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대학병원에서 안타까운 신생아 집단사고가 났다. 그 원인을 찾느라고 노력하지만 시간이 걸린다. 병원의 부주의에 따른 ‘집단감염’이 유력한 사고원인의 하나로 의심된다. 예전처럼 ‘인재’라는 뻔한 결론이 사고대책의 전부가 될 터이다. 요즘은 한파가 몰아치면서 감기가 크게 퍼졌다. 어린 학생들은 학교 다니기 어려워졌다. 인구가 밀집한 도회지에서 흔히 발생하는 집단감염이다. 많은 사람이 모이는 공중장소를 가려서 가고, 학교는 임시휴교를 하는 경우도 있다. ‘집단감염’을 피하려면 ‘집단‘을 멀리 하여야 한다.
손녀가 산후조리원에서 집단감염으로 사경을 헤맸던 쓰라린 경험이 있다. 쌍둥이 손녀·손자가 태어났을 때 이야기다. 산후조리 중 손녀가 고열로 몸이 불덩이 같고 설사를 하면서 젖을 먹지 않았다. 정체도 모르는 신종플루 때문에 노약자와 영유아는 별다른 대책 없이 공포에 떨었던 때였다. 동네병원을 거쳐 대학병원에 갔으나 ‘치료가 어렵다’면서 손사래를 쳤다. 지푸라기라도 붙잡는 심정으로 아이가 출생한 ‘제일병원’으로 전화를 하였다. ‘신종플루 감염 위험이 크다. 빨리 데려오라.’는 천사의 음성을 들었다.
토요일 오후 제일병원 응급실. 채혈하느라고 주사기를 꽂을 때마다 아이는 아파서 자지러졌다. 당직근무 중인 여의사는 아기의 궁둥이에 코를 대고 대변의 냄새를 맡았다. “검사 결과를 기다릴 시간이 없다. 경험상 세균 감염으로 보이니 치료를 시작하겠다.”고 말했다. 살아 있는 천사의 모습을 보았다. 며칠 후 나온 검사결과도 다행이 신종플루가 아니고 장염이었다. 천사 덕분에 골든타임을 확보하였다. 정성어린 치료로 열도 차차 내리기 시작하였다. 산후조리원에서 집단감염이 자주 발생하여 사회문제가 되던 때였다.
다섯 달 뒤에 외손자가 태어났을 때는 집단감염을 피하려고 산후조리원 대신 우리 집에서 딸의 산후조리를 하였다. 이 녀석이 얼마나 크게 울어댔던지 퇴근해서 보면 아내와 딸은 파김치가 되어 있었다. 저녁에는 아기돌보미가 되었다. 가슴에 안고 나의 어깨에 머리를 묻으면 안기 편하고, 거짓말처럼 곧 잠이 들곤 하였다. ‘외손자와 궁합이 잘 맞는다.’고 모두가 말하였다. 그래서인지 이 녀석은 외가에 오면 지금도 나를 꼭 안고 잔다. 무럭무럭 자라서 어느새 초등학교 1학년생이다.
손녀가 자라는 동안 건강을 항상 걱정하였다. 다행히 별 이상 없이 건강하게 자랐다. 날마다 아내와 함께 가까이 사는 쌍둥이의 등하교를 도우러 다닌다. 방과 후 수업, 영어공부, 체육관 다니면 아이들 말마따나 바빠서 눈코 뜰 새 없다. 저녁 늦게 귀가하는 쌍둥이를 맞으면 하루가 어떻게 지났는지 모른다. 헌데 올겨울에 큰 추위가 닥쳤다. 건강한 아이들이 감기에 자유롭지 못하였다. 방과 후 수업을 줄이고 체육관 운동을 줄였다. 아이들의 위생관리에 주의하고 휴식시간을 늘렸다.
집단감염을 피하기 위한 집단 멀리 하기다.
일대 변신을 예고하듯 서울시 용산구 곳곳은 공사가 한창이다. 미군기지의 평택 이전과 발맞춰 개발 사업 진행 또한 한창이다. 한강대교 북단 쪽 큰 도로변에서는 옛 모습을 도무지 찾아보기 힘들 정도. 더 헐리고 사라지기 전에 용산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강신영 동년기자와 함께 추억의 길을 걸어보기로 했다. 좁다란 골목으로 들어서니 웃음꽃 피는 옛이야기가 살아 있었다. 늦은 밤, 같이 어울리던 친구들과의 만남은 추억 놀이의 하이라이트였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모교, 한강초등학교
용산은 역사적으로 참 다양한 의미와 사건이 중첩되는 곳이다. 과거 서울의 행정 중심지와 가까우면서도 한강 이남과 이북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로서 역할을 다했다. 근·현대 부자들은 용산에 부촌을 형성하며 모여 살기 시작했다. 미군이 이 일대에 들어와 있던 60여 년 동안 자연스럽게 작은 지구촌 같은 분위기를 풍기게 됐다. 강신영 동년기자는 초등학교 입학 전 부모님을 따라 충청북도 영동에서 서울 용산으로 이주했다. 결혼 후에는 용산시장 근처에서 살다가 강남으로 옮겨갔다.
“한강초등학교가 내 모교예요. 삼각지에 용산초등학교가 있었어요. 원래는 거기에 입학했는데 2학년 1학기 때 한강초등학교가 생기면서 용산초등학교 10개 학급을 나누어서 한강초등학교에 보냈어요. 여기 판자촌이 되게 많았거든요. 동부이촌동과 서부이촌동 양쪽에요. 예전에 이쪽에 홍수가 많았는데 이재민이 생기면 학교 운동장에 수용했었어요.”
강신영 동년기자의 어릴 적 추억이 좀 남아 있을까 싶어서 향했던 한강초등학교. 2000년대 중반 학교를 재건축하면서 완전히 새로운 학교가 들어서 있었다. 물난리에 몰려왔던 운동장도 뛰어놀고 공부하던 교실도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
부유했던 용산 시절, 생각만 해도 신난다
“네, 그랬어요. 우리 집이 태평양(현 아모레퍼시픽) 다음으로 부자였어요, 진짜로. 왜 잘살았냐. 용산에 시외버스터미널이 있었는데 강남이고 동서울이고 남부터미널이고 생기기 전에는 용산시외버스터미널이 가장 컸어요. 그곳에서 장사를 아주 크게 했어요.”
용산 시외버스터미널은 1972년부터 1989년까지 경기 남부와 충청도, 경상남북도에 120개 노선, 631대 버스들이 들락거리던 서울의 중심 버스터미널이었다. 하루 평균 2만7000여 명이 이용하면서 일대 교통 체증이 증가하자, 당초 계획했던 1992년 이전을 앞당겨 1989년 강남 일대로 터미널을 옮겼다.
“지방으로 가려면 좌우지간 용산에서 버스를 타야 했어요. 터미널 앞에 상점이
5개가 있었는데 그중 우리 집이 3개 점포를 운영 했어요. 지금 기준으로 보면 구멍가게였지만 명절이 되면 물건이 없어서 못 팔았어요. 진열장에 올려놓기가 무섭게 다 사가지고 갔어요.”
용산터미널 앞에서 성공을 거둔 후 서울역에 또 다른 터미널이 생긴다 하여 주류업으로 업종을 전환해 또 크게 성공을 했다.
“아버지가 그 뒤 주류 도매업을 하셨어요. 트럭이 80여 대나 됐죠. 가업은 둘째 형님이 이어받았어요.”
용산의 추억이 많은 이유는 돈을 많이 번 것도 의미 있지만 어려웠던 시절의 풋풋한 이야깃거리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때는 참… 다 그렇게 살았으니까. 잘살았다고 말했지만 아주 뭐 비까번쩍한 집은 아니었어요. 그래도 그 옛날 프로레슬링하고 권투 중계를 하면 우리 집에 동네 사람이고 친구들이고 와서 텔레비전을 시청했어요.”
오래전 우리 집이 남아 있다
강신영 동년기자가 살던 집이 아직도 남아 있을까 궁금했다. 공사로 정신없는 용산 중심지를 벗어나 한강대교 북단 서울의 몇 안 되는 ‘땡땡거리’ 중 하나인 백빈건널목으로 향했다. 1960~1970년대 정취가 남아 있는 용산의 뒷골목은 마치 드라마 세트장처럼 시대의 한 페이지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한참을 두리번거리고 이 집 저 집을 찾는가 싶더니 강신영 동년기자는 옛집을 찾아내고 활짝 웃는다.
“이 집이었어요. 한 10년 여기서 살았어요. 하숙도 했었는데 그대로네요.”
곧바로 기찻길과 연결된 집. 오래전에는 지나가는 사람들도 많았다. 가끔 얼굴을 마주치기도 했는데 상명여중 여학생과 눈이 마주쳐 설레었던 적도 있었다고.
“지금은 담장을 쳐놓았는데 여기가 다 무허가 집들이 있던 기찻길입니다. 바닥에 귀를 바짝 대면 기차가 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어요.”
어렸을 적에 기찻길 건널목 차단기를 내려주는 아저씨가 멋져 보여 장래희망으로 생각했다 혼난 적이 있다고 강신영 동년기자는 털어놨다.
