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의 나이인 친척 조카가 초등학생인 자녀를 필리핀으로 유학 시키면서 조카며느리도 함께 보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이가 똑똑해 아마 더 큰 글로벌 인재로 키우고 싶었나 보다.
그 말을 들은 순간부터 필자는 걱정이 앞섰다. 젊은 나이에 부부가 떨어져 있게 되었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고 혼자 남아 기러기 아빠가 될 조카가 걱정스러웠다.
들리는 이야기같이 돈 버는 기계처럼 될까봐 안쓰러워서 다시 생각해 보라고 한마디 해주었다.
그저 지지고 볶아도 아이들 교육 때문이라든가 어떤 일에라도 남편과는 떨어져 살지 않을 거라고 말한 우리 며느리가 대견하고 고맙기만 하다.
12년째 기러기 아빠로 산다는 어떤 아버지의 이야기를 읽었다. 과거에 자신이 하고 싶었던 유학을 하지 못했기에 아들에게는 일부러 권해서 조기유학을 보냈다고 한다. 유학 초기 혼자 떠난 어린 아들이 힘들어하자 아내가 따라가고, 아빠는 혼자 남아 버는 돈의 85%를 송금하며 혼자 살기 시작했단다. 필자는 생각이 고루해서일까, 절대 기러기 가족을 좋게 생각할 수가 없고 가족은 모여 살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우수한 인재들이 세계 곳곳으로 나가 공부하고 역량을 펼쳐 우리 대한민국의 위상을 떨치는 것도 중요할 것이다. 그러나 가족이 헤어지고 더구나 아빠만 혼자 남아 외로움을 느끼고 우울증 증세까지 보이면서 뒷바라지를 한다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이다. 이 아버지는 12년 동안 아들을 딱 일주일만 볼 수 있었다 한다. 얼마나 보고 싶었을지 정말 안타까운 마음이다. 형편이 좋다면 자주 왕래하며 가족의 의미를 새길 수 있겠지만, 대다수 많은 가정이 그러지 못한다고 한다. 아이들은 유학 도중 고국에 갔다 오면 후유증으로 한동안 힘들어해서 나오게 할 수도 없고 아빠가 가자니 항공경비, 체류비, 여행비 등이 유학하는 아이와 아내의 한 달 생활비가 될 수 있어 차라리 돈을 보내게 되더라는 것이다. 공황장애 증세로 병원까지 찾았다는 아버지가 너무 힘겨워 보이고 슬프다.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걸까, 그래서 아들이 성공하면 그것으로 만족인 걸까, 아버지는 회사에서 정년을 고려해 편한 곳으로 발령을 내주려 했지만 정신없이 일해야 외로움을 덜 느낀다며 현장을 고집했다니 그것 또한 가슴이 아픈 이야기다. 아이의 공부가 끝나고 아내가 돌아왔단다. 필자 마음이 다 훈훈하다. 아들은 그곳에서 좋은 직장에 취업이 되었는데 어느 날, 1년만 외국에서 근무하고 한국지사로 오겠다고 했다고 한다. 공부가 끝나고 엄마가 한국으로 돌아가서 혼자 떨어져 살아 보니 그동안 아버지가 얼마나 외로웠을지 알 것 같다며 "아빠 미안해요," 라고 했다는 대목에서 필자는 필자와 아무 상관없는 가족의 이야기인데도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눈물이 흘렀다.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린 그 아들이 기특하고, 기러기 아빠로 외로운 삶을 살았지만, 이 아버지는 성공한 삶인 것 같다. 이 가족은 성공했지만 필자는 아직도 기러기 가정이 옳다는 생각은 안 든다. 이 가족의 행복을 진심으로 바란다.
그나저나 우리 조카도 먼 훗날 성공적인 삶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지 제발 그렇게 되기를 기도한다.
이 방과 처음 만나 건 7년 전이 2010년. 누구보다 외로움을 많이 타는 어머니가 혼자 있는 집에 다녀가는 기분보다는 적적함을 나누며 살아가는 게 나을 거 같다는 생각에, 여러 번 이 얘기 저 얘기 나눈 뒤에 쉽지는 않겠지만 이해해가며 살아보자는 의견일치를 보게 봤다. 어느 누구도 주위에서 잘 하는 일이라고 칭찬이나 격려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옛날 어렸을 때처럼 모녀 간이니 적당히 그렇게 지내면 되겠지 하며 일용품과 옷가지들이 섞인 이삿짐이 오던 날 축하(?)주로 짠! 까지 해가며 가지가지 옛날을 회상하는 얘기들을 펼쳐가며 슬픔+희망을 나누며 편하게 보냈다.
서울에 볼 일 있는 날에는 ‘늦을라, 어서 가라’는 재촉에 내가 내 아들 출근시킬 때와 같으려니 여겨 가볍게 외출하곤 했다. 마음과 말과 행동에 전연 다른 것들이 복선으로 깔려 있다는 걸 전연 모르고 지낸 거다. 나이든 어머니 마음엔 전연 다른 기대와 받고저하는 마음이 도사리고 있음을 눈치 채지 못한 덜렁이 딸이 나중, 나중에 여동생에게 전해 듣고서야 가슴도 아프고 섭섭해지며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꼬여갔다. 할 때 이 작은 방이 나의 기를 조금씩 살려줬다. 기가 막히게 날 보호해주고, 나만의 시간을 만들어주었고 일들을 조리 있게 착착 진행시켜주는 고마운 마음의 쉼터 아지트가 되어 줬다. 속상한 일들이 차츰 사라졌다.
