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시인' 나태주는 백편의 시를 쓰는 것보다 한편의 시가 백사람에게 알려져야 좋다고 하였다. 이분은 특이하게도 젊은 날 좋아하는 여성에게 차인 얘기를 이력에 써 넣는다고 하였다. 완전 자존감 쩌는 남자였다. 자못 흥미로웠다. 그 아픔으로 그는 엎어져서 울었다고 하였다.
'문학은 고통을 먹고 자라는 나무이다'
그 실연의 고통이 그를 시인으로 탄생시켰다고 하였다. 이제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한 여자는 나를 시인으로 만들어줬고 한 여자는 나를 남편으로 만들어줬다." 고.
수필가 피천득은 '봄'이라는 수필에서 첫사랑은 만나지 않는 것이 좋다 하였다. 서로가 세월이 할킨 자국에 실망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도 그녀를 다시 만나보지는 않을 거라 했다.
풀꽃이 탄생된 배경은 그림을 그리려니 풀꽃을 자세히 볼 수밖에 없었단다. 자세히 보니 예쁘더란다.
그는 말했다.
"시의 특성은 개별성 보편성이 있어야 한다. 시는 모든 인류가 이해하고 유용한(유명한이 아닌) 시여야 한다."고.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고 그 사람이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보면 행복한 사람이 된다"고도 했다.
"사람들이 왜 시를 외면하는데요? 어려우니까 그렇지요. 시를 어렵게 쓸 필요가 있나요?"
그렇다.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위로해 주는 것이 시의 역할이다.
광화문의 교보빌딩 꼭대기에는 커다란 글판이 있다. 거기에 적혀 있는 69개의 글귀 중 1위가 나태주시인의 풀꽃이다.
풀꽃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양지 바른 곳에 호젓하게 자리한 풀꽃문학관에는 그의 시가 적힌 병풍이 있었다. 그는 그림도 잘 그리셨다. 시에 들어간 삽화들도 직접 그린 것이라고 하였다.
어느 디자이너가 말했다. "새로운 디자인은 없다"고. 기존의 것을 재해석하여 재생산하는 것이라고. 글도 마찬가지라는 느낌을 받았다.
"사랑은 서로가 마주 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이다."
20세때 본 소설, 막스 뮐러의 에 나오는 말인데 나시인도 그런 요지의 문장을 구사하였다.
적산가옥이 그의 문학관이 됐는데 아주 소박하고 인간미가 넘치는 그와 잘 어울렸다. 그의 문학 강의가 얼마나 맛있던지 홀딱 빠져서 들었다. 시인의 어머니는 시인이란다.
"김용택의 어머니는 입으로 시를 쓰고 김용택 시인은 글로 씨를 쓴다"고 하였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본 후 뵙고 싶었던 신영복 교수님을 끝내 못뵈었다. 나목'을 읽은 후 대화를 나누고 싶었던 박완서 작가님도 세상을 떠나셨다. 나태주 시인을 직접 뵙고 강의를 들으니 너무 좋았다. 다른 분들도 이분이 살아 계실 때 만나 뵙고 그의 달관한 인생관과 가슴이 따스해지는 문학 강의를 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으로 퇴임하셔서 풍금도 잘 치셨다. 그 풍금소리에 맞춰서 '오빠 생각'과 '어머니의 마음'을 제창했다. 어머니의 마음을 부르며 나는 또 질곡의 삶을 살아낸 우리 엄마를 생각하며 엉엉 울 수밖에 없었다.
'만하루'가 있는 산에는 노오란 은행잎 비가 내리고 있었다. '휘잉' 몰아치는 세찬 바람에 커다란 몸짓으로 내리고 있었다. 나뭇잎들은 미련 없이 나무를 떠나가고 있었다.
스타벅스에서 30년 만의 재회를 기다렸다. 문이 열릴 때 혹시 상대를 못 알아볼까봐 출입구가 보이는 자리에 앉았다. 잠시 후 푸근한 인상의 한 남자가 들어섰다. 그는 잠깐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망설이지 않고 우리 자매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언니가 대학생이고 필자가 중학생일 때 이문동 주택에서 월세를 산 적이 있다. 우린 별채에 살고 주인은 안채에 살았다. 작은 정원에는 철 따라 꽃이 피었다. 청신한 봄이면 유난히 라일락꽃이 탐스러웠던 기억이 있다. 창문 가까이에 핀 꽃은 가난했던 우리 자매의 방을 향기로 가득 채워주곤 했다. 첫사랑이라는 꽃말처럼 우리의 꿈을 키워가며 설레던 시절이었다.