“예전에 기차가 오면 차단기를 내려주는 일을 하는 분이 있었어요. 한 번 내릴 때마다 수당을 얼마 정도 받는다기에 나중에 크면 저 일을 하고 싶다고 부모님께 말씀드렸다가 혼난 적이 있습니다. 세상에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꿈을 크게 가지라는 뜻이셨습니다.”
현재 백빈건널목 철길은 경의중앙선과 경춘선 ITX청춘 열차와 화물열차가 지나가는 길목이 됐다.
“어렸을 적 골목 중앙통에 긴 의자를 놓고 지나가는 학생들 복장 검사도 하고 그랬어요. 제 눈에 불량하다 싶으면 얌전하게 하고 다니라고 주의도 주고 그랬어요(웃음).”
수십 년 전 그들은 알았을까? 호롱불 밑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공부했던 행동이 어떤 파장을 불러일으킬지 말이다. 교육의 손길이 닿지 않는 아이들을 매일 밤 가르치고 보듬었더니 사회의 귀한 일꾼으로 자라났다. 20대 초반 야학 선생님의 노력은 교육을 넘어선 사랑, 그 자체였다. 이와 더불어 스승을 향한 야학생들의 고마움으로 기억되는 서둔야학. 서둔야학 홈커밍데이 현장에 찾아갔다. 짝사랑하던 선생님을 다시 만나니 새록새록 옛 추억이 떠오르는 것만 같다.
서둔야학, 서울대 농대생의 열정으로 기억돼
‘야학’이 뭔지 모르는 젊은이도 꽤 될 것이다. 집안 사정이 어려워 학교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하던 시절, 뜻있는 사람들이 모여 농촌을 비롯해 어려운 지역의 배우고자 하는 이들을 가르치던 곳이 야학(夜學)이다. 서둔야학도 당연히 비슷한 맥락에서 시작됐다. 일제강점기이던 1926년, 우리 문화를 말살하려는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대한민국의 역사와 문화를 가르치고 국어를 지켜내고자 생겨났다. 수원 서둔리에 설립된 서둔야학은 야학 선생님과 야학생 1000여 명을 배출해냈다. 이곳에서의 배움을 계기로 더 높은 실력을 쌓아 업적을 남긴 이들도 여럿이라고. 1980년 당시 정권의 민주화운동 탄압으로 말미암아 폐교를 결정하면서 공식적인 서둔야학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1983년 잠시나마 야학으로서 기운을 내는가 싶더니 금새 사그라졌다. 1990년에는 야학 선생님과 졸업생들로 구성된 서둔야학회를 조직하고 소식지 발간과 모임을 진행하고 있다. 홈커밍데이 행사도 명맥이 멈췄다 2011년부터 다시 시작했다. 이제는 좀 더 정기적인 모임으로 발전시킬 계획이다.
야학당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서울 관악캠퍼스로 옮기기 전 서울대학교 농업대학교가 있던 자리는 현재 ‘경기 청년문화 창작소’라는 명칭으로 바뀌어 문화 시설로 탈바꿈했다. 아이들이 뛰어놀 수 있는 놀이 공간, 문화 한마당, 다양한 문화 지식들을 향유하고 체험할 수 있다. 오래전 서울대 농대의 원예학관으로 쓰였기에 옛 강의실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이곳이 바로 서둔야학당으로 가기 전 모임 장소. 하나둘 서둔야학을 빛냈던 선생님들과 학생들이 모여들고 들어설 때마다 반가운 눈빛으로 서로를 맞이한다. 모두의 얼굴에 만발하는 웃음이 영락없는 야학 시절 모습 그대로다. 그 사이 많이 변했는지 이름을 알고 나서야 ‘그때 그 선생님이지, 그 학생이지’ 하며 기억을 되살려내는 모습이 정겹다.
황건식 서둔야학회 회장이자 전 서둔야학 교장은 인사말을 통해 간단하게나마 서둔야학이 걸어온 길에 대해 입을 열었다.
“1963년, 제가 서둔야학에 들어왔을 때는 초등학교 교육을 하고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문맹자 교육을 많이 했습니다. 해방 후 교육을 못 받아 글 모르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1965년에는 중등 과정을 상설했습니다. 서둔야학의 순수한 마음이 정치적 물결에 희생된 것이 사실이죠. 군부독재세력에 대한 저항정신을 가졌던 것은 분명하죠. 젊은 청년들이었으니까요.”
야학 선생님과 학생들의 소개가 끝난 후 초대가수 3대 뚜아에무아인 김은영씨와 함께 추억의 노래를 듣고 함께 부르는 시간을 가졌다. 야학당 시절, 밤 10시쯤 수업을 마치면 선생님들이 목장길과 나무숲을 지나 매일 집을 바래다줬다고. 그때마다 한국의 가곡이며 미국 민요며 노래를 부르며 길을 걷곤 했다. 동년기자 박애란씨도 이에 대한 그리움이 넘쳐났다.
“우리들이 야학에서 공부한 것은 공부보다 사랑과 관심이었어요. 부모들은 생존에 허덕이고 있었죠. 아이들한테 사랑? 관심? 이런 것은 사전에 나오는 것이었죠. 야학에서 선생님들이 항상 정성을 다해 가르치고 사랑해주셨어요. 그리고 집으로 갈 때는 노래를 부르면서 집으로 데려다주셨어요. 위험하다고요. 그땐 몰랐는데 나중에 ‘금발의 제니’, ‘매기의 추억’이라든가 이런 음악이 나오면 어김없이 눈물이 나요.”
서둔야학교의 홈커밍데이
가을 소풍처럼 나무 밭에 모여앉아 도시락을 까먹은 후, 서둔야학교로 향했다. 1950년대 서울대학교 주위 교회나 기관의 건물에서 야학교를 열다가 1965년 야학 선생님들이 돈을 모아 교내 연습림 근처에 대지를 매입해 스스로 건물을 지었다. 당시 뜻이 있던 교수에게 지원을 받고 일일주점으로 맥주를 팔아 돈을 모았다고 했다. 서울대학교 농대가 관악캠퍼스로 넘어가면서 인적이 드물어진 서둔야학당 앞에는 ‘서둔야학 유적지’라고 쓰인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잠겨 있던 문이 열리는 순간 옛 야학당 학생들의 책 읽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몇 해 전, 황건식 회장이 사비를 들여 야학당을 복원한 덕분에 비교적 깨끗한 모습으로 야학당 사람들을 맞이했다. 비록 풀이 높이 자라고 사람이 찾아왔던 흔적은 없지만 말이다.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가 천장을 바라보니 상량문이 시절을 기억해내듯 적혀 있었다. 학교 구석구석을 둘러보고 교가도 같이 불러보며 뜻깊은 시간을 보냈다.
황건식 회장님에 이어 내년부터 서둔야학회 회장을 맡게 되는 김기옥씨는 서둔야학당에 대해 “우리가 정규 교과과정에 의해서 제대로 가르쳤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인성교육 차원에서 사랑으로 학생들을 가르쳤기에 졸업생들이 잊지 못하는 것 같다”, “이곳을 나온 모두가 건전한 사회인으로 살고 있는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다.
평범한 문학관을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충청북도 영동군 매곡면에 위치한 이 작은 문학관은 지자체나 정부의 지원을 받는 안정된 사람들에 의해 운영되는 문학관과는 완전히 다르다. 소설가 이동희에 의해 운영되고 있는 농민문학기념관은 그의 소장품들과 사유물 그리고 농민문학에 관한 자료들을 모아놓은 곳이다. 번듯한 입구나 잘 차려 입은 안내인은 없지만 농민문학이 표현하고자 하는 삶의 치열함이 느껴진다. 이곳을 어떻게 이용하는가에 따라 누구에게는 훌륭한 박물관이 되기도 하고, 누구에게는 학교 또는 도서관이 되기도 한다.
둘러보니 농민문학을 이야기할 장소로 여기만 한 곳이 있을까 싶다. 전형적인 농촌마을. 당연히 대중교통을 이용한 방문은 불편하다. 영동과 물한을 왕복하는 버스가 문학관 앞 노천리에 서지만 하루 다섯 번만 운행된다. 다행히 고속도로가 멀지 않아 경부고속도로 황간IC로 나오면 차로 20분 거리다.
과거의 흔적만 남은 마을 앞 가게 터를 지나 골목으로 좀 걸어 들어가자 마을회관이 보이고 그곳을 지나니 농민문학기념관 앞이다. 관장이자 창립자인 소설가 이동희의 사택을 겸한 곳이기 때문에 주의 깊게 들여다보지 않으면 가정집과 구분하기 힘들다. 마당에는 작은 텃밭까지 있다.
민초의 삶 다룬 농민문학
이곳을 방문하기 전에 알아야 할 것이 있다. 농민문학에 대해서다. 농민문학에 대한 정의는 시대에 따라 조금씩 변화되어왔다. 이데올로기의 갈등이 시작됐던 1930년대 초에는 일종의 노동자문학의 하위 개념으로 빈농을 계몽해 사회주의 사상을 따르도록 하는 수단으로도 활용됐다. 이후 농촌의 자연이나 지방색, 농민의 생활을 그린 문학으로 변화해왔다.
