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공원에서 차이나타운 쪽으로 발길을 옮기자. 갑자기 북적이는 인파속으로 휩쓸렸다. 주말이라 그런지 많은 사람들이 그곳을 찾았다. 여기저기 붉은 색으로 장식한 가게와 벽화들, 붉은색 물결이 마치 차이나타운을 상징하는 듯하다. 왜 그들은 붉은 색을 좋아하는 걸까? 중국인들이 홍색을 좋아하는 이유는 붉은색이 복을 가져다 준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삼국지 벽화거리 인근에 청일 조계지 계단이 나타났다. 조계지(租界地)란 외국인 거주지를 뜻하는데 1883년 제물포 개항 이후 많은 청국과 일본인들이 들어와 이곳을 거주지로 삼았다고 한다. 당연히 이곳에 살던 사람들은 삶의 터전을 옮길 수밖에 없었는데 그곳이 지금의 배다리이다.
계단위에서 내려다보는 왼쪽이 일본, 오른쪽이 청나라의 조계지라고 하는데, 이 계단을 경계로 좌측엔 청국이 우측엔 일본의 집단 거주지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계단 위쪽 가운데에 공자의 동상이 서있었다. 그 곳에서 사진 몇 장을 찍고 차이나타운 중심부를 지나 중국인이 직접 운영하는 음식점으로 들어가 늦은 점심을 짜장면과 짬뽕으로 허기를 배를 달래고 월미도를 향해 다시 출발하였다.
월미도 입구 월미전통정원은 생각보다 아름다웠다. 특히 초입의 양진당은 각종 한국전통체험을 하기 딱 좋았다. 쾌적하고 멋들어진 정원에서 쉴 새 없이 눌러대는 카메라셔터, 월미산 올라가는 발길을 잡는다. 산책로를 따라 올라가니 지난 50여년간의 일반인 출입차단으로 훼손되지 않은 나무들이 터널을 이루고 있으며 걷다보면 향긋한 나무향기와 새소리가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드디어 월미산 정상에 오르니 인천포구는 물론이고 인천앞바다가 시원하게 내려다 보였다. 포구에는 군함이 아닌 화물선이 정박해 있었고 올망졸망한 바다 풍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 전망대에 오르자 인천대교가 코앞에 보이고 바다건너 영종도의 고층아파트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영종도는 필자의 고향이다. 어린 시절, 한없이 멀게만 느껴졌던 인천과 영종도의 간극이 이렇게나 좁혀졌을까?
긴 호흡을 하고 인천대교 너머 아스라이 가물거리는 바다를 바라보면서 긴박했던 인천상륙작전을 떠올렸다.
1950년 6월 29일 서울이 함락되고 북한군의 진격이 가속화되자 8월 1일에는 낙동강 선까지 국군이 후퇴하였다. 1950년 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유엔군 총사령관에 취임한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원수는 6월29일 전쟁발발 4일 뒤, 한강방어선을 시찰하며 인민군의 후방에 상륙, 병참선을 차단하고 낙동강을 통해 반격에 들어간다는 기본 전략을 세웠다고 미국 정부에 보고했다. 그러나 미 해군은 인천항의 간만의 차가 평균 7미터로, 항에 상륙하기 전에 월미도를 먼저 점령해야 하는데다 선단의 접안지역이 좁아 상륙 후 시가전이 불가피한 점 등의 이유로 상륙작전의 최악의 지형이라며 완강히 반대하였다. 해군 일부 인사들이 작전성공률이 5천대 1이라며 격심하게 반대하는 와중에, 맥아더는 이런 난점이 오히려 적의 허점을 찌르는 기습이 될 수 있다며 끝까지 인천상륙을 주장, 결국 8월 28일 미합참본부로부터 승인을 얻어냈다.
많은 논란이 있었지만 인천상륙작전은 치밀한 작전계획과 작전 당일까지 상륙작전 가능한 지역에 폭격을 실시하면서 양동작전을 실시하므로 서 손쉽게 교두보를 확보했다.
인천상륙작전의 진정한 의의는 유엔군이 우회 기동을 통해 북한군의 병참선을 일거에 차단하였으며, 이로 인해 낙동강방어선에서 반격의 계기를 조성해 주었다는 점이다. 또한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인해 인천의 항만시설과 서울에 이르는 제반 병참시설을 북진을 위해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 무엇보다도 인천상륙작전에 이은 서울 수도탈환의 성공은 심리적으로 국군 및 유엔군의 사기를 크게 제고시키고 북한군의 사기를 결정적으로 떨어뜨리게 하였다는 점이다.
월미산 정상에서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사진촬영을 마치고 내려오기 시작하였다. 다리도 아프고 피로감도 몰려왔지만 기분은 꽤나 괜찮았다. 50여년 만에 추억의 오솔길을 걸으면서 그 시절을 추억해서 행복했고, 특히 보훈의 달을 맞이하여 인천상륙작전지를 답사했다는 것은 더욱 의미가 있었다. 지하탄약저장고는 이제는 효소 발효음식 저장고로 바뀌었다는 사실이 세월의 흐름을 말해주고 있었다. 세월의 긴 간극을 월미산은 오늘도 말없이 지켜보고 있다.
그리스는 아름다운 곳이 많은 나라다. 아테네 거리에서는 여신이 금방 환생한 듯한 아리따운 여성들이 활보한다. 특히 그리스 여행의 백미는 ‘섬’ 여행이다. 200개의 유인도 중에서도 국내에 가장 많이 알려진 곳은 ‘산토리니’다. 그곳뿐 아니라 꼭 가봐야 할 곳은 ‘메테오라 수도원’이다.
그 아름답고 멋진 풍경은 시댁 어른들과 함께 떠난다 해도 모든 스트레스를 다 감싸 안아줄 것이다.
글·사진 이신화(on the camino의 저자, www.sinhwada.com)
화산섬 보트 투어는 유용한 패키지
TV 프로그램 에 소개되면서 광고 시너지 효과를 톡톡히 본 곳이 그리스다. 그리스의 수많은 여행지 중에서도 한국인에게 가장 인기 있는 곳은 산토리니(Santorini) 섬이다. 특히 한국 사람들의 신혼여행지로 큰 인기를 누리지만 이 섬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어느 누구하고 동행하더라도 상관없다. 단언컨대 ‘묵은 시름’이 많은 사람들이 동행해도 그 아름다운 풍치에 반해 스트레스를 다 녹여줄 것이다.
산토리니는 에게해 남쪽 그리스령 키클라데스 제도(Kykladhes Is.) 남쪽 끝에 있다. 아테네에서 235㎞ 떨어져 있으며 중심 마을인 피라(Fira)를 포함해 13개의 마을이 있다. 보통 사람들이 산토리니라고 부르지만 정식 명칭은 티라(Thira) 섬. 티라는 크레타 문명과 미케네 문명의 중간에 위치해서 두 문명과 교류하며 발전했던 키클라데스 문명의 중심지였다. 기원전 1500년경, 이곳에서 대규모 화산폭발이 일어났고 이후 한동안 사람이 살지 않았다. 1956년에도 화산폭발로 피라와 이아(Oia) 마을이 파괴된 적이 있다. 한때는 원형 섬이었는데 초승달 모양으로 변했고 잘려나간 절벽 위에 하얀 집들이 들어섰다.