집에 있는 날, 이 방에 들어와서 내내 글을 쓰던가, 편지 쓰고 책 읽고 전화도 편하게 걸고 받을 수 있는 곳. 무슨 일을 해도 내게 화를 내거나 내게 불만을 표시해 주지 않는 비밀 아지트였다. 마음대로 웃고, 그리고 싶은 그림도 열심히 그릴 수 있는 방. 특히 모녀가 몇 시간이라도 두런두런 싫증 안 날 만큼 대화의 꽃도 피우지만 내가 이 방에 있는 한 어머니도 본인이 하고픈 일들을 맘껏 할 수 있게 된 자유가 주어진 게 공로상 깜이다. 서로가 오로지 본인만의 시간을 즐기고 누구의 간섭 없이 시간을 낭비할 수 있다는 건 귀중한 거다. 어머니가 부르면 아쉽지만 벌떡 또 식사 때는 즉시 나간다. 이제는 어머니 얼굴 눈썹 날리는 것만 봐도 마음의 행로를 알게끔 숙련되었다고나 할까? 그야말로 잽싸게 요 방으로 들어와서 어머님 심사를 안 건드리고 내 일을 기쁨과 행복함에 휩싸여서 할 수 있게 된 거다. 작지만 큰 행복을 마음껏 누리게 해 주는 나만의 비결을 자꾸자꾸 개발하게 해 준다. 맛있는 게 있거나 즐거운 소식이 있을 때는 어머니랑 시간을 나누면서 즐긴다. 어머니가 피곤해 한다거나 별로 얘기가 하기 싫은 눈치면 얼른 주무시도록 모든 것을 대강 준비하며 섣불리 신경 거슬리는 행동일랑 감추고 얼른 이 방으로 피신한다. 심호흡 명상법으로 안쓰러운 마음에 공연한 얘기 꺼내 좋았던 감정 흩트리는 일이나 서로 감정 상하는 일 없도록 배려하고, 귀찮아도 웃는 얼굴과 눈에 힘 빼고 목소리는 언제나 상냥하게 가다듬어야 한다는 걸 이 방이 되 뇌이게 해줬다. 모녀관계의 지혜를 쌓는 공부도 인터넷을 찾아보며 남의 글을 읽으며 내 글도 쓰며...엄청 많이 도와준다. 이 방은 나를 고품질의 모녀관계 유지에 지대한 공헌을 하고 있다. 시니어의 바른 생활과 앞선 건강한 시니어로서의 태도와 겸손을 배우고 깨우쳐 주는 방이다. 7년 전의 마음가짐을 이 방이 이렇게 발전시키고 있는 거다. 7살이면 초등학생이 되는 나이 아닌가!?
참으로 격세지감이라 할 만하다. 어제까지만 해도 무더위에 힘들었는데 정말 딱 하루 사이에 날씨가 변했다.
잠자리에서 여느 때와 같이 얇은 잠옷에 얇은 홑이불을 덮으려던 필자는 선뜻한 기온에 그만 장롱을 열고 두툼한 이불을 꺼냈고 목까지 끌어 올렸다.
정말 기온 변화가 이렇게 달라질 수 있다는데 놀랍기만 하다.
오늘은 일요일 압구정동 광림 아트홀에서 마술공연을 보는 날이다.
날씨에 대비해 준비했던 외출복에 카디건 하나를 더 챙겨 들고 집을 나섰다.
버스 안에서 내다본 하늘이 너무나 깨끗하고 파래서 참 예쁘다고 감탄하며 바라보는 사이 잠시 후부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날씨 세계가 왜 이리 변화무쌍한지 모르겠다.
공연 장소에 도착하니 초등학생과 같이 온 부모들로 로비가 매우 붐볐다. 작년에 이은결 마술쇼는 어린아이 입장이 불가였던 것 같은데 오늘 마술쇼엔 아이들이 많으니 어쩐지 수준이 좀 걱정스러웠다.
언제나 봐도 마술은 정말 신기하다. 보는 사람에게 어떻게 저런 일이 있을 수 있는지 놀랍고 즐겁게 해 준다.
필자는 카드 마술이나 물건이 없어지고 생겨나고 하는 등의 마술은 별로 흥미가 없다.
마술사의 정밀한 손놀림의 눈속임이라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말 너무 꼭 알고 싶은 마술이 하나 있다.
같은 눈속임이라도 여자 어시스턴트를 테이블에 눕게 하고 반으로 잘라서 이쪽저쪽 분리하는 마술은 정말 신기해서 비밀을 알고 싶다.
어떻게 반으로 잘린 상체와 하체가 따로따로 움직일 수 있을까? 어디로 숨을 수도 없는 상황인데 말이다. 너무나 궁금해 꼭 알고 싶지만, 마술은 마술이니까 그냥 신기한 채로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알고 난 후 너무 시시해서 실망할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예전에 외국의 유명한 마술사가 방송에 나와서 자기가 한 마술의 비법을 그 자리에서 공개하는 걸 보았다
정말로 신기했던 마술이 알고 보니 너무나 허망하고 우스웠다.
저렇게 다 공개해버리면 신비함도 없어질 텐데 저 마술사는 왜 다 밝혀버리는 걸까? 그걸 보면서 어느 정도 마술은 베일에 싸여있는 게 낫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마술의 비법이 다 공개되면 마술사라는 직업이 없어지지 않을까 하는 염려도 되는데, 어떤 마술사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악보가 공개되었다 해서 누구나 연주를 할 수 있는 건 아니라고 자신만만이었다는데 맞는 말이다. 마술사들은 얼마나 피나는 노력으로 그런 경지에까지 오른 것이겠는가.
아무나 비법을 안다 해서 마술사가 될 수는 없는 일이다. 마술이란 그런 것 아닐까? 신기함을 느끼며 즐거우면 되는 것이다.
어릴 때 마술은 동네 장터에서 허름한 약장수 아저씨가 모자에서 토끼를 꺼낸다든가 가짜 꽃을 만들어 내는 정도로 기억된다.
그래서 마술하는 사람을 좀 헙수룩하게 보았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요즘 마술사는 매우 인기 있는 직업이 되었다.
잘 생긴 젊은이들이 다투어 나타나고 외국 마술쇼에서 상도 받는 등 마술의 세계가 변한 것이다. 이제 마술사는 동네 장터 약장수의 허름한 모습이 아니라 세련되고 멋있는 부러운 직업으로 바뀌었다.
오늘 최현우 마술사의 공연은 주제가 ‘더 셜록’으로 탐정 놀이를 하는 매지컬 이다.
매직과 뮤지컬을 합성한 공연이 시작되자 뮤지컬 못지않은 화려하고 웅장한 음향의 멋진 무대가 나타났다.
‘더 셜록’은 최현우 마술사가 런던의 셜록 홈즈가 되어 ‘제이슨’이라는 범인을 추리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관객은 런던시민이 되어 셜록의 추리에 동참하니 관객도 공연에 한몫을 하는 듯 동화되어 흥미롭다.
