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서에 나오는 대홍수가 끝난 후 ‘노아의 방주’가 멈춘 곳은 해발 5000여m 높이의 아라라트 산이다. 노아는 비둘기를 이용해 세상으로 나올 때를 확인한 뒤 제단을 쌓고 첫 포도원을 가꾸는 등 새로운 삶을 이곳에서 시작했다. ‘아라라트’라는 명칭은 ‘우라르투’(Urartu)의 히브리식 이름이다. 우라르투 왕국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중심 국가 아시리아와 대적하기도 했으나 기원전 6세기에 페르시아에게 멸망당했다. 그 후 페르시아 제국에서는 총독을 파견해 이 지역을 다스리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우라르투는 ‘아르메니아’(Armenia)로 불렸다. 이렇게 노아의 후손들이 지켜온 땅 아르메니아는 오랜 시간을 버텨오며 생긴 슬픔의 생채기를 처연한 바람의 아름다운 숨결로 들려주는 곳이다.
가장 오래된 도시 예레반의 품격
아르메니아는 한글보다 1000년 이상 앞서 만든 그들만의 고유문자를 가지고 있다. 한국의 3분의 1 정도 되는 2만9000㎢ 면적에 해발 1000m가 넘는 산악지대가 전체의 90%를 차지한다. 총인구는 300만 명.
이 중 35%인 106만 명이 수도 ‘예레반’(Yerevan)에서 살고 있다. 이곳에서는 어디서든 아라라트 산이 보인다. 아르메니아인들에게 이 산은 삶의 시작이자 궁극적으로 돌아가야 될 아름다운 보금자리다. 그리고 영혼을 치유해주는 곳이다. 치유는 밝은 곳에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빛과 어둠이 서로 만나는 곳에서 시작되며 그런 곳에서 기적이 일어난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은 수천 년의 슬픔을 덮어온, 자신들의 시작이자 끝인 아라라트 산을 언제나 보고 싶어 한다. ‘베르니사시 시장’ 한복판, 화가의 거리에서 만나는 대부분의 그림은 아라라트 산과 노아의 방주를 그렸다. 아르메니아에 입국할 때 출입국 심사대에서 여권에 찍어준 스탬프에도 아라라트 산을 의미하는 산 모양이 선명하다.
인간이 살아온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한 곳인 예레반은, 구 소련의 건축가 ‘알렉산더 타마니안’(Alexander Tamanyan)이 아르메니아가 소비에트 지배하에 있을 때 설계한 계획도시다. ‘공화국 광장’에서 ‘자유 광장’을 거쳐 ‘캐스케이드’에 이르는 시내 거리는 신고전주의풍 건물들로 장식해 마치 파리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여행 온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예레반은 잃어버린 낭만을 되찾아줄 것만 같은 분홍색 빛을 띤 도시다.
해외 유명 브랜드숍과 유럽풍 분위기의 레스토랑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길은 광장과 광장을 연결해준다. 노천카페에는 까맣고 짙은 눈썹의 아르메니아인들이 누군가를 하루 종일 그리워하는 것 같은 눈길로 지나가는 여행자를 바라본다. 원형 형태의 오페라 극장에서 흘러나오는, 체리빛 노을 색을 띤 바이올린의 흐느낌은 이방인의 발걸음을 잡는다. 수업시간을 기다리던 발레 아카데미의 청소년들은 수줍어하면서도 주차 요금기를 사용할 줄 모르는 외부인을 위해 기꺼이 무언의 손길을 내민다. 국민소득이 낮은 국가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문화적 품격이 돋보인다. 무엇을 흉내 낸 가벼움이 아니라 오랫동안 쌓아온 그들만의 자연스러움과 자존감이 스며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르메니아에 다시 가고 싶어 하고, 예레반을 오래 머물고 싶은 도시로 꼽는다.
아르메니아 제노사이드
아르메니아 국화는 ‘물망초’다. 6000년의 역사를 가진 그들에게는 20세기에도 가슴 아픈 역사가 있다. 제1차 세계대전 때 오스만 제국에 의해 행해진 아르메니아인 집단 학살이다. 오스만 제국에서 살고 있던 250만여 명의 아르메니아인들 중 150만여 명이 살해당했다. 이 참화는 1973년 유엔에 의해 ‘20세기 최초의 제노사이드’로 규정됐다. 이어서 많은 나라가 공식적으로 제노사이드(genocide, 국민·인종·민족·종교의 차이 등으로 집단을 박해하고 살해하는 행위)로 인정했다. 이 역사를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건 야만과 폭력으로부터 우리와 후손들의 삶의 가치를 보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레반의 서쪽 언덕에는 ‘제노사이드 추모 공원’이 있다. 아르메니아를 방문하는 다른 나라 정상들도 이 공원에 꼭 들러 기념식수를 한다. 추모탑 밑에는 절대로 잊지 말라는 의미에서 365일 꺼지지 않는 불꽃이 있다. 상처를 극복하는 길이 무조건적인 망각은 아니기에 물망초를 국화로 선택한 아르메니아의 아픔에 공감이 된다.
제노사이드 때 학살을 피한 난민들은 세계 각지로 흩어져 아르메니아 디아스포라(교포)를 형성했다. 현재 해외에 사는 아르메니아인은 800만 명으로 아르메니아 인구보다 많다. 해외에 거주하는 아르메니아인 상당수는 성공한 기업가들이다. 이들은 아르메니아에 도움을 주기도 하는데 그 힘이 막강하다. 미국에서도 유대인만큼은 아니지만 아르메니아 디아스포라가 정치, 경제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동병상련일까. 미국 L.A. 글렌데일의 위안부 소녀상 건립 당시 미국에 거주하는 아르메니아계 디아스포라가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등 한국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여줬다.
세계 최초 기독교 공인 국가
아르메니아인들이 특별하게 생각하는 아라라트 산. 그러나 현재 아르메니아인들은 갈 수 없다. 과거 스탈린이 아르메니아 민족주의를 억압하고 무력화하기 위해 이 산을 터키에 분할했기 때문이다. 아르메니아 사람들이 아라라트 산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볼 수 있는 곳은 산자락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코르 비랍’(Khor Virap)’ 수도원이다. 이 수도원에는 지하 20m 깊이의 동굴이 있다. 아르메니아에 기독교를 전파한 ‘성 그레고리’(St. Gregory)가 왕의 명을 거역해 13년 동안 갇혀 있던 곳이다. 그가 기적적으로 살아나 왕의 병을 고치자 왕은 크게 감동해 기독교로 개종했다. 아르메니아는 세계 최초로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했다. 이때가 301년. 로마보다 91년이나 빨랐다. 코르 비랍 수도원은 7세기 때 동굴 위에 세웠다.
아르메니아는 이슬람 국가들 사이에서 온갖 박해를 받으면서도 기독교를 지켜왔다. 심지어 국가가 없는 상황에서도 아르메니아의 정체성을 지켜주고 통일을 시킨 힘은 신앙이었다. 동방정교회, 서방 가톨릭, 개신교가 아닌 ‘아르메니아 사도회’라는 그들만의 독특한 계보를 이어가고 있다. 그들의 엄숙한 신앙에는 초기 기독교의 순수함과 절제, 소박함이 많이 남아 있다. 아르메니아에서 기독교의 비중이 커진 주요 원인은 그들만의 고유문자로 성경을 번역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수도원은 중요한 예술, 문학, 교육센터이자 ‘카트치카’(khatchkars, 십자가 문양을 판 돌비석)의 완성처가 됐다.
아르메니아에서 가볼 만한 여행지
에치미아진 (Echmiadzin) 아르메니아 정교회의 중심지로 300년경에 세워진 아르메니아 최초의 교회다. 예수님의 옆구리를 찔렀다고 추정되는 창이 보관돼 있다.
가르니(Garni) 신전, 아자트(Azat) 계곡 헬레니즘시대에서 로마시대에 걸쳐 태양신 미트라를 숭배하기 위해 이오니아 양식으로 세운 신전. 신전 밑 아자트 계곡에는 세계 최대 규모의 주상절리가 있다.
게하르트 수도원 (Geghard Monastery) 고대 아르메니아의 동굴 수도원으로 예수님을 찌른 창이 보관돼 있었다고 한다. 계곡의 바위를 파서 만들었다.
타테브 수도원(Tatev Monastery) 해발 2000m 높이에 위치한 수도원. 외부에서 침입을 하면 말발굽 소리에 기둥이 흔들렸다고 한다. 고즈넉한 풍광과 코카서스 최고의 경치를 자랑한다.
세반 호수(Sevan Lake) 바다가 없는 아르메니아에서 유명한 호수. 해발 1900m에 위치한 이 호수는 물이 맑고 깨끗해 가재도 잡힐 정도라고. 세반 호수의 송어는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본격적인 여름에 들어서자 하루에도 몇 번씩 마스크를 집어던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산들산들 부는 자연의 바람을 마시고 싶은 마음이 간절할 뿐이다. 사람들 북적이는 서울을 벗어나 쪽빛 하늘, 쪽빛 바다가 있는 청정지역에서 말이다. 간절히 원하면 길이 보인다 했던가? 지인에게서 지난 수요일 전화가 왔다.
“이번 주 주문진 아파트 비었는데 놀러가실래요?”
어이쿠 이게 웬 떡? 예정에 없던 주문진행 주말 나들이가 이뤄졌다. 주문진에 위치한 아파트는 지인이 운영하는 회사에서 직원 복지를 위해 구입해 펜션으로 이용하는 곳이다. 몇 번 주말에 가겠다고 요청했는데 늘 대여 스케줄이 꽉 차 있어서 부탁을 들어주지 못했던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나보다.
6월 초 주말 스케줄이 빈 것을 확인하고는 얼른 내게 전화를 한 것이다. 놀기 좋아하는 사람에겐 이런 찬스가 아주 쏠쏠하다. 이렇게 해서 2박 3일 주문진 여행이 시작됐다. 사실 동해를 안 가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50대 중반을 넘겼으니 가 봐도 수십 번은 가봤을 곳이지만 그래도 일상을 떠나 바다를 보러 간다는 것 자체는 늘 설렘과 기대를 주는 아주 작은 행복 중 하나다. 특히 요즘과 같은 코로나 정국에서는 말이다.
나이 들면서 여행을 떠나니 여행지에서의 즐거움이 예전과 좀 달라진다. 광폭 행보로 이곳저곳 사진 찍기 바쁘게 움직이는 것보다 묵을 곳 정해놓고 동네 마실 다니듯 기웃거리며 보고 먹고 마시는 소소한 즐거움이 더 새롭다.
금요일 오후 동서울터미널에서 시외버스를 탔다. 주문진터미널에 내리자마자 장치찜을 먹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주문진수산시장 쪽으로 재빠르게 걸어갔다. 수요미식회에서 소개한 장치찜을 먹고야 말겠다는 일념으로 점심부터 굻고 왔다는 후배와 나는 부지런히 걸어 마지막 손님을 받고 한숨 돌리고 있던 월성식당에 무사히 터치다운했다.
닫으려는 문을, 서울에서 지금 막 내려왔다는 비장의 무기를 꺼내며 읍소! 결국 주방일하는 남자 사장님에게 다시 앞치마를 두르게 하고 마침내 한 접시 수북한 장치찜을 맛봤다. 어라? 근데 이 장치라는 놈, 아구도 아닌 것이 장어도 아닌 것이 요상한 형태의 생선이었다. 살은 말랑말랑하고 적당한 기름기에 매콤한 양념이 어우러져 아구찜보다 기름지고 장어와는 달리 매콤해서 밥도둑이 따로 없다. 여기에 곰배령 생옥수수 막걸리까지 소박한 호사를 부리고 숙소로 갔다.
