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보지 않은 길이 더 아름답다.’ 라는 말을 ‘로버트 프로스트’라는 시인이 했다.
박완서 작가님의 ‘못 가 본 길이 더 아름답다.’ 라는 산문집도 있다.
두 갈래 길에서 어느 한쪽을 선택해 갔다면 그 다른 쪽 길은 어땠을까 궁금하고 그쪽으로 가 볼 걸 후회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선택의 연속으로 인생을 살아나간다. 때로는 선택을 잘못할 수도 있고 어쩌면 잘한 선택이라고 미소를 지을 수도 있다.
어렸을 때는 누구나 커서 무엇이 될까 상상을 많이 한다.
그러나 어떤 다른 일로 하고 싶었던 일을 하지 못하거나 다른 쪽으로 가야만 했었을 때 가지 않았던 길을 그리워하게 된다.
못 가본 길이 아름답다는 의미는 못 가봤기 때문에 아쉽고 후회된다는 뜻과 못가 본 길이기에 더 아름답게 생각될 수 있다는 뜻일 수 있을 것 같다.
언젠가 인터넷에 어느 외국계 은행에서 시각장애인을 위한 목소리 봉사에 지원해 보라는 배너광고가 눈에 띄었다.
순간 필자의 어렸을 때 꿈이었던 성우가 생각나고 한번 도전해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중, 고등학교 시절 국어 시간에 낭독 발표나 책 읽는 것은 도맡아 했었고 어릴 때는 영화 한 편을 보고는 동네 또래들을 모아놓고 그 내용을 이야기했는데 정말 영화를 직접 본 것처럼 재미있다고 열광적인 반응을 받았던 적 있는 만큼 그런 쪽에 관심이 많았었다,
그러나 살면서 더 재미있는 일에 몰두해서인지 어릴 때의 꿈을 실현할 노력을 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다른 것보다 목소리 연기만큼은 자신 있을 것 같아 신청할까 말까 망설이고 있는 동안 또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신문에서 그 기사를 읽었다. 목소리 재능 기부자 100명을 모집하는데 전국에서 2만 명이 신청했다고 한다.
현직 성우들 앞에서 한 사람당 1~2분 정도의 대본을 읽으며 목소리 연기를 하는 시간을 주었단다.
지원자는 각양각색의 사연을 가진 분들로 ‘가족 중에 시각장애인이 있어서,’ 또는 ‘장애인을 돕고 싶어서,’ ‘뭔가 보람 있는 일을 하고 싶어서' 라며 따로 보수를 주는 것도 아닌 순수 봉사인데 그렇게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갖고 지원해 왔다는 것이다. 시각장애인용 오디오 북을 위한 목소리 기부. 필자가 신청했다 해도 선정이 됐을지 아닐지는 모르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 오디션이 만만치 않은 어려운 시험이었던 것 같다.
시험관인 성우들은 아무리 애절한 사연을 가지고 지원했다 해도 그런 것보다는 음성과 발음 그리고 표현력을 우선으로 보았다니 필자가 합격하기에는 어려웠을 듯하다.
그래도 한번 용기를 내어 지원해 볼걸. 후회가 된다. 가보지 않은 길이기 때문이다.100명 모집하는데 2만 명이 왔다니 19,900명이 떨어진 셈인데, 이 일로 유명해지는 것도 아니고 보수가 있는 것도 아닌 자원봉사에 뜻을 가진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는데 이 사회의 따뜻함이 느껴지고 마음이 훈훈하다.
다음에 혹시 이런 기회가 있다면 떨어질지언정 늦지 않게 지원을 꼭 해 보아야겠다고 다짐한다.
음악을 들으며 수학문제를 푸는 학생이 있습니다. 봉제공장 작업장에서 라디오를 계속 켜놓고 라디오 연속극도 듣고 뉴스도 들으며 옷감 재단도 하고 재봉틀로 박음질도 합니다. 별 실수 없이 두 가지 일을 해내는 걸 보면 젊은 사람이고 젊음이 좋기만 합니다.
나이 들면서 두 가지 일이 어렵습니다. 은행가서 카드로 돈을 찾고 통장정리하고 시계방에 가서 손목시계 전지를 새것으로 교체하고 오겠다고 집을 나섰는데 은행가서 돈 찾고 통장정리만 하고 그냥 집으로 들어왔습니다. 시계 전지 교체는 은행과 연관성이 없다가보니 잊어버립니다. 어떤 때는 통장정리 하겠다고 통장을 가방 속에 넣고 나가서 며칠째 은행 앞을 지나면서도 까마득히 잊어버립니다. 당장 통장 정리가 절박한 것이 아니니까 두뇌가 기억을 깨우쳐주지 않습니다. 물건을 쓰고 아무데나 두면 시간이 지나서 다음에 쓰려고 찾을 때 어디 둔 곳을 몰라 찾느라고 애를 먹습니다. 나이가 들면 물건은 늘 두던 제자리에 두는 Only One 저장법이 최고입니다.
라면을 끓이는 시간은 짧아서 별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빨래를 삶거나 사골 곰국을 끓이면서 지루한 시간을 활용한다고 텔레비전을 보다가는 사고 칠 가능성이 높습니다. 재미있는 텔레비전에 온통 신경이 몰입 되는 순간 물이 쪼그라들고 내용물이 타는 걸 깜박합니다. 내용물이 아니라 냄비 까지 태울 때도 있습니다. 이것이 평소하지 않던 것을 여러 가지 하려다 생기는 일입니다.
망하는 기업들도 대부분 문어발식으로 기업을 확장하다가 자금 경색이나 예기치 못한 일이 터져 모기업까지 문을 닫습니다. 농촌에서도 우리 부모님세대는 농사를 천직으로 알고 논농사 밭농사만 합니다. 수입이 별로여서 그렇지 빚지고 살지는 않습니다. 망하려고 해도 망할 꺼리 가 없습니다. 빚을 크게 내어 가축도 키우고 특용작물을 한다고 덤비다가 실패하면 억대의 빚을 집니다. 해오던 것을 하지 않고 부실한 준비로 큰일에 덤벼들었기 때문입니다.
짐 콜린스의 ≪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에 나오는 ‘고슴도치와 여우’이야기가 재미있습니다. 많은 것을 아는 여우와 큰 것 한 가지를 아는 고슴도치와의 게임에서 승자는 늘 고슴도치라고 합니다. 여우가 갖은 머리를 짜내 고슴도치를 공격하지만 고슴도치는 결정적인 순간 몸을 둥글게 하여 가시넝쿨을 만들어 버립니다. 그리고 여우가 물러갈 때까지 인내합니다. 잔꾀 많은 여우가 복잡한 상황을 만들어 고슴도치를 유인하지만 고슴도치는 이것저것 고민하지 않고 한 가지만 하기 때문에 살아남는 다고 합니다. 섣불리 물로 뛰어들거나 빠른 걸음으로 도망가는 행동을 취했다면 여우의 밥이 되었을 것입니다.
나이 들수록 하루 한 가지만 Only One을 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등산하는 날은 등산만 해야지 등산 갖다 와서 다른 사람을 만나는 약속을 하면 곤란합니다. 약속시간에 늦어버리거나 하산 주 몇 잔에 약속자체를 잊어버리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하루 한건의 약속 이상은 하지 않습니다. 상대에 대한 예의이기도 하지만 여러 사람과 여러 약속을 할 만큼 바쁜 일도 없습니다. 부모님 제삿날이라면 아무하고도 약속을 하지 않습니다.Only One 제사 생각만 합니다.
운전을 할 때는 운전만하지 라디오도 듣지 않습니다. 처음 가는 길은 인터넷으로 검색하거나 네비게이션으로 행선지 길을 머릿속으로 그려봅니다. 그러면 여유롭고 편안한 길이 됩니다. 나이 들면 많은 것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Only One 의 여유가 최고입니다.
[요즘은 외출할 일이 있으면 자가용보다는 대중교통을 주로 이용한다.
젊어 한때는 바로 몇 정거장 아래에 있는 시장이나 은행 일을 볼 때도 차를 운전하고 나갔었다.
차가 내 발이라고 생각했고 마침 정비소에 갔거나 남편이 타고 나가 집에 차가 없으면 외출을 하지 않았으며 있던 약속도 “차가 없어서 못 나가니 다음 날 만나자.”라며 취소한 적도 있다.
오래 전에 대학동창 모임이 있는 날이었다. 장소는 청계산 밑 유명한 고기 집 이었는데 10명이 모이면서 모두 차를 갖고 나왔다.
음식점 주차장이 넓어서 망정이지 욕먹을 만한 일이었다는 생각이다. 필자와 친구들은 나란히 주차된 우리 차들을 보고 기름 한 방울 안 나는 나라에서 자중하자며 한마디씩 했다.
그땐 농담처럼 나온 말이었지만 곧 실감하는 일이 생겼다.
별로 기름 값 걱정은 안하고 살았는데 어느 날 휘발유 값이 매우 비싸져서 기름을 아껴야하게 되었고 꼭 필요하지 않으면 자동차 운행을 자제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또한 차를 가지고 나간 날은 주차장이 있는 곳이 아니면 차 세울 곳을 찾아 헤매느라 진땀을 흘리고 약속시간에 늦기 일쑤였다.그래서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시작했는데 좋은 점이 아주 많았다.
처음엔 지하철 환승하기가 어려워서 힘들었지만 여러 번 타다보니 요령도 생기고 인터넷에서 미리 검색하면 나의 목적지까지 쉽게 갈 수 있는 방법이 자세하게 나와 있어 편리했다.
지하철 승강장 번호까지 나와 있어 그 자리에서 타면 정말 손쉽게 환승하는 곳으로 갈 수 있고 이렇게 익혀놓으니 지하철 타는 재미와 약속시간에 늦을까봐 고민할 일은 절대 없게 되었다.
꼭 지켜야 할 급한 약속이 있을 때가 아니면 지하철보다는 버스타기가 더 재미있다. 앉을 자리만 확보되면 창밖으로 거리풍경이나 지나가는 사람들 감상하는 재미가 쏠쏠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는 이제 대중교통을 애용하는 사람이 되었다.
어느 날 버스를 타고 나가는데 붐비는 시간이 아니어서 필자는 자리를 차지하고 창밖을 보면서 가고 있었다. 몇 정거장 후의 어느 정류장에서 20세 전후의 청년이 버스에 올랐다.
그런데 하는 행동이 조금 이상해 보였다. 운전기사 아저씨가 “학생, 돈 내야지?”하고 말했는데 이 아이는 운전석 뒷자리에 서서 못 들은 척하고 있었다.
기사님이 조금 큰 목소리로 “차비 내야지!”하고 소리를 치셨다. 그런데도 그 아이는 시선을 이쪽저쪽으로 돌리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 차는 이미 운행 중인데 아저씨가 화가 나셨는지 차비 안 낼 거면 다음 정류장에서 내리라고 엄포를 놓았다. 내가 유심히 보니 그 아이는 잘생긴 외모였지만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이는 게 약간 지적장애인 같아 보였다. 야단을 치는데도 꼼짝 않고 서 있는 모습이 좀 애처로웠다.
