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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섯 번 째 ‘따뜻한 콘서트’
- 이투데이 신춘음악회 ‘2018 따뜻한 콘서트’가 3월 9일 여의도 KBS홀에서 열렸다. 공연은 7시 30분, 전 MBC 아나운서 서현진의 진행으로 시작했는데 객석은 이미 꽉 차 있었다. 순서지에는 K'ARTS 발레단, 김남윤과 바이올린 오케스트라, 프르테 디 콰트로와 발라드 가수 김범수가 아주 간단하게 소개되어 있었다. 첫 공연은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진이 이끄는 K'ARTS의 발레로 시작되었다. 발레리나 민세연과 발레리노 이은수는 자그마한 체구로 대단한 기교는 느껴지지 않지만, 감동적인 무대를 선보였다. 민세연은 깃털 같은 발을 내디디며 몸짓은 날리는 꽃잎 같았다. 이은수의 깔끔한 동작과 어우러져 경쾌한 봄을 알리러 온 듯, 눈을 떼기 힘들었다. 물의 요정처럼 차고 신선했다. 이어서 발레리나 박선미와 발레리노 류성우의 무대가 있었다. ‘바람의 신’과 ‘공기의 요정’은 격동적이고 활기차 무대가 좁다는 느낌을 줄 정도였다. 진행자 서현진은 이투데이 김상우 부회장을 무대로 초대해서 신춘 음악회의 취지를 질문했다. 김부회장은 “이투데이가 사옥을 마련하면서부터 시작했는데 이번이 6회차가 되었다. 이투데이가 경제 신문의 사명을 다하고 나라 경제에 도움이 되도록 기여하여 국민이 부자 되게 하겠다”고 말했다. 다음 무대는 한국음악예술종합학교와 영재교육원의 초등학생부터 대학생으로 구성된 세계 유일의 쇼스타비치 바이올린 오케스트라였는데 대중에게 익숙한 OST작품과 정통클래식 등을 연주했다. ‘에델바이스’, ‘미션임파셔블’이 나오자 관객들은 반가운 듯 손뼉을 치기도 했다. 사실‘ 클래식은 지루할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일시에 날리는 신나는 무대였다. 음악은 면역력과 기억력을 향상하니 참지 말고 좋아하시라고 진행자가 말했다. 관객들의 환호를 받으며 등장한 남성4중창 ‘포르테 디 콰토르’. JTBC의 오디션 프로그램 (팬텀싱어)의 초대 우승팀으로 뮤지컬배우 고훈정, 테너 김현수, 베이스 손태진, 가수 이벼리를 멤버로 구성된 팀이다. ‘포르테 디 콰토르’는 ‘4명의 힘’ 또는‘ 4중창의 파워’를 의미한다. ‘오딧세아’, ‘베틀노래’는 여린 듯, 감성을 어루만지며 관객들을 평화로 이끌었다. 고급스러움과 대중성을 동시에 느끼게 했는데 클래식과 대중음악의 크로스오버로 황홀하도록 설레는 감동을 주었다. 끝으로 무대에 오른 김범수는 관객들의 감성을 그 목소리 하나만으로 그에게 몰입시켜 버렸다. ‘끝사랑’, ‘보고 싶다’로 완전히 김범수에게 중독된 관객은 눈물을 글썽이며 각자의 사랑을 떠올리거나 작은 한숨을 내쉬는 것 같았다. 그런 순간에 김범수는 노련하게도 유머를 잊지 않았다. ‘어리석은 질문에 하는 흔한 답변을 이야기’하며 긴장을 풀어주기도 했다. 앙코르곡과 함께 무대는 막을 내렸다. 모두에게 봄을 배달한 것 같은 무대였다. 투명한 얼음이 눈앞에서 녹고, 물방울이 경쾌하게 떨어지며 시냇물이 졸졸 흐르기 시작하는 소리가 들릴 것만 같다. 매년 이투데이 음악회는 필자를 한 번도 실망하게 한 적이 없었다. 색다른 무대를 위해 노력한 담당자의 결과물일 것이다.
- 2018-03-12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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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춘음악회 '2018 따뜻한 콘서트'를 보고
- 매년 봄이 오는 길목에서 이투데이 신춘음악회 '2018 따뜻한 콘서트'가 서울 여의도 KBS홀에서 열렸다. 올해는 벌써 6회 공연이지만 필자는 운 좋게도 작년 이맘때쯤에 5회 공연을 관람하고 이번에 두 번째로 관람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송파에 살고 있는 필자는 조금 이른 시간에 아내와 함께 집을 나섰다. 퇴근시간의 지하철 9호선은 지옥철이었다. 공연시간보다 다소 이른 저녁 일곱 시 직전에 도착하여 오랜만에 아내와 함께 근처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하고는 KBS로 올라갔다. 입장하기 직전의 KBS홀 로비에는 삼삼오오 지인들끼리 모여서 반가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평소 알고 지내는 동년기자들과 가볍게 인사를 하고 티켓팅 부스에서 티켓 두 장을 받아들고 입장을 했다. 사회를 맡은 서현진 아나운서의 맑고 카랑카랑한 멘트와 함께 막이 올랐다. 'K'ARTS 발레단‘은 국내외 최고 권위의 콩쿠르에서 입상한 무용수들이 대한민국의 발레를 선도하는 발레단이라고 들었다. 2명의 남녀 무용수들이 환상의 호흡을 자랑하며 무대를 휘젓고 있었다. 사실, 발레공연은 필자 일상의 삶속에서 꽤나 거리가 먼 예술이다. 어쩌다가 찾아온 기회나 되어야 관람할 수 있지만, 오늘의 발레리나와 발레리노의 환상적인 공연은 어렴풋 지난 세월 속에서 관람했던 ‘빌리엘리어트’라는 영화를 추억해 내게 했다. 삶의 벼랑 끝인 탄광의 막장에서 아들 빌리의 성공을 위해 죽을힘을 다해 살아가는 광부와 그의 아들이 빌리엘리어트의 이야기다, 엄마를 여의고 치매에 걸린 할머니와 광부인 아버지와 형을 둔 빌리는 우여곡절 끝에 성공하여 영국 왕립발레학교에 입학을 하게 된다. 그리고 멋진 발레리노가 된 빌리가 가족을 초청해서 공연을 펼치는데, 그 멋지게 날아오르는 앤딩 장면이 자꾸만 클로즈업 되어 왔다. 이어지는 무대는 바이올린 오케스트라였다. 바이올린의 대가 김남윤을 중심으로 한예종 졸업생과 재학생, 그리고 초등학교 3학년부터 고등학생까지 어린 예술영재들의 황홀한 바이올린 연주였다. 곡이 끝날때마다 관객 모두가 힘찬 박수로 환호를 했으며, 이들은 전통클래식, 올드팝, 영화음악 OST 등 다양한 분야의 음악을 들려주었다. 바이올린의 간드러지면서도 애달프고 때로는 경쾌한 선률이 리듬을 타고 객석에 울려퍼지는 순간, 칙칙한 겨울은 이미 떠나가고 있었다. 감상하는 내내 답답했던 가슴이 뻥 뚫리는 듯 한 시원함이 묻어나왔다. ‘따뜻한 콘서트’에 딱 어울리는 공연이었다. ‘포르테 디 콰트로’는 JTBC의 오디션 프로그램 ‘팬텀싱어’의 초대 우승팀으로 4인조 멤버로 구성된 팀이다. 시원시원하면서도 우렁우렁 울려 퍼지는 목소리에 매료되어 어깨까지 들썩이면서 감상을 했다. 