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둔야학을 함께 다니던 동급생들 중에 남몰래 사모하는 선생님을 한 분씩 숨겨둔 아이가 서너 명 있었다. 우리들은 당시 한창 감수성 예민한 16~17세의 꿈 많은 소녀들이었다. 선생님들도 20대 초반의 맑고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들이었으니 그분들을 연모하는 일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필자 또한 그들 중의 하나였는데 그 당시의 애탔던 심정을 어찌 말과 글로 다 옮길 수 있으랴.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생들은 하나같이 모두 선하고 순수했다. 지금 사람들에게서는 그 맑고 고운 심성을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라 그랬을까? 흙은 선하고 정직한 것이니까.
야학 선생님들은 헐벗고 굶주린 아이들을 가르쳐보겠다고 자신들도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으면서, 또 배우는 학생으로서 소중한 시간을 쪼개어 우리들의 선생님이 되어준 분들이었다. 그야말로 순수와 열정의 덩어리였다. 정성을 다해 공부를 가르쳐준 것은 물론이고 무엇보다도 우리들이 소중한 사랑을 알게 해줬다. 부모님들이 생활고 때문에 베풀지 못했던 사랑과 관심을 보여준 것이다. 필자는 당시 야학 선생님들이 부모님보다도 더 많은 관심과 사랑을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선생님들은 항상 웃는 얼굴이었고, 우리들에게 언제나 따뜻하고 친절했다. 필자는 초등학교 때부터 선생님들을 무척 따르는 아이였는데 서둔야학 선생님들과의 인연은으로 그 절정을 이루었다. 이제까지의 인간관계에 있어서 최고로 찬란했던 시절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때 야학 선생님들은 필자의 전부였다. 마음을 빼앗기는 정도가 아니라 넋을 송두리째 빼앗겼다. 선생님들이 필자를 뿌리째 흔들어놓았던 것이다.
필자는 힘든 일이 있어 고민하다가도 야학에 가면 다 잊어버리고 ‘벙글벙글’ 웃었다. 선생님들만 보면 그저 너무 신이 나고 좋았다. 마치 태어난 지 5~6개월이 지난 아기가 엄마 얼굴만 보면 무조건 방긋방긋 웃는 모습과 똑같았다. 이후로 필자는 야학 선생님들보다 더 존경스럽고 마음을 바쳐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을 거의 만나지 못했다. 아마도 영원히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
우리가 살아갈 때 무엇이든 처음이라는 의미는 상당히 깊고 소중하다. 필자 삶에 있어서 빛깔 고운 첫정을 고스란히 바친 대상은 바로 야학 선생님들이었다. 그 색깔은 때로 파스텔 색조 같은 아련한 아름다움으로 다가오기도 하고 여름날의 흑장미처럼 강렬한 향기가 나기도 한다. 야학 선생님들은 교사가 아닌 신과 같은 사랑으로 우리를 가르쳤다. 교육자로서의 자격은 종이로 만든 증서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이 있느냐 없느냐에 있다. 현직 교사로 근무하는 필자 또한 야학 선생님들의 10분의 1만큼의 사랑도 제자들에게 쏟지 못한다는 자책감이 있다. 아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영어 공부, 수학 공부가 아니라 사랑이다.
모든 교육은 인간 사랑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교육자는 가슴이 따뜻한 사람이어 여야 한다. 진실한 마음으로 아이들을 사랑할 자신이 없는 교사들은 스스로 교단에 서 내려와야 한다. 교직을 천직으로 알아야 하고, 교육이 국가의 백년대계임을 인지해 투철한 사명감을 가지고 아이들을 가르쳐야 한다.
한국인들은 기계처럼 일해왔다.
그게 한국을 2차 산업의 승자로 만들어왔다.
그러나 이제는 기계처럼 일하는 인간은 기계를 이기지 못하는 세상이 왔다.
인간이 인간다워지는 게, 4차 산업혁명의 핵심이다.
인간으로의 회귀,
그것은 보다 많은 실패를 경험해야 한다는 말이고,
그것은 보다 천천히 가야 한다는 말이고,
그것은 보다 멍청해져야 한다는 말이며,
그것은 보다 양심적인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실패가 용인되는 사회,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하는 사회,
똑똑하지 않아도 재미있고 기발한 아이디어가 가득한 사회,
그리고 도덕적인 사회,
그것이 바로 창조적 사회이며, 4차 산업혁명을 이끌 사회라고 나는 생각한다.
한국이, 한국인들이 그렇게 될 수 있을까.
나는 아직, 그렇다고 믿고 싶다.
30대 중반인 아들이 오늘 페이스북에 올린 글이다.
"야! 물무지개다!"
감탄하며 어린 아들의 고사리 손이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아주 작은 물웅덩이에 차에서 떨어진 기름이 번져 있었다. 시외버스 터미널에서였다. 아들은 필자를 깨우쳐줬다. 사물을 다른 눈으로 보라고.
"엄마 아까부터 올챙이들이 계속 내려오고 있어요."
"어디? 어! 정말이네?"
어린 아들의 말을 듣고 보니 버스 창을 타고 내려오는 빗물이 정말 고물고물 움직이는 올챙이 같았다. 비 오는 날 아이들을 데리고 나들이한 날이었다.
어린이는 모두 천재이고 시인이다.
어린이의 눈으로 보는 세상은 모두 아름답고 신기하다.
어린이들과 같이 있다는 것은 세상의 아름다움에 눈을 뜨게 되는 축복의 시간이다.
영국의 계관시인 워즈워스는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고 말했다.
"엄마 나 내릴래."
"왜?"
"엄마 힘들까봐."
아들이 네 살 때였다. 퇴근해 힘없이 누워 있는 아들의 이마를 만져보니 열이 펄펄 끓었다. 부랴부랴 아들을 업고 병원으로 달려가는데 그런 말을 해서 순간 눈물이 앞을 가렸다. 평소에도 곰살맞은 아들은 필자가 안아주면 고사리 같은 손으로 필자를 더 꼬옥 안아주곤 했다. 아픈데도 엄마를 걱정해주던 아들. 아들의 고운 마음이 두고두고 생각난다.
가을 밤길
귀뚜라미 귀뚤귀뚤 우는 밤길을
나 혼자 걸어봅니다.
소리를 밟을까봐 조심조심
소리를 쫒아버릴까봐 조심조심
나 혼자 가을 밤길을 걸어봅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아들이 쓴 시다.
'소리를 밟을까봐'라는 탁월한 표현에 감탄해 동료 국어선생님들께 보여드리니 타고난 시인이란다.
"엄마 저를 자유롭게 키워주셔서 고마워요."
몇 년 전 아들이 필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들은 고3때도 학교에서 강제로 시키는 자율학습을 하지 않았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집에서 자유롭게 공부했다. 좋아하는 바로크 음악을 들으며. 어차피 공부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다. 어려서부터 아이들은 배움에 대한 의욕이 넘쳤다. 피아노, 컴퓨터, 성악, 발레, 지점토, 홈패션, 영어, 수영, 일본어, 태권도, 미술 등 학원을 열 곳 이상 다녔다. 아이들이 하고 싶은 공부가 있으면 시켰더니 결과적으로 이렇게 많은 학원을 다니게 되었다. 하지만 학원 가는 게 싫다고 하면 언제라도 그만두게 했다.
