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봄이다. ‘봄’은 동사 ‘보다’에서 온 말이다. 설(說)이 나뉘긴 하지만, 봄의 어원으로는 이게 끌린다. 고어에서 봄은 ‘보임, 보이는 때’를 뜻했다. 겨우내 감춰졌던 땅과 생명이 싹과 꽃으로 눈에 띄게 드러나는 시기라는 데에는 설이 일치한다. 그래서 그 계절을 봄이라 불렀다. 봄은 순우리말이며, 감각 동사에서 직접 파생된 드문 계절명이다.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기 시작하는 시간, 곧 드러남과 인식의 계절이다.
선현들은 봄을 ‘질서의 회복’으로 보았다. ‘예기(禮記)’에선 “봄이란 낳고 기르는 때”라 했다. 봄을 죽이지 않고 자라게 하는 시간으로 본 맹자는 그 기운이 측은지심(惻隱之心)에서 온다고 봤다. 시인 두보는 “때를 아는 비는 봄에 내려 생을 돋운다”고 노래했다. 겨울을 견뎌내 기다림을 통과한 자에게만 주어지는 응답이 봄이라고 보았다.
영어 ‘spring’은 ‘튀어 오르다/솟아나다’라는 뜻으로 봄을 더욱 구체적으로 표현하며 계절 이름으로 정착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봄을 자연이 자기 자리로 돌아오는 과정으로 보았다. 감상이 아니라 행동을 요구하는 시간으로 본 괴테는 “매일 새롭게 시작하는 사람만이 봄을 맞는다”고 했다. 봄은 달력이 아닌 태도 속에 있다는 뜻으로 해석했다. 시작하지 않는 자에게 봄은 오지 않는다. 봄은 오지만, 아무에게나 같은 의미로 오지는 않는다는 경계를 보고 읽었다.
우리 문헌에서 봄은 더욱 절제돼 있다. 봄은 늘 이미 왔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시간이다. 고려가요와 향가, 조선의 시조와 한시는 봄을 환희보다 경계와 각성의 계절로 보고 노래했다. “봄빛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는 다산 정약용의 말처럼, 봄은 미루지 말라는 시간의 압박이었다. 우리 조상들에게 봄은 쉬는 계절이 아니라 삶을 다시 정렬하는 시기였다.
3월은 봄의 얼굴을 한 시작이다. 아직 공기는 차고, 바람 끝에는 겨울의 기억이 남아 있다. 그러나 땅속에서는 이미 움직임이 시작된다. 선현들에게 봄은 늘 어떻게 살 것인가 묻는 계절이었다. 성큼 다가온 이 봄에 오늘을 사는 시니어는 무엇을 봐야 할까. 봄은 더하는 시간이 아니라 덜어내고 가다듬는 시간이다.
봄은 흔히 젊은이의 계절이라고 한다. 약동(躍動)만을 보았기 때문이다. ‘약(躍)’자는 ‘발 족(足)’자와 ‘꿩 적(翟)’자가 결합했다. 꿩이 크게 뛰어 날아오르듯 ‘도약한다’는 뜻이다. 봄은 젊음을 증명하는 계절이 아니다.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계절이다.
봄은 나이를 묻지 않는다. 아직 할 일이 있다고 믿는 사람에게만 봄은 찾아온다. 나이 든 이들에겐 미처 보지 못했던 걸 보아야 하고, 보고도 지나쳤던 걸 새롭게 봐야 할 일이 있다. 그래서 봄이 시작되는 3월은 특별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