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대 고려대 총장, 사립대총장협의회장, 대법원 양형위원회위원장, 중국연변과학기술대·러시아모스크바국립대·미국조지워싱턴대 등 국내외 유수 대학의 명예교수 및 석좌교수를 역임한 이기수(李基秀·71) 예원실그림문화재단 이사장의 경력은 법학자로서 얻을 수 있는 화려한 성공 사례들의 목록이다. 그런 그가 법학이 아닌 예술계의, 예원실그림문화재단의 이사장이 된다고 했을 때 모르는 사람의 눈으로 보면 다소 돌출적인 행보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 이사장은 그 선택이야말로 확고한 기준을 갖고 이뤄진 것이라고 말한다. 이 이사장이 예술을 접하는 시니어로서의 삶의 기준은 무엇일까?
아마도 평생 학자로 살면서 몸에 밴 버릇이자 의지일 것이다. 이기수 예원실그림문화재단 이사장은 요즘도 새벽 세 시에 일어나 공부를 한다. 그는 안중근 의사가 여순감옥에 갇혀 있을 때 한 말, “하루라도 책을 안 읽으면 입에 가시가 돋는다”를 신봉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시간적, 공간적으로 유한합니다. 자기가 움직일 수 있는 공간에서만 살잖아요. 그런데 책을 읽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어떻게 살고 어떻게 생각하는지 체험하는 거니까 책을 읽는 만큼 내 삶이 더 윤택해진다는 의미가 될 수 있죠. 나는 법학을 공부했으니 법학에 대해선 조금 알지만, 그 밖의 경제와 인류, 문학과 예술을 어떻게 알았겠어요. 모든 것은 책을 통해 다른 사람의 삶을 가져와서 내 삶에 녹여 삶을 좀 더 향상시켰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예요.”
예술의 후원자가 되다
경력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 이사장은 그동안의 삶을 법 연구로 세운 대표적인 법학자다. 그런 그가 어떻게 예원실그림문화재단의 이사장을 맡게 됐는지 궁금했다.
“이배영 이화여대 총장께서 가까이 지낸 사람들을 예원실그림문화재단에 초청했던 적이 있어요. 그때 손인숙(예원실그림문화재단 관장) 작가가 만든 를 보고 ‘어떻게 저런 작품을 직접 만들 수가 있었을까. 저건 사람의 손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싶었죠. 그런 걸 오천 점 정도 만들었다니까, 신의 경지여야 할 수 있는 거로구나 하며 감탄했습니다. 그렇게 작품에 매료되어 있는데 손 작가가 재단을 만들 생각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 자리에서 내가 갖고 있던 돈 삼십만원을 후원금으로 냈어요.”
이 이사장은 손 작가의 첫 후원자였다. 재단 통장에 첫 번째로 후원금을 넣은 첫 후원자로서 이 이사장은 손 작가의 요청으로 이사장까지 맡게 됐다.
“한국의 예술이 파리를 침략했다”
올해는 한불수교 130주년이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프랑스에서는 지난해 9월부터 올해 8월 말까지 작품 전시와 공연이 진행됐고 우리나라에서는 올해 1월부터 12월 말까지 130개의 작품을 전시 및 공연하고 있다. 그중 대표적으로 파리에서 3개의 작품 전시 및 공연이 이뤄졌는데 각각 종묘제례, 공예 작품, 그리고 손 작가의 실그림 작품이다.
실그림 작품 전시는 우선 프랑스 국립박물관인 기메박물관에서 했고 이어서 니스 동양박물관에서 콜을 받아 진행하고 있다. 8월까지 3개월 동안 8만 명이 관람하는 등 성황을 이루었다. 르몽드 지는 ‘한국의 예술이 파리를 침략했다’라는 카피를 내놓으며 두 번이나 지면에 소개했다. 이 이사장은 예원실그림문화예술로 한국 예술의 위대함을 유럽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며 흡족해했다.
“지난 9월에는 플뢰르 펠르랭 전 프랑스 문화부장관과 만났어요. 이분이 여섯 살 때 프랑스로 입양을 가서 프랑스 부모님 밑에서 프랑스 사람으로 자랐거든요. 우리나라에서도 대대적으로 소개됐던 사실이죠. 그런데 손 작가의 작품을 만나면서 자신이 한국 사람이라는 것과 한국이라는 나라가 어떻다는 걸 자각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예원실그림문화재단에 와서 작품을 보고는 계속 감탄하시더군요. 전통과 모던의 조화라고요.”
이사장이 추구하는 ‘헌법에 입각한 예술론’
이사장 역할까지 하면서 실그림을 알리는 데 열정적으로 뛰고 있는 이유는 그가 지향하는 가치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예술에 조예가 깊다고는 할 수 없고, 예술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총장을 끝내고 난 뒤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뭐가 있을까 고민을 하던 때가 있었어요. 결론은 나머지 인생을 대한민국의 가치를 높이는 일에 바치겠다는 거였죠. 그렇다면 대한민국의 가치를 어떻게 높일까 또 고민하고 있는데 헌법재판소에서 만든 헌법 소책자가 눈에 띄었어요. 헌법을 지키는 게 대한민국의 가치를 지키는 일이라는 확신이 들었죠.”
그는 대한민국의 가치를 지키기 위한 근거를 헌법에서 찾았고, 그 텍스트에 입각해 자신을 설명했다.
“헌법에 따르면, 국가가 성립되려면 주권, 국민, 영토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4조는 ‘대한민국은 통일을 지향하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 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한다’입니다. 이는 통일이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알려주고 있죠. 그리고 해야 할 게 9조입니다. ‘국가는 전통문화의 계승발전과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야 한다.’ 이 세 가지를 바탕으로, 제 남은 인생을 대한민국 헌법 가치 제고와 통일, 문화가치 창달에 투신하겠다고 마음먹었어요. 그러니 예원의 작품들을 보고 내 나머지 인생을 위한 이사장직을 흔쾌히 수락할 수 있었던 거죠.”
실그림에 담긴 민족문화 창달
기자를 놀라게 한 것은 그의 손에 들려 있는 이라는 빨간색 소형 책자. 그는 기자에게 헌법 제9조와 69조를 읽어보라고 했다.
“9조에는 ‘국가는 전통문화의 계승발전과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야 한다’는 내용이 있고, 69조는 대통령 취임 선서문인데, 여기에도 대통령으로서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할 것을 국민 앞에 엄숙히 선서한다’라고 적혀 있지요.”
현재에 만족하는 삶이 되기까지의 역사를 정리 중
이 이사장은 1945년생이다. 이제 70이 넘어가는 시니어로서 젊을 때보다 나은 점이 무엇이 있는지 물어봤다.
“나이 들어서 좋은 점은 정년을 했기 때문에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죠(웃음). 명예교수로서의 생활이 참 좋습니다. 시간을 내 마음대로 활용하는 게 가능하니까요. 시간이 있어 국선도를 배우기 시작해 건강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주가였는데 이제는 반주 정도로 줄였어요,”
이 이사장은 최근 자신의 역사를 정리하고 있는 중이다. 그가 쓰면 손녀가 정리해주고 있다. 이 이사장으로서는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기회이고, 손녀에게는 할아버지의 삶을 체험하는 독특한 경험일 것이다.
“쓰면서 ‘초등학교, 중학교 때가 이렇게 잘 기억이 나네’ 하고 마누라한테 얘기하니까 마누라가 ‘당신이 술을 안 먹으니 머리가 맑아져서 그런 거잖아’라고 하더라고(웃음).”
이 이사장의 경력은 대부분의 사람이 부러워할 만큼 화려함을 자랑한다. 그런데 그 자신은 잘살아왔다고 생각할까?
“아들 하나, 딸 하나인데 둘 다 시집 장가 잘 갔어요. 친손녀가 대학 3학년, 친손자가 대학 1학년, 외손주 중에 가장 큰 녀석이 대학 1학년이고 둘째가 고3, 셋째가 중3이죠. 제 처가 오십 될 적에 가족들 전부 모여 가족사진을 찍었는데, 이번에 칠순잔치 때 다시 모여 사진을 찍었어요. 그렇게 온 가족이 모여 즐거운 마음으로 찍으니 참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에게는 즐거운 일이 또 있었다. 올해 3월 1일, 그의 제자들 중에서 마흔 번째 교수가 탄생한 것이다.
“학문을 하는 학자 입장에서 제자가 마흔 명이나 4년제 대학 교수로 있다는 게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어요.”
목적에 봉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야말로 행복한 삶이라고 말하는 그는 확실히 현재의 삶에 만족하고 있었다.
“사실 총장 재임 때보다 지금이 더 좋습니다. 그때 사진보다 지금 사진이(웃음) 다들 좋다고 그래요. 그때는 아침, 점심, 저녁 모두 시간에 쫓겼고 저녁에도 두세 군데 들러 인사해야 하고 그랬으니까. 지금은 자유를 느껴요.”
열심히 산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스스로 만족스럽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이 이사장에게도 돌아가고 싶은 시절이 있는지 궁금했다. 그 대답은 천생 학자다웠다.
“독일에서 공부할 때로 돌아가고 싶죠. 공부할 때가 가장 좋았어요. 가장 행복했고. 논문만 쓰면 되니까(웃음).”
그는 지금까지 살아온 이야기를 정리하는 일과 함께 진행하는 작업이 또 있다. 30년 동안 교수생활을 하면서 그의 제자들 중 조교가 스물일곱 명, 교수가 마흔 명이 나왔다. 그 제자들이 그와의 인연을 원고로 만들고 있다. 이제 제자들과의 인연을 정리한 원고는 책이 되어 그의 삶을 타인의 시선을 통해 회고하는 증거로 남게 될 것이다.
“2010년 12월 30일은 제가 만으로 예순다섯 살 되던 날이었어요. 정년퇴임 논문집을 만들어 롯데호텔에서 기증식을 가졌는데 그때 말했어요. 내 인생 20년은 준비기간이었고, 45년은 고대 법대, 독일 박사, 회사법·공정거래법·지식재산권법·국제거래법 갖고 먹고 살았는데 예순다섯 살부터 45년간은 다른 나라들에서의 인연과 대한민국의 가치를 제고하면서 살겠다고. 그럼 110세예요. 그런데 왜 하필 110세냐. 고려대가 1905년에 만들어졌는데 2055년이 고려대 150주년이에요. 그해가 마침 제가 110세 되는 해고. 그래서 고려대 150주년이 되는 5월 5일에 17대 고대 총장을 한 사람으로서 축사하는 게 마지막 내 꿈이에요.”