산토리니의 중심 도시는 피라다. 하지만 여행이란 ‘첫인상’이 참으로 중요하다. 피라 마을이 산토리니의 중심지라 해도 섬 끝의 이아 마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움이 뒤떨어진다. 이럴 때는 먼저 ‘화산섬 보트 투어(Volcano Tour)’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대부분 마을 여행사에서 티켓을 판매하는데 1일 코스를 이용하면 된다. 아티니오스 신항구나 피론(Firon) 구항구에서 배에 오르게 된다. 배는 가장 먼저 산토리니 서쪽에 있는 네아 카메니(Nea Kameni)와 팔레아 카메니를 간다. 나무 하나 없는 허허벌판의 척박한 화산섬의 돌멩이에는 아직도 지열이 남아 있다. 그다음 코스는 바닷속에서 용출되는 온천수에서 수영을 즐기는 것이다. 40도가 넘는 고온이다. 이어서 유인도인 티라시아(Thirasia) 섬에 다다른다. 배가 없으면 접근할 수 없는 작은 섬이지만 천혜의 매력을 갖춘 곳이다. 이 마을에서는 맛있는 해산물 요리를 먹거나 마을까지 올라서 멋진 전경 사진을 찍으면 된다. 이때 당나귀(동키)를 타보는 것도 재미가 쏠쏠하다. 화산섬 보트는 이아 마을을 잇는 항구에서 내릴 사람에게 선택권을 준다. 대신 저녁 8시에는 셔틀버스가 운행되고 있어서 숙소로 이동하는 데 전혀 부담이 없다.
온통 캘린더 사진을 만들 수 있는 곳, 이아(Oia) 마을
이아 마을을 산토리니 첫 마을로 보게 된다면 ‘아, 정말 산토리니에 오길 잘했군’ 하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어느 곳에서나 내 몸을 조금만 움직여서 셔터를 누르면 캘린더 사진이 된다. 깎아지른 절벽 위로 다닥다닥 붙어 있는 하얀색 집들. 미로처럼 나있는 좁은 길목에 피어난, 화사한 부겐빌레아 꽃이 눈 시리다. 앙증맞고 귀여운 숍들이 열지어 이어지는 곳. 지붕이 파란 곳은 그리스 정교회의 돔 지붕뿐이다. 하얀 교회의 파란색 돔과 에게해의 푸른 물빛이 어우러진 풍경에 넋을 잃는다. 발길은 내내 하늘을 날아다니는 듯하다.
그나저나 이 섬의 건물들은 왜 하얀색일까? 건물 색채에 대한 사람들의 설명은 제각각이다. 외세에 대한 저항의 의미가 있다는 얘기가 많다. 그리스가 외세에 점령당했을 때 국기 좌상단의 십자가 색을 따 외벽을 하얗게 칠했고, 파랑 바탕색으로 창틀을 장식했다는 것이다. 어쨌든 산토리니를 빛나게 하는 곳은 이아 마을이고 석양시간이 되면 굴라스 성채 쪽으로 몰려드는 인파로 인산인해가 된다.
이아 마을을 먼저 보고 난 후 피라 마을을 찾아보자. 피라 마을은 산토리니의 명동 격으로 테오토코플루(Theotokopoulou) 광장이 중심이다. 골목을 구경하거나 교회나 수도원, 고고학 박물관 등을 보면 된다. 또 절벽 아래 항구까지 566개의 지그재그 계단 길이 놓여 있는데 당나귀나 케이블카를 타고 오르내릴 수 있다. 또 피라에서 10분 거리에 이메로비글리(Imerovigli) 마을이 있다. 산토리니에서 유일하게 언덕 위에 지어진 성채 마을로 스카로스(Skaros) 성까지 걸어보자.
렌터카를 이용한다면 동쪽 해변의 블랙, 레드, 화이트 비치를 따라 해안 드라이브를 즐겨보자. 블랙 비치라고 불리는 ‘카마리(Kamari)’는 해변 길이가 1㎞가 넘는 산토리니 대표 해변으로, 별칭처럼 온통 검은빛의 모래가 깔려 있다. 카마리 비치 인근에는 고대 티라 유적지가 있는데 메사 보우노 봉우리(369m) 꼭대기까지 트레킹하면 된다. 또 페리사(Perissa) 해변 근처에는 워터파크가 있다. 피라의 남단 아크로티리(Akrotiri)에는 선사 유적지가 있다. 에게해에서 발견된 선사시대 유적지 가운데 가장 잘 보존되어 있다. 이곳에는 붉은 퇴적층이 침식되면서 만들어진 레드 비치와 화이트 비치가 있다.
기암 위에 세워진 수도원 6곳 메테오라(Meteora)
그리스 여행 중에서 메테오라를 빼놓는다면 여행의 재미 하나를 잃어버린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메테오라는 그리스어로 ‘공중에 떠 있다’라는 뜻으로 ‘하늘의 기둥(columns of the sky)’이라고 불리는 지역이다. 유네스코는 이곳의 기묘한 자연경관과 경이로운 종교 건축물의 가치를 인정해 1988년 세계복합유산으로 지정했다. 칼람바카(Kalambaka) 마을에 도착하면 우선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마을 뒤로 거대한 암산이 산봉우리처럼 연이어진다. 400m 이상의 바위 봉우리들은 테살리아(Thessalia) 평원에 있는 페네아스(Peneas) 계곡과 칼람바카라는 작은 도시를 에워싸고 있다. 이 봉우리들은 약 6000년 전, 강에서 원추형으로 나타났다가 지진 활동으로 변형되면서 생긴 것으로 조사되었다. 메테오라의 기암들은 사암과 역암이 강물에 의해 침식되어 생겨난 거대한 암산이다. 그것보다 더 강렬한 것은 기암 위에 지어진 수도원이다.
그나저나 어떻게 기암 봉우리에 건물을 지었을까? 이곳은 11세기부터 수도사들이 정착하기 시작했다. 정치가 상당히 불안했던 14세기에 테살리아의 수도원들은 접근하기 어려운 봉우리 위에 건축된 것이다. 성 아타나시우스가 최초로 수도원을 세웠다고 한다. 전성기인 16세기에는 20여 개의 수도원이 있었다. 현재는 수도원 5곳과 수녀원 1곳이 남아 있는데, 2차 세계대전때 파손된 것을 복원한 것이다. 최초로 창건되고 가장 큰 대메테오라 수도원, 바를라암 수도원, 암벽에 붙어 있는 모습인 로사노 수도원, 성 니콜라스 아나파우사스 수도원, 가장 올라가기 힘든 트리니티 수도원(007시리즈 의 로케이션), 성 스테파노 수녀원 등이다. 현재 수도원에는 수사와 수녀들이 거주하고 있으며 관광객들의 방문이 제한된 범위에서 허용된다.
바위의 평균 높이는 300m, 가장 높은 것은 550m나 된다. 좁은 바위 꼭대기에 아찔하게 서 있는가 하면, 절벽 옆에 붙어 있는 형상이기도 하다. 분명코 바위 위에서 수도원을 바라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아 저곳으로 훨훨 날아보고 싶다’고 말이다.
Travel Tip!
항공편 한국에서 그리스 직항편은 없다. 프랑크푸르트, 파리, 로마, 이스탄불, 두바이 등을 경유해 아테네로 들어가면 된다. 많은 이들이 터키 여행과 함께 그리스를 선택한다. 터키항공을 이용해 이스탄불을 거쳐 그리스 아테네로 들어간다. 인천~이스탄불 구간은 주 11회, 이스탄불~아테네 구간은 주 42회 운항한다.
