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뇨병만 두고 보면 증상이 없어 위험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문제는 합병증이다. 관리가 매우 중요한 이유다. 안철우 강남세브란스병원 내분비내과 교수는 30년 넘게 당뇨병, 대사증후군, 기타 호르몬 장애 환자들을 치료한 당뇨 전문가다. 강남세브란스병원 내분비·당뇨병센터 소장 및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혈관대사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으며, 차세대 항암 신약 개발 바이오 벤처기업 바라바이오의 대표를 맡고 있다. 안 교수를 만나 당뇨 인구 600만 시대에 필요한 당뇨병 관리법에 대해 들어봤다.
01 혈당 관련 질환이 있는 사람의 절반은 자신이 당뇨병인 줄 모르고, 당뇨병 환자의 50%는 치료를 적극적으로 하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이유가 있나요?
일반적으로 고혈당이나 저혈당 같은 증상이 눈에 보이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당뇨병의 3대 증상으로 다음(多飮), 다뇨(多尿), 다식(多食)이 꼽히는데, 증상이 없는 환자가 더 많습니다. 당뇨병을 당혈병이라고도 하는데요, 혈당 조절이 안 되는 질환입니다. 그런데 몸무게를 재는 것처럼 혈당을 수시로 확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느 날 갑작스레 당뇨병 진단을 받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당뇨병을 진단할 때는 공복혈당, 식후혈당, 당화혈색소 세 가지로 확인할 수 있는데요. 보통 건강검진을 하면 공복혈당으로 확인합니다. 하지만 식후혈당으로 당뇨병 전 단계인 사람도 있고, 당화혈색소 수치에 문제가 있는 사람도 있기 때문에 건강검진만으로는 알 수 없죠. 정확하게 판단하려면 세 가지를 모두 확인해야 합니다.
02 우리나라 당뇨합병증 사망률이 세계 1위라고 합니다. 한국인 특성상 인슐린 분비를 조절하는 베타 세포가 서구권에 비해 적어 당뇨병에 취약한 것으로 알려졌는데요. 평소 혈당 관리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당뇨병은 통합적인 관리가 필요합니다. 생활에서는 식사, 운동, 스트레스 관리가 중요하겠고요. 지표로 본다면 혈압, 콜레스테롤, 혈당 관리를 해야 합니다. 당뇨병이 혈당과 관련 있는 질병이다 보니 대부분 혈당 관리에만 신경 쓰시는데요. 합병증을 예방하려면 혈압과 콜레스테롤까지 균형 잡힌 관리를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당뇨병이 있다면 1년에 한 번씩 합병증 검사를 꼭 해보시길 권합니다. 의사가 검사를 권했을 때 두려워하지 마시고 적절하고 빠른 치료를 받는 게 중요합니다.
03 당뇨병 진단을 받고 우울해하거나 평생 약을 먹어야 한다는 생각에 불안해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당뇨 환자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 있나요?
만성질환인 만큼 저는 당뇨와 ‘동행’하기를 강조하는데요. 긍정적인 사고방식과 병을 수용하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부정적인 생각만으로도 혈당이 올라간다고 합니다. 명의를 찾기보다 스스로 ‘명환자’가 돼야 합니다. 환자의 가족들도 당뇨병에 대해 올바르게 이해하고, 식사 조절을 해야 하는 환자와 동행해주어야 하고요. 당뇨병이 있지만 건강한 사람들과 차이가 없는 환자들을 사회 구성원들이 배려해줄 필요도 있습니다. 합병증이 동반된 당뇨병 환자를 치료하는 여러 과 의사들의 협진도 중요합니다.
또 당뇨병 진단을 받으면 초기에는 열심히 치료하다가, 1년쯤 지나면 갑자기 당 수치가 올라가는 분이 많습니다. 저는 초심을 잃기 때문이라고 말하는데요. 초심으로 돌아가 좋은 친구를 사귀듯 당뇨병을 사귀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당뇨 환자와 당뇨가 없는 사람 중 누가 더 오래 살까 조사한 재미있는 연구 결과가 있는데요. 당뇨병이 있지만 합병증이 없는 사람이 제일 오래 산다고 합니다. 관리를 잘하면 더 오래 더 건강하게 살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당뇨병이 내 삶을 구속하거나 제한하는 게 아니라, 내 삶을 되돌아보고 더 건강한 노년과 생활 습관을 갖게 하는 계기로 생각하시면 좋겠습니다.
