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견이 없었다. 지금 이 시대를 대표하는 어른은 누구일지 고민했던 편집회의에서 기자들은 나태주 시인을 꼽았다. 만장일치였다. 대중도 마찬가지다. MZ세대를 포함한 모든 세대에게 그는 인기를 넘어 추앙에 가까운 현상의 주인공이 됐다. 하지만 그는 이제 막 낯익어진 마이너한 시인일 뿐이라고 말한다.
“흔히 말하는 팬덤 같은 것이죠. 날씨도 팬덤이 되고 계절도 팬덤이 돼요. 눈과 비가 고르지 않게 한꺼번에 내리는 것처럼 사람들이 몰리는 것뿐이죠. 낯익고 익숙한 것을 찾는 거예요.”
쉽게 동의하기 어려운 얘기다. 최근 출간된 그의 신간 ‘좋아하기 때문에’는 발매 2주 만에 1만 부나 팔렸다. 요즘같이 책을 멀리하는 시대에 꿈같은 이야기다. 사람들이 단지 친숙함에 습관처럼 살 수 있는 숫자가 아니다.
그는 책을 통해 “시인은 세상 사람들의 감정을 돌보는 서비스맨”이라고 말했는데, 아마 그것이 통했던 것 같다. 마치 ‘풀꽃’의 한 구절처럼 나를 자세히 그리고 오래 봐주길 기대했기 때문일까. 책을 내놓을수록 20~30대 사이에서 강한 소구력을 발휘했다. 그 소감의 물결에선 희망과 위로, 치유 같은 단어들이 떠다녔다.
타인 감수성과 꼰대
이런 공감대 속에는 어른다움이 있다. 젊은 세대가 ‘꼰대’에 저항하는 이유를 그는 어른의 이해와 변화가 없어서라고 말했다. 그는 이해의 기준으로 ‘타인인지 감수성’이라는 표현을 썼다. ‘미투 현상’이 사회를 뒤흔들 때 익숙해진 ‘성인지 감수성’에서 온 말이다. 이제 세상은 내 입장만 고집하며 살 수 있는 곳이 아니니까. 타인에 대한 배려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주변에선 ‘타인 감수성’이란 표현을 쓰기도 한다니까, 시인은 더 좋은 표현이라며 그 말을 되뇌었다.
“세상은 나 하나와 나머지의 너로 나뉘어요.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아요. 나를 빼면 모두 ‘너’이기 때문에, 너를 감지하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자꾸 나 때만 얘기하려 들고, 네 때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어요. 네 때는 그렇구나, 그거 참 힘들겠다 하고 관심 갖고 보살필 줄 아는 마음이 필요한 거죠.”
그는 책 속에서도 꼰대를 상징하는 신조어 ‘라떼’를 지적했다. 어른과 젊은이 쌍방이 조금씩 물러서서 상대를 이해하기를 기대했다. 어른 쪽에서 권위를 내세우며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젊은이도 변화할 것이라고 믿었다.
소위 ‘인기 작가’ 반열에 오른 만큼 다양한 약속으로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그지만, 가장 즐거운 일정이 있다. 젊은 세대와 만나는 강연회다. 특히 아이들이 있는 곳이라면 거절하는 법이 없다.
“아이들을 만나서 어려운 점, 괴로운 점, 그늘진 점을 봐요. 겉으로는 멀쩡하고 좋아 보이는 청춘들도 소통을 해보면 문제가 있어요. 결혼이 싫은 여성, 학교가 힘든 선생님, 취업이 힘든 청년도 있어요. 그런 사람들의 그런 이야기를 듣고, 도움이 될 수 있는 말을 해주려 노력하고 있죠. 아이들이나 젊은 사람들을 나무라지 않고, 기다려주고, 도움 주는 말을 했으면 좋겠어요. 예전에는 낳아주고 길러주는 것만으로 부모 노릇이 끝났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져주고, 참아주고, 기다려주는 것이 필요해요. 어른이 됐다는 건 졌다는 것이니까요.”
젊은 세대가 갖는 아픔에도 주목했다. 학자금 대출 등으로 ‘젊은 빚쟁이’가 되고, 구직난에 직장 구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지만, 망가진 경력은 쉽게 되돌릴 수 없어 ‘손닿는 직장’을 선택하기도 어려운 고충에 대해서다. 그는 “가서 막일이라도 해라”가 어른 눈에는 맞는 말 같지만, 쉽게 하지 못하는 요즘 젊은이들의 심정도 들여다보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달라진 세상에 대해 어른들이 더 주목해주길, 그리고 스스로도 변화하길 당부했다. “우리 사회는 이제 유교 사회도 농본주의 사회도 아니에요. 편리한 것, 새것을 좇는 자본주의 사회입니다. 이미 젊은 사람들은 모든 것을 갖추고 있는데 무조건 어른을 따르라 요구할 수 없어요. 또 같은 자리에 앉아 있어도 떠도는 (디지털) 유목 사회가 됐어요. 내가 만든 우유 한잔도 휴대폰을 뒤져보지 않으면 팔지 못하는 세상입니다. 모두가 노마드처럼 살고 있는데 과거의 잣대를 들이밀 수 없죠.”
바뀐 세상에 맞춰 그 스스로도 변화를 택했다. 그는 “나 역시 생각을 고쳐먹었어요. 한창 일했던 시기보다 정년퇴직 후 내 생활은 더 많이 바뀌었죠”라고 말했다.
모두 비워내야 좋은 어른
최근에는 ‘좋은 어른이 되는 법’을 고민하는 어른이 많아졌다. 인문학 강좌의 주제로도 인기가 많다. 세대 간 갈등이 부각되면서 스스로를 고민하는 기성세대가 늘고 있다는 뜻으로 읽힌다. 나태주 시인은 이러한 모습을 ‘굉장히 좋은 상태’라고 이야기했다.
“젊은 시절은 스스로를 채워야 하는 기간이에요. 이기적인 삶이 되죠. 가지고 싶은 것도 많아요. 돈도 명예도 지위도 얻으려면 채우는 데 집중해야 해요. 하지만 나이가 들어서는 달라요. 이타적인 삶의 태도를 취해야 해요. 공부도 마찬가지예요. 젊을 때는 남을 이기기 위한 공부를 하지만, 나이 들어서는 상 타는 것도 돈 버는 것도 아닌 내 내면의 기쁨을 위해서 공부하는 겁니다. 철이 드는 과정이죠. 이것을 위해서는 젊을 때 스스로를 꽉 채워놓을 필요도 있어요.”
그는 이 과정에서 나타나는 심리적 안정을 통정성에 빗대 이야기했다. 살아온 삶 전체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할 수 있는 태도를 말한다.
“그러면 스스로의 잘못도 인정할 수 있게 돼요. ‘그 대목은 참 미안하게 됐다. 어쩔 수 없었고, 지금 같으면 안 할 텐데 그때는 내가 그랬다’고요. 어른이라면 자신을 속이거나 아니라고 부정하지 않고, 자기 잘못까지 인정할 수 있는 태도가 필요해요. 우리 사회나 국가 운영에서도 마찬가지고요.”
젊을 때 맘껏 채우고 나면 이후에는 비우는 과정이 찾아온다. “나이 먹은 사람들은 생각을 해야 돼요. 어떻게 비우고 갈 것인지. 때려 부숴서 비우고 갈까, 곱게 정리해서 도움이 되게 할까 말이죠. 지금 운영하는 풀꽃문학관도 나를 비우는 작업이에요. 그간 모아놓은 것들을 쓰레기가 아닌 보물이 되도록 정리하고 있어요. 이것들을 욕심내 집에 데려가는 순간 쓰레기가 될 거예요.”
그렇게 잘 비우고 간 인물 중 하나로 나태주 시인은 이어령 선생을 꼽았다. 청년 시절 누구보다 채우기에 열중했고, 말년에는 자기를 완전히 비워놓은 ‘선비’ 같았다고 평가했다.
“옛날 교사 시절, 태풍이 휩쓸고 간 운동장에 떨어진 나뭇잎들을 모아다가 태운 적이 있어요. 아직 푸르름이 남아 있는. 그 잎들을 태우면 아주 역겨워요. 아직 살아갈 수 있는 여력이 남아 그런 것 같아요. 그에 반해 가을이 되어 탈색되고 말라 떨어진 낙엽들을 태우면 냄새가 고숩고, 가볍게 훨훨 타요. 모두 비워냈기 때문이고, 사람도 비슷할 거라고 생각해요.”
다가오는 선거로 인해 정치적 성향이나 세대, 지역 사이의 갈등이 점점 커지는 요즘이다. 서로가 상대의 생채기를 기대하며 날선 감정을 말과 글에 담아 던지기를 반복하고 있다. 그는 성숙한 어른이라면 그럴 이유가 없다고 단언한다.
“산 정상에 올라가면 사방팔방이 열려 동서남북이 다 보여요. 산꼭대기에 올라간 사람이 왜 동쪽 사람, 서쪽 사람, 남쪽 사람, 북쪽 사람에게 욕지거리를 내뱉나요. 다 동지고 친구죠. 인생의 산꼭대기에 올라가면 죽일 사람도 살릴 사람도 없어요. 성인들처럼 훌륭한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해요.”
BTS와 이생망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도 고민이다. 앞길이 창창한 청년들은 가야 할 길이 멀어 고민이지만, 중년이 넘으면 얼마 남지 않아 마음이 급해진다. 나태주 시인은 청년과 중년 혹은 노년은 접근이 달라야 한다고 조언한다.
“청년들은 미래를 위해 10년짜리 계획이 필요하지만, 중년은 5년 계획을 세우고, 그 다음 5년을 준비하는 방식으로 살아갔으면 좋겠어요. 청년은 차근차근 꿈을 이뤄나갈 수 있도록 충분한 기간을 갖고 준비해야 하고, 중년은 꼭 그러지 않아도 되니까요. 무엇을 할지 결정하는 방식도 달라져요. 젊은 사람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했으면 좋겠어요. 내가 잘하는 일만 하려다가는 더 잘하는 사람을 만나면 상처를 입어요. 좋아하는 일은 노력하면 잘할 수 있지만 잘하는 일이 좋아지긴 어렵죠. 길게 보면 좋아하는 일을 선택해야 해요. 그래야 중도에 포기하거나 지치지 않고 성공할 수 있어요. 하지만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반대예요. 잘하는 일을 선택해야 남은 인생 동안 성공을 맛볼 수 있을 테니까요.”