그는 호탕하고 섬세한 사람이다. 사실 이 이사장과의 인터뷰 기사를 쓰면서 가장 쓰고 싶어 안달이 났던 내용은 그의 섬세한 친화력에 관한 것이다. 인터뷰 당일 약속시간보다 좀 늦었다. 자식뻘 되는 기자인데 늦어도 괜찮다며 마음씨 좋은 아저씨처럼 웃었다. 며느리에게도 이름을 불러주는 시아버지다. 그의 주변에 사람들이 몰려드는 이유를 알 것 같다. 그가 110세까지 발굴에 나설 민족문화의 정수로서 마르지 않은 깊은 샘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깊은 연구와 후덕한 인품으로 기라성 같은 제자를 길러내고 학계에서 우뚝 섰던 그가 요즘 부단히 자신에 관한 기록물을 만들면서 스스로 정한 가치에 열렬히 투신하고 있다. 이런 이사장은 과연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을까? 그 대답은 단순했으나 여운이 길었다.
“저는 전주 이씨 경남 하동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여기까지 왔습니다. 사람들에게 ‘열심히 산 사람이다’라고 기억되고 싶어요.”
◇ Exhibition
1) 태양의 화가 반 고흐: 빛, 색채 그리고 영혼 전
일정 12월 31일까지 장소 apM CUEX홀
천재 화가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을 미디어 아트로 새롭게 연출한 전시다. 고흐의 수작들을 디지털 영상 기술과 접목한 최첨단 전시 기법을 통해 시간과 공간의 변화를 체험하도록 했다. 인상파와의 교류, 대자연, 고흐의 방, 동양의 색채, 초상, 동생 테오와의 편지 등 8개의 존으로 구성되어 있다. 거대한 공간감을 느낄 수 있는 와치아웃 시스템을 이용한 멀티채널과 1만 픽셀 이상의 초대형 화면의 이머시브(Immersive) 시네마 등을 마련했다.
2) 최순우가 사랑한 전시품 전(CHOI SUNU’S FAVORITE)
일정 12월 31일까지 장소 국립중앙박물관
미술학자 최순우(1916~1984) 탄생 100주년을 맞아 기획한 전시로, 그가 생전에 아끼고 좋아했던 작품들을 글과 함께 소개한다. 평생 한국의 미를 탐색하고 박물관을 발전시키는 데 헌신한 최순우의 문화재에 대한 애정과 생각을 이해할 수 있는 자리다. 1층 통일신라실에서는 돌함과 뼈단지 등 일제강점기에 약탈됐다가 돌아온 문화재를, 2층 서화관에서는 김홍도서첩, 달마도 등을, 3층 조각·공예관에는 반가사유상, 달항아리 등 15개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3) 코디최 개인전 CODY CHOI Color Painting: Frustration is Beautiful
일정 10월 28일~11월 20일 장소 PKM 갤러리(서울시 종로구 삼청로 7길 40)
2017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출품 작가인 코디최(Cody Choi)의 개인전이 10월 28일부터 11월 30일까지 PKM 갤러리에서 열린다. 이번 전시는 2011년 이후 5년 만에 개최되는 개인전으로 회화와 설치 작업 약 20 여 점이 전시된다. 특히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출품 준비를 위한 기금마련 전시라는 점에서 뜻 깊은 자리다.
1980년대 중반부터 작가이자 문화이론가로서 활동하는 코디최는 현대사회의 문화정체성과 권력관계에 관해 탐구한다. 현시대 다양한 문화가 빚어내는 충돌과 간극에서 태어난 제3의 문화 혹은 혼종문화, 동시대 사회현상에 주목하며 회화·조각·설치 등의 작업으로 표현하고 있다.
LA 아트센터 칼리지를 졸업한 코디최는 LA 현대미술관, 타이페이 현대미술관, 토탈미술관 등 국내외의 주요전시에서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현재 독일 쿤스트할레 뒤셀도르프와 프랑스 마르세유 현대미술관 등 유럽에서 순회 회고전을 진행하고 있다. 20세기 문화 지형도 (2010), 동시대 문화 지형도(2010) 등 현대문화에 관한 전문비평서를 출간했다.
◇ Book
1) 초혼 (고은 저 · 창비)
고은 시인의 3년 만의 신작 시집이다. ‘때’와 ‘곳’에 얽매이지 않는 ‘자가지무(自歌自舞)’ 정신으로 우주와 소통하는 대자유의 세계를 펼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삶을 아우르는 우주적 상상력과 예리한 통찰력이 담겨 있다.
2) 보고 시픈 당신에게 (김광자 외 86명 공저 · 한빛비즈)
전국 한글학교에서 늦깎이로 한글을 배우고 있는 어르신들의 시와 산문을 엮었다. 글자를 익히면서 느끼는 기쁨, 가족에 대한 사랑, 삶의 애환 등이 돋보인다. 손글씨의 느낌을 살려 원문을 그대로 옮기고, 저시력자를 위해 큰 글자로 다시 정리했다.
◇ Movie
1) 기적을 증명한 두 남자 이야기
개봉 11월 3일 장르 드라마
감독 맷 브라운 출연 데브 파텔, 제레미 아이언스, 토비 존스 등
인도 빈민가의 한 수학 천재와 그의 가능성을 알아본 영국 수학자의 특별한 우정을 그렸다. 숫자가 유일한 친구였던 순수한 수학 천재 ‘라마누잔’의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해 그의 열정적인 천재성과 삶의 고뇌 등을 담았다. 라마누잔 역을 맡은 배우 데브 파텔이 해외 유수 언론에서 “실존 인물 라마누잔의 모든 것을 완벽하게 연기했다”는 평을 받는 등 작품성 못지않게 그의 연기력에도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2) 당신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개봉 11월 10일 장르 드라마
감독 나가이 아키라 출연 사토 타케루, 미야자키 아오이, 하마다 가쿠 등
시한부 선고를 받은 한 남자가 하루를 더 사는 대신, 세상에서 무언가를 한 가지씩 없애야 한다는 독특한 설정이 돋보이는 영화다. 전 세계적으로 130만부 이상 판매량을 올린 동명의 베스트셀러 소설을 영화로 제작했다. ‘세상에서 전화가 사라진다면, 당신의 인생이 어떻게 달라질까요?’라는 포스터 속 문구가 호기심을 자극한다. 신선한 스토리 전개로 잊고 지낸 것들에 대한 소중함과 인생의 행복을 선사한다.
◇ Stage
1) 연극 재공연, 이웃사촌들의 수상한 진실게임
일정 10월 27일~11월 20일 장소 대학로 선돌극장
연출 이동선 출연 이황의, 김수보, 리우진, 곽지숙 등
지난 3월 초연돼 뜨겁게 주목받았던 극단 몽씨어터의 (작가 석지윤, 연출 이동선)가 11월 20일까지 대학로 선돌극장에서 재공연 된다. 연극 는 치밀한 구성과 전개, 팽팽한 긴장감과 반전, 그 사이를 비집고 터지는 폭소로 관객들을 사로잡는다. 이웃 혹은 사람 간 의심이 한순간에 누구든지 싸이코패스로 몰아갈 수 있는 현대인의 각박한 심리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신예작가 석지윤의 독특한 언어, 이동선 연출가의 감각적인 연출에 힘입어 씁쓸하면서도 웃음 터지는 우리시대의 슬픈 자화상과 마주하게 한다.
빌라의 고양이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죽어나간다. 주민들은 벌어지는 상황을 진단하고 해결하고자 대책회의를 연다. 그런데 301호의 혼자 사는 남자가 수상하다. 사람들은 그가 분명 고양이를 죽인 싸이코패스가 틀림없다고 믿게 된다. 싸이코패스를 잡기 위한 평범한 이웃들의 위험하고 묘하게 웃긴 진실게임, 바로 연극이다.
2) 천재 시인의 삶과 사랑을 노래하다
일정 11월 5일~1월 22일 장소 대학로 드림아트센터 2관
연출 오세혁 출연 강필석, 오종혁,이상이, 정인지, 최주리 등
한 시대를 풍미했던 모던보이였던 시인 백석의 시가 뮤지컬로 재탄생한다.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서 모티프를 얻은 작품으로 백석과 그의 연인이었던 김영한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를 그의 시 노랫말로 표현했다.
3) 꿈과 희망을 위해 링 위에 서다
일정 11월 1일~1월 15일 장소 디큐브아트센터
연출 노우성 출연 신성우, 송창의, 신구, 김진태, 김지우 등
영화 를 원작으로 한 뮤지컬로 실베스터 스탤론이 직접 제작에 참여하며 기대를 모은 작품이다. 박진감 넘치는 권투시합 장면을 무대 위에 생생하게 그려내며 2014년 토니어워드와 드라마데스크어워드에서 무대디자인상을 받았다.
4) 고모와 조카의 예측 불허 동거
일정 11월 22일~12월 11일 장소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연출 구태환 출연 하성광, 정영숙
세상을 곧 떠날 것 같다는 고모의 편지 하나에 다니던 은행을 그만두고 30년 만에 고모를 찾아가는 조카의 이야기를 담았다. 배우 인생 첫 2인극 도전이라는 중견 배우 정영숙이 고모 그레이스 역을 맡아 섬세한 감정연기를 펼친다.
5)인간의 죄의식과 예술가의 고뇌
일정 11월 20일까지 장소 아트원씨어터 3관
연출 김동수 출연 남명렬, 이명호, 박지일, 김병철, 손성호 등
1995년 제26회 동인문학상 수상에 빛나는 정찬의 소설을 연극화한 작품이다. 같은 해 11월 첫 공연한 이래로 상업성이 짙은 작품들이 주목받는 공연계에서 인간의 존재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고통의 밀도를 담아내며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
뉴욕 브루클린에서는 지난 9월 29일부터 4일간 큰 춤판이 벌어졌다. 8개국 70개 댄스팀이 참가한 덤보댄스축제다. 이 춤판은 맨해튼 다리 밑, 버려진 공장지대였던 덤보(DUMBO, Down Under the Manhattan Bridge Overpass) 지역을 문화의 중심지로 변신시킨 일등공신이다. 뉴욕타임스는 이 축제를 뉴욕 5대 무용축제로 선정했고, PBS 방송은 올해 뉴욕의 5대 행사로 꼽았다. 이 춤판을 벌여온 주인공은 뉴욕 현대무용계의 대모로 불리는 김영순 화이트웨이브 무용단 단장(예술감독 겸임). 뉴요커의 자랑인 덤보댄스축제는 김 단장의 집념과 열정 그리고 고난과 눈물의 결정체다.
김영순 단장이 미국으로 건너온 것은 1977년. 이화여자대학교에서 현대무용을 전공한 후 마사 그레이엄(Martha Graham) 댄스스쿨로 유학을 온 것이 미국생활의 출발점이었다. 세계 현대무용계의 신데렐라를 꿈꾸며 시작한 유학생활은 고난 그 자체였다. 굳게 마음먹고 준비한 유학이었지만 턱없이 부족한 돈이 문제였다.
