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호에는 위기 때마다 구원투수가 되어주신 중·고등학교 담임선생님께 보내는 편지를 윤정모 소설가님께서 써주셨습니다.
정선우 선생님, 새해입니다. 새 수첩에 지인들의 연락처를 옮겨 적다가 어느 이름 앞에서 손길을 멈춥니다. 선생님 성함과 흡사한 이름입니다. 단지 흡사할 뿐인데도 선생님에 대한 생각들이 가슴속에서 회오리칩니다. 그리움이 아닙니다. 마음에 새겨두지 못했던 기억들이 생생하게 살아나면서 은혜도 몰랐던 제 양심이 아프기 시작합니다.
선생님과의 첫 만남은 중학교 때 담임으로였습니다. 비오는 날 장화가 없어서 고무신을 신고 학교에 갔는데 선생님께서 야단을 치셨습니다. 그때 저는 눈 똑바로 뜨고 대들었지요.
“돈 없어서 장화를 못 사는 것도 죕니꺼?”
선생님께서는 “중학생은 학교 규칙을 지켜야 한다. 다음부터는 그냥 운동화를 신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선생님은 교원노조로 잡혀가셨습니다. 그때 수감된 선생님들이 낮에는 극장 앞 철조망 안에서 운동을 한다고 했습니다. 학교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 점심시간마다 가보았습니다만 단 한 번도 선생님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두어 달 만인가 다시 학교로 돌아오셨지만 제가 철조망으로 갔던 일은 선생님께서 아실 리가 없고, 또 담임도 아니어서 따로 인사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선생님을 위해서 한 일은 오직 그것뿐이었습니다.
그해 학기말 시험 때였습니다. 생물 시험지를 받아 보니 아는 게 별로 없어서 대충 끝내고 남은 시간은 시험지 뒷장에 만화를 그렸습니다. 그때 저는 만화가가 되고 싶었거든요. 시험지를 본 생물선생님께서 저를 정신병원에 보내 정신 감정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때 선생님께서는 “단지 만화를 그렸을 뿐인데 정신적 문제로 몰고 가는 건 옳지 않다”고, 이제는 담임도 아닌데 극구 반대했다는 사실을 반장으로부터 전해 들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도 저는 고맙다는 생각을 전혀 새겨두지 못했습니다.
제 미음의 켜와 층, 의식구조는 그처럼 얕고 좁았던 것일까요? 아니면 기억을 흡수해두는 기능이 없었던 것일까요?
고등학교 2학년 때 선생님께서 또다시 제 담임이 되셨습니다. 큰 말썽 없이 잘 지나갔는데 늦가을 어느 날 문제가 터지고 말았습니다. 제가 서울에서 온 사촌오빠의 팔짱을 끼고 남포동을 걸었던 것이지요. 대학생 오빠라 뽐내고 싶었던 것인데, 그때 맞은편에서 훈육주임 선생님께서 오고 계셨습니다.
전 팔짱을 낀 채 고개 인사만 하고 그냥 지나갔지요. 그러지 않아도 저를 수상쩍게 보시던 선생님이었는데 제가 남자 팔짱을 끼고 유유히 지나갔으니 곱게 봤을 리가 없었겠지요. 이튿날 학교에서 난리가 났습니다. 선생님들이 의견을 모아 저에게 근신처분을 결정할 때, 정선우 선생님, 선생님께서 학부형의 확인을 요청하셨다지요? 그런 사실도 저는 엄마한테 전해 듣고 알았습니다.
그리고 고3 때, 제가 정말로 대형 사고를 치고 말았습니다. 자살소동, 그때 학교가 발칵 뒤집혔다지요? 발단은 제 친구였습니다. 초등학교 동창이었던 그 아이가 연탄가스로 가족을 다 잃은 후 혼자 어디론가 사라졌지요. 소식을 몰라 궁금해하던 차에 초량 텍사스에 있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양공주가 되었던 것이지요. 저는 그 사실이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공납금과 시계를 팔아서 방을 얻었지요. 쌀과 연탄도 들이고 그 아이를 찾아갔습니다.
“여긴 지옥이다. 네가 있을 곳이 아니니 어서 나가자….”
그 아이가 말했습니다.
“그간 식당 청소, 가정부로 전전했다. 가는 곳마다 주인 남자가 나를 겁탈했다. 그런 일을 겪느니 자의로 몸을 파는 이곳이 백배는 낫다….”
저는 친구를 설득하지 못한 채 돌아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선생님. 우리 학교 어느 선생님께서 제가 거기에 있는 것을 목격하신 것이었습니다. 이튿날 훈육주임이 불러서 그런 요상한 곳엔 왜 갔느냐, 화장을 진하게 한 그 여자는 누구이며 언제부터 그런데 출입을 했느냐, 해명을 요구하더군요. 저는 변명도, 대답도 하지 않았고 결국 징계를 받았습니다.
선생님, 솔직히 고백할까요? 저는 학교 벌칙 따위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런 일로 걱정해본 적도 없었습니다. 학교 선생님들마다 저를 문제아로 본다는 것도 마음에 새겨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자살소동은 뭐냐고요? 갑자기 살기가 싫어지더군요. 예쁘고 착한 내 친구가 양공주라는 것도 끔찍했습니다. 무엇 하나 제대로 하는 것이 없는 제 존재도 혐오스러웠습니다. 제가 세상을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바람직한 일이 사라져주는 것이라 여겨졌습니다. 약국을 돌면서 수면제를 샀습니다. 그리고 해운대로 갔지요. 동백섬에서 어두워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사이다와 함께 수면제를 삼켰습니다.
제 기억은 거기까지입니다. 누군가가 저를 발견하고 병원으로 옮겼다는 것, 위세척 후 학교로 연락했다는 것, 하필이면 그날이 또 선생님이 당직이었다는 것, 담임도 아니면서 선생님께서 달려와 저희 집까지 업고 가셨다는 것. 그러한 전말을 어렴풋이 전해 들은 것 같은데 어찌 깡그리 잊었다가 이제야 기억이 나는 것일까요?
선생님, 그때 저는 사흘 만에 깨어났습니다. 그리고 곧장 등교를 했습니다. 정학당한 일을 제가 잊었는지 아니면 제 소동으로 학교에서 징계를 풀어준 것인지는 기억이 없습니다. 확실한 것은 수면제를 먹고 자는 사이 많은 기억들이 무의식으로 숨어버렸다가 50년이 지난 지금에야 생생하게 떠오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랬습니다. 선생님은 저에게 그냥 스승이 아니었습니다. 위기 때마다 저를 구해주셨던 제 인생의 구원투수였습니다. 한데도 저는 그런 사실조차 까맣게 모르고 있었으니 이런 배은망덕이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선생님은 이미 오래전에 돌아가셨고 갚을 길조차 없는데 지금 이 생생한 기억들의 부활은 또 어쩌란 말입니까.
어느 동화에서처럼 하늘나라로 편지를 보내주는 우체통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저는 착한 제자로 돌아가서 선생님의 거룩한 은혜를, 가슴 터질 것 같은 고마움을, 절절한 그리움까지 낱낱이 다 적을 것입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여쭤볼 것입니다.
“선생님, 저를 용서해주실 거지요?”
>>윤정모(尹靜慕) 소설가
1946년 경북 월성에서 태어났으며, 서라벌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1968년 장편 ‘무늬져 부는 바람’을 출간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단재문학상(1993), 서라벌문학상(1996) 등을 수상했다. 대표작으로 ‘고삐’, ‘들’ ‘나비의 꿈’, ‘슬픈 아일랜드’, ‘꾸야 삼촌’, ‘수메리안’, ‘길가메시’, ‘수메르’ 등이 있다.
정유년인 올해는 정유재란(1597.1~1598.12) 발발 420주년이다. 임진왜란으로부터는 427주년.
임진왜란이 치욕의 역사였다면, 정유재란은 왜군이 충남 이북에 발도 못 붙인 구국승전의 역사다. 그 전적지는 진주, 남원, 직산 등 삼남지방 곳곳에 있지만 옛 자취는 찾기 어렵다. 뚜렷한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은 왜군이 남해안을 중심으로 농성하던 성터들이다. 주로 경남 중동부 해안에 밀집한 왜성 터들도 오랜 세월 허물어지고 지워져 갈수록 희미해져간다. 왜성이라는 이유로 사적지 지정이 해제된 탓이다. 근래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그 중요성에 눈을 떠 옛 모습대로 복원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는 아직도 방치되어 있다. 치욕의 역사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다. 더 늦기 전에 지금 모습이라도 남겨둬야 한다. 더 사라지고 훼손되기 전에 역사 현장 보전의 필요성을 일깨우고, 정유재란의 역사적 의미를 천착하기 위해서라도 그 흔적을 돌아볼 필요가 있어 에 게재하기로 한다.