늘 말과 글에 대한 탐구를 멈추지 않는 그는 요즘 말에도 관심이 많다. 신조어와 노래 가사 등 종류를 가리지 않는다. BTS의 노랫말을 모티브로 한 노래산문집 ‘작은 것들을 위한 시’를 출간하기도 했다. 이야기 나누는 동안 요즘 말이 툭툭 튀어나왔다. 젊은 엄마들이 쓰는 ‘육퇴’(육아퇴근)가 그랬고, ‘독박육아’나 ‘라떼’(꼰대를 상징하는 말)가 그랬다. 그는 ‘이생망’을 지목했다. ‘이번 생은 망했으니 돌이킬 수 없다’는 뜻으로, 젊은이들이 자조적으로 하는 줄임말이다.
“요즘 말 중에 가장 마음 아픈 말이에요. 절망적이죠. 왜 망했다고 생각해요? 이번 인생이 망했으면 다음 인생도 망한 인생이 돼요. 좀 부족해도 모든 사람의 인생은 아름답고, 포기할 수 없어요. 모두 성과에 급급하니 나오는 말이에요. 사회적으로 알려진 사람들은 써서는 안 되는 말입니다. 청년들에게 많은 영향을 줘요.”
그는 젊은 세대에 대한 당부를 이어갔다. 많은 장소에서 만난 힘들고 지친 청년들이 잊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청년들에게는 너무 큰 꿈에 매이지 말라고 조언하고 싶어요. 요즘 젊은이들은 너무 커진 꿈을 원해요. 마치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악마와 계약을 맺듯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바치려고 하죠. 하지만 집채만 한 큰 것을 바라다가 안 되면 부숴버리고 싶고, 포기하고 싶고, 주저앉고 싶어져요. 그래서 이룰 수 있는 꿈을 꾸고, 그것을 성취하는 아름다움을 느껴보길 권하고 싶어요.”
스마트폰 하나면 전국 어디서든 배달이 가능하고, 택시도 부르고, 기차 예약도 하는 세상이다.
하지만 많은 어르신들이 이런 기술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누구든 4차 산업의 혜택을 받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원더풀플랫폼이 만들어진 계기다.
원더풀플랫폼은 어르신 돌봄 서비스를 만드는 플랫폼 회사다. 원하는 종류의 디바이스를 선택해 원더풀플랫폼의 ‘다솜K’를 탑재하면 된다. 다솜은 순우리말로 사랑을 뜻한다. 꼭 스마트폰이 아니어도 어떤 기기에서든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다솜이를 사용하는 전국 어르신은 약 1만 명. 2023년 10월 기준 94개 지자체와 147개 기관에 보급된 다솜이를 더 많은 어르신이 만나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원더풀플랫폼의 목표다.
어르신의 말벗 ‘다솜이’
다솜이는 ‘다솜K’를 부르는 애칭이다.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하루를 보내는 어르신들을 위해 특화된 것이 ‘말벗 기능’이다. “보통 구글 등의 음성 명령 서비스는 기기를 부르는 ‘명령어’가 필요하고, 궁금한 것을 물어보면 대답하는 것에서 끝나는데요. 다솜이는 대답 후 다른 질문을 덧붙이기 때문에 정말 대화하듯 말을 주고받을 수 있습니다. 또 사용자가 부르지 않아도 먼저 말을 걸기도 하고, 한 주제로 이야기하다가 다른 주제를 물어보기도 합니다.” 정진현 원더풀플랫폼 국내영업팀 팀장은 다솜을 만들 때 ‘대화’에 강점을 두었다고 설명했다.
다솜의 또 다른 특징은 학습한다는 점이다. 사용자가 다섯 살 손자가 있다는 걸 언급했다면, 기억해두었다가 다른 대화를 할 때도 적용한다. 어르신들의 어눌한 말투나 사투리도 학습한다. 따라서 대화를 많이 하면 할수록 다솜이는 똑똑해지고 고도화된다. 누가 다솜이와 대화를 했느냐에 따라 집집마다 다솜이의 성격이 달라진다. 쓰면 쓸수록 사람처럼 진화하는, 말 그대로 ‘말벗’이 된다. 말벗 기능은 챗GPT가 오픈되기 전부터 개발하던 것으로, 이제 5년 차가 됐다. 최근에는 챗GPT도 결합해 기능을 좀 더 다양화했다.
보고 듣는 기능도 있다. 젊은이들이야 유튜브에 검색해서 스트리밍 서비스를 이용하거나 원하는 콘텐츠를 검색하지만, 어르신들에게는 어려운 일이다. 다솜이에게 “쫛쫛 검색해줘, 쫛쫛 노래 틀어줘”라고 말하면 된다. 음식 레시피가 궁금하면 “김치찌개 끓이는 법 알려줘”라고 하면 영상을 찾아 재생해준다. 정 팀장은 “요즘 시대에 나오는 콘텐츠에 접근할 수 있도록 효율성을 높여드린 셈”이라면서 “무엇이든 말로 할 수 있게 했다”고 설명했다. 2023년 10월 기준 다솜이를 통해 어르신들이 가장 많이 사용한 기능은 콘텐츠 재생, 날씨 정보, 화상통화다.
건강관리도 다솜이로
현재 다솜이는 지자체, 보건소, 치매안심센터 등을 통해 주로 보급되고 있다. 지자체에서 대상자를 선정하면 원더풀플랫폼에서 다솜이가 탑재된 디바이스를 댁에 방문해 설치해드리고 사용 방법을 알려준다. 원더풀플랫폼은 관리자 페이지에 대화를 통해 얻은 데이터를 저장한다. 어떤 어르신이 다솜이와의 대화 중에 “오늘 다리가 아프네”라고 말하고 며칠간 이런 대화가 반복될 경우 어르신을 방문할 생활지도사나 간호사에게 ‘아픈 부위 1순위 다리’라는 정보를 제공한다. 그러면 어르신을 방문할 때 “어르신 요즘 다리가 많이 아프시다면서요?”라며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갈 수 있다. 또한 자주 말하는 단어를 기록하는데, 만약 죽음과 같은 부정적인 단어가 자주 보인다면, 정서적 케어가 필요하다는 것을 관리자가 확인할 수 있다.
알림 기능도 있다. 휴대폰 전용 앱을 이용하면 다솜이가 ‘어르신 오늘 보건소 방문하셔야 하는 날이에요’라는 일상 알림이나 재난 문자 등을 읽어준다. 지방의 경우 태풍이 불고 천둥이 치면 마을 방송 확성기 소리가 묻혀 잘 들리지 않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는 지자체의 요청을 받아 기능을 개발했다. 다솜이에게 ‘도와줘’, ‘살려줘’라고 말하면 원더풀플랫폼에서 24시간 운영하는 관제시스템으로 연결되는 응급 기능도 있다. 직원이 상황을 파악한 후 필요한 경우 119에 대신 신고해준다.
병원에서도 다솜이를 활용하고 있다. 큰 수술을 마치고 집으로 귀가한 환자에게 위급상황이 발생할 경우를 대비하는 것. 간호사들이 귀가 후 주의사항이나 해야 할 것들을 다솜이를 통해 알릴 수 있고, 갑자기 몸이 안 좋아졌을 때 긴급 호출을 요청할 수도 있다. 최근에는 정신건강센터에서도 다솜이 이용 문의가 이어지고 있다.
2024년 원더풀플랫폼이 집중하는 것은 ‘스마트 빌리지’ 사업이다. 지자체에서는 움직임이 있는 휴머노이드형 로봇을 복지관을 비롯해 어르신들이 자주 방문하는 장소에 보급할 계획을 갖고 있다. 원더풀플랫폼은 각 기관에 있는 로봇과 집 안의 로봇을 연결하고자 한다. 몸이 불편해 경로당에 나가지 못해도 경로당에 나와 있는 어르신들과 소통할 수 있고, 경로당끼리 노래방 대회 등 교류도 할 수 있도록 말이다. 궁극적인 목표는 4차 산업 시대에 효과적인 기능의 혜택을 어르신들도 함께 누리도록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다솜이에게 ‘치약이 떨어졌다’고 말하면 치약을 대신 주문해주고, 일정 시간이 지나면 ‘어르신 곧 치약이 떨어질 때가 되었는데 주문해드릴까요?’라고 물을 수 있게 할 예정이다.
“시골로 내려가겠다고? 그건 좀 미친 짓 아닌가?” 김화자(59, ‘꽃피는 산골농원’ 대표)는 이런 핀잔을 종종 들었다. 그러나 귀에 담지 않았다. 시골살이의 고독과 농사의 고난을 헤쳐나가느라 몸은 물론 마음마저 상할 수 있으니 충분히 숙고하라는 충고쯤으로 여기고 시골행에 시동을 걸었다. 시골살이는 김화자 부부에게 오래 묵은 로망이었다. 복잡한 도시에서 벗어나 부부 단둘이 시골에서 오순도순 살고 싶다는 꿈에 무슨 결함이 있으랴. 김화자에게 귀농은 자연스러운 이행(移行)이었던 같다. 상류의 물이 하류로 흘러가는 것과도 같은 순행. 올해로 그는 귀농 11년 차를 맞이했다. 애초 귀농을 만류했던 이들의 말이 이젠 사뭇 달라졌단다. “어라, 이 사람들 성공했네!”
김화자의 집은 무주군의 명산 적상산 아래에 있다. 한갓진 외딴집이다. 집 앞엔 개활지가 시원하게 펼쳐진다. 인상적인 건 이 집에서 바라보이는 산 풍경이다. 뒤편으로는 적상산이 떡 버티어 집을 보듬었고, 앞쪽에선 대호산이 뭔가 서기를 풍겨 생동감을 부여한다. 저 멀리 아스라이 덕유산도 보인다. 하얀 눈을 뒤집어쓴 그 산의 정상부는 아예 설산인데, 마치 다른 차원의 세계를 편집해 붙인 듯 신비감이 감돈다. 여기나 저기나, 앉으나 서나, 밤이나 낮이나 산들의 동향을 관찰하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는 환경이다. 산경(山景)에 심취하는 버릇이 있는 사람에게 적격인 삶터다. 김화자는 마땅한 시골을 물색하기 위해 남편과 함께 여러 지역을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인터넷에 매물로 나온 이곳을 둘러보고 곧바로 부지를 사들였단다. 첫눈에 호감이 가서.