대표적인 농민문학으로 손꼽히는 작품은 이광수(李光洙)의 , 이기영(李箕永)의 을 필두로, 이무영(李無影)의 ·, 김동리(金東里)의 등이다. 이동희 관장은 농민문학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4차 산업시대에 접어든 농촌은 과거와 많이 바뀌었지만 땅과 흙은 변한 것이 없어요. 농민에게는 쌀이 떨어지고 보리도 나지 않는 절량기를 버텨온 정신이 있어요. 흙의 마음 말이에요. 농민문학은 그것을 표현하고 추구하는 문학입니다. 밭 갈고 논매는 이야기보다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직면해야 하는 삶의 이야기가 소재가 됩니다.”
소설가 이동희 일생의 자료 모아놔
농민문학기념관이 설립된 것은 2005년 2월 10일. 문학관 설립에는 이동희 관장의 스승인 소설가 이무영을 기념하기 위한 취지도 있다. 이동희 관장은 문학 지망생 시절 단국대학교 국문과에 진학하면서 이무영 교수와 인연을 맺었다. 이후 그의 가르침을 통해 소설가로 활동하게 되었고, 단국대학교에서 스승의 강의를 이어받아 1978년부터 2003년까지 국문과 교수로 강단에 섰다. 대표작으로는 소설 과 등이 있다.
문학관 설립을 위해 이 관장은 한국전쟁 때 소이탄을 맞아 불탄 옛집 터에 흙벽돌을 쌓기 시작했다. 너와로 지붕을 이어 복원한 생가에 모교 연구실에 있던 책과 자료를 5톤 트럭으로 네댓 번 날라야 했다.
현재 농민문학기념관에는 농민문학 작가인 이무영 선생의 작품을 비롯해 소설가 류승규, 오유권, 박경수, 김용호, 구상, 권웅 등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또한 영동 지역의 작가 박희선, 박운식, 장지성 등의 작품도 만날 수 있다.
이 문학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도서는 단행본과 잡지를 포함해 약 5000권 정도다. 여기에는 1930년대 농민문학의 영향을 받은 북한의 책들과 잡지 도 포함되어 있다. 연변문학예술연구소에서 편찬한 , 한글 소설을 출간하는 중국 출판사의 단행본도 전시되어 있다.
이 관장은 이 문학관을 기반으로 한 모임 ‘한국농민문학’을 바탕으로 계간지 도 출간 중이다. 한국농민문학 회원은 약 500명. 1990년에 창간호를 발간해 2017년 여름호까지 통권 102호를 출간했다.
지역 주민들의 사랑방 역할도 해
규모는 작지만 이 문학관을 통해 다양한 행사도 진행하고 있다. 지역 주민을 대상으로 창작교실 ‘농민문학 사랑’을 운영하고 있고, 전원문학 콘서트도 연다. 얼마 전에는 농민문학 4대 작가 이무영, 류승규, 오유권, 박경수의 활동전도 열었다.
때로는 인근에 위치한 매곡초등학교 학생들의 글짓기 사랑방이 되기도 한다. 전교생이 30여 명에 불과한데, 그중 절반가량이 문학관에서 글쓰기를 배운다. 이 관장은 “아이들의 삶의 수양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운영하고 있는데, 아이들 반응도 좋다”고 설명한다. 학생들이 관심 있는 책을 선정해 독서 후 토론도 하고 독후감 쓰기, 시·수필·소설에 대한 설명이 수업으로 진행된다. 이 관장의 희망은 문학관 자료들이 필요한 많은 사람에게 쉽게 쓰이도록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관련 협회와 다른 문학관, 박물관과의 교류를 통해 안목도 넓히고 공부도 많이 하고 있어요. 시골 농촌의 작은 시설이지만 세계적인 문화유산과 호흡하고 있는 셈이죠. 소장품 등록이나 데이터베이스 작업을 통해 궁벽한 지역의 자료가 중앙으로 연결되도록 하고 싶어요. 또 한 집 한 집 민족의 애환을 지니고 있는 지역 농가를 개발해 마을 전체가 박물관으로서의 기능을 갖게 하는 연구도 진행하고 있습니다.”
▲ 관람 정보
주소 충북 영동군 매곡면 노천리 622-3
전화 043-743-5186
관람시간 10:00~17:00
휴관일 매주 월요일, 명절
관람료 무료
‘온누리 사랑 챔버 오케스트라’는 장애인 챔버 오케스트라로서 국내에서 독보적인 자리에 서 있다.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있는 손인경(51) 단장은 한국에서 태어나 홍콩에서 자랐으며 예일대 음악 박사를 취득한 전문가로서, 1999년에 온누리 사랑 챔버 오케스트라를 창단했다. 올해로 18년째 오케스트라를 운영하면서 그녀는 스스로도 많이 배우고 성장했다고 말한다. 언젠가는 북한에서 공연을 하고 싶다는 꿈을 가진 그녀를 만나 사랑 챔버에서 사랑을 지휘하게 된 사연을 들어봤다.
“작게 애기 활~ 둘둘셋, 셋둘셋, 크게 쫙쫙 시원하게, 미혜씨 한 번 더 멈추고 혼자서~ 멀리 둘, 파~ 둘, 올리고 내리는 활 부드럽게, 선생님 손만 봐요, 낮음 미~~ 참아야 해요, 너무 잘해서 한 번 더, 참 잘했어요~”
매주 화요일 ‘사랑 챔버’ 연습실에서 손인경 단장의 암호 같은 손놀림으로 화음이 미묘하게 달라졌고 쩌렁쩌렁 악기들이 울렸다.
손 단장의 암호에 가까운 신호와 몸짓은 단원들만을 위한 특별한 지휘처럼 보였다. 그녀는 눈빛과 표정, 손 모양으로 단원들 개개인에게 사인을 주며 가르친다. 아이들을 혼내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즐겁게 할 수 있도록 쓰다듬어주고 이끌어줘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여느 보통 아이들과 똑같이 말이다.
통제가 어려운 지적 장애 단원들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시키지 않아도 피아노 소리가 들리면 저절로 자기 자리에 가서 앉았다.
“악보도 모르고 악기를 어찌 다루는지도 모르던 단원들이 이제 연주로 감동을 줄 뿐만 아니라 복음을 전하고 영혼을 치유하는 작은 선교사들이 됐어요. 아이들과 코드를 맞추고 적응해가면서 하나님 안에서 성장했어요. 제가 아이들한테 배워요.”
학부모님, 악기 선생님, 자원봉사 선생님, 단원들. 100여 명이 넘는 인원들이 부산하게 움직인다. 불쑥 의자에 서 있는가 하면 쉴 새 없이 왔다 갔다 돌아다니거나 빽 소리를 지르고 울고 웃고 떠드는 60명의 단원들 곁에는 사랑이 넘치는 학부모와 자원봉사 선생님들이 있다.
바이올리니스트 손 단장은 코스모폴리탄으로서 한국인의 삶을 보여준다. 그녀는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세 살부터는 홍콩에서 자랐다.
“어머니가 피아노를 전공하셔서 저도 피아노를 가까이 하게 됐죠. 그런데 어느 날 기타를 치는 사람이 멋있어서 고무줄로 기타 비슷한 걸 만들어 놀았어요. 그리고 어머니에게 기타를 사달라고 졸랐죠. 그랬더니 어머니가 기타는 커서 안 된다면서 대신 바이올린을 사주셨어요. 그때부터 바이올린을 켜기 시작했고 콩쿠르에 나가 입선하고 신문기사에도 나고 칭찬도 받았죠(웃음).”
그저 칭찬만 받은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자리매김한 그녀는 한국인 최초로 예일대 음대 음악 박사까지 취득한다. 그리고 1990년에 한국으로 돌아온 그녀는 대학에서 강의를 하며 지내던 어느 날사촌오빠를 따라갔다가 온누리교회와 만나게 됐다.
거룩한 부담감으로 시작된 오케스트라
“1999년 4월 1일에 바이올리니스트 장영주씨의 독주회를 가서 볼 일이 있었어요. 독주회였는데, 그날 앙코르를 받고 풀 오케스트라 세팅으로 남학생들이 나와서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 ‘마이웨이’ 등을 연주하더군요. 알고 보니 보육시설인 부산 소년의 집 학생들이었어요. 보육시설에서 지내는 그 아이들이 미사시간에 떠드니까 악기를 쥐어주면서 연주가 시작된 것이라고 들었어요. 그 많은 애들을 대체 누가 가르쳤을까, 충격을 받았죠.”
‘나는 뭘 하고 있지, 나누지도 못하는구나’라는 반성을 하게 됐고 그와 같은 오케스트라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생각은 부담감으로까지 발전했다.