임진·정유 국란의 왜군 출진기지는 규슈(九州) 서북 해안 나고야(名護屋) 성이다. 일본 중부의 중심도시 나고야(名古屋)와 구별하려고 히젠(肥前)이란 옛 지명을 붙여 ‘히젠 나고야’라 불리는 곳이다. 사가(佐賀) 현 가라쓰(唐津) 시에서 버스를 타고 해안선을 따라 40여 분 달리면 닿는 요부코(呼子) 포구 언덕 위에 있다.
굴곡이 심한 해안선 깊숙한 만(灣)에 얼마든지 배를 숨길 수 있고, 조선과의 거리가 제일 가까운 지리(地利)를 고루 갖추어 옛날부터 왜구의 소굴로 유명했던 곳이다.
26년 만에 다시 찾아본 나고야 성은 그때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흘러간 옛 노래 ‘황성옛터’를 연상시키는 무너진 성벽이 옛날 그대로였다. 일본이 군신으로 떠받드는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의 글씨로 ‘名護屋城址’라고 쓴 비석도 같은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헛꿈을 조롱한 쇼와(昭和) 시대 하이쿠 시인 아오키 겟토(靑木月斗)의 시비도 같은 자리에 있었다.
수십 년이 걸린 성터 발굴·복원사업이 끝났다지만 겉보기에 변한 것은 없었다. 주말 낮인데도 탐방객 발길이 뜸해 적막하기만 했다. 성터 입구에 자리 잡은 박물관과 그 앞에 조성된 상가만이 옛날에 없었던 건물이다.
도고 헤이하치로 글씨로 된 성적(城跡·성터) 비는 1930년, 겟토의 시비는 1940년에 세워졌다. 그러나 두 돌의 언어는 사뭇 다르다. 도고의 비에는 옛 성터라는 글자뿐이지만, 그것이 세워진 시대와 세운 자의 뜻에 히데요시의 대륙 정복 야망을 그리는 마음이 오롯이 드러나 보인다.
1930년이라면 일본의 만주 침략 야욕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대다. 내무성이 그 돌을 세우면서 러일전쟁 영웅에게 글씨를 부탁한 가슴 밑바닥에는 일본인들이 ‘역사상 최고의 영웅’으로 추앙하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존숭하는 뜻이 꿈틀거렸으리라.
1940년에 세워진 겟토 시비는 히데요시의 망상을 비웃는 것 같다. “다이코가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지만 바다에는 안개만 자욱해.” ‘다이코(太閤)’란 천황을 대신해 나라를 다스리는 관백(關白) 자리를 아랫사람에게 물려주고 상왕처럼 물러앉은 이를 말한다. 히데요시는 조카(秀次·히데쓰구)에게 양위한 뒤에도 만사를 제멋대로 한 사람이다.
그런 권력자가 아무리 대륙 진출 야망으로 용을 써도 그 꿈은 안갯속에 가물가물하다는 뜻으로 읽히지 않는가. 실제로 성터에서 바라본 현해탄 바다에는 쓰시마의(對馬島) 모습조차 어렴풋했다.
26년 만의 탐방객을 놀라게 한 것은 성터에 우거진 고목나무 가지에 달려 있는 올레길 리본이었다. 처음 눈에 띈 것은 천수각 가는 길가 나뭇가지에 달린 것이었다. 반가워 카메라를 들이대니 일본인 탐방객이 “그게 무엇이기에 사진을 찍느냐”고 물었다. 한국 제주도 올레길 표시라는 말에 그들은 “천수대 터에도 많다”고 알려줬다. ‘제주 올레가 일본과 몽골에 수출되었다더니 여기까지 왔구나’ 싶어 너무 반가웠다.
그의 말이 맞았다. 금빛 찬란한 천수각이 있었다는 천수대 터에는 쇠막대기로 만들어 세운 올레 표지물도 있었다. 나중에 알아보니 가라쓰에서 규슈 서북단 히라도(平戶) 섬에 이르는 해안선 구간에 올레길이 조성되어 한국인 여행객에게 인기가 있다 한다. 나고야 성을 찾아가는 도로표지판마다 한글이 병기된 것도 그래서구나 싶었다. 7년 동안 나라를 풍전등화처럼 위태롭게 했던 왜란 출진기지가 평화의 길이 된 것을 400여 년 세월의 작용이라고만 보아 넘기기에는 좀 미진한 뒷맛이 남았다.
임진왜란 400주년 기획 시리즈 취재 차 나고야 성에 갔던 1991년에는 유적지 발굴사업이 한창이었다. 옛 성터를 정비해 관광자원으로 삼기 시작한 때여서 일본인 관광객 발길이 잦았다. 그 르포기사가 신문에 보도된 것을 계기로 국내에서도 차츰 관심을 갖는 사람이 늘어 규슈 관광의 인기 코스가 되었으니, 세월의 두께를 새삼 음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모습 그대로 두는 것이 역사의 참뜻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생각에서 무너진 성을 보존하기로 했습니다.” 그때 특파원을 안내해준 진제이(鎭西) 초(町·일본의 행정구역 단위) 직원은 복원사업이 현상을 그대로 두고 발굴만 하는 것이라 했다. 히데요시 이후 염전·반전사상의 결과로 폐허가 된 성을 그대로 두는 것도 역사의 뜻이라는 것이었다.
정작 옛 자취를 찾게 된 것은 나고야 성 주변에 촘촘히 자리 잡았던 130여 개 번국(藩國)의 진터다. 독재자 히데요시는 휘하 영주[大名]들에게 전쟁기간 중 출진 병사들을 거느리고 성 아래 대기하도록 요구했다. 출진 후의 병력보충 병참 등 임무를 강제했기 때문에 전국의 영주들은 수많은 예비 병력을 거느리고 눌러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진터들은 전후 폐허가 되었다가 사유지로 바뀌어 흔적마저 감추었다. 1970년대부터 시작된 복원사업의 큰 틀은 그 땅을 사들여 옛 모습의 윤곽을 복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박물관을 지어 전쟁의 배경과 경과, 그리고 양국 평화의 지향점을 모색하고 홍보하자는 것이었다.
나고야 성은 축성과 폐성이 모두 전광석화 같았다. 인구 20~30만 명의 거대한 병영도시 나고야 성은 번개같이 건설되어, 또 그렇게 해체당하는 비운을 맞았다. 최고 권력자가 사라지고 세상이 바뀌면 어느 나라 어느 시대에건 일어나는 일이다. 그러나 그처럼 철저하게 무참하게 파괴된 일은 흔하지 않으리라.
일본 통일의 꿈을 이룬 히데요시는 조선과 명나라를 손아귀에 넣어 동아시아 패권을 잡겠다는 망상으로 1590년부터 대륙 침략을 꿈꾸기 시작한다. 중국은 물론 인도까지 영토를 넓혀 부하들에게 봉토를 나눠주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그 계획에 비판적이던 동생 히데나가(秀長)가 죽고, 천금보다 귀히 여기던 외아들 쓰루마쓰(鶴松)마저 잃어 심신이 극도로 피폐했던 1591년 8월, 그는 규슈 지방 영주들에게 ‘대륙 경영 사업’ 개시를 선언하고 적지에 출진기지를 건설하라고 명령한다.
당시 일본에 와 있던 포르투갈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의 에는 그때 일을 이렇게 묘사했다. “관백(히데요시)이 조선으로 가장 쉽게 건너갈 수 있는 항구가 어디인지를 묻자 가신들은 나고야로 불리는 아름다운 항구가 있는데, 수천 척의 선박이 안전하게 출입할 수 있는 곳이라고 대답했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전국의 영주들을 나고야에 집결시키도록 명령했다. 그리고 각자의 부담으로 궁전과 해자와 저택으로 꾸려진 화려하고 넓은 성채들을 조속히 축조하되, 교토에 지은 것보다 뒤떨어지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문장에서 주목할 것은 교토에 뒤지지 않는 화려한 궁전과 성채를 영주들 각자의 부담으로 건설하라는 ‘후신(普請) 명령’이다. 후신이란 불교에서 민간에 널리 시주를 청해 불당이나 탑을 짓거나 수선하는 사업이란 뜻이지만, 절대 권력자가 영주들에게 갖가지 토목·건축사업을 시킨 일을 뜻했다. 나랏돈은 10원도 쓰지 않고 국책사업의 돈과 인력을 영주들에게 부담시켰으니, 아무리 봉건시대이라지만 어떻게 그런 횡포와 전제가 있었는지 흥미롭다.