음식정보 그리스의 일반 식당인 타베르나(Taverna)가 있다. 전통 음식으로는 수블라키(Souvlaki), 게미스타(Gemista), 무사카(Moussaka), 기로스(Gyro, 기로, 자이로, 지로스라고도 함) 등을 꼽는다. 수블라키는 흔한 꼬치구이라 말할 수 있다. 게미스타는 피망 등 야채에 고기와 밥을 넣어 만든 것으로 동양인 입맛에 잘 맞는다. 무사카는 야채와 고기를 볶아 화이트소스를 뿌려서 구운 것. 기로스는 피타 빵(Pita bread)에 바삭하게 구워진 고기를 잘라 넣고 소스, 야채를 넣어 케밥처럼 만든 요리다. 또 슈퍼 등지에서 간단하게 사 먹을 수 있는 돌마데스(Dolmades), 혹은 돌마스(Dolmas)가 있다. 일명 ‘포도잎 꼬마 쌈밥’으로 간단하게 요기하기에 좋다.
전통 술 그리스의 국민 술이라 일컬어지는 우조(Ouzo)와 메탁사(Metaxa)가 있다. 2006년부터 오직 그리스에서 생산되는 ‘우조’는 40도 이상의 독한 술로 미틸리니에서는 해마다 축제를 연다. 포도+아네스씨+각종 허브로 만든 이 술은 문어요리를 안주 삼아 함께 마신다.
숙박정보 트립어드바이저(www.tripadvisor.co.kr) 사이트에서 순위를 확인하면 숙박 전문 인터넷 사이트로 연계가 가능하다. 가족 인원수가 많다면 메테오라에서 캠핑장을 이용하는 것도 방법이다.
통화정보 유로 사용
사용 전압 표준 전압 220V, 50㎐를 사용
인터넷 정보 대부분의 식당이나 숙소에서 인터넷이 잘된다.
치안정보 그리스는 비교적 치안이 좋은 편이다. 하지만 관광객이 많이 몰리는 지하철역 등에서는 날치기나 소매치기 등을 유의해야 한다.
기타 여행지 미코노스, 델로스, 낙소스 섬을 비롯해 희랍인 조르바의 배경이 되었던 크레타 섬 여행도 해봄직하다. 그 외 델피, 테살로니키, 올림피아, 칼라마타, 코린토스, 티바스 등 갈 곳은 너무나 많다. 아테네 시내와 수니온 곶 여행도 좋다.
함께 사진을 공부하는 이들과 빼놓지 않고 촬영해온 풍광 중 하나가 밤하늘이다. 밤하늘을 촬영하러 나가기 전에 나누는 얘기가 있다.
“밤하늘이 우리 눈에 어떻게 보이나요?”
“깜깜해요.”
“아무것도 안 보여요.”
“그래서 밤에 사진 촬영을 나간다는 생각은 안 해봤죠. 보이는 게 없는데 뭘 담을 수 있겠어요?”
맨눈으로 보면 밤하늘은 확실히 깜깜하다. 그런데 정말 깜깜하기만 할까? 옛말에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며 보는 것의 정확함을 역설했지만, 사진을 하다 보니 이런 경우 내 눈이 본다는 것이 그리 믿을 게 못 된다. 사진작업을 해보면 밤하늘이 결코 내 눈에 보이는 것처럼 깜깜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사진기에 있는 빛의 양을 조절하는 장치의 도움으로 우리의 맨눈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게 해줄 뿐 아니라, 그 색까지 드러내주어 우리의 선입견을 바꾸고 생각을 넓혀주는 것이 사진으로 세상에 할 또 다른 하나의 얘기이다.
카메라와 우리의 눈은 어떤 색이라도 빛이 넘치면 흰색에 가깝게 색이 바래지고, 반대로 빛이 모자라면 어떤 색이라도 희박해지고 어두워져 검다고 느끼게 된다. 이런 원리를 통해 셔터 스피드와 조리개를 조작함으로써 필름이 감당할 수 있는 적당한 빛을 모으는 일이 노출 작업이다. 우리 눈에 어둡고 깜깜해 보이는 밤하늘도 조리개를 열고 셔터 스피드를 길게 하면서 빛을 모으면 우리 눈이 볼 수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풍광이 필름에 드러난다. 카메라를 통해 보기 전에는 결코 보이지 않던 세상이다. 우리 눈이 세상의 기준이 아닐 뿐 아니라, 볼 수 없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님을 보게 되는 순간이다. 무비보다 스틸이 더 빛에 자유롭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 눈에 깜깜하기만 한 밤하늘이 사진을 통해 드러났다. 사진에 나타난 밤하늘은 온통 신비한 빛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빨주노초파남보 일곱 색과 연결된 빛이 아니라, 조금의 이음새도 없이 섬세한 색의 퍼짐으로 만들어진 여러 색이 모인 또 다른 무지갯빛이다. 칠흑 같은 밤이 대체로 절망과 무서움을 상징한다면, 빛은 희망과 약속의 상징이다.
살다 보면 누구라도 밤하늘처럼 깜깜한 순간을 맞이할 때가 있다. 절망이나 불확실성과 마주하면 우리는 그 순간 좌절하고 주저앉고 싶어진다. 하지만 사방이 전혀 보이지 않아 아디로 가야 할지 모를 때 애써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 주위를 돌아볼 여유를 가질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모른다. 즉 내 눈에 보이는 현실, 눈앞에서 전개되고 있는 확실한 절망에 매몰되지 않을 수 있는 근거를 스틸사진으로도 얘기하고 싶다.
사람의 눈에는 어두워 분명히 캄캄하게 보이는 저 하늘의 빛을 내 머리 속에 모아서 찬찬히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근거를 제공해 준다면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내 눈에 분명 깜깜하게 아무것도 보이지 않은 곳에서 촬영한 사진이 내겐 꽤 있다. 이 작업을 하면서 어둠 뒤에 숨겨진 무지갯빛을 우리 모두 함께 나눌 수 있도록 여러 차례 열어 주었다.
이런 밤하늘의 사진 역시 빛이 내게 준 선물이다. 나는 사진작업을 할 때마다 사진은 빛이 그린 그림이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필름이 캔버스(화폭)이고 셔터와 조리개가 붓인데 보통 우리가 아는 붓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이란 붓인 것이다. 그렇게 시간과 공간을 조절함으로써 필름에는 아주 다양한 그림이 나타난다. 빛의 양을 자신의 의도대로 잘 조절하는 것이 그림을 잘 그리는 첫 번째 방법이다. 그 다음에는 시간과 공간의 조합이다. 그것을 잘 활용하면 사람의 눈과 같은 것을 사진기도 보게 할 수 있지만, 사람이 의식하지 못하는 것까지 그려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사진기는 우리의 눈을 확장해주는 도구가 된다.