"억지로 시키면 창의성이 나올 수가 없어요."
아들의 주장이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욕심 많고 의욕이 넘쳤던 필자는 어렸을 때부터 발레가 너무 하고 싶었다. 잠자리 날개 같은 옷을 입고 하늘하늘 춤추고 싶었다. 피아노도 치고 싶었다. 정말로 미치도록 치고 싶었다. 그러나 가난 때문에 어느 것도 못해봤다. 그래서 필자는 아이들이 하고 싶은 공부가 있으면 즉시 배울 수 있게 했다. 우리 아이들에게는 필자의 한을 대물림하고 싶지 않았던 강렬한 의지 때문이었다.
"아들, 엄마는 한국에서 살아남을 테니 너는 일본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열여덟 어린 나이의 아들을 홀로 일본에 보내며 비장한 심정으로 말했다.
"아드님은 분명 한국을 빛낼 몇 안 되는 인물 중 한 사람이 될 거예요."
아들의 고등학교 졸업식 때 학생부장님은 필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들은 일본의 명문 게이오대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지금은 IT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다.
부모님이 장기 투병하는 막내 동생을 간병하려고 수십 년 전에 서울로 이주하셨다. 고희를 넘긴 아버님은 답답함을 달래려고 자주 주위를 산책하셨다. 하루는 “애야, 서울에는 왜 작은 차가 많은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큰 차로 많이 실어 나르면 될 터인데” 하루 한 번 다니면서 넓은 좌석에 웬만한 짐까지 실어주는 헐렁한 버스를 생각한 이야기였다.
새 옷을 입던 손자가 “옷이 작아서 불편해요” 하면서 벗어던졌다. 새 학년이 되면서 몸에 잘 맞고 예쁜 것으로 골랐던 옷을 제대로 입어 보지도 못하고 버려야 할 처지다. 커가는 아이들을 생각하여 조금 여유 있는 옷을 샀으면 좋았을 터이다. ‘몇 달 만에 아이가 부쩍 자랐나 보다’ 마음을 달랬다. 어머님이 사주셨던 헐렁한 옷가지와 신발이 문득 그리워졌다.
한국전쟁이 막 끝난 초등학교 시절에는 생활용품이 엄청 귀했다. 어머님은 일 년에 한 차례 설날이 되어야 몸에 헐렁한 옷과 신발을 사주셨다. 이유는 단 하나 한 해 동안 입고 신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옷의 긴 소매와 바짓가랑이는 적당히 접어서 바늘로 꿰맸다가 자라는 몸에 따라 조금씩 풀어 내렸다. 고무신을 아끼려고 손에 들고 맨발로 다니는 것이 보통이었고, 심한 자갈길에서만 신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발에서 잘 벗겨지지 않도록 고무줄로 동여매는 일은 너무나 당연하였다.
신발이 낡아서 더 신을 수 없을 때가 되어서야 발에 꼭 맞았다. 작아서 못 신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낡기 전에 못 신을 형편이 되면 어김없이 동생에게 넘겨야 했다. 한 해 동안 부족하지도 남지도 않게 고차원 방정식을 풀면서 신발을 신어야 했다. 읍내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쾌재를 불렀다. 교복ㆍ교모를 착용하는 학생다운 모습으로 초등학생 동생들에게 폼 잡는 것도 마음에 들었지만, 꿈에 그리던 운동화를 신을 수 있었다. 통고무신을 잊고 중학시절이 꿈 같이 흘렀다. 하지만 대도시 고등학교 입학 첫날부터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키 크기에 따라 번호를 정하기 위하여 처음 만난 친구들과 줄을 섰다. 중학생 때는 중간쯤이던 내 키가 대도시 고등학교에서는 제일 작았다. 두메산골에서 자란 탓에 1년 늦게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한 살 아래 동생들과 같은 학년이라는 점이 적잖이 신경 쓰이던 때였다. 하물며 이들보다 키가 작아서는 아니 될 일이었다. 아차!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비상대책을 찾았다.
중학교 때와 달리 고등학교에는 운동화를 신은채로 교실출입을 하였다. ‘옳거니, 바로 이거야’ 번쩍 머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키를 조금만 높여도 제일 작다는 소리를 듣지 않을 것 같았다. ‘1번 탈출 작전!’ 중학생 시절 신발이 젖으면 가끔 애용했던 대로 종이를 알맞게 말아서 운동화 바닥에 두툼하게 깔았다.
아 뿔 사! 헐렁한 신발이 싫어서 고등학교 입학하면서 발에 꼭 맞춰서 내가 산 운동화에 발이 들어가지 않았다. 여태까지 어머님이 사주셨던 조금 헐렁한 것이었으면 충분히 해결되는 문제였다. 도리 없이 종이를 빼낸 후 ‘야속한 새 신발‘을 신었다. 키가 제일 작은 1번을 피할 수 없었다.
그 후 폭풍 성장하는 동안 몸에 꼭 맞는 것보다 헐렁한 것을 더 찾았다.
여행기자 겸 작가. 3D프린팅에서 만난 전기환(全基煥·49세) 대표의 이력이다. 전자 부품과 기계 장비가 어지럽게 널려 있는 회사의 대표로 생각하기엔 어울리지 않은 이력이다. 게다가 아직 현역이다.
“언론인의 직업 수명은 그리 길지 않거든요. 은퇴 후 무엇을 할지 고민하던 차에 3D 프린터 업계에 있던 지인에게서 책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았어요. 이용자들이 너무 모르니 보급을 위한 서적이 필요했던 것이죠. 그렇게 3D 프린터라는 물건을 처음 접한 것이 2014년이었습니다.”
3D 프린터라는 낯선 장비와의 인연은 묘한 매력으로 그를 빠져들게 했다. 미래 산업을 주도할 만한 분야라는 확신이 섰다. 그리고 창업을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지인을 통해 3D 프린터의 개념을 배웠고, 2015년에는 유한대학교에서 진행한 시니어 기술창업 스쿨 과정을 통해 보다 전문적인 지식을 쌓았다. 유한대학교가 배출한 수료생 중 우수창업 사례의 인물로 꼽히고 있는 그는 이제 후배들을 위한 교육에도 참여하고 있다.
전 대표가 설립한 회사 3D프린팅은 주로 3D 프린터의 하드웨어 보급에 초점을 맞추고, 아이들을 위한 3D 교육용 키트나 고객이 직접 조립해 사용할 수 있는 DIY 3D 프린터 ‘메이커박스’를 출시했다.
하지만 최근 그가 관심 있어 하는 분야는 3D 프린터와 관련한 소프트웨어, 즉 교육 분야다. 장비가 보급되더라도 이를 운용할 수 있는 교육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관련 산업은 성장을 기대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정부 정책이나 기술 보급이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해요. 방과 후 학습을 하는 곳에 찾아가 보면 아이들 앞에 모니터와 키보드밖에 없어요. 실제로 제품을 출력해보고 3D 프린터를 다뤄볼 수 있는 기회가 적은 것이 현실이에요.”