아저씨가 계속 소리를 크게 내셨을 때 나는 용기를 내어 “아저씨 제가 낼게요,” 하고 돈을 꺼내어 버스비 넣는 통에 넣었다. 아저씨도 그 아이도 아무 말이 없었다. 혹시 저 아저씨가 나를 주제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닐까 조금 민망했다. 순한 표정의 아이에게 어디에 가는지 집은 잘 찾아갈 수 있는지 묻고 차비라도 챙겨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버스 안의 다른 사람들 시선도 그렇고 내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멀찍이 서 있는 아이에게 더 이상 말을 붙여 볼 순 없었다. 나도 모른 척 창밖만 내다보며 목적지까지 갔다. 차비도 없이 차에 올라탄 그 아이는 집으로 잘 돌아갔을까? 자꾸만 마음이 쓰이고 조금 더 관심을 가져 주지 않은 게 마음에 남았다. 그렇다고 불쑥 돈을 쥐여 줄 수도 없고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었을까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다음에 다시 이런 경우가 생긴다면 버스비뿐 아니고 찬찬히 아이가 집까지 잘 돌아갈 수 있도록 신경 써 주리라 다짐했다. 버스를 애용하면서 버스 안에서 생긴 일이다.
최성환 한화생명 은퇴연구소장·고려대 국제대학원 겸임교수
‘드라이버는 힘, 아이언은 기술, 퍼팅은 돈’ 아마추어 골퍼들이 자주 하는 말이다. 일단 드라이버는 멀리 보내고 볼 일이고 아이언은 정확하게 핀 근처로 갖다 붙여야 한다. 그리고 마무리인 퍼팅이 좋아야 내기에서 돈을 딸 수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 중요한 퍼팅이 가끔 전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가는 경우가 있다. 이때 본인의 최종적인 판단과 실제 퍼팅시 잘못은 생각지 않고 애꿎은 캐디에게 한마디 던지는 골퍼가 있다. 물론 캐디가 경사를 잘못 읽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캐디의 조언을 받아 본인이 동의를 하고 그에 따라 퍼팅을 한 사람은 바로 자신이 아닌가? 그럴 때마다 필자는 참지 못하고 꼭 하는 말이 있다. “주식투자와 퍼팅은 자기 책임이다. 우리 인생에서 또 하나 자기 책임 하에 하는 것이 있는데 무엇인지 아느냐?” 답은 ‘노후준비’이다. 우리가 주식투자에서 다양한 전문가의 조언을 참고하는 것처럼 퍼팅 시에는 홀마다 실제로 공이 굴러간 궤적 등을 보고 익힌 캐디의 조언을 참고한다. 캐디가 못 미더울 때는 동반자의 의견을 구할 수도 있다. 경험 많고 노련한 캐디가 있는가 하면 초보 캐디도 있기 때문이다. 어느 때나 최종 결정과 최종 퍼팅은 내가 하는 것이다. 그 결과가 엉뚱하게 나왔다고 해도 조언한 사람은 조언에 그칠 뿐이다. 조언을 받아들인 것도 나고 그에 따라 퍼팅을 한 것도 나이기 때문이다. 주식투자도 마찬가지이다.
노후준비는 어떤가? 노후준비 역시 주식투자나 퍼팅처럼 이 사람 저 사람으로부터 조언을 받을 수 있다. 요즘 노후준비에 관심이 높아지면서 노후준비 또는 은퇴설계 관련 전문가가 주식투자 전문가와 캐디에 못지않게 많다. 오히려 주식투자와 퍼팅은 나름 전문성이 있어야 하는 반면 노후준비는 누구나 당면한 과제이므로 한마디씩은 할 수 있다.
그런데 주식투자와 퍼팅은 안 해도 그만이지만 노후준비는 안 하면 노후가 괴로워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좀 더 나은 노후준비를 위해 전문가는 물론 은퇴를 했거나 은퇴를 앞둔 선배들의 경험과 조언을 듣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런데 주식투자와 퍼팅에 정답이 없는 것처럼 노후준비에도 정답은 없다. 여기서 정답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맞는 답, 즉 정답(正答)도 없지만 정해진 답이라는 뜻의 정답(定答)도 없다는 것이다. 정답이 없는 대신 현명한 답, 현답(賢答)은 있다. 우문현답(愚問賢答)이 아니라 노후준비를 언제,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현문(賢問)에 대해 현답을 하는 것, 즉 현문현답(賢問賢答)인 것이다. 더욱이 그 현답은 자기 책임 하에 나만의 맞춤형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 누구를 탓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스스로 뭔가 계획하고 설계하기에는 뭔가 크게 부족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다. 따라서 퍼팅이나 주식투자를 할 때처럼 전문가와 주위로부터 도움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너무 많은 조언과 정보는 헛갈리게 만들 뿐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을 수도 있다. 따라서 전문가 2~3명, 이미 은퇴해서 노후를 보내고 있는 선배 또는 친구 2~3명으로부터 조언을 듣고 나름대로 계획을 세워야 한다. 더해서 관련 책을 읽기도 하고 세미나에 참석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듣고 읽으면서 은퇴자들의 실제 생활을 보다 보면 나만의 철학과 전략이 설 것이고 그에 따라 차근차근 나만의 노후라는 집을 설계하고 지으면 되는 것이다.
핑계 없는 무덤 없듯이 핑계 없는 노후불안도 없다. 하나 다른 점이 있다면 무덤은 피할 수 없지만 노후불안은 피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노후가 불안한 사람들은 적어도 한 가지 이상의 핑계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소득이 적거나 가족관계 또는 건강에 문제가 있거나 하는 식이다.
따라서 스스로 한 번쯤 짚어 봐야 할 질문은 “만약 내 노후가 불안해진다면 그 핑계거리가 무엇일까?”이다. 이때 기준은 필자가 좋아하는 ‘행복한 노후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다섯 가지 분야, 즉 5F(Finance, Field, Fun, Friend, Fitness)’이다. 분야별로 조목조목 짚어 볼 필요가 있다. 노후에 쓸 돈(Finance)이 부족하다면 왜 부족할까? 은퇴한 후 그 많은 시간을 보낼 소일거리 또는 취미활동(Field)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면 지금부터라도 뭘 해야 할까? 노후에 나와 함께 할 배우자와 가족을 포함한 친구(Friend)가 없다면 왜 없을까? 재미(Fun) 없는 노후가 예상된다면 왜 그럴까? 현재 건강(Fitness)에 문제가 있거나 문제가 예상된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지금부터라도 5F 중 가장 부족한 분야를 우선적으로 채워나가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돈만 있으면 다 되는 것 아닌가 할 수도 있다. 과연 돈만 있다고 해서 할 일과 친구, 재미, 건강이 따라올까? 그 돈을 누구와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할 일과 친구, 재미, 건강이 크게 달라질 것이다. 미국의 벤저민 프랭클린의 말처럼 돈은 비료와 같아서 쓰지 않고 움켜쥐고만 있으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그 돈을 잘 써야 할 일도, 친구도 생기고 재미도 따라오고 건강도 지킬 수 있는 것이다.
작은 일이 아닐 수도 있지만 지금부터라도 담배를 끊고 술을 줄이기만 해도 돈과 건강을 한꺼번에 챙길 수 있다. 배우자와 가족, 친구들을 어떻게 대하는 것이 좋을까를 되돌아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취미활동이나 문화행사 또는 봉사활동에 참가해보라. 시간을 의미 있게 보낼 수 있을 뿐 아니라 뿌듯함과 자신감도 생길 것이다. 특히 걸어 다녀야 몸이 건강하다는 걸 알고 열심히 대사활동을 한다고 하지 않는가? 나이가 들수록 육체적 건강뿐 아니라 정신적 건강이 더 중요해진다. 오래 살기만 하면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치매에 걸리지 않고 100세까지 건강하게 산다면 가족이나 친구 누가 뭐라 하겠는가? 인터넷을 뒤져 재미있는 건배사와 에피소드를 발굴, 여럿이 모이는 자리에서 써먹어 보라. 하다 보면 늘기 마련이고 잘 하면 나만의 주특기가 될 수도 있다. 사는 게 재미있으려면 내가 재미있거나 재미있는 사람과 친하게 지내면 되는 것이다.
‘평균화의 맹점’은 폴란드의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이 한 말이다. “다리의 수송력은 여러 교각이 떠받치는 힘의 평균값이 아니라 가장 약한 교각의 힘에 좌우된다”는 것이다. 다리는 가장 약한 곳에서 무너져 내리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5F도 평균값을 끌어올리는 것에 못지않게 부족한 부분을 메우려는 노력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건강을 잃으면 다른 4F가 아무리 풍족해도 다 소용없는 것이다. 5F 중 부족한 F를 찾아내서 채워가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자 우리네 인생이다.
△ 최성환(崔聖煥) 한화생명 은퇴연구소장·고려대 국제대학원 겸임교수
한국은행 과장, 조선일보 경제 전문기자, 고려대 국제전문대학원/경영대학원 겸임교수, 한화생명 경제연구원 상무, 은퇴연구소장 등 역임.
인생 65세는 중요한 분기점이다. 어르신, 노인으로 호칭되는 ‘고령자’의 대열에 편입된다. 국민연금 수급자가 되고 ‘지공거사’가 된다. 하지만 전철무료 지공거사! 요금 면제커녕 폭탄을 맞는 경우가 많다.
한국전쟁 와중에 출생신고가 몇 년 늦어 이제 65세가 되었다. 기초연금신고와 전철 무임승차권에 대한 안내문을 받았다. 고령자가 되었다는 실감이 났다. “전철을 무임승차하면 어떨까?” 어린아이처럼 가슴이 설렜다.
주민의 일상으로 찾아가는 복지행정!
얼마 전 관악구 미성동 복지담당 공무원과 보건소 간호사의 방문을 받았다. 봉지형 복지사는 “앉아서 기다리지 않고 현장을 찾아가는 복지행정을 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전철무료승차권과 기초연금신청안내, 주택연금 활용방법 등 손에 잡히는 주제를 설명하였다. 김상희 간호사는 “사회은퇴 후 활동이 축소된 어르신의 건강이 문제된다.”고 하였다. 폐렴예방무료접종, 골밀도검사, 암 검진, 임플란트 치과지원도 설명하였다. 폐렴예방접종이 일생에 꼭 한번 해야 하는 것인 줄 처음 알았다. 치매검사, 우울증검사는 이상 없이 통과하였다. 무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현장을 찾아 친절하게 설명해준 복지사와 간호사에게 감사한다.
환승기능 없는 전철무임승차권
전철 무임승차 시행초기 춘천막국수, 온양온천 등 원거리 무임승차가 화젯거리가 되었다. 퍼주는 복지라고 야단났었다. 한편에서는 집안에 머무를 고령자를 밖으로 이끌어 건강에 도움을 준다는 긍정론도 있었다. 즐거움은 여기까지였다. ‘어르신 우대용 교통카드’를 받으면서 ‘지공거사’에 대한 기대는 산산이 조각났다. 문제는 시민이 통상 버스타고 전철을 바꿔 타는 ‘환승’에서 발생한다.