선이 굵은 목소리에서 나오는 4중창은 무대를 압도하고도 남았다. 마지막 순서로 서현진 아나운서가 비주얼 가수라고 소개한 김범수가 등장했다. 지금까지 정통클래식 공연을 감상했다면 이번에는 섬세한 바이브레이션과 고저음을 오가는 가창력으로, 슬픈 가사와 멜로디를 지닌 김범수의 음악을 감상하게 되었다. “사랑이 날 또 아프게 해요 사랑이 날 또 울게 하네요 ~” 관객중에 어떤 분은 김범수의 ‘하루’를 들으면서 울컥했다고 했다. 공연은 무르익어 마지막을 향해 가고 있었지만, 관객들은 공연자들과 끝까지 호흡하며 객석을 떠나지 못했다. 아직은 모질게 추웠던 금년겨울의 여운이 남아있었지만, ‘따뜻한 콘서트’ 공연을 감상하면서 칙칙한 그 여운조차 밀어내고 있음을 마음으로부터 느껴야 했다. 아내와 함께 뿌듯한 마음으로 돌아오는 전철 안에서 공연에 대한 얘기를 나누었다. 아내는 가장 인상깊은 공연은 ‘바이올린 오케스트라’라고 했으며 두 번째는 ‘포르테 디 콰트로’의 4중창을 꼽았다. 하지만 필자는 공연 모두가 의미있고 가슴속에 깊은 떨림과 여운으로 남았다고 대답했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따분한 일상에서 만나게 된 ‘따뜻한 콘서트’는 잠자던 가지에 물을 올려 봄을 꽃피워 내고 있었다. 또한 아내랑 모처럼 함께 차분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게 되어 더욱 의미가 있었다. ‘따뜻한 콘서트’를 감상하면서 겨울철의 암울했던 찌꺼기들은 훌훌 떠나보내고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찬란한 새봄을 맞이해야겠다.
- 2018-03-12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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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년퇴직 후 한국어 강사로 활약 중인 이상용 씨
- “퇴직 전 교직에 있을 때부터 한국어 강사를 하고 싶었어요.” 현재 다양한 기관에서 한국어 강사로 활동 중인 이상용(李相庸·64) 씨는 평생 초등학교 교단에서 활동해온 교사 출신. 40여 년간을 넘게 학교에서 근무하다 2015년 8월 정년퇴직했다. 원래 영어를 전공한 데다, 학교 내에서 교감과 교장 등 중책을 맡으면서 다양한 다문화가정을 경험했다. 자연스레 그들과 가까워지면서 한국어가 서툰 외국인이나 다문화가족을 대상으로 한 한국어 교육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한다. “퇴직 전부터 온라인 교육과 오프라인 실습에 참여해 한국어교원 자격증 2급을 따놨죠. 아무래도 평생을 학생들 가르치는 일을 해온 터라 유리한 부분이 있었어요.” 퇴직 후 2016년부터는 본격적으로 한국어 강사로 데뷔했다. 법무부에서 시행하는 사회통합프로그램을 통해 영주권을 원하는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한국어를 가르쳤다. 주로 한국에서 활동하는 외국인 근로자, 유학생이 많았다. “지난해 말까지 총 6기 교육에 참여했어요. 평생 만나온 어린 학생들과 달리 나이도 많고 사용하는 모국어도 제각각이었지만 가르치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어요. 다들 절실함도 있었고요. 교육 후에는 시험에서 일정 점수 이상을 받아야 해서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가르치는 학생도, 과목도, 장소도 달랐지만, 스승과 제자라는 관계는 여전했던 모양이다. 근무시간에 쫓기는 외국인 근로자의 수업 참여를 위해 고용주를 전화로 설득하기도 했다. 그렇게 맺게 된 사제관계는 4개월 교육기간으로 끝나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메신저를 통해 한국생활의 어려움에 대해 지도하는 멘토 역할을 하고 있다. 또 최근에는 온라인 교육기업 세이글로벌을 통해 전 세계 학생들을 만나고 있다. 그의 한국어 강습 실력은 학생들 사이에서도 평이 좋아, 강사 중에서도 수강신청이 많은 편에 속한다. 이 씨는 걱정과 달리 온라인 수업에 적응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고 이야기한다. 또 한국어에 대한 지식 전달만큼이나 수업에서 올바른 우리 문화를 전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아무래도 수업을 진행하다 보면 해외에서 인기 있는 다양한 한국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게 돼요. 그들에게는 한국어 강사가 한국어뿐만 아니라 한국이라는 나라를 알게 되는 유일한 창구가 되는 것이죠. 이를 통해서 외국인 학생들은 한국의 문화를 이해하게 되고, 동화됩니다.” 그렇다면 좋은 한국어 강사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베테랑 입장에서, 이제 시작하는 한국어 강사에게 어떤 말을 전하고 싶을까. 이 씨는 한국어로 말하고 싶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조언한다. “한국어 수업이라고 해서 다른 수업과 원리가 다르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말할 기회를 만들어주고, 하고 싶어 하는 말을 많이 하도록 입을 열어주는 것이에요. 일방적으로 끌고 나가지 말고 학생 스스로 말하는 것을 터득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해요. 물론 강사 경력이 짧다면 그 과정이 답답하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그래도 참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는 한국을 알리는 민간외교관으로서의 자긍심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조언한다. “큰돈을 벌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대한민국을 세계에 소개하는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단순한 언어교육 이상의 효과가 있어요. 그만큼 정확한 정보가 전해지도록 노력하고, 서로를 존중하고 인정하려는 마음가짐이 중요합니다.”