프로이스는 영주들이 꼼짝 못하고 명령을 수행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다른 영주들에게 뒤지지 않으려는 경쟁심이었다. 작업 중 사소한 부주의를 저지르면 감독들에게 공개적으로 질책을 당하게 되고, 그것이 관백에게 무능력자로 낙인찍혀 추방당하거나 재산을 몰수당할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축성 책임자는 히데요시의 오른팔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공사 책임자는 뒷날 이 지역 영주가 된 데라자와 히로타카(寺澤廣高)였다. 원래 있었던 가키조에(垣添) 성을 헐어 규모를 크게 확장하고, 사방 3km 이내에 130여 번국 영주들의 진영(陣營)을 건설하는 일본 역사상 초유의 대토목 공사였다. 성 공사는 착공 6개월 만에 완공되었고, 영주들의 진영이 완성되는 데는 8개월이 걸렸다니 얼마나 공사를 서둘렀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본성 공사는 규슈 지역 20여 명의 영주들이 비용과 공력을 분담했고, 나머지 공사는 각 영주들 책임 아래 시행되었다. 해발 89m 나지막한 구릉 꼭대기에 혼마루(本丸)를 짓고,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5층 규모의 천수각을 세웠다. 그 아래로 니노마루, 산노마루 등 부속시설과 병사를 배치하고, 주변에 견고한 석축을 쌓아올려 난공불락의 요새를 만들었다. 외성은 주변에 해자를 둘러 외적의 침입에 대비한 전형적인 왜성이었다. 성의 총면적 50만 평은 일본 최대의 오사카 성에 버금가는 규모였다.
성의 크기만 그런 게 아니었다. 그 시대 인구 30만을 가진 도시는 오사카 말고는 없었다. 성내에는 히데요시의 측실(廁室)을 위한 사찰과 다실, 전통 가무극 ‘노(能)’ 공연장까지 있었다. 그 시대에 그려진 병풍도에는 성내의 건물 약 70여 동, 그 아래 조카마치(城下町)의 일반 백성 주택과 점포 260여 동, 진영 시설 70여 동 등 400여 동의 건물이 그려져 있다.
나고야는 외국인 왕래가 잦은 국제도시이기도 했다. 병풍도에는 명나라 사절단 40여 명과 포르투갈인 등 260여 명의 통행인이 그려져 있는데, 이 가운데는 조선에서 잡혀온 포로들을 사들여 해외로 팔아넘기는 노예 상인들도 있다. 일본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돌아온 정희득(鄭希得)은 실기(實記) 에 “나고야 거리에서 마주친 사람의 반 이상이 조선인”이라고 썼다. 그들 대다수가 붙잡혀간 사람들이었다.
통행인 가운데는 남자들 소매를 잡아끄는 유녀(遊女)의 모습도 보인다. 해안 거리에는 유곽과 술집이 줄지어 있고, 각 번의 진에서는 수많은 사졸이 할 일 없이 소일하고 있었다. 노예장사로 재미를 본 외국인들도 돈을 풀어 즐거움을 샀을 것이다.
발굴 작업 중 천수각 주변에서는 금박기와편이 많이 출토되었다. 벽면뿐 아니라 기와에도 금박을 입혀 금빛으로 번쩍이는 건물이었던 것이다. 이런 성의 건설과 전쟁 수행에 시달린 일본 민중의 고난이 기록으로 남았다. 병력 1만5000명을 할당받은 사쓰마(薩摩) 번(藩·제후가 통치하는 영지)의 경우 7000명이 넘는 아시가루(足輕·보병)와 6000명이 넘는 인부를 징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들은 모두 농·어업에 종사하는 백성들이었다. 갖가지 무기와 장비, 병량과 말먹이, 군수품 및 병선 조달과 운용도 백성들 몫이었다.
백성들 고난은 그것으로도 모자랐다. 히데요시는 곧 조선으로 건너가겠다면서 중간에 머물 이키(壹岐) 섬과 쓰시마(對馬島)에도 성을 쌓고 궁을 지으라는 명령을 내려 부하들과 백성들을 괴롭혔다. 이키 섬에는 아직도 그때의 성터가 뚜렷이 남아 있다. 백성들의 피땀을 짜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을 ‘아방궁’을 지은 것이다.
침략군 출진은 1592년 3월이었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1번 대부터 하시바 히데카쓰(羽柴秀勝)의 9번 대까지 총출진 병력 15만8800명, 출진을 도운 예비부대와 병참요원 등을 합친 총인원은 30만5300명으로 기록돼 있다(역사군상 시리즈 ). 비탈진 구릉 도시에 인파가 북적거렸을 날에 비해 오늘의 정적(靜寂)과 정일(靜逸)은 너무 대조적이다.
히데요시는 침략군이 떠난 3월 26일 교토를 떠나 4월 25일 나고야에 착진(着陣), 1년을 머물며 전쟁을 지휘했다. 그 기간 협상 사절로 온 명나라 유격 심유경(沈維敬)을 접견하기도 하고, 여러 장수들이 조선에서 보내오는 보고서와 진귀한 전리품을 받아들고 천하를 얻은 듯 기고만장했다. 심유경의 거소는 명군 유격이 머물던 곳이라 ‘유게키마루(遊撃丸)’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런 영화의 무대였던 나고야 성은 전후 곧바로 참담하게 해체되었다. 히데요시가 죽고 가스미가세키 패권 전쟁에서 승리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전투에 공을 세운 데라자와 히로타카에게 히젠 나고야 땅을 영지로 주었다. 성을 축조할 때 공사 총감독으로 기여하고 조선에 출병한 공로까지 인정한 것이다.
데라자와는 1602년 나고야 성을 허물고 가라쓰 해변에 자신의 성을 축조했다. 조선 침략의 상징물인 그 성을 허문 것은 일개 영주의 결정이 아니었다. 조선과의 무역 재개와 친선관계의 필요성을 절감했던 이에야스는 성을 허물어 전쟁에 반대했던 자신의 뜻을 널리 알릴 필요가 있었다. 전쟁 기간에 아버지와 남편을 잃었거나 오래 빼앗겼던 민중은 전쟁에 치를 떨었다. 7년 동안 헐벗고 굶주린 것이 모두 전쟁 탓이라 여겼던 민중의 염전사상(厭戰思想)은 하늘을 찔렀다. 반전사상과 염전사상은 지금 허물어진 성터 위에 아기 불상의 모습으로 남았다.
데라자와는 그렇게 허문 성석과 건물의 자재를 고스란히 자신의 성 쌓기에 사용했다. 마쓰우라(松浦) 강이 바다로 흘러드는 나지막한 구릉 위에 한껏 멋을 부려 쌓아올린 가라쓰 성은 멀리서 보면 학이 나래를 펴고 춤을 추는 모습을 닮았다고 해서 무학성(舞鶴城)이라 불린다.
그렇게 헐린 나고야 성은 얼마 후 일반 민중의 공격으로 또 한 번 상처를 입는다. 1637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기독교 탄압과 가혹한 조세가 원인이었던 시마바라(島原) 민란 때였다.
성터 입구 ‘나고야 성 박물관’ 현관 앞에는 제주도 돌하르방 부자가 서서 탐방객을 맞아준다. 일본인들은 이 낯선 ‘수문장’ 앞에서 반드시 발길을 멈추고, 더러는 기념사진을 찍기도 한다. 이 박물관의 성격이 ‘일본열도와 조선반도의 교류사’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출입문을 들어서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전시물이 한국 고미술의 상징인 반가사유상 복제품이다. 7세기 중국과 조선반도 문명의 영향을 받아 일본에 처음 율령 국가가 세워졌다는 설명문이 그 아래 붙어 있다.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것이 거북선 모형이다. 실물보다 많이 축소된 것이지만 여수나 통영에서 본 것과 다르지 않다. 문을 들어서 처음 맞닥뜨리는 공간에 자리한 거북선 옆에는 당시의 일본 전함 아타케부네(安宅船) 모형과 두 나라 병기, 무복, 전황도 등이 전시되어 있다. 객관적인 시선으로 전쟁을 조명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1994년 11월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국민 앞에 모습을 보였다. 그러고는 “나는 알츠하이머병에 걸려 있습니다. 앞으로 나는 나의 친구, 내 가족을 몰라볼지도 모릅니다”라고 선언했다. 그는 “인생의 황혼(黃昏)으로 가는 여행을 떠난다”는 말과 함께 10여 년간 치매와 싸우다 2004년 9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옆을 지켰던 부인 낸시 레이건은 치매 환자 가족의 고통을 “사랑하는 사람이 눈앞에서 천천히 분해되어 무너져가는 것을 지켜보는 괴로움”이라고 표현했다. 병이 깊어졌을 때 레이건 대통령은 낸시 여사를 알아보지 못했고 자신이 미국 대통령이었다는 사실도 기억하지 못했다고 한다.
며칠 전 필자는 초등학교 가을 체육대회에 참석했다. 열두 살 꼬맹이였던 친구들은 60대 환갑이 넘은 초로의 모습이었다. 주름진 얼굴, 서릿발 내린 흰머리 등 세월의 흔적을 지울 수는 없었다. 오랜만에 학창 시절을 추억하고 웃고 떠들다 대화는 자연스럽게 부모님 안부로 이어졌다. 우리 나이가 육십이 넘었으니 이미 돌아가신 부모님도 많고 살아 계신다 해도 90세 전후라서 어르신들 건강이 좋지 않다. 집에서 치매로 고생하시거나 요양원에 계신 분도 꽤 있다.