마술쇼니만큼 추리하는 사이사이 마술이 펼쳐졌는데 의자에 앉아 있는 여자 어시스턴트의 목이 그대로 없어지는 기묘하고 신기한 마술도 있었다.
정말 의자에 앉은 채 금세 있던 목이 사라지고 없는 광경은 보면서도 믿을 수 없는 충격적인 장면이다. 역시 비밀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2시간 가까이 환상적인 무대가 펼쳐졌다. 이런 무대를 만들려고 얼마나 노력했을지 마술사 일행에게 아낌없이 환호를 보내주었다.
너무나 궁금하긴 하지만 이렇게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니 마술 비법을 알려 하지 말고 신비한 채로 비밀에 싸여있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다.
놀랍고 신나는 마술로 어린아이처럼 즐거웠던 시간이었다.
추워지기 시작했다. 일본 애들은 반바지 차림으로 다닌다. 며칠간은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긴 바지를 입고 등교하더니 우리도 그냥 반바지를 입고 다니겠다고 했다. 내가 보기에 무릎이 빨갛게 되면서 추워 보이는 게 안쓰러워서, 저 애들은 어려서부터 습관이 되어 괜찮지만 너희들은 이제껏 긴바지였으니 그냥 그대로 다니면 안 되겠느냐 해도 아니란다. 바람의 아들은 추위를 이겨내야 한다면서...
그 날부터 둘이는 반바지 차람으로 씩씩하게 잘 다녔다. 이제는 말은 일사천리로 잘 했고 우리는 남이 들어서 별로 기분 안 좋은 말들은 한국말로 하는, 그렇게 구분해 가며 할 수 있는 실력이 된 것이었다. 아이들은 선생님께서 사용하는 말과 아이들 끼리 통하는 말에 능통해졌고, 나는 시장에 가서 사용되는 말들과 인사말 그리고 일반 어른들과 하는 말들에는 불편함이 없이 의사소통을 하며 즐겁게 지내게 되었다. 물론 전화도 이제는 무서운 물건이 아닌 영어는 영어로, 일어에는 일어로, 한국말에는 한국말로 구별해서 대답을 할 수 있는 벌벌 떨이 겁쟁이를 면하게 된 것이었다. 혼자 있는 정적을 깨고 사납게 울려대던 전화벨 소리가 그렇게도 겁나더니 언젠가 부터 여유롭게 웃음도 웃어가며 대화를 하게 된 그 기분은 시쳇말로 째지는 기분이었다고나 할까.
모든 새로움에서 부딪혀 가야만 하는 시련은 지나면서 다시 생활화 되어가고, 그것들은 습관이 되어 적응의 길로 발전해 간다는 것을 모든 새로운 것들에서 익혀간다는 즐거움으로 하루하루가 우리에게는 기쁨이었고 그것이 결코 고통이 아니었다. 일본에서 처음 맞는 겨울은 한국보다는 춥지는 않았지만 습해서 조금은 다른 추위를 느껴야 했지만 모든 건 이겨낼 만한 것들이었다. 나와 같은 또래들의 다른 사람들 보다 더 많은 경험을 쌓아가며 살아가는 건 행복한 거라고 무조건 생각을 바꿔가게 하며 아이들에게는 언제나 긍정적이길 원해서 부정적인 일들은 거의 말을 꺼 낸 적이 없었다. 내가 어렸을 때 그저 선생님들이나 어른들은 무조건 ‘일본 놈!’이라고 말했고 고약한 얘기들만 해줬었다. 그 영향으로 나도 그렇게 생각을 굳히고 있어서 일본에 가야했을 때, 우리 아이들이 학교에 가서 엄청 차별을 당할 까 우려되어 마음속으로 은근 걱정이 심했었는데 선생님들이 전연 차별대우를 안 했고, 아이들도 그날로 친구가 되어 주는 친절에 여러 가지 나쁜 개념들을 조금씩 지우고 버리게 되었다. 더군다나 일본에서 그 유명한 왕따 문제에도 걸리지 않고 잘 순조로운 학교생활을 했으니 얼마나 다행이었나! 큰애는 잘못 인식한 단어 하나로 모든 게 다 잘 넘어가버렸고 작은 녀석은 어느 사건을 계기로 그러려고 벼르던 녀석들의 양 코를 죽여 버렸던 것이다. 나중에 얘기하기로 하겠다.
반바지를 입고 다니는 우리 아이들을 보고 모든 엄마들이 감동했고 우리 가족을 진심으로 대하면서 더욱 더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그런 저런 일들로 동네방네 ‘기므꾼쿄~다이(김군 형제)’는 정말로 멋지고, 운동도 잘하고, 인사성 바르고, 성적이 우등이라며 칭찬을 받게 되었다. 한국에서의 전학생이 일본 우에하라초등학교의 유명학생이 되어갔다. 처음 전학해서 운동회가 있었는데 두 녀석은 각 학년 대표 릴레이 선수가 되는 바람에 모든 여학생들의 선망의 눈길을 한 몸에 받게 된 것이었다. 두 형제의 긴 다리에 입은 반바지 차림이 너무나도 핸섬(한싸므)하다나? 정말 다리로 말하면 할 말이 없었다. 일본 사람들은 전체가 다리가 짧았으니까. 한국보다 눈도 안 왔고 춥지도 않아 정말 지내기가 좋은 겨울이었다.
그녀는 집 마당 매실나무 아래 영원히 잠들었다. 며칠 전 내가 사는 마을의 한 젊은 부인이 오밤중에 갑작스러운 지병의 악화로 병원으로 이송되어 수술을 시도했으나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마흔다섯의 정말 꽃다운 나이었다. 가족도 가족이지만 마을 주민들은 슬픔에 빠졌다. 화장으로 장례절차를 마친 그 여인의 유골은 주민들의 생각을 넘어 살던 집안 마당의 작은 매실나무 아래 묻혔다. 남편의 지고한 아내 사랑이지 싶다. 너무 짧은 나이로 멀리 보내기에 안타까움이었는지 남편은 아내와 함께 심었던 마당 한쪽의 매실나무 아래를 아내의 안식처로 정했다. 살아있을 때처럼 늘 가까이 두고 싶은 남편의 사랑으로 보고 싶다. 언덕배기의 그 집 위로 하늘은 높아지고 하얀 구름이 흐른다. 대문 밖의 연못에 핀 연꽃의 연밥들이 고개를 숙이고 있다. 저녁이면 그 여인이 밤늦게 켜놓았던 창문의 불빛도 여전하다. 까치도 여느 때와 같이 지저귀고 참새도 이 나무 저 나뭇가지로 우르르 옮겨 다닌다. 글을 쓰다 창밖을 보니 서쪽에 해가 나고 동편에 구름이 덥혀 비가 내리나 보다. 무지개가 둥그렇게 그 집 위를 감싸고 있다.
