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메이저리그 출신 최고령자인 콘라도 마레로가 영면했다. 향년 102세.
쿠바 공산당 기관지 그란마와 관영 매체인 쿠바데바테 등은 그가 23일(현지시간) 수도 아바나의 자택에서 눈을 감았다고 보도했다. 1911년 4월25일 태어나 한 세기를 넘게 산 마레로는 103세 생일을 이틀 앞두고 세상을 떠났다.
쿠바데바테는 "쿠바 야구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투수 중의 한 명이 영면했다"고 보도했다.
1946년 멕시코 후아레스 인디언스에서 우완 투수로 프로에 입문한 그는 한 시즌에 24승을 거두며 주목을 받았다. 특히 166㎝의 단신에 몸무게 75㎏의 신체 조건을 얕잡아 본 타자들은 그의 위력적인 투구에 압도됐다.
그는 1950년 4월 당시 39세의 나이로 메이저리그 워싱턴 세너터스(Washington Senators)에 입성한 뒤 다섯 시즌을 뛰며 43세에 은퇴했다. 세너터스에서 39승40패, 방어율 3.96, 297개의 탈삼진을 기록했다.
마레로의 생애 통산 승수는 367승이라고 그란마는 전했다. 그는 쿠바를 대표에 월드시리즈에 다섯 차례나 출전했으며 1958년부터는 쿠바에서 후진 양성에 힘썼다.
마레로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쿠바인들이 모여 종일 야구 얘기를 나누는 장소로 유명한 아바나 시내의 공원 광장에는 그를 애도하는 얘기들이 오갔다고 AP통신이 전했다.
마누엘 가예고라는 마레로의 팬은 AP통신 인터뷰에서 "그는 메이저리그의 살아있는 전설이자 쿠바 혁명 이전의 야구 선수였다. 너무나 슬픈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고령자가 많기로 유명한 쿠바 중부 비야 클라라의 라베린토라는 마을의 농장에서 자라 쿠바인들에게는 '엘 과히로 데 라베린토'(라베린토에서 온 농부)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쿠바 정부는 1999년 그에게 '국가 노동 영웅'이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 서울 곳곳에서 각 지역 대표 농수특산물을 싸게 살 수 있는 ‘서울 농부의 시장(Seoul Farmers Market)’이 열린다.
장소는 이달 6일부터 11월 15일까지 광화문 북측 광장(매주 일요일), 북서울 꿈의 숲 볼프라자(토요일), 보라매 공원(둘째, 넷째 토요일) 등 3곳이다.
61개 시군, 119여개 농가, 14개 도시농부 단체 등 생산자와 도시의 소비자가 직접 만나 사고파는 직거래 장터는 물론, 토크콘서트 등 각종 체험 문화 행사도 펼쳐진다. 시장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열린다.
‘서울 농부의 시장’은 2012년 광화문 시민열린마당 1곳에서 운영되다가 작년부터 도심공원 3개소로 확대됐다.
서울시는 농부의 시장 이외에도 9개 한강공원과 11개 자치구에서 주말 또는 휴일, 명절 직전에 직거래 시장이 열린다고 밝혔다.
최동윤 서울시 경제진흥실장은 “올해로 세 번째 열리는 ‘서울 농부의 시장’을 통해 시민들은 신선하고 안전한 먹거리를 사고 지방 생산자들은 판로를 확대할 수 있다”며 “시민들이 싸고 질 좋은 농산물뿐만 아니라 농사의 소중한 가치까지 얻어 갈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서울시는 '도시가족 주말농부'를 기존 월1회에서 2회로 확대해 10월까지 운영에 들어간다.
지난해 5월 첫 시행된 '도시가족 주말농부'는 시민들이 경기도 연천, 양평 등 서울근교의 농촌지역을 방문해 농사체험도 하고 직접 수확한 농작물로 요리실습도 하는 가족단위의 1일 농촌체험프로그램이다.
유치원생 이상의 어린이를 포함한 서울시민이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모집인원은 20여 가족 80명 내외이며 참가비는 1인당 1만원이다.
다음달 1일부터 서울시(www.seoul.go.kr)와 食사랑農사랑(www.식사랑농사랑.com) 홈페이지에서 선착순으로 접수한다. 다음달부터 둘째, 넷째 토요일 진행하며 방학기간인 7,8월은 매주 토요일 운영된다.
정광현 시 민생경제과장은 "서울시는 도시가족 주말농부가 인스턴트식품에 익숙한 어린이에게 올바른 식생활 문화를 가르치고, 스트레스가 많은 도시가족에게는 마음의 안식을 주는 행복한 주말나들이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문화·예술 도시를 표방하는 서울시의 정책적 온기가 지방에까지 스며들고 있다.
지방 고유의 축제와 연계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해 서울시와 지방자치단체가 함께 윈윈하며 시너지를 공유할 수 있도록 밑거름을 마다치 않고 있는 것. 과거 일부 지자체와의 갈등을 뒤로하고 새로운 문화·예술·축제 공연의 패러다임을 만들어가고 있다.
서울시는 최근 전남 완도군과 상생협약을 맺었다. 이를 통해 ‘2014 완도 국제해조류박람회’ 성공 개최 등을 지원하겠다는 것이다. 양측은 국제해조류박람회 성공 개최 지원, 관광지(축제) 집중 홍보 및 서울시민 할인, 농수산물(전복·다시마 등) 직거래장터 운영, 농어촌 체험 및 귀농·귀촌 희망자 지원 협력, 서울·완도 도서관 프로그램 상호 교류에 힘쓰기로 했다.
서울시는 완도 국제해조류박람회 지원을 위해 서울시 홈페이지, 미디어보드, SNS 등 홍보매체를 활용해 적극 홍보하기로 했다. 또 단체 관람객 유치도 적극 지원키로 했다.
이에 따라 완도군은 다음달부터 11월까지 매주 토요일 광화문광장, 보라매공원, 북서울 꿈의 숲에서 열리는 ‘농부의 시장’과 서울광장, 청계광장 등 ‘나눔 가득 서울장터’에 전복·김·미역 등 완도 농수산물을 선보일 예정이다.
지난해 등축제 문제로 갈등을 빚었던 진주시와의 관계도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대립각은 온데간데없고, 상생협력의 기운이 싹트고 있는 것.