◇안철우 교수가 제안하는 당뇨 관리 5계명
ㆍ평소 틈틈이 공부하기
현재 당뇨병 환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일반적인 지식을 평소에 알아두고 생활 습관을 하나씩 바꿔보자.
ㆍ식사는 규칙적으로
혈당 관리에서 중요한 것이 식사다. 어떤 것을 먹어야 할까 고민하느라 스트레스받기보다, 하루 세 끼 식사를 정해진 시간에 먹는 게 좋다.
ㆍ운동은 꾸준하게
하루에 30분씩 주 5회 꾸준히 운동하자. 무리한 목표를 세우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누가 해서 좋다더라는 운동보다 내가 좋아하는 운동을 하자.
ㆍ스트레스 풀어주기
악기 연주와 같이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는 취미를 가져보자. 배우면서 또 다른 스트레스를 받지 않도록 즐기는 게 핵심.
ㆍ단단한 마음으로
‘슬기로운 당뇨병 생활’을 하려면 먹지 않겠다고 다짐한 음식을 주변에서 권할 때 단호히 거절할 단단한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고령자는 각종 위험에 노출돼 있다. 외로움도 그중 하나. 나이 들어 마주하는 노화와 주변 환경 변화는 고령자를 외롭게 한다. 하지만 마음의 병은 알아차리기 쉽지 않다. 그럴 때 놓치지 말아야 할 신호가 있다. 일본 도쿄 건강장수의료센터연구소의 무라야마 히로시 박사가 전한 고독한 고령자가 보내는 시그널 7가지다.
1. 주변 사람이나 친구의 입원·부고를 이야기한다.
2. 지병 등 건강 상태의 변화를 이야기한다.
3. 취미나 레저로 외출하는 일이 줄었다.
4. TV나 스마트폰을 보는 시간이 늘었다.
5. 퍼즐이나 스도쿠를 하기 시작한다.
6. 애완동물을 키우고 싶다고 말한다.
7. 표정 변화나 미소가 적다.
“남몰래 외로움을 느끼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대면에 의한 비언어적인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합니다.”
에디터 조형애 출처 주간 SPA! 디자인 유영현
지금의 대한민국 테니스 열풍 뒤에는 이형택이 있다. 묵묵히 불모지를 개척해 씨를 뿌리고 꽃을 피운 인물이다. 올림픽 4회 출전, 아시안게임 2회 연속 금메달, 한국인 최초 ATP 투어 대회 우승, US오픈 16강 진출, 세계 랭킹 36위 등. 테니스 선수로 그가 이룬 기록은 기적에 가깝다. 선수 생활을 은퇴한 그는 현재 주니어 선수 감독으로 테니스와 함께하고 있다. 아홉 살 때 테니스를 시작하던 마음을 기억하며, 명맥을 이어줄 사람을 기다리는 중이다.
테니스 열풍 뒤 고민
테니스 코트를 배경으로 화보 촬영한 소감이 어떠셨나요?
코트 색감이 정말 예쁘더라고요. 괜히 아이돌 된 기분도 들고, 좋았습니다. 하하. 요즘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지난해 12월 무릎 수술을 해서 재활 훈련을 하면서 주니어 선수 육성에 매진하고 있죠. 그런데 이렇게 테니스 외적으로 색다른 경험을 하게 되어 기분도 환기되고 재밌었습니다.
요즘 테니스에 대한 관심이 상당한데 실감하시나요?
동호인, 그러니까 생활체육 쪽에서 테니스가 인기를 끌고 있죠. SNS의 영향이 있었던 것 같아요. 예쁘고 멋진 옷을 입고 테니스를 취미로 즐기는 사람들이 SNS에 사진을 게재하면서, 대중의 관심이 높아졌다고 생각해요. 건강에 좋은 스포츠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은 당연한 거고요. 시니어분들에게도 테니스 운동을 추천합니다. 전신 운동, 유산소 운동이 되고 테니스를 하면 수명 연장에 도움이 된다는 연구 결과가 있어요. 체력이 안 따라준다거나 부상당할까 봐 너무 겁내지 마시고 한번 배워보세요.
이 인기는 앞으로도 이어질까요?
