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전할 수 없는 상황이 돼서 마음만 동동 구르는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문을 두드려주셔요. 이루어질 수 없는 첫사랑 그 쓸쓸함에 대한 이야기를 이근후 이화여대 명예교수가 보내주셨습니다.
글 이근후 이화여대 명예교수
누님. 이렇게 불러야 내 마음이 편할 것 같습니다. 이젠 누니~임 하고 소리 높여 불러도 대답 없을 당신에게 띄웁니다.
생각해보면 내가 참 바보 같았습니다. 왜 그랬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지금도 누님 앞에 서라면 아마도 그때 그 시절처럼 한없이 작아질 것입니다.
누님 결혼식 날, 축시를 읽어주기로 약속해놓고선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축시를 읽어드리지 못했습니다. 기억나세요? 내가 막 예식장에 도착했을 때 누님은 차를 타고 신혼여행을 떠났습니다. 차 안에서 내게 손을 흔들어줬습니다. 그날 내가 왜 늦은 줄 아세요? 오래도록 잊고 있었던 기억인데 이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날은 정말 누님이 미웠습니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가 고등학교 시절입니다. 내 여동생의 S 언니가 되면서입니다(그 시절엔 S 언니 동생이 유행이었습니다). 동생의 언니이니 당연히 나한테는 누님이 된 것입니다. 누님과 내 나이 차이는 딱 한 살입니다. 누님이 생겼으니 공연히 즐겁고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습니다. 동생을 통해 말로만 듣던 누님을 만난 것은 훨씬 나중 일입니다. 마침 나와 가장 친한 친구가 누님과 친척이었는데 조카뻘이었습니다. 그러니 동생으로 인해 누님을 얻고 누님으로 인해 조카를 하나 얻은 셈입니다.
어느 날 친구를 앞세워 누님 집으로 찾아갔습니다. 보고 싶은 간절한 마음으로 찾아갔으나 부끄러움이 많았던 나는 하고 싶은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돌아와선 다음에 만나면 이런저런 말을 해야지 하면서도 그 말들을 지금까지 하지 못했습니다. 대학시험에 낙방하고 실의에 빠져 외가 근처에 있던 직지사에 들어가 한 학기 동안 머문 적이 있습니다. 그때 누님 꿈을 생전 처음으로 꾸었습니다. 글쎄요. 나 혼자 간직하고 싶었던 꿈이었지만 지금은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누님이 나한테 키스를 해주었습니다. 내가 한 것이 아닙니다. 누님이 나한테 해주셨습니다. 그 황홀한 느낌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깨어보니 허망하게도 꿈이었습니다. 계속 그런 꿈을 꾸고 싶었습니다. 그날의 꿈이 아쉬워 그 꿈을 꾸었을 때의 환경에 맞춰 여러 번 잠을 자보기도 했습니다만 그 후로는 한 번도 그런 꿈을 꾸지 못했습니다.
대학에 입학했을 때 누님은 영문과를, 나는 의예과를 다니던 시절이라 만나는 일이 잦았습니다. 함께 있는 시간이 많을수록 참 즐거웠습니다. 그렇게 가깝게 지내면서도 정작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입 밖에 내지도 못했습니다. 누님을 만나고 나면 즐거움만큼 아쉬움도 컸습니다. 꿈같은 대학 시절을 보내고 내가 모교 병원에서 인턴을 하고 있을 때입니다. 누님은 결혼을 한다며 내게 축시를 부탁했습니다. 나는 기꺼이 승낙했고 당일 낭송하기 위해 축시를 하나 지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뭐라고 썼는지 지금은 기억에 없습니다. 시를 쓰고 그림도 그려 시화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림에 눈물이 떨어져 번져버렸습니다. 축시를 쓰면서 왜 눈물이 났을까요? 그때는 잘 몰랐지만 지금은 너무나 명쾌히 그 이유를 압니다.
내가 사랑한 누나를 다른 사람이 채갔기 때문입니다. 누나를 채간 사람에 대한 분함과 그 사람을 따라간 누님에 대한 서운함이 범벅이 되어 눈물로 떨어졌습니다(나이답지 않게 참 바보 같았네요). 예식시간에 맞춰 예식장에 충분히 갈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병원에서 우물쭈물하다 시간이 늦어버렸습니다. 핑곗거리는 충분했습니다. “환자가 많아서 그랬습니다”라는 핑계입니다. 그러나 기실 환자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분노와 서운함이 밀려와 무의식적으로 시간을 맞추지 못한 것입니다. 그 분노와 서운함을 직면하기 어려웠습니다. 생각하면 그 뿌리는 깁니다.
내가 대학시험에 낙방해 직지사에서 한 학기 동안 칩거하면서 제일 많이 생각한 사람은 누님입니다. 공부하는 시간보다 누님을 상상하는 시간이 더 많았습니다. 그냥 보고 싶다는 수준이 아니라 결혼까지 하고 싶을 만큼 많은 시간을 누님과 함께하는 상상 속에서 보냈습니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항상 얼굴을 붉혔습니다. 속마음을 누군가에게 들킨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면 언제나 얼굴을 붉혔습니다. 결혼을 할 수도 있지, 못할 이유는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항상 나를 통제하는 나만의 도덕적 기준이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기준이지만 그땐 정말 바보스러웠습니다. 그 기준은 누님하고 어떻게 결혼할 생각을 하느냐는 자문이었습니다. 죄의식이었습니다. 참 바보스러웠지요. 누님은 내 혈연적 누님이 아니잖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님과의 결혼을 상상하는 것 자체가 부적절하다는 생각에 얽매였습니다. 누님하고의 결혼이라니…. 그런 불순한 생각을 하는 나 자신을 스스로 용납하지 못했습니다. 말하자면 사랑하는 마음과 사랑해선 안 된다는 마음이 서로 상충하는 양가감정에 시달렸던 것입니다.
한 학기 동안 가슴앓이만 하다 내려왔습니다. 이런 깊은 사연이 있습니다. 결혼식 날 예식장에 늦게 도착한 것이 꼭 환자 때문만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인턴 과정을 마친 뒤 정신과 레지던트 과정 수련을 받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내가 갓 결혼해 신혼생활을 시작했을 때입니다. 그 뒤 20여 년 동안 나는 누님을 잊고 살았습니다. 첫아들이 개혼할 때 누님에게 청첩장을 보냈습니다. 아들 결혼식을 준비하다 불현듯 누님 생각이 났던 것입니다.