서울시와 진주시는 양 도시에서 열리는 등축제의 공동발전을 위해 협력관계 구축을 주요 내용으로 한 축제발전협력서를 작성했다. 특이한 점은 이 과정에서 서울시가 많은 양보를 했다는 것.
서울시는 우선 서울등축제의 명칭을 진주남강유등축제와 이미지가 겹치지 않도록 변경키로 했다. 또한 서울등축제의 주제와 내용 역시 진주남강유등축제와 구분되도록 했다.
아울러 그동안의 갈등을 봉합하고 화해와 협력의 미래를 제시하는 내용도 포함시켰다. 서울시와 진주시는 협력서 발표를 계기로 각기 주최하는 등축제 발전을 위해 교류와 협력을 지속적으로 펼치기로 했다. 또 원활한 협력을 위해 실무협의체를 구성, 운영키로 했다. 서울시의 이 같은 통 큰 결단이 녹아든 협력서의 효력은 올해 열리는 축제부터 적용된다.
‘내일’을 키우죠”
베이비부머 귀농의 정석 전북 고창의 송인보씨
목에 힘주고 자신감 넘치던 삶은 세월에 밀려 점점 작아져만 갔다. 도시생활을 툭툭 털어버리고 선택한 고창행. 우리 부부는 따뜻하게 맞아준 이곳에서 허리 꼿꼿이 펴고 농사짓는 포도와 복숭아를 선택했다. 몸은 힘들지만 강소농을 꿈꾸는 새 인생이 즐겁다.
◇귀농 3년차, 몸은 축나고 수입은 없지만…= 지금은 여름, 할 일이 무지하게 많다. 과수묘목을 키우는 농부는 2년차에 나무를 얼마만큼 키우는가 하는 게 향후 농사의 갈림길이다. 풀과 전쟁하고, 벌레와의 싸움이 치열할 수밖에 없다. 특히 친환경을 고집할 경우에는 더더욱 힘든 싸움이 된다.
이른 새벽에 일어나 포도밭에서 일하다보면, 복숭아밭 주변 개암나무는 어느새 풀로 덮혀 있다. 회양목 잡초라도 뽑으려 하면, 포도넝쿨은 엄청 자라있기 일쑤다. 솔직히 너무 힘들다. 한낮에 잠깐 쉴라치면, 무슨 일이 또 생기는지 컴퓨터를 켜고 글을 올리는 것은 엄두가 나지 않는다.
최근 들어 고창에 귀농 또는 귀촌하려는 사람들이 많이 늘었다. 담바우농장에도 귀농하려는 사람들이 심심찮게 찾아온다. 아직 초보인 우리에게 귀농에 대한 자문을 듣겠다고 할 때면 아직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어진다. 귀농해서 2년차에 바로 수입을 짭짤하게 올리는 사람도 무지 많은데, 햇수로 3년차에 접어들었지만 몸만 축내고 수입 한 푼 없는 놈에게 자문이라니….
하지만, 담바우의 내 자신이 귀농을 했고, 고창의 많은 귀농인들과 인연도 쌓으면서 느낀 점도 있다. 무엇보다 사회적으로 귀농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지다 보니 귀농에 관한 내 개인적 소견을 한번 써보고 싶었다. 우리 부부는 둘 다 서울출신이고, 서울과 그 변두리지역(좋은 말로 수도권)을 벗어나지 못했던 사람들이었다. 소위 ‘기역자를 보고 낫을 연상’ 한다는 건 상상도 못하는 그런 수준이었다. 베이비부머 세대가 그렇듯 우리도 그 길을 따라 열심히 살아왔다.
젊어선 종합상사 입사를 목표로 공부했고, 결혼해서는 출근시간은 알아도 퇴근 개념이 없는 것을 당연시 했다. 내가 없으면 회사가 문 닫을 거란 자만에 빠져 살기도 했다. 그러다가 40대에는 성질난다고 회사 때려치우고, 사업한다고 은행에서 대출받고, 한번 실수는 ‘병가지상사’라며 스스로에게 위로하며 다시 일을 벌이기도 했다. 50대 초반을 넘기면서는 사업을 다시 하자니 겁이 나고, 취직을 하려해도 쉽지 않았다. 그렇게 몇 년 버티다보니 자연스럽게 벼룩시장 구직란도 기웃거리게 됐다. 이런 생활의 반복을 옆에서 지켜보다 우울증에 걸린 아내에게 겨우 한다는 말이 “여보, 우리 시골 내려가서 살래? 당신 생각은 어때”라면서 인터넷 검색어에 ‘귀농/귀촌’을 치고는 엔터키를 팍 눌렀다.
어디서 무슨 귀농박람회를 한다거나 또 어디서 도시민유치 설명회를 한다고 하면 찾아가고 귀농책자와 조그만 찹쌀떡봉지 하나 받고는 터덜터덜 나오곤 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아주 우연히 이곳 고창으로 오게 됐다.
◇따뜻하게 맞아 준 고창에서 발품 팔아가며 정착 = 남들에겐 “지도를 펴놓고 손바닥에 침을 탁 쳤더니, 침이 고창에 떨어져서 왔노라”고 우스갯소리를 한다. 하지만 사실은 우연히 들른 고창에서 귀농귀촌협의회와 기술센터의 도움이 없었으면 우리의 귀농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지나가다 들린 부부에게 빈집을 소개해 준다는 게 결코 쉽지 않은데(그분들은 마침 빈집이 있어서 소개해 주었겠지만), 처음 보는 분들의 따뜻한 애정이 우리에게는 감동이었다. 대부분의 베이비부머들이 그렇듯 떠밀리듯, 흘러들듯 귀농(?)을 했다. 처음엔 귀농이라고 하자니 농사기술도 없고, 몸도 부실하고, 경작할 토지도 없었다. 그렇다고 귀촌이라 하자니 돈도 없는 주제에 염치도 없었다. 그래서 귀농을 했다고 할지, 귀촌을 했다고 할지 정체성의 혼란이 오기도 했다.
귀농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거의 6개월을 우리 부부가 정착할 수 있을만한 지역을 찾아다녔다. 그러다 고창에 온지 6개월 후인 2011년 11월에 선운사 뒤편 담바우라는 산속마을에 3000평의 밭을 매입했다. 또 어떤 작물을 택할지를 결정하기위해 고창의 선진농업인들을 찾아 자문을 구했다.