“이왕이면 산세 좋은 곳에 터를 마련하고 싶어 강원도와 경기도 북부 지역 곳곳을 답사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이곳을 만난 건 행운이었다. 강원도의 산세를 닮은 분위기에 보자마자 반했으니까. 깊은 맛을 풍기는 산세에다 탁 트인 경관까지 보기 좋게 어우러져 즉시 매입했다. 철탑이나 축사가 인근에 없는지, 가격은 합리적인지, 갖가지 꼼꼼한 점검부터 하는 게 매입 수칙이라지만 그런 걸 다 생략하고 샀다. 한참 뒤에 알고 보니 시세보다 훨씬 비싼 땅값을 치렀더라.(웃음) 하지만 억울하진 않았다. 취향에 맞는 터를 구입했다는 기쁨이 더 컸으니까. 터를 정하고 나자 지인들이 ‘미쳤다’는 소리를 또 끄집어냈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무주에서 무슨 재주로 살 거냐면서.(웃음)”
초기 5년은 혹한기
터 일대의 자연환경 하나에 꽂혀 일을 저지른 셈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탁월한 선택이었다. 이날 이때까지 대체로 순탄한 시골살이를 해왔으니까 말이다. 터에 서린 무슨 지령(地靈)의 선한 감독을 받았을 리 없겠지만, 첫눈에 반한 땅이 주는 만족감을 정서적 기반으로 삼아 순항을 해왔으니 김화자에겐 영락없는 명당이다. 귀농 전에 그는 경기도 고양시에서 살았다. 남편과 함께 문구점을 18년간 운영하다가 접고 시골로 들어온 것.
“자영업이 대부분 그렇듯 자유시간이 없다. 스트레스도 많고 갑갑증이 난다. 더구나 우리는 휴일 없이 일에 매달려 살았다. 덕분에 문구점 규모를 키울 수 있었지만 언젠가는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 일찍부터 아이들을 다 키운 뒤엔 시골에 가서 마음 편하게 살 작정을 했는데, 마침내 적당한 시점에 이르러 가게를 청산하고 2013년에 이곳으로 내려왔다.”
도시에도 장점과 매력 요소가 많다. 시골이 마음 편하게 살 수 있는 곳이라는 생각은 어떻게 하게 됐나?
“돈을 벌기엔 도시가 한결 유리하겠지만 만족할 만한 좋은 삶을 꾸리는 데엔 시골이 더 낫다고 봤다. 그리고 그 좋은 삶이란 시골의 깨끗한 자연환경 속에서 텃밭을 일구고 정원을 가꾸는 식의 여유로운 활동을 통해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자유롭고 평온하게 살고 싶어 오랫동안 시골을 꿈꾸었던 거다. 어휴, 도시는 참 싫다. 스트레스와 부자유는 물론 교통체증과 매연에 질렸다.”
농사는 어떤 작물을 하나?
“농원의 전체 부지 1800평 중 1500평에다 사과와 블루베리 농사를 한다. 처음엔 사과 농사만 하다 나중에 블루베리를 추가했다. 애초 우리는 귀촌 형태의 시골살이를 구상했다. 호미자루 한 번 손에 쥐어본 적 없는 나로서는 본격적인 농사는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그냥 한가하게 살고자 했다. 인근에 구천동 관광지구가 있으니 상황을 봐서 나중에 민박집을 하면 되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런데 정작 들어오고 나서는 귀농 쪽으로 방향이 잡혔다.”
그렇게 된 계기가 있겠지?
“원래 이 터 일부에 사과 과수원이 있었던 데다 마을 주민들이 사과 농사를 하라 권유를 해 입문했다. 무주는 사과 특산지구다.”
농사 초심자가 과수원에 뛰어들었다. 막막한 게 많지 않았을까?
“처음 1년은 너무도 힘들었다. 호미로 풀을 메다가 집어던지고 주저앉아 펑펑 울기도 했다. 문제는 농사에 관한 아무런 사전지식도 없이 덤벼들었다는 데에 있었다. 그래서 무주농업대나 농업기술센터를 통해 열심히 배웠다. 여러 해에 걸쳐 농업교육을 이수하면서 농촌체험학습지도사, 농식품가공기능사, 팜파티플래너 1급 지도사, 다육아트지도사 등 다수의 자격증을 땄다. 농촌융복합산업 사업자 인증도 받았고.”
당초 귀농에 뜻을 두지 않고 내려왔지만 어차피 본격 농사에 승차했으니 제대로 한번 달려보자! 아마도 그런 결기가 작동했던 게 아닐까? 김화자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직시하고 민감하게 움직이는 걸로 귀농 생활을 개척해나갔다. 그러자 매사 탄력이 붙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농사일이 즐거워졌다. 비록 고달픈 노동이 연속으로 이어지는 나날이지만 도시에서와 달리 마음은 편하고 여유로웠다. 하지만 농사로 얻는 수익은 쉬 오르지 않더란다. 초기 5년은 혹한기였다는 것.
“월 300만 원, 즉 연간 3500만 원 정도의 순소득을 목표로 삼았다. 그쯤이면 부부 둘이 먹고살기에 충분할 거라 봤다. 하지만 손에 쥘 게 거의 없었던 초기 5년간은 많은 고심을 하며 지냈다. 다시 말하자면 자리 잡는 데 5년이 걸린 셈이다.”
그마저 괜찮은 성적이지 않나? 10여 년이 지나서야 궤도에 오르는 귀농인도 많다.
“우리는 친환경 농법으로 사과와 블루베리를 생산한다. 따라서 품질이 좋다. 이게 입소문이 나면서 찾는 이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농사 자체는 쉽지 않다. 특히 자연재해엔 속수무책이다. 농부가 최선을 다해도 물과 햇빛이 도와주지 않으면 망칠 수 있다.”
일찍이 현자가 말했더라. 하늘은 때로 사람을 공깃돌처럼 가지고 논다고. 어떤 식의 자연재해를 경험했나?
“태풍이 몰아쳐 사과나무들을 쓰러뜨렸다. 낙과 발생이 극심해 팔 만한 게 없었다. 밤낮없이 나무를 일으켜 세우는 작업을 하며 울었다.(웃음) 봄철에 느닷없이 쏟아지는 우박, 긴 장마, 겨울 가뭄 등 수시로 악재와 부닥친다. 자연 앞에서 사람은 나약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걸 실감하며 산다. 그러나 행복감을 맛보는 때가 아주 많다.”
어떤 때에?
“창밖이 밝아오는 아침에 눈을 뜰 때, 가만히 피어나는 들꽃을 바라볼 때 참 좋다. 밭에서 힘겹게 일하면서도 내가 지금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산다는 자각을 할 때도 행복하다. 이건 도시에서 가게를 할 땐 전혀 느끼지 못했던 경험이다.”
괜히 시골에 들어왔다는 후회는 없었는지?
“한번은 사다리를 타고 사과나무를 돌보다가 떨어져 발목뼈 세 군데가 부러졌다. 게다가 수술마저 잘못돼 무려 2년간 심한 고생을 했다. 그때 처음으로 회의를 느꼈다. ‘아이고, 내가 왜 시골에 와서 이 고생을 하지?’(웃음) 하지만 잠깐 스쳐가는 후회에 불과했다.”
이미 얻을 건 다 얻었다
그의 농원은 정갈하고 쾌적하다. 2층으로 지은 살림집과 정원 공간, 체험장과 가공공장, 사과와 블루베리 밭, 또는 이리저리 이어지는 통로 등이 유기적으로 구성돼 조화로운 한편 기능성을 극대화했다. 부부가 쏟아부은 비지땀과 능력과 시간의 산물이다. 농장의 핵심 공간은 체험장이다. 이곳은 급조한 비닐하우스지만 내부 치장이 꽤 흥미롭다. 벽면에 걸린 수예품과 그림들, 선반에 올라앉은 공예품들, 너른 자리를 차지하고서 재잘거리는 수백 점의 다육식물들. 이것들은 모두 김화자가 손수 만들거나 가꾼 것이라는 점에서 가히 독창적이다. 그는 이곳에서 방문객들을 상대로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우리 농원은 무주군 1호 치유농장이다. 과수 농사만 하다가 치유체험농장으로 전환한 이후 나름의 성장을 해왔다. 체험장에 있는 모든 사물이 치유 프로그램 소재로 쓰인다. 이건 실로 만족스런 대목이다. 나의 취미와 취향을 즐길 수 있는 수단을 프로그램화해 남들과 공유하고 소득까지 올리고 있으니까.”
일과 취미를 접목한 셈인가?
“시골에서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놀자는 게 기본 목표였는데 그게 이루어졌다. 처음엔 농사만 했지만 노동만 하면 무슨 재미가 있겠나? 취미 역시 제대로 즐겨 삶의 질을 높이고 싶었는데 그게 이루어졌다.”
흔히 원주민이나 귀농인이나 농사에 매몰돼 취미 내지는 문화 활동과 무관한 일상을 산다. 당신의 스타일은 독특하다.
“내가 경험한 시골 인심은 정겹고 순박하다. 그러나 평생 호미를 쥐고 사는 할머니들을 보면 안타깝다. 때로 그들을 농원에 모셔 그림을 그리게 한다. 그러면 무표정하던 얼굴에 생기가 돌더라. 귀농인들도 맘만 먹으면 얼마든지 문화를 즐길 수 있다. 난 읍내 합창단에 가입해 노래를 즐기기도 하는데, 문화 동아리도 많고 싼값에 볼 수 있는 공연이나 이벤트도 풍성한 게 요즘의 지방이다.”
성공한 귀농인이라는 얘기를 듣는다지? 이제 농원에 무엇을 더 보탤 계획인가?
“2023년 매출이 약 9000만 원이다. 이쯤이면 충분히 만족스러운 수준이다. 차후 게스트하우스를 하나 지을까 생각 중이지만 사실 얻을 건 이미 다 얻었다. 부부가 노후를 편하게 지낼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됐고, 자식들이 놀러 와 맘껏 놀다 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으니까. 무엇보다 그토록 바랐던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살고 있어 기쁘다.”
