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서른 바퀴 넘는 길을 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세계여행가 김찬삼은 ‘동양의 마르코 폴로’라 불릴 만큼 한국 해외여행의 선구자라고 일컫는다. 1958년부터 시작한 세계여행으로 그의 발걸음이 닿은 곳은 160여 개국 1000여 개 도시에 이른다. 당시는 해외에 나가는 것이 어려웠던 때일 뿐 아니라 세계여행이란 말조차 생소하던 시절인 걸 생각하면 가히 혁명적이기까지 하다. 예나 지금이나 두말이 필요 없는 독보적인 여행의 아이콘이다. 하늘도시 영종에 그가 있다.
여신(旅神)이 내게 있어 내게 무슨 특혜를 베풀어준 것은 아니지만 매양 새로운 것을 보는 기쁨이 둘도 없는 힘이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런 수난은 인간 수업에 있어서 고귀한 경험들이었습니다. -김찬삼의 ‘끝없는 여로’ 18쪽
세계의 나그네 김찬삼을 기억하다
여행가 김찬삼 교수(1926~2003)는 인천인이며 세계인이다. 황해도에서 태어났지만 본적인 인천시 중구에서 성장하고 생을 마쳤다. 서울대학교를 졸업한 후 고등학교 지리 교사와 대학에서 지리학과 교수를 지내면서 “직접 눈으로 보지 못한 것을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죽은 지식”이라며 세계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자 하는 열망을 키웠다고 한다. 이렇게 시작된 김찬삼 교수의 여행 이야기를 인천의 하늘도시 영종에서 만날 수 있다.
바다와 공원이 어우러진 영종역사관은 봄을 코앞에 둔 계절에 여행가의 기획전시를 보여주는 중이다. 영종역사관 3층에서 열리는 ‘세계의 나그네 김찬삼 특별기획전’은 3부로 나뉘어 전시된다.
1부는 ‘세계를 꿈꾸다’ 편으로 김찬삼 교수가 세계인의 꿈을 키웠던 인천에서의 성장 과정을 담았다. 학자와 저술가로서의 면모와 여행가로서 세계를 향한 도전 정신이 피부로 느껴진다. 2부는 ‘한국 최초의 세계여행가’ 편. 세계여행의 경로와 여정이 담긴 기록들을 귀한 자료들과 함께 소개했다. 세계일주의 첫 여행지 알래스카를 시작으로 40여 년 동안의 여행 이야기가 펼쳐진다. 3부는 ‘만인의 스승 김찬삼’으로 세계의 현장을 바탕으로 교육자로서 직접 보고 느낀 여정을 보여준다. 또한 그가 성장해온 인천과 후반기의 안식처였던 영종과 영종인으로서의 인연을 조명했다.
전시품 중 김 교수와 늘 함께했던 낡은 배낭과 모자와 신발은 특히 보는 이들에게 여행을 향한 강한 전율을 느끼게 한다. 마르코 폴로와 슈바이처를 사랑한 그는 여정 중에 슈바이처 박사도 만났다. 여행 중 굶주리다시피 해도 무한한 힘이 솟구치는 것은 매양 새로운 나라 사람들과 자연을 보는 기쁨이 둘도 없는 영양제가 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당시 출간되었던 책과 포스터엔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하다. 카메라와 낡은 지도, 꼼꼼히 기록한 여행일지와 수만 장의 슬라이드 필름. 그중에 세계를 돌아다니며 몰았던 빨간색 딱정벌레차도 인상적이다. 1970년 독일 여행 중 독일인 친구에게 선물받았다는 폭스바겐이다. 또한 지도가방은 지도를 고정하는 형태의 캔버스 가방으로, 아크릴 덮개가 있어 비나 눈이 오는 경우에도 지도를 확인할 수 있다. 여행가에게 지도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1960년대 중남미와 아프리카 여행 전에 친구에게 맡긴 유서는 여행가로서, 가장으로서 진중하다. “내 목적을 위해서는 어떠한 고난도 기쁘게 받으련다. 설령 내가 무슨 사고로 죽더라도 서러워 말고, 운명이라고 체념하고 부모에게 위로하여 줄 것이며 애들의 교육을 잘 부탁한다.”
그는 말한다. “나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인간 수업에 있어 여행처럼 좋은 것은 없다고 보인다. 세계 언어는 2000여 종, 이를 다 배우는 것보다는 소박하고 어진 미소가 무엇보다도 고귀한 것이 아닐까.” 전시장의 모든 사진마다 밝은 얼굴로 환하게 웃는 김찬삼 교수는 진정 세계의 나그네였다. (전시 기간 5월 31일까지)
하늘도시 영종과 김찬삼
우리에게 영종도는 듣기만 해도 먼 곳을 향한 그리움으로 짜릿해지는 곳이다. 그곳 어디쯤에서든 머리 위로 비행기가 날고 여행의 열망이 솟구친다. 그 옛날부터 영종도는 공항터가 될 곳이 아니었을까 하는 이야기가 있다. 기록에 따르면 영종도의 옛 이름은 자연도(紫燕島)였다. 섬에 제비가 많이 날아 붙여진, 문자 그대로 자줏빛 제비섬이다. 제비는 그렇다 치고 자줏빛은 해 저무는 영종섬의 붉다 못해 자줏빛이었던 하늘을 말함이라. 일몰에 물든 자줏빛 제비의 모습으로 명명된 자연도라 하니, 옛사람들의 지명 정하기의 기지와 운치는 멋스럽기 그지없다. 영종 또한 긴 마루를 가진 섬이란 뜻으로, 오늘날 활주로가 펼쳐진 공항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아무튼 현재 그곳엔 몇 분 간격으로 비행기가 뜨고 내린다.
영종도는 김찬삼 교수에게 특별한 곳이다. 세계여행가 김찬삼 교수의 여행 책은 당시 손꼽히는 베스트셀러였다. 그 시절 웬만한 집의 책꽂이에는 김찬삼의 세계여행 전집이 있었다. 인천인인 그는 책의 인세로 영종도 구읍나루터 인근 바다 언덕에 공간을 마련했다. 이곳에서 휴식을 하고 여행 원고 집필에 몰두했다. 또한 여행문화원과 여행도서관을 개관하기에 이른다. 더 많은 이들에게 세계여행의 꿈과 희망을 불어넣어 주고픈 마음이었다. 하지만 영종국제도시가 생기면서 터를 잃고 말았다. 아이러니하게도 부근에 세계로 통하는 첫 관문인 인천국제공항이 자리 잡았고 이곳에 영종역사관이 들어섰다.
영종역사관 밖으로
영종역사관은 영종도의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알리기 위한 공간이다. 실내는 물론이고 외부에서 유적과 유물을 만나볼 수 있는 전통정원이 앞마당이다. 정원을 몇 걸음 거닐다 보면 숲을 이룬 메타세쿼이아가 빽빽하다. 영종진공원은 운요호 사건이 일어난 곳이다. 일본의 급습으로 마을이 불바다가 되었던 아픔의 장소이기도 하다. 이곳에 역사적 상징물인 전몰영령추모비와 태평루라는 누각을 설치해서 아픈 역사를 기억하는 메모리얼 정원으로 조성했다.
바다 옆으로 난 영종둘레길을 따라 건강백년길, 치유하늘길, 힐링바닷길의 산책 코스 또한 자연스럽다. 영종역사관을 둘러싼 시사이드파크는 영종하늘도시 인근의 공원으로 8㎞의 해변공원이 일품이다. 해변길을 따라 조성된 왕복 5.6㎞의 레일바이크도 신나고, 캠핑장과 하늘구름광장, 스카이데크 등을 두루 갖추고 있어 남녀노소 누구나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저녁 무렵이면 갯벌 풍경과 어우러지는 일몰이 신비롭다.
인천의 작은 올레길 예단포둘레길
영종도의 예단포항 둘레길은 작은 올레길이라 할 만큼 예쁘다. 기왕 영종도에 갔다면 한 번쯤 가볍게 걸어보는 것도 좋다. 선착장에 주차하고 출발하면 입구의 대나무숲과 잠깐 쉴 수 있는 정자를 만난다. 언덕을 오르면 눈앞에 바다가 보이기 시작한다. 물이 빠졌을 때는 갯벌이 진득하다. 길 옆으로 손톱만 한 야생화가 반짝이고, 오래된 나무가 여름이면 울창한 숲을 이룬다. 바다와 산이 공존하는 시원한 풍경으로 가슴이 탁 트인다. 왕복 30분 정도 길이어서 가뿐히 걸어보기를 추천한다.
영종도의 해변과 공항전망대
서해에 왔으면 바다를 따라 한 바퀴 달려보자. 마시안해변과 선녀바위해수욕장, 을왕리해수욕장과 왕산해변이 멀지 않은 간격으로 이어져 있으니 시원하게 돌아보면 된다. 해변가 주변으로 출렁다리와 숲도 있어서 시간이 여유롭다면 차분히 숲길을 걸어보는 맛도 운치 있다.
영종도 나들이길에 이착륙하는 비행기들을 가까이서 바라볼 수 있다면 좋을 듯하다. 공항 서쪽 오성산 자락에 인천공항 전망대가 있다. 전망대의 해발고도는 172m지만 막상 올라보면 높은 느낌은 아니다. 오성산과 공항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고, 활주로에서 이착륙하는 비행기들을 눈앞에서 볼 수 있다. 발아래로 공항철도가 지나가는 풍경은 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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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 좋은 봄날, 전주한옥마을에 사람들이 그득하다. 내로라하는 관광 명소답다. 지난 한 해에 찾아온 관광객이 자그마치 1500만여 명이었다니 말 다했다. 한나절의 눈요기와 입요기만으로도 전주의 맛과 멋을 느낄 수 있는 곳이라 먼 길 마다 않고 달려오는 이들이 많다. 한때 상혼에 치우쳤다는 핀잔도 들었다. 그러나 문화공간과 체험 프로그램이 늘어 균형이 잡혔다. 바야흐로 문화 요소를 결여한 관광지는 찬밥 신세로 추락하기 쉬운 시대다. 사실 전주한옥마을엔 전주의 역사와 문화가 달걀노른자처럼 박혀 있다. 겉은 상업의 성황으로 요란하지만, 속엔 역사 유산의 광량이 깃들어 찬연하다.
경기전(慶基殿)으로 들어선다. 이곳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1335~1408)의 어진(御眞, 임금의 초상화)을 봉안한 공간이다. 이성계의 아들 태종 이방원이 1410년에 지었다. 천하를 호령한 절대 권력자를 그린 어진은 단순한 추모의 수단이 아니었다. 임금 그 자체로 간주됐다. 어진이 있는 곳엔 임금이 머문 것과 맞먹는 수준의 위상이 부여됐다. 왕실의 영속을 기원하는 성역이었다. 따라서 경기전의 규모부터 웅장하다. 우람한 나무들과 대밭이 있는 정원은 운동장처럼 널찍하다. 경기전의 핵심은 공간 중앙부에 조성된 정전(正殿) 구역이다. 홍살문으로 들어가 외삼문(外三門)과 내삼문(內三門)을 통과하자 본전인 정전에 닿는다.
경기전은 한마디로 왕실 사당이다. 태조의 넋을 기리는 제례가 거행되었던 곳으로 신성불가침 영역이다. 정전으로 이어지는 외삼문과 내삼문을 혼령이 드나드는 문, 즉 신문(神門)이라 불렀다. 이 문들엔 기둥으로 분할한 세 개의 통로가 있다. 중앙에 있는 통로는 아무나 다닐 수 있는 길이 아니었다. 혼령이 출입하는 신도(神道)니까. 바깥쪽 두 통로는 인도(人道)로 쓰였다. 예교(禮敎)를 지배적 이데올로기로 삼았던 시대의 종묘에 적용된 법식이 이렇게 엄격했다. 통로 끝엔 정전이 있고, 정전 한가운데 감실을 만들어 태조의 어진을 모셨다. 감실 안엔 부용향을 담은 향 주머니를 넣어 냄새와 습기와 해충을 잡았다. 화재를 막아주는 벽사(辟邪) 용도로 설치한 두 가지 장치도 위트가 있어 눈길을 끈다. 하나는 지붕 아래 붉은 풍판에 조각한 상서로운 동물, 거북 두 마리. 다른 하나는 마당에 가지런히 놓인 6개의 무쇠솥인데, 이건 방화수를 담는 용기로 ‘드므’라 부른다. 지붕을 타고 내려온 화마(火魔)가 솥을 채운 물에 비친 자신의 살벌한 모습에 놀라 스스로 달아나게끔 설치한 구조물이라 하니 재미있다.