사진을 처음 배울 때는 사진기를 조작하고 마지막에 셔터를 누르는 내가 주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진은 내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리고 사진기는 온전히 사람의 의도를 담아내는 장치라고 여겼다. 하지만 경험이 쌓이면서 그 생각이 착각이었음을 깨달았다. 내가 의도한 것 너머의 것이 사진에 담길 때가 있었다. 그때에도 사진은 빛에 숨겨진 다른 능력을 발휘해 우리 눈으로 보지 못하던 세상을 보게 해준다. 까맣게만 보이는 밤하늘에 숨겨져 있던 색이 드러나는 것처럼, 거기에는 내가 의도하거나 조작할 수 없는 영역이 분명히 있다. 비록 그 과정을 사람이 조작하더라도 그 결과물이 펼쳐내는 세상은 사람의 예상을 뛰어넘는 전혀 새로운 세계임을 경험하게 되었다. 사진가로서의 나의 시각은 그러한 맨눈으로 보아왔던 세계를 보기 전과 후로 구별된다. 내 안의 선입견이 쨍하고 깨지는 순간이다.
사진도 역시 내 생각을 깨뜨려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갈 수 있도록 나를 바꾸어 주는 과정이다.
전시장에 정작 사진보다 말만 가득한 상황이 벌어졌다. 사진들은 여느 전시장처럼 벽면에 걸려 있는데 관람객들이 그 사진들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비가 많이 내리는 전시회 넷째 날, 한 무리의 사람들이 어수선하게 안내를 받으며 전시실로 들어왔다. 그들이 시각장애인이라는 사실은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들과 그들을 안내한 도우미들의 두런거림과 기존 관람객들의 주춤거림이 있었다. 돌발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되며 나는 그들과 마주했다.
한 시각장애인이 내 옆에서 전시된 사진 프레임을 한 손으로 더듬자 안내인이 그의 손을 저지했다. 나는 저지당한 장애인의 손을 이끌어 사진프레임과 그 사이의 사진을 만져보게 했다. 다시 옆에 전시된 다른 프레임을 만져 서로 간의 거리를 짐작하도록 도와주었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지켜보던 안내인이 나와 눈이 마주치자 비로소 미소를 지었다.
그들이 무리지어 서 있는 곳은 ‘밤하늘도 파랗다’는 제목의 연작 세 점 앞이었다. 시각장애인을 안내하는 한 도우미가 엉뚱한 곳을 향해 서 있는 장애인을 돌려세워 전시 작품들과 마주보게 해주었다. 긴장감이 감돌았다. 전시장은 밖에서 내리는 빗소리가 느껴질 만큼 조용했고 작품을 강조하는 스포트라이트가 더욱 밝게 느껴졌다. 그 사이 큰숨을 몇 번 내쉬며 나도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이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다, 처음 카메라로 밤하늘을 담기 위해 노출을 맞춰볼 때가 생각났다. 나는 당시, 그들처럼 주위가 가름되지 않는 밤하늘 아래 서 있었다. 깜깜한 밤하늘을 계속 쳐다보고 있으면 마치 점자를 하나씩 손끝으로 헤아려 글로 읽어내듯 별이 하나씩 드러난다. 별들을 그렇게 점자의 점끼리 연결시키듯 한 단어가 만들어지고 이어 나름 한 문장이 만들어졌다. 그렇게 우리는 전시장 가득 별들을 채워나갔다. 그러면서 별과 별 사이 아무것도 없던 빈 공간에 차츰 차오르는 어렴풋한 빛의 아우라를 서로의 심상(心像)에 그릴 수 있었다.
이어지는 몽골과 유대 광야에서 촬영한 ‘빈자리의 아름다움’ 17점은 그들이 올 줄 미리 알고 준비한 작품들 같았다. 작품의 선별이나 순서 모두 그들을 위한 기획이나 다름없었다. 사진이 관람객의 생각을 이끌되 제한하지 않을 수 있다면 좋겠다는 사진가로서의 막연한 바람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 경험은 다시 만나기 힘든 축복이었고 누구라도 부러워할 행운이었다.
뒤늦게 전시장에 들어온 스태프들은 갑자기 벌어진 특별한 상황을 알아차리고 어쩔 수 없는 긴장감으로 조용히 뒤에 서서 지켜보고 있었다. 누구도 이들의 보지 못하는 눈을 무시하지 않았다. 이 전시를 기획한 스태프들도 예기치 않았던 이들의 방문에 감동하였다. 우리들은 이론과 말로만 바라던 ‘관람객들과 작가가 함께 작품의 질을 높이는 현장’을 체험하고 있었다. 마지막 작품을 셀프 도슨트로서 안내하며 ‘보는 자가 보지 못하는 세상을 보고, 보지 못하는 자가 볼 수 있는 세상’을 이야기했다.?
육체적으로 건강한 시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어두운 곳에 있을 때 하늘빛을 향한 창을 찾거나 새로 만들어야 했지만, 이번에 방문한 시각장애인들은 어느 곳이든 서 있는 그 자리가 바로 모든 곳으로 통하는 열린 창이었다. 그들은 보고 생각하는 면에서, 볼 수 있는 자보다 자유로웠다.
한 시간 가까이 작품을 설명하느라 땀이 흘렀다. 작품 설명과 안내가 끝나자 시각장애인들이 돌아가며 내 손을 잡고 감사를 표했다. 팔을 크게 벌려 안아준 이도 있었다. 그때 뒤에서 지켜보던 관람객들의 박수 소리가 들렸다. 어떻게 될지 몰라 긴장감이 가득했던 시각장애인들을 안내한 분들이 보내는 따듯한 눈인사에 답할 수도 있었다.
전시마다 최선을 다하지 않는 작가가 있겠느냐마는, 전시를 마치면 마음 저 밑바닥에서 올라오는 아쉽고 후회되는 마음은 남는다. 사진은 더욱 그럴 수밖에 없다. 사진가가 셔터를 누르면 적어도 두 장의 사진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한 장은 필름 위에, 또 한 장은 심상 위에. 그 두 사진 사이에서 갈등하는 것이 사진가이다. 전시회에서는 그 갈등의 간극이 극적으로 드러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예기치 못한 시각장애인들의 방문을 통해 바로 그 간극을 한껏 줄일 수 있었다. 사진 없는 사진전도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전시장에 걸어놓은 사진을 보여주지 않고 작가의 심상에 찍힌 사진으로만 전시회를 진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와 미국 두 나라의 아름다움을 비교하는 전시를 정부로부터 의뢰받아 한국과 미국을 번갈아가며 촬영할 때입니다. 지금은 모든 환경이 많이 바뀌었지만, 그때는 우리나라가 소위 큰 나라라고 불리는 대국들로부터 여러 방면에서 휘둘리며 IMF를 선고받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특히 미국으로부터의 압력은 대단했습니다. 우리나라 대통령은 미국과 한국의 관계를 연신 어깨동무라고 표현했지만, 그 상태에선 누가 봐도 두 나라가 어깨동무를 하기에는 서로 무리였습니다. 내 눈엔 덩치가 크고 팔도 긴 미국의 손은 그래도 우리의 어깨에 닿았지만, 상대적으로 키가 작고 팔도 짧은 우리의 손은 미국의 어깨에 닿지 않는 안타까운 뒷모습이 그려졌습니다. 그래서 그럴수록 예술을 통해 이 문제를 접근해 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특히 사진은 이 일을 담당하기에 좋은 점이 많은 예술장르라는 접근이 주변 사람들로부터 있었습니다.