원했던 곳에서 원했던 삶을 발굴해 지속한다는 건 아마도 인생의 최고봉이다. 섣부른 귀농으로 인생이 외려 꼬이는 수도 있지만 과욕 없는 열렬한 행보라면? 김화자의 방식엔 은근히 개성과 패기가 박혀 있다.
김화자가 주는 귀농 Tip
•마음을 비우고 귀농하자. 꽉 채워진 마음엔 새로운 게 들어설 자리가 없다.
•성향이나 기질이 농촌 생활과 어울릴지 면밀히 점검하고 귀농 여부를 결정하자.
•귀농 초기의 고생은 통과의례로 여기고 귀농하자. 5년 차까진 수련기로 작정하는 게 현명하다.
•처음엔 집을 빌려 쓰라고들 하지만 아예 내 소유 집부터 짓는 게 좋을 수 있다. 초기의 어려움에 질려 너무 쉽게 역귀농하는 사례를 볼 수 있는데, 집을 지어놨을 경우엔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아 인내하며 활로를 찾아가기도 한다.
•작목은 가급적 지역 특산물을 선택하자. 관의 지원을 받을 수 있고, 생산물 유통의 이점이 크기 때문이다.
•남자만의 귀농은 금물이다. 부부가 함께 귀농하자.
단양은 행정구역상으로 충청북도다. 하지만 북쪽으로 강원도 영월군, 동쪽으로 경상북도 영주시, 남쪽으로 경상북도 예천군과 문경시, 서쪽으로 충청북도 제천시와 접해 있어서 주변과 연계한 여행을 계획할 때 좋은 위치에 자리 잡고 있다.
단양의 자연은 짓누르던 일상의 무게를 날려버리고 지친 마음을 위로받기에 충분하다. 무엇보다 단양의 깊은 산과 계곡이 주는 힐링이 더할 나위 없다. 계절이 바뀌어가는 자연 속에서 한시름 내려놓고 푹 쉴 수 있는 푸근함 그 자체다. 그리고 만나는 사람마다, 가게 주인이나 지나가는 분들 모두 선량하고 친절해서, 이런 게 사람 사는 맛인 듯 느끼게 해주었다.
태풍, 시루섬의 기적
우리가 살아가면서 언제나 순항만 이어질 수 있을까. 지난여름의 장마와 더위, 그리고 무시무시한 태풍은 평온했던 일상을 바꿔놓고 사라졌다. 이처럼 해마다 맞닥뜨리는 장마와 태풍으로 무수한 아픔이 기억 속에 남겨진다. 1972년 8월 이곳 단양의 남한강 유역에 위치한 시루섬 마을에도 태풍이 강타했다.
당시 250여 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던 시루섬을 삼킨 태풍 ‘베티’. 남한강의 갑작스러운 범람이 시작되자 마을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빗줄기는 멈추지 않았고, 결국 마을에서 제일 높은 곳으로 모두 피신했다. 높이 6m, 지름 5m짜리 물탱크에 올라선 마을 주민은 198명이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서로 팔짱을 낀 채 숨쉬기도 어려울 정도로 빽빽하게 고립된 상태로 14시간을 버텼다. 이때 엄마가 안고 있던 백일이 지난 아기가 압박에 못 이겨 끝내 숨을 거뒀다. 사람들이 동요하면 물에 빠져 죽을 수도 있는 처지여서 혼자만 슬픔을 삼키던 아기 엄마의 이야기를 시루섬은 기억한다.
어쩌면 살아남기 어려울 수도 있었던 14시간의 절박한 사투였다. 이런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도 서로 손을 잡고 버텨낸 협동·단결·인내의 정신을 계승하고자 단양군에서는 시루섬의 기적을 콘텐츠화했다. 이제는 시루섬의 차분해진 자연 속에서 되짚어보는 안타까운 이야기와 함께 현재를 본다. 부근에 이끼터널과 수양개빛터널, 잔도길과 만천하스카이워크가 있다. 느림보 강물 길을 따라 천천히 돌아보며 조용히 자연을 즐겨볼 산책 코스다.
신선이 노닐던 상선암, 중선암, 하선암
이어서 단양 8경 중 제1경인 하선암, 제2경인 중선암, 제3경인 상선암을 돌아볼 차례다. 자동차로 달리면 바로바로 이어져 있어서 느긋하게 단양의 비경을 구경할 수 있다. 조약돌 탑이 즐비한 하선암 계곡의 느릿한 물 흐름을 바라보는 여행자들이 마냥 여유롭기만 하다. 출렁다리가 이어져 있는 중선암 숲은 고요하다. 출렁다리 앞 벤치에 앉아 가게 주인과 단양의 자연에 대해 몇 마디 이야기하기도 하고 중선암을 찾는 이들과도 주거니 받거니 하며 한참 쉴 수도 있으니, 이 아니 느긋할 수가.
중선암에서 상선암으로 가는 길목에 특이한 것이 눈에 들어온다. 산 아래 길 옆으로 소형 동물 옹벽 탈출 시설이다. 도로 건설 등으로 많은 소형 동물이 측구 등에 빠져 죽기도 한다. 이때 소형 동물의 탈출이 어려워, 배수관에 경사로를 설치하여 소형 동물의 탈출을 도와주는 시설이다. 도로를 횡단하는 동물이 높은 옹벽에 막혀 탈출하지 못해 로드킬당한 모습을 가끔 본 적 있다. 이렇게 섬세하고 친절한 인공 구조물이라니, 고마울 따름이다.
상선암 계곡에서 마을로 오르면 집집마다 마당에 널어놓은 고추가 빨갛게 잘 마르고 있다. 이런 태양초라면 김치도 맛있고 어떤 요리든 맛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 옆 마당의 평상에 고사리, 다래순, 오미자 진액, 취나물 등을 소쿠리에 담아놓고 가격을 적어놓았다. 3000원, 5000원… 이른바 무인 상점이다. 시골 분들의 정성이 담긴 식재료 맛은 남다를 듯하다. 지나던 마을 어르신이 앞산을 바라보면서 예부터 신선이 머물렀다는 전설의 상선암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주신다. 덕분에 단양의 산천에 얽힌 구수한 이야기도 듣는다. 자신이 사는 곳의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자신 있게 들려줄 수 있는 자부심은 매우 멋지다.
오랜 시간 속의 풍경, 사인암
단원 김홍도가 이곳 겹겹의 격자무늬인 사인암을 그리려고 붓을 잡고 1년여를 고민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로 절경을 보여준다. 흔히 말하는 기암괴석이 병풍처럼 배경을 이룬다. 사인암은 약 50m 높이의 멋진 바위 아래 남조천이라는 못이 함께하고 있어서, 바라만 보는 게 아니라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그 안에 들어가서 물장구도 치고 물고기도 잡는다. 거기에 산 정상의 소나무가 운치를 더한다. 단양 8경 중 4경에 속한다.
바로 옆으로 출렁다리를 건너기 전 청련암을 둘러보아야 한다. 청련암은 사인암과 맞닿은 사찰로 대한불교 조계종 속리산의 말사다. 팔작지붕 구조의 극락 칠성각이 차분히 맞는다. 무엇보다 사인암 뒤편 암반지대 사이의 삼성각이 눈에 들어온다. 가파른 계단 옆으로 많은 이들의 염원이 주렁주렁 매달렸다.
단양 도담삼봉(島潭三峰)의 풍류
단양 여행 중이라면 도담삼봉은 기본 코스인 양 당연히 들를 곳으로 생각한다. 많이 알려져 있고 몇 번씩 보았던 곳이어도 단양 시내에서 가까워 다시 한번 들러보지 않을 수 없다. 남한강이 휘도는 곳에 세 개의 봉우리가 우뚝 솟아 반영을 이루어 그 형상만으로도 눈에 담아둘 만하다. 조선 개국공신 정도전이 자신의 호를 삼봉이라 할 만큼 이곳을 사랑했다 하니, 옛 시절의 풍류도 떠올려본다. 도담삼봉 하류의 석문까지 돌아보고, 여유롭다면 유람선과 모터보트의 즐거움도 챙겨보자.
참고로 단양팔경은 단양군의 8군데 명승지로, 단양을 중심으로 12km 내외에 모두 자리 잡고 있다. 하선암, 중선암, 상선암, 사인암, 구담봉, 옥순봉, 도담삼봉, 석문이다.
구경(九景)시장의 마늘 맛 이야기
숙소로 가는 길에 단양 구경시장을 지나칠 수 없다. 단양팔경에 이은 아홉 번째 볼거리라는 뜻의 구경(九景)시장이다. 가는 날이 장날이 아니었는데도 사람들이 제법 많이 오간다. 구경시장은 상가건물형의 중형 시장으로, 장날은 매월 1일과 6일이다. 길 건너 맞은편에 주차장이 있다. 시장 근처에 드니 마늘 냄새가 확 풍긴다. 마늘로 유명한 단양임을 절로 실감한다. 입구부터 마늘이 주렁주렁, 마늘순대, 마늘만두, 마늘닭강정, 마늘빵, 마늘전병 등 끝도 없는 마늘 먹거리다. 몇 군데는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는 풍경을 이루고 있다.
숙소, 소선암 자연휴양림으로
자연휴양림은 각 지역에 따라 다르겠지만 PC나 모바일 앱으로 ‘숲나들e’ 사이트에서 예약 가능하다. 비용이 대체로 저렴해 매월 예약창이 열리면 재빨리 예약해야 한다. 각기 차이는 있지만 신청 시 경쟁률이 높다.
단양 선암계곡 가장자리에 자리한 소선암 자연휴양림은 숲속의 집이다. 숲으로 둘러싸인 산중이어서 숙소로 들어가는 길이 마치 속세를 벗어나는 기분이다. 자연의 풍경 속에 잠겨 마음껏 몸에 생기를 집어넣을 기회다. 울창한 숲과 깊은 계곡은 자연스럽게 숲 놀이터와 물놀이장이 된다. 휴양림 안에 두악산 등산로가 연결되었고, 유아숲체험관과 목재체험관도 있다. 숲 내부의 다양한 시설을 이용하며 평온하게 이곳에서만 시간을 보내도 문제없다. 피톤치드를 온몸으로 받으며 고요한 숲에 푹 잠겼다.