대학을 졸업한 후 선일여자중고등학교에서 무용교사로 재직하면서 월급의 70%를 저축해 모은 유학 자금을 장춘동 국립극장 소극장(현 달오름극장)에서 공연을 하면서 다 써버린 것이 화근이었다. 국내 사상 최연소 단독 현대무용 공연이었고 ‘잔잔한 호수 위로 퍼덕이며 뛰어오르는 은빛 찬란한 물고기’라는 평가도 받았지만 당초 계획에 없었던 공연이었다. 김 단장은 40년 전 그 공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기다리던 입학허가를 받고 미국 대사관에 비자를 신청했는데 거부를 당했어요. 대학 시절 민주화운동을 했기 때문인지, 젊은 여성이 미국에 눌러 살까 우려한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앞이 캄캄했어요. 그때 멋진 공연을 해서 대외적으로 널리 알려지면 비자를 받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조언을 듣고 공연을 하게 됐어요.”
아니나 다를까 공연을 마치자마자 바로 비자가 나왔다. 그런데 체재비는 고사하고 항공료조차 부족했다. 철도공무원인 아버지 김철주씨의 5남 4녀 중 셋째인 김 단장은 형편이 어려운 부모님께 차마 손을 벌릴 수 없었다. 뜻이 있으면 길이 있는 법. 홀트아동복지회에서 입양아 두 명을 미국까지 데려다주면 항공료를 지원해주겠다는 제안을 받고, 8개월과 11개월 된 두 아이를 양팔에 안고 22시간 넘게 비행을 했다.
침례교회가 운영하는 양로원의 자그마한 방 한 칸을 댄스스쿨에서 알선해줬지만 아침식사를 포함해 주당 25달러인 숙식비와 학비를 감당하기가 벅찼다. 하루 12시간 이상 무용 연습을 하면서도 베이글 하나로 견딜 때가 많았다. 때로는 밤늦게 돌아오다 너무 힘들어 남의 집 계단에 앉아 달을 보고 엉엉 울기도 했다. 김 단장은 그때의 심경을 토로했다.
“아버지는 그 당시 대부분의 부모님들처럼 딸이 시집가서 아들·딸 낳고 현모양처로 살기를 원하셨지 유학 가는 것을 바라시지 않았어요. 딱 1년만 공부하고 오겠다고 통사정을 해서 허락을 받았어요. 그리고 춤꾼이 되고 싶었으나 집안 어른의 반대로 끝내 꿈을 이루지 못한 어머니의 기대까지 짊어지고 있었어요. 김포공항을 떠날 때 외할머니께서는 부적을 한 장 주시면서 엄마의 꿈을 대신해서 이루어달라고 당부하셨어요. 그래서 아무리 어려워도 포기를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그를 극심한 생활고에서 구해준 것은 루돌프 누레예보 장학금이었다. 뼈를 깎는 노력 끝에 30 대 1의 경쟁을 뚫고 장학생 오디션을 통과한 그는 뉴욕서 열리는 공연이라면 단역이라도 마다하지 않고 출연했다. 얼굴을 알릴 수 있었고 얼마 안 되는 출연료였지만 생활에 큰 보탬이 되었다.
1980년, 경쟁률 300 대 1의 오디션을 통과해 뉴욕 10대 명문 무용단인 제니퍼 뮬러 현대무용단 전속 단원으로 발탁되면서 그는 프로페셔널 댄서로 우뚝 서게 됐다. 미국은 물론 유럽, 중남미, 캐나다 등 세계 곳곳으로 순회공연을 다니면서 ‘검정머리 휘날리며 춤추는 동양의 신비한 무녀’라는 찬사를 받았다.
1년에 9개월간 해외 공연을 하는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면서도 뉴욕에 머무는 3개월은 트론댄스시어터(Throne Dance Theater) 같은 소규모 무용단에서도 활약을 했다. 겹치기 출연을 해야 할 정도로 이미 명성이 높았다. 당시 한 유명 평론가는 “무대에서 춤추고 있는 많은 댄서들 가운데 눈을 뗄 수 없는 댄서”라고 극찬했다.
1988년, 드디어 그는 자신의 무용단을 창단한다. 하얀 파도가 세계로 용솟음친다는 의미의 ‘화이트웨이브(White Wave) 김영순 무용단’이다. 하얀 파도는 백의민족을 상징한다. 경쟁이 치열한 뉴욕에서의 무용단 창단은 실력과 명성과 인간관계를 모두 갖추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김 단장은 그 해 88서울올림픽 현대무용 페스티벌에 초청받아 국내 팬들에게 현대무용의 진수를 선보이기도 했다.
홍콩에서 단독공연을 할 때는 홍콩스탠더드 신문이 ‘춤추기 위해 태어났다(Born To Do It)’는 제목으로 그의 삶과 춤을 전면에 소개했다. 신문 제목처럼 그는 타고난 춤꾼이었다. 6세 때 인근 무용학교에서 들려오는 장구소리에 이끌려 춤을 배우기 시작했고, 7세 때는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 ‘사냥꾼’ 이야기를 춤으로 표현해 호남예술제에서 1등을 차지했다.
무용단 운영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 , 등 60여 가지의 레퍼토리를 선보였을 때 월스트리트저널이 ‘댄스의 영역을 뛰어넘은 새로운 예술세계 창조’라고 논평하는 등 주요 언론들의 호평이 이어졌지만 무용단 운영은 점점 어려워졌다. 소호(SOHO)에 있던 스튜디오를 임대료가 저렴한 이스트 할렘으로 옮겼으나 70평 남짓한 스튜디오 임대료를 제때 내지 못해 이불을 덮어쓰고 울기도 했다.
설상가상으로 2000년에는 맨해튼 스튜디오가 상가로 바뀌면서 새 터전을 찾아나서야 했다. 소호에서 밀려난 가난한 예술인들이 몰려든 덤보 지역은 앞이 캄캄했던 그에게 축복의 땅이었다. 기업인 존 라이언(John Ryan)씨가 든든한 후원자로 나타나면서 25만 달러를 지원받아 이스트 강변에 100석짜리 무용 전용극장을 마련할 수 있었다. 덤보댄스축제와의 인연도 이때 시작됐다.
미술·패션쇼·음악·필름스크린·댄스 등 5개 예술 분야로 나눠 열리는 덤보아트축제의 이사진과 댄스 부문 기획을 담당했던 친구의 권유로 2001년 제1회 덤보댄스축제의 총감독을 맡아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다. 사실 덤보아트축제는 ‘예술이 있으면 사람이 모이고, 사람이 모이면 사업이 번창한다’는 부동산개발업체의 경영전략에서 출범한 축제다. 덤보 지역이 번창하자 다른 분야의 축제는 사라지고 댄스축제만 남아 뉴요커의 발길을 끌고 있다. 김 단장은 신예 안무가들이 기량을 마음껏 펼치면서 뉴욕으로 진출할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주겠다는 신념으로 댄스축제를 지켰다.
그는 여세를 몰아 2004년부터 쿨뉴욕(Cool New York) 댄스축제를, 2006년부터는 웨이브라이징시리즈(Wave Rising Series) 무용축제를 잇따라 개최했다. 뉴욕타임스는 2008년 “다운타운 현대무용계는 김영순 단장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 하나도 하기 힘든 페스티벌을 세 개나 하고 있다”며 대서특필했다. 이때부터 그는 뉴욕 현대무용계의 대모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 축제를 통해 총 2600여 무용단과 1만3500명의 안무가들은 7만여 관객 앞에서 기량을 발휘했다. 창무회 & 김매자, 김윤정 프로젝트댄스, 장유경 무용단, 길섭무용단, 박신애, 정석순, 김정환과 박봄, 박정윤, 최성옥 메타댄스 프로젝트 등 수많은 안무가들이 그들이었다.
그는 현재 뉴욕시가 매년 수여하는 댄스·연기대상(Bessie Award)과 예술지원기금 무용 부문 심사위원을 맡고 있다. 그의 무용단은 3년 연속 뉴욕시 지원 대상 문화예술단체로 선정되는 등 공로와 능력을 널리 인정받고 있다. 마티 마코위츠(Marty Markowitz) 브루클린 구청장은 수년째 덤보댄스축제가 개막되는 날을 ‘화이트웨이브 김영순 무용단의 날’로 공표하고 있다. 그의 공로는 곤경에 처했을 때 더 빛이 났다. 2012년 허리케인 샌디로 인해 이스트 강이 범람해 극장이 침수 피해를 입자 온라인 성금이 답지했다. 루도 셰퍼(Ludo Scheffer) 드렉셀대학 교수는 상속 재산 중 상당액을 기부했다.
김 단장은 수많은 무대에 올라 많은 박수를 받았지만 2014년 한국계 안무가로는 처음으로 브루클린 음악아카데미(Brooklyn Academy of Music, BAM) 무대에서 새 작품 을 성공리에 공연한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 뉴욕에는 링컨센터 등 굴지의 공연장이 즐비하지만 공연 대상 선정이 가장 까다로운 BAM이 화이트웨이브무용단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링컨센터의 뉴욕공공도서관은 그의 공연을 촬영해 DVD로 영구 보관하고 있다.
그가 오랫동안 간직해온 꿈은 세상 사람들이 전율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을 선보이는 것이다. 그 꿈이 이루어질 때까지 그는 멈출 수 없다. 자신의 무용단을 통해 끊임없이 새 작품을 무대에 올리고, 국제댄스페스티벌을 잇따라 열어 다양한 작품을 소개하는 것은 걸작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다. 화이트웨이브 김영순 무용단은 요즘 인류 화합을 주제로 한 이라는 대형 작품을 새로 무대에 올리기 위해 매진하고 있다. 이 작품의 일부는 이번 덤보댄스축제에서 선보였다. 작품이 완성되면 내년쯤 한국 팬들에게도 소개할 계획이다.
그의 꿈을 이루기 위해 당장 시급한 것은 전용 공연장이다. 덤보 지역도 이제는 예술인이 감당하기 힘들 만큼 임대료가 뛰어 브루클린 내 다른 지역을 열심히 물색하고 있다. 김 단장은 새 공연장을 임대할 경제적 여력은 없지만 절실하면 이루어진다는 확실한 믿음이 있다. 이제까지 그런 믿음으로 험난한 무용인의 길을 성공적으로 걸어왔고 ‘뉴욕 현대무용계의 대모’라는 독보적 위치에 걸맞은 활약을 오늘도 펼쳐나가고 있다.