먼저 우리나라를 대강 훑으며 스케치하고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나름 충분히 준비하고 로드맵까지 미리 짜고 갔지만, 막상 현장에 들어서니 얼이 멍멍해집니다. 우선 미국이란 나라의 크기와 다양성 그리고 찾아 다녀야 할 장소와 그 거리를 인식하니, 주눅이 든다는 말이 피부로 느껴졌습니다. 도움을 받기 위해 이곳에 살고 있는 동포들과 문화원 직원들을 만났습니다. 식사를 하고 일터와 집에서 그들이 사는 모습을 보았고 또한 많은 얘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고 난 후에 다시 촬영 현장으로 들어갈 용기가 생겼습니다.
내 경험에 의하면 사진 작업은 현장에서 사진기 뷰 파인더를 통해 나를 보는 작업입니다. 그런데 풍광만 렌즈와 눈에 비칠 뿐, 내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게 내가 들어간 현장이 스스로 감당되지 않을 때, 사진가로 사진기의 셔터를 도통 누를 수가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미국으로 오기 전 우리나라의 담양 소쇄원을 촬영할 때도 그랬습니다. 소쇄원의 계곡과 광풍각 모두가 내려다보이는 제월당에 올라섰는데도 소쇄원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월당까지 포함해 소쇄원 담장과 소쇄원으로 들어오는 대나무 숲 모두가 한눈에 들어온다는 뒷동산엘 올라갔다 왔는데도 셔터를 누를 수 없었습니다. 결국 그날은 소쇄원 양재혁 원장이 준비해준 한 보따리의 책을 받아들고 철수했습니다. 그리고 그 책들을 훑어 본 얼마 후, 다시 소쇄원에 내려가 몇 번 소쇄원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습니다.
그 경우와는 또 다른 방법으로 미국동포들에게 힘을 얻고나서, 북미주에서 가장 높다는 위트니 마운틴(4500m)을 향했습니다. 그 산이 한눈에 보이는 자락에서 시작해 봉우리들을 사진기에 담기 위해 좋은 장소를 찾아 다녔습니다. 그렇게 위트니 마운틴의 산세에 한동안이나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위풍당당합니다. 시샘이 날 정도로 여러 모로 아름다운 산입니다. 그 산의 여기저기를 오르다, 무심코 밟고 가는 발밑 길바닥에 들꽃이 피었다는 것을 알기까지는 한참이 지난 뒤였습니다. 무릎을 꿇고 보니 그냥 맨땅인 줄 알았던 흙바닥에 많은 작은 들꽃들이 피어 있었습니다. 그것을 사진기에 담기 위해서는 몸을 더 낮추어야 했습니다. 아예 배를 땅에 대고 엎드려서야 눈높이가 겨우 맞았습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살랑거리는 들풀들이 한층 반짝거리는 것은 햇살도 그렇지만 높은 산이 그 뒤에서 그늘 배경을 만들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산자락의 그늘은 색 온도가 높아 상대적으로 푸른 색조를 띠었습니다. 감동이 커져, 평상심을 찾으려 숨을 크게 쉬며 작은 들풀에 초점을 맞추니, 카메라 뷰 파인더 안에서 웅장한 산자락이 정말 하늘 같아 보입니다. 그리고 들풀의 반짝거림이 잘 드러나게 하기 위해, 전체 노출을 셔터 스피드를 이용해 한 단계 줄였습니다. 피사계 심도는 뷰 파인더에 보이는 그대로 유지하고 명도와 채도를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게 나온 이미지입니다. 위풍당당한 위트니 산도 좋았지만, 작고 이름 모를 들꽃들 또한 연약하고 낮은 것이 갖고 있는 섬세한 아름다움이 돋보입니다. 문득 한 생각이 스쳤습니다. 한국을 떠나 아름다운 나라 미국에 살기 위해 많은 것을 참으며 내일을 위해 열심히 살고 있는 동포들이 뷰 파인더 안의 들풀과 겹쳐 보인 것입니다.
‘내 몸을 낮추니 세상에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렇게 이어져 ‘이 땅의 주인은 이 땅의 아름다움을 본 사람’이라는 전시 주제가 생겼습니다. 전체 전시 제목은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 보낸 편지’로 잡아 보았습니다. 나라와 민족들이 서로 자국의 이익을 위해 크고 작음에 관계없이, 경쟁하고 반목하는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을 때, 서로 다른 나라의 아름다움을 비교하는 사진 작업을 하다 우연처럼 만들어진 생각입니다.
크고 웅장한 아름다움은 섬세하고 연한 것을 만날 때 더 돋보입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대비되어 서로 드러나는 아름다움은 바꿀 수도, 무시할 수도 없는 나름의 가치인 것입니다. 큰 것은 큰 대로, 작은 것은 작은 대로. 사람들이 나라의 영역이나 민족에 자유로워질 수 있는 나름의 방법을 그때 그렇게 사진에 담아 발표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세상의 나라들은 국경을 서로 낮추고 있습니다. 우리도 여권을 어렵지 않게 정부로부터 발급 받고 있으며, 외국 방문과 거주도 훨씬 자유롭습니다. 외국인들도 우리나라 전역에서 많이 만날 수 있습니다.
이젠 누가 어느 땅에 살든 그곳의 아름다움을 본 사람이 그 땅의 주인인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 일이 빌미가 되어 우리 부부는 중앙아시아의 아름다움을 보기 위해 몽골국제대학교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아내는 몽골국제대학교의 예술 감독으로, 나는 사진으로 국경을 넘어 세계로 나가는 하나의 길을 교수와 홍보대사로 이곳의 젊은이들과 의논하며 살고 있습니다.
해가 뜨려면 아직 두세 시간은 더 기다려야 합니다. 주위에 있을 법한 사물도, 스치는 바람도 멈춘, 고요 가운데 내가 서 있습니다. 사진 작업을 하다 보면 이런 이른 새벽에 잠에서 깰 때가 있습니다. 이번 촬영의 주제는 빛이 만난 바람과 물입니다. 이렇게 빛이 약할 때에는 조리개와 필름감도의 한계를 시간이 감당해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 삼각대에 사진기를 고정하여야 시간이 확보됩니다.
먼저 사진기와 볼 헤드, 그리고 삼각대가 한몸이 되도록 모든 연결고리를 되풀이 점검하고 노출계로 셔터와 조리개 값을 계산해봅니다. 필름 스피드를 감안하더라도 210초 이상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결코 내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세상입니다. 아무리 머리로 상상하며 따져 보아도 빛이 양으로 덧입혀 만들어 낼 질감과 색은 그려지지 않습니다.
계산해 나온 시간은 3분 30초입니다. 평상시 사용하던 250 분의 1초에 비해 쉽게 감당하지 못하는 양입니다. 이렇게 큰 볼륨은 기계에 맡겨야 합니다. 일상적인 스틸 사진의 시간에 비해 4만 5000배 크기이기 때문입니다. 말이 쉽지 백, 천이라는 숫자는 사람의 감각을 넘어선다는 것을 사진을 하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만 배라는 양은 인간의 영역이 아니란 생각이 듭니다. 예를 들면 근육운동을 위해 날마다 턱걸이를 10번 하던 사람에게 1000번은 감당할 수 없는 양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겨우 100배일 뿐입니다. 하물며 천 배? 만 배?
