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더라도 거짓이 없어라. 꿈에라도 거짓말을 했거든 깨어나서 반성하라’고 말한 도산 안창호는 그 모든 위업을 아우를 수 있기에 진실이 화두인 요즈음, 대한민국 역사 속에서 태산처럼 서 있는 거목이다. 대학 시절 처음 도산의 존재를 접한 후 평생 동안 그를 사숙했다. 일과 삶 모두에 도산의 정신을 새기기 위해 산 김재실(金在實) 도산 안창호 선생 기념사업회 회장은 지금 시대야말로 도산의 신념과 철학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광복 72주년을 맞이한 올해 72세인 그가 평생을 바칠 정도였던, 도산에게서 발견한 거대한 화두란 무엇일까?
우리나라 역사에서 도산 안창호는 유독 커다란 무게감으로 다가온다. 그는 1878년에 평안남도에서 태어나 한학을 공부한 후 언더우드 학당에서 수학했다. 그야말로 조선 말기의 혼돈과 신문물의 합리주의를 동시에 겪으면서 자라난 세대였다. 그는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 참여하여 탁월한 연설을 통해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며 일찌감치 국가의 미래를 걱정하는 활동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줬다.
지적이고 신중한 조직가였던 도산 안창호
이후 미국으로 건너간 안창호는 샌프란시스코에서 공립협회를 창립하여 재미동포들이 민족의식을 자각하는 데 일조했으며 일제가 나라를 빼앗으려 하자 바로 귀국하여 신민회를 조직, 대성학교와 태극서관을 설립해 민족운동을 펼쳐나갔다.
안창호의 삶을 들여다보면 그가 무력으로 세상을 바꾸려 했다기보다는 지적인 조직가로서 신중한 행보를 거듭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신중함은 머뭇거림이 아니다. 그가 그 누구보다도 확고한 민족의식과 미래에 대한 굳은 의지를 바탕으로 이뤄진 커다란 그림을 그리고 있었음은 일제강점기 동안 세계 이곳저곳을 오가며 벌인 그의 행적을 보면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정신은 도산 안창호 선생 기념사업회를 통해 오늘날에도 표표히 흐르고 있다.
“참배나무에는 참배가 돌배나무에는 돌배가 열린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일제강점기가 시작되자 미국으로 망명하여 1913년에 흥사단을 창립했어요. 흥사단은 민족운동에 매진할 인재를 모으고 양성하기 위해 조직됐죠. 흥사단 일을 하느라 대학교를 휴학했던 게 기억나네요. 그때는 도산 선생의 이념을 어떻게 실천하느냐, 흥사단을 어떻게 전파하느냐만 생각하며 살았죠.”
김재실 도산 안창호 선생 기념사업회 회장은 자신의 젊은 시절을 오롯이 도산에게 바친 것으로도 모자라 그 후 기업 경영을 하면서도 50여 년에 가까운 세월을 도산의 정신을 실천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살아왔다고 말한다. 그는 충남 천안이 고향이며 병천중학교를 거쳐 서울대에서 수학을 전공했다. 그리고 마침내 도산 안창호와 만나게 된다.
“1963년 대학 1학년 때였습니다. 도산 서거 25주년 추모식장에 걸린 ‘참배나무에는 참배가 돌배나무에는 돌배가 열린다’는 글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았죠. 이를 계기로 흥사단 대학생 아카데미 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흥사단은 유력한 사회인사들이 청년 시절 거치는 대표적인 모임이기도 했다. 전남도지사를 지낸 박준영, 순천향대학교 부총장을 지낸 이윤배, 교육부장관을 지낸 황우여가 그 면면이다.
흥사단에 바친 청춘
흥사단 활동은 김 회장의 젊은 시절 꿈이 신문기자가 되게 하는 데도 영향을 줬다.
“흥사단에서 라는 잡지가 나와요. 왜 인가 하면 도산 선생의 말씀 중에 ‘기러기는 항상 줄을 맞춰 다닌다’는 말에서 따온 거예요. 그래서 흥사단의 상징이 기러기이기도 하죠. 이걸 제가 3년 동안 편집하고 책을 냈어요. 그래서 언론계와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꿈을 포기해야 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동생 여섯을 책임지는 가장이 됐기 때문이다. 가장이 되자 그는 생활인으로서 충실한 선택을 했다. 한국산업은행에 입사한 그는 핵심 요직을 두루 거쳤고 2000년부터는 산은캐피탈 사장으로 활동했다.
“산은캐피탈 CEO가 된 뒤 180여 명의 직원들을 책임져야 했죠. 그 고민이 매우 컸습니다. 굉장히 열심히 일했어요. 그 와중에도 도산 선생의 정신을 경영에 도입하고자 노력했죠.”
도산의 삶에서 배운 교육자의 삶
산은을 나온 김 회장은 중앙일보 시사미디어 상임고문과 대통령 자문 동북아경제추진위원회 자문위원을 지내며 잠시 동안 공직에서의 모험을 하고, 다시 기업계로 돌아왔다. 대아건설 감사와 경남기업 관리총괄 사장, 성신양회 대표이사 사장, 태강코퍼레이션 고문을 거쳐 현재는 동양시멘트(삼표시멘트) 상임감사로 있다. 다양한 조직의 요직을 거치면서도, 그는 도산이라는 자신의 롤모델을 놓치지 않았다. 숭실대와 성균관대, 성신여대에서 ‘경제통계학’, ‘경제수학’, ‘경영정책’ 등을 강의하고 대학 재학 중 도시 빈민 미취학 아동을 위해 청영고등공민학교(야학)를 설립·운영했으며, 흥사단 이외 ‘나라발전연구회’ 총무를 맡는 등 교육이라는 도산의 삶의 중요한 부분을 자신의 삶에 심는 데도 주저하지 않았다.
“흥사단은 나이 제한이 없어요. 흥사단 후배들을 제가 많이 만났죠. 대학생활 아카데미 회장, 고등학생 아카데미 지도교사도 했으니. 그때 가르친 고등학생들이 지금 칠십이 다 됐어요(웃음).”
도산 사상의 중심은 ‘진실’
그렇다면 도산 사상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도산 사상의 중심은 진실입니다. 그는 나라가 망한 것도 이완용 때문이 아니라 거짓 때문이라고 하실 정도였죠. ‘죽더라도 거짓이 없어야 한다’, ‘농담으로라도 거짓말을 말아라. 꿈에라도 성실을 잃었거든 통회하라’고 했습니다.”
김 회장은 우리나라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지도층이 진실하지 못한 것을 지적했다.
“다른 문제는 아무것도 없어요. 지도층이 거짓말을 하는 게 가장 큰 문제예요.”
도산은 진실을 위해서라면 자신에게 다가온 커다란 유혹도 매몰차게 거절하는 이였다.
“1907년에 이토 히로부미가 도산을 중심으로 청년내각을 만들려고 했어요. 그때 도산이 그 제안을 거절했죠. 그리고 상해 임시정부는 도산을 중심으로 만들어졌다고 봐야 해요. 상해 임시정부는 1919년 4월에 설립됐는데 도산이 5월 25일에 미국에서 상해로 와서 임시정부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서리로 취임해 독립운동에 매진했죠. 또 미국과 상해를 오가며 대독립당 결성 운동을 전개하고 임시정부 경제후원회를 조직했어요. 당시 미국에 있는 교포들이 돈을 모아서 상해에 지원금을 보낸 것도 도산의 공이라 할 수 있죠.”
‘도산의 희망편지’로 청년들에게 희망을
김 회장은 도산을 가리켜 ‘사람을 만드는 사람’이었다고 설명했다.
“도산 선생이 다른 독립운동가와 다른 것은 그가 인격 훈련을 중시한 사람이었다는 겁니다. 도산 선생은 항상 교육을 강조했고 ‘사람을 키워야 한다’고 말하곤 했어요. 그래서 다른 어떤 독립운동가들보다도 더 우리가 생활 속에서 닮을 수 있는 사람으로 남게 됐죠.”
그는 도산의 사상이 현재진행형이라고 말한다. 그는 그 근거를 도산의 말들에서 찾는다.
“도산 선생은 힘을 길러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 힘이란 신용의 힘, 그리고 지식의 자본, 마지막으로 금전 자본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진실을 통한 관계를 중요시했고, 한 사람이 한 가지 이상의 기술을 갖게끔 공부를 하라고 했으며 돈을 벌어서 저축하여 돈의 힘을 가지라고 말씀하셨죠. 이건 현재에도 그대로 통용될 수 있는 얘기입니다.”
김 회장은 도산이 말한 ‘힘’을 믿고 ‘도산의 희망편지’ 보내기 운동을 진행하고 있다.