내가 사는 마을은 4년 전부터 터를 만들기 시작하여 한두 집 짓기 시작했고 지금은 50여 채가 들어선 새로 이뤄진 전원풍의 마을이다. 나이가 든 사람보다 젊은 층이 많이 산다. 67세 나는 늙은이에 속한다. 마을의 동남쪽과 서남쪽은 나지막한 동산으로 둘러쳐졌고 북동쪽과 서북쪽은 논밭에 비닐하우스가 즐비하다. 세상에 잘 알려진 “일산 열무” 재배단지다. 산등성이를 개발하여 전원 마을이 되었다. 마을이 만들어질 즈음에 40 중반의 젊은 부부가 6학년 초등학생 아들을 데리고 이곳에 보금자리를 틀었다. 마을 중간쯤 언덕배기에 아담한 2층 단독 주택을 지었다. 3층 옥탑방이 있어 외양이 서구풍이다. 마을 행사에 헌신적으로 참여하는 젊은 층이다. 마당엔 텃밭을 만들고 대문 앞쪽에 작은 연못을 파고 연꽃을 심었다. 마당 한쪽 양지바른 곳에 매실나무도 한 그루 심었다. 봄이면 그 매실나무에 매화도 소담스럽게 핀다. 부인은 매화를 무척 좋아하였다. 2년 전에 이곳으로 이사를 온 나는 아침 산책길에 이곳을 지나며 예쁘게 핀 연꽃이나 연잎에 영롱하게 맺힌 물방울을 카메라에 담기도 하며 텃밭을 가꾸는 젊은이와 살가운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3년의 세월 속에 연잎이 너울거리게 되었고 여름이면 홍련이 저 멀리 하늘을 향해 큰 미소를 보낸다. 젊은 주인은 마당 텃밭에 먹거리로 채소를 가꾸었다. 고구마도 심고 토마토도 심는다. 지난해 가을에는 재배한 고구마라며 큼직한 녀석을 서너 뿌리 건네주어 맛있게 먹었다. 행복한 부부가 사는 집 중의 하나였다.
그 젊은이는 이제 또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새로운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우리의 세대가 생각할 수 없는 집안 마당에 안사람의 유골을 안치한 최초의 사람이 아닐까? 아침저녁이면 미소가 보일 것만 같은 아내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갈 매실나무 아래를 물끄러미 바라볼 그 젊은이를 상상해 보기도 한다. 별이 총총한 자정 무렵 어슴푸레 윤곽을 드러내는 매실나무를 계속하여 지켜볼 수 있을지도 관심거리다. 평생을 살지 않고 이사를 갈 경유엔 어떻게 할까? 영혼이 있다면 남편의 그러한 애틋한 사랑을 지켜보며 저승으로 떠나지 못하고 이승을 맴돌고 있지나 않을까? 그 자체의 옳고 그름이나 따라올 여러 가지 문제점을 차치하고 살아생전처럼 옆에 두고 싶은 남편의 사랑만을 얘기하고 싶다. 살아갈 세월이 그 젊은이와 확연히 다르지만, 과연 나와 안사람은 우리 집 마당의 과실나무 아래 나나 안사람의 유골을 안치할 생각이라도 해 볼 수 있을까?
◇학교 소개를 부탁하였다.
“학생 수는 800 명 정도이며 600여 명이 독서에 참여하고 있다. 도서는 2만 5000여 권을 보유하고 있는데 매월 1만 여 권의 책이 대출되고 있다.”
서울 관악구 서울미성초등학교는 ‘학교도서관 활성화상, 독서교육대상’ 등 서울시 교육감 단체상과 개인상을 수상하였다. 도서관 활동을 매우 잘하고 있다는 주위의 평가다.
◇특별히 독서권장 방법이 있는가?
“책 읽기가 즐거워야 한다. 책 일기에 부담이 되지 않도록 한 달에 몇 권에 해당하는 목표를 정하였다. 학년에 따라서 1년에 30~60권의 책 읽기를 권장한다. 목표를 달성하면 표창을 한다. 요즘처럼 표창받기 어려운 때 어린이들에게 큰 동기부여가 된다. 전체 학생의 4분의 3 이상이 참여하고 있다.”
60여 년 전 산골 조그만 교무실 한 귀퉁이에 꽂혀있던 몇 권의 책이 생각났다. 한국전쟁 종전 몇 년 밖에 되지 않는 그때에 책이 있었다는 게 지금 생각해도 믿어지지 않는다. 호롱불 밑에서 밤을 밝혔던 추억에 가슴이 아리다. “책은 영원한 마음의 양식이다. 재미있게 책을 읽어라. 어릴 때 독서는 일생을 좌우한다.” 쌍둥이 손주에게, 아이들에게 힘주어 강조하고 싶은 말이다.
◇교실 3개 크기의 도서실과 많은 장서를 관리하고, 개구쟁이 아이들을 보살피는 일은 쉽지 않을 터인데?
“물론이다. 혼자서는 하기 어려운 일이다. 교장·교감 선생님과 도사담당 교사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은 바 크다. 120여 명으로 구성된 어머니 명예교사가 날마다 2 명씩 교대로 도서관활동을 돕고 있다.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린다.” 기자와 대화중에도 개구쟁이들은 불쑥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어린이의 독서습관을 어떻게 기르면 좋다고 생각하는가?
“어린이의 독서습관은 부모에게 많은 영향을 받는다. 가정에서 독서분위기를 자연스럽게 만들어주는 것이 중요하다. 무리한 목표를 설정하면 아이들은 싫증을 느낀다. 독후감 토론 등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이는 것도 좋은 방법이며, 아낌없는 격려와 칭찬도 큰 보탬이 된다.”
