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 멀티미디어 아티스트 라즐로 모흘리 나기(헝가리 출신)는 미래의 문맹을 “사진기와 펜을 사용할 줄을 모르는 사람”이라 말한다. 사진기는 꼭 다룰 줄 알아야 하는 문명의 이기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사진이 일상에 필요한 콘텐츠로 사진을 멀리할 수 없는 시대임을 강조한 말이다. 카메라와 사진은 이미 대중화했다. 스마트폰에 장착된 카메라의 기능이 급속히 발전됨으로써 사진 대중화의 견인차 구실을 하고 있다. 침팬지도 사진을 찍을 수 있을 정도로 촬영 도구가 편리해졌고 사진은 취미를 넘어서 일상생활이 됐다. 누구나 쉽게 촬영할 수 있어서 평범한 사진으로는 시선을 끌 수 없다. 사진을 취미나 전문 직업, 어느 쪽으로 하든지 남의 시선을 끄는 사진을 남기고 싶어 한다. 어떻게 하면 그런 사진을 만들 수 있을까? 사진을 하는 사람들의 고민 중에 하나다.
촬영에서 여러 가지가 중요하나 남의 시선을 사로잡을 수 있는 촬영 기법으로 앵글을 꼽을 수 있다. 피사체를 바라보는 시선의 위치에 따라 전혀 다른 느낌의 사진을 만들 수 있어서다. 우리는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거나 카메라 뷰파인더를 통해 볼 때 대체로 키 높이에서 보게 된다. 많은 학자의 견해에 따르면 사람은 누구나 변화를 싫어한다고 한다. 어떻게 생각하면 편함을 찾는 동물이다. 사진도 같은 시각에서 바라보고 촬영하기에 함께 야외 촬영을 가게 되면 천편일률적인 형태의 사진을 찍는 게 사실이다.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려는 적은 노력이라도 기울인 사람은 분명 남다른 사진을 얻게 된다.
사진 촬영의 기본적 기법의 하나인 앵글이라고 하는 피사체를 향하는 카메라의 각도에 따라 다른 사진을 만든다. 세 가지로 구분한다. 새의 눈높이에서 바라보는 하이 앵글, 아래쪽에서 올려다보는 로우 앵글 그리고 눈높이에서 바라보는 아이 앵글이 그것이다. 자기의 눈높이를 주로 사용한다. 몸을 낮추거나 다른 방향으로의 변화를 귀찮아하기 때문이다. 쉽게 표현하면 눈에 보이는 대로 찍기 때문이다. 카메라 화면의 사각 틀에서의 균형이나 구도적 측면, 배경을 고려하지 않고 찍으려고 하는 피사체에만 시선을 집중한다. 나들이하며 손주 사진을 찍을 경우 대부분 손주한테만 신경을 쓰고 아이를 둘러싸고 있는 배경이나 색의 조화를 눈여겨보지 않는다. 아이가 입고 있는 옷의 색깔과 배경의 색이 같아 아이가 두드러지지 않음에도 셔터를 누르게 된다. 조화롭지 못한 사진이 만들어진다. 이럴 경우 위치를 바꿔보면 색다른 사진을 담아낼 수 있다.
고은 시인의 시, “그 꽃”도 시각의 변화에서 발견한 삶의 지혜를 노래하고 있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꽃 내려올 때 보았네 그 꽃” 위만 바라보고 걸었을 때 보지 못한 산자락에 곱게 피어난 꽃 한 송이, 내려오며 시선을 달리하니 보았네.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낮추어서 얻는 행복이다. 사진 촬영도 촬영자가 중심이 아닌 피사체를 진정한 주인공으로 여겨야 한다. 자연을 경외하듯 몸을 낮추고 올려다보면 새로운 아름다움이나 전혀 다른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세계적 사진작가의 유명한 작품 대부분이 올려다보고 촬영한 사진이 많다고 한다. 피사체를 기준으로 시선에 변화를 주면 분명 남다른 사진이 만들어진다.
자연을 마주하는 일은 거울을 보는 일과 같다. 자연이 거대하고 단순할수록 내 안의 껍데기는 사라지고 알맹이만 투명하게 드러난다. 그곳에서 느끼는 나는 아주 작고 또한 아주 크며 힘없고 미약한 존재다. 동시에 우주를 포함한 자연이다. 그것을 느끼는 순간의 강렬함을 잊을 수 없다. 여행이란 교실에서 배운 지식들을 현장에서 직접 느끼고 체험하는 시간이 아닐까. 많은 이의 버킷리스트인 우유니(Uyuni). 잘 알려진 소금사막과 바람이 만들어낸 놀라운 기암괴석,
붉은 빛깔의 호수, 안데스의 희귀동물 라마까지 신비함이 가득한 곳이다. 새롭고 아름다운 그 세계로 떠나보자.
해발 3660m, 세계에서 가장 높은 도시 ‘라파스’
볼리비아는 남미의 가장 가난한 나라이지만 세상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불가사의한 풍경을 간직하고 있다. 모험심 많은 전 세계의 사람들이 살아 있는 동안 꼭 한 번 가보고 싶어 하는 꿈의 여행지이기도 하다. 우유니 사막에 가려면 먼저 볼리비아의 수도 라파스로 들어가야 한다. 볼리비아의 헌법상 수도는 수크레이지만 실질적인 행정수도는 라파스로 ‘평화’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멀리서 해발 3660m에 작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모습을 보면 오색 성냥갑으로 만든 산처럼 보인다. 대표적인 사가르나가 거리 골목에는 안데스 특유의 패브릭과 장신구들을 파는 가게가 즐비하다. 재래시장은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풍긴다. 안데스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모자를 사서 쓰고 나니 금방이라도 빗자루를 타고 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부풀린 치마에 중절모를 쓰고 등짐을 진 컬러풀한 의상의 인디오 여성들 모습에서는 이국적인 향기가 느껴진다. 높은 지대라서 모든 길이 언덕처럼 되어 있어 오르내리기가 쉽지 않지만 거리마다 가득한 상점들과 사람들 보는 재미에 힘든 줄도 모른다.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신비한 ‘마녀시장’
사가르나가에서도 가장 유명한 골목은 ‘마녀시장(Witch Market)’이다. 이곳엔 말린 라마의 태아와 향료들이 기묘한 냄새를 풍기며 진열되어 있다. 온갖 색상의 돌과 장식품을 작은 병에 담아 행운의 상징으로 팔기도 한다. 남미 대부분의 나라가 그러하듯 이곳 또한 스페인이 전파한 천주교가 안데스의 전통적 제의와 만나 독특한 형태로 발전되었다. 하지만 토속신앙도 여전히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다. 천주교도인 인디오들은 하나님께 중요한 소원을 빌 때 살아 있는 라마를 잡아 바치는데, 이때 말린 라마 태아를 올리기도 한다. 온갖 허브와 목각, 희귀한 진열품을 보고 있자니 금방이라도 빗자루를 탄 마녀가 나타나 마법을 부릴 것 같다. 이곳 골목은 뭔가 음험하면서도 삶의 비밀을 들킬 것 같은 으스스함이 함께 느껴져 색다른 감흥이 일어난다. 1549년에 지어진 바로크 양식의 건축물 산 프란시스코 성당과 레스토랑, 전통 공예품을 파는 상점들, 여행사들이 즐비한 좁은 골목들은 여행자들에게 다양한 볼거리와 먹거리를 제공해준다. 라파스에 머무는 동안 시간이 허락된다면 달의 계곡(Valle de la luna) 투어를 떠나보자. 달 모양과 흡사하다고 해서 달의 계곡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곳은 마치 화성에 온 듯한 느낌을 갖게 해줄 것이다.