“SNS를 활용하자는 아이디어에서 시작한 일이죠. 2016년 3월 10일 선생 서거 78주년이 되는 날부터 시작한 일입니다. 요즘 희망을 잃어가는 청년들에게 도산의 말씀 중 한 구절씩을 선정해 매주 목요일에 이메일로 보내고 있습니다. 지금 대략 2만여 명에게 보내고 있고, 받고 싶은 사람들은 언제라도 연락하면 보내드립니다. 그리고 기회가 되는 대로 그 글귀들을 모아서 책자로 발간할 계획입니다.”
여생은 도산 안창호 기념사업에
도산 안창호 선생 기념사업회가 하는 일은 다양하다. 1973년, 사업회는 도산의 묘소를 서울 망우리 산꼭대기에서 도산공원으로 이장했다. 1998년에는 도산기념관 건립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리고 해마다 3월 10일이 되면 도산의 추모식을 거행한다.
“1937년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 사건 때 도산 선생은 일제에 붙잡혀 취조를 받게 됐어요. 그 사건에 도산의 제자 60여 명이 잡혔기 때문이죠. 고문을 당하면서도 도산은 초인간적인 면모를 보였습니다. 그러나 12월에 병보석을 나와서 다음 해
3월 10일에 사망하시고 말았죠.”
또한 도산학회를 조직해 도산 사상에 대한 논문집도 내고 있고, 연설문이나 서신 등도 책자로 발간했다. 청소년들 대상으로는 도산 정신을 2세들에게 널리 알리자는 취지로 체험학습 프로그램을 전개하고 있는데 매년 2000명이 넘게 참여한다고 한다. 글짓기 공모도 매년 실시하여 도산의 탄신일인 11월 3일에 시상식을 하고 있으며 미국에서 국제학술대회도 열고 있다. 그야말로 도산 안창호와 관련한 모든 것을 하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멈추지 않고 살아야 멋지게 나이 든다
사업회가 하고 있는 다양한 사업들은 ‘멋지게 나이 들어가는 방법’에 대한 김 회장의 정의와 묘하게 부합되는 면이 있다. 어쩌면 그 많은 사업들을 추진하는 에너지가 바로 거기에서부터 비롯되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김 회장이 말하는 ‘멋지게 나이 들어가는 방법’이란 바로 ‘뭔가를 쉬지 않고 계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멈추면 안 되죠. 생각으로 하든 몸으로 하든, 쉬지 말아야 멋지게 나이 드는 겁니다.”
그가 말하는 멋지게 나이 드는 또 하나의 방법은 ‘사람을 많이 만나는 것’이다.
“도산은 사람을 좋아했어요. 그는 사람을 만나면 성의를 갖고 만나는 사람이었죠. 그렇게 나이 들어서도 사람을 많이 만나는 게 좋습니다. 그런데 사람을 만나는 데 돈이 많이 든다고 안 만나는 사람들이 있어요. 돈이 많이 드는 걸 피하려면 공동체에 속하는 게 좋습니다.”
점점 함께할 수 있는 사람들이 적어질 수밖에 없는 시니어에게 커뮤니티는 삶의 중요한 요소가 될 수밖에 없다. 김 회장은 사람 대하는 법을 간략하게 ‘관심을 가져주는 것’이라고 요약했다.
“요즘은 이메일도 있고 전화도 있고 문자도 있잖아요. 그런 도구들로 관심을 가져주고 표현하다 보면 함께 식사를 할 수도 있는 거죠.”
도산 정신이 뿌리 내리도록 전파
“도산 선생은 정말 성실하고 매사를 철저히 챙기면서도 크게 생각하신 분이었습니다. 조금이라도 그런 도산의 생활 태도를 닮아보려고 노력한 결과가 아닐까 합니다.”
자신의 일과 삶에 대해 정의하면서 김 회장은 다시 한 번 도산을 불러왔다. 사람을 키우는 일을 그 무엇보다도 중시했던 도산의 마음은 김 회장을 통해서 그대로 실천되고 있었다. 그래서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가’라는 질문에 대한 김 회장의 대답은 단호하면서도 그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 자체를 응축하고 있었다.
“날 기억할 게 뭐가 있어요? 저는 앞으로도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묵묵하게 도산 사상 전파 운동을 할 것입니다.”
김재실 회장은 “1947년 사업회 출범 이래 신익희 선생이나 강영훈 전 국무총리처럼 사회적 지위와 덕망이 높으신 분들이 이끌어왔는데 부족한 제가 회장이 돼 송구스럽고, 두려움이 앞선다”고 밝혔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알아도 모르는 척해야 할 때가 있다. 하얀 거짓말을 하는 경우와 같다. 인간관계는 대화가 주요 수단이다. 상대방이 신나게 이야기할 수 있도록 하는 마음 씀씀이가 필요하다. 분위기를 돋우기 위하여 어떤 유머를 하면 개중엔 이렇게 반응하는 사람이 나온다. “그거 알고 있는 이야기야!” 말을 한 사람은 맥이 풀리고 만다. 필자는 스마트폰 카메라 사진 강의를 한다. 어느 분이 쉽게 사진 편집하는 방법을 가르쳐 달래서 상대방이 알아주면 좋은 유용한 내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다 듣지도 않은 채로 유사한 애플리케이션을 이용하여 자기도 할 줄 안다며 시큰둥해하는 눈치였다. 더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졌다. 앞의 예와 같은 사례다.
요즘은 유머가 세상을 이끌어가고 있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재미있는 총각이 인기 있는 신랑감이듯 일상 대화에서도 웃음을 주는 내용이 곁들여져야 한다. 유머 두서너 개는 외우고 있으면서 순발력 있게 쓸 수 있으면 좋다. 작은 수첩에 빼곡히 적어 다니기도 한다. 많은 사람이 유머를 잘 구사한다. 때로는 오래된 것이나 다른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내용을 이용할 때도 있다. 어지간한 우스개는 거의 알고 있기 마련이어서 상대방은 재미없어한다. 지나간 유머를 사용하면 당연히 관심을 두지 못한다. 이미 알고 있는 유머는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시큰둥하며 팔짱을 끼기 마련이다. 그것을 때때로 업그레이드해야 한다. 사는 것 자체가 노력이듯 삶의 모든 분야에서 향상이 요구된다. 인생 2막을 위해서 끊임없이 학습하며 2차 성장을 하듯 대화의 소재도 새로움으로 충전시켜야 한다. 자신의 내부 저장소에 쌓인 경험과 지혜의 활용도 있어야 하지만, 새로움으로 채워 나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많은 사람이 즐겨보는 코미디 프로그램 방송을 시청해두면 도움이 된다.
반면에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는 적극적 자세도 필요하다. 자기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어주기를 바라듯 다른 사람의 말에도 관심을 기울이는 자세가 절실하다. 나이가 들면 대체로 자기의 이야기에 더 열을 올리기 십상이다. 가끔 우리는 눈을 크게 뜨고 “처음 듣는 얘기야, 재미있네!””라며 알고 있으면서도 전혀 모르는 척하기도 한다. 좋은 반응인 맞장구를 치는 일이고 영어 표현으로 “리액션”이다. 이야기한 상대방을 배려해서다. 대화를 잘하는 기법의 하나가 상대방의 얘기를 잘 듣는 것이고 적극적으로 반응을 더하면 금상첨화다. 어느 유명한 분을 모실 기회가 있었다. 그분의 말씀을 열심히 경청만 하였다. 가끔 맞장구를 쳐 드린 것 외에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당신은 참 대화를 잘하십니다.”라고 칭찬을 남겨주고 자리를 일어났다. 잘 듣는 것이 첫 번째의 대화기술이고 내용을 설사 알고 있다손 치더라도 처음 듣는 것처럼 시늉할 필요도 있다. 시니어에 꼭 필요한 자세가 아닐까 싶다.
그녀는 뽀얗고 하아얀 뭉게구름 같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색다르고 기발한 발상이 피어오른다. 집중해서 듣자니 성자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다. ‘이상희 헤어팝’의 이상희(李相熙·56) 원장. 직업은 미용사인데 그녀 인생에서 봉사를 뺀다면 삶이 심심할 것만 같다. 손에 익은 기술을 바탕으로 모두가 더불어 사는 세상을 꿈꾸니 말이다. ‘누군가를 돕는다’란 말에 백만 개의 하트풍선이 ‘뿅뿅’ 터지는 그녀의 환한 얼굴과 마주했다. 어찌 웃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루하루가 감사한 사람입니다
“지금도 하루하루가 감사해요. 저는 되게 감사한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다. 잠시 망설이더니 ‘감사’라는 단어를 꺼낸다. 열 손가락이 성한 가운데 기술을 배운 것도, 그 기술을 가지고 다른 사람한테 해줄 수 있는 게 있어서 감사하단다.
“미용기술을 배울 때 돈만 벌기 위해 시작한 것은 아니었어요. 한 달에 네 번 봉사를 간다면 나머지 시간은 봉사를 가기 위해 미용실에서 일하는 시간이라 생각하거든요. 제 이름이 서로 ‘상’에 빛날 ‘희’거든요. 말 그대로 상희답게 사는 거죠.”