전철무임승차권에는 환승기능이 없다. 대중교통 환승제가 시행된 지 10년이 넘었는데도 환승기능 없는 교통카드가 아직도 존재하는 것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버스와 전철을 한번 환승하면 가까운 거리는 1250원 남짓이면 된다. 전철요금은 무료이나 버스요금은 내야한다. 전철요금은 면제로 알았으나 실제 면제요금은 50원, 한 달 왕복하더라도 3000원이다. “눈 가리고 아옹이지, 누가 전철요금 면제라고 하겠는가?” 볼멘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지공거사 오히려 요금폭탄!
시민은 보통 버스타고 전철로 환승하여 다시 버스를 타는 경우가 많다. 이럴 경우 대체로 요금이 1500원 안팎이었다. 그런데 지공거사가 부담하는 요금은 2400원이 된다. 면제요금 합한 총 요금은 2150원 1.43배 많은 3650원이 된다. 교통요금 면제커녕 오히려 폭탄이다. 이만큼 예산도 낭비하고 있다. 많은 시민이 실질적으로 전철요금 면제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현장이다. 이 대목에서 무료승차권 무용론이 나올 수밖에 없다. 전철무임승차가 노인에게 오히려 부담을 늘리는 기막힌 현실이다.
무임승차권 환승기능 부여하라
왜, 전철요금 전액 부담자와 면제자의 요금계산이 달라야 하는가? 지공거사의 무임승차카드 환승기능부터 부여하여야 한다. 환승기능도 없는 무임승차 교통카드 발급을 특정은행에 전담시키는 것도 큰 문제다. 계좌이동제, 인터넷 전문은행 출현 등 은행 간 벽이 허물어진지 이미 오래되었다. 모든 은행에 개방하여 시민이 편리하게 이용하도록 하여야 한다.
세번째 사진은 이경숙 대표가 올댓SNS연구소를 소개하는 사진이고
네번째가 조희배 강사가 강의하는 사진입니다.
지금은 SNS 시대이다. SNS를 모르면 한글을 모르는 문맹자 대접을 받듯이 이 시대에는 SNS를 반드시 다룰 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이 SNS라는 것이 현재 시니어들이 접한 것은 불과 얼마 전 일이라 SNS의 등장과 확산 속도에 매우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다양한 기능을 탑재한 스마트폰의 급속한 보급은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 더 이상 SNS 활용을 미룰 수 없게 만들었다. 시니어들을 포함해서 누구나 스마트폰으로 소통을 하게 되자 SNS 활용 방법을 모르면 소외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SNS 활용 방법을 배워보고자 했으나 마땅치 않았다. 자녀들에게 물어 보면 중간 과정은 생략하고 사용하는 방식만 너무 빠른 속도로 가르치는 바람에 이해가 어려웠다. 다시 물어보자니 민망하고 사용 빈도가 떨어지면 그나마 곧 잊어버리니 난감한 일이었다. 돈을 들여 학원에 가서 배우자니 경제적 부담도 문제지만, 가르치는 강사나 같이 배우는 사람들 수준과 안 맞으면 역시 마음의 상처나 부담을 받을 수도 있을 것 같아 머뭇거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경숙 대표가 이끄는 ‘올댓SNS연구소’는 이런 시니어들의 갈증을 풀어주는 수요에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는 맞춤 교육 프로그램을 선보였다. ‘올댓SNS연구소는 ‘시니어의, 시니어를 위한’ 정보지식산업 전파를 설립목적으로 한 사회적 단체이다. 스마트폰 SNS 활용법 연구 및 전파와 맞춤식 보조강사 활용으로 교육성과를 제고하는 방식으로 활동한다. 2013년 11월부터 아래와 같은 활동을 하고 있다.
2013년 11월∼ 사회연대은행, 송파실벗뜨락
2014년 1월∼ 사회연대은행, 송파실벗뜨락
2015년 1월∼ 송파실벗뜨락(초,중급), 시니어스타워
2015년 5월∼ 서울시도심권50플러스센터 초,중,고급 강의(수강생 최고 평점 받음)
2015년 12월∼ 사회연대은행 강의(클럽 단체상 수상)
2016년 1월∼ 송파실벗뜨락, 경기도교육공무원연수원 강의
도심권50플러스센터 기초반/심화반
도심권이나 사회연대 은행 등에서 진행하고 있는 ‘열린학교’ 강의는 강의를 하고자 하는 단체나 개인 강사가 개설을 신청하는 강의지만, ‘올댓SNS연구소’강의는 기관에서 정식으로 강의 의뢰를 받고 소정의 강사료도 받는다는 위상의 차이가 있다.
‘올댓 SNS연구소’의 강의 프로그램은 2015년 도심권 강의 프로그램 중 최고의 평점을 받았다. 매 기수 프로그램마다 20명 정원으로 인원을 받지만, 45명 이상이 몰려 와 책상도 없이 수업을 받는 경우가 속출했다. 수강생들의 반응은 “성의 있게 강의를 진행해 들을 게 많다”는 것이 중론이고 이미 수강했던 수강생이 재충전 차 등록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현재 도심권은 물론 시니어 관련 기관에서 스마트폰 강의를 하는 사람들은 ‘올댓SNS연구소’의 강의를 듣고 ‘올댓SNS연구소’가 만든 교재를 활용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림과 사진을 알기 쉽게 넣어 번듯하게 만든 교재라서 나중에 배운 것을 잊더라도 교재를 보고 기억을 되살릴 수 있게 만들어 인기가 높다. 수강인원보다 늘 교재가 모자라는 이유는 교재만 슬쩍 가져가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금번 7~8월 강의 커리큘럼은 꿀 팁 과정으로 ‘스마트폰 자신 있게 다루기, 캘린더로 인적 네트 워크 강화하기, 카톡+밴드 200% 활용하기, 에버노트로 무엇이든지 기록하기, 구글앱을 활용한 인터넷 검색, 드라이브 사용하기, 재미있는 사진, 동영상 만들기, 해외여행 더욱 즐겁게 보내기’ 등으로 되어 있다.
매 학기 이경숙 대표의 ‘올댓SNS연구소’, 커리큘럼, 강사진 소개로 강의가 시작된다. 수강생 친목도모를 위하여 교육 과정부터 강사와 교육 참가자들 간의 정보 전달 커뮤니티 채널도 카톡과 밴드로 만들어 운영한다.
현재 창립 위원 중 7명이 강사로 포진해 있지만 지속적으로 수강생 중에서 올댓SNS연구소의 일원을 뽑는 방식으로 운영한다. 강사진은 커리큘럼이 정해지면 각자가 할당을 받고 교안을 PPT로 만들고 시연을 한다. 문제가 있으면 재 시연을 하는 식으로 훈련을 많이 한다고 한다. 그 과정이 엄격해서 풀이 죽는 경우도 생기지만, 서로 믿고 격려하며 소정의 수준에 도달하게 도와준다고 한다. 봄이나 가을에 워크숍을 1박2일 일정으로 삼림욕, 농장에 가서 일하고 밤늦도록 토론도 하고 술도 마시고 음식도 만들어 먹고 하며 결속을 다진다고 한다.
1, 지리산 청학동서 세상을 만나다
필자는 촌놈이다. 지리산 삼신봉 아래 청학동 계곡에서 세상을 만나서다. 청학동은 경남 하동군 청암면 묵계리 일원을 이른다. 삼신봉에서 발원한 맑은 물이 기암괴석으로 둘러쳐진 계곡을 돌고 돌아 섬진강으로 이어진다. 하동읍까지 40리(약 15.7㎞), 진주시까지 100리(약 39.3㎞)다. 지금은 관광지로 많은 사람이 찾지만, 앞산 토끼와 뒷산 토끼가 서로 발맞출 수 있는 두메산골이었다. ‘정감록’을 비롯한 몇몇 옛 문헌에 신선들이 사는 이상향으로 등장한다. 청학이 노닐고 흉년, 질병, 난리가 없는 지상 낙원으로 신라 말기부터 전해오는 마을이다. 할아버지도 거창군 가조면 율리에서 그 이상향을 찾아 이곳에 삶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유불선합일경정유도교"의 신자들도 1960년대 초반부터 이곳에 보금자리를 틀었다. 한복을 입고 결혼 전에는 댕기 머리를 땋고 결혼 후에는 남자는 상투를 틀고 여성은 쪽 지은 머리에 비녀를 꽂는 풍습의 도인촌이다.
이곳으로 이주한 조부모와 부모는 화전을 일구어 밭농사를 지었다. 계곡 주위의 다소 반반한 터를 잡아 다랑논을 만들었다. 어느 가을날 그 밭에서 일하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빨치산에게 붙잡혔다. 부역을 시키거나 총살을 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소나무 둥치에 포박하여 둔 채로 그들은 떠나갔다. 어둠이 깔리자 두 분은 묶인 손의 밧줄을 간신히 풀고 일궈놓았던 논밭과 익어가던 곡식을 팽개친 채 빈 몸으로 10리(약 3.9㎞) 떨어진 대밭 몰이라는 아랫마을로 소개하여 삶의 터전을 새로 마련했다.
필자는 청학동서 배태하여 이곳에서 삼 형제 중 늦둥이 막내로 태어났다. 음력으로 1950년 2월 초나흘 새벽닭이 울 무렵이었다. 배냇저고리에 쌓여 한국전쟁을 겪었고 그곳에서 유소년시절을 보냈다. 끼니를 챙기는 어머니 곁에서 딸처럼 아궁이에 불을 지피어 드리기도 하고 들녘에서 나물을 캐기도 하였다. 닳고 닳은 놋쇠 숟갈로 감자 껍질을 벗겨드리기도 하였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하동읍에 있는 하동중앙중학교에 입학했을 때도 등잔불을 켜고 살았다. 밤에 공부하고 나면 콧구멍이 까맣게 그을렸다. 등잔불에 넣을 기름도 40~ 50분 걸어가야 하는 면사무소 근처의 가게에서 기름때 진득하게 낀 됫병에 짚으로 꼰 새끼줄을 묶어 조심스레 들고 와야 했다.
어머니 나이 33세에 필자를 낳았다. 큰 형님과는 10세, 둘째 형님과도 6세 터울이다. 할아버지의 만류로 9세에 초등학교에 입학(1958)했다. 징검다리가 있는 개울을 건너 신작로 고갯길을 돌고 도는 1시간 거리에 있는 청암초등학교였다. 공부 잘하고 달리기, 웅변, 그림 그리기 등 모든 부분에서 두각을 보였고 전교 학생회장도 했다. 중학교 역시 수석으로 입학하였고 3년 동안 1등을 놓친 적이 없는 수재로 지역주민의 기대를 받고 자랐다. 중학교 때는 같은 학년의 친구 집에 입주하여 공부를 도와주고 숙식을 해결한 적도 있다. 중학생이 가정교사로 일한 것이다. 중학교를 졸업한 후 초등학교 모교 졸업식에서 축사한 특별한 경험이 있다. 동네 결혼식의 축사도 도맡아 했다.