안채에 사는 주인집 아저씨는 월남한 사람이었는데 자녀가 아들 넷, 딸 하나였다. 주일이면 온 가족이 함께 교회에 나가는 신앙심 깊은 가정이었다. 주인집 아주머니는 정갈한 모습에 세련미까지 갖춘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가족이 성가를 부를 때면 아들들은 테너와 바리톤, 딸은 알토, 어머니는 소프라노로 멋진 화음을 들려줬다. 경외감이 들 만큼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한겨울 추위에 몸을 떨며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와 혼자 방에 앉아 있으면 주인집 아주머니가 조용히 노크를 하고는 이북식 김치밥을 주발에 그득히 담아 건네주시곤 했다. 김치와 고기를 듬뿍 넣은 따끈따끈한 밥이었다. 필자는 아직도 그때처럼 맛있는 김치밥을 먹어보지 못했다. 아주머니는 사랑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를 몸소 보여주신 분이었다.
옛 추억을 더듬던 우리는 이제라도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었다. 우리 자매는 스타벅스에서 30년 만에 만난 둘째 아들에게 아주머니의 안부를 물었다. 뵈올 수 있기를 잔뜩 기대하며 현재 어디 사시는지, 건강하신지를 물었다.
그러나 그는 미안해하며 어머니가 치매로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시니, 그때의 기억을 그대로 간직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어머니의 모습이 너무 엉망으로 변해서 보이고 싶지 않다는 얘기를 들으며 우리 자매는 뭐라 형언할 수 없는 슬픔에 빠졌다.
어느 누구도 피해갈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는 치매. 인간에게는 너무 잔인하고 가혹한 병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격적인 마무리를 방해하고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치매가 예견된다면 조금이라도 정신이 멀쩡할 때 남은 삶에 대해 준비를 해야 할 것 같다. 배우자나 자식들은 남의 이목을 의식해야 하고 평판을 염려해야 하고 경제적 손실도 고려해야 하는 등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누구든 좋은 추억을 남기고 떠나면 좋겠다. 산 자들이 종종 떠난 사람을 떠올리며 가슴 뭉클할 수 있으려면 냉정한 판단이 필요해 보인다. 치매가 깊어 회복할 수 없다면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하듯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의미한 연명치료는 아무 의미가 없다. 치매 집단시설도 가족에게 면죄부를 주기 위한 것이지 환자를 위한 공간은 아니다.
죽을 날 기다리며 남의 손길에 의지하는 삶은 최악이다. 필자라면 한 손에 읽던 책을 든 채 자는 듯 죽고 싶다.
일본문화를 논할 때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미국의 문화인류학자인 루스 베네딕트가 쓴 ‘국화와 칼’이 아닐까 한다. 재미있는 것은 정작 베네딕트는 한 번도 일본을 간 적이 없었다고 한다. 전후 일본을 다스리게 된 미국 정부의 의뢰로 다양한 책과 문서를 분석해 이 책을 썼다고 한다. 그런데도 이 책이 일본을 이해하는 데 고전이 된 것은 일본 문화의 핵심을 찌른 제목의 상징성 때문이다.
국화의 상징이 다양하게 해석되고는 있지만, 대체로 심미적인 아름다움에의 집착을 상징한다면, 칼은 그 이면에 감추어진 잔인한 죽음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오랜 바쿠후 지배의 결과이기도 하겠으나 사무라이 문화라든가 할복의 전통 등이 칼을 일본의 대표적 이미지로 자리 잡게 했다. 그런데 이런 험악한 죽음의 이미지가 심미적인 태도와 만나면서 기이하게도 죽음은 미학으로 표현된다.
그래서인지 일본 문학 속에서 죽음은 아픔이나 슬픔을 내포하지 않는다. 그저 삶의 한 유형으로 담백하게 마주하며 때론 아름답기까지 하다. 그것은 죽음의 배경으로 그들이 국화로 삼는 사쿠라(벚꽃)를 자주 등장시키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일본 말 ‘사쿠라’는 고대 우리말 ‘사그라지다’에서 유래되었듯이 화사하게 피었다가 어느 한순간 쏟아지듯 져 버리는 담백한 죽음에서 일본의 기질과 통한다는 것이다.
영화 는 이런 일본의 문화적 특징을 고루 담고 있어 흥미로웠다. 영화 줄거리는 단순한 사랑 이야기이면서 어린 시절의 성장 스토리로 볼 수 있는데 어른들의 눈으로 볼 때는 몹시 심심하고 유치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이런 스토리가 원작이 250만 부나 판매될 정도로 큰 인기를 얻었다는 점에서 이 이야기 속에는 분명 일본인을 열광케 하는 일본문화의 코드가 담겼다는 뜻이다.
이 영화는 모교에서 교사로 일하게 된 시가(오구리 슌)가 폐관이 결정된 도서관을 정리하면서 12년 전 첫사랑을 추억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12년 전 우연히 지금은 세상에 없는 동급생 사쿠라(하마베 미나미)의 공병문고를 주운 내(키타무라 타쿠미)가 그녀와 비밀을 공유하면서 일어나는 감정의 변화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그런데 전체적으로 매우 익숙한 ‘기시감’이 느껴진다. (1995)부터 여러 영화에 반복된 소재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영화만의 매력도 없지 않다. 그것은 바로 서사 전개의 힘이다. 키워드는 추억이며 줄곧 나의 시선을 따라간다는 점에서 과거 영화와 구별된다. 이런 서사 방식이 단순한 스토리이면서도 관객을 끌어들이는 장치로 기능한다. 관객들은 영화를 보며 각기 자신의 추억과 비교하며 공감하게 된다.