글 박원식 소설가
대전에서 은행원으로 살았던 홍성규씨(75)가 명퇴 뒤 귀촌을 서둘렀던 건 도시생활에 멀미를 느껴서다. 그는 술과 향락이 있는 도회의 풍습에 착실히 부응하며 살았던 것 같다. 어지럽고 진부한 일상의 난리블루스, 그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돼 있는 게 삶이라는 행사이지 않던가. 그러나 문득 쇠망치로 얻어맞은 것처럼 정색을 하고 화드득 나를 돌아보는 순간이 찾아오는 법. 홍성규씨는 그렇게 소스라치듯 자신과 독대한 뒤 곧바로 산골로 들어가기로 했다. 대담하고 파격적인 선택이었다. 반백년 이상을 살았던 도시생활을 일거에 청산한다는 건 일종의 모험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금강이 굽이치는 산발치에 터를 잡은 홍씨는 아내 박명자씨(70)의 손을 슬며시 잡아 유혹처럼 이끌었다. 처음에 아내의 반응은 미미하다 못해 썰렁했다. 난 싫소, 당신 혼자 잘해보시구려! 강과 산이 얼싸안고 춤을 추는 경관이야 기차게 삼삼했지만, 스러져가는 폐가와 길길이 웃자란 잡초들만 무성한 묵정밭으로 이루어진 터전에 아내는 초장부터 정이 떨어졌던 모양이다. 당장이라도 뱀이 대가리를 쳐들고 튀어나올 것처럼 뒤숭숭한 쑥대밭 앞에서 단박에 우아한 감흥을 느낄 여자란 세상에 없다. 홍성규씨는 기함을 치고 앵돌아진 아내를 거듭 꼬드겨 답사를 반복했다. 마침내 부부는 귀촌에 합의를 보기에 이르렀다. 여러 차례 드나드는 사이, 아내 역시 외진 호젓함과 빼어난 풍치에 마음을 열었던 것. 20여 년 전, 귀촌의 시동은 그렇게 걸렸다.
풍경을 볼까. 산과 강이 긴박한 교제를 한다. 산은 제 늠름한 하체를 강에 들이밀었고, 강은 수줍은 듯 살포시 온몸으로 산을 받아들인다. 이 소리 없는 통정과 협연을 관람하는 건 능선마루에 늘어서서 관음증에 취한 수목들이다. 도대체 여기에서 무슨 후끈한 일이 벌어지는지를 염탐하겠다는 양, 수면 위 허공으로는 연신 물새들이 선회한다. 밤이면 별들이 모여 수군거리겠지. 달빛은 요요히 쏟아져 산을 흘러 강물로 스며들겠지. 홍성규씨는 시를 짓는 버릇이 있는 사람이니 신바람이 날 수밖에 없을 게다. 알아주는 이가 많은 수묵 화가인 아내에게도 역시 이하동문이렷다.
풍경이 수려하다지만 풍경만 뜯어먹고 살 수 없는 게 생활이라는 난적이다. 유유히 음풍농월을 즐기며 참하게 찻잔이나 기울이면 그만일 것 같지만, 철따라 피고 지는 꽃들의 마술에서 시를 건져 올리고 그림을 길어 올리면 그만일 성싶지만, 그러나 널리 알려졌듯이 삶이란 고달픈 나그네 길이라서 고난을 피할 길이 없다. 게다가 홍성규씨 내외는 거하게 손에 움켜쥔 것도 없는 채로 산골에 입장했다. 산골이 주는 고립감과 권태도 만만치 않은 난관이리라. 홍씨의 얘기를 들어볼까.
“가령, 홍매화가 흐드러지게 피어나는데도 무심히 지나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귀촌하면 안 됩니다. 정서가 맞질 않으니까. 그 무엇보다, 그저 편안하게 살 궁리만 하는 사람이라면 절대 시골에 들어와서는 안 됩니다. 마음을 싹 비우고 갖가지 고생을 할 각오를 해야만 하는 것이죠. 산골의 적막이나 고독을 견딜 수 있는 힘을 발휘한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에요. 우리 부부도 초기엔 생각이 마구 왔다 갔다 했어요. 마치 향수처럼 도시 생각을 하곤 했는데, 우리가 지금 독립운동을 하는 것도 아니고, 왜 이러고 사나? 하는 회의가 없지 않았어요. 3년쯤 지나고 나자 비로소 만족감이 찾아듭디다.”
강물에 자동차가 떠내려가기도
“강철 같은 기세로 올라오는 풀들을 해치우는 일은 거의 전쟁이라죠? 선생의 거처 면적은 자그마치 2000평이에요. 이 너른 터를 간수하는 일부터가 벅차겠어요. 노년에 적당히 살기로는 터를 작게 잡을수록 이상적이라는 충고들이 많던데, 이건 믿을 만한 정보일까요?”
“연로한 분들의 경우엔 무리해서 너른 터를 잡지 말아야겠죠. 하지만 300평 이상은 돼야 뭐든 마음먹은 대로 활개를 쳐볼 수 있지 않을까요? 여하튼 온갖 노동과 정성을 쏟아야 기반이 잡히는 게 산골 살림입니다. 사람들은 우리 집을 둘러보고 거참 근사하다고들 하지만, 구석구석 비지땀을 쏟은 현장이라는 걸 알진 못해요. 물론 시골에서의 건강한 노동은 커다란 성취감을 줍니다. 모든 주변 사물과 정들게 되고요. 마치 사람과 사람 사이에 정들듯이….”
“과도한 노동으로 골병이 들거나 우울증에 걸리기도 하더군요.”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창밖으로 보이는 저 돌담장은 3년에 걸쳐 쌓았어요. 돌담을 쌓다 보니 재미가 생겨 봄가을로 열심히 돌을 주워다 쌓아올린 것인데 3년이나 걸렸어요. 그 와중에 병을 얻기도 했지만, 햐, 완성을 하고 나서는 얼마나 좋던지…. 마치 영화 한 편을 만든 감독처럼 신나더라고요. 골병은 피해야겠지만, 하나하나 나만의 작품을 만들어간다는 성취감과 만족감이 크기에 시골살이를 애호할 수밖에 없어요.”
강의 이름은 올목강이다. 강굽이 형세가 오리의 목을 닮아 ‘올목강’이라 부른다. 이 강엔 교각이 없는 채로 콘크리트를 부어 납작하게 가설한 잠수교가 걸려 있다. 이 옹색한 다리나마 없었던 시절엔 배로 강을 건넜다. 폭우가 쏟아지면 잠수교는 순식간에 물에 잠긴다. 그렇게 되면 꼼짝없이 갇힐 수밖에. 장마철이나 봄가을의 폭우 때는 여러 날씩 외부와 고립된다.
“별안간 고립될 가능성에 대비해 음식이나 가축 사료를 늘 충분히 비축해둡니다. 한번은 새벽에 잠이 깨어 나가보니 마당까지 물이 차올라 아예 싯누런 바다로 변했더라고요(웃음). 세상에 물 구경, 불 구경처럼 신나는 게 없다지만 기가 막힙디다. 우당탕탕 굽이치는 물살에 아름드리 통나무며, 컨테이너 박스며, 자동차며, 뭐든 막 떠내려가더라고요. 그 난리 통에 강 저편에 세워뒀던 우리 승용차도 떠내려갔어요. 졸지에 차를 잃어버렸지만, 차보다 정말 아까웠던 건 마당의 컨테이너 박스에 보관했던 집사람의 그림이었어요. 모조리 물에 잠겨버렸죠.”
아내 박명자씨는 그림 그리기를 밥 먹듯이 해온 인물이다. 무채색 먹의 농담(濃淡)으로 사물을 표현한다. 세필을 활용한 정교한 사생보다 일필휘지, 대담하고 호방한 작풍을 구사한다. 그림만 봐서는 여자의 작품이라 알아챌 수 없을 만큼 활달하고 후련하다. 남편의 눈에는 이런 아내의 작품이 세상에서 둘도 없는 명품이다. 그런 판국에 수해를 입어 그림들이 모두 물속 용궁 나들이를 했으니 상심이 컸을 게다. 수려한 강변에 사는 가혹한 대가를 치른 셈이다. 그런 변을 겪을 때면 귀촌이 후회될 성싶지만, 아서라, 홍씨는 수해이든 수난이든 자연의 형제로 살아가기로 작정을 한 자가 기꺼이 감당해야 할 수련이거나 단련의 계기로 받아넘기는 낌새다.
정든 오누이처럼
홍성규씨는 이라는 시집을 낸 바가 있다. 염염한 로맨틱이 비치는 제목이지만, 그의 적성은 자연과 사교하는 쪽으로 사뭇 발육했다. 이를테면 그는, 산골에서 꽃향기가 천지간에 가득하면 황홀해져 춤추고 싶어 하고, 비바람에 갈피없이 흔들리는 꽃들의 비통한 몸부림에도 섬세하게 가슴이 닿아 시적 충동을 느끼는 개성의 소유자로 보인다. 일찍이 세간에 횡행하는 욕망이나 허영은 대충 놔버렸기에 간소하게 먹고도 뿌듯하게 자족하는 생리가 몸에 익었다.
“시골에선 도시에 비할 때 생활비 지출을 절반 이하로 줄일 수 있습디다. 한 달에 150만원이면 뒤집어쓰고도 남을 지경이지만, 형편이 여의치 않을 때는 70만원 남짓으로도 까딱없어요.”
“텃밭에 키우는 작물들로 충분히 자급자족이 되겠죠? 닭들은 마구 알을 낳을 테고.”
“불필요한 외출을 즐거이 자제하며 살기 때문에, 거처 내부에서 사는 재미를 쏠쏠히 느끼기에, 지출을 줄일 수 있는 여지가 많죠. 승용차 대신 작은 트럭을 굴려 유지비를 절감하고, 가끔 먼 곳을 여행할 경우엔 대중교통을 이용해 검소한 살림을 운영합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인간이란 역시나 돈 문제로 충돌하게 마련인 동물입디다. 때론 아내와 토닥거리기도 하는데 그게 주로 금전 문제 때문이었어요. 끙.”
“금전의 여유가 있으면 덜 싸우게 될까요?”
“부자들은 돈 때문에 더 치열하게 싸우지 않습디까(웃음)?”
“도무지 싸우지 않고, 부처님 가운데 토막처럼 어엿하게 살 수 없는 게 원래 인간일까요?”
“저 고고한 하늘에도 가끔은 번개가 치지 않나요? 부부싸움을 하지 않고 산다는 건 맹물 마시고 술 취하려는 것처럼 가당치 않은 일입니다. 충돌과 마찰 속에서 부부 사이가 더 단단해지는 법이거든요. 우리 내외가 말이죠, 도시에 살 때는 불행하게도 부부싸움을 할 기회가 없었어요. 나는 툭하면 밖으로 나돌아 다녔고, 아내는 아내대로 스케치니 전시회니 하면서 며칠씩 나가 살고 그랬거든요. 모든 시간을 같이 붙어살게 된 귀촌 이후엔 싹 달라졌어요. 자못 건설적이고 생산적인 부부싸움을 전개해서 진정한 친선을 도모하게 되었으니까요. 이거 쾌거 아닌가요(웃음)?”