뭐니 뭐니 해도 관심 가는 건 태조 어진이다. 세조 때의 문신 신숙주가 쓴 ‘영모록’에 따르면 태조 어진은 무려 26점이나 됐다. 말을 탄 초상도 있었단다. 그러나 현존하는 건 경기전에 남은 어진이 유일하다. 이 어진은 원래부터 경기전에 있었던 원본이 오래되어 낡고 해지자 1872년에 원본 그대로 베껴 그린 작품이다. 당대의 우뚝한 화가 8명이 합작해 그렸다. 이렇게 부활한 태조 어진의 진본은 현재 경기전 후원의 어진박물관에 소장됐고, 정전엔 복제본을 봉안했다. 망가진 원본은 항아리에 담아 정전 뒤편에 묻었다지.
조선의 왕들은 하나같이 하늘에 맞먹을 지존으로 섬김을 받았다. 그러나 조선을 세운 태조를 능가할 만한 공경의 대상은 아예 존재할 수 없었다. 태조의 어진 봉안처만 해도 여러 곳이었다. 서울 문소전, 평양 영숭전, 개성 목청전, 경주 집경전, 전주 경기전 등에 각각 어진을 두었다. 그런데 오직 전주의 어진만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게 아닌가. 전주를 ‘조선의 발원지’로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전주는 전주 이씨 이성계의 본향이기도 하다. 이래저래 조선의 뿌리가 전주에 박혀 있다는 얘기, 이거 빈말이 아니다.
어진에 드러나는 태조의 모습을 볼까. 그의 실제 키가 180cm에 달했다던가. 초상을 척 봐도 기골이 장대하다. 청색 곤룡포를 입고 바위처럼 묵직하게 앉아 정면을 응시한 틀거지에 포스가 넘친다. 혁명 군주다운 도도한 기상을 테마로 삼아 초상을 그린 것 같다. 곤룡포와 용상엔 용틀임하는 금빛 용들을 연쇄적으로 집어넣어 군왕의 위엄을 돋우었다. 능란하게 휘저은 붓놀림의 자취도 볼 만하다. 색조를 달리한 배색으로 얼굴에 음영을 넣어 살짝 입체감을 살렸다. 오른쪽 눈썹 위에 묘사한 사마귀는 이 어진이 리얼리티에 충실한 그림임을 알게 한다.
풍남문에 걸렸던 순교자들의 머리
경기전 건너편엔 ‘호남에서 가장 먼저 지어진 서양식 건물’이라는 전동성당이 있다. 경기전 답사를 마친 사람들의 발길은 대부분 자연스럽게 전동성당으로 이어진다. 저만치서 바라보이는 돔 부위만으로도 아름다워 자력에 끌린 양 성당 정문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렇게 해서 성당과 마주하기에 이르면 이젠 심취하게 마련이다. 전동성당의 완벽한 건축미에 반해서. 성당의 고고한 내면성이 느껴져서. 건축가 김광현에 따르면 전동성당은 르코르뷔지에가 설계한 롱샹 성당이나 독일 뒤렌에 있는 성 안나 성당보다 ‘훨씬 영성적’이다. 잠시 지나가는 나그네에 불과한 나로서는 감히 영성까지 운운하기 어렵지만, 유려한 건축미에 서린 깊고 따뜻하고 순수한 기운에 몸과 마음이 씻겨 내려가는 듯하다.
전동성당의 외벽은 붉은 벽돌과 회색 벽돌을 배합해 쌓았다. 1908년에 착공, 23년에 걸친 공사로 완성했으니 100여 년 세월이 내려앉은 건물이다. 그러나 세련된 건축 메커니즘과 정교한 디자인이 빼어나 고색을 느끼긴 어렵다. 이 성당이 야기하는 미감은 정면 중앙에 높이 솟은 종탑부와 양쪽 계단 탑의 돔에서 절정으로 치닫는다. 성당 내부도 화려하고 장엄하다. 궁륭형 천장의 곡선이 흘러내린 아래편 좌우에 펼쳐진 감실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은 어머니의 체온처럼 따사롭다. 성당을 떠받친 기둥 행렬, 수평 또는 수직으로 펼쳐진 벽돌 벽들, 신비감과 안락감을 풍기는 스테인드글라스 창문 등도 빼어나다.
전동성당의 정체성은 무엇보다 순교의 피와 얼이 배어 있는 터에 세운 성소라는 데 있다. 한국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과 권상연이 신유박해 때 이곳에서 죽음을 맞이했던 것. 전동성당 코앞엔 풍남문이 있다. 전주의 역사성을 웅변하는 성문으로 반월형 옹성(甕城)이다. 원래 전주성엔 동서남북으로 4대문이 있었지만 풍남문만 남았다. 전주성은 고려 말 1389년에 전라관찰사 최유경이 주도해 지었다. 그는 전주성에서 우거진 축성 솜씨로 숭례문(남대문)을 축조하기도 했다. 그런데 전동성당과 풍남문은 불행한 역사를 공유했다. 효수를 당한 윤지충과 권상연의 머리가 풍남문에 걸렸던 게 아닌가. 한편 순교 터에 전동성당을 지을 때엔 풍남문의 허물어진 성벽 돌들이 성당의 주춧돌로 쓰였다. 굳센 신앙은 세상의 잔인함에 패하지 않는 법. 순교자들의 영혼은 성벽 돌에 얹혀 마침내 전동성당을 이루었다. 성당 사방으로 크리스털처럼 투명한 햇살이 쏟아진다. 천지가 유독 환하다.
나종우 전주문화원 원장
일찍부터 ‘너와 나는 하나’라는 인식이 있었다
“전주시는 흔히 말하는 대로 ‘맛과 멋의 고장’이다. 고유한 음식 문화와 예술의 발달로 형성된 멋을 빼놓고 전주를 이야기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맛과 멋’은 어디에서 유래했을까? 과거의 경제적 여유에 그 근원이 있다. 전주는 농산물이 풍성하게 쏟아지는 농업지대였다.”
나종우 전주문화원 원장의 얘기다. 먹거리 풍부한 곡창지대였던 데에서 전주의 문화와 정서가 토착화됐다는 뜻이다. 전주는 한국 최초로 유네스코에 의해 ‘음식 창의도시’로 선정되기도 했다. 전통으로 이어진 문화와 예술의 파워 역시 타 도시를 능가한다. 나 원장의 얘기는 전주 사람들의 ‘포용력’에 관한 역사적 근거를 제시하는 쪽으로 이어진다. 그는 원광대 사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전주 사람들은 외지인을 격의 없이 품는다. 예부터 ‘더불어 함께’라는 의식을 가지고 삶을 영위하는 풍토가 여실했다. 이는 전주만이 아니라 호남권의 보편적 경향이었다. 가령 고창읍성을 축조할 때 전라도 곳곳에서 사람들이 달려와 힘을 보탰다. 장보고가 완도에 청해진을 만들 때도 마찬가지였다. ‘너와 나는 하나’라는 인식. 거기에서 나온 포용력. 이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과거 전통사회에선 양반들의 지배 문화가 횡행했다. 호남권의 서민 문화는 어떠했다고 보나?
“전라도에선 서민 문화가 발달했다. 예컨대 호남엔 농부들이 일하다가 모여 쉬는 모정(茅亭)이 매우 흔했다. 이는 사대부들이 즐긴 누각 문화가 발달했던 영남권과 다른 양상이다. 임진왜란에 뛰어들어 나라를 지켜낸 서민 출신 의병이 유독 많은 곳도 호남이다. 일찍이 발동한 서민 문화가 민중의식의 싹을 틔웠고, 그게 동학혁명 같은 민권운동으로, 나아가 민주의식으로 발화했다. 전주 특유의 ‘포용력’엔 이와 같은 역사적 배경이 깔려 있다.”
세상은 이기적인 경쟁과 과욕이 만연해 삭막하다. 전주라고 예외일까?
“현대의 한국 사회는 정치적인 힘에 좌우되며 돌아간다. 전주엔 좌절감에 가까운 정치적 소외감이라는 게 있다. 넉넉한 전통적 정서와 자긍심이 흔들릴 정도로. 그래서 문화의 힘, 문화원의 역할이 커지고 있다. 우리 문화원은 지역의 뿌리와 자존심을 회복하는 데 쓸모 있는 책자들을 다수 발간했다. 전통문화를 현대적 매력으로 승화할 수 있는 콘텐츠 발굴에도 나서고 있다.”
전주 한옥마을을 찾는 관광객들이 실로 많다. 한옥마을의 역사에서 놓칠 수 없는 대목이 있다면?
“항일의식의 발현으로 한옥마을이 형성된 배경을 알면 좋겠다. 일제강점기 때 전주엔 일본인이 대거 유입돼 집을 짓고 살았다. 전주가 통째 일본인 땅으로 바뀔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자 전주의 뜻있는 부자들이 나서서 한옥 다수를 지으며 대응했다. 이렇듯 전주를 지키자는 민의의 힘으로 형성된 게 한옥마을이다.”
경기전 내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한 4대 사고(史庫)의 하나인 전주사고가 있다. 임진왜란 때 소실을 모면하고 유일하게 실록을 보존한 사고다. 전주의 선비와 머슴들이 필사적으로 실록을 지켜낸 덕분이었다. 나 원장은 이 역시 전주의 빛나는 역사 대목으로 꼽았다.
이견이 없었다. 지금 이 시대를 대표하는 어른은 누구일지 고민했던 편집회의에서 기자들은 나태주 시인을 꼽았다. 만장일치였다. 대중도 마찬가지다. MZ세대를 포함한 모든 세대에게 그는 인기를 넘어 추앙에 가까운 현상의 주인공이 됐다. 하지만 그는 이제 막 낯익어진 마이너한 시인일 뿐이라고 말한다.
“흔히 말하는 팬덤 같은 것이죠. 날씨도 팬덤이 되고 계절도 팬덤이 돼요. 눈과 비가 고르지 않게 한꺼번에 내리는 것처럼 사람들이 몰리는 것뿐이죠. 낯익고 익숙한 것을 찾는 거예요.”
쉽게 동의하기 어려운 얘기다. 최근 출간된 그의 신간 ‘좋아하기 때문에’는 발매 2주 만에 1만 부나 팔렸다. 요즘같이 책을 멀리하는 시대에 꿈같은 이야기다. 사람들이 단지 친숙함에 습관처럼 살 수 있는 숫자가 아니다.
그는 책을 통해 “시인은 세상 사람들의 감정을 돌보는 서비스맨”이라고 말했는데, 아마 그것이 통했던 것 같다. 마치 ‘풀꽃’의 한 구절처럼 나를 자세히 그리고 오래 봐주길 기대했기 때문일까. 책을 내놓을수록 20~30대 사이에서 강한 소구력을 발휘했다. 그 소감의 물결에선 희망과 위로, 치유 같은 단어들이 떠다녔다.
타인 감수성과 꼰대
이런 공감대 속에는 어른다움이 있다. 젊은 세대가 ‘꼰대’에 저항하는 이유를 그는 어른의 이해와 변화가 없어서라고 말했다. 그는 이해의 기준으로 ‘타인인지 감수성’이라는 표현을 썼다. ‘미투 현상’이 사회를 뒤흔들 때 익숙해진 ‘성인지 감수성’에서 온 말이다. 이제 세상은 내 입장만 고집하며 살 수 있는 곳이 아니니까. 타인에 대한 배려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주변에선 ‘타인 감수성’이란 표현을 쓰기도 한다니까, 시인은 더 좋은 표현이라며 그 말을 되뇌었다.