영화 속에는 죽음을 앞둔 이들에 흔한 소재인 버킷리스트라든가 둘만이 공유한 비밀 등 아기자기한 에피소드가 등장하지만, 역시 가장 인상 깊은 것은 이름다운 미장센이다. 포스터에도 등장하듯이 화사한 벚꽃이 압권이고 가는 곳마다 화사한 풍광이 일품이다. 거기엔 죽음의 음산함이 깃들 틈새가 없다. 게다가 배우들의 섬세한 연기가 비교적 무리 없이 작품에 몰입하게 만든다.
영화 제목이 이상하다는 사람들이 많지만, 내용을 보면 비슷한 부위를 먹으면 약효가 있다는 우리에게도 있는 전통적인 믿음을 표현한 것으로 병을 앓는 상대에 대한 간절한 소원의 말이다. 나중에는 서로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말로 승화되지만, 왠지 듣기가 거북하다. 잔혹한 표현을 즐기는 지극히 일본다운 표현이다. 마지막 반전은 헛웃음이 나오는 불필요한 기교가 아닐까?
영화 는 몇 번을 봐도 재미있다. 다 아는 내용인데도 지루하지 않다. 포레스트 검프로 나오는 톰 행크스가 천연덕스럽게 바보 연기를 하는 것도 재미있다.
이 영화에 포레스트 검프가 사랑하는 여자, 제니가 나온다. 어렸을 때부터 끼가 많아 발레도 하고 기타 치며 노래도 하고 운동권에도 들어가서 활동하는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여자이다. 포레스트는 그녀와 어릴 때부터 가깝게 지냈고 첫사랑이었지만, 그녀를 잡지 못한다.
살면서 몇 번을 다시 만나지만, 그녀는 떠난다. 포레스트의 아이를 임신하고도 연락도 안 했다. 나중에 다시 포레스트에게 돌아온다. 돌아온 탕자이다. 알 수 없는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곧 죽을 운명이다. 결국 제니는 포레스트의 아들을 남기고 포레스트의 품에 안겨 편안히 세상을 떠난다. 포레스트는 어린 시절 제니와 자주 가서 놀던 자기 집 큰 나무 밑에 제니의 무덤을 만들어준다. 가장 바람직한 죽음이다.
제니와 포레스트의 사랑을 보면 제니는 사람들 앞에서 기타 치며 노래하고 갈채 받기 좋아하는 스타일이다. 포레스트는 좋은 사람이지만, 남자로서의 매력도, 짜릿한 삶의 재미도 없는 사람이라 인생을 같이 할 사람으로 치지 않는다. 그러나 말년에는 변함없이 자기를 사랑해주는 포레스트에게 돌아온다.
남녀의 사랑과 결합은 참으로 미묘하다. 한 사람은 좋아하는데 다른 한 사람은 그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부 조합 때문에 마음 아파하는 사람들은 수없이 많다.
포레스트는 사람은 운명대로 살아야 하는 건지, 바람에 뒹구는 낙엽처럼 살아야 하는지 갈등한다. 둘 다 맞는다고 결론짓는다. 제니는 운명은 개척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여러 분야에 도전하고 인생을 만끽한 사람이다. 인생은 현재에서 즐기는 것이 가장 남는 것이라며 살았다. 자기 할 것 다 하고 그랬는데도 다행히 기다려준 포레스트가 있어서 행복한 사람이다.
평범한 남자들은 대부분 포레스트 스타일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지만, 극소수이고 대부분은 기다리는 스타일이다. 잘 난 여자를 잡을 능력이 없다. 잘 난 여자는 주변에 남자들이 들끓어 그 치열한 경쟁을 뚫고 그녀를 쟁취할 자신이 없는 것이다. 잘 난 여자는 그런 것을 즐긴다.
남들은 댄스 계가 화려하다고 보고 있지만, 댄스 계도 마찬가지로 부조화가 심하게 나타나는 세계이다. 예쁘고 몸매 좋고 춤 잘 추는 여자는 제니 스타일이다. 남자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어 그것을 즐기거나 잘난 남자가 채 가서 독점한다. 나머지 남자들은 포레스트 신세이다.