지금이 참 중요한 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기를 단순히 즐기는 것이 아니라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다음 스텝이 무엇인지 고민이 필요합니다. 저는 테니스라는 스포츠가 더욱 발전하려면 결국 엘리트 선수가 나와야 한다고 생각해요. 스포츠 업계에서는 테니스가 10년 전 골프의 상황과 비슷하다고 얘기해요. 박세리 선수 이후 좋은 선수들이 계속 나오고 세계대회에서 이름을 알렸기에 발전할 수 있었죠. 지금 국내에서 테니스를 즐기는 사람이 100만 명 조금 넘는다고 하는데 300만 명 이상으로 커지려면 정현, 권순우 같은 선수가 4~5명 정도 더 나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현, 권순우 선수에 대한 애정이 많으신 것 같아요.
두 선수 모두 본인의 의지로 해외 경기에 도전했고 멋진 성적을 냈죠. 정현 선수는 그랜드슬램 4강을 달성했어요. 지금은 부상으로 인해 공백기가 길어지고 있어 안타깝습니다. 권순우 선수는 최근 메이저 대회(프랑스오픈)에서 승리하며 활약을 보여줬죠. 선배로서 두 선수 모두 몸 관리 잘하고, 부상 없이 투어 생활을 오래 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너무 성적에 연연하지 않고 여유를 가졌으면 좋겠어요. 사실 제가 그러지 못했기에 선수 생활이 끝나고 좀 아쉽더라고요. 해외에 가서 맛집도 못 가보고 주변 관광도 못 즐기고 그랬죠.
빛나던 영광의 순간들
테니스 불모지에서 어떻게 선수가 되셨나요?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운명이었던 것 같아요. 저는 강원도 횡성군 오천면에서 자랐어요. 어느 날 저희 초등학교로 발령받아 오신 선생님이 테니스부를 창단하신 거예요. 멤버를 모집하기 위해 축구 테스트를 하셨어요. 축구를 잘하면 모든 스포츠를 잘한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당시 선생님이 제 축구 실력을 좋게 봐주셔서 테니스부에 들어갔고, 그게 시작이 된 거죠. 그때는 정말 테니스에 대해 하나도 모르던 아홉 살짜리 아이였어요.
선수 생활 기록 중 어떤 순간이 가장 기억에 남나요?
많은 분들이 ‘타이브레이크의 기적’이라면서 2005년 국제남자챌린저테니스 경기를 얘기하시죠. 6대0에서 역전승을 거둔 스토리가 포인트 같아요. 당시 저는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는 생각으로 포기하지 않았어요. 그 마음이 통했던 걸까요? 그리고 1998년 아시안게임 금메달 수상은 저에게 많은 의미가 있습니다. 당시 회사가 IMF로 많이 힘들었거든요. 제가 금메달을 따지 못했다면 선수 생활이 그때 끝났을 수도 있어요. 금메달을 따면서 본격적으로 해외 투어를 시작했고 2000년 US 16강 진출도 가능했죠.
경기 때 특별한 징크스가 있었나요?
징크스는 아니지만 저는 식당에 가면 항상 앉았던 자리에 앉으려고 했어요. 경기하는 날이 아닐 때도요. 식당에 들어갔는데 그 자리에 앉지 못하면 괜히 아쉬운 기분이 들곤 해요. 생각해보니 징크스가 하나 있었네요. 어머니께서 관람하러 오시는 날에는 한 번도 경기에서 이기지 못했어요. 그래서 어머니께 오시지 말라고 했는데, 아마 서운하셨을 거예요. 그 징크스를 깨보려고도 했지만 결국 끝날 때까지 깨지 못했죠.
테니스 경기에서 승패를 좌우하는 건 결국 무엇일까요?
테니스는 매 순간 의사결정을 해야 하는 스포츠예요. 그렇기 때문에 멘털 관리가 중요하죠. 경기하면서 조급해지는 순간이 와도 마인드 컨트롤을 하면서 덤덤해지려고 노력해요. 끝까지 포기하지 말자, 최선을 다하자, 긴장하지 말자고 계속 저 자신과 대화를 하죠.
지금도 테니스 황제
선수 시절과 비교해 체력이 떨어진다고 느끼시나요?