2. “당신은 중책을 맡게 될 거야!”
거창대성고등학교를 졸업(71)한 후 72년 곧바로 국민대학교 행정학과에 입학하여 1학년을 마치고 공군에 자원입대하여 관제병으로 3년 만기 전역했다. 이후 77년 10월, 대학 졸업 직전에 쌍용그룹 고려화재해상보험㈜에 공채로 입사했다. 특종보험 언더라이팅 업무를 하다 기획조사부로 발령되어 신상품 개발 업무를 하여 국내 최초 골프보험, 낚시보험 등의 레저보험을 개발하였다. 79년 4월 15일, 다섯 살 아래인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하였다.
보험감독원 등 외부기관 연수에서 늘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재무부 장관 표창도 받았다. 83에는 스위스 취리히에 있는 스위스보험연수소(SITC)를 수료(사진)했다. 중견 사원이 되었을 때는 운영상 문제가 있었던 제주지점, 대전지점, 동대문지점장으로 부임하여 업적을 크게 올렸다. 그런 덕으로 96년 초 직장의 별인 임원으로 승진해 부산, 경남, 제주를 관장하는 본부장(부산 주재)을 지냈다.
3, 47세에 용도폐기
호사다마라 했던가? 임원으로 승진한 지 2년이 채 되지 않았던 1997년 12월 말 갑작스럽게 해임되었다. 충격이었다. 나이 47세 때다. 유능한 직원으로 인정받으며 회사 일에 매달려온 지난 날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한창 일할 나이였고 두 아들도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다닐 때였다. 아버지로서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이 필자에게 거는 기대를 생각하면 더 얼굴을 들 수 없었다. 넥타이를 매고 정상 출근하듯 집을 나서 공원에서 배회하다가 퇴근 시간에 맞춰 귀가하는 사람들의 얘기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필자가 바로 그 처지가 되었다.
4. “당신 제 명에 살게 하려고”
해임된 그 날 집으로 돌아가면서 어떻게 아내에게 알려야 하나를 고민했다. 믿고 있는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망설여지기도 하였으나 그날로 아내에게 사실을 알렸다. 가족의 의미가 무엇인가? 서로를 알고 서로를 도울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지만, 용기를 내어 알렸다.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던 일이어서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잠시 시간을 보낸 아내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참 잘 됐어요. 당신 제 명에 가게 하려고 하늘이 도왔나 봐요! 그동안 애 많이 쓰셨어요. 어디 산 입에 거미줄 치겠어요.” 우리 세대들이 다 그러했듯 나 역시 목표달성을 위하여 몸을 사리지 않고 밤낮으로 일했다. 거래처 접대와 직원 격려를 위한 회식 자리로 자정 무렵에야 겨우 혼자 살던 사택으로 돌아가기 일쑤였다. 이렇게 살다가는 필자가 제 명에 갈 수 없겠다 싶은 생각을 수차례 하였을 것이다.
5. “설상가상”, 이런 때 쓰는 말이구나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퇴직한 다음 해 IMF 위기가 닥쳤다. 먹고 사는 일이 걱정거리로 등장했다. 재취업하려 발버둥 쳐봤지만, 필자가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다단계 모집 광고에 빠져들기도 하였다. 그런 현실은 분노를 부추겼고 속이 더 상했다. 분노를 일간신문 독자 투고란에 토로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행동은 필자에게 도움이 되지 않음을 깨닫고 마음을 비워가기 시작했다. 체면이나 자존심을 조금씩 버렸다. 그런 과정에서 마음을 가장 잘 가라앉혔던 생각은 “나의 직장 운이 거기까진 데 어이하겠어”라고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마음이 한결 안정되었다. 주어진 현실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를 찾기 시작했다.
6, 마당쇠가 되다
생계유지를 위한 일을 찾아야 했다. 퇴직 6개월이 지나서야 고용노동부 고양시고용센터에 들러 실업급여를 청구했다. 처음엔 쑥스럽고 창피하여 신청을 미루고 있었다. 국민연금을 해지하여 생활비로 사용했다. 다른 보험도 모두 해지하였다. 그 후 별별 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아는 사람의 도움으로 만화방을 창업했다. 누워서도, 엎드려서도 만화책을 볼 수 있는 새로운 시스템 도입으로 좋은 호응을 얻어 사업이 잘됐다. 수입을 조금이라도 늘리기 위하여 라면을 직접 끓여 팔기도 하였다. 하지만 시대조류였던 PC방이 성업하면서 이 업종도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그래서 이 사업을 접고 경기 부천시 상동에서 부대찌개 음식점을 창업해 운영했다. 90% 이상이 성공하지 못한다는 통계를 누누이 들으면서도 많은 퇴직자가 덤벼드는 것이 요식업이다. 필자도 그런 사람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처음엔 고전을 면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회사 다닐 때 몸에 익힌 고객서비스 정신이 도움되어 친절한 음식점으로 소문이 나기 시작하면서 수익이 괜찮아졌다. ‘이런 맛에 음식점을 하나보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몸이었다. 계속 아팠다. 특히 나이도 환갑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진정한 삶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계기를 맞았다. 때마침 가게를 욕심내는 사람이 나타나 적정한 가격 협상 끝에 가게를 넘겼다. 그 후에도 먹고 살기 위해서 다양한 일을 이어갔다. 월 40만 원을 받으며 작은 회사의 조경관리사로 취업하여 매일 아침 긴 대나무 빗자루로 마당을 쓸고 쓰레기봉투를 치우는 일도 하였다. 마당쇠가 된 셈이다. 대형 고깃집 일산한우마을 점장도 하였고 일당을 받기 위하여 MBC 드라마 ‘주몽’ 엑스트라 출연도 해보았다. 마음을 내려놓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좋은 경험이 되었다. 강의 콘텐츠가 생산되었기 때문이다.
7, 친구의 비명횡사, 인생의 전환점 되다
57세 때 가까운 친구를 비명횡사로 잃었다. 두 살 아래의 직장 친구였다. 평소 술은 하지 않았고 담배도 수년 전에 끊어 건강한 사람이었다. 그는 추석 전날 다른 친구들과 남한산성에 올랐다. 산행 중 가슴에 통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구급 차량을 불렀으나 고향 가는 차량 행렬에 막혀 늦게 도착한 119차량에 실려 가까운 성남시의 한 병원으로 가는 도중에 숨을 거두었다. 정말 황당했다. 친구의 죽음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퇴직 후 보낸 10년의 세월을 되돌아보았다. 열심히 산다고는 했지만, 내로라할만한 일은 이루지 못하였다. 이렇게 살다가는 필자도 친구와 같이 무의미한 생을 마감하겠구나 싶었다. ‘100세 장수시대를 맞아 보람 있고 즐거운 생활을 하기 위해선 무엇을 해야 할까’하는 고민을 시작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이제부터는 필자를 위한 삶을 살아야겠다는 것이었다.
8, 60살에 사진 배우다
직장생활과 생업으로 잊고 있었지만, 은퇴하면 햇살 좋은 언덕에 캔버스를 세우고 수채화를 그리는 꿈을 꾸곤 했었다. 그런데 우연한 기회에 필자가 사는 고양시에서 무료로 하는 사진강좌를 알게 되었다. 당시에 필자는 블로그 ‘촌놈의 세상보기’를 운영하면서 사진을 곁들인 글을 쓰고 있었다. 좀 더 좋은 사진을 생각하고 있던 때여서 강좌에 참여했다. 화필 대신에 카메라를 잡은 셈이다. 2010년 7월부터 한 달에 3회 6개월 강좌를 들었다. 필자 나이 60대 중반이었다. 사진에 특별한 재능이나 솜씨를 갖고 있지 않은 초보자였다. 카메라도 소형 디지털카메라 한 대가 전부였다. 하지만 지리산 청학동 계곡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감성과 초등학교 때 수채화를 그렸던 경험, 전 직장에서 맡았던 홍보 관련 일과 사보편찬 업무가 도움돼 일취월장했다.
사진 취미활동은 여가를 무료하지 않게 보내면서 건강도 챙기고 여러 사람이나 자연과 함께함으로써 외롭지 않게 보낼 수 있게 했다. 때로는 작품으로 부가적 소득과 재능기부도 하면서 평생을 현역처럼 살 수 있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 했다. 사진을 배우기 시작한 3개월 뒤인 2010년 10월부터 공인 사진작가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일반인이 사진작가가 되는 길은 한국사진작가협회가 인정하는 전국사진공모전에서 입선 이상을 하여 획득한 점수가 50점을 넘겨야 했다. 입선하면 2점을 받는다. 일 년 동안에 28회 출품해 절반 이상 낙선하였으나 어쨌든 15회의 수상으로 사진작가 명함을 달았다. 첫 번째로 출품했던 제1회 너브내전국감성사진공모전에 ‘형상II’이 동상의 영예를 안겨주어 출발이 순조로웠으나 다른 공모전에선 잘 뽑히지 않아 포기할 생각도 수차례 하였다. 그러나 사진 자체가 재미있었다. 꾸준하게 찍으며 관련 서적을 사서 공부하고 기회가 되면 망설이지 않고 재능기부도 마다하지 않았다. 사진을 배우기 시작한 3년 만인 2013년 7월 국전인 대한민국사진대전에 ‘무한 질주’라는 작품이 입선했다. 2013년 10월에는 보건복지부와 국민연금공단에서 주관한 ‘8만 시간 디자인공모전’의 사진 부문에 ‘몰입’이라는 작품이 우수상을 받았다. 11월에는 부산일보 주최 제21회 ‘부일 전국사진대전’에 출품한 ‘닭장’이 1,166점 중에서 좋은 심사평으로 2위인 우수상 영예를 안았다. 부산일보는 2013년 12월 26일 자 기사에서 이렇게 전했다. "변용도 씨의 우수상 '닭장'은 울타리 안에서 바깥세상을 바라보는 닭의 붉은 머리 부분을 어두운 배경에서 강렬하게 보여 주어, 닭의 모습에서 감옥에 갇힌 사회의 한 단면을 풍자하는 듯한 표현이 출중했다는 평을 받으며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9. 사진취미, 인생이막의 텃밭이 되다
필자는 사진을 ‘카메라로 쓰는 이야기’로 정의하고 ‘포토스토리텔러’라 자칭한다. 사진은 찍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다.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하여 끊임없는 노력을 한다. 지금까지 찍은 사진의 숫자가 37만 장이다. 카메라는 가장 아끼는 친구다. 늘 함께한다. 사진은 취미가 아닌 일상이 됐다.