“앗! 부부싸움도 창의적 예술이라는 말씀?”
“집식구가 세상에서 가장 유능한 요리사입니다. 뭐 제 입맛에 딱 맞는 음식을 만들어주는 고마운 존재라는 뜻이죠. 대충대충 사는 저에 비해 합리적이고 현명하게 꼼꼼한 여자라는 점도 아주 매력이죠. 그러나 단점이라면 예민하다는 점이에요. 전엔 송곳이었다면 지금은 부지깽이처럼 좀 무뎌졌지만, 아무튼 이런 아내에게 제가 그림 비평을 인정사정없이 해대곤 했어요. 그러니 다툼이 없었을 리가. 오해는 마시라. 다툼의 날들은 이젠 추억의 잔영으로 남았을 뿐이니까(웃음).”
느티나무를 맨손으로 뽑을 천하장사가 있던가. 불화와 앙앙불락이 없는 부부가 있던가. 홍성규씨의 언설은 자주 아내와의 역사를 술회하는 쪽으로 번진다. 20년 세월을 산골에 살며 그는 자연과 교감하는 도락을 만끽해왔다. 일상의 근로로, 절간의 중들이 비운 발우와도 같은 허심(虛心)의 내공으로, 또는 우슬(牛膝, 일명 쇠물팍)이니 쇠비름 같은 산야초를 장복한 건강생활로, 그는 인생의 저물녘을 훈훈하게 통과하고 있다. 그러고서도 한결 자랑스럽고 사랑스러운 존재가 하나 있으니 그게 바로 아내라는 고백을 차마 참지 못하고 토설한다.
“아내에게 칭찬을 받고 인정을 받을 때면 대통령에게 표창장을 받은 것보다 기쁩디다. 그런 아내가 강변에 앉아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바라보는 순간은 또 얼마나 행복한지…. 노년의 부부란 말이죠, 가급적 산골 외딴집에 살아야 합니다.”
졸혼(卒婚)이라는 요상한 잠정적 결탁이 예찬되기도 하는 이 부박한 세상. 그러나 강변에 사는 내외는 정든 오누이처럼 단란하게 어깨를 겯고 산골의 나날을 동행한다. 이는 아마도, 귀촌이 아니었다면 도달하기 어려운 비경이렷다.
>>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 , 등의 저서가 있다.
장석주(張錫周·62) 시인의 트위터 자기 소개란에는 ‘산책자 겸 문장노동자’라고 쓰여 있다. 그는 현재 자신의 삶을 가장 잘 드러내는 두 단어라고 이야기한다. 장 시인의 하루는 매일 걷고, 읽고, 쓰고, 단순하지만 풍요로운 사색으로 채워진다. 산문집 은 그런 그의 일상에 온유한 자극을 준 책이다.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매일 온라인 서점에 들어가 신간을 살펴본다는 그는 1년에 주문하는 책만 1000권에 달하는 독서광이다. 포털사이트에 그의 이름으로 된 책을 검색하면 100여 권이 나올 정도로 집필 작업도 충실히 하고 있다. ‘문장노동자’라는 별명이 꼭 들어맞는다. 그런 그가 추천한 도서 에는 영미 작가들의 아름다운 산문 32편이 담겨 있다.
“최근 읽은 산문집인데 자연이나 인생에 대한 성찰이 잘 녹아 있어요. 19세기부터 20세기 초반의 글들인데, 훨씬 여유가 느껴지고 글맛이 깊더라고요. 이런 책이 두루 많이 읽히면 좋겠다는 생각에 추천하게 됐죠. 저도 천천히 음미하면서 다시 읽고 있어요.”
길어진 중년, 적당한 긴장감이 필요하다
여러 주제의 산문 중에서도 그는 알도 레오폴드의 ‘산처럼 생각하기’나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소나무의 죽음’ 등 자연에 대한 성찰이 돋보이는 글이 인상 깊다고 했다. 평소 자연을 바라보는 풍부한 시선을 따뜻하고 지적인 언어로 표현해온 장 시인다웠다.
“인간의 평안과 안위 때문에 자연이 훼손되고 있잖아요. 그런 데서 오는 생태계 불균형이 결국 고스란히 우리에게 오게 될 텐데, 인간은 너무나 무관심하죠. 글에도 늑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만, 제가 1960년대 서울에 처음 왔을 때만 해도 늑대 울음소리를 들었던 것으로 기억해요. 그런데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게 돼버렸잖아요. 책을 읽고 그런 문제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어요.”
중년 이후 꽃, 나무 등 자연에 관심을 두는 이가 많다. 그는 “자연이 눈에 들어온다는 것은 나이 들었다는 증거”라며 “생존 경쟁에서 물러나 삶에 여유가 생긴 덕분”이라고 설명했다. 이 책에는 세월이 흐름에 따라 다소 느슨해지는 중년의 삶을 묘사한 ‘오버롤스 작업복’이라는 글이 나온다. 소작농들이 입는 작업복인 오버롤스 세 벌을 각각 초기 중년, 중년, 후기 중년 단계로 설명했는데, 장 시인은 비유가 아주 탁월하다며 감탄했다.
“예전에는 30대 후반만 돼도 중년이라고 했는데 요즘은 마흔이 훌쩍 넘어도 중년이라는 생각을 잘 안 해요. 수명이 늘어났기 때문인데, 그래서 중·장년기가 상대적으로 더 길어졌죠. 그런 중년의 삶을 세 단계로 나눠 옷에 빗대 설명했는데 정말 참신하더라고요. 새 옷은 솔기도 살아있고 옷감도 견고한데, 시간이 흐를수록 단추도 헐거워지고 천도 닳아서 얇아지죠. 처음에는 깨끗하지만 빳빳해서 불편했던 작업복이 삶의 흔적대로 때가 묻기도 하고 해지기도 하면서 내 몸에 점점 익숙하고 편안해져요. 그런 은유가 중년의 삶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고 생각했어요. 우리의 인생도 세월이 더해질수록 오버롤스처럼 부드럽고 느슨해지니까요.”
저자 제임스 에이지는 후기 중년 오버롤스를 ‘여전히 제구실을 완전히 해내며 최고로 편안한 단계’라고 설명했다. 장 시인은 나이가 들며 누리는 편안함은 양면성을 지닌다고 말했다.
“삶이 여유로워졌다는 면에서는 좋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권태롭고 의욕이 떨어지기도 하죠. 꿈이나 생의 약동에서 멀어지는데 그러다 보면 아무렇게나 막 살아버릴 수 있거든요. 그러면 삶의 질이나 자기존중감도 떨어지죠. 중년은 인생의 끝이 아니라 가장 활동적으로 살아야 할 시기이거든요. 뭔가를 이뤄낼 수 있는 나이에 느슨해지고 희미해지면 안 되죠. 적당한 긴장감을 느끼고 삶을 탄력적으로 유지하려는 노력이 필요해요. 길어진 중년의 삶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인생의 가치가 결정된다고 생각해요.”
책 읽기는 뇌의 유산소 운동
그는 삶의 탄력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과 마주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조언했다. 즉 자기성찰을 하라는 말인데, 이를 실천하고 도울 방법으로 ‘책 읽기’와 ‘미니멀라이프’를 제시했다.
“책 읽기는 뇌의 유산소 운동과 같아요. 뇌에도 근육이 있는데, 책을 읽지 않으면 뇌의 유연성이 떨어지죠. 시집과 철학책은 뇌에 좋은 자극을 주고, 주체적으로 생각하는 힘을 길러줘요. 인간에게는 세 가지 기억이 있어요. 절차기억, 학습기억, 신념기억. 절차기억은 아기가 엄마 젖을 빠는 것과 같은 선천적인 기억이고, 학습기억은 책 읽기나 경험을 통해 얻는 것, 신념기억은 정치나 종교적인 기억을 뜻해요. 그런데 책을 읽지 않으면 학습기억이 줄고 그 자리를 신념기억이 차지하거든요. 그러면 자기주장이 강해지고 융통성이 없어지죠. 그렇기 때문에 나이 들수록 책을 읽고 학습기억을 키워 균형을 맞춰야 해요. 그래야 다른 세대와 원활히 소통할 수 있습니다.”
책은 많이 읽는 것이 삶에 이롭지만, 그 외의 것들은 최대한 적게, 단순하게 하는 것이 현상의 본질을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된다고 덧붙였다. 최소한의 것으로 최대의 인생을 만들어가는 ‘미니멀라이프’를 실천하고 있다는 그는 적게 소유할수록 크게 생각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너무 많은 것들이 복잡하게 쌓여 있으면 그 물건의 진가가 잘 안 보여요. 겉으로는 풍족해 보일지라도 그 하나하나의 가치는 희석돼버리고 말죠. 불필요한 요소들을 걷어내고 꼭 필요한 것만 남겼을 때, 가진 것에 대한 소중함을 깨달을 수 있어요. 물건뿐만 아니라 마음도 마찬가지예요. 욕심이나 사심을 비워냈을 때 본인의 가치를 발견하고,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죠.”
비울수록 충만해지는 행복을 경험하고 싶지만, 막상 물건이든 마음이든 비워내려고 하면 쉽지 않다. 수긍이 가는 말들이지만 결국은 실천이 문제다.
“버리는 삶은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아요. 무언가를 많이 가지고 있어야 안심하고, 움켜쥐려는 성향이 강하거든요. 옷장을 열면 옷이 가득한데도 입을 옷이 없다고 하죠. 몇 년째 입지 않은 옷들이 걸려 있으니까요. 그러면 버리거나 누구에게 주거나 해야 하는데, ‘언젠가는 입을 거야’라는 생각에 그대로 걸어두죠. 하지만 그 ‘언젠가’는 오지 않을 확률이 높아요. 특히 나이 들어서 갖는 그런 욕망을 노욕이라고 하는데 남들이 볼 때 굉장히 추합니다. 불편하고 쉽지 않겠지만 실천적 결단이 필요하죠. 우리는 단호해질 필요가 있어요.”
삶의 단순화에 대한 장 시인의 시각은 그의 산문집 에 잘 나타나 있다. 모든 군더더기를 없애고 최소화하려 하지만, 독서와 산책만큼은 충분히 즐긴다. 글을 쓰는 게 그의 일이기에 육체보다는 정신적 노동에 과부하가 걸리곤 한다. 그럴 때 산책을 하면 어지럽혀져 있던 생각을 정리하고 비울 수 있기 때문에 정신적 피로를 푸는 데는 효과만점이라고.