- 2018-03-05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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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뱃돈 경제학
- 설날에는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세뱃돈을 주며 한 해의 복을 바라는 덕담을 건넨다. 신권지폐를 구하러 은행에 갔다. 고액권은 수량이 부족하고 소액권은 남아돌았다. 경제발전만큼 세뱃돈도 급속하게 변하고 있다. 손주들을 생각하면서 설날을 준비한다. 아이들이 첫돌이 되어 동전을 돈으로 알기 시작했다. 돈의 가치를 알지 못하여 오백 원 한 개보다 백 원 동전 몇 개를 더 좋아하는 식이었다. 어린이집 다니면서 큰 동전이 작은 동전 몇 개보다 좋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숫자를 세면서 더하기, 빼기 산수를 배우고부터다. 지폐는 가지고 노는 그림종이보다 관심이 없었다. 아이들이 유치원에 다니면서 지폐가 동전보다 크다는 사실을 터득하였다. 세뱃돈 받자마자 ‘감사합니다’ 인사와 함께 제 엄마에게 돈을 맡기는 용돈관리를 시작하였다. 초등학생이 된지 두해가 지난 지금까지 얼마를 맡겼는지는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다. 그렇다고 할아버지 선물 하나 사달라고 하면 펄쩍 뛴다. 장난감 하나 사더라도 자기 돈을 사용하지 않으려고 한다. 초등학생 수준의 본능이다. 자라면서 세뱃돈 경제를 철저히 익힐 것이다. 세월이 지나면서 세뱃돈도 급속하게 올랐다. 지폐였던 오백 원짜리가 동전으로 바뀌면서 봉투에 담아 세뱃돈으로 주기 부적절해진 때부터 최소단위가 천원으로 급상승했다. 올림픽과 아시안게임을 치른 80년대 중반에는 물가가 급등하면서 천 원 한 장으로 할 수 있는 일이 확 줄었다. 별 수 없이 세뱃돈도 오천원대에 진입하고 이어서 만원 단위로 껑충 뛰었다. 하지만 IMF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다시 천 원짜리로 뒷걸음치는 슬픈 역사도 있었다. 2009년 오만 원 권이 등장하면서 세뱃돈에도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였다. 세뱃돈을 언제까지 받아야 할까 방송에서 토론이 한창이다. ‘일단 소득이 없는 학생들은 세뱃돈을 받을 수 있다. 나이 많은 대학원생이라도 소득이 없으면 세뱃돈을 받는다.’ 여기까지가 상식이다. 하지만 대학교 4학년이라도 빨리 ‘취업해 회사에 다니면’ 세뱃돈을 받지 않는다. 근로소득세를 낸다면 더 이상 못 받는다. 당연한 결론이다. 파트타임, 아르바이트생이나 취업 준비생은 세뱃돈 받을 수 있다. 단, 취업했다가 다시 백수가 된 '돌백'은 못 받는다. 세뱃돈 주기도 받기도 복잡한 세상이다. 자녀의 연봉수준에 따라 부모님께 드리는 세뱃돈이 달라진다고 한다. 이때 한 분에게 몰아 드리지 말고 아버지, 어머니께 따로 드려야 한다는 주의도 덧붙여졌다. 어린아이는 세배 안 하고 울기만 해도 얼굴을 봤으니 주라는 권고도 있다. 5촌 이상 넘는 조카나 손자뻘 되는 아이들은 조정이 필요하다. 혹시 이름이나 얼굴을 기억하고 있는 아이라면 조금 더 얹어주면 된다. 그런데 형은 더 주고 동생에게 덜 주는 일을 하여서는 아니 된다. ‘세뱃돈 법전’이라도 있어야 할 지경이다. 까치설날이다. 세뱃돈을 봉투에 넣고 덕담을 썼다. 그 위에 아이들의 얼굴을 올려보았다. 예쁘게 씩씩하게 튼튼하게 웃는 모습이 오버랩 되었다. 오후에 세 손주가 와서 와락 가슴에 안겼다. 설날 아침에는 넙죽 엎드려 세배를 할 터이다. 세뱃돈을 건네고 덕담을 해야겠다. ‘예쁜아, 씩씩아, 튼튼아 풍성한 설날에 큰 복 받고 항상 건강하여라!’
- 2018-02-18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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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뱃돈의 추억
- 8살 손녀가 할머니에게 이렇게 말하더란다. “할머니 이번 설에는 요! 세뱃돈 주지 말고 선물을 사서 주세요.”라고. 손녀의 마음을 헤아려보면 세뱃돈을 받기는 손녀가 받아도 손녀가 갖고 있으면 잃어버린다고 그 돈은 다시 며느리 수중으로 들어가는 메카니즘에 대한 손녀의 반발로 보인다. 손녀에게 “그럼 무슨 선물을 사 줄까?”라고 물었다. 이런 되물음에 미리 준비가 없었는지 손녀는 얼른 대답을 못하더란다. 물론 손녀가 받은 세뱃돈의 몇 배의 돈을 손녀를 위해 며느리가 썼겠지만 손녀의 눈에는 자기가 받은 돈을 직접 되돌려주지 않는데 대한 불만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어른들에게 세배를 하면 세뱃돈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요즘 아이들은 생각한다. 옛날 우리 때는 일가친척의 어른들에게 세배를 해도 세뱃돈이 없었다, 농촌 자체에 돈이라고 씨가 말랐으니 줄 수가 없었다. 아주 귀하게 서울에 사는 친척어른이 할아버지에게 세배를 하러 왔을 때 우리도 친척 어른에게 세배를 올리면 지금 돈의 가치로 천 원 정도를 줄때가 있었다. 당시로서 세뱃돈을 받는 다는 것은 하늘로 날아갈듯이 기쁜 사건이다. 물론 부모님들도 흔한 일이 아니니까 세뱃돈을 낚아채지도 않았다. 그 돈으로 연필도 사고 과자도 사먹었다. 내년에도 꼭 세뱃돈을 주는 친척어른이 다시 오기를 기다렸던 추억이 있다. 자식들을 키울 때는 세뱃돈을 주고는 이놈들이 어떻게 사용하나 눈여겨봤다. 아이들이 세뱃돈을 많이 받으려고 보통 머리를 굴리는 것이 아니다. 어느 삼촌은 얼마를 줄 것이며 외가 집에 가면 누가 세뱃돈을 얼마나 줄 것인지를 주판알 굴리듯 복잡한 계산을 한다. 세뱃돈을 다 모으면 얼마가 될 것이며 그 돈의 사용처까지 생각해 본다. 그런 희망을 알고부터는 결산해서 희망금액에 부족한 금액만큼은 선심성으로 아버지인 필자가 채워 주기도 했다. 부모로서 자식이 희망한 금액에 미달되어 안타까워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애처로웠기 때문이다. 초등학생이나 중, 고등학생의 경우 용돈의 쓰임새가 다르다. 