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내리던 비가 개었다. 잠에서 깨어 밖을 보니 하늘은 맑고 해가 중천에 떠 있다. 부모님은 일찍부터 들에 나가셨는지 보이지 않았다. 불현듯 학교에 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책 보자기를 들고 학교로 냅다. 동 뛰었다. 동네 입구를 막 빠져나가는데 어머니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선범아! 어디 가니?” 논에서 줄을 지어 모내기하던 사람 중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었다. “예, 학교 가요.” “오늘 일요일인데 무슨 학교에 가니?” 그랬다. 오늘이 일요일인데 늦잠을 자다가 보니 깜박 잊고 학교가 늦었다고 생각에 빠른 발걸음을 하고 있었다.
필자는 전북 정읍군 신태인읍 신용리 장교부락에서 4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농부의 자식으로 태어났지만 농사라야 논 1,200평 정도, 밭이 300평 정도밖에 되지 않은 가난한 집안이었다. 소득이 변변치 않았기 때문에 지금은 웰빙 식품이라고 할 수 있는 시래기밥, 콩나물밥, 무밥, 꽁보리밥 등으로 식사하거나 고구마, 감자 등으로 끼니를 때우는 날이 대부분이었다. 당시 영화에서 통구이 굽는 장면을 보고 고기를 실컷 먹어보았으면 하는 마음을 갖기도 하였다.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 아버지는 서울에서 기반을 잡겠다며 올라갔다. 이후 남겨진 농사는 어머니의 몫이었다. 장남이었던 필자도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농사일을 거들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150여 평 되는 하천가 논은 품을 사지 않고 어머니와 필자가 직접 모내기를 하곤 하였는데, 중학생의 눈으로 보기에 넓기만 하였다. 다리에 행정을 두르고 모를 심는다고 엎드리면 허리가 너무 아팠고, 행정을 두른 다리에 수많은 거머리가 달려드는데 묶은 끈 사이를 파고들었다. 거머리를 때어보면 피가 한 대롱 맺혀 있는데, 이내 피는 종아리를 타고 줄줄 흐른다. 물린 곳은 여간 가려운 것이 아니었다. 그때마다 ‘나는 앞으로 절대 농사는 짓고 살지 않겠다’고 되네 곤했다.
중학교 2학년 때 돌연 서울에 올라간 아버지가 흑석동 성모병원에서 큰 수술을 받으셨다는 연락이 왔다. 아버지는 당시 동작동국립묘지에 다녔던 넷째 숙부 집에서 숙식하면서 고무신 노점상을 하였는데, 장사를 마치고 나면 반겨줄 사람도 없고 해서 강술을 많이 마시다 보니 위가 약해져 복막염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때 병원비가 28만 원(7년 후 공무원에 들어가 받은 첫 월급이 2만 원 수준)이나 되었는데, 필자 집에 그 많은 돈이 있을 리가 없었다.
어머니는 아버지 형제들을 포함하여 마을 사람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돈을 빌리려고 하였으나 누구도 도움을 주는 사람이 없었다. 아버지의 형제는 6남 2녀였고 아버지의 둘째 형님은 80여 마지기(16,000평)나 되는 농사를 지었는데도 고개를 돌렸다. 부득이 어머니는 친정으로 눈을 돌려 4자매 중 가장 친근감이 있는 셋째 이모님 댁을 찾아가 하소연했고, 이모부님으로부터 3푼 이자로 돈을 빌려 병원비를 지급하였다. 그 돈은 필자가 공무원을 하면서까지 갚아야 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수명이 너무 짧았다. 아버지는 수술받은 이후 건강을 회복하는 듯했으나 그후 7년여 기간 이름 모를 병으로 고생하시다 1984년 54세의 나이로 저세상으로 갔고, 어머니도 그후 5~6년 동안 당뇨병으로 고생하다 합병증이 악화하여 2000년 67세의 나이로 죽었다.
부모가 모두 신병으로 오랫동안 병석에 있었으나 가진 재산이 없어 치료 하나 제대로 받지 못하고 돌아간 것이 지금도 마음에 걸린다. 그래서 부모 이야기만 나오면 지금도 눈물이 앞을 가린다. 필자는 부모를 잃고 고아 신세가 되었으나 이후 차츰 재정상태가 나아졌다. 그러나 그 이후로도 4남 2녀의 장남으로서 돌아간 부모를 대신하여 동생들을 뒤치다꺼리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그런 처지니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대학 같은 건 생각도 못 하고 고된 농사일만 계속했다.
그러나 지난한 고통에 돌파구가 생겼다. 하루는 집에 사촌 형이 찾아와 “공무원시험 보기 위해 응시원서를 접수하러 간다”며 “너 시험 한번 보지 않을래” 하고 물어온 것이었다. 그 소리가 너무 반가워 따라가 함께 원서를 내고 시험을 봤다. 그리고 운 좋게 필자만 합격하고 형은 낙방하였다. 사촌 형은 3년 후 필자가 서울 관악노동사무소에 근무할 때 가리봉동 한일합섬 부근에서 자취하였는데, 그때 함께 생활하며 필자가 수학을 가르쳐준 이후 서울시 공무원에 합격하였다.
공무원으로서 첫 발령은 노동청(현 고용노동부)으로 났다. 시골에 사는 필자로서는 사실 그곳이 무엇을 하는지 몰랐다. 또한 당시 시골에서 동사무소나 우체국에서 근무하려면 돈을 써야 하는데 필자가 공무원시험에 합격하였다는 말에 20만 원을 벌었다느니 50만 원 벌었다느니 하는 소리가 나왔다.
시험에 합격한 이후 어디 가도 자연스럽게 필자의 이야기가 화두에 올랐는데, 우연히 옆에서 필자의 이야기를 들은 처음 보는 노인장 한 사람이 “참 좋은 직장에 취직이 되었네”하고 말하였다. 그 말에 노인장에게 “할아버지 노동청에 대하여 잘 아셔요. 왜 좋은 직장에 들어갔다고 하는 거예요” 하고 물었다. 그랬더니 “남을 도와주려면 자기 돈을 써서 도와주어야 하는데 그곳에서 봉급을 받으면서 남을 도와줄 수 있는 것 아니냐”고 오히려 반문하였다. 그 말에 감명을 받아 공직 생활을 퇴직할 때까지 이를 새기고 일했다.
노동청에서의 첫 근무지는 부산 동래온천장에 있는 한독직업훈련원(발령일 74년 11월 11일)이었다. 한독직업훈련원은 진학을 못 하는 가난한 학생들에게 정부가 무료 직업훈련을 시키고 취업을 시켜주는 곳이었다. 그런데 같이 근무하던 선배 한 사람이 지방 관서에 근무하다가 훈련원으로 발령을 받은 것에 대하여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나중에 필자가 지 방관서 발령을 받은 이후 그 사정을 알게 되었는데 당시 공직사회는 급여 수준이 낮아서인지 알 수 없으나 금품 수수가 일상화되어 있었다. 그래서 가욋돈이 없는 곳에 발령받으면 좌천으로 생각하고 있었고, 상납하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었다. 가진 재산도 없고, 다른 사람처럼 상납이나 술대접도 잘 못 하고, 배경도 없었던 필자는 공직 생활하는 동안 그만큼 마음고생이 심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고향마저 전라여서 그 고통은 더 컸다.
필자는 한독직업련원에서 일하다 지방 관서로 이동했다. 지방관서에서는 주로 산재보험 징수 및 보상 업무를 담당하였고, 25세가 되던 해부터 대부분 근로감독관으로 근무하였다. 198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노사분규가 많이 발생하였는데, 6.29선언 이후 그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그때 분규는 너무도 거칠어 근로감독관들이 분규 현장에 나가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필자는 경험이나 지식이
짦았음에도 책임감 때문인지, 젊은 혈기 때문인지 분규 사업장을 일일이 돌아다니며 양쪽 이야기를 듣고 완화해보려고 노력하였고 뜻밖에 성과도 많았다.
그때 느꼈던 것은 사용자의 말을 들으면 사용자의 말이 옳고 근로자의 말을 들으면 근로자의 말이 옳다는 것이었다. 분규를 해소하려면 누가 잘못했는지 짚어내고 잘못한 쪽이여금 고치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나중에 세상을 이해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을 때 이러한 갈등은 노사분규 현장만이 아니라 정치ㆍ경제ㆍ과학ㆍ문화ㆍ예술 등 사회 곳곳에 만연해 있음을 알았다.
필자의 공직 생활은 경제개발과 민주화라는 엄청난 국가적 정치적 변환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다. 국가적으로 보면 78ㆍ87ㆍ97ㆍ2008년 등 10년 터울로 변화했다. 우선 1978년 이후 YH사건, 부마항쟁, 박정희 대통령 서거, 5.18광주민화운동이 연달아 발생하다. 87년에는 6.29선언 이후 공권력 약화에 따라 노사분규가 들불처럼 일어났다. 97년에는 대통령 출마자 세 사람이 각서를 쓰고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고 구조조정을 하는 과정에서 150만~200만 명의 근로자가 실직하는 대량실업사태가 발생하였다. 그 후 2007년이 되면 다시 미국에서 리먼 브러더스 사건이 터지고 그 파장이 세계 경제에 미치면서 한국도 2008년에 또다시 대량실업 사태가 발생하였다. 41년 7개월이라는 근무 기간 9명의 대통령(정부)이 바뀌고, 그때마다 추구하는 노선이 다르고 정책이 달랐을 뿐만 아니라, 사건, 사고가 터질 때마다 여기 맞춰 일하지 않으면 아니 되는 힘든 삶이었다.
공직 생활을 하기 이전부터 느꼈던 아버지 형제를 비롯한 주위 사람들의 상식에 맞지 않는 모습과 공직 생활 동안 직장에서의 편견, 편향, 편애, 편파 등의 모순, 노사관계를 지도할 때 느꼈던 무력감, 그리고 아버지의 죽음과 그 무렵에 읽었던 책 등의 영향으로 필자는 정신세계 공부에 심취하였다. 1984년 무렵부터 서울 시내 큰 서점에서 종교, 사상, 철학, 역사, 역학 등 잡다한 서적을 사 닥치는 대로 읽었고, 다양한 단체를 돌아다니며 견문을 넓혔다. 책을 읽고 명상하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항상 생각한 것은 ‘진리라면 무엇을 공부하든 반드시 일맥상통한 것 즉 보편 당성이 있는 것이 있을 터인데 그것이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었다. 그러던 차 성철 스님의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말을 듣고 그 의미를 알기 위해 스님들이 쓴 화두 관련 책을 집중으로 읽고 명상을 거듭하다 성(性)에 대한 의미를 깨닫고 비로소 세상에 대한 모든 의문을 풀어낼 수 있었다.
94년에 그것을 정리하여 ‘진과 사(眞과 邪)’라는 책을 출판하였다. 그러나 ‘세계에는 수많은 석학이 있고 평생 몸을 받친 종교인들도 많은데 필자가 아는 것을 왜 그들은 깨닫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고 ‘혹시 허상이나 망상을 본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어 다시 20여 년 동안 깨달은 내용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노사지도에 적용해보고, 한국사회의 다양한 모습을 관찰해보고, 직장 생활에 활용해보고, 각종 고전 등도 다시 읽다. 그 결과 필자의 깨달음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하고, 2015년 천성(天性)과 지성(地性)의 원리로써 풀어낸 ‘새로운 경세학을 말하다’라는 책을 출판하였다.