“걷다 보면 사유가 깊어지고 자기성찰에 몰입할 수 있어요. 잡념은 사라지고 내면의 기쁨이 차오르는 것을 느끼죠. 물론 건강에도 도움이 되고요. 무엇보다 걷는 동안 내가 살아 있다는 행복을 오롯이 느낄 수 있기 때문에 가장 귀하고 가치 있는 시간이라고 생각해요.”
직장과 가정을 함께 꾸려나가는 맞벌이 주부는 슈퍼우먼이 아닌 한 힘이 든다. 게다가 명절날 시댁 가서 이런저런 일을 거들고 집에 오면 녹초가 다 되니 무슨 핑계 거리라도 만들어 시댁에 안 가거나 음식 장만에 열외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만도 하다. 일도 해본 사람이 한다고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곱게만 자라 시집 온 대부분 며느리들이 명절증후군을 느낄 만도 하다. 명절음식은 가짓수도 많고 양도 많다. 잘못했다고 야단맞을 까봐 겁도난다. 심지어 명절 후유증으로 이혼하는 사례도 있다하니 그냥 웃어넘길 일이 아니다.
지난 추석때 힘든 시댁 일을 피하기 위해 가짜로 아픈 척 깁스를 하는 며느리가 늘었다고 한다. 방송에서도 가짜깁스 판매업체에서 나와서 하는 말이 “(매출이) 한 100%정도 올랐다고 보시면 돼요. 명절 앞두고 가사노동이나 개인적인 핑계거리가 없어서 필요하신 분들”이라고 한다. 물론 연출용 깁스가 며느리만 애용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나 연극에 소품으로도 쓰이고 결근(결석)이나 조퇴용으로도 사용하니 전부 명절 때문에 늘어났다고 보기는 어렵다.
차례나 제사음식을 간소화하는 음식문화 혁명이 필요하다. 조상에 대한 정성이라고 하여 한 상 그득 그득 쌍아 올리고 겨울에 수박을 다 올린다. 주부들의 말을 빌리면 ‘그래도 명절인데’ 초라한 음식상은 친척들 눈치가 보이고 ‘그래도 조상님 제사상인데’ 정성스럽게 최고급품을 준비해야지, 하는 유교적 효의 문화가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고 있어 간단히 하기도 어렵다. 예절과 관련한 음식문하는 주부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유림이나 국가에서도 물꼬를 터주고 각 가정에서도 열린 마음으로 가족회의를 열어 원만하게 해결하였으면 한다.
명절 때 남은 음식처치에 집집마다 골머리를 앓고 있고 명절 후에는 각 방송사에서 남은 음식 조리법이 어김없이 방영된다. 음식물 쓰레기로 쓰레기 하치장이 몸살을 앓을 정도로 넘쳐난다. 사회 지도층 인사부터 명문가에서부터 달라진 시대상을 반영하여 차례상, 제사상을 간소화 하는데 앞장서고 각종 언론에서도 이를 널리 홍보하면 차츰차츰 줄어들지 않을까 생각된다.
연출용 깁스를 사용하는 일이 비록 일부의 일이라고는 하나 이런 세태까지 등장한 것은 집안일을 분담하지 않는 낡은 가부장적 문화와 어떻게든 과중한 책임에서 벗어나보려는 ‘이기주의’의 ‘잘못된 만남’이라는 분석이 가능하다. 가족회의를 통해 음식준비를 줄이고 음식 장만에 가족 모두 역할분담을 새롭게 만들어 즐거운 명절, 진심으로 조상을 섬기는 제사상 차림이 되었으면 한다.
부득이 이사를 하면서 더 이상 책을 수납할 공간이 없어서, 아니면 부모님이 소장하고 계시던 유품들을 정리하다가 남게 된 책들, 이러한 책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 아끼던 책, 다 읽은 책, 필요가 없어진 책, 기증 받은 책들 중 한 권 한 권 정리하며 내놓았다. 쌓을 대로 쌓아 놓고 보니 어마어마하다. 가물가물 새록새록, 기억의 조각을 더듬어 열어 본 책 틈에 낀 먼지에서 청춘이 흩날린다.
좋은 책, 나쁜 책, 이상한 책에 따라 사고파는 가치가 달라진다. 괴테의 말에 ‘지금 네 곁에 있는 사람, 네가 자주 가는 곳, 네가 읽은 책들이 너를 말해 준다’처럼 그 사람의 마음을 가늠하기 어려울 때 그 사람의 책장을 보면 된다. 수십 년 소중하게 보관해 왔던 책을 팔아 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차곡차곡 박스에 담아 고생해서 헌책방에 가져갔지만, 주인의 짠 가격 매김에 다시 들고 돌아와야 하나 아니면 울며 겨자 먹기로 책을 넘길 것인가의 갈림길에서 한 번쯤 고민해 봤을지 싶다. 그 책의 가치를 아는 것은 자신이고, 자신만큼 그 책을 사랑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제대로 값을 쳐 주고 새로운 주인에게 책을 내어 주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같을 텐데,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좋은지 살펴보자. 분명한 것은 같은 책이라도 파는 이의 정보력에 따라 다른 값에 팔린다는 점이다.
첫째, 책의 상태를 점검한다.
중고 책의 값을 결정할 때 당연히 책의 상태가 중요하다. CD와 DVD 등의 부속품이 딸린 책이라면 그게 없을 경우 거래 가격은 뚝 떨어진다. 인기 작가의 소설과 유명 인사의 저작 등의 단행본이라면 책 띠까지 갖춘 미품(美品) 상태라면 그렇지 않은 책보다는 높이 평가받을 수 있으며, 초판본의 경우엔 그 희소성 때문에 더 주목을 받을 것이다. 또한 영화화한 작품이라든지 문학상 수상작품, 그리고 화제의 인물과 관련된 책 등 시대와 유행에 따라 책의 희소가치는 시시각각 변하고 있으니 그런 점들도 눈여겨봐야 하겠다.
그밖에도 읽으면서 밑줄을 친 곳은 없는지, 혹시 저자의 친필 사인이 들어 있는 책은 아닌지 팔기 전에 우선 꼼꼼히 책의 상태를 점검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전집이라면 당연히 완질 상태, 시리즈라면 전부 갖춘 상태라야 제값을 받을 수 있다. 잡지의 경우라도 창간호부터 있거나 화제의 인물과 기사가 실려 있으면 수집가 혹은 연구자들에게 그 가치를 평가 받을 것이다.
둘째, 중고 책의 가격대를 알아야 한다.
인기 있는 책은 당연히 비싼 가격에 팔린다. 아울러 재고량과 희귀품인지 아닌지도 거래 가격의 결정에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소장한 책의 현재 거래 가격 내지 적절한 가격을 알아 두는 건 큰 도움이 된다.
셋째, 해당 분야의 전문 책방을 이용한다.
책값을 매기는 것은 그 책의 상태와 가치이다. 상태야 눈썰미 있는 사람이라면 꼼꼼히 살펴보면 알겠지만, 그 책의 가치는 전문가가 아니고서는 사실 알기 힘든 부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같은 책이지만 업자에 따라서 값이 들쑥날쑥한 법이다.
음악과 미술 서적은 예술 계통의 전문 책방에, 의학서라면 의학 관계 서적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서점에 가져가야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팔기 전에 조금 수고스럽겠지만, 그 분야의 지인들 혹은 전문가에게 조언을 구하거나 인터넷으로 검색해 본 뒤 사전 지식을 갖는 자세가 필요하겠다.
넷째, 온라인 전문 사이트를 이용한다.
처분할 책이 많거나 헌책방까지 갈 시간이 없을 경우 등등 그 밖의 이유로 온라인 전문 사이트를 이용할 경우가 있다. 사이트에 따라 책 점검과 가격 결정, 그리고 판매 대금 입금 방법 등 차이가 있으며, 차별화된 서비스와 장·단점을 서로 비교해 봐야 한다. 또한장르별로 전문적 지식과 경험이 있는 경우도 있으니 온라인 전문 사이트가 헌책방보다 더 싸게 거래된다는 생각은 편견일 수도 있다.
특히, 판매하지 않더라도 온라인 전문 사이트를 통해 값을 비교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니 자신의 책이 어느 정도 값이 매겨지는지 사전 조사 차원에서도 이용하면 좋을 것이다.
다섯째, 인맥과 SNS를 이용한다.
헌책방이나 온라인 전문 사이트를 이용하지 않고, 직접 필요한 사람에게 파는 직거래야말로 책의 가치를 제대로 이해하고 아껴줄 사람에게 책을 처분하는 가장 이상적인 방법일 것이다.
하지만, 필요로 하는 사람이 어디 있는지 모르고, 어떻게 알야 봐야 하는지 알 수 없는 게 대부분이다. 그럴 때는 자신의 인맥과 카카오스토리, 페이스북, 트위터 등 소셜 네트워크를 이용하는 게 효율적이다. 판매자, 즉 책을 소장한 자신이 누구인지 분명하기에 처분할 책을 구입하려는 사람도 안심하고 거래할 수 있다는 장점과 함께 책 거래를 통해 새로운 인맥이 형성될 수도 있을 것이다.
여섯째, 중고 및 경매 사이트를 이용한다.
내가 처분할 책의 값을 직접 매길 수 있는 중고나라, 벼룩시장 등의 중고 사이트를 이용하는 방법도 좋겠다. 또한, 처분할 책을 갖고 싶어 하는 사람이 여러 명 있을 것 같다는 판단이 서면 옥션 등 경매 사이트를 이용하면 경매에 참여하는 사람들로 인해 판매 가격이 올라갈 것이다.
출간된 지 50년 이상 된 책이거나 유명 작가와 저명인사의 사인이 들어 있는 책 등 소장 가치가 높다고 판단되는 책이라면 고서 및 골동품이나 예술품 등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경매 사이트를 이용한다면 생각지도 못한 놀라운 결과를 얻을수도 있겠다.
1. 개똥이네 www.littlemom.co.kr 중고서적 전문 사이트, 중고 및 새책 판매, 가격비교, 이벤트 등 정보 제공.
2. 북코아 www.bookoa.com인터넷 헌책방, 교과서, 전공서적 구입 및 판매, 오픈마켓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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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P]중고 책 구매를 피해야 하는 책
1. 최근의 트렌드를 반영하고 있는 책
2. CD등의 부록이 있는 책
3. 시간의 제약을 받는 몇몇 실용도서
4. 시리즈나 일련번호의 도서
인생에서 가장 좋을 때는 언제일까? 순진무구하고 혈기왕성했던 시절을 떠올리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인문학자 김경집(金京執·57)은 “지금 내 나이가 가장 좋다”고 말한다. 그는 중년 이후의 삶은 ‘의무의 삶’을 지나 ‘권리의 삶’을 사는 시기라고 설명했다. 그만큼 자신이 누릴 수 있는 자유와 즐거움을 만끽하며 살기에 가장 좋은 때는 바로 ‘지금’이라는 것. 그런 생각을 담아낸 책이 바로 이다.