밤늦게 아파트에 도착해 이런저런 이야기꽃을 피우다 잠이 들었다. 주위의 깊은 어둠 때문일까? 불면증 때문에 고생이라는 후배는 얼마 지나지 않아 코를 골며 잠을 자기 시작했다. 도시에 살아서 불면증일까? 늦은 저녁을 포식해서 잠이 쏟아진 걸까? 어찌됐든 오랜만에 자는 꿀잠이 도시에서도 계속되길 바랄 뿐이다.
아침부터 막국수
아파트가 위치한 주문진 소돌마을. 이른 아침부터 아파트 근처 곳곳에서 닭을 키우는지 여기저기서 닭이 우렁차게 울어댄다. 푹 자고 일어나 상쾌한 몸으로 한 바퀴 돌며 동네를 염탐해봤다. 멀지 않은 도로변에 깨끗하게 생긴 막국수 집이 눈에 띈다. 오픈시간을 확인하니 아침 8시부터 문을 연단다. 흠 아침부터 막국수 먹는 사람이 많나? 부지런히 숙소로 돌아와 나갈 채비를 하고 막국수 집으로 향했다.
이른 아침인데 벌써 막국수 먹으러 온 외지인들이 하나둘 눈에 띈다. 실내를 둘러보니 심상치가 않다. 어젯밤 주문진수산시장 인근 월성식당에서 먹었던 장치찜도 수요미식회에 나왔다는 정보를 갖고 찾아갔는데 아침부터 막국수 먹겠다는 가상한 용기를 예뻐하셨는지 이 집 막국수 맛 또한 환상이다. 맛있다며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워 드렸다. 심드렁한 주인아저씨 왈, “우리 집 맛집이여. 모르는가벼?”
이번 여행은 주문진에서만 머물기로 했다. 일단 차가 없기 때문에 장거리 이동이 불편하기도 했고 몇 번씩 가본 곳들을 또 가려고 렌터카나 택시를 이용하기도 내키지 않았다. 오직 주문진 바닷가를 거닐고 산책하고 샛길, 오솔길, 큰길… 길이란 길은 다 걸어 다녔다. 시골 산길을 걷다 분위기 넘치는 돌계단이 있어 올라가 봤다. 계단을 오르자 양지바른 언덕에 고즈넉하게 단장돼 있는 누군가의 무덤이 나타났다. 뜻하지 않게 누구인지도 모르는 이에게 잠깐 묵념을 하고 내려왔다. 묘역이 웅장하지 않지만 품위 있어 보였다. 후손의 정성스런 손길이 느껴졌다. 언덕 위 묘역에 잠드신 분보다 이렇듯 품격 있게 관리하는 후손이 더 대단해 보였다.
한참 돌아다닌 끝에 의외의 산책 코스를 발견했다. 주문진 바닷가 건너편 향호리에 위치한 호수 향호다. 향호는 강릉 경포대, 고성 송지호와 함께 강원도의 대표적인 석호라고 한다. 석호란 파도가 해변의 모래를 밀어 올려 둑을 쌓고 모래섬이 커지면서 바닷물이 다시 바다로 돌아가는 길을 막아버려 생긴 호수다. 돌아갈 곳을 잃어버려 다시 그곳에 정착한 실향민 혹은 이민자 같다. 마치 내 신세 같다고나 할까? 바다 깊이가 얕고 밀물 썰물의 차이가 큰 서해안은 갯벌이 발달해 석호가 생기기 어렵지만 동해안을 끼고 있는 강원도와 함경도에는 큰 석호가 많단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경포대가 가장 큰 석호 중 하나이며 향호는 주문진 바닷물이 돌아가지 못한 작은 석호다.
바람의 길, 트레킹 코스
향호를 지나는 트래킹 코스도 발견했다. 이른바 강릉 바우길 13구간 바람의 길이다. 이 길은 주문진 해변에서 시작해 산간으로 들어오는 고속도로 교각을 지나 향호 호수 제방을 따라 산길까지 15km 구간을 트레킹하는 코스다. 산길을 거닐며 바닷바람을 맞을 수 있어 바람의 길이라고 불린단다. 이름이 참 예쁘다.
강릉 바우길은 제주 올레길 성공에 자극받아 지난 2009년도부터 개발됐다고 한다. 바우는 바위를 의미하는 강원도 말로, 백두대간의 시작인 강원도의 트레킹 코스를 일컫는 용어로 정착됐다. 기존 산악 등산로와 연결돼 손쉽게 개발된 코스 외에도 바우길 개척대가 신설한 코스 등을 합해 현재는 총 19구간으로 확대됐다. 2010년에는 사단법인 강릉 바우길이 설립돼 스토리텔링과 코스 개발 등을 맡고 있다.
산에 난 오솔길 등산로를 걷는 즐거움도 있지만, 강릉 바우길 13구간 바람의 길에서 향호 호수를 한 바퀴 도는 둘레길에서 매력을 느낀다. 산책을 편하게 할 수 있도록 호숫가 옆에 나무데크를 설치해 호수를 노니는 물새들을 바라보며 갈대 숲길을 따라 걷다가 주문진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흐르는 땀을 식힐 수 있다. 중간중간 설치한 등나무 쉼터 벤치에 앉아 동네 촌로가 가꿔놓은 정갈한 경작지에서 자라는 야채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치 내 집 뒷마당에 앉아 휴식을 취하는 것 같은 편안함을 맛보게 된다. 등나무 벤치에 앉아 노래 한 곡을 듣고 일어났다. 이제 주문진 바닷가로 향할 참이다. 이른 아침 막국수 한 그릇으로 채운 배가 신호를 보낸다. 회는 언제 먹을 것이냐고. 주문진 바닷가를 향해 걸어가 본다.
관광객들이 모여 있는 주문진 바닷가에서 벗어나 소돌해변 쪽에서 들어가면 식객 허영만 화백의 백반기행에서 소개한 섭국 전문점 미경이네 횟집이 나온다. 메뉴를 찬찬히 살피다 일단 오늘은 회를 먹고 섭국은 내일 아침 식사로 도전해보기로 했다. 자연산 회와 소주 각 1병씩으로 운동의 피로를 적당히 풀었다. 부산스럽지 않은 여유로운 여행이 편안하고 즐거웠다. 이른 저녁의 술 한잔도….
바닷가를 걷다가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해변을 어슬렁거리다 보니 버스정류장 앞에 외국 여학생들이 까르르르 웃음을 지으며 사진을 찍기 위해 기다리는 모습이 보였다. 호기심이 발동해 버스정류장을 살펴보니 2017년 BTS가 발매했던 ‘봄날’ 앨범 재킷 사진을 촬영했던 향호 해변이라는 설명이 보인다. 세상에나! 소가 뒷걸음치다 쥐 잡은 격이구나. 우리 역시 라인업을 하고 쪽빛 바닷가를 배경으로 녹슨 버스정류장에서 인생 샷 한 컷을 건졌다.
아무 할일 없이 바닷가를 어슬렁거리는 일은 인생에서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의 중대 사건이다(?). 금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났다면 몰라도 연령대별로 해야 하는 과업에 낙오하지 않고 패스하기 위해 우리는 늘 여유가 없었고 발을 동동 구르며 바쁘게 살아야 했다. 지하철 환승 칸을 체크하며 바꿔 탈 때마다 종종걸음으로 옮겨 다녔고 버스로 환승하는 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에스컬레이터를 성큼성큼 걸어 다녔다. 이제 인생의 숙제는 다 끝냈고 난 나의 길을 찾아 이길 저길 돌아다녀본다. 내게 맞는 길은 어디 있는지, 이 길은 맞는 길인지, 또 이 길은 어디로 맞닿을 길인지.
섭미역국은 모범생, 섭국은 깡패 같은 맛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집으로 돌아왔다. 내일이면 서울로 올라가야 한다. 마지막 할일 하나가 남았다. 섭국을 맛보는 일. 미각여행의 끝을 보고 말리라. 둘째 날 이른 아침 짐을 챙겨 일단 미경이네로 향했다. 아침 식사로 섭국을 맛보기 위해서다. 섭은 자연산 토종 홍합으로 옛날에 쌀이 귀하던 시절, 어민들이 채소에 밀가루 반죽을 입혀 홍합을 듬뿍 넣어 끓이는 국에 이 채소를 넣고 매콤하고 알싸하게 끓여 먹었던 국이라고 한다.
음식에 대한 자부심이 넘치는 사장님이 서울 촌놈들을 대상으로 섭의 유래와 섭국 끓이는 법까지 일장 강의를 하신다. 강의가 끝난 후 섭국이 나왔다. 우리가 자주 먹는 국밥의 내용물이 홍합이라고 생각하면 될 듯하다. 해장에도 좋고 아침 식사 한 끼로도 충분했다.
그때 식사가 끝난 것을 본 사장님이 또 출동. 허영만 선생이 섭미역국은 모범생, 섭국은 깡패 같은 맛이라고 설명했다며 우리에게 맛이 어땠는지 물어보신다. 아! 집요한 사장님. 이래서 성공했구나. 우리 둘은 “알싸한 맛이 깡패 같아요“ 하고 대답해줬다. 매우 흡족해하신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해안가 산책을 한 번 더 하기로 했다. 걷다가 언뜻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어 가까이 가봤다. 도로변 나뭇가지에 나란히 꼬챙이에 꽂힌 오징어가 말라가고 있었다. 다리는 모두 잘린 채. 그 오징어 사이사이로 보이는 쪽빛 바다, 쪽빛 하늘…. 2박 3일 완벽한 힐링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뭔가 빠진 듯 내내 허전함이 느껴졌다. 뭐지? 이번 여행에서 찍었던 사진들을 꺼내본다. 맨 마지막 사진. 다리 잘린 오징어. 그 사진을 보자 떠올랐다. 맞아! 주문진은 오징어였지? 다음 여행을 기약해본다.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진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모든 것이 불확실한 인간의 삶에서 오직 죽음만이 확실하다”고 말했다. 인간은 모두 공평하게 한 번은 죽음을 만난다. 죽음은 같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살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죽은 자는 행위가 종식되고 운동이 정지하면서 반응이 없어진다. 존재에서 무존재가 되어 모든 계획과 삶이 끝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영원히 되찾을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가슴을 후벼파는 슬픔으로 다가온다.
독일의 여성 감독 도리스 되리의 영화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2008)은 사랑하는 아내가 죽은 후, 곁에 있을 때 못 느꼈던 사랑과 아내가 접어야 했던 꿈을 이해하는 과정을 잔잔하게 그린 작품이다. 죽음이 우리 삶에 주는 의미, 그리고 소통과 배려 등 살면서 챙겨야 할 소중한 가치들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독일 남부의 시골 마을 시청 청소행정과 과장 ‘루디’(엘마 베퍼 역)는 큰 위기 없이 20여 년 공무원 생활을 착실히 해온 평범한 가장이다. 그의 아내 ’트루디‘(한넬로르 엘스너 역)는 무용의 꿈을 접고 내조와 자녀 교육에만 전념해온 전업주부다. 그들에게는 베를린과 일본 도쿄에서 사는 2남 1녀의 자녀가 있다. 트루디는 일본의 ’후지산‘을 가고 싶어 한다.
어느 날 트루디는 남편 루디가 암에 걸렸다는 이야기를 의사에게 듣는다. 하지만 트루디는 이 사실을 숨긴 채 베를린의 자녀들을 만나러, 둘이 함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여행을 떠난다. 그곳에서 자녀들의 무관심과 세대 차이에 충격을 받고 발트해로 둘만의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뜻밖에도 그곳에서 트루디가 먼저 죽음을 맞이한다.
상실의 슬픔과 그리움에서 헤어나지 못하던 루디는 아들 칼을 만나러 도쿄로 가지만 바쁜 아들 때문에 홀로 도시를 헤맨다. 그러던 어느 날 공원에서 부토 춤을 추는 한 소녀를 만나게 되고 소녀와 함께 아내가 가고 싶어 했던 후지산을 찾아간다. 후지산이 선명하게 보이는 새벽녘 푸른 호숫가에서 루디는 아내 트루디와 함께 부토 춤을 춘다.