“세상은 나 하나와 나머지의 너로 나뉘어요.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아요. 나를 빼면 모두 ‘너’이기 때문에, 너를 감지하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자꾸 나 때만 얘기하려 들고, 네 때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어요. 네 때는 그렇구나, 그거 참 힘들겠다 하고 관심 갖고 보살필 줄 아는 마음이 필요한 거죠.”
그는 책 속에서도 꼰대를 상징하는 신조어 ‘라떼’를 지적했다. 어른과 젊은이 쌍방이 조금씩 물러서서 상대를 이해하기를 기대했다. 어른 쪽에서 권위를 내세우며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젊은이도 변화할 것이라고 믿었다.
소위 ‘인기 작가’ 반열에 오른 만큼 다양한 약속으로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그지만, 가장 즐거운 일정이 있다. 젊은 세대와 만나는 강연회다. 특히 아이들이 있는 곳이라면 거절하는 법이 없다.
“아이들을 만나서 어려운 점, 괴로운 점, 그늘진 점을 봐요. 겉으로는 멀쩡하고 좋아 보이는 청춘들도 소통을 해보면 문제가 있어요. 결혼이 싫은 여성, 학교가 힘든 선생님, 취업이 힘든 청년도 있어요. 그런 사람들의 그런 이야기를 듣고, 도움이 될 수 있는 말을 해주려 노력하고 있죠. 아이들이나 젊은 사람들을 나무라지 않고, 기다려주고, 도움 주는 말을 했으면 좋겠어요. 예전에는 낳아주고 길러주는 것만으로 부모 노릇이 끝났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져주고, 참아주고, 기다려주는 것이 필요해요. 어른이 됐다는 건 졌다는 것이니까요.”
젊은 세대가 갖는 아픔에도 주목했다. 학자금 대출 등으로 ‘젊은 빚쟁이’가 되고, 구직난에 직장 구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지만, 망가진 경력은 쉽게 되돌릴 수 없어 ‘손닿는 직장’을 선택하기도 어려운 고충에 대해서다. 그는 “가서 막일이라도 해라”가 어른 눈에는 맞는 말 같지만, 쉽게 하지 못하는 요즘 젊은이들의 심정도 들여다보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달라진 세상에 대해 어른들이 더 주목해주길, 그리고 스스로도 변화하길 당부했다. “우리 사회는 이제 유교 사회도 농본주의 사회도 아니에요. 편리한 것, 새것을 좇는 자본주의 사회입니다. 이미 젊은 사람들은 모든 것을 갖추고 있는데 무조건 어른을 따르라 요구할 수 없어요. 또 같은 자리에 앉아 있어도 떠도는 (디지털) 유목 사회가 됐어요. 내가 만든 우유 한잔도 휴대폰을 뒤져보지 않으면 팔지 못하는 세상입니다. 모두가 노마드처럼 살고 있는데 과거의 잣대를 들이밀 수 없죠.”
바뀐 세상에 맞춰 그 스스로도 변화를 택했다. 그는 “나 역시 생각을 고쳐먹었어요. 한창 일했던 시기보다 정년퇴직 후 내 생활은 더 많이 바뀌었죠”라고 말했다.
모두 비워내야 좋은 어른
최근에는 ‘좋은 어른이 되는 법’을 고민하는 어른이 많아졌다. 인문학 강좌의 주제로도 인기가 많다. 세대 간 갈등이 부각되면서 스스로를 고민하는 기성세대가 늘고 있다는 뜻으로 읽힌다. 나태주 시인은 이러한 모습을 ‘굉장히 좋은 상태’라고 이야기했다.
“젊은 시절은 스스로를 채워야 하는 기간이에요. 이기적인 삶이 되죠. 가지고 싶은 것도 많아요. 돈도 명예도 지위도 얻으려면 채우는 데 집중해야 해요. 하지만 나이가 들어서는 달라요. 이타적인 삶의 태도를 취해야 해요. 공부도 마찬가지예요. 젊을 때는 남을 이기기 위한 공부를 하지만, 나이 들어서는 상 타는 것도 돈 버는 것도 아닌 내 내면의 기쁨을 위해서 공부하는 겁니다. 철이 드는 과정이죠. 이것을 위해서는 젊을 때 스스로를 꽉 채워놓을 필요도 있어요.”
그는 이 과정에서 나타나는 심리적 안정을 통정성에 빗대 이야기했다. 살아온 삶 전체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할 수 있는 태도를 말한다.
“그러면 스스로의 잘못도 인정할 수 있게 돼요. ‘그 대목은 참 미안하게 됐다. 어쩔 수 없었고, 지금 같으면 안 할 텐데 그때는 내가 그랬다’고요. 어른이라면 자신을 속이거나 아니라고 부정하지 않고, 자기 잘못까지 인정할 수 있는 태도가 필요해요. 우리 사회나 국가 운영에서도 마찬가지고요.”
젊을 때 맘껏 채우고 나면 이후에는 비우는 과정이 찾아온다. “나이 먹은 사람들은 생각을 해야 돼요. 어떻게 비우고 갈 것인지. 때려 부숴서 비우고 갈까, 곱게 정리해서 도움이 되게 할까 말이죠. 지금 운영하는 풀꽃문학관도 나를 비우는 작업이에요. 그간 모아놓은 것들을 쓰레기가 아닌 보물이 되도록 정리하고 있어요. 이것들을 욕심내 집에 데려가는 순간 쓰레기가 될 거예요.”
그렇게 잘 비우고 간 인물 중 하나로 나태주 시인은 이어령 선생을 꼽았다. 청년 시절 누구보다 채우기에 열중했고, 말년에는 자기를 완전히 비워놓은 ‘선비’ 같았다고 평가했다.
“옛날 교사 시절, 태풍이 휩쓸고 간 운동장에 떨어진 나뭇잎들을 모아다가 태운 적이 있어요. 아직 푸르름이 남아 있는. 그 잎들을 태우면 아주 역겨워요. 아직 살아갈 수 있는 여력이 남아 그런 것 같아요. 그에 반해 가을이 되어 탈색되고 말라 떨어진 낙엽들을 태우면 냄새가 고숩고, 가볍게 훨훨 타요. 모두 비워냈기 때문이고, 사람도 비슷할 거라고 생각해요.”
다가오는 선거로 인해 정치적 성향이나 세대, 지역 사이의 갈등이 점점 커지는 요즘이다. 서로가 상대의 생채기를 기대하며 날선 감정을 말과 글에 담아 던지기를 반복하고 있다. 그는 성숙한 어른이라면 그럴 이유가 없다고 단언한다.
“산 정상에 올라가면 사방팔방이 열려 동서남북이 다 보여요. 산꼭대기에 올라간 사람이 왜 동쪽 사람, 서쪽 사람, 남쪽 사람, 북쪽 사람에게 욕지거리를 내뱉나요. 다 동지고 친구죠. 인생의 산꼭대기에 올라가면 죽일 사람도 살릴 사람도 없어요. 성인들처럼 훌륭한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해요.”
BTS와 이생망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도 고민이다. 앞길이 창창한 청년들은 가야 할 길이 멀어 고민이지만, 중년이 넘으면 얼마 남지 않아 마음이 급해진다. 나태주 시인은 청년과 중년 혹은 노년은 접근이 달라야 한다고 조언한다.
“청년들은 미래를 위해 10년짜리 계획이 필요하지만, 중년은 5년 계획을 세우고, 그 다음 5년을 준비하는 방식으로 살아갔으면 좋겠어요. 청년은 차근차근 꿈을 이뤄나갈 수 있도록 충분한 기간을 갖고 준비해야 하고, 중년은 꼭 그러지 않아도 되니까요. 무엇을 할지 결정하는 방식도 달라져요. 젊은 사람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했으면 좋겠어요. 내가 잘하는 일만 하려다가는 더 잘하는 사람을 만나면 상처를 입어요. 좋아하는 일은 노력하면 잘할 수 있지만 잘하는 일이 좋아지긴 어렵죠. 길게 보면 좋아하는 일을 선택해야 해요. 그래야 중도에 포기하거나 지치지 않고 성공할 수 있어요. 하지만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반대예요. 잘하는 일을 선택해야 남은 인생 동안 성공을 맛볼 수 있을 테니까요.”
늘 말과 글에 대한 탐구를 멈추지 않는 그는 요즘 말에도 관심이 많다. 신조어와 노래 가사 등 종류를 가리지 않는다. BTS의 노랫말을 모티브로 한 노래산문집 ‘작은 것들을 위한 시’를 출간하기도 했다. 이야기 나누는 동안 요즘 말이 툭툭 튀어나왔다. 젊은 엄마들이 쓰는 ‘육퇴’(육아퇴근)가 그랬고, ‘독박육아’나 ‘라떼’(꼰대를 상징하는 말)가 그랬다. 그는 ‘이생망’을 지목했다. ‘이번 생은 망했으니 돌이킬 수 없다’는 뜻으로, 젊은이들이 자조적으로 하는 줄임말이다.
“요즘 말 중에 가장 마음 아픈 말이에요. 절망적이죠. 왜 망했다고 생각해요? 이번 인생이 망했으면 다음 인생도 망한 인생이 돼요. 좀 부족해도 모든 사람의 인생은 아름답고, 포기할 수 없어요. 모두 성과에 급급하니 나오는 말이에요. 사회적으로 알려진 사람들은 써서는 안 되는 말입니다. 청년들에게 많은 영향을 줘요.”
그는 젊은 세대에 대한 당부를 이어갔다. 많은 장소에서 만난 힘들고 지친 청년들이 잊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청년들에게는 너무 큰 꿈에 매이지 말라고 조언하고 싶어요. 요즘 젊은이들은 너무 커진 꿈을 원해요. 마치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악마와 계약을 맺듯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바치려고 하죠. 하지만 집채만 한 큰 것을 바라다가 안 되면 부숴버리고 싶고, 포기하고 싶고, 주저앉고 싶어져요. 그래서 이룰 수 있는 꿈을 꾸고, 그것을 성취하는 아름다움을 느껴보길 권하고 싶어요.”
‘1924년 파리 FIFA 총회’를 기점으로 월드컵 창설 100주년인 올해를 기념해 스포츠 평론가이자 해설가인 기영노 평론가가 신간 ‘월드컵 축구 100년 - 100번의 영광과 좌절의 순간들’을 출간했다. 이 책은 월드컵이 지닌 100년의 역사와 그 안에 담긴 빛나는 순간들, 전설적인 선수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고, 오는 2026년 북중미 월드컵에 대한 예측까지 포함하고 있다.
이 책은 1930년 우루과이에서 시작된 제1회 월드컵부터, 2024년 현재까지 월드컵이 지나온 길을 조명한다. 월드컵 역사 속 빛난 선수들, 하늘의 별이 된 전설들부터 현재까지 활약하는 스타 플레이어들의 이야기를 풀어냈다. 펠레, 디에고 마라도나, 프란츠 베켄바워, 에우제비오, 요한 크루이프부터 리오넬 메시,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킬리안 음바페, 손흥민에 이르기까지, 축구 팬이라면 누구나 가슴 뛰며 읽을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책은 지구촌을 하나로 만드는 월드컵의 힘과 매력을 집대성한 저서다. 지난 100년간 월드컵이 어떻게 전 세계의 관심을 모으고, 수많은 사람들을 웃고 울게 만들었는지를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기영노 평론가는 ‘베이스볼 매거진’, ‘일요신문’, ‘민주일보’ 기자 출신으로, 1982년부터 스포츠 평론가로 활동해왔다.
한낮인데도 바다 위에 띄워진 고깃배는 정지화면처럼 가만히 멈춰 있다. 바위섬 저편으로 낚싯대를 드리우고 시선을 고정한 채 바다를 향한 낚시꾼의 뒷모습이 한가롭다. 물때에 맞춰 바닷길이 열리면 그 사이로 난 길을 따라 걸어서 당도하는 작은 섬의 기적을 날마다 마주한다. 바다를 앞에 두고 있는 그저 적요하기만 한 카페는 감성을 품었다.