사진 활동이 바탕이 되어 다양한 분야로 활동영역이 확대되어 다용도(多用途)로 후반생을 바쁘고도 보람 있게 산다. 사진이 인생이막의 텃밭이 되었다. 필자는 그 텃밭에 글솜씨, 강의 솜씨를 추가로 뿌렸다. 그런 씨앗에서 싹이 돋고, 잎이 무성해지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기 시작했다. 2008년에는 ‘미역국’ 외 다수의 작품으로 ‘순수문학지’ 신인상에 당선되어 수필가 명함을 달았다. 2012년에는 필자의 블로그 ‘촌놈의 세상보기’가 대한민국 100대 우수블로그로 선정됐다. 사진작가, 사진 칼럼니스트, 수필가, 저자, 강사(은퇴준비, 생애 재설계, 변화관리, 사진), 방송인(KBS 1TV ‘아침마당’, SBS라디오 ‘유영미 마음은 언제나 청춘’ 시니어리포터, 머니투데이 행복특강, 토마토TV 강연, 아리랑TV, CBS라디오, 한국직업방송), 기자(시니어조선 사진명예기자, 사회연대은행 KDB시니어브리지센터 두드림기자), 유어스테이지 시니어리더 겸 시니어리포터, ‘디카와 놀자’와 세화포토클럽 운영자다. 최근엔 경제신문 이투데이 자매지 브라보 마이라이프의 동년기자로 활동을 시작했다.
2013년 11월 ‘아름답게 보니 아름다워’, 2016년 1월 ‘카메라로 쓴 아름다운 이야기’를 출간하여 인터넷 교보문고에서 판매 중이다. 대우조선해양㈜와 미래창조과학부 산하 국가과학기술인력개발원, 고려대 평생교육원 액티브시니어전문가과정 전임강사다. 서울시 서초구 우면동에 있는 우면청춘대학의 사진강좌를 2년째 맡아오고 있다. 사진이 근간이 되어 활동 영역이 확대되었다.
10. 도랑 치고 가재 잡다
대학을 입학하면서 서울 생활이 시작되었고 지금은 경기 고양시 외곽의 한적한 전원 마을에서 자그마한 주택을 지어서 살고 있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지는 아니하여도 현실을 인정하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하고 싶은 일 하며 일상을 즐긴다. 즐겁지 않으면 인생이 아니라고 한 어느 노부부 여행가의 생활 철학을 닮아가려 한다. 젊은 시절에 느끼지 못하였던 보람을 느끼며 산다. 전반생보다 후반생을 더 바쁘고 활기차게 보낸다. 그 바탕에 사진이 있다. 많지는 않아도 용돈도 번다. 그야말로 도랑 치고 가재 잡는 형국의 삶을 산다. 2차 성장을 한 셈이다. 하버드대 성인발달연구소 윌리엄 새들러 교수가 “내 생애 최고의 순간을 재창조하는 것이 인생의 2차 성장이라고 말하고 있듯이 제2의 절정기를 만들기 위해 성장을 멈추지 않는다. 변함없는 도전이다. 필자의 이름을 ‘변함없는 용기로 도전하는 남자’로 풀이해본다. 그런 덕분에 누구나 한 번쯤 출연해보고 싶은 KBS 1TV의 ‘아침마당’(2014, 11, 24)에 섭외를 받아 출연했다. ‘다시 시작하는 인생- 나의 두 번째 직업을 소개합니다’란 주제였다. 사진작가로, 은퇴준비강사로 안사람과 함께 출연해 삶의 정점을 새로 찍었다.
11, 생애 최고의 순간을 찾아
세계적 사진작가 프랑스의 마크 리부가 있다. ‘에펠탑의 페인트공’, ‘꽃을 든 여인’ 등 유명한 작품을 만든 현존하는 사진작가다. 기자가 물었다. “선생님의 작품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은 어느 것입니까?” 리부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일 찍을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를 감동하게 한다. 세계 최고의 경지에 이른 작가이지만, 더 나은 작품을 얻기 위하여 계속 노력하겠다는 꿈을 꾼다. 희망으로 산다. 진정한 대 작가의 마음이란 생각이 든다. 그런 마음과 자세가 새로운 경지로의 작품세계를 창조한다고 볼 수 있다. 오늘에 머무르지 않고 발전을 거듭하려는 삶의 철학이, 남이 넘볼 수 없고 흉낼 수 없는 작품 세계를 만드는 것이라 여겨진다. 미래를 향해 또 다른 꿈을 꾼다. 필자 또한 늘 이제 시작이라는 마음으로 아직 오지 않은 생애 최고의 순간을 찾아 도전의 발길을 멈추지 않으련다. 또한 하늘이 인생의 구석구석에 베풀어주신 은혜에 보답하고 경험과 지혜를 이웃과 사회를 위하여 아낌없이 다 쓰고 가리라.
최성환 한화생명 은퇴연구소장·고려대 국제대학원 겸임교수
‘50대 후반의 기혼자, 자신의 판단과 금융 지식이 평균 이상이라고 생각하는 낙관적인 성격의 소유자, 새로운 생각이나 판매 선전에 귀가 솔깃한 사람, 최근에 건강 또는 금전적으로 어려움을 겪은 사람.’
이 사람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바로 금융사기를 당하기 쉬운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필자의 주장이 아니라 미국투자자보호교육재단(FINRA)에서 내린 ‘금융사기 피해를 가장 입기 쉬운 사람’의 정의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이때 만약 ‘50대 후반의 기혼자’를 ‘50대 후반 이상의 은퇴자’로 바꾸면 대부분의 은퇴자가 금융사기에 노출되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은퇴자들이 사기꾼의 표적이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은퇴자들은 직장에서 은퇴한 뒤 고정적 수입은 크게 줄어들지만 퇴직금이나 모아둔 사업준비자금 등 자금 동원력은 상대적으로 많다고 할 수 있다. 은퇴를 앞두고 있는 이들도 상황은 비슷하다고 할 것이다. 회사 생활을 20~30년 이상 해오면서 사회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판단과 금융지식이 평균 이상은 될 것이라고 믿고 있거나 그렇게 믿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그간 일만 하느라 경제 및 금융시장 변화에는 상대적으로 어두울 수밖에 없다. 반면 은퇴와 함께 수입이 줄어드는 만큼 마음은 조급하고 귀는 얇아질 대로 얇아진 상황이다. 이런 틈새를 사기꾼들이 파고드는 것이다. 오죽하면 사기꾼 자녀가 퇴직금이나 목돈이 생긴 순간 ‘내 돈이 아니다’라는 말이 나왔을까.
설마 내가 사기를 당하랴 하겠지만 주위를 살펴보면 실제로 사기를 당한 경우가 적지 않다. 한국투자자보호재단의 2015년 조사에 따르면 금융사기를 당한 사람의 비율이 40~50대의 3.5%에서 60대로 가면 5.7%로 높아지고 있다. 5.7%면 조사대상자 20명 중 1명 이상이 사기를 당한 것이 결코 낮은 수준이 아니다. 또한 금융사기를 당할 뻔한 사람의 비율도 40~50대는 20% 안팎이지만 60대는 27.3%로 높아진다. 60대는 10명 중 3명이 금융사기를 당했거나 당할 뻔했다는 것이니까 누구나 사기를 당할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금융사기로 입은 피해 금액도 만만치 않다. 30대는 1900만원, 40대는 2328만원으로 그다지 많지 않다고 말할 수도 있다. 피 같은 내 돈이라고 생각해보라. 특히 50대로 가면 9038만원으로 피해 금액이 급증하고, 60대도 5464만원으로 결코 적지 않은 돈이다. 50대의 피해규모가 가장 큰 것은 미국투자자보호교육재단이 정의한 금융사기 피해를 가장 입기 쉬운 사람 중 첫 번째로 언급한 ‘50대 후반의 기혼자’와도 맞아떨어지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는 주된 직장에서 물러나는 나이가 53~54세이므로 50대들이 퇴직금을 포함한 목돈을 들고 뭔가 해보겠다고 나서다가 사기를 당하고 있는 것이다.
50대에게 9038만원이 얼마나 큰돈인가는 통계로도 확인할 수 있다. 통계청(2015년 가계금융복지조사)에 따르면 가구주가 50대인 가구의 순자산(총자산-부채)은 3억4363만원이다. 이 중 9038만원을 사기 당했다면 순자산의 26.3%에 해당하는 돈이다. 내 노후에 1억원이 더 있을 때와 없을 때를 생각해 보면 1억원이 얼마나 큰돈인지 잘 가늠할 수 있다.
한두 번 사기를 당하고 나면 세상이 허무해지기 마련이다. 그것도 액수가 노후 자금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정도라면 그 충격은 더 클 수밖에 없다. 돈과 사람에게 속고 벙어리 냉가슴을 앓듯 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기를 당하지 않기 위한 최선의 방어책은 큰 욕심을 부리지 않으면서 눈높이를 낮추는 것이다. 일확천금(一攫千金)의 경우가 없지는 않겠지만 그 기회가 나한테 온다는 것은 로또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다. 예금금리가 1%대인데 누가 6~7%대의 투자 수익률, 그것도 확정 수익률을 보장한다고 하면 그건 십중팔구 사기일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6%의 확정 수익률이 가능하다면 은행에서 3%로 대출을 받아 투자하면 3%의 수익이 그냥 떨어지는 장사라는 계산이 나온다. 그렇게 쉽고 안전하면서도 많은 수익이 남는 장사가 어떻게 나한테까지 순서가 오겠는가?
그렇다고 금리 1%대의 은행예금에만 돈을 넣어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따라서 투자를 하더라도 천천히 여유를 가지고 다른 전문가들의 조언도 들어가면서 가능한 한 결정을 늦춰야 한다. 사기꾼들은 통상 희소가치를 들먹이는 동시에 특별히 당신에게만 기회를 주는 것이라면서 재촉하기 때문이다. 또한 사기꾼들은 엇비슷한 수법을 모방해서 우려먹는 경우가 많으므로 여기저기 소문을 내는 것도 한 방법이다. 비슷한 수법에 사기당한 경우를 직·간접적으로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듣기 좋은 말로 당신의 과거와 이력을 부추길 때 발을 빼야 한다. 전문 사기꾼일수록 왜 하필 나일까에 대한 대답을 미리 다 준비해 오기 마련이다. 뿐만 아니라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유명 인사들도 이미 투자하고 있다고 할 때 의심의 눈초리를 더 세워야 한다. 유명 인사들은 자신도 모르게 이름이 팔리고 있기가 십상이고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실제 투자액은 미미하거나 아예 없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사기 당하지 않는 다른 대비는 경제와 금융지식을 배우고 익히는 것이다. 주식이나 펀드에 수백만 원, 많게는 수천만 원 정도 투자해 놓는 것도 한 방법이다. 너무 많은 돈을 주식이나 펀드에 넣어두면 그에 따른 스트레스 또한 커질 수밖에 없으므로 여유분 중 일부를 넣어두고 말 그대로 여유만만하게 투자하는 것이다. 그러면 투자한 회사는 물론 그 회사가 속한 업종에 더해 경제동향과 전망, 뉴욕증시 등도 살펴봐야 할 과녁 속에 들어올 것이다. 이를 위해 평소 신문이나 인터넷의 경제면을 꼼꼼히 읽으면서 세상 돌아가는 일에 촉만 세워도 절반 이상은 성공하는 것이다.