그의 회사에선 매주 토요일 일반인들이 3D 프린터를 직접 다뤄보면서 배운다. 수강생들은 초등학생에서 주부까지 다양하다. 그는 3D 프린터를 이용한 창업을 준비하는 중이라면 너무 거창하지 않게 작은 규모로 시도해보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일단 경험을 쌓아보라는 의미다.
“본인이 스스로 흥미를 갖고 시도할 만한 분야를 찾는 것이 중요해요. 사소한 아이디어라도 좋아요. 사람들이 드나드는 상점 한 귀퉁이에서 공방처럼 시작해도 좋아요. 지금 시점에선 출력대행서비스(출력실)도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당분간 수요는 계속 될 테니까요.”
그는 자신만의 전문 분야가 있다면 성공 가능성이 더 높다고 말한다.
“주변에서 제빵사가 자신만의 케이크 장식을 위해 3D 프린터를 이용하기도 하고, 금속 세공사나 의상 디자이너가 활용하는 경우도 봤어요. 본인만의 전문기술을 활용할 수 있으면 3D 프린터 기술의 가치는 훨씬 올라갈 거예요. 내가 무엇을 잘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과정이 필요해요.”
지난 대선 과정에서 엉뚱하게 화제가 됐던 기술 분야가 있다. 바로 삼디, 쓰리디 발음 논란을 일으켰던 3D 프린터다. 3D 프린터 기술은 대선주자들도 관심을 가졌을 만큼 소위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선봉장으로 손꼽힌다. 3D 프린터 기술 분야는 기술과 장비만 있으면 체력이나 나이와 상관없이 소규모 창업을 할 수 있다. 시니어들도 쉽게 도전해볼 만한 기술일까?
일단 3D 프린터가 무엇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학창 시절의 기억을 떠올려보자. 어떤 상품이든 상품 제조 공정은 일반적으로 단조와 주조로 시작된다. 즉 큰 덩어리를 깎거나 틀에 액체 형태의 재료를 넣어 굳히는 방식을 써왔다.
그런데 3D 프린터 기술은 좀 다르다. 컴퓨터를 이용해 도안을 만들면, 3D 프린터는 설계대로 재료를 조금씩 쌓는다. 재료는 쌓이는 동시에 굳어지면서 하나의 형태가 되어간다. 벽돌을 쌓아 집과 담장을 만들어 올리는 것을 상상하면 이해하기 쉽다. 다만 집을 먼저 짓고, 벽을 올리는 것이 아닌, 집과 벽 모두를 벽돌을 한 층씩 동시에 쌓아가는 형식이다.
3D 프린터가 제품을 제작할 때 쌓는 두께는 0.01mm에서 0.4mm 정도로 미세하며 이러한 제작 방식을 적층가공기술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때 사용되는 재료도 다양하다. 고체를 녹여 만드는 FDM 방식이 가장 값도 싸고 대중화된 3D 프린터로 꼽히며 액체 소재를 사용하는 DLP, SLA 방식도 있다. 또 분말을 재료로 사용하는 SLS 방식도 있다.
미래 산업의 마법상자
3D 프린터가 미래의 기술로 꼽히는 이유 중 하나는 다양한 재료를 활용한 제품 제작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플라스틱(합성수지)을 이용한 기술은 가장 기초적인 것으로 분류되고 세라믹이나 금속 제품을 출력해낼 수도 있다. 실제로 공업용 3D 프린터는 이미 항공기 제조나 로켓 개발 등에 널리 쓰이고 있다. 유연한 재료를 활용해 옷을 출력하는 경우도 있다.
일부 제품은 의료용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복잡한 두개골이나 광대뼈 등을 컴퓨터로 설계해 3D 프린터로 출력해 인체에 이식하는 치료가 다양한 방식으로 시도되고 있다. 지난 4월에는 중앙대병원에서 광대뼈 결손 환자에게 바이오세라믹 3D 프린팅 기술로 출력한 인공 광대뼈를 이식하는 수술을 성공적으로 끝냈다.
국내에서 3D 프린터 시장 붐을 조성하는 데는 정부도 한몫했다. 2014년 정부는 2020년까지 3D 프린팅 인력을 1000만 명으로 양성하고, 제조 공정 고도화 및 중소·중견기업 기술지원을 위한 제조혁신지원센터를 구축해 운영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전국 주요 도시에 설립된 창조경제혁신센터에 각종 3D 프린터를 도입해 사용을 원하는 창업자, 회사 등에 시설을 개방하고 있다. 3D 프린터 이론과 이를 이용한 창업 교육도 하고 있다.
물론 한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높은 정밀도의 제품 출력이 가능한 SLS 방식 3D 프린터는 가격이 수천만원대에 이르고, 출력에 소요되는 재료 비용도 만만치 않다. 정밀기계 제작에 쓰이는 공업용 3D 프린터는 가격이 억대가 넘는 것이 기본이다. 저가의 FDM 프린터는 50만원대에도 구입할 수 있다.
느린 출력속도도 문제다. 작은 머그컵을 하나 출력하려면 3~4시간은 기다려야 한다. 3D 프린터가 미래형 가내 수공업에 적합하다고 말하지만 생산효율을 높이는 데 어려움이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3D 프린터의 상품 제작 과정
3D 프린터의 상품 제작은 크게 세 가지 단계로 이뤄진다. 첫 번째 단계는 3D 모델링이라고도 부르는 설계 과정이다. 건축으로 치면 설계도면과 같다. 다만 종이가 아닌 컴퓨터에서 모든 작업이 이뤄지는 것이 다르다.
두 번째는 프린터에서 제품을 출력하는 것이다. 프린터에서 막 출력된 제품은 채색이 되지 않은 한 가지 색상만을 띠는 것이 일반적이다. 최근에 출력 과정에서 채색까지 가능한 기술이 개발되었다.
마지막 단계는 후처리다. 출력된 거친 면을 매끄럽게 다듬고, 광택을 내거나 색을 입히는 과정도 여기에 속한다. 조립이 필요한 제품은 각 부품을 별도로 출력해 조합한다. 이제는 움직이는 관절 형태도 아예 조립된 상태에서 출력이 가능하다.
3D 프린터 창업, 무엇이 있나
3D 프린터 기술을 활용한 창업 방식은 다양하다. 먼저 3D 프린터를 유통하거나 유지·보수하는 업종이 있다. 장비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분야로 업계에선 레드오션으로 불린다. 또 3D 모델링을 대행해주는 직종도 있다. 제품을 출력하기 위해서는 도안을 3D 프린터가 인식할 수 있도록 STL파일 형태로 컴퓨터에 입력해야 하는데 이 과정을 담당하는 업무다.
디자인 회사나 건축 회사를 상대로 하는 출력 대행업도 있다. 아직 3D 프린터가 대중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만들어놓은 파일을 제품으로 출력하려면 프린터가 있는 곳을 찾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대학가에서는 대학생들의 과제 제작을 위한 출력 대행이 성업 중이다.
4차 산업혁명에 대한 열풍으로 이에 관련한 교육 서비스에 대한 관심도 점점 높아지고 있다. 이미 상당수 초등학교에서는 학생을 대상으로 한 3D 프린터 방과 후 교실이 2015년부터 시작되었다. 3D 프린터의 원리를 알려주고, 간단한 장난감 등을 직접 출력하도록 해 아이들의 흥미가 높다.