영화에서는 중요한 두 개의 메타포가 등장한다. 하나는 파리다. 베를린으로 가는 기차의 창에 붙어 있던 파리의 모습은 이후 벌어질 자녀들과의 세대 차이에서 오는 갈등을 예고한다. 식탁에 앉은 파리를 손바닥으로 내려쳐 잡는 젊은 세대와, 작은 생명체 하나도 존중하는 기성세대 간의 차이를 보여주기 위한 사전 장치다. 부모 앞에서 레즈비언 행위를 서슴지 않는 딸의 모습과 부모의 반응은 ‘세대 간 차이를 갈등과 대립이 아닌 소통과 배려로 극복해야 함’을 표현하는 서브 텍스트다. 여성 감독이기에 이런 따뜻한 메시지가 더해졌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그림자다. 영화 초반 루디의 기계적 일상을 설명하는 트루디의 내레이션에서 시작돼 자주 등장하는 장치다. 이 영화의 큰 축인 부토 춤의 표현이기도 하다. 심리학에서는 그림자를 외부에 드러내기 싫은 나, 그래서 진정한 나에 가까운 것으로 말한다. 억누른 기억과 감정이 모두 담겨 있는 무의식의 거대한 산 같은 것이 그림자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는 그림자를 존재의 다른 방식으로 때론 타인에게 인식될 수 있고 또 타인과 이어주는 방식으로 사용한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일본 사회의 허무주의를 바탕으로 삶과 죽음의 해답을 갈구하는 것 같은 움직임을 묘사한 그림자 춤인 부토 춤을 이 영화에서는 이쪽 세계와 저쪽 세계가 통하는 의식으로 설정했다.
결국 루디는 그림자, 그림자 춤을 통해 상실한 마음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내면의 울림에 귀 기울인다. 자신의 상처와 끊임없이 대화하면서 마음을 챙기고 ‘그림자 치유’ 과정을 통해 트루디가 있는 세계로 가는 블랙홀에 빨려 들어간다. 부토 춤을 추는 공원의 소녀가 춤출 때 사용한 전화기의 수화기와 선도 중요한 메타포라 할 수 있겠다.
두 사람의 마지막 여행지인 발트해에서 트루디는 계면쩍어하는 루디의 손을 잡고 같이 춤을 춘다. 루디가 얼마 살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기에 트루디는 춤을 추면서 어떤 참혹한 상실의 시간이 오더라도 그 시간을 딛고 일어설 것이라며 스스로를 다독였을 것이다. 낮에는 해안가에서 추워하는 루디를 위해 스웨터를 함께 입는 세심한 배려를 하기도 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반전이 일어난다.
홀로 남게 된 루디의 슬픔, 아픔이 살갗을 뚫는 듯했다. 남겨진 자들의 고통은 떠난 사람을 그리워하는 것보다 잊혀간다는 사실을 자각했을 때 가장 큰 슬픔으로 다가온다. 루디는 침대 위 자신의 옆자리에 트루디의 잠옷을 펼쳐놓는다. 트루디를 느껴보고 싶어서, 트루디를 기억할 수 있는 작은 것들 하나도 잊지 않으려고…. 그리고 “여보 어디 있어…”라고 속삭인다. 이 영화의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거대한 상실의 구멍이 생긴 것처럼 슬픔이 스며들었다.
트루디가 죽기 전 발트해의 해안을 둘이 걸을 때 루디가 말했다. “그래, 우린 행운이지. 우린 서로가 있으니까. 그게 젤 큰 행복이야….” 그런데 몇 시간 뒤 루디는 홀로 남겨진다. 루디는 남겨진 자녀들에게 말한다. “이제 익숙해져야겠지.” 일본에서 만난 아들은 왜 좀 더 빨리 두 분이 함께 일본에 오지 않았냐고 묻는다. “시간이 많은 줄 알았다”고 루디는 대답한다.
영화 초반부에 노이슈반스타인 성과 알프스 산맥이 있는 독일 남부의 아름다운 자연이 영상으로 나온다. 후반부에서는 일본의 봄 벚꽃과 후지산의 풍경이 잔잔하게 흐른다. 이야기 전개상 도쿄의 다양한 모습이 보인다. 이 때문에 일본 홍보 영화로 평가절하하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독일에서 흥행에 성공하고 각종 영화상도 받은 작품이다. 편견 없이 이 영화를 보면 좋겠다.
이 영화에서 인상적이었던 또 하나의 장면은 베를린의 자녀 집에서 잠자리에 누운 트루디가 루디에게 “아이들이 낯설다“고 하면서 손을 내밀어 루디의 손을 꼭 잡는 모습이다. 세상의 남편들이여 오늘은 잠들기 전 옆에 누운 아내의 손을 꼭 잡아보자. 그리고 한마디쯤 하자. “미안합니다. 고맙습니다”라고.
중년에 취미활동이나 외국어 학습, 악기 연주, 유산소 운동 등을 하면 치매를 예방하는 데 좋은 효과가 있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한다. 건강검진을 받으러 갈 때마다 의사가 적당한 운동이나 취미활동을 권유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중년이 되면 유산소 운동에 도전하고 취미활동에 관심을 갖는 경우가 많다. 악기 연주나 외국어 학습도 마찬가지다. 요즘은 온라인에서 혼자 배울 수 있는 다양한 외국어 학습 프로그램이 많다. 굳이 학원을 가지 않아도 집에서 편하게 외국어 공부를 할 수 있다. 나이 들어 외국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거냐고 물어본다면 할 말은 없다.
앞으로 코로나가 일상이 될 것 같아 해외여행지에서 써먹기도 힘들 것 같고 원어로 영화나 드라마를 보거나 소설을 읽어보려 외국어 공부를 한다는 게 시간 낭비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런데 하루에 몇 시간씩 외국어를 배우면 뇌 건강은 좋아질 것 같다. 언어도 익히고 치매에 대한 두려움도 떨칠 수 있다면 일석이조 아닌가? 학창 시절에 이루지 못했던 꿈도 이루고 뇌 건강도 챙기고, 그리고 자기계발에도 열심인 나, 상상만 해도 자랑스럽다. 그래서 과거에 이루지 못했던 꿈, 현재의 만족, 미래에 대한 준비까지. 퍼펙트하게 삼위일체를 이루는 외국어 학습을 집에서 혼자 할 수 있는 다양한 온라인 학습 사이트를 찾아봤다.
우리가 365일 매일 24시간 손에서 떼어내지 못하고 애지중지하는 스마트폰은 외국어를 배울 때 매우 유용한 도구다. 특히 전 세계의 빅 브라더라 할 만한 구글의 언어 학습 플랫폼은 놀라운 속도로 업데이트가 이루어진다. 최근 구글 번역기는 103개국 언어로 텍스트 번역이 확대됐다. 게다가 여행 전 미리 다운로드해서 쓸 수 있는 언어가 59개국 언어라 하니 구글 번역기 하나만 있으면 해외에서도 겁날 게 없어진 세상이 됐다. 구글 번역기를 열고 마이크에 대고 언어를 말하면 지정된 언어로 음성이 흘러나오는 동시통역 기능까지 추가돼 해외 언어에 대한 불편함을 덜어주고 있다. 또 스마트폰 카메라를 표지판이나 메뉴판에 대면 38개의 언어로 텍스트를 즉시 번역해주는 기능도 있어 해외여행자들에게 활용도가 높다고 한다.
네이버가 출시한 파파고도 막강한 번역 서비스를 하고 있다. 번역 실력도 생각보다 우수하다. 특히 영어와 한국어 번역은 깜짝 놀랄 정도다. AI가 이 정도까지 발전했다는 걸 생활 속에서 발견한다. 다음은 알아두면 유용한 언어 학습 앱들이다.
▶Duolingo 듀오링고는 모든 연령대의 사용자들이 무료로 외국어를 배울 수 있도록 서비스하고 있다. 게임을 하듯 단계별 학습을 끝내면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간다. 한국어를 비롯해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네덜란드어, 스페인어, 포루투갈어, 이탈리아어, 그리스어, 체코어, 헝가리어, 루마니아어, 폴란드어, 터키어, 러시아어, 우크라이나어, 힌디어, 일본어, 중국어, 러시아어, 인도네시아, 베트남어, 태국어 등 23개 언어 학습을 돕고 있다. 2011년 스타트업으로 시작해, 현재까지 앱 다운로드 수 3억 건을 돌파했다. 2019년도에는 구글 플레이와 애플 앱스토어에서 올해의 앱으로 선정됐다. 2019년 12월에는 구글의 투자를 받아, 벤처 기업의 상징인 유니콘 기업에 올랐다.
▶Rosetta Stone 1992년도에 처음 출시된 로제타 스톤은 외국어 학습시장에서 가장 오래된 플랫폼 중 하나다. 1992년 시디롬으로 10개국의 언어 교습법이 출시된 후, 현재 버전 4까지 업데이트를 계속해 34개의 언어 팩을 지원하고 있다. 초창기에는 시디롬으로만 판매했지만 현재는 온라인에서도 교습이 가능하다. 외국어 학습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이 앱은 사라져가는 미국 소수민족에 대한 언어 지원 프로그램 등 사회적 역할에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 2003년 전 세계의 글로벌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로제타 스톤도 큰 성장을 맞이했다. 2011년에는 로제타 스톤 코리아가 설립돼 기업체 어학 프로그램 지원 및 어학원 등 오프라인 사업도 하고 있다.
▶Drops 2015년에 론칭된 스타트업 언어학습 앱이다. 헝가리의 스타트업 회사로 현재 한글 학습도 가능한 상태. 한글 ‘ㄱ’ 자도 모르는 외국인에게 ‘가나다’부터 가르쳐주는 앱이다. 2018년에 론칭한 하와이어는 사용 인구가 300명에 불과하지만 사라져가는 언어에 대한 문화인류학적인 어젠다를 발표하는 등 기업의 소명을 중시해 주목을 받고 있다. 현재 31개국 언어가 서비스된다. 2018년 말 기준으로 앱 다운로드 500만 건을 달성했다. 한국보다 해외에서는 주목받는 스타트업 중 하나다.
▶Babbel 2006년 독일 베를린에서 창업했다. 시디롬과 책으로 배우는 외국어 학습 분야에서 온라인 강좌가 곧 대세가 될 것이라는 생각에, 음악 믹싱 프로그램을 개발하던 젊은이들이 만들어낸 앱이다. 단순히 언어만 반복 교육하지 않고 문화마다 다른 손 모양 표시와 비언어 소통법 등도 가르쳐준다. 특히 사업을 하기 위해 언어를 배우는 사람, 여행을 계획하는 사람 등을 위한 맞춤형 강좌를 개설해 많은 고객을 확보했다. 2015년 펀드레이징에서 2200만 달러를 모았고, 애플 워치에 바벨의 다국어 학습 앱이 탑재되면서 글로벌 무대에 올라섰다. 현재 바벨은 100만 명의 유료 회원을 자랑하며, 1일 다운로드 횟수도 10만여 건에 이르는 등 전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외국어 학습 앱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한국어 인터페이스는 지원이 안 된다. 영어를 디렉션 언어로 선택해 다른 나라의 언어를 배워야 한다.
▶Busuu 부슈는 듀오링고와 경쟁하는 언어 학습 앱이다. 언어 능력을 고급으로 올리고 싶은 대상자들에게 적합하다. 주제와 형식별로 과정이 세분화돼 있어 언어 능력 향상을 목표로 하는 사람들에게 유용한 앱이다. 기초 문법과 퀴즈, 언어 학습 기능 모두 유료다. 초보자가 이용하기에는 다소 부담스럽다.
▶TripLingo 해외여행을 하는 이들에게 필요한 언어 서비스를 제공한다. 식사와 쇼핑, 간단한 대화 등 주제별 문장을 쉽게 연습할 수 있다. 또 문화 관련 안내 및 환전·환율 계산기, 국제 통화요금을 절약할 수 있는 와이파이 전화, 현지 상황을 고려한 팁 계산기, 음성 번역기, 이미지 번역 도구 등 다양한 기능을 제공한다.
