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전할 수 없는 상황이 돼서 마음만 동동 구르는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의 문을 두드려주셔요. 이번 호에는 시인이자 야생화 사진작가인 박대문님께서 풀꽃들에게 쓴 글을 보내주셨습니다.
계속되는 가뭄 끝에 단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단비를 가득 품은 바람 소리가 쏴 밀려옵니다. 주룩주룩 낙숫물 듣는 소리가 어느 고운 음악보다 감미롭게 들려옵니다. 얼마나 애타게 기다리던 단비입니까?
어제 산에서 만났던 풀꽃, 그대! 참 안타까웠습니다. 오랜 가뭄에 시들시들 연명하듯 버티는 모습이 참으로 애잔했습니다. 게다가 가뭄 탓에 꽃망울과 새순 줄기에 온갖 물것들이 달라붙어 진을 빠는 통에 제대로 꽃도 피우지 못하더군요. 힘겹게 열리는 꽃잎이 처량해 보이기조차 했습니다. 그런데도 시원한 물 한 바가지 뿌려주지 못하고 진딧물 한 무더기 털어주지도 못했습니다.
가뭄과 물것에 시달려 제대로 피우지도 못한 풀꽃, 사람으로 치면 화장기 없는 병색 짙은 민낯에 카메라만 들이댔습니다. 아니 민낯이 아니라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대의 생식기에 확대경을 들이댄 것입니다. 목마른 갈증, 물것의 시달림을 번연히 보고서 도움도 못 주면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그대의 은밀한 곳만 훑고 지나쳤습니다.
돌이켜보면 그대에게 참 많은 잘못을 저지르고 다녔습니다. 삭막하고 황량한 겨울 지나고 이른 봄이 되면 발밑에 보이지도 않는 작은 풀꽃 하나에 넋을 잃고 홀딱 빠졌습니다. 그러다 보니 같이 나온 새순이나 꽃망울이지만 좀 더 크고 먼저 핀 꽃에만 카메라 앵글 들이대고 옆에 돋아나는 새싹은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밟고 뭉개기 일쑤였습니다.
온갖 꽃들이 다투어 피어나는 봄날과 초여름이면 작고 빈약한 꽃은 본체만체 제치고 화려하고 멋진 꽃에만 매달렸습니다. 꽃이 귀한 시기에는 발밑의 사소한 풀꽃도 애지중지하다가 여기저기 온갖 꽃이 한창일 때는 크고 화려한 것만 중시하고 그렇지 못한 것은 차별하는 변덕을 부린 것입니다. 심지어 예쁜 꽃 곁에 뻗은 다른 줄기를 사진 화면에 잡티 된다며 제치고 꺾기도 했습니다. 어려운 역경 속에 생을 위해 악전고투하는 데도 도움 주지 못하면서 아무런 배려도 없이 은밀한 치부를 사진 찍어 자랑스럽게 내놓고 공개했습니다.
태어난 생체로서 소명을 저버리지 않는 풀꽃, 그대! 좋아하고 사랑합니다. 선택의 기회도 없이 주어진 최악의 환경일지라도 생을 포기하지 아니했습니다. 온갖 주위 역경과 고난을 감수하며 새싹 틔어 꽃피우고 열매 맺어 씨앗을 남기는 데 전력을 다했습니다.
지금은 어디에 가든 경애하는 마음으로 눈 맞춰 인사하고 이름을 불러주며 가슴 깊이 사랑합니다. 꽃 사진 찍으면서 혹시나 새싹을 밟을까봐 삼각대도 거의 쓰지 않습니다. 특히 이른 봄에는. 또한 옆에 다른 풀과 가지가 끼어들어도 웬만하면 그대로 찍습니다. 그동안 관심 밖에 두고 낮춰 보며 함부로 하고 차별한 것 반성하고 뉘우칩니다. 너그러이 용서하고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지금 그대를 사랑하는 마음만큼 ‘나도 그래’라고.
-2017년 8월 모일, 풀지기 올림
말도 느낌도 통하지 않는 풀꽃에게 편지를 보내다니? 이런 편지를 쓰게 될 줄은 생각조차 못했습니다. 우연히 에서 ‘부치지 못한 편지’를 써보라 하기에 생뚱맞게 용기를 냈습니다.
직장생활을 그만두고 무료한 일상을 메꾸기 위해 풀꽃에 관심을 두고 탐사활동을 시작한 지 10년이 되어갑니다. 지금은 생활 중 대부분의 관심 사항이 풀꽃에 있어 카메라 들고 산과 들에 나가 풀꽃을 찾고 때로는 멀리 여행도 갑니다.
풀꽃 탐사활동을 하기 이전에는 풀과 나무를 주변에 그저 널브러져 있는, 아무런 느낌도 감각도 없는 사물로만 여겼습니다. 눈에 띄게 예쁘고 화려한 꽃을 피우면 화초, 아닌 것은 모두 잡초로만 여겼습니다. 이름을 안다는 것이 고작해야 농작물과 채소 일부 그리고 과일 몇 종류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뜻하지 않게 직장생활을 생각보다 일찍 그만두고 나서 무료한 일상과 나름 정신적 안정을 찾기 위해 산·들·꽃에 관심을 두게 되었습니다. 언제든지 찾아가면 만날 수 있고 미소 짓는, 앙증맞게 고운 꽃이 마치 나를 반기는 듯 여겨졌습니다. 그러는 사이 차차 풀꽃 이름을 하나둘 알아가면서 비로소 풀꽃과 새로운 관계가 이루어져갔습니다.
아무리 좋고 귀한 것도 내가 관심이 없으면, 즉 내가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나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는 허상입니다. 내가 관심을 갖고 내용을 알아 의미를 두고 보았을 때, 비로소 나와 새로운 관계가 설정되고 서로 의미 있는 상대가 됩니다.
이 세상에 이름 없는 풀꽃은 없습니다. ‘이름 없는 풀’이라며 잡초를 천덕꾸러기 취급하지만, ‘잡초’라는 이름의 풀은 없습니다. 다만, 사람들이 그 이름을 모를 뿐입니다. 풀꽃은 좋든 싫든 선택의 기회도 없이 주어진 환경에서 싹을 틔워야 합니다. 선택 없이 태어난 우리 사람과도 같습니다. 오직 살아야 한다는 대명제를 안고 끈질기게 참고 견디며 살아갑니다. 닥쳐오는 시련 모두를 벌거벗은 몸뚱이 하나로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역경에 아랑곳하지 않고 꽃피워 결실을 보아야 하는 생체로서의 신비로움과 경이로움을 이제야 하나둘 느끼기 시작합니다.
그동안 말 못 하고 느낌 없고 귀하지 않다고 함부로 여기고 다루어왔습니다. 알고 보면 이 세상의 생명체 중 가장 막내가 인간이라 합니다. 그런데도 인간은 마치 지구 상 모든 생명체 가운데 으뜸이고 주인인 양 착각하고 있습니다. 지구에 태어난 것으로 치자면 현생 인류는 식물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현생 인류의 탄생은 4만 년 남짓입니다. 고생대 석탄기의 양치식물은 차치하고 꽃이 있고 생식기관으로서 씨방이 있는 속씨식물이 탄생한 것만 해도 약 1억4000만 년 전인 중생대입니다. 감히 대비할 수 없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 모두를 좋아하고 사랑합니다. 멀리 해외에 나가서도 우리 땅에 자라는 같은 풀꽃을 만나면 고향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갑고 다정스럽습니다. 외국에 있으면서도 고향 땅인 것처럼 푸근한 마음이 생깁니다. ‘오! 너도 여기에 있네.’ ‘천지만물이 나와 함께 존재하고 한 형제[天地與我 竝存, 萬物與我 爲一]’라는 장자(莊子)의 말이 더욱 실감 납니다.
이제까지의 저의 잘못을 반성하고 뉘우치며 한 말씀 올립니다.
“풀꽃, 그대! 사랑합니다. 그대도 한 말씀만 하소서 ‘나도 그래’라고.”
>>박대문 야생화 사진작가
환경부에서 공직생활을 하는 동안 과장, 국장, 청와대 환경비서관을 역임했다. 우리 꽃 자생지 탐사와 사진 촬영을 취미로 삼고 있다. 저서로 시집 . , 가 있다.
쑥은 들국화에 속한 여러해살이풀로서 ‘모든 풀의 왕초’란 닉네임을 달고 있다. 히로시마 원폭 때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식물이지만 좀처럼 자신을 앞세우지도 않고 빈터나 길가 논두렁 밭두렁 산속 아무데서나 낮은 키로 ‘쑥쑥’ 자라나 사람에게 제 몸을 보시한다. ‘쑥’이라는 이름의 유래도 여기에서 비롯되지 않았나 싶다. 쑥도 시간이 흐르면서 여러 종으로 진화해 산쑥, 들쑥, 덤불쑥, 참쑥, 물쑥 등 40여종이 한반도에 분포해 있다고 한다. 특히 강화 개똥쑥은 암 치료에 효과가 있다하여 몸값도 제법이다. 암투병하다 세상을 떠난 내 남편도 치료 중 그 쑥을 달여 마시곤했다.
