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시에 살고 싶어요. 거긴 천국 같아요. 아시시나 토디 근처에 새집을 장만할까 합니다.” 영국의 글램 록 가수의 대명사인 데이비드 보위가 한 말이다. 그는 1990년대 중반, 한 이탈리아 신문을 통해 “자신이 지상에서 본 천국은 아시시”라고 말했다. 아무런 선입견 없이 이 도시를 찾았을 때의 첫 느낌은 분명코 데이비드 보위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탈리아의 ‘푸른 심장’ 아시시
아시시(Assisi) 여행은 혼자가 아니다. 시에나(Sienna) 숙소에서 만난 남미계 미국인 신디아(38세)와 동행한다. 그녀는 3개월간 혼자 여행 중이다. 시에나에서 아시시까지는 매우 복잡한 여정을 거쳐야 한다. 버스, 기차를 여러 번 바꿔 타면서 조용하고 한적한 시골 느낌을 주는 아시시 간이역(1866년 개통)에 내린다. 메인 타운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타원형의 고풍스러운 타운. 스바지오 산 언덕 위에 오롯이 모여 있는 아시시를 보고 서로 감탄을 금치 못한다. “리, 너무 아름답다. 시에나보다 나은걸.” 표정이 풍부한 신디아는 아시시의 첫 느낌을 한껏 표출하고 있다. 가파른 언덕길로 버스가 올라서자 많은 사람들이 우르르 내린다. 정류장에서 성문을 따라 걸어 들어간다. 숙소가 서로 다른 신디아와는 클라라 성당 앞에서 다시 만나기로 하고 헤어진다.
아시시는 이탈리아 중부, 움브리아(Umbria) 주 북부의 아펜니노(Appennino, 켈트어로 ‘산봉우리’라는 뜻) 산맥의 남서쪽 기슭 위에 있다. BC 1000년경, 움브리아인들이 처음 정착했고 이후 에트루리아인들의 손에 넘어갔다. BC 295년, 로마인들이 아시시움(Asisium)을 건설하면서 현재의 도시명 ‘아시시’가 됐다. 2000년에 유네스코에 등재된 이 도시는 이탈리아의 ‘푸른 심장’이라는 애칭을 갖고 있다. 오래된 가옥, 울퉁불퉁한 골목길마다 긴 세월의 흔적이 녹아들었다.
성 프란치스코 출생지, 코무네 광장
클라라 성당 앞에서 다시 만난 신디아와 함께 도심을 걷는다. 클라라 성당을 비껴 키에사 누오바 교회가 있는 골목으로 들어간다. 1615년, 후기 르네상스 양식의 이 교회는 성 프란치스코의 생가 위에 세워졌다. 교회가 생기기 두 해 전(1613년), 프란치스코의 생가는 부서질 위기에 처했다. 이걸 본 스페인인 ‘비카’는 자국의 펠리페 3세(1578~1621) 왕에게 자금을 지원받아 교회를 지었다.
성당 앞쪽에는 성인의 부모님 동상이 있고 성당 안쪽에는 성인이 갇히게 된 감옥이 있다. 성인은 이곳에 갇혀 신의 부름에 답하고 고행의 길을 가기로 작정했다고 전해온다. 길을 따라 남쪽으로 더 내려오면 아시시에서 가장 오래된 코무네 광장이다. 로마의 흔적들이 남은 곳으로 사자상 분수대가 눈길을 끈다. 미네르바 신전 위에는 산타마리아 성당이 있고 그 옆에 포로 로마노 박물관이 있다. 포로 로마노 박물관에서는 부서진 로마의 유적과 함께 폼페이에서 본 똑같은 스타일의 벽화를 봤다. 1997년에 발견된 고대 로마의 빌라 유적지에서 발굴된 것이리라.
‘빈자의 성인’ 성 프란치스코의 도시
남쪽 끝에는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이 있다. 수도복 입은 수도사들이 삼삼오오 짝을 이뤄 거리를 누빈다. 수도사들은 스스럼없이 다가와 함께 사진을 찍어준다. 유럽 전역에서 ‘아시시’ 하면 ‘성 프란치스코(St Francis, 1182~1226)를 떠올린다. 수많은 순례자들은 ‘가난과 결혼한 수도자’, ‘예수 그리스도와 가장 닮은 그리스도인’으로 불리는 그의 헌신적인 삶을 기린다. 부유한 직물 장사의 아들로 태어난 프란치스코는 군대에 입대했다가 포로로 잡혀 감옥에서 살기도 했다. 두 번째 군 입대 후 ‘환시’를 체험하고 아시시로 돌아와 스스로 ‘빈자의 성자’ 삶을 선택한다. 이때부터 최소한의 먹거리를 직접 구하며 청빈한 초막생활, 영성적 삶을 시작한다. 무수한 일을 해냈고 여러 번의 기적을 보여줬다. 그러다 건강이 급속히 안 좋아져 눈이 반쯤 멀고 심한 병까지 얻어 포르치운콜라(Porziuncola)의 작은 오두막에서 84세로 선종했다.
프란치스코의 유해는 우여곡절 끝에 대성당 지하에 안장되었다. 대성당에서는 프레스코화, 스테인드글라스 등이 눈길을 끌었고, 1230년부터 수사들이 기거해온 대성당 수도원이 특별하다. 프란치스코 대성당 앞 정원 쪽으로 올라오면 ‘패잔병 프란치스코’의 동상이 있다. 페루지아 전쟁터에 나갔던 23세의 청년 프란치스코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아시시로 귀환하던 날을 표현해낸 동상이다. 말 위에서 방향 감각을 잃은 듯 고개를 떨군 모습은 해질 무렵이라서 그런지 더 처량하게 느껴진다.
프란치스코의 여제자 성 클라라
패잔병 프란치스코의 동상 앞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해걸음을 벗 삼아 신디아와 저녁을 먹는다. 무척 배가 고팠다는 것을 표정으로 보여주는 신디아. 그녀가 “수도자의 삶을 어떻게 생각해?”라고 묻길래, 난 일언지하에 “싫어. 평생 싱글로 사는 것은 좋지 않아”라고 말했더니, 한국어로 숫총각은 뭐라 말하느냐고 묻는다. ‘동정남’이라고 말해줬더니 그 말을 그대로 따라하며 흉내를 낸다. “그러면 너넨 뭐라고 말하니?”라고 물었더니 남녀 상관없이 ‘버진(virgin)’이란다. 그녀는 아시시에서 단 하루밖에 머물지 못하고 이른 아침, 로마로 가서 포르투갈로 가야 한다. 그녀를 위해 시간을 더 할애해준다.
길을 거슬러 처음 만났던 산타 키아라 성당(1257~1265년에 건축) 앞에 선다. 멋진 건축물이다. 이 성당엔 성 프란치스코의 여제자 클라라(Clara, 1193~1253)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떠나기 전에 아시시에서 가장 높은 로카 마조레는 꼭 가보고 싶다는 신디아의 뒤를 따른다. 가는 길목에 루피노 대성당이 있다. 이 성당과 종탑 앞 아치형 건물 사이에 클라라 생가가 있다.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클라라는 이 성당에서 세례를 받았고, 이곳에서 성 프란치스코의 설교를 듣고 제자가 됐다.
클라라는 프란치스코와는 달리 밀폐된 공간에서만 기도하며 살았다 그녀가 살았던 산 다미아노 수도원은 처음부터 엄격한 봉쇄의 장소였다. 그녀는 매일 허리를 끈으로 묶는 허름한 수도복을 입었고, 사시사철 맨발로 다녔으며, 삭발한 머리에는 흰 두건과 검은 수건을 쓰고 다녔다. 잠자리는 맨바닥 위의 요였고, 베개는 나무토막이었으며, 공동 침실은 춥고 적막했다. 식사는 대개 하루에 한 끼만 먹었고 주일과 성탄절에만 두 끼를 먹었다. 고기와 포도주는 언제나 금했고, 주로 빵과 채소를 먹었다. 계란이나 우유가 생기면 병자들에게 주었다. 그녀는 가난을 ‘그리스도인의 특전’이라고까지 불렀다. 클라라는 프란치스코가 죽은 지 30년 만(60세)에 죽음을 맞았다. 클라라의 삶을 되새기면서 ‘조선의 테레사’로 불리는 서서평(1880~1934) 미국 출신 여성 선교사가 떠올라 자꾸 눈가에 이슬이 맺힌다.
아시시 ‘뷰포인트’ 로카 마조레 요새
로카 마조레(Rocca Maggiore)는 아시시의 북동쪽, 가장 높은 언덕 위에 있어서 골목과 계단을 따라 지그재그로 올라야 한다. 신디아는 “운동을 해서 살을 빼야 해” 하면서 몇 번이나 숨을 고르면서도, 가로등 불빛에 더욱 아름답게 보이는 발코니에 걸린 꽃 화분을 보며 감탄을 연발한다. 성곽 일부에만 서치 조명이 아름다운 요새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신디아와 아쉬운 작별을 고한다.