지난 호에서 써먹은 명언(?)을 다시 한 번 기억해 보자. “현명한 사람은 들으면 알고, 보통 사람은 보면 알고, 우둔한 사람은 당해야 안다.” 금융사기는 일단 당하고 나면 돈도 친구도 잃고 남는 것은 실망과 후회, 노후빈곤뿐이다. 금융사기든 창업사기든 당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자 최상의 방책이다.
△ 최성환(崔聖煥) 한화생명 은퇴연구소장·고려대 국제대학원 겸임교수
한국은행 과장, 조선일보 경제 전문기자, 고려대 국제전문대학원/경영대학원 겸임교수, 한화생명 경제연구원 상무, 은퇴연구소장 등 역임.
사주나 점을 믿지는 않지만, 매번 '무난’, ‘평탄’ 같은 단어가 튀어 나온다. 전반적으로 필자 삶을 돌아 볼 때 과연 맞는 말인 것 같다.
인생 전반의 삶
인생의 여러 중대사가 결정되는 1970년대가 필자 20대 나이였다. 그 시기 대학교에 입학하고 군대에 갔다 오고 취직해서 결혼했으니 말이다. 아들딸까지 낳았으니 더 바랄 것이 없었다. 운이 좋았는지 대학교도 단번에 합격하고 군대도 카투사로 갔다 왔다. 취업도 서로 오라는 데가 많아서 골라서 들어갔으니 요즘 청년들에 비하면 정말 운이 좋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첫 직장에서 아내를 만나고 건설회사인 둘째 직장에서 사우디아라비아, 독일 근무를 하면서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 덕분에 스포츠 장갑을 만들어 수출하는 중소기업에 스카우트 되어 임원으로서 12년간 마음껏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전혀 연고도 없던 회사에 기존 임원들보다 10세 연하인데도 젊은 패기로 승승장구하며 탄탄대로를 걸었다. 입사 6년 만에 단일 바이어에게 거의 의존하던 매출구조를 미국, 유럽, 내수시장으로 확장해 건전한 포트폴리오대로 만들면서 세계 스포츠장갑 1위 업체로 부상시켰다.
1997년 IMF 금융위기는 당시 대표를 맡고 있던 스포츠 브랜드 UMBRO 사업에도 직격탄이었다. 미화로 지급해야 하는 로열티와 수입대금도 막대했지만 국내 시장이 초토화되어 더 이상 사업을 끌고 나갈 수 없었다. 결국 경영책임을 지고 퇴사한 것이 21세기를 두 달 앞둔 1999년 10월이었다. 직장 생활 23년을 마감하게 된 것이다. 나이 49세였다.
묘하게 퇴직 1주일 후 섬유의날 시상식에서모범경영인으로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재직 중이었더라면 큰 축하를 받을 수 있는 자리였으나 찜찜하게 퇴직하고 난 처지라서 가족들과 단출하게 자축할 수밖에 없었다. 퇴직했으니 앞으로가 막막했으나 대통령 표창은 큰 용기를 주었다. 뭔가 큰 힘이 될 것 같은 느낌을 받은 것이다. 실제로 표창은 위력을 발휘했다. 이탈리아 스포츠 브랜드 KAPPA의 한국 런칭도 그 덕분에 이뤄졌다. KAPPA의 성공 덕분에 JAKO 등 다른 스포츠 브랜드 도입도 수월했다. 비즈니스뿐 만 아니라 각종 서류 심사 때도 떨어져 본 적이 없다.
밀레니엄 시대라는 2000년부터 퇴직 이후의 새 삶이 시작되었다. UMBRO 대표 시절에 여러모로 도와줬던 업자가 동대문 사무실에 나와 소일하라며 권유했다. 그의 사업도 도울 겸 필자 사업으로 스포츠 장갑을 수출하던 시절에 가까웠던 바이어들과 연락하며 지냈다. 주문량이 적은 바이어들은 본사에서도 귀찮아하던 것을 필자가 주문을 대신 처리해줬다. 한 바이어는 당시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의 공식 스폰서가 되면서 대량주문을 해 와서 그때 꽤 짭짤한 수익을 건졌다. 그러나 9.11테러 이후 미국 경기가 급속하게 하락하면서 이 비즈니스도 하락세를 면치 못했다. 중국의 저임금을 활용하여 그나마 주문을 소화했었는데 중국의 인건비가 급속하게 올라 결국 손을 들고 말았다. 여기서 더 비즈니스를 이어가려면 중국보다 임금이 더 저렴한 나라를 찾아다니며 바이어들도 지속적으로 확보해야 했으나 비즈니스는 이쯤에서 접자는 생각이 들었다. 필자 인생도 50 줄인데 돈을 더 벌겠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다 보면 인생을 낭비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 무렵 필자랑 비슷한 위치에 있었던 사람들이 퇴직 대열에 합류하면서 실패하는 사람도 봤고 건강을 잃고 쓰러지는 사람이 많았다. 건강을 잃으면 모두 잃는 것인데 이럴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번뜻 든 것이다. 그래서 자전거, 등산을 비롯하여 건강을 위한 삶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여러 가지 시도해본 결과 댄스스포츠가 가장 잘 맞는 운동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댄스 이야기
93년 한국에 댄스스포츠가 체계를 갖춰 상륙하자 백화점 문화센터에 등록했었다. 당시만 해도 댄스스포츠를 제대로 알고 가르치는 곳도 드물던 시절이었다. 독일에 주재원으로 근무할 때 어느 와인 촌 홀에서 백발의 할아버지와 고등학생은 되어 보이는 소녀가 같이 춤을 추는 것을 보고 완전히 매료된 충격적인 일이 기억났다. 그 춤을 제대로 배워보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몇 몇 선생을 거치도 갈증이 그치지 않았다.
그러고는 10년 만에 다시 댄스스포츠에 빠져 들었다. 집 근처 올림픽공원 스포츠교실에서 라틴댄스를 가르치는 데 완전히 매료된 것이다. 한번은 50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댄스 경연대회를 했는데 하루 종일 예선부터 뛰어 최종 챔피언으로 등극하는 일이 생겼다. 춤에 대한 재능을 처음으로 확인한 일이다. 다음 해에도 챔피언 자리를 유지했다.
이 정도 했으면 필자도 배우는 입장에서 가르치는 입장이 되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경기대학교 사회교육원의 ‘댄스스포츠 코치아카데미 코스’에 도전했다. 1년 만에 1, 2급 자격증을 손에 쥘 수 있었다. 이때 올림픽공원에서 가르치던 선생이 영국 유학을 권했다. 댄스스포츠의 본고장은 영국이며 거기 가서 공부하고 국제지도자 자격증을 따가지고 오면 우리나라 댄스 역사에 드문 일이 될 거라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영국에 유학할 준비로 개인 레슨을 받으며 국제지도자 자격증 코스를 공부했다. 6개월 공부 후에 영국 런던의 유서 깊은 ‘쌤리댄스스쿨’에 갔다. 지도교사로 'Technique of Latin Dancing' 이라는 책을 낸 라틴댄스 계의 전설 월터 레어드의 비서였으며 현존 최고의 지도자 준 먹머르도 여사를 만났다. 2개월간 새벽부터 밤늦은 시간까지 집중적인 댄스 공부와 연습을 하며 결국 ‘국제지도자 자격증(IDTA:International Dancesport Teachers Association)’을 따 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 영국에 가서 이 자격증을 따 온 사람은 몇 몇 댄스 계 원로에 불과했는데 동호인에 불과한 필자가 이 자격증을 들고 들어온 것이다.
개선장군처럼 귀국한 필자 주변에 댄스동호인들이 모여들었다. 그렇게 해서 ‘댄스엔조이’라는 댄스 동호회를 만들었다. 무려 5년 동안 회장을 맡으며 댄스스포츠 동호회를 키웠다. 당시에는 1주일의 거의 절반을 댄스 강습으로 보냈다. 그 과정에 샤리권(권금순)이라는 학원 원장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영국에서 귀국 직후 ‘댄스엔조이-라틴댄스’라는 책을 내려고 ‘댄스스포츠코리아’라는 잡지사에 찾아 갔다가 그 자리에서 편집 기자 자리를 제의받았다. 책도 나왔고 3년 후에는 ‘댄스엔조이-
라틴댄스 실전과 이론’, ‘댄스엔조이 – 모던댄스’, ’댄스엔조이 - 즐거운 댄스 라이프‘ 3권을 동시에 냈다. 그리고 10년 후 낸 ’캉캉의 댄스이야기‘까지 내면서 댄스 칼럼니스트로서 자리를 굳건히 했다. 특히 ‘댄스스포츠코리아' 잡지사의 기자 자리는 필자에게 날개를 달아준 격이 되었다. 세계적으로도 댄스 잡지는 드물지만 국내에서 발행되는 유일한 댄스 잡지라서 권위가 있었다. 국내 댄스 경기 대회나 행사에는 언론사 자격으로 VIP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국내 댄스 계 중요 인사들을 만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취재 과정에서 세계적인 챔피언들을 인터뷰하여 기사화할 수 있었다.
댄스 인생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을 얘기하자면 장애인들과의 만남을 빼 놓을 수 없다. 원래 장애인들과의 만남은 94년 ‘댄스 동호회’에 나온 시각장애인들을 통해서였다. 몇 사람을 가르치고 있는데 혼자는 힘들다며 도와달라고 하여 갔던 것이다. 자이브를 중심으로 가르쳤는데 시각장애인들도 곧잘 했다. 처음에는 물론 막막했으나 그들도 노력했고 필자도 가르치는 노하우가 생겼다. 그들과 함께 여성의날 행사에 오프닝 무대에서 춤췄는데 노무현 당시 대통령이 참석한 자리였다. 시각장애인의날 행사 때도 함께 오프닝 무대를 자이브로 장식했는데 그때는 당시 영부인 권양숙 여사가 참석했었다. 시각장애인의날 행사 때 객석을 보니 대부분 시각장애인이라 보이지도 않는데 춤을 춰봐야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시큰둥했던 필자가 부끄러웠다. 보이지도 않고 댄스화 갈아 신기도 귀찮으니 운동화 신고 그냥 하자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필자 파트너는 진지하게 임했다. 끝나고 사진을 같이 찍자고 해서 또 한 번 놀랐다. “사진을 찍어 봐야 볼 수가 없는데 왜 찍느냐”고 물었더니 아이들에게 자랑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아이들은 정상적인 시력을 가졌다고 했다. 이들과의 만남은 여기까지였다. 그 당시만 해도 장애인댄스대회가 없어 더 이상 끌고 나가기 어려웠던 탓이다.