푸른 하늘과 맞닿은 소금사막 ‘우유니’
볼리비아 남서쪽, 해발 약 3600m에 자리 잡은 우유니 사막(Salar de Uyuni)은 남미를 대표하는 매혹적인 여행지다. 원래 바다의 땅이었던 우유니는 대륙붕의 충돌로 바다 아래의 땅이 하늘 가까이 솟구쳐 오르면서 만들어졌다. 고지대의 공기가 건조해 시간이 흐르면서 바닷물이 증발되었고 이로 인해 생겨난 소금평원 우유니는 언제 가도 아름답지만 특히 12~2월의 우기 때 가면 비가 고인 물에 푸른 하늘이 반사되어 마치 천국에 온 것 같은 착각이 일어나기도 한다. 서울과 경기도를 합친 것보다 넓은 면적의 거대한 소금사막을 사륜구동차를 타고 가로질러가다가 다른 행성에 착륙이라도 한 듯 소금사막 한가운데 발을 내딛었다. 선글라스를 끼지 않으면 눈이 멀어버릴 것 같은 사막의 풍경 앞에서 모두들 카메라 셔터를 눌러가며 인생샷 한 장이라도 건져보기 위해 바쁘다. 소금사막의 광활한 풍경 앞에 서면 삶의 가장 소중한 것들이 떠오른다.
2박 3일의 우유니 사막 투어가 가장 인기
우유니 사막 투어는 초입의 작은 광산마을 포토시에서 시작한다. 이곳에서 사람을 모아 1일 투어, 2박 3일 투어 등 다양한 투어를 한다. 시내에는 많은 여행사가 있다. 경쟁이 심한 만큼 몇 곳을 비교해서 선택하는 것이 좋다. 길이 험해 사륜구동차를 이용해야 하며 투어 비용은 한 대를 기준으로 책정되므로 함께 투어 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비용은 낮아진다. 우유니 사막의 아름다움을 충분히 느끼려면 2박 3일 투어가 좋다. ‘우유니’ 하면 대부분 하얀 소금사막만 생각하는데, 기암괴석으로 가득한 사막 지대와 플랑크톤 작용으로 인해 붉은 빛을 띠는 신비로운 호수, 눈 덮인 산, 수많은 플라밍고를 볼 수 있는 호수까지 희귀한 풍경이 가득하다. 또 소금호텔을 둘러본 후 눈부신 사막 한가운데 앉아서 맛보는 라마 스테이크의 맛은 잊을 수 없다. 조금 전 귀엽다고 쓰다듬어주었던 라마가 입속으로 들어가는 상황은 조금 께름칙하지만 그토록 부드러운 고기는 태어나 처음 맛보는 진미였다.
피로를 말끔히 씻어주는 온천욕
덜컹거리는 지프를 타고 뜨거운 태양 아래를 달리는 동안 바라보는 창밖 풍경은 그야말로 드라마틱하다. 바람이 깎은 예술조각들이 가득한 협곡과 붉은 빛깔의 신비로운 호수를 지나 무리지어 날아오르는 플라밍고를 만날 때까지….
이토록 짧은 기간에 신비로운 풍광을 흠뻑 경험할 수 있는 곳도 드물다. 변화무쌍하고 이국적인 향기를 열린 마음으로 느낄 수 있도록 해준 건 함께 차를 타고 2박 3일 동고동락한, 칠레와 독일에서 온 친구들이다. 아름다운 풍경에 감탄할 때는 국경이나 언어 장벽이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았다. 칠레에서 온 친구는 어디선가 커다란 타조 알을 주워와 우리를 또 한 번 놀라게 했다. 여행 마지막 날, 칠레 국경을 넘기 전에 만난 노천 온천은 축복이었다. 전기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고 물도 잘 나오지 않는 곳에서 씻지도 못한 채 다니다가 대자연 속에 거짓말처럼 준비되어 있던 따스한 온천을 만나자 모두들 앞뒤 재지 않고 옷을 벗어던지며 뛰어들었다.
볼리비아의 자연은 거칠고 투박하지만 곳곳에 반짝이는 풍경이 많다. 팀 케일은 ‘나를 유혹한 낭만적인 곳들’이라는 책에서 “젊은 시절에는 누구나 먼 곳까지 가는 색다른 모험을 꿈꾸었다. 이런 꿈은 가슴 설레게 하는 꿈 아니었는가?” 하고 묻는다. 그의 말처럼 그 시절처럼 상상의 나래를 활짝 펴고 있다면 지금 당장 떠나야 한다. 안 그러면 영원히 떠나지 못할 테니까. 그리고 이루지 못한 꿈을 아쉬워하며 자신에게 큰 죄를 저질렀다며 안타까워할지도 모르니까.
travel tip
항공>> 한국에서 볼리비아 라파스로 가는 항공편은 미국과 페루를 경유한다. 라파스에서 우유니는 국내선 항공이나 버스를 이용한다. 우유니 마을에 있는 여행사를 통해 다양한 사막투어에 참여할 수 있다. 당일치기로 소금사막을 즐기는 1일투어와 우유니를 출발해 칠레 북쪽의 사막도시 산페드로데 아타카마로 가는 2박3일의 투어가 인기가 좋다.