많은 우여곡절과 고민 끝에 포도 한그루에 2000송이를 맺는 유기농포도의 장인이며, 대한민국 신지식인인 도덕현 선생님을 멘토로 친환경시설포도와 노지 복숭아를 재배하게 됐다.
◇‘왕년’은 중요하지 않다, ‘내일’을 보라 = 우리가 귀농 한 경험을 바탕으로 귀농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몇 가지 조언을 하려고 한다. 특히 도시에서 얼마 남지 않은 돈으로 왕년의 자기스펙에 자만하고 사업을 벌이려는 사람들이나 프랜차이즈의 유혹에 솔깃한 사람들이라면 꼭 한번 경청하기를 바란다.
첫째, 귀농하고자 하는 지역을 먼저 확실히 정해야한다. 먼저 발품을 팔고, 그 지역의 기술센터나 귀농상담소를 찾아봐야한다. 정착지를 선택하는 것도, 향후 어떤 작물로 먹고사느냐 만큼 중요하다. 지원이 많은 지자체라면 많은 사람들이 귀농하지 않는 뭔가(?)가 있을 수 있고, 지원이 적은 지자체는 귀농해 봐야 찬밥일 뿐 먹고살기 힘들 수도 있다.
수도권 주변 땅은 거의가 서울의 있는 사람들의 소유이고, 기획부동산이 훑고 간 경우가 대부분이다. 만일 자신이 하고자 하는 목표가 정해져 있다면, 거기에 맞춰 지역을 찾아야 한다. 무화과를 심으려면, 장류를 제조하려면, 소를 키우려면 어디가 좋을까? 복분자를 짓고 싶다면 고창을 우선순위로 두듯이 말이다.
둘째, 집이나 땅을 먼저 사지 않는 게 좋다. 100여 평이 넘는 대지위에 그럴듯한 기와지붕의 농가주택이 3000만~4000만원이라면 도시인 개념에선 “우~와, 싸다”이겠지만 그 집을 중심으로 활동범위의 제약을 받게 된다. 집주변에서 땅이 없다면 다른 지역으로 출퇴근하며 농사를 짓게 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
먼저 전세든 월세든 아님 공짜든 거주할 집을 구하는 게 첫 번째지만 사는 건 심각하게 고려해보고 결정해야 한다. 개인적인 생각은 귀농 후 발품을 팔며, 매입이든 임대든 땅을 먼저 알아보는 게 집을 매입하는 것보다는 우선일 것 같다.
셋째, 작물은 그 지역의 특산물이 가장 안전하다. 고창이라면 수박, 복분자, 고추 등 일단은 수매가 확실한 작물이 좋다. 남들이 안하는 것을 했다가 만약 수매가 안 되면 낭패를 당할 수 있다. 수익성이 아무리 좋아도 10개를 생산해서 3개만 판
다면 문제다. 때문에 농사지을 땅의 날씨, 바람의 방향, 주변 환경, 땅의 성질, 멘토의 확보 등을 고려해 결정해야 한다.
용인에서 목회활동을 하면서 고창에서 땀 흘려 가족농사를 짓는 성은주 목사님은 “농사에는 하층농사, 중층농사, 상층농사가 있다”고 우스개를 하곤 한다. 하층농사는 고추, 수박, 고구마, 양파 등 온갖 과채류를 지칭하는데 이 작물들은 바닥을 박박 기며 농사를 지어야한다는 것이다. 중층농사는 블루베리, 복분자, 버섯, 아로니아 등으로 이건 서서 허리를 약간 숙이고 농사를 짓는다. 상층농사는사과, 배, 복숭아, 감, 포도 등 온갖 과수류를 말하는데 허리를 꼿꼿이 펴고 농사를 짓는 것을 빗댄 얘기다. 우리의 경우는 상층농사를 선택했다.
그런데 귀농 3년차인데 아직도 수입이 없고, 돈만 나간다. 거품은 많이 줄었지만 농촌 살림도 고정적으로 들어가는 생활비가 있다. 남들이 복분자를 몇 킬로그램 팔아 얼마를 벌었다고 말하면 괜스레 힘이 빠지고 주눅이 든다. 또 예측 못 할 기후조건에 한순간에 성목이 죽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당장의 소득을 바라고 하층농사를 택하면, 30~40년은 기본인 기존 원주민의 발끝만 따라가야 한다. 몸 고생은 장난 아니게 힘들고, 항상 몸으로 때울 뿐 향후 미래소득이 지금보다 나아지진 못한다. 이렇게 힘들다 보면 집에 계신 사모님께서 보따리를 쌀 수도 있다. 그렇다고 여기는 고추, 저기는 오디, 나머진 감나무 하는 식으로 접근하면 더 힘들 수도 있다. 작물의 선택은 신중해야한다.
◇작지만 강한‘강소농’이 해답이다 = 넷째, 강소농을 꿈꿔야 한다. 땅의 크기는 상관없다. 재배 면적이 크면 수입이 배로 생기겠지만, 인건비도 배로 나가고 만약 잘 안될 때는 손해도 곱절로 볼 수 있다. 작지만 강한, 작지만 알찬, 작기에 덜 힘든 강소농을 목표로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착 후 교육을 잘 받고 인적 네트워크를 강화해야 한다. 귀농과 귀촌을 같이 생각하는 베이비부머 세대라면 더욱 그렇다. 기술센터를 활용한 각종교육과 멘토 확보에 공을 들이고, 진정한 강소농의 꿈을 실현하기 바란다. 누가 뭘 심어 얼마를 벌었더라는 풍문들은 무시해야 한다.
다섯째, 지원에 민감할 필요가 없다. 귀농하는 사람들 중에 “고창에 오면 뭘 주나요?” “돈은 얼마나 줘요?”라고 묻는 이들이 있다. 도시에서 시골 오는 게 다 자기 개인사정 때문이지, 시골에서 오라고 애걸하는 건 아니다.
지원을 목표로 사업을 하게 되면, 그래서 자신입장과 상관없이 지원 사업을 받게 되면 결국엔 자부담금액은 날아가고 융자부분은 빚으로 남게 된다. 열심히 하다보면 지원받을 기회도 온다. 지원이 목표가 되면 안 될 것이다.