합리적으로 차등해서 세뱃돈을 주었다. 적게 받는 동생이 울상이 되며 부당하다고 따지기도 했다. 그래서 겉으로는 똑 같이 주고 큰놈은 나중에 따로 불러 별도로 봉투를 준적도 있다. 금액의 고하간에 별도로 자신만 배려 받아 특별 대접을 받는 다는 것은 어른이나 아이나 기분 좋은 일이다. 한번은 형님 집에 아이들을 데리고 세배를 갔는데 형님이 우리아이들한테는 만 원짜리 한 장씩을 주면서 당신의 손자에게는 십만 원 정도를 줬다. 자기 손자 더 주는 것을 뭐라고 탓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세배하는 그 자리에서 공개적으로 차별적으로 더 주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생각했지만 형님이 하는 일이라 못 본채 했다. 우리 아이들이 차별대접을 받았다고 입이 한발이나 나왔다. 집에 와서 십 만원을 채워주고 친아버지와 큰아버지이 차이라고 이해 시켰다. 다음해부터 큰집인 형님 댁에 아이들이 가지 않겠다고 토라져있어서 달래느라고 애를 먹었던 추억도 있다. 세뱃돈의 크기도 우리나라 경제력에 따라 많이 커졌다. 천원 오천 원을 세뱃돈으로 주면 단박에 얼굴빛이 변하고 실망한다. 만원이 거의 최하액수의 마지노선이다. 보통 2~3장은 줘야 아이들이 만족해하는 모습을 한다. 세뱃돈 많이 받기 경쟁을 하고 어떤 집 아이는 그 나이또래로서는 만져보기 어려운 거금을 받기도 하는 모양이다. 사실 세배(歲拜)는 어른에게 ‘지난 세월에 감사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어른들에게 지난한해 보살펴주신 존경의 의미를 담아서 직접 찾아가서 큰 절을 올리는 풍습이었다. 가난해도 동네 어른 댁에 소고기 한 근이나 고등어 한손 정도는 선물을 했다. 집에 할아버지가 살아계시면 이곳저곳에서 보내오는 선물꾸러미가 제법 쏠쏠했다. 아이들의 세뱃돈을 말하기보다 이웃의 노인들에게 세배를 어떻게 하고 무슨 덕담을 올릴 것인가를 걱정해야할 나이가 되었다.
- 2018-02-14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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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영원한 로망, 왈츠
- "너무 예쁘셔요." "그렇다고 빠지지는 마세요. 책임 못 져요." 며칠 전 남자 파트너와 홀딩을 하고 왈츠를 추는 중에 나눈 대화다. 물색 모르는 사람들은 필자가 춤을 꽤 잘 추는 것으로 오해할 것이다. 왈츠나 탱고는 가까운 거리에서 몸을 밀착시키고 춤을 춰야 하니 뭔가 ‘썸’을 타지 않을까? 색안경을 끼고 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분들에게 춤을 한번 배워보라 하고 싶다. 모든 일에 있어서 기본이 중요하다. 춤도 마찬가지다. 올바른 자세를 갖추는 것이 쉽지 않다. 인터내셔널 왈츠는 루틴이 복잡해서 루틴 외우는 것 자체가 매우 어렵다. 춤추다 보면 자칫 자세가 흐트러지기 때문에 올바른 자세를 유지하며 루틴대로 추려면 긴장해야 한다. 춤을 제대로 추는 사람은 춤에 집중해야 하기 때문에 잡생각이 아예 불가능하다. "인아야, 엄마 왈츠 열심히 배워서 왈츠 선생 할 거다." "엄마 다른 건 몰라도 그건 안 되거든. 엄마 몸치거든." 몇 년 전 딸에게 희망사항을 말했더니 단칼에 필자의 꿈을 날려버린다. 왈츠를 배운 지는 10년도 넘은 것 같다. 재직 시에는 송탄에 있는 국제대학교 평생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배웠다. 퇴직 후 집을 서울로 옮긴 뒤에는 서초문화원에서 3개월 수강한 뒤 신사동에 있는 샤리권 댄스 학원에서 3개월을 수강했다. 2년 전에는 선릉에 있는 더 댄스 스튜디오에서 몇 개월을 수강했고 양재에 있는 리세움에서도 3개월을 수강했다. 지금은 선릉에 있는 휴먼 서비스센터에서 6개월째 왈츠를 배우고 있다. 정리해보니 엄청 여러 곳에서 많은 세월 왈츠에 빠져 살아왔다. 그런데도 폼은 아직도 엉성하고 실력도 하품 수준이다. 필자는 왜 이렇게도 몸치일까? "저는 학교 다닐 때 체육시간이 지옥 같았어요." 그러자 왈츠 선생님은 하하하 웃으며 말했다. "저는 너무 신났는데요." 초등학교 때는 공부를 못하면서 운동만 잘하는 애들을 무시했다. 그런데 정말 우수한 학생들이 체육도 잘한다는 것은 교사가 되어 알게 되었다. 가만히 앉아서 책을 본다든가 음악이나 영화감상을 즐기던 필자는 체육시간이 지옥 같았다. 특히 달리기는 딱 질색이었다. 그런 필자가 왈츠를 배우려고 한 것은 엄청난 도전이었다. 안 되는 것을 억지로 하려니 스트레스도 있었다. 인터내셔널 왈츠는 A코스, B코스, C코스, 바리에이션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필자는 지금도 A코스만 무한반복하고 있다. '이렇게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왈츠를 꼭 배워야 하나?‘ 몇 년 전이었다. 루틴을 외우지 못해 힘들어하던 피랒는 왈츠 수업을 가는 중에 문득 회의가 들었다. 지난 화요일 왈츠 수업 중에는 눈물까지 났다. 너무 못하는 자신에게 속이 상해서였다. '발레를 할 때는 행복해서 눈물이 났었는데….' '음지가 양지 된다고, 내가 춤 잘 추는 사람을 부러워하게 될 줄이야.' 영화 '전쟁과 평화', '왕과 나', '사운드 오브 뮤직', '라스페기',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등에서는 주인공들이 우아하게 왈츠를 추는 장면이 나온다. 필자의 목표는 영화에서처럼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고 나비처럼 우아하게 왈츠를 추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공주처럼 기품 있고 우아한 삶을 동경해왔던 필자가 가장 가슴 설레던 장면이 바로 멋진 왕자와 왈츠를 추는 장면이었다. 안 되는걸 기어코 하겠다고 왈츠에 집착하는 필자에게 얼마 전 딸애가 말했다. "엄마 참 대단해. 나 같으면 두세 번 해보다가 안 되면 그만둘 텐데." 필자는 의지의 한국인이다. 그 꿈을 꼭 실현해보고 싶다. 언제 그런 날이 오려나? 아니 그런 날이 오기는 오는 건가?