작품 속 캐릭터를 보고 실제 배우의 성격을 오해할 때가 있다. 배우 최수린(49)은 악한 캐릭터를 주로 맡았던 터라 실제로도 까칠하거나 차가운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실제의 그는 작품 속 모습과, 머릿속 막연한 생각과는 180도 달랐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천성이 선한 사람이었다. 5월 봄날의 햇살을 꼭 닮은 그의 해맑음은 연기로는 나올 수 없는 본연의 것이다.
최수린은 과거 MBC ‘밥줘’, KBS 2TV ‘내사랑 금지옥엽’ 등에서 얄미운 캐릭터를 맡아 연기했고, 근래 작품에서는 주로 못된 시어머니 역할을 소화했다. 최근 작품인 KBS 2TV 일일드라마 ‘태풍의 신부’에서도 그는 비슷한 역할로 등장했다. 최수린은 사실 다양한 역할을 소화한 스펙트럼이 넓은 배우다. MBC 사극 ‘김수로’와 ‘마의’에서는 선한 캐릭터를 연기하기도 했다.
“악녀 연기, 시어머니 연기가 따로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저는 그냥 제게 들어온 캐릭터를 최선을 다해서 연기했을 뿐이고, 그 역할들이 연이어 나오거나 대중의 눈에 띄었던 것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지금까지 맡은 역할에 대한 후회나 아쉬움은 없어요. 다만, 늘 제 연기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편견 탈피한 여배우 행보
1995년 SBS 드라마 ‘까치네’로 데뷔한 최수린은 베테랑 배우다. 활동한 지 거의 30년 차가 되어가는 그는 지난해부터 부쩍 시청자의 눈길을 끌고 있다. 제2의 전성기라고 표현해도 무방할 정도다. KBS 2TV 주말드라마 ‘현재는 아름다워’에서 밉상 시누이로 시청자들에게 눈도장을 강렬하게 찍은 후, ‘태풍의 신부’로 기세를 이어갔다.
‘태풍의 신부’는 OTT(온라인 동영상 서비스) 전성시대에 15%(닐슨코리아, 전국 기준) 내외의 시청률을 기록하면서 인기를 끌었다. 최수린이 연기한 ‘태풍이 엄마’ 남인순은 미워할 수 없는 악녀였다. 자기 자식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엄마지만, 사랑스럽고 허당 매력이 넘치는 인물이다. 최수린은 스펙트럼 넓은 연기로 남인순을 표현했고, 시청자들에게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남인순을 연기하면서 정말 행복했어요. 배우가 여러 감정선을 보여주는 캐릭터를 만나기란 쉽지 않거든요. 여자로서 질투, 돈과 자식에 대한 집착과 사랑, 미래에 대한 두려움 등 인간이 가진 여러 가지 심리를 골고루 보여줄 수 있어서 좋았어요. 연기를 하면서 몰입도 많이 했고, 즐거웠습니다.”
최수린은 드라마가 방영되는 동안 연기 호평과 함께 ‘젊은 엄마’라는 평도 많이 들었다. 그는 어린 나이부터 ‘어머니’나 ‘시어머니’ 역할을 맡아왔다. 최수린은 “20대와 30대 때 나이에 맞는 젊은 역할을 연기하지 못했다. 30대 때는 이미 40대, 40대 때는 50대 역할을 연기했다”고 말했다.
배우 중에서는 나이대가 높은 캐릭터 또는 누군가의 엄마 역할을 기피하는 사람이 꽤 있다고 알려져 있다. 최수린은 이런 편견을 깨는 반전의 행보를 펼치는 셈이다. 여기에는 그만의 스토리가 있다. 최수린은 1994년 SBS 1기 공채 MC 출신으로 연예계에 발을 디뎠다. 그러다 배우로 전향했는데, 생각만큼 잘 풀리지 않았다. 그는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았고 연기 제안도 거의 없었다. 그게 많이 힘들었다”고 회상했다.
이후 30대가 되면서 최수린은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서른 살에 아들을 낳고 배우로 복귀한 그는 본격적으로 최선을 다해 일하겠다고 마음을 다졌다. 최수린은 “항상 일이 간절했다. 나이대가 안 맞는다는 이유로 연기를 못 한다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내가 역할을 선택할 처지도 아니었고, 기회가 오면 놓치지 않았다”고 말했다.
“아이를 낳은 후 30대가 됐고, 젊은 역할을 맡기에는 애매한 상황이 됐어요. 그때 제가 살을 원 상태로 다 빼지 못해서 좀 통통했거든요. 아예 머리도 볶아버렸고, 실제보다 나이가 많은 역할을 맡게 됐죠. 그게 시작이었던 것 같아요. 그러다가 2009년에 ‘내사랑 금지옥엽’을 만났어요. 다른 제작진분들은 다 반대했는데, 작가님이 저를 추천했다고 하더라고요. 결국 좋은 결과가 나왔고, 저한테도 터닝포인트가 됐죠.”
그렇게 최수린은 실제보다 나이 많은 역할도, 악한 캐릭터도 마다하지 않았다. 항상 최선을 다했고, 죽기 살기로 연기했다. 일을 하면서, 작품이 쌓여가면서 점점 배우라는 직업에 대한 소명의식과 애정도 생겼다.
“예전에는 잘 몰랐는데 요즘 생각해보면 연기는 제가 좋아하는 일이고, 그래서 계속 하는 거예요. 저는 연기를 하면서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요. 무슨 역을 맡든지 그저 잘 해내고 싶었고, 잘한다는 칭찬의 말을 듣고 싶었어요. 그리고 그 드라마로 인해 다음 드라마가 이어서 들어오기를 바랐죠. 그래서 욕심을 과하게 부릴 때도 있었는데, 그러면 연기가 미워 보이더라고요. 배우는 연기할 때 완급 조절을 잘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명상 통해 온화함 찾아
배우가 되지 않았다면 그는 어떤 일을 했을까. 최수린은 “미술 쪽 일, 뭔가 만드는 일을 하지 않았을까”라는 예상치 못한 답변을 했다. 그리고 “워낙 그림 그리고 만드는 것을 좋아해서 미대 진학을 생각했다. 특히 자개장을 좋아해서 나전장이 되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우리 전통문화예술을 잇는 전수자들이 계속해서 나왔으면 좋겠다”라고 설명을 이었다.
최수린의 이야기를 들으며 언제 진로를 바꾸게 됐는지 궁금했다. 그는 고등학교 3학년 때 처음으로 배우를 생각했다고 털어놓았다. 열 살 많은 친언니이자 배우인 유혜리의 영향도 조금은 있었다. 그러나 정작 유혜리는 동생의 내성적인 성격을 걱정하며 배우 활동을 반대했다고 한다.
“결국 고등학생 때 마음먹은 대로 배우를 하게 됐죠. 저도 처음에는 제 성격이 연예계 활동을 하기에는 맞지 않다고 느꼈어요. 연기를 하면서 내성적인 성격이 오히려 장점으로 작용한 것 같아요. 저의 모든 것을 보여줘도 부끄럽지 않습니다. 내성적인 사람은 평소에 표현을 많이 하지 않지만 연기라는 기회를 통해서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잖아요. 그러다보니 이제는 내성적인 편은 아닌 것 같아요.(웃음) 연기를 하고 사람들을 많이 만나면서 성격이 중화됐고, 나를 표현하는 방법도 좀 능숙해진 것 같아요.”
얘기를 나누어 보니 최수린의 성격은 내성적이라기보다는 온화하다는 표현이 맞아 보인다. 그의 일상 또한 단조로우면서도 건강하다. “나이가 들수록 체력이 떨어지는 것을 체감한다”는 최수린은 건강관리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꾸준한 운동과 식단을 통해 몸 관리를 하고 있다. 요리를 좋아하는 터라 한식 위주로 건강하게 식사하는 편이다. 마음은 명상을 통해 다스리고 있다.
“만약 누가 저를 기분 나쁘게 하면, 저는 그 사람한테 뭐가 기분 나빴는지 다 말했어요. 그러면 상대방한테 상처를 주게 되니까 결국 제가 스트레스를 받더라고요. 그래서 올해부터는 ‘한마디 더 할 걸 하지 말자’라고 스스로 다짐했어요. 말을 줄인 후 스트레스를 덜 받고 있죠. 그리고 스트레스는 명상을 통해 풀어요. 명상을 한 지는 5년 정도 됐어요. 눈을 감고 내 마음에 있는 더 큰 세상을 보는 게 명상이에요. 저는 매일 하고 있는데,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리얼한 연기하는 배우 되고파
이처럼 평온한 일상과 달리 연기할 때는 많은 에너지를 써야 한다. 소리도 지르고, 울고, 누군가의 뺨을 때려야 할 때도 있다. 최수린은 역할에 워낙 몰입하는지라 감정 소모도 심한 편이라고. 그래서 그는 작품을 마칠 때마다 훌쩍 여행을 다녀온다. 자신이 연기한 캐릭터를 보내주고 온전한 나로 돌아오는 시간이다.
“이번에 ‘태풍의 신부’를 마치고는 헝가리, 체코, 벨기에, 프랑스 등 유럽 여행을 다녀왔어요. 저는 어딘가로 여행을 떠나면 오랜 시간 머무는 편이에요. 관광지도 너무 열심히 돌아다니지 않고 일상을 지켜요. 아침에 일어나서 명상하고 운동하고, 식사도 천천히 하고요. 여행을 통해 내 마음의 중심을 찾는다는 생각이 커요. 여행을 다녀오면 차분하게 마음 정리가 되고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좋더라고요.”
최수린은 꼭 여행이 아니더라도 일상에서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느끼려고 한다. 친구나 가족과 대화할 때, 지나가는 행인의 모습 등에서 자연스럽게 발견되는 표정이나 감정이 있다. 그는 그것들을 연기에 투영하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최수린의 배우로서 목표는 ‘리얼(Real)한 연기를 할 수 있는 배우’가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슬플 때, 또 어떤 사람은 즐거운 순간에 기가 막힌 톤이 나오더라고요. 그 예상치 못했던 것들을 발견하는 게 너무 재밌어요. 또 저는 고향이 안성이거든요. 어렸을 때 들었던 사람들의 말투, 느꼈던 정서, 그런 것들을 잊지 않으려고 해요. 실생활에서 연기를 배우는 거죠. 배우는 사람에게 공감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 감정에 공감해야 자연스럽게 연기로 나오는 거죠.”