비자>>
볼리비아는 여행시 비자가 필요한 나라다. 여행비자의 경우 30일 단수비자가 발급된다. 한국에서 볼리비아 영사관에서 비자를 발급받아 출국할 수도 잇지만 비용이 비싼 편이다. 라파스 국제공항으로 입국시 한국에서 준비하는 것보다 저렴하고 간편하게 비자를 받을 수 있다. 남미의 다른 나라를 거쳐서 볼리비아로 들어간다면 페루 쿠스코영사관,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영사관, 브라질 상파울루 영사관, 칠레 산태아고 영사관 등에서 무료로 발급이 가능하다.
고산병>>
해발3600미터에 위치하고 있어 간혹 고산증을 호소하는 사람도 있지만 라파즈에서부터 오는동안 어느정도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우유니에서 고산증을 호소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고산병은 낮은 지대에서 해발 2000-3000미터 이상의 고지대로 이동했을 때 산소가 희박해지면서 생기는 신체반응으로 피로, 두통, 호흡곤란, 체온저하 등이 있다. 대처방법은 낮은 지대로 이동하는 가장 좋으며, 물을 충분히 마시고, 천천히 걷는 것도 도움이 된다.
호가 춘곡(春谷)인 고희동 가옥을 지나 올라가다 보면 빨래골을 만나게 된다. 약간 지하에 있는 개구멍받이처럼 생긴 곳에서 물이 졸졸 흐르고 있었다. 옛날 궁녀들이 그곳에서 머리도 감고 세수도 했단다. 궁녀들이 비누 대신 곡물을 사용해 늘 뿌연 뜨물이 흘러나왔는데 사람들은 그 물에 빨래를 했고 그 뒤 빨래골이라 불려왔다 한다.
곡물로 머리를 감았다니 궁녀들의 호사를 알 수 있었고 예쁜 모습으로 왕의 눈에 들어보려는 암투가 느껴지기도 했다. 흘러내려오는 물로 동네 사람들이 비누 없이 빨래를 했다고 하니 민초들의 가난한 생활이 상상이 되었고 빨래터의 정겨운 모습이 그려지기도 했다.
바로 위쪽으로는 숙종의 총애를 받았던 장희빈이 살았다는 집이 있었다. 그렇게 세도를 부리던 장희빈도 사약을 마시고 죽었으니 인생무상이 따로 없다. 그렇게나 아름다웠던 장희빈이 살았던 집이라니 다시 한 번 들여다보았다.
아기자기한 골목길을 돌다가 삼해 소주 공방에 들어갔다. 마당에서는 소주를 만들려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집 안으로 들어가니 간단한 차와 직접 만든 편강, 김부각 등을 팔았다. 북촌민예관도 함께 있었는데 무형문화재 김복곤 악기장의 가야금이나 아쟁, 대금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또 옆방에는 백남준 씨의 조형 작품들이 있었다.
계동에서 원서동을 지나 가회동 11길의 오르내림이 심한 골목에 다다르니 3경이 바로 눈앞이다. 포토존에서 멀리 남산타워가 보였다. 오늘은 날씨가 좀 흐려서 희미한 실루엣만 보였지만 날씨가 좋으면 타워가 선명하게 보여 많은 관광객들이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고 한다.
그윽한 정취를 가지고 있는 한옥들을 감상하며 4경을 지나 5경에 이르니 벽과 지붕이 맞닿을 듯 즐비한 한옥 골목이 나타났다. 이곳에서는 전봇대나 전선이 보이지 않는 점이 특색이다. 주택업자가 모두 지하로 파묻어 분양했다고 한다. 외관은 고칠 수 없어 예전 모습 그대로이지만 집 안은 다 현대식으로 고친 한옥들이라 한다.
골목길을 따라 올라가니 취운정(翠雲停)이라는 한옥이 나왔다. 이곳은 이명박 전 대통령이 살던 집이라고 한다. 지금은 게스트하우스로 사용되고 있으며 하루 숙박료가 140만 원이라니 보통사람은 하룻밤 지낼 엄두를 못 낼 것 같다.
6경에서도 남산타워가 보이는 포토존이 있는데 그 옆 유서 깊은 중앙고등학교는 ‘겨울연가’를 촬영지로 일본 관광객들이 끊이지 않고 찾아온다고 한다. 필자가 대학생 때 좋아했던 남자 친구도 중앙고등학교 출신이었다. 학교 앞에 서니 그 시절이 생각나고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 슬쩍 궁금해져서 속으로 픽 웃음이 났다. ‘잘 살고 있겠지, 뭐’ 하면서.
7경의 북촌 전망대에서는 멋진 기와지붕들 너머로 백악산과 인왕산 사이의 청와대와 경복궁이 보였다. 8경은 삼청동으로 내려가는 가파른 계단이어서 필자 일행은 정독도서관 쪽으로 내려왔다. 정독 도서관은 옛 경기고등학교 자리로 이전에는 사육신 중 한 분인 성삼문이 이 근처에 살았다 한다. 또 조선시대 총포를 만들었던 ‘화기도감 터’였다고도 한다.
오늘 탐방한 북촌 8경에서 우리나라 한옥의 지붕 곡선과 아름다움에 감탄했다. 이렇게 보존되고 있다는 것이 다행스럽고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더 많은 분들이 전문 문화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우리의 한옥마을을 찾아 아름다움을 느껴보기를 권하고 싶다.
자연은 우리에게 신비스러움을 안겨준다. 인간의 힘이나 손재주로는 엄두를 낼 수 없는 경이로움 그 자체를 주곤 한다. 필자는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 이야기 쓰기를 좋아한다. 특히 겨울철이면 그런 일에 빠져든다.
눈이 내리는 절기, 소설(小雪)을 기점으로 산야의 크고 작은 피사체에 서리가 내려앉는다. 이른 아침이면 태양의 부드러운 빛에 서릿발은 한 점의 영롱한 보석처럼 빛난다. 낙엽 된 이파리와 가느다란 줄기에 맺힌 서리는 한 송이 꽃으로 태어난다. 이름하여 서리꽃이다. 차가운 겨울철에만 만날 수 있다. 그것도 이른 아침에 부지런함을 떨어야 된다.
