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구, 시니어 인생의 ‘스리쿠션’… 인생 2막에는 핸디캡 없다

기사입력 2025-04-29 08:05 기사수정 2025-04-29 08:05

중장년층에서 꾸준한 인기… 건강과 즐거움, 일자리까지 ‘한 큐에’

▲고급화 전략으로 세련된 인테리어와 첨단 시설을 갖춘 당구장.(RS빌리어즈)
▲고급화 전략으로 세련된 인테리어와 첨단 시설을 갖춘 당구장.(RS빌리어즈)

강남의 한 고급 당구장. 점심시간이 지나자 삼삼오오 모여든 시니어들이 큐를 들고 진지한 표정으로 경기를 펼친다. 매서운 눈빛과 큐가 볼에 맞닿는 순간 경쾌한 소리가 퍼진다. 한쪽에서는 경기 장면을 유튜브로 송출하는 프로 선수들도 보인다.

몸은 당구장에 있지 않아도 영상으로나마 선수들의 당구 경기를 찾아보는 마니아도 많다. 다시 찾은 당구장, 시니어들의 당구 열풍에 마음이 뜨거워진다.


큐를 잡아라! 시니어 당구가 뜬다!

1970~1990년대 대학가에서 당구는 필수 교양과목처럼 여겨졌다. 그런 시절을 보낸 이들이 은퇴 후 당구장으로 돌아오고 있다. 허해용 대한당구연맹 수석부회장은 본인이 운영하는 당구장을 둘러보며 말한다.

“대학 시절 선후배를 만나면 ‘당구 몇 치냐’가 인사말이었죠. 예전에는 젊은이들의 놀이 문화였지만, 이제 중장년층이 주도하고 있어요. 낮에는 당구장이 시니어들로 꽉 찹니다.”

시대가 흐르며 당구장의 환경과 시설에도 변화가 생겼다. 디지털로 점수를 집계할 뿐 아니라, 경기 장면을 녹화하고 이를 온라인에 송출하는 장비를 갖춘 곳도 많다.

당구 대회 중계방송 시청률은 여자 배구에 뒤이을 만큼 높은 편인데, 재방송 시청률도 상당하다. 다른 스포츠의 경우 경기 자체를 즐기기 위해 중계 영상을 보고 응원하지만, 당구는 선수의 경기를 분석하고 직접 따라 하면서 실력을 키울 수 있는 종목이기 때문이란다. 이런 까닭에 미디어나 유명 연예인들이 나서서 당구 콘텐츠를 만드는 등 당구 열풍이 더욱 거세지고 있다. 무엇보다 당구는 나이나 실력에 관계없이 누구나 함께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골프나 테니스는 비슷한 수준의 상대를 찾아야 하지만, 당구는 60대와 20대가 핸디캡 조정을 통해 대등한 경기를 할 수 있죠. 또 신체적인 면과 정신적인 면의 조화가 중요한 스포츠인데, 인생의 경험이 많은 시니어들은 젊은이들보다 흔들리지 않고 여유롭게 경기를 운영하는 강점이 있어요.”


당구, 시니어 인생의 ‘스리쿠션’ 되다

당구는 스포츠이자 과학이다. 당구를 치면서 움직이는 거리를 환산하면 한 시간에 2~4km에 이른다. 앉았다 일어서기를 반복하고, 허리를 굽히고 큐를 움직이면서 근육을 유연하게 사용하기도 한다. 또한 무엇보다 강력한 당구의 효과는 바로 집중력을 높이고 두뇌 활동을 자극한다는 데 있다.

“접근성 좋은 실내 스포츠이다 보니 언제나 편하게 즐길 수 있고, 부상 위험은 적어요. 당구를 즐기는 선배님들 사이에서는 돌아가시기 전날까지 당구를 친다는 이야기도 있으니까요. 무엇보다 당구라는 종목 특성상 치매에 걸릴 수 없다고 봅니다.”

공의 궤적을 예상하고 다음 수를 계산하는 것은 물리와 수학의 영역이다. 곡예에 가까운 움직임을 보이는 예술의 영역도 존재한다. 당구의 어떤 종목이든 집중력 없이는 성적을 낼 수 없다 보니, 상대방의 집중력을 흐트러뜨리지 않는 매너도 필수다.

당구장 안에서 일어나는 사회·경제적 효과는 다양하다. 시니어의 몸과 마음의 건강을 위한 생활체육 효과, 사교 및 교류를 통한 사회 안정 효과, 대회나 경기를 통한 자기 성취감과 자신감 고양 효과 등이 여러 방면에서 삶의 질을 높인다.

다만 허 부회장은 “처음 당구를 시작하는 시니어들은 장비 욕심을 내기보다 기초 자세부터 익히는 것이 중요하다”며 “기초 없이 득점하는 법부터 배우면 한계가 온다. 올바른 자세, 큐 잡는 법, 공의 움직임을 이해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경제적 부담 없이 당구를 오래 즐기려면 정액제로 운영하는 당구장을 찾아 연습량을 늘리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이길남 심판이 중국 창춘에서 헤이볼 심판 자격 취득을 위해 연수를 받고 있다.(이길남)
▲이길남 심판이 중국 창춘에서 헤이볼 심판 자격 취득을 위해 연수를 받고 있다.(이길남)

퇴직 후 국제 심판의 길 열어준 당구

가천대학교 국제통상학과 교수였던 이길남 씨처럼 정년 퇴임 후 당구 심판으로 새 길을 찾은 사례도 있다.