자연스러운 치매 얘기에 경험담이 하나둘 터져 나왔다. 치매 환자가 있으면 가족은 비상이다. 잠시라도 자리를 비우면 주방에 가스레인지를 켜놓는 등 위험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현재 치매 치료제는 없고 지연시키는 약만 있으나 그 효능은 그리 크지 않다고 한다. 최선책은 조기진단과 예방법 실천이다. 알려져 있는 예방법은 다음과 같다.
첫째, 햇볕을 많이 쬔다. 오메가-3 지방산과 비타민D 섭취량을 높인다. 둘째, 오메가-3가 풍부한 등 푸른 생선을 많이 먹는다. 셋째, 숫자나 퍼즐 게임, 낱말 맞히기, 산·강 이름 암기 등 두뇌를 쓰는 게임을 한다. 넷째, 당분 섭취를 줄인다. 다섯째, 잠을 7시간 이상 충분히 잔다. 여섯째, 항산화제가 풍부한 커피를 하루 3~5잔 마신다. 일곱째, 스트레스를 낮추고 혈액순환에 도움이 되는 명상을 생활화한다. 끝으로 취미, 모임 등에 자주 나가 사회활동을 한다.
이미 치매가 시작되었다면 국민건강보험공단에 신청해 등급 판정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구체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다. 지원 내용에는 방문 간호, 주간 보호, 단기 보호, 복지 용구 지원 등이 있다. 경증 환자를 위한 주간 보호 시설도 어린이집처럼 운영된다. 중증 환자는 24시간 방문 요양 서비스를 받을 수 있고 요양원 입주가 가능하다. 현재 중증 환자의 경우 본인 부담금이 20%인데 ‘치매 국가 책임제’로 정책이 전환되면서 10%만 부담하면 된다.
필자의 장모님도 등급을 받아 주간 보호센터에 다니신다. 요양원이 싫은 사람은 간병인을 구하면 되지만 경제적으로 큰 부담이 된다. 요양원이라고 해서 부정적으로만 볼 일은 아니다. 각종 프로그램과 전문가들의 도움이 있어 집에서 갇혀 있거나 누워만 있는 것보다 나을 수도 있다.
치매는 본인뿐 아니라 돌보는 가족도 환자로 만드는 가족병이라 한다. 평소 예방법 등을 실천해 치매가 오지 않도록 하고, 주기적인 검진으로 치매 진행 속도를 늦추고, 치매 관련 제도를 활용해 경제적인 부담을 줄여야 한다. 또한 치매 환자를 돌보는 가족도 환자가 한 생애를 끝내고 황혼 여행을 잘 떠날 수 있도록 인내심을 갖고 돌봐야 한다.
일본 NHK가 보도한 바에 의하면 지난해에 쓰레기장에서 주었다고 신고한 금액이 우리 돈으로 약 1900억 원 정도 된다고 한다. 혼자 살면서 장롱 속에 보관하다가 죽은 사람들의 뭉칫돈이라는 것이다. 신고하지 않은 금액은 더 많을 것이다. 상속받을 사람이 없어 국고로 귀속된 금액도 4000억 원이 넘는다고 한다. KBS 보도로 우리나라도 고독사로 추정되는 죽음이 연간 1만 건이 넘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시사 하는 바가 크다. 일본은 왜 뭉칫돈을 은행에 안 넣고 장롱 속에 보관하는지 궁금하다. 그리고 그만한 돈이 있다면 쓰다가 죽어야 하는데 다 쓰지도 못하고 죽는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노인이 되면 사실 돈 쓸데가 많지 않다. 기껏해야 친구들 밥이나 사고 친척 손주들 용돈이나 주는 정도이다.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돈을 쓰는데 익숙하지 않은 편이다.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는 것이다.
시니어들을 보면 이미 갖고 있는 재산이 많은데도 돈 벌 궁리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동안 돈 벌던 습관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살고 있는 아파트만 해도 큰돈이지만, 이미 갖고 있는 재산은 돈으로 안 친다. 더 작은 아파트로 이사 갈 생각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현금은 없단다. 그러니 하우스 푸어인 셈이다.
같이 어울리는 사람들에게 밥 한 끼 살 만도 한데 그러지 못하는 부자들도 많다. 현금은 아내가 갖고 있어서 쓸 권한이 없다는 사람도 있다.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막상 돈 쓰는 데는 인색하다. 안 써 봐서 그렇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 시니어들은 돈을 모을 줄만 알았지, 쓰는 교육에 대해서는 받은 적이 없다. 선진국처럼 기부문화가 발달한 것도 아니다. 자신이 속한 커뮤니티에서 하는 행사에 일부 기부하는 것도 서툴다. 모은 돈을 기부하는 것은 아깝고 미리 자녀들 주자니 대우를 못 받을 것 같다. 그러니 뭉칫돈을 가지고 있다가 쓰지도 못하고 죽는 것이다.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다.
고독사 문제도 나름대로 사회 안전망이 잘 되어있다는 일본이 그 정도인데 우리나라는 더 열악할 것이다. 전기나 가스, 수도 사용량으로 점검한다고 하는데 그것도 완전하지 않다. 필자가 한 때 장애인 아파트에 살 때, 관리실에서 겨울철인데 전기요금이 너무 많이 나온다며 점검을 받으라고 한 적이 있다. 그래서 우편함에 꽂혀 있는 다른 집 고지서를 보니 거의 제로에 가까운 집들이 많았다. 엄동설한에 난방, 온수를 전혀 쓰지 않는 집도 있다고 했다. 그러니 그것도 안전망 구실을 못한다.
필자도 해외여행이나 부득이한 일로 스마트 폰 연락이 안 되면 혹시나 무슨 사고 가 있지 않나 걱정하게 된단다. 그래서 해외여행 등의 사유가 생길 때는 미리 밴드나 카톡으로 연락을 해둔다.
필자는 월간지도 여러 개 보고 있고 일간 신문도 두 가지나 보고 있어 집 앞에 잡지, 신문이 쌓이면 이상하게 볼 것이다. 그래서 해외여행 갈 때는 일정 기간 동안 신문을 넣지 말고 돌아오는 날 몰아서 넣어달라는 휴독 신청을 해둔다.
며느리가 전화를 걸어왔다. 아파트 분양에 다자녀 특별 분양신청을 했더니 당첨이 되었단다. 아파트 경쟁률이 몇 백대 일이 되어 도저히 붙을 가망이 없었는데 자식이 셋인 덕분에 정부의 다자녀 특별 분양 혜택을 톡톡히 봤다고 한다. 셋째 막내가 복덩어리라고 이웃에서 모두가 한 마다씩 덕담을 해준다고 며느리 목소리에 잔뜩 기쁨의 웃음이 배어있다.
또 하나 다자녀의 혜택을 본 것이 있다. 들어가기가 하늘의 별따기라는 시립유아원에 아이들이 쉽게 들어간 것이다. 시립유아원을 선호하는 아이들은 많은데 원생 수는 한정되어 있어 그림의 떡으로 바라보기만 하는 사람이 많은 것이 현실이다. 입학 희망자가 넘치다보니 다양한 방법으로 점수 누진제를 하여 최고점을 받은 사람이 입학을 한다. 공평하게 입학기회를 준다고 제도화 하였지만 워낙 경쟁이 치열하다보니 차례가 돌아오기가 하 세월이고 하염없이 기다리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 셋째가 입학 적령이 되면서 다자녀 점수로 단번에 앞사람 여러 명을 제치고 입학하게 되었다.
세상 참 많이 변했다. 지금은 다자녀에게 혜택이 있지만 우리가 젊었던 시절에는 반대로 산아제한이 있었다. 아이를 못 낳게 했다. 그 당시는 정관수술한 사람이 오히려 가점을 받아 아파트 당첨이 유리했다. 아파트를 받으려고 70대 노인이 정관수술을 했다는 소리를 듣고 웃었는데 이제는 정반대가 되었다.
인구가 자꾸 줄어드니까 출산을 장려하기위해 정부나 지자체에서 여러 가지 혜택을 주면서 출산을 장려한다. 다자녀에 대한 어떤 혜택이 있을까 인터넷을 통해 찾아보니 생각보다 많다. 지자체별로 혜택 내용도 다르고 명칭도 다르고 금액도 다르지만 대략이나마 알고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 알아본 내용을 옮겨본다.
1, 다자녀우대카드를 발급받아 수목원이나 박물관 무료입장 가능
2, 전기요금 상하수도 요금 감면
3, 년말정산 시 자녀 추가공제
4, 자동차 취득세 면제
5, 대학등록금 감면
6, 국공립어린이집, 병설유치원, 국립유치원 우선권 부여
7, 출산비용 지원
8, 통신비 할인
9, 중, 고등학교 수업료지원
10,국민연금 가입기간 추가인정
11,셋째 아이 교복 구입비 지원
12,도시가스 요금 감면
보건소에서도 특별 혜택이 있는 것 같다.
아들의 집 문제가 해결되니 그 밑의 딸아이의 집 문제가 또 걸린다. 딸은 이제 8개월의 아이가 있는 새댁이니 좀 더 전세를 살아도 된다. 하지만 오빠가 집을 마련했다니 ‘오빠 축하해’ 하는 목소리 속에 부러움이 들어있다. 딸도 다자녀를 낳아 이런 저런 혜택을 받고 정부정책에 호응하는 집안이 되었으면 하는데 자식들의 결정에 관여할 생각은 없다.