쑥은 한국전쟁 전후 구황식품 중 으뜸이었다. 혹독한 겨울 추위가 풀리기 시작하면 겨우내 웅크렸던 뿌리들이 솜털 보송보송한 쑥잎을 쑥쑥 밀어올린다. 아득한 보릿고개를 넘어야할 때 기다렸다는 듯 언니 엄마들은 논두렁 밭두렁에 파릇파릇 자라난 쑥을 뜯어다가 보릿겨, 밀기울 등과 반죽하여 아무렇게나 반데기를 만들어 쪄서 간식이 아닌 주식으로 연명하던 기억이 내 해마에 ‘보릿고개’란 압축 파일로 저장되어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떡이 쑥개떡이다. 쑥개떡도 못 먹어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소문이 보릿고개를 유령처럼 떠돌기도 해서 그 유령을 만날까봐 안채와 떨어져 있던 화장실에 갈 때도 밤이면 어른들을 동행하곤 했다. 불과 몇 십 년 전의 일이지만 지금처럼 먹거리가 풍성한 세상에서 자란 젊은이들은 마치 단군설화 속 곰이 쑥과 마늘을 먹고 사람이 되어 환웅과 결혼하고 단군을 낳았다는 신화쯤으로 여길듯하다.
시간이 흘러 쑥개떡이 각광 받는 웰빙 식품이 되었다. 맵쌀가루와 찹쌀가루를 섞은 데다 데쳐서 말려 빻은 쑥을 섞고 달작지근하게 익반죽해서 강낭콩을 켜켜이 박아 쪄 놓으면 쫄깃하고 향이 좋아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고 쑥의 따뜻한 성분과 풍부한 섬유질 때문에 배탈이 나지 않는다. 특히 부인과 병인 만성 허리 어깨 결림, 냉, 대하증에 특효가 있다고 한다. 쑥떡을 좋아하는 나를 위해 구정무렵이면 올케언니가 볶은 콩가루와 찹쌀로 만든 쑥떡을 한 넙데기씩 보내 주시곤했다. 출출할 때면 한번 먹을 만큼 렌지에 돌려서 콩가루 묻혀 먹는 맛이란 일품이었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올케언니가 연로하셔서 그러한 노동이 불가능한 탓에 그 맛을 볼 수가 없게 되었다.
늘 약한 허리 핑계로 엎드린 일을 회피하던 내가 2년 전 여름 한철 보양식을 마련하겠다는 기대감으로 지인들을 따라 쑥을 캐러 갔다. 시누이가 주말에 내려가 농사를 짓는 강화도 외포리 뚝방에 해풍 먹고 자란 쑥들이 순한 물결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농약이 닿지 않아 쑥 체취의 장소로서 이만한 곳이 없으리라. 북녘땅이 가까운탓에 들려오는 총소리를 삭히느라 그랬는지 고개가 비틀어진 놈도 있어 바로 세워 놓고, 뚝방의 해면 반대편으로 자리를 옮겨 “칠년 묵은 병에서 삼년 묵은 쑥을 구한다”는 맹자의 말을 되새김질하면서 경사를 오르락내리락 쑥을 뜯었다. 지인들이 한 웅큼씩 보태주기도 해서 배낭의 배가 불룩해졌다. 어릴 적 동네 언니들 따라 쑥을 캐 본 후로 처음인지라 자뭇 설레는 마음으로 직접 쑥개떡을 만들어보기로 했다. 쌀을 불리고 쑥을 씻었다. 아랫집 아주머니의 조언을 받아 생 쑥과 불린 쌀을 방앗간에 가지고 갔더니 쑥 빠는 삯이 두 배가 들어갔다. 생 쑥을 빠러 온 사람은 처음이라며 방앗간 주인장으로부터 핀잔을 배가 터지도록 먹었다. 생 쑥은 쓴맛이 그대로 남아있어 쑥개떡을 해도 써서 먹기가 거북하단다. 생 쑥만이 떡을 파랗게 할 것이란 고정관념이 나의 첫 작품을 망치게 한 셈이 되고 말았다. 그래도 쌀가루와 빻은 생 쑥을 익반죽해서 손바닥만 하게 넙데기를 만들어 냉동실에 차곡차곡 쟁여 놓으니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한 개씩 찜기에 쪄서 먹은 나만의 점심 먹거리, 내 60조의 세포막을 뚫고 쑥쑥 일어서는 쌉쌀한 향기에 당시 개보다 더 잔인하게 한반도를 짓밟던 메르스도 비켜갔다.
*송시월 시인은…
1945년 전남 고흥출생. 1997년 월간 등단.
시집으로 (2015년 문광부 추천 세종 우수도서 선정)이 있다.
제 1회 푸른시학상 수상 계간 편집위원.
주책이란 말은 사전적 용어로 ‘일정하게 자리 잡힌 주장이나 판단력’을 의미한다. 나이가 들어 주책이 없다는 말은 이러한 냉철한 판단력이 없다는 뜻이다. “노인네가 주책없이! 남 보는 앞에서 뽀뽀한다”는 말은 남의 이목도 있는데 젊은 애들 앞에서 주책을 떠는 것이며 줏대 없이 되는 대로 하는 짓이라는 뜻도 된다. 물론 아낙네들의 애교 섞인 핀잔은 내심 싫지 않다는 정겨움이 담겨 있다.
조금은 허풍스러운 면도 있어야 사는 재미가 있다. 자로 잰 듯 반듯하게 사는 삶은 무미건조하기 십상이다. 특히 부부 사이에서는 가끔 주책스런 장난기가 발동해야 한다. 어렸을 적 시골에서 살았을 때 이웃집 중년 부부가 장난치는 모습은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다. 아내가 마당 *수돗가에서 빨래를 하는데 남편이 지나가다 돌담 너머로 조그만 돌을 물통에 던져 물을 튀게 하고는 담장 밑으로 몸을 쏙! 숨기고 아내를 두리번거리게 만드는 모습이 무척이나 재미있었다.
그런가 하면 영화 *의 한 장면은 노년의 삶을 풍요롭게 해준다. 눈을 *한주먹 뭉쳐 할머니에게 던지며 눈싸움을 하고 할머니는 그 복수를 반드시 할 거라며 비장한 각오를 한다. 그리고 할아버지 밥 잡수실 때 쌈에 소금이나 매운 고춧가루를 넣어 매운맛으로 복수를 한다. 또 익은 감자를 드시라고 먹여주며 *숫깜뗑이를 얼굴에 묻혀 복수하는 할머니의 모습이 저절로 미소를 짓게 만든다. 부부는 가끔 이렇게 주책없이 살아야 자녀들이 나가버린 빈 둥지 같은 집에서 외롭지 않게 애틋한 정을 나눌 수 있다.
필자의 부부관계에서도 주책없음은 큰 위력을 발휘한다. 거실에서 부엌으로 오갈 때 아내의 엉덩이를 툭 치거나 쓰다듬어주면 밥 짓다 말고 기겁을 하며 ‘주책없다’며 핀잔을 준다. 그러면서도 싫지 않은 표정이다. 부부간의 애정은 값비싼 선물을 사줄 때만 생기는 것이 아니다. 작은 스킨십을 하면서도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다. 가끔은 자식들 앞에서 “오늘 된장찌개가 최고의 맛”이라며 기습 뽀뽀를 감행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생일에는 시집와줘서 고맙고 수고했다고 식구들이 보는 앞에서 등에 없고 거실을 한 바퀴 도는 것도 큰 선물이 될 것이다. 주책없음은 조금은 갑작스럽고 상식을 벗어난 행동이어야 제맛이 난다. 예측되는 행동이 아니라 전혀 예측되지 못한 것이어야 한다. 아내는 다리를 바둥거리며 내려놓으라며 난리를 필 것이다. 그러나 아내의 얼굴에 도는 화색을 감출 수 없다. 아직도 나를 이렇게 사랑하고 있구나 하며 감사해할 것이다.
생각해보면 쥐꼬리만 한 월급으로 시작한 신혼 초는 가난한 살림이었지만 그래도 재미있게 산 비결은 이런 작은 주책들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앞으로도 필자는 이 사랑의 묘약을 활용하는 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부부의 사랑의 묘약을 살짝 공개한다.
주책 사용법: 너무 과하지 않게, 예기치 못한 상황 속에서, 기습적으로 아내가 다리를 바둥거리게 하라!
지금의 강북 삼성병원 입구쯤에서 내 중년의 한 시절을 보낸 탓에 정동은 길 하나 사이의 낯익은 동네다. 하지만 살기에 바빠 막상 정동을 문화적 역사적으로 접근할 기회는 거의 없었다.