·귀농 전 거주 지역: 경기도 수지
·귀농 전 직업: 기업 퇴직 후 자영업
·귀농 결심동기: 노후준비
·귀농 선택작목: 복숭아, 포도
·귀농귀촌 교육이수 실적: 없음
·귀농연도: 2011년
·귀농시 나이: 만 55세
·귀농지 선택사유: 농업특화도시
·귀농시 영농기반: 없음
·귀농 초기자금: 땅 3000여평(1억원), 집 건축비용 1억원
·현재 영농규모: 포도하우스 800평, 복숭아 1000평
·연간 수익: 아직 없음(내년 3000만원 예상)
쉬운 결정은 아니었지만 한 살이라도 더 젊을 때 결행해야만 했다. 고향 마을로 돌아왔지만 시내에 거처를 두고 출퇴근하는 우리는 어른들의 눈에 이상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적응기를 거치고 복분자 농사를 지으며 어른들과 소통을 해갔다. 이젠 시골생활의 불편함도 즐길 수 있는 작은 여유가 생겼다.
◇3년의 준비, 2년의 시내생활로 연착륙 = 요즘 언론에서 귀농귀촌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있다. 노후대책 또는 새로운 사업으로 농업을 선택하는 등 귀농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많다. 예전에는 도시의 삶이 동경의 대상이었지만 요즘은 인터넷과 다양한 정보를 통해 농촌에서의 새로운 출발을 꿈꾸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편리한 도시생활을 접고 농촌으로 떠나온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도 편리한 귀농을 결심했지만 많은 망설임과 걱정에 선뜻 결정을 내릴 수는 없었다. 귀농을 꿈꾸며 머릿속으로는 하루에도 몇 번씩 여러 채의 집을 짓기도, 부수기도 했다.
어떤 농사를 지을 것 인지, 시골에서의 정착은 어떻게 할 것인지 고민하며 귀농교육을 하는 곳을 찾아 강의도 듣고, 자료도 찾아 읽으며 준비한 기간만 3년이었다. 나름 귀농공부를 하고 결정을 내린 시기는 2009년 2월. 큰아이가 고3, 작은아이는 중3이었다. 주변에서는 아이들의 가장 중요한 시기에 어떻게 하려고 시골로 가려는지 모르겠다며 반대했고, 아이들도 크게 반기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나이 한 살이라도 젊었을 때 귀농을 하는 게 옳다는 생각에 고3인 큰아이만 외할머니께 남겨두고 고향인 정읍으로 내려왔다.
어린 시절 시골집을 떠나 도시에서 살면서 명절이나 특별한 날에만 선물꾸러미를 들고 찾던 고향 작은 마을로의 귀농은 가족 모두에게 포근한 안식처 같은 느낌보다는 불편하고 어렵고 힘든 공간과 시간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우선은 정읍 시내에 작은 전셋집을 마련했다. 연착륙의 시간을 갖기 위해서였다.
우리 부부는 시골마을로 출퇴근을 하며 주변도 익히고, 농사일도 배우고, 농업기술센터에 다니며 교육도 열심히 받았다. 일년 동안 서툰 솜씨로 고추농사를 조금 지으며 얻은 수익은 도시에서의 한 달 월급도 되지 않은 적은 금액이었다. 그저 헛웃음만이 나올 뿐이었다.
현지에서 직접 보고 듣고 경험한 현실은 책으로 보고 교육센터에서 몇 시간씩 강의 듣는 것과는 다른 부분이 참 많았다. 관행으로 농사를 지어온 시골 어른들과의 소통은 참 어려운 문제였다. 아무리 좋은 농법이라 해도 어르신들의 경험과 관행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 의견을 나누기도 하고, 설명도 해 보았지만 교육으로 배운 다양한 농법과 관행농법의 차이점을 좁히는 것은 가장 큰 어려움 일 뿐만 아니라 넘기 힘든 벽과도 같았다.
시내에서 아이학교 보내고 8시쯤 시골마을로 들어오는 우리부부를 보며 “무슨 일을 해가 중천에 뜬 뒤”에 시작하느냐며 혀를 끌끌 차기도 하고, 저녁 무렵 퇴근하는 모습을 보며 “일을 하다가 말고 간다”고 핀잔을 주기도 했다. 새벽녘 동틀 때 나와 논과 밭을 둘러보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하루 종일 들에서 일하다 해가 지면 고단한 몸을 눕히는 시골 어른들이 보기에는 당연히 게으르기 이를 때 없는 모습이었을 것이다.
수시로 교육이 있다며 나가는 뒷모습을 보며 “도대체 뭘 한다는 것인지…”, “뭔 교육을 하루가 멀다 하고 받는다는 것인지…”라 여기는 따가운 눈총을 받아야만 했다. 저녁 무렵 마음에 맞는 분과 막걸리 한 잔 하는 것으로 어려움을 이야기하며 조언을 듣고 방향을 조금씩 수정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홍보·판로 걱정 없고 2차 가공 쉬운 복분자 선택 = 귀농을 계획하며 여러 가지 고려할 문제들이 많지만 어느 곳에서 어떤 작물을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다. 1년 동안 교육과 견학을 반복하며 우리는 지역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작물인 오디와 복분자를 선택했다.
복분자라는 작물을 잘 알아서가 아니라 지역의 특산물, 지역의 브랜드를 선택한 것이었다. 지역에서 홍보도 많이 해 주고, 판로를 쉽게 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이었다. 또한 재배방법이나 정보 등을 쉽게 접할 수 있다는 점과 2차 가공 상품으로도 쉽게 다가갈 수 있다는 생각에서 선택한 것이었다.
시골생활을 하면 생활비가 적게 든다고 생각했다. 물론 도시보다는 적게 들어간다. 그래도 꼭 들어가야 하는 고정비용이 있는데 농사로만 그 비용을 만든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귀농이나 귀촌, 전원생활을 하려면 무조건 꼭 필요한 것은 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택도 있어야 하고, 농지도 있어야 하고, 농기계도 구입해야 하고, 농사 운영비도 있어야 하고 더군다나 꼭 필요한 생활비, 아이들 학비 등.