국가경쟁력의 첫 번째가 인구수라는데 우리나라는 저 출산으로 인구수가 줄어든다고 걱정이 많다. 다자녀에 대한 혜택도 필요하지만 아이들 키우기가 쉽도록 정부에서도 제도적으로 보완해주고 기업에서도 배려를 해주었으면 한다.
한때 막걸리 열풍이 일었던 적이 있다. 유산균이 많아 건강에 좋다는 이유였다. 우리나라 전국은 물론 이웃 일본에 수출 물량 대기도 바빴었다. 여러 기업에서 고급 막걸리를 출시하기 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막걸리 열풍이 많이 식었다.
필자는 주로 막걸리를 마신다. 워낙 막걸리만 고집하기 때문에 회식자리에 참석하면 필자를 위해 막걸리 두 병을 따로 주문해준다. 막걸리는 알코올 도수 6도로 적당히 취하고 숙취도 없는 편이다.
그러나 필자가 선호하는 막걸리는 업소에서 취급하기를 꺼려하는 곳이 많다. 유통기간이 짧아 안 팔리면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필자가 마시는 생막걸리는 유통기간이 법적으로는 14일이고 상온에서는 5일 정도 놔둬도 괜찮다. 그러나 5일이 지나면 맛이 덜하다. 그래서 바꿔달라고 하면 대부분 출고된 지 얼마 안 되는 막걸리로 바꿔준다. 집에서 마실 때도 한 번 마개를 딴 막걸리는 다음 날 벌써 맛이 달라 버리게 된다. 유통기간이 1년인 막걸리도 있다. 업소에 따라 필자가 마시는 막걸리 대신 이 막걸리를 강권한다. 그러나 맛이 덜해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필자가 강하게 원하면 인근 편의점에서 사다 주는 경우도 있다. 그 대신 반드시 다 마셔야 한다는 조건이 붙는다. 그래봐야 편의점 가격이 1300원이고 업소 판매 가격이 3000~4000원이다. 조금 남으면 남기고 오지만 많이 남으면 배낭에 넣어오기도 한다.
지방에 가면 서울에서 파는 막걸리가 있을 리 없다. 그 대신 그 지방 막걸리는 있다. 한번은 대구에 내려갔는데 편의점 주인이 “왜 좋은 술 많은데 굳이 막걸리를 찾느냐?”고 물었다. 술의 역사로 볼 때 막걸리는 서민들이 마시는 술이다 맥주는 막걸리보다 고급술이라 생각한다. 막걸리 파는 술집과 맥주 파는 술집은 격도 다르다. 그러니 맥주를 마시라는 것이다.
막걸리를 마시면 배가 부르다는 편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그렇게 따지면 맥주도 마찬가지다. 소주는 알코올 도수가 높아 작은 잔으로 마시며 기름진 안주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막걸리는 안주 없이 마셔도 괜찮다. 밥반찬도 안주가 될 수 있다. 그 어떤 술도 안주까지 감안하면 배부르기는 마찬가지다. 맥주나 막걸리에는 이뇨 성분이 들어 있어 화장실 몇 번 왔다 갔다 하면 다 배출된다.
막걸리를 마시고 나면 트림이 자꾸 나서 본인이 느끼기에도 고약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트림이 나는 것은 막걸리에 탄산가스를 넣기 때문인데 청량음료나 맥주도 마찬가지다. 필자의 경험상 요즘 막걸리는 트림을 많이 유발하지는 않는 것 같다.
많이 마시면 안 되겠지만, 막걸리는 더운 여름날 소화와 갈증 해소에 도움을 준다. 비타민, 미네랄 등 다른 술에는 없는 영양 성분도 있다. 막걸리 덕분에 소주 같은 독주도 덜 마시게 되고 막걸리는 굳이 차갑지 않아도 되므로 맥주 같은 찬 음료도 피할 수 있다. 김밥이 서양의 패스트푸드를 상당 부분 대체해 막았듯이 서민의 술 막걸리가 소주와 맥주와 와인시장의 상당 부분을 막은 공로도 있다고 본다.
서울은 세계에서 가장 공기가 나쁜 도시로 알려져 있습니다. 미세먼지 때문입니다. 많은 미세먼지와 흡연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폐를 혹사시키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폐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고 방치하다가 큰 병에 걸려 후회를 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폐는 공기 중의 산소를 혈액에 공급해주고, 혈액 속의 이산화탄소를 몸 밖으로 내보내는 기능을 합니다. 이를 가스 교환이라고 합니다.
폐는 근육이 없기 때문에 횡격막 운동으로 호흡을 합니다. 횡격막이 수축하면 허파 속의 공기가 몸 밖으로 빠져나오고, 횡격막이 이완되면 바깥 공기가 몸 안으로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폐(허파)에는 폐포(허파꽈리)가 있고 가스 교환은 이곳에서 이루어집니다. 건강한 성인은 보통 1분에 15~18회의 호흡을 하며, 한 번에 흡입되는 공기의 양은 약 500ml 정도입니다. 건강한 성인 남성의 경우 최대 폐활량은 약 4800ml에 이릅니다.
폐를 건강하게 유지하려면 폐활량이 좋아야 합니다. 계단을 조금만 올라가도 숨이 차 도중에서 쉬었다 가는 사람은 폐활량이 적기 때문입니다. 또 폐활량이 적은 것은 폐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폐에 문제가 있으면 장수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한 번 망가진 폐는 직접적으로 자극을 주어 원상복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따라서 장수를 원하는 시니어는 폐활량을 적절히 늘리고 유지해 폐를 보호해야 합니다.
일단 줄어든 폐활량을 늘리는 법은 간단해 보이지만 쉽지는 않습니다. 특히 시니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시니어의 폐활량 늘리는 방법입니다. 처음부터 무리하지 않도록 조금씩 연습량을 늘리고 그 강도를 높여나가는 것이 좋습니다.
첫째, 유산소운동인 걷기입니다.
가까운 거리는 되도록 걷고 평소에 계단을 많이 이용하면 폐활량을 늘릴 수 있습니다. 사실 걷는 것도 좋지만 더 좋은 효과를 보기 위해서는 숨이 찰 정도로 달려야 합니다. 5분 정도 전력질주한 후, 5분 정도 빠른 걸음으로 걷기를 매일 40~50분만 해도 폐활량이 크게 늘어납니다.
둘째, 복식호흡입니다.
코로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천천히 입으로 내쉬면 됩니다. 그러나 평소에 복식호흡을 생활화하지 않은 사람들은 자꾸 잊어버리기 때문에 쉽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복식호흡 대신 풍선불기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한 번에 풍선을 열 개씩 불면 충분히 운동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색소폰을 부는 시니어들의 폐활량이 큰 것도 같은 이치일 것입니다.
셋째, 금연입니다.
폐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담배는 건강에 백해무익합니다. 폐를 생각한다면 무조건 금연해야 합니다. 아무리 걷고 뛰고 복식호흡을 한다 해도 금연을 하지 않으면 도로아미타불입니다.
넷째, 폐에 좋은 음식들을 챙겨 먹는 것입니다.
도라지, 토마토, 더덕, 복숭아 등이 폐에 좋은 음식입니다. 꾸준히 챙겨먹으면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니어는 먹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위에서 말한 방법으로 폐활량 늘리는 연습을 생활화해야 합니다. 누죽걸산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누우면 죽고 걸으면 산다”는 말입니다. 뜻을 알고 나면 좀 싱겁긴 해도 시니어에게 딱 맞는 격언 아닐까요. 많이 걷고 행복하게 삽시다.
한때 홍콩 감독 허안화(1947년~)에 관한 국내 평가는 “여러 장르를 아우르며 실망과 환희를 동시에 안겨주는, 높낮이가 심한 연출자”였다. 그러나 필자는 (1997)과 같은 범작에서도 실망한 적이 없다. 서극, 담가명 등과 함께 1980년대 홍콩 뉴웨이브를 이끌었던 허안화는 진중한 사회파 드라마에서부터 액션, 시대극, 멜로를 아우르며 홍콩과 홍콩인이 처한 현실을 이야기하는 저력을 발휘해왔기 때문이다.
특히 모녀의 20년 세월을 그린 (1990), 치매 노인을 둔 가정 이야기를 맏며느리 중심으로 그린 (1995), 매염방의 연기로 영원히 기억될 (2002)만으로도 그가 영화계에 남긴 선물과 성취는 이미 넘친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여류라는 수식어를 자랑스럽게 쓸 수 있는 몇 안 되는 감독 중 한 명인 허안화가 마지막 연출작으로 생각했던 (2011)는 평단과 대중의 찬사를 얻었다. 이로 인해 허안화의 은퇴 심경을 번복하게 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제13회 전주국제영화제 폐막작으로 처음 소개된 는 제68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 제48회 금마장영화제 감독상 등을 받았고 2012년 제84회 아카데미영화제 외국어영화상 부문 홍콩 영화로 선정되었다.