그렇다면 남자들은 어떨까? 춤 잘 추고 화려한 경력까지 갖추고 있으면 주변의 인기가 높다. 늘 여자들이 들끓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한 여자에게 국한하면 다른 여자들은 외면한다. 그래서 불가근불가원 하는 것이다. 물론 좋은 여자를 만났다면 올인 해야 한다. 그러나 가능성은 희박하다. 여자가 볼 때 남들 앞에서 춤 잘 추고 노래 잘 부르고 인기 있는 것은 좋지만, 막상 반려자로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제니 같은 남자로 보는 것이다. 미국도 아니고 한국에서는 제니 같은 여자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2004년 이슬람 무장단체에 의해 아들을 잃은 반전 활동가 마이클 버그의 실화를 모티브로 한 연극이다. 작품의 작·연출을 맡은 장우재의 페르소나라 불리며 초연부터 이번 공연까지 주인공 ‘빌’을 연기하는 배우 윤상화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초연부터 현재까지 작품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요?
작품이 발표되기 전에 작가로부터 먼저 희곡을 받아볼 기회가 있었어요. 처음 읽던 그날은 어쩐 일인지 마음이 좀 젖어 있는 늦은 겨울의 오후였죠. 추운 마당에 나가 오랫동안 지는 해와 오후의 먼지 속에 앉아 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면서 ‘빌’을 생각했고 그가 혼자였을 오후를 느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작가에게 빌 역할을 하고 싶다고 먼저 제안했죠. 작가는 연출가과 상의한다 했고, 연출가는 다른 배우를 선택했어요. 그런데 공연이 만들어질 즈음 그 배우에게 사정이 생겼고, 연출가는 제게 연락을 해왔죠. 그리고 그 까다로운 연출가에게 아직까진 잘리지 않고 있습니다(아시겠지만 이 작품의 작가와 연출가는 같은 사람입니다).
초연 당시와 비교해 무엇이 달라졌나요?
제가 처음 이 작품에서 본 것은 슬픔이었습니다. 그 슬픔은 제가 경험할 수 있는 종류의 슬픔이 아닌, 슬픔 그 너머에 있는 짐작하기도 어려운 그런 것이었죠. 그 거대한 비극에 맞닥뜨린 인물로서 당연히 제 속엔 그만큼의 에너지가 필요했고요. 그 에너지를 내 속에서 끓게 하여 보는 이들도 그 비극의 한복판에서 어떤 생각을 하게 만들고 싶었어요. 그런데 그러다 보니 어떤 이들은 감동을 하지만 또 어떤 이들은 생각은커녕 그 감정을 감당하기조차 힘들어하더라고요. 이번엔 제가 볼 수 있는 만큼의 비극을 보고 싶어요. 빌의 고통을 희석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를 더 이해해보고 싶은 거죠. 극적으로가 아니라 인간으로 말입니다. 빌이 바다 너머 어디에 있는 인물이 아니라 바로 주위에, 동네 술집에서 혼술하는 그런 사람이었으면 합니다. 그와 같은 일을 꼭 겪지 않아도 그를 이해할 수 있는 그런….
‘빌’은 어떤 인물인가요?
세상을 불신·저주하며, 절망하고 스스로를 유폐시키는 인물입니다. 아들보다 더 어린애 같고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좀 구질구질한 구석도 있죠. 무엇보다 저는 그가 정태춘의 ‘정동진 3’에서의 ‘찬 바다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석양을 바라보며 웅숭그리고 있던 맨발의 추레한 중년 멕시칸 사내’ 같은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어떤 이들에게 위로가 될까요?
이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어떻게 남을지 모르겠습니다. 누군가의 초가을 저녁시간을 내가, 우리가 어떻게 책임질 수 있을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어떤 이는 보는 내내 흥미로울 것이고 또 어떤 이는 가슴이 아플 것이며 혹 몇은 카타르시스 같은 것을 느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공연을 하면서 그냥 얘기를 해보고 싶습니다. 우리는 정말 잘살고 있는지, 아니 우리는 정말 잘살고 싶은지.
장소 명동예술극장 일정 9월 6~25일 연출 장우재 출연 윤상화, 김동규, 이동혁, 정태화, 구자승 등
“나를 건드리지 마세요”라는 꽃말을 가진 봉선화. 어린 시절, 그 기나긴 여름이면 초가집의 울밑마다 봉선화가 피었다. 그 봉선화를 나라 잃은 슬픔을 비유해 해방 전후에 태어난 우리들은 “울밑에 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라고 애처롭게 노래했다. 여성들은 지금의 매니큐어 대신 백반과 섞어 찧은 봉선화 꽃을 손톱에 동여매 곱게 물을 들이곤 했다. 손톱에서 봉선화 꽃물이 첫눈 올 때까지 빠져나가지 않으면 첫사랑이 이루어진다고 하여 손톱을 깍지 않고 첫눈이 오기만을 초조히 기다리던 추억 한가닥 씩은 다들 품고 있으리라.