낮과 밤의 기온 차이가 커야 한다. 샛별이 반짝이는 이른 새벽녘에 칼바람이 빚은 조각 꽃인 셈이다. 수줍음도 많은 듯 태양이 동녘 하늘을 솟아오르면 서서히 모습을 감춘다. 오밀조밀 세세히 만들어진 조각품은 마치 동화 속 겨울 왕국을 연상하게 한다. 가까이서 천천히 살펴보면 신비로운 모습에 숨이 멈춰진다. 고운 자태에 넋을 잃는다. 사진작가는 이러한 모습을 발견하면 더없는 기쁨에 환희를 지른다.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필자의 손이 가늘게 떨린다. 조심스레 구도와 앵글을 바꿔가며 셔터를 누르고 또 누른다. 무아지경이 된다. 행복한 겨울 아침이다.
이 아름다운 모습을 누구에게 보여줄까? 사랑하는 당신이다. 셔터를 누르던 손길을 멈추고 조용히 눈을 감는다. 아름다움과 신비스러운 모습에 눈을 떼지 못하고 감동에 겨워하는 당신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필자의 입가에 미소가 흐른다. 오늘 아침도 카메라로 수채화, 서리꽃을 그리며 마냥 행복해진다.
“아직도 꽃 타령이냐?”
허물없는 친구들에게 자주 듣는 말입니다. 그 난감한 질문에 이젠 저도 어렵지 않게 되묻습니다.
“꽃이 뭔지 알아?”
사진을 하면서 누구 못지않게 꽃을 대할 기회가 많았기에 대답합니다.
꽃은 만날수록 그 깊이를 가늠하지 못하겠습니다. 가까이 볼수록 감탄이 커집니다. 처음에는 그저 유명하고 낯익은 꽃에 눈이 갔습니다. 차츰 스쳐 지나며 보잘것없다고 치부했던 꽃들의 단순함과 섬세함에 놀라고, 독특함에 놀라고, 거리와 각도에 따라 새롭게 드러나는 면의 깊이가 선으로 모이고 응축되어 점점으로 흩어지듯 다시 이어짐에 놀랍니다.
하나일 때도 있지만 둘, 셋이 모여 다시 수십, 수백, 천으로 이어질 때도 있습니다. 그때도 한 송이, 송이송이 여러 송이마다 다릅니다. 바람에 따라 흔들림이 또 그 군락의 아름다움에 변화를 만들어냅니다. 조합으로 색이 빛을 만들어냅니다. 이번 홍콩 전시에서도 꽃 사진이 꽤 많았습니다. 홍콩에서는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 전시(風流 ‘Pung Ryu’ HK Ⅱ)라서 더 긴장하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전시장(HONG KONG VISUAL ART CENTER)을 관리하는 직원으로부터 좋은 말을 꽤 많이 들었습니다. 예를 들면 관람객 수를 점검하는 직원은 ‘날이 갈수록 방문객이 늘어나 결국 천 명을 넘었다’고 자부심을 전해주었으며, 수석 큐레이터는 “작년에 이어 수준 높은 전시에 감동했다”며 “앞으로 계속 관계를 갖자”는 제안을 해왔습니다. 그리고 좋은 일은 작품이 작년보다 더 많이 팔렸으며, 더 다양한 나라로 보내졌다는 것입니다.
이번 전시 초대 글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보지 못했던 것을 보았습니다. 휘몰아치는 바람을 보았고, 모이고 흩어지는 물방울을 보았습니다. 기쁨을 보았고 각각의 색이 우렁차게 외치는 소리를 보았습니다. 말로 전달할 수 없는 그 모든 것, 빛과 소리와 향기를 우리는 사진에 담기로 했습니다. 그러자 멈추어 있는 시간 속에서 모든 것이 살아 움직였습니다. 평면인 사진 속에 공간이 스스로를 명확히 드러냈습니다. 과거에 찍은 사진 속에 현재가 흐르고 있었고, 그 안에 사진을 찍은 내가 있었습니다. 아무리 많은 말로 설명을 해도 충분히 전달할 수 없어서 전시회를 준비했습니다. 우리가 느낀 놀라움을 이제 세상과 함께 나누려 합니다.
어느 때부터인지 꽃은 제게 더 이상 구상도 아니고 더더구나 정물도 아닙니다. 요즘 제게 꽃은 하늘의 아름다움과 비밀을 짐작해보는 단초라는 생각이 자주 듭니다. 이건 꽃받침이고, 수술이며, 줄기이고, 턱이며, 영양분을 나르는 동물의 핏줄과 같은 맥이 그물 망사 같은 것도 있고, 서로 평행으로 나란한 것도 있어 그물맥과 나란히 맥으로 구분한다는 생물 시험의 답안지가 아직 기억나지만, 꽃마다 잎마다 왜 그런 오묘한 색을 띠고 있는지, 꽃을 보면 볼수록 점점 더 모르겠습니다.
꽃들마다 갖고 있는 서로 다른 선들의 부드러움과 반투명한 질감, 그리고 시시각각 바뀌는 색들의 변화를 카메라의 렌즈로 들여다보고 있는 그 자체가 경이입니다. 셔터를 누름으로 작품이 된다는 것마저 잊어버리게 됩니다.
꽃의 이름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카메라에 아름다움을 찾아 담겠다는 나의 욕심을 놓치고 창조주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들 때입니다. 그때 꽃은 창조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아름다움이 세상을 이어주고 이끌어주는 질서이기도 하고, 혼돈임을 보여줍니다.
어느 꽃에서도 아름다움의 아르케를 눈치 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성들은 어떻게 이런 과정 없이 꽃을 잘 알고 있는지 그게 제겐 신비입니다.
2017년 7월, 그라피티 전시회가 서울에서 열렸다. ‘얼굴 없는 거리의 화가’로 유명한 영국인 그라피티 작가 뱅크시(Banksy)의 작품을 모은 전이었다. ‘길거리 낙서’, ‘불법 행위’로 보는 시선이 있어 쉽지 않았을 전시회임에도 불구하고 뒤이어 열린 전도 흥행에 성공하며 그라피티의 새로운 가치를 보여줬다. 그라피티 작가들은 분사되는 스프레이를 통해 자유를 표출하며 때론 현대사회의 문제를 해학적 그림으로 표현해 지적한다. 깡통 스프레이는 회색빛의 거리를 화려하게 변신시키고 흥미로운 장소로 탈바꿈시킨다.
