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체사진을 찍으면 그 사진 속에서 제일 주름이 많고 나이든 사람을 고르면 그게 바로 필자다. 나이가 제일 많아 그러려니 하면서도 왠지 모를 억울함이 있다. 거울에 비췬 모습보다 사진에서만 더 늙게 나오는 것 같아 속상한다. 예전에 나이든 사람들을 사진 찍으려하면 ‘늙은이 뭘 자꾸 찍으려 해’ 하고 손사래 치는 이유를 이제 알겠다.
한번은 동료들에게 ‘진짜 사진의 모습과 내 모습이 맞나? 사진 빨 잘 받는 사람이 있다는데 사진만 찍으면 이렇게 늙수그레하게 나오지’ 하고 푸념 반 억울함 반을 호소했다. 모여 있던 사람들이 웃으면서 ‘ 카메라가 왜 거짓말 합니까 보이는 그대로 찍히는 게 카메라죠.’ 요런 얌통머리 없고 앞뒤 꽉 막힌 말을 하는 밥 맛 없는 놈의 소리를 들은 적도 있다.
눈치 빠른 놈은 내 기분을 알고 ‘사진을 자주 안 찍어서 그래요. 사진을 자주 찍으면 포즈도 제대로 잡아서 젊게 나오는데 어쩌다 한번 찍으면 나이든 사람은 실물보다 더 늙게 나와요.’ 어리벙벙하게 위로 같은 이유를 곁들여 설명해주는 고마운 놈도 있다.
예쁘게 나오는 것은 고사하고 두 눈의 크기가 같고 눈 밑에 지방덩어리라도 보기 싫지 않게 나왔으면 좋겠다. 주름살이라도 덜 깊게 파였으면 좋겠다. 더구나 술을 먹고 사진을 찍으면 더 나이 들어 보인다. 정신이 몽롱해지면 사진에 그대로 투영되어 영락없는 상늙은이다.
사진을 찍어보면 실물보다 더 예쁘게 나오는 사람이 있고 실물보다 잘 안 나오는 사람이 분명 있다. 얼굴이 작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사람이 예쁘게 나온다, 찍는 각도에 따라 예쁜 얼굴도 되고 못생긴 얼굴도 된다. 요즘 사진은 포토샵 기술이 발달되어 얼굴 교정도 가능하고 늙은이를 젊은이로 만들 수도 있다. 주름살도 다리미질하듯 펴준다.
전문 사진사가 찍은 사진은 역시 다르다. 웃을 때 입의 크기도 적당할 때 셔터를 누른다. 여러 장의 사진을 다각도로 찍어서 그중 나은 것을 선택하니 좋은 사진이 나오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구도와 배경을 잘 맞춘다. 그래서 사진을 종합 예술이라 한다. 여러 종류의 사진들을 보면서 필자가 사진에서만 더 늙게 나오는 것은 내 얼굴 탓이 아니라 완전히 사진사들의 얕은 사진 실력을 탓한다. 그러면 정신적으로 좀 위안이 된다.
나이 들어 생기는 얼굴주름을 없애려고 보톡스 주사를 맞거나 얼굴 속에 실을 넣어 잡아당겨 걸어두는 리프팅 성형을 하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그렇게까지 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마음에 아직 젊음의 열정이 있고 신체적으로 건강하기 때문이다. 웃으며 찍은 사진은 주름이 많이 잡힌 모습이지만 웃어서 생긴 주름은 보기에도 좋다.
사진 속의 주름살은 안타깝지만 세월의 훈장으로 자랑스럽게 생각하겠다. 그래도 주름진 얼굴을 감추려 선 그라스를 쓰고 싶다. 내면의 이중성이 사진 찍을 때마다 꿈틀거린다.
매주 목요일 저녁. 기타 가방을 메고 드럼 스틱을 든 남자 다섯이 남양주의 한 대형 가구 상점에 출몰한다. 한두 번이 아니다. 이곳에 모여든 기간만 5년째, 이미 수십 년 전부터 같은 목적으로 수도 없이 만나왔다. 이들 중에는 40년이 더 된 사이도 있다. 으슥하고 인적 드문 곳에 자꾸 모여드는 이유는 철들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라고? 매주 같은 시간, 조건반사처럼 만나 연주하고 노래한다는 5인조 밴드 ‘철없는 아빠들’이다. 연습이 시작되면 철없는 아빠가 아닌 20대 꽃미남 밴드 시절로 돌아가는 것만 같다.
철없을 때 만난 친구들입니다! 하나, 둘 매장 셔터가 내려지고 어둠이 내려앉은 남양주 가구거리에서 기타 튜닝 소리가 울려 퍼진다. 철들 생각 없는(?) ‘철없는 아빠들’이 모인 곳은 베이스 기타 장시영씨가 운영하는 가구 매장. 이곳에 ‘철없는 아빠들’만의 전용 연습실이 있다. 머리가 하얗고 배가 나오고 손자까지 본 할아버지들이지만 연습실에 들어서는 순간, 나이는 숫자놀이에 불과하다. 드럼 치는 김영석(55)씨를 제외한 네 명은 58년 개띠로 김종민(리드기타), 한동호(보컬·기타), 이인섭(건반), 장시영(베이스)씨다. 초등학교, 고등학교, 군대 친구, 와이프의 대학 후배까지 제대로 얽히고설키다 밴드까지 만든 멤버다.
장시영 원래 어렸을 때부터 알고 있었던 사이예요. 기타 치고 음악 하는 거 좋아해서 갓 스 무 살 때부터 다들 밴드 경험이 있죠. 다시 음악을 하게 된 건 인생이 너무 지루한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어요.
김종민 술 먹고 밴드 불러서 노래를 부르다 보니 저희도 잘할 거 같더라고요. 차라리 우리가 모여서 밴드를 하자! 그때가 아마 서른세 살이나 서른네 살이었을 거예요. 아내들이 돈 안 벌고 맨날 음악만 하니 철없다고. 그래서 팀 이름이 ‘철없는 아빠들’이 된 겁니다.
김종민씨가 다시 기타를 잡게 된 건 장시영씨 때문이었다.
김종민 이 친구(장시영)가 원래 군대 선임이었어요. 제대하고 8년쯤 지났을 때 저에게 게리무어(Gary Moore)의 ‘스틸 갓 더 블루스(Still got the blues)’를 들려줬어요. 그걸 듣고 정말 나자빠진 느낌이었습니다. 없는 형편에 게리 무어가 쓰던 기타를 샀어요. 심취해서 계속 기타를 치고, 그전보다 더 잘하고 싶어졌어요. 그러다 그룹을 만들겠다 했을 때 인섭이가 합류했습니다.
지금은 건반, 관악기, 퍼커션에 코러스까지 담당하는 이인섭씨. 밴드에 들어올 당시 다룰 줄 아는 악기가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건반을 치더니, 플루트에 코러스까지 넣을 줄 아는 밴드 알짜배기로 성장했다.
이인섭 피아노 전공자처럼 할 수는 없어요. 주로 기타 코드를 보고 연주하고 전주곡 같은 것이 있으면 열심히 배우려고 하는 거죠.