예식장에서 누님을 20여 년 만에 만났습니다. 반가워서 잡은 손을 한참 놓지 않았습니다. 그날 나는 누님 손을 처음 잡아봤습니다. 결혼식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옛날 생각이 나서 혼자 웃었습니다. 이젠 누님을 채간 분에 대한 분노도 누님에 대한 서운함도 내려놓은 지 오래돼서 그런지 그날은 그냥 미소를 짓게 하는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날은 정말 반가웠습니다. 바보스러웠던 내 모습을 생각하면서 누님 손을 오래 잡고 있었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누군가가 그리운 사람이 있다면 참 행복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고 또 세월이 많이 흘렀지요. 인편에 누님이 아프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다시 옛날 생각이 밀려오면서 누님이 너무 보고 싶었습니다. 수소문 끝에 전화를 드렸지요.
“누님 나 대구 갈 일이 있는데 누님 집에 들려도 돼요?”
“오지 마.”
내 기대와는 다른 답변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누님은 아파서 누운 모습을 보여주기 싫다고 했습니다. 체중이 35kg밖에 안 나간다니 그 모습을 상상하기 싫었습니다.
“대신 전화 자주 해.”
나는 그래서 매일 전화를 했고 옛날이야기를 하며 즐거워했습니다. 그러다가 네팔로 봉사를 떠났습니다. 네팔에 가 있는 동안 나는 누님이 돌아가시지나 않을까 내내 불안감을 떨치지 못했습니다. 네팔 봉사를 마치고 귀국하면서 곧바로 누님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전화벨이 한참을 울리는데도 누님은 받질 않았습니다. 불길한 예감에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러곤 전화를 걸 용기가 나지 않아 한동안 걸지 않았습니다. 누님의 부음을 들은 것은 그 후 한참 지나서였습니다. 나는 또 바보짓을 했구나 싶었습니다. 두려워도 참고 전화를 걸어볼걸. 자책하고 또 자책했습니다. 전화를 통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지금도 내가 그런 바보입니다.
오랜만에 대학 동창을 만났다. 충무로에서 만난 친구는 예전에 비해 살이 조금 찌고, 얼굴에 잔주름이 늘어난 것 외에는 걸음걸이도 말투도 달라진 것이 별로 없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더치페이를 하던 대학 시절과는 달리 자기가 먼저 달려가서 계산을 했다는 점이다. 우리는 점심식사를 마치고 커피 전문점으로 자리를 옮겼다.
“뭐 마실래?”
“으~~음. 오늘은 달달한 카푸치노.”
“엉? 그런 커피도 마셔?”
카푸치노를 마시는 일이 무슨 큰일이라고 놀란 눈으로 필자를 바라보는 친구를 향해 “응 그때그때 달라” 하고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카푸치노와 아메리카노 한 잔씩 시켜놓고 철없던 대학 시절 얘기를 했다. 궁금했던 옛날 일들을 들추며 “그땐 왜 그랬어?” 하고 묻기도 하고 당시에는 몰랐던 이야기를 듣고는 “아~ 그랬었구나” 하며 놀라기도 했다.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그 시절 누가 누구를 좋아했고, 어떤 남학생이 어느 여학생을 집까지 바래다줬는지, 그러다가 결혼에 골인한 커플이 요즘에는 어떻게 지지고 볶으며 살고 있는지, 실타래 풀리듯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학과 일에 적극적이었던 친구 덕분에 몰랐던 관계들도 많이 알게 돼 놀랍고 신기했다.
“난 그때 왜 아무것도 몰랐을까?”
필자의 말에 친구가 배시시 웃었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이젠 좀 자주 보고 살자는 말을 주고받은 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친구가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보았다.
오늘, 드디어 첫사랑을 만났다. 10여 년 만에 만났지만 워낙 친하게 지냈던 터라 어색함이 없었다. 점심 먹고 커피 한잔하며 학교 때 이야기와 친구들 근황으로 수다를 떨고 다음번에는 선배들과 보기로 하고 헤어졌다.
대학 1학년 영어시간에, 옆자리에 앉아 대학노트에 장 콕토와 김춘수의 시를 적어주던 그녀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 밑에 적어준 한 귀절이 생각난다.‘까만 커피 좋아하는 사람, 내가 좋아하는 사람’. 난 갓 스물의 나이에 커피 맛도 제대로 모르면서 블랙만 마셨다. 그때나 지금이나 모르겠다. 그 사람이 누군지….
모르는 사이에 필자는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 그가 맛도 제대로 모르는 까만 커피를 마시며 가슴을 졸이는 동안에, 필자 또한 까만 커피를 좋아하던 첫사랑을 가슴 깊이 간직하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 다른 첫사랑앓이를 하고 있었지만 우리에게는 청춘을 함께한, 찬란히 아름답게 남아 있는 그날들이 있다는 걸 그 친구에게 말해줄 날이 올까?
중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였다. 길을 걷고 있는데 저 멀리서 한 남학생이 쏜살같이 내달려왔다. 아무래도 부딪힐 거 같은 불안함으로 살짝 비켜서는데 어느새 필자의 오른쪽 어깨를 툭 치며 지나갔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필자는 당황해하면서 멈춰 섰고, 뒤를 돌아보자 남학생은 뒷모습을 보이며 벌써 저만큼 달려가고 있었다.
그때 발에 뭔가 밟히는 기분이 들었다. 내려다보니 오른발 옆에 편지 같은 것이 떨어져 있었다. 순간 가슴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다. ‘누가 본 건 아니겠지? 혹시 아버지가?’ 하면서 주변을 돌아봤지만 근처에는 사람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이걸 어쩌지?’ 난감한 표정으로 다시 뒤를 돌아봤지만 이젠 남학생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가슴이 두방망이질하던 필자는 순간 화장실에 들어가 편지를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냅다 집으로 뛰어갔다. 살금살금 화장실로 들어가 조심스럽게 편지를 열어보려는데 종이 부스럭대는 소리가 어찌나 크게 느껴지던지 방에 있는 엄마와 동생들이 들을 것만 같았다. 결국 화장실에서도 편지를 열어보지 못하고 다시 도서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유 없이 화가 치밀기 시작했다. 그런데 도서관 가는 길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큰 나무 밑에 편지를 던지고 간 남학생이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앉아 있었다. 필자는 쏜살같이 남학생이 앉아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러고는 남학생 등 위로 열어보려다 만 편지를 휙 집어던지고는 돌아서서 도망치듯 달아났다. “저기요!” 하며 다급하게 필자를 부르는 소리가 등 뒤로 들려왔다. 얼마나 뛰었을까. 숨이 차서 씩씩거리며 겨우 멈춰 선 곳은 집 근처 숲 속, 필자가 자주 찾아가던 비밀 아지트였다.