평생 살면서 가질 수 있는 직업이 몇 가지나 될까? . 흔히 ‘사회에 첫발을 내디딜 때 어떤 일을 했느냐에 따라 사람의 인생이 달라진다’라는 말을 많이 한다.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첫 직장에서 시작한 일이 두 번째 일로 이어지고 다시 세 번째로 이어진다. 그래서 옛말 틀리지 않는다. 첫 단추를 잘 꿰어야 한다.
큰 항공사에서 일하다 적성을 찾아 연관 기업인 여행사로 이직했다. 마침 이곳이 대규모로 여행 상품을 밀어내던 곳이 아니라 소그룹 맞춤 여행을 전문으로 하던 곳이었다. 이곳에서 여행업의 기본과 고객과의 관계까지 알토란같이 배우며 즐거웠다. 육아로 공백기를 가졌던 6년이 지난 후, 다시 재취업을 거친 끝에 마침내 2008년에 창업했다.
현재 본업은 여행 카운셀러(?), 트래블 카페 오너(?), 여기에 여행작가 협동조합 설립에 여행작가들의 출판물 발간까지 계획하는 콘텐츠 생산자다. 메종 인디아 인도 여행 책방 전윤희 대표를 만났다. 아마 전윤희 대표의 다음 번 전업 혹은 창업 명함은 작가 아닐까 싶다. 하여간 재미있다. 그녀의 창업 스토리를 살펴본다.
전윤희 대표는 대학에서 불문학을 전공했다. 당시 여성들에게 선망의 직업이던 항공사 승무원으로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전 대표는 승무원으로 일하면서 비행기를 타고 승객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직업은 뭔가 생산적인 일이 아니라 내가 소비된다는 느낌이 들었단다. 남들이 다 부러워하던 직장을 그렇게 2년 만에 그만두고 나왔다.
전 대표가 항공사에서 일하던 90년대 중반에는 한국에서 해외여행 붐이 폭발적으로 일어났던 때다. 전 대표는 승무원으로 일하면서 앞으로는 한국에서 해외여행이 급증할 것이라는 확신이 들자 항공사를 그만두고 여행사를 찾아갔다. 그것도 흔히 말하는 대규모 회사가 아니라 신설된 지 얼마 되지 않은 곳이었다. 지금은 없어진 씨에 프랑스란 여행사에서 유럽과 북미, 남미, 아시아, 일본 전 세계 여행상품 중 맞춤 여행 중심으로 상품을 판매하는 곳이었다.
여행사 일이 이렇게 재미있는 줄 몰랐다는 전 대표는 한창 여행 카운셀링 일에 빠져있을 때 결혼과 육아로 약 6년 정도 가정에서 아이 키우기에 전념하며 자연스럽게 여행과 멀어지게 됐다. 아이가 유치원 들어갈 때까지 6년의 기간은 인생에서 힘들었던 기간. 아이가 유치원에 갈 수 있는 나이가 되자 부지런히 일할 곳을 찾아보았다. 하지만 경단녀(?)의 재취업이 쉽지는 않았다고. 다행히 여행업은 전문직 여성에게 문호가 열려있는 편이라 6년 전의 경력으로 다시 ‘블루 하와이’라는 하와이 전문 맞춤여행사에 재취업했다.
첫 창업의 계기가 특별한 것이 있었나?
아이들을 키우다 재취업한 후 4년 동안 정말 열심히 일했다. 여행사의 특성상, 고객과의 밀접한 관계가 중요한데 아무래도 회사에서 월급을 받고 일하다 보면 뭔가 수익이나 이런 개념이 자꾸 들어가서 고객이 원하는 것을 나도 해주고 싶은데 그게 쉽지 않더라. 나만이 서비스할 수 있는 그런 특별한 여행 상품을 만들고 싶었다. 여행 코스와 일정 등을 잘 만드는 것도 일종의 상품 생산이다. 특히 여행은 콘텐츠의 질이 매우 중요한데 여행상품을 좀 더 잘 만들고 싶다는 욕심이 자꾸 커지고… 그러면서 내가 직접 해보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여행사와 북 카페는 어떤 콘셉트로 함께 운영하는 건지?
여행하다 보니 결국 여행이 사람을 만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지금 사는 일상의 공간이 아니라 낯선 곳에서 만나는 사람에 대한 관계였다. 그러다 보니 사람을 좀 편하게 만날 수 있는 공간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에서 트래블 카페를 하게 됐다.
처음 창업했던 길 투어리즘은 꽤 운영이 잘 됐던 것으로 알고 있다.
맞다. 9년을 운영했다. 사무실도 두 곳이나 두고 카페까지 정말 9년을 어떻게 운영했는지 모를 정도로 정신없이 살았다. 그러다 보니 완전 내 몸과 영혼이 소진했더라. 억만금을 준다고 해도 더 이상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창업을 했을 때만 해도 내가 굉장히 목표지향 주의적인 인간형이라고 생각했다. 사업도 잘됐고 고객들 만족도가 높아서 평판도 좋았다. 근데 그것도 어느 한계가 있지… 어느 순간 사람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일들이 닥쳐오자 임계점을 넘어 내가 폭발 직전이라는 걸 알았다. 그래서 매각을 하게 됐다.
다시 창업한 게 이제는 인도 여행상품만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곳이다. 규모가 줄었다.
아! 그러고 보니 나는 계속 사이즈가 줄어들고 있네. 대기업 항공사에서 중소기업 여행사, 소규모 자영업…. 근데 그중에서도 인도 여행 상품만 취급하고 있으니… 하지만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
사실 메종 인디아는 이전에 운영하던 회사에서 홈페이지 정도만 만들어서 갖고 있던 것이었다. 회사를 매각하면서 아예 이 홈페이지도 정리하려던 것인데…. 같이 일하던 직원에게 그냥 넘겨주면서 해보라고 권유했더니 겁이 난다며 못하겠다고 하더라.
이왕 만들어놓은 홈페이지니 그냥 두자 하는 마음으로 오픈해 놓고 있던 것이었다. 일 년을 쉬는 동안 그냥 휴식 겸 인도와 한국을 왔다 갔다 하며 인도에 대해 더 많은 애정을 느끼게 됐다. 인도의 관광 자연만이 아니라 그들의 문화와 홍차, 영화, 음악, 그리고 그들의 출판물까지 접하게 되면서 좀 더 전문적으로 인도를 알리고 싶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메종 인디아, 인도 여행서점(책방)을 열어보자는 것이었다.
일반적인 여행사나 서점은 아닌 것 같다. 구체적인 운영 방향은?
무엇보다 콘텐츠 생산에 비중을 든 책방이다. 말처럼 인도 여행서점이다. 지금은 인도 여행에만 국한되지 않고 여행 인문학으로 콘셉트를 넓혀서 책을 갖추고 있다. 관련 서적을 약 400여 권 비치해 도서관의 기능과 책방의 기능을 겸하고 있다.
‘여행은 서서 하는 독서이고 독서는 앉아서 하는 여행이다’
서점 한 벽면 액자에 붙은 글귀가 떠올라 물어봤다. 저희가 필사 여행 모임을 하는데 그곳에서 저희 고객분이 캘리그라피로 써서 주신 말씀이다. 우리 책방에 딱 맞는 것 같아 벽에 걸어놓고 있는데 볼 때마다 행복하다.
단순히 음료를 판매하는 곳이 아니라 이곳에서는 매주 다양한 소모임이 열린다.
예를 들면 고전 읽기 책모임인 ‘명작클럽’, 읽고 있는 책이나 읽고 싶은 책을 손으로 써나가는 ‘필사 여행’, 요즘 유행하는 여행 드로잉을 배울 수 있는 ‘드로잉 클래스’, 할리우드에 견주어 발리우드로 불리는 인도 영화 감상 클래스, 한 달에 한 번 매월 마지막 주 금요일에는 ‘치유 타로’ 시간을 마련해 소소한 즐거움을 나누고 있다.
이렇게 콘텐츠를 건전하게 소비하는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 여행을 기획하고 또 떠난다. 그 과정에서 충분히 공부하고 탐구하면서 여행을 다녀오면 만족도도 훨씬 높아지고 끈끈해져서 또 다른 공간을 연구하고 떠나게 된다. 이렇게 여행지에서 생산된 콘텐츠를 보다 의미 있게 묶어내고 전시하고 그런 일로 발전해나가려고 한다.
그래서 올해에는 좀 더 콘텐츠 생산을 하기 위한 준비작업에 신경을 많이 쏟을 예정이다. 여행서점에서 작가와의 대화를 기획하는 것은 물론 여행기를 책으로 묶는다든지… 보다 의미 있는 작업을 기획하고 있어 요즘 다시 일하는 것이 행복해지고 있다. 여러 가지 쏟아지는 아이디어를 마구마구 실행해볼 참이다.
코로나로 여행업이 크게 위축될 것이라고 말한다. 어떻게 전망하고 있나?
그러잖아도 타격이 심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코로나가 안정돼도 여행을 자제하는 분위기가 한동안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근데 또 우연히 최근 인도에서 한국을 방문하고 싶어 하는 문의가 심심찮게 들어온다. 인도의 상류층에서 특히 한국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고 유학이나 무역 등의 문의가 높아진다. 뭔가 내가 지금까지 했던 아웃바운드에서 인 바운드 여행으로 다른 분야를 개척해나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창업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음… 내가 사업하는 게 지긋지긋해져서 완전히 매각하고 일 년을 쉴 때였다. 물론 일 년이라는 휴식이 충분하지는 못했지만 간혹 고객분들이 자꾸 다시 여행 사업을 안 할 것이냐고 물어볼 때마다 내게 자문한 것이 있다. 내가 어떤 일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하면 첫째, 내가 정말 좋아하는 일인가? 둘째, 내가 하고 싶은가? 셋째, 그 일이 나를 필요로 하는가?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뭔가 생산해내는 즐거움이 있어야 했다. 다행히 일을 열심히 해서 그간 비축해두었던 자금도 좀 있었고 이제부터는 콘텐츠를 생산하면서 그걸로 의미 있는 일을 해나가고 싶다.
물론 메종 인디아만으로 운영하는 데는 현재는 부족하다. 두 달에 한 번씩 10여 명 내외의 인도 맞춤 여행을 진행하고 있다. 뜻밖에 인도가 MICE 산업도 발전해있고 다양한 콘퍼런스도 많아서 이런 수요도 꾸준한 편이다.
지금 이렇게 콘텐츠를 차곡차곡 생산해나가면서 비로소 푹 쉬면서 힐링 된다는 느낌이 든다. 이래서 카페가 정말 살롱문화의 정수라고 하는 것 같다. 사람들 만나면서 관계도 깊어지고 인생도 깊어지는 느낌이다.