어린 시절 만난 사이이다 보니 각자의 직업도 다양하다. 보컬 담당 한동호씨는 부동산임대업을, 기타 치는 김종민씨는 외국계 자동차 회사 이사다. 베이스 장시영씨는 얘기했다시피 가구업을 하고, 건반 이인섭씨는 성형외과 의사, 드럼 치는 김영석씨도 개인사업체 대표다. 매주 모여 연주 연습을 하다 보니 나이를 어디로 먹는지 다들 잘 모르겠다고 입을 모은다.
장시영 흔히 얘기하는, 고리타분하게 남의 일에 참견하는 꼰대 성향은 없어요. 음악 하는 친구들과 대화하고 항상 웃고, 즐거운 시간을 보냅니다. 그러고 싶어서 음악을 하는 거거든요.
생활이 힘들다거나 경제적인 부분에 대해서 서로 대화하지 않아요. 이들의 전용 연습실은 방음 시설과 장비 면에서 전문 밴드의 것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는 수준이다.
장시영 집사람은 제가 여기서 연주하는 걸 좋아해요. 아내는 음악에 둘러싸여 살아왔기 때문에 음악이라면 긍정적이죠. 연습실 만들 때 배려를 많이 해줬습니다.
한동호 그 전에는 돈을 주고 연습실을 빌려서 사용했어요. 그런데 왜 이곳으로 왔냐면 저희가 매번 전문 연습실을 사용했던 것이 아니거든요. 방음이 안 돼 있으면 시끄러우니까 장소 구하기가 어려웠어요. 여기는 방해가 안 되니까 좋죠.
김종민 에피소드가 있어요. 송파의 한 지하 연습실에서 연주를 하는데 교회에서 예배 보던 분들이 찾아와서 시끄럽다며 저희더러 마귀라고 하더라고요. 정말 그곳에 교회가 있는 줄 몰랐어요. 드나드는 길이 달랐어요. 그래서 더 열심히 연주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정말 웃겼어요(웃음).
남양주 연습실에 온 이후로는 누구 눈치 볼 일 없이 음악에 몰두할 수 있어서 좋다. 지금까지 철없는 아빠들이 연주했던 음악은 약 150여 곡. 공연을 통해 관객들에 연주 실력을 검증받은 바 있다. 올 가을쯤 장시영씨의 처제가 소속해 있는 밴드와 같이 공연할 계획이라고.
장시영팀은 자작곡도 있고 해서 10월이나 11월 초에 공연할 생각으로 공연장을 알아보고 있습니다.
언제까지 연주할 수 있을까? 장시영씨는 이 질문에 대한 고민을 해봤다고 한다. 그때 한 생각은 밴드 중 누군가가 흥을 잃을 때 연주가 멈출 것 같다고.
장시영 우리가 언제까지 이 흥을 유지할까. 우리 중 누군가가 흥을 잃을까 걱정입니다. 어떠한 계기가 됐건 흥을 잃을까봐요. 독려를 많이 해주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당장은 그 ‘흥’이라는 것이 떨어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듯싶다. 지금 그들의 흥이라면 70이 돼도 80이 돼도 끄떡없을 것 같다.
사진은 죽음의 흔적과 같다고 한다. 사진을 찍던 그 순간은 돌아오지 않고, 다시 그대로 찍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신의 과거를 사진으로 찍는 이가 있다. 전도유망한 과학자에서 어엿한 사진작가로 전향한 김경수(金炅秀·53)씨다. 한때 현미경을 통해 신약(新藥)을 연구하던 그는 이제 뷰파인더를 통해 자신을 탐구하고 있다. 지난 세월의 파편들을 고스란히 담아낸 사진들은 곧 그의 자화상이다.
1990년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26세 나이로 최연소 이학박사 학위를 딴 그는 한국화학연구원의 촉망받는 연구원이 된다. 이후 ㈜카이로제닉스와 ㈜셀트리온화학연구소 대표이사로 활약하며 ‘21세기의 뛰어난 과학자 2000인’, ‘21세기의 가장 위대한 지성’, ‘21세기 가장 위대한 천재 500인’ 등 세계 인명사전에 20여 차례 등재되는 영예를 안기도 했다. 과학자로서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았지만, 그는 49세라는 이른 나이에 직장과의 안녕을 고한다.
“갑자기 은퇴를 결심한 건 아니에요. 몇 년 전부터 서서히 내려놓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죠. ‘내가 하고 싶은 연구를 하겠다’ 마음먹고 연구원에서 나와 벤처기업을 운영했는데, 온갖 흥망성쇠를 겪으며 심신이 많이 상했어요. 과도한 스트레스로 불면증에 시달렸고, 위(胃)에 문제가 생겨 건강이 악화됐죠. 일을 그만둬야 하는데, 퇴직하면 뭘 해야 할지가 고민되더라고요. 그동안 과학자로 23년을 살았지만, 앞으로 살아갈 날은 30년도 더 남았으니 말이죠.”
어린 시절 그림은 곧잘 그렸지만, 글 쓰는 데는 영 소질이 없던 그다. 그러나 사회생활을 하다 보니, 기획안도 작성하고 칼럼도 쓰며 붓보다 펜을 잡는 일이 많아졌다. ‘글을 써볼까?’ 하는 생각에 시를 쓰기 시작했고, 2012년에 에 투고한 시가 당선돼 시인으로 등단했다. 그러나 막상 전격적으로 하려니 피를 토해내는 듯한 정신적 고통이 느껴졌다.
“스트레스를 안 받으려고 퇴직한 거잖아요. 근데 아, 이건 내가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싶었죠. 그러다 사진을 시작했는데 글을 쓰는 것보다는 재미있더라고요. 단국대 사진예술아카데미를 다니며 본격적으로 사진을 공부했죠.”
2013년 그는 만 50세를 5개월 남겨두고 회사생활을 정리한다. 남들보다 이르게 퇴직한 뒤 일상의 어려움은 없었을까? 또 그의 바람대로 스트레스는 없는지 궁금했다.
“퇴직하고 공허해하는 사람이 많죠. 그건 출근을 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목표가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인 것 같아요. 현재의 삶이 여유롭긴 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쉬는 것은 아니거든요. 작품에 대해 늘 무언가를 생각하고 고민하니까요. 즐거운 고민이죠. 나름 스트레스도 받아요. 그러나 과거의 스트레스가 몸에 해로운 것이었다면, 지금의 스트레스는 삶에 탄력을 주고 의미를 주는 활력소 같은 거죠.”
어릴 적 반짝이던 꿈 ‘별이 빛나는 밤에’
‘무엇을 할까’ 고민하던 그에게 슬며시 동심이 피어올랐다. 한때는 그도 밤하늘에 총총히 떠 있는 별을 보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소년이었다. 시간이 흘러 소년은 과학을 전공하는 청년이 됐고, 반짝이는 별의 빛깔을 수학적으로 계산할 수 있을 만큼 영리해졌다. 아쉽게도 어릴 적 느꼈던 별에 대한 환상과 신비는 그렇게 잊혀졌다. 그리고 30여 년 뒤, 중년이 되고 문득 다시 그 별이 보고 싶어졌단다.
