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잊지 못할 선생님이 한 분쯤은 있다. 필자에게도 그런 선생님이 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선생님이었던 이인기 선생님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분을 만나지 않았다면 지금의 필자도 없을 것이다. 필자는 충남 태안의 농촌에서 태어났다. 그 시절의 또래가 모두 겪었듯 필자도 교육의 혜택을 많이 받지 못했다. 필자는 소위 보릿고개를 체험한 마지막 세대다. 먹고사느라 바빠 부모의 교육열도 별로 없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대표로 한 명만 중학교 이상의 상급학교에 다니는 ‘특권’을 누렸다. 우리 집에서는 둘째 형님이 고등
영하 10℃ 이하의 날씨다. 오랜만에 동장군(冬將軍)의 위력을 실감했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온수가 나오지 않는다. 약식 점검을 해보니 난방라인은 이상이 없는데 온수라인은 냉수가 들어오는 부분이 얼어서 물을 밀어주지 못해 온수가 나오지 않는 것으로 판단되었다. 아파트 관리소장에게 전화를 했다. 기사를 보내왔는데 아무런 연장을 들고 오지 않고 빈손으로 왔다. 그러면서 필요한 이런저런 연장을 빌려달란다. 기사가 연장통을 들고 와야지 빈손으로 온 것이 못마땅했지만 당장 아쉬운 것이 필자인지라 짜증이 나도 응했다. 대충 이곳저곳을
몇 해 전, 세계태권도연맹(ITF) 부총재를 비즈니스차 몇 차례 만난 적이 있다. 말레이시아 사람인데 처음엔 필자보다 몇 살 연하로 봤다. 얼굴이 맑고 귀티가 났다. 그런데 알고 보니 두 살이나 연상이었다. 비결이 뭐냐고 물으니 채식주의자라고 했다. 술, 담배는 물론 고기와 우유도 안 먹고 생선, 조개류 등 해산물까지 전혀 안 먹는다는 것이었다. 필자는 그럴 바에야 차라리 먹고 싶은 것 다 먹고 나이 들어 보이는 것이 낫다는 의견이다. 살면서 식도락이 얼마나 중요한데 동안을 위해 그걸 다 포기한다는 말인가. 우리나라에서 채식주의
어르신의 전철무임이 시행되면서 어르신교통카드가 발급되었다. 십여 년 전부터는 전철·버스 환승할인제를 실시하였다. 일반인은 전철 1250원, 버스 1200원 합계 2450원이던 교통요금이 할인되어 전철 638원, 버스 612원 식으로 거리비례계산하여 합계 1250원만 부담한다. 하지만 어르신의 교통요금은 지금도 환승할인 되지 않는, 일반인보다 1200원 더 많은 2450원을 부담한다. 전철요금은 국가가 지급하고 버스요금은 어르신이 부담한다. 서울시 교통정책 담당공무원과 전철·버스를 탑승하여 확인한 결과다. 어르신 교통요금은 얼
전직 상사와 아랫사람 사이 진흙탕싸움이 한창이다. ‘나 살고 너 죽기’이다. 상사에게 토사구팽 당하였다는 하소연부터 아랫사람에게 배신당했다는 분노까지 다양하다. 상사가 다 부려먹은 아랫사람을 자르는 것을 토사구팽이라면 아랫사람이 상사와 등을 돌리는 것은 배신이다. 언뜻 달라 보이지만 ‘약속’을 지키지 않아서 발생한 부산물이다. 추적자와 도망자가 뒤엉켰다. 누가 포식자인지 먹이가 될지 알 수 없다. 관중은 허망한 약속을 함부로 하지 말라는 교훈을 곱씹는다. 토사구팽은 중국 춘추전국시대부터 유래한다. 오월동주로 잘 알려진 월왕 구천
문형! 독하게 추운 겨울입니다. 한파가 그야말로 맹위를 떨치고 있습니다. 수도가 얼고 비닐하우스의 농작물도 성장을 멈추어 서민들의 마음이 무겁습니다. 수십 명의 목숨을 앗아간 연이은 화재 참사도 한파 이상으로 춥게 합니다. 기후 온난화를 꽤 걱정했으나 올겨울은 그런 분위기는 아니었습니다. 입춘 절기가 코 앞인데 추위는 물러갈 줄 모릅니다. 예전부터 입춘 추위가 있다 했으니 봄기운은 더 멀리 머물고 있나 봅니다. 이런 겨울이면 지리산 청학동 계곡 언덕배기 자그마한 마을 초가집에 살던 때가 생각납니다. 방문 틈새로 들어오는 차가운 겨
MBC 탤런트 극단이 창단하면서 올린 첫 연극 시연회에 기자 자격으로 초대 받아 갔다. 아가사 크리스티의 쥐덫이었다. 최안규 각색, 정세호 연출, 안지홍 음악으로 되어 있다. 이 연극은 1952년 런던 앰배서더 극장에서 초연한 이래 세인트 마틴 극장으로 자리를 옮겨 지금도 하루도 빠지지 않고 공연하는 작품이란다. 올해 66년째이다. 최장기 연극 공연이며 매일 기록을 갱신하고 있다고 한다. 대학로 SH 아트홀 앞에는 낯익은 연예인들의 모습이 보였다. 이 연극이 MBC 탤런트 극단이 마든 작품이기 때문이다. 시연회 이다 보니 이
‘포미 족’이란 영어 그대로 ‘나를 위한’이라는 뜻도 되지만, 포미(FOR ME)는 건강(For health), 싱글(One), 여가(Recreation), 편의(More convenient), 고가(Expensive)의 알파벳 앞 글자를 따서 만든 신조어를 말한다. 이들은 자신이 가치를 두고 있는 제품에 적극적으로 소비하는 소비자로서 ‘작은 사치’를 추구하는 소비 경향을 보인다. 가격대비 마음의 만족도를 따지는 ‘가심비(價心比)’ 도 같은 맥락이다. 이런 트랜드는 곧 단독가구가 복수 가구를 넘어서는 추세로 볼 때 상당히 관심