그렇게 빛의 양을 계산하는 사이 사진기가 4만 5000 번 필름에 덧칠한 빛이 드러납니다. 신선한 코발트색입니다. 하늘을 배경으로 한 나무의 실루엣이 그럴 수 없이 섬세합니다. 멀리 그리고 더 멀리서 받쳐주는 산의 능선 덕이기도 했지만, 바람마저 도와주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맨눈으로는 볼 수 없는 빛이며 색입니다. 우리는 나온 결과를 색으로 인식할 뿐입니다. 그렇다 해도 사람의 감각은 놀랍습니다. 단순한 겉껍질의 색에 복잡한 인간의 오랜 기억이 덧입혀지는 순간입니다. 하루가 채 끝나기 전에 날은 또 다른 하루를 품어내듯, 내 생각은 이미 하루를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온갖 바람을 잉태하고 있는 몽골평원 새벽이 사진기에 담겼습니다. 어떤 바람도 풀어내기 전, 고요가 필름을 통해 드러납니다. 그렇게 푸른 바람의 연작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첫 작품입니다.
연작의 매체는 나무입니다. 바람을 끊어뜨리지 않고 드러내는 선(線)은 땅에게는 나무이며, 나무에게서는 가지가 담당하였습니다. 그렇게 땅과 하늘을 연결시키는 신경 줄 시냅스(synapse)가 나무를 통해 드러났습니다. 언뜻 봐선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공간이 사람의 감각을 넘어서는 4만 5000배의 시간을 덧바르니 우리가 볼 수 있는 형태로 실체를 드러냅니다. 맨눈으로 감지할 수 없는 섬세한 빛을 기계를 통해 이렇게 나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진기를 사용해야 하는 시각예술의 한계가 오히려 인간의 눈을 확장시킬 수 있는 또 다른 길이 보입니다. 내가 못 본다고 없다고 단정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행복을 찾아 나선 한국 실버의 몽골 정착기
오래전부터 사람들에게 여행은 인기 있는 오락이며, 취미, 유익한 공부로 인정받아 왔습니다. 이런 긍정적인 여행을 사진가로 평생 해온 우리 부부는 이름난 관광명소를 둘러보고 사진을 찍으며 돌아갈 집을 위해 필요한 물건을 쇼핑하는 여행이 아니라, 살면서 점검해 온 높은 가치에 나를 던지는 임상적이며 실험적인 삶을 위해 낯선 몽골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아내(손 청 몽골국제대학교 예술감독)에게는 무리인 줄 알면서도 고국의 살림살이를 정리하였습니다. 재미를 위한 여행에서 더 짙은 삶을 위해 나이 먹은 부부가 소꿉장난처럼 삶을 던지는, 적어도 우리에겐 진한 여행기입니다. 그러기 위해 여기도 저기도 아닌, 어디에도 고향이 없는 이방인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내가 있는 곳이 내 집이며, 내가 만나는 사람들이 사랑하는 형제이길 바라게 되었습니다. 사진을 시작하면서 우리는 내일 어떤 일을 만날지, 어떤 작품을 만들지 스스로도 모르는 삶을 살고자 했습니다. 예기치 못한 바람처럼 만나는 몽골 생활의 기쁨과 설렘을 브라보 마이 라이프 독자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함철훈(咸喆勳) 사진가
1995년 민사협 초청 ‘손1’ 전시를 시작으로, 2009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 2012년 이탈리아 밀란시와 총영사관 주최로 전을 FORMA에서 개최. 2006년 인터액션대회(NGO의 유엔총회)서 사진으로 대상 수상. 저서 , 등.
“평생 공무원으로 살았지요. 그래서인지 어느 순간부터 사진도 정형화된 틀에 갇혀 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이젠 공무원이 찍은 사진 같다는 말은 듣지 않으려고요. 제가 셔터를 누르던 찰나의 느낌을 사진을 보는 이들에게도 그대로 전달할 수 있는 사진을 찍고싶어요.”
그렇다. 그는 한평생 공무원이었다. 1972년 3월 건설부(현 국토교통부) 초급 공무원부터 시작해 2007년 4월 행정도시건설청기반시설본부장(국장급)으로 퇴직하기까지 35년간 국토정책 전문가로 나라의 녹을 받고 국가에 봉사했다. 퇴직 이후 2012년 4월까지 몸담은 건설공제조합(전무이사)까지 감안하면 40년 이상 사실상 공직생활을 한 셈이다. 그런 그가 퇴직 후 사진 찍기 삼매경에 빠져 있다. 그의 사진 얘기가 궁금했다.
현역시절엔 신문 스크랩으로 아쉬움 달래
공무원은 눈코뜰새 없이 바쁘다. 특히 국토부 공무원은 주택이라는 국민과 가장 근접한 이슈를 다루면서 일을 한다. 기본적은 정책 업무뿐만 아니라 언론 기사 대응까지 24시간이 모자란다. 그의 말에 따르면 주말을 편안하게 보내 본 기억이 없다. 공직에 발을 들여 놓고선 긴장의 끈을 놓고 살아본 적이 없다는 얘기다.
그런 그의 유일한 취미가 사진찍기였다.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멋진 풍경을 찍어야 하는데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 그래서 일단 모으기 시작한 것이 일간지 신문에서 주말판으로 제공하는 투어나 여행 관련 섹션이었다. 언젠가는 직접 다니며 그림 같은 풍경을 찍겠노라고 모은 여행 섹션지가 큰 사과박스로 2개가 넘는다. 어느 순간엔 퇴직하고 나면 반드시 가겠노라며 차곡차곡 모아 놓은 것이다. 공직 퇴직 후 7년이 넘은 지금. 그의 도전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백수가 과로사한다는 말 들어보셨지요? 진짜 (현역때보다) 더 바쁘더라구요. 동창회를 비롯해 업무상 지인들, 가족 모임까지 몸이 몇 개라도 모자랄 판이었어요. 아직 스크랩한 지역들을 다니지 못한 것이지요. 게다가 투어 섹션은 여전히 매주 발행되고, 또 새로운 여행지가 쏟아져 나와 이젠 감당이 힘들 정도예요.”
“예술사진반서 공부… 달력사진 안 찍어요.”
그래서 그가 선택한 곳이 계원예술대학교 예술사진반이었다. 전문가에게 사진을 체계적으로 배울 수도 있을 뿐만 아니라, 한 달에 두 번 전국에서 사진 찍기 좋기로 유명한 곳들을 좋은 분들과 함께 다닐 수 있었기 때문.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사진을 전문적으로 배우기 시작하다보니 지금까지 찍었던 사진들은 한낮 풍경만 담은 달력사진 정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특히 같은 사진반 회원들이 찍은 작품을 살펴보다 풍경만 있고 감성은 없는 무미건조한 자신의 사진을 발견한 것이다. 그는 이를 스트레스라고까지 말했다.
“공무원이 찍은 사진 같다는 얘기가 그렇게 듣기 싫더라고요. 틀에 박힌 사진이란 얘기지요. 여백을 담아내기도 하고 감성을 이끌어 내는 다른 분들의 사진과 비교할 때마다 스트레스를 받게되더라고요. ‘난 왜 그런 생각을 못했을까’라는 고민이 시작된 것이지요. 그래서 요즘은 무조건 멋진 풍경을 담기보다 풍경을 차분히 보고 제가 보고 느낀 감정을 같이 표현할 수 있는 사진을 찍기 시작하고 있어요. 점점 고민하고 진지하게 사진을 대하고 있는 셈이지요.”