같은 책도 읽는 시기에 따라 느낌이 다르다. 소나기 한 방에 무더위는 쫓겨나고 책 읽기 좋은 계절이 다가왔다. 개구쟁이들은 책과 더 친할 것이다. 배인식 선생의 친절한 설명에 감사하면서 미성초교 도서실을 조용히
글 한만수 소설가
어린 시절을 보낸 충북 영동은 워낙 산골이라서 전국적으로 소문난 난시청 지역이다. 1시간 거리에 있는 대전이며 김천만 가도 몇 개의 라디오 프로가 나오지만 영동은 FM 주파수 하나만 간신히 잡힌다.
그 시절 라든지 라는 심야 방송이 유행했었다. 별도 새도 잠든 한밤중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듣는 프로그램은 내게 신세계였다. DJ의 감미로운 목소리도 좋았지만 시청자들이 보내는 엽서의 내용이 가슴의 심장 박동 수를 빠르게 했다. 쿵작쿵작하는 트로트 선율에 길들여져 있던 내게 ‘상하이 트위스트’ 라든지 ‘울리불리 트위스트’, 톰 존스의 ‘킵 온 러닝’ 같은 신나는 노래는 가슴을 확 트이게 하는 청량음료였다.
그 밖에도 비틀스, 롤링스톤스, 사이먼 앤 가펑클 등의 목소리는 14세 중학생의 가슴 깊은 곳에 흐르는 감성의 강물에 뜨겁게 소용돌이쳐갔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서커스단이 들어왔다. 가수가 엘비스 프레슬리 흉내를 내며 ‘하운드 독(Hound dog)’을 불렀다.
가수가 무대에 섰을 때 막 밀크캐러멜 포장을 뜯고 한 개를 입에 넣었다. 가능한 한 아껴 먹으려고 밀크캐러멜을 천천히 빨았다. 노래가 끝났을 때는 언제 먹었는지 열두 개의 캐러멜을 모두 먹어 버렸다. 그는 다른 가수들처럼 마이크 앞에서 얌전히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요란한 밴드 음악에 몸을 맡기고 ‘개다리춤’을 추면서 부르는 노래는 완전히 충격이었다.
소풍을 가면 기껏해야 남진의 ‘님과 함께’를 함창하면서 손뼉이나 치고 있던 그 시절. 도시학생들처럼 나팔바지를 입고 야외전축에서 흘러나오는 팝송에 맞춰 개다리춤과 트위스트를 추었다. 친구들 앞에서 미친 듯이 몸을 흔들어 되긴 했지만 성격은 지극히 내성적이어서 글쓰기를 좋아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시절 나는 아무도 모르는 광기를 품고 있었다. 나만 광기를 품고 있었던 것은 아닐 것이다. 그 시절은 요즘과 달라서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내야 살아갈 수 있는 시대다. 부모님에게 상속받을 유산도 없었지만, 세상은 어차피 혼자 살아가야 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자라던 시대라서 모두들 미래에 대한 광기를 품고 있었을 것이다.
작가가 되겠다는 결심을 처음 한 것은 중학교 2학년 때이다. 백일장에서 ‘운동장’이란 제목으로 산문을 써서 당선된 날 밤이다. 우등상도 아니고 모범상도 아닌 그저 글 잘 써서 받은 상은 집에서 별로 환영을 받지 못했다. 혼자 밤중에 상장을 쓰다듬으면서 이다음에 작가가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작가가 되겠다는 결심은 은행원이 되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은행배지를 양복 재킷 깃에 찬란하게 달고, 잘 마시며 잘 먹다가 군대를 갔다. 군대에서는 졸병 시절부터 우연찮은 기회로 선임들의 펜팔편지, 혹은 연애편지를 대필해 주기 시작했다.
글은 쓰면 쓸수록 는다. 편지를 잘 쓴다는 소문은 금방 퍼져 나갔다. 동기들이 그늘 밑에서 휴식을 취할 때 나는 연애편지를 대필했다. 일요일에도 동기들은 화장실 뒤에 숨어 과자를 나누어 먹을 때 나는 나무 그늘 밑에서 선임이 사다 준 초코파이를 먹으면서 편지를 썼고, 동기들이 칼바람을 맞으며 얼차려를 받을 때 나는 내무반 페치카 옆에서 편지를 썼다.
어느 날 문득 중학교 2학년 때 작가가 되겠다는 결심을 했던 것이 생각났다. 그때부터 시간이 있을 때마다 소설을 썼다. 지금 생각해 보면 소설이라 할 것도 없다. 연재 형태로 써서 내무반에 돌렸는데 세월이 고래심줄처럼 질길 때여서 나름 인기는 있었다.
전역을 하고 복직을 했지만 작가의 꿈은 버려지지 않았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사표를 내고 절간에 들어가거나, 어떤 소설가처럼 영등포역 근처 닭장 방을 한 칸 얻어서 글을 쓰고 싶었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못했다.
결정적으로 직장을 그만두고 작가의 길을 걷게 된 것은 나이 36세 때이다.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꾸준히 습작을 하고 있던 어느 날 원치 않은 부서로 발령이 났다.
그날 혼자 술을 마시면서 고민을 했다. 새로운 임지로 가면 똑같은 날이 계속될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출근을 하고, 때가 되면 보너스를 타고, 또 한 해가 가고, 결국 나이가 들면 퇴직을 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남은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아주 싫었다.
고생이 되더라도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쓰면서 남은 생을 살면 적어도 후회는 하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초등학교에 다니는 자식 형제가 눈에 걸렸다. 전업주부로 사는 아내의 얼굴도 지워지지 않았다.
이튿날 나는 임지로 전출 인사를 하러 가는 대신 사직서를 제출했다. 사직서를 제출하기까지는 갈등이 파도처럼 끊임없이 밀려왔다. 막상 사표를 내니까 오히려 초연해졌다. 나름대로 열심히 일했지만 지점장은 형식적인 반려와 함께 사표를 받아들였다. 서운함보다는 내 판단이 옳았다는 것을 뼈가 저리도록 느꼈다.
세월은 결코 움켜잡을 수가 없고, 흘러간 세월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 만약 그때 상사들이 사직서를 반려했더라면 나는 지금쯤 은퇴자로 아파트 경비를 서고 있거나, 등산복을 입고 산에 오르거나, 선글라스 쓴 얼굴에 강아지를 끌고 공원 산책을 하며 물에 물탄 듯 술에 술탄 것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산골 고등학교 출신의 사직서는 대학을 졸업한 지점장의 눈에는 퇴직금 청구서 그 이상의 의미는 없었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그 점이 내게 축포를 터트려 준 셈이다.