또 다시 10년만인 2013년 서울시장애인댄스연맹에 코치 겸 선수로 들어가게 되었다. 장애인댄스스포츠연맹이 정식으로 발족하여 전국적으로 경기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너무 나약해서 안마사 시험에도 떨어졌다는 40대 할머니를 파트너로 하여 선수로 출전했다. 처음엔 왈츠 단일 종목으로 동메달을 겨우 땄는데 스탠더드 5종목을 다 연습하고 나니 금메달까지 딸 수 있었다. 한 대회에 3개 부문까지 출전할 수 있으니 출전만 하면 메달을 수확했다. 이 할머니 파트너가 은퇴하고 나서 만난 파트너 중 최고였다. 나이도 40대라 젊고 체형이 날씬했다. 국내 ‘스타킹’이라는 TV 프로그램에 출연할 정도로 플라멩코 춤에서는 인정받는 사람이었다. 이 파트너 덕분에 국립극장에서 있었던 ‘대한민국 장애인 문화예술 대상’에서 대중무용 댄스스포츠 부문에서 수상을 했다. 장애인 댄스경기 대회는 대개 오전 중에 끝나지만 이 파트너와는 일반인들끼리 겨루는 댄스경기대회에도 출전했다. 2014년 여수에서 벌어진 ‘아마추어선수권대회’에서는 오전에 장애인 부문에서 3경기를 뛰고 오후에 일반인들끼리 겨루는 장년부, 일반부, 아마추어부까지 결승에 올라 나란히 우승, 우승, 준우승하는 쾌거도 이뤘다. 스탠더드 5종목을 뛰려면 대단한 체력이 요구돼 세 부분을 연속해서 출전하는 선수도 처음이라며 화제가 되었다. 이 파트너도 건강상 그만두게 되어 아쉬웠다.
2015년에는 새 파트너를 만나 ‘전국체전’에서 동메달을 따는 쾌거를 이뤘다. 비록 동메달이나 덕분에 서울연맹이 ‘댄스스포츠 전국대항전’에서 간발의 차이로 우승할 수 있었고 전체 장애인종목에서도 만년 단골 우승인 경기 다음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글쓰기
필자에게 글재주가 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초등학교 5학년 때이다. 국어시간에 다음 배울 것을 짧게 축약해 오는 ‘짧은 글짓기’에서 늘 선생님의 칭찬을 받았다. 받아쓰기는 늘 만점이었고 국어 성적도 거의 만점을 받았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하는 것. 그래서 글쓰기가 좋아졌다. 그 당시만 해도 책은 구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만화를 많이 본 것이 어휘 구사에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 5학년 무렵에는 전국적으로 글쓰기 열풍이 불어 학교 내에서는 물론 서울 단위에서도 ‘어린이글짓기대회’가 열렸다. 당시 대회에서 필자는 후배 여학생과 단 둘이 입상하고 돌아와 교내 스피커를 통해 방송도 하고 전체 조회 시간에 교단에 서서 수상작 낭독도 했다. 그 인기 덕분에 전교어린이회장까지 했다.
중학교 때는 문예반 활동을 한 것도 아닌데 당시 ‘학원’이라는 학생 잡지에서 하는 ‘학원문학상’에 응모했더니 수상했다. 당시 학교 정문에 플래카드가 붙기도 했다. 당시 그림도 좋아해서 미술반에 들어갔으나 저녁 식사도 못 한 채 매일 밤 10시까지 버티기가 힘들어 그만 두었다.
대학교에 들어가서 중학교 때 못한 그림 공부에 미련이 남아 사진반에 들어갔다. 그림은 한 장 그리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사진은 셔터만 누르면 되니 적성에 맞았다. 예술사진이니 작품성도 있어야 하고 설명과 제목도 멋지게 달아야 하는데 그림과 글쓰기에 대한 갈증을 한꺼번에 충족시켜주는 것 같아 한동안 사진에 빠져 들었다. ‘전국대학생사진동아리’도 구성해서 활동했다.
사진에 꽂혀 있떤 필작 다시 글에 손을 댄 것은 40대 초반으로 직장에서 자리가 잡혔을 때였다. 젊었을 때부터 외국을 자주 다니면서 느낀 점들을 신문에 독자 투고했는데 인정받았다. 1000여 편의 독자투고 내용을 책으로 3권 냈고 서울 서초구청장으로부터 기록인증서도 받았다.
독자투고는 글이 짧아 하고 싶은 말을 간단명료하게 담아내야 했다. 그러나 글이 길지 않아 갈증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2003년 댄스 동아리를 만들면서 이 갈증을 충족할 수 있었다. 당시 인터넷에 댄스 칼럼을 길게 올린 것이다. 이 칼럼은 인기도 높었다. 그 글들을 모아 2004년 영국 유학 후 ‘댄스엔조이’라는 책을 4권 냈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2007년 ‘유어스테이지’에 시니어 리더로 합격하면서부터였다. 블로거를 모집했는데 당시 필자는 블로그가 뭔지도 몰랐으나 그간 인터넷에 올린 글들 덕분에 합격한 것이다. 그때부터 ‘캉캉의 글모음’이라는 블로그를 만들었다. 이 블로그로 2012년에는 ‘대한민국 100대 블로거상’도 받았다. 필자 블로그는 하루 방문객 1500명 내외이더니 2016년 5월 드디어 누적 방문객 300만 명을 돌파했다.
2010년에는 보건복지부에서 주관한 ‘액티브 시니어 자서전 공모전’에서 우수상으로 2등상을 수상했다. 1등상을 수상한 사람은 필자보다 10세 이상 연배로 전쟁도 직접 겪었고 인생을 모범되게 살아 충분히 자격이 있었다. 그런데 정작 방송, 잡지 등에서는 필자에게 출연 교섭을 많이 해왔다. 춤이 그림이 되기 때문이다.
블로그의 힘은 대단했다. 필자 블로그를 검색한 방송, 잡지 등에서 섭외가 많이 들어 왔다. ‘시니어 파트너즈’에서 지원해준 덕도 많이 봤다. 한국의 모든 공중파에 나갔고 케이블 TV까지 합하면 셀 수도 없을 정도로 출연했다. 한 방송국에서는 휴먼 다큐멘터리를 찍는다며 무려 10일간을 매일 녹화하기도 했다.
블로그는 현재 중요한 일과 중 하나이다. 하루에 글 하나는 꼭 올린다. 글을 쓸 때 가장 마음이 편하고 생각이 정리되어 힐링되는 것 같다. 자꾸 희미해지는 기억력을 붙잡으려면 일상이든 독후감이든 영화 감상문이든 바로 써둬야 한다.
사회 활동
초등학교 때 어린이회장을 한 이래로 감투 복은 있는 모양이다. 대학 시절에 4학년이 관례로 맡던 사진반 회장을 2학년 올라가자마자 맡더니 ‘전국대학생사진동아리’’를 결성하여 회장단을 꾸리기도 했다. 군 생활 때도 동기들과 선배들이 즐비한데도 중대 전체의 선임자 역할을 했다. 그리고 참여하는 곳마다 크고 작은 모임에서 회장을 많이 했다. 리더십도 있는 편이지만 말이 많지 않아 카리스마가 있다고 한다. 틀이 좋다거나 돈이 많거나 말을 잘하는 일반적인 요소는 없으나 중심을 잘 잡고 전체와 미래를 보는 시각이 있다는 평이다.
퇴직 후 삶은 IMF 외환위기로 고통받을 때를 생각해 보면 드디어 자유의 몸이 된 것 같은 해방감을 느꼈다. 직장 생활 때 인적 관계는 퇴직 이후 거짓말처럼 멀어져 갔다. 새로 새로운 세계의 사람들을 만나게 된 것이다. 댄스스포츠에 집중한 덕분에 ‘댄스엔조이’라는 동호회를 만들었고 5년간 회장을 맡았다. 동호회를 운영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유어스테이지’에서 공모한 시니어 리더들의 모임에서도 5년째 회장을 하고 있다. 회장 맡은 것을 자랑하려는 게 아니라 회장을 맡은 덕분에 책임감을 가지고 여러 좋은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많다는 것이 좋다. 그런 면에서 ‘브라보 마이라이프’ 기자 활동과 새로 맡은 운영위원회장 자리도 기대가 크다.
요즘은 유난히 발이 넓은 동네 친구 덕분에 ‘한국시니어블로거협회’에 대표로 참여하고 있다. 그 덕분에 ‘KDB 시니어 브리지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동문회 등 거기서 파생되는 여러 모임에도 나가고 있다. 협회 자체의 행사나 프로그램도 많다.
강의도 자주 나간다. 퇴직을 앞둔 우리은행 지점장급 직원들을 대상으로 생산성본부에서 해마다 인생 이모작 강의를 했었다. 200명을 대상으로 하루 8시간 하는 강의이다. 퇴직 후 16년차에 들어섰으니 인생 이모작 선배로서 그간 경험한 퇴직 이후의 삶에 대한 경험을 전해주는 강의이다. 노사발전위원회에서도 공모전 입상을 한 덕분에 비슷한 내용으로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도심권 이모작 센터’’, ‘사회연대은행’ 등에서도 강의를 해오고 있다. 댄스스포츠 강의도 하지만 홀로 살기, 파워 블로거 되기 등 테마도 다양화하고 있다.
필자 스케줄 표를 보면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꽉 차 있다. 동호인들끼리 댄스하는 날, 노래배우러 가는 날, 책 만들러 가는 날, 댄스 동아리 강의 하는 날, 장애인 댄스 교습 및 댄스 선수 연습하는 날이 고정되어 있다. 일요일만 비워두고 있다. 그렇다고 전혀 틈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루는 24시간이고 그런 스케줄은 대부분 저녁 모임이거나 한 나절 정도 걸리기 때문에 나머지 시간에는 다른 스케줄을 소화할 수 있다. 특히 남는 시간은 집 근처에 공유사무실이 있어 글쓰는 데 활용한다.
어떤 면으로 보면 너무 바쁘게 살고 있기 때문에 매력 없는 남자라는 소리를 듣기도 한다. 여유 있게 차 한 잔 하면서 같이 대화라도 나누고 싶은데 필자처럼 바쁜 사람에게 전화했다가는 바쁘다며 거절당할 게 빤하다는 것이다. 휴먼 다큐멘터리를 찍을 때 가까운 사람들 인터뷰가 있었다. 필자도 동석한 자리이므로 좋은 대답을 기대했는데 그런 말을 들으니 충격적이었다. 그래서 절대 바쁜 척 하지 않기로 했다. 그전에는 댄스 하러 가는 날이면 다른 스케줄은 아예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댄스는 어차피 여기저기서 하고 있고 한두 번 쯤 빠져도 큰 문제 아니니 결석을 택한다. 다른 고정 스케줄도 마찬가지이다.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가 60대 중반에서 70대 중반이라는 말이 있다. 과연 그런 것 같다. 아직 건강하고 활동력도 있다. 노후 대비 경제력을 걱정할 정도는 아닌 것도 다행이다. 사주에서 보듯 무난하고 평탄하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인생의 정점에서 ‘브라보 액티브 시니어 인생’을 사고 있는 셈이다.
밥만 해 먹는 여자
공인중개사 사무소를 폐업 하고나서 꼭, 10년! 집에서 밥만 해먹고 사회활동은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 밥만 해 먹으면서 가정 살림만 한다고 하면 누구든지 한심하게 본다. 그것도 그럴 것이, 사회활동을 해야만 훌륭하고 대단하게 여겨 주는 것이 요즘 사회의 현상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집에만 있다. 그렇다고 살림살이를 반짝반짝하게 닦아 빛이 나게 하며 살아가는 주부도 아니고, 요리솜씨가 뛰어나 특별하게 내세울 나만의 ‘필살기 메뉴’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살림도 대충하고, 청소도 대충하면서도, 남들처럼 취미하나도 계발하지 못하고 무취미로 살아가는 ‘게으른 은둔자’다.