아무래도 근력의 질이 많이 다르죠. 힘도 떨어지고요. 그래서 평소에 근력 운동을 열심히 하려 하고 러닝도 하면서 체력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죠. 테니스장에 있다고 운동하는 건 아니에요. 지금은 선수가 아니고 지도자잖아요. 여러 명의 학생을 신경 쓰느라 바쁘죠.
요즘에도 축구를 즐기시나요?
축구는 체력 훈련 삼아 하고 있어요. 전에는 축구를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는데, ‘뭉쳐야 찬다’(JTBC 예능)를 하면서 정식으로 레슨을 받고 기술을 익혔죠. 축구장을 뛰면서 땀을 흘리고 나면 기분이 좋더라고요. 또 요즘은 골프를 취미로 즐기고 있어요. 사실 골프 프로 투어에도 도전해보고 싶었는데 여러 여건상 안 되겠더라고요. 이제 무릎이 좋아지면 야구, 마라톤 등 새로운 운동에 도전해보려고요. 유튜브 채널도 운영 중이니까요.
유튜브 채널 ‘머드Lee-이형택TV’에 대한 관심이 높아요.
‘머드Lee’는 제 별명이고, 한마디로 말하면 테니스를 주제로 하는 채널이에요. 정보영 선수와 대결을 펼치는 영상(조회 수 200만 회 돌파)이 가장 인기가 많아요. 시청자들이 제가 경기하는 영상을 좋아하시더라고요. 그런데 문제는 그게 테니스 치는 분들한테만 재밌는 영상이라는 거죠. 그래서 다른 스포츠 즐기는 모습, 먹방, 일상 등 다양한 콘텐츠를 다루려고 합니다.
테니스의 의미, 그리고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가요?
테니스는 제게 동반자예요. 죽을 때까지 계속 같이 가야죠. 끝이라는 게 없는 스포츠라고 생각해요. 저 역시 경지에 다다르지 못했고 성공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성공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니까요. 제가 올림픽을 4회, 16년 동안 출전했어요. 그런데 메달이라는 성적을 내지 못해 아쉽다고 할 수도 있고, 그래도 잘 견뎠다고 위로받을 수도 있겠죠. 지금 저는 주니어 선수 육성에 최선을 다하려고 해요. 후배들이 좋은 길로 가는 것을 보면 대리만족을 느낄 수도 있겠죠.
Bravo Question - 나에게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은?
테니스에 대한 열정만은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다만 테니스를 바라보는 시각이 좀 달라진 것 같아요. 예전에는 내가 잘되고 성공하는 것이 중요했다면, 지금은 테니스라는 스포츠 자체가 잘됐으면 하는 마음이에요. 그래야 좋은 선수들도 많아지고 선순환 발전이 이뤄지는 거죠.
1950년, 10남매 중 여덟째로 태어났다. 그 시절 사회는 남편 내조 잘하고 아이 잘 키우는 현모양처가 되라고 했다. 꿈은 아득히 먼 단어였다. 대학 졸업장이 거의 결혼 자격증 같았다. 그렇게 결혼하고 남편과 아이들에게 충실하는 것이 내 운명이라고, 내게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남편은 외국을 많이 다니는 직업을 가졌다. 국제부인회에 갔더니 해외 나가 적응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게 있다고 했다. ‘마인드 스포츠’ 브리지*였다. 1982년, 그렇게 브리지를 알게 됐다.
*브리지: 4명이 2인 1조가 되어 겨우는 카드 게임. 130여 개 국가, 4000만 명 정도가 즐기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84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유일한 취미는 브리지였다. 그러던 어느 날 영국 대사 부인이 한 마디를 건넸다. “저랑 파트너 하실래요?”
나는 얼떨결에 ‘선수’가 됐다. 그렇게 나선 경기에서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누구보다 아이들이 좋아했다. 그 관심이 즐거워 브리지를 파고들었다. 손에 잡히는 대로 책을 읽었고, 틈만 나면 브리지를 생각했다.
두 딸이 결혼하고 남편까지 은퇴한 뒤 브리지에 더 몰입했다. 국제 대회 경험도 쌓았다. 그때 2022 항저우 아시안게임 정식 종목으로 브리지가 채택됐다. 하지만 줄곧 나서던 시니어 카테고리는 없었다. 마음을 비우고 여성부 경선에 임했다. 2주 동안 경기를 치러 승률이 높은 팀을 선발하는 방식이었다.