논어 위정편 제4장에 오십유오이지우학(吾十有五而志于學) 삽십이입(三十而立) 사십이불혹(四十而不惑) 오십이지천명(五十而知天命) 육십이이순(六十而耳順) 칠십이종심소욕(七十而從心所欲) 불유구(不踰矩)라고 하였는데 필자도 이순의 나이이다. 황하의 신이 바다를 보고 할 말을 잊는다고 하는데 고용노동부라는 우물을 벗어나 넓은 세계를 알기 위하여 20여 년 전에 했던 방황을 다시 하고 있다.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하기 위하여 태어났는지, 어떻게 살아야 올바로 살아가는지를 모르고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필자의 깨달음을 전하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소녀가 어렸을 때 살던 곳은 대구시 삼덕동이었다. 그곳 삼덕동의 중앙초등학교에서 4학년까지 다니다가 어머니,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이사를 와서 종로구 경운동에 있는 교동초등학교로 전학하던 그때가 소녀에게는 서울 사람의 시작이었다.
어린 시절 삼덕동 소녀의 집에는 동네에서 제일 큰 마당이 있었고 여름에는 그 마당 한가득 형형색색의 이름 모를 꽃이 피고 졌던 기억들이 어렴풋하다. 밤중에 화장실 가는 일이 큰일 중 큰일이었던 기억, 화장실에 가기 위해 누군가를 깨워서 같이 대청마루를 지나칠 때 발바닥에 닿았던 얼음장 같았던 마루 촉감의 기억도 아직 남아 있다.
또 겨울 어느 날 밤 소녀의 집에서 그리 가깝지 않다고 생각했던 성당의 뾰족지붕이 겨울밤 투명한 마루 유리창을 통해 한눈에 들어왔던 기억도 뚜렸하다. 뾰족지붕에 돌려져 있는 색등 때문에 선명한 삼각형이 된 성당 지붕은 심지어 반짝이기까지 하면서 어린 소녀의 눈에 요지경처럼 들어왔다. 소녀의 집과 성당 사이 아무것도 가릴 것이 없던 시절 반짝이는 삼각형 지붕은 소녀에게는 까만 밤하늘의 디즈니월드 이상이었다. 발이 시린 줄도 모르고 오래오래 서서 바라본 반짝이던 성당 지붕 크리스마스 불빛의 황홀했던 환상도 뇌리에 깊이 박힌 추억이다. 싸인지라고 불렀던 파스텔톤 빛의 색 도화지를 두 살 위 언니를 졸라 겨우 얻어냈을 때의 기억. 아마 소녀는 죽을 때까지 이 보잘 것없는 기억들의 불씨를 마음속 깊이 살려 둘 예정이다.
소녀가 초등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아버지께서 하시던 일을 서울로 옮기면서 소녀의 어머니, 아버지는 1년 이상의 원조 주말 부부를 하시다가 아버지의 인솔 하에 대식구 모두가 소녀가 4학년이 되던 해 서울로 이사 왔었다. 아버지는 자식들을 위하여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살기를 원하신 게 아닌가 하는 짐작을 소녀는 나중에야 해본다.
아버지가 서울에 가셨던 어느 여름날 삼덕동 시절. 소녀는 할머니, 고모, 어머니가 대청마루에서 대수롭지 않게 하는 지나간 얘기를 우연히 듣게 된다.
소녀가 우연히 들은 그 얘기는 이랬다. 엄마가 소녀의 언니를 막 뱃속에 가질 때 한국전쟁이라는 것이 일어났다. 당시 군대 사정은 잘 모르지만 소녀의 아버지는 3대 독자여서 전쟁터로 나가는데 면제를 받으셨다고 한다. 그러나 1.4후퇴 이후 인민군이 부산까지 내려오면서 전황이 매우 급해졌다. 장소 불문하고 아무 준비 안 된 사람이라도 눈에 띄는 민간인 남자는 군복도 없이 삼엄한 감시하에 무조건 전쟁터로 차출됐다는 것. 그런데 그즈음 외출 중이던 소녀의 아버지도 영문을 모르는 채 그 대열에 끼게 된다.
군인도 아닌 오합지졸 민간인 행렬은 전쟁터로 향하는 첫발을 떼면서 삼덕동 집 앞을 지나가게 된다. 그곳을 지나가다 소녀의 아버지는 윗옷 호주머니에 단단히 꽂아뒀던 ‘보물 1호’ 파카 만년필을 집 담장 안으로 던져 넣었다. 담장 밑에 던져진 소녀 아버지의 만년필을 발견하고 사태를 짐작한 남은 식구들은 모두 패닉에 빠진다.
낮에 붙들려 걷기 시작한 행렬은 만 하루 이상을 걷다가 자정이 되어갈 무렵 이름 모를 곳에서 잠시 쉬게 된다. 잠시 후 곧장 전쟁터로 가서 군복도 없이 인민군의 총알받이가 되든, 잘못되면 국군에게 총살당하더라도 이 대열에서 빠져나와 가족에게 돌아가는 것. 선택이 둘뿐인 찰나의 순간 수많은 생각을 했을 소녀의 아버지는 후자를 선택한다. 칠흑 같던 밤 행군을 잠시 멈춘 사이 아버지는 가족이 있는 집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어둠 속에서 길을 찾아 헤매다 다음날 밤 마침내 불빛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모퉁이마다 총을 들고 보초 서고 있는 군인을 만나게 된다. 아무 결정권이 없는 처음 만난 군인은 소녀의 아버지를 미군에게 데리고 간다. 모든 각오를 하고 있던 아버지는 있는 그대로 얘기하게 된다. 당시 영어가 신통치 않았을 아버지와 미국 사람이 어떻게 대화가 통했는지 알 수 없으나 아버지는 자신의 민간인 신분과 산달이 가까운 아내 얘기를 미군에게 하였다. 아버지와 뜻이 통한 미군은 아버지를 통과 시키고 집으로 돌아가는 곳곳에서 만나게 될 보초를 통과할 수 있는 메모까지 써준다.
군인이 아니었던 아버지는 난생처음 만난 외국 군인의 도움으로 극적으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고, 소녀의 가족은 건재할 수 있었으며, 소녀도 세상에 존재할 수 있게 된다. 갓 여고를 졸업했던 20세 남짓 된 소녀의 고모는 어느 날 외출에서 누구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지 뜬금없이 붉은 완장을 두르고 집으로 들어와 식구들을 기겁시켰던 얘기도 소녀는 곁들여 듣게 된다.
생각해보면 당시 사람들은 모두 2년 전에 상영했던 영화 ‘국제극장’의 주인공인 것만 같다. 이데올로기가 뭔지도 몰랐고 누구를 위한 것인지도 몰랐을 시대의 사람들이 겪었던 역사의 환란.
초등학교 시절 ‘상기하자 한국전쟁'의 달을 맞아 글짓기, 포스트 그리기 시간이 돌아오면 호국 영웅들의 이야기를 수없이 듣는다. 그러나 겪어보지도 못한 소녀 가족 환란의 이야기는 소녀에게 혼자만의 비밀이 되어 시시때때로 그 비밀과 싸워야 했다.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사회의 규칙에 조금씩 눈 떠가며 민간인이었던 아버지의 상황이 이해된 소녀는 비로소 혼자의 비밀로부터 스스로 자유로울 수 있게 된다.
이제 할머니가 된 그때 그 소녀는 지금 루마니아 작가 콘스탄틴 게오르규가 쓴 장편 소설 ‘25시’를 생각해낸다. 소녀는 중학생 어린 나이에 명동성당 앞 중앙극장에서 아무 생각 없이 이 영화를 보았다. 하지만 대학생이 되었을 때 읽어본 소설 ‘25시’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었다.
게르만도, 유대인도 아니고 아무런 이데올로기도 가지지 않은 루마니아 시골의 순박한 농부 요한 모리츠와 그의 가족이 역사 속의 희생물로 바쳐져 버린 슬픈 비극의 운명이 떠오른다. 요한 모리츠는 제2차 세계대전과 나치, 유대인, 연합군, 다시 미ㆍ소의 소용돌이 속에 끝없이 갇혀버린 어이없이 허무한 인생의 이야기지만 요한 모리츠, 그의 이름은 온갖 강대국 사이에 끼어 고난의 운명에 처하는 약소민족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했다.
지금 할머니가 된 그때 그 소녀는 또다시 돌아온 6월에 이제 모두 돌아가시고 안 계신 소녀의 할머니, 할아버지, 아버지, 엄마, 철없이 붉은 완장을 차고 들어와 식구를 놀래게 했던 고모, 그들이 60년도 훨씬 전에 걸어왔던 그 길과 혼자 간직했던 비밀들이 아주 오랜만에 생각이 나 아무도 몰래 그 시절 그 소녀의 해맑은 웃음을 다시 한 번 만들어 본다.
수필 공부 차 문우들이 10여명 모였다. 유명 수필가의 글을 읽으면서 각자의 의견을 발표하는 형식이었다.
그날 공부할 수필에서 다들 남의 문체나 적절치 못하다는 어휘를 지적하며 제 문학적 예리함을 뽐내는 것 같았다. 그러나 필자가 지적한 것은 작가의 문체나 어휘가 아니라 "뒷산의 리기다소나무는 아무 쓸모없는 나무라 베어내고 그 자리에 자작나무를 심는다"는 내용에 대한 반발이었다.
필자 의견은 작가가 리기다소나무를 쓸모없는 나무라며 너무 평가절하 했고 자작나무야 말로 다른 나무와 달리 흰 나무껍질 때문에 문인들이 그냥 막연히 좋아하는 수종이라는 것이었다.
리기다소나무는 우리나라 산이 민둥산일 때 정부가 산림녹화의 일환으로 아카시아와 함께 전국 산에 대대적으로 심은 나무이다. 우리나라 소나무는 대부분 곧게 자라지 못해 쓸모가 없는데 반해 리기다소나무는 곧게 자라는 특성이 있었다. 속성수라서 경제적이기도 하다. 소나무 종류이므로 휘톤치드 방출량도 많다. 그래서 목재의 용도로도 활용가치가 높다는 평가 하에 심은 것이다. 리기다소나무는 과연 곧게 잘 자라 현재 우리나라 산에 중요 수종으로 자리 잡고 있다.
자작나무는 나무껍질을 태울 때 자작 소리가 난다하여 자작나무로 이름 지었다. 그렇다면 땔감으로나 쓰는 용도인데 요즘은 나무를 땔감으로 쓰는 집도 별로 없다. 땔감 용도로만 봐도 차라리 리기다소나무가 나무도 단단하고 송진이 있어 자작나무보다 더 좋은 화목이다. 물론 가구 용도로 많이 쓰인다는 얘기는 있다.