그런데 어느 날 우리 동네에 크나큰 사건이 일어났다. 치렁치렁 머리를 땋고 다니며 여성스런 느낌이 물씬 풍기면 이웃집 학순이 언니가 연애를 하다가 사랑이 엇나가자 자살을 한 것이다. 하필이면 우리 집 선산 아래 있는 조그마한 둠벙물에 빠져 숨을 거두었다. 손톱의 봉숭아물이 너무 일찍 빠져나가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동네 아주머니들의 쑤근거리는 입방아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우물가를 달구어댔다. 그 둠벙 앞을 지날때마다 머리를 풀어헤친 벌건 손톱의 처녀 귀신이 끌어들일 것 같아 그 길로 지나가질 못하고 늘 먼 길로 돌아다니곤 기억이 난다. 흉흉한 소문을 듣고 아직 소녀였던 나도 곱게 물든 손톱이 자라지 않기를 얼마나 빌었던가.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그때의 추억이 가끔씩 낭만으로 남아 울컥 그리운 계절이다.
그 시절 슬프게 피던 봉숭아가 화단에서 당당하고 탐스럽게 꽃을 피운다. 동네 할머니한테서 모종 두 개를 얻어다가 옥상 큰 화분에다 심었는데 옆의 금잔화와 나리를 뒤덮을 기세로 가지를 치다 요즘엔 마디마다 꽃을 피워 제법 위용을 뽐내고 있다. 그렇게 당당한 녀석들도 40도가 넘는 한 낮 옥상의 복사열과 싸우다가 오후가 되면 어깨가 축 늘어진다. 그래도 물만 먹으면 다시 일어서서 꽃을 피우는 모습이 대견스럽다. 마치 우리의 딸아이들을 연상케 한다.
나는 아침마다 올라가서 손톱에 물들이던 추억을 꺼내 만지작거리며 꽃잎을 따다가 지인들에게 나눠주곤 한다. 주말쯤엔 나도 딸아이와 함께 손톱에 보름달을 띄워 보고 싶다. 그 보름달이 반달이 되고 상현달이 되다가 결국은 첫눈이 올 때쯤 그믐밤 속으로 사라지겠지만... 시간은 모두에게 똑같이 냉정하다. 꿈의 씨앗이 발아하던 소녀시절도, 물오른 한 여름의 청춘도 속절없이 가버리고, 어느새 가을날의 샛길을 서성이고 있으니 봉숭아물이라도 들여 내 손톱에 풍성한 보름달을 띄워보고 싶을 뿐.
평생 오로지 한길만을 걸으며 위대한 족적을 남긴 이들의 모습은 언제 봐도 멋있다. 여전히 젊음을 잃지 않은 목소리로 무대에 오르고,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는 연출력과 필력을 뽐내는 네 명의 연극 원로가 제2회 늘푸른 연극제에서 만났다. 바로 대한민국 연극을 대표하는 배우 오현경과 이호재, 연출가 김도훈과 극작가 노경식이 올해 주인공들이다. ‘원로연극제’라는 이름으로 시작해 ‘늘푸른연극제’로 문패를 바꿔 달은 이 연극제는 원로들의 노고를 격려하고 응원하는 따뜻한 예술가들의 잔치였다. 8월 한 달, 평균 연령 79세 젊은 오빠(?)들의 무대로 대학로 극장가가 뜨거운 박수로 넘쳐났다.
범접할 수 없는 화술의 대가, 배우 오현경
연극계 후배들은 오현경을 ‘학 같은 배우’라 부른다.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후배를 꾸짖는 목소리는 카랑카랑하고 곧다. 화술의 대가, 그의 연기를 말할 때 빠지지 않는 표현이다. 국내에서 가장 정확한 한국어를 구사하는 배우로 통하는 오현경은 사비를 털어 ‘송백당’을 열고 후학을 위해 화술을 가르치기도 했다. 이번 연극제의 개막작이자 오현경의 출연하는 연극 은 1984년 초연 때부터 오현경이 아버지 역을 맡아왔던 작품이다. 젊음을 향한 늙은 아버지의 주책스런 욕망을 해학과 능청스러움으로 표현해 초연 때부터 관객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고. 이번 무대에서도 또한 강단 있고 깊은 대사와 호흡으로 나이를 잊은 열연을 보여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사실주의극에 시적 분위기를 불어넣는 연출가 김도훈
혹자는 연출가 김도훈을 일컬어 ‘돈과 억세게 거리가 먼 연극인’이라고 부른다. 관객의 입맛에 맞는 연극은커녕 자신만의 연출 스타일을 끈질기게 고집하고 남녀의 애증과 갈등, 인간의 본질 파악에만 집중한다. 이 때문에 그의 작품은 진지하고 무거우며 당연히 관객이 많이 들지 않는다. 대중과 타협하지 않고 자신만의 스타일을 고집하는 연출가 김도훈. 1976년 극단 뿌리 창단 이후 40년 동안 100여 편이 넘는 작품을 선보였다. 그러나 역시 그의 대표작은 이다. 남루한 집을 배경으로 한 가족이 붕괴되고 해체되는 과정을 그린 테네시 윌리엄스의 은 1976년 첫 연출 후, 그가 가장 자주 무대에 올렸던 레퍼토리다. 이번 공연에는 국회의원을 지낸 배우 최종원이 주인공 톰으로 출연했다.