갑자기 눈물이 터져 나왔다. 그곳에서 혼자 엉엉 울다가 눈물을 닦고 집에 들어가니 엄마가 필자를 안방으로 불렀다. 어떤 남학생이 불쑥 찾아와 엄마한테 필자를 동생 삼으면 안 되겠냐고 했다면서 아는 사이냐고 묻는 것이었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자 엄마는 “이 편지도 주더라?” 하며 필자에게 돌려주었다.
방으로 들어가 편지를 읽어보니 “여동생이 되어주면 고맙겠다!”는 내용이 씌어 있었다. 평소에 오빠가 있는 친구들이 부러워 잠시 혹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엄마가 낳은 오빠가 아니라서 바로 단념했다. 필자는 평생 단 한 번도 ‘오빠’라는 말은 해본 적이 없다. 그때 생각을 바꿨다면 필자에게도 오빠가 한 명 생겼을지도 모른다. 오호 통재라!! 어쩌면 예쁘고 아름다운 첫사랑으로 엮어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때는 왜 오빠들이 못살게 군다는 친구들 말만 떠올랐는지…. 그렇게 용기 있던 남학생의 시도는 불발탄으로 끝나버리고 말았다. 그 남학생은 동네방네 소문이 날 만큼 공부를 잘했지만 원하는 대학에는 못 들어갔다고 한다. 대학도 낙방하고, 거기에 내 반응도 그랬으니 상심이 컸으리라. 혹시라도 어디선가 다시 만나게 된다면 아직도 여동생이 필요하냐는 농담 같은 질문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이루어지지 않아서 첫사랑’이라는 말처럼 첫사랑은 어쩐지 애틋하고 비극적이어야만 할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첫사랑은 대부분 이루어지지 않은, 아름답고 슬픈 사연으로 각자의 가슴에 묻혀 간직되어 있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가끔 그날의 추억을 꺼내 그리워하면서 은근히 비밀을 즐기기도 하는 것 같다. 어렸을 때 필자 마음을 설레게 하던 까까머리 중학생은 첫사랑이라기보다는 풋사랑이다. 언제 생각해봐도 웃음이 나고 장난스러운 추억이다. 그러니 첫사랑은 아닐 것이다.
마음을 아프게 한 남자, 그가 바로 필자의 첫사랑이었다. 필자는 좀 괜찮은 용모였음에도 대학을 졸업하고 몇 해가 지나도록 결혼을 못했다. 딸만 셋인 집안의 장녀로 27세가 되어도 사귀는 사람조차 없었으니 엄마의 걱정이 대단했다. 당연히 수없이 많은 선 자리에 끌려 나갔다.
지금은 없어진 광화문 국제극장 옆 골목 안에 ‘라라’라는 작은 레스토랑이 있었다. 어느 날 그곳에서 선을 봤는데 그가 특별하게 다가왔다. 첫눈에 반한다는 말은 그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모처럼 마음이 활짝 열려 세상을 다 얻은 듯 기뻤다. 하지만 인생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부모님은 같은 시기에 선을 본 다른 남자를 마음에 들어 하셨다. 특히 엄마의 성화가 심했다. 필자가 마음을 굽히지 않자 그 사람을 집으로 불러 결혼해서 살 집은 있는지, 돈은 얼마나 있는지 속물 같은 질문을 해대며 모욕을 줬다. 묵묵히 듣고만 있던 그가 집을 나설 때 같이 따라 나가 서부역에서 일영 가는 기차를 타고 가면서 한없이 울었던 기억이 잊히지 않는다.
그 사람이 아니면 세상 그만 살아도 좋다는 결심까지 했지만, 부모님의 큰 반대 속에 결국 엄마가 좋다는 남자와 결혼하게 됐다(이 글은 남편이 알면 곤란한 특급 비밀이다). 그렇게 첫사랑은 가슴에 묻고 평탄한 삶을 살았다.
그런데 몇 해 전 ‘싸이월드’라는 미니홈피가 유행처럼 퍼졌을 때 필자도 ‘싸이월드’에 사진과 글을 올리며 대학 동창들과 소통하며 지냈다. 그때 이름과 나이 정도를 입력하면 친구를 찾을 수 있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어느 날 반신반의하며 첫사랑 이름을 입력해보았다. 순간 너무 놀라 필자의 눈을 의심할 뻔했다. 나이 들어 중년 아저씨가 된 그 사람의 사진을 보게 된 것이다. 비슬산이라는 설명이 달려 있는 사진 속 남자는 웃고 있었는데 필자가 기억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필자 모습이 변한 것도 잊은 채 충격을 받고 말았다. 그렇게 샤프하고 매력적이었던 사람이, 헤어지면 죽겠다는 결심까지 하게 만들었던 사람이 이제 저런 아저씨가 되어버렸다니 믿을 수 없었다. 괜히 찾아봤다는 후회도 살짝 들었다.
서로 각자 살아온 세월이 있으니 그냥 그 사람도 살아 있었구나 하며 마무리를 했다면 좋았으련만 필자는 사진 밑에 “비슬산이 어딘가요? 멋지네요”라고 다소 의미심장한 댓글을 남겼다.
다음 날 다시 홈피를 찾아가 보니 필자가 단 댓글 밑에 “과거보다는 현재의 삶이 중요합니다”라는 답글이 달려 있었다. 순간 얼굴이 확 달아오르며 아는 척을 왜 했을까 민망하고 후회스러웠다. 그냥 추억이 떠올라 한마디 써본 건데 그렇게까지 냉정한 반응을 보이다니…. 그 후 다시는 그 사람의 홈피를 찾지 않았다.
보고 싶었다는 반응을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좀 실망스럽긴 했다. 지난 일은 그저 가슴에 묻어두고 아름다웠다고 추억만 하는 게 나았겠다는 생각을 절실하게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현재의 삶이 중요하다는 첫사랑의 한마디는 참 멋대가리 없는 말이었다.
우리 세대는 화려한 영화의 시대였다. 종로, 을지로, 충무로는 물론이고 프랑스 영화를 보기 위해 반은 겉멋으로 프랑스문화관을 드나들던 추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중에 지금도 필자의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영화 두 편이 있다. 하나는 알랭 들롱이 주연한 이고, 또 한 편은 라이언 오닐과 알리 맥그로우가 함께 나온 다.