“첫 개인 사진전 제목이 ‘별이 빛나는 밤(The Starry Night·2015)’이었는데 어릴 적 밤하늘의 별, 그러니까 유년기의 꿈을 재현한 작품들이었어요. 진짜 밤하늘의 별을 찍은 게 아니라, 그 옛날 환상을 가지고 바라보던 별을 물방울과 빛을 이용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거죠. 투명한 유리판에 물방울을 만들고 빛을 입혀 사진을 찍으면 반짝이는 별이 담기거든요. 정말 어려운 작업이었죠. 다시 한다고 해도 그렇게까지 못할 것 같아요. 힘들긴 했지만, 그만큼 다른 누구도 따라 하지 못하는 저만의 방법으로 작품을 탄생시켰다는 자부심이 커요.”
아름다운 꽃송이에 번지는 별빛들이 어릴 적 꿈처럼 반짝이는 그의 첫 전시 작품들은 전문가와 관람객들에게 호평을 얻었다. 독특한 표현 기법도 눈길을 끌었지만, 과학자 출신 신진 사진작가의 작품이라는 점이 감탄을 자아냈다.
“사진을 시작할 때는 가벼운 마음으로 했어요. 2013년부터 그룹 사진전에 참여했는데, 좋은 평가를 들으니 자신감이 생기더라고요. 또 인정해주는 사람이 많으니 재미있어졌죠. 그렇게 본격적인 사진작가의 길로 전향하게 됐어요. 잘 모르는 사람은 ‘은퇴하고 좋은 취미활동 한다’고 하지만, 나는 ‘사진작가’라고 딱 잘라 말해요. 제2인생의 직업이 된 거죠. 은퇴하고 등산 많이들 하는데, 등산이 제2직업이 될 수는 없잖아요. 수입이 많지는 않더라도 평생 직업으로 삼을 만한 일을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내면의 자화상 ‘꼭두각시’
과학자로, 기업가로, 그리고 사진작가로 무엇을 하든 빠르게 좋은 성과를 거두는 그의 삶이 탄탄대로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김 작가의 속사정은 달랐다. 모든 것이 절정으로 무르익던 40대, 수차례 천당과 지옥을 오갔을 정도로 절망과 실패로 얼룩진 나날을 보냈던 그다.
“제 이력만 보면 모르겠지만, 사실 그렇게 순탄하게 살지는 못했어요. 직접 회사를 운영하다 보니 수익에 연연하게 되고, 경기가 안 좋으면 빚을 지고, 그러다 회사가 숨넘어가는 지경에 이르면 정말 악몽 같은 날들을 보내야 했죠. 내가 하고 싶은 연구를 하려고 뜻이 맞는 사람들과 함께 차린 회사인데도 자금 때문에 연구도 제대로 못하고 결국 인간관계도 틀어지더라고요.”
김 작가는 당시의 아픔과 시련을 위로하며 자신의 모습을 사진에 담기로 했다. 지난 전시에서 별을 표현했지만 진짜 별을 찍지 않았던 것처럼, 이번에도 자신이 아닌 피노키오 마리오네트를 통해 감정을 이입했다.
“카이스트에서 박사학위 받고 마치 내가 세상의 주인공인 것처럼 의기양양하게 살았는데, 현실에 무너지고 상처받으면서 ‘나는 사회라는 쳇바퀴 속에 갇힌 꼭두각시에 불과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두 번째 전시 ‘꼭두각시(Marionette·2017)’는 그런 슬픔과 절망을 담았어요. 눈에 보이지 않는 내면의 모습을 표현한 거죠.”
아무런 표정이 없고, 생명력도 없는 목각 꼭두각시에 그는 ‘빛’을 이용해 감정을 불어넣었다. 라이트 페인팅(light painting) 작업인데, 푸른빛에서 느껴지는 색의 감정, 붉은빛에서 나타나는 색의 온도 등으로 꼭두각시에 감정을 입힌 것이다.
“그냥 꼭두각시만 찍어서는 그런 감동을 줄 수가 없잖아요. 하나의 꼭두각시라도 빛에 따라 다 감정이 달라 보여요. 무언가를 추구하는 모습, 우울한 표정, 위축된 감정 등 새로운 이미지와 메시지를 담을 수 있는 거죠.”
삶의 경험이 예술이 되다
빛을 이용하다 보니 그는 주로 어두운 곳에서 작업을 한다. 컴컴한 방 안, 조명과 카메라, 그리고 자신을 마주한 피사체와의 고요한 시간 속에 조바심이 나기도 하고 기대감에 들뜨기도 한다. 어둠 속에서 찍힌 작품들이 세상의 빛을 보았을 때, 몇몇 사람들은 의아스러운 표정을 짓기도 했다. 그의 작품이 사진이 아닌 애니메이션이나 컴퓨터그래픽인 줄 알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김 작가의 작품은 몽환적이고 이색적인 색감이 두드러져 마치 그림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에 대해 그는 실제로 보이지 않는 것을 찍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무대를 세팅하고 암실에서 카메라 셔터를 열고 빛을 칠하고 셔터를 닫으면 내가 했던 행위예술적 작업이 모여 한 장의 사진으로 담겨요. 분명 사진으로 나오지만 그 비주얼이 눈앞에 나타나는 것은 아니죠. ‘별이 빛나는 밤’의 별도 실제로는 안 보여요. 촬영했을 때 물방울에 반사된 빛이 결과물로 나오는 거죠. 결국엔 내 머릿속에서 상상하는 것들을 만드는 거예요. 마치 연주하는 것처럼.”
김 작가는 아무리 멋있고 좋은 곳이라도 풍경사진은 찍지 않는다. 누구나 가서 찍을 수 있을 뿐더러, 이미 그보다 더 잘 찍어낼 전문가들이 많기 때문이다. 평범한 것을 거부하고, 새로운 것에 열정을 보이는 그에겐 과학자로 살아왔던 인생철학이 담겨 있었다.
“화학 분야를 연구하다 보니,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는 것에 몰두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건 내 삶의 논리와도 같고요. 남들이 하는 것은 하지 않아요. 사진도 누구나 찍는 건 안 찍어요. 나만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작품을 만들죠. 취미 수준을 넘어 예술을 하려면 새로운 것에 대한 갈증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 점에서 과학과 예술이 관통하는 부분이 있죠.”
과학자로서의 경험은 그만의 독특한 작품세계 속에도 숨어 있었다. 물방울로 별을 표현하는 작업에서도 표면을 동그랗게 만들거나, 크기를 크게 만드는 등 화학적 원리를 이용한 방법들이 쓰였다고 한다. 남들에게는 어렵지만, 화학을 전공한 그에게는 별것 아닌 소소한 과정이라고. 그는 자신처럼 지난 경험을 무기로 활동하는 중장년 예술가들의 저력이 대단하다고 했다.
“요즘 은퇴하고 평생교육원이나 기관을 통해 글, 그림, 사진 등을 공부하는 사람이 많잖아요. 젊어서는 돈벌이가 되지 않아 직업으로 삼지 못하다가, 나이 들고 생계의 고충에서 벗어나 예술활동을 하는 거죠. 그중에 잘하는 분들의 작품을 보면, 지난 경험들이 다 녹아 있어요. 문학이든 예술이든 진정성이 뒷받침돼야 하는데, 그동안 축적해놓은 자기 이야기와 감정을 풀어놓으니 엄청난 무기가 되는 거죠.”