2주 후 이변이 발생했다.
아시안게임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그 생동감! 꿈과 열정 가득한 국가대표 선수들과 한자리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젊어지는 것 같았다. 국내 SNS에서 최고령 국가대표로 화제를 모았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언젠가는 좋은 성적으로 다시 인터뷰를 하고 싶다. 그때까지 계속 브리지를 즐기려고 한다. 열아홉 손자와 짝을 맞춰 경기에 나선다면 얼마나 좋을까…! 다시 한번 꿈을 꾼다.
“항저우 아시안게임 브리지 국가대표 임현입니다. 일흔셋에 첫 태극마크를 달았습니다. 살다 보면 인생의 깜짝 선물 같은 일이 벌어져요.”
에디터 조형애 디자인 유영현
기상 시간 평균 6시 44분
하루 평균 7.3시간 잔다. 일반 대중과 비교해 30분 덜 자는 편. 잠자리에 드는 시간은 대략 오후 11시 30분으로 12시를 넘기지 않았다.
오전 루틴 종이신문·뉴스 보기, 운동·산책, 스케줄링
자산규모가 커질수록 신문이나 뉴스를 많이 본다는 응답이 높았다. 관심 분야는 경제, 정치, 생활문화 순이었다.
독서 1년에 10여 권
금융자산 100억 원 이상 보유한 부자는 20여 권을 읽는 것으로 나타났다. 선호하는 분야는 인문사회, 소설, 자기계발 순이었다.
연간 독서랑
부자 – 10권
일반 대중 - 6권
일하는 시간 하루 평균 5시간 이하
부자 중 절반은 하루 평균 5시간 이하로 일했다. 기업경영자나 자영업자로 비교적 시간 운용에 자유도가 높기 때문이다.
취미 산책과 걷기
부자는 산책과 걷기로 일상 속에서 심신을 단련한다. 건강은 골프와 헬스로 관리하는데, 골프는 친목 도모의 목적도 큰 편이었다.
가족과 식사 주 3회 이상
부자 10명 중 7명은 주 3회 이상 가족과 식사한다. ‘거의 매일’이라는 응답도 40%를 넘었다.
부자의 주 평균 가족 식사 횟수
거의 매일 – 41%
주 3~4회 – 26.6%
주 1~2회 – 23%
거의 없다 – 9.4%
“일상의 루틴이 우리를 구원한다.” - 파스칼 브뤼크네르, 철학자
에디터 조형애 출처 하나금융경영연구소 ‘2024 대한민국 웰스 리포트’ 디자인 유영현
장애인·고령자·영유아 가족 등 관광 약자도 활동 제약 없이 자유롭게 즐길 수 있는 여행을 ‘무장애 여행’이라고 한다. 나이 들어가며 어쩔 수 없이 체력이 부족해지고 거동이 불편해져도, 무장애 여행지라면 얼마든지 즐길 수 있다. 무장애 자유여행을 꿈꾸는 이들을 위해 방법을 알아봤다.
보행이 불편한 사람에게 여행지는 ‘가고 싶은 곳’과 ‘가기 편한 곳’으로 나뉜다. ‘또 가고 싶은 여행’이 되려면 출발 전 준비해야 할 것도, 확인해야 할 것도 많다.
무장애 여행지를 고를 때는 먼저 휴게 공간 유무를 확인해야 한다. 앞서는 의욕만큼 몸이 따라주지 않을 때 앉아서 쉴 공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휠체어나 이동 보조수단이 갖춰져 있는지도 살펴보자. 바닥에 턱은 없는지, 보호자와 함께 이용 가능한 다목적 화장실이 있는지 등도 알아두면 좋다.
고령자 전용 맞춤 여행 상품을 개발하는 어뮤즈트래블의 정수진 팀장은 여행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가르는 가장 중요한 점으로 ‘이동 접근성’을 꼽았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는 접근성을 높이거나 편의 시설을 만드는 등 관광 약자를 위한 여행 환경을 조성하고 있다. 2015년부터 무장애 여행이 가능한 여행지를 ‘열린 관광지’로 선정하고 있다. 2024년 기준 열린 관광지는 132개소다. 무장애 여행자가 방문하기 편한 음식점과 숙박 안내는 물론, 여행 코스도 추천하고 있다.