창업 성공의 열쇠는 결국 콘텐츠
그래도 3D 프린터 창업의 핵심은 역시 제품 생산에 있다. 주방용 제품 등 생활용품과 장난감, 인테리어 소품 등을 출력해 판매하는 것이다. 아직까지는 대량생산이 어렵기 때문에 희소성이나 작품성을 가지고 부가가치를 창출해야 한다.
국내 3D 프린터 분야의 초창기 선구자로 꼽히는, 의 저자 MWC 오정철 대표는 3D 프린터 창업의 핵심은 기술이 아닌 콘텐츠에 있다고 강조한다.
오 대표는 “프린터 장비 가격은 점점 저렴해지고 있어 출력 대행 가격과 진입장벽도 함께 낮아지는 것이 현재의 업계 상황”이라며 “단지 프린터만 갖추면 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은 오산”이라고 충고한다. 또 “3D 프린터를 활용한 분야는 무궁무진하기 때문에 조금만 생각을 바꾸면 여러 가지 제품을 개발하는 기반이 될 수 있고, 나만의 고유한 제품을 개발해야 3D 프린터의 가치를 제대로 활용한 창업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고유한 아이템으로 시장에서 주목받는 사례로는 서울과학사가 있다. 엔지니어 최종언씨와 디자이너 김종범씨가 함께 창업한 이 회사는 우리가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사물을 채집(제품화할 대상을 선정해 3D 모델링하는 과정)하고 이를 키트화한다. 흔히 우리가 ‘조립식’으로 부르는 프라모델과 같은 형태의 제품이다. 다만 상품화되는 대상이 독특하다. 교통신호제어기나 호두과자수레, 주차단속카메라 같은 것들이 상품화됐다.
이 같은 사례는 해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쿠사카 엔지니어링(Kusaka Engineering)은 유명 스포츠카의 엔진을 그대로 축소해 3D 프린터로 출력한 뒤 채색 등의 과정을 거쳐 상품화한다. 이들의 제품은 하나의 작품으로 인정받아 마니아들에게 높은 가격에 팔린다.
업계 관계자는 “3D 프린터 교육뿐만 아니라 창업 아이템 개발에 노력을 기울여야 성공적인 3D 프린터 창업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하짓날 새벽 곁에서 자고 있는 아내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언제 저렇게 잔주름이 있었던가.
매일 매 시간 다른 어느 누구보다 많이 자주 본다고 자부하며 곁을 지켜왔어도 몰랐는데 갑자기 눈에 띄다니
서 있는 곳이 바뀌면 풍경도 바뀐다는데 혹시나 하고 발치로 옆구리로 옮겨 가며 바라봐도 보려고 해서 그런지 역시나 보인다.
가시덤불로 막아도 지름길로 온다는 흰 머리칼이 이겼구나.
오랜 연애 끝에 문서에 도장 찍고 맏며느리로 들어와 아이 셋 낳고 지지리 고생하는 자체를 아이 키우는 즐거움으로 퉁 치며 살았던 아내.
자신들이 좋다는 배필 토하나 달지 않고 승낙 해 아직 잡음 없이 무난한 삶 갖게 해줘 며느리 사위들에게 사랑 받으며 자주 찾아오는 휴일을 기다리는 엄마.
중학생 셋 초등학생 하나인 손자 손녀들에게 늘 공부하고 열심히 배우는 자세를 몸소 본이 되어주는 정신적 지주면서 절대 멘토인 스승 할머니.
두 식구 살면서 꼰대가 될 것이냐 어르신이 될 것이냐 물어보는 동반자.
친구들 연락에 순서 지켜 골고루 만나주고 함께 울어주는 듬직한 친구.
무엇하나 소홀한데 없이 묵묵히 중심 지키며 세상에 순응하고 철저히 준비하는 삶의 표본인 아내.
모든 게 부족하고 팍팍한 생활 속에서도 잠시 누가 무얼 하면 좋다는 말에 귀가 팔랑대 한눈팔려는 기미만 보이면 아이들 다 키워 보낼 때까지만 참으면 그 다음은 마음대로 하라며 오로지 아이들 건사하기에 올인 한 엄마.
이제 모든 걸 다 해 줬으나 단 둘이 남아 정작 기운도 없고 우리 몫은 없지 않느냐는 물음에 나를 못 찾은 것은 후회되지만 다시 그 일을 한다 해도 또 후회할 줄 뻔히 알아도 나는 다시 그 일을 하고 이렇게 후회하겠다는 아내.
인생의 정답이라는 게 있을 수 없겠지만 그래도 아이들은 잘 키웠지 않느냐
그거면 됐다 이 세상에 태어난 소명 중 내 일은 다 한 듯하다.
내 짧은 생각에 내게 또 다른 욕망은 욕심이니 가자 부르시면 기쁜 마음으로 가겠다는 아내.
내게는 아재나 꼰대가 아닌 어르신으로 사는 첫 걸음은 얼굴과 매무새가 정갈해야한다며 늘 양복과 넥타이를 추천한다.
시대를 리드하기까지는 아니더라도 스스로 자세를 낮추고, 말수는 적게, 잔잔한 미소로 불치하문의 겸손을 갖추는 태도와 행동이 어르신일 것이란 확고한 개인소견.
상대가 하고 싶어 하는 말을 경청해 주고 세상 돌아가는 상황을 잘 감지해 젊은이들 보다 한참 떨어지지 않도록 공부하며 어느 누구도 내가 아는 분야를 제외하곤 나보다 더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나서지 말라.
아재 꼰대 어르신은 내가 정하는 게 아니라 상대가 나에 대해 느끼는 것이니 답답하고 안타까워도 상대가 물을 때만 대답해 주도록 하라.
주름지고 쳐진 얼굴이야 흐르는 세월에 어쩔 수 없지만 그나마 가꿔야한다
나를 대신하는 게 내 얼굴이고 누구에게나 보여 지는 내 자신이다.
나는 나를 잘 안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의외로 나를 모르는 경우가 대단히 많으니 거울 앞에서 얼굴을 자주 봐라.
한번 보고 두 번 세 번 볼 때마다 다른데 자주 볼수록 내 자존감이 커지고 보는 시간도 짧아진다.
찡그린 얼굴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밝고 맑은 얼굴을 만들자 한다.
아내 얼굴에 잔주름이 생겼다.
거울을 자주 보니 본인이 먼저 알 텐데 그 흔한 주사 한 방 안 맞았다.
더 자주 바라봐야겠다.
‘애란이도 이젠 시집가야지’
그날 3학년 교실에서 목에 힘을 주시며 필자에게 이 말을 하신 분은 열일곱 살인 필자보다 한 살 더 많은 조봉환 선생님이었다. 순간 나는 속이 상해서 입술을 깨물고 눈물을 삼켰다. 필자의 자존심을 송두리째 짓밟아버린 선생님의 잔인함이 미워서였다.
훤칠한 키, 이목구비가 뚜렷한 잘생긴 용모, 목소리까지 좋았던 조 선생님. 싱긋 웃으며 그냥 지나가는 얘기로 농담한 것인 줄 뻔히 알면서도 필자가 상처를 받은 것은 선생님에 대한 필자의 심상치 않은 감정 때문이었다.