특히 이화여고와는 인연이 깊다. 이화여고를 다닌 큰 딸이 전체 1등을 해서 조회시간에 상을 받으러 단상으로 나가야 했다. 그런데 운동화가 구멍이 나서 친구 신발과 바꿔 신고 나갔다는 에피소드가 남아있는 곳이다. 그 시절 남편의 사업이 잘못되는 바람에 과외는 커녕 워크맨 하나도 못 사주다가 고 3이 되어서야 청계천에서 중고를 사 주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 와중에서도 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건전하게 자라 주었다. 어느덧 자라 중년이 된 지금도 엄마의 마음을 잘 헤아리고 보살피는 착한 딸이어서 고마울 뿐이다.
정동 맞은편 신문로는 80-90 년대 군부 독재에 항거하는 학생 시위대로 자주 교통이 통제되곤 했다. 큰 아이는 늘 교정을 울리는 시위행렬의 “군부독재 물러가라”는 외침이 익숙해서인지 사회학과에 입학했고 1학년부터 시위에 참여한 일이 비일 비재했다. 때로는 경찰의 곤봉을 피해 같은 과 동료 선배들이 우르르 우리 집으로 숨어드는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제 오랜 세월이 흘렀고 그 아이가 벌써 중년의 징검다리를 건너가고 있는 오늘, 나는 다른 지역에 살지만 때마침 유관순 기념관 탐방 기회를 얻어 이화의 교정에 첫발을 딛는다. 물오른 바람이 마중 나와 초여름의 풋풋함을 한 아름 안겨준 유월의 오후였다. 유관순 기념관에 들어서는 순간, 복잡하게 얽인 생각의 밑바닥에서 정체가 불분명한 울렁거림이 고개를 들었다. 사진 속 16세의 어린 유관순이 왜 그렇게 아픈 역사를 잊고 살았냐고 질책 한 것 같아 발걸음이 주춤, 온 몸에 열이 오름을 느끼기도 했다.
삼일 운동의 시위대가 고종의 시신이 있는 덕수궁 주변으로 몰려가며 부르는 대한 독립 만세 소리가 교정을 울릴 때 고등과 1학년이었던 유관순은 여섯 명으로 조직한 시위결사대와 함께 담장을 넘기로 했단다. 교장 프라이는 자신을 밟고 가라며 애원하듯 말렸지만 그들의 의지는 너무 확고해서 기어이 담을 넘고 말았다. 그 후부터 3.1운동 진원지의 핵이 되어 고종의 장례식을 마치고 대거 참여한 시위대에 합류했다가 자신의 온 몸을 조국에 바치겠다고 결심한다. 사촌 언니 유예도와 같이 독립선언서를 숨기고 고향 아우내(병천)로 내려간다. 유관순의 부친 유중권은 일찍 감리교 신자가 되어 향리에 홍호학교를 세우고 민족 교육과 계몽운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였다. 그런 부모 밑에서 자란 유관순은 독립선언문을 낭독하며 아버지와 같이 시위를 주도하다가 헌병들의 총검에 아버지 어머니를 한꺼번에 잃고 오빠도 투옥되었다. 그리고 유관순은 체포되어 공주감옥에서 서대문 형무소로 이감되어서도 독립만세를 부르다가 감옥에서 순국한다. 이화학당의 담장을 넘은 후 토막 난 시신으로 프라이 교장과 월터 선생의 품으로 돌아온 것이다. 오늘 우리가 어느 제국의 식민지로 살고 있다면 나도 담을 넘어 역사의 현장으로 뛰어들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자신에게 해본다. 실은 지금도 문화식민지의 그물을 보이지 않게 펴 놓고 걷어 올릴 기회만을 기다리는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서 어떻게 나라를 지킬 것인가를 국민 모두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하는 시점이 아닌가 싶다.
이화여고 교정의 늙은 은행나무 아래에서 유관순이 빨래하던 빨래터가 남아 있었다. 어린 그녀가 식민지란 오욕을 두드려 빨아 헹구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아래와 같은 박두진의 시를 음미해 본다.
유관순누나로 하여 처음 나는
3월 하늘에 뜨거운 피 무늬가 어려 있음을 알았다
우리들의 대지에 뜨거운 살과 피가 젖어 있음을 알았다.
우리들의 조국은 우리들의 조국
우리들의 겨레는 우리들의 겨레
우리들의 자유는 우리들의 자유이어야 함을 알았다.
아, 만세, 만세, 만세, 만세, 유관순 누나로 하여 처음 나는
우리들의 가슴 깊이 피터져 솟아나는 ,
우리들의 억눌림, 우리들의 비겁을
피로써 뚫고 일어서는
절규하는 깃발의 뜨거운 몸짖을 알았다.
유관순 누나는 저 오를레앙 잔다르크의 살아서의 영예,
죽어서의 신비도 곁들이지 않는 ,
순수하고 다정한 우리들의 누나,
흰 옷 입은 소녀의 불멸의 순수,
아, 그 생명혼의 고갱이의 아름다운 불길의,
영웅도 신도 공주도 아니었던,
그대로의 우리 마음, 그대로의 우리 핏줄,
일체의 불의와 일체의 악을 치는,
민족애의 순수 절정, 조국애의 꽃넋이다.
아,유관순 누나, 누나, 누나, 누나,
언제나 3월이면 언제나 만세 때면,
잦아 있는 우리 피에 용솟음을 일으키는
유 관순 우리 누나, 보고 싶은 우리 누나,
그 뜨거운 불의 마음 내 마음에 받고 싶고,
내 뜨거운 맘 그 맘 속에 주고 싶은
유관순 누나로 하여 우리는 처음
저 아득한 3월의 고운 하늘
푸름 속에 펄럭이는 피깃발의 펄럭임을 알았다.
-박두진의 “3월 1일 하늘” 전문
*의사와 열사의 구분
총이나 칼등 무기를 가지고 싸웠던 안중근 같은 분을 의사라 하고
맨손으로 싸웠던 유관순을 열사라 한다.
시인 송시월은
전남 고흥 출생, 1997년 월간 으로 등단, 계간 편집 위원
저서로는 시집 이 있다.
‘애란이도 이젠 시집가야지’
그날 3학년 교실에서 목에 힘을 주시며 필자에게 이 말을 하신 분은 열일곱 살인 필자보다 한 살 더 많은 조봉환 선생님이었다. 순간 나는 속이 상해서 입술을 깨물고 눈물을 삼켰다. 필자의 자존심을 송두리째 짓밟아버린 선생님의 잔인함이 미워서였다.
훤칠한 키, 이목구비가 뚜렷한 잘생긴 용모, 목소리까지 좋았던 조 선생님. 싱긋 웃으며 그냥 지나가는 얘기로 농담한 것인 줄 뻔히 알면서도 필자가 상처를 받은 것은 선생님에 대한 필자의 심상치 않은 감정 때문이었다.
어느 날 교회에서 예배 도중 내가 소리 죽여 울고 있었더니 옆에 계신 아줌마가 조심조심 물으셨다.
“얘 너 왜 우니?”
대답을 하지 않자 또 다른 아줌마가 말했다.
“아마 설교 말씀에 감동해서겠지 뭐”
천만에 말씀. 그날 내가 운 것은 동생 연희 때문이었다.
목사님 설교 중에 동생은 작은 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언니, 내가 언니 편지에서 우표를 떼었어, 우표 수집하려고.”
“말도 안 돼. 내 편지에 손을 대다니!”
선생님들의 편지를 보물처럼 아끼던 필자였다. 더군다나 조 선생님의 편지를? 속이 상해서 눈물이 났던 것이다.
조 선생님은 분명히 필자의 가슴 한 자락을 차지하고 계셨다. 여섯 살에 초등학교에 입학하신 조 선생님은 그해 어느 날 어머니께 매를 맞았는데 “잘못했다고 한 번만 빌어라. 그러면 때리지 않겠다”고 애원하는 어머니께 끝까지 굴복하지 않고 결국은 매를 맞다 견디지 못하고 기절까지 하셨다는, 필자 못지않은 고집쟁이 선생님이었다.
조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아리랑’의 가사를 이렇게 풀이해주셨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 리도 못 가서 발병이 나서 나한테 다시 돌아와라’가 아니라 나를 버리고 가는 놈은 십 리도 못 가서 죽어버려라’라고 해야 한다.”
내게서 떠나는 사람에게는 더 이상의 미련을 두지 말고 과감하게 떠나보내야 한다는 의미의 말씀이었다. 처음에는 그 의미가 여리고 정 많은 한국인의 정서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말이라서 충격을 금치 못했지만 필자도 모르는 사이 그 말씀이 점점 와 닿았다.
훗날 조 선생님은 우리들이 어려운 환경을 이겨내도록 그렇게 강인한 의지 내지는 투지를 의도적으로 심어주려고 그러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조 선생님의 의도대로 필자는 강인함을 잘 키워나갔던 것 같다.
국어를 가르쳐주셨던 조 선생님이 김영랑 시인의 ‘모란이 피기까지는’, ‘돌담에 속삭이는 햇살’ 등을 낭송하실 때면 그 멋진 모습에 푹 빠져들곤 했다. 금상첨화라고 조 선생님은 잘생긴 용모에 목소리도 일류 성우 못지않았다.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킹카였다.