다음 날, 일찍 요새에 올라 박물관이 오픈하기를 기다리면서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본다. 아시시 마을과 움브리아 전원풍경은 한 폭의 그림처럼 평화롭고 아름답다. 넓은 평원에 감탄하고 아름다운 아시시의 전경에 넋을 놓는다. 더 작은 요새인 미노레 성채의 남은 흔적도 찾아낸다. 성곽 안에는 유명 인물의 연보와 중세의 물건들, 음악회, 연극이 열렸던 사진들이 걸려 있다.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아시시를 떠나 역에 도착해 짐을 맡기고 산타 마리아 델리 안젤리 성당을 찾아가 포르치운콜라 예배당을 본다. 종교와는 전혀 무관한 한 여행객일 뿐인데도, 이 도시는 발길을 부여잡는다. “아직 넌 볼 것도 할 것도 많아”라는 ‘환청’이 들리는 듯하다.
Travel Data
현지 교통 정보 로마에서 열차와 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테르미니 역에서 하루 네 번(토요일 3회) 직행 열차가 운행된다. 약 2시간이 소요되며 환승을 하면 2시간 40분 정도 걸린다. 또 로마 티부르티나 역 광장에도 버스(7시, 10시 30분)가 있다. 일요일과 공휴일은 1회(8시 15분) 운행된다.
아시시 박물관 카드 로카 마조레 외에 두 군데의 박물관을 더 볼 수 있는 ‘아시시 티켓’이 있다.
맛집 정보
타운에는 수많은 레스토랑이 있고 매일매일 색다른 코스 요리를 선보이는 레스토랑이 많다. 빵 위에 다양한 재료를 얹어 먹는 애피타이저 브루스케타가 깔끔하다. 호텔 추천 레스토랑은 할인이 가능하다. 길거리 음식인 파니니 등도 맛있다.
숙박 정보 아시시에는 호텔, B&B, 게스트하우스가 부지기수로 많다. 개개인의 상황에 맞게 선택하면 된다. 또 가톨릭 신도가 아니더라도 델 질리오 수녀원을 이용할 수 있다.
어탭터 정보 다른 지역과 달리 3핀 어탭터가 꼭 필요하다. 미리 준비 못했다면 타운 숍에서 구입 가능하다.
시니어 한 달 여행 포인트 아시시 시내만 보게 된다면 딱히 할 일이 없을 것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천천히 순례지(Eremo della Carceri, San Damiano) 등을 찾아 트레킹을 즐기면 된다. 또 아시시 주변의 페루지아(Perugia), 아멜리아(Amelia), 나미(Nami), 토디(Todi), 오르비에토(Orvieto), 구알도타디노(Gualdo Tadino), 구비오(Gubbio), 치타디카스텔로(Citta di Castello)와 시에나를 거쳐 토스카나까지 여행을 즐기면 된다. 이탈리아는 한 달 여행으로는 턱없이 부족한 나라다.
1977년 10월 24일 김포공항. 자유로운 해외여행이 어려웠던 시기. 하지만 이날은 달랐다. 생이별을 앞둔 인파로 가득했다. 한 사람을 배웅하기 위해 형제, 자매와 조카까지 모두 공항에 자리를 잡았다. 곳곳에서 울음이 터져 나왔고, 힘줘 잡은 두 손은 빨갛게 달아올랐다. 곧 먼 이국의 땅으로 떠날 파독(派獨)광부들을 환송하는 자리. 그 자리에는 만삭의 아내와 두 아이를 끌어안고 이별을 고하는 민석기(閔錫基·66)씨도 있었다. 그리고 39년이 흘러, 그는 이날의 이야기를 자서전에 기록해 세상에 내놓았다.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사진 오병돈 프리랜서(Studio Pic) obdlife@gmail.com 장소협조 Frenchie B
1960년대 초 대한민국. 당시 경제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았다. 박정희 군사정권 초반 시행한 경공업 위주의 수출 지향 정책은 되레 실업자 양산과 외화 부족 현상을 증가시켰다. 대책이 필요했다. 그래서 선택된 방안 중 하나가 바로 ‘인력 수출’이다.
당시 독일은 ‘라인 강의 기적’이 완성돼가고 있었다. 경제는 가파르게 성장했고, 일자리는 많았지만 사람이 없었다. 일자리를 고를 수 있는 상황에서 거친 일을 하려는 사람이 부족했다. 당연히 육체노동이 요구되는 일자리는 외면당했다. 독일 정부 역시 비슷한 선택을 했다. ‘인력 수입’이다.
양쪽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서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1963년부터 1980년까지 약 7900여 명의 광부가 독일에서 근무했다. 500명을 모집했던 첫해, 첫 번째 모집에는 4만6000여 명이 몰릴 만큼 좋은 일자리는 절실했다. 민석기씨도 그중 한 명이었다.
독일에서 찾던 ‘경력 광부’
한때 광부만 2000명이 넘었던 함태광업소. 사촌누나와 매형 덕분에 광부로 자리 잡을 수 있었고, 그곳에서 2년을 일했다. 독일로 갈 사람을 뽑는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은 것도 그때였다.
“독일로 갈 광부를 뽑는다네.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났어.” 동료 광부의 전언이 계기가 됐다. 그 이야기를 들은 후부터 민석기씨는 새로운 꿈이 생겼다고 했다. 당시 독일 광부들의 월급은 600마르크(약 160달러) 정도로 한국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금액이었다.
“제가 독일에 지원했던 시기는 파독광부제도 시행 후반이었어요. 초기에는 해외생활에 적응할 수 있을 만한 머리 좋은 사람들을 주로 뽑았죠. 처음에는 대학생들이 많이 갔는데, 일을 안 하고 요령 피우는 친구들이 많았나봐요. 그래서 힘쓸 만한 사람들 위주로 뽑았더니 이번엔 폭력사건이 골치를 썩였죠. 그래서 독일 측에서 요구했대요. ‘진짜 광부’를 보내달라고. 이때 탄광일에 경험이 있는 사람들을 우대해줬고, 저도 되겠다 싶어 지원하게 됐죠.”
들어 올리지 못했던 가마니
영화 에는 파독광부를 지원했던 주인공 ‘덕수(황정민 분)’가 체력시험을 보는 유명한 장면이 나온다. 반드시 합격하겠다는 일념으로 쌀가마니를 힘겹게 머리 위로 들어올리는 장면. 1977년에는 그 체력시험이 서강대학교에서 있었다. 독일인 심사관도 통역을 받으며 지원자들을 지켜봤다. 하지만 현실은 영화와 달랐다. 번쩍 들 필요도 없이 어깨 위에 들쳐 매기만 하면 됐는데 그것조차 되질 않았다. 쌀 대신 모래가 들어 있던 60kg짜리 가마니는 꼼짝도 하질 않았다.
“시원하게 떨어졌죠. 이해할 수 없었어요. 평소 같으면 쉽게 들 수 있었을 텐데 안되더라고요. 요령이 없었나봐요. 그렇게 풀이 죽어 태백으로 돌아갔는데, 후에 연락이 왔어요. 다시 시험을 보라고. 그래서 서울로 향하기 전에 열심히 모래가마니를 들어올리는 연습을 했어요. 그것도 열심히 하니까 요령이 생기더라고요.”
두 번째 도전에서는 필기시험까지 일사천리로 합격했다. 합격하고 나서도 독일로 가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본인이 부담해야 하는 경비가 30만원이나 됐다.
“당시에 대구에서 집 한 채 사는 데 150만원이었으니 엄청나게 큰돈이었죠. 하지만 돈을 빌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어요. 그 시절에는 ‘독일 가는 데 돈 좀 빌려달라’고 하면 잘 모르는 사람도 선뜻 빌려줬어요. 그만큼 파독광부는 선망의 대상이었고 신용도 높았어요. 어떤 기수는 한국에서 한 달짜리 사전교육까지 다 마쳐놓고도 떠날 날짜가 자꾸 미뤄져 빚이 늘어나는 경우도 있었어요. 곧 독일에서 큰돈을 벌 테니까 하는 마음에 빚으로 흥청망청 생활했던 거지요. 다행히 저는 사전교육을 제대로 마칠 수 없을 정도로 출국일이 급하게 잡혀 별일 없이 독일로 향할 수 있었어요.”
3년 후 돌아오겠다는 약속 못 지켜
“3년만 꼭 참아. 3년만 참고 일하면 한국에서 잘살 수 있을 거야.”