동대문 근처에 일봐주는 회사가 있다. 새로 고층 사옥을 지으며 식수할 수종을 고르는데 설계 회사에서 자작나무를 추천하자 아무도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다. 필자가 자작나무가 어떻게 생겼는지 아느냐고 회사 사람들에게 묻자 아무도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냥 멋있을 것 같다고 했다. 도심의 고층 건물들 사이에 어떤 수종의 나무를 심든 크게 차이가 나지는 않는다. 필자도 나무 전문가도 아니면서 다른 수종을 추천할만한 위치는 아니었다. 결국 건물 사이 틈에 빈약하게 보이는 자작나무가 심어지긴 했다. 촘촘하게라도 심었으면 그나마 그렇게 빈약해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필자가 리기다소나무의 혹평에 대해 반발하고 자작나무를 폄하하지 몇 사람들이 해명을 하긴 했다. 리기다소나무는 소나무 재선충이 번져 죽어가는 수종이고 소나무 진액이 독해서 그 밑에는 다른 식물들이 자라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자작나무는 어떤 점이 좋으냐 물으니 잘 모르겠단다. 원래 추운 지방에서 자라는 나무로 ‘닥터 지바고’ 같은 시베리아 배경의 러시아 문학 작품에 자주 나오는 수종이다. 우리에게 친숙한 러시아 문학 작품들 속에 자주 나오니 친숙하다는 것이다.
자작나무를 굳이 폄하하기보다는 어떻게 생긴 나무인지도 잘 모르면서 그냥 막연히 자작나무를 문학작품 속에 등장시키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다. 어느 작가든 글 속에 자작나무 얘기만 나오면 바로 책을 덮는다. 매너리즘에 빠진 작가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귀족 계급 중에 공작, 백작, 남작과 함께 자작이라는 계급도 있다. 한자로는 전혀 다르지만, 혹시 귀족계급에서 들은 귀족적인 이미지 때문에 막연한 호감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나라가 원래 백의 민족이라 흰색을 좋아하긴 한다. 지금은 우리나라 사람들도 얼굴이 하얗지만, 그래도 더 하얗게 되려고 안달을 한다. 미백크림이 여전히 잘 팔리고 감기도 아닌데 얼굴 탄다며 마스크까지 쓰고 다니는 사람도 많다. 우리는 황인종이다. 농촌에서 자외선을 그대로 받으며 일하는 농부들의 피부색은 영락없는 황인종이다. 황인종이라고 하면 콤플렉스라고 하기에는 지나치지만, 어쨌든 백색에 대한 동경심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시베리아의 대표적인 나무인 자작나무가 우리 산야에도 어울리는 나무인지는 모르겠다. 우리 산에는 별로 안 보인다. 나무는 심고 나면 몇십 년 후를 봐야 한다. 우리나라가 점점 아열대화되어 기후가 바뀌는 중인데 한대지방 나무가 몇 십년 후에도 버텨줄지는 또다른 문제이다.
필자가 좋아하는 수종은 느티나무 또는 밤나무 같은 유실수이다. 느티나무는 빨리 크고 병충해 없이 잘 자란다. 지금 현존하는 수백 년 된 보호수는 대부분 느티나무이다. 나무의 기품이나 형세도 보기 좋다. 밤나무는 밤꽃도 좋지만, 해마다 풍성한 밤이 열리니 일석이조이다. 산에 나무를 심는 이유가 뿌리 덕분에 토사가 흘러내리지 않게 하고 풍성한 잎들은 산소를 내뿜는다는 이유 때문이다. 베어냈을 때 나무의 용도는 별도이다. 자작나무보다 느티나무나 밤나무는 토속적이라 문학적인 분위기로는 덜 어울릴지 모른다. 그러나 실용적이다.
5월의 산은 온통 연두색 이파리들이 점령한 가운데 중간중간 하얀 이팝나무 꽃 무리가 섞여 마치 파스텔화 같다. 온통 생명으로 가득한 5월은 말 그대로 ‘계절의 여왕’답다.
경북 상주보를 지나 긴 교량을 타고 넘으니 상주자전거박물관이라는 이정표가 눈에 띄었다. 잠시 그곳에 들러 자전거의 발자취를 돌아보고 휴식을 취한 다음 구미보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강 주위로 길게 펼쳐진 평야에서는 일손 바쁜 농부들의 바쁜 일상이 고스란히 눈에 들어왔다. 엊그제 비가 온 덕분에 찰랑찰랑 물 잡힌 논에서 농사 준비에 바쁜 그들의 옆을 지나칠 적에는 은근히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개구리의 합창 소리가 가슴을 적셔왔지만 어린 시절, 이맘때쯤이면 농촌 들녘을 장악했던 ‘송아지 찾는 어미 소의 헤설픈 울음소리’는 간데없고 트랙터의 굉음만이 가득해 마음이 허전했다.
서울에는 이틀 연속 비가 온다고 하는데, 이곳만은 햇살이 싱그러웠다. 전국적으로 비가 온다는데 우리의 자전거길만이 햇살이 비추니 이만한 행운이 또 어디에 있을까?
오늘의 본래 계획은 칠곡군이었다. 칠곡군에서 부산 을숙도까지 점프해 3일 차의 힘든 여정을 대비하기로 했는데, 구미시 구미보에 도착해 전망대를 구경하면서 잠시 쉬다가 아뿔싸, 너무 오랫동안 지체한 것이 화근이었다. 발 뻗은 김에 누워버린다더니 노곤한 몸으로 더는 못 가겠다는 회원들의 아우성에 다시 중지를 모아 오늘은 여기까지 라이딩을 마치기로 했다.
구미보에서 차를 불러 타고 부산 을숙도를 향하는 중에 을숙도를 불과 30여 분 남겨두고 고속도로에 장사진을 친 차량 행렬을 만났다. 할 수 없이 일정을 변경해 경남 김해시에서 묵어가기로 하고 차를 돌렸다. 애초에 부산에 가면 자갈치시장에 들러 꼼장어 구이나 붕장어 회에 소주 한잔은 꼭 먹어야 한다고 강조했는데, 일정이 차질을 빚어 부산은 가지도 못한 것이다. 더구나 김해시에서 장어집을 찾는 데만도 꽤 시간이 걸렸다. 비록 늦은 저녁이나 세 분 회원님들의 찬조로 바닷장어의 깊은 맛을 맘껏 느끼고 내친김에 펜션까지 소개받아 김해시 신어산 자락에 있는 신라농원펜션에 여장을 풀고 하룻밤을 묵게 됐다.
상동면에 있는 신라농원펜션은 신어산 자락에서 불어오는 싱그러운 바람과 계곡 물소리가 일품이어서 지칠 대로 지친 몸과 마음의 피로를 다소나마 내려놓을 수 있었다. 피로가 엄습해 왔지만 소주잔을 기울이면서 자전거 하룻길에 대한 담소를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른 채 이어갔다.
정녕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것일까? 신어산 자락의 초승달도 구름에 숨고 밤벌레 소리만 적막한데 여기저기서 코 고는 소리와 잠꼬대 소리가 창문을 넘었다. 그렇게 둘째 날 밤도 깊어만 갔다.
주 무대는 압구정이다. 마피아가 주로 애용한다는 보르살리노 모자와 젊은 층이 열광하는 디젤 청바지를 즐겨 입는, 멋을 제대로 아는 사람. 패션 감각이 조금이라도 빠진다 말하면 서러워할 이 남자의 직업은 ‘서예가’다. ‘서예가’라고 해서 갓 쓰고 도포 자락 휘날리며 나타날 것으로 생각했나? 완벽한 오산이다. 현재라는 프리즘으로 시공간 너머와 호흡하는 서예가 하석 박원규(何石 朴元圭·69)를 브라보 마이 라이프가 만났다.
서예가 하석 박원규(이하 하석)는 만나기 전 겁부터 났다. 먹 묻힌 붓 들어본 지 어언 20년은 됐다. 인터넷으로 검색한 하석의 기사나 인터뷰는 만만치 않은 도량 아니면 읽을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 조금이나마 가깝게 하석을 느꼈다면 그건 임권택 감독과 영화 , , 작업을 함께했다는 정도. 하석을 만나기 전 첫인상은 그랬다. 마침내 하석의 작업실 석곡실(石曲室) 문이 열렸다. 생각지 못한 젊은 청년(?)이 빼꼼 문을 열어준다. 세련된 옷차림, 칠십을 바라보는 하석이 맞나 싶다. 하지만 생각도 잠시.
“아유, 나 같은 사람 인터뷰해서 뭐해요. 그냥 붓 잡아 글 쓰고 전각 공부한 사람이 뭐가 궁금해요?”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를 듣는 순간, ‘주소는 바로 찾아왔구나!’
부잣집 아들로 산 세월에 대한 고마움
하석은 매일 석곡실에 들어서자마자 일종의 의식을 치른다. 돌아가신 부모님 사진과 마주하며 아침 문안을 드리는 것. 하석은 김제평야 만석꾼의 아들로 태어나 직장생활 한 번 없이 살았다.
“아버지 말씀이 ‘먹고 사는 것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조금 부지런하면 먹고는 산다. 그런데 남자는 꿈을 크게 가져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하석은 선친에 대해 ‘시골 농부였지만 굉장히 깨어있는 어른’이었다고 회고했다. 시대를 앞서간 부모의 지원 덕에 진정으로 하고 싶은 것에 접근하며 살아왔다.
알 수 없는 끌림, 서예에 빠지다
하석이 서예의 매력에 빠진 건 이종사촌 집에 살면서 고등학교 다닐 때다.
“검사 집안이라 그런지 서화 작품이 많았어요. 집에 걸려있는 작품을 보고 한순간에 빠졌습니다.”
이때부터 하석은 길을 걷다 어려운 한자가 있으면 그대로 그려 한문교사 조두현(1925~1989)을 찾아갔다. 조두현은 스테디셀러인 ‘한시의 이해’를 쓴 작가다. 하석이 서예대가로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준 스승 중 한 명. 조 선생은 하석의 서예 스승 강암 송성용(剛菴 宋成鏞·1913~1999)을 만나게 해주는 중요한 연결고리가 됐다.
“한 녀석이 흰 봉투 하나들고 조두현 선생님을 찾아왔는데 자기 아버지 글씨를 가지고 왔다고 했어요. 그게 강암 선생 글씨였습니다. 조 선생이 남성여고 가정관 현판을 강암 선생께 부탁했더라고요.”
하석은 강암의 실력을 알게 된 뒤 그가 산다는 전주의 여러 곳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마침내 68년 강암 문하에 입문했다.
“전북대 법대에 다닐 때는 서예 공부를 위해 동양철학이나 국문과, 동양사 쪽으로 전과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기회를 놓쳐서 법대에 남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각 과목 교수를 찾아가 수업을 꼭 들어오겠지만, 법 대신 한문 공부를 할 거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도 장학금을 받고 다녔다는 하석. 수업 시간을 열심히 들어서 시험문제 정도는 쉽게 알 수 있었다. 오히려 문제를 물어오는 학생도 있었단다.
“C 학점은 민법 말고는 없습니다.”
그의 인생에 씻을 수 없는 오점 혹은 역경은 ‘아마 전과를 하지 못한 것’과 ‘민법에서 받은 C학점’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석은 무슨 얘기를 해도 살면서 어려운 게 없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말이 잠시 대학 이야기로 흐르면서 젊은 시절 연애 이야기가 듣고 싶어졌다.
“연애라……. 난 다 차여서…….”
의외의 대답이었다. 김제평야 대지주의 아들이 여자한테 차이다니.
“까무잡잡하고 눈만 빤질 했는데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그래도 고등학교 때 연서는 몇 장 써봤다고 했다. 언젠가 편지를 받았다는 여고생을 한번 만난 적이 있다고 했다. 고교동창회 자리였다.
“내 고등학교 친구랑 결혼한 거예요. 난 잊고 있었는데 편지를 받았었다고 얘기해주더라고요.”