“은퇴 후 뭘 하며 살까 고민하던 차에 당구 심판이라는 직업을 알게 됐어요.”

처음엔 국내 자격증 취득을 목표로 했지만, 당구 심판을 향한 관심과 애정이 깊어지며 영국과 아일랜드, 중국과 싱가포르까지 국경을 넘나들었다.

“국내에는 스누커(영국식 당구의 한 종류)나 헤이볼(중국식 당구의 한 종류) 심판이 많지 않아요. 외국 자료를 찾아 공부하고, 관계자들과 직접 교류하며 배웠습니다.”

그 노력 덕분에 현재 그는 해외에서 여러 종목의 심판 자격을 취득하고 심판으로 활약 중이다. 또한 후배 심판들을 국제 무대로 이끌기 위한 멘토링도 진행하고 있다.

“국제적인 규모로 이뤄지는 큰 대회에 심판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이는 새로운 기회죠. 한국 심판들의 국제 진출을 돕는 것이 또 다른 목표입니다.”

그는 당구 심판이 시니어에게 적합한 직업이라고 강조했다.

“책임감과 경험이 중요한 분야입니다. 전문성을 갖추면 은퇴 후에도 꾸준히 활동할 수 있습니다.”

시니어들의 당구 열풍은 단순한 유행이 아니다. 새로운 관계 형성, 두뇌 건강, 심지어 직업적 기회까지 제공하는 ‘인생 2막의 스포츠’로 자리 잡고 있다.


▲서수길 대한당구연맹 회장(대한당구연맹)
▲서수길 대한당구연맹 회장(대한당구연맹)

서수길 대한당구연맹 회장 “시니어 당구 열풍에 발맞춰 최선 다할 것”

사단법인 대한당구연맹(KBF)은 대한체육회 가맹 단체로 국내 대회를 주관하고 국가대표 선발 및 국제 대회 참가를 지원하며, 생활체육과 시니어 당구 활성화 등 당구의 제도적 성장을 도모하는 공식 기관이다. 올해 2월 7일 취임한 서수길 대한당구연맹 신임 회장은 프로와 생활체육의 두 날개를 달고 당구를 콘텐츠, 문화, 산업으로 확장해가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최근 시니어 당구 열풍이 눈에 띄는데?

시니어 당구의 인기는 단순한 유행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흐름이라고 본다. 당구는 전신을 사용하는 신체활동일 뿐 아니라, 전략과 전술을 짜는 두뇌 스포츠이기도 하다. 은퇴 후 새로운 취미를 찾는 분, 신체적 부담이 적으면서도 집중력과 두뇌 활동이 필요한 시니어에게 특히 적합하다. 다만 시니어만 모이는 문화에서는 벗어나야 하지 않겠나.(웃음) 이왕이면 가족과 같이 즐기는 재미있고 에너지 넘치는 스포츠로 나아가야 한다. 할아버지와 손녀가 같이 당구를 즐기는 그림, 참 멋있을 것 같다. 비교적 쉬운 포켓볼이나 원 쿠션 경기도 자리 잡으면 좋겠다.

시니어 당구만의 특징이 있다면?

젊은 선수들은 파워와 빠른 템포의 경기를 선호하는 반면, 시니어 선수들은 경험과 노련함을 바탕으로 한 섬세한 경기 운영이 탁월하다. 시니어 당구에서는 체력적인 부담을 줄이면서도 전략적 사고와 정교한 샷을 더욱 강조한다.

시니어 당구는 사회적 교류와 정서적 안정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당구장을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형성된 커뮤니티에서 새로운 인연을 만들고, 삶의 활력을 더하는 데 기여하기도 한다.

시니어 당구 활성화를 위해 연맹이 추진하는 정책은?

그간 대한체육회의 사업이었던 ‘전국 어르신 당구 강습회’의 부대 행사 개념으로 ‘전국 어르신 당구 페스티벌’을 진행한 바 있다. 페스티벌의 올해 진행 여부는 불확실하지만, 연맹은 시니어를 대상으로 하는 대회를 연 2회 지원하며 시니어 선수들이 안정적인 환경에서 대회를 준비하고 참가하도록 지원할 것이다. 나아가 시니어 당구 활성화와 함께, 연령층을 아우르는 당구 문화 조성에도 힘쓸 예정이다. 핵가족화가 심화되면서 세대 간 교류 기회가 줄어드는 가운데, 당구가 세대 간 소통의 매개체 역할을 하도록 다양한 프로그램을 마련할 것이다. 시니어와 젊은 세대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질 기회를 확대하고, 당구를 통해 세대 간 교류를 활성화하는 것이 목표다.

이 밖에 당구 문화 확산을 위해 집중하는 부분은?

특정 지역·종목·성별·연령 등에 편중되지 않도록 다양한 과제를 논의하고 실행해가는 중이다. 당구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대회의 질을 향상하고, 선수 및 동호인들에게 더 나은 환경을 제공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더 많은 분이 당구의 매력을 경험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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