출국심사를 하기 전 눈물을 흘리는 아내에게 민석기씨는 이렇게 말했다. 기본 계약이 3년이었으니 그 시간만 채우고 돌아오면 한국에서 무엇을 시작해도 쉽게 할 수 있는 밑천을 만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물론 그때는 자신의 귀국이 훨씬 늦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상상도 못했다. 그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과 곧 대구의 시댁으로 내려가야 하는 아내를 뒤로 한 채 그는 루프트한자 항공기에 올랐다.
“당시엔 비행기 자체가 신기했던 시대였으니까요. 타고 있던 커다란 것이 두둥실 떠오르면서 진짜 떠난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젠 내릴 수도 없고, 도망갈 곳도 없다는 현실이 체감됐어요.”
버스는 어둠 속을 5시간을 넘게 달렸고, 잔뜩 겁먹은 얼굴의 한국인 무리가 낯선 향기의 공기를 들이마시며 차에서 내렸을 때 그들은 딘슬라켄의 땅을 밟고 있었다. 이들이 독일의 광부로서 생활을 시작한 로벡 광산이 있는, 먼 훗날 이들을 기억하기 위해 ‘아리랑파크’가 건립된 장소였다.
“처음엔 말도 못하게 고생했어요. 말이 안 통했으니까요. 이걸 들라는 건지 내리라는 건지 당기라는 건지 밀라는 건지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죠. 멍하니 들고 서 있을 때가 태반이었어요. 망치, 톱, 정 같은 공구 이름도 전혀 몰랐고요. 갱도 내에서는 무전으로 지시를 받는 경우가 많아 더 알아듣기 힘들었어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저녁에는 괜한 군기를 잡겠다는 선배들의 괴롭힘도 있었다. 하지만 가장 힘든 것은 역시 지옥 같은 갱도였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000m쯤 갱도를 내려가면 작은 터미널 같은 것이 나와요. 개미굴같이 여러 소규모 갱도들로 연결되는 철로들이 집결되는 곳이죠. 거기서 열차를 타고 10분 넘게 들어가면 다시 지하로 내려가야 하고, 내려가서 실제 작업하는 곳까지 다시 수백m를 더 들어가야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어요. 내려가고 들어가기를 여러 번 반복하기도 했고요. 석탄을 찾아 따라다니는 것이죠. 공기가 공급되는 환풍기 근처는 찬바람 때문에 서늘했지만, 바람이 통하지 않는 곳은 지열 때문에 40℃가 넘기 일쑤였죠. 거기서 독일인들의 고함을 들어가며 일했어요. 죽을 고비도 많이 넘겼고.”
그래도 말이 들리고 일이 익숙해지자 독일은 지옥에서 천국으로 변했다. 한국에선 쉬는 날도 없이 작업시간이 길었지만 독일은 달랐다. 주 5일 근무에 공휴일도 꼬박꼬박 쉬었고, 하루에 8시간만 근무하면 그만이었다. 막장에 들어가는 데 1시간, 나오는 데 1시간, 점심시간 1시간을 제외하면 실제로 일하는 시간은 5시간에 불과했다.
독일에서 나 홀로 이름 지어본 ‘새마을협동농장’
처음에는 3년만 있자 하고 온 독일이었지만, 첫 휴가는 그보다 훨씬 뒤인 7년 만에 이뤄졌다. 한 달 휴가 동안 도로공사나 다른 일을 하면 큰돈을 쥘 수 있었고, 더 돈을 모아 금의환향하고 싶은 마음도 컸다.
한국에 도착했을 땐 집에서 잔치가 벌어졌다. 8남매가 모두 모여 민석기씨를 환영했다. 형제 대부분이 직·간접적으로 독일에서 큰돈을 벌고 있는 민석기씨의 도움을 받고 있었다. 빨갛고 파란 테두리가 그려진 아빠의 국제우편을 늘 기다리던 막내는, 막상 난생 처음 아빠를 만나자 낯설음에 뒷걸음쳤다가 곧 아빠 품에 안겼다. 그렇게 가족들은 그동안 쌓인 회포를 풀었다.
휴가 때 그의 마음을 흔든 것 중 하나는 ‘새마을운동’이었다. 한국을 떠나 있는 동안 조국은 많이 변해 있었고, 그 변화의 중심에 새마을운동이 있다고 믿었다.
“당시에 전 기숙사를 나와 인근 마을의 농장에서 일하고 있었어요. 농장에서 지내는 것이 훨씬 편했고, 주말에도 쉬지 않고 일할 수 있었으니까요. 주말에 시간이 남는 한국인 광부들을 유혹하는 것들은 너무나 많았어요. 전 아예 나와 있어서 이런 유혹을 피할 수 있었고 농장일로 가욋돈까지 벌었죠. 그때 농장 주인의 제안으로 빈 땅에 직접 배추와 무, 갓 등을 심으며 농사를 짓기 시작했는데, 새마을협동농장이라고 이름을 지었죠.”
후에 그의 이 농장은 현지 신문에 소개되면서 지역에서 화제가 되었는데, 그의 ‘외도(?)’가 회사에까지 알려져 곤란을 겪기도 했다.
외로운 말년의 파독광부 많아
한때 아이들을 독일로 불러 완전한 정착도 꿈꿔봤지만, 아이들이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자 1989년 민석기씨는 한국으로 완전히 돌아왔다. 휴일도 없이 일해서 모은 목돈으로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되리라 기대했지만 돌아와서 보니 그것과는 먼 삶이었다. 다른 파독광부들처럼 남의 손에 관리가 부탁된 돈들은 형제들에게 그리고 처가로 스며들었고, 되찾기 어려운 상황이 돼 있었다.
“잘된다는 말만 믿고 형님 건설회사에 계손 돈을 보탰지만, 실제로는 까먹기만 했어요. 또 처가 쪽으로도 돈이 흘러가 수중에 남는 게 없었죠. 결국 가기 싫다는 아이들을 설득해서 독일에서 엄마와 살게 했고, 전 딸아이와 한국에 남았어요. 그 후 식당일부터 안 해본 일이 없었죠. 건강이 나빠졌을 때는 간이식을 받으러 중국까지 갔었어요. 굴곡이 많은 삶이었지만 그래도 남에게 폐는 끼치지 않고 잘 살아온 것 같아요.”
독일로 가 인생의 대박을 맞이한 것 같았지만, 실제로는 어려움이 많았던 민석기씨. 그렇다면 다른 광부들의 사정은 어땠을까.
“파독광부들이 잘산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가난한 사람들이 많아요. 독일에 살고 있는 사람들 중 300명 정도의 사람들은 돌아오고 싶어도 못 돌아오는 상황인 거죠. 한국에 돌아온 사람들 중 주변 사람들에게 속아 빈털터리가 된 경우도 적지 않아요. 심지어 재산권 때문에 ‘오지 말라’고 하는 친척들도 있죠.”
마침 그를 만난 12월 9일은 국회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 발의안이 국회에서 가결된 날이었다. 민씨와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가결 소식이 들려왔는데 그 소식을 듣는 그의 표정에서 많은 이야기들이 읽혔다. 현 대통령의 아버지에 의해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었고, 또 평생을 지지했는데, 이제는 상당수 국민이 그의 딸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로서는 명쾌하게 답을 낼 수 없는 상황일 것이다.
“그래도 독일에 다녀온 것을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많은 광부들이 한국인의 성실함을 몸으로 증명했기 때문에 경제성장의 동력이 된 차관도 독일로부터 빌려올 수 있었죠. 또 조국과 민족, 가족을 위한다는 마음이 있어 막장에서도 그렇게 열심히 일할 수 있었고요.”
민씨의 이야기는 가족과 부모 이야기를 자서전으로 엮는 회사 ‘뭉클스토리’의 기획 행사에 선정돼 함께 독일에 다녀온 간호사 노금희, 황보수자씨의 이야기와 함께 책으로 만들어져 지난 10월 정식 출간됐다.
혜화역 4번 출구를 나와 혜화동 로터리에서 길을 건너 3분가량을 걸었다. 한무숙 문학관을 가리키는 이정표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무심히 걷고 뛰던 대학로 길 옆. 이 익숙한 거리를 수없이 지나다니면서도 문학관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니. 조용한 골목으로 들어서자 문학관 입구가 보였다. 긴 숨을 내쉬고, 무거운 나무 대문을 열고. 그녀와 첫인사를 나눴다.