역사를 통해 현실을 환기시키는 참여적 극작가 노경식
“작가로서는 이런 자리는 처음인 것 같습니다. 한평생 처음으로 포스터에 나온 작가가 아닌가 싶습니다. 연극 잘 만들어서 후배나 선배들에게 부끄러움 없었으면 합니다.” 극작가 노경식
극작가 노경식은 1965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희곡 로 등단했다. 지난해 까지 50여 년 동안, 약 40여 편의 희곡을 발표했다. 그가 작품을 통해 들려주고자 했던 것은 우리 한국인의 이야기였다. 늘푸른연극제의 작품으로 무대에 오른 는 일제강점기 일본에 협조했던 친일 부역자를 처벌하기 위해 설치했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부패권력에 의해 해체되는 과정을 그린 작품. 2005년 극단 미학(정일성 연출)에 의해 초연된 바 있다. 작가 특유의 역사적 안목으로 완성된 기록극이다. 의 총연출은 극단 동양레퍼토리의 상임연출가 김성노와 협력연출 이우천이 공동으로 맡았다. 권병길, 정상철, 이인철, 김종구, 유정기 등 노련한 60대와 40~50대의 중장년 및 젊은 배우들 등 총 30여 명의 연기자들이 종횡무진 새롭게 무대를 석권하는 대형 파노라마로 꾸며졌다.
첫사랑을 찾아가는 노년을 연기하다, 배우 이호재
이호재는 1964년 를 시작으로 그동안 출연한 작품만 200여 편이 넘는다. 연극평론가 구히서는 그의 연기에 ‘연기의 교과서, 대사의 달인’이라는 별칭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무대 위에서의 유연성과 순발력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배우’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는 2007년에 초연된 작품으로 극작가 이만희가 이호재에게 헌정한 작품이다. 50년 만에 만난 동창이 첫사랑이었음을 뒤늦게 깨닫고 고백하는 동창생들의 이야기다. 젊은이들이 주는 풋풋함이 아닌 시니어의 우정과 사랑의 감정을 잘 녹였다. 얼마 남지 않은 생의 끝에서 따질 것 없이 던지는 그들의 모습이 귀여우면서도 애잔하게 그려졌다.
예술과 시장의 거리는 얼마나 될까? 아니 정확하게 문학작품과 상업영화의 거리는 어느 정도가 적절한가 하는 의문이 영화를 보는 내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원작자인 줄리언 반스가 ‘영화는 소설로부터 멀리 갈수록 좋다’고 말했다는데 이건 원작과 달라진 영화에 대한 찬사일까? 아니면 영화가 책과 다르니 소설을 읽으라는 야유일까? 아무튼, 각기 다른 장르이니 무어라고 단정 지을 수 없는 문제이기는 하다.
런던에서 빈티지 카메라 점포를 운영하며 노년을 지내고 있는 토니에게 어느 날 편지 한 통이 배달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 내용은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첫사랑 베로니카의 어머니 사라의 죽음과 어머니가 토니에게 남긴 유산을 알리는 소식이었다. 유산 담당자를 통해 그 유산이 고교 친구인 아드리안의 일기장인 것을 확인했지만, 베로니카가 주지 않으려 한다는 사실을 알고 베로니카를 찾아 나선다.
이 사건을 계기로 토니는 젊은 날의 기억을 다시 소환한다. 영화는 토니의 시각으로 과거와 현재를 교차해 가면서 기억을 재현한다. 그러니까 베로니카를 찾아가는 과정은 곧 숨겨진 진실을 밝히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 과정에서 감독은 인간의 기억이 얼마나 불완전하고, 우리가 얼마나 기억을 윤색하고 편집하는지, 역사라는 것이 얼마나 허술하고 왜곡되어 있는지를 이야기한다.
무례하고 자기중심적인 성격의 토니는 가까운 가족과 주변 사람들로부터 배척당하지만, 정작 자신은 그 사실을 모르고 모든 기억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편집하여 기억하고 있다. 집요하게 베로니카를 찾아낸 토니는 그녀가 냉소와 함께 건네준 과거 자신이 보냈던 편지를 읽고 충격에 빠진다. 그 편지는 첫사랑이었던 베로니카와 존경하던 친구 아드리안을 동시에 불행에 빠트린 악의에 가득 찬 저주였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부터 그의 기억은 혼선을 일으킨다. 베로니카가 자신을 버리고 아드리안과 사랑에 빠진 것이 자신의 잘못이 아닌 친구의 배신으로 알고 있다든지, 베로니카의 집에 초대되었을 때 엄마인 사라에 대한 기억의 왜곡 등 모든 것이 자신에게 유리하게 구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베로니카가 손잡고 정신지체아 모임에 데리고 다니는 또 다른 아드리안을 보는 순간 당연히 베로니카의 아들로 생각했던 그가 사실은 동생임을 알았을 때 기억의 혼란은 극에 달한다.