풋풋했던 젊은 시절의 알랭 들롱은 바다를 닮은 푸른 눈동자가 매우 인상적이었다. 선과 악의 분위기가 교차하는 미묘한 눈빛으로 푸른 바다 위 하얀 요트에서 작열하는 태양을 올려다보는 장면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는 뭐니 뭐니 해도 역시 눈이 오는 하버드대학 교정에서 아이들처럼 눈싸움을 하며 즐거워하던 장면과 배경 음악을 잊을 수 없다.
는 훗날 훈남 배우 맷 데이먼을 내세워 라는 제목으로 리메이크됐지만, 가슴에 새겨진 알랭 들롱의 강렬한 눈빛을 이길 수는 없었다. 얼마 전 의 실재 인물의 거짓이 드러났다. 알리 맥그로우가 연기한 그녀는 래드클리프 여대를 나온 적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는 필자 마음속에서 여전히 아름다운 영화로 남아 있다.
첫사랑은 그런 것이다. 만해 한용운 시인은 ‘님의 침묵’에서 마음에 각인되어 잊을 수 없는 첫사랑의 기억을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이라고 읊었다. 서정주 시인도 ‘국화 옆에서’라는 시를 통해 국화를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라고 노래했다. 첫사랑은 알랭 들롱의 눈빛처럼 강렬하고, 의 눈싸움처럼 다정하고, 국화꽃처럼 향기롭게 필자 마음속에 남아 있다.
첫사랑은 마치 우두 자국과 같다. 어린 시절 우리는 몇 가지 예방주사를 맞곤 했다. 지금은 그럴 리 없지만, 의료기술이 낙후했던 시절에는 우두 주사가 제일 말썽이었다. 그래서 대부분 어깨에 희미한 우두 자국을 낙인처럼 지니게 되었다. 첫사랑도 우리 마음에 흔적을 남긴다. 어떤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면 그것은 첫사랑이 아니다.
첫사랑은 대개 일방적이다. 그래서 첫사랑은 늘 안타깝고 수줍어서 다가갈 수 없는 그 어디쯤에 있다. 물론 쌍방통행의 무르익은 사랑이 어쩔 수 없는 저항에 부딪혀 이루지 못한 첫사랑도 있다. 첫사랑은 신이 인간에게 번성의 필요충분조건인 사랑의 마법을 알게 하려고 놓아준 사랑의 예방주사다. 예방주사를 맞으면 병에 걸리지 않듯이 첫사랑의 열병이 진짜 사랑으로 번지면 그것은 이미 첫사랑이 아니다.
어린 시절에는 거의 모르고 지나가버린 정유년을 60년 만에 다시 맞았다. 김용택 시인은 ‘첫사랑’이라는 시를 통해 “인생은, 사랑은 시든 게 아니라네/ 다만 우린 놀라움을 잊었네/ 우린 사랑을 잃었을 뿐이네”라고 읊었다.
정월 아침 새해라는 새하얀 눈길에 첫 발자국을 찍으며 마음속에서 희미해진 첫사랑의 우두 자국을 찾아보자. 풋풋했던 시절 수줍은 첫사랑의 설렘이 사그라져가는 우리 삶의 열정을 되살려줄지 누가 알겠는가.
2017년 정유년 열 번째 아침이 밝았다.
우와~
오늘따라 유난히 쨍한 햇빛이 가슴에 와 박힌다. 하도 눈이 부셔 윙크하듯 눈이 저절로 찡긋해지고, 촬영할 때 라이트를 가득 받은 사람처럼 온몸이 자연에 발가벗겨진다.
거실과 안방의 먼지들도 모든 죄를 천지에 드러내듯 하나하나가 작은 차돌만큼 크게 보인다.
자연스럽게 고개가 숙여지고 용서를 바라는 마음처럼 겸손해지는 날이다.
날 선 추위는 곁에서 눈 부릅뜨고 지켜보는 듯하다.
이런 대단한 햇빛을 본 게 과연 언제였던가.
그날도 그랬지.
친구 소개로 예쁜 여학생 만나 학교에서 늘 붙어 다니고 서로의 강의시간표도 달달 외웠지. 강의가 비는 시간이면 친구들의 볼멘소리 뒤로 하고 둘만 아는 장소로 뛰어가 나중에 오는 사람이 나타날 골목길만 뚫어지게 쳐다보며 기다렸지. 개나리와 진달래 필 때는 고궁을 거닐었지.
여름방학이면 일을 해야 하는 필자 때문에 뚝섬 모래사장에서 만나 흐르는 강물을 보는 게 고작이었지만 마냥 즐겁기만 했지. 차비까지 탈탈 털어 국화빵 사 먹으며 한 없이 걷고 또 걷는데도 발이 안 아팠지.
우리가 만날 때는 왜 그리도 비가 자주 내렸을까. 변변한 우산도 구하기 힘들었던 시절, 비닐우산은 우리를 급속도로 밀착시켜 비 오는 날씨를 은근히 고마워했지. 그 시절엔 눈도 왜 그리 많이 왔는지 함박눈 내리는 날이면 우산을 털어가며 걸었고 넘어질까 걱정되어 더 밀착하고 걸었지.
그렇게 봄에서 겨울까지 일 년을 꿈같이 보냈지.
다음 해, 봄도 오기 전 영장이 나와 입대를 하고 훈련받는 동안 우리 소대에서 가장 많은 편지를 받았지. 자대배치 받은 부대에 면회도 자주 오고 즐거운 기대감에 병영생활이 희망찼었지.
그런데 대학을 졸업하고 은행에 취직한 다음 바쁘다며 편지와 면회가 뜸해지더니 상병 계급장 달던 날 오전에 절교 편지를 받았지. 그날 본 하늘이 오늘 본 하늘과 같았지.
편지를 보내고 답장을 기다렸지만, 10여 통의 편지를 보내도 끝내 소식은 오지 않았지. 소개해준 친구를 통해 같은 은행원 상사와 만난다는 소식을 들었지. 제대하고 만났을 때 결혼을 약속했다는 말을 듣고 축하해주며 끝냈지.
그동안 잊고 살았는데 오늘 눈부신 햇빛이 그 시절을 끄집어낸다. 첫사랑은 다시 할 수 없지만 우리가 만났던 장소들이 하나하나 모두 생각나는 걸 보니 ‘첫’이라는 단어만큼 여전히 두근거리고 아름다운 추억임이 분명하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남녀 학교가 구분되어 있어 아예 여자를 몰랐다. 기회가 생겨도 당시 관례대로 머리를 빡빡 깎아놓으면 삼손처럼 기가 죽는다. 또 여학생들이 남학생들보다 정신연령이 높아 상대가 되지 않았다.