한무숙(1918~1993)은 일제 강점기에 태어난 소설가다. 어려서부터 몸이 허약해 학교보다는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았다. 중이염, 폐결핵 등을 앓아 어렸을 때 어른들이 ‘서른이’라는 별명을 지어줬다고 한다. 서른까지만이라도 살아달라는 당부였다. 뇌막염으로 왼쪽 청력을 잃었지만 삶에 대한 의지와 탐구는 끊임없었다. 그림 재능이 있어 초등학교 2학년 때 독일 베를린 만국 아동 전시회에서 입상했다. 언어 능력도 뛰어났다. 독학으로 영어와 프랑스어를 익혀 쓰고 읽고 말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화가를 꿈꿨지만 1940년 결혼 이후 그림 그리는 것이 쉽지 않아 펜과 종이만 있으면 할 수 있는 글쓰기로 전업했다. 1941년 잡지 장편소설 현상 공모에서 ‘등불 드는 여인’이 당선되면서 문단에 등단했다. 대표 소설로는 , 등이 있다. 은 폴란드어, 영어, 프랑스어, 에스토니아어, 체코어, 중국어로 번역됐다. 대표적인 기념사업으로 1995년부터 한무숙문학상을 재정해 1년 중 활약이 돋보인 중견 소설가에게 상을 주고 있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한무숙 소설 독후감 쓰기 대회’도 2011년부터 진행하고 있다.
작가의 흔적, 문학관에 담다
한무숙 문학관은 작가가 40년 동안 살았던 종로구 명륜 1가의 한옥집에 세워졌다. 대청마루에 꾸민 1전시실과 2전시실인 응접실, 집필실, 한무숙 작가의 사진과 다양한 소품 등을 전시해놓은 3전시실로 구성돼 있다. 입구로 들어가 바로 앞에 보이는 널찍한 대청마루가 1전시실이다. 다양한 언어로 번역된 한무숙 작가의 대표 소설 에서부터 단행본, 평소 썼던 메모지, 여권, 여행을 하면서 가지고 다녔던 주사기 등 한무숙 작가의 대표 소장품들이 전시돼 있다.
2전시실은 응접실이다. 한무숙 작가가 살았을 때보다 집안 내부 규모를 넓혔다. 2006년 공사를 진행했는데 응접실 중앙에 있는 기둥을 기점으로 왼쪽이 원래는 뒷마당이었다고 한다. 펄벅 여사를 비롯해 국내외 유명 인사들이 다녀간 이곳에는 작가의 소품과 유명 문인과 화가들이 직접 선물한 족자 등이 전시돼 있다.
따뜻한 기운이 감도는 곳
한무숙 문학관의 백미는 집필실이다. 작가가 마치 살아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그대로 잘 보존돼 있다. 살아생전에는 책이 더 많았는데 수천 권에 이르는 책을 숙명여대에 기증했다고 한다. 전시를 위해 책상의 방향을 관람객 쪽으로 돌려놓은 것 말고는 옛 모습 그대로다. 책상 위에는 작가가 쓰던 만년필과 잉크, 손녀가 그린 그림 등이 놓여 있어 따뜻함을 더해준다. 평소 사용했던 오래된 양산과 우산도 방 한쪽에 자리 잡고 있다.
3전시실에 들어가면 작가가 시집갈 때 만들었던 수공예품을 비롯해 초기작 영인본을 감상할 수 있다. 드라마로 제작됐던 소설 의 비디오 등도 전시돼 있다.
한무숙 문학관은 사립박물관이지만 일반인들이 상상하는 박물관보다 작다. 관람료는 받지 않지만 박물관 측은 방문 전에 꼭! 예약을 해달라고 당부한다. 예약을 하면 상주하는 문학사가 관람객들과 전시실을 함께 다니면서 친절하게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한무숙 작가의 아들인 김호기 관장은 어머니의 소설을 이해하는 관람객을 소중히 모시고 설명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매일 관람객이 꾸준히 찾고 있다.
관람 정보
관람시간 평일 9:30~5:00 (전화 예약 후 관람 가능), 주말 및 공휴일 휴관 (토요일 오전 관람 가능) 입장료 무료 문의 및 예약 02-762-3093 위치 서울시 종로구 명륜1가 33-100(지하철 4호선 혜화역 4번 출구, 혜화초등학교 방향 약 200m) 홈페이지 www.hahnmoosook.com
세월 따라 변하지 않는 것이 어디 있으랴마는 크리스마스 날이 예전과 다르게 이렇게 조용하게 변할지는 몰랐다. 어릴 적 크리스마스이브는 무조건 교회 가는 날이었다. 교회 가는 목적은 단 하나, 종이봉투 속에 빵과 사탕 몇 개를 담은 선물 봉지를 받고 싶어서다. 그 당시 시골 아이가 크림이 들어 있는 단맛 나는 빵과 알록달록한 사탕과 과자를 얻어먹는다는 것은 횡재라고 부를 만큼 기쁜 일이었다. 제삿날 밤늦게 기다리다 얻어먹던 하얀 쌀밥에 참기름 넣은 나물 무침과 상어고기 한 토막과는 또 다른 맛이었다.
예전에는 크리스마스 무렵이 되면 온 동네가 시끌벅적했다. 전자제품 A/S센터가 없던 시절이라 골목마다 라디오 고치는 전파사가 있었는데 하루 종일 징글벨 노래가 울려 펴졌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루돌프 사슴코 노래도 엄청 들었고 창밖을 보라, 실버 벨, 기쁘다 구주 오셨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등 메들리 캐럴송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교회에서는 긴 망토를 입은 세 명의 동방박사가 예수님 탄신을 경배하기 위해 찾아가고 예수님은 구유에서 태어나시는 모습을 주제로 한 연극을 했고 어린이 관객은 박수를 치고 환호했다.
필자가 고등학생일 무렵에도 떠들썩한 크리스마스 분위기는 변함이 없었다. 교회 다니는 신도들보다 교회 다니지 않는 친구들이 더 야단이었다. ‘광란의 올나이트’라고 이름 붙이고 밤새 춤추고 노래 부르며 놀았다. 그날만큼은 통행금지도 없었고 교인들의 행렬도 장관이었다. 특히 연인들은 그날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만나야 하는 날이었다.
필자가 초년 직장인이었던 시절에는 경제 부흥의 여파로 세상이 역동적이고 경기도 좋았다. 크리스마스를 시발점으로 하여 연말연시는 늘 시끌벅적했다. ‘Marry Christmas And Happy New Year’라는, 즉 크리스마스와 새해 신년인사를 함께 하는 카드를 주고받는 것이 유행이었다. 일 년 내내 소식 한 번 전하지 않고 지내다가도 이때 다양한 카드를 주고받으면 모든 죄(?)가 용서되었다. 그림 솜씨가 좋은 학생들은 직접 그린 수제 카드를 길거리에서 팔았다. 그림이나 글귀가 좋은 것은 책상 유리 밑에 끼워두고 오래 보기도 했다.
요즘은 크리스마스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고 넘어간다. 길거리에서도 캐럴송을 들어본 지 오래다. 캐럴송이 사라진 이유는 저적권법에 걸려 고액의 사용료를 지불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노랫소리가 듣기 싫은 사람들이 소음공해로 민원을 제기하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TV 방송이나 라디오에서도 예전만큼의 캐럴송이나 크리스마스를 주제로 한 가슴 훈훈한 이야기들을 특별히 소개해주지 않는다.
부처님 오신 날이든 예수님 탄신일이든 정부에서 경축 기념일로 정한 날은 세상이 좋은 쪽으로 조금은 시끌벅적하면 좋겠다. 해당 종교를 안 믿는 사람에게도 공휴일의 혜택은 다 같이 주어지기 때문에 종교 기념일이라고 굳이 색안경을 끼고 반대할 명분도 약하다. 해당 종교를 믿든 안 믿든 기쁜 날로 생각하며 시끌벅적 사람 사는 냄새가 나면 좋겠다.
브라질의 삼바 춤 축제는 열흘이나 이어진다고 한다. 일본에도 지역별로 진행되는 다수의 ‘마츠리’ 축제가 있다. 건강, 사업 번창 등을 기원하는 일종의 종교행사다. 우리나라도 예전부터 농한기가 되면 풍악을 울리고 명절 때는 마을마다 다양한 놀이가 있었다. 이런 자발적인 축제는 이제 다 없어지고 얼토당토않은 관 주도의 행사에 뒷말만 많다. 크리스마스 날만이라도 저작권료나 소음공해민원 걱정 없이 신나는 캐럴송이 온 나라에 울려 퍼지는 좀 시끌벅적한 날이 되면 좋겠다.
자서전은 지나온 삶을 성찰하고 위로받을 수 있는 훌륭한 자기계발서와 같다고 할 수 있다. 때론 가슴을 적시는 소설이 되기도 하고, 희로애락이 한껏 버무려진 희곡이 되기도 한다. ‘내 이야기’ 즉, 직접 겪은 일을 자기 감정을 토대로 쓰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내 이야기를 내가 직접 쓰는 게 생각처럼 쉬운 것은 아니다. 자서전을 만들고 싶지만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막연한 이들을 위한 방법을 정리했다.