어려운 이들을 만나면 뭔가 해줄 수 있어 좋고 자신이 운영하는 미용실에서 후배들이 잘 배우고 성장해나가는 것도 참 좋은 일이라고. 이상희 원장을 만난 것은 5월 말. 본인 스스로가 정한 인생의 안식년을 시작한 지 한 달이 채 안 된 시점이었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은데 미용실을 계속하면 쉴 수 없겠더라고요. 원래 하던 넓은 미용실을 4월 30일까지만 하고 5월 1일 철거했어요. 저와 오래 일했던 디자이너들이 일할 곳을 마련해 지금의 아파트 상가로 옮겼어요. 이성적으로는 이제 내가 하고 싶은 일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철거하던 날 잠이 안 오더라고요. 안식년이라 해도 두 손 다 노는 게 아니라 그런지 다음 날부터는 잠이 너무 잘 왔어요.”
그런데 그 안식년이란 것 말이다. 대부분 휴식을 염두에 두고 설계를 한다. 이상희 원장은 그 하고 싶다던 일(?)에 더 빠져보려 미용실 운영 대부분을 후배 디자이너들에게 맡겼다. 벌여놓은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 당장 앞두고 있었던 새터민 결혼식에 피부 관련 사업, 매달 있는 봉사, 새로운 봉사, 미용인의 처우 개선 등 쌓이고 쌓인 일을 보니 이게 안식년인가 싶다.
봉사와 업(業)이 하나인 인생을 구상하다
전라북도 정읍 출신인 이상희 원장은 성공하려고 미용계에 입문했다. 미용실에 갔더니 기술을 배우면 서울도 갈 수 있고 해외도 갈 수 있다고 말해줬다. 솔깃한 말에 응시한 미용 자격증 필기시험에 떡하니 붙었고 곧바로 실기시험을 준비했다.
“학원 안 다니고 미용실에서 연습했어요. 고등학교 친구들 데리고 가서 머리 잘라주면서 두세 달 정도 훈련했고 합격 1년 정도 후에 상경했죠.”
서울에 오자마자 당시 유명했던 미용실에 취업한 이상희 원장은 일주일을 못 다니고 그만뒀다. 줄지어 서 있는 거울에 헤어디자이너의 이름이 아닌 번호가 붙어 있었다.
“큰 미용실 가야 성공한다기에 들어갔는데 거기선 사람 이름을 부르지 않았어요. 적응하기 힘들더라고요. 제가 시골 애였지만 자존감은 있었거든요.”
서울살이 초반 20대의 이상희는 걷기도 많이 걸었다. 집이 있던 상도동을 지나고 한강다리 건너, 숙대, 남대문시장. 어떻게 살 것인가 고민했다.
“신호등 앞에 있는데 파마가 막 말아지는 거예요. 다시 미용을 해? 돈 많은 남자 만나서 미용실을 열어? 가난해서 걷고 고민하면서도 걷고. 그렇게 내린 결론이 나를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실력을 키워 성공하겠다는 거였어요.”
머리 자르는 미용기술 외에도 머리를 올리는 ‘업스타일’에 ‘메이크업’ 기술도 할 수 있어야 했다. 다니던 미용실 원장과 선배, 동료에게 양해를 구해 시간을 마련했고, 잘살던 친구에게 학원비를 부탁해 메이크업 학원에 등록했다. 선후배 관계가 수직적이고 딱딱하던 시대였지만 업무시간을 배려받고 학비문제를 해결해나가면서 더욱 완벽한 미용사로서 비상을 꿈꿨다.
“후배들에게 돈과 시간이 없어서란 변명을 하지 말기를 당부해요. 꼭 해야 할 일이고 열정이 있으면 누구든 도울 테니 도움을 받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라 해요.”
20대는 미용사 이상희로서 삶을 채우는 시간이었다면 30대는 그것을 바탕으로 존중하고 돕고 깨치며 살아갔다.
‘높임말’과 ‘봉사’는 철칙
서른 살의 나이, 자신의 이름을 단 미용실을 열었다. 개업과 함께 이상희 원장이 철칙으로 삼았던 두 가지가 있다. 그 첫 번째가 직원들 사이에 높임말 사용이었다. 당시는 손님이고 미용사들이고 서로에게 함부로 하던 시절이었다.
“저희 때는 디자이너와 스태프가 같이 앉아 밥도 안 먹었어요. 솔직히 미용기술에는 차이가 있지만 사람 차이는 없잖아요. 그래서 오픈할 때부터 높임말을 사용했어요. 혹여 함부로 하는 손님이 있으면 더 예의를 갖춰 말했어요. 구두며 유니폼도 갖춰 입었습니다. 그렇게 분위기를 바꿨어요.”
두 번째는 바로 봉사다. 한 달에 한 번은 전 직원이 봉사하기로 했다. 좋은 기술을 가지고 있으니 그것을 좋은 일에도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종교, 지역 그 어떤 것도 따지지 않고 손길이 필요한 곳을 찾아 어려운 이웃과 얼굴을 마주했다.
“처음 찾아서 봉사했던 곳이 가난한 마음의 집이라는 곳이었어요. 1990년대에는 메이크업이 아주 강할 때였어요. 장애우들이 저희를 보고 놀라서 숨는 거예요(웃음). 그래도 몇 번 가니까 친해졌어요. 봉사하다 보니 새터민과도 연결이 됐어요.”
어렵던 시절 동료들과 친구의 도움으로 메이크업을 배운 것이 두고두고 고맙다는 이상희 원장. 좋은 마음이 모여 얻은 기술이기에 봉사를 할 때 더없이 기분이 좋다.
“미용실 열고 1년쯤 돼서 어떤 손님이 저에게 도움을 요청했어요. 러시아 여자와 함께 한국으로 들어온 탈북민이 결혼식을 하는데 메이크업해줄 사람이 필요하다고요. 제가 메이크업을 한다는 걸 몰랐던 손님인데 말입니다. 당연히 좋다고 했죠.”
봉사한다는 게 알려지면서 놀이처럼 재미있고 기획력 있는 봉사가 이어졌다. 정부 지원이 어려운 틈새 청소년들을 위해 일일찻집을 열고, 산골 아이들을 위해 자전거도 사주고 고아원에 세탁기도 기증했다.
“손님들에게 이건 꼭 약속했어요. 우리 미용실에 와서 머리를 하면 그 일부는 다른 사람들 위해 쓰인다고요. 제가 그렇게 좋은 일을 하면 이곳에 오시는 분들이 복을 받는 거잖아요.”
‘K뷰티’와 ‘뷰티엔젤’ 봉사의 중심에 서다
2000년대 중반에는 한·일 미용인 간의 세미나가 자주 있어서 일본에 갈 기회가 많았다. 그때 일본의 성년의 날과 우리나라의 성년의 날에 대한 의문과 고민이 일었다.
“일본에 갔는데 일본 젊은이들이 기모노를 많이 입더라고요. 예쁘기도 하지만 그 나라 문화잖아요. 그런데 일본의 ‘성인식’은 공휴일인데다가 자치단체에서 큰 잔치를 열어요. 기모노 입고 화장과 머리를 하고. 이 모든 게 다 미용실에서 이뤄지는 거예요.”
함께 일본에 방문하고 온 미용실 원장들에게 우리 청년들을 위한 성년의 날을 특별한 날로 만들자고 제안했다. 메이크업과 머리손질은 미용실에서 도움을 주고, 한복은 당시 이상희 원장이 다니던 우석대학교 최고경영자과정 ‘미르’에서 만난 지인이 공급해주기로 했다.
“연세대학교 다니는 손님한테 학교 대동제 때 성년식을 열어주겠다고 제안했어요. 단, 스마트폰으로 한복 입은 사진을 찍어서 SNS에 올리는 학생들에게만 기회를 주기로 했어요. 2011년 5월에 이틀 동안 저희가 준비한 성년식에 300여 명이 참여했어요.”
이 행사를 계기로 K뷰티디자인협회의 시초가 된 한국업스타일협회를 창설했다.
“일본에 같이 다녔던 미용인에게 한국으로 돌아가서 좋은 일도 하고 미용실 손님도 우리 손으로 오게 하자고 말씀드렸어요. 한국업스타일협회는 이후 좀 더 의미를 넓혀 지금의 K(Korea)뷰티디자인협회가 됐습니다.”
이상희 원장의 또 다른 활동 영역은 뷰티엔젤이다. 미용실 개업 초기 직원들과 다니던 봉사가 주위 미용인들과 함께하는 한국미용봉사회로 이어지다가 누구든 함께 참여하는 연합봉사 형태의 ‘뷰티엔젤’로 탄생했다. 한국 봉사는 물론 캄보디아 미용기술 지원봉사를 이어가고 있다.