필자는 혼자서 가슴을 태웠다. 그런데 어쩌랴? 선생님은 서울대학교 학생이었고 필자는 정규 중학교도 못 가서 야학에서 가르침을 받고 있는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소녀였으니…. 필자가 만들어낸 동화에서는 필자가 공주였으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그 사실이 필자를 참담하게 만들었다.
내세울 것이 하나도 없었던 필자는 그때부터 아성을 굳게 쌓기 시작했다. 걸핏하면 자존심을 부르짖으며 상처받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선생님이 아무리 좋아도 절대 내색하지 않았다. 야학 선생님들의 제자 사랑이 각별한 만큼 우리들 가슴속에 피어난 선생님에 대한 존경과 사모의 정도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필자는 그럴수록 더 비참해지는 자신을 느껴야 했다. 이상은 높았으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던, 불운했던 10대에 야학 선생님들과의 신분상 장벽은 필자의 삶에서 결정적인 아픔이었고 상처까지 됐던 것이다.
1990년대 초반 어느 날, 근무하고 있던 평택여고 교무실에 학생들이 구름떼같이 몰려왔다. 군복무를 마치고 갓 부임한 총각 선생님의 얼굴을 보려고 몰려든 것이다. 별로 잘생기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얼굴이 울퉁불퉁 민주적으로 생겼거나 키 작은 분이라도 총각 선생님이라면 무조건 껌뻑 죽는 여학생들을 보면서 필자는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만약 필자의 야학 선생님들처럼 맑은 눈망울, 해맑은 표정의 선생님이 오신다면 과연 어떤 반응이 일어날까. 그 상상만으로도 혼자 즐거울 때가 있다. 아마도 몇 명쯤은 심한 몸살을 앓게 될 것이다.
속없이 외모만 잘난 남자처럼 경멸스러운 대상이 또 어디 있을까? 개성도 없고 평범한 용모의 필자는 순수하고 인품이 있으면서도 잘생긴 남자들을 좋아했는데 B선생님과 조 선생님은 야학 선생님들 중에서도 용모가 영화배우급으로 수려했으며 키도 훤칠했던 멋진 분들이었다. 또한 순수하면서도 의젓한 인품이 단연 돋보였다.
당시에는 신분상의 갭을 느끼며 가슴 아파했는데 요즘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게 아니었다. 필자가 별 볼일 없는 자신을 커버해줄 완벽에 가까운 사람들만 가슴속에 넣어두기를 고집했던 것이다. 현실 감각도 없었던 필자는 오직 그런 사람들만 동경의 대상으로 모셔놓고 혼자 아파하고 상처받은 후 슬픔에 빠져 있기를 즐겼던 것이다. 그렇게 흠모하는 사람만 바라보고 있었기에 다른 사람이 필자에게 품고 있는 고운 감정에는 아예 장님이 되어 깨닫지 못하거나 안다고 해도 터무니없이 오만방자하게 굴었다. 얼음처럼 차가운 반응으로 상대방에게 상처까지 주곤 했다. 자신의 감정이 소중하면 다른 사람의 감정 또한 소중한 것을 몰랐던 시절이다. 정신적 미숙아였던 것이다.
1993년 1월, 여의도에 있는 주택은행 본점을 찾았다. 조 선생님을 뵙기 위해서였다. 야학 시절에는 몸이 마르신 편이었는데 적당히 살이 붙어 보기 좋은 모습이었다. 25년 만에 뵙는 선생님이었는데 선생님도 필자를 잊지 않고 기억해주셨다. 단 1년 동안 우리를 가르치셨는데 그 순수하고 열정적인 시절을 오늘날까지 잊지 않고 선생님 가슴속에 꼭 간직해두고 계셨던 것이다.
선생님은 필자가 10대에 지독한 가난 때문에 맺힌 한이 너무 많다고 하니까 “가난한 것이 그렇게 불편한 거였냐?’ 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말씀하셨다. 당신도 가난했지만 크게 불편한 것을 몰랐다며, 당시 야학 선생님들도 대부분 어려운 처지였기에 우리들의 아픔을 잘 이해할 수 있었고 그러기에 조금이라도 더 많이 가르쳐주려고 노력했다고 말씀하셨다.
조 선생님은 당시의 야학활동이 ‘베풀고, 나누고, 사회에 동참한다’는 의미였다고 말씀하셨다. 선생님의 홀어머니도 삯바느질을 하시며 사셨다고 했다. 돈이 없어서 중․고교 때의 교복도 늘 남이 입던 것을 얻어 입었기 때문에 옷이 길면 긴 대로 짧으면 짧은 대로 입을 수밖에 없었다고 말씀하셨다. 심지어 교복 모자도 쓰레기통을 뒤져서 나오면 먼지를 ‘툭툭’ 털어 쓰고 다녔다고 한다.이렇게 오랜만에 뵙기 전까지는 선생님 댁이 어느 정도 여유 있는 집안인 줄 알았다가 새삼 당신도 그렇게 어려운 처지였음에 놀랐고 그 상황에서도 우리들의 선생님이 되어주셨다는 데 대해 깊이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다.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어려움과 고통은 그 사람을 단단하게 만들어준다. 고통을 많이 겪으신 선생님의 원숙함과 철학의 깊이에 필자의 마음은 고개를 숙였다. 조 선생님은 졸업식 날 집까지 데려다준 우리들이 다시 야학에 와서 선생님들을 붙잡고 운 일을 지금도 잊지 못하고 계셨다.
슬픔마저도 찬란하게 기억되는 그 시절!
서로가 애틋했던 시절의 소중하신 우리들의 선생님이시여.
100세 시대의 행복경영 비결은 무엇일까. 단거리 경주가 아닌 마라톤 인생을 살아낼 새로운 설계와 순서는 어떻게 세워야 할까. 유필화(63) 성균관대학교 경영전문대학원 교수는 마케팅 분야에서 독보적인 업적을 쌓아온 경영학계의 구루다. 뿐만 아니라 를 비롯해 , 그리고 최근작 에 이르기까지 인문학 고전을 경영학적 관점에서 재해석하는 작업을 시도해왔다. ‘100세 시대, 고전에서 배우는 인생 경영 지혜’를 듣고 싶은 생각에 인터뷰를 청했다.
대방동에 위치한 유 교수 서재의 섬돌엔 검정고무신 두 켤레가 정겹게 놓여 있었다. 유 교수는 부인(이기향 한성대 의류학과 교수)이 아침에 인터뷰 복장 코디는 물론 간식을 손수 준비해놓고 갔다며 미소를 지었다. 신혼 때부터 지금껏 수십 년간 변함없이 싸준 부인의 도시락 내조력을 들려주는 그의 얼굴에 일순 사랑과 감사가 환하게 번졌다.
인생은 60부터란 말도 있는데요. 교수님께선 예순을 기점으로 달라진 것이 있는지요.
“나눔과 베풂의 봉사활동이 내 삶의 비중에서 늘어났습니다. 60이 넘고부터는 경력과 일에 관련되지 않더라도 의미 있는 일에 에너지, 시간을 쏟아 붓고 있습니다. 이게 사실은 두 여인의 영향 덕분입니다. 어머님도 생전에 ‘늘 베풀라’고 말씀하셨는데요. 아내도 같은 말을 하는 겁니다. 덕분에 전혀 만나볼 수 없는 사람을 알게 되고, 접하지 않았던 세계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기업과 경영 문제에만 쏟던 관심을 기업 바깥의 세계로 돌리게 돼 좀 더 크고 객관적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여러 계층의 다양한 사람을 알게 돼 세상을 보는 균형감각이 키워지는 부수효과도 있더군요.”
사회봉사가 행복을 증진시킨다는 것은 개인의 단순한 느낌이나 추정이 아니라 이론적으로 근거가 있다. 코넬대학의 행복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남을 돕는 사람은 자긍심을 고양시키고 자신의 삶을 통제한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뿐만 아니라 ‘자기중심적인 사람과 이타적인 사람 간에는 정신이 노쇠해가는 속도에 큰 차이가 있다’고 한다. 봉사활동은 더욱 건강한 정신자세를 지니게 하고, 이는 다시 건강과 삶의 만족을 증진시키는 ‘행복의 선순환’을 일으킨다는 게 연구의 골자다. 봉사는 이타적 행위일 뿐 아니라 이기적 행동이기도 하다.
인생 2막에선 성공보다는 행복이란 단어가 한결 실감 있게 다가온다고 다들 말씀하시더군요. 교수님께서는 행복을 어떻게 정의하시는지요.
“‘행복이란 마음이 편한 것, 마음의 평정과 평온을 찾는 것’이라고 봅니다. 사회적으로 성공했다고 해서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사회에서 부러워하는 기업인을 만나보면 ‘성공하면 뭐해’ 하며 자조하는 경우도 많고요. 어쩌면 남이 부러워하는 정상에 오르는 것은 울 일이 많다는 것과 동의어라고나 할까요. ‘살아 있는 게 축복이고 숨 쉴 수 있는 게 기적’이라는 마음을 갖고, 일상을 감사히 받아들일 줄 아는 삶의 태도를 갖는 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조건의 충족이 아니라 그 수행 과정에 행복이 존재하지요.”
