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3.21

말을 못 할 뿐, 나무도 사람과 같다 교감하라! 갈 길이 보인다

입력 2026-03-21 06:00

[민간정원 순례] 경북 칠곡군 시크릿가든

(주민욱 프리랜서)
(주민욱 프리랜서)


시크릿정원은 산속에 있다. 산자락 겹겹이 포개진 팔공산의 안통에 터를 잡았다. 고요하고 외롭고 깊은 정취를 풍기는 정원이다. 그럴 줄 몰랐다. 외진 산협에 민간정원이 있을 줄은. 속세에 두었던 정은 거둬들이고, 초막을 조촐히 지어놓고, 있는 듯 없는 듯 소리 소문 없이, 물처럼 구름처럼 그저 담백하게 사는 은자 하나 걸어 나올 것 같은 변방에 사람을 숱하게 불러 모으는 정원이 있다니. 이곳엔 봄부터 가을까지 성수기 주말이면 1000여 명의 입장객이 몰려든다.

사람들은 잠시나마 벗어나고 싶으리라. 매력과 환멸이 공존해 아리송한 도시의 잡답에서. 딱딱한 잿빛 콘크리트 더미에서. 순리를 거스르는 반자연적 문명의 창궐에서. 디스토피아를 예감케 하는 인공지능(AI)의 으스스한 행군에서.


(주민욱 프리랜서)
(주민욱 프리랜서)


정원은 일상의 권태와 긴장에서 놓여나고자 하는 이들을 프리 허그처럼 포용한다. 식물과 사람의 관계를 증폭시킨다. 사람을 일순에 자연으로 회귀시킨다. 정원은 인류가 벼랑 끝에 서더라도 최후까지 동행할 만한 낙원이다. 설령 지구의 시계가 멈춰도 유적으로 남아 영속하리라.

정원 초입엔 계곡이 있다. 계절은 엄동. 골짜기가 얼었다. 암반도, 암반 틈새에 낀 나무도 얼어붙었다. 돌돌돌 흐르던 개여울도 꽝꽝한 얼음장을 뒤집어쓰고 있다. 빛이 도달하지 못한 골은 어둑해 조명 꺼진 무대를 연상시킨다. 공연 끝! 자연에게 겨울은 휴지기다. 골짜기의 풍색은 암암하고 처연해 비장미가 있다. 차고, 시니컬하고, 금속처럼 강고한 이미지들이 펼치는 고요의 향연이랄까. 이 악문 채 세한(歲寒)을 견디는 인내도 집힌다.


(주민욱 프리랜서)
(주민욱 프리랜서)


얼음 아래엔 물이 흐르리라. 세공한 크리스털처럼 투명한 피라미들이 유영할 테고. 보이는 게 다는 아니다. 자연히 이루어진 생명치고 죽기 전에 섣불리 정지하는 건 없다. 최선을 다해 존재를 기척한다. 귀 기울이면 물소리가 들린다. 자세히 보면 물살이 보인다. 넥타이처럼 가느다란 물길이. 얼음장 사이로 간신히 흐르는 물이 내는 소리는 여려, 안으로 침잠한 계곡이 연주하는 나직한 노래로 다가온다. 겨울 산의 말단 지체에서 뛰는 맥박으로 읽으면 그지없이 뜨거워진다. 꽃만 꽃이랴. 여울물은 계곡의 결빙을 눅이며 흘러가는 하얀 꽃떨기다.

계곡 맞은편엔 대숲이 있다. 잎잎이 새파랗고 줄기마다 짙푸른 대나무들, 유난히 난폭한 된바람에 밀린다. 갈피 없이 일렁거린다. 일제히 스크럼을 짜고 앞으로 나아가려는 듯 허리를 방정맞게 비틀어댄다. 심상치 않다. 애초 왔던 곳으로 돌아가고 싶어 발작하는가? 평생 부동자세로 서서 지속하는 식물의 삶, 그 지루한 운명을 죽창처럼 봉기해 한번 깨볼 심산으로? 그러다 허리 나갈라. 절개와 허심의 심벌인 청죽의 위엄에 오늘은 금이 갔다. 달구치는 북풍에 뿔났다.

그러나 바람을 이길 순 없다. 바람보다 빠르게 풀이 눕는 법이다. 발 없는 것들의 재능은 바람을 타는 데 있다. 대나무는 개중 고수다. 바람에 옆구리 터진 대가 있던가. 저 대숲의 요란법석을 춤판이라 해두자. 대밭을 휩쓰는 폭풍 같은 북풍을 능란히 다루는 명장면이다.