는 단 한 명의 악인도 등장하지 않는, 그래서 절정도 극적 엔딩도 없는 담백한 영화다. 그렇다고 지지부진하고 무의미한 일상 묘사에만 머무는 심심하고 지루한, 소위 예술 영화인 체하는 작품도 아니다. , , 과 마찬가지로 보통 사람의 삶과 인간관계를 깊이 사색할 수 있는, 그러나 감동을 강요하지 않는 수채화 같은 영화다. 겸손하고 진지한 현실 응시와 표현력이 영화의 미덕임을 확인케 하는 작품인 것이다. 이런 영화를 계속 내놓는 허안화의 뚝심과 이 같은 소재에 제작비를 대는 홍콩 영화계의 인프라가 존경스럽고 부럽다.
는 홍콩의 최고 스타 류더화(유덕화)가 제작을 자처하고 시나리오에 감동받아 주연까지 요청한 작품이다. 홍콩 누아르의 청춘 아이콘에서 진지한 소품에 돈을 대는 제작자로 성숙한 류더화를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주윤발, 양조위, 여명, 양가휘 등 홍콩 남성 스타들은 어쩐 일인지 도무지 나이를 먹지 않는데, 특히 1961년생인 류더화는 대학생 역할을 맡아도 빠져들 만큼 늙은 티가 나지 않는다. 에어컨 수리기사로 오인받을 정도로 허름한 잠바와 배낭 차림으로 나오는 에서도, 노총각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2012년 부산국제영화제 폐막작으로 상영된 (2012)에서는 조연으로 잠깐 출연하는 등 역할의 크고 작음을 문제 삼지 않는 류더화 같은 스타 제작자가 있어 홍콩 영화계의 미래가 밝아 보인다.
는 시리즈와 등을 제작한 홍콩의 유명 영화 프로듀서 로저 리의 개인사를 바탕으로 했으며, 로저 리가 직접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했다. 혈연으로 맺어진 식구만을 가족으로 여기는 편협한 사고가 고령화 사회의 걸림돌이 될 것임을 새삼 깨닫게 해준다.
어머니를 비롯한 온 가족이 캐나다로 이민을 간 후 혼자 홍콩에 남은 영화 프로듀서 로저 리 (류더화 분)는 잦은 중국 출장 등으로 바쁘게 산다. 그런 그를 돌보는 것은 60여 년 전부터 그의 집에서 일해온 늙은 가정부 타오지에(예더셴 분)뿐. 어느 날 뇌졸중으로 쓰러진 타오지에는 로저의 짐이 될 수 없다며 요양원을 고집한다. 자기 집안 식구를 4대나 모셨으며 자신을 키워주기도 했던 타오지에를 보러 이따금 요양원을 찾는 로저와 양아들 노릇을 해주는 그에게 감사함과 미안함을 느끼는 타오지에와의 이심전심. 그리고 두 사람 눈에 비친 요양원 노인들의 일상.
출장에서 돌아와도 이렇다 할 말 한마디 건네지 않고 타오지에가 자신의 식성에 맞춰 요리해주는 각종 해산물 요리와 우설 찜을 먹기만 하는 로저. 그는 먼지 하나 없이 집 안을 쓸고 닦는 타오지에를 늘 제자리에 있는 가스레인지 혹은 청소기 같은 존재로 여기는 게 아닌가 싶다. 그러나 이는 그의 무심한 성격에서 기인했던 것일 뿐, 타오지에가 요양병원에 입원한 후 로저는 따뜻한 본심을 드러내길 주저하지 않는다.
어린 시절부터 관절을 못 쓰게 된 나이에 이르기까지, 결혼도 하지 않고 로저의 가족을 돌봐온 타오지에에겐 로저 가족과의 관계가 전부다. 노인병원에서 잠시 외출 나온 타오지에는 그동안 보관해온 소중한 물건들을 로저에게 보여준다. 그녀가 평생 간직해온 것은 로저와 함께 찍은 옛날 흑백 사진, 로저가 아기 때 입었던 옷과 장난감, 그리고 자신의 첫 월급봉투 등이었다.
자신과 함께 시부모를 봉양해준 타오지에를 병문안하러 온 로저의 어머니는 로저와 단둘이 지내게 되었을 때 이런저런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무조건 베풀기만 했던 타오지에의 행동과는 대조되는 행위였다. 즉 로저에게 타오지에라는 존재는 어머니보다 더 가까운, 자신을 속속들이 알고 이해해주는 또 다른 어머니였던 것이다. 이는 로저가 누이에게 하는 말에서도 확인된다. “내가 아플 때 타오지에가 나를 돌봐줘 살아났는데, 이제 내가 그녀를 돌볼 수 있어서 다행이야.” 누이는 오빠에게 “어린 시절 유독 오빠만 챙겼던 타오지에가 서운했어. 그러나 나도 타오지에가 키워줬으니 장례식 비용만큼은 내가 부담하게 해줘”라고 말한다.
이처럼 로저의 가족은 타오지에의 헌신에 깊이 감사해하며 그녀의 노후를 책임지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특히 로저는 타오지에가 퇴원해서 살 집은 물론 요양병원 비용까지 알아서 준비한다. 형제의 결혼식 피로연에 타오지에를 데려가 함께 가족사진을 찍는다거나, 자신이 제작한 영화 발표회장에 타오지에를 초청해 그녀에게 기쁨과 자랑스러움을 느끼게 해주기도 한다.
모자지간이나 다름없는 로저와 타오지에의 관계 못지않게 이 영화에서 비중을 차지하는 장면은 두 사람 눈에 비친 요양병원 노인들과 직원들의 일상이다. 정초 연휴 때도 병원에 남아 있는 노처녀 최 간호사(진해로 분). 아들에게 전 재산을 준 뒤 버림받았음에도 아들만 기다리는 어머니와 그런 어머니에게 화를 내면서도 모시러 오는 딸. 깊은 병에 걸린 딸과 그 딸을 보러 오는 어머니는 병원비 걱정 끝에 말없이 사라진다. 타오지에에게 돈을 빌리곤 하는 노인의 에피소드도 가슴 뭉클하다. 빌린 돈으로 젊은 여자를 사러 간다는 사실을 알게 된 로저가 돈 빌려주지 말라고 하자 타오지에는 이렇게 말한다. “할 수 있을 때 하는 게 좋지.”
에피소드의 주인공들은 삽화처럼 간간이 등장할 뿐이지만, 관객들이 그들의 전 인생을 짐작할 수 있을 만큼 풍부한 이야깃거리를 남긴다. 류더화와 예더센을 제외한 요양원 노인들은 비전문 연기자들이며, 요양병원 묘사는 거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 같다. 여기에 유머와 페이소스가 곁들여진 소소하면서도 세심한 묘사가 더해진다.
커튼으로 가림막을 한 조그만 방들이 다닥다닥한 한 서민요양병원 스케치는 에서 여주인공 손 여사의 이모와 이모부의 요양원 생활을 떠올리게 한다. 사실 는 의 자매편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소재와 묘사의 연관이 많아 보이며, 절제된 카메라워크와 단정한 화면구성 또한 그러하다.
1961년생인 류더화와 1947년생인 예더센은 (1985)에서 모자 지간으로 호흡을 맞춘 이래 여러 차례 모자지간으로 출연한 바 있어, 에서의 호흡이 자연스러웠고 각종 연기상으로 그 보답을 받았다. 1992년 공리가 로 여우주연상을 탄 이래, 예더한은 19년 만에 중국어권 여배우로 두 번째 베니스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유명 감독과 배우의 우정 출연도 이야깃거리에서 빼놓을 수 없다. 로저가 중국 출장에서 영화 일정을 의논하고 함께 술을 마시는 영화인들로는 , 시리즈의 서극 감독, , 등의 제작자 시남생, , 등으로 유명한 감독이자 배우인 홍금보인데 이들이 자신의 이름으로 출연했다.
1963년 필자가 서둔야학에 정식으로 입학하기 전 호기심으로 동네 언니들을 따라 며칠째 나가던 어느 날이었다. 화기애애함으로 수업을 하던 분위기가 그날따라 이상했다. 통곡을 하며 우는 선배 언니들도 있었다. 내막을 알고 보니 야학 선배들의 선생님인 김진삼 선생님이 돌아가셨단다. 농사단 자취방에서 잠자다가 문틈으로 새어 든 연탄가스 때문에 돌아가신 것이다. 그때는 야학생들이 농촌진흥청 강당을 빌려 공부를 했는데, 진흥청에 근무하는 공무원들이 살고 있는 관사 한쪽 귀퉁이에 있던 건물이었다.
지난여름 아버지가 가시던 언덕
갈바람에 물들은 그리운 언덕
오늘도 그 언덕은 변함없건만
가신 아버지는 왜 안 오시나.