매일 참선과 명상을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서재에 명상실까지 두고 있으시지요.
“마음의 평화를 위한 제 수행 방법은 참선과 300배입니다. 1997년부터 해왔으니, 20년 가까이 해온 셈이네요. 가끔 40~50분씩 참선하고 300번 절하고 나면 마음과 몸이 깨끗해집니다. 현재에 몰입하고 집중함으로써 잡념을 없애버리는 것이지요. 명상을 하면 집중력, 몰입력이 높아져요. 건강한 긴장력이 생산된다고나 할까요. 삶을 객관적으로 제3자화, 관찰하는 것을 습관으로 하면 자기에 대한 지독한 애착과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어요. 줏대 없이 이리저리 흔들리지도 않고요. 참선을 하다 보면 나를 특별한 존재로 보기보다는 수많은 중생 중 하나로 담담히 관찰할 수 있게 됩니다. 대부분의 불행과 불만은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대우받으려고 하는 집착 때문에 생기는 것 아니겠습니까.”
유 교수에게 이순(耳順)(공자가 60을 가리켜 한 말)의 나이에 문자 그대로 이순(생각하는 것이 원만하여 어떤 말을 들어도 흔들리지 않는 경지)에 이르렀는지 물어봤다. 그러자 가볍게 손사래를 치며 “칭찬, 아부의 말에 흔들리지 않을 자신은 있는데 비난, 싫은 말에는 그리 편하지 않고 신경이 쓰인다. 아직 이순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한 것 같다”고 고백한다.
교수님은 위기의 시대를 이기는 단 하나의 질문으로 ‘무엇을 버릴 것인가’를 꼽으신 바 있지요. 인생 경영에서 과감하게 버려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자만심입니다. ‘왕년에’와 ‘내가 누군데’가 자만심을 대변하는 대표적인 말입니다. 장군은 은퇴 후 모임에도 군복 입고 훈장 달고 나온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를 알아달라는 의미이지요. 그래봤자 남들은 ‘그래서(so what)?’예요. 버려야 채울 수 있고, 낮춰야 올라갈 수 있습니다.”
반대로 지켜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자신이 살아온 인생에 대한 자신감이요. 우리 세대는 산업혁명, 민주화를 달성한 세대 아닙니까. 열심히 살아온 것이지, 결코 헛산 것이 아니지요. 사회를 위해서, 나라를 위해서 살아왔다는 자부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봅니다. 젊은이에는 부족한 경륜이나 직관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갖고 당당하고 늠름하게 살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자만심과 자부심, 얼핏 보면 비슷해 보이지만 큰 차이가 있다. 유 교수는 “나만 옳고 다른 사람은 시원치 않다고 깔아뭉개는 마음이 자만심이라면, 스스로는 물론이고 상대도 인정하고 존중해주는 것은 자부심”이라고 구분했다. 자만심은 남을 무시하지만 자부심은 남을 포용하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하버드대학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받으시고, 독일 빌레펠트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서양통이신데 동양고전에 심취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으신지요.
“동양이 서양보다 한결 깊고 차원이 높다고 생각해서입니다. 병법서를 예로 들어볼까요. 과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의 을 비교해도 큰 차이가 있습니다. 서양에서 전쟁은 정치의 수단이고, 어떻게 이기느냐 거기에만 관심을 둡니다. 반면 동양은 이보다 한발 더 나아가, 무력으로 싸우지 않고 지략으로 이길 방법을 모색하지요. 서양에선 지략이나 책략보다 전략, 전술에 관심을 두고요. 서양의 병서가 단지 전략서인 데 반해 동양의 병서를 정치사상서의 반열에 올릴 수 있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시대를 이끈 리더들의 공통점은 뭘까요.
“공부력입니다. 위기의 순간에도 평생 학습의 끈을 놓지 않은 것입니다. 독서이든, 대화를 통해서든 늘 배우려는 자세를 가졌습니다. 살아 있는 한 멈추지 않고 끈질기게 배우려고 하는 학습력이 이들의 공통점입니다. 이는 동서양의 리더가 다르지 않습니다.”
리더들의 경쟁력이 공부력이란 사실은 인생 경영 지혜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린다 그래튼 런던비즈니스스쿨 교수는 저서 에서 공부력을 변형자산이라 명명해 강조한다. 변형자산이란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그래튼 교수는 “돈 등 유형자산 못지않게 필요한 무형자산이 공부력”이라며 “학교 졸업, 취업, 은퇴라는 3단계 벽이 무너진 오늘날, 100년 인생의 풍요로움은 평생공부에 달려 있다”고 단언한다. 요컨대 100세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선 미분의 인생관에서 적분의 인생관으로 발상전환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인생 전반기의 실력과 경력에 얹혀 후반전을 영위하던 시대는 끝났다. 이제는 전반전에 종언을 고하고 유연성과 개방성을 갖고 부단히 노력하라, 그렇게 공부력을 쌓는 것이 100세 시대의 생존비결이라는 진단과 처방이었다.
역사는 리더십의 스승이란 말을 강조하십니다. 역사적 인물 중 평생학습의 롤 모델로 누구를 꼽으시는지요.
“중국의 황제 당태종을 꼽고 싶습니다. 평생학습은 자기경영이 바탕인데요. 당태종은 죽는 날까지도 겸허한 태도를 잃지 않았지요. 그의 자기경영원칙은 경청, 자기경계, 자기절제, 긴장감 지속, 겸허한 태도 및 신중한 언어 구사 등 다섯 가지로 정리됩니다. 다만 집권 말년에 고구려 원정 등 쓸데없는 전쟁을 만류하는 신하들의 충언을 듣지 않은 것이 결정적 실수였지요. 아무리 뛰어난 군주라도 최초의 긴장감을 20년 이상 지속시키기는 어려웠다고나 할까요.”
당태종의 자기경영 비결 중 겸허한 태도 및 신중한 언어구사가 눈에 띄는군요. 이는 오늘날 기성세대와 신세대 간의 소통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나서고자 하는 마음, 참견하는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본인은 경륜이지만, 상대에겐 편견이고, 본인은 조언이지만 상대에겐 잔소리일 수 있습니다. 저는 어떤 말을 하기 전에 세 가지 기준을 돌아봅니다. 먼저 내 의도입니다. 상대를 위하는 것인가, 내 능력 자랑을 위해서인가 성찰해봅니다. 즉 그 사람이 필요로 하는 것인가 아니면 내 능력을 드러내 잘난 척하려고 하는 것인가를 검토해봅니다. 다른 사람이 다 보는 상황이어서 불편하거나 부끄럽게 느끼지는 않을지를 살핍니다. 끝으로 내가 말하는 방식이 그 사람이 받아들이기 쉬운 것인지를 고려해봅니다.”
그는 “나이는 말 그대로 숫자에 불과할 뿐인데 연장자라고 말을 다짜고짜 낮추며 하대하는 것은 삼가야 한다며 무엇을 말하는가보다 ‘어떻게 말하는가’가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 같은 겸양의 태도를 평생친구인 헤르만 지몬 교수를 통해 체득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헤르만 지몬 교수는 ‘유럽의 피터 드러커’로 불리는 독일의 경영학자다. “일국의 대통령에서부터 차 나르는 직원에 이르기까지 차별 없이 존중하고, 즐겁게 대화를 하는 지몬 교수에게서 학문적 열정뿐 아니라 리더의 소양까지 배울 수 있었다”는 술회다.
행복한 인생 2막을 위한 교수님의 ‘인생 경영 비법’을 듣고 싶습니다.
“가족, 친구, 자신과 잘 지내는 것이지요. 가족, 친구와 잘 지내려면 있는 모습 그대로를 수용하고 포용하는 게 필요해요. 또 나이 들수록 중요한 게 자신과 잘 지내는 것인데요. 저는 최고의 방법으로 독서를 꼽고 싶습니다. 인생에 독서만큼 좋은 것이 없습니다. 새로운 것을 접할 때의 호기심, 혼자서 경험할 수 없거나 알 수 없는 내용을 알게 됐을 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지요. 그러기 위해선 지치지 않는 호기심과 건강이 필수이지요.”
그에게는 독특한 독서 버릇이 있다. 책 앞날개에 독서를 시작한 날짜, 독서를 마친 날짜, 책 구입 장소 등을 메모해놓는 일이다. 나중에 이 메모를 보면 책 내용은 물론 책을 읽게 된 동기, 시공간의 배경에 대한 추억까지 함께 떠올라 즐겁다고 한다. 또 세 종류의 책을 동시다발로 읽어나가는 독서 습관도 있다.
인생의 버킷 리스트가 있으신지요.