‘메종 인디아’
창업 시기: 2017년 5월
제품 및 서비스: 커피, 인도 홍차, 여행 서적 및 여행 상품, 소규모 모임 공간 대여
점포 면적: 11평
입지 조건: 서초구 방배로23길 31-43 메종 인디아 1층 (바로 옆에 방배동 공영 주차장)
자가격리 100여 일 만에 야외로 차를 몰았다. 긴 낮을 거의 칩거하다시피 했다. 우리나라도 그랬지만 TV에 비치는 세계의 유명 도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잿빛 도시처럼 싸늘하게 식은 것은 지구촌이 처음 겪는 일이다. 마치 영화 속 장면처럼 흑사병으로 신음하던 중세 시대의 모습과 같다. 첨단과학이 발달한 이 시대에 우리가 겪고 있는 현실이다. 코로나19 사태가 가져온 풍경이다. 뭔가 뻥 뚫리는 분위기 전환이 필요했다. 마침 사회적 거리 두기에서 생활 방역으로 전환되고 있어 결행했다.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모처럼 먼 길을 달렸다. 현장에 도착하니 이미 많은 사람으로 차가 붐볐다. 마스크를 쓴 채지만 이러한 아름다운 자연을 만끽할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걷기 좋은 길이라서 꼭 가봐야지 하던 곳이다. 충북 괴산의 산막이옛길이다. 한국관광공사가 뽑은 ‘걷기 좋은 길 10선’에 들기도 한 명소다. 괴산댐이 건설되기 전 봇짐장수들이 넘나들던 옛길을 살려 놓았다. 왕복 20여 리나 되는 길을 강물을 따라 걷게 된다. 물과 숲이 어우러져 트레킹 코스로 안성맞춤이다. 해외 유명한 트레킹 코스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입구에 들어서니 주변 산이 장막처럼 둘러싸여 있다. 산막이 길이라는 명칭은 이래서 붙여진 이름이다. 괴산호 주변에 울창한 노송과 굴참나무 길로 자연 생태공원이다. 푸른 강을 옆에 끼고 숲이 해를 가려 걷기에 금상첨화다. 가는 길마다 스토리가 있어 지루하지도 않다. 연화협, 여우비 굴바위, 남매 바위, 매 바위, 앉은뱅이 약수, 삼신 할매바위, 꾀꼬리 전망대, 신랑·각시 바위, 괴산 바위 등이 있다. 산굽이를 돌면 옛날 호랑이가 살았을 듯한 호랑이 굴을 만날 수 있다.
트레킹 코스로는 주차장에서 등잔봉까지 약 1.2Km를 올라 유람선 선착장까지 걸어 내려오는 길도 있다. 3시간 정도 소요된다. 등산이 아니면 강 물줄기를 따라 왕복 두 시간 정도 코스로 가족과 함께 걷기 좋은 길이다. 연장자나 아이들은 선착장에서 배를 타는 것도 한 방법이다. 어느 코스를 택하든지 선착장에서 모두 만나 도토리묵이나 맷돌로 손수 빚은 순두부에 시원한 막걸리 한 잔을 즐길 수 있다.
강줄기를 따라 걷는 길에 앉은뱅이 약수를 만났다. 전설에 의하면 앉은뱅이가 이 약수를 먹고 일어나 걸었다 한다. 흘러나오는 약수를 한 바가지 들이키니 더위가 확 가시는 듯 가슴이 썰렁하다. 이때 약수터 옆에서 멋진 풍경이 펼쳐졌다. 사람들이 몰려 사진 찍느라 여념이 없다. 다람쥐가 모델이었다. 처음이 아니라는 듯 다람쥐는 여유 있게 자세를 바꾸며 포즈를 취한다. 사람들이 주는 먹이에 길들어 이 상황을 즐기고 있다. 바로 코앞에서 이루어지는 광경이었다. 이 순간을 놓칠세라 먹이를 입에 물고 양 볼이 볼록한 귀여운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약수터를 지나 긴 출렁다리가 나타났다. 군 복무 시 유격 훈련할 때 타봤던 생각이 난다. 양쪽 밧줄을 잡고 출렁이는 다리를 걷는다. 가다가 심술 많은 사람이 일부러 흔들 때는 더욱더 심하게 요동친다. 연인들과 초보자들의 괴성이 숲에 메아리친다. 계곡을 가로지르며 공중곡예하듯 걷는 기분이 여간 설레지 않는다.
깎아지른 40m 절벽 위에 세워진 꾀꼬리 전망대에서는 짜릿한 기분도 느낄 수 있다. 괴산호를 가슴으로 만끽할 수 있는 장소 중 하나다. 물레방앗간에 이르니 흐르는 물에 돌아가는 물레방아가 한결 정겹다. 소가 이끄는 디딜방아에서는 곡식으로 빚은 따끈한 떡이 나올 것 같다.
목적지에 도착하여 손수 만든 손두부에 막걸리 한 잔 기울이니 별천지가 따로 없다. 도토리묵에 파전을 추가하여 배를 채우고 왕복 두 시간 거리를 걸으니 쌓였던 스트레스가 확 풀린다. 괴산 산막이옛길은 이래서 충전이 필요한 도시 사람들에게 한 번쯤 가볼 만한 필수 코스다. 해외 어떤 여행지 못지않게 가까운 곳에서 즐길 수 있는 최적의 장소이다. 돌아오는 내내 기분이 좋아진다. 에너지가 가득 채워진 느낌이다.
△ 충북 괴산군 칠성면 외사리 사오랑 마을부터 사운리 산막이 마을까지(입장료 무료, 주차료 2000원)
스무 해가 훌쩍 넘어서 다시 온 파리에 낯섦이 기다려주어 다행이다. 그러나 파리는 이전에 보았던 것처럼 수백 년 된 건물에 거뭇하게 묻은 세월의 흔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센강은 여전히 느리게 흐르고 있었고 퐁네프 다리도 더 깨끗하거나 새롭게 단장되지도 않았다. 센강 양쪽으로 오래된 옛 건물들이 자아내는 분위기가 여전하다. 산천은 의구하되 나만 바뀌어 왔다.
김영하 작가의 글에 “한 번 간 곳을 또 가는 것이야말로 여행의 묘미다. 이전에 보지 못했던 걸 볼 수 있어서가 아니다. 산천은 의구한데 오는 '나'만 바뀌어있다는 것, 내가 늙어간다는 것, 그런 달콤한 멜랑콜리에 젖어 드는 것, 그것이야말로 '다시 가는 여행'에서만 느낄 수 있는 정조라는 뜻일 것이다."라고 김화영 선생님이 사석에서 말했다며 덧붙인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이십 년 세월을 훌쩍 넘겨 찾아와 늙어가는 내가 느릿느릿 걸으며 그런 달콤한 멜랑콜리에 젖어보는 건가. 어쨌든 다시 찾은 여행지의 맛을 느껴본다. 다만 그 옛날과는 다르게 사람들이 몰리는 곳은 제외했다. 에펠탑은 강 건너 빌딩 사이로 멀리서 탑 끄트머리만 힐끗 쳐다보았다. 샹젤리제 거리나 루브르 박물관 따위는 아예 안중에도 없다.
센 강 변을 따라 노트르담 성당 쪽으로 걸었다. BC 2세기경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고 파리시의 기원이 된 센 강의 시테(Cite) 섬에 있는 노트르담 성당, 그 옛날 찬송 미사가 울려 퍼지던 노트르담 성당을 바라만 본다. 이전엔 알아듣지는 못해도 그들처럼 기도하고 오르간 연주와 장엄한 노래를 들으며 예배에 함께 참여했었다. 높은 천정까지 울리는 오르간 연주와 신부님의 기도소가 온몸을 휩싸던 감동의 시간, 순박한 콰지모도가 치는 듯한 종소리가 울려 퍼지던 종탑, 에스메랄다의 물 한 모금 얻어 마시듯 성당의 성스러움을 온몸으로 받았던 그 옛날이었다.
흐린 하늘에 바람이 불고 간간이 빗방울이 흩뿌린다. 비를 피해 지하철역으로 얼른 뛰어들어갔다. 이곳 사람들은 비가 오거나 말거나 걷는 속도는 여전하다. 도무지 비를 피할 생각이 없는 모습이다. 일상의 자연 속에 바람 불면 부는 대로 눈과 비도 함께 하듯.
노트르담 역에서 오르세 역까지는 10여 분이다. 역에서 나와 미술관 가는 길로 접어들었다. 오르세 미술관과 오랑주리 미술관이 같은 방향으로 있다. 바람이 많이 불어서 길가 강변의 가게에서 머플러를 하나 사서 둘렀다. 한결 온기를 준다.
오르세 미술관이 먼저 나타난다. 역시 예상한 대로 입장권을 사려는 사람들의 행렬이 빗속에 길게 이어지고 있다. 저 행렬에 서서 보낼 시간이 없다. 애초에 두 개의 미술관 중에 오랑주리 미술관에 갈 생각이었다. 클로드 모네의 필생 역작인 '수련 연작'을 다시 볼 생각이다.
이날은 오랑주리 미술관 모네의 수련과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에만 시간을 집중하기로 했다. 오르세 미술관은 오르세 역사(驛舍)를 미술관으로 리모델링한 곳이다. 규모도 크고 볼거리도 엄청나서 한나절을 다 보내야 한다. 그 옛날 그렇게 다리 아프도록 실컷 보았던 오르세 미술관이다.
오르세 미술관을 그냥 지나치고 사랑의 자물쇠가 빽빽이 걸려있는 다리를 건너 조금 더 가면 오랑주리 미술관이 있다. 근처에 다다르면서 익숙함의 안도가 생긴다. 그래, 여기쯤에서 잠깐 앉아있었지. 오래전 엄청 추웠었던 공원은 그대로군... 김영하 작가의 글에서처럼 나만 변해서 다시 하는 여행을 맛본다. 기분이 촉촉하다.
시간이란 게 참 별거 아니다. 스물 몇 해 전 꽁꽁 손이 얼던 겨울 속의 파리를 기억하는 것처럼 이제는 이렇게 촉촉했던 파리를 또 기억하게 되었다.
오랑주리 미술관(Musée de l'Orangerie)을 향하는 길의 튈르리 정원은 오래된 정원의 멋이 물씬하다. 튈르리 궁전 정원 별채의 자연광이 클로드 모네의 그림을 완벽하게 보여주는 공간이라고 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오랑주리 미술관은 모네의 수련 연작을 가장 아름답게 볼 수 있는 곳, 천정의 빛과 자연광이 날씨에 따라 또는 일출과 일몰에 따라 환상적이다가 몽환적이다가 하며 최상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미술관이다.
흐린 날에 찾아간 모네의 대작들은 조용히 그 자리에서 수련의 멋을 보여준다. 오직 자연의 원초적인 빛을 찾아 그의 영혼을 불어넣은 수련 연작이 갤러리 내부에 가득 차 있다. 모네의 메시지가 무엇일지 생각하며 가슴 벅차게 그의 예술혼을 흐뭇하게 느껴보는 시간이다. 모네의 방에서는 그 날의 자연광에 따라서 수련 연작은 언제든 다른 그림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여행자의 기분에 따라 달라진다는 사실이다.
-1차 세계 대전의 종결을 기념하여 모네가 작품을 기증하면서 요청한 조건이 있었다.
1. 작품을 시민에게 공개할 것
2. 장식이 없는 하얀 공간을 통해 전시실로 입장할 수 있도록 할 것
3. 자연광 아래에서 감상하게 할 것.
지하로 내려가면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이 다닥다닥 전시되어 있다. 고풍스러운 액자도 눈길을 끈다. 모네, 마네, 모딜리아니, 피카소, 르누아르, 루소, 마티스, 위트릴로, 시슬리...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작품들의 맛을 실컷 느껴볼 수 있었다.
더 꼼꼼히 그림을 즐기기 위해 오디오 가이드가 있다. 그리고 가이드 투어를 이용해서 작품 이해에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또 한 가지는 지베르니에 있는 모네의 정원을 들러볼 일이다. 그래야만 오랑주리 미술관의 모네 작품과 연결해서 완전한 감상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오랑주리 미술관에서 나와 눈을 들어보면 저편으로 콩코드 광장도 보인다. 파리의 동선은 생각보다 길거나 힘들지 않다. 얼마든지 파리를 느끼며 걷기 좋다. 이날처럼 비 오는 날의 여행은 감성지수를 자극한다.
미술관을 벗어나니 센강엔 파리지엔느들이 하나둘 나와 걷고 있다. 바람 불거나 비가 오거나 햇살 좋은 어느 날 오후 미술관 정원을 거닐며 가끔 센 강 변을 거닐며 그렇게 여행자가 되는 파리 사람들, 센 강을 배경으로 여행자처럼 사진을 찍는다. 내가 사는 곳에서 여행하는 기분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는 감성은 축복이다. 일상 속에서 즐기는 그들의 자연스러운 발걸음은 풍경이다. 나는 어떤 여행 중인가.
