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몇 년 째 영어 강의를 하고 있는 중구 노인대학에서 이 겨울이 끝나면 새 학기가 시작 된다. 새 학기가 되면 강의 시간도 조금 바뀌고 새로 생기는 강의도 있다. 필자는 강의 시간에 변동이 없어 지난 학기 학생이 거의 연속 수강을 하게 된다. 학생 중에는 몇 년을 다녀도 조용하게 별 존재감도 없이 다니는 학생이 있는가 하면, 선생인 필자에게 반찬을 만들어서 가지고 온다든가 집에 놀러 오는 특별한 학생도 가끔 있다. C는 나이가 60세 정도의 특별한 학생이다. 여고 때 탁구 선수를 했으며 나에게 특별하게 잘 한다. 가끔 반
전철역에서 집까지 가는 길목에 먹자골목이 있다. 크고 작은 업소들이 길 양옆에 포진해 있다. 경쟁이 심해져서인지 몇 달 못 가 문 닫는 업소들이 많다. 그러고는 새 업소가 간판 달고 인테리어 다시 해서 문을 연다. 그때 축하 화분들이 많이 들어온다. 부피가 큰 것으로는 고무나무, 관음죽 등 열대 관엽식물들이 많다. 그런데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면서 밖에 둔 열대 식물들이 그대로 얼어 죽은 채 방치되어 있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업소 영업도 부진한데 입구의 얼어 죽은 열대 식물들이 더 처량하게 보인다. 이런 현상은 요즘 사람들이
중소기업 중앙회는 분기별로 협동조합이나 중소기업체를 대상으로 오전 7시부터 조찬회를 겸한 강연을 한다. 12월 6일 포럼의 주제는 ‘패권과 행복의 비밀’이었다. 김태유 서울대 명예교수의 특강은 지난번 강의 ‘은퇴가 없는 나라’에 이어 두 번째로 듣게 되었다. 김 교수 강연의 특징은 자신만의 독특한 주제와 연구로 경제와 역사의 흐름을 이야기해주는 데 있다. 포럼의 주제도 그러하다. 국가 경제가 발달한 미국에서 사업을 하는 것과 후진국인 아프리카에서 사업을 하는 것은 기업가의 입장에서 볼 때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즉 모든
오카리나를 배우기로 했다. 나이 들면 악기 하나는 다룰 줄 알아야 한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으나 실행이 쉽지 않았다. 대학 시절 기타는 포크송 정도는 연주할 정도로 배웠으나 부피가 커서 들고 다니기가 불편하다. 오카리나는 부피가 작아 일단 마음에 들었다. 얼마 전 동네에 있는 ‘한국 오카리나 박물관’을 둘러봤다. 그래서인지 오카리나가 계속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그러다가 낙원상가에 갔을 때 오카리나가 눈에 띄어 가격을 물었더니 초급용은 2만 원이라고 했다. 이 역시 구미를 당기게 한 것 같다. 먼저 낙원상가에 가서 초급용 오카
작년 여름, 교회에 다니는 친구가 바자회를 한다고 연락이 와서 가봤다. 맘에 드는 겨울 코트 하나를 샀다. 요즘은 지퍼가 달린 패딩 코트가 많은데 한 손이 불편한 필자는 지퍼 채우기가 어렵다. 그런데 그날 커다란 단추로 옷을 여밀 수 있는 코트를 발견하고 횡재한 기분으로 얼른 구매했다. 필자는 혼자서는 외출이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남편, 손윗 시누이랑 만나 한 달에 한 번 대형 할인 매장인 코스트코에서 쇼핑을 하고 점심을 먹는 시간이 가장 즐겁다. 시누이는 남편을 필자에게 소개한 분이다. 팔십이 넘은 나이인데도 친구들과 해외
연말이 되면 언 가슴을 녹이라며 구세군 종이 울린다. 가슴을 녹인다는 것은 돌덩이 같은 마음을 머시멜로처럼 노골노골하고 달짝지근하게 만들라는 말이다. 그래야 바람도 들고 비도 들고 낙엽도 보인다. 옛날 옛적 한 임금 이야기다. 일을 무척 열심히 하는 왕이었는데 과로 때문인지 시력이 날로 나빠져 거의 실명 위기에 처했다. 좋은 약도 써보고 전국의 명의들을 불러 치료했지만 아무도 고칠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궁전 앞에 어떤 노인이 와서 섰다. 그는 임금의 눈을 치료하러 왔다며 만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남루한 행색을
댄스 스텝에서 남자 스텝은 거의 대부분 전진하는 스텝이다. 그러나 가끔 뒤로 가는 스텝이 있다. Back Check, Back Lock, Back Whisk, Back Corte 등이다. 가장 어렵다. 앞만 보고 가다가 뒤로 간다는 것은 루틴이 아주 훤해서 여유가 있지 않으면 자칫 까먹고 실수하기 좋다. 뒤로 가는 스텝이 모양이 제대로 나올 리 없다. 당구에서도 대부분 공이 앞으로 진행하는 형태로 친다. 끌어치기가 유일하게 백 스핀으로 공의 아래쪽을 치면 수구가 앞 목적구에 맞고 나서 공이 뒤로 굴러 오는 기술이다. 4구에서는