“목사님이 ‘뭔가 해야 하는데 하는 생각이 들면 그것은 거룩한 부담감’이라고 하셨죠. 이것이 그 거룩한 부담감인가 싶었어요. 저는 자연스럽게 장애인 오케스트라를 떠올렸어요. 바이올리니스트 이작 펄만은 소마마비 장애가 있어도 국제적으로 성공한 연주자가 됐잖아요. 한국의 장애아들 중에도 재능은 있는데 선생도 없고 악기도 없고 지원도 없어서 발견되지 못하고 있는, 숨어 있는 이작 펄만이 있을 것 같았어요.”
온누리교회 집사인 손 단장은 온누리교회에 연락해 자신이 챔버 오케스트라를 만들어 장애아들을 데리고 음악을 지도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교회에서 모집이 시작됐다. 하지만 처음 시작하는 일, 좌충우돌이 없을 리 없었다.
“교회에서 장애아들을 모으는데, 하용주 목사님이 정서장애아, 학습장애아, 지체장애아 모두 지원하라고 했어요. 저는 신체장애만 생각했지 지적장애까지는 생각도 못했어요. 그리고 지금처럼 풀타임으로 하게 되리라고는 전혀 예상 못했죠.”
울면서 아이들을 가르쳤던 첫 일 년
장애인 오케스트라에 대한 정보를 찾아봤는데 타악기와 관악기를 다루는 곳들은 이미 어느 정도 있었다. 그런데 극도의 섬세함이 필요한 바이올린이나 첼로 등의 현악기를 다루는 곳은 없는 상태였다. 참고할 사례가 없으니 말 그대로 맨땅에 헤딩하는 입장일 수밖에 없었다.
“처음은 다섯 명으로 시작했죠. 첫 일 년은 정말 힘들었어요. 아이들이 모이기만 한 정도였죠. 뭘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었거든요. 제가 경험이 전혀 없었고, 자폐 증세도 잘 모르고 그러다 보니 아이들의 장애 등급이나 유형 같은 개념도 전혀 몰랐고. 부모님들의 요구도 부담됐어요. 눈도 못 마주치는 첫 일 년은 차에서 울고 그랬어요. 오늘은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하고.”
그러나 선한 의지로 시작한 일, 망하라는 법은 없었나보다. 막상 아이들을 만나면 어떻게든 된 것이다.
“연주회 섭외를 받고 그걸 위해 연습을 하게 되니 목표가 생기면서 어느 정도 정비가 됐어요. 첫 연주회는 완전 눈물바다였죠. 첫 연주회 후 새로운 섭외를 받고, 사례비도 받게 됐어요. 지금은 사례비가 엄청 많아졌어요.”
현재 ‘온누리 사랑 챔버 오케스트라’는 봉사하는 선생님 40명, 단원은 현재 60여 명에 이르는 큰 규모로 성장했다. 물론 성장통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방송에 나가고 언론을 타면서 막무가내로 내 아이도 가르쳐 달라고 오는 부모도 있었지만, 연주보다는 기도를 더 많이 해야 한다며 안 나오는 학생도 있었고, 악기 연주가 성향에 안 맞는다며 그만둔 아이도 있었어요. 그러면서 차차 정리된 거죠.”
부끄럽지만 사랑 챔버와 함께 성장하다
생전 처음 만나는 특별한 아이들에게 자신이 배운 것들로는 가르칠 수가 없었다. 온누리 사랑 챔버 오케스트라의 성장은 손 단장 개인의 성장이기도 했다.
“제가 학교에서 배운 것들 중에 아이들에게 전수할 게 하나도 없었어요(웃음). 아이들이 이탈리아어를 알 리가 없으니 연주할 때 힘을 빼라는 말도 못하고 ‘원숭이 팔’, ‘애기 팔’ 이렇게 유치원 아이 가르치듯이 해야 했죠. 악보를 읽을 줄 모르는 학생들을 위해 손 모양을 개발해서 가르쳐줬어요. 그래도 멜로디를 알고 박자 감각이 있으면 배우기 시작해서 첼로를 연주할 때까지 십 년 걸린 경우도 있었어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려도 기다렸던 거죠.”
가능성이 보이면 시간이 오래 걸려도 기다려준다는 것이야말로 온누리 사랑 챔버 오케스트라의 강점이었다. 그래서 오케스트라에서 가장 어린 아이는 초등학교 6학년, 제일 나이 많은 아이는 1977년생이다.
“창단 멤버 5명 중 한 명은 첼로, 한 명은 클라리넷을 대학교에서 전공하게 됐어요. 그런데 저한테 보람은 그런 큰 사건들이 아니고 뭔가 안 통했던 거 같은데 통하는 그런 순간들이에요. 벽이 있었는데 교감이 되는 그 순간. 그리고 우리는 숙제를 카톡으로 해요. 물론 어머니가 도와줘야 하죠. 악기를 연주한 영상을 카톡으로 보내면 아이들이 그걸 보면서 자신의 연주를 점검하고 연습을 하죠. 스마트폰 기술이 저희를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셈이에요(웃음). 그런데 그렇게 해서 다음 연습에 모이면 소리가 달라진 걸 느낄 때가 있어요. 제가 투자한 만큼 아이들이 따라온 거죠. 그때 큰 보람을 느낍니다.”
이 과정에서 아이들은 음악만 하는 게 아니라 음악을 하면서 삶을 배우게 됐다.
“아이들이 변화된 것을 보는 것도 기쁘지만 어머니가 기뻐하시는 것을 보면서 제 기쁨으로 돌아오더군요. 단원 중 자폐아가 70~80%예요. 심한 애들은 정말 이유 없이 깨물고 소리 지르고 해요. 어머니가 어떻게 해도 안 되는 아이들이 있죠. 컨디션이 안 좋은 날에는 눈도 안 마주치고 앉아 있다가 뛰쳐나가고. 그런데 그런 아이들이 피아노 전주만 나와도 악기를 잡고 준비하는 모습을 보여요. 본인들이 보람을 느끼는 거죠. 서로 챙겨주는 모습도 발견되고. 그건 이 아이들이 가지지 못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사회성이죠.”
“우리의 목적은 공동체”
요즘 손 단장은 과거와는 조금 다르게 오케스트라를 운용하고 있다.
“예전에는 잘하는 애들이 있으면 못하는 애들도 있기 때문에 공평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기회를 덜 줬어요. 아무래도 아래쪽으로 더 치우친 방향성이었죠. 지금은 아이들의 실력을 나눠서 잘하는 아이는 더 잘할 수 있도록 도와줘요. 그보다 못한 애들은 못한 애들을 위한 클래스가 있고요. 현악을 하는 아이들은 소규모 실내악 공연을 할 수 있도록 따로 가르치고 있어요.”
일반인도 다루기 어려운 악기인 바이올린이나 첼로를 장애인이 다룰 수 있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뮤직 테라피라고도 하죠. 여기에 오는 아이들의 95%는 음악을 너무 좋아해요. 어떤 때는 엄마는 귀찮아하는데 아이가 ‘사랑 챔버 사랑 챔버’ 노래를 불러서 끌려오는 경우도 있고(웃음). 여기 오면 너무 즐거워하는 학생도 있고.”
온누리 사랑 챔버 오케스트라의 목표는 공동체다. 더 뭉쳐야 한다는 게 손 단장의 생각이다.
“그동안 큰 공연도 해왔지만 일단은 큰 연주가 있으면 저희가 뭉쳐지거든요. 아이들도 집중적으로 해야 하는 부분이고. 연주하는 모습을 녹화해서 올리면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것 같아요. 때로는 부모님도 배워오는데 그것도 큰 자극이 되거든요.”
손 단장은 사랑 챔버 단원들을 위한 바람도 덧붙였다.
“언젠가는 이 아이들의 부모가 돌아가시고 나 또한 언제 떠날지 모르니까 함께 살 공동체 공간이 만들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내 뜻대로 된 적이 없었지만 저에게 할 일을 알려주시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뜻대로 잘 쓰일 수 있도록 기도하고 있어요.”
카네기홀보다는 북한에서 공연하고파
손 단장은 과거를 돌아보며, 주어진 삶대로 사는 것이 자신의 삶이었다고 평가했다.
“홍콩에서 바이올린을 공부하게 되고, 좋은 학교를 나오고, 한국에 돌아와 결혼을 하기까지의 과정에서 제가 계획한 건 하나도 없었어요. 저는 그냥 주어진 대로 살았을 뿐이죠. 개인적인 목표요? 개인적으론 없어요(웃음). 지금 하는 일이 시간이 많이 필요하고.”
그러나 주어진 삶을 산다는 것이 무조건 수동적으로 사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다.
“사명이 주어졌을 때는 ‘왜 시키셨지?’ 하고 생각한 적도 있지만 저를 시켜주셔서 감사하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하는 거죠. 제가 한 가지 맡겨진 일이 있으면 끝장을 보는 스타일이긴 해요(웃음).”
그 말대로, 손 단장은 사명감만으로 시작한 오케스트라를 지금의 준프로급 오케스트라로 성장시켰다. 그녀가 말하는 끝장을 보는 마음가짐 덕분이었을 것이다.