‘아바타’, ‘나는 나무로 살고 싶다’
과거 어린 시절의 꿈, 그리고 청년기와 중년기의 좌절을 담은 두 번의 전시를 마친 그는 이제 현재와 미래의 모습을 그린 작품들을 준비하고 있다. 세 번째 전시는 ‘아바타’, 네 번째 전시는 ‘나는 나무로 살고 싶다’라고 이미 제목도 지었고, 작가노트도 작성했다고 한다. 보통 작가들은 작업을 마친 후에 작업노트를 쓰는데, 벌써 마쳤다고 하는 것을 보니 그만큼 뚜렷한 작품세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가늠할 수 있었다.
“‘아바타’는 장년기의 소회를, ‘나는 나무로 살고 싶다’는 미래에 대한 삶의 고민을 담을 예정이에요. 제 작품들을 보면 비주얼은 특별하지만, 스토리는 소소한 제 삶을 이야기하잖아요. 그 덕분에 주제가 명확해 작품노트도 일찍 쓸 수 있었고요. 이제 어떤 방법으로 표현할지가 관건이에요. 한 가지 고민이 있다면, 지금 작업실을 따로 두지 않고 집에서 작업을 하는데, 작품 스케일이 점점 커지다 보니 불편한 점이 있어요. 아직은 제 작품을 알고 사가는 분들이 많지 않지만, 시간이 지나면 점점 나아질 거라 생각해요. 그런 부분도 기분 좋은 스트레스라 여기고 현명하게 잘 헤쳐나가야죠.”
최근 한밤중에 우리 아파트 뒤편 동네에 화재가 났다. 드라마를 보던 중이었는데 베란다 밖으로 시끄러운 사이렌 소리가 울리고 확성기가 요란해서 무슨 일인가 내다보았더니 바로 우리 집 건너편 숲 너머로 시뻘건 불길이 치솟고 연기가 퍼지고 있었다. 그 동네로 들어가는 길은 구불거리고 좁아서 평소에도 차 두 대가 만나면 한쪽이 비켜줘야 하는 곳이었다.
드라마에 심취해 있어서 몰랐는데 그 좁은 길에 어느새 출동한 대여섯 대의 소방차와 경찰차가 요란한 사이렌과 함께 경광등을 번쩍이고 있다. 새까만 밤길에 빨갛고 파란 경광등이 선명했다. 우리 집까지 번져오지는 않겠지만 바로 코앞에서 시뻘건 불길이 타오르니 섬뜩하기도 했고 무서웠다. 그래도 필자는 그 와중에도 기자 정신을 발휘해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이 동네는 예전엔 무허가 집이 즐비했던 산동네였다. 이제는 무허가 집이라 해도 말끔하게 단장하고 옆 텃밭을 가꾸는 등 목가적이고 아늑한 풍경이어서 가끔은 일부러 산책하러 가기도 했다. 아직 옛 정취가 남아 있어 담장마다 넝쿨 꽃을 늘어뜨리고 집 앞을 꽃 화분으로 장식한 소박한 집들이 보기에 정겨운 곳이다.
이렇게 깨끗하고 소박한 마을이지만, TV 드라마나 영화에서 주인공의 못살던 시절을 표현할 때 이곳을 찾는다고 한다. 언젠가 인기 드라마를 보다가 어디서 많이 본 듯한 풍경이 나왔는데 바로 이 동네였다. 덩달아 우리 아파트도 한 컷 찍히기도 해서 반가운 마음이 들었지만, 알고 보니 주인공의 가난한 시절을 찍기 위해 이 동네에서 촬영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직도 못사는 동네를 촬영할 때 이곳을 찾는다니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다.
그런데 유난히 이 동네는 불이 자주 난다. 웽웽 사이렌 소리가 울려 내다보면 연기와 함께 시뻘건 불길이 심심치 않게 보인다. 이번 불은 재빠른 소방차의 대응으로 금세 불길이 잡혔다. 인명피해가 있었다는 말은 없어서 다행이지만 몇십 년 보아오던 무성한 숲의 나무들이 불타는 광경은 참으로 안타까웠다.
불조심은 몇 번을 강조해도 부족하지 않다. 오늘의 화재도 누군가의 실수로 일어났을 것이다. 불이란 사소한 데서도 일어날 수 있으니 각자가 평소에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우리나라른 최근 고령사회로 접어들어 시니어들이 늘어나고 있다. 시니어는 젊은 사람보다 기억력과 행동에서 문제가 있을 수 있으니 불은 정말 조심해야 할 것 같다. 깜빡 잊는 바람에 큰일로 번질 수 있는 일이 많아 불안하고 걱정스럽다.
며칠 전에는 우리 아파트에서 작은 소동이 있었다. 8층에 사시는 할머니 한 분이 가스 불에 올려놓은 냄비를 잊고 마당에 나와 친구분과 한가로운 시간을 보냈다는 것이다. 아랫집에서 연기가 올라와 위층에 사는 사람이 관리실과 소방서에 연락해 출동했는데 정작 마당에서 놀고 계시던 할머니는 까맣게 몰랐단다. 다행히 불이 나지는 않았지만 실내엔 연기가 가득했고 타는 냄새가 심각했다고 한다. 이런 일이 생기면 자신뿐 아니라 이웃에게도 큰 피해를 주게 된다. 많은 분이 할머니에게 조심하시라는 이야기를 했고 할머니도 미안한 마음에 무척 놀라셨다고 한다. 생각해 보면 생판 남의 일만은 아니다. 필자도 가끔 가스레인지에 음식을 올려놓고 다른 일을 하다가 타는 냄새가 날 때쯤 겨우 알아차렸던 일이 있기도 했으니 말이다.
우리 아파트는 각 집마다 외출 시 가스와 전열기구 점검하라는 빨간색 경고 스티커를 배부했다. 필자는 스티커를 현관문 안쪽에 붙여놓고 나갈 때마다 한 번씩 더 점검을 한다. 나만 조심해서 될 일이 아닌 이런 사고가 노인이 늘어가는 세상에서는 더 자주 일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참으로 걱정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럴수록 서로가 더 조심해야 할 것이다. 백번을 말해도 부족하지 않을 불조심!!이다.
유채꽃은 제주도에서만 유명한 줄 알았더니 부안의 유채꽃밭도 아주 볼 만했다.
샛노란 유채꽃이 끝없이 펼쳐져 눈부신 풍경을 이루었다.
몇 년 전 제주도 유채꽃밭에서 사진을 찍으려 했더니 돈을 내야 한다는 팻말이 있어 기분이 안 좋았는데 이곳 부안 유채꽃밭은 포근하게 우리를 맞아주었다.
그 속에서 필자도 꽃이 된 양 마음껏 셔터를 눌러 멋진 유채꽃밭 사진을 얻었다.
유채꽃 만발한 부안 마실길인 수성당은 재미있는 전설이 깃든 곳이다.
수성당은 딸 여덟 명을 낳아 일곱 명 딸을 팔도에 한 명씩 나누어주고 막내딸만 데리고 살면서 서해바다를 다스렸다는 개양 할머니의 전설이 있어 매년 음력 정월 초사흘에 제사를 올리고 풍어와 무사고를 빌었다고 한다. 또 수성당 주변에서 선사시대 이래 바다에 제사를 지낸 유물이 발견돼 죽막동 제사 유적지임이 확인된 곳이라 한다.
유채꽃밭 속에서 손자, 손녀와 그네도 타고 사진도 찍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여행 첫날을 보내고 다음 날은 부안에서 유명한 누에박물관에 가보기로 했다.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장소라며 고른 방문지다.
