흡혈귀로 알려진 드라큘라는 실존 인물이다. 동유럽의 루마니아 중부 아르제슈주 쿠르데아르제슈 시에는 드라큘라 성으로 알려진 ‘브란(Bran) 성’이 있다. 루마니아 여행자들은 ‘브란성’을 빼놓지 않고 찾는다. 루마니아 당국에서도 이미 소설, 영화, 뮤지컬 등으로 전 세계에 알려진 ‘드라큘라’를 이용해 관광객들을 유치하고 있다. 드라큘라는 루마니아에서는 역사에 기록된 공인 영웅이다. 그 영웅은 어떻게 흡혈귀로 변신했을까? 동화 속에 나옴직한 멋진 고성, ‘브란 성’ 여느 관광지가 그렇듯이 브란성 입구에는 드라큘라와 관련
장진 감독의 영화 을 원작으로 영화에서는 볼 수 없었던 내레이션이라는 형식을 더한 작품이다. 무기징역 선고를 받고 복역 중 15년 만에 특별 귀휴 대상자로 선정돼 처음 아들의 얼굴을 보기 위해 찾아간 아버지의 이야기를 그렸다. 아버지와 아들의 애틋한 감정을 담아낸 다양한 음악 레퍼토리로 눈과 귀가 즐거운 연극을 관람할 수 있다. 작품 속 아들과 같은 또래의 아들을 둔 아버지, 정태영 연출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연출을 맡게 된 계기 10년 전 장진 감독의 이라는 영화를 봤는데 따뜻한 이야기에 감
요즘은 다들 형편이 좋아졌는지 휴가철이나 무슨 때만 되면 외국으로 나가는 사람들로 인천공항이 북새통이 된다고 한다. 소시민인 필자는 아이가 어릴 적부터 어른이 되어 더는 아빠 엄마와 휴가를 같이 보내려 하지 않게 되었을 때까지 여름휴가나 겨울휴가 여행을 국내, 특히 동해안으로 갔다. 우리나라 곳곳 다 아름답지만, 그래도 한계령을 넘어 설악산으로 가는 구불구불 길이 좋았다. 고개 넘어 맞닥뜨리는 동해의 탁 트인 파란 잉크 빛 바다와 특히 내가 좋아하는 먹거리 해산물이 풍부하다는 점이 그곳을 여행지로 꼽는 첫 번째 이유였다. 가수 양
자유공원에서 차이나타운 쪽으로 발길을 옮기자. 갑자기 북적이는 인파속으로 휩쓸렸다. 주말이라 그런지 많은 사람들이 그곳을 찾았다. 여기저기 붉은 색으로 장식한 가게와 벽화들, 붉은색 물결이 마치 차이나타운을 상징하는 듯하다. 왜 그들은 붉은 색을 좋아하는 걸까? 중국인들이 홍색을 좋아하는 이유는 붉은색이 복을 가져다 준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삼국지 벽화거리 인근에 청일 조계지 계단이 나타났다. 조계지(租界地)란 외국인 거주지를 뜻하는데 1883년 제물포 개항 이후 많은 청국과 일본인들이 들어와 이곳을 거주지로 삼았다고 한
5월의 마지막 주말에 친구와 월미공원을 가자고 약속을 했는데, 막상 동인천역에서 만난 후에 생각이 바뀌었다. 이왕지사 발걸음을 하였으니 동인천에서 시작하여 자유공원, 차이나타운, 그리고 월미공원으로 이어지는 추억의 오솔길을 함께 걸어보자고 의기투합하고 도보순례를 시작하였다. 동인천역전은 50여 년 전의 모습에서 크게 달라진 게 없어보인다. 50여년이라고 하면 강산이 다섯 번이나 바뀌고도 남을 세월인데 막상 그곳은 세월의 무게가 살짝 비켜간 것처럼 올드한 모습에 왠지 모를 정겨움과 친근감이 느껴졌다. 역에서 출발하여 자유공원쪽으로
필자 가족이 놀러 간 적이 딱 한 번 있다. 5남2녀로 나는 맏딸이다. 엄청난 식구가 놀러 갈 수 있는 차가 있던 것도 아니고, 버스를 타야만 했다. 그 버스도 하루 다섯 차례 다녔다. 필자의 고향은 괴산이다. 그곳에는 쌍곡, 화양동이 있는 휴가지다. 필자 집은 그 곳에서 십 여리 떨어진 곳에 살았다. 사람이 붐비는 휴가철이 되면, 버스에 사람이 꽉 차서 지나가는 것을 보고도 도시사람들이 놀러 가나보다. 그날이 그날처럼 무심하게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해가 서쪽에서 떴다. 필자 가족한테 괴산수력발전소가 있는 개울에 놀러 가자고
몇 년전 봄에, 언니와 함께 경주의 보문단지로 ‘왕벚꽃’구경을 갔다. 왕벚꽃 구경을 하기에 가장 좋은 날로 골라 관광여행사에 예약을 했다. 필자는 버스만 타면 차멀미를 심하게 해서 관광버스로 갈 수 있는 것도 늘 기차로 간다. 이번에도 KTX를 타고 신경주역에 내리니 우리에게 문화 유적을 설명해 줄 가이드가 대기하고 있었다. 우리는 12인승 봉고차에 몸을 싣고 달리는 차 안에서 어린아이 처럼 마냥 신바람이 났다. 가이드는 운전하고 가는 내내 보문단지의 왕벚꽃을 은근히 걱정했다. 바로 전날에도 비가왔기 때문에 벚꽃이 다 떨어져
1978년 10대 국회의원 선거에 낯익은 얼굴이 당선됐다. 바로 인기 드라마 등으로 스타덤에 오른 탤런트 홍성우였다. 당시 37세의 나이에 연예인 최초로 서울 도봉구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돼 국회의원이 된 홍성우는 11, 12대 민주정의당 소속으로 같은 지역에서 3선 기록을 세웠다. 이후 배우 최무룡, 신영균, 탤런트 코미디언 이주일, 가수 최희준, 연기자 이대엽 이낙훈 이순재 최불암 강부자 신성일 정한용 최종원 등이 지역구 혹은 비례대표(전국구)로 국회의원이 돼 활동했다. 연기자 이덕화 문성근, 코미디언 김