섬이라는 음절이 전하는 서정성은 쓸쓸함과 평온함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이런 섬 안으로 찾아드는 자발적 고립이 주는 진정한 휴식, 더 볼 것 없다. 섬의 군락 고군산군도로 떠난다.
신시도, 무녀도, 선유도, 장자도, 대장도. 다섯 개의 섬이 내륙과 다리로 연결된 고군산군도는 새만금방조제를 관통하며 섬으로 향한다. 시원하게 뚫린 30km가 넘는 방조제 도로가 바다를 가로질렀다. 길목마다 전망대와 쉼터가 마련돼 있고, 그중에 해넘이 휴게소는 신비로운 일출과 일몰을 보여주는 곳이다. 고군산군도의 관문 역할을 하는 고즈넉한 섬마을 야미도의 평온함도 스쳐 지나간다. 고군산군도에 닿기 전부터 가슴 확 뚫리는 풍광이 반기는 새만금방조제는 최고의 드라이브 코스이기도 하다.
다도해 절경을 한눈에, 신시도
전북 군산시 남서쪽에 위치한 고군산군도는 60여 개의 섬으로 구성되어 있다. ‘옛 군산의 섬 무리’라는 뜻의 고군산군도는 그 옛날 중국 사신 서긍이 고려 방문기를 남긴 견문록 ‘고려도경’에서 무리 지어 있는 섬을 보며 ‘바다 위의 성’이라고 표현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특히 천혜의 경관과 생태자원으로 고군산 8경으로 불리며 국가지질공원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그중에 가장 먼저 신시도에 닿는다. 새만금방조제와 곧바로 연결된 고군산군도의 관문이며, 군도 중에서 큰 규모에 속하는 섬이다. 섬을 둘러싼 199봉에서 월령봉과 대각산으로 이어지는 신시도 산행은 산과 바다를 동시에 만끽할 수 있는 코스라서 찾는 사람이 제법 많다. 계절이 무르익을 때면 고운 단풍이 달빛 그림자와 함께 바다에 비친다는 월영단풍은 고군산 8경에 속한다.
섬 속의 국립신시도자연휴양림은 우리나라 최초로 바닷가에 지어진 친환경 휴양림으로 매월 예약 경쟁이 치열하다. 숙박과 상관없이 입장료만 내면 휴양림 주변 탐방이 가능해서 평소에도 산책이나 트레킹을 위한 방문객들이 찾아든다. 산책로를 걸으며 만나는 달맞이 화원이나 전망대를 지나면서 마주하는 숲과 탁 트인 바다는 복잡한 도시를 떠나온 이들에게 해방감을 안겨주기에 충분하다. 상쾌한 공기 속에서 내다보는 저 멀리 고군산대교의 주탑과 섬들이 눈앞에 시원하게 펼쳐진다.
원시적 풍광과 SNS 감성 품은 무녀도
신시도에서 곧바로 무녀도로 건너오면 따스한 섬마을 풍광이 맞아준다. 섬에 들면서 무녀도라는 지명이 혹시 김동리 소설 ‘무녀도’와 관련 있을까 생각했지만 섬 이름의 유래는 따로 있었다. 섬의 형태가 마치 장구와 술잔을 놓고 춤을 추는 무당의 모습처럼 보여 무녀도라 불렸다고 한다.
무녀도에서는 단연 쥐똥섬이 볼거리다. 섬마을 앞바다 저편으로 몇 걸음도 안 된다. 물때에 따라 바닷길이 열리면 질펀한 갯벌 사이로 섬까지 걸어가는 풍경은 그림처럼 아련하다. 쥐똥섬 해안길을 따라 조금만 더 걸으면 나타나는 똥섬 역시 독특하다. 약 9000만 년 전의 화산 활동으로 형성된 무녀도의 똥섬은 시간이 만들어낸 지질구조를 보여준다. 똥섬을 옆에 두고 자리 잡은 펜션 아래로 연결된 데크를 따라 걸어가면 가까이서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다.
근래 들어 사람들이 무녀도를 찾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섬 앞에 시선을 끄는 노란 버스 때문이다. 마을 주민들이 스쿨버스를 개조한 것이다. 무녀 2구 마을버스라는 버스 카페는 서해 오션뷰가 끝내준다. 청량한 바다와 푸른 하늘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이 만들어내는 섬 풍광은 비길 데 없이 아름답다. 이뿐 아니라 젊은 층에게 무녀도가 핫플로 소문난 데는 이국적인 버스 옆에 자리한 방탄소년단의 RM 벽화도 한몫한다. 오래된 바닷가 마을의 원시적 풍광과 함께하는 무녀도는 지금 SNS 감성이 풀풀 나는 매력 또한 품고 있다.
신선이 노닐던 섬에서 한나절, 선유도
무녀도에서 다리 하나만 건너면 선유도다. 예전부터 고군산군도의 섬 중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섬이다. 섬 북단의 봉우리 형태가 마치 두 신선이 마주 앉아 바둑을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해서 지어진 이름이 선유도다. 이름조차 신선이 놀던 섬이라는 선유도(仙遊島)는 군도의 중심 섬이다.
겨울 끝자락인데도 해변엔 제법 많은 사람들이 오간다. 선유 8경 중 하나로 고운 모래가 10리나 깔려 있어서 명사십리해수욕장으로 불리는 해변 너머로 망주봉이 듬직하다. 그 옛날 억울하게 유배된 충신이 북쪽을 바라보며 임금을 그리워했다는 유래가 깃든,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제113호인 망주봉이 물이 빠져나간 갯벌을 내려다보고 있다. 여름철엔 망주봉에서 떨어지는 빗줄기가 폭포수가 되어 시원한 볼거리를 선사한다. 석양이 지는 바다가 붉게 물들어 장관을 이루는 선유낙조(仙遊落照)는 선유 8경의 으뜸이다. 요즘은 액티비티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해 바다 위에서 즐기는 짚라인이나 전기 스쿠터와 자전거, 섬 투어를 위한 유람선, 도보 산책이나 갯벌 체험 등의 재미거리도 다양하게 준비되어 있다. 주변에 옥돌해수욕장의 선유봉 등산길과 명품 데크길도 찾아볼 만하다.
아니 온 듯 다녀가시오, 장자도와 대장봉
이제 선유도 맞은편의 장자도를 가기 위해 장자대교 위를 달려간다. 장자도는 대장도를 가기 위한 길목인데 장자도의 호떡마을이 유명해서 오가는 여행자들의 손에 호떡 하나씩 들린 걸 쉽게 본다. 장자도에 딸린 대장도는 선유도나 무녀도에 비해 작은 섬이지만 오밀조밀한 섬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섬 깊숙이에서 맛보는 자발적 고립의 행복을 누려볼 만한 포인트다.
고군산군도에 들어섰다면 대장도의 대장봉을 빼놓을 수 없다. 오르는 코스는 두 군데 길이 있는데, 우측 장자할머니 바위 쪽 계단길이 수월한 편이다. 비밀의 정원처럼 좁은 숲속을 걷는 듯하다가 정자 쉼터에 앉아 잠깐씩 숨을 고르고 올라야 한다. 해발 140m 정도지만 절대 만만치 않다. 정자 쉼터 기둥에 쓰인 ‘아니 온 듯 다녀가시오’ 글귀를 보면서 잠시 쉬었다가 구불길과 무섭게 경사진 계단을 다시 올라야 한다. 숲길 옆으로 바다를 향한 할머니바위는 아기를 업은 여자가 밥상을 든 모습이라고 한다. 한양으로 과거 보러 간 남편이 급제하여 돌아오자 아내는 정성을 다해 상을 차려 내왔건만 남편이 데려온 소실을 보게 되었고, 서운한 마음에 그대로 굳어서 바위가 되었다는 전설이 서려 있다. 숨차게 가파른 길을 오르고 섬에 담긴 이야기를 마주한다. 아시아의 숨은 명소로 CNN에서도 소개했던 고군산군도의 대장봉이다. 이윽고 마주하는 잔잔한 서해의 아스라한 섬 무리들이 자아내는 기운을 선사받는다. 땀을 식히면서 일몰 속에 잠긴 신비로운 섬 무리를 바라볼 수 있다면 더없는 행운이다. 크고 작은 섬들이 어우러진 다도해의 평화로운 풍광에 차분하게 압도당하는 순간이다.
애기봉 평화생태공원 경기 김포시 월곶면 평화공원로 289
새 단장을 마쳤다. 북녘땅이 불과 1.4km 앞. 하늘이 맑은 날엔 개성 송악산까지도 조망할 수 있다. 신분증 지참 필수!
태백산 하늘전망대 강원 태백시 소도동 327-3
국립공원 최초 무장애 전망대. 잎갈나무 군락지와 태백 시내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오는 30일부터 전면 개방 예정!
광한루원 광한루 누각 전북 남원시 요천로 1447
평상시 문화재 보호를 위해 출입을 제한하고 있는 광한루 누각 내부를 한정 개방한다. 오는 29일부터 31일까지, 단 3일!
칠불사 아자방 경남 하동군 화개면 범왕길 528
신라시대부터 이어진 전통 온돌 문화를 만나볼 수 있다. 주지스님 설명과 함께 체험도 가능하다. 오는 5월 15일까지!
고성 독수리 체험장 경남 고성군 고성읍 기월리 251-1
몽골에서 월동 준비를 위해 날아온 독수리를 50m 내에서 볼 수 있는 이색 체험장. 3월 21일까지, 매주 화·목·토·일 운영!
는 노인 인식을 개선하고 세대 갈등을 해소할 여러분의 사연을 기다립니다.
‘우리 집의 제일 높은 곳 조그만 다락방. 넓고 큰 방도 있지만 난 그곳이 좋아요. 높푸른 하늘 품에 안겨져 있는 뾰족지붕 나의 다락방 나의 보금자리.’ 1970년대 활동했던 혼성 포크 듀오 ‘논두렁밭두렁’의 대표곡 ‘다락방’의 가사다. 이 노래를 알고 있다면 그들이 부부였다는 걸 기억할 테다. 두 사람은 부부의 연으로 가꾼 보금자리에서 더 많은 인연을 보듬어 가족으로 맞았다. 남편 김은광은 먼저 세상을 떠났지만, 아내 윤설희는 여전히 그 보금자리에 남아 사랑의 온기를 더하고 있다.
‘다락방’을 비롯해 ‘외할머니댁’, ‘영상’ 등의 곡으로 사랑받았던 논두렁밭두렁. 종종 방송이나 무대에 나오긴 했지만, 이전처럼 활발한 소식을 듣긴 어려웠던 그들이다. 가수로서의 행보는 그러하나, 사실 부부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날들을 보내온 터였다. 쉼 없는 지난날을 한눈에 보여주는 건 아내 윤설희 작은도서관 더브릿지 관장의 SNS 프로필이다. 논두렁밭두렁 멤버로 시작해 다리The Bridge청소년사업가지원센터 센터장, 사단법인 땡큐 이사장, 별빛내리는마을과 봄채 아동 그룹홈 설립자, 사랑하는교회 목사 그리고 작은도서관 더브릿지 관장까지. 적혀 있지는 않지만 음악학원과 24시 어린이집도 운영했다. 그런데 음악학원을 제외하면 가수와 연계된 활동은 찾아보기 어렵다. 가수였던 그들이 이렇듯 의외의(?) 근황을 알리게 된 데에는 아내 윤 관장의 뜻이 컸단다.
“첫딸을 낳고 가수 활동은 그만뒀어요. 어려서부터 꿈이 현모양처나 교사였는데, 그 영향인지 아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쳐보면 어떨까 싶더군요. 작은 기타 학원을 운영하다가 종합적으로 음악 교육을 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렇게 연 방송음악학원이 꽤 인기를 끌었는데, 어느 날 보니 엄마들 사이에서 ‘값비싼 학원’으로 알려져 있더라고요. 체계적인 프로그램을 짜느라 스무 명 넘는 강사를 초빙한 데다 건물 임대료까지 냈으니, 교육 원가 대비 수업료가 높지는 않았거든요. 어쨌거나 내가 원했던 결과는 아니었어요. 차라리 어린이집을 운영하면 국가의 보조를 받아 더 부담 없는 환경에서 아이들을 교육하지 않을까 싶었죠. 그렇게 어린이집을 열게 됐습니다.”