호가 춘곡(春谷)인 고희동 가옥을 지나 올라가다 보면 빨래골을 만나게 된다. 약간 지하에 있는 개구멍받이처럼 생긴 곳에서 물이 졸졸 흐르고 있었다. 옛날 궁녀들이 그곳에서 머리도 감고 세수도 했단다. 궁녀들이 비누 대신 곡물을 사용해 늘 뿌연 뜨물이 흘러나왔는데 사람들은 그 물에 빨래를 했고 그 뒤 빨래골이라 불려왔다 한다. 곡물로 머리를 감았다니 궁녀들의 호사를 알 수 있었고 예쁜 모습으로 왕의 눈에 들어보려는 암투가 느껴지기도 했다. 흘러내려오는 물로 동네 사람들이 비누 없이 빨래를 했다고 하니 민초들의 가난한 생활이 상상이
필자는 어릴 때 한옥에서 오래 살았다. 지금은 아파트에 살고 있지만 대문 앞에 있던 한 그루 대추나무 때문에 대추나무집이라 불렸던 아현동 집과 반듯한 서까래가 아름다웠던 돈암동 집 등 한옥에 대한 향수와 그리움은 늘 넘친다. 오늘은 문화해설사의 안내로 북촌 탐방을 하기로 한 날이다. 하늘이 나지막하게 가라앉은 차분한 날씨. 이런 날은 여행이나 산책하기에 매우 적합하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약속 장소인 안국역 3번 출구로 갔다. 필자는 약속을 참 잘 지키는 사람이다. 오늘도 어김없이 첫 번째로 도착했는데 약속 시간이 20분 정도 남
영하 15℃의 강한 한파가 몰려올 것이라는 일기예보가 있던 어느 겨울날 저녁, 대학로로 연극 한 편을 보러 갔다. ‘앙리 할아버지와 나’라는 제목의 연극으로 꽃할배로 유명한 이순재, 신구 선생이 더블 캐스팅된 작품이다. 필자가 보러 간 날은 신구 선생이 열연을 했다. “니들이 게 맛을 알아?”라는 호통을 치는 광고로 매력을 발산하던 신구 선생. 고집불통 앙리 할아버지 역에 매우 잘 어울려 보였다. 상대역인 상큼 발랄한 젊은이 역은 탤런트 박소담이 맡았다. TV 드라마에서 봤던 이미지 그대로 매우 귀여운 모습이었다. 작품에는 4명
"너무 예쁘셔요." "그렇다고 빠지지는 마세요. 책임 못 져요." 며칠 전 남자 파트너와 홀딩을 하고 왈츠를 추는 중에 나눈 대화다. 물색 모르는 사람들은 필자가 춤을 꽤 잘 추는 것으로 오해할 것이다. 왈츠나 탱고는 가까운 거리에서 몸을 밀착시키고 춤을 춰야 하니 뭔가 ‘썸’을 타지 않을까? 색안경을 끼고 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분들에게 춤을 한번 배워보라 하고 싶다. 모든 일에 있어서 기본이 중요하다. 춤도 마찬가지다. 올바른 자세를 갖추는 것이 쉽지 않다. 인터내셔널 왈츠는 루틴이 복잡해서 루틴 외우는 것 자체가 매우 어렵
A라는 사람은 “될 대로 돼라.” B라는 사람은 “아무렇게나 살 수는 없다.” “우리는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겨우 열넷, 열다섯 살이었던 우리들에게 이따금씩 이런 물음을 넌지시 던지면서 조용히 자신을 성찰해볼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주시던 분이 있다. 바로 통신대학교 교수로 재직하고 계신 박순직 선생님이다. 필자가 정신적으로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은 은사님 중 한 분인데 그 후 ‘아무렇게나 살 수는 없다’가 필자 생활의 지표가 되었다. “사과 반쪽이 남아 있으면 A라는 사람은 ‘겨우 요것밖에 안 남았어?’ 하고 B라는 사람은
청년 시절, 내 편이 되어준 처사(불교에서 성인 남자 신도를 이르는 말) 한 분을 잊을 수 없다. 그분을 생각하면 천군만마를 얻은 듯했던 그날이 떠오른다. 그분과의 인연은 5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필자가 15세 때였다. 불일폭포 가까이에 있는 초가지붕의 한 암자에서 생면부지의 처사를 만났다. 행동과 말이 어눌한 60대 노인(지금은 한창 나이이지만 당시엔 노인이었다) 한 분이 건강을 위해 입산해 혼자 살고 있었다. 중학교 졸업 후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빈둥거리던 필자는 새싹이 막 돋아나오던 이른 봄에 쌍계사와 불일폭포
머리를 박박 깎은 녀석들이 1월의 세찬 바람이 몰아치는 드넓은 논바닥 옆 부대 정문 앞에서 기간병들의 호루라기 소리에 맞춰 이리저리 몰려다니며 대열을 이룬다. 불안감을 감추기라도 하듯 허허롭게 웃으며.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녀석들과 같은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열차를 탔다. 눈치껏 빈자리를 찾아 웅크리고 앉았다. 객차 한가운데 분탄 난로 근처가 최상의 자리였지만 어느 누구도 선뜻 앉으려 하지 않는다. 옷차림새도 다시는 안 입을 요량으로 집에서 가장 남루한 것을 골랐는지 하나같이 꾀죄죄하다. 거지보다 아주 조금 나아 보이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