작가와 감독의 행보는 이즈음에서부터 갈라진다. 작가는 구제불능의 토니를 통해 기억을 윤색하는 인간의 본질과 역사의 허구를 이야기하는데, 영화는 누구에게나 익숙한 이야기로 이끌며 멜로드라마로 전환한다. 원작에 없는 딸의 출산과 새 생명의 탄생을 계기로 이루는 가족 간의 화해는 우리 드라마에서도 익히 보아온 너무도 식상한 줄거리가 아닌가.
언뜻언뜻 등장하는 아드리안의 지성과 비범성은 너무 생략되어 지적인 재미를 반감시킨다. “역사는 승자들이 만들어낸 이야기다. 동시에 패자들의 자기기만이기도, 평범한 사람들의 회고이기도 하다.” 같은 대사는 맥락을 잃고 방황한다. 아드리안 2세가 베로니카의 동생이라면 아드리안과 엄마의 관계가 아리송한데 모든 것을 관객의 상상에 맡겨버린다. 또 드라마적 상상력을 동원해야 하나 잠시 고민한다.
다만 출연 배우들의 출중한 연기는 놀라웠다. 늙은 토니 역의 짐 브로드벤트와 늙은 베로니카 역의 샬롯 램프링은 기억에 남는다. 전체를 관통하는 카메라와 사진의 이미지는 기억과 왜곡을 이야기하는 소도구로 훌륭한 역할을 해내고 있다. 우리가 팩트로 믿고 있는 사진도 알고 보면 찍은 이의 시각에 불과하지 않은가.
“망고, 어디서 났게?”
동생은 망고를 깎으면서 대단한 비밀이라도 들려주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의도를 알기 어려운 질문이어서 잠시 머뭇거리니까 동생이 그새를 못 참고 말을 이어갔다.
“요즘 우리 시어머니가 이상해.”
그 말에는 참을 수 없는 호기심이 잔뜩 묻어 있었다.
동생의 시어머니는 음식 솜씨가 참 좋다. 그 솜씨를 동네 노인정에서 발휘하니 점심 먹는 사람이 많아졌다고 으쓱해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도 있다. 게다가 나이가 들었어도 무너지지 않은 얼굴선 덕분에 70세가 넘은 할머니치고는 예쁘장한 외모를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당신이 노인정에서 인기가 많다는 걸 자랑 삼아 얘기하기도 한단다.
그러던 어느 날 초인종이 울려 나가보니 대문 앞에 계란 한 판이 놓여 있더란다. 사람은 없고 계란만 덩그맣게 있길래 의아해하고 있는데 시어머니가 마당까지 쫓아 나와서 한마디 하셨단다.
“노인정 영감이 놓고 갔나?”
그래놓고 당황한 기색으로 구구절절 변명을 늘어놓으셔서 “들어오시라 해서 차라도 한잔 대접하시지 그러셨어요” 했더니 “에이, 나이 들어서 주책이야” 하며 뛰어 들어가시더란다. 언제부터인지 시어머니가 아침 숟가락을 놓기 바쁘게 노인정으로 달려갔는데, 멜론이나 망고 등 시어머니가 평소에 돈 주고 사지 않을 과일들이 냉장고에 들어 있는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며 동생은 깔깔 웃었다.
모두들 나이 들어가면서 꺼리고 외면하는 것들이 있다. 나잇값을 제대로 하지 못할까봐 하고 싶은 말, 하고 싶은 일을 감추기에 급급하다. 잘못했다가는 ‘나이 들어 주책이야’라는 소리를 들을까봐 두려운 것이다.
그러나 얼굴에 주름이 파이고 육체의 기능이 쇠락해도 감정은 여전히 살아 있다. 사랑은 숫자로 하는 게 아니라 느낌으로 하는 것이다. 그러니 청춘은 갔어도 가슴 뛰는 인생의 봄날을 여전히 기대하는 것 아닌가.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이라는 소설을 통해 90세 노인에게 찾아온 첫사랑을 이야기한다. 평생을 창녀들과 함께 보내면서 이 세상에 순정한 여자는 없다고 생각하는 독신이자 신문사 칼럼니스트 사비오. 그는 90세 생일에 자기 자신에게 아름다운 밤을 선사하기 위해 선택한 14세 소녀에게 빠진다. 사랑의 열병은 그에게 낭만주의 문학작품을 들추게 하고, 연애편지 형식의 칼럼을 쓰도록 만든다. 사랑 때문에 죽는 것은 시적 방종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던 그가 사랑 때문에 죽는 일은 가능한 일일 뿐 아니라 자신도 사랑 때문에 죽어가고 있음을 고백한다. 그리고 그 고통의 달콤함을 무엇과도 바꾸지 않겠다고 말한다.