- 2018-02-05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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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 진로교육 페스티벌’ 열려
- 날씨가 매우 차가워진 1월 10일 오전 코엑스 홀에서는 우리 아이들을 위한 진로교육 페스티벌의 개막식이 있었다. 10일과 11일 이틀에 걸쳐 진행되는 이 페스티벌은 교육부가 주최하고 17개 시도 교육청과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이 주관하는데 학교와 마을의 여러 주체가 학생들의 진로개척 역량을 높이기 위해 경험과 지혜를 나누는 네트워크 조성의 중요성에 따라 마련되었다. ‘온 마을이 함께하는 우리 아이들의 꿈’이라는 슬로건과 함께 큰 코엑스 홀의 행사장에는 우리의 관심을 끄는 수많은 진로에 관한 부스가 설치되어 있었다. 교육은 백년지대계라는 말이 있듯 너무나도 중요한 것임을 잘 알고 있지만, 주입식교육과 수행평가에 매달리는 학생들이 자신의 진로에 대하여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고민하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는데 우리나라 교육문제에서 진로 탐색의 부재를 실감하는 부분이다. 행사 부스에서는 학생들이 자신의 적성을 찾아 진로를 탐색할 기회가 많을 것으로 기대가 되었다. 개막식은 충남 공주의 석송초등학교 어린이들의 아름다운 합주로 시작되었고 많은 내빈이 참석했다. 김상곤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과 나영선 한국직업능력개발원장, 이재정 경기도 교육감, 염태영 수원시장의 축사가 이어졌는데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시대에 아이들 스스로 흥미를 찾아가는 미래를 위해 국가가 책임지는 진로교육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했다. 혁신학교와 자유학기제 확대, 진로교육 집중 학년 학기제 안착, 아이들 스스로 행복한 삶을 설계할 수 있도록 모두의 참여와 협력 속에서 진로개발역량을 더욱 튼튼히 키워주어야 하며 학생들이 참여하는 이런 진로교육프로그램이 살아있는 교육일 것이니 교육현장에서 꼭 필요하다는 실무자의 영상인터뷰도 있었다. 학교 교육과정에 스며드는 진로교육정책으로 학교 진로설계코칭 강화와 수요자 중심 진로교육 기반 구축, 미래를 탐색할 수 있는 다양한 진로체험기회제공으로 진로 탐색 활동 지원을 강화하고 4차산업혁명 시대에 창업 체험교육을 활성화한다고 했다. 삶의 경험과 지혜를 얻고 당당하게 길을 찾아가는 아이들은 우리가 꿈꾸는 미래이자 추구해야 할 가치다. 모두가 한마음으로 우리 아이들을 응원하고 아이들의 진로, 희망찬 미래를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번 페스티벌은 주제마당, 교류마당, 체험마당, 창업 경진마당으로 구분되었다. 다양한 부스 중 특히 관심이 갔던 곳은 창업동아리 경진마당이었다. 진로교육 차원에서 지난 한 해 동안 육성된 전국의 60여 개 청소년 창업동아리가 총출동하여 그들만의 독특한 매력을 보여주었다. 젓가락이 서툰 동생이 파스타 먹는 걸 어려워하자 한 번에 감아 입에 넣을 수 있도록 개발한 ‘전동포크’가 흥미로웠는데 이 제품은 어르신이나 장애인에게도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태양광 구명조끼도 관심이 갔다. 구명조끼에 GPS를 장착해 조난당한 위치를 알릴 수 있고 구명조끼에 열선을 설치하여 태양광 전지판으로 충전해 체온을 지켜주는 기능도 있다고 한다. 파라솔에 태양광을 설치한 아이디어작품도 있었다. 파라솔은 자외선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주는 동시에 햇볕을 많이 받게 된다. 파라솔에 태양광 전지판을 설치해 얻는 에너지로 전구나 휴대폰 충전을 할 수 있고 환경오염도 줄일 수 있다고 한다. 이렇게 60여 개나 되는 창업동아리 부스에서 각각 반짝이는 재치가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환하게 밝혀주는 것 같아 흐뭇했다. 진로교육페스티벌은 4차산업 혁명에 대응하는 인재육성이 궁극적인 목표였다. 학교라는 고정적인 울타리를 벗어나 꿈과 미래를 꿈꾸고 설계할 수 있는 진로교육의 장을 마련해 청소년에게 꿈을 키울 기회를 만들어 주는 것이 마을과 지역사회, 정부의 몫일 것이다. 우리의 희망이자 미래인 청소년의 꿈을 진로교육의 장을 통해 더욱 튼튼히 키워 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 2018-01-26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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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다른 10년 계획
- 필자의 집안은 3대가 개띠다. 아버지가 34년 개띠, 필자가 58년 개띠, 둘째아들이 94년 개띠다. 말티즈도 한 마리 키우고 있어 집안이 온통 개판이라고 가끔 농담을 한다. 34년 개띠이신 아버지 세대는 일제강점기와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을 겪으며 생사의 갈림길을 수없이 지나온 분들이다. 비교 대상이 되지 못하지만 58년 개띠도 나름 파란만장한 시대를 살았다. 필자의 초등학교 4학년 성적표를 보면 104번이라는 숫자가 나온다. 한 반이 104명 정도는 되었다는 의미다. 실제로 학생이 너무 많아 3부제 수업을 했다. 콩나물시루 같은 교실이라는 표현은 아마 이때 만들어졌지 싶다. 필자도 그랬지만 그 시절에는 판자촌에 사는 사람이 많았다. 다들 가난했기에 추워도 외투 하나 없이 교복만 입고 다녔다. 겨울엔 참 추웠다. 특히 겨울방학이 끝나고 새 학기가 시작되기 전 초봄 추위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날 만큼 맹렬했다. 58년 개띠는 고등학교 평준화 1세대다. 그래서 ‘뺑뺑이’ 세대라 표현하기도 한다. 