“‘미르’의 박문희 원장님이 의료진하고 캄보디아 봉사를 간다고 머리를 하러 오셨어요. 제가 ‘의사들은 너무 좋겠다, 다른 나라 가서 봉사도 하고’ 그랬더니 너무 좋아하시는 거예요. 봉사를 하게 된다면 저는 미용을 가르쳤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그게 진행이 됐어요. 그쪽 아이들 미용기술 가르칠 생각을 시작하니까 잠이 안 왔어요.”
캄보디아 봉사는 이상희 원장 인생에 새로운 전환점이 됐다. 20년 넘게 많은 사람을 도우며 살아왔지만 처음의 그 에너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캄보디아 봉사를 앞두고 느꼈어요. 왜 잊고 있었지? 친구 한 명의 도움으로 내가 20대를 살았는데 지금 못할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가난해도 여자가 기술을 배우면 자식교육 시킬 수 있고 생활고에서 나아지니까 공부는 늦게라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지금까지 두 번의 캄보디아 미용기술학습프로그램을 통해 20명을 지원했다. 학비뿐만 아니라 숙식과 생활보조금까지 지원하는 사업이라 매년 할 수 없다고 한다.
“캄보디아 아이들과도 약속한 것이 있어요. ‘너희가 성공을 하면 한 사람을 가르쳐라.’ 그게 약속이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캄보디아에 미용실 오픈을 생각하고 있어요. 그곳 아이들이 일할 수 있는 곳을 만드는 거죠.”
‘미용복지사’라는 직업 멋지지 않나요?
안식년이라는 본인의 결정과는 무관하게 하는 일이 너무나도 많다. 매달 13일 레드엔젤(청년응원단체)과 함께 K-컬처 콘서트를 개최한다. 2~3개월에 한 번씩은 다른 봉사단체와 연합활동도 한다. 캄보디아는 물론 올가을 새터민 합동결혼식도 계획 중이다. 미용인으로서의 고민도 남다르다.
“미용은 보건의 개념도 있지만 지금 사회에서는 복지의 개념입니다. 형편은 되는데 거동이 힘들어서 미용실에 못 오시는 경우가 있잖아요. 현재 미용은 이동 미용이 안 됩니다. 환자 외에는요. 미용복지사가 필요한 세상입니다.”
미용사의 새로운 직업에 대한 아이디어일 뿐 아니라 고령화 사회 시니어들의 복지에 대한 깊은 배려가 담겨 있다. 이외에도 한류로 인해 유입되는 외국 여행객에게 보다 친근하게 한국 문화를 알릴 수 있는 ‘뷰티존’을 만들어 세계에 한국 문화와 아름다움을 알리고 싶단다. 미용실을 작은 평수로 옮기면서 ‘손아당(蓀雅堂)’이라는 공간도 만들었다. 뜻 맞는 사람들이 모여 봉사에 관한 아이디어를 주고받는 허브 역할을 하게 되기를 바라면서.
“근데 저는 생각하는 게 예쁜 거 같아요. 끊임없이 꿈을 꾸는 거 같아요. 내가 만일 미용 일에서 손을 뗀다면 내 직함을 뭘로 하지? 뷰티풀 라이프 디자이너 이상희로 불리면 어떨까 하는데 되겠죠?”
뷰티풀 라이프 디자이너를 꿈꾸는 그녀의 입에서는 이쁘다(예쁘다)라는 말이 참으로 많이 흘러나온다. 자주 쓰는 단어에는 그 사람의 평소 모습이 담겨 있다. 그녀의 이쁜 마음이 영원하길 지지하고 응원한다.
여행기자 겸 작가. 3D프린팅에서 만난 전기환(全基煥·49세) 대표의 이력이다. 전자 부품과 기계 장비가 어지럽게 널려 있는 회사의 대표로 생각하기엔 어울리지 않은 이력이다. 게다가 아직 현역이다.
“언론인의 직업 수명은 그리 길지 않거든요. 은퇴 후 무엇을 할지 고민하던 차에 3D 프린터 업계에 있던 지인에게서 책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았어요. 이용자들이 너무 모르니 보급을 위한 서적이 필요했던 것이죠. 그렇게 3D 프린터라는 물건을 처음 접한 것이 2014년이었습니다.”
3D 프린터라는 낯선 장비와의 인연은 묘한 매력으로 그를 빠져들게 했다. 미래 산업을 주도할 만한 분야라는 확신이 섰다. 그리고 창업을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지인을 통해 3D 프린터의 개념을 배웠고, 2015년에는 유한대학교에서 진행한 시니어 기술창업 스쿨 과정을 통해 보다 전문적인 지식을 쌓았다. 유한대학교가 배출한 수료생 중 우수창업 사례의 인물로 꼽히고 있는 그는 이제 후배들을 위한 교육에도 참여하고 있다.
전 대표가 설립한 회사 3D프린팅은 주로 3D 프린터의 하드웨어 보급에 초점을 맞추고, 아이들을 위한 3D 교육용 키트나 고객이 직접 조립해 사용할 수 있는 DIY 3D 프린터 ‘메이커박스’를 출시했다.
하지만 최근 그가 관심 있어 하는 분야는 3D 프린터와 관련한 소프트웨어, 즉 교육 분야다. 장비가 보급되더라도 이를 운용할 수 있는 교육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관련 산업은 성장을 기대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정부 정책이나 기술 보급이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해요. 방과 후 학습을 하는 곳에 찾아가 보면 아이들 앞에 모니터와 키보드밖에 없어요. 실제로 제품을 출력해보고 3D 프린터를 다뤄볼 수 있는 기회가 적은 것이 현실이에요.”
그의 회사에선 매주 토요일 일반인들이 3D 프린터를 직접 다뤄보면서 배운다. 수강생들은 초등학생에서 주부까지 다양하다. 그는 3D 프린터를 이용한 창업을 준비하는 중이라면 너무 거창하지 않게 작은 규모로 시도해보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일단 경험을 쌓아보라는 의미다.
“본인이 스스로 흥미를 갖고 시도할 만한 분야를 찾는 것이 중요해요. 사소한 아이디어라도 좋아요. 사람들이 드나드는 상점 한 귀퉁이에서 공방처럼 시작해도 좋아요. 지금 시점에선 출력대행서비스(출력실)도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당분간 수요는 계속 될 테니까요.”
그는 자신만의 전문 분야가 있다면 성공 가능성이 더 높다고 말한다.
“주변에서 제빵사가 자신만의 케이크 장식을 위해 3D 프린터를 이용하기도 하고, 금속 세공사나 의상 디자이너가 활용하는 경우도 봤어요. 본인만의 전문기술을 활용할 수 있으면 3D 프린터 기술의 가치는 훨씬 올라갈 거예요. 내가 무엇을 잘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과정이 필요해요.”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라는 파스칼의 말이 생각난다. 인간은 자연 앞에서는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미약한 존재지만 생각을 할 수 있으므로 그 어떤 존재보다 위대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인간은 갈대처럼 가냘픈 존재이기는 하나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이 우주를 포옹할 수도 있는 위대성을 지니고 있다. 이와 같이 양극을 공유하는 존재가 인간인 것이다.
이성적이면서도 감성적인 존재, 어쩌면 인간은 존재 자체로 모순을 안고 살아가는 2원적인존재인 것 같다. 그 모순을 어떻게 극복하여 순리에 맞춰서 사는가 하는 것이 중용의 삶을 사는 방법인 것 같다.
우리가 삶을 살면서 수많은 문제에 직면하게 되고 그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느냐의 방향에 따라 그 사람의 삶은 달라지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따라서 의사결정의 중요성은 그 사람의 일생을 좌우 할 만큼 때로는 중요한 것일 수가 있다. 올바른 판단과 결정을 위해서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첫째 많이 배워야 할 것이다. 우리는 삶을 사는 내내 죽을 때까지 끊임없는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서 학습하는 생활을 해야 한다. 우리는 아는 만큼 인생을 편하게 살 수 있고 아는 만큼 지혜롭게 의사결정을 하면서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것 같다.
특히 인생2막을 시작하는 시니어들은 인생1막을 정리하고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 학창시절만큼의 오랜 시간은 아니더라도 인생 2막을 위해 필요한 만큼의 학습을 다시 해야 할 것이다. 고대 희랍의 철학자 플라톤은 “교육이 한 인간을 양성하기 시작할 때의 방향이 그의 삶을 결정할 것이다”라고 강조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교육은 노후로 가는 여행을 위한 최상의 양식이다” 고 말했다. 굳이 이런 철인들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우리는 교육과 학습의 필요성을 절실히 삶을 통해 느끼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배움은 인간을 사람답게 만들어 준다. 그리고 주체적으로 자기 뜻에 따라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러므로 사람은 배워서 행복하게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요약하여 한 마디로 “배움은 미래를 위한 가장 큰 준비다”라고 했다.