“없습니다(답변의 속도는 30초도 안 될 정도로 빨랐다). 평소에 열심히 살고 아무 미련 없이 세상을 떠나고 싶은 게 제 신조라고나 할까요. 안 되면 그만이지요. 무엇인가를 바라고, 해야 된다고 마음먹는 순간 괴로워요. 그것을 해야 한다고 마음먹는 순간 족쇄가 되기 때문이죠. 저는 그저 주어진 삶을 열심히 살다 간 사람으로 기억되고 그렇게 자부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유 교수와 인터뷰를 하며 ‘인생 경영의 최고 비법은 공부력’이고 “궁극적 공부력은 마음 경영과 통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100세 인생 시대, 무한성장 시대인 오늘날이야말로 자기성찰력이 최고의 인생 덕목이자 경쟁력이 아닐까.
‘유필화’란 이름 석 자의 문패가 달린 파란 대문 집을 나와 돌아오는 길에 그의 시집 를 다시 펼쳐보았다. 그는 ‘나의 묘비명’이라는 시에서 ‘인간 유필화’를 이렇게 관조한다.
‘그는 입버릇처럼 자주 수행을 얘기했고 꾸준히 좌선도 하였지만, 생각만큼 행동이 안 따르는 자신의 한계를 늘 절감했다. 그는 물욕과 애욕에서 끝내 벗어나지 못했으며 자만심도 결코 떨쳐버리지 못했다. 하지만 장년 이후 눈에 띄게 화를 내는 일이 적어진 것에 대해서는 은근히 흐뭇해했다. (중략) 그는 자신의 숱한 약점, 단점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에 대해서는 자부심을 품고 있었다. 그것은 수시로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태도였다. 그의 이름은 유필화였다.’
>>김성회 CEO리더십연구소 소장
연세대학교 졸업. 경영학 박사.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겸임교수. 리더십 스토리텔러. 세계일보에서 CEO 인터뷰 전문기자로 활약했다. 세계경영연구원(IGM)과 삼성경제연구소 등에서 강의했다. 저서로는 , , 등이 있다.
가문 땅을 적시는 단비가 내린 다음날 아침, 서울시가 주최하고 국제 펜클럽 한국 본부가 주관하는 서울 詩 기행을 나섰다. 미세먼지도 말끔히 걷히고 길가의 초여름 나무들은 상큼하고 싱그러워 내 삼십대를 떠올리면서 정동골로 향했다.
정동은 근대사가 곳곳에 살아 쉼 쉬는 곳이요 덕수궁 돌담길은 내 데이트 코스이기도 했기에 감회가 새로웠다. 덕수궁의 동문인 대한 문을 들어서자 비운의 역사가 되살아나는 듯 마음이 침울했다. 고종이 야심차게 자주적으로 선포한 이란 국호와 란 년호의 맥이 끊긴 곳이기도 하다. 고종황제가 러시아 공사관으로 아관파천 했던 곳도 다시 돌아온 곳도 이 곳 경희궁(덕수궁)이었다. 1918년 경술국치로 완전히 국권을 일제에 빼앗겼으며물론 외교권도 빼앗겼다 얼마 후 이곳에서 강제 퇴임 당하는 치욕의 장소이기도 했다. 비운의 왕 고종의 승하는 3.1운동의 기폭제가 되기도 했다. 주인 잃은 석조전은 유일한 서양식 건축물인데 고종이 귀빈을 만나거나 외국 손님을 만날 때의 장소였다. 지금 봐도 품위 있고 멋이 있었다. 그 앞 느티나무 한 그루가 옛 주인을 생각한 듯 푸른 잎을 떨어뜨려 날리고 있었다.
배재학당 박물관에 가니 보수중이어서 들어가지 못했으나 부활절 아펜젤라의 기도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조선 백성을 얽어맨 결박을 끊고 자유와 빛을 주옵소서”라는 간절함을 담은, 그는 한양 정동에 한옥을 구입하여 4명의 학생으로 교육을 시작하고 고종으로부터 배재학당이란 학교명을 부여 받고 배재학당을 세웠다고 한다. 이곳에서 서재필과 이승만이 나왔고 시인 김소월이 나왔다. 그리고 후에 카프문학의 발상지가 되기도 했다. 카프문학의 주 멤버인 박세영 박팔양 나도향 이런 시인들이 배재학당 출신들이다. 박세영의 그 유명한 시 는 노래로도 불려져 북한에서는 성악가 조청미가 불렀다 한다.
1 임진강 맑은 물은 흘러흘러 내리고
뭇새들 자유로이 넘나들며 날건만
내 고향 남쪽 땅 가고파도 못가니
임진강 흐름아 원한 싣고 흐르냐
2,3 단원 중략
남극에서 왔나
북극에서 왔나
산상에도 상상봉
더 오를 수 없는 곳에 깃들인 제비.
너희야말로 자유의 화신 같구나,
너희 몸을 붙들자 누구냐
너희야말로 하늘이 네 것이요 대지가 네 것 같구나
녹두만한 눈알로 천하를 내려다보고,
주먹만한 네 몸으로 화살 같이 하늘을 꿰어
마술사의 째찍 같이 가로 세로 휘도는 산꼭대기 제비야
중략
나는 차라리 너희들 같이 나래라도 펴 보고 싶구나
생략
나더러 진달래꽃을 노래하라 하십니까
이 가난한 시인더러 그 적막하고도
가냘픈 꽃을
이른 봄 산골짜기에 소문도 없이 피었다가
하루 아침 비바람에 속절없이 떨어지는 꽃을
무슨 말로 노래하라 하십니까?
노래하기에는 너무도 슬픈 사실이외다
백일홍처럼 붉게붉게 피지도 못하는 꽃을
노래하느니 차라리 붙들고 울 것이외다
친구께서도 이미 그 꽃을 보셨으리라
이분들의 시를 읖조리다보니 역사의 숨결이 아프게 다가오는듯 하다.
시인 송시월은
전남 고흥 출생, 1997년 월간 으로 등단, 계간 책임 편집.
저서로는 시집 시문학사 이 있다.
아내는 집을 7일씩 비운 적이 거의 없다. 장남인 필자에게 시집와서 아이 둘을 키우고 시어머니를 모시는 와중에도 필자의 네 동생들 학업을 지원하느라 적잖은 고생을 했다. 그뿐인가? 명절 때는 처가가 멀리 있는데다 시집간 동생들이 시차를 두고 인사를 와서 친정에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누가 처갓집이 멀수록 좋다고 했는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요즘에는 아들 둘이 다 결혼해서 우리 부부는 젊어서 제대로 누리지 못한 인생 2막의 신혼생활을 즐기고 있다. 게다가 아내는 무려 15일간 친하게 지내던 동네 주부들과 동유럽 여행을 함께 다녀왔다. 아내에게 그런 여유가 생긴 건 좋았지만 아내의 빈자리는 너무 공허했다. 아내는 혼자 있을 필자를 위해 이런저런 것들을 미리 준비해놓고 떠나 숙식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그래도 아내가 없는 침실은 쓸쓸했다. 특히 밖에 나갔다가 돌아왔을 때 필자를 기다리는 아내 모습이 보이지 않아 허전했다. 마치 아내가 멀리 떠나간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필자가 직장생활을 할 때 1개월 이상 해외 장기출장도 했고, 1년 이상 파견근무도 했는데 그때 아내와 우리 가족들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비로소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바쁘게 직장생활을 하느라 아무 생각 없이 지냈는데 시니어의 삶을 사는 지금은 아내가 없는 보름간의 시간이 너무 공허하고 힘들었다.
아내가 없는 보름이라는 시간은 마치 먼 훗날 우리 내외 중 한 명이 저세상으로 갔을 때 어떻게 살아야 할지 예행연습을 하는 기분이 들었다. 아내의 빈 공간이 그렇게 크고 넓을 것이라고는 이전에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다. 아내가 돌아오면 그동안 고생한 세월에 대해 고맙다는 표현을 하고 그만큼 더 잘해줘야겠다고 다짐했다.
아내가 동유럽 여행 중에 보내주는 문자와 카톡으로 보내오는 사진은 마치 천국에서 보내주는 선물 같았다. 그렇게 반갑고 기쁠 수가 없었다. 필자도 과거에 회사 다닐 때 아내와 함께 다녀온 북한의 겨울 개골산 여행에서 찍은 사진을 카톡으로 보내주었다.
얼마나 다행인가? 아직 건강해서 하고 싶은 여행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필자가 직장 다닐 때 퇴직하면 함께 세계여행을 다니자고 아내에게 약속한 적이 있는데 아직 그것을 실행하지 못하고 있다. 아내는 그 약속을 믿고 기다리다 도저히 현실성이 없다고 보고 동네 친구들과 유럽행을 결심한 것이다.
아내가 친구들과 여행을 떠난 후 혼자서 생활하는 것이 힘들었지만 아내가 여행 중에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오히려 행복했다. 여행을 함께하지 못한 죄책감 혹은 약속을 이행하지 못한 미안함도 들었다. 앞으로 우리 부부는 이행해야 할 숙제가 남아있다. 아내가 친구들과 서유럽 여행을 할 기회가 있었는데 필자와 함께 간다고 빠진 적이 있기 때문에 서유럽 여행은 꼭 함께 해야 한다.