귀농 후 2년차. 교육에서 듣고 배운 대로 우선 가공공장을 짓기로 했다. 시골에서는 땅의 분류가 참 복잡하다는 것을 알았다. 눈으로 보기에는 논인데 토지대장에는 대지, 전, 답 등으로 조각조각 나뉘어져 있는 경우가 많고, 실제 면적과 서류상의 면적이 크게 다를 뿐 아니라 대지가 아닌 경우 건물을 짓고자 할 때 형질변경을 해야 하는 번거로움과 비용지출 등 가공공장 계획에서 착수까지 6개월이라는 시간을 이리저리 뛰어다녀야 했다.
◇귀농자금? 세상엔 공짜가 없다 = 정부에서 귀농자금을 지원해 준다는 이야기가 있어 귀농자금을 문의해 보았다. 정부 귀농자금은 선착순이 아니라 평가제이므로 선정과정과 수급이 참 어려웠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말처럼. 조건도 너무나 까다로울 뿐 아니라 지원 자금 또한 저리로 해 주는 융자였다. 그것도 신용등급이 낮거나 담보가 없으면 불가능했다.
지원 자금을 받기 위해 준비한 서류만도 그야말로 한 보따리였다. 우여곡절 끝에 2010년 4월 드디어 가공공장을 짓기 위한 첫 삽을 뜰 수 있었다. 가공공장을 준비하는 중간 중간 오디밭, 복분자밭도 조성하고 정신없이 달리고 또 달린 시간이었다.
교육을 받고 가공공장을 짓고 여러 가지 정착을 위한 준비를 하는 동안 소소한 일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교육에서 배운 대로 블로그를 통해 기록해 나갔다. 우리를 알리기 위한 작은 소통으로 시작한 블로그는 시골에서 좌충우돌 하며 살아가는 이야기를 전달하며 도시생활을 하고 있는 많은 분들을 알게 됐고 생활의 활력도 돼 주었을 뿐 아니라 직접 생산, 가공한 제품을 처음으로 출시했을 때 아낌없는 응원과 함께 구입을 해주는 소중한 고객이 돼 주었다.
도시에서 귀농하는 사람들에게 인터넷과 SNS는 꼭 배우기를 권한다. 농산물을 가공하고 또 직거래 하지 않으면 힘들게 농사 지어도 손에 쥐는 돈이 적다. 그래서 어떻게 파느냐가 중요하고 어려운 부분이다. 때문에 인터넷을 통한 홍보와 SNS는 반드시 배우려고 노력해야 한다.
‘“귀농은 3년을 준비하고, 수입 없이 3년을 견딜 수 있어야 성공한다”’는 얘기가 있는 것처럼 우리는 귀농 후 1년은 교육으로, 2년째는 가공공장 짓는 일로, 3년째는 보금자리인 집을 완성한 것으로 완전한 귀농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그리고 가슴 뿌듯한 첫 제품도 출시됐다.
홈페이지를 오픈하고, 지마켓, 옥션 등 오픈마켓에 입점하면서 본격적으로 온라인 판매를 계획, 실행해 갔다. 다양한 교육과 다양한 사람과 다양한 정보를 배웠다. 기존 농민들은 그저 생산자로서 충실하면 되었지만 사회가 바뀌고 산업이 발전하면서 1차 농산물 또한 단순 재배, 생산이 아니라 재배, 생산, 가공, 유통, 판매, 기획하고 책임까지 져야 하는 요즘 제품을 디자인 하는 경영 마인드가 없이는 농촌에서 살아남기는 힘들다는 것을 눈으로 보고 느꼈다.
우리 부부도 블로그뿐 아니라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스토리를 시작했다. 어쩌면 도시에서 평범한 생활을 하는 직장인이나 주부들이 굳이 몰라도 되는 부분까지 늦은 밤에도 눈 비비고 앉아 배우고 챙겼다. 농사도 사업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악착같이 공부했다. 매일같이 사진을 찍고 기록하며 끊임 없이 쏟아지는 정보를 스폰지처럼 받아들이며 실천해 나갔다. 10가지를 배우면 꼭 한 가지라도 실천하자는 생각을 가지고 연구를 하고 토론을 했다. 그러다 부부간에 큰 다툼도 있었지만.
◇정신없이 달려 온 4년, 이젠 막걸리 좋아하는 촌부 = 그렇지만 힘들어도 함께 이겨나가야 하는 과정을 거치며 살다보니 이제는 귀농을 생각하는 많은 분들이 농장을 찾아와 함께 공유하고 토론도 하게 됐다. 귀농 후 4년. 어느덧 즐겨하던 와인보다는 막걸리가 더 좋아졌다. 빽빽하게 들어선 도시의 건물보다는 눈뜨면 마주하는 높은 산이 더 정겨워졌고 먼 길 찾아와
주시는 손님이 너무나 반갑다.
아이들 성화에도 절대 반대를 고수하며 키우지 못하게 했던 동물에게도 친구인 듯 다정히 말을 건네게 되었고 논으로, 밭으로 장화신고 뛰어 다니며 간섭도 하고 신기해하고 자연이 주는 선물에 감사하게 되었고 시골생활의 불편함도 즐길 수 있는 작은 여유가 생겼다.
앞으로 시골생활에 어떤 변화가 있을지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이젠 열심히 배우고 열심히 뛰면 행복한 일이 가득할 것이라는 희망을 4년이란 시간이 선물해 줬다. 만약 귀농을 꿈꾼다면 절대 대단하고 거창한 성공 비결에 한눈팔지 말고 현재에서 조금 다르게, 지금보다 조금 낫게 그렇게 천천히 시골생활에 적응해 가다 보면 작지만 강한 농부가 될 수 있다.
·귀농 전 거주 지역: 인천
·귀농 전 직업: 출판업
·귀농 결심동기: 농업에 대한 비전
·귀농 선택작목: 복분자, 오디
·귀농귀촌 교육이수 실적: 없음
·귀농연도: 2009년
·귀농시 나이: 43
·귀농지 선택사유: 고향 마을
·귀농시 영농기반: 없음
·귀농 초기자금: 없음
·현재 영농규모: 없음
·연간 수익: 2012년 1억7000만 원 / 2013년 상반기 1억 5000만 원
“네가 가거라. 망얀족에게. 네가 직접 가거라!”