손 단장은 ‘내가 잘나서가 아니구나, 하나님이 다른 사람 돌보는 일을 시키려고 나를 이렇게 만드신 거구나’라고 깨닫는 데 10년이 걸렸단다. 두 아이 엄마로서 대학 강의에 봉사활동까지 하느라 바쁜데 최근에는 음반도 내놨다. 손 단장이 바이올린, 배일환 교수는 첼로, 이민정 교수는 피아노를 연주했다. 그녀는 예일대 음대 재학 중인 1992년 이후부터 탄탄하게 연주 실력을 쌓아 실내악계에서 기량과 예술성을 인정받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사랑 챔버 같은 오케스트라가 있으면 카네기홀을 대여하고 언론을 타려고 노력하는데, 저희는 시작부터가 그냥 만들어진 것이고 하나님이 시키신 대로 따랐을 뿐이에요. 길이 열리는 대로 자연스럽게 이뤄진 거죠. 얼마 전에는 북한 장애인 오케스트라와 함께할 기회도 있었는데 핵실험 때문에 무산됐죠. 사실 저희 목표는 카네기홀보다는 북한이에요.”
극작가 노경식(盧炅植·79)에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했다.
“어떤 얘기든지 들려주세요.”
극작가란 무언가. 연출가에게는 무한대의 상상력을, 배우에게는 몰입으로 안내하는 지침서를 만들어주어 관객에게 의미를 전달하는 자가 아닌가? 그래서 달리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저 인생 후배로서 한평생 외길만을 걸어온 노장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고 싶었다. 무대 위 모노드라마를 관람하듯 말이다.
자, 그럼 이제 커튼을 열어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봐 주시겠습니까?
노경식 희곡집 1권 을 꺼내 들다
인터뷰에 나가기 전 서재에서 책 하나를 찾아냈다. 노경식의 첫 희곡집 이었다. 노경식 작가와도 가까웠던, 지금은 고인이 된 은사에게 2004년 초판을 선물로 받았다. 책을 받고 13년 만에 일종의 필자 사인회를 거행(?)한 것. 1965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로 당선된 걸 생각하면 한참 시간이 흘러 희곡집을 발간했다.
“내가 책을 늦게 냈거든. 그래도 지금까지 7권이나 나왔어요. 희곡은 한 40편 되는 것 같아. 그중에 5편 정도 빼고는 다 공연을 했습니다.”
전북 남원 출신인 노경식 작가는 경희대학교 경제학과를 거쳐 서울예술대학교의 전신인 드라마센터 연극아카데미에 들어가 동랑 유치진, 여석기 선생으로부터 극작 수업을 받았다. 올해 80의 나이에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한국 리얼리즘의 대표 현역 극작가다. 노경식 작가는 토속적인 색채에서부터 역사, 정치극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작품을 써왔다. 앞서 언급한 1971년 작품 으로 제8회 한국연극영화 예술상(백상예술대상) 희곡상과 연기상 등을 받아 세간의 이목을 받았다. 작년 극작50주년 기념공연 을 비롯해 , , 등은 노경식을 대표하는 역사 시대극이다.
“내가 왜 역사나 정치에 관심이 많냐면 경제학과 중에서도 경제사를 전공했기 때문입니다. 조선, 한국 경제 그런 쪽. 그래서 시대극이나 역사적인 소재가 많은 부분을 차지합니다. 독립운동사라든지 임진왜란도 많이 썼고요.”
작가 황순원의 눈에 든 남원 촌놈
처음 노경식의 가능성을 알아본 사람은 경희대 재학 시절 만난 소설 의 작가 황순원이다. 황순원은 노경식이 수강하던 교양국어의 담당 교수였다.
“대학교에 입학해서 ‘하와이’란 제목의 수필을 교내 학보사에 투고했어요. 저는 당해본 적 없는데 전라도 출신 선배들이 서울에 올라와 가난 때문에 차별당한 이야기를 쓴 글이었어요. 꽤 길었는데 학보에 실렸더라고요. 그것을 보고 황순원 선생님이 잘 썼다며 칭찬해주셨습니다. 얘기를 들어보니 황 선생님도 동경 유학 시절 비슷한 차별을 당한 적이 있으셨더군요.”
황순원은 학생 노경식을 볼 때마다 “너 수필 잘 쓰더라”며 글쓰기를 부추겼다. 결국 또 한 번 파란의 주인공이 됐다.
“우리 학교에는 그때 교내 문학상 제도가 있었어요. 미술, 음악, 시, 소설, 그림…. 1등이 되면 등록금이 면제였습니다. 황순원 선생님 역시 제가 글을 문학상에 내보기를 계속 권하셨습니다. 저는 그냥 희곡이나 한번 써볼까 해서 써냈습니다. 근데 그게 또 1등이 된 겁니다. 희곡을 쓴 건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상을 주는 교수들의 입장이 사실 난감했다. 이전 수상자였던 무역학과 학생이 장학금만 받고 글쓰기를 멈춘 것이다. 경제학과인 노경식 또한 장학금을 받고 글을 쓰지 않으면 주나 마나 한 상황이 되니 심사위원 교수끼리 회의를 열었다.
“희곡 심사위원이었던 김진수 선생 옆에 있던 황순원 선생님이 ‘왜? 경제학과야? 노경식?’ 하더니 ‘어, 노경식이 내가 알아. 내가 보증할게’라고 해서 제가 된 겁니다.”
결국 노경식은 빚을 톡톡히 갚은 거다. 대학 시절 희곡으로 장학금을 타는 바람에 지금까지도 열심히 작품 활동을 하는 극작가로 사니 말이다.
“ 초연 때 모셨는데 작품이 마음에 드셨나봐요. 내 손을 꼭 잡고 ‘애썼다. 잘 썼다’ 그러시면서 ‘희곡이 소설보다 좋은 거 같아. 관객을 놓고 박수도 받고 야, 희곡 좋은 거 같다’ 나한테 그런 말씀도 하시더라고. 뭘 잘해드린 적도 없는데 참 예뻐해주셨어요. 황순원 선생님이 결혼식 주례도 서주시고 말입니다. 선생님이 서주신 제자가 많이 없을 겁니다.”
현역 작가로서 저력을 과시하다
인터뷰 차 만났던 9월 대학로의 한 카페. 그 어느 때보다 한결 여유로운 얼굴이었다. 지난여름 제2회 늘푸른 연극제를 통해 무대에 올린 연극 가 관객의 뜨거운 호응과 평단의 찬사 속에 막을 내린 것. 공연이 끝나고 원로 연극인들과 함께 기분 좋은 온천 여행을 다녀왔다고 덧붙였다.
늘푸른 연극제에서 노경식 작가가 선택한 는 신의 한수였다. 그와 함께 연극제에 초청된 배우 오현경, 이호재, 연출가 김도훈은 대표작을 내걸고 공연했다. 노경식 작가 또한 대표작인 을 공연할 것이라 대부분 사람들은 예상했다.
“는 2005년에 극단 미학에서 초연했던 작품입니다. 기대만큼 결과가 좋지 않았어요. 그런대로 성과가 나면 모르겠는데 미치지 못하니 작가는 한 번 더 해보고 싶은 생각이 있잖아요. 도 마침 생각하고 있었는데 늘푸른 연극제에 선정됐습니다. 나를 선정한 거니까 내가 맘대로 작품을 고를 수 있다기에 를 선택했습니다. 좀 오래전에 써서 개작을 많이 했어요. 이번에는 만족합니다.”
그의 대표작 을 기다린 관객에게는 아쉬운 일이다. 하지만 노경식 작가는 현역 작가로서 과감한 도전에 박수받기를 택했다. 원로 연극인으로서 지금껏 살아온 노고에 대한 격려 대신 말이다.
“만족이야. 기분 좋습니다. 이번 연출을 맡은 김성노씨한테 고맙다는 소리를 몇 차례 했어요. 배우들의 연기도 좋았습니다.”
는 일제강점기 친일파의 반민족행위를 처벌하기 위해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를 제헌국회에 설치했으나 1949년 친일 경찰의 ‘6·6습격사건’을 기점으로 반민특위가 해체되는 과정을 보여준 정치극이다.
여전히 잘 팔리는 극작가
“나는 잘 팔려, 고민 안 해(웃음).”
연극 가 끝나기가 무섭게 노경식 작가는 신작을 내놓았다. 이미 세상에 내놓은 것, 꼭 쓰겠다고 작정한 것 두 가지 작품이 있다. 여전히 잘 팔린다며 너스레를 떠는 모습이 재밌다. 우선 세상에 내놓은 작품은 이라는 제목의 4·19혁명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4·19혁명에 관한 작품이 없어요. 왜 없는 줄 알아요? 4·19혁명이 나고 5·16 군사정변이 났잖아. 그 이야기에 손댔다가 시끄럽고 어쩌고… 몸을 사리는 거지 작가들이. 내가 4·19세대거든. 나라도 본격적으로 4·19 얘기를 써야 되겠다. 내가 겪은 이야기니까. 그래서 마침내 성공을 했어요.”
4·19혁명과 관련해 작가로서의 사명감이 오래전부터 있어왔다는 노경식 작가. 몇 달을 걸려서 자료를 찾고 화보집을 보면서 작품을 썼다.