갈 곳 없는 아이들, 보금자리를 내어주다
어린이집을 열고 얼마 지나지 않아 IMF가 터졌다. 가장들은 회사 밖으로 내몰렸고, 집집마다 재정난에 시달렸다. 어린이집을 운영하던 당시 그런 현실의 아픔을 고스란히 마주했던 윤 관장이다.
“IMF로 해체되는 가정이 늘어가는 걸 실감했어요. 낮뿐 아니라 밤에도 돌봄이 필요한 아이들이 생겨났죠. 그러면서 24시 어린이집을 떠올렸는데, 막상 우리나라에 몇 곳 없는 것 같더라고요. 저도 지방 공연을 다니면서 아이들 맡기는 문제로 고민했던 경험이 있던지라 고충을 해결해보고 싶었어요. 그렇게 24시 어린이집을 개원했습니다. 당시 벼룩시장에 ‘무료탁아상담’이라는 1단짜리 광고도 냈죠. 말 그대로 무료로 탁아 상담을 했는데, 그러면서 정말 많은 가정에 어려움이 있다는 걸 한 번 더 알게 됐습니다.”
그나마 24시 어린이집에라도 오는 아이들은 다행이었다. 그곳마저 다닐 형편이 안 되는 아이들도 있었으니 말이다. 남편의 폭력에 시달려 도망 나온 엄마와 아기, 생활고로 조부모에게 떠맡겨진 손주들, 호적도 없이 버려진 신생아까지. 저마다 딱한 사정을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그렇게 논두렁밭두렁 부부는 어려움에 처한 아이들에게 자신의 보금자리를 내어주기로 결정했다.
“2000년 6월이었어요. 미혼모의 아이를 가족으로 받아들이고 함께 생활하기 시작했습니다. 전국 곳곳에서 우리와 비슷한 일을 하는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났어요. 그러면서 그게 바로 ‘그룹홈’이라는 걸 알게 됐죠. 2003년에 ‘별빛내리는마을’이라는 이름으로 아동 그룹홈을 설립했고, 10년 후인 2013년엔 여자 아동 그룹홈 ‘봄채’를 설립했습니다. 만든 두 개의 그룹홈을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어요.”
2000년 초만 해도 그룹홈이란 개념은 생소했다. 국내에 많지 않은 그룹홈을 운영하는 이들은 대체로 종교인이었는데, 법적 근거가 부족해 이렇다 할 지원을 받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다 2010년대에 이르러 아동공동생활가정(그룹홈) 발전 및 지원에 관한 조례 통과, 아동복지법 개정 등을 통해 관련 지원책들이 속속 생겨났다. 아직도 사회적으로 관심과 지원이 더 필요하지만, 과거 불모지 같았던 때를 생각하면 그나마 형편이 나아진 셈이다. 제 가정도 돌보기 어려웠던 시절, 숱한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남편 사업이 부도가 나서 정말 먹고살기 힘든 적도 있었어요. 그런데도 크게 어렵다고 느끼진 못했던 것 같아요. 오히려 그런 상황에서도 누군가를 위해 작은 일이라도 할 수 있어 행복했죠. 나만 헌신한다고 여겼으면 여태껏 오래 해올 수 없었을 거예요. 결국은 나에게도 보탬이 되고 즐거운 일이었던 거죠. 요 며칠도 하루 세 시간 자고 밤을 꼴딱 새고 하면서 일을 했는데, 피곤하긴 했지만 기쁨이 더 컸어요. 막상 제가 아이들에게 도움을 준 건 얼마 되지 않아요. 오히려 제가 아이들을 통해 성장했고, 많은 걸 이뤘죠. 결국 그 원동력은 이타심보다는 자기실현에 가까웠다고 봐요.”
남편의 유작 ‘사랑해봤나’를 완성하며
여러 아이를 돌봐야 하는 고단한 상황에서도 가장 큰 힘이 돼준 건 남편인 가수 故 김은광이었다. 오래오래 그들의 보금자리에 함께 머물렀다면 좋았을 텐데, 아쉽게도 그는 2010년 대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진단을 받고 1년 만에 이별을 겪었지만, 언제나 그렇듯 슬퍼할 새도 없이 아이들 챙기는 데 여념이 없었던 윤 관장이다. 그러다 한 번씩 불현듯 찾아오는 남편의 빈자리는 너무도 컸다.
“부랴부랴 애들 밥 먹이고 학교 보내고 나면 그제야 제정신이 들더라고요. 그러면 한바탕 울고 또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아이들 챙기고,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냈어요. 한번은 운전하고 가는데 길을 잘 모르겠는 거예요. 이럴 때 남편이 있었으면 당장 전화해서 물어봤을 텐데, 그럼 그이가 이렇게 저렇게 가라고 설명해줬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다가 저도 모르게 눈물을 펑펑 쏟았어요. 부부는 반쪽이라고 하는데 그 이상이었구나, 적어도 3분의 2쯤은 되겠구나, 다 내가 해온 일이라 생각했는데 우리 남편 몫이 참 컸구나, 부부가 함께한다는 건 되게 좋은 거였구나 깨달은 거죠. 요즘도 그렇게 불쑥불쑥 남편의 빈자리가 느껴질 때가 있어요.”
최근 윤 관장은 남편의 유작을 하나 발견했다. 연필로 적은 악보였다. 논두렁밭두렁의 노래는 남편이 작곡, 아내가 작사하곤 했는데, 남편이 생전 작곡해둔 노트를 찾은 것이다. 함께 노래하던 시절을 돌이켜보면, 좋은 노래는 듣자마자 좋은 가사가 생각나곤 했다. 남편의 악보를 피아노로 치다 보니 순간 가사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가사가 지어졌고, ‘사랑해봤나’라는 제목의 곡이 완성됐다.
“‘사랑해봤나’ 가사는 그런 내용이에요. 청춘이 빛났던 건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랑의 기억이 있기에 어쩌면 우리는 더 사랑을 원하는 것일 수 있다. 그런 생각을 하며 곡을 지었고, 곧 음원으로도 공개할 예정입니다. 다가오는 4월에는 완성된 곡으로 남편을 위한 추모 공연을 열려고 해요. 근데 한번 불러보니까 음역대가 제가 소화하긴 어렵겠더라고요. 그래서 동생(가수 윤설하)에게 부르라고 했더니 사랑 얘기는 자신과 맞지 않는다며 고사하더군요. 그래서 결국 제가 부르게 됐어요. 저도 목소리가 예전 같지 않지만, 남편을 생각하면서 최대한 잘 불러보려 합니다.”
아이들아, 언제든 편히 찾아오렴
남편의 추모 공연은 그룹홈이 있는 건물 지하의 소리 소극장에서 열린다. 같은 건물에 더브릿지 작은도서관이 있는데, 이 공간을 마련하게 된 건 그룹홈 아이들을 위해서였다.
“우리 애들이 보면 친구가 없더라고요. 학교 가면 엄마 아빠에 대해 얘기할 경우가 많은데 그런 걸 못 하니까. 그러다 보니 자꾸 위축되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어려워하는 게 안타까웠어요. 마침 여기저기서 후원받은 책도 많겠다, 이걸 잘 모아서 지역사회와 공유하면 어떨까 싶더라고요. 작은도서관이라는 공간에서 아이들과 주민분들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지고 교류하길 바랐죠.”
소극장과 작은도서관, 교회와 그룹홈까지 모두 한 건물에 있다 보니 간혹 윤 관장을 건물주라 여기는 이들도 있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지원금과 후원금이 있긴 하지만, 공간을 유지하고 식솔들을 챙기려면 턱없이 부족하다. 그럼에도 윤 관장은 또 다른 형태의 그룹홈을 꿈꾸고 있었다. 바로 노인들을 위한 그룹홈이다.
“제가 부모 역할을 하지만 많이 부족했죠. 아이들 하나하나 눈 맞추고 마음을 어루만져줘야 하는데, 지원금이나 행정적인 업무들 처리하느라 서류 만지는 시간이 많았던 것 같아요. 아이들도 누군가에게 충분한 사랑을 받아야 하는데 사람이 부족하다 보니 쉽지 않더라고요. 그러다 든 생각이 외롭게 홀로 계시는 어르신들을 위한 그룹홈을 만들고, 아이들과 교류하도록 하면 어떨까 한 거죠. 아이들 수만큼 어르신들이 있다면 저마다 충분히 사랑을 독차지할 테니까요. 가능하다면 언젠가 마당 있는 넓은 집을 마련해 그런 꿈을 이뤄보고 싶습니다.”
‘남들이 다 하는 일보다는 나를 필요로 하는 일을 하자’라는 포부로 지난 20여 년을 달려왔다. 더불어 사는 세상이 비로소 아름다운 세상이라 믿으며, 그런 아름다운 세상에서 더불어 살기를 희망하며 남은 인생도 지금처럼 살아가리라 다짐해본다. 올해로 칠순, 윤 관장 개인만을 생각한 노후의 꿈은 없을지 궁금했다.
“글쎄요. 지금처럼 계속 일하는 게 곧 노후의 꿈이자 준비 아닐까요. 요즘도 그룹홈 아이들을 대형 승합차에 태우고 여행도 다니고 하거든요. 그런 걸 보면 친구들이 이제 힘들 텐데 일을 그만하라 하죠. 근데 저는 오히려 일을 취미로 한다는 기분이에요. 지금이야 여러 역할을 하고 있지만, 정말 늙어서 뭘 못 하겠다 싶은 때가 오더라도 작은도서관 관장은 하려 해요. 꼬부랑 할머니가 되어서도 도서관 귀퉁이 어딘가에 앉아 책 읽고 있으려고요.(웃음) 한편으론 그룹홈을 떠난 아이들이 종종 찾아오길 바라죠. 이번 설날에도 혹시나 해서 세뱃돈 챙겨 기다렸는데 많이 오지는 않더라고요. 물론 찾아오지 못하는 아이들의 형편도 이해합니다. 다만 살면서 힘들고 외로운 순간, 늘 나를 기다리는 누군가가 있다는 걸 아이들이 기억해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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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영주시의 최고 특산물은 풍기인삼이다. 매년 풍기인삼축제가 열린다. 그런데 이 축제에선 조선의 문신이자 도학자인 주세붕을 기리는 퍼레이드가 펼쳐진다. 어떤 연유로? ‘풍기인삼의 아버지’랄까, 풍기인삼 재배의 초석을 다진 인물이 바로 주세붕이다. 당시 백성들은 나라에 산삼을 캐다 바치느라 고생이 자심했는데, 이를 딱하게 여긴 주세붕이 소백산 산삼 종자를 통한 인공 재배에 성공한 뒤 기술을 보급했다. 주세붕이 풍기군수로 재직하던 때의 일이다. 군수 노릇도 이쯤이면 최고봉이다.
주세붕의 명민한 행장은 또 있다. 영주시 순흥면에 조선 서원의 시초인 백운동서원을 세운 것. 백운동서원은 얼마 뒤 사액서원(임금이 이름을 지어준 서원)인 소수서원으로 변신, 마침내 영주라는 작은 고을을 사림 집합소로 띄워 올렸다. 조선 말 고종조에 이르기까지 우후죽순처럼 많은 선비를 배출했다. 그 수가 자그마치 4000여 명. 그래 오늘날까지 영주는 ‘선비의 고장’이라 불린다.