전철이나 건축물의 벽면, 교각 등에 스프레이, 페인트를 이용해 그리는 그림인 그라피티는 1960년대 필라델피아 갱단에서 자신들의 구역을 알리는 용도로 활용됐다. 이후 뉴욕으로 퍼져 이름을 공공장소에 불법적으로 남겨 악명과 명성을 동시에 얻을 수 있다는 점에 흥미를 느낀 청년들을 중심으로 유행했다. 그리고 약 50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는 전 세계 거리에서 화려하면서도 현란한 원색의 그림을 쉽게 접할 수 있게 됐다. 또한 짧지 않은 세월 동안 뱅크시(Banksy), 키스 해링(Keith Haring), 셰퍼드 페어리(Shepard Fairey) 등 유명 작가도 배출됐다.
하지만 그라피티의 성지인 뉴욕에서도 그라피티는 여전히 불법이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대표적인 사례로 2015년 지하철역 환기구를 통해 침입해 전동차에 낙서한 외국인 4명에 대해 수배가 내려져 전파를 탄 사건이 있다. 지금도 허가받지 않은 공간에서의 그라피티는 재물손괴죄, 건조물침입죄를 적용해 강력하게 단속하고 있다. 이처럼 그라피티가 공공질서를 어지럽힌다고 보는 부정적인 시각도 있지만 자유롭고 창의적인 그림이 도시를 밝힌다는 긍정적인 시선도 존재한다.
그라피티는 종종 특정한 장소에서 작업되어 주목받지 못하는 장소를 새롭게 조명하고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당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홍대 주위로 작업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지만 이제는 그마저도 사라져 발걸음을 옮겨야만 했다. 그렇게 새로 찾은 곳이 한강과 압구정을 이어주는 압구정나들목이다. 그라피티 작가들 사이에서 ‘토끼굴’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이곳은 한강사업본부가 그라피티 작업을 할 수 있도록 허가한 공간이다. 단 작업은 밤 10시 이후에만 가능하며 정치적, 선정적 이미지를 그려서는 안 된다는 약속을 지켜야 한다.
늦은 밤이 되면 그라피티 작가들이 삼삼오오 모여 벽 앞에 자리를 잡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뒤죽박죽 얽혀 알아보기 힘든 글자체를 사용해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하며 그 옆에 이미지를 덧붙이기도 한다. 화살표, 따옴표, 비눗방울 등의 이미지는 마치 글자들이 살아 움직이는 듯한 효과를 만들어낸다. 밑그림 위로 뿌려진 스프레이는 하나의 근사한 작품을 탄생시킨다. 압구정나들목을 자주 지나가는 박모(55)씨는 작업 중인 그라피티 작가들의 그림을 신기하게 바라보더니 이내 핸드폰을 꺼내 들고 사진을 찍는다.
“예전에는 색감도 어둡고 뾰족한 이미지만 있어서 날카로운 느낌을 받았어요. 지금은 화려한 색상에 재미있는 캐릭터도 있어 전체적으로 밝은 분위기죠. 그저 삭막하기만 했던 벽에 정기적으로 그림이 바뀌니 신선하고 좋았어요. 도화지에 그리는 그림이 아닌데 어떻게 완성되는 건지 궁금하고 신기했는데 오늘 비로소 궁금증이 풀렸네요(하하).”
알록달록하게 그라피티로 꾸며진 이곳은 자전거 동호회인들 사이에서도 인기다. 김모(25)씨는 벽에 그려진 작품들을 훑어보다 가장 마음에 드는 곳 앞에 자전거를 세워두고 셔터를 누른다.
“여기서 자주 자전거 동호회 회원끼리 사진을 찍어요. 그라피티의 색감과 자유로운 느낌이 자전거와 잘 어울려 일부러 찾아오기도 하죠. 집주인 입장에선 불쾌할 수도 있겠지만, 노후 주택이나 운영하지 않는 건물을 방치하지 말고 그라피티로 꾸민다면 이곳처럼 주목받을 수 있는 장소로 바뀔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사회적인 제도 안에서 인위적인 방법으로라도 이런 공간이 더 많아지면 좋겠어요.”
SITCH라는 익명으로 활동 중인 한 작가는 “그라피티는 자기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의 끝이라고 생각한다. 보수를 받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욕도 먹는다. 그 와중에 좋게 봐주시는 분들도 있다. 이런 경계에서 작업을 할 수 있다는 게 좋다. 생각했던 것을 스프레이로 뿌려 표출할 수 있고 그런 작품이 다른 사람에게 영감을 주고 공감을 끌어낼 수 있다는 점도 특별하다”고 설명했다.
그라피티 작가 위제트는 “장르에 구애받지 않고 표현할 수 있는 범위가 넓기 때문에 신선한 디자인 요소라고 생각한다. 또 뜻밖의 공간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그림을 보여줄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다”라고 말했다.
일반적인 전시회라면 작품에 대한 기대감을 안고 다가가지만 그라피티 같은 거리의 예술은 뜻밖의 상황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그라피티 작품 앞에서 만난 김모(51)씨는 “표지판이나 벽, 길거리에 뿌려진 알 수 없는 글자와 그림들은 공공시설을 지저분하게 만들고 분위기와 더해져 사람을 긴장하게 만든다”며 그라피티를 공공시설을 해치는 길거리 낙서라고 표현했다. SITCH는 이러한 부정적인 반응이 익숙한 듯 입을 열었다.
“가끔 작업을 하다 보면 신고가 들어오는 경우가 있어요. ‘냄새 난다’, ‘보기 좋지 않다’, ‘위협적인 분위기를 조성한다’ 등 다양한 이유로 말이죠. 우리나라에 허용된 공간이 별로 없는데 허용된 공간에서만큼은 우리의 작업을 열린 시선으로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작업한 다음 날 흔적도 없이 지워질 수도 있는 그라피티는 독창적인 방법으로 예술의 세계를 전달한다. 최근에는 예술성을 인정받아 전 세계적으로 다양한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선 비주류 문화로 인식되는 면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라피티 작가들은 부정적인 인식과 위험을 감내하면서도 개성이 숨 쉬는 예술을 만들어낸다. 이제부터는 거리를 걸을 때 잘 살펴보자. 어쩌면 오늘 밤 남몰래 그라피티로 꽃단장을 마치고 다음 날 새로운 모습으로 반길지도 모를 테니 말이다.