민경호 세계로미디어 대표· 저자
>>STEP 1 준비 단계
자서전에는 소소한 일상부터 가치관이나 사상, 인생관, 국가적·사회적 사건과 관련된 이야기 등 나와 관계된 모든 것이 들어갈 수 있다. 이러한 내용을 일반적으로 시간 순서대로 나열해 목차를 구성한다. 오래전부터 써 온 다이어리 등이 있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기억력’과의 싸움이 된다. 과거를 떠올리는 데 도움이 되는 몇 가지 방법을 실행해 가며 토막글을 쓰거나 메모해 두는 것이 좋다.
◇ 과거를 떠올리는 방법
➊ 연대별 주요 사회 사건과 내 기억을 연관 짓기
10년 단위로 그 시대의 주요 사건들을 정리한다. 각 사건이 일어날 당시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어떤 일이 생겼는지 떠올려 보자. 큼지막한 사건들을 중심으로 시간 순서대로 떠오르는 기억을 정리해 나갈 수 있다.
➋ 편지·사진 모으기& 추억의 장소 찾아가기
막연히 떠올리는 것보다 편지·사진을 보거나 고향 집, 학교, 직장 등을 다녀오면 새로운 기억이 새록새록 올라온다. 직접 찾아가기 어렵다면 예전에 살던 동네나 이사 다닌 집, 사무실 등을 떠올리며 그림을 그려보는 것도 방법이다.
➌ 질문지 활용하기
인터뷰를 하듯 세세하게 질문지를 만들어 시기별로 나누어 답을 적어 본다. 아동기·청소년기·청년기·결혼생활기·중년기·노년기 등으로 분류하고, 몇 가지 키워드를 활용해 질문을 이어간다. (예: 어린 시절 가장 좋아했던 음식은? 학창시절 가장 싫어했던 과목이나 선생님은? 첫 직장상사와 관계는? 신혼여행은? 중년기 공휴일에는 무엇을 했는가? 등등)
>>STEP 2 글감 만들기&구성하기
기억을 떠올리며 메모를 하거나 토막글을 써두었다면, 소주제를 정하고 여러 개의 토막글을 엮어서 서술해 보자. 소주제를 정하기 어렵다면 유명인의 자서전 몇 권을 읽어 보고 참고하는 것도 좋다. 다른 책의 목차나 구성을 활용해 글감을 마련하고, 얼추 윤곽이 잡히면 원하는 대로 재구성해 보는 것도 괜찮다.
◇ 자서전 내용을 독특하게 구성하는 방법
➊ 나에게 영향을 준 사람 이름을 목차에 활용: 피터 드러커 자서전의 예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의 자서전 목차를 보면 아주 독특하다. ‘할머니-인간에 대한 예의를 깨우쳐준유쾌한 사람’, ‘엘자와 소피-교육의 길을 제시한 노처녀 자매 선생님’, ‘폴라니 가-새로운 사회를 꿈꾸던 흥미로운 가족’ 등 자신에게 영향을 준 주변 인물 또는 유명인의 이름을 소주제로 해 자서전을 꾸몄다.
➋ 시간 순서가 아닌 중요한 사건 순으로: 러셀 베이커 자서전의 예
미국 언론인 러셀 베이커의 자서전은 마치 영화를 보는 듯 흥미로운 구성이 눈에 띈다. 어린 시절부터 순차적으로 시작하는 일반 자서전과 다르게 그는 맨 처음 ‘제1장 어머니의 타임머신’이라는 소주제로 문을 연다. 요양병원에 계신 어머니와의 대화를 서두에 넣는 등 기억에 남는 사건을 먼저 이야기하고 당시 관련된 에피소드를 풀어 나가는 형식이다.
>>STEP 3 글다듬기&견적 의뢰
그동안 써 놓은 글감을 모아 자서전의 두께나 형태를 가늠해야 한다. 완성도를 높이려면 글쓰기나 스토리텔링 강좌 등을 참고해 글을 세련되게 다듬는다. 가능하다면 간단한 문법을 익혀 틀린 문장이나 단어는 없는지 확인한다. 인터넷으로 ‘맞춤법 검사’ 프로그램을 찾아 활용해 보는 것도 어느 정도 도움이 된다. 자료가 정리됐다면 출판사 등에 자서전의 페이지 수나 크기, 레이아웃에 따른 견적을 의뢰한다.
외국인 관광객과 쇼핑하는 사람들로 즐비한 서울 명동거리. 북적북적 정신없는 그 거리를 뒤로하고 한적한 남산 꼭대기를 한번 바라보자. 그리고 시선을 아래로 두고 천천히 걷기 시작하면, 소소한 즐거움으로 가득한 ‘재미로’를 발견할 수 있다. 만화를 좋아하는 어린 손주와 함께 간다면 더욱 기분 좋은 나들이가 될 것이다.
지하철 4호선 명동역 3번 출구로 나가면 만남의 광장처럼 벤치가 있는 작은 쉼터가 있다. 바로 그 가운데 ‘명동 만화의 거리-재미로(ZAEMIRO)’ 지도가 보인다. 명동 퍼시픽호텔 왼쪽으로 들어서 명동 주민센터를 지나 서울애니메이션센터에 이르는 길이 그려져 있다. 2013년 남산 아래 작은 골목에 조성된 이 길은 건너편 쇼핑거리에 비교해 사람이 많지 않아 산책 삼아 걷기에 한적하고 좋다. 편의점, 미용실, 식당 등 가게마다 간판이나 벽면 등에 만화 주인공 캐릭터가 그려져 있고, 그 사이사이에도 캐릭터 조형물이나 만화벽화 등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요즘 아이들이 좋아하는 ‘뽀로로’부터 추억 속 만화 캐릭터까지 만나볼 수 있다.
1. 서울애니메이션센터
국내 최초의 애니메이션 전용극장으로 국내·외 다양한 애니메이션 작품을 상영하는 서울애니시네마가 있는 곳이다.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과 관련한 콘텐츠를 즐길 수 있는 기획 전시실과, 각종 도서 및 영상자료를 살펴볼 수 있는 정보실, 애니메이션을 배워보고 체험할 수 있는 교육프로그램과 캐릭터 체험장 등을 운영하고 있다. 서울 중구 소파로 126, 02-3455-8341~2, 월요일 휴관.
2. ABC문방구
‘재미로’는 걸어서 30분 이내로 둘러볼 수 있는 코스인데, 중간 지점인 ‘ABC문방구’까지 오르막길로 돼 있다. 이만큼 올라오면 재미로 골목을 한눈에 담아볼 수 있고, 하늘을 올려다보면 남산이 가장 가깝게 보인다. 학창시절 등굣길에 문방구에 들렀던 추억을 되새기며 한 번쯤 들어가 장난감과 학용품 등을 구경해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손주와 함께 갔다면 잠시 쉬어갈 겸 기념 삼아 작은 선물을 사주는 것도 괜찮겠다.
3. 재미랑
만화 박물관 ‘재미랑’은 지하 1층 코믹극장, 1층 안내·판매 숍, 2층 전시갤러리, 3층 커뮤니티 공간 등으로 이뤄져 있다. 가장 눈여겨 볼 곳은 맨 위층 만화다락방과 옥상정원이다. 마루처럼 꾸며진 만화다락방에서는 신발을 벗고 편하게 만화책을 읽을 수 있고, 옥상 정원에서는 시원한 바람을 쐬면서 골목 전경을 구경하기 좋다. 서울 중구 퇴계로20길 42, 02-779-6107, 공휴일·월요일 휴관.
4. 웹툰공작소
다양한 웹툰 관련 상품을 둘러보고 구입할 수 있다. ‘아이언맨’, ‘슈퍼맨’, ‘원피스’, ‘드래곤볼’ 등 인기 캐릭터의 피규어를 전시해 놓은 공간을 찾는 마니아가 많다고 한다. 웹툰 작가를 꿈꾸는 아이들을 위해 태블릿으로 직접 웹툰 그리기를 체험해 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했다. 더불어 피규어, 핀버튼 만들기 프로그램도 즐길 수 있다. 서울 중구 퇴계로20길 24, 070-7796-7086, 월요일 휴관.
5. 남산커피집
편안한 분위기에 아기자기한 인테리어가 돋보이는 드립커피 전문점이다. 바리스타 수업을 진행하는 공간으로도 쓰인다. 카페 왼쪽으로 나가 서울애니메이션센터로 향하다 보면 한국대표만화 40선 캐릭터가 그려진 옹벽이 눈에 띈다. ‘공포의 외인구단’, ‘꺼벙이’, ‘맹꽁이서당’ 등 반가운 그림들이 벽면을 채우고 있다. 서울 중구 퇴계로20길 57, 02-776-6580.