여행이 끝났어요. 즐거움이 남아 있다는 건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이제는 내가 파리와 모네의 정원에 갔다 왔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답니다. 하지만 친구들이 '에펠탑은 어땠니?' 하고 물으면 나는 이렇게 대답한답니다.
'에펠탑은 볼 시간이 없었어. 그보다 훨씬 중요한 것들을 봐야 했거든....'
크리스티나 비외르크 ...모네의정원에서 중에서~
폴란드의 한 유태인 마을에 신앙심이 강한 사람들이 죽기 전에 성지 순례를 한번 다녀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사소한 이유들로 미루고 미루다가 결국 가스실 문으로 끌려들어 가며 하던 말이 있다. 그때 갔어야 했는데...
놓친 것이 못내 머릿속을 맴돌 때마다 뜬금없이 류시화 님의 글 중에 라는 글을 자꾸 떠올리게 된다. 이럴 때 딱 맞는 비유의 글은 아니지만 굳이 끼워 맞춰본다. 또한 포기하거나 미루기의 증세가 느껴질 때면 이 글이 떠올라 조바심을 부채질을 한다.
10여 년 전쯤 프라하 여행 중에 뾰족 지붕 아래 전망 좋은 꼭대기 층에서 민박을 한 적이 있다. 아침이면 함께 투숙한 여행자들이 모두 모여 식사를 하면서 그날의 계획을 꺼내놓으며 정보를 주거니 받거니 했다. 그리고 각자의 여행을 마치고 늦은 밤에 하나 둘 귀가하면 필스너 맥주 한 잔씩 마시면서 그날의 이야기를 펼쳐 놓는다. 여행지에서의 열린 마음들이 거리낌 없는 정보가 되고 공감하는 동지애가 즐거웠던 기억이 있다.
그중에서 중학교 교사였던 젊은 여행자가 그 날 인접국인 드레스덴 다녀온 이야기를 했다. 두 시간 정도 버스를 타고 가서 하루를 보내고 온 이야기였다. 혼자 차분히 느끼며 다닌 그녀의 드레스덴 이야기가 내 마음에 들어와 박혔다. 잠깐 우리도 거기 가볼까 갈등을 했었다. 하지만 그땐 이미 뮌헨으로 넘어갈 일정이 있어서 그곳엘 가질 못했다.
그 후 그 여행에서 돌아와 나는 간간히 드레스덴이 생각났다.
그때 갔어야 했는데...
그쪽을 다시 가기가 어디 뭐 쉬운가. 그때가 좋은 기회였는데...
간 김에 그때 하루쯤 시간 만들어 다녀왔으면 좋았을걸.
아무래도 그때 갔어야 했어.
그런 아쉬움의 여파인지 아들이 유럽 여행 중에 들른 드레스덴의 사진을 어느 날 밤 스무 장이 넘게 보내와 자다 말고 일어나 한참을 들여다보았던 적이 있다. 내가 너무 안달을 했나 하는 생각에 언제부턴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잊고 있었다.
그러나 남편 역시 기억하고 있었고 이번 여행에 드레스덴을 집어넣었다. 프라하에서 Flix bus로 드레스덴까지 1시간 55분 걸린다. 물론 국경을 넘으니까 티켓과 함께 여권 검사를 한다. 유럽의 들판을 달리고 숲길을 스치는 풍경은 덤이다.
마치 누군가 날 기다리고 있기나 한 듯 결국 왔어야 할 곳에 온 듯한 기분으로 드레스덴 중앙역 앞에서 내렸다. 역 뒤편에서 내린 줄도 모르고 숙소 쪽으로 향하다가 '어? 이 길이 아닌걸?' 하는데 마침 지나가던 현지인 인듯한 부부가 우리 지도를 들여다보더니 따라오라는 손짓을 한다. 한참 걸어서 예약된 숙소 앞까지 우릴 데려다 놓고 그들은 후딱 빠른 걸음으로 되돌아간다. 고맙다고 인사를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아쉽다. 그 부부의 등 뒤에 대고 우리말로 '감사합니다아~' 크게 외쳤더니 돌아보며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든다. 그 미소가 기분좋다. 드레스덴 여행의 예감이 좋다.
신기하게도 시작부터 모든 순간들이 거리낌이 없다.
발걸음을 옮기면 마침 그것이 보고 싶었던 것이었다. 앞으로 걸어가는 길에 공기의 저항조차 없이 길을 열어주는 듯하다. 배가 고파서 골목을 돌아서면 맛있는 음식점이 있을 거란 예감이 적중했다. 다리를 쉬고 싶으면 멋진 풍경이 눈앞에 있는 벤치가 나타났다. 이 무슨 신비한 조화인가. 언제까지 이럴 것인지 모르겠지만 드레스덴의 은혜를 마음껏 믿어본다.
머리와 마음을 텅 비워가지고 온 내게 이 도시의 충만한 햇빛과 에너지와 고고한 문화를 채우는 시간은 피곤하도록 길어져도 좋다. 구시가지의 돌길에 내딛는 내 발걸음 소리가 어느 날 역사가 될 거라는 당치도 않은 상상을 하면서.
어째서 낯설지 않은 걸까.
엘베강을 바라보며 오랜 전통의 미술대학이 세워진 것도, 그 강변의 행위 예술가들도, 긴 세월의 든든함 아우구스투스 다리, 폭격에 허물어진 교회 벽돌 하나하나 시민들에게 번호를 부여해서 보관했다가 재건에 사용하던 그 마음이 담긴 교회도 모두 자연스럽게 조화롭다. 온 도시가 2차 대전의 공습으로 불타고 무너져 내렸어도 그 거뭇한 색감조차도 생소하지 않다. 전쟁의 아픔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도시 자체가 가슴으로 다가온다.
브륄의 테라스에서 내려다보는 엘베강은 마치 내가 본 듯한 그 옛날의 강처럼 흐른다. 괴테가 즐겨 산책하며 유럽의 발코니라 일컬었음을 나도 인정하기로 한다. 거길 걷다 보면 그 시가지를 오가는 사람들이 풍경이 된다.
독일의 피렌체라 불릴 만큼 각종 문화유산에서 고풍스러움의 멋이 도시를 채우고 있었다. 왕궁이나 대성당, 오페라하우스나 마차가 다니는 골목길에 스며들어본다는 것은 심장이 두근대는 걸 느끼는 시간이다. 어딜 돌아보아도 감각적인 바로크 건축물들의 위용이 도시의 멋과 고고함에 흠뻑 빠뜨린다.
요하네스 왕 청동 기마상 앞 광장에서 BTS노래를 틀어놓고 춤추던 젊은 청춘들을 보며 어쩐지 가슴 뭉클. 오옷... 이쁘신 우리의 bts~. 길 가다가 갈증 나면 노천카페에 앉아 맥주 한 잔 마시며 이 도시를 넓은 눈으로 둘러본다. 거리의 아티스트가 벌이는 전위 예술도 인상적이었고, 가던 길 멈춰 서서 들었던 숄로스 광장의 털보 악사의 연주도 기억난다. 특히 밤 산책길이 이쁘고 편안했던 시간.
독일 라이프치히 남동쪽으로 마이센과 피르나 사이에 있는 엘베 강 유역에 있는 작센 주의 주도 드레스덴. 게르만의 식민에 의하여 1200년 이전에 성(城)이 구축되고 1206년에 도시가 되었다. 베를린 남쪽 약 189km 지점에 위치했다. 독일의 도시중 외곽으로 멀리 떨어진 도시라고 할 수 있다.
슬라브어(語)로 숲 속의 사람이란 뜻의 드레스덴(Dresden), '평야의 삼림 거주민'을 뜻하기도 하는데 드레즈단이라는 슬라브족 촌락으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옛 동독의 古都,
도시가 오가는 이들을 압도할 만큼 크지 않아서 참 다행이다. 이쁜 뮌츠 골목도, 강변을 바라보는 나란한 벤치들도, 노란색 트램도, 소소하게 품격을 느끼게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천천히 다닐 수만 있어도 좋은 곳, 이 도시가 폼나니까 그 속에 서 있는 사람들까지 아름답다. 그들의 눈빛은 따뜻하다. 그냥 다녀도 가슴 벅찬데 게다가 마냥 관대해지기까지 한다. 드레스덴은 더없이 은혜로웠다.
그때 갔어야 했는데...
잊을만하면 떠들어댈 만했다. 그리고 오고야 말았다.
▲드레스덴의 맛
독일에는 감자요리가 여러 가지 있다. 그 중에 노천카페에서 먹었던 뢰스티는 우리의 감자채전과 흡사하다. 그 위에 소스와 잘게 썬 베이컨이나 샐러리 등을 뿌리고 채소를 듬뿍 얹어서 먹기 때문에 식후에도 가벼운 느낌이 좋다.
특히 구운 토마토와 콩 요리를 많이 먹었는데 잘 익은 토마토 맛의 풍부함은 최고다. 그리고 드레스덴에 왔으니 흑맥주 한잔쯤 빠뜨릴 수 없다.
당신은 섬에 가고 싶지 않은가? ‘그 섬에 가고 싶다’란 말에는 막연한 그리움이 담겨있다. 배를 타야만 들어갈 수 있던 섬이 다리가 놓이면서 바퀴가 달린 탈 것으로도 갈 수 있게 된 곳이 많아졌다. 접근은 쉽고 섬이 주는 그리움을 느끼게 해주는 곳으로 여행을 떠나보자. 그곳이 강화도다.
봄이 채 오지 않은 겨울 끝 무렵에 서울에서 멀지 않은 강화도로 향한다. 섬이지만 섬이 아닌듯한, 역사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어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고 불리는 강화도에서 어렴풋이 남아있는 섬이 주는 그리움과 시간의 터널을 지나온 역사의 자취를 만나볼 것이다.
섬과 육지를 연결하는 연륙교가 놓인 후에는 섬이 섬답지 않아졌다. 이것을 아쉬워해야 할 것인가, 기꺼워해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개인의 몫이다. 어찌 되었든 다리가 놓여 섬 주민들의 생활이 한결 수월해진 것은 사실이다. 여행자의 입장에서도 섬 나들이가 한결 편해졌다. 초지대교를 지나 강화도에 입도한다. 강화도와 육지를 연결하는 연륙교는 두 개다. 처음으로 연륙교가 놓인 때는 1969년이다. 시간이 지나면 낡아지듯 다리는 노후되었고 1997년에 재시공하여 만들어진 다리가 지금의 강화대교다. 김포시와 강화도를 잇는 초지대교와 강화대교 외에 강화도와 교동도를 잇는 교동대교, 2017년에 개통된 석모대교까지 합치면 네 개의 다리가 강화도를 사통팔달로 연결하고 있다.
강화도가 육지와 연결된 지는 어언 50년 세월이 흘렀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섬이 육지가 되다시피 한 후 많은 시간이 지났다. 섬이라기보다는 육지처럼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섬 느낌이 남아있는. 그래서일까? 강화도를 제2의 터전으로 삼으려는 이들이 많다. 가까운 이도 강화도에 집을 짓고 강화도 자연을 해설하며 활기찬 인생을 살고 있다. 역사의 섬 강화도에는 휴식과 새로운 용기가 꿈틀거린다.
강화도가 섬이라는 사실은 초지대교를 건널 때 실감한다. 마니산을 오를 때도 마찬가지다. 마니산은 일종의 전망대다. 여유만 된다면 꼭 올라보길 추천한다. 전체 전경을 확인하려면 전망대에 올라가야 하지 않는가. 마니산 능선을 타면서 만나는 경치는 삭막함이 진을 치고 있는 이런 계절에도 충분히 경이롭다. 근육처럼 뻗어 내린 산줄기가 서해바다를 향해 두 팔로 벌리고 있고 바다 위에는 크고 작은 섬이 올망졸망 떠 있다. 이런 풍경만으로도 오를만한 가치가 있지만 정상에 있는 첨성단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되새긴다면 흘린 땀방울이 아깝지 않다.