아침 운동을 나갈 때면 보이는 동물이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새지만 너무 커서 마치 동물처럼 느껴졌다. 보통 참새, 까치, 비둘기, 오리가 주를 이루는데 그에 비해 그 새는 덩치가 큰 편이었다.
몸 색깔은 검고, 크기는 거위보다는 작고 오리보다는 3배 정도 컸다. 그런데 하는 행동이 눈길을 끌었다.
운동을 나갈 때는 물위를 퍼드득 대거나 배를 깔고 머리를 물속에 쳐박고 있어 별로 커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돌아올 때면 물속에 있는 조그만 바위에 올라가 날개를 펼치고 있어서 더 커 보이는 것 같았다. 또 날개를 앞뒤로 흔들며 같은 자세로 꽤 장시간 서 있었다. 가마우지였다.
동물이 야생에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이 먹이와 안전, 번식이라면 탄천처럼 안전한 곳이 없지 싶다. 먹이는 ‘물고기 반, 물 반’이 아니라 거의 물고기들로 우글거리고 사람들은 가마우지를 방해하지 않으려고 카메라 셔터도 조심스럽게 누른다. 그래서 그런지 요사이 가마우지가 자주 눈에 뜨인다.
아침 식사를 끝내고 젖은 날개를 단장하고 말린다. 온갖 정성을 다하는 모습이 마치 샤워를 막 끝낸 여자의 몸단장 같다. 물 항아리를 비스듬히 든 비너스의 목욕 모습이 오버랩 된다. 향기 나는 비누를 거품 내어 몸에 문지르고 상쾌한 비누냄새가 가시기 전에 물을 닦고 긴 머리카락을 말리는 모습. 바람결에 비누향기가 날려 올 것 같다.
날개를 펼치면 그 끝이 집시의 드레스처럼 후릴이 져 있어서 당장이라고 캐스터네츠를 울리며 뛰어오를 것만 같다. 검은 드레스엔 빨간 구두가 어울린다. 빨간 장미라도 머리에 꽂으면 더 좋겠다. 비제의 카르멘이 공중으로 퍼지고 가마우지의 날개는 리듬을 따라 펄럭인다.
날개가 다 말랐다 싶으면 날개를 펼치고 비상을 하는데 그 모습이 역동적이다. 몇 번 세게 날개를 휘휘 젓듯 흔들다가 바위를 박차고 일어선다.
가느다란 다리를 가지런히 세우고 비상하는데 높이 날지는 못한다.
중국이나 월남에서는 가마우지를 낚시에 이용하는데 나도 그 모습을 TV에서 본 적이 있다. 가마우지가 달아나지 못하게 묶어 작은 고깃배에 태우고 강에 도착하면 물고기가 있는 곳에 가마우지를 풀어 놓는다, 그러면 가마우지는 물고기를 입에 물고 물 위로 올라오는데 그 때 물고기를 빼앗는다. 대신 작은 피라미 같은 생선을 주어 계속 배고프게 한다고 한다. 어부들이 가마우지의 목을 끈으로 묶어 큰 물고기는 삼킬 수 없었다. 가마우지는 물고기를 잡으러 계속 물속으로 뛰어들지만 그들은 모두 빼앗겼다.
이 행복한 가마우지는 물고기 잡는 노예 가마우지의 운명을 알고 있을까.
한국의 가마우지야 너의 자유를 축하한다.
너의 행복한 모습을 마음껏 보고 싶다.
참 곱다. 다시 보아도 예쁘다. 눈을 크게 뜨고 요목조목 들여다보아도 신비스럽기도 하다. 겨울이 오는 문턱에서 가을을 노래하던, 여리고 작은 풀잎에 차가움이 서릿발 되어 살포시 내려 앉았다. 마치 영롱한 보석으로 치장한 여인네를 상상하게 한다. 자연의 변화 속에 신비스럽게 만들어지는 아름다운 형상에 사진작가인 필자는 늘 매료된다. 그 시간은 마냥 행복하다. 소소한 일상과 작은 피사체를 렌즈로 즐기는 나만의 시간에 흠뻑 빠져들어서다.
온 산에 단풍이 가을을 수놓더니 채도가 낮아진 낙엽 되어 바람에 흩날려 길바닥에 구른다. 계절은 속절없이 흘러 한 겹의 나이테를 또 그려간다. 지난밤 추위에 잎새 끝자락에 무서리가 날을 세웠다. 추수가 끝난 들녘 논에 줄지어 서 있는 벼 이삭을 베어낸 한 뼘 벼 포기에도 내려앉았다. 성큼 다가선 겨울이 보인다. 이른 아침 산책길에 나선 손끝이 차갑다. 겨울이 소매 끝을 타고 스며든다. 이맘때면 낮과 밤의 기온 차이가 크다. 이슬이 하얀 서리 되어 대지 위에, 풀잎 위에, 나뭇가지에 자리를 틀었다. 바람에 구르는 낙엽 위에도, 마지막 안간힘을 쓰며 꽃을 피우고 있는 들꽃 꽃송이 위에도 내렸다. 마치 섬세하게 빚은 보석처럼 눈길을 사로잡는다. 초겨울의 문턱에서 볼 수 있는 아름다움이다. 두 번 다시 오지 않는 순간이다.
계절의 변화가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을 카메라에 담아 한 편의 이야기를 쓴다. 세월의 흔적을 기록한다. 간단없이 흘러가는 순간을 붙잡아 두고 싶은 마음의 표현이다. 한 해의 마지막 달력이 슬며시 고개를 내미는 연말이면 더 그런 생각이 든다. 필자는 사시사철, 아침저녁 구분 없이 카메라와 함께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어제도 그랬듯이 오늘 아침도 여전히 작은 풍광에, 일반인들이 눈길도 주지 않는 작은 피사체에 몰입하기를 좋아한다. 어떻게 생각하면 남들과 다른 시각에서 발견하는 기쁨이 있어서다. 자신만의 즐거움이다. 계절에 따라 바뀌는 여러 모습이 카메라를 잡은 손을 분주히 움직이게 한다.