나이가 들다 보니 시간과 돈이 문제가 아니고 건강이 제일 걱정이다. 요즘 아내는 과거에 비해 몸이 많이 안 좋아졌다. 지난 2개월간 허리 통증으로 힘들어하더니 요즘은 다리가 아파 계속 병원과 한의원에 다니고 있다. 쉽게 낫을 것 같지 않아 걱정이다. 여행 약속은 건강이 허락할 때 빨리 이행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몸이 허락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 필자는 간곡한 화살기도를 하고 있다. 아내가 하루빨리 회복해 옛날처럼 산행도 하고 여행도 함께할 수 있도록 건강을 회복하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이번에 건강을 회복하면 더 나이 들기 전에 서유럽 여행 약속부터 지켜야 할 것 같다.
장수는 누릴 수 있으면 축복이고 누릴 수 없으면 재앙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장수하라는 말이 달갑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나이가 들수록 건강은 나빠지고 삶의 질은 하락한다고 생각하기에, 차라리 병들기 전에 깔끔하게 죽는 게 좋다고 솔직하게 고백하는 사람들도 있다. 국내 장수학계의 전문가인 박상철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뉴바이올로지 전공 석좌교수는 그런 생각이 틀렸다고 지적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백세를 만나봤을 그가 밝히는 얘기는 충격적인 사고의 전환을 요구했다. 고령화시대 백세청풍(百世淸風)의 기운으로 장수하는 사람들의 패러다임을 박 교수의 시각으로 들여다봤다.
박상철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뉴바이올로지 전공 석좌교수는 2000년에서 2009년 사이에 국내 최초로 백세인구를 조사한 결과를 발표해 장수에 대한 인식을 획기적으로 바꾼 인물이다. 그가 백세인구를 조사하게 된 이유는 매우 현실적이고 당연한 인식으로부터 시작됐다.
“사람이 늙으면 신체기능이 점점 떨어지는데 아주 늙었을 때는 어떤 모습일까, 그때가 되어도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고 독립적으로 사는 게 가능할까? 저는 그것이 가장 큰 의문이었습니다.”
‘100세 정도 되면 생활이 형편없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박 교수는 막상 조사를 하면서 강렬한 충격을 받았다.
만나자마자 힘자랑하던 백세인
“전남 곡성에서 만난 홍순갑 어르신은 당시 102세였는데 만나자마자 힘자랑을 했습니다. 마당에서 팔굽혀펴기 100개를 하고 계시더군요. 구례 산동면에 사는 101세 임종철 어르신은 뵈러 갔는데 지게를 메고 오시더군요. 그리고 손자가 100세 어르신을 모시는 게 아니라, 100세인이 쉰 살 손자를 데리고 살고 있었습니다. 더 기가 막힌 분은 쇼지 사부라 박사입니다. 102세 때, 저녁에 식사를 하다가 이 양반이 갑자기 한국말로 ‘한국에서 왔습니까?’ 하고 묻더군요. ‘예’라고 대답하니 ‘그럼 우리 한국어로 이야기합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65세 정년에 딱 퇴직하여 ‘한글을 배워야 한다’ 싶어 한글을 배웠고 80세에는 중국어를 배웠습니다, 100세 때 러시아어를 배웠고 104세 때 브라질에서 이분을 초청했는데 그때부터 포루투칼어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90대가 인터넷을 하는 마을
박 교수가 조사를 시작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만난 국내 장수인들은 대략 250여 명에 이른다. 백세인들의 사례를 보니 나이를 무색하게 만드는 새로운 깨달음이자 분명한 성공 좌표들이었다. 나이가 들어도 젊었을 때와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은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새로운 공동체마저 만들고 있었다.
“도쿠시마에 가미가쓰라는 마을이 있습니다. 이 마을에,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에 농업학교를 막 졸업한 젊은 사람이 농협의 직원으로 들어갑니다. 가서 보니 마을 주민이 2000명인데 65세 이상이 1000명이 넘었던 겁니다. 50% 이상의 인구가 노인인 초고령 마을이었습니다. 그런데 노인들은 자주 티격태격 싸웠고 일을 하지 않으면서 손쉽게 얻으려고만 했습니다. 모습이 보기 좋지 않아 ‘우리 일을 합시다’라고 말하며 사람들을 설득했습니다. ‘도쿠시마 산속 마을에 있는 재료들로 일본 요리 장식용 패키지를 만들자’는 게 그의 생각이었습니다.”
물론 동네 어른들이 단번에 그런 일을 하겠다고 했을 리가 없다. 겨우 3명이 시작했는데 이게 팔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물건이 팔리자 할머니들이 서로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주문을 뺏어가려고 했던 거죠. 젊은 사람이 70~80세 사람들의 싸움을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그래서 이 사람이 꾀를 냈죠. ‘주문은 인터넷으로 받아가시오’라고. 그러자 처음에는 어르신들이 무슨 인터넷이냐며 난리를 쳤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딱 버텼고, 2년이 지나니 70~90대 마을 주민들이 컴퓨터를 하게 됐어요. 세계 최고령 인터넷 마을이 돼버린 거죠. 그렇게 해서 마을이 발전한 지 30년 이상이 됐습니다. 다른 지역에서 흉내를 내려고 해도 게임이 되지 않습니다.”
‘고령화 사회가 되면 돈이 많이 든다.’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하며 걱정하고 있다. 박 교수는 반대로 생각한다. 저비용 장수사회를 만들면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이다. 장수인이 건강하게 일하며 생산 인력으로 생활할 수 있으면 되는 일이다. 앞서 소개된 고령화 마을의 기업화가 그 좋은 모델이란다. 그는 확신에 차서 말했다.
슈퍼 노인의 시대가 오고 있다
“‘나이가 들어도 잘 살 수 있는가?’ 있습니다. ‘나이가 들어도 당당할 수 있는가?’ 있습니다. 우리가 나이가 들면 생기는 많은 문제점들만을 생각했었는데 위에서 소개한 분들을 보면 안 그렇습니다. 그러니 패러다임을 바꿀 때가 온 거예요. ‘패러다임 시프트(어떤 한 시대 사람들의 견해나 사고를 근본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테두리로서의 이론적인 틀이나 체계)’가 일어나야 합니다.”
박 교수는 ‘지금 놀라운 시대가 오고 있다’고 강조했다. ‘슈퍼 노인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일본이나 유럽에는 100세인의 육상대회가 생겼습니다. 영국의 파우자 싱은 102세의 나이에 마라톤 풀코스를 8시간에 걸쳐 완주했습니다. 그는 단축 마라톤인 10km를 1시간 30분 만에 완주하기도 했습니다. 나가오카 미에코라는 100세 할머니는 수영 마라톤 1500m를 완주했습니다. 미국 돌푸드 사의 데이비드 머독 회장은 94세 때, 캘리포니아의 자기 목장에서 아침마다 한 시간씩 말을 타고 다녔습니다. 지금은 99세인데 아직 회사를 경영하고 있습니다.”
100세 장수가 보편화되고 있는 현실은 여러 통계 지표로도 증명되고 있다.
제대로 장수하며 일하는 사람들
빠른 속도로 인간의 평균수명이 늘어나고 있다. 평균 수명이란 것은 어디까지 갈 것이냐. 실제 사람들이 많이 죽는 나이인 최빈사망연령은 0세부터 100세까지 중에서 사람이 가장 많이 사망하는 연령의 개념으로 평균수명보다 더 길다. 최빈사망연령은 1950년부터 계속 늘어나고 있다. 우리나라 평균수명은 82세, 최빈사망연령은 90세가 넘었다. 이제 고령사회에서는 실제 사람들이 제일 많이 죽는 나이가 중요하다.
“최빈사망연령 표준편차를 보면 옛날에는 10년 정도였는데 지금은 6년입니다. 죽어가는 사람들 나이의 표준편차가 작아진다는 것은 죽는 사람들 나이의 차이가 없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장수의 보편화’가 이뤄지고 있는 겁니다. 옛날에는 특별한 사람들이 장수했는데 지금은 ‘somebody’가 아닌 ‘everybody’입니다.”
100세가 넘는 인구는 일본이 6만 명이지만 우리나라는 3000여 명이다. 미국은 7만 명, 중국은 5만 명 정도다.
단순히 나이를 먹는 게 아니라 건강한 노인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도 주목할 지표다.
“옛날에는 70이라는 나이는 죽어야 할 나이였죠, 지금 70이란 나이는 일을 못해서 안달 난 나이입니다, 저도 70입니다. 기가 막힌 이야기죠. 건강한 노인의 숫자가 압도적으로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죠.”
그는 건강한 노인에게 ‘dependent Life(의존적인 삶)’를 가지게 하지 말고 ‘Independent(독립된)’할 수 있게끔 제도적인 문제를 바꾸어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제대로 장수시켜버리자.’ 그러면 병원비가 안 듭니다. ‘장수인은 일을 시켜버리자.’ 그러면 복지비용도 안 듭니다. 이게 제 주장입니다.”
무조건 부지런하라
박 교수는 사람이 아무리 늙어도 변하지 않는 두 가지가 있다고 말한다.