둘째 인생길을 안내 해주는 멘토가 필요하다. 삶을 바로 살기 위해서는 인간에게도 항해할 때 등대처럼 가이드 역할을 해주는 스승이나 멘토가 필요하다. 훌륭한 멘토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고전과 같은 책이 될 수도 있다. 직접 경험에 의해 지혜를 터득할 수도 있겠지만 보다 현명한 사람은 간접경험을 통해서도 삶의 지혜를 깨우칠 수 있다.
가장 훌륭한 멘토는 자신과 코드가 맞는 선지자가 아닐까 싶다. 함께 공감하고 자신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나 분야에 대하여 이야기를 해서 이를 깨우쳐주고 가이드 해주기 때문이다. 멘토는 인생의 성공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존재이다. 마치 나침판이나 등대처럼 배가 옳은 방향으로 바로 항해할 수 있도록 안내해 주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셋째 사물의 본질을 알고 핵심을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나무도 보고 숲도 볼 수 있는 안목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장님이 코끼리를 만져보고 정확하게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다리, 배, 코 등 어느 일부분만 확인해서는 안 된다.
우리 인간은 바른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항상 파스칼처럼 생각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생각 없는 삶은 무미건조하다. 삶의 맛을 북돋우는 것은 생각과 행동이다. 그러면 우리는 삶의 와중에서 어떻게 생각의 차이를 극복하고 함께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을까?
꽃밭에 있는 여러 종류의 꽃들이 함께 피어 있는 것을 보면 아름답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
꽃들은 종류가 다르지만 남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자신의 영역을 지키면서 꽃을 피우는 것처럼 우리의 삶도 서로 다른 개성의 차이를 인정하고 장점을 존중하면서 단점을 보완하여 함께 공존해 나갈 수가 있지 않을까? 만일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자신만 옳으니 따르라고 한다면 우리는 꽃밭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없을 것이다. 치열한 약육강식의 자연의 생존법칙에 따라 항상 불안한 삶을 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차이란 서로 다름이지 다르다고 적은 더욱 아니다. 다른 것은 결코 잘못된 것과는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차이를 인정하고 공존하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그럴 경우에 우리의 삶은 발전이고 평화로운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음악의 오케스트라처럼 서로 다른 악기들이 다른 음으로 화를 이루기 때문에 아름다운 음악을 감상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트럼펫 소리가 아름답기는 하나 혼자 내는 소리는 단조롭다. 서로 다른 악기들이 화음을 만들어 낼 때 우리는 서로의 차이를 존중하고 공유할 수 있는 것이다.
정치에 있어 보수와 진보도 마찬가지다. 보수와 진보는 모두 삶을 행복하게 잘 살기 위한 방법을 찾는 공통적인 목적이 있다. 보수와 진보는 서로 다른 차이를 존중하고 받아들일 때 미국과 같은 선진 민주주의 국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장점을 수용하고 단점을 보완하는 그런 사고가 생각의 차이를 극복하는 방법이 될 것이고 이는 한마디로 중용의 삶과 상통하는 것이 될 것이다. 차이의 화합된 순열과 조합은 우리가 추구하는 가장 이상적인 삶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개굴개굴 개구리 노래를 한다. 아들, 손자, 며느리 다 모여서….”
노래와 함께 인형극이 시작된다. 거리를 걷다 멈춰 서다를 반복하다 간이의자에 자리 잡고 앉는 시민 관객들. 서울역 고가 보행길 ‘서울로 7017’ 개장과 함께 어린이들과의 교감을 담당하기 위해 탄생한 인형극단 ‘오늘’의 공연에 구름관객이 몰렸다. 활기차고 밝은 에너지로 중무장한 시니어들을 만나봤다.
시니어의 장점이라면 바로 노련함 아닐까? 인형극을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다는 이들이라고 했다. 그런데 어린이 관객들 앞에 서서 웃고 눈높이를 맞추며 노래하는 모습이 전문배우 못지않다. 인형극단 ‘오늘’은 ‘서울로 7017’을 지원하는 자원봉사단 초록산책단의 동아리반 활동 중 하나다. 평균연령 65세, 시니어 파워를 자랑하는 인형극단 ‘오늘’은 올해 1월부터 6개월간 맹훈련을 거듭해 인형극 ‘오늘이’를 들고 서울로 7017 담쟁이 극장에 입성했다.
인형극단 ‘오늘’에는 왜 지원했나요?
이인웅 초록산책단 안에 전체 자원봉사 활동 외에 동아리 활동반이 있습니다. 각자가 원하고 좋아하는 모임에 지원한 것이죠. 서울시 후원으로 전 국립극단 어린이청소년연구소 부소장인 유홍영 예술감독을 비롯해 많은 스태프가 도움을 줘서 열심히 연습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배우가 하고 싶었어요. 끈을 놓지 않았어요(웃음).
장광자 저는 사실 인형극단보다는 야생화반에 들어가고 싶었어요. 제가 여기서 나이가 제일 많아요. 인형극단은 대사 외우는 게 무서워서 생각도 못했어요. 그런데 오라고 하더라고요. 다행히 대사가 많이 없는 백주 할머니 배역을 주시더군요. 그래도 대사는 까먹고 또 까먹고 해요.
김정자 저는 손주들하고 하려고 시작했어요.
백남재인형극단이 처음 모이던 날 남자 배우가 없다고 빨리 들어 오라고 하더라고요. 첫 모임에는 일이 있어 못 갔는데 배역은 이미 주어졌고 빠지지도 못하겠고. 재밌게 지내고 있어요. 한 장면씩 지나갈 때마다 잘 넘어간다, 좋다 이렇게요. 잘 끝났으면 하죠 늘. 그런데 우리 여배우들 나이가 너무 많아서 불만이에요(웃음).
주인공인 오늘이는 어떻게 발탁됐나요?
양희선 제가 원래 어린이들에게 동화를 들려주고 있거든요. 인형극을 하면 꼬마 친구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줄 때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지원했어요. 주인공이 된 건 아무래도 제가 동화구연 경험이 있다 보니 목소리 흉내를 좀 냈던 것 같아요. 미모도 한 미모 할까요 ?(웃음)
이야기꾼은 특별히 연출가가 직접 뽑았다면서요? 목소리가 듣기 좋았어요.
김정자 카랑카랑한 목소리는 아들 셋 키우면 나옵니다(웃음). 맨날 소리 지르다 보면요.
관객들이랑 호흡할 때 느낌이 어땠나요?
이숙경 저는 많이 설레던데요? 아이들이 아직 어리잖아요. 눈높이에 맞춰서 노래도 불러주고요. 구연동화 활동가로 일하고 있는데 여기서 공연하면서 많이 배우고 있어요. 또 아이들이 우리를 바라봐주니까 좋아요.
오늘 무대는 어땠나요?
강부형오늘까지 총 4회 공연을 했습니다. 오늘이 제일 좋은 것 같아요. 나름 집중했고 관객 호응과 몰입도도 높았어요.
배우로 공연하는 느낌 어떤가요?
이인웅 아직은 좀 긴장된 상태예요. 공연을 시작하면 정말 얼마 안 있어 끝나는 거 같아요.
왜 인형극을 선택했나요?
조정자나이 들면서 다양한 것을 해봤어요. 인형극도 도전할 수 있는 새로운 분야였어요. 사람도 만나고, 매일 대사 암기를 하면 치매도 안 걸릴 거고요. 날마다 신나요. 연습하러 와도 즐겁고요.
인형극으로 하고 싶은 작품이 있다면?
강부형 지금 제가 라는 대본을 쓰고 있어요. 완성이 되면 인형극으로 무대에 꼭 올리고 싶어요. 줄거리는 어느 정도 나온 상태입니다.
일반봉사하면서 동아리 활동을 한다고요?
김정자인형만들기 체험학습이에요. 목요일 4시부터 인형 만들기를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놀아주는 프로그램입니다. 늙을 시간이 없어요. 못 늙어요(웃음).
가족들은 뭐라고 하나요?
구경희 엄마가 어떻게 거기에서 그걸 하냐고 하더라고요. 저 어렸을 때 천 보자기 붙들고 연극하고 그런 시절을 보냈어요. 그때는 TV도 없었고요. 그런 게 항상 마음속에 있었는데 나이 먹고 기회가 있어서 하는 게 즐거워요.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이인웅 거리에서 비보이가 춤을 추거나 가수들 노래하는 것들을 볼 수 있잖아요. 그런데 이런 연극은 많이 없는 거 같아요. ‘서울로 7017’에서만큼은 계속 다양한 공연을 하면 좋겠습니다. 누군가 지나다 우리 인형극을 보고 힐링을 할 수도 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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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자랑할 수 있는 한국의 대표적인 세계적 문화유산 2가지를 말하라면 어떤 것이 있을까? 우리나라에는 세계적으로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이 아주 많이 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창덕궁, 불국사, 석굴암, 수원화성, 고인돌 유적, 해인사 대장경판, 종묘, 판소리, 강강술래 등 유형 및 무형 문화유산이 많은 편이다. 특히 제주도는 최근 세계 7대 자연경관으로 선정되었다.