“내가 아는 얘기, 겪었던 일이에요. 그리고 4·19는 영웅들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민초의 이야기죠. 구두닦이, 우리 학생, 대학생, 초등학생들도 나왔어요. ‘총 쏘지 마세요’라면서요. 양아치들, 매춘부까지 다 나왔던 민초들이 이뤄낸 역사입니다.”
이번 작품의 주인공은 매춘부라며 깜짝 놀랄 이야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작가의 고향 남원과 관련한 토속적인 얘기를 쓰고 싶단다.
“사실 봄꽃이 아니었으면 먼저 쓰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자꾸 뒤로 밀리고 있어요. 늘 생각은 있어요. 우리 집안의 얘기도 관계가 있고요. ‘밤으로의 긴 여로’ 같은 것을 쓰고 싶은데 어찌 될지.”
프리한 80? 행복한 극작가!
노경식 작가와 얘기하는 동안 머리에 맴도는 의문 한 가지가 있었다. 지금까지 만나온 극작가는 대부분 연출과 겸업을 하고 자신만의 극단을 거느리고 있다.
“나는 한 번도 극단에 들어가본 적이 없어요. 단원이 돼본 적도 없고. 그냥 늘 자유롭게 조직에 구애받지 않고 연극을 했어요.”
듣고 보니 이유는 간단했다. 노경식 작가가 극작가로 데뷔한 1965년도에는 출판사 편집장을 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드라마센터 동기들이 연극판으로 몸을 옮겼을 때 노경식 작가는 매일 출근을 해야 했다. 대신 누구든 노경식 작가가 쓴 대본을 넘겨주면 공연을 하겠노라고 했다.
“국립극단에서도 내 작품을 하겠다고 하니까 극단에 소속될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내 극단을 가져보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도 없다. 다들 잘해주고 공연 잘하는데 굳이 그럴 필요도 못 느꼈다. 무엇보다 스스로 간섭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어떤 작가들은 연출 해석이 잘못되면 언성을 높이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런데 그건 내 스타일이 아니에요. 혹시라도 연습실에 가면 앉았다가 ‘술이나 한잔하자!’ 그러면 땡이고. 술 마시다가 살짝 얘기하면 되지. 화내고 그럴 필요 전혀 없어요. 한 사람 머리보다 두 사람이 낫지 않겠어?“
연출자도 작가도 창조자이고 작품을 좋게 만들 뜻으로 만났으니 서로의 신뢰가 아주 중요하다고 했다.
대학로 만빵 모임 좌장 납십니다!
경계 없이 만나고 사귄 덕에 주위에 사람들이 넘쳐난다. 그러다 만든 모임이 바로 만빵 모임이다. 노작가가 좌장(?)으로 있는 만빵 모임은 2년째 대학로 바닥을 주름 잡는 원로 연극인 모임으로 자리 잡았다.
“두 주에 한 번씩. 매주 목요일 오후 5시. 만원씩 가지고 빈대떡 주점에서 모이다가 ‘만빵 모임’이 된 거예요. 혼자 부담하려면 너무 크니까. 여유 있는 친구들이 가끔 다 내기도 하고 나오면 받고 안 나오면 안 받고 그래요. 우리도 한번 모여보자 해서 만나는데 만빵 모임의 존재를 아는 후배들이 빈대떡 주점에 돈을 맡기고 갈 때도 있더라고요. 만나서 한잔하고 그러면 좋잖아.”
원래는 70세 이상만 모이다가 가끔 후배들도 종종 참여하고 있다. 만나서 막걸리는 기본. 웃고 떠들고 과거를 추억하다 요즘 젊은이들의 연극에 대한 걱정도 한다.
“평가라기보다 우리 연극이 좀 시류를 따른다고 해야 하나, 영합한다고 해야 하나. 가볍다고 말하기도 그렇고. 좀 묵직하고 그런 작품들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적어도 만빵 늙은이들은 그렇게 생각해(웃음).”
사실 이런 말을 하고 싶어도 이제 젊은 후배들을 만날 기회가 없는 것이 안타깝다고. 정말 특별한 인연이라 꼭 좀 와주십사 연락하는 사람이 있으면 연극을 보러 가는 정도다. 아무렴 어떤가! 그래도 늘 행복한 웃음을 잃지 않는 노경식 작가는 어딜 가나 인기가 높다. 지금 이 시간 해피 바이러스 내뿜으며 젊음의 거리를 거닐고 있을 노경식 작가에게 인터뷰 중 약속했던 한마디를 남기고자 한다.
“고향에 관한 연극 꼭 쓰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젊은연극제란? 전국의 연극영화전공 학생들이 주축이 된 연극제.
세상 모든 길에 사람이 지나다닌다. 이들 중에는 길과의 추억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있다. 추억이란 살아온 시간, 함께했던 사람, 그날의 날씨와 감정이 잘 섞이고 버무려져 예쁘게 포장된 것이다. 박미령 동년기자와 함께 오래전 기억과 감정을 더듬으며 종로 길을 걸었다. 흑백사진 속 전차가 살아나고 서울시민회관이 눈앞에 보이는 듯하다. 그리고 행복한 발견. 감동이 잔잔히 밀려왔다.
경복궁에서 스케이트 타던 시절이 있었어요!
서울시 종로구 당주동에서 태어난 박미령 동년기자는 대학 시절을 넘어 결혼 전까지 종로에서 산 토박이다. 세종문화회관 전신인 서울시민회관 계단이 놀이터였고, 중학생이 돼서는 경복궁과 인왕산 활터가 주 무대였다.
“인왕산에 활터가 있어요. 활터 아저씨들이랑 얘기하고 맛있는 것을 주시면 먹기도 했어요. 경복궁은 젊었을 때 너무 많이 왔어요. 경회루 연못이 얼면 그곳에서 스케이트를 탔어요. 그때는 뭣도 모르고 탔죠. 스케이트 날을 가는 아저씨와 스케이트 빌려주는 아저씨가 저기 경회루 계단 아래 앉아 있었어요.”
현재를 사는 젊은이에게는 상상이 되지 않는다. 경복궁은 문화재청이 엄격하게 관리하는 문화재다. 취재 당일에도 문화재청에 경회루 사진촬영허가신청서를 냈다. 스케이트를 탔다는 말이 그저 충격이었다.
“창경원에서 보트도 탔는걸요. 밤벚꽃놀이도 하고요.”
이 부분에 있어 옛 추억으로 그냥 넘어가기에 씁쓸함이 앞선다. 일제강점기 창경궁은 창경원으로 불렸다. 궁 안에 동물원과 식물원 등 놀이시설이 들어섰다.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벚꽃 수천 그루를 심어 놓고 밤벚꽃놀이를 즐겼다. 왕이 사는 궁궐의 의미를 상실한 시대를 지나야만 했다. 경복궁 내에 세워졌던 조선총독부 건물은 1996년 철거됐고, 창경원으로 불리던 창경궁은 1983년 원래 명칭으로 환원하였다. 시니어의 추억은 안타깝게도 일제강점기 잔인한 역사와 함께한다는 생각이 들어 꼭 낭만적이지만은 않았다.
아버지와 아침식사, 금천교시장 기름떡볶이
1960년대, 박미령 동년기자가 초등학생이던 시절 서울시민회관 옆 길가에는 중국인이 직접 운영하는 중화요리집이 있었다. 아침잠이 없는 아버지는 아침잠이 많은 어머니를 깨우지 않고 박미령 동년기자를 데리고 그곳으로 아침식사를 하러 가곤 했다.
“중국 사람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사먹고 부인 먹을 것을 싸들고 온답니다. 아버지가 그러셨어요. 근데 거기서 먹었던 콩국이 정말 맛있었어요. 콩국에 찹쌀튀김을 잘라 넣은 것인데 시리얼 같다고 생각했어요. 지금도 가끔 생각이 나서 중국여행 가면 찾아는 보는데 딱 그 음식 맛이 나는 걸 아직은 못 먹어봤어요.”
함경도 출신인 박미령 동년기자의 아버지는 혈혈단신 남한으로 내려왔다. 이북 사람들은 의식주 중에 먹는 것을 가장 최고로 친다고 한다. 그래서 음식 솜씨가 좋은 외할머니와 아버지가 여느 모자 못지않게 친했다. 그리고 기름떡볶이에 대한 추억도 나눠주었다.
“어렸을 때 먹었던 기름떡볶이에 대한 기억이 많아요. 떡볶이가 먹고 싶어서 엄마 따라 시장에 갔습니다. 제 기억에 떡볶이는 빨간 떡볶이가 아니고 기름에 바짝 구운 떡볶이예요.”
박미령 동년기자의 말에 곧장 기름떡볶이를 파는 통인시장으로 향했다. 사실 박미령 동년기자가 말한 기름떡볶이는 통인시장에서 파는 것이 아니다. 경복궁역 2번 출구, 금천교시장에서 기름떡볶이를 팔던 故 김정연 할머니(향년 98세)의 떡볶이다. 북에서 홀로 남한으로 내려온 김 할머니는 평생 모은 재산을 기부하고 돌아가셨다.