1970년대 강남 부흥의 상징 같던 한 아파트는 2014년 재건축되면서 기억 속에서 잊혔다. 적은 돈으로 푸짐한 음식을 배불리 먹으며 친구들과 술잔 기울이던 피맛골 또한 개발이란 이름으로 영영 사라졌다. 도시의 지도가 바뀌고 변화한 거리. 뭐든 새것이 좋다지만 우리네 따뜻했던 옛 시절도 아름답지 않던가. 혹시 그때가 그립다면 서울역사박물관(서울 종로구 새문안로)에 가보시라. 정겨웠던 이웃, 친구들과 술잔 부딪히던 그때 정취를 잠시나마 느낄 수 있다.
판자촌 위에 쌓아 올린 시민 아파트
전시실에 들어서서 1950년대 생활상을 지나 1960년대 ‘서울은 공사중’ 전시실로 들어서면 ‘돌격건설’이라고 크게 써 붙인 포클레인 삽이 건설현장을 연상하게 하는 모래 속에 처박혀 있다. 이 설치물 뒤쪽으로 1960~70년대 세워졌던 시민아파트 내부 모습을 클레이 아트로 꾸몄다. 아파트 속을 재현한 클레이 아트를 살펴보면 마루에 누워 TV 보는 남편, 아파트 상가의 레코드 가게, 금은방, 지금은 거의 사라진 곤로 파는 가게, 다방 등 시대상을 재미있게 표현해 놓았다. 1960~70년대 서울의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도심 주변으로 판자촌, 즉 무허가 불량주택이 급격하게 불어나자 도시 경관 개선을 이유로 1968년부터 시민아파트 건설이 대대적으로 진행됐다. 1969년에만 32개 지구에 406동 1만5840 가구의 아파트가 판자촌 위에 세워졌다. 시민아파트 건설은 1970년 4월 8일 마포 와우아파트 붕괴 사고로 중단됐으나 판자촌 마을에 아파트가 세워지면서 서울의 모습이 크게 변화하는 계기가 됐다.
피맛골이 그립다!
안국역과 광화문역 일대에는 굽이굽이 작은 골목 사이로 정(情)을 한가득 담아내던 오래되고 허름한 음식점들이 모여 있었다. 피맛골이라 불리던 이곳은 도시 재개발로 사라지기 전까지 고단한 하루를 풀어주던 우리의 이웃이자 친구였다. 그중 광복 직후부터 2010년 2월까지 가장 오랜 기간 그 자리에서 영업을 했던 ‘청일집’이 서울역사박물관에 그대로 옮겨져 전시 중이다. 손님들이 끼적인 낙서부터 사용하던 의자, 국자, 전을 굽던 철판, 주전자 등 옛 청일집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청일집 단골이었다면 향수에 젖기 딱 좋은 장소. 기억 속 친구와 술 한잔이 떠오르는 독자라면 부디 가보길 바란다.
우리가 살던 집이네
실제 아파트도 재현해 놓았다. 1978년 입주가 시작된 강남구 지금은 서초구 서초삼호아파트 9동에 살던 한 가족이 쓰던 가구, 생활용품, 집 내장재 등 기증품으로 꾸민 집이 전시실 마지막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1939년생, 1943년생 부부와 아들과 딸, 네 가족이 살던 아파트다. 주방 일부를 제외하고는 1981년 입주 초기 모습을 그대로 유지했다고. 식탁 의자에는 호돌이가 새겨진 강남구청 수건이 걸려 있다. 골드스타가 선명하게 쓰인 냉장고, TV, 믹서기, 밥통 등도 낯익다. 아이들이 쓰던 방 책꽂이 앞에 놓인 가방은 옛 추억을 방울방울 샘솟게 해 준다. 취재 당시 어린 아들과 함께 온 한 엄마는 “여기 엄마가 살던 집이랑 정말 똑같다”고 말하면서 즐거워했다.
관람시간 3~10월 평일 09:00~20:00 토·일·공휴일 09:00~19:00 / 11~2월 평일 09:00~20:00 토·일·공휴일 09:00~18:00 휴관일 1월 1일, 매주 월요일(1층 학습실, 서울역사자료실, 로비전시관, 강당, 식당, 카페테리아 개방) 관람료 무료 전화 02-724-0274~6
홈페이지 museum.seoul.kr
내가 사진 촬영을 위해 떠나는 여행의 목적지는 오지라 불리는 곳, 그러니까 세계의 변두리나 사람들의 관심이 미치지 않는 구석진 곳들이 대부분이다. 문명으로부터 벗어난 지역이라 불편함이 이루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문명의 이기로부터 멀어진 순수한 삶의 모습에서 불어오는 신선한 바람을 쐴 수 있으니 그 정도의 불편은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다. 돌아보면, 잊을 수 없는 경험이나 세상에 하고픈 이야기들도 대개는 그런 오지로부터 바람처럼 불어왔다.
그런 여행 중 피엔지(PNG)라고 불리는 파푸아뉴기니를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뉴질랜드에 살고 있는 친구를 만나기 위해 일정을 조정하였다. 더니든(Dunedin). 남섬과 북섬으로 길게 이어진 뉴질랜드. 그 남섬에서도 남동쪽 남극해와 닿아 있는 더니든에서 나는 보고픈 친구를 만날 수 있었다.
친구가 안내한 바닷가는 한적했다. 아니 우리밖에 없었다. 친구와 두 딸, 그리고 그의 아내와 함께 맞는 바람은 순하고 조용했다, 왜 여기까지 왔는지? 우리 세대는 그렇게 살았다. 많은 말이 필요 없었다.
다음 날 친구가 안내한 곳은 넓은 바다가 한눈에 가득 보이는 높은 절벽 위였다. 절벽 끝에는 등대가 있었고 커다란 새들이 많이 있었다. 처음 본 새였는데 가까이 다가가도 별로 피하지 않고 하던 일을 계속하는 이상한 새였다. 뒤뚱거리며 걸어가는 새는 방향도 바꾸지 않고 제 길을 가고, 졸고 있는 새는 뭔가 좀 모자라는 녀석처럼 보였다. 부리를 아예 몸 깊이 묻고 자고 있는 새는 무슨 배짱인지 내가 곁에 가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래서 아주 가까이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이렇게 야생의 큰 새를 자세히 보기는 처음이었다. 몸의 크기에 비례해 부리도 아주 컸지만 뾰족한 구석이 없어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다. 한 녀석이 잠자기도 지겨웠는지 기지개를 켰는데, 난 정말 놀랐다. 그렇지 않아도 큰 몸에 날개가 펴진 것이다. 이렇게 클 수 있다니! 바로 그 유명한 알바트로스가 땅에 발을 딛고 활짝 펼친 날개를 본 것이다.
친구의 권유에 따라 누워서 하늘을 바라봤다. 그것이 알바트로스-신천옹(信天翁)을 가장 잘 즐기는 방법이라 했다. 난 그렇게 보고픈 그 친구와 한동안 하늘을 유영하는 창공의 왕자들의 눈으로 하늘보다 더 높은 하늘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돌아와 당시 연재하고 있던 내 고정 칼럼 ‘프리즘 파인더’에 올렸다. 이랜드가 운영하는 도서출판 한세가 발행하는 주간지 프리즘이다. 최종훈 편집장이 글을 붙여 주었다. 내 사진과 설명이 단번에 녹아나는 글이었다. 사진가인 나는 글의 힘을 보았다. 그동안 좋은 글은 많이 만났어도 내 사진과 얘기에 맞춰 내 앞에서 그것이 글다운 글로 만들어지는 것은 처음이었다. 흥분된 내 설명과 감정을 가라앉히면서 생각을 승화시키는 아름다운 글이 만들어지는 현장을 난 곁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하늘은 이미 내 안에 살아
하늘 위에 더 높은 하늘이 있다는 걸 알고부터 모든 게 하찮아졌어.
두 번씩이나 접히는 내 크고 고운 날개도,
더 높이 날아서 더 멀리 봐야 한다는 의지도.
그래, 이름 석 자를 위해 퍼덕이기엔 난 너무 늙었어!
신천옹 네 이름만큼이나
하늘 위에 더 높은 하늘이 있다는 걸 알고부터 난 자주 여기서 살아.
날개를 접고 부리를 땅에 박고 있을 때조차 난 이곳에 떠 있지
약해진 두 발목을 노리는 올가미로도, 약 먹인 낟알로도,
단 한 발로 모든 걸 끝내버리는 총알로도 날 여기서 끌어내릴 순 없어.
난 이미 하늘보다 더 높은 하늘을 내 안에 넣어뒀거든
하늘은 이미 내 안에 살아
그리고 한참 후에 보들레르가 같은 새 알바트로스를 노래한 시를 보았는데, 난 최종훈의 글이 감히 보들레르의 알바트로스보다 한층 더 좋다고 생각했다. 보들레르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그는 글로 눈을 열어준 내겐 참 아름답고 귀한 사람이다.