대만에서 마침내 무림고수를 만나다
하석의 연애 얘기로 즐거워졌을 때 대만 유학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이 또한 무림고수 일대기를 듣는 것만큼이나 흥미로웠다. 기회는 1979년 제1회 동아 미술제에서 대상을 받고 난 뒤 찾아왔다.
“당시 동아일보가 대만과 관계가 아주 좋았습니다. 장다첸(張大千·1899~1983)을 비롯해 대만 최고 작가는 전부 모셔다 전시회를 열어줬어요. 그때 동아일보 측에서 권유했습니다.”
1회 대상자를 위한 특급 기회(?)였다. 하지만 그는 학위를 목표로 하지 않았다.
“견문을 넓히고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살지 않으려고요. 나의 현주소가 어딘지, 이 사람들은 뭘 어떻게 하는지 알고 싶었어요.”
하석은 서예 분야 고수들을 만나 기술을 연마하고 배움을 얻어나갔다. 그들이 쓰고, 깎고, 그리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수업이었다. 대만에서 유학하는 동안 언어의 장벽은 어떻게 넘었는지도 궁금했다.
“나 같은 돈 있는 사람이 치사하게 그러겠어요. 통역을 썼지요. 공부하는 사람이 정확하게 물어야 하잖아요. 그래서 화교 유학생을 통역사로 고용했습니다(웃음).”
이 시기 하석은 전각 스승인 독옹 이대목(獨翁 李大木·1926~2002) 선생도 만난다. 이들의 인연은 동아미술제 대상을 타기 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각을 독학으로 공부할 때 책을 사러 가끔 명동에 갔습니다. 중국 대사관이 당시는 대만 대사관이었어요. 입구에 있는 중국서점에서 해교인집(海嶠印集第一集)을 찾아냈습니다.”
하석은 자리에서 일어나 서재에서 해교인집을 찾아 이대목의 전각을 보여줬다.
“이 각을 보세요. 재밌죠?”
언뜻 봐선 삼지창 모양인데 무엇을 느끼라는 건가.
“‘대’는 음각이고 ‘목’은 양각입니다. 음각과 양각 두 개를 한 공간에 새긴 건 처음 봤어요.”
하석은 대만 대사관을 통해 이대목의 주소를 알아냈다. 그리고 한문 실력을 총동원해 자신의 호와 이름 석 자를 전각에 새겨 달라는 편지를 썼다. 전각을 새겨주는 대가로 벽천 나상목(碧川 羅相沐·1924∼1999)이 그린 산수화도 동봉했다. 1년 쯤 대만에서 소포가 하나 왔다. 기쁨도 잠시. 열어보는 순간 이대목의 솜씨가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제 눈으로 보기에 이것은 선생님의 각이 아닙니다. 선생님 솜씨가 이 정도면 소장할 가치가 없습니다.’
하석은 이렇게 편지 한 통과 받은 전각을 싸서 다시 대만으로 보냈다. 그 이후 제대로 된 전각이 왔다. 하석이 몇 살인지도 모르면서 ‘하석 선생’이라고 쓴 전각을 만들어 보낸 것이다. 하석은 대만에 가자마자 이대목부터 만났다고 했다.
“너무 반가웠어요. 보통 인연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고 처음 만남 자리에서 제 이름을 전각에 새기는 작업을 끝까지 보여주셨습니다. 하루가 걸렸어요. 저는 옆에서 열심히 지켜봤습니다.”
대만에서 유학하는 동안 이대목과 매주 만나며 돈독한 스승과 제자로 지냈다.
서예 대가는 아직도 이루고 싶은 것이 너무 많다
하석은 세계 중심인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세계서예올림피아드’를 여는 게 꿈이다. 여기에는 한국 서예에 대한 하석의 걱정이 담겨있다.
“중국과 일본은 서예 인구가 많죠. 우리는 중국 인구에 막히고 일본의 축적된 문화에 안 됩니다. 우리 젊은 세대들은 한문과 꽤 멀어졌습니다. 나 때 하지 않으면 어떤 의미에서 영원히 (세계 서예계에서) 설 길이 없을 겁니다.”
혹시 ‘세계서예올림피아드’가 열리면 우승할 자신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내가 감히 ‘자신 있다’라고 한다면……. 그냥 알아서 짐작하기를 바랍니다.”
한문 작업을 많이 하고 있지만 결국 마지막 목표는 한글이다. 한글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것만큼 어렵고 고민되는 부분도 없다.
“내가 쓰는 한글은 달라야 합니다. 창조는 나 혼자 해야 합니다. 어떤 작품을 하더라도 나에게 계속 묻습니다. 혼자만 할 수 있느냐고 계속 물어요. 누구도 흉내 못 내는 것인가? 이 정도 가지고? 늘 생각을 해요. 그러나 즐거운 고민입니다."
패션의 완성, 예술가 느낌 가는 대로
사실 그의 미적 감각은 서두에서 밝혔듯 패션에서부터 드러난다. 석곡실 입구에는 세련된 운동화와 부츠가 가지런히 놓여있다. 젊은 예술가라 느낄 정도로 색깔 선택도 과감하다.
“아무래도 나이가 있으니까 1년에 한 번을 사도 질 좋은 것을 사는 게 현명한 쇼핑이라 생각합니다. 구두는 아테스토니 블랙라벨을 선호하고요.”
15년이 됐다는 그의 명품 구두는 어제 산 듯 깨끗한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명품을 명품답게 보관할 것! 하석의 철칙이다. 그가 입은 청바지는 젊은층이 선호하는 고가 브랜드. 젊은이만큼 멋지게 입으려면 몸매 유지는 필수. 하석은 일주일에 세 번은 꼭 사이클 25km를 탄다. 저녁은 아주 가볍게 먹고 매일 4시에 일어나는 규칙적인 생활을 30년째 이어오고 있다.
하석과의 시간은 상상 이상으로 즐거웠다. 알파고와 이세돌의 대국으로 새삼 익숙하진 바둑만큼 서예도 가깝게 다가왔다고나 할까. 하석의 붓에는 과거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이 있다. 시니어돌 서예가 하석 박원규! 이 시대를 대표하는 예술가로 오래오래 사랑받길 바란다.
크로아티아 흐바르(Hvar)는 유명 여행전문잡지에 ‘세계에서 아름다운 섬’으로 자주 손꼽힐 이유가 충분하다. 빌 게이츠, 스티브 잡스가 자주 찾았던 곳이란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유명인과 일반인의 여행 시각이 뭐가 다를까? 그저 살아생전 찾아가봐야 할 섬이 흐바르다.
이 섬의 아름다움은 그 어떠한 미사여구로도 표현해 낼 수 없다.
진한 라벤더 향기 머금은 스타리 그라드의 골목길
스플리트에서 배를 타고 2시간 거리. 여객선은 2008년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흐바르 스타리 그라드(Stari Grad) 섬으로 다가선다.
한눈에도 볼 수 있는 작은 섬이 눈 앞으로 스르르 다가선다. 선착장에 멈춘 거대한 배에서 우르르 사람들이 내린다.
하선한 관광객과 다시 배를 타고 이 섬을 나가려는 인파로 복잡한 선착장 주변에 라벤더 향기를 가득 담은 난전 두어 개가 펼쳐져 있다. 라벤더의 강한 향기가 코 끝을 ‘훅’ 자극한다. 즉석에서 갈아주는 주스 파는 곳으로 다가간다. 햇살 좋은 섬에서 자란 과일 주스는 맛이 참 좋다. 피자 한쪽을 사서 미처 먹지 못한 ‘아점’도 먹는다. 그러는 사이 북적대던 사람들은 섬 어디론가 흩어져 갔다. 돌아갈 배편을 미리 구입하고 천천히 섬 안으로 발을 옮긴다.
해안 길(riva)을 피해 일부러 민가가 있는 계단으로 올라선다. 해묵은 느낌이 가득한 골목길엔 치즈 빛 담 벽과 반질반질한 돌이 이어진다. 골목은 고요하고 평화롭다. 좁은 골목길에서 앙증맞은 숍, 여행사, 호스텔 등의 간판들을 만난다.
강한 향내를 풍기며 유혹하는 라벤더 가게는 그냥 지나칠 수 없다. 가게는 가슴골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꽃무늬 원피스를 입은, 금발 생머리의 날씬한 판매원을 닮은 듯 예쁘고 현혹적이다. 라벤더 오일, 건제품들은 예뻐서 꼭 사가고 싶은 마음을 불러 일으킨다. 흐바르에 라벤더 가게가 많은 것은 이유가 있다. 이 섬은 ‘라벤더 섬’으로 불릴 만큼 라벤더 재배가 성행한다. 5월이면 온 섬은 라벤더 꽃과 향이 코끝을 간지를 것이다.
수녀가 만드는 알로에 레이스와 하니발 루치치 동상
골목길에서 11세기 베네딕트회 수도원(Benedictine Monastery)을 만난다. 그저 유럽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작은 수도원이다. 무심하게 지나칠 수 있지만 이 수도원은 ‘알로에 레이스(Aloe Lacemaking Skill)’를 만드는 곳으로 유명하다. 알로에 화분 하나가 놓여 있고 건물에는 레이스 그림을 새긴 팻말이 있다. 유럽 마을마다 흔히 볼 수 있는 레이스 공예지만 흐바르는 색다르다.
크로아티아에는 3가지 서로 다른 레이스 공예 전통이 전해지고 있다. 아드리아해 연안의 파그(Pag) 마을에서 전하는 ‘니들포인트 레이스 공예(Needle Point Lacemaking Skill)’, 크로아티아 북부의 레포글라바(Lepoglava)에 전하는 ‘보빈 레이스 공예(Bobbin Lacemaking Skill)’, 그리고 달마티아(Dalamatia) 연안의 흐바르 섬에서 전승되는 ‘알로에 레이스 공예(Aloe Lacemaking Skill)’다.
‘알로에 레이스’는 흐바르에 거주하는 베네딕트회 수도원의 수녀들만 만든다. 생 알로에 잎의 심에서 나오는 얇은 흰색 실을 이용해 보드지 뒤에서 망이나 다른 패턴을 짠다. 이렇게 완성된 레이스 작품은 흐바르 지방을 상징한다.
이 수도원 앞에는 르네상스기의 위대한 작가인 하니발 루치치(Hanibal Lucic)의 동상이 있다. 15~16세기 크로아티아의 대표적 작가인 하니발 루치치(1485~1553)는 ‘로비냐’ 라는 서사시를 썼다.
멀지 않은 곳에 르네상스의 시인 페타르 헤크토로비치(Petar Hektorovi?, 1487~1572)의 요새와 트브르달리(Tvrdalj) 성의 안내 팻말이 붙어 있다. 르네상스 시대의 유명한 시인이었던 그는 이곳에서 나고 죽었다. 그는 어부의 노래를 수집했고, 기행담 등을 친구와 서신으로 대화를 즐겼다. 그가 기록한 해상 및 동물원 용어들은 크로아티아어 표준 언어에 통합되었다. 요새와 성은 직접 설계했는데 현재는 숙소로 이용되고 있다.
스타리 그라드 랜드마크 스테판 광장엔 그리스 흔적이
골목을 비껴나면 흐바르 타운의 중심지인 넓은 스테판 광장이 얼굴을 내민다. ‘U’자 모양의 항구가 있는 이 광장에는 성 스테판(St. Stephen's) 대성당이 있고 1612년에 지어진 유럽 최초의 시민극장 등 유적지가 몰려 있다. 한눈에 봐도 스타리 그라드의 중심지임을 알 수 있다. 오래된 건물들에선 어김없이 레스토랑, 와인바 등이 성업 중이다. 이 광장은 흐바르에 그리스인들이 가장 먼저 정착한 곳으로 아드리아 해안 달마티아 지방에서 가장 오래되었다.