최수린의 지나온 삶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항상 배움의 자세를 잃지 않는 겸손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을 높이 평가하지 않으며 세상만사에서 깨달음을 얻는다. 120세 시대이니 앞으로 살아갈 날이 많이 남은 만큼, 최수린도 찬란한 미래를 설계해본다. 늘 발전하는 배우가 되고 싶고, 인간적으로는 버킷리스트를 이루며 가족과 행복하게 살고 싶단다.
“저는 하고 싶은 게 많아요. 스카이다이빙도 해보고 싶고, 어학 공부를 해서 새로운 언어를 마스터하고 싶기도 해요. 50대는 친구들끼리 여행을 많이 다닐 때라고 하던데, 이제 성인이 된 아들하고도 같이 여행을 다니고 싶어요. 함께 같은 걸 보고 느끼면서 배우는 부분이 많을 것 같아요. 꼭 여행이 아니더라도 아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많이 가져야겠다고 생각해요. 여러분도 하고 싶은 것을 하시면서 인생을 즐기면서 사세요.”
드라마 '현재는 아름다워'의 현진주, '태풍의 신부' 남인순 역으로 제2의 전성기를 맞은 29년차 배우 최수린.
질투, 돈과 자식에 대한 집착과 사랑,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폭넓게 그려내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최수린은 제 나이보다 높은 나이대의 인물, 악한 인물도 마다하지 않았다. 모든 배역에 최선을 다하면서 직업에 대한 애정이 생겼단다.
"항상 일이 간절했죠. 나이대가 안 맞는다는 이유로 배역을 거절하는 건 말이 안 되잖아요. 무엇보다 기회를 날리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컸어요."
그는 작품 하나를 마칠 때마다 훌쩍 여행을 떠난다. 연기했던 인물을 떠나 보내고 온전한 그, 최수린 본인으로 돌아오기 위함이다.
"여행을 통해 내 마음의 중심을 찾는다는 생각이 커요. 마음을 차분히 정리하고,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다짐하게 되거든요."
최수린은 여행지에서, 혹은 일상에서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느끼려 한다. '리얼한 연기를 하는 배우'라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다.
TO. 브라보 독자
"늘 발전하는 배우이자, 버킷리스트를 이루는 인간 최수린으로 살고 싶어요. 독자 여러분도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인생을 즐기셨으면 좋겠습니다."
이야기를 좋아해 그 속에 푹 묻혀 살았다. 동네 사랑방, 길쌈하는 여인들 틈바구니 비집으며 이야기 구슬들을 집어 담았다. 어른이 되고 나서는 다듬고 정리해 하나씩 쓸모 있게 만들기 시작했다. 구슬은 서 말이라도 꿰어야 장신구가 되듯이, 최상식(77) PD의 손에서 잘 꿰어진 고향의 전설들은 한국의 여름을 대표하는 드라마, ‘전설의 고향’이 되었다.
최상식 PD는 1971년 서울중앙방송(현 KBS)에 PD로 입사했다. 1976년부터 1994년까지는 TV드라마 PD로서 ‘전설의 고향’(1977~1989), ‘보통사람들’(1982~1984), ‘춘향전’(1994) 등을 연출했다. 이후 KBS 드라마 제작주간으로 ‘젊은이의 양지’(1995), ‘첫사랑’(1996~1997), ‘태조왕건’(2000~2002), ‘겨울연가’(2002) 등을 기획 및 제작했다. 2002년 퇴사한 뒤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원장, 미디어공연영상대학 학장, 한류아카데미 원장 등을 역임했다. 지금은 유튜브 채널 ‘최상식 PD와 송도영 성우의 전설의 고향’을 운영하며 전설을 찾아 전국 방방곡곡을 헤매고 있다.
‘촌스러운’ 캐릭터의 창시자
최상식 PD의 이름 밑으로는 제목만 봐도 OST가 귀에 들릴 정도로 유명한 작품들이 빼곡하다. 그는 시청률 공식 집계 이래 대한민국 모든 프로그램을 통틀어 역대 최고 시청률인 65.8%를 기록한 KBS 2TV 주말 연속극 ‘첫사랑’의 책임 프로듀서다. 491회로 최장수 일일 연속극 기록을 보유한 ‘보통사람들’의 책임 프로듀서이며, 김희선, 배종옥, 배용준 등 내로라하는 배우들을 발굴해냈다. 그러나 그를 만난 사람들은 ‘전설의 고향’부터 떠올린다.
“1976년부터 드라마 PD로 일했어요. 1977년 10월에 시작한 ‘전설의 고향’은 PD로서 영글기 전에 만들었던 프로그램이죠. 저 스스로는 부끄럽게 느껴지는 부분도 없잖아 있어요. 그래서 저는 대표작으로 ‘전설의 고향’보다는 ‘보통사람들’을 꼽곤 하는데, 워낙 이미지가 강해서인지 최 아무개 하면 ‘전설의 고향’부터 떠오르는 모양이에요.”
지금도 ‘납량 특집 드라마’의 대명사로 여겨지지만, 당시 파급력은 더욱 대단했다. TV 있는 집이라면 안 본 집이 없다고 할 정도로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전설의 고향’이 전파를 탄 다음 날이면 온통 전설에 대한 이야기뿐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12년 동안 프로그램을 제작한 불세출의 연출가임에도, 한국인이라면 남녀노소 좋아할 만한 ‘전설’이란 소재 덕분에 인기 있었던 것이라며 겸손을 보인다.
마산 시골에서 나고 자란 그는 어릴 적부터 이야기를 참 좋아했다. ‘전설의 고향’ 역시 그가 유년 시절 접한 수많은 이야기들로부터 탄생했다. PD가 된 그는 연출자로서 어떤 점을 내세워야 성공할지 고심했고, 그동안 모아둔 이야기를 풀어놓는 이야기꾼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처음에는 반대의 목소리가 컸다. KBS에서 TV 드라마 방영을 시작한 지 10년이 막 지나던 즈음이었다. CG는커녕 촬영한 영상에 효과음을 넣는 편집 작업조차 다른 세상 이야기이던 시절, ‘전설 속 요괴와 귀신을 어떻게 구현하려고 하느냐’는 지극히 현실적인 우려였다.
하지만 그는 제작을 밀어붙였다. 쑥을 태워 스튜디오에 연기를 자욱하게 내고, 시골 초가집을 표현하기 위해 스튜디오 바닥에 지푸라기를 잔뜩 가져다 깔았다. 물뿌리개로 카메라 렌즈 앞에서 물을 뿌려 비 오는 날씨를 연출했고, 전설에 자주 등장하는 뱀이나 구렁이를 직접 섭외(?)해 스튜디오에 풀기도 했다. 게다가 리얼함을 추구하는 연출자였던 그는 출연 배우에게 어떤 장치가 설치돼 있는지 미리 안내하지 않고 촬영에 임했다. 덕분에 촬영 중 실제로 울음을 터뜨리는 배우도 있었다. 그야말로 난장판인 촬영 현장에서 생고생을 해야 하니, 배우고 제작진이고 ‘전설의 고향’ 참여를 원치 않는 경우가 허다했다.
다행히 고생한 보람은 충분히 있었다. 프로그램을 크게 흥행시킨 것 말고도 구미호나 저승사자를 한국 납량물의 대표 캐릭터로 정립한 까닭이다. 하얀 소복과 하얗게 센 머리, 희고 큰 꼬리 아홉 개를 가진 구미호, 검은 갓과 검은 도포, 하얀 얼굴에 까만 입술의 저승사자. 이제는 당연하다 못해 자칫 촌스럽게 느껴질 수 있지만 최상식 PD가 고민 끝에 구현해낸 엄연한 창작물이다.
“저는 어릴 적에 여우 이야기를 많이 접했어요. 농한기인 겨울에는 사람들이 큰방에 모여서 새끼를 꼬면서 옛날이야기를 하곤 했거든요. 그때만 해도 한국에 여우가 굉장히 많았고, 주로 농사를 짓다 보니 소만큼 중요한 가축이 없었기 때문에 여우와 관련한 이야기가 많았죠. 하지만 1979년 처음 에피소드를 제작할 때만 해도 구미호는 ‘남자 간 빼먹는 여우 같은 여자’ 같은 욕으로나 쓰였어요. 관련한 설화를 아는 사람도 얼마 없었죠. 그래서인지 반응이 좋을 줄 전혀 몰랐습니다. 저를 포함한 제작진들이 모두 어안이 벙벙했어요.”
1대 구미호를 연기한 배우 한혜숙은 길에 나서면 아이들이 ‘구미호 나타났다’며 돌을 던졌다. 방송 잘 보고 있다는 전화가 고등학교 은사로부터 걸려오기도 했다. ‘전설의 고향’ 출연 섭외와 프로그램의 인기는 반비례했지만, 구미호만큼은 예외였다. 구미호로 출연한 배우들은 모두 이름 날리는 데 성공하면서 방송가에는 ‘여우 귀신이 도와줘 스타가 된다’는 소문까지 생겼다.
미래 콘텐츠 찾아 헤매는 이야기꾼
그의 취재 과정은 학자의 연구를 방불케 한다. 서재와 작업실, 거실을 가득 채운 책들과 고서, 그림 등 고문헌을 뒤지고, 취재하다 만난 동네 주민들에게서 새로운 이야기를 듣 기도 한다. 전설을 발견하면 현장에 직접 가서 증거물이 실제로 있는지, 전설에 등장하는 지역과 그 근방을 샅샅이 뒤진다. 이제는 동네의 오랜 전설을 아는 어르신들이 많이 돌아가신 탓에 지역 주민이라도 전설에 대해 전혀 모르는 경우가 많다.
“지네 여인 전설이 있는 서울 남산 부엉바위 약수터도 찾기 힘들었어요. 조사해보면 해방 전까지 한양, 경기 일대 최고의 약수터로 꼽혀서 사람들이 줄을 설 정도였다고 해요. 그런데 남산을 아무리 오르내려도 전설에 등장하는 부엉바위 약수터는 없는 거예요. 2주일이 넘도록 찾다가 계단 난간을 넘고 가시덤불 밑으로 들어가니 거기에 약수터가 있었어요. 하도 무당들이 찾아오니까 도시 정비를 하면서 그곳을 폐쇄해버렸던 거예요. 그러니 경비원도 주변 주민들도 전혀 몰랐던 거죠.”