직장을 그만두고 가장 어려웠던 점은 경제적 곤란이다. 그다음으로 새털처럼 많은 시간을 다스릴 수가 없었다. 서른여섯 살이 되도록 타인의 시간에서 살아왔던 탓에 내가 직접 시간을 조정하는 것은 쉽지가 않았다. 마음은 어서 빨리 글을 써야 경제적인 문제가 풀린다는 생각을 하고 있지만 현실은 그걸 허용하지 않았다. 매일 집에 있으니까 아침부터 술을 마셔도 되고, 새벽까지 마시고 늦잠을 자도 되는 생활이 이어졌다.
나는 결국 1년 만에 서울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시절에는 자식들을 서울로 유학 보내지 못해 부모들이 안달을 하던 시절이다. 책 한 권 없는 내가 글을 쓰겠다고 고향에 내려가니 모두들 수상쩍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내 어린 시절의 영혼을 나누어 가졌던 초등학교 동창들도 모임을 하고 있었지만 나에게 가입 권유를 한 것은 무려 4년 쯤 뒤다. 무엇보다 힘들었던 것은 생존해 계시던 아버님의 절망과, 형제들의 보이지 않는 무시였다.
글을 쓴다는 것은 사서 고생을 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형제들의 눈에는 내가 글을 쓰기 위해 직장을 그만두었다는 것은 그저 핑계일 뿐일 것이다. 무슨 횡령이나, 사고를 쳐서 잘린 것이라고 자기네들끼리 단정을 지었던 것 같았다. 지금은 사정이 바뀌었지만 아직까지 가족들에게 그 시절에는 왜 나를 그렇게 대했냐고 묻지를 않았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까 나라도 가족들과 같은 시선으로 못마땅해하고 동네 사람들 보기에 창피했을 것 같았다.
글을 써서 먹고산다는 것은 생각처럼 쉽지가 않았다. 원고가 완성돼서 출판사에 우송하면 대답이 없다. 기다리다 못해 전화를 해 보면 “원고는 좋지만 우리 출판사와 색깔이 다르다”라는 무성의한 대답을 수없이 들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식으로 문학수업도 들어 보지 못한 내가, 간신히 소설 쓰는 것을 배워서 출판사에 제출했으니 채택되지 않는 것이 당연했지만 그때는 피를 말리는 고통의 연속이었다.
그 무렵 ‘천리안’ 이라는 PC통신이 생겼다.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새로운 것들에 대한 목마름이 강하다. 태블릿 PC도 일찌감치 구입을 했다. 스마트폰의 웹 활용법이라든지, 내 또래 사람들은 상상도 못할 액정 태블릿에 대한 관심도가 높은 것도 성격 탓이다.
그 당시도 나는 보기 드물게 16비트 중고 컴퓨터와 ‘도트프린터’를 가지고 있었다. 서울에서 내려갈 때 청계천 전자상가에서 산 것으로 워드 기능은 있는데 통신을 할 수가 없었다. 통신을 하려면 단말기가 있어야한다. 담뱃값이 없어서 100원짜리 환희를 피우고 있는 내게 통신을 할 수 있는 단말기는 그림의 떡이다. 그런데 어느 날 동생이 집으로 왔다. 한국통신에서 ‘하이텔’ 이라는 통신을 개설하면서 농민후계자들에게 단말기를 한 대씩 대여해준다는 것이다.
천리안이며 하이텔 통신은 문학의 아웃사이더였던 내게 밀크캐러멜 같은 것이었다. 내 시야는 PC통신으로 인하여 전국적으로 넓어졌다. 동호회에 가입을 하고, 작품을 평하고, 가끔은 회원들을 영동 산골로 불러 내려서 밤을 새우며 문학을 토론하고, 소설을 이야기하고 시를 논했다.
유니텔이라는 통신회사가 생겨나면서 통신업계는 3파전이 됐다. 더불어서 대학생과 전문가들 전용이던 통신 세대는 고등학생부터 일반 직장인들까지 넓어졌다. 통신이 보편화 되면서 유료소설 사이트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통신에서 익명으로 글을 올리던 작가들은 급속하게 유료소설 사이트로 편입이 됐다.
나는 유료사이트에 글을 쓰면서 두 마리 토끼를 노렸다. 연재가 끝나면 종이책을 내겠다는 계획이다. 통신으로 보는 문장과 종이책으로 보는 문장은 여러 부분으로 많은 차이점을 보인다. 통신 세대들의 가독률쪽에서 보면 종이책의 문장은 무겁다. 나는 그 점을 재미와 신선한 스토리로 보완 하며 내 존재감을 드러냈다.
컴퓨터가 ‘286’으로 진화를 하면서 윈도라는 것이 생겼다. 윈도는 과거 텍스트 위주의 통신에 새로운 바람을 집어넣었다. 초등학생들까지 키보드를 두들기면서 유료소설 사이트는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PC통신에 연재를 하던 작가들은 모두 자기만의 숲에 고요히 잠겨들었지만 나는 본격적으로 종이책을 출간하기 시작했다. 거의 10년간 하루 12시간 이상, 많을 때는 14시간 동안 손가락에 굳은살이 생기도록 키보드를 두들겼다. 통신에 연재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늘어난 필력이 있었기에 시간이 없어서 글을 못 쓰면 못 썼지. 스토리가 이어지지 않아서 글을 못 쓴 적은 없었다.
글쓰기에 대한 자신감이 붙을 무렵 서서히 회의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빵을 살 생각으로 소설을 쓴다는 것은 다이아몬드로 연탄집게를 만드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가라면 적어도 펄 벅의 같은 소설을 써야한다는 사명감 같은 것이 어깨를 짓누르는 날들이 하루가 다르게 크기를 더해갔다.
나는 2002년 5년 정도 기한을 잡고 현대사 반세기를 배경으로 한 장편소설 집필에 들어갔다. 계획과 다르게 12년 6개월 만에 원고지 2만5000매 분량의 15권짜리 이 완간됐다. 교보문고 광화문점에서 2015년 1월에 ‘작가의 만남’ 행사를 가졌다. 많은 분들이 참석을 해서 성황을 이루었다. 하나같이 “이제 그만 쓰고 쉬어라, 쉬는 것이 어려우면 몇 년 쉬고 다시 시작하라”는 등 그동안의 여정을 치하했다.