글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책을 쓸 때 그는 40대 후반이었다. ‘나이듦’에 관해 이야기하기엔 덜 늙은(?) 게 아닌가 싶지만, 10년이 흐른 지금도 그때의 생각은 변함이 없다고 한다. 제목에 쓴 ‘나이듦’이란, ‘늙어감’이 아닌 ‘제 나이를 사는 즐거움’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기 때문. 그가 이야기하는 ‘제 나이를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어려서는 어른처럼 성숙해 보이려 하고, 반대로 어른이 되면 한 살이라도 어려 보이고 싶어 하죠. 그러니 정작 제 나이를 살아본 적이 없는 거예요. 오히려 자기 나이를 벗어나려고 애쓰고 있죠. 그렇게 힘들일 것 없이 제 나이에 맞춰 자연스럽게 즐기며 사는 편이 더 행복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노력한다고 해서 늙는 것을 막을 수도 없잖아요. 그렇다면 자기 삶의 결대로 즐겨 보자는 거죠. 그런 마음으로 제 나이를 인식하고 누릴 방법을 찾다 보면 진정으로 내 나이가 좋아져요.”
그가 나이 들어 좋은 것 중 하나는 ‘자유로운 삶’이다. 의무감으로 바쁘게 살아왔던 지난날 못해 본 것들을 하나씩 해나가는 기쁨이 크다고 한다. 무언가에 얽매이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자유’ 역시 나이가 들어 얻게 된 것이니, 지금의 나이가 고마울 수밖에.
5차선 곡선도로를 달리며 음미하는 풍경
그는 40대에서 50대로의 변화를 도로가 4차선에서 5차선으로 확장되는 것과 같다고 표현했다. 그동안 달려온 4차선 도로는 직선이었지만, 현재의 5차선 도로는 자유로운 곡선형이라고 한다. 바뀐 것은 도로만이 아니었다.
“운전할 때 속도를 올리는 것만 신경 쓰면 주변 풍경을 놓쳐 버려요. 풍경을 감상하면서 가려면 속도는 떨어지고요. 초보 운전 때(젊은 시절)는 노련하지 않으니 그럴 수밖에 없잖아요. 이제는 적당히 속도를 내면서 동시에 풍경도 볼 수 있는 나이가 됐죠. 직선도로의 속도와 곡선의 여유로움을 자유자재로 컨트롤할 수 있어요.”
차선이 하나 더 늘어나며 생긴 변화도 있지만, 그의 인생에 가장 큰 변곡점은 교수로 지내던 가톨릭대학교를 떠났을 때다. 당시 그의 나이 쉰넷이었다. 정년까지 10년은 더 남았기에 그의 행동을 이해 못 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런데도 용단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은 젊은 시절 그려 보았던 인생 계획을 실천해 내기 위함이었다.
“서른 살 무렵에 막연히 ‘나는 25년은 배우고, 25년은 가르치고, 25년은 마음껏 책 읽고 글 쓰며 문화운동에 뜻을 두고 살겠다’는 꿈을 꿨었어요. 누구에게 말한 적도 없고 혼자 괜히 무게를 잡은 건데, 살다 보니 잊고 지냈었죠. 근데 쉰이 넘어서 갑자기 떠오른 거예요. 한편으론 두렵더라고요. ‘이걸 정말 해, 말아?’ 결국 하자고 결심했고, 교수생활 딱 25년을 채우고 미련 없이 학교를 나왔어요.”
‘나였던 그 아이’와 ‘나인 그 아이’가 만나는 시간
계획대로 세 번째 25년을 살고 있는 그는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꿈들을 되새겨 보곤 한다. 일하느라 바빠 잊힌 꿈도 있고, 이룰 수 없기에 애써 잊은 꿈도 있었다. 그는 삶의 무게를 한 꺼풀 덜어 낸 지금이야말로 꿈을 되찾고 이뤄 나가기 좋은 때라고 했다.
“젊어서는 능력도 부족하고 여유가 없어 하기 어려운 일이 많죠. 나이가 들면 그동안 형성한 네트워크나 삶의 노하우가 더해져 꿈을 실현할 가능성이 커져요. 오래전 꿈을 자꾸 돌이켜보고 새로운 꿈도 꾸며 작게나마 이뤄갈 수 있는 것도 나이 들어 즐거운 일 중 하나죠.”
그는 “꿈을 실현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과정에서 얻는 깨달음”이라며 파블로 네루다의 시집 에 나오는 ‘나였던 그 아이는 어디 있을까? 아직 내 속에 있을까? 아니면 사라졌을까?’라는 문장을 인용했다.
“사람들에게 ‘행복하세요?’라고 물으면 흔히들 ‘그렇다’고 해요. 돈은 많지 않아도 먹고사는 데 지장 없고, 아이들 건강하게 잘 컸으니 이만하면 행복하다는 거죠. 그런 분들에게 ‘그럼 지금의 삶이 어렸을 적 꿈꾸던 그 삶입니까?’라고 되물어요. 그러면 대답을 잘 못 해요. 그 이유가 ‘나였던 그 아이’하고 ‘나인 그 아이’를 만나게 하지 않아서라고 생각해요. 꿈은 ‘나였던 그 아이’가 꾸는 게 아니라 ‘나였던 그 아이’가 꾼 꿈을 ‘나인 그 아이’가 지금 실현하는 거예요. 꿈이 없다는 건 ‘나인 그 아이’가 없거나, ‘나였던 그 아이’를 잊은 거죠.”
이 두 아이가 대화하고 서로 격려하며 때론 갈등도 하면서 자주 만나야 내적인 삶이 더 풍부해질 수 있다고 한다. 그런 그는 꿈을 잘 이뤄가며 사는지 궁금했다.
“‘꿈을 이룬다’보다는 ‘꿈을 누리다’라는 말이 더 좋더라고요. 꿈은 성취가 중요한 게 아니라 누리고 있는 현실 자체가 즐거운 거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자꾸 획득하려고만 하죠. 젊어서의 꿈은 목표지향적일 수 있지만, 나이 들어서의 꿈은 과정을 즐기는 데 의미가 있어요.”
그는 현재의 삶이 과거 꿈꾸었던 삶과 어느 정도 맞는 편이라고 했다. 30대 때 이루고자 했던 25년 단위 인생 계획도 잘 지켜가고 있다. 그러나 100세 시대라 불리는 요즘, 네 번째 25년에 대한 계획도 필요하지 않을까? 그는 10년쯤 후에 생각해 보겠다고 답했지만, 어느 정도 밑그림은 그려 놓은 듯 했다.
“75세쯤 되면 무언가를 생산하는 게 아니라 사람을 이어 주고, 다음 세대를 격려해 주는 일을 해야겠죠. 문화공동체운동 같은 걸 계속해 나가려고 해요. 아무리 좋은 뜻으로 만나는 모임이라도 부딪히는 일이 생기죠. 그런 갈등을 풀어 주고, 다시 연결하는 ‘매개 점’ 역할을 하는 게 어른의 몫이라 생각해요. 꿈은 혼자 이루는 것도 있고, 함께 해 나가는 것도 있죠. 혼자 악악거리며 사는 것보다는 사람들이 모여 만든 꿈에 벽돌 한 장 쌓을 수 있다면 좋겠어요.”
새해 첫날 쓰는 인생의 끝자락
매사 꿈을 꾸라고 조언하면서도 그는 해마다 1월 1일이면 유서를 쓴다. 지난해 서랍에 넣어두었던 유서를 꺼내 읽고 새 유서를 쓰는데, 그 과정에서 얻는 깨달음이 남다르다고 한다.
“열세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예닐곱 살쯤 아버지랑 산에 갔다가 못 내려오게 됐는데 밤하늘의 별을 보며 이런 말씀을 하셨죠. ‘저 별이 아무리 예뻐도 너만큼 사랑스럽고 아름답지는 않아. 아버지는 널 제일 사랑해’라고요. 조금 오글거릴 수도 있는데 지금까지 그 말이 살아서 마음이 흔들리고 어려울 때마다 생각나요. 그 한마디가 나를 지켜 준 것처럼 우리 아이들에게도 인생을 사는 데 좌표가 될 만한 이야기를 남겨야 하잖아요. 언젠가 제가 떠나고 나면 서랍 속에 담아 뒀던 유서가 그 역할을 할 수 있겠죠.”
매년 쓰는 유서는 일종의 인생 계획서이자 지침서가 된다. 다음 해 유서를 풍요롭게 채우기 위해 올 한해도 허투루 살지 않아야겠다는 다짐도 하고, 자기 성찰도 하며 삶을 돌아보기도 한다. 의미 있는 유서이지만 모아 두지는 않는다. 그런 행동도 집착이고 결국 얽매이게 된다는 것이다.
“새 유서를 쓰기 전에 한 번 읽으면서 ‘올해 결산 괜찮네!’ 하고 탁 태워 버려요. 그러고 깔끔하게 잊어버리죠. 내가 정해 놓은 거지만 가끔은 쓰기 싫을 때도 있어요. 그럴 땐 ‘그럼 음력설에 쓰지 뭐’ 그래요.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남의 눈치 봐야 하는 일도 아닌 내 자유니까요.”
어느 대학교의 철학교수가 수업 첫시간에 학생들에게 아는 철학자의 이름을 말해보라고 하면 대부분 소크라테스, 플라톤 등 외국의 철학자를 들먹이고 아주 드물게 퇴계 이황선생을 말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위대한 선조보다 외국의 누구를 알아야 지식인 취급을 받고 있는 것을 안타까워 합니다.
퇴계는 조선시대 성라학의 대가입니다. 그의 학문적인 업적은 너무 깊고 높아 배우려고 하다가 포기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학문보다도 그의 인간미에 반하여 그를 존경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퇴계의 손자며느리가 아이를 낳았는데 년년 생이라 젖이 잘 나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마침 고향집 하녀 학덕이가 딸을 낳았다는 소식을 손자며느리가 듣고는 유모로 보내달라고 퇴계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퇴계는 이 편지를 받고 엄하게 나무랍니다.
“남의 자식을 죽이면서 제 자식을 살리는 것은 사람으로서 차마 못할 짓이다.” 그리고는 증손자를 위해 약을 지어 보내고 또 증손자가 병이 있음을 듣고 괴로운 심정을 편지로 써서 손자에게 보냈습니다. 왕자도 유모의 젖을 먹고 양반이 유모를 들이는 것이 보편화된 시대에 젖이 부족하여 죽어가는 증손자의 죽음을 앞에 두고 그가 취한 행동은 위대합니다. 결국 이 아기는 증조부인 퇴계를 보지 못하고 요절하였다고 합니다.