위대한 첫사랑이다. 90세 노인에게 찾아온 첫사랑을 주책없는 늙은이의 추태로만 볼 것인가? 아니다. 그 사랑은 죽음과 멀지 않은 노인에게 찾아온 마지막 열정이자 의미 있는 삶에 대한 순정한 고백이다.
나이 들어간다는 것은 외로움과 고독에 익숙해진다는 의미다. 함께 산책하고 함께 여행하면서 맛있는 음식 먹고 행복한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다면 축복이다. 동생은 시어머니와 영감님이 언제쯤 드러내놓고 주책을 부릴까 그때를 기다린다고 했다.
서점에서 책을 산다는 건 달콤쌉싸름한 일이다. 그걸 처음 안 건 중학교 3학년 때였다. 단짝 친구와 함께 서점엘 갔다. 놀 것이나 즐길 것이 거의 없었던 시절, 친구와 나는 예배를 마치고 적당히 시간을 보내며 놀 곳으로 서점을 택했던 것 같다. 서점이 집으로 가는 길목에 있어서 동선이 자연스레 이어졌다.
사춘기의 절정을 지나고 있던 우리는 만나기만 하면 교회 오빠나 남학생에 대해 이야기 했다. 누가 누구를 좋아하는지가 최대 관심사였다. 우리는 설익은 얘기로 온 시간을 보내며 로맨스 소설로 허전함을 채웠다. 그리고 서점에 가서 각각 책을 골랐다. 나는 ‘첫사랑’을 골랐고 친구는 ‘짝사랑’을 꺼내들었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키득거렸다.
달콤하고 아름다운 첫사랑을 기대하며 골라들었던 투르게네프의 ‘첫사랑’. 16살 소년이 자신의 집 별채에 이사 온 공작부인의 딸, 지나이다를 보고 사랑에 빠진 후 지독한 사랑의 열병을 앓게 되는 이야기였다. 아버지는 투르게네프가 러시아의 대문호라고 알려주었지만 혹시라도 가족들 눈에 띄어 놀림을 당할까봐, 밤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몰래 책을 읽었다. 지나이다가 여러 남자들을 다루며 군림하는 장면이 참으로 이상했지만 그보다도 그 여자가 아버지의 연인이었다는 사실이, 소년만큼 당황스러웠고 이해하기 힘들었다. 이 책을 읽은 후 불에 데인 것처럼 화끈하고 찝찝한 감정이 여러 날 동안 맴돌았다.
책을 읽는다는 건 뭔가 내밀하고 말로 다하지 못할 비밀을 갖게 되는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첫사랑’ 때문이었다. 16살 소년이 겪은 사랑은 불가해 했지만, 그 사랑에 대해 이해하고 싶었고 더 깊이 알고 싶었다. 그 때부터 서점을 드나들며 삼중당 문고를 사모으기 시작했다. 노량진역을 지날 때면 삼거리 모퉁이에 있던 내 첫사랑, 삼우서적이 문득 떠오르기도 한다. 남편과 연애 시절에 드나들었던 명동 충무서적, 가끔 들러 지적 허영심을 채우던 고시촌의 녹두서점까지, 내가 사랑하던 서점들이 다 없어졌다. 이제는 서점에 가려면 지하철을 타고 가야 한다.
얼마 전에 서울국제도서전에 다녀왔다. 도서정가제 이후 출판사들도, 관람객들도 관심이 시들해졌던 도서전시회가 몰라보게 달라졌다. ‘변신’을 주제로 새롭게 바뀐 도서전시회 중심에 동네책방이 있었다. 전국의 인기있는 동네책방 20 곳이 참여한 덕에 평소에 가보고 싶었던 책방이나 미처 알지 못했던 독특한 책방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었다. 고양이서점, 시전문서점, 음악전문서점, 한 사람 만을 위해 책을 골라 주는 서점 등 주인의 취향이 제대로 드러난 서점들을 둘러보는 일은 참 즐거웠다. 예전에 비해 젊은 사람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음악전문서점 ‘라이너노트’에서 앙드레지드가 쓴 ‘쇼팽의 노트’라는 책을 골랐다. 대형서점에 갔더라면 사지 않았을 책이다. 통영의 한 출판사가 펴낸 ‘통영예술기행’이라는 책은 통영여행 할 때 참고하면 좋겠다는 생각에 집어들었다.
책을 사지도 읽지도 않는 시대라고 한탄하지만 동네 골목 구석구석에 동네책방들이 많이 생겨나고 있다. 여기서는 책을 파는 일 이외도 독서모임이나 전시회, 세미나, 음악회 등 다양한 문화행사도 열며 동네 사랑방으로, 복합문화공간으로서의 역할을 하고있다. 어느샌가 하나 둘 사라진 동네책방들의 화려한 부활을 기대해도 좋을 것 같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