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들에게 가장 익숙한 운동으로는 무엇이 있을까? 바로 ‘걷기’다. ‘프리맨 도보여행’ 클럽은 걷기의 즐거움을 깨닫고, 걷기를 통해 건강을 가꾸고 있는 시니어들의 모임이다. 프리맨 도보여행 클럽의 대장을 맡고 있는 기윤덕(奇允德·58) 대장의 목소리를 통해 걷기의 매력과 즐거움을 확인해 본다. 시니어를 위한 종합 포털 유어스테이지에 자리한 ‘프리맨 도보여행’ 클럽은 회원 708명에 방문자수 11만 명에 달하는 인기 클럽이다. 2010년 12월 첫 모임을 시작한 후로 지금까지 한 번도 쉬지 않고 매주 모임을 가지며 활발하게 활동
최성환 한화생명 은퇴연구소장·고려대 국제대학원 겸임교수 때는 18세기 중반. 유럽 열강들이 해외 식민지를 놓고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1755년 9월 북아메리카에서 전쟁을 시작한 영국과 프랑스가 지중해에서 맞붙은 것이 1756년 5월의 미노르카 해전이다. 이 해전을 계기로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 등이 개입하면서 유럽 전역으로 7년 전쟁이 확산되었다는 것이 역사학자들의 분석이다. 발단은 1708년 왕위 계승 전쟁 이후 영국이 지배하고 있던 미노르카섬(현재는 스페인
동네 xx금고 이사로 있는 친구가 이사장에 출마해 보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의견을 물어왔다. 필자는 이 xx 금고 이사장 선출 투표권도 없기 때문에 표를 의식하고 던지는 질문이 아니라 친구로서 편하게 조언을 듣고 싶어 묻는 것이다. “아니 편하게 사시지 왜? 고난의 길을 걸으려하는가?”하고 본인의 의지를 물어봤다. 지금 이사장은 두 번이나 연임하였기 때문에 규정상 이제는 물러나야하는 호기에다 주위에 우호적인 사람들이 많으니 출마해 보라고 주위에서 권유한다는 것이다. “출마하면 당선가능은 확실한가?” “꼭 된다
2000년대 초반 ‘아름다움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강의를 의뢰받은 적이 있다. 주제를 보고 필자는 대단원에 나이 들어 얼굴에 잔주름 가득한 미국 여배우 오드리 헵번이 두건을 한 채 뼈만 앙상한 흑인 어린이를 안고 있는 사진을 넣기로 했다. 이 사진만큼 ‘아름다움의 지속가능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시절 필자는 완전 컴맹이었고 강의용 파워포인트 교재는 디자인팀 여직원이 만들어 주곤 했다. 필자는 그날도 평소대로 강의 콘티를 손으로 스케치한 후 디자인팀 여직원에게 파워포인트로 만들어 달라고 했다.
정년퇴직하고 약 1년을 쉬었다. 43년이라는 길다면 긴 세월을 한결같이 직장에 몸담아왔던 필자f에게 ‘정년퇴직’이라는 단어는 처음에는 생경하기조차 했지만 길고 지루했던 그 세월에서 해방된다는 느낌은 처음에는 아쉬움보다는 홀가분함으로 다가왔다. 그동안 직장생활로 인해 하고 싶어도 못했던 취미활동 시간도 늘리고 친구들과 어울려 산과 강을 찾아 마음껏 자유를 누리고 싶다는 생각에 다소 설레기도 했다. 그렇게 1년이 훅~지나가 버렸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알수 없는 공허함이 점차 마음속에서 자리를 넓혀갔고 삶의 현장에서 살짝 비켜 앉
우리나라가 한강의 기적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급격하게 경제발전을 이룬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으나 사람들은 그중 하나가 고등교육을 받은 풍부한 인력에 있었다고 한다. 세상의 부모들은 왜 아이에게 공부를 하라고 하는 것일까? 필자는 철이 들면서 이런 의문을 품고 있었다. 오늘날 자라나는 대부분의 학생은 지엽적으로는 알고 있지만 핵심적인 답을 하지 못하는 것 같다. 취업이나 결혼을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알아야 면장(免牆)을 한다는 말도 바로 그런 말이다.