백운동서원의 후신인 소수서원은 퇴계 이황이 주도해 설립했다. 주세붕에 이어 풍기군수로 부임한 퇴계가 1549년 조정에 편액과 더불어 서적, 토지, 노비를 하사하길 요청했는데, 명종이 이를 흔쾌히 받아들여 이듬해 친필 편액을 내려주었다. 이렇게 해서 사액서원의 효시인 소수서원이 열렸다. 입학 정원은 30명. 소수서원의 기틀을 잡아나간 건 퇴계였다. 천하의 퇴계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으니 알조다. 그는 도학(道學)의 부흥을 평생 사업으로 삼으며 수많은 저작을 쏟아낸 인물이다. ‘학문을 할수록 길이 멀었다’고 고백할 정도로 자기 검증에 엄격했다. 그러하니 서원 운영에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겠는가? 학칙은 엄준해 미풍양속을 해치거나, 수신(修身)엔 관심 없고 앉으나 서나 과시(科試)에 붙을 궁리만 하는 유생은 바로 쫓겨났다.
담장 사이로 난 출입문을 들어서자 소수서원의 내경이 좍 펼쳐진다. 평편한 터 곳곳에 다수의 건축물이 있어 조선 최고의 서원다운 위용을 과시한다. 크게 보면 학문을 익히는 강학 공간과 제사를 지내는 제향 공간으로 나뉜다. 자연경관에 기대어 머리를 식히며 쉴 수 있는 유식(遊息) 공간은 담장 밖 외부에 조성했다. 강학 공간의 중심 건물은 유생들이 강의를 듣던 강학당으로 가장 큰 규모를 지녔다. 여기엔 ‘백운동’이라 쓴 현판이 걸려 있는데, 소수서원의 시발이 백운동서원에 있다는 걸 잊지 않겠다는 뜻이겠지. 강학당 뒤편엔 교수들의 숙소인 일신재와 직방재, 유생들이 기거한 지락재와 학구재를 배치했다. 유생들의 기숙사는 교수들의 숙소보다 작고 낮게 지어 흥미롭다. 스승에 대한 예를 다하는 게 도리라는 암시를 담은 구조일 터다.
책을 보관한 장서각 앞뜰엔 정료대가 있다. 밤이면 관솔에 불을 붙여 어둠을 밝힌 일종의 가로등이다. 사람들은 일쑤 서원을 따분한 곳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가만히 뜯어보라. 겹겹의 의미와 개성을 찾아내는 재미가 있다. 소수서원의 모습은 여느 서원과 달리 자유로운 건물 구성을 했다는 점에서도 독특하다. 조선 서원들은 통상 중국식 배치법인 전학후묘(前學後廟, 앞쪽에 학당, 뒤쪽에 사당을 둠) 양식을 도입했다.
반면 소수서원은 동학서묘(東學西廟, 우측에 학당, 좌측에 사당을 둠) 형식을 구사했다. 아울러 건물들이 윷판에 윷가락 흩뿌려놓은 듯 헐겁게 널려 있다. 따라서 위엄을 갖춘 학문의 전당이라기보다 사적인 대저택 같은 느낌을 자아낸다. 소수서원의 이 활달한 구조는 사액서원의 효시로 등장, 참고할 만한 어떤 범례나 전형을 전제할 여지가 없었던 데에서 비롯되었다.
경내를 벗어나 밖으로 나오면 이제 냇물과 야산이 어우러진 유식 공간이다. 물 좋고 산 좋으면 정자가 필수 품목. 서원 정문 코앞에 있는 경렴정은 물소리로 귀를 씻기 좋은 정자다. 다소곳이 아담하고 소박해서 아름답다. 현판은 두 개다. 해서체 현판은 퇴계가 썼고, 초서체 현판은 퇴계의 제자이자 초서의 달인인 황기로의 글씨다. 퇴계가 지켜보는 앞에서 현판 글씨를 쓰던 황기로의 붓이 파르르 떨렸다던가. 흠모하는 스승의 눈길만으로도 레이저 맞은 듯 주눅 드는 게 제자다. 냇물 건너편 둔덕엔 퇴계가 시를 짓고 풍류를 즐겼다는 정자 취한대가 있다. 서원 들머리에 조성된 노송 숲도 빼어난 경관 요소다. 수백 년 수령의 노거수들이 끽해야 100년 안짝을 머물다 세상을 지나가는 인간들을 굽어보고 있다. 이 노송들을 일러 학자수(學者樹)라 한다. 사시사철 푸른 솔의 기개 역시 공부감이라는 데서 붙은 별명이다. 소나무들이 서원 쪽으로 갸웃이 고개를 들이밀고 청강하는 품새를 연상해 지은 이름이라는 얘기도 있다. 학문의 바다 소수서원에선 노송도 학동으로 불려간다.
전통건축의 고전, 무량수전
이제 천년고찰 부석사를 찾아간다. 소수서원과 쌍벽을 이루는 영주시의 고품격 문화유산으로, 부석면 봉황산 자락에 있다. 산기슭을 타고 한참 이어지는 소로 끝자락에 닿자 부석사가 문득 모습을 드러낸다. 마치 막이 오르면서 무대가 펼쳐지듯이. 이렇게 극적으로 느껴지는 건 경사면과 구릉지가 절묘하게 배합된 터에 들어앉은 건축물의 조화미와 세련미가 매우 빼어나기 때문이다. 부석사 전각들을 일컬어 ‘한국 전통건축의 고전’이라 하는데 이게 과언이 아니다. 어떤 이들은 부석사에서 천상이나 극락, 또는 서방정토를 느낀다. 미학으로 간을 친 건축적 맛과 멋을 음미하는 사이에 불교적 상상력까지 나래를 펴는 셈이다.
부석사의 수려한 전각들 중에서도 뛰어난 건 무량수전이다. 안동 봉정사 극락전에 이어 한국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목조건물로 추정되는 법당이다. 고풍스러운 정취가 짙게 묻어난다. 아담하고 단아한 봉정사 극락전의 구조미가 우수하지만, 건물 규모나 법식의 완성도에선 무량수전이 한 수 위다. 무량수전 불단에 모신 소조여래좌상도 걸작이다. 한국의 소조불상 가운데 가장 크고 오래된 불상으로 그 가치가 매우 높다. 특이한 건 불상이 봉안된 위치다. 통상 법당 중앙 정면에 불상을 두지만 이곳에선 측면인 서쪽에 있다. 이런 배치법을 취한 이유가 명확하진 않지만, 소조여래좌상을 서방정토의 부처로 추정해 서쪽을 바라보게 배치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아무려나 소조여래좌상의 상호에 기품과 위의가 넘쳐 눈을 뗄 수 없다. 숨소리 새어 나올 듯 입매는 생생하고, 눈은 반쯤 내리떠 그윽하다. 올려다보면 호방한 표정이고, 옆으로 보면 냉엄한데, 물러나며 돌아보자니 연민이 어린 얼굴이다. 이렇게 각도에 따라 기색이 다르지만 하나같이 가슴을 친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어 바라보는 풍광 역시 가슴으로 들이친다. 저 멀리에서 출렁거리는 산군(山群)의 파노라마가 장엄한 화엄 세상의 축약도로 비쳐서.
김기진 영주문화원 원장
“예로부터 많은 선비가 배출된 고장”
영주는 ‘선비의 고장’이다. 그럴만한 내력이 있다. 우선 고려에 성리학을 최초로 도입한 안향과 조선을 설계한 정도전이 태어난 곳이다. 조선의 문신 주세붕이 영주에 백운동서원을, 퇴계가 소수서원을 설립해 학풍을 일으키고 수많은 선비를 배출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역사적 배경에 따라 선비 정신이 면면히 이어졌던 것. 김기진 영주문화원 원장 역시 선비 정신을 중심 가치로 삼고 산다.
“조선시대 영주에선 4000여 명에 이르는 선비들이 배출되었다. 그 후손들이 현재까지 영주에 살면서 지역 풍토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나쁜 짓을 삼가고, 조상과 문중에 부끄럽지 않은 처세를 하는 게 좋은 삶이라 여기는 이들에 의해 올바른 지역 정서가 형성된 측면이 여실하다. 다시 말해 영주는 살기 좋은 곳이다. 범죄 발생률도 낮다.”
김 원장은 독서 애호가라고 들었다.
“난 소백산 자락에 산다. 산이 보이는 창가에 앉아 좋은 글을 읽는 일보다 더 행복한 게 없더라. 평생 무수히 많은 책을 읽었다. 덕분에 시집을 낼 수 있는 힘을 얻기도 했다. 2023년엔 좋은 글들을 뽑아 엮은 책 ‘산에서 보고 들은 것’을 출간했다.”
어디를 가나 과욕과 과속이 넘치는 세상이다. 영주라고 크게 다를까 싶은데.
“세상은 어지럽지만 올곧은 사람들도 있게 마련이다. 동네에 옳고 그름을 아는 선비가 한 사람이라도 있을 경우 좋은 풍토가 유지될 수 있다. 영주엔 다행스럽게도 선비 정신을 존중할 줄 아는 이들이 아직 많다. 내가 아는 영주 사람들은 다들 나름의 품위를 지키며 살아간다. 그들은 자녀 교육에도 충실하다.”
영주엔 명산 소백산이 있다. 소백산은 어떤 산이라 보나?
“한마디로 사람을 살리는 산이다. 예부터 흉년이 들어 막막할 때 영주 사람들은 된장 한 종지 들고 소백산에 들어가 산나물을 채취해 생계를 해결했다. 소백산은 영주의 정신적 지주이기도 하다. 이렇게 볼 때 물심양면으로 그 누구도 차별하지 않는 평등의 산이다.”
좋아하는 명문 하나를 소개한다면?
“‘겸손함은 하늘과 통한다’는 글귀를 가슴에 담고 산다. 젊을 때는 분노와 미움의 감정이 많았다. 그런데 독서를 하며 자신을 꾸준히 다스리면서 사람이 변했다. 책이 곧 스승이었다.”
영주문화원을 통해 성취한 건 어떤 것이 있나?
“‘영주근현대사 아카이브’를 구축했다. 역사는 보통 이름난 사람들 중심으로 쓰인다. 난 이름 없는 사람들의 역사도 중요하다고 봤다. 그게 아카이브 작업에 뛰어든 동기다. 2년여 동안 5만여 점의 자료를 수집해 일을 완결했다. 큰 상도 받았다.”
문화원의 성장을 위해 필요한 요소는 무엇이라 보나?
“첫째는 젊은 피의 수혈이고, 둘째는 열악한 예산 사정을 개선하는 일이다. 둘 다 난제지만.”
‘나는 솔로’, ‘환승연애’ 등 연애 예능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고 있다. 이런 시기에 실버세대도 사랑한다며 나타난 프로가 바로 HCN 충북방송 ‘홀로탈출’이다. 실버세대의 로맨스가 이렇게 귀엽고 순수하다니! 유튜브 채널 최고 조회수 57만 회를 넘을 정도로 관심이 뜨겁다. “실버 싱글 남녀의 끝 사랑을 찾아드리고 싶다”고 말하는 조미선·이창수 PD와 자세한 이야기를 나눠봤다.
‘홀로 된 인생, 다시 한번 로맨스를 꿈꾸다.’ ‘홀로탈출’은 60·70대 싱글 남녀 8명이 짝을 찾는 과정을 담은 러브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이다. 조미선 PD는 “문득 왜 젊은 사람들의 연애 프로그램만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어 HCN의 주요 시청자층인 실버세대를 타깃으로 하는 프로그램을 만들게 됐다”면서 “처음 기획 때는 지금보다 출연진 연령대가 높았고, 경로당 미팅 콘셉트를 생각했다. 과거 ‘장수퀴즈’라는 프로그램 같은 분위기를 내고 싶었다”고 말했다.
조미선 PD는 든든한 후배 이창수 PD와 ‘홀로탈출’의 시작부터 함께했다. 두 사람 모두 PD 경력 10년이 넘었지만 예능 프로그램 제작은 처음이다. 섭외, 연출, 편집 뭐 하나 쉽지 않았다. 괜한 도전을 한 것인가 싶었는데, 내부 시사회에서 ‘재밌다’는 반응이 나왔다. 다행이구나 하고 마음을 쓸어내렸더니 이내 대중의 뜨거운 반응이 터졌다. TV 최고 시청률은 5.08%(디지털 케이블 플랫폼 전국 유료가구 기준)를 기록했으며, 유튜브 채널은 3월 현재 총 조회수 780만 회를 향해 간다.