온종일 피곤했을 텐데 아이들은 잠을 안 자고 뛰어다닌다.
억지로 끌어안고 누웠더니 필자가 먼저 꿈나라로 갔던 모양이다.
아침에 손녀가 가만히 귀에 대고 “할머니~” 하고 불러 잠이 깼다.
콘도였으면 아침 정도는 간단히 해먹었겠는데 호텔이라 아래층 식당으로 갔다.
넓고 깨끗한 한식 식당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누에 박물관으로 출발했다. 누에 형상을 한 귀여운 캐릭터가 아이들이 좋아할 만해서 손자 손녀는 신이 났다.
누에로 비단 실을 만들므로 실크로드와 부안의 선잠 농가에 관한 설명이 있었는데 실크로드(비단길) 라는 이름의 어원은 1877년 독일의 지리학자 ‘리히트 호팬’이 중국에서 중앙아시아, 인도로 이어지는 교역로에서 주요 교역품이 비단인 것에 착안 그의 저서 ‘차이나’에 ‘자이덴 슈트라쎄’ 라고 명명한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연구가 계속되면서 1910년 독일의 동양학자 ‘알버트 헤르만’이 교역로가 중국에서 시리아까지 간다고 주장했으며 오늘날에는 동서의 교역로를 비단길과 초원길, 바닷길, 3가지로 나눈다고 한다.
부안은 참뽕 프로젝트로 세계제일의 누에 메카를 꿈꾸며 입는 실크에서 먹는 기능성 실크로 녹색성장의 힘찬 도약을 하고 있다.
부안 참뽕 오디를 이용하여 뽕 아이스크림, 뽕 오디 과자, 오디 케이크, 뽕 술, 뽕 바지락죽 등 많은 음식을 만들고 있다.
‘잠령제’ 라는 행사도 있는데 해마다 봄누에 치기를 앞두고 순조로운 누에치기를 빌며 인간이 기능성 식품생산을 위해 큰누에를 급랭 건조하는 죄를 천지신명께 고하고 잠령들의 안녕과 양잠 농가의 풍년 농사를 기원하는 의식이라 한다.
누에에 속죄하는 사람의 마음이 선하게 느껴졌다.
체험관에서는 실제 누에를 만져 볼 수 있었다. 하얗고 보드라운 누에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보니 캐릭터처럼 귀여운 모습이다.
5살 손녀는 징그럽다고 싫다지만 두 살짜리 손자는 단풍잎 같은 손으로 누에를 살짝 만져보며 관심을 보였다.
이런 작은 누에에서 멋진 비단 실이 나온다는 게 정말 신비스럽다.
농약을 하지 않고 키운다는 참뽕나무 터널도 지나보고 참뽕 잎도 하나 따서 입에 넣어 보았다.
부안의 참뽕 프로젝트가 큰 성공을 해서 세계적으로 유명해지면 좋겠다는 바람을 해 보았다.
세상이 각박해졌다는 말을 할 때 우리는 상징적으로 하늘을 얘기한다. 사실 눈앞에 닥친 일을 해결해야 하는 급급한 상황에 치이다 보면 하늘 한 번 올려다볼 틈 없이 바쁘게 사는 현대인이다. 그런데 요즘은 하늘을 올려다봐도 특별히 보이는 게 없다. 낮에는 태양이 눈부셔서 올려다보기 힘들고, 밤의 하늘은 거리를 밝히는 가로등과 거리를 가득 메우고 달리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 그리고 별들을 흉내 낸 인조 조명들이 정작 별들을 몰아냈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도시에 모여 살며 그 많은 밤하늘 가득한 별들을 추방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 별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아마 그들은 자신들을 반기는 곳으로 갔을 것이다. 그중의 한 곳-별을 만날 수 있는 길을 나는 사진을 하며 알게 되었다.
물론 작정하고 도시를 떠나 한적한 산이나, 아직 오염되지 않은 시골로 가면 별을 만나볼 수 있다. 그런데 난 의외의 곳에서 그 별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곳에는 몽돌들이 쉬지 않고 오르고 내리는 파도와 함께 으르렁 드르렁거리며 굴렀다. 그 소리가 얼마나 큰지 같이 간 아내가 바로 곁에서 큰 소리로 이야기해도 잘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아내는 소리에 민감하다. 버스나 택시를 탔을 때 기사 아저씨가 틀어놓은 라디오나 음향기기의 소리가 조금만 커도 난 볼륨을 조금이라도 줄여 달라 양해를 구한다. 집 안이든 밖에서 다른 사람들과 만날 때든, 아내와 함께 있을 때면 난 내 큰 목소리에 신경을 써야 했다. 이제야 겨우 내 목소리가 낮아져 아내의 지적을 많이 받지 않지만 그동안 38년이 걸렸다. 그런 아내가 이렇게 커다란 소리에 둘러싸여 있는데도 조금도 얼굴 찌푸리지 않는다. 마치 아무 소리도 나지 않거나 좋아하는 음악을 작게 틀어놓고 무심히 할 일을 하며 즐기는 모습이다. 바람소리, 파도소리, 수천수만의 몽돌이 파도에 밀려 굴러 올라가고, 다시 한꺼번에 굴러 내리며 마냥 부딪치는 소리는 조금도 멈춤 없이 되풀이되며 막힘 없는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데도 말이다. 세상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이 굉장한 소리가 아내의 귀를 압박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막힘 없이 트이는 해방감을 만들어준다는 것을 알았다. 아내는 무조건 큰 소리를 싫어한 게 아니라 내 소리를 포함해 좋아하는 소리와 싫어하는 소리가 구분되어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틈날 때마다 그곳에 갔다. 힘든 일이 생겨도 집에서 도시락을 싸 각자 사진기를 챙겨 그곳으로 갔다. 그곳은 늘 한산하다. 우리와 우리가 초대한 사람 외에 다른 사람을 만난 적이 없다. 우린 큰 소리 속에서 사진 작업을 했다. 사진기 뷰파인더를 통해 매번 다르기도 하고 크게 보면 같기도 한 바람과 물에 비치는 빛의 모습을 언제나 파도와 몽돌들이 서로 부딪쳐 으스렁거리는 소리 속에서 관찰했다. 사진기가 없었다면 우리는 맨눈으로 그렇게 오랫동안 그 이미지의 변화를 섬세히 볼 수 없었을 것이다.
해가 기울어 석양의 각도가 낮아지면, 굴러가는 몽돌을 감싼 물에 직접 비친 빛이 수면을 점점 더 넓게 비추며 그늘진 물빛과 대조를 이룬다. 수평선 가까이 태양이 떨어질수록 색 온도도 낮아진다. 주위에 깃들기 시작하는 어둠 속에서 갓 잘라낸 짙은 오렌지빛 태양은 수면에 면을 이루며 반짝인다. 때로는 그 빛들이 물과 하늘의 경계선이 되어 흐르기도 한다. 그때 렌즈 조리개를 가능한 한 닫아 셔터 스피드를 길게 해 파도에 밀린 몽돌이 구르며 사진에 남길 시간의 흔적이 내 머리에 떠오르게 한다. 스틸사진을 오래 되풀이한 사람의 뇌에 미리 그려지는 프레임 중 하나다. 그 이미지가 궤적이 되어 실제 한 장의 스틸에 담긴다. 돌의 크기와 모양에 따라 굴러간 속도도 달라 제각기 다른 흔적이 보인다. 굴러가는 속도가 빠를수록 긴 시간의 흔적을 남기고, 느린 속도는 짧은 흔적을 남긴다.