지구 온난화의 여파로 그 폭염 열기가 계절을 초월해 최고조를 달린다. 이에 상응이라도 하듯 나라에는 크고 작은 사건들이 곳곳에서 터지고 그 애도의 열기도 식을 줄을 모른다. 가습기 사건, 강남 묻지마 화장실 사건 등등. 희생의 아픔보다 더한 무기력을 채우기 위해 햇살 가득한 베란다 밖으로 세상을 내다보았다. 자연은 여전히 청아하고 맑은 계절의 기운을 창출해 내고 있다. 아직은 살아있기에 성찰하며 그 애도의 마음을 보내고 싶다. 미처 준비하지 못한 죽음이라는 낭떠러지 끝에서 마지막 발버둥의 소리들이 귓전을 맴돌며 삶에 대한 허무
우리 한자어에 부부(夫婦)라 함은 지아비 부(夫)와 지어미 부(婦)를 뜻한다. 부부의 날은 2007년 부부 관계의 소중함을 깨우치고 흔들리는 가정의 이탈 속에서 화목한 가정을 이끌어 가자는 취지로 여성가족부 주관으로 만들어진 법정기념일이다. 건전한 가족 문화의 정착과 가족 해체 예방을 위한 행사를 개최하는 의미를 담고 만들어진 특별한 날이다. 매년 5월 21일로, 5월은 가정의 달로 숫자 2는 두 사람이 1은 하나가 된다는 의미에서 만들어졌다. 뜻 깊은 부부의 날을 맞이하여, 가정마다 이혼율은 높아지고 그것도 황혼이혼율이 늘
어릴 적 천수답 물꼬를 터 물레방아 놀이를 하다가 농사를 망칠 뻔하였다. 그러나 할아버님은 필자를 한 번도 나무라지 않으셨다. 성년이 되어서도 큰 뜻을 이해하지 못하였으나 손주를 키우면서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80년 만이라는 5월의 더위가 계속되고 있다. 물놀이장은 여름철 같다. 마땅한 장난감이 없던 어릴 적에는 집 앞 논에서 물놀이하고, 밭에서는 수박·참외·오이를 따먹으면서 놀았다. 배가 고프면 냅다 집으로 달려가곤 하였다. 평상에 앉으신 할아버님은 새참을 막 드시는 때가 많았다. “어서 오너라. 너는 먹을 복이 참 많구나
거주하고 있는 지역의 구청에서 1998년 컴퓨터교실이 처음 만들어졌지만 필자는 신청을 미적거렸다. 컴퓨터나 인터넷이 지금같이 ‘대단한 물건’이 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자가 통장인데 어쩌겠는가. 참여할 수밖에. 그리고 ‘한글 문서의 달인’으로 대변신하고 싶은 맘도 있었다. 그러나 문외한이 뭔가를 배우는 데는 엄청난 고통이 수반하는 법. 그놈의 클릭을 수없이 반복하느라 어깨, 손목이 뻐근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그래도 필자는 원래 ‘의지녀’로 전 세계에 명성이 자자했던 터라 포기하지 않고 1년을 버텼다. ‘어깨, 손목은
A는 국제결혼 중개업자의 소개로 베트남 여성 B를 알게 돼 베트남에서 결혼식을 올린 후 2012년 4월 9일 혼인신고를 마쳤다. B는 A와 혼인하기 전에 베트남에서 아이를 출산한 적이 있었다. B와 결혼 중개업자는 이 사실을 알려준 적이 없어 A는 혼인 당시 B의 출산 경력을 모르고 있었다. 그러다가 A는 1년이 지난 2013년 8월 무렵 B가 혼인 전에 베트남에서 아이를 출산한 사실을 알게 됐다. 속았다고 생각한 A는 화가 나서 2013년 8월 28일 사기에 의한 혼인 취소 등을 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B는 만
어쩌다 수십 년 전 결혼식 사진을 볼 때면 풋풋하고 아름다웠던 부부의 모습에 가슴이 따뜻해진다. 순백의 웨딩드레스를 입고 행복한 미래를 약속했던 그날의 설렘이 되살아나기도 한다. 다시 그날로 돌아갈 수는 없겠지만, 그때의 두근거림은 재현할 수 있다. 바로 리마인드 웨딩(Remind Wedding)이다. 요즘은 30·40주년 결혼기념일을 기념하거나, 환갑·칠순잔치를 대신해 리마인드 웨딩을 하는 부부가 늘고 있다. 소박하게 부부 기념사진을 찍는 것부터 지인들과 함께 즐기는 소규모 웨딩 파티까지. 빛바랜 사진 속 신랑·신부를 핑크빛으
잘 부푼 팝콘 같은 탐스러운 벚꽃, 어릴 적 병아리 떼 종종종, 하는 노래가 생각나는 샛노란 개나리, 화전에 쓰이던 고운 분홍빛 진달래, 그 자태가 너무나도 우아한 자목련 백목련, 어느 향수 못지않은 향기로운 라일락, 거기에 쌀밥처럼 풍성해 보여 붙여진 이팝, 조팝나무 등 우리 곁에 가까이 있던 봄을 알리는 전령 꽃들이 서서히 자취를 감출 즈음 우리는 계절의 여왕 장미를 만난다. ‘of all flowers me thinks a rose is best’ 모든 꽃들 중 최고는 장미라고 영국의 문호 셰익스피어가 말했듯이 장미는 보는
필자는 유엔이 정한 65세 노인의 나이에 해당되고 건설현장에서 땀을 흘리며 일을 하니 노인노동자임에 틀림없다. 좌우를 둘러보아도 필자처럼 60이 넘은 늙은 노동자는 보기가 어렵다. 필자는 운(?) 좋게 아직 일을 하지만 건설현장에서는 나이든 사람을 전염병환자처럼 기피한다. 주된 이유는 나이 들면 행동이 둔하고 고집이 세어 부려먹기 어렵다는 선입견이다. 이런 선입견이 여러 곳에서 작용한다. 예를 들면 현장에서 일을 하다가 다치기도 한다. 본인의 부주의든 남에게 피해를 입었든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사고는 일어난다. 사고가 나면 난
한국인들의 첫 서양 나들이는 일본인들이나 중국인들에 비해 늦었다. 개항이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30년 이상 늦어진 까닭이다. 중국의 개항은 아편전쟁 후인 1842년(남경조약), 일본의 개항은 1854년인 데 비해, 한국은 일본과의 개항조약을 1876년(강화도조약), 미국·영국과는 1882년에 맺었다. 또 일본이나 중국은 서양문물의 우수성을 인정하고 자발적으로 사절단을 파견하여 각국을 ‘견학’하지만 우리에겐 이 같은 의욕이 부족했다. 조선은 혼자 있기를 좋아했다. 정부 차원에서 허용된 몇 개 항구를 제외하고는 외국과의 해로와 육로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