대지 위에 구르던 노란 은행잎에도 겨울이 살며시 내려앉았다. 서릿발이 보석처럼 장식되었다. 눈이 부시다. 밤새 바람과 이슬이 빚은 고운 조각품이다. 영롱한 빛과 선 그리고 형상은 무어라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아름답다. 자연의 조화다. 동산에 태양이 솟아오르면 자취를 감출 이런 모습을 영원히 남겨두고 싶다. 아름다운 사물을 보았을 때 생각나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그를 사랑함이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기쁨을 나누고 싶다. 카메라의 초점을 맞추고 숨죽여 셔터를 누른다. 한 장의 그림을 그렸다. 겨울을 좋아한다던 그녀에게 띄우는 겨울엽서가 만들어졌다. 소슬한 바람에 실려 보낸다.
산책은 이어진다. 논두렁 사이 웅덩이 가에 옹기종기 둘러앉아 정겨운 가을 이야기를 나누는 이끼 같은 작은 이름 모를 풀 위에도 초겨울이 왔다. 촘촘히 얼음 꽃송이를 만들었다. 눈이 내리는 한 겨울 고산 지대의 나뭇가지에 피는 상고대를 닮았다. 곱디고운 형상에 가슴이 뛴다. 누구 한 사람 눈 여겨 보지 않던 풀 포기가 보석상 진열대에 놓인 사파이어를 상상하게 한다. 1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카메라로 소소한 모습들을 즐겨 찍었지만, 이런 신비스러운 광경은 오늘 처음 만났다. 혼자 보고 즐기기엔 너무 아까운 모습이다. 서둘러 카메라 렌즈의 초점을 맞췄다. 또 한 장의 그림엽서를 다시 카메라로 그렸다. 겨울철이면 산속 멋진 상고대 촬영을 특히 좋아하던 친구에게 띄우리라. 친구의 미소가 떠오른다. 자연의 변화를 기다리며 조각품처럼 빚어진 피사체에 빠져드는 필자는 속일 수 없는 사진작가인가 보다. 카메라와 함께 하는 아침 산책길이 더 행복해진다. 환갑의 나이에 뒤늦게 시작했지만, 참 잘 선택한 여가활동이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근간이다.
고요히 혼자 떠나 볼 수 있는 때다. 물론 둘이, 여럿이도 괜찮다. 온몸에 한기가 엄습하고 찬 이슬이 피부에 촉촉이 느껴지는 저수지의 새벽이다. 일출 이전의 어둠 속에 서서 물체를 확인하는 시간이 주는 혼자만의 충만함, 여럿이 함께 있다 해도 이럴 때는 혼자가 된다.
물안개 피어오르는 괴산의 문광저수지에 도착한 것은 새벽 여섯 시가 될 무렵이었다. 동트기 전 어스름 새벽안개의 정적을 느끼며 저수지를 바라보고 있을 때 근처 자동차에서 커피를 꺼내 마시던 분들이 거리낌 없이 한 잔 건네 온다. 따끈한 차 한 잔의 고마움이 더 따스히 온몸에 스민다. 그 동네 사는데 이렇게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들고 물안개가 신비할 때면 자주 나온다고 했다. 보온병에 커피 가득 담아서 나오는 그들의 새벽 나들이가 부럽고 순수하게 차 한 잔 나누어주는 인심이 고맙다.
저수지의 어둠이 조금씩 걷히고 낚시꾼들의 수상 좌대의 빨간 지붕들이 이쁜 반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누군가 꽂아놓은 듯한 고목들의 무수한 반영들이 저수지의 파문에 아른거리며 비구상 그림을 연상시킨다. 차츰 은행나무길도 노란 색감을 자랑하고 가끔 지나가는 차량들의 바퀴 사이로 은행잎이 회오리치듯 날린다.
마침 그 지역 사진작가협회 회원께서 나와 사진 찍는 우리들에게 새로운 정보를 주고 좋은 말씀을 많이 해 주시어 셔터를 누르는 즐거움이 더 컸다. 그리고 괴산만의 맛난 음식점으로 이끌어서 정갈한 나물반찬으로 시골 아침밥을 먹었다. 그런데 어딜 가나 각자 부담이 확실한데 그분께서 굳이 식사비를 계산하신다. 부담을 드릴 수 없어서 드리는 돈을 한사코 받지 않아 그분의 트렁크에 선물을 실어드렸다. 그리고는 또 다른 멋진 풍경을 담을 수 있는 안내도 받는 멋진 수확에 감사할 따름이다. 연로하시지만 인자한 모습으로 차분히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려는 그분의 순박하고 선한 마음씨가 훈훈하다.
어차피 충청북도 지역에 왔으니 대청호를 들릴 일이다.
대청호는 넓다. 충북 청주 옥천, 보은은 물론이고 대전도 걸쳐져 있어서 대청호 오 백 리 길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 호수 주변에 작약이 필 때도 있고 자연의 풍광이 시시때때로 다르거나 위치에 따라 풍경이 다른 몇 군데가 있다. 현재 6구간까지의 길이 있어서 가을을 맛보고 즐기기에 좋은 곳이다. 이번에는 가을바람에 어울리는 갈대습지를 찾았다.
호숫가의 갈대가 반짝이며 바람에 일렁인다. 갈대가 배경이 되어주는 가을호수다. 거기서 조금 더 내려가니 호수를 중심으로 넓은 잔디밭이 있었고 한가로이 벤치가 누군가를 기다린다. 천천히 거닐며 호수에 풍덩 빠져있는 푸른 가을 하늘의 반영에 감탄했다.
그때 벤치에 조용히 앉아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던 두 여자분이 "우리 둘 모습 좀 찍어주실래요?" 하며 휴대폰을 내밀기에 가을 풍경에 잘 어울리도록 구도를 잡아 찍어줬다. 그리고 앞모습뿐 아니라 “뒷모습의 분위기가 더 좋아서 한 장 더 찍어드릴게요” 했더니, "어머, 고맙습니다. 우리 둘이 지금 환갑 놀이하는 거예요." 하면서 따뜻한 연륜의 미소를 보여준다.
갈대와 가을 하늘이 넓게 펼쳐진 호숫가 벤치에 앉아 친구와 살아온 시간을 자축하는 모습이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환갑이나 무슨 기념일이면 해외로 여행을 떠나거나 멋들어진 잔치를 했다는 말들을 듣기도 하는데 이분들의 모습이 특별하고 이뻐서 몇 번씩 뒤돌아보곤 했다. 아름다운 정경이 아름다운 가을을 만들어 준다.