게으른 은둔자
사람들은 동호회다, 친목계다, 동창회다 해서, 갖가지 모임을 만들어 가며 사람들을 사귀고, 만난다. 그러나 필자는 집에만 있어도 세상 편하고 좋다. 밖에 나가는 일은 꼭 필요 할 때만 나간다. 병원갈 때, 은행이나 관공서에 볼 일이 있을 때, 가끔 언니들이나 지인을 만날 때, 교회에 갈 때, 그리고 대부분 반찬거리 사러 대형마트에 갈 때뿐이다. 집에 화수분이라도 하나 있어서 반찬거리가 저절로 생겨난다면 외출 할일도 없을 터이지만, 불행하게도 그런 화수분이 내게는 없다. 그래서 주 1회 정도, 반찬거리 사러 할 수 없이, 사람이 북적거리는 대형마트엘 간다. 사람 많은 곳에서 휘둘리다가 오면, 너무 피곤해 초주검이 되곤 한다.
집에만 있다고 하면, 사람들이 필자에게 묻는 말은 하나같이 ‘심심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천만의 말씀! 그것은 사람들이 몰라서 하는 말이다. 이렇게 살아도 하루 24시간이 항상 모자란다. 재미있는 영화보기, 다양한 프로의 TV시청, 그리고, 살아가는데 필요한 책들을 읽기에 하루는 너무나 짧다. 그러니 살림을 대충 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필자는 사람들과 대화를 하는 것보다 책이 더 좋고, 영화나 TV가 더 재미있다. 이렇게 은둔자가 된 것에 대해 주변 사람들은 대부분 답답해하는데, 이런 은둔을 반기는 사람이 딱 한 사람 있다. 필자에게 마음 놓고 밥을 시켜 먹으려는 사람, 바로 남편이다.
구석기사람이라도 본 것처럼
하루는, 오전에 야쿠르트 영업사원이 우리 집의 벨을 눌렀다. 문을 열고 나가니 깜짝 놀란다. 벨을 눌렀기에 나간 것뿐인데 왜 필자를 보고 놀라는 것인지 물어 보았다. “이 시간에 집에 계시네요?” 마치 신기한 뭔가를 보듯 한다. 내가 물었다. “이 시간에 우리 집에 내가 있는 게 그렇게 이상해요?” 야쿠르트 판매사원이 대답했다. “아니요, 요즘은 이 시간엔 집집마다 주부들이 나가고 집에 없거든요. 돈을 벌기 위해 나가든지, 취미활동을 하러 나가든지, 다들 나가고 없는데, 그런데 집에 계신 분도 있네요” 그녀는 집에 있는 필자가 마냥 신기한가보다. 마치 구석기사람이라도 본 듯이 그런 표정으로 바라본다. ‘그렇게 이상한가?’ 하긴 요즘은 모두들 바쁘게 살아가는데, 혼자서만 한없이 늘어져 있다는 생각도 가끔 하긴 했으니까, 야쿠르트 판매사원의 말을 전혀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다. 가족들의 건강을 위해서 밥을 열심히 했다는 것이 자랑스러울 것 까지는 아니라도, 당당한 일임엔 틀림이 없다. 그런데도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것처럼, 야쿠르트 판매사원의 말에 필자는 은근히 민망하고 부끄러운 생각까지 든다.
경제활동을 꿈꾸며
며칠을 두고 은둔생활에 대해 곰곰이 생각을 해 보았다. 나이가 더 많아져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가 오기 전에, 어서 털고 일어나 경제활동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지인들은 취득하기 어려운 자격증을 묵혀 두는 것이 너무 아깝다고 공인중개사 사무소를 다시 개설하라고들 한다. 그러나 그건 부동산 중개업을 몰라서 하는 말이다.
많이 걸어 다녀야 하고, 누군가 에게는 전 재산일 수도 있는, 고객의 큰 재산이 오가는 일을 해야 하므로 순발력이 있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젊은 사람들이 해야 하는 직업이지, 시니어들이 할 수 있는 직업은 절대 아니다. 또, 멀지 않아 대기업과 외국기업들이 부동산 법인을 만들어서 부동산 중개업시장에 진입하는 날이 다가 올 것이다. 게다가 요즘은 부동산중개업의 경기가 좋지 않을 때이고 보니, 더더욱 사무소 개업은 할 수가 없다. 오랜 시간 고민한 끝에 인터넷에 들어가 ‘서울시일자리플러스센터’에 구직 신청을 했다.
취업교육을 받다
하루는 ‘서울시어르신취업훈련센터’에서 취업교육을 받으라는 문자가 왔다.
취업교육을 받으러 가보니까, 여러 가지 교육이 다양하게 있어서 그때부터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들꽃 가드닝 교육, 동년배 상담가 교육, 도슨트 교육, 취업설계아카데미 교육등 그 외에도 다수의 교육을 더 받았다. 교육을 받고나서 그걸로 취업을 해보려고, 내게 맞을 것 같은 교육만 골라서 받았다. 그러다보니, 1년이 어느새 꿈결같이 흘러갔다.
취업을 못해 크게 실망
교육을 받고나면, 처음에 내가 그 교육을 선택 했을 때와는 결과가 달랐다. 필자가 직업으로 가지기에는 힘들고, 자신도 없고, 취업할 분야를 선택할 수가 없었다. 실망도 많이 되고, 회의를 느끼게 되었다. 교육 받을 때, 강사들이, 정말로 재미있고, 취미로 즐길 수 있는 분야를 직업으로 선택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일이 재미있어야 싫증 내지 않고 오랫동안 할 수 있을 테니까, 뭘 잘 할 수 있을지 꼭 취미부터 찾으라는 것이다. 나는 맞는 취미를 못 찾아서 지금까지도 취미생활을 못하고 있다. 그래서 취업도 어려운가보다. 취업을 포기할까? 아니면 진로를 바꿔 볼까?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 결과, 진로를 ‘상담’ 쪽으로 바꾸어 보려고 굳게 마음먹었다.
적성 진로검사를 받다
센터에는 그만 다니려고 상담분야의 교육기관을 알아보고 있는 중이였는데, 센터 강사님이 ‘취업설계아카데미교육’을 받아 볼 것을 적극 권유 하셨다. 뿌리칠 수가 없어서 이번 교육만 한 번 더 받아보고 그만 둬야겠다고 생각하고, 교육을 받았다. ‘취업설계아카데미교육’은 직업상담 분야의 프로그램이 들어 있어서 ‘진로검사’도 받게 되었다. 이때는 이미 상담 쪽으로 마음이 많이 기울어 있어서 결과가 상담관련분야로 나올 줄 알았다. 그러나 뜻밖에도 ‘예술적, 진취적, 탐구적’ 뭐 이런 단어만 나오는 것이 아닌가! 상담분야로 전환 하려던 계획에 브레이크가 걸렸다. 갑자기 앞이 캄캄하고 막막해졌다. 지금 까지는 예술하고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해 온 사람인데, 예술이 왜 별안간 튀어 나오느냐 말이다. 상실감에 허탈해하는 이 모습을 본 담당 복지사가 ‘본인이 좋아하는 교육만 받지 말고, 관심 없는 분야도 골고루 받아 보면, 의외로, 관심 없던 분야에서 적성에 맞는 직업을 찾을 수도 있다’고, 절대 포기하지 말라고 격려해 주었다. 생각해보니 복지사의 조언이 정말 맞는 말이다. 그래서 그때부터 교육을 골고루 다 받아 보기로 결심 했다.
방송인 교육을 받으며
‘취업설계아카데미교육’을 마치고 났을 때, 마침 ‘방송인교육’의 교육생을 모집하고 있었다. 복지사의 조언대로 평소엔 전혀 관심조차 없었던 ‘방송인교육’을 신청했다. 방송인 교육은 시니어 연기자, 모델, 리포터와 같은 방송 일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전문직 교육이다. 연기엔 관심 없지만, 커리큘럼을 살펴보니 방송기사작성과 리포터교육은 글쓰기가 있어서 받아보면 좋을 것 같았다. 리포터교육을 받으면서, 자기 소개하는 글을 발표했을 때와 리포터 기사작성을 했을 때 두 번 모두 강사에게 칭찬을 들었다. 고칠 것이 하나도 없고, 지금 바로 현장에 가서 리포터를 해도 되겠다고 했다. 큰 박수도 두 번이나 받았다. 도슨트 교육과 시니어 기자교육을 받을 때도 같은 칭찬을 받았다. 이렇게 여러 번 강사들에게 칭찬을 듣고 보니, 교육생들 사이엔 필자가 글을 잘 쓴다고 소문이 났다.
시니어 잡지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기자가 되다
시니어기자교육이 끝날 무렵에, 마침 경제신문 ‘이투데이’에서 만들고 있는 시니어잡지 ‘브라보 마이 라이프’에서 시니어기자를 모집하고 있었다. 그 모집광고를 보고, 필자는 무릎을 탁 쳤다. “그래! 바로 이거다. 여기서부터 시니어의 새 삶을 시작해야지!” 필자는 그 길로 ‘브라보 마이 라이프’에 시니어기자 지원서를 냈다. 운이 좋게도 합격되어서, ‘기자’가 되는 어릴 적 꿈은 이루게 되었다. 그래서 현재는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시니어기자인 ‘동년기자’로 활동하고 있다.
글쓰기로 삶을 꽃 피우리라!
글을 잘 쓴다고 소문이 나고 보니, 소문 난대로 정말 글 잘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런데 글쓰기를 해볼 용기를 낼 수 있었던 이유가 하나 또 있다. 중학교 2학년 때의 일이다. 문예반은 아니지만, 방과 후에 집에서 원고지를 묶어놓고, 혼자서 취미로 틈틈이 시를 썼다. 그 덕분에 중학교 3학년 때는 학교 대표로 뽑혀서 대학교 백일장에 나가 장려상도 탔다. 상을 타고 보니, 시인이 되어서 기자를 해보고 싶다는 꿈을 꾸게 되었는데, 그건 언니들이 보던 여성월간지를 보고서 부터였다. 시인인데, 유명 인사를 인터뷰하러 다니는 걸 읽어본 후로는 필자도 ‘시인이면서, 기자가 되면 얼마나 멋질까!’ 하고 생각했다. 그 티끌만한 작은 경험을 움켜지고, 지금부터라도 ‘글쓰기’를 위해 꾸준히 노력하면 언젠가는 ‘시인’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또, 시인이 되지 못하면 어떤가! 글쓰기를 하는 순간들이 행복한 날들이 될 것이고, 필자의 남은 삶을 아름답게 꽃피워 낼 것이다. 이 화려한 꿈을 이루기 위해서 삶의 노을이 지기 전에, 서둘러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