‘속도가 빠를수록 시간은 느려지고 이동거리가 짧아지면 시간은 그만큼 빨라진다’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사진 속에 들어온다. 한 천재 과학자가 이미 오래전에 발견하고 세상에 소개한 변하지 않는 수(상수-C) 얘기를 우리는 그렇게 겨우 렌즈의 힘을 빌려 볼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은 시간이라는 붓이 그려낸 변형된 빛의 흔적이었다. 그처럼 우린 수많은 몽돌에 다녀간 별을 사진으로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내 렌즈를 통해 들어온 별들은 결국 내 사진에 선과 면으로 맺혀졌지만, 나중에 자세히 보니 모두 점이었다. 수많은 별이 다녀간 것이다. 사진과 달리 실제 풍경을 보고 있는 내 눈에는 흐르는 파도도, 파도에 구르는 몽돌도 모두 빛나는 점이었다. 마치 동트기 전 새벽녘 하늘에 더욱 크고 밝게 드러내는 몇몇의 별처럼!
여기에 한 가지 이미지가 더 보태졌다. 점인 별이 선으로 모였듯이, 그 선이 이어져 구르며 면의 흔적을 만들어낸다. 이 이미지들은 사진이 아니면 나눌 수 없는 얘기다. “색은 우주와 인간의 두뇌가 만나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장소”란 말을 남긴 폴 세잔이 떠오른다. 시간에 따라 바뀌는 색을 맨눈으로 관찰한 그의 기억력은 절대색감에 바탕을 두었을 것이다. 그런 능력을 지닌 그의 두뇌와 우주에도 매 순간 서로 다른 새로운 별들이 빛으로 다녀갔을 것이다.
새벽 댓바람에 그곳에 닿으려면 밤새도록 달려야 한다. 자정 무렵 서울을 출발한 버스가 그곳에 도착해 우리를 어둠 속에 내려놓았을 때는 새벽 5시가 조금 넘었을 때였다. 버스에서 내려 세량지까지 걸어갈 때 코끝에 스치는 새벽 공기는 마치 박하 향기 같았다. 두런두런 이야기하며 산길을 걷다 보니 어둠이 서서히 풀렸다. 멀리 저수지가 보이자 일행은 “와~” 하며 탄성을 질렀다. 그 탄성은 산하의 아름다움에서 나온 감탄사가 아니었다. 멀리 보이는 저수지 언덕 위에 수백 명의 사진 애호가들이 이미 진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가히 인파라고 해도 과장이 아닐 정도였다. 좋은 포인트를 선점하기 위해 그들은 텐트를 치고 밤을 새우거나 자동차 안에서 이슬 내리는 새벽을 맞았으리라.
사진 인구가 천만이 넘고 바빠진 카메라 시장 이야기가 필자의 귀에까지 들리고 이렇게 직접 눈으로도 확인된다. 필자도 이전엔 사진을 찍기 위해 먼 곳으로 달려가기도 했지만 지금은 가까운 곳으로 잠깐씩 나가는 정도다. 이번엔 우리 지역 사진가들과 함께 하는 출사여서 한동안 못 보았던 분들도 볼 겸 오랜만에 참여했다.
먼저 와 있는 사람들에 비하면 우린 늦게 도착한 사람들이었다. 삼각대 세울 자리조차 없어 이리저리 틈새를 찾아 잠깐씩 카메라를 들이밀고 셔터를 누른 뒤 얼른 빠져나오곤 했다. 어떤 사람은 이날 모인 인원이 천 명 가까이는 될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세량지의 모습은 수천 점의 사진에 담겼을 것이다. 실소가 나왔지만 어차피 필자도 그들 중 한 사람이었다.
필자는 그럼에도 사진의 대중화를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현대 사회의 기록물로 사진은 빠질 수 없는 장르다. 예술작품으로 남지 않아도 개개인들의 감성과 여가활용 측면에서 사진은 순기능이 많다.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는 건강도 좋아지고 감성도 자극된다. 또 이런 열정들이 차츰 프로페셔널한 개성을 만들고 사진 예술의 경지를 이루는 과정으로 이어질 것이다.
아무튼 수많은 군중 속에서 세량지의 새벽을 보았다는 것만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산벚꽃과 복사꽃이 물안개와 함께 이루어내는 반영이 신비로웠던 날이었다.
세량지(細良池)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읍 세량리에 있는 저수지이다.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하여 1969년 준공되었다. 봄이면 연분홍빛으로 피어나는 산벚꽃과 초록의 나무들이 수면 위에 그대로 투영되는데, 햇살이 비칠 무렵 피어오르는 물안개와 어우러져 이국적 풍광을 빚어낸다. 또 가을이면 단풍으로 물든 산과 어울려 경관이 아름답다. 이 때문에 사진 찍기를 즐기는 사람들의 출사지(出寫地)로 알려져 있다. - 네이버 지식 in
세상이 각박해졌다는 말을 할 때 우리는 상징적으로 하늘을 얘기한다. 사실 눈앞에 닥친 일을 해결해야 하는 급급한 상황에 치이다 보면 하늘 한 번 올려다볼 틈 없이 바쁘게 사는 현대인이다. 그런데 요즘은 하늘을 올려다봐도 특별히 보이는 게 없다. 낮에는 태양이 눈부셔서 올려다보기 힘들고, 밤의 하늘은 거리를 밝히는 가로등과 거리를 가득 메우고 달리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 그리고 별들을 흉내 낸 인조 조명들이 정작 별들을 몰아냈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도시에 모여 살며 그 많은 밤하늘 가득한 별들을 추방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 별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아마 그들은 자신들을 반기는 곳으로 갔을 것이다. 그중의 한 곳-별을 만날 수 있는 길을 나는 사진을 하며 알게 되었다.