대학교 1학년 때 사진 서클 활동을 했다. 예술사진을 배우는 서클이었다. 어느 날, 가정학과 2학년 여자 선배 세 명이 새로 입회를 했다. 그중 한 명이 필자를 캠퍼스 커플로 찍었다며 당장 사귀자고 했다. 긴 생머리에 목소리가 매력적인 여학생이었다. 그 여학생은 가정학과 2학년 과대표였다. 필자는 그녀가 선배라서 약간 주눅이 들었던 모양이다. 그러다 보니 필자 쪽에서 적극적으로 주도권을 쥐지 못했다. 더욱이 캠퍼스 커플은 금방 소문이 나기 때문에 다른 여학생과는 사귈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럭저럭 데이트라는 것을 했지만, 서클 활동에 매진하다 보니 늘 단체로 만나 호프집에서 맥주나 마시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팔짱을 끼기는 했으나 겨울이면 두터운 모피코트를 입고 다녀 실감이 안 났다. 지금 같으면 스킨십은 당연한 것이었으나 당시의 분위기는 여자를 지켜주는 것이 남자의 매너였다. 70년대의 한국영화는 , 같은, 남자에게 버림받은 여자가 결국 불행에 빠지거나 죽는 내용이 많았다. 결혼 전까지는 사랑하는 여자의 순결을 지켜주는 것이 당연한 시대였다.
물론 캠퍼스 커플이라 해서 난공불락은 아니다. 같은 사진 서클 동기가 그녀를 마음에 두고 공략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는 마른 체구에 두꺼운 안경을 쓰고 다녔는데 처음에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며 무시했다. 그러나 계속 그녀의 동선에 맞춰 우연히 마주친 것처럼 행동하고 다닌다고 해서 필자의 비위를 건드렸다. 그녀에게도 말했으나 별로 의식하지 않는다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러나 필자는 그 연적을 볼 때마다 부아가 치밀었다.
한번은 의혈탑 아래서 만나 따졌다. 우리가 캠퍼스 커플이라는 것을 전교 학생들이 다 알고 있는데 어떻게 남의 여자를 탐할 수 있느냐며 화를 냈다. 그랬더니 “너는 애인으로 만나고 나는 누나로 사귀는 것이므로 상관이 없다”고 말했다. 필자가 욕설을 퍼부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가 주먹을 휘두르며 내게 달려들었다. 필자는 달려드는 그를 냅다 잔디밭에 내동댕이쳤다. 옆에 있던 친구도 말리려 끼어들었다가 동시에 나가떨어졌다. 그런데 그 장면을 지나던 학생과 주임이 보고 말았다. 당연히 주임에게 끌려갔는데 필자는 멀쩡하고 친구 두 명은 옷이며 얼굴이 엉망이라 필자를 가해자 취급을 했다. 자초지종을 설명하니 화해하고 말 일이라며 악수를 하라고 했다. 억지로 악수를 했으나 분이 풀리지 않았다.
그 길로 그녀에게 달려가 우유부단함에 이런 불상사가 났다며 원망했다. 그러자 그녀는 이 참에 관계를 정리하자고 했다. 어차피 나이 때문에라도 이루지 못할 사랑이라는 것이었다. 집에서는 빨리 시집가라고 성화인데 필자는 군대도 갔다 와야 하고 갔다 오면 졸업도 그만큼 늦어지고 취업도 해야 하는데 그때까지 기다릴 수 없다는 설명이었다.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군대 3년에 대학교 졸업 때까지 그녀가 버틸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군대를 빨리 갔다 오는 방법도 알아보고 졸업 전에 결혼하는 것도 생각해봤으나 현실의 벽은 너무 무거웠다. 우리는 곧 헤어졌다. 헤어지는 마당에 그녀가 한마디 했는데 그 말이 뇌리에 박혔다. “너는 키스도 할 줄 모르니?” 그러고 보니 애인이라면서 키스 한번 시도하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첫사랑이었는데 우물쭈물하다가 그렇게 끝나버리고 말았다. 필자는 홧김에 징집원을 내고 곧바로 군에 입대했다.
1957년생 장은숙은 1977년에 데뷔해 1995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자기애로 똘똘 뭉친 장은숙은 고독한 생활을 즐겼다. 고독했기에 행복했고 그래서 늙지 않는 것일까. 무엇보다 그녀의 가수 인생은 파란만장했지만 고독했기에 노래에 집중할 수 있었고 성공과 행복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는 것. 시집 한 번 안 간 그녀는 요즘도 혼자 밥 먹고 혼자 술 마시는 것이 편하고 재밌단다. 올해로 60세인 장은숙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최강 동안을 자랑하며 ‘함께 춤을 추어요’와 ‘당신의 첫사랑’ 등 여전히 매력적인 허스키 보이스로 노래를 부르고 있다.
몇 년 전 (KBS 1TV 프로그램)을 통해 한국 무대에 오랜만에 나타난 장은숙을 보고 깜짝 놀랐다. 내가 젊었을 때 보았던 장은숙의 모습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오히려 세련되어졌고 농후한 맛까지 더해져 젊었을 때보다 훨씬 더 섹시해져서 나타난 것이다. 그녀의 나이가 60인데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최강 동안(童顔)이었다. 그때 TV를 보면서 장은숙의 미모와 목소리에 푹 빠져 팬이 되어버렸다. 그 후 유튜브로 그녀의 노래를 듣고 또 들었다. 그런데 지금 그녀와 마주앉아 인터뷰를 하고 있으니 한량 이봉규는 정말 행운아다.
인터뷰를 마친 후 내가 내린 그녀의 최강 동안 비법은 고독이다. 그녀는 결혼한 적이 한 번도 없을 뿐만 아니라 제대로 된 연애도 못해봤다. “남들은 결혼을 세 번씩도 하는데 난 이게 뭐냐?”고 페인트 모션(feint motion)까지 쓴다. 그런 엉성한 페인트 모션에 넘어갈 한량 이봉규가 아닌 걸 금방 눈치 챘는지, “혼자 밥 먹고 혼자 술 마시는 것이 편하고 재밌다”고 자기 진단을 내린다. 죽도록 사랑하는 사람과 살지 않는 바에야 혼자 사는 것이 편할 수 있다. 하기 싫은 것을 파트너에 대한 배려 차원에서 억지로 하다 보면 스트레스를 받기 마련. 그러다 보면 툭하면 싸우게 되고 스트레스는 가중된다. 그런 일상이 켜켜이 쌓인 세월의 무게에 짓눌려버리면 어느새 늙어버리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다. 그런데 장은숙은 철저하게 자기가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살아왔다.