왜 뺑뺑이가 시작되었는지는 만천하가 다 알고 있으니 따로 설명하지 않겠다. 문제는 뺑뺑이 추첨이 가져온 부작용이 너무 컸다는 사실이다. 단적인 예로 역사와 전통이 있는 명문 고등학교에서는 평준화 기수를 후배로 취급하지 않는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평준화 기수들은 선배를 선배로 대우하지 않는다. 필자도 명문 고등학교에 배정을 받았지만 좋아하기엔 교사들과 선배들로부터 마음의 상처를 너무 많이 받았다. 올해가 고등학교 졸업 40주년이 되는 해다. 아직도 동창회에 나오지 않는 친구가 많다. 그들에게 고등학교 시절이 여전히 악몽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공대 건축과를 졸업하고 건축설계사무소에서 몇 년 동안 도제생활을 했다. 담배 피우고 술 몇 번 먹을 정도의 돈을 월급으로 받았다. 그런 상황에서 결혼을 하고 대책 없이 사직서를 냈다. 외부와 연락도 끊고 공부를 해서 건축사 자격증을 취득해 30대 초반에 건축사사무소를 차렸다. 온 나라가 건설 현장 같았던 시절이다. 일도 많았고 그만큼 직원도 늘었다. 결혼하고 전용면적 7평짜리 벌집 아파트에서 전세로 시작했는데 집도 분양받았다. 골프도 쳤고 해외여행도 다녔다. 그러나 언제까지 그렇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던 화려한 30대는 40세로 막 접어드는 해에 터진 IMF와 함께 종말을 고했다. 공황장애와 폐쇄공포, 감각마비가 겹치면서 정신과 몸이 무너졌다. 암흑의 터널을 빠져나오는 데 10년이나 걸렸다. 몇 년 전 필자의 생일에 일어난 일이다. 그날따라 급하게 처리할 일이 생겨 야근을 하게 되었다. 야근하고 간다고 아내에게 카톡을 보냈다. 덤덤한 답변이 돌아왔다. ‘혹시 아내가 내 생일을 잊어버린 건가’ 하고 의심을 하다가 속으로 ‘내가 속을 줄 알고’ 하면서 속아 넘어가는 척했다. 그동안 무슨 기념일이 되면 필자는 깜짝 이벤트를 자주 했다. 전혀 모르는 척하고 있다가 기념일 아침에 꽃을 준비한다든지 돈 봉투나 선물을 내놓는 식이다. 이런 이벤트에 익숙해진 아내는 기념일이 가까워져도 특별히 호들갑을 떨지 않는다. 그날 야근을 마치고 집 앞에 도착하니 밤 11시가 넘어 있었다. 늦었지만 생일 음식을 준비해뒀을 아내와 한잔하려고 가게에서 맥주 몇 병을 사가지고 들어갔다. 현관을 들어설 때 분위기는 평상시와 다름이 없었다. 개는 반갑게 짖으며 달려 나왔고, 아내는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고, 큰아들은 컴퓨터에 앉아 있었다. 검은 비닐봉지에 든 맥주를 보면서 야근하고 오면서 무슨 맥주냐고 아내가 한마디했다. 식탁을 힐끔 보니 텅 비어 있었다. 설마 하면서도 그때까지는 깜짝 이벤트를 하려고 그러는 줄 알았다. 그런데 옷을 갈아입고 화장실을 다녀왔는데도 전혀 상황 변화가 없었다. 시간은 벌써 11시 반을 넘어가고 있었다. 그제야 깜짝 이벤트가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니고 상황이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아내와 아들놈을 식탁으로 불렀다. 일단 맥주를 한 잔씩 따르고 말했다. “앞으로 30분만 지나면 여기 있는 두 사람이 오랫동안 심각한 고통에 시달릴 것 같아서 한마디하겠다…. 오늘 내 생일이다!” 사색이 된 두 사람이 벌떡 일어나 호들갑을 떨어 결과적으로 30분 안에 맥주 안주가 준비되긴 했지만 속으로는 좀 섭섭했다. 다행히 다음 날 아침, 전방에서 군 복무하는 아들에게서 온 전화가 위로가 되긴 했다. “아빠 생신을 엄마도 형도 다 잊어버렸다면서요….” 얼마 전에 ‘어디서 살 것인가?’라는 주제로 시니어에게 강의를 하던 중 환갑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수강생들은 대부분 50대 중반에서 60대 초반이었다. 그날 필자는 감정이 약간 고조되어 있었다. 수강생들에게 이야기한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요즘엔 남 눈치 보느라 환갑잔치를 안 한다고 하는데 왜 남 눈치를 봐야 하는가. 우리 베이비부머들이 어떻게 살아왔는가. 어릴 때 판자촌에서 살며 춥고 배고팠던 기억이 다들 있지 않은가. 뒤는 돌아볼 겨를도 없이 앞만 보고 달려온 세월이었다. 잠시 한숨 돌릴 만하던 시기에 IMF로 다시 고꾸라졌다. 그리고 또 일어서서 여기까지 정신없이 달려왔다. 어느 순간 거울에 비친 나를 보니 머리는 허옇고 주름도 많더라. 무엇을 이루려고, 무엇 때문에 이리도 바쁘게 산 것일까 생각하면 허무할 때도 있다. 그러니 우리 환갑상을 꼭 받자. 거창하게 받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가족과 아주 가까운 친구들만이라도 모인 자리에서 술 한잔하면서 그동안 살아온 삶에 대한 위로의 말을 듣고 싶다….” 대충 이런 이야기를 하는데 앞쪽에 앉은 분이 손수건을 꺼내서 눈물을 닦았다. 필자도 감정이 북받쳐 더 이상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지난해 5월, 퇴직하고 반년 동안 현역일 때보다 더 바쁘게 살았다.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지인들을 만나고 여행도 하고 글도 쓰고 사진도 찍으러 다녔다. 돌이켜보니 시간이 참 빠르다. 허둥지둥하면서 살았다. 옆을 볼 겨를도 없이 앞만 보고 달려왔다. 이제 좀 느리게 걸으면서 주변을 돌아보고 싶다. 해가 바뀌어 필자도 이제 환갑이다. 주변에서는 크루즈 여행을 간다, 북유럽을 간다, 벌써부터 환갑 계획들을 자랑한다. 필자의 계획은 명확하다. 10년 전, 그러니까 오십이 되던 해부터 매년 한 가지씩 목표를 정해 10년 계획을 실행해왔다. 그동안 이룬 성과로 상담 관련 자격증 네 개를 취득했고 공저로 책을 네 권 냈다. 기타 배우기, 목공예 배우기, 명강사 되기, 글쓰기, 그림 다시 그리기, 새로운 관계 맺기 등의 목표를 이루었다. 수필가로 등단도 했다. 환갑인 올해는 다시 일을 시작하고 또 다른 10년 계획을 실행에 옮기는 원년이 될 것이다. 지난 10년간 이룬 성과를 주변과 나누고 공유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싶다. 물론 환갑상은 받고 나서.