스타리 그라드에 처음 사람이 정착한 때는 그리스 시대다. 그리스가 아드리아해까지 영역을 확장한 시기는 고대 시칠리아 시라쿠사(Siracusa)의 독재자 디오니시우스(Dionysius) 1세(재위 BC 405~BC 367)때부터다. 그는 384년, 일리리아인의 도움으로 비스(Vis) 섬을 정복해 첫 번째 식민지를 세웠다. 10년 뒤, 디오니시우스와 동맹을 맺은 에게해의 파로스 섬 거주민들이 섬을 정복해 식민 도시를 건설했다. 현재 남은 요새, 고대 석담, 건물 골조, 돌로 만든 작은 대피소 등이 그리스 시대의 흔적들이다. 또한 고대 그리스의 토지 구획 체계인 ‘코라(chora)’는 24세기 동안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그러다 BC 4세기 중반, 시라쿠사 제국이 몰락했고 BC 5~BC 6세기 경 일리리아인의 독립 공국이 되었다. 일리리아인들은 요새를 재사용하고, 여기에 새로운 요새를 구축하면서 번성했다. 데메트리우스(Demetrius)가 왕이 되어 통치하면서 권력을 확장했다. 하지만 로마인들에 의해 식민지화한다. 그때 파리아(Pharia, Faria)라는 새 이름이 붙여졌고, 아우구스투스(Augustus)와 티베리우스(Tiberius) 통치 기간에는 자치도시(municipium)의 지위를 획득했다. 몇몇 로마식 무덤이 만들어지고, 물탱크가 축조되기도 했다. 파리아는 그리스 시대보다는 좀 더 작은 경계로 다시 요새화했다. 이후 12세기에는 기독교 주교의 관할권 아래 있었고, 13세기 중반부터는 베네치아인들에게 정복 당해 1797년까지 정치적인 통제를 당했다. 베네치아 왕국 시대(14~16세기) 때 교통, 군사상 요지로서 번영했다. 15세기부터 교역 중심지 항구로서의 부흥기를 맞이했는데, 당시의 지역명은 캄포 산 스테파니(Campo San Stephani)였다.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던 19세기 말, 포도나무 뿌리를 썩게 만드는 필록세라(phylloxera) 병이 돌면서 이 섬의 경제는 흔들거렸다. 많은 농부들이 농지를 포기했고 20세기에는 이 섬을 떠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포도를 경작하던 남부 마을들은 부분적으로 사라지고, 토지와 도로 대장 체계도 관리 부족으로 명맥만 유지했다. 제2차 세계대전(1939~1945) 이후에는 새로운 위협에 맞닥뜨렸다. 집단농장과 농업의 기계화가 그 원인. 그래도 지금은 다시 관광객들이 늘어나고 조금씩 떠난 농부들이 돌아오고 있다고 한다.
흐바르 요새는 천국의 자리
흐바르 스타리 그라드의 백미는 흐바르 요새에 올라서서 내려다보는 전망이다. 스페인 요새, 베네치아 요새(Spanjola Fortica, Spanol Fortress)라고 불린다. 스테판 광장에서 북쪽의 산 언덕으로 오르면 된다. 오르는 길목의 모습은 타운과 엇비슷한 골목이다. 돌길을 따라 이어진 주변 화단에는 알로에와 사보텐 선인장이 질긴 생명력을 보여준다.
10여분 걸음 끝에 만나는 요새는 중세 때, 오스만 투르크 족으로부터 도시를 방어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요새 안 박물관에는 부서진 유적들이 있지만 딱히 볼만한 것은 없다. 대신 앞이 환하게 트인 성벽에서 바라보는 발밑 풍경에 넋이 빠진다. 이렇게 아름다운 풍치를 누군들 반하지 않겠는가? 흐바르 타운과 쪽빛 바다와 점점이 떠 있는 섬들을 조망하면서 위치를 가늠해 본다. 흐바르 해협을 사이에 두고 브라치(Bra?)섬과, 비스(Vis) 해협을 사이에 두고 비스와, 코르출라(Kor?ula) 해협을 사이에 두고 코르출라와, 네레트바(Neretva) 해협을 사이에 두고 펠제샤츠(Pelje?ac)섬과 마주 보고 있다. 풍광만으로 흐바르 사랑이 가슴 속 깊숙히 채워지는 곳. 더 이상 말이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오를 때 무겁던 발걸음은 몇십 배 가벼워져 하산한다. 다시 선착장을 기점으로 반대편으로 걸어간다. 물 속까지 들여다보이는, 맑은 쪽빛 바다에는 물놀이 즐기는 사람들의 즐거운 비명이 울려퍼진다. 생선 굽는 냄새에 코끝을 킁킁대며 굴 전문 식당, 와인숍을 한가하게 기웃거리다가 만난 프란체스코(Franciscan) 수도원. 15세기에 코르출라 출신의 유명 석공 가문이 건설했다고 한다. 바다를 정원 삼은 작은 수도원에는 사이프러스 나무가 포인트를 주고 있다. 수도원 내부는 박물관으로 이용되는데, 특히 마테오 이그놀리의 ‘최후의 만찬’ 등이 눈여겨 볼 그림들이다. 겨우 하루였지만 흐바르의 눈 시리게 아름다운 풍광과 코끝을 파고드는 라벤더 향기는 아직도 가슴 속에 선연하게 박혀 있다.
TRAVEL TIP!
항공편 크로아티아로 바로 가는 직항 편은 없다. 일단 유럽의 주요 도시로 이동한 후 그곳에서 크로아티아로 이동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독일 뮌헨, 오스트리아 잘츠부르그, 헝가리 부다페스트, 슬로베니아 루블라냐,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등의 국제선을 이용해 자그레브 공항으로 갈 수 있다. 근교 도시에서는 버스나 열차를 이용하면 된다. 필자는 슬로베니아에서 열차로 이동했다.
배편 스플리트에서 페리를 이용하면 된다. 페리는 스플리트 항구, 타운 버스 터미널 맞은편에서 일반 페리가 매일 3회 출발한다. 쾌속선은 1시간 5분 정도 소요되지만 보편적으로 2시간 정도 예상하면 된다. 단 시기에 따라서 페리 스케줄이 다를 수 있다. 정확한 스케줄은 홈페이지를 통해 확인하는 게 좋다. 날씨에 따라 출발이 결정되므로 여유있게 여행 일정을 잡는 것이 좋다.
여행시기 라벤더가 피어나는 5월과 6월 가장 아름답고 한가롭다. 여름 피서철에는 사람이 많아져서 배편, 숙박 이용하기가 불편해진다.
와인 크로아티아의 2대 와인 생산지로도 유명하다. 남쪽은 적포도주, 스타리 그라드와 젤사 사이 중앙 평원은 백포도주 산지다.
먹거리 해물 스파게티와 신선한 새우요리, 그릴에 구운 생선구이 등 바닷가라서 해산물 요리를 먹을 수 있는 곳이 많다. 바닷가 옆이나 스테판 광장 쪽에 식당이 많으며 아시안 음식점도 있다. 또 골목 속에 박혀 있는, 작은 레스토랑이나 선술집(konoer)들도 많다.
특산물 흐바르는 라벤더의 섬이다. 난전은 물론 골목에 가게들이 있다.
화폐 쿠나(HRK) 전압 220V, 50Hz(공통)
크로아티아 추천 여행 코스 수도 자그레브를 시작해서 플리트비체-시베니크-자다르-트로기르-스플리트-흐바르-두브로브니크 순으로 여행을 즐기면 된다.
여행 유의점 크로아티아는 한국인이 가보고 싶은 여행지 1위란다. 현지에서도 한국인을 만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크로아티아 일부에서는 인상을 찌푸리게 하는 경우가 제법 많다. 짐 값은 당연히 받고 택시기사의 바가지 상흔도 아주 흔하다. 국내 여행사 상품이 여러 군데 나와 있으니 패키지를 이용해도 좋을 듯하다.
>> 이신화 여행작가
이립(而立)에 여행작가로 시작해 어언 지천명(知天命)에 다다랐다.
그동안 ‘걸어서 상쾌한 사계절 트레킹’, ‘대한민국 100배 즐기기’, ‘on the camino’ 등
여행서 총 14권을 출간했다. ‘인생이 짧다’는 것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여 지난해 홀로 197일간 30개국의 유럽 배낭 여행을 했다. ‘살아 있을 때 떠나자’가 삶의 모토다.
아파트에 사는 것이 꿈인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도시의 집값은 터무니없이 오르고 그나마 있던 매력을 잃은 지도 오래다. 그런 틈새를 노려 생겨난 것이 바로 도심형 전원마을이다. 말로만 듣던 ‘전원마을’에 ‘도심형’이 붙어 멀리 가지 않아도 전원생활을 즐길 수 있다. 말로만 하면 뭐하겠는가. 브라보 마이 라이프가 직접 가봤다. 도심형 전원마을에 막연한 관심이 있던 독자들에게 살짝 비슷한 듯 전혀 다른 도심형 전원마을 두 곳을 소개한다.
단독주택, 꼭 넒어야 한다는 편견을 없애라
하우개마을
하우개 마을은 파주 황룡산 앞에 세워진 도심형 전원마을이다. 하우개 마을은 작은 땅에 효율적인 집을 짓기 위해 집집마다 지하에 차 2대가 들어갈 주차공간을 확보했다. 차고 위에 정원을 조성하고 2층과 다락방을 올려 이용 공간을 넓혔다.
다락방 천창으로 바라다보이는 하늘이 도시에서는 느낄 수 없는 평온함까지 준다. 4년 전만 해도 전원주택은 330m²(100평) 이상 큰 평수대로 지어져왔다. 지금은 젊은 30~40대나 은퇴를 앞둔 50~60대가 살 수 있는 99.2~132m²(30~40평) 형대의 전원주택이 건설되고 있다. 집값이 안 오를 바에는 넓고 편한 집에서 살아보겠다는 젊은 사람들에게 인기다.
남의현(南議鉉·61)씨와 김경주(金庚珠·60)씨는 하우개 마을 첫 입주자로 2014년 9월 문패를 달았다. 점심시간 조금 넘어 방문했을 때는 바깥주인인 남의현씨만 집을 지키고 있었다. 작년 말 공기업을 정년퇴직하고 장애인 봉사를 하며 은퇴 생활에 적응해 가고 있다. “우선 공기가 좋다는 게 마을의 최고 매력입니다. 아파트에 살 때는 아침마다 머리가 아팠는데 지금은 사라졌습니다.”
남씨는 마을에서 최고 연장자고 오랫동안 산 사람이지만 동생 격인 주민들과도 친하게 지내는 중이다. 현재 남씨 부부를 제외하고 30대에서 50대까지 다양하게 살고 있다. 다른 주민들 입주가 시작되고 친해지다 보니까 매일 만나 밤새 술을 마시기도 했다.
“요즘에는 날씨가 추워서 자주 못 만나는데 날씨 좋을 때는 정말 거의 매일 만났던 것 같아요. 함께 삼겹살 파티를 하면 정말 좋습니다. 맛이 달라요.”