첨성단은 고조선 시대 단군이 제를 지내기 위해 쌓았다고 전해진다. 하늘을 숭배하고 제사를 지내는 제천 행사는 선사시대부터 시작되었다. 그 후 신라, 백제, 고구려의 왕들과 고려의 제관과 왕 그리고 조선시대에까지 국가적으로 단군왕검에 대한 제를 이곳에서 지내왔다.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본래의 모습을 확인할 수는 없지만 현재에는 둥근 기단 위에 네모난 제단의 형태로 되어있다. 하늘에 대한 제사는 현재에도 개천절에 의식을 진행하고 있다. 제단과 함께 눈여겨볼 것은 제단을 지키기라도 하듯 서 있는 소사나무 한 그루다. 유난히 바람이 센 정상, 돌 틈 사이에 뿌리를 내린 150년 된 소사나무는 지금도 의연하다. 천연기념물 제502호로 지정되어 있다.
마니산의 첨성단은 강화도 역사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상징과도 같다. 선사시대부터 삼국시대, 고려와 조선을 지나 근세기에 이르는 역사의 자취를 따라서 강화도를 한 바퀴 휙 돌아본다.
강화도의 굴곡 진 역사를 만나기 전 바다가 보고 싶다면 동막해변부터 가보자. 해변 가까이 분오리둔대에서 바라보는 서해 풍광은 시름을 잊게 할 정도로 시원하면서도 애잔하다. 서해바다가 갖는 먹먹함 때문이다. 갯벌에서 느껴지는 끈끈한 바다의 흔적을 삶의 흔적인 양 곱씹으며 강화도 대표 사찰인 전등사로 향한다. 역사의 현장에서 살아남은 전등사는 그리 화려하지 않으나 시간의 결을 품고 있다. 대웅전 앞 느티나무가 현실의 위태로움을 잊고 쉬어가라며 부른다. 전등사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였던 절이다. 명부전에서 100m 정도 오르면 정족산사고터가 나온다. 초지대교가 보이는 너른 풍경을 앞에 두고 잠시 쉬어 가도 좋다.
전등사를 주변으로 삼랑산성의 흔적이 남아있다. 삼랑산성은 삼국시대에 쌓았던 토성이다.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점령했던 5세기경부터 백제, 고구려, 신라가 번갈아 가며 강화도를 점령하였고, 강화도에 요새를 설치하였다. 강화도는 한강을 낀 전략적 요충지였다. 고려시대에는 강화도로 도읍을 옮겨 39년간 몽골에 대항하였고 조선시대로 넘어오면서 5진, 7보, 54돈대를 설치하여 외세의 침입을 막고자 하였다. 초지진, 덕진진, 광성보, 갑곶 돈대 같은 군사 시설이 강화도 곳곳에 남아있다. 조선말 병인양요, 신미양요가 강화도를 무대로 벌어진 전투다. 꼭 가봐야 할 곳으로 추천하는 광성보에는 광성돈대, 손돌목돈대, 용두돈대 등이 있다. 송림 사이를 지나 용두돈대까지 이어지는 길은 사계절 언제 걸어도 좋은 산책로다. 길 끝, 좁은 강화 해협을 향해 용머리처럼 쑥 튀어나온 돌 위에 서 있는 용두돈대는 천연방어지다.
시대를 거슬러 삼국시대 이전의 유적인 강화도 부근리 고인들을 만난다. 강화도 북부에 위치하여 이동 경로에서 뒤로 밀린 때문이다. 고인돌은 청동기시대 무덤이다. 부근리 고인돌은 규모가 워낙 커서 무덤이 아니라 제단이 아닐까라는 의견도 있다. 두 개의 굄돌 위에 53톤에 달하는 덮개돌이 얹어져 있는데 그 옛날 이 돌을 옮기기 위해 동원되었을 사람 수를 떠올려 보면 이것이 과연 믿음의 힘인지 권력인지 궁금해진다. 부근리에 16기의 고인돌이 있고 오상리에 탁자식 고인돌 군락지가 있어 청동기시대의 주 생활무대가 이곳 강화도였음을 알 수 있다.
역사의 현장을 짚어가며 나름 알찬 여행을 했다 싶다. 이제는 추억의 소환이다. 강화도와 교동도를 잇는 교동대교를 지나 대륭시장으로 간다. 제비집이 처마 끝에 붙어있고 고개를 쳐들지 않아도 시장통이 눈에 들어오는 키가 작은 시장이다. 좁고 가파른 계단을 올라 옛날식 다방에 앉는다. 달걀 동동 쌍화차에 옛 기억을 앞에 두고 겨울 볕을 쬔다. 좁은 골목길은 꽈배기 도넛 하나에도 웃음이 스민다. 교동도는 강화도 섬 속의 섬, 당신의 옛 시간을 만나게 해주는 여행지다.
강화도는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고 할 정도로 선사유적부터 고려, 조선의 문화재가 즐비하다. 섬을 빙 둘러 53개의 돈대가 자리하고 있고 어느 돈대나 조망이 시원하다. 최근에는 강화 나들길이 인기다. 해안 절경을 끼고 오르는 고려산, 마니산 산행도 해볼 만하다. 요즘 여행을 자제하는 분위기 탓에 식당이나 여행지가 한산하다. 달리 말하면 여행을 여유롭게 할 수 있는 시기라는 이야기다. 주변 환경에 주눅 들어 있기보다는 겨울 햇볕을 쬐며 기지개를 켜 몸과 마음을 쫙 늘인 뒤 단단하게 움켜쥐는 그런 시간이 필요하다. 강화도 한 바퀴에서 답을 찾는다.
그 외 가볼 만한 곳
정수사
마니산 자락에 호젓한 분위기의 정수사는 강화도의 대표 사찰인 전등사와는 또 다른 맛이 있다. 이곳에서 마니산 첨성단까지 오를 수 있는 짧은 산행코스가 있다. 자그마한 절, 정수사는 여행의 호흡을 가다듬기에 좋은 소박하면서 고즈넉한 산사다.
연미정
고려시대에 지어진 정자로 월곶돈대 앞 물길이 제비꼬리 같다고 하여 이름이 연미정이다. 정자에 서면 확 트인 전경이 눈길을 끈다. 미세먼지가 없는 날에는 북녘 땅과 파주시, 김포시가 선연하게 보인다. 두 그루의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멋스럽다.
강화 추천 살 거리
순무김치
순무김치는 매콤하면서도 쌉싸래한 맛이 일품이다. 비타민 함량이 높고 소화를 촉진하는데 특효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관광지 앞에서도 구입이 가능하나 강화풍물시장에 가면 맛을 보고 입맛에 맞는 것을 고를 수 있어 좋다. 순무김치는 처음 담갔을 때보다는 익었을 때 더 맛있다. 잘 익은 순무김치는 무와는 다른 쫀득하게 씹히는 아삭거림과 혀가 아리다 싶게 톡 쏘는 맛이 난다. 한번 맛을 들이면 그 매력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다.
강화도 먹거리
밴댕이회무침
가장 인상에 남는 맛은 강화풍물시장 2층에 있는 식당에서 먹은 밴댕이회무침이다. ‘서울식당’에서 투박하지만 찰진 그 맛을 처음 보았다. ‘밴댕이 가득한 집’, ‘밴댕이로 왕창 잘되는 집’이 꽤 이름이 알려져 있다. 시장에서 먹는 것도 좋지만 포구에서 여유롭게 밴댕이 맛 탐방을 즐겨도 좋다. 다양한 밴댕이 요리와 찬거리가 강화도 만찬으로 기억될 만한 후포항의 ‘청강횟집’을 추천한다.
그녀가 들려주는 얘기의 톤도 내용도 화창하다. 꽃 핀 개나리처럼 밝다. 전공은 미나리 농사. 청초하기로 개나리에 맞먹을 미나리와 자신이 딱 닮았단다. 미나리의 억센 생명력, 그걸 집어 자신의 정신적 초상으로 여기는 거다. 미나리의 초록처럼 싱그러운 시절은 아쉽게도 이미 몸에서 떠났다. 그러나 이옥금(62) 씨가 누리는 귀농생활은 베어낸 자리에 다시 싹눈이 돋는 미나리처럼 싱싱하다.
농사란 정한(情恨)의 사업이다. 흠뻑 정을 쏟아도 일쑤 허무한 결산이 돌아오는 게 농사이니까. 그러나 미나리 농군 옥금 씨는 구슬피 우는 일 한 번 없이 쾌속 직진했다. 미나리 농사를 시작한 첫해부터 오붓한 결산을 봤으며, 지금까지 줄곧 그래왔으며, 앞으로도 거침없이 질주할 게 빤하다는 게 아닌가.
‘뭐시라? 그럼 나도 미나리 농사에 뛰어들어볼까나!’ 이렇게 솔깃해하며 미나리를 믿고 귀농에 용기를 내는 이가 있다면 그는 머잖아 싱긋 웃을지도 모른다. 썩 유능한 작목을 선택했다는 안도감으로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옥금 씨의 믿을 만한 귀띔에 따르면, 개중에 유망하면서도 수월한 게 미나리 농사라는 게 아닌가. 물론, 남의 흉내만으로 덩달아 성취할 수는 없는 게 농사다. 야무진 자립 의지와 노력, 그리고 속 깊은 꾀주머니가 필요하다. 행운을 배달하느라 늘 업무에 바쁘신 천사의 내방도 필요하다. 여하튼 농사 초보자에게 미나리만큼 대견한 작물이 다시없다는 게 옥금 씨가 주는 금쪽같은 힌트다. 그녀 자신이 일련의 성취를 이룬 본이라는 자부심도 크다.
미나리 연간 매출액 약 7000만 원
흔히 남편의 근사하고도 집요한 꼬드김에 따라 부부 귀농이 이루어진다. 옥금 씨의 경우는 달랐다. 옥금 씨가 먼저 남편 정덕근(69) 씨를 유인했다. 아마도 신혼 첫 밤의 속삭임처럼 자못 감미로운 유혹이지 않았을까. 지루한 서울 생활을 접고 시골에서 자연을 즐기며 인간의 고유한 의무인 평온한 삶을 구가하자, 피로에 찌든 두 사람의 영혼에 생기를 부여해보자는 요지의 제안을 했던 모양이다. 거기엔 아무런 먹구름이 없었다. 해서, 은퇴 이후의 나날을 다소 따분하게 보냈던 덕근 씨는 노년의 신세계가 멋들어지게 펼쳐질 것을 기대하며 마침내 아내와 함께 시골로 내려온 것이다. 저 멀지 않은 곳에서 희양산의 우뚝한 바위 봉우리가 눈부신 빛을 뿜는 경북 문경군 가은읍의 변두리께 시골로. 그게 10년 전의 일이었다.
“제가 원래 여행을 좋아했어요. 문경으로 귀농한 것도 여행 중에 만난 문경 산수에 반한 호감 때문이었지요. 명산이 많아 어딜 보나 아름다운 지역이니까요. ‘문경’(聞慶), 즉 ‘기쁜 소식을 듣는다’는 지명의 뜻도 아주 기분 좋더라고요.”
“귀농하자마자 미나리 농사를 시작했나요?”
“처음 한동안은 오미자 농사를 했어요. 오미자가 문경의 명산물이거든요. 지역의 대세를 따랐던 셈이죠. 그런데 전지(剪枝) 작업을 비롯해 모든 게 너무 힘들었어요. 특히나 부부 둘 다 키가 작아 오미자 덩굴을 지지대 위에 올려주는 작업이 엄청 힘들더군요. 남편의 불평불만마저 심해져 자칫하면 이혼 법정에 설 것 같은 상황이기도 했어요.(웃음) 이래저래 도저히 안 되겠더라고요. 그래서 미나리로 바꿨지요.”