박운서(75·사진) 전 통상산업부 차관이 한국에서의 모든 명예를 내려놓고 필리핀 생활을 선택하게 된 결정적인 한 마디다. 박 전 차관은 꿈에서 필리핀 선교 생활을 시작하라는 목소리를 들은 후 2005년부터 벌써 9년째 현지에서 망얀족을 위한 삶을 살고 있다. 대기업 최고경영자(CEO)를 역임한 전직 경제부처 관료 출신이 필리핀 오지에서 쌀농사꾼이 되기까지 험난했던 여정을 그는 ‘네가 가라, 내 양을 먹이라’는 책 발간을 통해 새롭게 풀어냈다.
박 전 차관은 제6회 행정고시에 합격해 뉴욕총영사관 경제협력국 영사, 대통령 경제비서관, 통상산업부 차관 등을 역임한 정통 경제통이다. 관료 시절 대외협상에서 보여 준 기백으로 ‘타이거 박’이란 별칭을 얻었고, 공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한국중공업(현 두산중공업) 대표이사 사장, LG상사 대표이사 부회장 및 데이콤ㆍ파워콤 대표이사 회장 등을 역임했다.
박 전 차관은 이 책에서 2005년을 중요한 인생 전환의 한해로 기억했다. 은퇴 이후 필리핀 선교 활동을 위해 현지에서도 오지인 민도로섬으로 돌연 떠난 첫 해이기 때문이다. 선교의 일환으로 쌀농사를 시작했지만 처음엔 시행 착오도 많았다. 농사와 관련해선 일자무식이었던 데다, 현지에서 고용한 일꾼들도 야속하게 구는 통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농사 시작 2년 후인 2007년부터는 효과가 눈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일당제 임금 방식을 도급제로 바꾸고 직파법이 아닌, 이양법을 고집하면서 주변 농부들보다 평균 20~30% 더 생산했다. 연간 평균으로는 약 4000가마의 벼를 수확했다. 박 전 차관은 쌀농사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자 1년 수확량 중 벼 400가마를 개척 교회와 교육 입양생들을 돕는 데 사용하기 시작했다.
더불어 박 전 차관은 인근 아토이 마을에서 망얀족들을 위한 본격적인 선교 활동을 시작했다. 망얀족은 필리핀에서도 가장 빈곤에 시달리는 부족이다. 박 전 차관은 아토이 마을에서 망얀족의 처참한 모습을 직접 목격하고 선교 활동에 대한 의지를 다시 불태웠다. 망얀족에게 따뜻한 쌀밥을 배불리 먹이기 위해 아토이 마을에 처음으로 예배당을 만들었다.
이후 박 전 차관은 리마스, 피난타오, 다쿠탄, 산시드로, 히낭오 등 총 12곳의 마을에 망얀족을 위한 예배당 설립을 확대해 나갔다. 일흔이 넘은 박 전 차관은 이 과정에서 발목이 부러지고 사고를 당하는 등 숱한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사람들이 발길이 잘 닿지 않는 더 깊은 오지로 들어갔다. 교통수단도 두발과 물소 등에 불과했고, 건축 자재도 모두 등짐으로 옮겨야 했다. 과거 경제관료 시절 ‘타이거 박’으로 불릴 만큼 저돌적이었던 그의 추진력이 빛을 발했다.
이에 외부인에 배타적이었던 망얀족도 변화했다. 먼저 박 전 차관을 따르는 가하면, 교육에도 적극적으로 임하고 있다. 박 전 차관은 필리핀 생활을 시작하면서 몸무게가 15kg 빠졌다. 하지만 건강은 오히려 40대로 돌아왔을 정도로 좋아졌다. 우리나라의 많은 고위공직자들과 재벌들이 노블레스 오블리주는커녕 갖은 비리에 연루돼 매스컴을 장식하는 현실 속에서 박 전 차관의 이 같은 행보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충청남도 홍성군 홍동면은 친환경농업, 풀무학교, 생협운동 등 농업과 관련해 특별한 역사를 만들어 온 지역으로 잘 알려진 만큼 귀농하고 싶어도 집이나 땅 구하기가 어려워 쉽게 발을 들여놓을 수 없는 곳이다. 금창영 씨는 지금으로부터 4년 전 이곳으로 귀농했다.
◇농부가 된 역사학도 = 건강에 적신호가 올 때까지 연구에 매진하던 역사학도. 귀농 전 그의 모습이다. 그런 그가 귀농을 결심하게 된 것은 가족에 대한 가장으로서의 책임감 때문이었다. 그의 아내가 일을 그만두면서 더 이상 학업만을 생각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고 서울보다는 시골에 해답이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시골은 역사를 탐구하는 그의 일이나, 책을 만드는 아내의 일에도 적합한 장소라고 생각됐다. 홍동과의 인연은 먼저 귀농해 살고 있는 선배를 통해 이어졌다.
둘째 아이를 임신한 아내를 서울에 두고 먼저 내려와 빈집과 농지를 찾았다. 6개월 후 가까스로 가족이 함께 머무를 수 있는 곳을 찾았고 이로써 본격적인 그의 시골살이가 시작됐다.
◇세 명의 회원으로 시작한 농산물 직거래 = 요즘은 마음만 먹으면 어렵지 않게 귀농 교육을 접할 수 있는 만큼, 충분한 학습과 준비과정을 거쳐 귀농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 도시에서 하던 일과 다른 일을 하면서 새로운 문화적 환경 속에서 적응해 살아가는 일이 그렇게 녹록치 않기 때문이다. 충분한 준비가 실패 확률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을 것이라는 게 보통의 생각이다. 그러나 금씨는 이러한 ‘귀농의 정석’과는 거리가 있는 길을 택했다.
시골 출신이지만 농사일을 전혀 모르는 채 시작한 생활의 무게는 버거웠다. 농사를 짓고도 소득을 내지 못해 아내와의 말다툼이 잦아졌다. 그날도 아내와 다투고 집밖을 서성이던 날이었다. 절박함이 지인들에게 전화를 걸게 했다. 자신이 재배한 농산물을 정기적으로 상자에 담아 보낼 테니 팔아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렇게 세 명의 회원이 탄생함으로써 농산물 판매를 통한 수입 창출이 가능하게 됐고 본격적인‘시민지원농업(Community Supported Agriculture, CSA)’이 시작됐다.