마룻바닥 안쪽 깊숙이 각목을 비스듬히 세워 고정시켜놓은 칠판에는 한동안 위의 노래가 적혀 있었다. 이 노래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신 생전의 김 선생님이 좋아하시던 곡이었는데 누군가 선생님을 추모하려고 적어놓았던 것 같다. 사진으로 뵈었을 때 무척 선한 인상의 김 선생님께 필자가 직접 가르침을 받은 적은 없지만 제자들에 대한 그분의 사랑이 각별하셨다는 것을 깊이 느낄 수 있었다.
그분의 죽음을 안 언니들이 어찌나 슬프게 울던지 야학교가 떠나갈 듯했다. 울음이 그친 후 언니들의 눈은 하나같이 퉁퉁 부어 있었다. 그 비통함은 가히 피붙이를 잃은 것 이상이어서 김 선생님을 잘 모르는 필자도 덩달아 눈물이 났다. 그 뒤 선생님들은 수업을 진행시키느라 애를 먹었는데 언니들의 슬픔이 며칠 동안이나 이어졌기 때문이다.
김진삼 스승 영전에
한 번 태어나 흙 속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운명에 쫓겨 님은 가셨나요.
책 속에 얼굴 묻고 목놓아 울부짖는
당신의 제자들은 생각지도 않으시고
꽃잎들을 저버리셨나요.
자연의 울부짖음도 제자들의 눈물도
가버린 님께선 들을 수도 없을진대
그 슬픔 또한 덜어줄 사람도 없습니다.
님이 묻힌 무덤가를 무심히
지나쳐버릴 이도 많을 테지만
주위에 소나무들만은 모든 것을 알 수 있다는 듯
우러러보고 있어요.
한낮이 지나고 밤이 돌아오면
공민의 얼들 속엔 님의 가르침이
가득 아로새겨 있답니다.
님이여
영원히 고이 잠드소서
그리고
언제까지나
작은 얼들과 함께 하시옵소서.
1964년 10월 10일
위의 시는 선배 형정순 언니가 김진삼 선생님을 추모하여 지은 것인데 그 당시 동아일보에 투고해 실렸다. 김 선생님이 늘 강조하시던 말은 ‘참’을 사랑하라는 것이었고 실제 생활에서도 참을 실천하며 사셨단다.
김 선생님의 강하면서도 선한 인품이 단적으로 드러난 일화가 있다. 그분이 살고 있었던 곳은 농사단이었는데 농사단은 농대의 수많은 서클 중 하나로 탑동에 회원들의 합숙소가 있었다. 어느 날 세 명의 회원이 외출했다 돌아와 보니 남아 있는 밥이라곤 오직 한 그릇뿐이더란다. 그때 “나는 괜찮아요” 하며 선뜻 다른 사람들에게 양보하신 분이 김 선생님이었는데 상당히 늦은 시간이라 보통 허기진 것이 아닐텐 데도 끝끝내 당신 뜻을 굽히지 않으셨단다.
당시 같이 살았던 황건식 선생님 말에 의하면, 참으로 보기 드물게 선하신 분으로서 늘 남을 먼저 생각하셨고 주위에 어려움에 처해 있는 사람이 있으면 발 벗고 나서서 도와주곤 했단다. 이분의 생활신조인 ‘참을 사랑하라’는 그 후 후배들에게도 영향을 끼쳐 야학생들은 선생님들께 늘 이 말을 들으며 살았다.
야학을 졸업하고 몇 년의 세월이 흐른 후, 장사를 하는 야학의 한 남자 후배가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돈을 못 벌고 있다면서 푸념을 했다. 그러면서 그 이유가 아무래도 ‘참’을 강조한 서둔야학에서 공부를 해서 그런 거 아닐까 하며 농담하듯 말했다. 장사를 하려면 적당히 거짓말을 해야 하는데 자신은 그러지 못하며 살고 있다는 밀이었다. 그만큼 ‘참을 사랑하라’는 말은 서둔야학 출신들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들이 어디에서 살든 무엇을 하든 ‘참을 사랑하라’는 생활철학은 큰 힘이 되어줄 것이다.
미국은 세계에서 실버타운이 가장 발달한 나라다. 자녀가 성인이 되면 독립하고 결혼을 하더라도 부모를 봉양하지 않는 독립적인 가족문화 때문일 것이다. 은퇴 후 자식에게 의존하기보다는 내 스스로 삶의 질을 높여야 한다는 시니어들의 의식도 한몫했다. 미국에서는 1960년대에 이미 실버타운이 건설되기 시작했다. 현재 전국적으로 이름난 대규모 은퇴 단지만 3000여 곳, 이 중 캘리포니아 오렌지카운티의 작은 해안도시에 있는 라구나우즈 빌리지는 한인들에게는 꿈의 은퇴촌으로 불린다. 365일 따뜻하고 화창한 날씨, 입맛대로 골라 즐길 수 있는 클럽활동,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동년 친구들, 무엇보다 긍정의 에너지가 넘치는 곳이다. 서로를 ‘아름다운 동행자’라 부르는 이곳, 라구나우즈 빌리지의 한인들을 만나봤다.
미스터&미세스 손
“입구를 잘못 들어왔네요. 거기서 기다려요. 미스터 손한테 나가보라고 할게요~”
은퇴촌이라고 만만히 봤다간 낭패다. 라구나우즈 빌리지의 총면적은 2100ac(약 250만 평). 라구나우즈 시(市)의 90%를 차지한다. 여의도 전체보다도 크다.
알려준 9번 출입구를 못 찾아 8번 출입구로 들어간 것이 화근이었다. ‘9’에서 ‘8’이 멀어봤자 얼마나 멀겠냐 했지만 결국 길을 잃었고 기어이 80세의 주인장을 마중 나오게 만들고 말았다. 나무 그늘 밑에 자동차를 대놓고 5분 정도 기다리자 언덕 위에서 골프카트 한 대가 바람을 가르며 달려왔다. 흐트러진 흰머리를 단정히 하며 환한 웃음으로 맞아주는 노신사. 미스터 손이었다. GPS를 손에 들고도 길을 잃은 젊은이(?)에게 위로의 말도 잊지 않는다.
“여기가 원래 넓어서 찾기가 좀 힘들어요. 하하하.”
손기용(80), 손종숙(75) 부부. 빌리지에서 이들은 미스터&미세스 손으로 불린다. 두 사람은 캘리포니아와 정반대 쪽에 있는 오하이오에서 40년 넘게 소아과 의사, 병리과 의사로 각각 일하다 은퇴를 했고 6년 전 캘리포니아로 이주, 라구나우즈 빌리지의 주민이 됐다.
“오래 살았던 오하이오가 익숙하긴 했지만 겨울이 추웠어요. 따뜻한 플로리다로 갈까, 아들이 있는 캘리포니아로 갈까 고민하던 중에 집이 덜컥 팔려버린 거예요. 어디로든 떠나야 했죠. 일단 아들 집과 가까운 이곳 라구나우즈 빌리지에서 월세로 살면서 천천히 결정해보자 했는데, 두 달 만에 집을 샀습니다. 여기가 바로 우리가 찾던 파라다이스였어요!”
부부가 살고 있는 집은 2300ft2(약 65평)의 크기로 거실과 주방, 그리고 두 개의 침실과 화장실이 있는 예쁜 단층집이다. 2011년 당시 80만 달러에 구입했다. 라구나우즈 빌리지에는 손씨 부부가 살고 있는 단독주택 외에도 콘도와 아파트가 있는데 한인들이 선호하는 어바인이나 플러턴에 비해 주택 가격은 다소 낮은 편이라고.
캘리포니아의 화창한 날씨는 부부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여름엔 더워도 습도가 낮아 상쾌했고 겨울엔 눈이 내리지 않아 운전하기가 좋았다. 10분이면 캘리포니아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라구나 해변이 있어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갈 수가 있었다. 인근 플러턴과 어바인에는 한국 식당과 상점이 넘쳐나니 한국 음식이 그리울 틈도 없었다.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던 것은 여유 넘치는 빌리지의 라이프스타일이었다.
“한마디로 하고 싶은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환경이었어요. 골프, 수영은 물론이고 젊은 시절부터 취미였던 사교댄스도 더 본격적으로 할 수 있는 분위기였죠. 빌리지에는 200개가 넘는 클럽(동호회)이 있어요. 원하면 어떤 클럽이든 가입할 수 있고 직접 만들 수도 있어요. 여기서는 심심할 일이 없어요. 어떤 날은 하루 종일 서로 얼굴도 못 보는걸요. 젊은 시절보다 더 바쁘다고 농담처럼 이야기합니다.”
남편은 독서와 골프를 즐기고 아내는 하이킹과 합창을 좋아한다. 서로의 취향을 존중하는 부부는 각자 활동하는 클럽이 다르지만 이것만큼은 꼭 같이하자고 정해놓은 세 가지가 있다. 손을 잡고 거니는 저녁 산책, 같은 침대 쓰기, 그리고 벌써 20년을 함께해온 볼륨댄스가 그것이다.