사상 처음 수능시험이 연기될 정도로 큰 지진이 발생하였다. 우리나라도 지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고 입을 모은다. 이럴 때마다 국민에게 얼마나 빠르게 위기상황을 알렸는지가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 첨단 문명기기를 손에 들고 살면서도 쉽게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다. 서울 남산, 안산, 봉화산 3곳에 옛적 재난통신수단 봉수대가 있다. 대중교통으로 접근하기 쉬운 나지막한 곳이다. 봉수제는 국가에서 운영하는 옛날의 통신수단이었다. 밤에는 횃불, 낮에는 연기로 국경의 긴급한 소식을 중앙이나 국경의 기지에 전하던 군사통신 방법이었다. 우리나라
진도 남단의 조그마한 어촌 마을에 팽목항이 있다. 선착장엔 주변의 섬으로 입출항하는 배들이 정박해 있고 그 위로 갈매기들이 날고 있는 평화로운 항구마을이다. 지난 3년 동안 이 마을엔 슬픔과 아픔이 가득 담긴 채 아직도 무거운 공기가 느껴지는 곳이었다. 입구의 어판장은 찾는 사람 없이 꽃게 손질하고 있는 몇몇 상인들만 눈에 들어온다. 아픈 현실 부정하고 싶지만 그 앞엔 여전히 무수히 많은 노란 리본이 겨울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그리고 바다를 향해 두 손 모아 기도하며 울부짖던 부모형제들의 슬픔이 고스란히 다가온다. 숙연해
‘7080세대’는 1970년대와 1980년대에 대학생활을 한 세대를 말한다. 필자는 71학번이므로 ‘7080 세대’의 선두에 서 있다. 1970년대에 대학에 입학하고 졸업했다. 그 사이에 군 복무를 마치고 취업과 결혼까지 했다. 아이 낳고 열심히 가족을 먹여 살리다가 퇴직하고 이제 환갑을 넘어 칠십고개를 향해 가고 있다. ‘7080 세대’에서 빠르면 60대 중반이고 마지막 세대는 50대 초반이다. 필자가 졸업하던 무렵에는 취업이 잘되던 시기다. 기업들도 한창 사업을 확장하던 시기라서 1980년대 말에는 오히려 구인난에 허덕였
얼마 전 필자는 창신·숭인 지구 도시재생을 알아보기 위해 이 동네를 찾았다. 창신동은 필자에게 아련한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동네다. 선머슴처럼 천방지축이던 중학생 시절과 꿈 많던 여고 시절을 창신동에 있는 학교에서 보냈기 때문이다. 돈암동에서 보문동 신설동을 지나 숭인동까지 버스를 타고 통학했는데 학교 앞에서 내리면 잘 다려 허리 잘록하게 맵시 있게 입었던 흰색 교복이 마구 구겨져서 한동안 돈암동 집에서 창신동 언덕을 걸어 통학하기도 했다. 이 동네는 그렇게 세월이 흘렀는데도 골목마다 아직 친근함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필자가 다니
지금 생각하면 발칙하기도 했고 직장 동료들이 괘씸하게 생각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1978년 한창 젊은 나이에 미국 은행 (Bank of America)에 재직하던 시절이다. 아내와 필자는 사내 연애를 했다. 둘이 연애 중임을 알면 사람들이 놀려대서 피곤할 뿐 아니라 결혼하고 나면 둘 중 하나는 직장을 옮겨야 했으므로 비밀 연애를 했다. 그런데 갈 곳이 한정된 서울 시내에서 데이트를 하다 보면 사람들 눈에 띌 수밖에 없다. 직접 데이트 장면을 들킨 적은 없으나 연애기간이 길어지자 여기저기에서 수군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불편했다.
11월 15일 수요일 오전 일산 킨텍스 전시장에서 대한민국 안전산업 박람회 개막식이 있었다. 이번 행사에선 안전산업 활성화와 일자리 창출, 안전의식 향상을 목적으로 김부겸 장관이 나서서 12개 해외 정부 대표단과 32개 바이어, 그리고 참가 기업이 만나는 '비즈니스 교류회'를 개최했다. 행정안전부는 이번 박람회를 통해 국내 안전산업이 활성화될 수 있도록 안전 분야 기술 제품의 판매를 지원할 계획이라고 한다. 안전산업 박람회에 다녀온 날 경북 포항에서는 진도 5.4의 큰 지진이 일어났다. 일본이 큰 지진으로 피해를 입었을 때도 우리
지난 달 건국대 새천년관에서 재미있고 유쾌한 토크 콘서트가 열렸다. 주제는 성 평등이었다. 깊이 들어가면 그리 유쾌할 수만은 없는 남녀의 차별 문제도 제기되었다. 그래도 시종일관 분위기가 밝았던 건 사회를 본 최광기 여사 덕인 것 같다. 본인의 이름으로도 큰 웃음을 주었고 태어났을 당시 자매들의 출생신고가 아무렇게나 되었는데 딱 하나 아들을 낳자 그날로 출생신고를 하셨던 아버지를 예로 들며 태어나자마자 차별을 받았다고 고백해 청중을 웃겼다. 딸만 셋이었는데도 지극한 사랑을 주셨던 아버지 덕에 필자는 남녀차별을 전혀 모르고 자랐다
1970년 11월, 동네 친구 4명이 교복을 입고 동네 사진관에서 같이 사진을 찍었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찍은 사진이다. 일반 카메라로는 미흡했는지 정식으로 사진관에 가서 찍었다. 네 명 모두 이 사진에 큰 의미를 뒀던 것 같다. 사진은 평생 친한 친구가 될 것임을 각인시키는 역할을 했다. 그리고 47년 만에 네 명의 친구가 다시 모여 사진을 찍었다. 한 명은 1970년대에 미국으로 이민 가서 살고 있는데 잠시 한국에 나왔다. 한 명은 은퇴 후 멀리 용문에 살고 있는데 이날 미국 친구를 만나겠다고 서울로 왔다. 또 한 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