“싫은 사람은 아무리 비즈니스로 연결되어 있어도 만나지 않는다”는 고집불통적인 자기애(自己愛)가 최강 동안의 비법이 된 것이다. 고독하기에 자기만 사랑했고 그러다 보니 고독을 즐기는 선순환이 오늘의 장은숙을 만들었다. 물론 나름대로 젊어지려고 발버둥치는 노력도 병행했다. 15년째 경락 마사지를 받고 있고 운동은 늘 일상이다. 이런 노력도 결국 자기애의 일환이다. “70대가 되어도 최강 동안 소리를 듣고 싶다”는 그녀의 욕심은 무죄다.
“더 이상 예쁘다는 소리를 들을 수 없을 때는 다 팽개치고 화장도 안 하고 산에 파묻혀 전원생활을 즐기고 싶다”고 말하는 걸 보라. 얼마나 자기애가 강한지 알 수 있다. 아무리 고독을 즐기기로서니 나이 60인데 여태껏 제대로 된 연애를 못 해봤다는 그녀의 말이 믿기 어려워 파고들었다. “가끔 섹스하고 싶은 충동이 없냐?”는 이봉규의 도발에 그녀는 “솔직히 운동하고 일하는데 열정을 쏟다 보면 피곤해서 그런 생각이 나질 않는다”고 답변한다. 그러나 오히려 섹스 생각이 나는 게 두려워 일부러 운동과 일로 몸을 피곤하게 만드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운동과 일은 그녀가 너무나도 좋아하는 에너지 발산법이기에 일석이조(一石二鳥)의 효과가 나는 것이다.
그녀는 20대부터 요즘 유행하는 ‘혼술(혼자 마시는 술)’을 좋아했다. 지금도 집에서 혼술을 즐긴다. 어떨 때는 혼자 단골 바(bar)에서 새벽 두시까지 마신다. 언제부터인가 술 마시는 모임도 피곤해서 차단하고 혼자 마신다. “모임에 나가 말 상대하기도 피곤해서 싫고 차라리 편하게 집에서 마시는 것이 훨씬 즐겁다”는 그녀의 진단을 백퍼센트 이해한다.
한량인 나도 혼자 집에서 TV 보면서 막걸리를 마시곤 했다(지금은 띠동갑 마누라와 신혼생활에 푹 빠져 집에서 음악 틀어놓고 제대로 막걸리를 즐기고 있지만). 고독을 즐기고 혼자 술 마시는 것을 밥 먹듯 하는 그녀도 한 달에 한두 번은 대화가 통하는 멋진 남자와 한잔하고 싶을 때가 있다고 털어놓는다. 특히 공연이 끝나고 혼자 집에서 술 마시면 뭔가 허전함을 느낀단다.
오늘은 나와 ‘그루브’라는 라이브 카페에서 진토닉을 마시고 있다. 이미 1차로 주꾸미에 막걸리를 마신 후라서 취기가 슬슬 오르는지 “혼자 술 마시면 슬플 때도 있다”고 고백한다. “언젠가 남산에서 혼자 술 먹고 걸어서 집에 가는데 눈물이 났다”고 회상하는 그녀의 눈가가 촉촉하다. 그녀도 사람인지라 가끔은 고독에 지칠 때도 있는 것이 당연하다. 나의 피아노 반주에 장은숙이 노래를 뽑아댔다. 김정호의 ‘이름 모를 소녀’가 다시 태어난 느낌이다. 걸쭉한 허스키 보이스에 서구적인 마스크가 김정호의 노래를 지워버린다. 내친김에 앙코르, 삼코르, 사코르를 막 받는다. 토니베넷의 ‘I Left My Heart In San Francisco’, 카펜터스의 ‘This Masquerade’를 재즈풍으로 너무나도 멋지게 불러젖힌다.
그녀가 아직 독신으로 살고 있는 것은 몇 번의 찬스를 놓쳤던 이유도 작용했다. 어린 시절부터 남동생과 친척 동생까지 키우고 뒷바라지하느라 젊었을 때는 마음의 여유조차 누릴 수 없는 시간들을 보냈다.
‘함께 춤을 추어요’와 ‘당신의 첫사랑’ 등 잇따른 히트로 스타가 되었을 때는 바빠서 정신이 없었고, 37세 때부터 시작된 일본 생활은 엄격하고 혹독했기에 연애가 여의치 않았다. 매일 6시 반에 기상해서 학교에서 일본어 배우고 노래와 춤까지 연습하느라 마치 군 생활을 하는 것 같았다고 회상한다. 그녀가 결정적으로 찬스를 놓친 것은 일본 가기 전에 잠깐 사귀던 남자와 헤어지면서부터다. 마음의 상처를 받았기에 또 다른 사랑을 찾기가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혹독한 일본에서의 연습생 시절, 한국에 있던 그 남자는 장은숙과 연락도 잘 안 되고 이상한 헛소문(“아쿠자에 잡혀갔다”)까지 돌자 그녀를 잊고 다른 여자와 결혼했다. 그러나 마음의 상처를 달랠 여유조차 없을 정도로 바빴다. 그 뒤 몇 번의 기회가 더 있었지만 음양의 조화가 안 맞아 연애를 못했다.
“내가 어떤 남자를 좋아하면 그가 도망가고, 나에게 달려드는 남자는 내가 싫고, 남자에게 애교도 부릴 줄 모르는 성격이라 연애가 잘 성사되지 않았다”고 애써 핑계를 댄다. 이토록 매력 있는 여성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연애를 즐길 수 있었겠지만 자기애로 똘똘 뭉친 장은숙은 고독한 생활을 즐겼다. 고독했기에 행복했고 그래서 늙지 않는 것이다. 그녀의 가수 인생은 파란만장했지만 무엇보다 고독했기에 오히려 노래에 집중할 수 있었고 성공과 행복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
그녀는 1977년 동양방송(TBC)에서 주최한 대한민국 최초의 오디션프로그램인
에서 연말까지 승승장구한 끝에 우수상을 받고 데뷔했다. 이때 처음 받은 참가번호가 행운의 숫자인 ‘7번’이었는데 월말 결선에서도 7번을 받았고, 연말 결선에서도 7번을 받았다. 하늘이 그녀를 미리 점지했는지도 모른다.