◇ 함철훈 사진가 개인전 '풍류(風流)' 안내
장소 포스코미술관(포스코센터 지하1층)
일정 7월 13일~8월 9일 *평일 10~19시, 토요일 정오~17시, 일요일ㆍ공휴일 휴관
'우리가 만난 바람과 물'이라는 부제로 펼쳐지는 이번 전시에서는 그동안 지면을 통해 선보인 몇몇 사진과 더불어 함철훈 사진가의 다양한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아울러 그동안 연재한 '함철훈의 사진 이야기'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전시돼 있다.
필자는 1944년 2월 16일 태어났다. 당시는 각박한 삶의 시대이기도 하지만 여명이 바로 문밖인 시기이기도 하였다. 어머니는 “2차 세계대전 막바지로 일제가 최악의 모습을 보였던 시기라 민간의 식량이 부족할 대로 부족했기 때문에 산모가 영양을 충분히 공급받지 못했다. 애를 낳았는데 자라지 못하여 큰 쥐만 하더라”는 말을 곧잘 했다. 좋은 점이라면 출산이 무척 쉬웠다는 것이다.
돌 지나고 6개월이 되어 나라를 되찾았는데 우후죽순의 지도자들과 새로운 정치ㆍ사회 조류가 물밀듯 쏟아져 들어왔다. 급변하는 시대에 걸맞는 야망을 가진 사람들의 시대였다. 우선 산다는 것으로도 허덕이는 서민의 삶은 더 어렵고 고달팠다는 기억이 희미하지만 있다. 특히 대구의 10.1사건 때는 좌파의 폭력을 피하여 한적한 곳으로 피신하는 아버지를 따라 거처를 옮겨야 했었다. 아버지는 한국전쟁 전 해에 병사하고 말았다.
취학 전 여자 아이부터 고등학교 2학년인 아들, 두 딸 아이에 필자까지 네 명의 자녀들이 일터 없는 어머니에게 맡겨진 부양가족이었다. 대구 중심가에서도 더러더러 초가지붕이 보이는 시절 기와집이 필자 집이라 가난에 대한 물질적인 아픔은 없다. 필자의 가난은 끼니를 거르는 가난은 아니었고 문화 욕구에 대한 가난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낀다, 절약한다, 쓰지 않는다는 방어소비에 집착했다. 세금, 교육비, 식비 외에는 돈을 쓰지 않았다. 삶을 지탱할 수 있는 지팡이는 자녀를 지켜내야 하는 모성본능과 체면과 자존심뿐이다.
그래서 어머니는 돈 안 드는 놀이로 우리와 시간을 보냈다. 작은 돌 주워 하는 공기놀이, 반들거리는 흙마당에 가느다란 선을 귿고 하는 땅뺏기, 선교사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은 탄력성 있는 공으로 삼박자 노래 부르며 다양한 모양으로 공차기 등이었다.
다만 책에는 아끼지 않아 집에 책이 풍부했다. 그래서 필자는 동화책은 물론 소설책도 읽을 수 있었다. 아마도 ‘소공자’, ‘소공녀 같은 외국의 책들도 그 무렵에 읽은 것 같다. 책 내용 가운데 무슨 소리인지는 모르는 게 태반이지만 독서는 지루한 시간을 즐거운 시간으로 바꿔주는 마법 상자이었다. 언니는 ‘태양계’란 이름의 동네 구멍가게 겸 책대여점에서 부지런히 신간잡지를 빌려왔다. 필자는 이것도 열심히 탐독했다. 10대를 위한 잡지 ‘학원’은 한 회도 빠지지 않고 읽었다. 연재된 조은파의 ‘얄개전’은 익살스런 행동이 얼마나 기발했던지 지금도 흥분이 느껴진다. 익살의 세상이 휴전 직후의 가난과 닫힌 사회에 답답해 하는 청소년에게 스트레스 분출구 역할을 했다. 이상스러운건 대구 시절 어떻게 넉넉한 책이 주어졌던가 하는 것이다. 한참 성장기의 아동이었을 때 세 끼니의 밥만으로 채울 수 없는 이채로운 먹거리에 대한 허기가 가끔 기억나지만 놀이와 독서에 대한 허기는 없었다는 기억이다. 특히 필자 집은 새 책 살 형편이 아니었는데 무슨 돈으로 책을 샀는지 궁금하다.
고등학교 시절은 격변의 시기다. 3.15부정선거를 고등학교 1학교, 4.19혁명을 고등학교 2학년, 5.16군사쿠데타를 고등학교 3학년에 맞은 것이다. 특 , 5.16군사쿠데타로 집권한 군사정권은 일사천리로 대학입시제도를 무 토막내듯 확 바꾸어버렸다. 국가고시 점수를 개별 대학 입시에 100% 반영하고 각 대학은 오로지 체력장과 면접만 시행했다. 그런데 필자는 제도 변경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체력장의 한 과목에서 완전히 빵점을 먹은 것이다. 할 수 없이 대구 한 대학의 약학과에 진학했다. 그러나 서울로 진학하고 싶어하는 열망은 잦아들지 않았다. 결국 다음 해에 서울 연세대학으로 튀었다. 약학과 팔촌쯤 되는 화학과였다.
필자는 18년 동안 내륙의 소도시 대구서 살았다. 어디 여행간 적도 없었다. 그러니 대처에 대한 선망이 강할 수밖에 없다.
필자는 원래 가족과 함께 대구의 교회를 다녔는데 서울로 옮기면서 교회도 다른 곳으로 옮겼다. 교회를 옮기자 가슴에 한 줄기 신선한 바람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필자는 YMCA에서 하는 ‘대학생을 위한 기독교 사상 강좌’를 들었고 일요일에는 연세대학 교회를 출석했다. 당시 필자는 서울에서 얻을 수 있는 것들에 가슴 벌렁거렸다. 기독교가 기성복이 아닌 시대별 노력과 아픔 및 정서를 담아 걸어왔다는 것, 큰 테두리에서 문화와 사회 및 역사를 배경에서 성장했다는 것이 이해되기 시작하였다. 이 이해는 인간, 고고학에 대한 호기심을 안겾줬다. 또 종교와 인간관계, 역사를 만들어 가는 인류 복합체로서의 인간, 생각하는 존재로의 인간 등 참으로 많은 분야의 인문학적인 호기심도 갖게 했다.
전공이 화학인데 인문학에 홀딱 반하였으니 이 노릇을 어쩌란 말이냐. 그렇다고 또 전공을 바꿀 수도 없다. 이미 약학과에서 화학과로 한 번 바꿔서다. 덕분에 대학의 전공 성적표는 엉망이다. 이 성적표 때문에 졸업 후 20년 동안 대학을 말하지 않는 결백증이 있었다.
71년 4월 5일 식목일 공휴일에 결혼했다. 그리고 80년엔 아프리카 수단에서 1년 간 살게 된다. 고온 건조한 나라 수단은 정부의 정체가 공산국가인지 자본주의 국가인지를 구별할 필요가 없는 산업의 불모지대다. 수단은 남북한 공관이 공존하는 나라다. 포장되지 않은 고속도로를 달리다보면 소나 양같은 동물들이 차에 치여 죽은 모습을 쉽게 보는데 단 시간에 건조되어 부패하지 않고 박제가 된 모양을 본다. 중동에서 제왕이라도 죽으면 그날로 매장하는 문화는 과학적인 이유가 있다.
그 척박한 땅, 공기 중에도 물기라고는 없는 갈증의 땅 바위틈에서 자라나는 초록의 생명체를 볼 수 있는데 생명력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실감하였다, 생명의 주인은 따로 있다는 생각을 해다. 사람은 태양열에 지치고, 영국의 지배 200년 동안 문명인의 안면무치 이기심에 착취당하면서 비옥한 땅이 물을 만나지 못하여 석녀처럼 생산이 불가능한 지독한 가난으로 기력이 없다 아이들의 손으로 밀쳐도 무너질 것 같다. 개를 싫어하는 무슬림의 나라에서 들개들은 늘씬하게 잘난 모양이고 기름기까지 돈다. 떼 지어 다니는데 들개 떼가 수단인보다 더 위풍당당해 보인다.