우리는 그런데도 공기나 물처럼 그것이 얼마나 자랑스럽고 고마운 것인지 모르고 지내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은 것 같다. 그중에서도 세계 제일인 것을 말하라면 한국인에게 자랑스러운 유형의 한글과 무형의 선비정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높은 문맹률 퇴치와 자본주의의 폐단인 이기적인 삶의 만연으로 인하여 정신적으로 힘든 삶을 살고 있는 이 시대의 문제점을 해결해줄 수 있는 이러한 아름다운 문화를 전파하는 일에 우리나라 발전의 새로운 동력인 액티브 시니어들이 나선다면 우리의 인생 2막은 훨씬 더 아름답고 의미 있는 삶이 되리라 생각한다.
1. 훈민정음
한글은 유엔이 인정한 세계 최고의 문자다. 유엔의 산하기관인 유네스코는 매년 지구촌 문명퇴치에 공이 큰 각국의 기관과 단체에게 세종대왕 문해상(King Sejong Literary Prize)을 수여하고 있다. 현재 서울 간송 미술관에 보관 중인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 훈민정음은 국보 제70호(1962.12.20)로 지정되어 있으며 세종 28년 (1446년) 창제 반포된 전권 33장 1책의 목판본이다.
한글이 세계적인 문화유산이 되는 이유는 표음문자, 음소문자, 자질문자의 3요소를 모두 갖춘 지구상의 유일한 문자일 뿐만 아니라 인류가 발명한 문자 중 창제 목적이 확실하고, 창제 일이 정확하고, 창제자가 분명한 문자는 한글 하나뿐이라는 사실이다. 한글은 과학적이고, 보편적이며 아주 실용적이라 할 수 있다. 세계적인 언어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한글은 인류가 발명할 수 있는 최고의 문자라고 격찬하고 있다. 특히 오늘날 IT시대를 맞이하여 한글의 우수성은 국가 발전의 원동력이 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현재 우리가 추진하고 있는 한글의 세계화 운동을 더 적극적으로 펼쳐나가야 할 것이다. 통계에 의하면 한국어를 제1외국어 또는 제2외국어로 가르치는 국가가 2012년 현재 23개국 799개 학교로 증가하고 있다고 하며 그 학생 수는 약 7만6000여 명에 이른다고 한다. 우리가 세계 10대 무역국가로서 농수산물, 공산품 등 제품의 수출입만 치중할 것이 아니라 이제 세계적으로 자랑스러운 한글이라는 문화도 함께 수출하여 세계문화 발전에 기여하는 나라가 되어야 하리라 생각한다. 한글이 지구촌 인류의 소통과 평안, 평등, 평화를 이룩할 수 있는 위대한 문자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글은 자음과 모음 24자로 모든 의사를 전달할 수 있는 체계다. 오늘날 세계를 제패하고 있는 영어는 자음과 모음이 26자이지만 사실상 이를 표현하는 데는 26x4=84자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세계문화를 통일하는 것은 쉽지 않으나 한글로 문자를 통일한다면 그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2. 선비정신
오늘날 선비라는 말은 뭔가 고전적이며 구태의연한 느낌을 주는 단어다. 또 막상 선비에 대해 한마디로 말하라면 머리에서만 맴돌 뿐 쉽게 설명하기가 어렵다. 이는 일제 통치시대 때 일본의 한국 문화 말살 정책 결과에 따른 부정적인 영향일 수도 있다.
선비란 “인·의·예·지의 인간 본성으로 개인 인격을 수양하고, 효·충·경·신의 조직 원리로 사회 인격을 수행하여 만인에게 이로움을 가져다줄 수 있는 홍익인간을 실천하는 리더다”라고 정의를 내릴 수 있는 아주 멋진 말이다. 좀 더 쉽게 표현하면 오늘날 영어의 신사(gentleman)나 군자의 의미이지만 이런 낱말이 주는 뉘앙스보다 훨씬 더 멋있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선비라는 말의 어원은 대략 3가지 설이 있다.
첫째, 선비란 어질고 지식이 있는 사람을 뜻하는 알타이 어족 몽골어 기원설이다.
둘째, 고구려 조의선인(皁衣仙人)의 호칭인 선배(신라의 화랑도와 유사)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셋째, 선비 사(士, 하나를 알면 열 가지를 안다), 선비 유(儒, 세상이 필요로 하는 사람), 선비 언(彥, 문무를 겸하는 사람)이라는 뜻에서 나온 의미라고 한다.
선비들이 갖춰야 하는 근본정신과 핵심 가치는 무엇일까?
오늘날 한국 선비정신의 대가라고 할 수 있는 한국 선비 아카데미 회장인 화원 선생은
다섯 가지로 요약하고 있다.
살신성인, 거의소청, 극기복례, 법고창신, 솔선수범이다.
그러면 선비 정신의 보편적 핵심 가치는 무엇일가?
공자가 강조한 것은 인간은 개인적인 존재이자 사회적인 존재로서 대동사회를 펼치기 위해 유학사상을 창안했고 이는 선비정신의 근본이다.
유학은 인도주의 사상으로 수기치인지학(修己治人之學)이다.
유학은 현실 중심 사상이다. 매순간 인간의 삶에 최선을 다하자는 강령으로 하의상달로 요약된다. 유학은 실천중심 사상이다. 유학은 관계구현 사상이다.
공부와 학습은 개인의 인격 완성을 위해 하는 것이고 나아가 조직의 인격완성을 위해 하는 것이다.
퇴계 이황은 개인 인격의 완성으로 독립할 수 있고 사회 인격의 완성으로 상생할 수 있다.
개인 인격은 인간의 근본인 진실함인데 이를 실천하기 위해 격물, 치지, 성의, 정심으로 해야 한다고 강조하였으며 이를 지도자의 셀프 리더십 근본으로 삼았다.
이는 사람의 생각과 말과 태도 및 행동의 뿌리다.
여기서 격물이란 대상에 대한 깊은 궁리로 밑바닥까지 캐내고 철저하게 규명하는 것을 뜻하며 과학적 탐구를 뜻한다.
치지란 정확한 지식의 종착점을 말하며, 성의란 성실한 의지로 열정과 집중을 한곳에 투입함을 뜻한다.
정심은 하늘로부터 받은 본래의 양심으로 옳고 바르며 순수한 편견이 없는 마음이다.
수신이 이루어지면 개인 인격의 독립이 완성되고 스스로 빛을 밝히게 된다.
그다음 단계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빛을 이끌어내는 행위다.
즉 나와 남이 빛을 함께 발할 수 있어야 대동사회를 구축할 수 있다.
따라서 선비 리더십의 8가지 요소는 격물, 치지, 성의, 정심,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다.
이황이 성의 정심에 무게를 두고 정신적인 면을 강조했다면 이이는 격물, 치지에 중심을 두고 물질적인 면을 강조하였다.
요컨대 선비란 어짊인 사랑과 섬김인 존중을 실천하는 사람이다.
또한 선비는 자기 자신을 닦아 개인 인격을 완성하고 나아가 공동체를 위한 조직 인격과 사회 인격을 확립시키는 사람이다.
선비가 되기 위해서는 수기안인, 위기지학, 법고창신을 해야 한다.
오늘날 사용하는 언어로 대체하면 인간성 교육, 전문성 교육, 창의성 교육을 의미한다.
이러한 선비정신은 붓의 문화이며 일본의 사무라이 정신인 칼의 문화와 구분된다.
따라서 한국은 붓의 문화로 칼의 문화를 감싸 안고 이를 극복하여 세계 문화의 창달에 힘을 써야 한다. 또 나아가 선비정신을 전 세계에 수출하여 아름다운 세계문화 창달과 홍익인간의 이념 실현을 위해 다 함께 노력해야 할 것이다.
‘조하리 창문’은 심리학에서 사용하는 자기 발견 방법이다. 앞의 사진처럼 “타인이 아는 나와 타인이 모르는 나” “내가 아는 나와 내가 모르는 나”를 축으로 하여 4개의 창문으로 구분한다. 필자는 이 이론을 취미개발에도 적용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보았고 실제 경험이 이를 뒷받침해주었다.