가을바람 따라 이름 모를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온 힐링의 시간을 더듬으며 그 분들처럼 따뜻한 차 한 잔이나 미소를 나눌 수 있는 사람으로 잘 나이 먹어가고 있는가 생각해 보았다. 세상은 흉흉한 뉴스가 연일 나오는데 가을은 이렇게 눈치 없이 이쁘기만 하다.
아내는 새로 이사 갈 집의 조건을 제시했다.
첫째: 뷰(view),
둘째: 좋은 전망,
셋째: 뷰!
집에 대한 아내의 이러한 확고한 생각이 여기 몽골 울란바토르에서 예기치 못한 결과를 갖게 했다. 이사를 결단하게 된 이유는 더 이상 이사를 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서울에서 몽골까지 산 넘고 바다 건너온 거리가 얼마인데 그 짐을 다시 싸야 하다니…. 나보다 아내의 부담이 훨씬 클 것이다. 그런데 집주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가장 약한 곳을 건드린다. 게다가 계약할 때마다 매번 세를 올린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는 그렇지 않아도 낯선 외국생활 채 익기도 전에 좌초되겠다 싶어 ‘다시는 이사하지 않도록 하겠다’고 마음잡고 결단했다. 더구나 서울과 비교해 몽골 생활이 갖고 있는 좋은 점은 멋진 풍광!
셋집이 아니라 아예 새로 분양하는 전망 좋은 곳을 큰맘 먹고 먼저 찾아보았다. 그리고 한 단계 더 나아가 소위 말하는 로열층! 그런데 이게 무슨 계산법인가? 모든 층이 방향과 관계없이 오직 면적에 의해서만 단가가 설정되어 있지 않은가? 몽골은 참 이상한 나라다. 그렇게 우린 아내의 바람대로 전망 좋은 집을 얻게 되었다.
지금도 눈앞에 펼쳐진 멋진 산을 배경으로 모이고 흩어지는 구름! 시시각각 넓은 하늘을 가득 채우는 빛의 향연에 감동하고 있다. 그렇게 창문 넘어 변하는 풍광에 얼마 전 홍콩 출장에서 촬영한 사진이 겹쳐진다. 사람들이 대부분 잠든 시간. 홍콩 타이쿠싱 뒷산 마운틴 버틀러에 제자들과 함께 올랐다. 산이 높아지고 경사가 가팔라질수록 건물들이 깊은 어둠 속에 쭈삣 드러났다. 인공 불빛의 디테일이 선명하다. 산을 오르는 목적 자체가 사진 촬영을 위한 것이다 보니, 보이는 것들을 사진기의 눈으로 생각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우리들이 마치 거대한 사진기 안으로 조금씩 들어가고 있는 것 같다. 잠시 멈춰 먼 야경을 맨눈으로 내려다보니 얼마 전 문체·외통·지경부와 중앙일보 주최로 국립중앙박물관에 초대전을 준비할 때, 전시할 공간을 의논하기 위해 관계자들과 만났을 때와 흡사하다. 박물관 직원이 컨트롤 타워와 워키토키로 교신을 하며 예정된 전시장 문의 암호와 스위치를 조작하니 둔탁하게 느껴질 만큼 커다랗고 두꺼운 쇠문이 서서히 올라가며 공간이 열렸다. 바로 그때 지금과 같이 우리들이 커다란 사진기 앞에 서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내등을 켜기 전 가물한 전시장의 크기가 가늠되지 않았다. 막상 문턱을 넘어 들어서니, 조금 전에 커다랗고 육중하게 보이던 문과 사람들이 갑자기 작게 느껴졌다. 방 끝이 보이지 않는 막연한 사각형 공간이 더욱 사진기 안에 들어왔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우리가 거인국의 사진기 안으로 들어와 두리번거리고 있는 듯하다’라는 신드바드의 얘기를 아내에게 했다. 그때 전시의 큐레이팅을 맡게 된 아내는 전시장 입구를 바늘구멍으로, 작품 설치를 맺힌 상으로, 전시장 밖에서 우리가 촬영해온 중앙아시아 나라들의 풍광을 서브제로 구성했다.
지금 내 눈에 보이는 홍콩의 야경이 그때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전시실에 걸린 작품의 오브제 같았고, 산을 오를수록 작품 앞에서 눈을 떼지 않고 뒤로 물러서며 원근감의 각도를 확인하고 있는 듯했다.
사진은 그렇게 빈 공간에서 시작된다. 그 어둠상자에 만들어진 빛의 통로를 이용해 원하는 이미지가 잘 드러나도록 거리를 맞추고 또한 빛의 양을 조절한다. 그리고 셔터스피드와 조리개 값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시간과 공간이 섞이고 호환된다. 그런 이론의 변수를 잠시 내려놓으면 사진의 힘은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발휘된다. 사실 사진기라고 불리는 ‘카메라’의 어원은 ‘비어 있는 방’이다.
사진기에 맺히는 영상과 산 위에서 촬영한 홍콩의 야경, 지금 내 집의 창을 통해 보고 있는 구름, 그리고 용산전시장의 중앙아시아의 풍광들이 서로 엇갈려 겹쳐진다. 한쪽은 일정한 비율로 축소되었고, 다른 편은 빛을 모으고 모아 작은 점을 통과시켜 얻은 좌우상하가 바뀐 이미지들이다. 하나는 창을 통해 보이는 세상이고 다른 하나는 사진기가 만들어낸 것이다. 그 둘이 마치 같은 이미지처럼 보이지만 그 과정에 소실점을 통과했나 안 했나의 차이가 엄연하다.
창을 통해 보이는 풍경이 밝은 곳의 축소된 세상이라면, 사진은 렌즈로 수렴시킨 점을 통과시켜 어두운 사진기 안에 거꾸로 맺힌 필름에 담아낸 상인 것이다.
함철훈(咸喆勳) >> 사진가·몽골국제대학교 교수
1995년 민사협 초청 ‘손1’ 전시를 시작으로, 2009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 2012년 이탈리아 밀란시와 총영사관 주최로 전을 FORMA에서 개최. 2006년 인터액션대회(NGO의 유엔총회)서 대상 수상. 저서로 ,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