몽골·미얀마 사진전 열어
그의 사진에 대한 열정이 최근 결실을 맺기도 했다. 계원예술대학교 전문사진반이라야 갈 수 있는 몽골과 미얀마 투어에 참가하게 된 것. 이를 계기로 올해 2월과 8월 각각 몽골 사진전과 미얀마 사진전에 준 프로급 전문가들과 작품을 함께 전시하는 영광을 얻게 됐다. 실력으로 보면 몽골과 미얀마 동행은 물론 사진전도 동참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그의 열정과 함께 주변의 도움을 받아 작품을 선보일 수 있었다.
그는 몽골과 미얀마가 각기 다른 매력을 품고 있다고 했다. 먼저몽골의 키워드는 ‘광활함’이었다. 그리고 메마르고, 거칠었다. 한반도 넓이의 7배에 달하는 드넓은 땅이었지만 춥고 척박했다. 그런 땅에서도 가족단위로 소·말·양·염소 등의 가축을 키우며 살아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고. 한때 대제국을 건설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초라한 변방국가가 돼버린 그들에게서 ‘우리가 사는 것은 무엇인가. 어떤 것을 놓치고 사는 것은 아닌가’라는 잔상이 남기도 했다고.
반면 미얀마의 매력은 ‘사람’이었다. 한없이 맑고 순박한 표정과 평화로운 사람들이 그를 매료시켰다. 외부인에 대한 경계심이라는 것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독실한 불교국가라는 점에서 그연유를 찾고 있었다. 특히 사원이 많다보니 거의 맨발로 돌아다니며 유적지에서 사람들을 만나 사진을 찍었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사진전 작품들은 지인을 비롯해 자식들에게 선물했어요. 그 전에 몸담았던 건설공제조합에도 기부했고요. 이제 사진은 제가 사람들과 소통하는 매개체 역할도 하고 있지요.”
문화해설가로 재능기부 하고파
사실 그의 인생에서 사진을 빼고 얘기하기도 어렵다. 이는 국토부 공무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본부 과장 시절 국토부 내 처음으로 사진 동호회를 운영하게 된 것이다. 청사의 사계 등 사진전도 열고 사진을 팔아 어려운 이웃을 돕기도 했다.
이후 행복도시 건설청으로 자리를 옮긴 후에도 사진반을 만들어 직원들이 함께 여가를 즐길 수 있도록 배려하기도 했다. 건설공제조합 시절에는 찍었던 사진들을 조합에 건네 조합달력을 만들기도 했다. 은퇴 이후에도 국토부 퇴직 공무원 모임인 건설진흥회에서 사진반 총무를 맡는 등 사진 전도사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앞으로는 사진으로 재능기부를 하고 싶어요. 관광 가이드가 찍어 주는 사진이 맘에 들지 않을 때 많으셨지요? 제가 문화해설가 역할도 하면서 사진도 찍어드리는 가이드를 하게 되면 ‘더 의미 있는 취미 생활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지금은 평생 찍은 사진을 분류하는 작업도 하고 있어요. 정말 움직이기도 힘들 때가 되면 아내와 둘이서 지난 세월을 음미하면서 사진을 즐기고 싶어서요.”(웃음)
#효원힐링센터- 임종체험으로 삶에 대한 새로운 성찰을 하다
효원상조는 장례서비스 분야에서 잘 드러난다. 효원상조의 모든 장례지도사는 회사의 체계적인 교육프로그램을 이수해야 한다. 생의 마지막 절차로 중요한 장례를 잘 치르는 데 장례지도사의 역량이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장례서비스를 제공하는 데 필요한 전통문화에 대한 교육과 전문지식 교육도 철저히 한다.
인성교육도 중요하게 생각한다. 김상봉 회장은 “장례지도사들이 고객에게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일반 회사와는 다른 한 차원 높은 사명감이 요구된다”며 “고객의 아픔을 내 부모 내 가족의 아픔으로 생각하고 함께해야 고객 감동 서비스를 실현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효원상조는 장례서비스 외에도 웨딩서비스, 칠팔순 잔치서비스, 크루즈 여행서비스, 해외어학 연수서비스 등을 제공한다. 사회적 ‘봉사’를 실천할 수 있는 사회공헌 활동에도 적극적이다.
효원상조는 2012년 무료임종체험장인 ‘힐링센터’를 만들었다.
서울 영등포구 당산동의 효원힐링센터 5층에는 ‘힐다잉 프로그램’에 참여하기 위한 사람들이 모여있다. 영정 사진 촬영 죽음을 준비하는 첫 단계로 셔터 소리와 함께 플래시가 터지면서 사람들의 멋쩍은 표정이 카메라에 담겼다. 영정 사진을 앞에 놓은 이들이 유언장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분위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눈물을 훔치거나 흐느끼는 소리도 들렸다.
‘쾅~’. 세상과 단절을 의미하는 소리가 들렸다. 관 뚜껑이 닫히면서 정적과 칠흑 같은 어둠이 찾아왔다. 외부의 흐느낌도 들리지 않는 시간이 15분간 이어졌다. 관 속에 머문 짧지 않은 동안, 세상과 단절되는 체험을 하게 된다.
효원힐링센터의 정용문 센터장은 “임종체험이 삶에 대한 새로운 성찰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힐링의 효과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문을 연 이후 현재까지 6000명 이상이 참여했다”면서 “학교나 회사 등에서 단체로 오기도 하고, 가족 단위로 오는 사람들도 늘고 있지만 삶과 죽음을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보다 지속적인 연구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 프리드라이프, 장례부터 웨딩-여행사업까지 다양한 서비스
㈜프리드라이프(옛 현대종합상조㈜)가 상조업계 부동의 1위를 고수하며 사업영역을 크게 넓히고 있다.
지난 2002년 설립 이래 장례문화에 뿌리 깊이 정착돼 있던 낙후된 관리체계를 개선하고자 전국 각 지역에 200여개의 본부를 설립해 24시간 고객감동센터를 운영하면서 호평을 받고 있다.
또 GPS 위치 확인 시스템 및 ERP 시스템 도입, 프리드장례문화연구원 개설, 업계 최초 공중파 방송 CF 방영 및 메이저 홈쇼핑 방송 등 혁신적인 경영을 통해 고객의 신뢰를 구축함은 물론 연 행사 1만5천여건 진행, 가입고객 수 110만 명을 보유한 국내 상조업계 1위 회사로 성장했다.
특히 2014년 2년 연속 대한민국 대표브랜드 대상을 수상한 ‘프리드’는 죽음에 대비해 생전에 미리 장례에 필요한 물품이나 경비를 준비함으로써 남아있는 가족들이 짊어질 경제적 부담과 정신적 스트레스를 덜어주는 모든 제반행위나 제도를 일컫는 ‘프리니드(Pre-need)’에서 착안된 국내 최초 상조 서비스 브랜드다.
유럽이나 미국에서 이미 활성화 돼 있는 ‘프리니드(Pre-need)’가 국내에 정식으로 소개된 것은 2008년 프리드라이프에서 론칭한 상조 브랜드 ‘프리드’를 통해서다.
프리드라이프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미리미리 준비한다’는 프리니드의 개념을 웨딩, 여행, 결혼정보 등 인생 전반으로 확대해 나가고 있다.
국내 대표 야생화 200여 종의 모습을 담아낸 사진집이 나왔다.