나이 먹어도 똑같아
‘홀로탈출’의 기본 형식 자체가 새롭지는 않다. 그러나 출연진이 실버세대로 달라지니 변화가 확 느껴진다. 무엇보다 일상에서 마주하는 보통 사람들이 짝을 찾는다. 그래서 그들의 로맨스가 친근하게 다가오며 더욱 응원하게 된다. 조미선 PD는 “우리 이웃 같은 사람들을 계속 출연시키는 것이 목표”라고 설명했다. 일부 연애 프로그램의 출연진은 방송계 진출이라든지 홍보를 목적으로 출연했다는 의혹을 받는데, ‘홀로탈출’은 이 부분에서 자유로워 보인다.
제작진이 출연진 검증에서 철저히 하는 부분이 있다. 면담 후 출연이 결정되면 혼인관계증명서를 무조건 받는다. 싱글임을 검증하는 것. 현재까지 지원자 및 출연자는 이혼 또는 사별을 경험한 돌싱이었으며, 미혼은 없었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여성 지원자가 남성에 비해 훨씬 많은 상황이라고 한다.
“남성 싱글들의 성향은 정말 극과 극이라고 하더라고요. 외부 활동을 많이 해서 연인이 있거나, 아니면 외부 활동을 극도로 안 하거나. 그러니까 진짜 싱글은 후자인 경우가 많은데, 주변에서 방송 출연을 권유해도 내켜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시즌1 때도 남성 출연자들을 겨우 섭외해서 촬영을 진행할 수 있었죠. 여성들은 방송국 프로그램이라는 안정감 때문인지 많이 지원하세요. 경쟁률도 매 시즌 높아지고 있죠. 시즌1 때는 2:1, 시즌2 때는 8:1 정도였습니다. 현재는 시즌3 참여자를 모집하고 있는데, 경쟁률이 벌써 10:1을 넘어섰습니다. 시즌3는 꽃피는 따스한 봄날인 4월에 촬영할 예정이에요. 시즌1, 2는 추울 때와 더울 때 촬영이 진행돼 출연진들을 너무 고생시킨 것 같아 죄송했거든요. 출연자도 8명 이상 될 수도 있습니다.”
실버세대 싱글들이 원하는 이성상의 기준은 어떻게 될까. 조미선·이창수 PD는 “남성들은 여성을 볼 때 외모와 나이(연하)를 제일 중요하게 생각한다. 여성들은 남성을 볼 때 경제력 위주로 보는 것 같다”고 이구동성으로 답했다. 또한 흥미로운 부분은 여성 출연자들이 ‘평범한’ 스타일을 선호한다는 것이다. 패셔너블하거나 잘 꾸미는 남성을 보면 멋지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홀로탈출’의 여성 출연자는 대부분 ‘너무 튄다’면서 부담스러워하는 반응을 보인다. 실버세대와 MZ세대의 싱글 남녀가 원하는 이성의 모습이 비슷하면서도 다르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홀로 탈출이 필요한 이유
5070 싱글들이 사랑을 찾는 과정은 매우 흥미진진하다. 부모님 혹은 조부모님 세대의 어른들은 사랑 앞에 매우 순수하고 솔직한 모습이다. 상대방이 좋거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얼굴에 그대로 표가 난다. 또한 오랜만의 데이트에 설레는 모습을 보이지만, 마음만 앞서 말실수를 하기도 한다. 조미선·이창수 PD는 “실버세대의 로맨스가 특별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젊은 층과 동일한데 좀 더 솔직한 편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일부 남성 출연자들은 살림을 해줄 여성을 찾는 것 같다’는 시청자 반응이 나오기도 했죠. 그분들은 홀로 식사하고 살림하는 것을 어렵게 느끼셨던 것 같아요. 그게 꼭 연애를 해서 이성이 해결해주길 바란다는 뜻은 아니었다고 봐요. 잘 포장해서 말할 수도 있는데, 너무 마음속 생각을 그대로 말하다 보니 여성 출연자와 시청자가 이해하지 못하는 지점이 생긴 것 같습니다. 표현이 솔직하고 투박해서 벌어진 문제라는 거죠.”
유튜브 채널에서 가장 인기 있는 영상은 시즌1의 자기소개 시간이 담긴 부분이다. 3월 현재 조회수 57만 회를 넘어섰다. 조미선 PD는 “연애 예능의 자기소개에서 사별 얘기를 하는 경우는 거의 없지 않나. 우리 유튜브 채널 시청자의 90%는 50대 이상이다. 출연진이 사별과 외로움에 대해 얘기하는 부분에서 시청자들이 많이 공감하셨을 거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실버세대가 사랑을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 조미선·이창수 PD는 결국 ‘외로움’이라고 얘기했다.
마음은 늙지 않는다
조미선 PD는 “출연진과 인터뷰를 해보면 그동안은 자식 키우느라 정신없었는데 자식들이 결혼 후 혼자 남으니까 적적함을 많이 느낀다고 한다. 이제는 그 외로움에서 벗어나 나를 찾고, 로맨스를 나눌 친구 같은 존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이와 함께 이창수 PD는 시즌1에 출연한 군인 출신 박영수 씨를 가장 기억에 남는 출연자로 뽑았다.
“처음엔 정말 밝은 분이라고 생각했는데, 속사정을 들어보니 밝은 이면에 아픔을 가진 분이셨죠. 자신에 대해 ‘사별했고, 자식도 없고, 진짜 홀로라서 출연했다’고 덤덤하게 말하시는데, 외로움이 느껴지더라고요. 저희 프로그램의 취지와 정말 맞는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촬영할 때도 성격이 좋으셔서 인기남에 등극했고, 네티즌한테도 응원을 많이 받으셨죠. 좋은 짝을 만나셨으면 좋겠습니다.”
조미선·이창수 PD는 젊은이들이 사랑하듯이, 실버세대도 똑같이 사랑을 원한다고 생각한다. 젊은 두 PD는 앞으로도 이 마음을 잃지 않고 프로그램을 만들어나갈 계획이다. “홀로 되신 분들이 다시 설레고 다시 사랑할 수 있는 용기를 주는 프로그램이 되고 싶고, 더 나아가 실버세대가 당당하게 사랑하는 문화가 형성됐으면 좋겠습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는 정말 늦었습니다. 더 늦기 전에 홀로 탈출하세요!”
‘홀로탈출’ 커플 이충국♥최문숙 인터뷰
“사랑은 남사스러울 게 없다”
‘비주얼 커플’로 통하는 이충국·최문숙 씨는 ‘홀로탈출’ 시즌1에서 만나 연인으로 발전했다. 이충국 씨는 촬영을 마친 후에도 직진 로맨스를 펼쳤고, 최문숙 씨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성공했다. 벌써 만난 지 1년이 다 되어간다는 두 사람은 결혼도 계획하고 있다.
‘홀로탈출’ 촬영 당시 이충국 씨는 최문숙 씨의 어떤 점에 끌리셨나요? 최문숙 씨는 언제부터 마음이 열렸는지 궁금합니다.
이충국 최문숙 씨가 가장 예쁘기도 했고, 시니어 모델이라는 공통분모가 있다 보니 호감이 갔습니다. 사실 저는 여성분들한테 관심을 많이 못 받았어요. 최문숙 씨와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내게 호감을 갖도록 많이 노력했죠. 하하.
최문숙 이충국 씨의 첫인상은 날라리 같았고 비호감이었어요.(웃음) 그런데 데이트를 하면서 대화를 나눠보니 생의 아픔이 있는 분이더라고요. 그리고 이야기를 진솔하게 하는 모습을 보면서 깊이 있는 사람 같다고 느꼈죠. 그때부터 어떤 사람인지 탐구했어요. 촬영 후 5~6번 정도 만나서 얘기를 많이 나눈 뒤 교제를 결심했습니다.
교제하면서 느낀 연인의 장점에 대해 칭찬 부탁드립니다.
최문숙 이충국 씨는 굉장히 긍정적인 분이에요. 또 사람의 마음을 잘 알아주고 배려심이 깊다는 것도 장점이죠. 요리도 정말 잘해요. 또 시니어 모델로 통하는 점이 많아서 좋아요. 커플이자 동료로서 HCN 광고 촬영을 같이 할 때 편해서 좋았는데, 또 광고를 찍고 싶습니다!(웃음)
결혼 계획도 세우셨나요?
이충국 앞으로 1~2년 안에 혼인신고도 하고, 전원생활을 하려고 합니다. 최문숙 씨가 대전에 살고 있어서 그곳에서 살 가능성이 제일 큰 것 같아요. 혼인신고를 안 하고 동거만 하려는 사람들도 있고 졸혼도 많이 한다는데, 저는 법적으로 부부가 되어야 신뢰가 밑바탕이 되어 잘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제가 70세를 바라보고 있는데, 앞으로 얼마나 일할지 모르잖아요. 그 안에 빨리 자리를 잡아서 최문숙 씨를 행복하게 해주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최문숙 씨의 자녀분들도 만나보셨나요? 자녀들의 반응이 궁금합니다.
이충국 저는 방송에서 말했듯이 아들이 하늘나라로 떠났고 가족이 없죠. 자식을 먼저 보내면 평생 가슴에 안고 산다고 하잖아요. 최문숙 씨의 자식들을 친자식처럼 생각하면서 살려고 합니다.
최문숙 이충국 씨가 굉장히 사려 깊은 분이라 저희 애들이 잘 따르고, 응원을 많이 해줍니다. 손주들도 참 좋아하고요.
60대에 사랑을 찾은 소감과 함께 ‘홀로탈출’ 출연을 추천해주세요.
이충국 주변을 보면 방송 출연에 대해 염려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한 번만 용기를 내면 좋은 인연을 만날 수 있습니다. 저는 ‘홀로탈출’에 출연하면서 정말 좋은 사람을 만나고 싶었는데, 이렇게 최문숙 씨를 만났죠.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라 생각하고, HCN 방송국에 굉장히 감사하고 있어요. 앞으로도 여왕님으로 모시고 살겠습니다!
최문숙 어렸을 때는 첫눈에 반해서 사랑할 수 있는데, 나이가 들면서는 여러 가지를 따지게 되더라고요. 동년배들에게 이제는 조건만 따지지 말고 나와 공통점이 있고 재밌게 잘살 수 있는 사람을 찾으라고 말하고 싶어요. 혼자 지내면 외로운데 같이 밥 먹고, 영화도 보고, 여행도 가고, 세상사도 같이 논하는 사람이 생기면 인생이 참 즐겁답니다. 주변에서 ‘이 나이 먹어 연애하는 게 주책 아닌가, 남사스럽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사랑에는 남사스러울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홀로탈출’ 출연도 좋고, 여러 사람을 만나보면서 자신에게 맞는 짝을 찾길 바랍니다.
“시골로 내려가겠다고? 그건 좀 미친 짓 아닌가?” 김화자(59, ‘꽃피는 산골농원’ 대표)는 이런 핀잔을 종종 들었다. 그러나 귀에 담지 않았다. 시골살이의 고독과 농사의 고난을 헤쳐나가느라 몸은 물론 마음마저 상할 수 있으니 충분히 숙고하라는 충고쯤으로 여기고 시골행에 시동을 걸었다. 시골살이는 김화자 부부에게 오래 묵은 로망이었다. 복잡한 도시에서 벗어나 부부 단둘이 시골에서 오순도순 살고 싶다는 꿈에 무슨 결함이 있으랴. 김화자에게 귀농은 자연스러운 이행(移行)이었던 같다. 상류의 물이 하류로 흘러가는 것과도 같은 순행. 올해로 그는 귀농 11년 차를 맞이했다. 애초 귀농을 만류했던 이들의 말이 이젠 사뭇 달라졌단다. “어라, 이 사람들 성공했네!”