“첫째는 그 사람의 목소리입니다. 20대 때 헤어진 애인이라도 딱 들으면 ‘아, 그녀’라고 생각이 납니다. 그다음에 변하지 않는 것은 ‘성격’, 즉 마음 씀씀이입니다.”
박 교수가 제시한 사례들 덕분에 백세가 되어도 인생은 젊을 때와 다를 바 없이 살 수 있다는 것은 잘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제는 구체적인 방법을 들어봐야 할 때다. 건강하게 장수하기 위한 기본적인 방법론을 묻자, 박 교수는 다산 정약용의 이야기를 꺼냈다.
“다산 선생이 18년간 유배생활을 하면서 동네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그때 만난 사람이 황상(黃裳, 1788~1870)이란 사람입니다. 이분이 글을 잘 쓰셨는데, 라는 문집에 다산 선생과의 일화가 나옵니다. 다산 선생이 이분에게 ‘공부하라’고 말해서, ‘내가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할 수 있습니까?’ 물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다산 선생이 한 말씀이 세 글자였습니다. ‘부지런해라, 부지런해라, 부지런해라.’ 사실 장수라는 것도 이 3근계(勤戒)가 그대로 적용됩니다. 장수도 그냥 이뤄지지 않습니다. 건강장수라는 것은 다 부지런해야 일어날 수 있습니다. 많은 장수인들에 대해 연구할 때, 무엇을 먹느냐, 어떻게 생활하느냐가 주로 거론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전 세계 공통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장수는 성실한 사람, 부지런한 사람의 것이었습니다.”
백세라도 사랑할 수 있는 세상을 꿈꿔라
부지런하라는 것은 무언가를 실행하라는 말과도 같다. 박 교수는 그 실행 부분을 간단하게 세 가지로 나눠서 설명했다.
“‘무엇이든 해버려라.’ 나이가 들었다고 핑계대지 마라. 못할 이유가 뭐 있냐. 그리고 나이가 들면 ‘받으려고 하지 마라, 줘라.’ 마지막으로 나이가 들면 ‘배워야 한다.’ 배워야 줄 것도 생기고 할 것도 생긴다.”
‘하자, 주자, 배우자. Do it, Give it, Prepare it. 行之 與之 習之.’ 그가 던지는 장수시대의 실천강령이다.
백세인들에게서 ‘움직이고(動), 적응하고(應), 머리를 쓰며(判), 느끼고(感), 절제(適)’라는 공통점이 발견됐다고 한다. 그는 “장수를 위해서는 유전자, 성격, 환경 등의 자연적 요인도 중요하지만 운동, 영양, 관계, 배움, 참여 등의 생활습관이 특히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 중 ‘관계’가 가장 중요한 비결인 것 같다며 여기에는 부지런함이 포함된다고 했다. 결국 나이가 들수록 의존적인 사람이 되지 말고 스스로 독립하고 사회에 기여하는 존재가 되는 게 중요하다.
“백세인들 중 고혈압, 관절염, 위장병이 있는 분들이 많아요. 그런데 당뇨는 거의 없어요. 당뇨는 생활습관 질환인데, 결국 장수와 생활습관도 연관이 있다는 거죠.”
“98세에 시집을 내서 100만 권이 팔렸다는 시바타 도요 할머니가 쓰신 시 중 ‘비밀’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99살이라도 사랑도 하는 거야, 꿈도 꿔, 구름도 타는 거야’라고 말합니다. 100세가 돼도 연애하면 안 되겠습니까? 김형석 교수가 올해 한국 나이로 98세이신데, ‘뭐가 가장 하고 싶으냐?’ 물었더니 ‘연애하고 싶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런 마음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박상철 (朴相哲) 교수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생화학 전공으로 의학박사학위를 받았고 1980년부터 2011년까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생화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과학기술부 우수 연구센터인 노화세포사멸연구센터와 서울대학교 노화고령사회연구소 소장을 역임했다. 가천의대, 이길여 암·당뇨연구원장을 거쳐 현재 대구경북과학기술원 석좌교수, 서울대학교 노화고령사회연구소 고문으로 있다. 주요 저서로 등이 있다.
필자는 슬하에 아들만 둘을 두었다. 딸 하나를 더 갖고 싶었지만 관상쟁이로부터 사주팔자에 아들만 셋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후 딸 갖는 것을 포기했다. 그러니 남의 집 딸들만 봐도 사랑스러웠다. 딸 갖기를 포기한 이유 중 하나는 아들 둘이 너무 활발한 삶을 살았던 탓도 있다. 결혼 전 자식은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했지만 세월이 흘러 시대가 바뀌니 자식 양육도 옛날 같지 않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하늘의 뜻을 따르지 않은 것이 가끔 아쉬운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들들이 성장해 해병대에서 군복무를 마친 차남은 울산에서, 육군 학사장교 출신인 장남은 서울에서 살게 되었다. 그 뒤 혼자 가족이 살던 집을 지키고 있던 둘째가 마침 혼기가 찬 여자 친구가 있어 먼저 결혼을 허락했고, 현재 아들을 놓고 잘 살고 있다. 울산에서 가족과 함께 살던 아파트에 보금자리를 튼 둘째 내외는 집 사기 힘든 시대에 어쩜 복이 많은 아이들인 것도 같다.
작은 며느리는 손자가 커가는 사진을 수시로 카톡으로 올리거나 한 주가 멀다 하고 화상통화를 해서 우리 부부를 즐겁게 해준다. 필자의 아버님은 효자였다. 그 핏줄이 이어졌는지 한 번도 보지 못한 손자들이 일찍 작고하신 아버님의 효심을 그대로 빼닮아 참 고맙기도 하고 장하기도 하다. 물론 가끔 필자의 투박한 말투를 닮은 둘째가 눈에 벗어나기도 하지만 말이다.
작은 며느리는 결혼 전 필자를 처음 만나 인사하는 자리에서 남편이 될 우리 둘째를 자신이 책임지겠다는 당돌한 이야기를 해서인지 멀리 떨어져 살고 있지만 크게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 실제로 집안일이나 무슨 일을 할 때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할 정도로 아주 일을 잘하는 며느리다.
첫째는 결혼 결심을 늦게 해서 둘째보다는 좀 늦게 결혼을 했다. 아직도 신혼의 꿈을 즐기고 있는 큰아들이 몇 주 전에 우리를 초대해 퓨전음식을 대접했는데 요리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레시피를 보고 했다는데도 마치 프로가 만들어낸 요리를 먹는 듯 맛있었다. 특히 정성을 들여 만든 하트 모양의 전은 너무 예뻐서 먹기가 망설여 질 정도였다. 두부와 함께만든 고기 요리 또한 일품이었다. 맛과 모양이 함께 뛰어나니 어느 유명 레스토랑에서나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먹은 것 같아 며느리에게 금일봉을 주면서 칭찬을 해줬다. 음식솜씨가 남다른 큰며느리임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큰며느리의 100세 시대 행복한 삶을 위해 필자가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생각해봤지만 당장 생각이 나질 않는다.
서울 사는 큰며느리는 제사와 명절 때 빠지지 않고 일찍 와서 시어머니와 제사 음식을 준비한다. 그 모습이 참으로 든든하고 좋다. 맏며느리로 시집와서 필자 아내가 늘 혼자 고생하면서 준비를 했는데 며느리가 손을 보태니 너무나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물론 둘째 며느리도 차례에 참석할 때는 손위 형님을 깍듯이 대하며 우애 있게 잘 지내는 것 같다.
어느 날 우리 부부는 큰아들 부부가 좋아한다는 간장게장을 담아주기 위해 함께 노량진 수산시장을 찾아가 봄에 가장 맛이 좋다는 암꽃게를 샀다. 아내는 처음 만들어본다는 꽃게 간장게장을 정성들여 만들어 아들들에게 보냈다. 아들과 며느리들은 맛이 환상적인 게장이라며 감사인사를 했고 그날 아내는 내내 행복해했다. 요리솜씨가 좋은 필자의 아내는 둘째 아들 내외가 명절에 올라올 때마다 좋아하는 음식을 준비해 잔뜩 챙겨준다. 둘째는 명절 귀갓길에 짐꾼 노릇을 하느라 힘들었을 것 같다.
우리 며느리들은 박사도 아니고 절세미인도 아닌 평범한 며느리들이다. 그러나 필자에게는 더없이 사랑스럽고 소중한 며느리들이다. 두 아들 내외 모두 화목하고 서로 위하면서 살고 있으니 이보다 행복한 일이 어디 있을까 싶다. 이웃에 사는 어느 집 며느리는 얼굴도 예쁘고 똑똑하다고 소문이 났지만 남편과 신혼 때부터 불화를 겪고 있다고 한다. 한 번은 육탄전을 벌이며 대판 싸워 이혼 직전 상태까지 갔단다. 아내와 같은 성당에 다니는 그 집 시어머니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란다.
우리 집 며느리들은 남편을 위하고 동서간의 우애도 좋으니 얼마나 기특하고 고마운지 모르겠다. 내년 새해 며느리들에게 주는 절값은 금년의 배로 올려줘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