“김 할머니는 간장으로 간을 한 기름떡볶이만 했어요. 금천교시장 할머니가 원조죠. 할머니는 곤로에다 무쇠솥 하나 올리고는 낚시의자에 앉아 떡볶이를 만드셨어요. 할머니 앞에 손님들이 빙 둘러앉으면 ‘몇 개 줄까?’ 하고 물어보셨어요. 겉을 바삭하게 무쇠솥에 지져서 구워주셨는데 정말 맛있었어요. 어렸을 때 그 기름떡볶이를 굉장히 좋아했어요.”
정신여고 회화나무가 기다리고 있었다
통인시장에서 택시를 타고 박미령 동년기자의 모교인 정신여고가 있던 종로구 연지동 옛터를 찾아갔다. 명성왕후의 주치의이자 선교사였던 애니 엘러스 벙커(Annie Ellers Bunker)가 1887년 중구 정동에 설립한 정신여고는 1895년 종로구 연지동으로 교정을 옮겼다. 1978년 지금의 교정인 잠실로 이전하기 전까지 깊은 역사의 흔적이 쌓인 곳이 연지동 교정 터다. 이곳에서 박미령 동년기자는 여중·여고 시절을 보냈다.
“버스를 타고 지나는 다녀봤지만 내려서 학교 쪽을 가본 적은 없어요. 종로5가 뒤쪽 대학로로 가는 중간에 있어요. 종로통을 잇는 전차를 이용해 통학했는데 종로4가에 내려서 학교로 걸어갔어요.”
지금 생각해도 학교 시설이 너무 좋았다고 회고했다. 수세식 화장실에 라디에이터 난방을 했다. 기숙사에는 침대가 설치돼 있는 등 당시에는 최고 시설을 갖춘 서양식 학교였다. 예쁜 교정이 그립지만 정신여고 옛터에는 본관과 기숙사로 사용됐던 세브란스관만 남아 있다. 현재는 다양한 기업체들이 상주해 과거 교실을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다. 옛 모습 그대로 사용하는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기도 하다.
“우리 저기 뒤쪽으로 가보면 안 될까요? 교정이 남아 있는 것 같아요.”
과거 정신여고 부지를 사들였다는 보험회사 건물과 남아 있는 정신여고 본관 건물 사이에 조성된 녹지공원이 보였다. 그곳에 가보니 정신여교의 교목인 회화나무가 그대로 서 있었다.
“우리 학교 교목이에요. 옆에 건물도 보니 우리 학교 건물이 맞아요. 건물 사이를 이어주는 구름 다리도 기억나고요. 제가 찾아올 줄 알았겠어요? 나무를 찾아서 너무 좋아요.”
정신여고의 교목인 회화나무는 독립운동을 함께한 고마운 나무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 애국부인회의 출발점인 정신여고가 일본 관헌의 수색을 받았을 때 비밀문서와 태극기, 국사책 등을 고목의 구멍에 숨겨 보존할 수 있었다. 걸어 다니기 힘들 정도로 뜨거운 날에 만나 시원한 바람으로 마무리한 멋진 데이트였다. 한 사람의 역사가 아닌 우리의 이야기였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었다. 종로의 작은 틈, 작은 돌 하나에도 우리의 역사와 추억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어느 새 아침저녁으로 선선해진 기온 때문에 겉옷을 집어들게 되었지만, 한낮에 내리쬐는 태양은 아직 그 위력을 잃지 않았다. 가을의 풍요로운 수확을 위해 쨍쨍한 햇볕은 꼭 필요한 고마운 존재이니 덥다고 불평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한다. 뜨거운 햇볕을 양산으로 가리고 오후 3시 공연인 오페라를 보러 예술의전당에 갔다.
천재 작곡가라 불리는 모차르트의 대표 오페라 를 관람했다. 는 1993년 오페라 하우스 개관 이래 예술의전당이 가장 많이 제작했던 오페라 작품이다. 지난 2001년부터 2009년까지 총 9차례나 토월극장 무대에 올려 매년 매진기록과 함께 가족 오페라라는 공식을 세우며 사랑을 받아왔다고 한다.
2015~2016년에는 의 작품성을 관객들이 온전히 느낄 수 있도록 기획해 큰 감동을 주었다는데 이번 공연에선 ‘우리 가족 첫 오페라’라는 수식어에 걸맞게 어린이들도 재미있고 부담 없이 감상할 수 있도록 모든 대사를 한국어로 준비했다. 또 누구든 쉽고 편안하게 즐길 수 있도록 ‘징슈필(Singspiel)을 통해 극의 재미를 느끼도록 했다. ‘징슈필’이란 연극처럼 중간에 대사가 들어 있는 독일어 노래극이다. 필자는 공연 내내 무대를 보랴 양옆에 마련된 자막을 보랴 눈이 매우 분주했다.
도로가 한가로운 시간에 출발했기 때문에 예술의전당에 조금 일찍 도착했다. 20여 분 정도 일찍 자리에 앉았는데 무대 저편에서 리허설 중인지 음악소리가 들려왔다. 악기도 조율하고 하모니도 맞추어보는 듯했다. 뮤지컬이나 오페라, 연극 등을 감상할 때는 항상 조용한 분위기에서 막이 오르길 기다렸는데 이번처럼 리허설을 보게 된 것은 흔한 일이 아니어서 공연에 대한 기대감이 더욱 높아졌다.
마침 토요일이라서 그런지 초등학생 자녀를 동반한 가족이 많아 공연 시작 전의 객석도 약간 소란스러웠다. 공연을 자주 다녀봤지만 이런 분위기는 처음이라서 조금 당황스럽기도 했다. 와글와글 떠드는 소리와 무대 뒤에서 연습하는 소리가 뒤섞여 소음처럼 들리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잘 어우러지는 소리처럼 들리기도 했다.
인터미션 15분에 거의 세 시간이나 되는 긴 공연의 막이 올랐다. 무대는 어린 관객을 생각해서인지 머리에 풍선을 단 세 어린이가 등장하면서 동화적인 장면으로 시작되었다. 작품의 배경은 고대 이집트 제국의 신전 부근. 현자 ‘자라스트로’가 지배하는 지혜의 세계와 밤의 여왕이 지배하는 어둠의 세계가 대립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커다란 뱀에게 쫓기던 ‘파미노’ 왕자를 밤의 여왕을 모시는 시녀 세 명이 구해준다. 밤의 여왕은 납치된 딸을 구해달라며 초상화 한 장을 보여주는데 바로 ‘타미나’ 공주였다. ‘타미나’의 아름다운 모습을 본 왕자는 꼭 공주를 구하겠다며 길을 나선다. 그때 밤의 여왕은 위험할 때 도움이 될 것이라며 마술피리를 왕자에게 준다.
왕자는 나쁜 ‘자라스트로’에게서 공주를 구하려 하지만 ‘자라스트로’는 현명한 사람이다. 사악한 밤의 여왕인 어머니로부터 공주를 보호하려고 데려온 것이다.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왕자와 공주가 만나 사랑을 이룬다는 이야기다.
이 작품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독특한 ‘밤의 여왕 아리아’를 들을 수 있는 즐거운 오페라다. 매우 고음으로 부르는 ‘아아아~’는 모든 성악가가 어려워하는 부분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수미의 밤의 여왕 아리아가 유명하다.
출연진의 노래도 멋지고 무대장치도 환상적이어서 동화 속 꿈나라에 다녀온 듯 재미있었다. 특히 ‘파파게노’와 ‘파파게나’의 ‘파파파’하는 경쾌한 이중창이 오페라가 끝난 후에도 귓가에 계속 들려오는 듯했다.
아이들이 많아 어수선한 분위기였지만, 우리 손주들 생각을 하니 이해가 됐다. 여섯 살인 우리 손녀도 내년쯤이면 오페라 공연장에 데리고 다닐 수 있을 것 같아 흐뭇하다.
누구나 노후에 작물을 기르며 텃밭을 가꾸고 싶은 작은 소망이 하나씩 있다. 밥상 위에 놓을 야채 몇 가지가 추가되는 것만으로도 좋고, 주변에 누군가와 나눌 수 있다면 더 좋다. 여기에 약간의 용돈까지 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실현 불가능한 꿈은 아니다. 그렇다고 집을 등지고 시골로 내려가야만 가능한 것이 아니다. 잘만 하면 직업으로 삼을 수도 있다. 바로 도시농업이다.
도시농업은 우리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어쩌면 전 세계적으로 자연스러운 흐름일 수 있다. 자연이 도시화되고 상당수의 인구가 도시에 몰려 살면서 농촌이 가지고 있던 일부 농업 기능을 도시로 옮기고자 하는 노력은 전 세계적으로 이어졌다.