김화자의 집은 무주군의 명산 적상산 아래에 있다. 한갓진 외딴집이다. 집 앞엔 개활지가 시원하게 펼쳐진다. 인상적인 건 이 집에서 바라보이는 산 풍경이다. 뒤편으로는 적상산이 떡 버티어 집을 보듬었고, 앞쪽에선 대호산이 뭔가 서기를 풍겨 생동감을 부여한다. 저 멀리 아스라이 덕유산도 보인다. 하얀 눈을 뒤집어쓴 그 산의 정상부는 아예 설산인데, 마치 다른 차원의 세계를 편집해 붙인 듯 신비감이 감돈다. 여기나 저기나, 앉으나 서나, 밤이나 낮이나 산들의 동향을 관찰하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는 환경이다. 산경(山景)에 심취하는 버릇이 있는 사람에게 적격인 삶터다. 김화자는 마땅한 시골을 물색하기 위해 남편과 함께 여러 지역을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인터넷에 매물로 나온 이곳을 둘러보고 곧바로 부지를 사들였단다. 첫눈에 호감이 가서.
“이왕이면 산세 좋은 곳에 터를 마련하고 싶어 강원도와 경기도 북부 지역 곳곳을 답사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이곳을 만난 건 행운이었다. 강원도의 산세를 닮은 분위기에 보자마자 반했으니까. 깊은 맛을 풍기는 산세에다 탁 트인 경관까지 보기 좋게 어우러져 즉시 매입했다. 철탑이나 축사가 인근에 없는지, 가격은 합리적인지, 갖가지 꼼꼼한 점검부터 하는 게 매입 수칙이라지만 그런 걸 다 생략하고 샀다. 한참 뒤에 알고 보니 시세보다 훨씬 비싼 땅값을 치렀더라.(웃음) 하지만 억울하진 않았다. 취향에 맞는 터를 구입했다는 기쁨이 더 컸으니까. 터를 정하고 나자 지인들이 ‘미쳤다’는 소리를 또 끄집어냈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무주에서 무슨 재주로 살 거냐면서.(웃음)”
초기 5년은 혹한기
터 일대의 자연환경 하나에 꽂혀 일을 저지른 셈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탁월한 선택이었다. 이날 이때까지 대체로 순탄한 시골살이를 해왔으니까 말이다. 터에 서린 무슨 지령(地靈)의 선한 감독을 받았을 리 없겠지만, 첫눈에 반한 땅이 주는 만족감을 정서적 기반으로 삼아 순항을 해왔으니 김화자에겐 영락없는 명당이다. 귀농 전에 그는 경기도 고양시에서 살았다. 남편과 함께 문구점을 18년간 운영하다가 접고 시골로 들어온 것.
“자영업이 대부분 그렇듯 자유시간이 없다. 스트레스도 많고 갑갑증이 난다. 더구나 우리는 휴일 없이 일에 매달려 살았다. 덕분에 문구점 규모를 키울 수 있었지만 언젠가는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 일찍부터 아이들을 다 키운 뒤엔 시골에 가서 마음 편하게 살 작정을 했는데, 마침내 적당한 시점에 이르러 가게를 청산하고 2013년에 이곳으로 내려왔다.”
도시에도 장점과 매력 요소가 많다. 시골이 마음 편하게 살 수 있는 곳이라는 생각은 어떻게 하게 됐나?
“돈을 벌기엔 도시가 한결 유리하겠지만 만족할 만한 좋은 삶을 꾸리는 데엔 시골이 더 낫다고 봤다. 그리고 그 좋은 삶이란 시골의 깨끗한 자연환경 속에서 텃밭을 일구고 정원을 가꾸는 식의 여유로운 활동을 통해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자유롭고 평온하게 살고 싶어 오랫동안 시골을 꿈꾸었던 거다. 어휴, 도시는 참 싫다. 스트레스와 부자유는 물론 교통체증과 매연에 질렸다.”
농사는 어떤 작물을 하나?
“농원의 전체 부지 1800평 중 1500평에다 사과와 블루베리 농사를 한다. 처음엔 사과 농사만 하다 나중에 블루베리를 추가했다. 애초 우리는 귀촌 형태의 시골살이를 구상했다. 호미자루 한 번 손에 쥐어본 적 없는 나로서는 본격적인 농사는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그냥 한가하게 살고자 했다. 인근에 구천동 관광지구가 있으니 상황을 봐서 나중에 민박집을 하면 되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런데 정작 들어오고 나서는 귀농 쪽으로 방향이 잡혔다.”
그렇게 된 계기가 있겠지?
“원래 이 터 일부에 사과 과수원이 있었던 데다 마을 주민들이 사과 농사를 하라 권유를 해 입문했다. 무주는 사과 특산지구다.”
농사 초심자가 과수원에 뛰어들었다. 막막한 게 많지 않았을까?
“처음 1년은 너무도 힘들었다. 호미로 풀을 메다가 집어던지고 주저앉아 펑펑 울기도 했다. 문제는 농사에 관한 아무런 사전지식도 없이 덤벼들었다는 데에 있었다. 그래서 무주농업대나 농업기술센터를 통해 열심히 배웠다. 여러 해에 걸쳐 농업교육을 이수하면서 농촌체험학습지도사, 농식품가공기능사, 팜파티플래너 1급 지도사, 다육아트지도사 등 다수의 자격증을 땄다. 농촌융복합산업 사업자 인증도 받았고.”
당초 귀농에 뜻을 두지 않고 내려왔지만 어차피 본격 농사에 승차했으니 제대로 한번 달려보자! 아마도 그런 결기가 작동했던 게 아닐까? 김화자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직시하고 민감하게 움직이는 걸로 귀농 생활을 개척해나갔다. 그러자 매사 탄력이 붙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농사일이 즐거워졌다. 비록 고달픈 노동이 연속으로 이어지는 나날이지만 도시에서와 달리 마음은 편하고 여유로웠다. 하지만 농사로 얻는 수익은 쉬 오르지 않더란다. 초기 5년은 혹한기였다는 것.
“월 300만 원, 즉 연간 3500만 원 정도의 순소득을 목표로 삼았다. 그쯤이면 부부 둘이 먹고살기에 충분할 거라 봤다. 하지만 손에 쥘 게 거의 없었던 초기 5년간은 많은 고심을 하며 지냈다. 다시 말하자면 자리 잡는 데 5년이 걸린 셈이다.”
그마저 괜찮은 성적이지 않나? 10여 년이 지나서야 궤도에 오르는 귀농인도 많다.
“우리는 친환경 농법으로 사과와 블루베리를 생산한다. 따라서 품질이 좋다. 이게 입소문이 나면서 찾는 이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농사 자체는 쉽지 않다. 특히 자연재해엔 속수무책이다. 농부가 최선을 다해도 물과 햇빛이 도와주지 않으면 망칠 수 있다.”
일찍이 현자가 말했더라. 하늘은 때로 사람을 공깃돌처럼 가지고 논다고. 어떤 식의 자연재해를 경험했나?
“태풍이 몰아쳐 사과나무들을 쓰러뜨렸다. 낙과 발생이 극심해 팔 만한 게 없었다. 밤낮없이 나무를 일으켜 세우는 작업을 하며 울었다.(웃음) 봄철에 느닷없이 쏟아지는 우박, 긴 장마, 겨울 가뭄 등 수시로 악재와 부닥친다. 자연 앞에서 사람은 나약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걸 실감하며 산다. 그러나 행복감을 맛보는 때가 아주 많다.”
어떤 때에?
“창밖이 밝아오는 아침에 눈을 뜰 때, 가만히 피어나는 들꽃을 바라볼 때 참 좋다. 밭에서 힘겹게 일하면서도 내가 지금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산다는 자각을 할 때도 행복하다. 이건 도시에서 가게를 할 땐 전혀 느끼지 못했던 경험이다.”
괜히 시골에 들어왔다는 후회는 없었는지?
“한번은 사다리를 타고 사과나무를 돌보다가 떨어져 발목뼈 세 군데가 부러졌다. 게다가 수술마저 잘못돼 무려 2년간 심한 고생을 했다. 그때 처음으로 회의를 느꼈다. ‘아이고, 내가 왜 시골에 와서 이 고생을 하지?’(웃음) 하지만 잠깐 스쳐가는 후회에 불과했다.”
이미 얻을 건 다 얻었다
그의 농원은 정갈하고 쾌적하다. 2층으로 지은 살림집과 정원 공간, 체험장과 가공공장, 사과와 블루베리 밭, 또는 이리저리 이어지는 통로 등이 유기적으로 구성돼 조화로운 한편 기능성을 극대화했다. 부부가 쏟아부은 비지땀과 능력과 시간의 산물이다. 농장의 핵심 공간은 체험장이다. 이곳은 급조한 비닐하우스지만 내부 치장이 꽤 흥미롭다. 벽면에 걸린 수예품과 그림들, 선반에 올라앉은 공예품들, 너른 자리를 차지하고서 재잘거리는 수백 점의 다육식물들. 이것들은 모두 김화자가 손수 만들거나 가꾼 것이라는 점에서 가히 독창적이다. 그는 이곳에서 방문객들을 상대로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우리 농원은 무주군 1호 치유농장이다. 과수 농사만 하다가 치유체험농장으로 전환한 이후 나름의 성장을 해왔다. 체험장에 있는 모든 사물이 치유 프로그램 소재로 쓰인다. 이건 실로 만족스런 대목이다. 나의 취미와 취향을 즐길 수 있는 수단을 프로그램화해 남들과 공유하고 소득까지 올리고 있으니까.”
일과 취미를 접목한 셈인가?
“시골에서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놀자는 게 기본 목표였는데 그게 이루어졌다. 처음엔 농사만 했지만 노동만 하면 무슨 재미가 있겠나? 취미 역시 제대로 즐겨 삶의 질을 높이고 싶었는데 그게 이루어졌다.”
흔히 원주민이나 귀농인이나 농사에 매몰돼 취미 내지는 문화 활동과 무관한 일상을 산다. 당신의 스타일은 독특하다.
“내가 경험한 시골 인심은 정겹고 순박하다. 그러나 평생 호미를 쥐고 사는 할머니들을 보면 안타깝다. 때로 그들을 농원에 모셔 그림을 그리게 한다. 그러면 무표정하던 얼굴에 생기가 돌더라. 귀농인들도 맘만 먹으면 얼마든지 문화를 즐길 수 있다. 난 읍내 합창단에 가입해 노래를 즐기기도 하는데, 문화 동아리도 많고 싼값에 볼 수 있는 공연이나 이벤트도 풍성한 게 요즘의 지방이다.”
성공한 귀농인이라는 얘기를 듣는다지? 이제 농원에 무엇을 더 보탤 계획인가?
“2023년 매출이 약 9000만 원이다. 이쯤이면 충분히 만족스러운 수준이다. 차후 게스트하우스를 하나 지을까 생각 중이지만 사실 얻을 건 이미 다 얻었다. 부부가 노후를 편하게 지낼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됐고, 자식들이 놀러 와 맘껏 놀다 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으니까. 무엇보다 그토록 바랐던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살고 있어 기쁘다.”
원했던 곳에서 원했던 삶을 발굴해 지속한다는 건 아마도 인생의 최고봉이다. 섣부른 귀농으로 인생이 외려 꼬이는 수도 있지만 과욕 없는 열렬한 행보라면? 김화자의 방식엔 은근히 개성과 패기가 박혀 있다.
김화자가 주는 귀농 Tip
•마음을 비우고 귀농하자. 꽉 채워진 마음엔 새로운 게 들어설 자리가 없다.
•성향이나 기질이 농촌 생활과 어울릴지 면밀히 점검하고 귀농 여부를 결정하자.
•귀농 초기의 고생은 통과의례로 여기고 귀농하자. 5년 차까진 수련기로 작정하는 게 현명하다.
•처음엔 집을 빌려 쓰라고들 하지만 아예 내 소유 집부터 짓는 게 좋을 수 있다. 초기의 어려움에 질려 너무 쉽게 역귀농하는 사례를 볼 수 있는데, 집을 지어놨을 경우엔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아 인내하며 활로를 찾아가기도 한다.
•작목은 가급적 지역 특산물을 선택하자. 관의 지원을 받을 수 있고, 생산물 유통의 이점이 크기 때문이다.
•남자만의 귀농은 금물이다. 부부가 함께 귀농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