여행을 위해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지만 가족과 함께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면 관광 약자의 여행을 돕는 ‘트래블 헬퍼’와 함께 가거나, 무장애 여행 전용 여행사를 이용하는 것도 방법이다. 이동할 때는 파파택시, 블랙캡 같은 슬로프 택시를 이용하거나, 지역별로 운영하는 저상 시티투어 버스를 활용해보자.
여행지의 환경과 이동 접근성을 알아보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사전 준비다. 전윤선 작가는 책 ‘아름다운 우리나라 전국 무장애 여행지 39’에서 “사전 준비를 철저히 해두어야 무장애 여행에서 발생하는 위험을 최소화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고령자라면 복용약을 여유 있게 챙겨야 한다. 약을 분실할 경우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여행 일정의 두 배 정도를 챙겨두면 좋다. 해외여행을 가는 경우라면 영문으로 된 복용약 명칭과 지병을 명시한 영문 진료 기록을 가져가면 응급 상황에서 빠르게 대처할 수 있다.
전동휠체어 이용자라면 자신이 사용하는 휠체어 사양과 배터리 사양을 확실하게 알아두자. 배터리 사양 인증서를 판매처에서 발급받아 가면 좋다. 배터리 충전기는 필수이고, 휠체어 바퀴 여분을 반드시 챙기자.
정수진 팀장은 “관광 약자는 관광 정보가 없으면 아예 집을 나서지 않는 등 활동에 제약을 받는 사례가 많다”면서도 “생각보다 물리적 환경이 조성된 관광지가 많이 생겼고, 전화로 물어볼 수 있는 기관들도 있으니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여행을 시도해보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정 팀장은 고령자가 무장애 여행을 준비할 때 단발성 여행으로 끝나지 않도록 다양한 체험을 해볼 것도 권유했다. 예를 들어 여행지에서 바리스타 체험을 한 후 집으로 돌아와 취미로 이어질 수 있도록 연결해보라는 것이다. 삶의 가치를 높이는 체험을 통해 여행이 외부 활동으로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이다.
또한 “관광 약자도 보통의 여행자처럼 바라보는 사람들의 인식 개선이 함께 이뤄진다면 무장애 여행지는 앞으로 더 많아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도움말 정수진 어뮤즈트래블 팀장 참고 ‘아름다운 우리나라 전국 무장애 여행지 39’(전윤선 저)
강원도 강릉시 구정면에는 ‘모던춘지’라는 이름의 건물이 있다. 불투명한 유리문 너머로 보이는 것이 무엇일까 싶어 문을 활짝 열어보니 라디오 1000여 대가 얼굴을 드러낸다. 나이도 국적도 달라 보이는 라디오가 질서정연하게 앉아 있는 모습이 감탄을 자아낸다. 건물의 규모는 작지만 라디오 박물관이라 해도 손색없는데, 이곳 주인 김형호 기자는 “그냥 라디오가 좋아서 모았을 뿐”이라고 말한다. 전시나 수익의 목적이 아니라 취미 수집의 결과라니 놀라울 따름이다. 덕후의 힘은 실로 대단하다.
“이 붐박스는 마돈나가 ‘Hung-Up’이라는 노래의 뮤직비디오와 라이브 공연에서 갖고 나온 모델이에요. 겉모습만 봐도 화려하죠. 라디오를 통해 자신의 캐릭터와 성향을 보여준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또 이건 VE301이라는 굉장히 오래된 라디오입니다. 히틀러는 이 라디오를 국민에게 보급해 연설을 내보내는 등 선동하는 용도로 사용했죠. 당시의 분위기를 느껴보고자 히틀러의 마지막 연설이 담긴 LP판도 공수해와 놓았답니다. 어느 날 여길 방문한 독일 분이 보고는 깜짝 놀라시더라고요.”
김형호 기자는 모던춘지 곳곳을 돌아다니며 라디오에 대해 설명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는 ‘가장 오래된 라디오가 가장 비싸냐’는 식의 질문을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듣는다고 꼽았다. 그의 답은 “단순히 오래되었다고 비싼 게 아니다. 당시 어떤 가치를 구현했느냐가 중요하다”였다. 보통은 라디오의 외형이나 금액 등을 궁금해하지만, 그는 라디오 뒤에 숨은 스토리에 주목한다. 라디오가 가진 역사, 가치, 그리고 라디오 주인과 그의 사연. 그 모든 것을 따뜻한 마음으로 품고 있다.