어느 날 교회에서 예배 도중 내가 소리 죽여 울고 있었더니 옆에 계신 아줌마가 조심조심 물으셨다.
“얘 너 왜 우니?”
대답을 하지 않자 또 다른 아줌마가 말했다.
“아마 설교 말씀에 감동해서겠지 뭐”
천만에 말씀. 그날 내가 운 것은 동생 연희 때문이었다.
목사님 설교 중에 동생은 작은 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언니, 내가 언니 편지에서 우표를 떼었어, 우표 수집하려고.”
“말도 안 돼. 내 편지에 손을 대다니!”
선생님들의 편지를 보물처럼 아끼던 필자였다. 더군다나 조 선생님의 편지를? 속이 상해서 눈물이 났던 것이다.
조 선생님은 분명히 필자의 가슴 한 자락을 차지하고 계셨다. 여섯 살에 초등학교에 입학하신 조 선생님은 그해 어느 날 어머니께 매를 맞았는데 “잘못했다고 한 번만 빌어라. 그러면 때리지 않겠다”고 애원하는 어머니께 끝까지 굴복하지 않고 결국은 매를 맞다 견디지 못하고 기절까지 하셨다는, 필자 못지않은 고집쟁이 선생님이었다.
조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아리랑’의 가사를 이렇게 풀이해주셨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 리도 못 가서 발병이 나서 나한테 다시 돌아와라’가 아니라 나를 버리고 가는 놈은 십 리도 못 가서 죽어버려라’라고 해야 한다.”
내게서 떠나는 사람에게는 더 이상의 미련을 두지 말고 과감하게 떠나보내야 한다는 의미의 말씀이었다. 처음에는 그 의미가 여리고 정 많은 한국인의 정서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말이라서 충격을 금치 못했지만 필자도 모르는 사이 그 말씀이 점점 와 닿았다.
훗날 조 선생님은 우리들이 어려운 환경을 이겨내도록 그렇게 강인한 의지 내지는 투지를 의도적으로 심어주려고 그러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조 선생님의 의도대로 필자는 강인함을 잘 키워나갔던 것 같다.
국어를 가르쳐주셨던 조 선생님이 김영랑 시인의 ‘모란이 피기까지는’, ‘돌담에 속삭이는 햇살’ 등을 낭송하실 때면 그 멋진 모습에 푹 빠져들곤 했다. 금상첨화라고 조 선생님은 잘생긴 용모에 목소리도 일류 성우 못지않았다.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킹카였다.
필자는 혼자서 가슴을 태웠다. 그런데 어쩌랴? 선생님은 서울대학교 학생이었고 필자는 정규 중학교도 못 가서 야학에서 가르침을 받고 있는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소녀였으니…. 필자가 만들어낸 동화에서는 필자가 공주였으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그 사실이 필자를 참담하게 만들었다.
내세울 것이 하나도 없었던 필자는 그때부터 아성을 굳게 쌓기 시작했다. 걸핏하면 자존심을 부르짖으며 상처받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선생님이 아무리 좋아도 절대 내색하지 않았다. 야학 선생님들의 제자 사랑이 각별한 만큼 우리들 가슴속에 피어난 선생님에 대한 존경과 사모의 정도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필자는 그럴수록 더 비참해지는 자신을 느껴야 했다. 이상은 높았으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던, 불운했던 10대에 야학 선생님들과의 신분상 장벽은 필자의 삶에서 결정적인 아픔이었고 상처까지 됐던 것이다.
1990년대 초반 어느 날, 근무하고 있던 평택여고 교무실에 학생들이 구름떼같이 몰려왔다. 군복무를 마치고 갓 부임한 총각 선생님의 얼굴을 보려고 몰려든 것이다. 별로 잘생기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얼굴이 울퉁불퉁 민주적으로 생겼거나 키 작은 분이라도 총각 선생님이라면 무조건 껌뻑 죽는 여학생들을 보면서 필자는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만약 필자의 야학 선생님들처럼 맑은 눈망울, 해맑은 표정의 선생님이 오신다면 과연 어떤 반응이 일어날까. 그 상상만으로도 혼자 즐거울 때가 있다. 아마도 몇 명쯤은 심한 몸살을 앓게 될 것이다.
속없이 외모만 잘난 남자처럼 경멸스러운 대상이 또 어디 있을까? 개성도 없고 평범한 용모의 필자는 순수하고 인품이 있으면서도 잘생긴 남자들을 좋아했는데 B선생님과 조 선생님은 야학 선생님들 중에서도 용모가 영화배우급으로 수려했으며 키도 훤칠했던 멋진 분들이었다. 또한 순수하면서도 의젓한 인품이 단연 돋보였다.
당시에는 신분상의 갭을 느끼며 가슴 아파했는데 요즘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게 아니었다. 필자가 별 볼일 없는 자신을 커버해줄 완벽에 가까운 사람들만 가슴속에 넣어두기를 고집했던 것이다. 현실 감각도 없었던 필자는 오직 그런 사람들만 동경의 대상으로 모셔놓고 혼자 아파하고 상처받은 후 슬픔에 빠져 있기를 즐겼던 것이다. 그렇게 흠모하는 사람만 바라보고 있었기에 다른 사람이 필자에게 품고 있는 고운 감정에는 아예 장님이 되어 깨닫지 못하거나 안다고 해도 터무니없이 오만방자하게 굴었다. 얼음처럼 차가운 반응으로 상대방에게 상처까지 주곤 했다. 자신의 감정이 소중하면 다른 사람의 감정 또한 소중한 것을 몰랐던 시절이다. 정신적 미숙아였던 것이다.
1993년 1월, 여의도에 있는 주택은행 본점을 찾았다. 조 선생님을 뵙기 위해서였다. 야학 시절에는 몸이 마르신 편이었는데 적당히 살이 붙어 보기 좋은 모습이었다. 25년 만에 뵙는 선생님이었는데 선생님도 필자를 잊지 않고 기억해주셨다. 단 1년 동안 우리를 가르치셨는데 그 순수하고 열정적인 시절을 오늘날까지 잊지 않고 선생님 가슴속에 꼭 간직해두고 계셨던 것이다.
선생님은 필자가 10대에 지독한 가난 때문에 맺힌 한이 너무 많다고 하니까 “가난한 것이 그렇게 불편한 거였냐?’ 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말씀하셨다. 당신도 가난했지만 크게 불편한 것을 몰랐다며, 당시 야학 선생님들도 대부분 어려운 처지였기에 우리들의 아픔을 잘 이해할 수 있었고 그러기에 조금이라도 더 많이 가르쳐주려고 노력했다고 말씀하셨다.
조 선생님은 당시의 야학활동이 ‘베풀고, 나누고, 사회에 동참한다’는 의미였다고 말씀하셨다. 선생님의 홀어머니도 삯바느질을 하시며 사셨다고 했다. 돈이 없어서 중․고교 때의 교복도 늘 남이 입던 것을 얻어 입었기 때문에 옷이 길면 긴 대로 짧으면 짧은 대로 입을 수밖에 없었다고 말씀하셨다. 심지어 교복 모자도 쓰레기통을 뒤져서 나오면 먼지를 ‘툭툭’ 털어 쓰고 다녔다고 한다.이렇게 오랜만에 뵙기 전까지는 선생님 댁이 어느 정도 여유 있는 집안인 줄 알았다가 새삼 당신도 그렇게 어려운 처지였음에 놀랐고 그 상황에서도 우리들의 선생님이 되어주셨다는 데 대해 깊이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다.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어려움과 고통은 그 사람을 단단하게 만들어준다. 고통을 많이 겪으신 선생님의 원숙함과 철학의 깊이에 필자의 마음은 고개를 숙였다. 조 선생님은 졸업식 날 집까지 데려다준 우리들이 다시 야학에 와서 선생님들을 붙잡고 운 일을 지금도 잊지 못하고 계셨다.