나는 그 다음 날 새벽 6시 20분에 컴퓨터 앞에 앉았다. 을 쓰면서 창작노트에 메모해 두었던 장편소설 를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도 나는 소설을 쓰고 있다. 내게 소설을 쓰는 시간은 밀크캐러멜의 맛을 아무도 모르게 음미하는 시간들이다. 내 사직서를 선뜻 받아 준 상사분들에게 땡규!를 보내면서.
우리 이웃에는 일흔이 지난 할머니 한 분이 아들과 함께 산다. 주변에 밭을 가지고 있다. 김장배추며 무, 파, 고추, 들깨, 상추, 시금치 등을 가꾸어 먹고 이웃에 나눠준다. 요즘엔 들깨가 초등학생 키만치 자랐고 김장할 무씨를 파종하여 꽤 긴 이랑에 싹이 터서 귀엽기조차 하다. 이른 아침 산책길을 나서면 밭에서 아침 먹거리를 위해 파를 뽑거나 오이를 따기도 하고 밭을 둘러본다. 아침 인사에 기뻐하며 화답을 빼놓지 않는다. “늙은이에게 늘 인사를 건네주는 것만으로 고맙다.” 밝게 웃는다. 내 사진 속의 등장인물이 될 때도 있다. 간혹 밭에서 딴 가지며 오이를 건네주기도 한다. 일궈 놓은 상추밭에 상추를 따서 먹으라 성화다. 무가 익어갈 무렵이면 먹음직스러운 녀석을 뽑아 준다. 집을 비웠을 때는 나눠줄 채소를 담은 검정 봉지를 현관문에 매달아 두고 간다. 안사람도 맛있는 것을 사서 건네준다. 주고받는 세상인심이다. “이웃사촌”인 셈이다. 농촌으로 외지에서 농촌으로 귀촌이나 귀농을 하면 먼저 정착해 사는 마을 사람들과의 친화 문제가 뉴스거리로 자주 등장한다. 예전의 여유롭고 넉넉한 시골 인심이 사라졌다고 한다. 그럴지도 모른다. 환경이 달라짐에 따른 시대의 변화이지 싶다. 그러나 자기 하기 나름이다.
남남이지만, 사촌과 같은 가까운 관계가 이웃이다. 떨어져 사는 자식보다 함께하는 시간이 많다. 그렇게 가까운 이웃을 이르는 말이 “이웃사촌”이다. 다급한 일을 상의할 사람도 이웃이다. 이처럼 삶에 있어서 중요한 관계망의 하나가 이웃임엔 틀림없다. 사람은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사회적 동물이다. 미우나 고우나 이웃은 있기 마련이다. 요즘은 층간 소음 문제로 원수지간이 된 경우가 없지 않아도 멀리 있는 가족이나 친인척보다 가까이 있는 이웃의 소중함을 느낀다. 근대산업화가 진행하면서 할 일이 많아지고 대체로 시간에 쪼들린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남편과 아내가 함께 직장을 다녀야 가정경제가 유지된다.
1983년에 스위스 취리히에서 해외보험연수를 받은 적이 있다. 휴일을 이용하여 영국을 방문하여 교포 집에 하룻밤을 잔 적이 있다. 그때 안주인이 이런 얘기를 했다. “영국에서는 일손이 있으면 누구든 일을 해야 먹고 산다. 남편 혼자 일해 먹고 살 수 있는 한국 부인들이 부럽다.” 20여 년이 지난 우리나라도 그런 상황이 됐다. 그렇기에 휴일은 그야말로 직장인의 황금 휴식시간이다. 맞벌이하여야 하는 시대이고 자기 일을 찾아 함으로써 보람을 갖는 시대를 산다. 그 시간을 쪼개어 부모를 방문하기는 마음 같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이웃은 중요한 관계망으로 부상할 수밖에 없다. 개인주의와 아파트 문화가 확산하면서 이웃이 멀어지는 듯도 했다. 이웃에 누가 사는지 모르고 지내기 예사였고 함께 쓰는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도 그저 그랬다. 서양의 외국인처럼 낯선 사람을 만나도 어깨를 들썩이며 눈인사를 나누는 모습을 동경하기도 했다. 근래에 이르러 이웃은 더 중요하게 주목받는다. 홀몸노인을 비롯하여 홀로 사는 사람과 세대가 늘어나는 현실에서 더 관심을 가져야 할 분야다. 특히 나이 들어 외로움을 더 타는 시니어에 꼭 필요한 인간관계다. “이웃사촌”으로 내가 먼저 나서야 한다. “늙은이에게 정답게 인사해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우니 점심 사시겠다.”고 나서는 우리 이웃 할머니처럼 말이다.
저출산으로 인한 문제는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코흘리개 어린 시절 다니던 초등학교가 문을 닫는다. 언제나 찾아가면 어릴 때 왁자지껄한 아이들 웃음소리가 들릴 듯한데 잡초만 무성하다. 마음의 안식처를 잃은 듯 한참이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전국 시골 어디를 가봐도 이러한 폐교의 모습을 보는 건 어렵지 않다.
저출산은 생산의 동력을 잃어 경제발전에 막대한 손실을 주기도 한다. 지난 몇십 년 동안 한국의 발전을 이끌어 왔던 것도 높은 수준의 교육열과 풍부한 인적자원에 의해서였다. 1970년대까지 대학의 문은 좁고 고교 졸업자들은 넘쳐났다. 대학입학정원이 졸업생보다 적어 대학을 들어가기가 무척 힘들었다. 그 후 전국에 많은 대학이 생겨났다. 4년제 대학은 물론 전문인을 육성하기 위한 전문대학이 앞을 다투어 문을 열었다. 이들은 교육을 받고 경제성장의 큰 역할을 해내며 한국의 경제성장을 이끌어 왔다.
그 후 몇십년, 지금의 사정은 많이 달라졌다. 저출산에 의한 학령인구(6~21세)감소로 교육의 지형도가 바뀌기 시작했다. 통계청과 교육부에 따르면 1996년 1176만 명이던 학령인구는 2015년 말 기준 24.5%가 감소하여 892만 명이 되었다. 불과 20년 사이 학생이 4분의 1이나 감소한 것이다. 앞으로 2020년이면 775만 명, 2050년에는 561만 명 2060년에는 488만 명까지 급감할 것으로 예측된다.