- 2018-01-20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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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무신 신고 달렸던 개띠들에게 축배를
- 2018년, 드디어 58년생 개띠들이 회갑을 맞이한다. 우리나라는 61세가 되면 회갑(回甲) 또는 환갑(還甲)이라 하여 특별히 생일잔치를 열었다. 요즘이야 식구들 모여 소박하게 밥 한 그릇 나누어 먹지만 말이다. 회(回)나 환(還)은 한 바퀴 돌아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는 뜻이라는데, ‘자리로 돌아왔다’는 그 말에서 알 수 없는 무게가 느껴진다. 어쨌든 회갑을 맞이하는 벗들에게 안부를 묻고 싶다. 땡볕 내리쬐는 공사장에서, 시끄럽고 위험한 공장에서, 갑갑한 사무실에서, 긴장이 넘치는 병원에서, 영혼 없는 학교에서, 쓸쓸한 들녘에서, 살려고 몸부림치는 모든 삶터에서 앞만 보고 달려온 벗들에게 인사를 전한다. “가난하고 어려운 시절 잘 견뎌주어 고마우이.” 그리고 안타깝게도 다시 못 올 길로 먼저 떠난 벗들에게도 머리 숙여 인사를 전한다. “그대들 몫까지 살다가 곧 따라갈 테니 기다려주시게나.” 벗들에게 인사를 건네는데 왜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걸까? 가난했지만 아름다웠던 어린 시절 나는 1958년 5월 5일 경남 마산시 월영동 산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말이 좋아서 ‘마산시’이지, 똥구멍 찢어지도록 가난한 마을이었다. 신발과 양말이 귀했던 때라 추운 겨울에도 고무신에 양말조차 신지 못하고 학교를 다니는 바람에, 내 발은 겨울철만 되면 동상에 걸려 붓고 가려워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보다 못한 어머니는 메주콩을 수건에 싸서 밤마다 내 발을 감싸주었다. 나는 지금도 그게 어떤 효과가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내가 초등학교 다닐 적에 우리 마을은 거의 초가집이었다. 그때만 해도 집집마다 꽃이 피고, 마당에는 온갖 푸성귀들이 자랐다. 그래서 반찬거리를 돈 주고 사 먹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우리 집은 아주 작은 초가집이었지만 마당과 들머리에는 아침마다 맨드라미, 봉숭아, 접시꽃과 같은 수십 가지 꽃이 피었다. 채송화만 해도 여름 내내 하루 천 송이가 넘게 피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옆집 친구랑 꽃송이를 헤아리다 학교에 지각한 적도 있었다. 사람들은 우리 집을 ‘석류나무 집’이라 불렀다. 마당가에 나보다 나이가 몇 배나 많은 석류나무가 있었기 때문이다. 석류가 빨갛게 익으면 어머니는 제일여고 정문 앞에서 석류를 팔았고, 석류 판 돈으로 한 해 쓸 공책과 연필을 사주었다. 가끔 서리꾼이 나타나 석류를 도둑질해가는 바람에 아버지는 석류나무 가지 사이에 탱자나무 가지를 꺾어서 걸쳐놓곤 했다. 가끔 그 석류나무를 생각하면 알 수 없는 그리움이 밀려온다. 가난은 전염병처럼 오래도록 우리 식구들을 못살게 굴었다. 형은 집을 나가 공장에서 돈을 벌어 스스로 고등학교를 다녔고, 누나 셋은 모두 초등학교만 겨우 졸업한 뒤 부산 가발공장으로, 대구 섬유공장으로 돈 벌러 갔다. 나는 가난이 싫어서 스스로 학교를 포기하고 공장에 다녔다. 그때는 부자가 되는 게 꿈이었다. 하루는 거나하게 술에 취한 아버지가 “사람은 배워야 사람이 된다”고 하셨다. 그 말씀을 듣고, 낮에는 공장에 다니면서 내가 번 돈으로 뒤늦게 야간 중학교(고등공민학교)에 입학해 공부를 시작했다. 야간 중학교 수업을 마치고 걸어서 집으로 가면 거의 밤 열한 시가 넘었다. 몇 시간 겨우 자고 나면 아침 일찍 공장에 가야 했기 때문에 늘 잠이 모자랐다. 그때 내 나이 열네 살이었다. 나뿐만 아니라 야간 중학교 학생들은 모두 집안이 가난했다, 더구나 같은 학년인데도 나이 차이가 많았다. 서너 살 많은(1954~1957년생) 형들도 뒤늦게 공부하고 싶어 야간 중학교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같은 또래들보다 ‘세상’을 일찍 배웠는지 모른다. 지금 돌이켜보면 가난하고 불편했지만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결코 내 삶을 불행하다고 생각한 적 없었으니까 말이다. 첫 시집 ‘58년 개띠’ 나는 사람들이 ‘쉽게’ 말하는 58년생 개띠다. 쉽게 58년 개띠라 불러주어 고맙다. 왜냐하면 살아온 세월만큼이나 친근감이 드는 말이기 때문이다. 나는 1995년에 보리출판사에서 첫 시집 ‘58년 개띠’를 내고 세상에 이름이 조금 알려졌다. 시집을 내고 가톨릭여성회관 강당에서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100명이 넘는 손님들(거의 현장 노동자들이었다)이 찾아와 강당에 신문지를 깔고 여기저기 둘러앉아 막걸리에 파전을 먹으며 시를 읽거나 ‘민노래’를 불렀다. 예나 지금이나 어떤 행사를 하면 손님들이 방명록에 이름을 적는다. 그때 손님들이 방명록에 적은 내용은 대부분 ‘띠’에 관한 글이었다. “70년생 개띠 왔다 갑니다. 저도 12년 뒤에 선배님처럼 꼭 시집을 내고 싶습니다.”, “58년 개띠 친구가 시집을 내다니, 내 시집처럼 기쁘네그려.”, “60년생 쥐띠인데요. 왜 58년생 개띠만 유명한가요?” 사람들은 ‘58년 개띠’에 실린 시들 중 ‘58년 개띠’라는 시를 좋아한다. 지면을 줄이기 위해 줄과 연을 조금 붙여서 옮긴다. 58년 개띠 해 오월 오일에 태어났다, 나는 양력으로는 어린이날 음력으로는 단옷날 마을 어르신들 너는 좋은 날 태어났으니 잘 살 거라고 출세할 거라고 했다. 말이 씨가 되어 나는 지금 ‘출세’하여 잘 살고 있다. 이 세상 황금을 다 준다 해도 맞바꿀 수 없는 노동자가 되어 땀 흘리며 살고 있다. 갑근세 주민세 한 푼 깎거나 날짜 하루 어긴 일 없고 공짜 술 얻어먹거나 돈 떼어먹은 일 한 번 없고 어느 누구한테서도 노동의 대가 훔친 일 없고 바가지 씌워 배부르게 살지 않았으니 나는 지금 ‘출세’하여 잘 살고 있다. 시집 ‘58년 개띠’는 20년 남짓 노동현장에서 노동자로 살아오면서 보고 듣고 느끼고 겪은 삶의 기록이다. 