대표적인 사례가 미국의 오바마 전 대통령의 부인 미셸 오바마다. 그녀는 백악관 텃밭에서 작물을 가꾼 경험을 바탕으로 이라는 책을 2012년에 발간했다. 미국은 자생적 도시농업의 대표적 국가로 각 주정부마다 시민들이 마음껏 경작을 할 수 있도록 세세한 조례를 마련해놓고 있다. 뉴욕 시도 예외는 아니어서 도시 텃밭 조성을 위한 시민사회단체가 운영하는 그린 섬(Green Thumb) 프로그램을 시 차원에서 지원하고 있다. 또 식량위기를 도시농업으로 돌파한 쿠바의 이야기나 시민농원법을 통해 공동체 텃밭의 운영을 권장하는 일본 역시 도시농업의 주요 사례 중 하나로 꼽힌다.
도시농업의 세계적 우수사례 서울
이렇게 많은 도시가 도시농업에 주목하는 이유는 첫 번째로 환경 문제가 있다. 도심의 생태계를 도시농업을 통해 복원시키고 거주 환경도 개선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한 일자리 창출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급속도로 다가오고 있는 고령화 사회에 대한 대비로도 도시농업이 꼽힌다. 각종 텃밭 관리나 농업 관련 교육 등은 은퇴자 일자리에 적합한 분야 중 하나다. 특히 ‘땅’을 기반으로 한 농업은 지역 공동체 결속과 밀접한 관련이 있고, 결국 지역에서 거주기간이 긴 중장년층이 나설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이를 통해 공동체 문화가 조성되고, 지역의 경제적 기반이 마련된다면 금상첨화다.
국내에서 도시농업에 대해 정책 개발을 가장 적극적으로 시도하고 있는 곳은 서울시다. 서울시의 사례는 세계적으로도 모범으로 꼽힌다. 서울시는 2012년부터 도시농업 1.0 사업을 통해 도시농업이 정착될 수 있는 제반 준비와 함께 다양한 실험적 사업을 진행했다. 현재는 2018년까지 완료를 목표로 ‘도시농업 2.0’을 진행하고 있다. 1.0이 관 주도의 취미·여가형 도시농업이었다면, 2.0은 민관이 결합해 함께 사업을 추진하고 지역에 공동체 문화를 활성화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것이 서울시의 설명이다.
서울시의 도시농업 사업이 잘 적용된 대표적인 곳이 바로 종로구 행촌권 성곽마을이다. 종로구 행촌동 일대 지역은 단독주택이나 다세대주택 밀집 지역으로 그동안 돈의문 뉴타운 사업이나 재개발구역에서 소외되어왔다. 그러다 주거환경관리사업 정비계획안이 통과되면서 주거환경 개선사업과 더불어 도시농업 시범마을로 특화돼 연중 자동화 재배가 가능한 IoT(사물인터넷) 스마트팜 조성도 진행 중이다.
서울시와 지역민들은 지역공동체 거점인 ‘행촌共터’를 3호점까지 개설하고, 이곳을 중심으로 도시농업을 위한 여러 교육을 진행했다. 지난해부터 육묘장을 만들고 본격적으로 텃밭을 가꿔 불우이웃을 도울 수 있을 정도의 작은 소득도 올렸다. 양봉도 시작해 꿀 800ℓ를 얻기도 했다. 올해는 도시농업의 특성상 작은 면적에서 높은 효율의 수확을 얻어내기 위해서 부가가치가 높은 더덕, 감초, 어성초 등을 심은 약초밭도 만들었다.
농부 되기 위해선 교육이 우선
도시농부가 되는 과정은 무엇이 있을까. 도시농부가 되는 가장 빠른 방법은 역시 관련 교육과정을 통해 농업의 기초를 쌓는 것이다. 교육과정은 지역별 농업기술센터의 교육과정이 대표적이다. 서울시 농업기술센터의 경우 도시농업 전문가 과정을 통해 매년 100명 이상의 도시농부를 배출하고 있다.
도시농업 교육기관을 표방하는 민간단체들도 상당히 많다. 일부에선 “교육기관이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다”고 평가할 정도. 서울시에서 꼽은 도시농업 시민단체만 해도 협동조합을 포함해 44개나 된다. 관련 소규모 시민단체들은 지역에 따라 활성화된 곳도 있지만 조직적, 재정적 어려움도 상당하다.
이러한 교육 과정의 정비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농림축산식품부 산하 국가자격증 제도인 ‘도시농업관리사’ 제도가 실시된다. 지난 3월 관련 법령이 개정되면서
9월 22일부터 시행 예정인 도시농업관리사는 도시민의 도시농업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도록 도시농업 관련 해설, 교육, 지도 및 기술보급을 하는 사람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또 개정안에는 도시농업의 범위에 ‘수목과 화초를 재배하는 행위’와 ‘곤충을 사육(양봉 포함)하는 행위’를 추가해 도시농업의 범위가 넓어졌다.
해설과 교육, 기술 보급도 도시농업
도시농업이 단지 주변의 작은 유휴지에 작물을 심어 가꾸는 것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텃밭학교나 스쿨팜 사업 등을 통해 작물에 대한 교육과 이를 통한 인성 교육을 추진하는 단체들도 많다. 도시농업포럼의 꿈틀텃밭학교가 대표적이다. 이 학교는 이동필 전 농림축산식품부장관이 교장으로 부임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2015년부터 초등학생들과 학부모 등을 대상으로 텃밭을 가꾸는 데 필요한 각종 교육, 채취한 농산물을 활용할 수 있는 교육 등을 진행하고 있다. 학교 관계자는 “단순한 농업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텃밭이라는 공간을 통해 가족 간의 잃어버린 대화를 회복하고, 아이들의 인성 발달 등 긍정적인 효과가 탁월하다”고 평가했다.
직업으로서 도시농부는 어떨까? 아직은 글쎄다. 일부에선 “농작물을 통해 거둬들이는 수익을 기대하는 것보다는 강사로 활동하는 것이 벌이는 더 낫다”고 평가할 정도. 도시농업에서의 텃밭이라는 공간은 농촌의 대규모 농업과 경쟁에서 이기기 어려운 구조적 어려움을 안고 있다. 일부 지자체나 주민단체가 고부가가치 농작물에 열중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농작물을 가꾸고 수확하는 것에서 끝내지 않고, 이를 가공해 서비스 사업으로 연계해야 도시농업도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고 조언한다.
필자가 중․고교생이었던 시절에는 스승의 날이 되면 각 반의 반장이 중심이 되어 학생들의 코 묻은 돈을 걷어 선생님 선물도 마련하고 가슴에 꽃도 달아드리곤 했다. 또 강당에서 재롱잔치도 벌이고 운동장에서 선생님들과 배구시합을 하는 등 즐거운 하루를 보냈다.
이렇게 사랑이 넘치고 화기애애했던 스승의 날 분위기가 언제부터인가 달라졌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고 가정 경제가 좋아지면서 학부모들의 치맛바람이 거세졌고 소위 금일봉이라는 돈 봉투가 눈도장을 찍는 도구가 되었다. 돈 봉투가 한창 문제가 돠었을 때, 어떤 봉투가 너무 무거워(?) 선생님이 되돌려 보냈더니, 그 어머님이 “내년 치도 포함한 걸로 알고 받아주세요”라고 했다는 웃지 못할 얘기도 있다.
그러나 이젠 소위 김영란 법으로 선생님이 학생에게 꽃 한 송이도 받지 못한다. 편지만 받을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니 너무 각박한 세상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인성교육은커녕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단지 시험 준비를 위해 지식만 가르치는 지식 소매상처럼 되어버린 요즘 세태가 아쉽기만 하다. 학생이 선생을 고발하는 사태도 흔하다고 하니 정말 문제가 많은 세상이다.
평생을 초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교장으로 정년퇴직을 한 친구는 교사가 자신의 천직이라고 말하곤 했다. 결혼 전에는 일요일이면 어서 월요일이 되어 아이들과 만나고 싶어 했다. 그만큼 학생들을 사랑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아이들이 선생님을 존경할 줄 모르고 학생들이 순수함을 잃어가는 모습을 보며 많이 힘들었다고 한다.
필자는 우연히 노인대학에서 영어 강사를 시작했다. 벌써 수년째 재능 봉사를 하고 있는 것이다. 몇 년 전 암 수술을 하고 또 칠순을 넘겼는데도 학생들과 많이 친해져 그만두지 못 하고 있다. 지난 5월 스승의 날, 같은 또래 어르신인 수강생들이 꽃바구니와 카드 그리고 선물까지 주셨다. 수업이 끝난 후에는 일동이 기립해 ‘스승의 은혜는 하늘 같아서~~’로 시작하는 스승의 노래를 불렀다. 노래를 부르며 반은 웃고 반은 울었다. 나이 들어 늦은 공부를 하며 스승님이 얼마나 고마운 분인가를 새삼 느꼈다면서 서로가 감격해 급기야는 울음바다가 되었다.
꼭 물질적으로 감사 표시를 해야 하는 건 아니다. 꽃 한 송이도 뇌물로 생각하는 인정 없는 법이 너무나 삭막하고 기가 막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노인대학 학생들은 용감하게 법을 어기고(?) 꽃바구니, 카드, 선물을 준비했고 거기다가 점심 대접까지 했다. 무엇보다 학생들이 모두 기립해 불러준 스승의 노래가 감격스러웠다. 솔직히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 이 일을 끝내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