지난 31일 발행된 ‘야생화 화첩기행(김인철 지음, 푸른행복출판사)’가 ‘야생화의 극치미를 사진으로 형상화한 작품집’이라는 호평을 받으며 눈길을 끌고 있다. 야생화의 혁명, 생태 정보와 특징뿐만 아니라 그 유래와 이야기까지 소개해 볼거리와 읽을거리가 풍성하다.
한라에서 백두까지 국내 대표 야생화 149종을 비롯해 멸종위기종, 희귀식물, 특산식물 51종을 함께 소개한다. 월별로 구분해 야생화의 자생지와 사진마다 셔터 속도·노출값 등 촬영 정보까지 상세하게 담아 야생화 촬영 시 누구나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
특히 이 책에서는 손대지 않은 자연 상태의 우리 야생화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보여줌으로써 왜 우리의 자생식물을 보호하고, 자생지를 보전해야 하는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아울러 학생은 물론 교사와 학부모 등 남녀노소 모두가 산과 들의 자연생태를 이해하고, 우리 자생식물을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는 ‘우리 꽃 교과서’라 하겠다.
2월부터 10월까지 무거운 사진 장비를 짊어지고 다니며 찍은 수십만 장의 사진 가운데 한 폭의 그림 같은 장면들만을 추려냈다. 굽이쳐 흐르는 동강을 굽어보는 절벽위의 동강할미꽃, 설악산 여심폭포 절벽에서 만난 금강초롱꽃, 백두대간 연봉을 굽어보는 솔나리 등 야생화와 자연이 아름답게 어우러진 사진들을 만나볼 수 있다.
저자는 "야생화를 만나는 일이 상처 입고 병든 마음과 영혼을 달래는, 이른바 힐링"이라며 "너도 나도 힐링을 말하는 시대, 우리의 산과 들에 자연스럽게 피어나는 야생화들을 통해 마음의 상처를 위로하고 치유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신문기자로 29년간 활동했던 그는 2008년부터 ‘김인철의 야생화 산책’(http://ickim.blog.seoul.co.kr)을 운영하며, 올해 6월부터는 격주간지 ‘브라보 마이 라이프’에 ‘김인철의 야생화 포토기행’을 연재 중이다.
벌어지는 입을 닫을 수 없다. 피곤한 하루를 마친 태양. 잠에 들려는 듯 바다 속으로 사라지며 물결을 빨갛게 물들인다. 그 순간 잡념은 사라지고 도시에 아름다움에 흠뻑 취한다. 어떤 이들은 그 순간을 간직하기 위해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고, 어떤 이들은 아무 방해도 받기 싫다는 듯 멍하니 그 장관을 음미한다.
지중해에서 가장 큰 섬. 이탈리아의 최남단에 위치한 시칠리아. 영화 대부, 시네마 천국, 그랑블루 등 수많은 영화의 배경이 될 만큼 그 자연 풍광과 도시의 모습이 아름답다. 독일 문학의 상징 괴테도 말했다. “시칠리아를 보지 않고서는 이탈리아를 봤다고 말할 수 없다.”
◇ 괴테가 사랑한 도시 ‘팔레르모’
시칠리아 안에서도 괴테가 세계 최고도시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은 곳이 있다. 북부에 위치한 팔레르모다. 영화 ‘대부’의 배경으로 유명한 이 곳에는 ‘4개의 모서리’를 뜻하는 콰트로 콴티(Quattro Canti)와 팔레르모 두오모 성당이 있다. 콰트로 콴티는 예술작품으로 꾸민 3층 건물 4채를 말한다. 1층은 사계절 여신들의 조각상이 있는 분수, 2층은 시칠리아를 지배한 왕들, 3층에는 성녀의 모습이 담긴 조각상이 있어 콰트로 콴티만의 세련미를 느낄 수 있다. 1184년 팔레르모 대주교에 의해 세워진 팔레르모 두오모 성당에서는 다양한 건축 양식을 엿볼 수 있다. 이 성당은 팔레르모를 지배한 여려 세력의 다양한 건축 양식이 섞여있다. 외부는 고딕 양식, 남쪽 현관은 카탈로니아 양식, 돔은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혼합돼 있어 신비로움을 더한다. 내부에 있는 왕들의 무덤과 보물을 구경하는 것도 팔레르모 두오모 성당을 즐기는 색다른 요소다.
◇ 시네마천국의 배경 ‘체팔루’
영화 ‘시네마 천국’에서 주인공 토토가 데이트를 하던 낭만적인 해변 마을을 기억하는가. 유럽 왕족과 유명 인사들이 가장 선호한다는 체팔루다. 이러한 명성에 걸맞게 건물과 해변, 바다가 어우러진 풍경은 그 속에 있는 사람을 영화 속 주인공처럼 만들어준다. 팔레르모 두오모 성당 보다는 작지만 그보다 화려한 모자이크가 있는 체팔루 두오모 성당과 페스카라 문도 으뜸이지만, 무엇보다 해안도로를 따라 이어지는 절경을 빼놓고 체팔루를 얘기 할 수 없다. 해안가 따라 이어진 다소 이탈리아 정서의 소박하고 낡은 건물과 고즈넉한 해변이 드넓은 바다와 조화를 이뤄 보는 이들의 혼을 빼놓는다. 한 폭의 그림. 환상적인 도시. 그 이상의 수식어를 더 넣을 수 있다면 그것은 체팔루다.
◇ 시칠리아 최고의 휴양지 ‘타오르미나’
시칠리아가 자랑하는 세계적인 휴양지 타오르미나. 영화 ‘그랑블루’ 배경지이기도 하다. 타오르미나 절벽 위에 세워진 그리스극장은 이 도시의 대표적인 볼거리다. 기원전 3세기 때 지어진 이 야외극장은 눈앞에 바다가 펼쳐진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한다. 특히 여름에는 발레나 음악회 등이 열려 로맨틱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아기자기한 상점이 들어서 있는 움베르토 1세 거리는 저녁이 되면 많은 관광객들로 북적거린다. 예쁜 도자기와 기념품, 장식품을 전시하는 상점이 많아 유쾌함 넘치는 곳이다.
◇ 아르키메데스의 고향 ‘시라쿠사’
거리 자체가 중후한 멋을 뽐내 영화 속에 자주 등장하는 두오모 광장, 아레투사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강의 신’ 알페오스가 샘에 뛰어들어 스스로 강이 되었다고 전해지는 아레투사의 샘, 1만6천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그리스 극장부터 검투경기를 즐기기 위해 만들어진 로마원형 경기장까지. 이 모든 것을 둘러볼 수 있는 곳이 있다. 고대 그리고 최고의 수학자 아르키메데스의 고향 시라쿠사다. 거리의 야경이 유난히 빛나는 시라쿠사는 낭만과 역사가 공존한다.
◇ 유럽 최대의 활화산이 있는 ‘에트나’
유럽에서 가장 높은 활화산 에트나산(3350m). 기원전 2700년부터 화산활동을 한 세계에서 가장 긴 역사를 가진 화산답게 최근까지 그 위력을 보여주고 있다. ‘불의 신’ 불카누스의 대장간이라는 별칭이 붙을 정도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에트나 화산은 2013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에 등재 됐다.
투어2000에서는 시칠리아를 포함한 이탈리아 8박 9일 일정의 패키지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올 여름 지중해의 보배, 시칠리아의 낭만에 취해보는 것은 어떨지.
사진 : 투어2000 / 문의 : 투어2000(02-2021-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