이 시집이 세상에 나오기 전에, 시집 제목과 표지를 의논하기 위해 서울에서 네 사람이 모였다. 보리출판사 차광주 대표, 편집부 강순옥 선생, 함께 편집 이야기를 나누었던 분과 나까지 모두 58년 개띠였다. 그래서 모두 시집 제목을 ‘58년 개띠’라 하자고 했다. 그때 그 자리에는 알 수 없는 기운이 펄펄 살아서 빈 공간을 가득 메웠다. 58년생 개띠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한평생 옆집에서 살았던 친구처럼 반갑고 정겨웠다. 58년생 개띠들이 모여 ‘58년 개띠’ 시집을 내고 4년 뒤, 글을 써서 밥 먹고 살아가는(대부분 글만 써서는 밥을 못 먹고 산다) 58년 개띠 작가들 모임을 가졌다. 1999년 6월 4일, 첫 모임을 가진 곳이 서울 종로경찰서 맞은쪽 ‘동루골’이라는 조그만 술집이었는데 전국에서 서른 명쯤 모였다. ‘서울’이라는 먼 길을 비행기 타고, 기차 타고, 버스 타고 올라온 58년생 개띠 작가들 모임은 말 그대로 ‘개판’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개판은 엉망이라는 말이 아니고 ‘개띠’다운 술판이 벌어졌다는 말이다. 그날 모인 58년생 개띠 중 창비 김이구 평론가와 박영근 시인은 몹시 안타깝게도 세상을 떠났지만…. 회갑을 맞이하는 당신들에게 나는 13년 전에 복잡하고 어지러운 도시를 떠나 어릴 때 내가 살던 곳과 같은 작은 산골 마을에 뿌리를 내렸다. 이 나이에 13년째 마을 청년회장(?)을 맡고 있다. 도시에서 나를 돌아볼 새도 없이 바쁘게 살았으니, 이제 남은 삶은 작물을 가꾸듯 살고 싶다. 외로움을 벗 삼아 산골 이웃과 아이들과 함께 배우고 깨달으며 살아가는 맛이 아주 깊고 그윽하다. 아스팔트와 시멘트 숲을 떠나 자연의 소리를 들으며 산밭에서 땀 흘리며 일하다 보면 어느새 내 몸에서 ‘사람 냄새’가 난다. 농부가 되고서야 내 몸에서 ‘사람 냄새’가 난다는 것을 알았으니,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물려받은 땅 한 뙈기 없어 남의 논밭을 빌려 농사지으며 살아왔지만, 같은 해에 태어나 같은 하늘 아래 숨 쉬고 살아가는 벗들이 있어 든든하고 더없이 행복하다. 벗들이여, 이제 우리 나이 예순한 살이다. 나이를 먹는다는 말은 받아들인다는 뜻이겠지. 몸을 쓴 만큼 섬겨야 한다는 것을. 머리 쓴 만큼 비워야 한다는 것을. 뱉은 말 만큼 들어야 한다는 것을. 느낀 만큼 나누어야 한다는 것을. 받은 만큼 베풀어야 한다는 것을. 떠나는 그날까지 살아볼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벗들이여,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든 허둥거리며 바쁘게 살지 마시기를! 사람으로 태어나 바쁘게 사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마음이 강물처럼 깊어져 미련도 원망도 욕심도 그냥 내려놓을 수 있기를! 살다 보면 어찌 눈물 마를 날이 있으랴마는, 그 눈물로 메마른 세상 흠뻑 적실 수 있기를.
- 2017-12-28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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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주 돌보기 질을 높이자
- 손주 돌보기가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중요 이슈로 떠오른 지 오래다. 자녀 내외가 맞벌이해야 하는 현실을 살고 있어서다. 경제적 사정이 허락되면 아이 돌봄 전문인을 활용할 수 있지만, 대체로 친정이나 시댁의 부모가 그 일을 대신한다. 또한, 손주 돌봄 자체가 노후 삶에 보람을 주기도 해서다. 남의 손에 맡기느니 힘이 들어도 내리사랑을 베풀기 마련이다. 유아원이나 어린이집에 안전하게 보내고 먹거리를 챙기는 일 등이 기본이다. 정성을 다해 열심히 해도 때로는 마찰이 일기 마련이다. 한눈판 사이에 가구에 부닥쳐 생채기를 내기도 하여 며느리나 딸에게 걱정을 끼치는 경우도 생겨서다. 그러한 일상적이고 보편적인 손주 돌보기가 중요하지만, 질이 다른 분야도 관심을 갖고 손주를 눈여겨보는 자세가 더 필요하지 싶다. 예를 들면 선천적 재능을 발견해 본다든지 잘못된 버릇을 고쳐주는 일 등에 더 중점을 두어야 하지 않을까? 손주를 돌보는 일의 근본적 주안점은 미래를 위한 손주 양육이기에 질을 높여야 한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 어릴 때 버릇을 제대로 들여줘야 바르게 성장한다. 인성이나 자세를 만들어가는 시점이 유아기라 한다. 유소년 시절에 잘못 길든 버릇은 평생 고치기가 쉽지 않다. 손주를 둘이나 안겨준 큰아들은 젓가락질이 아직도 서툴다. 젓가락을 잡는 방법이 달라 음식을 먹을 때 불편해 보인다. 본인은 버릇되어 아무렇지 않을지라도 주변에서 보기는 어색하기만 하다. 어릴 때 바로 잡아주지 못해서고 성장해서 고치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다. 필자의 셋째 처제가 고등학교 교사다. 얼마 전에 가족 모임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고등학생 중 많은 학생이 연필이나 볼펜을 제대로 잡지 못한다고 털어놓았다. 서툴게 잡고 필기를 하다 보니 힘이 들어 공부하는 시간을 오래 버티지 못한다고 했다. 어릴 때 손주가 연필을 잡는 모습을 유심히 살펴보아 바른 방법으로 고쳐주어야 한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난 뒤 내년에 초등학교 입학을 앞에 두고 있는 큰 손주가 연필 쥐는 모습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앞의 사진과 같이 잡고 글을 쓰고 있었다. 엄지와 중지 등 세 손가락 사이에 연필을 두고 있었다. 셋째 손가락이 연필을 받쳐주는 형태가 아니어서 글쓰기가 불편해지는 방법이다. 두 번째 사진처럼 고쳐 잡게 하였더니 이내 고쳐 잡았다. 글쓰기도 편해 보였다. 보편적 방법에서 벗어나 미래에 초점을 둔 질을 높인 손주 돌봄이다.
- 2017-12-26 17: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