슬픔마저도 찬란하게 기억되는 그 시절!
서로가 애틋했던 시절의 소중하신 우리들의 선생님이시여.
산책길에 나섰더니 어느새 새빨간 덩굴장미가 지천이다.
이제 연분홍 벚꽃이나 샛노란 개나리, 백목련, 자목련 등 봄꽃이 지나간 자리에 이렇게 예쁜 장미꽃이 피었다.
높은 축대가 있는 집 담장에도 흘러내릴 듯 빨간 장미가 넝쿨 졌고 산책길 한 편에도 무리 지어 아름다운 모습을 자랑하고 있어 보기에 여간 예쁜 게 아니다.
이렇게 탐스러운 덩굴장미를 보니 옛날 장미로 뒤덮였던 장미 터널이 떠오른다.
초등학교부터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필자는 돈암동 한옥 한곳에서만 살았다.
우리 집, 골목에는 문화재급 되는 한옥도 여러 채 있었고 대부분의 집이 단정하고 아름다운 한옥의 멋을 자랑하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 동네의 명칭은 동소문동이었고 미아리 쪽으로 한 정거장 올라간 곳에 돈암동 전차종점이 있었다.
필자는 전차 세대이다. 지금의 아이들은 전차가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하겠지만 필자는 여중 시절 전차로 통학을 했다. 필자가 살던 돈암동에 전차종점이 있었고, 또 동대문에 있는 종점, 경전이라는 곳에서는 한 달씩 쓸 수 있는 자유 티켓, 패스권을 팔았다. 그 패스권을 사면 한 달 동안은 무제한 프리로 전차에 탑승할 수 있었다.
용무가 없어도 을지로나 시내 쪽으로 타보기도 하면서 필자는 프리패스 권을 잘 이용하였다.
우리 집이 돈암동이어서 필자는 돈암동에서 전차를 타고 종로4가 광장시장 앞에서 내려 갈아타고 동대문 밖 창신동에 있는 학교에 다녔다. 돈암동에서 종로4가까지 가는 동안 혜화동 로터리를 지나가는데, 잊을 수 없는 건 봄이 지나 초여름 될 때쯤 로터리의 철제 터널에 하나 가득 피어있는 새빨간 덩굴장미다.
상상해보시라. 전차에 앉아 빨간 장미로 온통 뒤덮인 꽃 터널을 지나는 기분을... 지금 생각해도 너무 로맨틱하고 아름답던 광경이다.
3년 내내 봄, 여름이면 꽃 터널을 지나다니며 동화 나라를 지나는 듯한 상상을 하며 필자의 감수성을 키웠다.
필자가 고등학생이 되는 무렵 전차는 없어졌다. 그 낭만도 따라서 사라져버렸다.
전차가 지나가는 철로를 둘러싸고 있는 로터리에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무덤이 하나 있었다. 도시 한복판의 무덤이라 옮겨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다는데 오랫동안을 그 무덤이 그곳에 있었던 건 그 무덤을 훼손하는 사람은 죽는다는 미신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물론 미신이었겠지만, 그래도 지금은 없어진 걸 보면 누군가 용감하게 그 무덤을 옮겼나 보다.
이제 둥그런 로터리 동산은 없어지고 일직선으로 차가 다니게 되었다. 오늘도 그 혜화동 로터리를 직진으로 지나왔는데, 동그란 모습이었던 로터리와 댕댕댕~하며 달리던 전차의 기억. 어린 날의 예뻤던 추억이 그리워 가슴이 서늘하다.
한낮에도 그저 적요한 읍내 도로변에 찻집이 있다. ‘카페, 버스정류장’이라는 간판을 달았다. ‘버스정류장’이란 떠나거나 돌아오는 장소. 잠시 머물러 낯선 곳으로 데려다줄 버스를 기다리거나, 마침내 귀환하는 정인을 포옹으로 맞이하는 곳. 일테면, 인생이라는 나그네길 막간에 배치된 대합실이다. 우리는 모두 세월의 잔등에 업히어 속절없이 갈피없이 흔들리며 먼 길을 가는 나그네가 아니던가. 저마다 여정을 손에 쥔 순례자이며 여행자! 상호에 서린 서정을 음미하며 찻집으로 들어선다.
‘카페, 버스정류장’ 주인 박계해(57)씨는 5년여 전까진 문경시 가은읍의 산골에서 귀농자로 살았다. 그보다 더 오래전엔 중학교 교사로 재직했다. 교직생활은 신바람 났었더란다. 그럼에도 교사직을 버리고 귀농을 한 건 그 어떤 틀에 사로잡혀 살기를 악어의 아가리에 머리를 집어넣는 일처럼 싫어하는 성향의 소유자였기 때문이다. 그보다 더 결정적인 이유는 남편이 어느 날 귀농을 선창하고 나선 데 있었다. 그녀는 고분고분 따랐으며, 남편보다 더 빠르게 시골생활에 적응했다지. 지금으로부터 15년 전에 그렇게 시작된 시골 살림은 이후 10여 년간 계속됐으나 다시 행선지를 바꾸었다. 인생이라는 여행 혹은 순례에 무슨 고정된 목적지가 있을 것인가. 박계해씨는 우연히 상주시 함창읍의 거리를 걷다가 오래된 일본식 2층 고가에 필이 꽂혀 단박에 임대를 하고 찻집을 차렸다.
교사에서 농촌생활자로, 다시 소읍의 찻집 운영자로. 다채로운 편력을 하며 중년기 15년여의 세월을 흘러온 셈이다. 섭렵이 쏠쏠했으니 드라마도 푸짐하렷다. 행복과 불행이, 만족과 불안이, 빛과 그늘이 순리처럼 그녀의 시간을 곡예하며 통과했을 게다. 그렇다면 마땅히 자리에 모시어 경청하는 게 사리에 맞는 일. 운치도 정취도 남실거리는 찻집에 마주앉아 한 여자의 삶에 서성거리는 나름의 광량(光量)이라는 걸 느껴볼 수 있는 기회란 행운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귀농 10년의 얘기부터 들어볼까? 순식간에 학교에 사표를 내고 후다닥 귀농한 대목으로부터 얘기가 시작되었다.
“남편의 제안을 따라 귀농 교육을 받으며 곧바로 제 마음도 시골로 향했어요. 제 고향이 하동 악양의 시골인데요, 허물어져가는 돌담집에 대한 애호 같은, 농촌의 자연과 풍경에 매료되는 성향 덕분이었죠. 드디어 지인의 소개로 가은의 시골을 둘러보게 되었는데, 모든 게 맘에 들었어요. 빈집 하나를 사서 적당히 고쳐 시골 살림을 시작했어요. 도시 출신인 남편과 달리 저는 풀이나 피도 잘 뽑고, 매사 빠르게 적응했어요. 시골생활의 많은 점들이 좋았어요.”