미나리엔 두 종류가 있다. 물속에서 길러 뿌리째 생산하는 물미나리와, 밭에다 재배해 잎자루를 수확하는 밭미나리. 옥금 씨는 비닐하우스를 지어 밭미나리를 기른다. 경지 면적은 1200평. 그간의 연간 매출은 평균 6000만~7000만 원이며 이것의 70%가 순소득이란다. 미나리 재배 첫해부터 이런 수준의 성과를 거두었다니 놀랍다. 더욱 기똥찬 건 연중 작업기간이 다만 두어 달이라는 점.
“미나리 농사의 매력은 한둘이 아니에요. 우선은 첫해부터 수익 발생이 가능하다는 점이지요. 생산까지의 작업 과정도 단순하고, 다년초라서 한 번 심으면 과수처럼 해를 이어 계속 수확이 됩니다. 농약이나 농기계가 필요한 일도 아니고요.”
“연중 작업기간이 불과 두어 달이라 했죠? 그 이상은 생산이 어려운가요?”
“연중 생산이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늦겨울과 초봄 사이 두어 달만 집중해도 채산성이 좋기에 그리 하고 있어요. 이 시기엔 잡초도 거의 없어 일이 한결 쉽지요.”
“판로 문제는? 생산이 쉽더라도 판매조차 쉽지는 않을 텐데요?”
“그게 가장 중요한 대목이죠. 즙으로 가공하지 않는 한 저장 판매가 불가능해 생물로 즉시 팔아야 하는 게 미나리이니까. 저는 밭을 살 때 일부러 차량 내왕이 많은 도로변을 택했어요. 관광지구 문경을 드나드는 관광객들이 직접 재배 현장을 구경하고 시식까지 겸할 수 있도록 찻길 가에 간이식당이 딸린 농장을 조성한 게 주효했지요. 지인들을 통한 택배 판매나 SNS 마케팅도 겸해왔지만 현장 판매가 참 재미있어요. 주말이면 허리에 찬 전대가 순식간에 불룩해지던걸요.(웃음)”
갈피를 잡지 못한 채 밤낮없이 식은땀을 흘리기 쉬운 게 농사다. 물정에 어두운 귀농인의 시련은 더 자심할 수밖에 없다. ‘하이고, 이건 뭐 모래성을 쌓는 거 아녀?’ 그런 푸념이 푸짐하게 터져 나올 수 있는 것. 하지만 옥금 씨는 까딱없다. 오미자로 초기에 잠시 죽을 쑨 것 외엔 순풍을 만난 돛배처럼 길찬 행보를 거듭해왔다. 이게 오로지 자력으로 이뤄진 것만은 아니란다. 지자체 공무원들이 적극 거들어준 대목이 많다는 게 아닌가. 멘토를 붙여주고 판로를 함께 모색하는 식으로. 올봄부터는 관에서 주도하는 ‘문경 미나리삼겹살 식당 단지’에 미나리를 납품할 예정이며, 공급 물량의 지속을 위해 미나리를 연중 생산할 계획이다.
“사견이지만, 제가 파악하기로는 전국의 미나리 농가들이 대체로 안정적인 운영을 하는 것 같아요. 경북 청도군에 이어 미나리 농업 특화지구로 부상하고 있는 문경군으로 귀농한 건 행운이었지요. 애초 농사에 전념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정말 재미있게 빠져들었어요. 귀농 이후 할일이 많아졌지, 사귄 사람 많아졌지, 갈 곳과 오라는 곳 많아졌지, 이모저모 즐거워요.”
고충은 낙관적 근성으로 해결했다
신바람 났다, 옥금 씨. 예상하지 못한 고난으로 어혈이 든 심정으로 헤매기 쉬운 게 귀농생활. 그러나 그녀에겐 무관한 얘기다. 두루두루 즐거운 일 속에서 활갯짓하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만족과 기쁨을 느낀다는 게 아닌가. 이는 옥금 씨가 몹시 사랑해 마지않는 희양산의 정기를 받은 덕택이라기보다는, 그녀 자신이 스스로 기른 활달한 기상의 정기를 받은 덕이라 봐야 할 것 같다. 타고난 근면성, 낙관적인 근성, 거침없는 사교성을 겸비했으니, 한마디로 어느 물에 던져놔도 물방개처럼 능숙히 활개칠 성향이지 않겠는가. 게다가 딱 부러지게 대찬 투지마저 타고났다. 귀농 초기, 그녀는 여기저기서 몇 번 맞붙었단다.
“귀농인들에게 던지는 눈초리부터 차가운 게 시골 분위기입니다. 초기에 저는 세 차례 들었다 놨다, 원주민들과 싸워 이겼어요. 한번은 공무원들과도 싸웠지요. 농지원부 관련 일처리에 너무도 미온적이라 분통을 터트렸던 건데, 누가 그러더라고요, 일단 책상을 탕탕 치며 ‘면장 나오라고 해!’라고 버럭버럭 고함을 치라고요. 그래 그대로 했더니 비로소 태도를 바꾸더라고요.(웃음)”
“원주민 한 사람과 싸우고 나면 마을 전체가 돌아앉을 수 있지요. 미운 털이 박힐 걱정은 하지 않으셨나?(웃음)”
“통과의례를 피할 수는 없지요. 충돌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협력하는 긍정적 관계의 조성을 앞당겼다고 봐요. 뭐 사실, 저의 단점은 인정합니다. 매사 너무 적극적이라는 거!”
“문경군 귀농귀촌협의회장으로도 활동했죠? 조용하고 한가한 시골 생활을 계획했던 처음의 구상과 다른 방향으로 살아온 셈인가요?”
“별안간 방향이 달라진 게 사실이지요. 그런데 일이 즐거워 집 안에만 박혀 있긴 힘들더라고요. 이왕 시골에 온 김에 남들과 어울려 더 즐겁고 더 보람찬 일을 찾아 해보고 싶다는 욕구를 누를 수가 없어서.”
“나만의 이익이 아니라 남들의 유익까지 생각했다는?”
“남들에게도 득이 되는 일이 결국은 저 자신에게 보람으로 돌아오는 거 아니겠어요? 저는 지인들이 일손을 필요로 할 경우엔 무조건 달려갑니다. 불편하고 험한 일에 더 큰 흥미를 느끼는 게 저의 특질이기도 해요. 예전엔 혼자 떠나는 배낭여행을 자주 했는데 그때에도 주로 오지를 누볐지요. 그런 여행이 삶의 본질 같은 걸 사색하게 하니까.”
귀농을 통해 자연 속에 살다 보니 이젠 딱히 여행 충동을 느끼지도 못한단다. 가만히 바라보면 주변의 자연 풍경이 경이로워 이미 이색이며 충분한 사색의 재료이기 때문에.
“삶의 본질? 그걸 뭐라고 보죠?”
“황량하고 쓸쓸한 게 인생의 본질 같아요. 그러나 다 긍정하고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것. 가급적 재미있게 살아야겠다는 것. 그런 걸 자주 생각해요. 제가 한번은 국수집을 차려 즐거웠어요. 문경 아줌마들이 모이는 수다방을 만들고 싶어 한 그릇 가격을 3000원으로 정해 문턱을 낮췄지요. 그런데 이게 대박이 났어요. 어휴, 남녀노소 손님이 어찌나 많던지 남편의 원성이 하늘에 뻗치던걸요.”
“박수가 아니라 원성이?”
“일을 거들던 남편이 질려 나가떨어진 겁니다. ‘이거야 원, 농사도 힘들어 죽을 맛인데 내가 국수까지 말아야 하느냐? 이젠 정말 못 살겠다!’ 그런 비명을 지른 거예요. 냉큼 가게를 접었지요. 하하하!”
투덜이 남편은 하나뿐인 길벗
옥에 티라 할까. 옥금 씨의 미끈한 시골생활에도 폐단이 있다. 남편과 앙앙불락 실랑이가 잦았으니 말이다. 이는 사실 간단한 ‘티’가 아니라 토네이도의 전조일 수 있었지만 용한 곡예로 어렵사리 넘어온 것 같다. 내외는 한집에 살면서도 3년째 별거하고 있다. 옥금 씨는 안채에, 덕근 씨는 별채에. 이렇게 소가 닭 보듯이 사는 게 서로 속 편하단다. 규격화된 부부 시스템에서 진취적으로 벗어나 호젓하게 개체의 인권과 자유를 누리기에. 용무가 있을 때면 상대의 주둔지로 면회를 가겠지. 영치금을 넣어주듯이 간간이 풍미 넘치는 별식을 넣어줄지도 모르겠다. 잠이야 창문을 톡톡 두드리는 달빛이 있으니 한 이불을 덮지 않아도 될 테지.
아직 불후의 저작을 내지는 못했지만 옥금 씨는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해 시(詩)로 등단도 했다. 덕근 씨는 국토교통부 산하 기관에서 항공교통관제 공무원으로 35년을 근무하다 퇴직했다. 사회와 이웃을 교란한 적 없는 이 무고한 사람들은 제각각 억울하다고 하늘에 대고 탄원서를 쓴다. 할 만한 일이라는 일은 모두 찾아 나를 쏟아 부음으로써 명랑 사회 건설에 이바지하는 게 무슨 죄냐고 옥금 씨는 툴툴거린다. 반면, 덕근 씨는 무슨 억하심정으로 날이면 날마다 나를 일에 처박아 골병들게 하느냐고 투덜거린다. 그것도 ‘무보수 명예직’으로 말이다. 덕근 씨는 괜스레 아내의 꾐에 코 꿰여 애초 기대했던 시골이라는 낙원은커녕, 만고에 허무한 지옥에 풍덩 빠졌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씩 웃으면 해맑은 표정이 드러나는 이 순둥이 남자는 낙원을 찾아 모퉁이를 돌다가 왕퉁이 벌에게 쏘인 격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옥금 씨는 고고싱! 어디까지나 직진이다. 인생이란 저마다 외로운 별처럼 홀로 광을 내야만 하는 고독 드라마가 아니고 뭐란 말인가.
“제가 이젠 남편을 완전 포기했어요. 남편 역시 저를 도저히 뜯어고칠 수 없는 여자라는 걸 명석하게 알아차린 것 같아요.(웃음) 그러자 살짝 평화로운 분위기가 감돌아요. 연민이라 하나? 그런 감정도 생기고요. 알고 보면 남편이 엄청 착한 사람이거든요.”
유유상종할 게 드문 연이라는 걸 귀농하고서야 알았단다. 그러나 근 한평생을 동행한 남편이란 앞에도 없었고 뒤에도 오지 않을 하나뿐인 길벗. 그걸 인정하고 이젠 연민으로 남편을 보듬을 생각인 것 같다. 그러나 옥금 씨의 머릿속에는 지금도 일 생각으로 꽉 차 있다.
“이 좋은 시골을 놔두고 왜 아비규환 같은 도시에서들 살까요? 요즘 저는 어떻게 해서든 도시 주부들을 한 트럭씩 실어다 1주일이라도 시골 체험을 하게 할 생각에 골몰해 있어요. 귀농을 유도하기 위해.”
이옥금 씨가 주는 Tip
•시골에서 살고 싶다면 주저 없이 용기를 내라. 이것저것 재다 보면 세월만 축난다. 어떻게든 기어이 살아남겠다는 결심이면 길이 열린다.
•시골에 으리으리한 집을 짓지 말자. 이웃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 뿐만 아니라 나중에 팔기도 어렵다.
•사전에 잠깐이라도 살아보고 귀농지를 결정하자. 농사는 지역 환경이 중요 변수이니까.
•유아독존할 게 아니라면 경치 좋다고 깊은 산중에 올라가 살지 마라. 눈길이나 빗길에 구르기 십상이다. 3년쯤 지나면 다 내려온다. 좋은 경치야 슬슬 근방을 찾아다니며 즐기면 된다.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와 동대학원 졸업. 광주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