수국들의 하얀 아우성에 붙들린 탓이기도 하다. 우두머리 없이도 성대한 군락을 이루어 질서처럼 가지런한, 저 초대형 꽃 부족! 꽃바다 앞에서 돌아보는 인생은 초라하지 않다. 근심이 없어지고 아픔도 사라진다. 꽃 무리에 감정이 접속되면서, 꽃과 사람이 겪는 희로애락이 서로 다르지 않음을 이해하며 위안을 얻는 덕분이다. 상처 없이 자라는 인생이 있으랴. 고난을 면제받고 피어나는 꽃이 있으랴. 다 똑같은 운명이다. 피차 삶의 정점에 오르려면, 밑바닥까지 박박 긁어 물을 긷는 두레박처럼 용을 써보는 수밖에 없다. 그 뒤에 무엇이 올지 몰라도.



죽화경 수국의 동향과 생태를 가장 깊숙이 들여다본 이는 정원주다. 25년 전부터 수국을 심었다고 하니 몸과 마음의 어딘가에 수국이 자랄 터다. 인생을 자연 쪽으로 밀고 가는 철학과 근력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삶이란 어디로 튈지 모를 럭비공을 닮아 뜻대로만 굴러가질 않는다. 동쪽으로 냅다 달렸는데 서쪽에 닿기도 한다. 정원주의 블로그 글에 이런 게 있다. ‘꽃만 보고 살아 행복할 줄 알았더니 그것만도 아니었다.’

그래도 정원주에겐 건진 게 있다. 수국을 가꾼 건 아내가 수국을 좋아해서라고 하는데, 그는 마침내 수국 천지를 일군 게 아닌가. 이쯤이면 할 일 거의 다한 셈이다. 정원주가 거둔 열매는 더 있다. 그는 여러 수종을 분리하지 않고 뒤섞어 기르는 혼식(混植) 재배법(고도의 기술력이 요구되는 식재 방법)을 구사해 죽화경을 완성했다. 내공과 시간과 양심을 쏟아 여느 민간 정원과 다른 정원을 조영했다.

햐! 방향을 알 수 없는 곳에서 별안간 매미 울음소리다. 길게는 7년을 땅속에서 유충으로 살다 지상으로 올라와 겨우 보름쯤 머물다 가는 매미. 그래서 몸이 부서지도록 통절한 노래를? 그래 봬도 사랑 노래다. 간절하게 짝을 부르는 연가이며, 정원을 뒤흔들어 제패할 만한 광시곡이다. 그러나 수국의 성세에 밀려 조역에 그치고 만다. 그마저 접을 시간이 박두한 까닭은 가을이 오고 있기 때문이다. 고요한 꽃들도, 극성스러운 매미 울음소리도, 이렇게 계절의 순환에 실려 흘러간다.

떠나야 하는 것들이 짐을 챙기는 철에도 득의에 차 훤칠한 건 배롱나무다. 붉은 꽃 여전히 붉고 양양해 기품이 넘친다. 꽃만 빼어난 건 아니다. 배롱나무 꽃은 백 일 동안 피고 백 일 동안 진다. 드라마로 치면 장편 연속극이다. 무슨 약속이 있기에, 무슨 사무친 그리움이 있기에 그토록 오래 머무나. 극의 전체를 볼 수 없으니 오리무중이다. 활활 타오르는 그 마음만 읽을 뿐.

  • 좋아요0
  • 화나요0
  • 슬퍼요0
  • 더 궁금해요0

관련 뉴스

  • 청아한 대숲, 그리고 ‘비밀정원’의 깊은 정취
    청아한 대숲, 그리고 ‘비밀정원’의 깊은 정취
  • 자연이 인간에게 보내는 농담과 위트
    자연이 인간에게 보내는 농담과 위트
  • 여름에 보는 봄날의 꽃들
    여름에 보는 봄날의 꽃들
  • 대화를 유도하는 친절한 정원… 전남 해남군 ‘문가든’
    대화를 유도하는 친절한 정원… 전남 해남군 ‘문가든’
  • 바람 세찬 언덕 위, 태연한 나무들을 만나다 ‘사니다정원’
    바람 세찬 언덕 위, 태연한 나무들을 만나다 ‘사니다정원’
저작권자 ⓒ 브라보마이라이프 무단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 금지

브라보 스페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