물론 작정하고 도시를 떠나 한적한 산이나, 아직 오염되지 않은 시골로 가면 별을 만나볼 수 있다. 그런데 난 의외의 곳에서 그 별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곳에는 몽돌들이 쉬지 않고 오르고 내리는 파도와 함께 으르렁 드르렁거리며 굴렀다. 그 소리가 얼마나 큰지 같이 간 아내가 바로 곁에서 큰 소리로 이야기해도 잘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아내는 소리에 민감하다. 버스나 택시를 탔을 때 기사 아저씨가 틀어놓은 라디오나 음향기기의 소리가 조금만 커도 난 볼륨을 조금이라도 줄여 달라 양해를 구한다. 집 안이든 밖에서 다른 사람들과 만날 때든, 아내와 함께 있을 때면 난 내 큰 목소리에 신경을 써야 했다. 이제야 겨우 내 목소리가 낮아져 아내의 지적을 많이 받지 않지만 그동안 38년이 걸렸다. 그런 아내가 이렇게 커다란 소리에 둘러싸여 있는데도 조금도 얼굴 찌푸리지 않는다. 마치 아무 소리도 나지 않거나 좋아하는 음악을 작게 틀어놓고 무심히 할 일을 하며 즐기는 모습이다. 바람소리, 파도소리, 수천수만의 몽돌이 파도에 밀려 굴러 올라가고, 다시 한꺼번에 굴러 내리며 마냥 부딪치는 소리는 조금도 멈춤 없이 되풀이되며 막힘 없는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데도 말이다. 세상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이 굉장한 소리가 아내의 귀를 압박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막힘 없이 트이는 해방감을 만들어준다는 것을 알았다. 아내는 무조건 큰 소리를 싫어한 게 아니라 내 소리를 포함해 좋아하는 소리와 싫어하는 소리가 구분되어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틈날 때마다 그곳에 갔다. 힘든 일이 생겨도 집에서 도시락을 싸 각자 사진기를 챙겨 그곳으로 갔다. 그곳은 늘 한산하다. 우리와 우리가 초대한 사람 외에 다른 사람을 만난 적이 없다. 우린 큰 소리 속에서 사진 작업을 했다. 사진기 뷰파인더를 통해 매번 다르기도 하고 크게 보면 같기도 한 바람과 물에 비치는 빛의 모습을 언제나 파도와 몽돌들이 서로 부딪쳐 으스렁거리는 소리 속에서 관찰했다. 사진기가 없었다면 우리는 맨눈으로 그렇게 오랫동안 그 이미지의 변화를 섬세히 볼 수 없었을 것이다.
해가 기울어 석양의 각도가 낮아지면, 굴러가는 몽돌을 감싼 물에 직접 비친 빛이 수면을 점점 더 넓게 비추며 그늘진 물빛과 대조를 이룬다. 수평선 가까이 태양이 떨어질수록 색 온도도 낮아진다. 주위에 깃들기 시작하는 어둠 속에서 갓 잘라낸 짙은 오렌지빛 태양은 수면에 면을 이루며 반짝인다. 때로는 그 빛들이 물과 하늘의 경계선이 되어 흐르기도 한다. 그때 렌즈 조리개를 가능한 한 닫아 셔터 스피드를 길게 해 파도에 밀린 몽돌이 구르며 사진에 남길 시간의 흔적이 내 머리에 떠오르게 한다. 스틸사진을 오래 되풀이한 사람의 뇌에 미리 그려지는 프레임 중 하나다. 그 이미지가 궤적이 되어 실제 한 장의 스틸에 담긴다. 돌의 크기와 모양에 따라 굴러간 속도도 달라 제각기 다른 흔적이 보인다. 굴러가는 속도가 빠를수록 긴 시간의 흔적을 남기고, 느린 속도는 짧은 흔적을 남긴다.
‘속도가 빠를수록 시간은 느려지고 이동거리가 짧아지면 시간은 그만큼 빨라진다’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사진 속에 들어온다. 한 천재 과학자가 이미 오래전에 발견하고 세상에 소개한 변하지 않는 수(상수-C) 얘기를 우리는 그렇게 겨우 렌즈의 힘을 빌려 볼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은 시간이라는 붓이 그려낸 변형된 빛의 흔적이었다. 그처럼 우린 수많은 몽돌에 다녀간 별을 사진으로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내 렌즈를 통해 들어온 별들은 결국 내 사진에 선과 면으로 맺혀졌지만, 나중에 자세히 보니 모두 점이었다. 수많은 별이 다녀간 것이다. 사진과 달리 실제 풍경을 보고 있는 내 눈에는 흐르는 파도도, 파도에 구르는 몽돌도 모두 빛나는 점이었다. 마치 동트기 전 새벽녘 하늘에 더욱 크고 밝게 드러내는 몇몇의 별처럼!
여기에 한 가지 이미지가 더 보태졌다. 점인 별이 선으로 모였듯이, 그 선이 이어져 구르며 면의 흔적을 만들어낸다. 이 이미지들은 사진이 아니면 나눌 수 없는 얘기다. “색은 우주와 인간의 두뇌가 만나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장소”란 말을 남긴 폴 세잔(Paul Cézanne)이 떠오른다. 시간에 따라 바뀌는 색을 맨눈으로 관찰한 그의 기억력은 절대색감에 바탕을 두었을 것이다. 그런 능력을 지닌 그의 두뇌와 우주에도 매 순간 서로 다른 새로운 별들이 빛으로 다녀갔을 것이다.
함철훈(咸喆勳) 사진가·몽골국제대학교 교수
1995년 민사협 초청 ‘손1’ 전시를 시작으로, 2009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 2012년 이탈리아 밀란시와 총영사관 주최로 전을 FORMA에서 개최. 2006년 인터액션대회(NGO의 유엔총회)서 대상 수상. 저서로 , 등이 있다.
겨울의 한가운데서 추위가 연일 맹위를 떨치더니 밤새도록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던 어느 날, 눈 쌓인 남한산성을 등반을 하기로 했다. 송파에 살고 있는 필자에게 남한산성은 매우 근접해 있어 매일같이 조망할 수 있으니 마을 뒷산 같은 느낌이 들곤 했다. 늘 그곳을 조망하면서 건강을 위해서 최소한 매주 한번 정도는 등산을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지만 실제로는 일 년에 두서너 번이 고작이다.
어제 저녁 내내 소복소복 눈이 오더니 아침에는 제법 많은 눈이 쌓였다. 시내는 눈이 내리면서 녹았지만 산에는 낮은 기온으로 인해 많은 눈이 쌓여있어 모처럼 설원을 구경하면서 역사의 숨결 따라 멋진 눈길산행을 해 볼 요량으로 지인들과 함께 산행 길에 나섰다. 지하철 5호선 마천역에서 내려 만남의 광장에서 합세한 일행은 성불사를 들머리로 산행을 시작하였다. 고즈넉한 사찰의 기와위에 소복하게 쌓인 눈이 눈부시도록 정겹다.
등산을 좋아 하는 많은 사람들 속에 섞여 본격적으로 산을 오르기 시작하자 드디어 미끄러운 등산로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나뭇가지에 소복하게 걸터앉은 눈꽃이 바람이 불적마다 후드득 머리위로 떨어지고 까마귀 울음소리가 까악 까악 산중에 울려 퍼져 우리를 반겨주는 듯 했다. 터벅터벅 올라가는 산행 길에서 만났던 멋진 설경은 덤으로 주어진 귀한 선물이었다. 올라가면서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댄다. 오르락내리락 한 시간을 훌쩍 넘겨서 걷다보니 어느새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힐 무렵, 드디어 산성이 보이기 시작한다. 산성 기와에 소복하게 쌓인 눈은 한층 멋들어진 한 폭의 그림이었다. 산성 위에서 내려다 본 도시(都市)는 엄동설한(嚴冬雪寒)에 묻혀 고즈넉하고 평화로운 풍경을 연출해 내고 있었다. 송파 쪽으로 바라보니 눈을 흠뻑 뒤집어쓴 도시 한가운데에 빌딩 하나가 우뚝 솟아 눈앞으로 다가온다. 124층짜리 잠실 제2롯데 빌딩이 그 웅장함을 보여주고 있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빌딩이 이제는 완공단계에 접어들어 그 멋진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반대로 돌아 하남시 쪽을 내려다보니 전형적인 농촌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눈 속에 푹 파묻혀있는 그곳의 풍경을 내려다보고 있노라니 왠지 모를 평화로움이 마음 한 구석에서 샘솟듯 올라온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눈 속에 깊게 묻힌 산성은 고요와 함께 태고적 신비로운 모습을 고스란히 느낄 수가 있었다. 수많은 외침을 겪은 민족이지만 특히 병자호란 중에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던 인조임금이 결국은 오랑캐에게 항복을 하기 위해 어떤 심정으로 이 문을 나섰을까 감히 상상해 본다. 인조14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여 47일간 항전을 하였다. 청나라의 12만 대군의 침략을 받은 인조가 서울을 버리고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여 항전하다가 끝내 청나라에 굴복하여 송파 삼전도에 나와 청태종 홍타이지 앞에 3번 절하고 9번 머리를 조아린 뒤 무릎을 꿇고 항복하는 치욕적인 굴욕을 당해야 했는데 이를 삼전도의 굴욕이라 불렀다.