그를 움직이는 건 사명감이다. 어느덧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전국을 헤매며 현장의 영상을 담는 고생스러움을 마다하지 않는다. 1박 2일에 유튜브 방송 8~9회 분량을 취재하는 답사 일정이 점차 힘에 부친다. 그러나 그는 전설이 갖는 콘텐츠의 중요성을 알기에 그만둘 수 없다. 한 가지 소재로 웹툰, TV 드라마, 뮤지컬, 영화까지 만드는 요즘이다. 전설이 빠지면 섭섭하다.
“전설은 이야기의 보물창고예요. 한국 사람들의 상상에서 나온, 다른 나라 사람들은 도저히 떠올릴 수 없는 구조의 이야기들이죠. 게다가 전설을 뜯어보면 당시 서민들이 무엇에 분노하거나 서러워했는지, 무엇을 꿈꿨는지 알 수 있어요. 인간의 삶과 죽음, 한(恨)이나 정(情)이 한데 들어 있으니, 이보다 더 완벽한 소스가 또 있을까요.”
그는 올해 초 국제영화제에 감독으로 이름을 올리는 영광을 안으면서 이를 증명해냈다. 로테르담 국제영화제 측으로부터 공식 초청을 받은 KBS 아카이브 프로젝트 다큐멘터리 ‘모던코리아’ 11부 ‘짐승’ 편의 정재은 영화감독이 ‘전설의 고향-이어도’(1979)를 동반 초청작으로 직접 추천했기 때문이다. 후배들은 ‘과거 선배들의 업적이 재조명된다는 점이 의미 있다’, ‘함께 소개할 수 있어 영광이다’라며 기뻐했지만, 정작 당사자는 소식을 접하곤 부끄러운 마음이 앞섰다.
“처음 후배들한테 연락을 받고서는 ‘그걸 창피해서 어떻게 내느냐’면서 손사래를 쳤어요. 장비도 마땅치 않았고 편집은 거의 불가능한데다 막 컬러 영상이 도입되던 시절에 만든 영상이니 요즘 나온 작품들에 비하면 얼마나 어설프겠어요. 하지만 영화제 측에서 유튜브에 올라온 리마스터링 영상을 확인했고, 충분히 좋다며 재차 요청해서 결국 출품하게 됐죠. 그때 제주도에 태풍이 와서 비바람 부는 밖에서 힘들게 촬영했던 기억이 아직도 납니다.”
유튜브로 옮겨붙은 열정
열흘에 한 번, 10분 내외의 분량. 얼마든지 재탄생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사라지는 게 아쉬워 지난해 유튜브 채널 운영을 시작했다. ‘10대가 보지 않으면 유튜브로 성공할 수 없다’, ‘이미 야사나 민담을 다루는 유튜브 채널이 너무 많아 상대가 안 될 것이다’ 등 대부분이 만류했지만 그는 이번에도 제작을 밀어붙였다. 배우를 쓰는 대신 연필을 들었다. 직접 그린 삽화와 촬영해온 현장 영상, 애니메이션 ‘은하철도 999’의 메텔 역 등을 맡았던 유명 성우이자 아내 송도영의 더빙 음성을 합하면 ‘가내수공업’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퀄리티의 영상이 탄생한다.
유튜브 채널 운영은 순탄한 편이다. 구독자도 7만 명을 훌쩍 넘겼고, 영상의 조회수 추이도 좋다. 올린 지 한 달 만에 조회수 110만 회를 넘긴 영상도 있다. 야심차게 기획한 어버이날 특집 ‘고비사막을 넘은 효자’ 영상 조회수가 정작 낮다는 점이 아쉽지만 아무렴 괜찮다. 가장 큰 걸림돌은 밑그림 작업이다.
지난해 4월부터 여태 그린 그림만 1000장이 넘는다. 이쯤 하면 실력이 늘 법도 하건만, 현장에서 연출할 때도 배우의 표정에 가장 신경을 많이 썼던 그는 직접 그린 그림 속 인물의 표정이 마뜩찮아 애를 먹고 있다. ‘내가 남의 속에 들어앉는 게 아니고서야’ 맡길 수도 없는 일이라, 그는 오늘도 눈초리며 입 매무새를 그렸다 지우길 반복한다.
유튜브에는 과거 ‘전설의 고향’에서 다뤘던 전설과 새로운 전설에 대한 영상이 골고루 올라간다. 전설만 12년 넘도록 소개했지만 아직도 다루고 싶은 내용이 차고 넘친다. 일본에서 살았던, 살아야 했던 한국인들의 전설도 마찬가지다.
“일본은 지리적·역사적으로 우리와 연관이 깊은 나라예요. 이미 잘 알려진 귀무덤이나 코무덤 말고도 가야, 백제 때부터 임진왜란, 일제강점기까지 합치면 다룰 수 있는 내용이 엄청날 거예요. 국내에서 다룰 전설도 많고 시간과 체력 때문에 엄두를 못 내고 있지만, 기회가 된다면 꼭 다뤄보려 합니다. 실제로 일본에 갔을 때 작은 돌다리 간판석에 백제 관직과 이름이 새겨져 있거나, 얼굴 반절이 탄 채로 절 구석에 처박혀 있는 우리나라 불상을 많이 봤어요. 그런 유물, 지명에 담긴 정서와 이야기를 전달하고 싶습니다.”
은퇴 후 학생들 앞에 설 때도 좋았지만 무언가 부족했나 보다. 촬영 현장을 진두지휘하는 꿈을 종종 꿨다. 무언가 잘못돼서 촬영 전체가 어그러지는 꿈은 귀신 꿈보다 끔찍했다. 20년 가까이 그를 쫓아다니던 꿈은 지난해 유튜브 시작과 함께 멎었다. 천직이라는 표현이 절로 나온다. 그가 소망하듯, 이야기꾼이 꿰어낸 보배는 길이길이 K-콘텐츠의 든든한 원형이 되어줄 것이다.
소설가 스티븐 킹은 이런 말을 했다. “소설은 독자를 움켜쥐고 한 대 후려갈기는 것처럼 위력적이어야 한다.” 그는 독자들에게 충격과 전율을 야기하는 작품을 쓰고 싶었던 것이다. 사람의 관습과 관점을 타격하려는 예술가로서의 목적의식이 선명하기로는 비디오아트 창시자 백남준(1932~2006)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기발하고 기이한 작품 행위를 통해 대중의 굳은 의식을 비트는 데 이골이 난 사람이었다. 어디로 튈 줄 모르는 럭비공, 그것도 도발과 전복의 메시지를 다탄두로 장착한 럭비공처럼 날아가 사람들의 타성을 가격한 백남준의 작품은 전례 없는 새로운 것이었다는 점에서 창조의 원본이었다. 사람들은 초기 한때 그의 작품에 어지러워 야유를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갈채는 뜨거워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이렇게 탁월한 예술혼의 작품 다수를 한꺼번에 만날 수 있는 곳이 있다. 경기도 용인시에 있는 백남준아트센터다.
백남준아트센터는 도시 외곽 야트막한 동산 아래에 있다. 유리로 외부를 두른 3층 규모의 대형 단독 건물을 지어 미술관을 꾸렸다. 첫눈에 감흥을 맛보기는 다소 어려운 형상이다. 물결처럼 굽이치는 건물 뒤편 곡면이 매우 유려하지만 미감을 자극할 만한 디테일 요소는 부족한 편이다. 설계를 주도한 이는 독일 건축가 마리나 스탄코비치. 그는 “자연과 인공의 조화를 최우선으로 했으며, 건물 외벽을 유리로 만들어 안과 밖이 연결되도록 했다”고 밝힌 바 있다. 주변 지형을 흐트러뜨리지 않고 지었다는 점은 이 건물이 지닌 커다란 미덕이다.
건물의 형상은 동서 방향으로 눕혀진 ‘P’자를 닮았다. 주변의 언덕과 골짜기를 배려하 는 한편, 가용 부지를 최대한 활용하면서 귀결된 형상이 그렇다. 이 ‘P’자 모양은 그랜드피아노의 형태와 비슷하다. 그래서 피아노를 퍼포먼스 오브제로 즐겨 동원했던 백남준의 경향을 이미지화한 건물 형상이라 유추하는 이들이 많다. 설계자가 의도적으로 건축에 담은 백남준의 상징물은 외벽 유리 커튼월에 즐비한 가로줄이다. 이는 백남준이 구사한 작업의 핵심 매개체인 TV 화면의 이미지를 형상화한 것이다. 과거 흑백 TV의 화면 조정 시간 때 지지직거리며 출렁거리는 줄무늬에서 착안한 것. 재미있게 음미할 만한 요소가 적지 않은 건물인 셈이다. 그러나 백남준이라는 거대한 콘텐츠를 담은 그릇치고는 평범하고 소박하다. 실험과 도발을 일삼았던 백남준을 닮았더라면, 건물을 척 보는 순간 감동과 상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들솟을 텐데. 세계적 수준의 예술가는 세계적 수준의 건축에 담아야 아귀가 맞는 게 아닐까.
정신의 대륙붕에서 융기한 준봉
이 미술관은 백남준의 작품 130여 점을 소장했다. 해마다 두어 차례 펼쳐지는 백남준 상설전에 소장품 일부를 번갈아 전시한다. 현재 ‘아방가르드는 당당하다’전이 열리고 있다. 올해로 탄생 90주년을 맞이한 백남준의 놀라운 예술 세계를 재조명하기 위해 마련한 전시회다. 1층 전시장에서 맨 먼저 관람객을 맞이하는 작품은 ‘TV정원’이다. 열대성 식물로 채운 인공 정원에 경쾌한 뮤직비디오가 흘러나오는 TV 모니터들을 배치한 이색으로 눈길을 붙잡는 작품이다. 식물과 기계, 또는 자연과 기술의 컬래버레이션이다. 조물주의 작품이라 할 만한 식물을 오브제로 끌어들여 예술의 경계를 확장했다. 언뜻 대수롭지 않은 조합처럼 보이지만 백남준의 작품이라 뭔가 대수로운 걸 열심히 찾아보게 된다. 이게 예술의 소구력이자 백남준의 힘이다. 평범하거나 따분한 세상과 사물을 한 걸음 더 들어가 흥미진진하게 바라볼 수 있는 새로운 눈을 달아주는 게 그의 예술이지 않던가.