빌리지 안에서 손씨 부부는 춤꾼으로 유명하다. 경력 20년의 수준급 솜씨다. 특히 아내 손종숙씨는 전국 경연에도 참가할 만큼 프로급 댄서다. 어느 해 연말파티에서 백인들도 울고 갈 정도로 멋들어지게 춤을 추는 부부의 모습을 보고 이웃에 사는 한인 부부들이 배움을 자청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미세스 손의 댄스교실은 현재 40명이 넘는 학생들이 늦은 춤바람으로 열공 중이다.
부부는 라구나우즈에 들어오기를 두고두고 잘한 일이라 여긴다. 아내에 비해 조금은 소극적인 성격인 손기용씨는 이곳에서 동년 친구들과 격 없이 어울리며 사는 재미를 알게 됐다고 한다. 평생 쓰고 싶어도 못 썼던 모국어를 원 없이 할 수 있는 것도 신나는 일이다.
“저녁은 주로 아내가, 아침은 내가 준비합니다. 내가 내린 커피를 마시며 행복해하는 아내의 모습을 매일 아침 볼 수 있다는 건 감사한 일이지요. 우리는 현재 생활에 아주 만족해요. 둘이 있어서 좋고 친구가 많아서 즐겁습니다. 이곳에 오지 않았다면 몰랐을 즐거움이지요. 아내와 나는 이곳이 마지막 종착역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건강해야지요. 스트레스가 건강에 제일 안 좋다는데 여긴 그럴 일이 없어요. 이곳에 살고 있는 최고령 한인은 90이 넘은 분이에요. 10년은 문제없겠지요? 하하하.”
라우나우즈의 이장님, 한인회 김일홍 회장
라구나우즈 빌리지에 한인회가 만들어진 것은 지난 1998년. 당시 회원은 30명 정도였다. 타향살이 이민자들은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형님 동생이 되었고 주말이면 다 같이 한집에 모여 바비큐를 먹고 친목을 다졌다. 이후 7명의 한인 회장이 배출되었고 그동안 빌리지의 한인은 700여 가구 1200여 명으로 늘었다. 옛날처럼 오손도손한 분위기는 없어졌지만 한인의 위상은 커졌다.
현재 8대 한인 회장을 맡고 있는 김일홍(79)씨는 초기 한인회가 한인들 간의 친목을 다지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지금은 커뮤니티 내 타 인종과의 화합과 클럽활동을 통한 자기계발에 중점을 두고 있다고 말한다.
“지난 5년간 이곳에 한인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었어요. 이대로 가면 빌리지의 한인 비율이 전체의 10%를 차지하게 될 겁니다. 그만큼 커뮤니티에 좋은 영향력을 미치면 좋겠습니다. 매년 빌리지 내에 한국전 참전 용사들을 초청해 기념식과 만찬을 열고 있는데 참으로 뿌듯합니다. 4년 전 만든 한국어 클래스도 아주 인기가 좋아요. 얼마 전에는 아리랑 코리안 문화축제를 열었는데 주민들의 호응이 대단했어요.”
라구나우즈 빌리지에는 동호회 활동을 위한 대규모 연회장인 클럽하우스가 10여 개 있다. 소규모 모임을 위한 크고 작은 미팅룸은 예약만 하면 10~20달러(1만~2만원) 선에서 얼마든지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 한인들이 주축이 된 클럽도 20여 개나 된다. 김일홍 회장은 클럽활동을 단순한 여가생활에서 더 발전시키려 애쓰고 있다.
“목표를 정하고 도전해보자는 거죠. 그 예로 글사랑모임 클럽에서는 2014년부터 라는 수필집을 발간하고 있어요. 회원들의 필력뿐 아니라 편집이나 사진 실력이 매년 발전하는 것을 보며 성취감과 자부심을 느낍니다.”
김일홍 회장은 라구나우즈에서 늘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한다. 한인회 관련 일은 물론이고 동호회 활동, 관리사무소나 빌리지 내 시설 사용 등 민원 업무도 그의 몫이기 때문이다. 앞서 만난 손기용씨는 김 회장을 알뜰살뜰한 마을 이장님 같다고 했다. 빌리지 안에서 운전하며 가다가도 아는 얼굴을 만나면 꼭 차를 세우고 이름을 부르며 안부를 묻는다. 짬을 내어 아프거나 홀로된 노인들이 잘 지내고 있는지도 살펴야 맘이 편하다. 때로는 라구나우즈 빌리지 가이드가 되어 투어 서비스도 한다.
미국 전역에서 톱 10에 속하는 명성에, 한인이 많이 살다 보니 은퇴자라면 한 번쯤 꿈꾸어보는 라구나우즈 빌리지. 입주 문의는 늘 이어진다. 라구나우즈 빌리지에 입주하기 위해서는 주택 종류에 따라 3만6000달러(약 3600만원)에서 4만2000달러(약 4200만원)가량의 연수입이 있어야 한다. 일정 금액의 자산도 증명되어야 한다. 월 관리비는 650달러로 골프장, 수영장, 헬스클럽, 클럽하우스 등 빌리지의 모든 시설을 이용할 수 있다. 물론 시설관리, 조경, 가스, 수도, 케이블TV 등이 모두 포함된 금액이다.
김 회장은 빌리지 입주는 어느 정도 경제력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하지만 미리미리 은퇴 계획을 세운다면 어려운 일은 아니라고 조언한다.
“재력이 은퇴생활의 필수조건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죠. 100세 시대에 은퇴하고 20년, 30년을 어떻게 살 것인가를 미리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한국인들은 자식에게 모든 것을 바치는 경향이 있죠. 지나친 헌신으로 은퇴 후 자신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경우를 주위에서 많이 봅니다. 안타까운 현실이죠. 솔직히 우리 나이가 되면 자식보다 배우자, 친구가 더 소중합니다.”
김 회장은 건강과 재력 외에 성공적인 은퇴생활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은퇴 후 어떤 삶을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라고 말했다.
“은퇴 후 시간을 어떻게 쓸지 몰라 난감해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아요. 미리 준비해야 할 것은 돈만이 아닙니다. 평소 좋아하는 운동이나 취미를 준비해놓는 것도 중요해요. 라구나우즈가 최고의 은퇴촌으로 불리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열정이 있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이 열정적으로 살 수 있는 환경을 완벽하게 만들어놓고 있기 때문이죠. 이곳에서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사람이 별로 없어요. 다들 바빠요(웃음).”
라구나우즈 빌리지의 많은 이야기는 ‘현재진행형’이다. 이웃들의 소소한 일상을 카메라에 담아내는 포토그래퍼 박성원 작가, 성악가의 꿈을 라구나우즈에서 이루고 합창단을 이끌고 있는 소피아 최 회장, 춤을 사랑하는 동호인들을 모아 7년째 고전무용 춤방을 열고 있는 김영옥씨, ‘김중배의 다이아 반지가 그리 좋더냐’ 훈남 이수일로 변신한 연극반 채한경씨, 고등학교 미술선생님에서 이제는 라구나우즈 미술선생님이 된 이상락씨, 그리고 여전히 서로를 뜨겁게 사랑하고 배려하며 최선을 다해 살고 있는 미스터&미세스 손까지….
라구나우즈 빌리지가 꿈의 은퇴촌으로 불리는 이유는 기막힌 골프코스와 수영장, 럭셔리한 클럽하우스 때문만은 아니다. 이곳에는 여전히 꿈을 이루며 살아가는 열정적인 사람들이 살고 있다. 라구나우즈 빌리지가 아름다운 이유다.
라구나우즈 빌리지는?
캘리포니아 오렌지카운티 남서쪽에 위치해 있는 ‘라구나우즈 빌리지’는 라구나우즈 시 안에 있는 은퇴 마을이다. 현재 1만2736세대, 3만6000여 명이 거주하고 있다.
빌리지 안에는 5개의 수영장과 36홀의 골프코스, 테니스코트, 도서관, 극장, 우체국 등 각종 편의시설이 있다. 라구나우즈에 입주하려면 조합(HOA – Home Owner’s Association)에 가입해야 하는데 크게 협동조합(Co-Op)과 상호조합(Mutual)으로 나눠져 있다. 협동조합의 경우는 조합이 소유주로서 입주자는 집이 아닌 조합회원권(Stock Certificate)을 구입하면 된다. 상호조합의 경우는 콘도 내부 수리와 관리를 소유주가 책임지고 해야 한다.
상호조합과 협동조합의 가장 큰 차이는 구입한 집을 임대해줄 때다. 협동조합의 경우는 1년 동안 6개월 이상 임대를 줄 수 없다. 상호조합은 임대에 대한 제약이 없다. 따라서 투자를 위한 임대 목적으로 은퇴촌 주택을 구입하는 경우는 상호조합 콘도를 구입하는 것이 유리하다.
라구나우즈에 입주하려면 배우자 중 한 사람이 반드시 55세 이상이어야 하며, 집값은 일시불로 지불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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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구나우즈 빌리지 웹 사이트 lagunawoodsvillage.com
한인회 웹사이트 lagunawoodskac.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