“귀농의 초기 정착에 갖가지 애환을 겪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선생의 시골생활은 좀 달랐군요. 일테면, 어떤 점들이 만족스러웠죠?”
“무엇보다 도시에서와는 달리 자연이 주는 감흥들이 참 좋았어요. 하늘, 땅, 나무, 풀, 모든 자연 생태가 주는 힘이라는 것, 그게 좋았어요. 재래식 화장실을 쓰며 도시에서 좌변기를 쓸 때 느꼈던 죄의식을 갖지 않을 수 있다는 점도 만족스러웠어요. 이웃분들과의 소통은 늘 즐거웠어요. 제가 말이죠, 마을 부녀회장을 맡기도 했어요. 상(喪) 당한 집에서 이웃들과 둘러앉아 전을 지진 기억도 많아요. 학교생활의 경험을 살려 할머니들을 모신 학급을 운영하기도 했어요.”
귀농 경험, 책으로 펴내다
“처음 3년간은 아무런 불편 없이 살았어요. 교직 근속 20년을 채우기 직전에 사표를 써 연금 대상자가 되진 못했지만 퇴직 때 받은 돈이 있었기에 미리 걱정하거나 연연해하질 않았어요. 그런데 3년이 지나자 돈이 바닥나고 말았어요(웃음). 저나 남편이나 돈 문제엔 워낙 태평한 사람들이었어요. 저축이라는 걸 생각조차 하지 않고 살았거든요.”
“돈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는 게 귀촌귀농이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물질을 하느님으로 모시는 이 세속에선 환상에 불과할지도 모르죠.”
“저희 집 가훈을 들어보실래요? ‘내비도!’ 바로 그거였어요. 남편이나 저나 그냥 사는 스타일이었어요. 귀농해서 살며 생전 처음으로 돈의 위력을 실감했어요. 어느 정도 돈 문제에 덜미를 잡혔던 거죠. 마치 벌을 받는 것처럼(웃음).”
‘내비도!’ 내버려둬라, 저절로 흘러가련다. 렛 잇 비(let it be)! 근사한 푯대가 아닐 수 없다. 인간의 삶이란 낭만적 지향이건 급진적 가치이건, 물적 토대에 의해서만 실현 가능하다는 소식이 난무하지만, 그게 반드시 그러기만 하랴.
귀농이나 귀촌이란 소유를 헐겁게 하는 실천일 수도 있다. 소유하지 않음이 아니라 가급적 소유의 부피와 무게를 줄이는 지혜를 발휘할 절호의 찬스일 수도 있겠지. 박계해씨의 사고와 삶은 자유로운 지평을 향했던 것으로 보이며, 귀농의 나날들은 한동안 유쾌했던 것 같다. 그러나 통장 잔고가 바닥을 치면서 당장 활로를 찾아야 했다.
“더 이상 여유를 부릴 상황이 아니라서 일을 만들어 덤벼들었어요. 가은읍내에 점포를 얻어 옷을 팔았어요. 전에 천연염색과 바느질 공부를 해둔 게 있었는데, 그게 도움이 됐어요. 손수 염색한 옷가지들이 제법 팔려나갔으니까.”
“시골 옷가게 매상이라는 게 소소했을 테고, 남모르게 진땀 흘린 시절들이었겠어요.”
“당시 아들과 딸, 두 녀석이 학생이었는데 교육비 부담이 컸어요. 어떻게 이 상황을 헤쳐 나갈까, 늘 고심이 많았어요. 그러나 자존심이 상하거나 위축되진 않았어요. 이왕이면 일을 즐겁게 해나가야겠다는 생각으로 가게에 딸린 안방을 동네 사랑방처럼 활용해 아줌마들과 교류를 했어요. 제가 교직에 있을 때 교사 극단을 만들어 활동한 경험이 있는데요, 가은 시골의 초등학교 학부형들과 작당을 해 연극 캠프를 열기도 했습니다.”
고심이 많은 생활이었지만 여흥을 누리는 일에도 게으르지 않았던 셈이다. 취향과 재능을 죽이는 난감한 상황에서도 여하튼 들고 일어서는 게 낙관의 힘이렷다.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것처럼 즐거운 게 다시 있을까. 무슨 일이건 억지로는 하기 싫은 반면, 하고 싶은 일은 기어이 해내면서 살고 싶었어요. 그런데 사실 생활에 보탬이 되고자 벌인 일이기도 했어요. 연극 강사로 나서 수입을 얻었으니까. 주부강좌에 나가 천연염색을 강의하기도 했어요.”
“가은 시골에서의 귀농 경험을 담은 책, 를 출간했더군요.”
“촌에 살며 농사를 좀 했지만 사실 일머리가 서툴렀고 커다란 애착도 없었어요. 자연이 드러내는 사계의 민감한 변화를 만끽하는 일, 야산에 올라 산나물을 뜯는 일, 어른들과 어울리는 일은 참 좋았지만 그것만으로는 다 채워지지 않는 어떤 허기 같은 게 있었어요. 나, 이렇게 살다가 마는 거야? 아니지, 이건 아니지 하는 생각으로 귀농일기를 쓰기 시작했어요. 제가 버지니아 울프를 좋아하는데, 그가 말했어요. ‘기록하지 않은 일은 일어나지 않은 일과 마찬가지다’라고. 그 말에 자극을 받아 마을 얘기, 마을 사람들과의 관계, 좌충우돌한 경험담 등을 글로 썼던 겁니다. 책 출간 뒤엔 글쓰기 강사로 활동하기도 했어요.”
“비록 물적 애환이 자심했다지만 동분서주, 야무지게 자신을 건사한 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말이죠, 귀농으로 맞닥뜨린 시련 중에 부부간 갈등이 깊어지는 경우가 드물지 않더군요. 선생의 그 열렬한 날들 중에 부군과의 관계는 어땠나요?”
“흠. 저희 부부는 이혼을 했어요. 제가 먼저 이혼을 원했고, 마침내 남편이 동의해줬어요. 저는 그를 존경하고 좋아하고 사랑했어요. 그러나 더 이상 발전이 없는 한계를 깨달았어요. 소통에 문제가 생겼어요. 각자의 길을 가는 게 옳다는 판단을 했죠.”
언젠가는 섬에서 살고 싶어
이혼을 금기시하는 묘한 모럴도 있지만, 결혼이 자연스럽듯이 이혼 역시 당연한 귀결로 찾아드는 수가 있다. 이혼이 상처가 되지는 않았다고, 차라리 좋은 경험이었다고, 박계해씨는 담담하게 토로하고 있다. 그녀는 이혼 절차를 완료하고 남편과 함께 법원을 나서던 날의 기억을 다음처럼 글로 썼다.
‘그는 내 어깨를 툭 치며 독립을 축하해! 라고 말했다. 그 순간 나는 이 대단한 남자와 결혼했던 것이 뿌듯해서 그에게 몸을 찰싹 붙이고 팔짱을 끼었다.’