인조가 땅바닥에 연이어 머리를 짓치며 피를 흘릴 때에 이를 보던 백성들과 신하들은 얼마나 피눈물을 흘렸을 것인가?
예나 지금이나 힘이 없는 나라의 백성은 그 대가를 혹독하게 치러야 한다는 역사의 교훈을 되새겨야 할 것이다. 이제라도 나라의 근간을 든든하게 하여 두 번 다시 이민족으로부터 핍박 받는 백성이 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하지만 작금의 정치상황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수렁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은 아닌지 역사의 숨결이 어린 남한산성 위해서 심히 걱정스러운 마음이 드는 것은 기우(杞憂)일까?
다시 신발을 졸라매고 하남시를 향해서 눈길을 헤쳐 나갔다. 남한산성과 하남 의 이성 산성으로 이어지는 위례둘레길을 걷기로 했다. 대체로 길이 평평하고 무난한 코스이긴 하지만 등산로에 많은 눈이 쌓여 있어 다리에 한층 힘이 들어갔다. 눈길을 걸은 지도 어느덧 서너 시간이 지나고 나니 다리도 아프고 배도 고팠다. 양지 바른 곳에서 잠시 배낭을 풀고 갈증이 나던 차에 시원한 막걸리 한 잔으로 목을 축이니 이보다 더 행복할 순 없었다. 멋진 설경속에서 따끈한 커피 한잔은 세상 그 어떤 커피보다 맛이 있었다.
다시 산행을 시작하여 이성 산성을 거쳐 덕풍골쪽으로 하산했다. 산행을 시작한지 거의 4시간 반이나 걸려서 끝난 산행에 비록 몸과 마음은 지치고 피로했지만 멋진 설경에 도취되었던 시간들은 두고두고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될 것이다.
봄이 기지개를 켜는 3월이다. 우리네 마음은 춘삼월(春三月)이어도 꽃봉오리들은 아직 몸을 웅크리고 있다. 봄꽃을 보려면 조금 더 기다려야 하지만, 아산세계꽃식물원을 찾는다면 사시사철 언제나 향기로운 꽃들을 만날 수 있다.
아산세계꽃식물원은 3000여 종의 원예 관상식물을 볼 수 있는 국내 최대 규모의 실내 온실 식물원이다. 각기 다른 테마로 꾸며진 18개의 실내 온실 정원과 3개의 야외 정원을 둘러보며 여유롭게 산책하기 좋다. 2004년 개관해 2014년부터는 한국노인인력개발원의 고령자친화기업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아 리아프(LIAF, Life ia a Flower)라는 자회사를 설립해 운영 중이다.
3월은 봄이라고 해도 날씨가 제법 쌀쌀한 편인데, 이곳 온실 정원에서는 3월 말부터 4월 초순까지 꽃피우는 구근식물(球根植物)을 미리 만날 수 있다(1월부터 온실에 전시). 알뿌리식물이라고도 불리는 구근식물은 땅이 얼기 전 심어 추운 겨울을 보내야만 봄에 꽃을 피우는 것이 특징이다. 겨우내 움츠렸던 구근에서 싹이 나고 싱싱한 꽃망울을 터뜨릴 때면 따뜻한 봄기운이 찾아왔음을 느낄 수 있다. 이번 봄에는 튤립, 히아신스, 수선화 등을 비롯해 네덜란드에서 지난가을 수입해 식재한 250여 종의 구근식물을 전시한다.
따뜻하고 향기로운 꽃길 산책
꽃구경을 위해 온실 정원(식물원)으로 향하기 전, ‘LIAF 가든 센터’를 지나게 된다. 원예와 정원 문화가 발달한 유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든 센터(garden center)처럼 다양한 원예 프로그램을 체험하고 관련 제품까지 구입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마련했다. 가든 센터의 외관은 지붕이 뾰족하고 벽이 유리로 되어 있어 마치 식물원을 보는 듯하다. 실내로 들어서면 안팎이 훤히 보이는 유리벽 덕분에 햇살이 곧 조명이 된다.
가든 센터를 지나 온실 정원에 들어서면 한층 더 따뜻한 기운을 느낄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외투를 벗고 가벼운 차림으로 꽃을 즐기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햇볕이 잘 들고 실내 온도가 훈훈한 덕분에 계절에 상관없이 다양한 종의 꽃과 식물을 볼 수 있다. 산책 동선을 알려주는 이정표를 따라가면 굳이 천천히 걷지 않아도 자주 발걸음을 멈추게 된다. 올망졸망 피어난 꽃들을 바라보고 그윽한 향을 맡으려면 느긋하게 거닐 수밖에 없다. 관람객들은 예쁜 꽃을 담기 위해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꽃밭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기 바쁘다. 연못 정원과 새 모이 정원, 미로 정원 등은 아이들도 좋아하는 공간이다.
식물원에서의 추억, 집에서 키워나가기
온실 정원 코스를 순서대로 관람하고 나면 다시 가든 센터에 도착하게 된다. 봄을 맞이하는 꽃과 구근식물 화분, 원예에 필요한 다양한 도구 등을 구입할 수 있다. 가든 센터를 나서기 전까지 입장권을 잘 챙겨야 한다. 관람을 마친 후 입장권을 매표소에 보여주면 작은 다육 화분을 선물로 주기 때문이다. 식물원에서의 즐거웠던 추억이 집에서까지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에서 증정하기 시작한 다육 화분은 벌써 100만 개가 넘었다고 한다. 다육식물은 원예 초보자도 쉽게 키울 수 있어 집에서도 이곳에서의 추억을 오래 간직할 수 있다.
‘삶이 꽃이다’라는 캐치프레이즈처럼 단순히 꽃을 구경하는 것 외에 다양한 프로그램을 즐길 수 있다. 꽃잎으로 손수건에 물을 들이는 ‘꽃 손수건 천연 염색 체험’을 비롯해 화분 심기 등 다양한 원예 교육 프로그램이 마련되어 있다. 주말에 방문할 계획이라면 가든 센터에서 운영하는 레스토랑에도 들러보자. 다양한 식용 꽃과 신선한 나물로 만든 ‘꽃 비빔밥(8000원)’을 맛볼 수 있다(평일 10명 이상 예약 시 주문 가능).
>>LIAF·아산세계꽃식물원
위치 충남 아산시 도고면 아산만로 37-37
이용시간 (식물원) 09:00~18:00 (가든 센터) 09:00~19:00
관람요금 8000원(65세 이상 6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