어릴 때 국악을 배운 그녀는 가끔 절에 들어가서 연습을 하곤 했다. 연말에 우수상을 타고 나서도 득음을 위해 화곡동에 있는 절에 들어가서 2년간 목청을 가다듬었다. 그래서인지 끈적끈적한 허스키 보이스는 어느 누구도 감히 흉내 낼 수 없을 정도로 독보적이다. 1981년에는 코미디언 이주일과 이라는 영화의 주인공도 했다. 톱스타로서 승승장구하던 장은숙에게 해외 진출의 기회가 온 것은 1995년. 그녀는 일본 토라스레코드 사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고 ‘장수(Chang Suu)’라는 예명으로 일본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계은숙이 일본에서 한참 활동한 후여서 같은 이름의 은숙이라는 본명 대신 일본 기획사에서 지어준 ‘장수’라는 예명을 사용했다(2009년부터는 본명 장은숙으로 다시 바꿨다). 그녀는 데뷔 첫해 일본 유선대상에서 신인상을 받았고, 2000년 발표한 ‘운명의 주인공’으로 방송 및 각종 차트에서 12주 이상 1위를 차지하며 총 25만 장의, 당시로서는 상당한 앨범 판매 기록도 세웠다.
지금까지 그녀가 발표한 음반은 21장인데 이 중 14곡이나 유선방송(리퀘스트 차트) 1위에 올랐다. 지금은 2003년에 설립한 연예기획사 ‘오피스 장수’의 대표로서 후배 양성도 하고 있다. 요즘도 한국과 일본을 오가면서 바쁘게 생활하고 있지만 앞으로는 한국에서의 활동 비중을 점차 늘려나갈 예정이다.
나는 그녀의 노래 중 ‘당신의 첫사랑’을 가장 좋아한다. 예전에는 이 노래 가사의 의미도 제대로 모르고 불렀는데 지금은 감정이 달라 다른 분위기로 노래한다고 한다. 이 노래를 부를 때면 스무살 시절, 다섯 살 연상의 연대생 오빠와 신촌에서 막걸리 마시던 추억이 떠오른단다. 최강 동안이니만큼 이제는 다섯 살 이상 연하의 멋진 남자와 첫사랑 같은 싱그러운 사랑에 빠지면 좋겠다. 그런 날이 빨리 와서 ‘고독한 최강 동안’에서 ‘고독한’이라는 형용사를 빼고 다른 형용사가 붙기를 기대해본다.
토요일이기도 하고 날씨도 좀 어두컴컴한 것 같아 늦게까지 침대에 있었다.
그때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되게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려대기 시작했고 받아 보니 친구의 명랑한 목소리가 잠을 확 달아나게 했다. “눈 온다!”
친구는 벌써 다른 친구와 일산 어디의 멋진 카페에서 창밖의 눈을 감상하고 있다고 한다.
필자가 잠자리에서 게으름 피우는 동안 고마운 친구는 벌써 외출해 맛있는 커피를 마시면서 첫눈을 즐기며 필자에게 올 첫눈 소식을 전해주었다.
벌떡 일어나 거실 창문 밖을 내다보니 새하얀 눈이 펄펄 내리고 있다. 올겨울 첫눈이 아주 풍성하게 쏟아지는 중이다.
물론 뉴스에서 북쪽 지방이랑 산간에선 눈이 내렸다고 이미 보도되었었지만, 필자 눈으로 이렇게 가깝게 폭설처럼 쏟아지는 깨끗하고 예쁜 눈을 보는 건 올해로선 처음이어서 감동이다.
북한산 국립공원 근처인 우리 집은 서울 변두리 산 밑이라서 눈이 많이 내리면 보이는 곳곳이 멋진 동양화의 그림같이 변한다.
산등성이를 휘두르며 마른 겨울나무와 계곡을 채우는 흰 눈을 감상하는 건 너무나 장관이어서 그 장면을 볼 수 있는 게 필자의 행운이라고까지 생각이 든다.
하얀 눈이 너무나 깨끗해 보이고, 시원한 얼음 가루인 것 같아서 어릴 땐 마당 장독 위에 쌓인 눈을 집어 먹기도 했는데 요즘은 그러고 싶은 마음이 들어도 선뜻 그러지 못하는 현실이 좀 안타깝다.
환경 공해 때문에 언제부터인지 눈은 맛보면 안 되는 거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첫눈-하면 가장 먼저 연상되는 건 첫사랑...아닐까?
지금은 아무리 생각해도 첫사랑이 언제였는지 누구였는지도 가물가물하기만 해 이렇게 그만 메말라버린 감정이 아쉽기도 하지만 펑펑 내리는 눈을 바라보니 그래도 소녀 같은 감상이 느껴져서 수줍은 미소가 지어진다.
첫사랑이 누구였는지 생각나지는 않아도 팔팔했던 젊은 날 남자친구와 흰 눈을 맞으며 무작정 걸었던 예쁜 추억은 있다.
그때 그 녀석이 누구였는지 도무지 얼굴이 떠오르진 않지만 송추 쯤이었던가 어느 넓은 눈밭에서 러브스토리 주인공 따라 한다며 털썩 눕기도 해 보았고 나무 밑의 눈을 한 움큼 입에 넣어보기도 했다.
그땐 모든 게 즐거워서 환경공해 때문에 눈을 먹으면 안 된다는 생각 같은 건 하지 않았다.
젊었을 땐 그렇게 모든 게 아름답고 즐겁기만 했는데 시니어가 된 지금은 다른 생각도 하게 한다.
이렇게 눈이 많이 내리면 한때 보기는 좋지만, 눈이 녹으면서 길은 질척해질 테고 교통도 막힐지 모른다. 그리고 날이 더 추워져 빙판이라도 되면 엉금엉금 조심해야 할 것이 걱정스럽다는 낭만적이지 못한 염려가 되니 서글프다.
그래도 펄펄 내리는 흰 눈은 기분 좋게 해준다.
이런저런 생각을 떨치고 아무리 날이 춥고 썰렁해도 옷 단단히 챙겨 입고 눈을 밟아보러 나가야겠다.
함인희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
‘욘사마 열풍’이 한창이던 시절, 시청 앞 광장과 남대문시장 그리고 압구정 로데오거리를 걷다 보면 배낭을 메고 지하철 지도를 손에 든 채 어설픈 한국어로 길을 묻는 중년의 일본 여성들을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었다. 아이돌에 열광하는 10대도 아니고 40대를 훌쩍 넘은 중년 여성들이 왜 욘사마를 찾아 한국까지 왔을까 무척이나 궁금했는데, 평소 친분이 있던 일본인 교수 덕분에 그 수수께끼가 풀렸다.