◇상자 속에 담긴 철학 = 시민지원농업이란 농업인은 소비자 회원들에게 정직하게 생산한 농산물을 공급하고 소비자 회원
들은 그에 합당한 대가를 지불하는, 생산자와 소비자가 함께하는 농업의 한 형태를 일컫는다. 금씨가 꿈꾸는 농업은 이렇게 생산자와 소비자간의‘관계’가 살아있는 농업이다.
그는 생산자가 소비자의 가족 구성, 건강 등까지 소비자에 관한 것이라면 모두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생산자가 가족을 대하듯 소비자의 안부를 묻고 좋아하는 농산물이나 건강 상태에 맞는 먹을거리를 챙겨줄 수 있어야 한다는 지론이다.
때문에 금씨가 생산한 농산물을 먹고 건강이 좋아졌다든지, 어렸을 적 먹었던 맛과 흡사하다든지 하는 회원들의 인사를 듣는 게 그의 가장 큰 보람이자 기쁨이다. 키우던 배추의 속이 차지 않아 걱정하고 있었을 때, 어머니가 아프시니 꼭 그 배추를 보내달라고 하는 소비자의 전화를 받고 나서 느꼈던 벅차오르는 행복을 잊을 수 없다는 그이다.
금씨가 정기적으로 보내는 일명 ‘나눔상자’에는 그가 생산한 친환경 제철 농산물 6~7가지와 이웃집 할머니가 생산한 농산물 3~4가지가 담긴다. 그가 생산하지 못하는 농산물과 가공품은 이웃 귀농인들이나 홍성유기농영농조합, 풀무학교생협 등에서 사서 보낸다. 나눔상자 하나당 가격은 3만원, 소비자는 한달을 기준으로 원하는 만큼 횟수를 정해 이용할 수 있다.
현재 회원은 30명 정도인데, 입소문으로 회원이 60명까지 증가한 적이 있었다. 회원 수는 너무 많아도 관리가 어렵고, 부부가 감당할 수 있는 작업량을 초과하기 때문에 30명 정도가 적당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처음 시작할 때에는 나눔상자를 계속하게 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고 하지만 이제는 전체 소득의 60%를 차지할 정도의 안정적인 소득원으로 정착했다. 그럼에도 그는 도시 소비자 회원들의 재미와 만족을 더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를 계속 고민하고 있다.
◇고집스런 농사 방식 = 금씨는 친환경농업을 한다. 그러나 가능하면 토종종자를 사용하고 논에는 우렁이나 오리, 쌀겨를 넣지 않으며 밭은 비닐 멀칭을 하지 않고 모두 손수 풀을 뽑는다. 보통 하는 친환경농업보다 훨씬 엄격하게 농사를 짓고 있는 셈이다.
또 논에 들어갈 때에도 장화를 신지 않고 흙의 감촉을 즐기며, 작물을 돌보면서 대화를 나눈다. 논밭에 들어가면 작물들이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고 호미 들고 한 고랑씩 김을 매어 나갈 때 행복을 느낀다고 하니, 이쯤 되면 농사일이 그에게 천
직이 아닌가 싶다.
게다가 그는 농사 욕심이 아주 많다. 지금도 80가지 이상의 작물을 심고 많을 때는 130가지 이상의 작물을 가꾸지만, 아직까지 키워보지 않은 작물들에 욕심을 낸다. 하지만 다품종 소량생산을 추구하기 때문에 이것이 규모의 확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가족이 행복한 귀농 = 금씨가 가족이 함께 살아갈 보금자리로 홍동을 선택해 선뜻 내려올 수 있었던 데에는 아내와 아이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곳이라는 확신도 한 몫 작용했다. 홍동에는 젊은 사람들이 많아 논생물, 비폭력대화 등에 대한 학습모임 뿐만 아니라 목공예, 장구 등 문화예술 강좌도 다양하게 이뤄지고 있어 금씨의 부인 장현숙 씨도 이중 여러 활동들에 참여하고 있다.
또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자연 속에서 맘껏 뛰노는 생활을 즐거워하고, 무엇보다 친구가 많다고 좋아한다. 면 단위 어린이집이 현재 60~70명의 아이들을 맡고 있는데도 여전히 자리가 부족해 줄을 서있는 정도라고 하니 홍동은 역시 특별한 시골이다.
금씨는 가족의 행복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기에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농사를 확장하지 않는 것을 또 하나의 원칙으로 삼고 있다. 농사일을 하다보면 하나라도 더 심어 더 거두고 싶은 욕심이 생기지만, 정직한 친환경농업과 규모화가 얼마나 양립하기 어려운 것인가를 잘 알고 있기에 적정수준을 유지하려 한다. 대신 이웃과 함께 먹을거리와 여유, 쉼을 나눌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공유하고자 하는 꿈을 꾸고 있다.
◇여럿이 함께 꾸는 꿈 = 금씨가 주도해 홍동에서 처음 연 ‘파머스마켓’은 여럿이 함께 가고자 하는 그의 생각을 확인할 수 있는 일례이다. 그동안 파머스마켓에 대한 논의는 많았지만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생산자들을 설득해 20여 명을 모았고, 전단지를 돌려 행사를 알렸다.
주변에선 행사장이 휑할 것을 염려했지만 150여명의 소비자들이 행사장을 찾아 참여한 생산자들이 즐겁게 행사를 마칠 수 있었다. 작은 시작이었지만 새로운 가능성을 확인한 의미있는 시간이었다.
귀농 첫 해 논 1000평, 밭 1000평으로 시작한 그는 이제 논 2100평, 밭 2300평, 하우스 150평을 일구게 됐다. 그는 ‘준비 없이 귀농해도 행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부부 모두 잘 몰랐기 때문에 고생도 많이 했지만 덕분에 계산하지 않고 도전할 수 있었고 이웃 주민들의 도움도 많이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의 귀농 방식이 정답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너무 많은 생각과 걱정과 두려움으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면, 높은 연매출을 올리는 것만이 행복의 조건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그의 조언을 들어봄직 하다.