백남준의 예술 여정은 전위음악으로 시작됐다. 1960년 그는 ‘피아노포르테를 위한 연습곡’을 공연하면서 피아노를 박살내고 스승 존 케이지의 넥타이를 잘라 청중을 경악시켰다. 그건 예상을 초월한 급진적 퍼포먼스였다. 텔레비전을 오브제로 동원, 비디오아트의 신호탄을 쏜 건 ‘음악의 전시’라는 개인전을 통해서였는데, 이번엔 잘린 소머리까지 진열했다. 틀에 갇힌 예술 관행을 질타하고, 위선의 이웃사촌인 엄숙주의를 조롱했던 거다. 이때부터 백남준은 ‘문화 테러리스트’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러나 국내에서 백남준을 알아보는 눈은 많지 않았다. 언론의 보도 자체가 드물었다. 기사를 쓰더라도 백남준의 작업이 희한하지만 그게 과연 예술인지 뭔지 모르겠다는 투의 의문을 제기하는 글에 그쳤다. 첼리스트 샬롯 무어만과 나체 퍼포먼스를 하다 경찰에 연행됐다는 외신을 가십으로 전하는 정도에 그쳤다. 이후 백남준이 비로소 국내에서도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건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계기로 해서였다.
전시장에선 백남준의 출세작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볼 수 있다. 1984년 새해 벽두,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중계로 한국, 미국, 독일, 프랑스에 생방송된 이 퍼포먼스는 현대미술사의 명장면으로 회자된다. 조지 오웰은 소설 ‘1984년’을 통해 기계문명의 폐단을 암울하게 묘사했다. 그러나 백남준은 ‘1984년’을 비디오아트로 패러디, 오웰의 어두운 미래 전망을 뒤엎었다. 기술 발전으로 오히려 인간 해방이 가능하다는 낙관적인 세계관을 개진했다. ‘굿모닝 미스터 오웰’로 백남준은 드디어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으며, 국내에서도 주목하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전시실의 백남준 작품은 10여 점에 불과하다. 하지만 한 시대를 태풍처럼 휩쓴 거장의 작품들이니 반색하지 아니할 수 없다. ‘칭기즈 칸의 복권’에는 말 대신 자전거를 탄 20세기 칭기즈 칸 로봇이 등장한다. 자전거의 짐받이에는 TV가 가득 실려 있다. 왜 칭기즈 칸인가? 백남준은 자신의 진취적 성향의 출처를 ‘몽골 유전자에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비디오아트로 세상의 모든 예술을 압도하겠다는 야심의 표명? 그는 다만 머리와 기교로 예술을 성취하지 않았다. 어릴 적에 가족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를 만들어 사용할 정도의 기찬 상상력, 어마어마한 독서량, 정밀한 철학적 논문 등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로 벼린 통찰력…. 그의 예술은 정신의 대륙붕에서 융기한 하나의 준봉이었을지도.
2층 전시실에 있는 ‘메모라빌리아’(Memorabilia)는 뉴욕 소호에 있었던 백남준의 작업실을 그대로 옮겨 재현한 공간이다. 백남준의 숨결이 선연히 느껴지는 공간이라 기억에 남겠다. 작품 관람을 마친 뒤엔 건물 뒤편을 굽이치는 산책로를 즐길 일이다. 돌을 바닥에 깔고 경사지의 곡면을 채웠으니 돌의 성채다. 구간은 짧지만 매우 아름다워 강렬하다.
행정안전부는 취약계층에 대해 풍수해보험료 전부 지원 등을 내용으로 하는 ‘풍수해보험법’을 개정하고, 전부 지원할 수 있는 대상 등을 내용으로 하는 풍수해보험법 시행령이 시행된다고 지난 4일 밝혔다. 이번 시행령은 반복된 풍수해로 스스로 회복할 힘을 잃은 경제취약계층에게 실질적인 지원을 제공하기 위해 마련됐다.
풍수해보험은 행정안전부가 관장하는 정책보험이다. 9개 유형(태풍, 호우, 홍수, 강풍, 풍랑, 해일, 대설, 지진, 지진해일)의 자연재해로 인한 재산 피해에 따른 손해를 보상해준다. 가입 대상 시설물은 주택(단독, 공동), 농·임업용 온실(비닐하우스 포함), 소상공인이 운영하는 상가·공장건물(건물내 설치된 시설·기계·재고자산 포함)이며, 시설물의 소유자와 세입자(임차인)모두 보험에 가입할 수 있다.
이번 시행령에는 ▲정부가 풍수해보험료를 전부 지원할 수 있는 대상 ▲풍수해보험금과 재난지원금 간의 차액에 대한 지원 근거 등의 내용이 새로 담겼다. 풍수해보험료 전액 지원 대상은 풍수해로 인해 풍수해보험금을 수령했거나, 정부의 재난지원금을 받은 이력이 있는 주택에 실제 거주하고 있는 기초생활보장 수급자, 차상위계층, 한부모가족지원법에 따른 지원 대상자 등이다. 자연재해 위험성이 높은 ‘풍수해보험 가입 촉진 대상 지역’에 실제 거주하고 있는 저소득층도 대상에 포함된다. 풍수해보험 가입 촉진 대상 지역이란 붕괴위험지역·산사태취약지역·해일위험지구·상습설해지역 등 자연재해 취약지역을 가리킨다.
또한 풍수해로 인해 받는 풍수해보험금이 재난지원금보다 적을 경우, 그 차액을 재난지원금으로 지원받을 수 있다. 보험기간 내 정부의 재난지원금 지원기준이 상향 조정된 이후 재난피해 시 지급받는 보험금이 재난지원금보다 적은 경우와, 보험목적물에 반복적으로 피해가 발생해 피보험자가 실제로 지급받는 보험금이 재난지원금보다 적을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
진명기 행정안전부 재난복구정책관은 “기후변화 등으로 대규모 재해가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어 자발적인 풍수해보험 가입이 꼭 필요하다”라며 “예외적으로 저소득층에 대한 정부의 전부 지원으로 취약계층에 대한 안전망을 지속적으로 확대하겠다”고 말했다.
경북 울진과 강원도 삼척을 중심으로 한 동해안 산불 피해가 8일째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연예인들의 성금 기부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그들은 한마음 한뜻으로 산불 피해를 입은 이재민들을 위로하며 피해 수습·복구·지원에 성금이 쓰여지기를 바랐다.
배우 김희선과 가수 영탁은 적십자를 통해 성금 1억 원을 기탁했다. 김희선은 적십자사를 통해 “예기치 못한 산불로 삶의 터전을 잃은 이웃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고 산림재건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기부하게 됐다”며, “어려움을 겪는 이재민들이 하루빨리 일상으로 복귀하고, 산불로 소실된 산림이 조속히 복원될 수 있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가수 임영웅은 사랑의열매 사회복지공동모금회를 통해 1억 원을 기부했다. 그는 “산불로 삶의 터전을 잃은 주민분들에게 조금이나마 힘이 됐으면 한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임영웅의 팬클럽 '영웅시대' 또한 회원들의 동참으로 모인 2억 6000만원을 사랑의열매에 전달했다.
유재석은 희망브리지 전국재해구호협회(이하 희망브리지)에 “산불 피해로 아픔을 겪는 이재민들을 위해 써달라”며 1억 원을 기부했다. 대형 산불 피해가 커진다는 소식을 접한 유재석은 이재민들을 돕기 위해 긴급 구호 등 피해 지원 명목의 기부를 결정했다고 전해졌다.
유재석은 앞서 2019 태풍 피해, 2020 수해 피해 긴급구호 캠페인, 코로나19 피해 지원 성금 등 희망브리지를 통해 지속적으로 기부해왔고, 기부 금액이 8억여 원을 넘은 것으로 알려졌다. 유재석의 선한 영향력이 새삼 입증됐다.
이달 결혼을 앞둔 예비 부부인 스타 커플 현빈과 손예진도 희망브리지에 기부금 2억 원을 함께 전달했다. ‘절친’ 정우성과 이정재도 희망브리지에 1억 원을 각각 기부했다. 정우성은 소속사를 통해 “산불로 피해를 입은 지역 주민들과 밤낮으로 힘쓰시는 모든 관계자분들께 작게나마 도움을 보태고 싶다”라고 전했다.
김은숙 작가와 드라마 제작사 화앤담픽쳐스의 윤하림 대표는 산불 피해 이웃돕기 성금 6천만 원을 희망브리지에 기부했다. 더불어 우크라이나 전쟁 피해자 돕기에 4천만 원을 기부했다.
가요계를 대표하는 3사도 기부에 동참했다. 이수만 총괄 프로듀서와 SM엔터테인먼트, 그리고 YG엔터테인먼트는 희망브리지를 통해 5억 원을 쾌척했다. JYP엔터테인먼트는 국제구호개발 NGO 월드비전에 3억 원을 기부했다.
이 외에도 송강호, 김혜수, 송혜교, 신민아, 한지민, 이제훈, 김우빈, 이종석, 박민영, 김고은, 박보영, 아이유, 수지, 방탄소년단 슈가, 전현무, 김연아 등도 1억 원을 기부하며 산불 피해 구호에 동참했다.
강원도 산불은 지난 5일 오전 1시 8분 강릉시 옥계면 남양2리에서 주민 이모(61)씨의 방화로 시작돼 8일째 이어지고 있다. 11일 오전 울진-삼척 지역 산불이 꺼지지 못한 채 진화율 75%를 기록하고 있다.
정부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중대본)에 따르면 동해안 산불로 인해 이날 오전 6시까지 2만 3 993ha의 산림 피해(산불영향구역 면적)가 추정된다. 이는 역대 최대 규모인 2000년 동해안 지역 산불의 피해 면적인 2만 3천 794ha를 넘어섰다.
이날 오전 5시까지 산불로 648개 시설이 피해를 입었다. 주택 358채, 농·축산시설 48곳, 공장 및 창고 167곳, 종교시설 75곳이 피해를 봤다. 인명 피해로 확정된 사례는 없다. 방화를 저지른 이모 씨의 모친(86)이 산불을 피해 대피 도중 다치면서 숨진 바 있지만, 경찰은 평소 모친이 거동이 불편했기 때문에 산불로 인한 연관성은 적다고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