일본의 중년 여성들이야말로 한때는 입시지옥 아래 자식교육에 올인하기도 했고, 이젠 거품으로 끝나버린 부동산 버블의 주역을 담당하기도 했다 한다. 그런데 일본 경제가 잃어버린 10년을 지나 저속 성장과 끝 모를 불황의 늪에 빠지자 ‘자식도 아니고 돈(부동산으로 대변되는)도 아니더라’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바로 이들 중년 여성이 ‘욘사마 열풍’을 주도하면서 의 자취를 찾아 한국 땅을 밟는 것이라는데, 정작 이들이 찾아 나선 건 욘사마가 아니라 를 보며 첫사랑의 아련한 추억에 가슴 설레어하는 자기 자신이었다는 것이다. 자식 뒷바라지 하랴, 빠듯한 남편 월급으로 살림하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잃어버렸던 자신을 뒤늦게나마 찾아 나섰다는 것이다. 일본 중년 여성들의 절실함이 왠지 남 이야기 같지 않다.
언젠가 고령화를 다룬 책을 읽다가 멋진 문장을 만나게 되었다. “부부 나이를 합해 100세가 되면 라이프스타일 이주(移住)를 준비하라. 결코 빠르지 않다. 나이 들수록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호기심도 떨어지고 생각한 바를 행동으로 옮기는 실행력도 감퇴되게 마련이다. 그러니 50대가 시작되면 인생 이모작을 시작해보라”는 내용이었다.
책 쓴 이의 주장에 깊이 공감하던 차에 정말 우연치 않게 주말이면 초보 농사꾼으로 변신할 수 있는 기회가 내게 찾아왔다. 오래전 세종시 인근에 땅을 사두셨던 이모님께서 은퇴 후 이모부와 사별하고 귀농을 결심하시면서 ‘가족농장’을 시작한 덕분이었다. 그때 내 나이가 쉰둘이었는데, 어느 새 햇수론 7년이 지났다.
서울에서 나고 자라 농사라곤 대학교 1, 2학년 때 소양강 근처의 부귀리란 마을로 농촌 봉사활동 가서 콩밭의 풀 뽑았던 경험이 전부였던 내가, 겁도 없이 농사에 살짝 한 발을 걸쳐보았는데, 의외로 농사일이 적성(?)에 맞는 것이 아닌가.
무엇보다 살아 있는 생명을 다루는 데서 오는 기쁨이 남다른 것 같다. 농사 첫해엔 소나무 묘목을 심었는데 “나무는 사람 발자국 소리를 들으면서 크는 것”이라고 했던 마을 이장님 말씀이 지금도 귀에 들리는 듯하다. 말 못하는 나무도 사람의 손길을 이토록 탄다는데, 하물며 사람 하나를 키우는 데는 얼마나 깊은 사랑과 남다른 정성이 필요한 것인지….
소나무 키우기의 묘미는 가지치기라는 주변 이야기가 아니어도, 해마다 쳐내야 하는 잔가지와 굵은 가지들이 초보자의 눈에도 선명하게 들어온다. 전문가들이라면 수년 후의 나무 모양까지 정확히 머릿속에 그리며 과감히 가지치기를 하겠지만, 초보자 눈엔 어느 가지를 쳐내야 좋을지 판단이 서질 않아 망설일 때가 잦다. 우리네 삶도 끊임없이 가지치기를 해야 크고 굵은 가지들이 시원시원하게 뻗어나갈 수 있으련만, 과한 욕심에 필요 없는 가지를 늘어뜨리고 이것도 저것도 포기 못 한 채 초라한 삶을 지나가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쓰잘데없는 상념도 잠시, 소나무 밭에 앉아 가지치기를 하고 있노라면, 잡념도 없어지고 머리도 맑아지는 것이 신선놀음이 따로 없다.
농사 두 번째 해엔 2년생 블루베리를 심었다. 어릴 때는 생김새가 비슷해 품종을 구분하기 어려웠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자신만의 개성을 드러내는 모습이 신기하기만 하다. 조생종 패트리어트는 열매가 다닥다닥 붙어 있어 엉덩이 부분이 익었는지 판별이 어렵고 열매의 신맛이 강한 대신, 가을 단풍은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운 빨강 빛으로 물이 든다. 중만생종인 토로는 넓적한 이파리에 가지 또한 자유분방하게 뻗어나가는데 열매의 끝 맛에 달달함이 오래도록 남는 것이 일품이다. 만생종 넬슨은 유선형의 날렵한 잎에 큰 키를 자랑하는데 시큰한 맛과 달콤한 맛의 조화가 매력적이고 탱탱한 식감도 훌륭하다.
예전에 대학 은사님께서는 “인생은 혼자 뛰는 마라톤이다. 비교급으로 살지 말고 절대급으로 살아라’라고 말씀해주셨는데, 사노라면 항상 나보다 잘난 사람들 때문에 주눅 들고 상대적 박탈감에 좌절하면서 스스로를 초라하게 몰아가기도 한다. 꽃이든 열매이든 자연 속에선 아무도 서로를 비교하지 않는데 말이다.
동네 어르신 한 분이 “어쩌다 농사가 잘되면 3년을 고생하고 한 해 농사를 망치면 3년이 편안하다’라고 한마디 툭 던지고 가신다. 왜 농사를 망쳤을까. 두루두루 이유를 찾다 보면 배수도 챙기고 거름도 제때 주고 풀 관리도 열심히 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연한 행운보다는 노력이 더욱 값진 것임을 새삼 깨닫게 해주는 주옥같은 말씀이다.
얼마 전 카톡방에 유튜브 동영상이 전달되었다. 열어보니 미국의 대학 강의실인 듯했는데 교수가 학생들과 함께 흥미로운 실험을 진행하고 있었다. 유리병을 채우는 실험이었는데 먼저 조약돌로 유리병을 가득 채우도록 했다. 다음은 작은 자갈을 가득 넣도록 했다. 그다음엔 모래를 살살 뿌려 유리병을 채우도록 했다. 마지막엔 물을 가득 붓도록 했다. 실험을 끝내며 교수님 왈, “여러분, 만일 순서를 바꾸어 물부터 부으면 유리병 속에 모래와 자갈과 조약돌을 넣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네 인생길에서 조약돌과 자갈 그리고 모래와 물이 무엇일지 새삼 생각해보게 된다. 조약돌이야말로 평소엔 잊고 사는 삶의 의미, 삶 속에서 이루고자 했던 꿈,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가장 소중한 가치 등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