퇴계가 단양군수로 재직할 때 둘째아들이 21세의 젊은 나이로 타계했습니다. 아들의 죽음도 슬픈 일이지만 자식도 없이 한평생 과부로 살아야할 며느리가 큰 걱정입니다. 여필종부, 부창부수, 삼종지도 의 봉건적인 조선시대에 여인의 재혼은 꿈도 꾸지 못하던 시절입니다. 이렇게 재혼금지라는 제도가 강하게 된 이유가 과부가 재혼하면서 배속에든 아이가 전 남편의 자식인지 지금 남편의 자식인지가 아리송한 일이 생기자 1477년에 ‘과부제가급지법’(1896년 감오경장 때 폐지) 이 만들어졌습니다. 비록 사대부 출신이라 해도 과부로서 재가하여 낳은 아들이라면 관직이 철저히 봉쇄되었습니다.
반면 과부로서 평생 수절하고 정절을 지키면 국가유공자에게 포상하듯 기념비를 하사하고 수절한 과부의 희생을 그 가문과 후손에게 혜택으로 보상하였습니다. 이런 시대에 퇴계는 며느리의 인간다운 삶을 고려하여 사돈을 불러서 둘째며느리를 데려가도록 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의 통념을 깬 것입니다. 며느리의 재가는 가문의 큰 수치이지만 퇴계는 가문보다는 며느리의 삶을 걱정하고 결행 했습니다. 사돈도 퇴계의 뜻을 이해하고 은밀하게 그녀를 재혼시켰다고 합니다.
퇴계가 조정의 부름을 받고 서울로 올라가던 중 어느 기와집에 유숙하게 되었습니다. 퇴계는 주인집에서 차려준 밥상이 고기보다 채식을 좋아하는 자신의 식성에 맞게 차려진 밥상을 보고 기이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아침 식사 후 주인이 예법대로 버선을 선물하였는데 버선의 크기가 자신의 발 치수에 정확함을 알고 이 집의 안주인이 자신의 며느리였었음을 눈치를 챘지만 서로의 체면을 생각하여 모른척했다고 합니다. 주인집을 멀리 떠나와 퇴계가 뒤돌아보니 자신의 둘째며느리가 담 모퉁이에서 자신을 바라보며 배웅하는 것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며느리의 재가 사실이 알려지면 퇴계 선생과 그 가문이 받아야 할 치욕은 이만저만 한 게 아닙니다. 지금 까지도 퇴계 후손들은 며느리의 재가를 입에 올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가문의 명예를 위해서는 목숨도 버리지 않는 유교문화의 조선사회에서 그가 어렵게 택한 결행은 인간 사랑이고 가족사랑입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좋아하고 닮고 싶은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람이 너무 신과 같아서 도저히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능력의 소유자를 가까이 닮기에는 너무 벅찹니다. 내가 한발만 더 내 디디면 손에 잡힐 듯한 우리의 영웅이 필요합니다. 너무도 인간적인 퇴계의 삶에서 나는 따뜻한 사람의 정을 느끼고 그를 존경합니다.
한기호 출판평론가
발견으로서의 기획 이후의 출판
프랑스문학 전공자인 가시마 시게루(鹿島茂)의 ( 2016년 3월 임시증간호)에 라 퐁텐의 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이 책이 출간된 루이 14세 시대(17세기)에도 너그러운 후원자와 그렇지 않은 후원자가 있었다. 라 퐁텐의 에는 루이 14세나 다른 왕족, 귀족을 비판하는 부분이 꽤 많다. 이런 책이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가 세상에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은 동물을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사람을 직접 비판하지 않고 동물에 빗대어 우회적으로 비판하는 것이 우화다. 도 원래 그런 것이었는데, 라 퐁텐이 손을 봐서 훨씬 더 신랄하게 위선자를 비판하는 바람에 많은 인기를 끌고, 지금도 살아남아 독자의 손을 타고 있다.
2006년의 한국 출판시장에서도 우화는 상한가를 쳤다. 그때 우화는 이솝이나 라 퐁텐의 우화가 아니었다. 이른바 ‘성공우화’였다. 호아킴 데 포사다의 를 비롯해 한상복의 (위즈덤하우스), 스튜어트 에이버리 골드의 등이 상한가를 쳤다. 성공우화의 인기 시발점이 스펜서 존슨의 (진명출판사)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지금 출판시장이 요동을 친 계기가 된 것은 스마트폰의 등장일 것이다. 필자는 2004년부터 “휴대전화(이제는 스마트폰이라 부르는 것이 옳을 것이다)는 모든 행동의 출발점이 되고 있다. 그것은 매체(미디어), 상점, 판매채널, 만남의 공간 등 인간의 행위를 이끄는 기점”이라고 말해 왔다. 스마트폰으로 결제 기능마저 가능해지자 웹툰과 웹소설 시장이 급격하게 확대되기 시작했다. 이제 인간이 추구하는 텍스트는 완전히 달라져야만 한다.
21세기에는 ‘무엇’(What)을 어떻게 연결해 제대로 말하는가가 중요하다. 정보는 다른 정보와의 관계 속에서 의미가 발생한다. 정보를 서로 비교하면 차이(변별)가 생긴다. ‘차이’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보여주는 텍스트가 아니면 종이책은 살아남을 수 없다. 종이책은 그래픽 디자인에 힘입어 그런 능력이 더욱 강화될 것이다.
발명으로서의 책
그렇다. 이제 책은 달라져야 한다. 그것을 ‘발명’으로서의 책이라 부르면 어떨까. 새로운 장르라도 좋고, 새로운 텍스트라도 좋다. 가령 ‘본 디지털’로 생산해 가장 성공한 사례인 ‘휴대전화소설’(우리는 웹소설이라 부른다)만 해도 일본의 출판기획자인 우에무라 야시오(植村八潮)가 일찍이 지적했듯이. “휴대전화소설은 ‘뺄셈’이다. 표현도 줄이고, 그림도 빼고, 글자 수도 줄여서 멋지게 ‘본 디지털’로 성공했다.” 그러니 우리는 시대의 변화에 맞게 새로운 책을 발명할 줄 알아야 한다.
지금 베스트셀러 1위에 올라 있는 (세계사)은 또 어떤가. 1996년에 출간된 박영규의 (웅진지식하우스)은 드라마 의 인기에 힘입어 판매에 불이 붙었고, 결국 밀리언셀러의 반열에 올랐다. 필자는 (교보문고)에서 이렇게 썼다. “을 한 권으로 축약해 역사서로는 드물게 130만 권이나 팔린 은 비록 대학에서 독일어와 철학을 전공하고 전문 글쓰기를 위한 10여 년의 노력을 거친 전문 집필가의 책이기는 하지만 역사학자가 쓴 책은 아니다. 이 책은 비전공자의 대중적 역사 쓰기라는 점 때문에 역사학계에서는 철저하게 외면 받았다. (…) 하지만 이 책은 대중의 역사인식 눈높이와는 절묘하게 맞아 떨어져 이후 비전공자들이 쓴 대중 역사서들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는 계기가 되었다. 비전문가 신인이 일을 낸 대표적 사례다.”
딱 20년 만에 다시 나온 은 차례부터가 재미있다. 저자는 조선 27대 왕에게 모두 ‘OOO 호랑이’라는 저마다의 닉네임을 붙여 줬다. 태조는 ‘이빨 빠진 호랑이’, 정종은 ‘무늬만 호랑이’, 태종은 ‘진짜 호랑이’, 세종은 ‘위대한 호랑이’, 문종은 ‘피곤한 호랑이’, 단종은 ‘어린 호랑이’, 세조는 ‘무서운 호랑이’. 그러나 호랑이가 되지 못하고 고양이에 머무른 두 왕이 있다. ‘도망간 고양이’ 선조와 ‘나라 뺏긴 고양이’ 순종이다. 강연 현장을 담은 글이라 너무 잘 읽힌다. 삽화도 재미있다.
가시마 시게루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 시집을 사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그래도 아주 없지는 않지요. 자기 표출의 시로 환원되는 형태나 그런 것을 포함한 형태만이 활자미디어로서 살아남을 겁니다. ‘자연스러운 문체를 대할 때 사람들은 크게 놀라고 기뻐한다. 한 작가를 만나리라 기대했는데 뜻밖에도 한 인간을 만났기 때문이다.’ 파스칼이 한 말입니다. ‘그 책을 읽으며 저자가 아닌 인간을 만나는 책’이 자기 표출형 책입니다. 책 내용은 모두 잊어버려도 그 사람과 내가 서로 공감했다고 느낀 기억만은 남습니다. 그러면 같은 저자의 다른 책도 사고 싶어집니다. 반면 저자밖에 만나지 못한 책은 같은 저자의 책을 사고 싶다는 마음이 안 생깁니다. 책에 독자가 붙는다는 건 그런 겁니다. 정보 외에 무언가 자기 표출이 있는 책은 사람을 끌어당깁니다. 지시 표출 형으로 보이는 산문에서도 언어의 배치, 치환, 문체 등으로 자기표출이 이루어지고 있어서 독자는 돈을 들여서라도 다음 책을 읽고 싶어 합니다. 이것이 표현의 원점입니다. 인터넷사회의 정보 속에는 없는 것입니다. 결국 거기까지 갈 수밖에 없다는 게 출판의 가까운 미래에 대한 제 예상입니다. 마지막에 남는 건 시집 정도겠지요. 그렇게 내리막길을 걸어도 출판이 완전히 없어지는 일은 없을 겁니다. 시집이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자기 표출형 책은 정보가 아니어서 설령 인터넷에 공개되어 있다고 해도 하나의 물건으로서 소유하고 싶어집니다. 이것이 자기 표출 미디어의 특징입니다.”
무섭다. 정말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책은 무엇일까. 가시마 시게루는 “고서의 가격이 비싼 이유는 책에 작품성이라는 가치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출판도 인터넷사회 이후에는 개인출판처럼 일종의 창조행위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적은 부수로도 어떻게든 헤쳐 나갈 수 있습니다. 마지막에는 그렇게 되리라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그의 말 속에도 이제 책을 ‘발견’하는 것 이상으로 하늘 아래 없는 새로운 것을 ‘발명’해야만 마지막까지 살아남을 수 있다는 단언이 들어 있는 것 같다. 새로움이란 결국 생각의 차이다. 그 차이를 찾아내는 최상의 방법은 책을 함께 읽고 토론하는 과정에서 드러난다. 그러니 책이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것임은 자명하다.
>>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1982년 출판계에 편집자로 입문해 15년 동안 일하다 1998년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를 설립했다. 출판전문지 격주간 를 창간해 올해로 18년째 발간해 오고 있다. 2010년 한국 최초의 민간 도서관 잡지인 월간 을 창간해 학생들을 대상으로 책읽기운동을 벌이고 있다. , , , , , 등 저서와 다수의 공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