조물주는 인간을 창제할 때 평등을 주었다 한다. 잘할 수 있는 재능, 즉 끼도 마찬가지지 싶다. 어릴 때부터 그 끼를 발견하여 키워온 사람은 성공한 삶을 살고 있다. 물론 이 경우는 부모나 학교 선생이 그 재능을 알아보고 키워준 경우가 많다. 예전에는 성공 직업의 폭이 좁았다. 대통령이 되거나 판사가 되기를 희망했다. 한때는 군인으로서 장성의 꿈을 꾸기도 했다. 시대가 바뀌어 지금은 스포츠맨이나 연예인을 꿈꾸고 그 외에도 자기 나름의 다양한 미래 희망을 이야기한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찾고 있다는 점에서 다행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명문대학을 가기 위해 시험 성적을 올리기 위한 준비에 매달려온 지난 날이었다. 그런 결과는 창의성이 가장 뒤처진 나라로 낙인이 찍히게 되지 않았나 싶다. 그뿐만 아니라 은퇴를 한 베이비붐 세대들 또한 날로 늘어나는 한가한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를 고민하고 있다. 어느 조사에서 할 수 있는 취미활동이 없어서 집안에서 뒹굴뒹굴하게 되어 ‘삼식이’로 부인들의 잔소리를 듣는다 했다. 여가활동을 위한 준비를 못 해서다. 서구인의 경우는 은퇴를 무척이나 즐거워한다. 미리미리 준비를 해왔기 때문이고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자기 인생의 출발점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과연 잘할 수 있는 끼가 없을까? 우리 세대는 전 반생의 삶에서 가족이나 직장을 위하여 매달렸다. 생존경쟁의 틈바구니에서 여가생활은 늘 뒷전이었고 자기가 하고 싶은 꿈도 접어두기 예사였다. 그런 세월을 살다 보니 접어둔 꿈 자체도 까마득하게 잊고 말았다. 시니어 세대는 그동안 잊고 살았던 꿈을 펼치며 살아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고 있다. 우선은 은퇴로 말미암아 자기 마음대로 쓸 수 있는 한가한 시간이 주어졌다는 점이다. 수명도 늘어나 그 시간이 길다. 다시 말해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시간이 충분하다는 점이다. 직장인으로 살 때 늘 시간에 쫓기던 때와는 사뭇 다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날마다 일요일을 사는 셈이다. 하릴없이 무료하게 보내는 시간은 고통이다. 장수시대에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돈이 없이, 아프면서 오래 사는 것보다 하릴없이 오래는 사는 것이라 한다. 1980년대 초에 인기리에 불렸던 팝송 ‘다니엘 분’의 'Beautiful Sunday' 가사처럼 아름다운 일요일, 기다려지는 그런 일요일이어야 한다.
취미활동이나 평생학습 또는 봉사활동 등의 여가활동이 필요하다. 그런 일 중에서 은퇴자들이 가장 많이 희망하는 분야가 취미활동이다. 그러나 실제는 텔레비전 시청이 1위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 이유는 경제적 이유도 있지만 할 수 있는 취미가 없어서라는 은퇴자도 많다.
자기가 잘 할 수 있는 취미개발이 필요함은 당연하다. 다행스럽게 꾸준히 해오고 있는 취미가 있다면 문제가 아니지만, 그렇지 못하면 만들어야 한다.
간혹 “지금 배워서 뭐하려고?”라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앞으로 보내야 할 노후 시간이 너무 길다. 먹고 자고 배설하고 꼭 해야 할 의무적 시간을 제외한 순수 여가가 상상 이상이다. 해가 갈수록 늘어난다. 또 나이가 들면 신체적 변화로 잠자는 시간도 줄어들어 여가는 더 늘어나는 꼴이어서 더욱 그렇다.
어떻게 취미를 개발할 것인가? 필자는 60살에 사진을 배우기 시작했고 지금은 사진작가로 후반생을 활기차게 보내고 있다. 시작 시점에서 환경은 열악했다. 사진 솜씨는 초보자 그대로였고 장비 또한 똑딱이라 부르는 소형 카메라가 전부였다. 처음엔 단순한 취미로 그냥 한번 해보려고 했을 뿐이다. 사진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만난 한 여인이 발견해준 필자의 사진 재능을 믿고 사진작가에 도전하게 되었다. 그 계기를 통하여 삶의 새로운 방향이 열린 셈이다. 새로운 사람과의 교류로 자신이 모르고 있는 재능을 발견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조하리 창문’ 과 같이 ‘스스로는 모르고’ 있으나 다른 사람이 볼 때 잘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 재능을 다른 사람을 통하여 발견해 내는 방법이다. 그러기 위하여 그동안 자주 만나던 동창이나 직장인보다 새로운 사람과의 만남이 필요해진다. 기존 친분이 있는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타성에 빠져있게 마련이어서 새로운 시각으로 보지 않는다. 새로운 사람은 또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는 문이 열려 있어서다. 자기는 모르는 자신의 재능을 다른 사람을 통해서 발견하는 ‘조하리 창문’도 이용해볼 만 하다
사상 최대 규모 5.8 지진에 온 나라가 발칵 뒤집혔다. 수백 차례의 여진은 지금도 진행 중이며 우리나라도 지진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전문가들의 전망이 우리를 여전히 불안하게 하고 있다. 때맞춰 9월 30일부터 10월 6일까지 동작구 서울소방재난본부 보라매안전체험관에서 2016 안전체험이 열렸다.
사람의 안전이 최우선이다.
10월 4일 10시 서울소방재난본부 김종섭 행정주임 소방관의 안내로 실내 체험 실습에 참여했다. 이날의 체험 행사는 화재시 대피와 소화기·풍수해·지진체험 등을 주제로 했다. 각 코스마다 시청각 교육과 체험 실습이 진행됐으며 무엇보다 인명 안전에 최우선 목적을 두고 훈련 방법이 확 바뀌었다.
실감난 지진대피 체험
그동안 우리나라에서 별로 관심이 없었던 지진대피 체험이 특히 인상 깊었다. 지진 동영상을 시청하고 대피 훈련을 거쳐 사후 수습 가정까지 체험했다. “지진이야!” 하고 구호를 외친 뒤 머리를 보호하면서 탁자 밑으로 대피했다. 지진을 가상한 흔들림은 언론을 통해 느꼈던 것보다 훨씬 강했다. 실제 상황이 발생하면 제대로 대피할 수 있을지 많은 염려가 됐다.
소화기 체험도 이전과 크게 달라졌다. 이전에는 소화기를 들고 불난 곳으로 달려가는 훈련이 대부분이었지만 이번 체험에서는 정전으로 시야가 확보되지 않는 상태에서 벽을 더듬으면서 대피하는 요령을 배웠다. 비상상황이 실제처럼 느껴지는 훈련이었다.
김 소방관은 “벽면 쪽 손을 이용해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따라가면 출구를 찾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화재 현장에서는 자세를 최대한 낮춰야 한다. 연기는 위로 올라가기 때문에 바닥에서 30~60센티미터 정도에는 맑은 공기가 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또 소화기는 인화물 밑 부분에 분사해야 소화 효과가 있다.
태풍, 안전벨트, 지하철 화재 관련 체험
태풍은 재해 예보에 귀를 잘 기울이고 대비하면 극복할 수 있다. 시속 30킬로미터의 태풍 위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태풍은 위험한 곳에서 멀리 떨어져서 피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버스사고 시 안전벨트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배웠다. 급커브, 급브레이크의 위험성을 체감할 수 있어서 효과적이었다. 만약 벨트를 착용하지 않았다면 공중부양했을 것이다.
지하철 화재 때는 골든타임 확보가 매우 중요하다. 화재 현장에서 2~3분 이내에 탈출해야 한다. 먼저 다른 칸으로 신속히 대피한 뒤 1층 출구로 나가야 한다. 불가능할 경우에는 철로를 이용해 1~2킬로미터 떨어진 다른 역으로 탈출해야 한다. 하지만 이 방법은 매우 위험하므로 최후의 방법으로 선택해야 한다.
일반인들도 많이 참여해야
안전체험은 학생들이 체험학습의 일환으로 단체로 참가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제는 일반인들의 참여 방법도 강구해봐야 한다. 특히 거동이 불편한 시니어들은 재난시 위험에 처할 가능성이 더 많으므로 대피요령에 대한 교육이 더 절실해 보인다. 즐기면서 익힐 수 있는 안전체험을 마련해주신 서울소방재난본부와 친절과 성의를 다해 안전체험을 즐겁게 이끌어준 김종섭 소방관과 직원에게 감사드린다.
잠은 누구에게도 예외없는 일상이다. 그러나 수면을 연구하는 수면의학은 쉽게 접하기 어렵다. 대학병원을 제외하고 개인 병의원에서 수면의학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곳은 전국에 열 군데가 안 된다. 부산을 제외하곤 모두 서울에 몰려 있다. 전문성을 보수적으로 평가하면 수면질환을 종합적으로 치료할 수 있는 개인 병의원은 한 손으로 꼽을 수 있다는 평가도 있을 정도다.
대중화되지 않은 이유는 돈이 되지 않아서다. 환자가 잘 알지 못하니 수익이 늘기 어렵고, 이 분야에 몰리는 의사도 별로 없다. 그런데도 수면의학 분야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중 한 명이 이번에 만난 신홍범 원장이다.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사진 오병돈 프리랜서(Studio Pic) obdlife@gmail.com
신홍범 원장은 현재 국내 수면의학을 이끄는 이른바 황금세대 중 한 명이다. 개원가에서 활발하게 활약하고 있는 수면의학 분야의 전문가 중 대부분이 신홍범 원장 또래다. 수면의학에 대해 매력을 느낀 것에 대해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아마 다른 친구들도 비슷할 거예요. 제가 서울대 입학하고 얼마 안 된 1993년이었어요. 아직 예과생이라 좀 여유가 있을 때이기도 해서 책을 볼 시간이 있었는데, 당시에 잠과 관련된 일본 책들이 번역되어 국내에 들어오기 시작했죠. 아무래도 당시만 해도 일본이 수면의학에선 많이 앞서 있었으니까요. 그때 수면분야 책들을 많이 접하면서 흥미를 갖게 됐어요.”