우습게도 한 대접의 물로 목욕하는 물이 귀한 나라, 상수도도 전기도 없는 그 곳에서 필자는 공짜로 미터기 없는 전기 물 풍족히 쓸 수 있었다. 핫(hut)이라는 원두막만한 집에서 살고 있는 원주민의 땅에서 필자의 사택은 큰 저택쯤으로 여겨진다. 지금도 필자 아이들은 수단에서 살았던 집이 가장 훌륭한 집이었다고 이야기한다. 이태리 가구를 갖추고, 에어컨이 방마다 있으며, 냉장고에 냉동기까지 구비한 그 사택은 원주민의 생활상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주거환경이었다. 필자가 근무한 곳은 나일의 지류인 백나일의 물을 인공수로로 끌어들여 사탕수수 농사를 짓고 설탕까지 생산하는 그 나라 기간산업체였다. 인공 수로에서 쉽게 낚시한 물고기로 회도 뜨고 매운탕도 만들어 먹었다. 한국인들이 낚시하는 것을 보고 수단인들도 낚시하기 시작하였는데 수단인들의 극성스런 낚시가 시작되고 두어 달 지나니 수로에는 거의 고기가 낚여지지를 않았다. 무계획 노획이 자연을 해칠 수 있다는 걸 확실하게 볼 수 있었다.
이어 미국에서 이민생활이 시작됐다. 우선 유학이 아니고 이민으로 미국 땅을 밟는다는 것부터 필자 속은 무척 상했다. 그리고 미국은 필자 꿈 실현의 땅이 아닌 생존의 땅으로 전락했다. 선배들이 버리라는 학력, 경력, 배경이 낯섦에서 버틸 수 있게 하는 유효한 수단인 것도 알게 됐다.
필자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육체노동의 미숙함이다. 해보지 않았던 일을 한다는 것이 가장 어려운 숙제였다. 바느질이 필수인 세탁소를 인수했을 때도 필자는 재봉틀에 실 꿰는 법도 모르는 상태였다 인계한 전 주인이 어쩌려고 무조건 가게를 사느냐고 더 걱정을 하였다. 기술을 쉽게 익히지 못하면 그 자리에서 가스실로 데려갔다는 유대인 집단수용소 체험기가 필자를 독려했다. 하지 못하면 죽으리로다란 명제 앞에 누군들 해내지 못하겠는가. 두 아이들의 똘망거리는 눈망울도 필자의 용기에 보탬이 되었다. 덕분에 필자는 주민의 95%가 백인인 부촌에 세탁소를 소유하게 되었다.
다는 아니지만 미국 사람들 중에 좋은 사람도 많았다. 특히 한 남자 단골손님은 하루 12시간 주 6일을 일하는 필자를 안타깝게 생각하여 우호적이었다. 필자 글씨체와 암산 실력이 학력을 증명해주었기 때문이다. 이 손님에게서 “네 나라에서는 화이트칼라 잡을 가졌을 거야”라는 말을 종종 들었다. 남편과 큰 소리로 다툼하는 현장을 본 이 손님은 남편에게 “ 내 아내는 일하지 않으면서 가사 도우미를 두는데 하드워킹 아내에게 무얼 불평하느냐” 하는 내정간섭에 가까운 일격을 날리기도 했다. 백인이건, 흑인이건, 교육 수준이 높든 아니든 미국 남자는 여자와의 다툼은 꺼렸다. 일종의 배려였다. 이런 작은 차이가 신사문화를 이루는 근본이 아닌가 생각하였다. 오랜 동안 일만 하자 피로가 누적되기 시작하였다. 그래도 아침 일어날 때의 피로는 첫 손님이 내미는 달러에 확 가셨다. 난산의 아이도 돈을 보이면 달려 나온다는 유머가 생각났다.
1994년 남편이 준비도 이별사도 없이 떠나버렸다. 시폰처럼 흰 눈이 투명한 3월의 어느 일요일, 늦은 기상을 하고 나와 대화를 나누는 중 목이 깔깔하다고 물 가지러 간 사이 심장마비의 공격을 받고 평화의 나라로 갔다. 필자는 남들의 두 배에 이르는 노동에 시달렸으니 10년 미리 은퇴하여 문화적인 욕구를 채우리란 약속을 자신과 가족과 하였다. 그러나 남편 떠나고 4 년 후에야 가게를 팔았다. 남편 보내고 금방 가게 처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놈의 돈 때문이다.
가게 처분하고 파트타임 일했다. 여유 시간에 시립대학에서 강의도 들었다. 이런 학구적인 활동이 경직된 내면을 많이 부드럽게 만들어 주었다. 머리가 멈추고 손발만이 분주하였던 시간이 머리와 손발이 함께하는 시간으로 전환하였다. 그리고 필자가 공부와 일을 병행하는 바로 그 시기에 영원히 걸 프렌드를 못 만날 것 같던 두 아들이 차례로 결혼했다.
드디어 형식도 내용도 필자 혼자가 된 것이다. 미리 계획하고 준비한 대로 은퇴 후 제주도로 갔다. 역이민이라고 말하는데 필자는 그냥 이사한 기분이다. 여기서도 저기서도 마이너리티인 필자에게 어디고 완전한 행복의 파라다이스는 없다. 두 땅 서양과 동양의 지구촌 마을이 필자의 삶터다. 더 넓어 좋고, 더 다양하여 좋고, 더 배워야 하여 좋다.
레일크루즈 해랑(이하 해랑)이 시니어 관광의 중심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처음 이런 열차가 생겼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 고가의 열차 여행이 가능할까 물음표를 크게 그리기도 했다. 하지만 외국 여행을 쉽게 갈 수 없는 시니어들, 가족 단위 관광객들 사이에서 입에 오르면서 인기 상승 기류를 탔다. 열차에 오르는 순간부터 여행 시작이 되는 크루즈 열차 해랑. 대한민국 방방곡곡 아름다운 풍경과 지금까지 느끼지 못했던 열차 여행의 묘미를 해랑에서 느껴보자.
글 권지현 기자 9090ji@etoday.co.kr 사진 이은덕(코레일 홍보문화실) eunduk-2@korail.com
지난 5월 5일 오전 8시 36분, 2박 3일 코스 해랑 열차에서 만난 홍창기(洪昌基·62)씨는 이번 해랑 열차 여행이 두 번째다. 3년 전 결혼기념일을 맞이해 아들이 보내줬고. 이번에는 홍창기씨 생일, 어린이날, 어버이날이 다 겹친 연휴라 아들, 손자, 며느리, 사돈 내외까지 9명이 열차에 몸을 실었다. 처음에는 좀 가격이 높지 않을까 부담도 됐지만 편하게 좋은 곳을 돌아보는 맛이 좋았다고 말했다.
같은 날, 오전 10분 간격으로 두 대의 해랑은 만석의 승객을 싣고 서울역을 떠났다. 열차를 타자마자 간단하게 짐을 정리하고 승객들 모두 이벤트룸에 모여 안전수칙과 여정을 책임 승무원으로부터 듣고 승무원과 승객 소개 시간을 갖는다. 임시 공휴일을 맞아 외국 대신 국내를 돌아보자는 마음으로 해랑을 선택한 이들, 몸이 불편한 시니어, 기념일을 맞이한 가족 등이 함께 했다. 이날 승객 대다수가 삼대가 같이 하는 가족 단위였다.
일주일에 두 번 서울역에서 출발하는 해랑은 8량으로 된 두 대의 열차가 운영된다.
화요일에 출발하는 2박 3일 전국일주 코스가 시니어들에게 인기 있다.
토요일 출발하는 1박 2일 코스는 동부권, 서부권 코스가 격주로 운행되고 있다.
물론 관광지에 내려 지역의 먹거리, 관광을 즐기는 것도 여행의 큰 부분이다. 그러나 해랑 안에서 이뤄지는 다양한 이벤트와 열차에서 숙박을 한다는 이색적인 상황도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매력이다.
비싸다는 편견에 부딪힌 당신에게
딱 이 얘기를 들었을 때 ‘정말 재밌다, 당장 이용해보고 싶다’ 생각하지만 멈칫하는 부분이 가격이다. 가격이 비싸다는 편견에 부딪히게 된다.
우선 해랑 열차는 코레일관광개발 홈페이지의 해랑 사이트에 접속해 예약할 수 있다.
http://www.railcruise.co.kr/
자세한 사항은 1544-7755로 문의하면 된다.
운영시간 : 평일 09:00 ~ 18:00 (공휴일/주말 휴무)
해랑 열차 요금은 다음과 같다.
물론 비용이 만만치 않다. 하지만 해랑에 올라타 내리는 순간까지 위 표의 가격 안에서 모든 서비스를 제공 받을 수 있다. 열차 안에서 제공되는 식·음료는 물론이고 열차에서 내려 지역 관광지에서 필요한 모든 내용이 포함된 가격이다. 역에서도 해랑 열차를 타는 이용객들을 따로 모신다고 하니 대우받는 느낌에 남다르다는 이용객들의 반응. 해랑을 다시 이용하는 승객은 일반 가격에서 10%를 할인 받을 수 있다. 자식들이 혹시 가족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면 해랑을 꼭 찾아보라고 권유해 보시라. 생각보다 훨씬 안락하고 즐거운 여행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