요즘 ‘폭풍성적’이란 말이 있다. 부모들은 자녀를 키우면서 성적이 폭풍처럼 올라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 그런데 모든 일이 그렇듯이 조급함은 대세를 그르친다. 서두르면 결코 큰일을 이루지 못하는 법이다. 서두르면 지는 거다. 자녀를 키우는 부모들이 가장 경계해야 할 점이 조급하게 ‘폭풍성적’을 바라는 것일 게다. 그러나 폭풍성적은 요행을 바라는 것과 진배없다.
자녀를 키우는 부모 입장에서 미국의 케네디가(家)만큼 교훈을 주는 가문도 없다. 보잘것없는 아일랜드 농부 출신의 가난한 이민자 가문에서 4대 110년 만에 대통령을 탄생시켰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 선조는 당시 아일랜드를 휩쓴 감자 대기근으로 여비조차 없어 이웃에 빌려 야반도주하듯 아일랜드를 떠났다. 물론 돈을 갚았을 턱이 없다. 그러나 이후 케네디가의 행적은 다르다.
케네디가의 가장 큰 성공 비결은 바로 부모가 한 가문의 CEO가 되어, 세대를 이어가는 단계적 시나리오를 세웠다는 것이다. 명문가를 이룬다는 것은 여러 세대 간의 공동 작업이지 결코 한 세대가 이룰 수 있는 게 아니다. 케네디가의 이야기는 아일랜드의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패트릭 케네디, 즉 케네디 대통령의 증조부(1대)가 미국에 이민을 오면서 역사가 시작된다. 증조부는 이민의 고단함 때문인지 폐결핵으로 요절했다.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그 아들(케네디의 할아버지·2대)은 초등학교를 중퇴하고 술통 장사를 하면서 생계전선에 나섰다. 점차 주위에서 신망을 얻자 급기야 주의원에 당선되었고 정치가로의 첫발을 내디디게 되었다. 이어 3대인 케네디 아버지는 하버드대를 졸업한 후 은행장, 사업가, 외교관을 걸쳐 루스벨트 대통령의 후원회장을 맡으면서 본격적인 정치 가문으로서의 기반을 닦아 주게 된다. 그리고 그 무대에 오른 이들은 바로 미국 역사를 뒤흔든 케네디의 4형제였다. 존 F. 케네디는 최연소 미국 대통령이 되었고, 그 형제들 역시 미국을 대표하는 정치가가 되었다. 그리고 현재 케네디가의 자녀들 역시 각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명문가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케네디가를 큰 시나리오로 보면, 1대는 생활의 터전 준비, 2대는 경제력 기반 준비, 3대는 경제력을 바탕으로 한 인적 네트워크 구축 그리고 4대는 가문의 비전 실현이라는 큰 그림이 나온다. 이 큰 시나리오 중심에는 ‘케네디 가문의 기획자’와 같은 역할을 담당한 케네디 할아버지가 자리 잡고 있다. 그는 어떤 분야에서든 ‘최고가 되기 위해 늘 일등을 하라’고 강조했는데 이는 가난한 아일랜드계 후손이 미국 사회에서 당당하게 인정받으려면 오로지 최고가 되어야만 했던 역사적 배경에서 나온 것이었다.
자녀를 둔 부모의 입장에서 케네디 가문을 들여다보면 가슴이 용솟음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비록 지금은 아무리 가난해도 세대를 이어 서두르지 않고 노력하면 누구나 숭고하게 살 수 있다는 희망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계속)
“자격증을 따고 카페에서 안정적으로 일하게 되어 마냥 즐겁고 생활에 활력이 넘치네요.”
‘인생 2막’을 준비하는 노숙인들이 운영하는 커피 전문점이 문을 열었다. 서울시의 노숙인 자활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지난 4월부터 3개월간 진행된 바리스타 교육과정 참가자 중 자격증 취득한 3인이 나선다.
서울시는 14일 영등포 보현의 집 입구에 마련된 홈리스카페 ‘내 생에 에스프레소' 1호점이 공식 개소식을 갖고 운영에 들어간다고 밝혔다.
카페에서 근무하게 된 바리스타 원모(60) 씨는 “바리스타 교육을 받으면서 커피의 맛을 느끼고 새로운 인생의 맛을 알게 됐다”며 “쉽지 않은 도전이었지만 다행히 자격증을 따고 카페에서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게 돼 즐겁고 생활에 활력도 얻게 됐다”고 말했다.
‘내 생에 에스프레소’는 서울시가 노숙인들의 자활과 일자리 제공을 위해 운영하는 카페로 1호점에는 노숙인 바리스타 3명과 함께 연담스님이 카페매니저로 참여한다. 연담스님은 본인이 바리스타 자격증이 있고 커피 제조에 남다른 관심이 있어 카페 운영에 조언을 하다, 참여자들의 열정적인 모습에 하나가 되어 교육과 운영을 직접 도와주는 역할을 하게 됐다.
이 카페의 운영시간은 주중 오전 9시30분에서 오후 3시30분까지이고, 아메리카노와 에스프레소와 더치커피 등 6종의 커피를 1잔당 2000~3000원의 저렴한 가격에 판매한다. 판매는 테이크아웃 형태로만 이뤄지며 특히 향후 수익금은 노숙인 자활분야에 쓰일 예정이다.
앞서 시가 지난 지난달 29일부터 카페를 시범 운영한 결과 점심시간에는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할 정도로 주민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고 있으며, 많은 날은 하루 400여 잔의 커피가 판매되기도 했다. 시는 이번 홈리스카페 운영이 정상화되면 성과를 분석한 후 2호점과 3호점도 오픈해 사회적기업으로 육성한다는 계획이다.
카페매니저인 연담스님은 “누구나 인생에서 한 번쯤은 방황을 하고 길을 잃을 수 있는데 내가 먼저 도움을 주는 것이 필요하다”며 참여하게 된 계기를 설명했다.
앞서 서울시는 자활프로그램을 통해 노숙인들을 호텔리어, 사진사, 농부로 일할 수 있게 도왔다.
김경호 서울시 복지건강실장은 “노숙인들이 스스로 희망을 품고 자립하는데 초점을 맞춰 지원하고 있다"며 "요양보조사, 중장비 운전, 조리사 등 다양한 분야로 진로를 넓히는데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