부인 김경주씨는 홀트일산복지타운 원장이다. 사무실이 근처라 주위 아파트를 찾아보다 하우개마을을 알게 됐다.
“그때는 벌건 흙밖에 없었어요. 간이 크다고 하겠지만 조감도만 보고 집을 계약했어요. 누가 여기 들어오나 했는데 그게 바로 우리 부부였습니다.”
입주를 망설이는 사람들에게 도우미를 자청하기도 했다.
“사람들이 결정을 못하고 그럴 때 우리 집을 보여줬어요. 아마 여기 입주민은 우리집 한 번쯤 왔을 겁니다.”
집은 지상 2층에 다락까지 공간이 꽤 되는데 연료비나 전기료 부담이 없다.
“도시가스비가 제일 많이 나왔던 게 14만원이었어요. 전기료도 두 식구밖에 안 되니까 얼마 안 나와요. 아파트에선 관리비를 30만원씩 냈는데 말입니다. 그리고 창뿐만 아니라 집 구석구석에 쓴 히노키 나무가 마음에 듭니다. 나무집은 습기가 차면 나무가 팽창해서 습기 들어오는 걸 막고 더울 때는 마르면서 통풍이 된다던데 정말 그렇더군요.”
퇴근해서 집에 올 때면 나무 냄새 등자연의 향을 맡을 수 있어서 좋다. 새소리는 도시에서 느낄 수 없었다.
전원생활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도시와도 가깝고 또 공기까지 좋아서 도심형 전원주택으로 오기를 잘 한 것 같다고 덧붙였다.
최소한의 대지에서 최대한의 공간을 활용한다
도시농부 타운하우스
파주 운정 신도시를 지나다 보면 마치 만화에서 튀어나온 듯 알록달록한 집들을 볼 수 있다. 바로 도시농부 타운하우스(이하 도시농부) 1, 2차 단지다. 오솔길처럼 낸 길을 따라 옹기종기 집들이 모여 있다. 곳곳에 도시농부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는 텃밭도 보였다. 현재 5단지까지 분양 완료 됐는데 가격은 3억원 대로 알려져 있다.
도시농부의 특이점은 빌라형이면서 독채로 사용하는 것이다. 도시 대부분이 평면을 넓혀 단층(1층)을 높이 쌓아서 집을 지었다면 도시농부는 가로가 아닌 세로로 집을 잘라 구분했다. 박닥은 좁은데 천장이 높고 2층에 다락방까지 있다. 지금까지 봐온 도시 주택과는 확실하게 차별화됐다.
6년 전 지어진 도시농부 1, 2차 단지의 경우, 설계를 담당한 도시농부 최용덕(崔龍德·57) 대표의 생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실내와 실외의 융합을 노린 듯 층마다 텃밭이 있다. 면적은 좁지만 그안에 층을 만들어 공간 활용을 했다. 그런데 최 대표는 그런 실험이 사실상 실패라고 말했다. 실내와 실외의 융합을 위해 준실내를 만들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 같다고. 그렇게 보완해 설계한 것이 최근 지어진 도시농부 미니멀하우스다. 이 집도 역시 세로로 집을 구분한 독채 빌라형이다. 1,2차 단지에 비해 옆으로도 꽤 넓고, 높다. 여러 군데 창이 있어 내부가 도시 집에 비해 상당히 밝은 것도 이 집의 장점이다.
조인관(趙寅官·71)씨는 딸의 권유로 당산동에서 파주 도시농부로 이사 왔다. 최근 간 이식수술을 한 부인이 공기 맑은 곳에서 살기를 바랐다. 가격에 비해 집안 환경이 마음에 들었다.
조씨의 집은 1층 응접실과 주방, 2층 부부의 방, 3층을 손님들이 묵고 갈 수 있는 게스트하우스로 꾸몄다. 3층 공간을 조금 나눠 드레스룸을 만들었다. 드레스룸 안, 높은 천장 위를 가로로 분리해 창고로 만들었다. 2층은 통째로 부부의 방으로 꾸몄다.
“부부 단 둘이 살기 때문에 공간을 쪼개서 방을 많이 만들 필요는 없었어요. 대신 계단 옆에 뭐든 넣을 수 있는 수납공간을 만들었습니다. 계단 때문에 힘들지 않을까 했는데 살아보니까 적응돼 괜찮습니다.”
인테리어는 조씨가 직접 했다. 조씨가 집안 내부를 인테리어에 직접 개입한 것은 ‘마이너스 옵션제’로 분양 받았기 때문이다. 마이너스 옵션제란 익스테리어(건물외관, 창호, 전기, 보일러, 정원)는 회사측이, 내부공사는 입주자가 하는 방식. 유럽이나 미국 등지에서 시행하고 있고 도시농부와 하우개마을도 마이너스 옵션제를 시행하고 있다.
조씨는 집 앞 마당 가꾸는 것이 취미다. 봄을 맞아 마당 주위에 꽃도 심었다. 도시의 아파트 생활에서 벗어나 조금이나마 이곳에서 시골 생활을 느끼며 살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평생 한 번도 갑의 위치에 서본 적이 없어요. 항상 을이었으니까. 그런데 을로 사니까 편안한 거 같습니다.
편하게 살 수 있는데도 굳이 갑이 왜 되냐는 생각이에요.” 아무 망설임 없이 스스로를 을이라 여긴다는 시인, 그러나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한국 시단의 거목. 바로 신경림(申庚林·81)시인이다. 그의 시를 ‘농무’로 처음 접해서였을까? 농부 같고 담백한 인상을 주는 그는 차분하고 소탈한 어조로 자신이 생각하는 삶과 생활, 세상에 대해 풀어냈다. 그가 말하는 꾸밈없는 삶이 주는 행복이란 무엇인지 들어본다.
올해로 등단한 지 60년. 1935년에 태어나 평생을 시인이자 평범한 이들의 벗으로 산 사람. 몇 남지 않은 이 사회의 진정한 원로라고 할 수 있는 신경림 시인을 만나는 데는 반 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인터뷰를 요청했으나 기사에서 요란하게 부풀려지는 게 싫다는 거듭된 그의 고사 때문이었다. 마침내 만나게 된 그와 인터뷰를 하는 내내 그의 시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시인이 아니었으면 어떻게 살았을지를 물어봤다.
시인으로밖에 살 수 없었던 인생
“옛날에 몇 번 다른 것을 뭐 해볼 수 있을까 해서 여러 가지 시험해봤어요. 장사도 해보고 시험 공부도 해보고 직장 생활도 해보고. 그런데 내게 맞는 게 없었어. 잘하는 게 없었어요. 그래서 ‘내가 잘하는 건 시 쓰는 일이다’라고 다짐할 수 있었습니다.”
신 시인은 지금도 교사는 해보고 싶다고 말한다. 어렸을 때부터 교사라는 직업을 좋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제로도 학원 선생을 해본 적이 있다고 한다. 영문과 출신이었던 그는 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쳤었다.
“굉장히 열심히 가르쳤습니다. 수업이 한 시간이면 한 시간 오 분을 가르쳤으니까요. 그런데 그렇게 하니 내가 학생들에게 되게 인기가 없는 선생이었어요(웃음).”
신 시인은 자신에게 시인으로서의 재능이 있다는 걸 고등학교를 다닐 때 알았다고 한다.
“고등학교 시절 선생님에게 칭찬받았을 때였습니다. 칭찬이라는 게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게 맞아요. 칭찬을 받으니까 ‘아, 정말 내가 능력이 있는가 보다’ 해서 자신이 생기고, 그러면서 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좋은 시의 조건으로 ‘남을 가르치려고 하지 않는 시와 교훈적이지 않은 시, 이데올로기에 엮이지 않는 시’를 꼽았다. 한마디로 ‘사람을 편하게 하는 시’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시각과는 다른 개성 있는 시, 남이 한 말을 따라하지 않는 시가 좋다고 봐요. 그러면서도 소통이 되는 시여야 하죠.”
타인과의 소통은 오랜 세월을 역사의 부침 속에서 살아온 신 시인의 지론이기도 했다.
“생각이 다른 사람도 이해해주고 해야지 원수가 되면 안 돼요. 나는 나하고 생각이 다른 사람과 얘기하면 재밌거든요? 상대가 엉뚱한 얘기를 하면, ‘어, 내가 생각 못한 거다’ 싶어서 즐겁습니다. 그게 내가 발전할 수 있는 토대가 될 수 있는 것이라고 봅니다. 자기 생각만 고집하는 사람들은 발전 못해요.”
타인의 생각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일이다.
“쉽지 않죠. 불편할 때도 많지. 그래도 어떨 때는 굉장히 재밌습니다. 우리 사회가 좀 더 좋아지려면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려는 노력, 생각이 다른 사람의 말을 들으려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나라가 시끄럽다는 건 나라가 발전했다는 증거
사실 문학은 요즘 과거에 비해 힘을 많이 잃었다. 본인도 문학을 추구하는 시인으로서 그런 세상의 변화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궁금했다. 그 물음에 대해 신 시인은 한 마디로 “걱정 안 한다”라고 대답했다.
“유신을 겪으면서 문학계의 역할이 커졌습니다. 시대에 앞장 설 수 있는 게 문학밖에 없었기에 그랬어요. 그런데 독재 시절이 끝난 이후로 예술적 문화적으로도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아졌잖아요. 문학도 자기가 할 일을 옆으로 분산시켜야 해서, 준 거죠. 걱정할 게 없어요.”
그는 과거의 전근대적인 사회, 야만적인 사회에서의 문학의 역할은 컸지만 그 사회가 지나가면서 문학의 역할이 줄어든 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설명했다.
“세상 돌아가는 걸 걱정하면 안 돼. 걱정해도 될 것도 아니니까, 그러니 문학은 우리 사회에 대해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우리나라만큼 민주화를 이룩한 나라가 어디 있어요? 민주주의가 제대로 되는 나라는 일본하고 한국밖에 없습니다. 경제 발전도 그렇고, 물론 한국 경제가 지금 위기에 처해 있지만 이만큼 온 나라는 없습니다.”
그는 자신이 학생 시절 절망적이었던 국민 정서에 대해서 얘기했다.
“그때는 너무 가난해서 세계에서 꼴찌에서 몇 번째인 나라였어요. 그래서 ‘이런 한국은 폐기처분해야 된다’는 생각이 사람들에게 많았어요. 민주주의도 못하지, 부패와 독재는 엄청났지. 주민등록증을 하나 떼려고 해도 동사무소 사람에게 담배를 사줘야 했고, 선거 때 되면 자기 표가 자기 표가 아니었어요. ”
신 시인은 요즘 모 방송사 사장이 자기 딸과 해외에 나가서 공금으로 수백만 원짜리 식사와 숙박을 하며 논란이 된 사건을 보면서도, 그런 사건이 밝혀지는 것 자체가 얼마나 좋은 사회냐고 되물었다.
“시끄러우니까 나라가 결딴날 것 같이 얘기하지만, 그렇게 시끄러운 게 나라가 발전한 겁니다. 옛날에는 더 시끄러웠어요.”
시의 영감은 생활 속에서 나온다
오랜 세월이 지나 고향엘 갔더니,
고향집 앞 느티나무가 옛날처럼 커져 있다.
내가 늙고 병들었구나 이내 깨달았지만,
내 눈이 이미 어두워지고 귀가 멀어진 것을,
나는 서러워하지 않았다.