대학 정원도 2005학년도 전문대학 및 대학 입학정원은 62만 4,333명 이었다. 수능 응시인원은 57만 4,218명으로 5만 명 초과하는 정도였다. 2019년에는 대학 정원보다 고등학교 졸업생 수가 적어질 것이라는 예측이다. 대학은 미달사태로 수도권 대학과 지방대학 간 격차는 더욱 심화할 것이며 문 닫는 대학도 속출할 것이란 전망이다. 2023년에는 10만 명이 부족한 역전현상이 일어날 것이라는 분석이다.
지금도 일부 지방대학은 정원이 부족하여 중국교포로 유지하고 있는 대학도 있다. 교육부에서는 이러한 사태를 예측하여 2023년까지 총 16만 명의 대학 인원을 줄일 계획에 있다. 이 사태를 미리 대비하지 않으면 대학은 미달 상태에 처하게 되고 폐교하는 대학이 나오리라 한다.
초등학교의 폐교에 이어 대학의 폐교는 저출산의 가장 직접적인 영향이다. 교육은 백년대계라 했는데 불과 몇십년 사이 이렇게 된 것이다. 필자가 대학을 다닐 때를 생각하면 상상도 못 할 일이 벌어지고 있다. 치열하게 대학입시 공부를 했던 우리에게 대학의 문은 좁고도 좁았다. 그러던 것이 대학의 정원을 채우지 못해서 문을 닫아야 하는 처지이니 단순히 대학의 정원 문제가 아닌 국가의 장래를 위해서도 걱정이 아닐 수없다
1960년대의 가족계획 표어 ‘덮어놓고 낳다 보면 거지꼴 못 면한다’ 1980년대 표어 ‘하나씩만 낳아도 삼천리는 초만원’이란 표어가 오늘 새삼스레 그리워진다
어른들에게는 누가 봐도 잘못을 범했다는 게 확실한 일인데도 그걸 인정하고 사과하는 일은 힘든 작업 같다.
미안하다 아니면 용서해달라고 하는 말을 해야만 한다면 나이어린 아이들에게라도 하는 습관을 누구나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나는 믿어왔다. 그러나 그런 어른을 본 적이 거의 없다.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인격에 도달한 사람이 드물다는 증거라고 보인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드라마에서도 자주 등장하지만 정말로 선생님까지도 학생들에게 무릎을 반듯하게 꿇고 사과하는 장면을 봤다. 잘못을 용서해 달라고 할 때 나이가 전연 필요하지 않다는 걸 의미하는 것으로 산교육이라고 보였다. 야구 코치가 학생들 앞에서 잘못을 인정하고, 아버지가 아들에게 용서해 달라며 무릎을 꿇는 장면은 아름다운 것이었다. 그들은 정말로 자기의 잘못을 깨달았을 때는 어느 누구이건 간에 그 앞에 무릎을 반듯하게 꿇고 용서를 구한다는 것에 놀라웠다.
일본에 처음 가서 일본 엄마들이 한국에서 온 나를 초대했다. 한국에서는 그 당시 초등학교 한 반이 80명이 넘었다. 그런데 일본에 가니 한반의 정원이 30명이란다. 나는 정말 놀랐다. 초대되어 간 학부형 집에 도착하니 우리 반이 25명이라 1명이 회사에 근무해서 못 나오고 전원 참석했었다. 그렇게 점심을 먹고 얘기를 하는데 너무 놀라웠던 것은 한국은 아주 못 살고 힘든 나라로 알고 있는 것이고, 북한은 아주 잘 살고 굉장한 발전을 하고 있는 나라로 알고 있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당시엔 몰랐지만 한국은 일본 동경에 초등학교도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아 우리가 주재원 자격으로 가도 전학시킬 곳이 없는 실정이었다. 북한은 김일성대학까지 인가를 받은 정식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반해 우린 초등부터 중, 고도 인가가 안 나 있는 실정이었다. 그들은 죠센징(북한사람)은 잘 살고 있는 민족이고 그에 반해 강꼬꾸징(대한민국사람)은 데모나 하면서 나라가 아주 불안하고 힘든 국민으로 알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대 연설을 해야 했고, 내가 구사할 수 있는 걸 모두 총동원해서 일본이 우리를 36년간 식민지화해서 몹쓸 짓을 했다고 열변을 토했다. 별안간 내 앞에 모두 일어섰다. 그들은 구령도 없었지만 똑같이 나에게 조아려 절을 올리면서 ‘유르시떼 구다사이. 혼도니모시와케아리마셍’(용서해 주십시오. 정말 할 말이 없습니다) 긴장된 분위기에 약간은 놀랐지만 무릎 꿇고 바로 일어서지도 않고 엎드려 있는 그들의 모습에 그만 마음이 숙여지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정말 전연 교과서에서 배운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말들이었습니다. 정말 미안하다며 얼마나 고생했을까 말 안 해도 안다며 전쟁에서 지고나면 그 뒤의 국민들의 고생은 정치하는 사람들은 모르는 일이고 설사 안다 해도 그런 일들은 다 무시당한다는 것이다. 국민만 불쌍한 거라고 내게 오히려 위로를 했다. 놀라웠다. 그들이 물어봐서 말을 꺼낸 일도 아니고 중간에 어떻게 하다가 그리로 얘기가 흘러갔던 것인데... 내가 만난 엄마들은 내 또래이니 그 부모들이 당한 일들에 대해 전연 모르고 있던 것이었다. 우리는 미주알고주알 역사에서 다 배웠고, 부모들이 입으로 입으로 전달해서 알아진 것이지만 그들은 역사에서 배우질 않았다 했다. 정말인지 거짓말인지 나는 모르지만 정치인들이 한 일에 대해서 국민으로서 예를 갖추는 그들의 국민성에 놀랐었다. 그들은 잘못을 인정하면 나이와 국적에도 상관없이 나의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더라도 사과할 줄 아는 국민성을 가진 게 부러웠다. 아들에게도 무릎을 꿇고 용서하라고 비굴함 없이 정정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아버지들이 많았으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다. 지금도 변함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