1960년대의 일이니 꽤 오래된 기억이다. 여유로운 어느 주말 오후, 뮌헨 거리를 한가로이 지나가는데, 한 미술관 출입구 주변에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필자는 무심코 미술관 벽면을 크게 장식하고 있는 플래카드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놀랍게도 르네 마그리트(René Magritte1898~1967)와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 1904~1989) 작품 중심의 초현실주의(Surrealism) 전시회가 아닌가? 하마터면 놓칠 뻔했다 싶은 마음에 필자는 황급히 긴 행렬 끝에 섰다. 그 무렵 필자는 살바도
우리는 자신을 가장 잘 알아주는 친구를 일컬어 ‘지음(知音)’이라 부른다. 중국 춘추시대 금(琴)의 명인인 백아(伯牙)가 자신의 음악을 가장 잘 알아주던 친구 종자기(鍾子期)가 죽고 나자 ‘파금절현(破琴絶絃)’, 즉 자신의 음악을 더는 이해해줄 마음의 친구가 사라져 버렸으므로 금을 부수고 줄을 끊어버린 뒤 다시는 금을 잡지 않았다는 고사이다. 이 고사에서 비롯된 지음이라는 단어는, 곧 자신을 어쩌면 자신보다 더 잘 이해해 주는 세상의 하나뿐인 친구를 의미하는 말로 사용된다. 그렇기 때문에 삼국지의 영웅 조조의 아들 조비(曹丕)는
최근 로베르토 베니니(Roberto Benigni)가 연출·주연을 맡은 영화 가 17년 만에 국내 박스오피스에 이름을 올렸다. 재개봉(4월 13일) 9일 만에 5만 관객을 돌파한 데 이어 18일 차에 10만 관객을 모으는 등 기분 좋은 흥행성적을 냈다. 이 외에도 , , 등을 다시 스크린을 통해 만날 수 있었다. 영화는 상영 기간이 끝나고 나면 과거에는 비디오, 요즘은 DVD나 TV 영화 채널, 인터넷 동영상 다운로드 등을 통해
우리가 경제개발 계획을 잘 추진하여 중진국 수준의 경제생활은 하고 있으나 정신적인 문화수준은 아직 이를 따르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지난 세월호 사태로 인하여 안전 불감증의 한국사회는 새로운 변화의 전기를 맞아 심하게 앓고 있다. 1990년대 초 오스본과 개블러가 쓴 유명한 행정 개혁 교과서 '정부재창론'이 나온 미국 정부의 상황처럼 어려움에 처해 있다. ‘관피아’ 라는 말이 언론에 오르내리며 그간 물질문명의 발달에 묻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올바른 정신문화 및 도덕성 문제, 안전문화 등에 대한 중요성이 거론되며 전면적인 정부
창덕궁 옆에 있는 옛 공간사옥은 우리나라 건축계의 큰 별이었던 고 김수근 선생의 혼이 살아 있는 건축물이다. 외벽을 담쟁이가 덮고 있는 이 작은 건축물은 우리나라 현대 건축에 있어 시간적, 공간적으로 역사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1970년대 초에 건축된 이 공간사옥은 최근까지 건축설계사무소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주인이 바뀌어 뮤지엄으로 변신했다. 건축을 전공한 나는 졸업을 앞두고 이곳 공간에 입사가 허락되었었다. 1981년의 일이다. 그러나 아주 작은 건축사무소에 가면 다양하고 많은 일을 배울 수 있을 것이라는 이유로 여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기 전해인 1996년 4월, 필자는 외국인 친구 4명과 중국 구이린(桂林)을 여행했다. 떠나기 전 한국 친구들은 찡그린 표정으로 한마디씩 하며 말렸다. “공산주의 국가에 외국인들과? 꼭 가야겠니?” “하여튼 못 말려!.” 필자도 내심 걱정이 되었지만 ‘기회는 아무 때나 오는 게 아니야. 왔을 때 잡아야지!’ 이렇게 다짐하며 여행을 강행했다. 그림으로만 보던 구이린의 풍광 중에도 가장 기대했던 곳은 리강(漓江)이다. 둥그런 봉우리들과 어우러진 유장한 리강은 명물허전이었다. 일행는 두말없이 남편이 운전하고 부인이
몇 년 전부터 휴가철이 되면 아내는 직장 동료나 친구들과 매년 해외여행을 떠났다. 그때마다 거의 일방적으로 필자에게 통보하곤 했다. ‘가도 되느냐?’가 아니라 ‘간다!’라고 했다. ‘가지 말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예약을 다 마쳐 놓은 상태에서 그냥 참고로 알고 있으라는 식이었다. 은근히 부화가 나 필자도 아내처럼 결행하고 싶은 마음도 생겼으나 불가능했다. 친구들이나 직장 동료들 중에 같이 휴가를 떠날 사람을 찾기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가 찾아낸 방법이 혼자 휴가를 떠나는 것이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진정한 휴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