라디오를 수집한 지 약 15년. 김형호 기자도 평범하면서도 특별한 라디오 스토리를 갖고 있다. 어부인 아버지는 매일 아침 라디오 방송으로 날씨를 확인했고, 어린 소년은 늦은 밤 아버지의 손때 묻은 라디오에서 나오는 방송을 들었다. 파도 소리와 함께 어우러지는 라디오의 음색은 소년의 감수성을 키우기에 충분했다. 이후 서울에서 학업을 마치고 돌아온 소년은 TV에 나오는 지역 방송국 기자가 됐다. 그러나 늘 마음속 한편에는 라디오가 자리한 터. 그리하여 라디오를 하나둘 모으기 시작한 것이 지금에 이르렀다.
라디오 안식처, 모던춘지
당시에는 몰랐지만, 돌이켜보면 필연인 순간들이 있다. 김형호 기자는 결혼할 때 아내로부터 TV 대신 티볼리 라디오를 혼수품으로 받았다. 라디오를 애지중지하며 매일 방송을 청취했던 그는 어느 날 1970년대 독일에서 나온 라디오 소리를 듣게 됐단다. 티볼리 라디오보다 30년 정도 일찍 만들어진 것인데, 놀랍게도 소리의 차이는 엄청났다고. 김 기자는 그 이유가 궁금했다. 여기에 그의 지적 호기심이 더해지면서 라디오 수집과 연구가 시작된 것이다.
날이 갈수록 김형호 기자의 집에 쌓이는 라디오도 늘어났다. 문제는 보관이었다. 다행히 2017년 삼척에서 강릉으로 이사 가면서 라디오 보관 공간이 생겼다. 단독주택인데 지하실이 있었기 때문. 그러나 이번에는 습기가 문제였다. 라디오가 상할까 봐 걱정하던 가운데, 김 기자는 대형 사고를 터뜨리고 말았다. 라디오 전문 사이트에서 한꺼번에 내놓은 라디오 100대를 집에 데려온 것. 더 이상 라디오를 지하실에 방치할 수 없다고 생각하던 즈음 어머니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는 모던춘지가 지어진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어머니를 보내드리면서, 죽음이라는 게 마음의 준비 없이 갑자기 찾아올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그리고 물건의 의미도 생각하게 됐죠. 장례 후 자식들이 어머니 집 정리를 했는데, 어머니가 쓰시던 물건들의 가치를 모르니 버릴 수밖에 없어 너무 죄송스럽더라고요. 그러면서 내가 라디오에 대한 가치를 정립해놓지 않으면 이 물건들이 쓰레기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작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이 공간을 지었어요. 너무 아프고 힘들어서 위로받고 싶기도 했죠. 모던춘지의 ‘춘지’는 어머님 성함이에요. 여기 있으면 어머니 생각이 많이 나죠.”
2019년 모던춘지를 지을 당시 건축 비용이 예상보다 많이 들었다. 그는 삼척 신혼집 아파트를 팔고 보험도 해지해 1억 원이 넘는 돈을 마련했다. 라디오 수집에 이어 창고 만들기까지, 취미활동으로 큰돈을 소비한 김형호 기자는 아내에게 고맙고 미안한 마음을 지니고 있다. 그는 “평일에는 직장에 다니고, 주말에는 여기에서 노는 게 좋다. 이런 놀이터 같은 공간을 갖는 것이 어른의 로망 중 하나인데, 아내가 이해해줘서 가능했다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호주에 사는 친형과 라디오 수집을 같이 시작했어요. 사실 호주에는 여기보다 더 많은 라디오가 있답니다. 4년 전쯤 형과 라디오 수집을 위해 호주 곳곳을 돌아다녔는데, 그 과정에서 만난 사람들과 라디오의 의미, 사연 등을 인터뷰한 것을 영상으로 남겨놓았어요. 그걸 편집해 만든 다큐멘터리 상영회를 2월 13일 세계 라디오의 날에 여기에서 가졌죠. 라디오에 대해 생각하고 얘기를 나눈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이곳에서 종종 토론회, 전시회를 진행했으면 좋겠어요. 궁극적으로는 더 넓은 공간으로 옮겨가서 라디오를 기반으로 하는 복합 문화 공간을 형성하고 싶다는 꿈도 갖고 있습니다.”