박계해씨의 찻집 ‘카페, 버스정류장’은 귀농 이후 그녀의 삶을 새로운 쪽으로 데려다주었다. 인생엔 터닝 포인트라는 게 있는 법. 찻집 운영과 더불어 그녀의 나날은 바닷장어처럼 생동하는 것으로 보인다. 원로 시인 강은교 선생이 이 찻집을 다녀간 뒤 ‘카페 버스정류장’이라는 제목의 시를 발표하기도 했지만, 어지간히 지역의 명소로 부상해 일부러 찾아드는 이가 드물지 않다. 토속적 미감과 모던한 감각이 잘 버무려져 낭만적 분위기를 자아내는 이 적막한 소읍의 찻집에선 차만 파는 게 아니다. 예술인들을 위한 전시장으로, 노래 공연장으로, 시낭송 공간으로 쓰이기도 하니까.
“귀농 이후 그 어느 시절보다도 편합니다. 일단은 규칙적인 소득이 발생하기에 안도할 수 있고, 다양한 개성의 사람들과 만나 삶을 얘기할 수 있다는 게 참 좋아요. 아이들도 잘 자라 아들놈은 부산에서 연극배우로 활동하고, 딸은 만화가로 일하고 있어요. 두 번째 책 을 펴낸 일도 즐거운 추억이 되었어요.”
“귀농으로 촉발된 인생의 색다른 여정이 어떤 안착에 이른 거예요?”
“꽤 안심을 느끼지만 이 찻집은 앞으로 5년 정도만 더 할 작정입니다. 경제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만 있다면 이곳을 지역 예술인들에게 내놓고 싶은 생각도 있어요. 저는 다시 어디론가 떠난다거나 환경을 바꿔야겠죠. 음, 요즘엔 시나리오를 쓸 궁리를 하고 있어요. 독립영화가 아닌 상업영화용 시나리오를요. ‘나의 경제’라는 제목의 책도 한 권 쓸 예정이에요.” “가령, 무인도에 혼자 살아야 할 경우 꼭 가져가고 싶은 한 권의 책이 있다면?”
“이상의 예요. 어, 그런데 제가 최종적으로 가서 살고 싶은 곳이 섬인데요?(웃음)”
“섬에서의 삶을 꿈꾸세요? 고독을 견딜 수 있겠어요?(웃음)”
“가급적 환경을 새롭게 바꿔 자신의 삶이 점점 나아지는 걸 느끼고 싶어요. 경험 세계를 넓혀 내적으로 성숙하는 기쁨을 맛보며 살고 싶다는 거!”
길은 다양하며, 모든 길마다 나그네의 경전이다. 삶의 문제를 여행으로 혹은 순례로 치환할 수만 있다면 귀농이건 섬이건 가슴 설레는 행로이지 않겠는가. 잠정적인 고난이야 해 뜨기 직전의 어둠이나 추위에 불과할 테고.
길은 다양하며, 모든 길마다 나그네의 경전이다. 삶의 문제를 여행으로 혹은 순례로 치환할 수만 있다면 귀농이건 섬이건 가슴 설레는 행로이지 않겠는가. 잠정적인 고난이야 해 뜨기 직전의 어둠이나 추위에 불과할 테고.
박원식 소설가
-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등의 저서가 있다.
초등학교 시절 필자와 친구들의 아지트는 등나무 밑이었다. 그런데 5학년 여름방학이 시작되던 날, 등나무 밑에 몇 명의 아저씨들이 서성이고 있었다. 작은 짐 보따리 앞에서 웅성거리다가 한 명이 어디론가 뛰어가더니 열쇠를 가지고 와서 옆에 있던 건물의 쪽문을 열었다.
우리는 호기심에 모두 그리로 달려가서 안을 들여다봤다. 아저씨들은 상자를 열어 책을 꺼내기 시작했고 보따리를 풀어 옷들을 열심히 정리했다.
그때 아저씨들과 눈이 마주치기라도 하면 걸음아 날 살려라 하며 도망갔다가 또다시 그곳으로 갔다. 수십 번을 그렇게 하면서 놀이처럼 즐겼다. 나중에는 아저씨들이 주는 과자도 받아먹고 이름을 물으면 대답하면서 친해졌다. 어머니한테 얘기하니 자취생들이겠지 했다.
아저씨들은 가끔 기타를 치면서 노래도 했고 우리에게 동화도 들려줬다. 그 뒤 아저씨들이 서울대 1학년이라는 것도 저절로 알게 되었다. 그렇게 몇 달을 보내다가 겨울방학이 되었고 그 다음해는 6학년이라 입학시험 대비로 바빠 아저씨들에 대해선 까맣게 잊은 채 중학생이 되었다. 중2 때 혼자 집에 오는데 한 아저씨가 “야아~ 너로구나 많이 컸네!” 했다. 중학생이 되면서 부끄러움이 부쩍 많아진 필자는 그 말에 놀라 뒤도 안 돌아보고 집으로 뛰어갔다. 씩씩거리는 필자에게 동생들이 “언니 왜 그래?” 하고 물었지만 “몰라!” 하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날부터 가끔 그 아저씨를 길에서 만났다. 자취생들 중 한 명이었는데 제대하고 복학했다고 들었다. 키가 무척 컸고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기억이 안 나는데 별명이 개고기였다. 종종 우리 집에 와서 어머니랑 얘기도 하고 동생들과는 시시덕거리다가 가곤 했는데 필자는 특별하게 할 얘기도 없어 무시하고 지냈다. 이후 나는 고등학생이 되었고 그 아저씨는 장학생으로 대학원까지 들어가 연구원이 되었다.
필자는 그 아저씨가 어느 과 학생이며 이름은 뭔지 동생들을 통해 알게 되었지만 특별한 관심은 없었다. 당시 이성에 관해서는 무조건 멀리 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기에 더욱 그랬다. 하지만 그 아저씨는 형제가 없어 필자가 여동생이 되어줬으면 했던 거 같다. 물론 필자도 오빠가 있으면 좋겠다 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눈치만 보다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런데 필자가 결혼하고 몇십 년 뒤, 뜬금없이 개고기 아저씨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때부터 오빠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개고기 아저씨가 떠올랐다. 뭔가 의논하고 싶을 때, 어려운 일을 겪을 때면 조금이라도 위로받을 수 있는 오빠라는 존재가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든다.
어느 날 그 친구분을 어느 결혼식장에서 우연히 만났다. 필자를 알아보고 인사를 하고는 개고기 아저씨가 폐가 안 좋아 고생하다가 갔다는 얘기를 해줬다. 지금이라면 살갑게 대해줬을 텐데… 그렇게 해주지 못한 게 미안해졌다. 친구와 묘소라도 찾아가볼 걸 그랬나? 왜 그런지 친구분을 만난 뒤로 개고기 아저씨 생각이 더 났다. 필자 오빠가 되어줄 사람이 이젠 영원히 떠나버렸다는 생각까지 들고, 아저씨가 “이제 내 마음 알겠니?”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스멀스멀 올라오는 이 억울한 마음은 또 뭔지 알 수가 없고. 어쨌든 만나보고 싶은 마음만큼은 진실이다. 이제는 마음껏 스스럼없이 굴 수 있는데… 아저씨가 이 세상에 없어 슬프다. 아니 그립기까지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