재미있는 것은 국내에서 수면의학을 대표하는 대한수면의학회 역시 1993년에 창립됐다는 점이다. 수면에 대한 관심이 수면 위로 올라오기 시작한 사회적 분위기가 반영된 셈이다.
그러다 한국사회의 수면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은 2000년대 중반 무렵이다. 당시 외환위기를 극복하고 건강에 대한 관심이 급격하게 증가하면서 잘 먹고 잘 살자는 ‘웰빙(Well Being)’ 바람이 불었는데, 이 중 수면은 핵심분야 중 하나였다.
신 원장의 특이한 이력 중 하나인 미국수면전문의 자격 획득도 이 시기였다. 미국수면의학회가 일시적으로 타국의 의사들에게 문호를 개방해 응시 기회를 준 적이 있었다. 당시 국내에서 7명이 지원해 4명이 합격했는데, 그중 한 명이 신 원장이다. 2006년의 일이다. 현재는 미국수면의학회가 자격 수준을 세부전문의로 높이면서 외국인의 지원을 막아 놓고 있는 상태다.
그의 수면의학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자연스레 학회로 옮겨갔다. 지금 그가 학회에서 맡은 역할은 보험이사다.
“스승이신 정도언, 문화식, 김진 교수님들이 계신 곳이니까 당연하죠. 국내 수면의학은 이분들의 피와 땀이 바탕이 됐다고 봐야 합니다. 이 학회가 정립하고 체계화한 내용들이 수면분야가 익숙하지 않은 타 분야 의사들을 교육하는 데 쓰이고 있으니까요. 단순히 수면제만 처방받다 환자가 몇 년 동안 차도 없이 고생하는 일은 이제 없어야겠죠.”
보험이사? 일반인들에겐 익숙하지 않은 직함이다. 이 보험이사의 역할은 수면의학의 대중화와 연관되어 있는데, 바로 국민건강보험과 관련이 있다.
“국내에서 수면질환을 본격적으로 치료하는 데 걸림돌은 비싼 검사비와 치료비예요. 특히 수면질환은 일단 환자가 잘 때 나타내는 뇌파나 호흡을 측정하는 수면다원검사가 필수인데, 이 검사가 보통 60만~70만원 내외로 무척 고가예요. 검사 자체가 비싸니 환자 스스로도 자신이 무슨 질환이 있는지 알 수 없게 되는 셈이죠. 다행히도 학회와 복지부 측의 협의가 잘 진행되고 있어서, 연말쯤에는 좋은 소식을 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수면다원검사의 급여화(건강보험 혜택 적용)가 이뤄지면 다음 목표는 수면무호흡 치료에 필수적인 양압기(陽壓器)의 급여화입니다. 이 양압기도 250만원이나 되는 고가여서 환자들이 질환을 알고도 치료 못 하는 경우가 있어요.”
신 원장은 국내에서 수면관련 서적을 가장 많이 출간한 저자 중 한 명이다. 이렇게 책이 많아진 것에 대해 그는 수면의학의 다양성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처음엔 수면의학에 관한 전반적인 내용을 소개하는 책을 내놓았어요. 그랬더니 예상 외의 반응이었어요. 예를 들어 기면증 환자는 불면증에 관심 없고, 불면증 환자는 수면 무호흡증에 관심이 없는데, 이 내용을 한데 묶어 놓았으니 관심이 없을 수밖에요. 게다가 국내에 수면의학이 대중화가 안 된 상태여서, 질환 때문에 고생했던 환자들은 웬만한 의사 이상의 지식을 갖게 되신 분들도 많아요. 심지어 외국 논문까지 찾아 읽으시는 분도 봤어요. 이렇다 보니 더욱 전문성을 갖춘 내용을 전달할 필요가 있겠다라고 느꼈고, 그래서 한 가지씩 내놓다 보니 6권이나 됐죠.”
그 과정에서 그가 가장 보람을 느꼈다고 꼽는 책은 다. 교대근무로 인해 수면장애를 겪고 있는 환자들을 위한 치료법과 조언이 담겨 있는 책이다.
“서울 강남구 삼성동 쪽에 개원하고 있을 때였어요. 유난히 근처에 있는 한국전력이나 한국수력원자력에 근무하시는 분들이 많이 오시는 거예요. 공통점은 교대 근무자들이라는 것이었어요. 그때부터 교대 근무자들의 수면장애에 관심을 두고 해외 쪽 자료도 자세히 살펴보게 됐죠. 실제로 미국에서 사용되는 수면의학 교과서는 개정돼서 ‘직업수면의학’이라는 분야가 새로 생겨날 정도니까요. 외국은 직업 안전 관련 부처에서 교대근무자들을 위한 가이드북을 만들고 상세한 지침을 전달하고 있지만, 국내 자료는 간단한 2페이지짜리 팸플릿 수준이에요. 그래도 최근에는 수면장애가 산재로 인정받은 사례도 나타나고, 인식이 점차 좋아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소방관이나 경찰, 군인, 의료인과 같이 교대근무를 멈출 수 없는 직군들도 있잖아요. 그들을 위한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흥미로운 사실 중 하나는 교대근무를 중단하고 은퇴하거나, 평범한 일상생활로 돌아가도 불면 증상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제로 국제암연구소가 2007년 교대 근무를 2급 발암원인(물질)으로 규정했을 정도다.
“실제로 교대근무를 하다 은퇴한 50~60대 시니어들이 여전히 불면증을 호소하는 경우를 많이 봐요. 수면 리듬이 망가져서 그래요. 낮과 밤이 바뀌는 생활을 하다 수면 중추가 리듬을 잃어버려, ‘잠에 들라’는 신호가 떨어지지 않는 거예요. 이렇게 교대근무로 인한 불면에 대한 서적을 출간하면, 노동자들이 불면 대책을 사용자에게 요구하는 근거로 사용될 수 있다 생각했죠. 또 한편으로는 기업체에서 교육용으로 대량 구매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약간 있었고, 이 기대로 출판사 측을 설득하기도 했는데 결국 팔리진 않았어요.(웃음)”
이렇게 많은 책을 내게 된 배경에는 글쓰기가 어색하지 않은 그의 성향 탓도 있다. 한미약품에선 매년 의사들을 대상으로 한미수필문학상을 시상하는데, 그는 장려상을 세 번이나 수상했다.
“처음엔 뛸 듯이 기뻤죠. 자랑스럽기도 하고. 그런데 장려상만 세 번 반복되니까 되레 내 밑천을 드러내는 것 같아서 부끄러워지더라고요. 친한 동료는 한 번에 대상도 받던데. 나중엔 부끄러워서 가족에게도 숨겼어요.(웃음)”
그가 수면의학분야에서 꾸준히 일을 해 나가는 이유는 수면의학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잠을 줄여가며 공부를 하는 수험생의 생활패턴이 사실은 공부의 능률을 떨어뜨리고 수험생들의 건강을 해친다는 내용이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야간자율학습이 제도적으로 단축된다든가, 현대자동차가 밤샘근무를 폐지하고 주간연속 2교대제를 도입한 것도 수면의학이 영향을 미친 분야라고 생각해요. 또 얼마 전 봉평터널 버스추돌사고를 일으킨 기사가 기면증이라고 주장하면서 기면증 환자들이 생활에 불이익을 받을까 불안해했잖아요. 제대로 치료만 받는다면 사고 날 확률은 거의 없어요. 이런 분들을 돕는 것도 수면의학자들이 해야 할 일이겠죠. 이렇게 수면의학은 생각보다 많은 분야에서 사회에 도움 을 줄 수 있고,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불면에 시달리는 시니어들에 이렇게 당부했다.
“요새 액티브 시니어라는 말 많이 쓰잖아요. 이렇게 적극적이고 활달한 삶을 사시는 분들이 제게 도움을 요청하는 일은 많지 않아요. 낮에 활동이 많은 분은, 자연스럽게 피로도 늘고, 낮잠 잘 시간도 부족하니 밤이 되면 쉽게 잠에 들 수 있는 것이죠. 이에 반해 낮에 활동이 적으면 풀어야 할 피로도 없고, 시간이 남으니 졸거나 낮잠을 자게 되고, 결국 밤에 잠이 안 와 수면제에 의존하게 되는 악순환을 반복하는 거예요. 그러니 건강을 위해서라도 적극적인 삶을 사셨으면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