다시 느티나무가 커진 눈에
세상이 너무 아름다웠다.
눈이 어두워지고 귀가 멀어져
오히려 세상의 모든 것이 더 아름다웠다.
-신경림 시인의 ‘다시 느티나무가’ 중에서
신경림 시인의 시집 에 실린 시다. 나이가 들면서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며 잊었던 아름다움을 자연스럽게 재발견하게 되는 감성을 신 시인답게 소박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 시가 늙어감 자체에 대한 긍정을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신 시인은 굳이 잘 늙어가는 것에 대해 따로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그냥 사는 거지 뭘 정리를 하고 그래. 죽음이 예고를 해요? 그거 바보짓이에요. 그냥 자연스럽게 내버려두면 됩니다.”
혼자 사는 신 시인의 최근 생활은 등산, 여행, 그리고 영화 감상이다. 그는 요즘은 특히 영화를 많이 봤다며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를 ‘강추’했다. 잔잔하지만 인생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문득 그 영화가 시인의 시 세계와 흡사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 시인은 자신이 임화, 백석, 오장환, 이용악의 시 세계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말한다. 그 모두가 생활 속에서 시상을 뽑아낸 시인들인 것처럼, 신 시인 또한 자신의 시의 영감이 모든 생활 자체에서 나온다고 밝혔다. 그렇지만 여행을 가서 시를 쓰는 것 외의 글은 쓰지 않는다고 한다.
“옛날에는 여행을 갔다 오면 의무적으로 여행기를 썼어요. 그런데 몇 번 쓰니까 한 소리 또 하고 또 하고 하는 것 같아서, 에이…(쓰지 말자).”
아내와 극장에서 영화 한 편 못 본 남편
자신의 삶을 자신답게 산 신 시인이지만, 그렇기에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에게는 항상 지워지지 않는 미안함이 남아 있다. 그는 아내에게 가장 미안한 일로 영화관을 못 간 것을 떠올렸다.
“아내와 함께 영화관을 갔는데, 그때는 영화 시작하기 전에 일어나서 애국가를 부르게 했어요. 그런데 같이 일어나서 애국가를 부르고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남자 배우가 여자 배우 끌어안고 키스하는 장면이 나오는 거야. 그걸 보고 내가 너무 화가 나서 ‘에이 나가자, 더러워서 영화 안 본다’ 하고 아내를 끌고나왔어요.”
1971년 3월 1일부터 정부는 ‘애국가의 올바른 보급과 존엄성, 애국심 고취를 위해’ 애국가를 극장에서 틀었다. 애국가가 나오면 극장에 온 사람들은 기립해야 했다. ‘조국에 대한 충성’이 끝나자마자 나오는 남녀의 흐트러진 애정 신이라니, 정서적인 괴리감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때는 그런 걸 겪기 싫어서 극장을 안 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신 시인도 그중 하나였던 셈이다.
“그러니 아내가 너무 화가 난 거예요. ‘이 미친 놈이 남들 다 보고 앉았는데 혼자 잘난 체를 하네? 다시는 내가 같이 영화관 안 간다’ 그런 거죠. 그래서 내가 70년대, 80년대 영화는 하나도 안 봤어요. 그때만 해도 내가 성질이 더러웠지. 아내에게는 그게 가장 미안해요.”
그는 작년에 일본의 국민 시인 다니카와 슌타로(谷川俊太郞)와 이메일로 주고받은 글을 묶어 를 냈다. 그 전 해인 2014년에 낸 열한 번째 시집 은 10쇄를 찍었다. 새로운 책은 아직 계획에 없다고 한다. 즐겁게 생을 누리며 삶과 시가 함께하는 그의 작업을 보면 독자로서는 기다림이 필요할 듯하다.
“부지런해야 하는데 좀 게을러요. 생각을 하면서도 방에 드러눕고만 있어. 머릿속에 그림을 다 그려놓은 다음엔 ‘에이 뭐 해봤자 마찬가진데’ 하며 귀찮아해서. 다행히 여행하는 건 열심히 하니까 다닐 수 있는 힘이 있을 때까지는 다니려고 해요.”
신 시인은 누워 있을 때가 가장 편하다고 한다. 아무리 누워 있어도 지루하지가 않다는 것이다. 주변의 누가 가장 편하냐는 물음에는 “혼자 있을 때가 가장 편하다”고 밝혔다. 그 말을 듣고 혼자서 하는 사색이라든지 무념무상이라든지 하는 멋진 말을 갖다 붙이려고 하자 그는 절레절레 손사래를 쳤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가만히 있는 거야.”
그의 대표 시인 ‘농무’를 보면 자연스럽게 시골 선비, 한량의 느낌을 받게 된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어떤 가감도 없이 삶의 자연스러움을 받아들이고 체화한 모습. 그것이야말로 평생 자신의 글과 삶을 일치시켰던 신 시인만의 아우라였다.
최성환 한화생명 은퇴연구소장·고려대 국제대학원 겸임교수
영어사전에서 ‘버킷 리스트(bucket list)’를 검색하면 ‘죽기 전에 꼭 해야 할 일이나 달성하고 싶은 목표 리스트’라고 나온다. 버킷은 얼마 전까지 바께쓰라고 부르던 양동이나 들통을 말하는 것이고, 리스트는 명단이나 목록을 뜻한다. 그런데 두 단어의 조합에서 왜 이 같은 풀이가 나오는 걸까? 해서 좀 더 찾아보니 버킷 리스트라는 단어가 원래 ‘죽다’라는 뜻을 가진 영어 속어 ‘kick the bucket’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중세 유럽에서 교수형에 처하거나 자살할 때 목에 밧줄을 걸어 놓고 발밑에 놓인 양동이를 걷어찬 데서 나온 것이다. 영화 의 마지막 부분에서 유대인수용소장 아민 괴트를 교수형에 처할 때 발밑의 나무로 된 받침대를 걷어차는 모습을 떠올리면 이해가 갈 것이다.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것들
필자의 두 번째 의문은 다음과 같다. 왜 이처럼 끔찍한 장면을 연상케 하는 단어를 많은 사람이 챙기고 만들기를 좋아하는 것일까? 아마도 누구나 양동이를 걷어차기 전에, 즉 죽기 전에 꼭 해야 할 일 또는 하고 싶은 일들이 있기 때문이어서 그렇지 않을까?
버킷리스트라는 단어가 널리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영화 제목이 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2007년에 나온 영화 는 6개월 시한부 삶을 선고 받은 두 사나이가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들을 하나씩 실행해 가는 이야기이다. 평생을 자동차 수리공으로 살아온 카터 챔버스(모건 프리먼)와 재벌 사업가인 에드워드 콜(잭 니콜슨)은 우연히 중환자실에서 만난다. 카터의 어릴 적 꿈은 역사학 교수가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가장(家長)으로서의 책임감과 흑인이란 이유로 포기하고 TV쇼를 보면서 위안을 삼으며 살았다. 반면 에드워드는 자수성가해 전용 비행기까지 갖게 됐지만 세 번의 결혼 실패로 딸에게조차 잊힌 사람 취급을 당하고 있다. 이른바 성공한 만큼 외로움의 빈자리도 큰 사람이다.
이 두 사람이 중환자실에서 우연히 만나 친구가 되면서 의기투합한다. 급기야 둘이서 머리를 맞대고 적은 버킷 리스트를 들고 병원을 뛰쳐나간다. 그리고는 3개월 동안 ‘스카이다이빙하기, 문신하기, 아프리카 초원에서 사냥하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과 키스하기, 모르는 사람 도와주기, 눈물이 날 때까지 웃어보기’ 등을 하면서 흥미진진한 나날을 보낸다. 영화에서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에 임박해서, 혹은 건강을 잃고 나서야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한다. 그러면서 미리 하지 않은 사실에 후회하고 그것들이 너무나 쉽고 간단한 일이라는 데 또 한 번 절망한다. 영화는 ‘인생에서 가장 많이 후회하는 것은 살면서 한 일들이 아니라, 살면서 하지 않은 것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미국의 경우 유명인사들이 갑자기 현직에서 사임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2014년 3월 애플의 재무최고책임자(CFO) 피터 오펜하이머는 무려 430억원 규모의 주식을 포기하고 그 해 9월에 은퇴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이유는 단순명쾌하다. 1996년 애플에 입사해 2004년부터 만 10년째 CFO로 근무하고 있는데 이제 ‘자유인’이 되고 싶다는 것이었다. 나이는 51세로 아직 한창이지만 회사는 세계 최고가 되었고 돈은 벌 만큼 벌었으니 ‘앞으로는 회사와 일이 아닌 자신과 가족을 위해 시간을 쓰고 싶다’는 것이었다. 결국 430억원과 내가 하고 싶은 일, 즉 버킷 리스트와 맞바꾸겠다는 것이었다. 구글의 CFO 패트릭 피체트 역시 52세때 ‘아내와 여행을 다니기 위해서’라면서 2015년 3월 회사를 미련 없이 떠났다. 짐 로저스와 피터 린치 등 펀드매니저 중에도 억만장자가 된 다음 유유자적하며 지내겠다고 40~50대에 은퇴한 이들이 수두룩하다.
그럼 이렇게 유명하고 돈 많은 사람들만 버킷 리스트를 작성할까? 아니다. 평범한 사람 누구나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 2014년 6월 EBS의 이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한 신권식씨(당시 86세). 경기도 평택에 사는 평범한 농부인 그는 환갑이 되던 해에 농사를 접고 땅도 거의 다 팔아치웠다. 아버지가 평생 일만 하다가 77세에 돌아가시는 것을 보고 나는 저렇게 살지 말아야지 하는 결심을 실행한 것이었다. 그 때부터 배운 서예가 늘어 가르칠 정도가 됐고 동네 향교(鄕校)에서 하는 행사에는 제관(祭官)으로 빠지지 않고 참여하고 있다. 처음에는 땅을 파는 것을 반대했던 부인이 남편이 하고 싶은 대로 살라고 마음을 내려놓은 것도 큰 힘이 됐다. 그래서 그런지 여든이 넘은 두 분 다 건강하다. 조용한 시골에서, 그것도 평생 농사지은 곳에서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사는데 부러울 게 뭐 있으며 스트레스가 어디 있겠는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아직 은퇴하지 않았다면 오지 않은 은퇴를 걱정하느라 인생에 단 한 번뿐인 소중한 오늘을 놓치지 말고 지금 당장 나만의 버킷 리스트를 만들어보자. 버킷 리스트를 작성하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말은 꺼내지도 말자. 영화 속 이야기이기는 해도 6개월 시한부 인생도 얼마든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갈 수 있다는 걸 보여주지 않는가?