(주민욱 프리랜서)
(주민욱 프리랜서)


대나무는 강하다. 휠망정 부러지지 않는다. 대나무는 생각보다 약다. 자기들끼리 이기적인 동맹을 맺어 다른 식물이 영역에 틈입할 수 없게 채비를 했다. 대밭의 모든 대들이 하나의 뿌리에서 나온 게 아닌가. 쇠그물처럼 견고하고 촘촘한 뿌리의 생태와 파워에 대나무의 진정한 천재성이 있는 것이다. 타 식물의 침투를 불허하는 대나무들의 연대와 아성이 그래서 가능하다. 대 뿌리는 텅스텐처럼 질기고 드릴처럼 집요하다. 헤드램프도 없이 불굴의 기세로 캄캄한 지하 멀리까지 사통팔달로 파고든다. 식솔의 양육에 필요한 자양분을 채굴한다. 대밭의 성황은 대 뿌리의 기개세에 힘입은 나머지다. 그리운 사람 고 이청준 작가는 대 뿌리를 지사(志士)의 상징으로 봤다. 물을 도사의 대표로 쳤고.

대나무의 종말도 찬연하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길게는 100여 년간 살다가 일생 처음이자 마지막에 건진 꽃 한 번 하얗게 피우고 저문다. 꽃만 무너지는 건 아니다. 줄기와 뿌리도 이내 고사한다. 대밭이 통째 상여로 바뀐다. 꽃 핀 화려한 순간에, 얻을 것 다 얻은 시점에 집단 고사로 일체를 버린다. 완전한 무(無)로의 회귀, 시원한 해탈이다. 대나무를 따라갈 길이 없다.


(주민욱 프리랜서)
(주민욱 프리랜서)


시크릿가든의 모습은 조화롭다. 정원 하부엔 자연의 순수한 됨됨이를 보여주는 내추럴 패션 공간을, 상부엔 유럽풍을 차용해 모던한 공간을 배치했다. 다양성과 심미성의 층위를 구사한, 볼거리 넉넉한 정원이다. 구석구석 정갈하고 요기조기 유려하다. 외곽 기슭엔 햇빛을 튕기며 하얗게 반짝이는 은사시나무들. 수려한 외모로 자존감을 돋운 그것들은 정원을 내려다보며 교만한 회의를 하는 것으로 보인다. 정원의 패권을 틀어쥘 수 있다는 가설을 세운 채.

물론 정원의 압도적 권위는 다른 데 있다. 꽃 중의 꽃, 나무 중의 나무는 정원주 하영섭이다. 그는 어머니에게서 나왔지만 정원에서 다시 났다. 30여 년간 식물을 기르고 섬기고 비위 맞추며 살았다. 대체로 정원주들 태반은 제정신이 아니다시피 식물 하나에만 꽂혀 사는 외골수. 하영섭의 열 손가락엔 지문이 없다. 나무와 돌의 살을 만지는 사이에 다 뭉개졌다. 지독히 식물에 도취한 삶, 행복할까? 나무를 똑 닮아 이치대로 살까?

“혼란에 빠지는 때가 많다. 허영심을 버리고도 순리를 좇기가 어렵다. 식물 연구와 실험을 계속하지만 가드닝 실력은 여전히 부족하다. 겨울에 개화하는 수종을 개발하려고 노력했는데 성과가 없으니. 내놓을 것 없는 사람일 뿐이다.”

나무와 진배없다. 그는 티 낼 줄 모르는 또 한 그루의 겸손한 나무다. 내공이다. 득도가 멀지 않겠다. ‘나무는 말을 못 할 뿐, 사람과 다를 게 없다. 나무와 교감하라. 삶의 길을 보려면!’ 정원주가 발하는 뉴스가 그렇다. 진부한 삶일망정 안도할 만한 경지가 있다. 새롭고 자유로운 눈을 얻으면 되겠지. 정원은 그 눈을 달아주는 성소다. 그래서 낙원이다.

새 한 마리 마른 가지에 앉아 지저귄다. 살뜰히 정든 짝에게 보내는 연가인가. 염염한 가락이다. 동그랗게 종이를 오려 붙인 듯 선명한 낮달, 앙증맞은 새를 내려다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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