미국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위대한 포수 중 하나인 요기 베라는 말한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니까!(It ain’t over till it’s over)” 그의 말처럼 설사 은퇴했다고 하더라도 은퇴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은퇴(retire)’란 말 그대로 타이어를 다시 갈아 끼우는 것(re-tire)일 뿐이다. 9회 말을 지나 잠시 배트를 놓고 글러브를 벗었지만 다음 게임이 기다리고 있다. 그것이 정식 리그가 아니라 동네 야구일 수도 있지만 포기할 이유는 전혀 없다. 골프에서의 성패 역시 18홀을 끝내고 장갑을 벗을 때까지 모른다고 하지 않는가? 최선을 다하는 삶이라면 마지막 순간까지 나만의 버킷 리스트는 살아 있고 거기다 뭔가를 적어 넣을 여백과 그 리스트를 실행할 용기 또한 충분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소설가 박경리 선생(1926~2008)을 떠올려보자. 선생은 한국전쟁 통에 남편을 잃고 아들을 먼저 보내는 큰 슬픔을 당했다. 참으로 모진 세월이었다. 누구보다도 불행했지만 누구를 원망하거나 그 뒤에 숨지 않았다. 불행에 이은 고독과 병마를 와 같은 불후(不朽)의 작품들로 바꾸어 우리에게 남겼다. 말년에는 원주로 내려가 소박한 농부의 삶을 살았다. 그리고 돌아가기 얼마 전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모진 세월 가고, 아 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선생의 버킷 리스트에는 버리고 갈 것만 남았다는 것이다. 우리도 버리고 갈 것만 남은 홀가분한 버킷 리스트를 만들어보자.
가구 컬렉션계의 대부 혹은 가구 컬렉션계의 1세대. 모두 aA 디자인 뮤지엄 김명한 관장을 지칭하는 수식어다. 그의 컬렉션은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유명하다. 질과 양에서 모두 세계 수준으로 손꼽힐 정도다. 디자인 가구의 컬렉팅은 그에게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진다. 처음엔 단순한 취미로 시작했지만, 새로운 인생을 펼치는 도화선이 됐다. 그 노력의 집약체가 바로 aA 디자인 뮤지엄이다. 그 곳에서 김명한(金明漢·63) 관장을 만났다.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젊은이들이 흔히 말하는 ‘홍대’는 단순히 홍익대학교와 그 앞 거리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신촌과 함께 서울에서 가장 큰 소비의 축을 담당하고 있으면서, 디자인과 출판, 건축 등 다양한 창조물이 샘솟는 곳이다. 이제 지역적으로는 마포구 서교동과 동교동을 넘어 합정동, 창전동에 일부는 서대문구 연남동 일대까지로 그 의미가 확대되기도 한다. 수십 년 전 저잣거리를 축으로 확대된 ‘종로’가 있다면, 지금은 그 역할을 홍대가 해내고 있는 셈이다.
그 홍대의 랜드마크 중에는 aA 디자인 뮤지엄이 있다. 휴일에는 문을 닫고, 오후 5시 전에는 나가야 하는, 으레 생각하는 그런 박물관이 아니다.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밤늦도록 머물 수 있는, 디자인을 손에 쥐고 몸으로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 aA 디자인 뮤지엄이다. 문화를 주도했던 주인공들이 주변으로 밀려나는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현상 속에서도 aA 디자인 뮤지엄은 젊은 디자이너들이 창작을 지속할 수 있는 공간과 영감의 공급처 역할을 하고 있다. 설립자 김 관장은 aA 디자인 뮤지엄의 의의를 이렇게 설명한다.
“개인적으로 홍대에, 젊은이들에게 빚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들을 통해 돈을 벌고 일어설 수 있었으니까. 그래서 그들이 디자인을 느끼고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다들 콘텐츠가 중요하다고 이야기하지만, 사실 그것만큼 중요한 것은 그 콘텐츠를 담을 하드웨어예요. 어린 친구들은 그 하드웨어를 만들 여력이 없으니 그 부분만큼은 기성세대의 책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aA 디자인 뮤지엄은 권위나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젊은이들에게 열려 있는 공간이다. 인터뷰가 진행된 날에도 박물관 공간 한쪽에선 학생들의 전시 준비가 한창이었다. 이뿐만 아니라 그는 한국 디자이너들을 해외에 소개할 여러 가지 수단을 찾고 있고, aA 디자인 뮤지엄과 유사한 상설 전시공간을 유럽에 마련하는 것도 고민 중이라고 했다. 홍대를 지키는 기둥으로 마포 디자인·출판 진흥 지구협의회의 회장을 맡아 서울시와 함께 중소 출판인들의 인프라 개선을 위한 작업을 올해부터 본격 진행할 계획도 갖고 있다.
그의 가구 컬렉션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면 조금 많이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991년 유럽식 레스토랑 ‘아지오’를 열면서 그의 수집은 시작됐다. 그의 공간을 장식할 소품과 가구들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런 그의 노력 때문이었는지 그가 손대는 레스토랑과 카페들은 연이어 성공했다.
“운이 좋았던 시절이었어요. 젊고 순수했고 열정으로 가득한 시기였지요. 똥폼도 잡고 밤새 예술에 대해 이야기했던 시절이었습니다. 당시엔 정원이 있는 레스토랑에 대한 전문가도 없었고, 평론에도 자유로웠던 시절이어서 쉽게 일을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마침 1980년대 후반부터 해외여행 자유화를 통해 외국을 경험한 젊은이들이 그 추억을 공유할 장소가 필요했고, 대표적 여행지인 유럽과 유사한 공간은 그들에게 어필하기에 충분했으니까요.”
그의 공간에 대한 감각과 욕심은 유년 시절의 경험과 맥락을 같이한다. 유복했던 어린 시절 그가 뛰어놀던 정원은 아버지의 정성으로 가득했고, 그가 자란 안동은 미적으로 뛰어난 한옥들이 즐비했기 때문이다.
“어릴 때는 한국전쟁이 막 끝난 시기여서 주택문화라는 것은 찾아보기 어려웠던 시기입니다. 독서와 정원 가꾸는 것 말고는 취미가 없었던 아버님 덕분에 정서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았죠. 디자인 역시 직접 경험하고 체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그의 배경은 ‘경험’을 중시하고, 나누고자 하는 계기가 된다. aA 디자인 뮤지엄이나 제주도에 세운 게스트 하우스 모두 이 맥락에서 출발했다. 수집이 본격화되면서 시작한 것은 공부다.
“유럽의 각국을 다니면서 많이 배웠습니다. 주로 영국과 프랑스, 이탈리아의 경매소들을 많이 다녔죠. 그곳에서 물건을 감정하는 눈을 키우고, 거래 기관과의 신용을 쌓았습니다. 관련 전문서적도 갈 때마다 사들여서 매달 번역해서 읽었고요.”
20년 넘게 진행된 그의 컬렉션은 100여평의 창고 8개를 채울 정도가 됐다. 일본의 업계 관계자가 한국시장 진출을 꿈꾸다 그의 컬렉션을 보고 규모에 깜짝 놀라 포기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다.
“제 수집 스타일은 일본 사람들의 그것과는 조금 다릅니다. 그들이 중요시하는 학술적 가치 말고도 조형적 가치나, 시대적 가치를 갖고 있는 것들도 모았으니까요. 전시만을 고려하는 것이 아니라 라이프 스타일에 맞춘 활용까지 생각하는 것이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죠. 덕분에 컬렉션의 형식이나 아이템들이 다양해졌습니다.”
물론 이런 과정 속에서도 그가 세운 원칙은 철저하게 지켰다. 김 관장 스스로가 정한 약속이다.
“그동안 가구들을 수집하는 과정에서 지켜왔던 원칙이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쓸데없는 경쟁은 피하고, 갖고 있는 능력 안에서만 하자는 것이죠. 기본적으로 수집은 저에겐 사업의 대상이 아니라 취미의 연장선상에 있기 때문에 절대 무리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수집은 3년 전 멈췄다. 그가 아지오나 다른 카페들에서 손을 뗐을 때와 마찬가지로 무 자르듯 그만뒀다. 관리에도 문제가 있었고, 다른 관심사들도 생겨났기 때문이다. 아지오를 그만둘 때도 주위에서 이런저런 만류가 있었지만, 단칼에 실행했던 그다. 지금은 무거운 짐을 벗어던진 것처럼 행복하다고 그는 이야기한다.
수집은 그의 인생 2막의 시작이었지만,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다양하게 확대됐다. 그중 하나가 무크지 ‘캐비닛’과 ‘캐비닛 Jr.’의 출간이다. 캐비닛 창간호는 전 세계 디자이너 20명의 인터뷰를 실었는데, 출간되자마자 업계의 반향을 일으켰다. 외국 기사를 번역한 것이 아닌, 현지에 찾아가 그들과 직접 나눈 이야기와 촬영한 사진을 게재한 잡지는 이전에 없었기 때문이다. 궁금한 사람이 있으면 날아가서 만나봐야 직성이 풀리는 그의 성향이 반영됐다.
또 다른 사업은 그의 디자인 안목과 경험이 집약된 ‘aA 디자인 퍼니처’다. 2011년 론칭해 주목받았던 그의 가구 브랜드 aA 디자인 퍼니처는 최근 경기도 가평에 공방을 열고 새로운 도약을 준비 중이다. 그의 공방은 우리가 생각하는 ‘가구 공장’과는 차이가 크다. 공방이 곧 전시장이 될 수 있는 정갈한 작업환경과 디자이너들이 머물 수 있는 숙소까지 갖추고 있다.
“내 직업에 대한 평가를 상대적 가치로 판단하려 들면 자식에게 내 일을 물려줄 생각을 못 하게 됩니다. 하지만 직업과 일터를 물려주겠다고 생각하면 공간이나 도구 등 모든 것이 달라지죠. 춥거나 덥거나 더럽지 않은, 직원들이 폼나게 일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고 싶었습니다. 위치가 가평인 건 혼자 떨어져 있는 것을 좋아하는 제 성격이 많이 표현된 것이죠.”
그는 이 공방을 통해 디자인 샘플이 탄생되면 소비자들을 고려한 가격을 정해 시장에 내놓을 생각이다.
최근 제주에 세운 게스트 하우스 ‘Jeju in aA’는 다시 한 번 그가 주목받는 계기가 됐다. 워낙 제주가 좋았던 그는 지인들과 편하게 지낼 수 있는 집이 하나 있었으면 했고, 수집한 가구들로 공간을 근사하게 꾸며놓고 보니 많은 사람과 그 경험을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그 목적에 맞게 비용도 저렴하게 책정했다. 주말 가격도 없고, 성수기 가격도 따로 없다. 1년 365일 같은 가격이다. 바가지 상혼이 가득했던 크리스마스나 연말에도 평소 가격을 유지했던 ‘아지오 아저씨’ 김 관장의 고집이다.
“게스트 하우스를 사람들에게 개방하기로 결정하면서 이름을 지었는데, 두 채는 제주 방언으로 게으름뱅이를 뜻하는 ‘간세다리’와 영어로 빈둥거린다는 뜻의 ‘아이들(idle)’입니다. 다른 한 채는 제 손녀의 이름이자 순우리말로 바다를 뜻하는 ‘아라’고요. 이름처럼 젊은이들이 여유를 즐겼으면 하는 마음을 담았습니다.“
이곳에서 조금 떨어진, 성산일출봉 근처에는 미술관을 세울 계획이다. 예기치 않게 제주 제2공항이 근처로 발표되는 바람에 오해도 받고, 계획에 차질이 생겼지만 할 수 있는 만큼 하려고 한다.
그는 두 번째 인생을 준비하는 또래의 중년들에게 미루지 말고 바로 실행할 것을 주문한다.
“돈에 얽매이지 말라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돈은 절대 가치가 될 수 없어요. 대신 자신에 대한 가치, 신념이 있어야 해요. 저는 생일을 챙겨본 적이 없습니다. 매일을 태어난 날이라고 생각하고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농부가 농사를 하루라도 거르거나 미룰 수 없는 것처럼 인생도 똑같다고 봐요. 그렇게 인생을 준비해나가면 어떨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