라디오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는 유리관 내부를 진공으로 만들어 전극을 넣은 진공관 라디오다. 두 번째는 1954년 미국에서 발명한 트랜지스터 라디오다. 반도체 부품이 쓰이면서 파손 위험이 줄어들었고, 오늘날 휴대용 라디오도 탄생했다. 그렇다면 라디오 역사계에 있어 혁명적인 일은 무엇이었을까. 김형호 기자는 붐박스(Boombox) 탄생이라고 꼽았다. 붐박스는 트랜지스터에 속하며, 손잡이가 달린 것이 특징이다. 힙합과 브레이크댄스의 영향으로 1980~1990년대에 전성기를 보냈다.
“저는 붐박스를 문화가 접목된 물건이라고 생각해요. 흑인들이 랩 배틀을 할 때 비트 음악이 필요하잖아요. 그때 휴대 가능한 붐박스가 큰 역할을 했죠. 우리나라에서도 1990년대 후반에 청춘들한테 인기를 끌었어요. 그래서 붐박스는 중년들에게 향수의 물건인데, 지금 봐도 전혀 촌스럽지 않죠. 저는 붐박스만 100개 넘게 모았어요. 전 세계적으로 붐박스에 대한 관심이 높은데, 국내에서는 이렇게 모은 사람이 없어요. 붐박스를 계속 수집하고 연구해서 어떤 프로젝트를 해볼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오래된 라디오 생존법
김형호 기자는 드라마나 영화 등을 볼 때, 시대나 상황에 맞지 않는 라디오가 소품으로 나와 안타까운 경우가 많다고 한다. 예를 들어 199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 주인공이 2000년대에 나온 노트북을 사용하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얼마나 어색한가. 그러나 컴퓨터와 달리 라디오는 변천사를 잘 아는 사람이 없기에, 소품이 잘못 쓰여도 모르고 지나치는 경우가 많다. 김 기자는 “라디오 전문가로서 자문 역할을 하고 싶다. 지금도 가끔 비공식적으로 소품 자문 요청을 받는다. 작품의 배경, 인물의 환경 등을 분석해 답을 찾는다. 작은 디테일이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는 법이다”라고 말했다.
“라디오가 오래된 물건 같지만 사실 역사가 100년이 채 안 된 물건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1980년대 이전의 라디오 스토리를 잘 모르죠. 저도 수집하면서 진공관 라디오를 처음 접했으니까요. 라디오 연구와 자문을 통해 시대별로 만들어진 라디오가 다르다는 점과, 그 안에서 읽어야 하는 코드는 무엇인지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어요. 라디오의 가치를 찾아주고 싶기도 합니다. 실제로 이런 일도 있었어요. 제가 아는 사람 집에 오래된 라디오가 있었는데, 저는 보자마자 그 라디오의 가치를 알아봤어요. 그게 지금 영월 라디오스타 박물관에 전시돼 있어요. 박물관 전시 주제와 맞는 라디오라고 생각해, 제가 중간에서 가치에 대해 보증을 섰죠. 자신이 갖고 있던 물건이 어느 날 박물관에 전시되다니, 얼마나 놀랍고 뿌듯한 일인가요.”
현재는 ‘옛 물건’, ‘서민형 물건’이라는 인식이 있지만, 과거에는 라디오가 고급 물건으로 대접받았다. 1970년대만 해도 라디오 한 대 가격은 100만 원, 현재 가치로 보면 1000만 원에 달했다고 한다. 그러나 TV가 보편화되면서 라디오는 몰락의 길을 걸었다. 수요가 줄어들자 제조사에서도 예전만큼 좋은 부품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에 따라 라디오는 저품질화되고, 대중의 인식 또한 저하되고 말았다. 김형호 기자가 가장 아쉬워하는 지점이다.
“오늘날 라디오에 손이 가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소리가 좋지 않기 때문이에요. 부품의 차이가 크죠. 쉽게 얘기하면 과거에는 스피커를 쇠와 자석으로 만들었어요. 그런데 오늘날에는 비싸다는 이유로 자석을 쓰지 않아요. 그래서 과거 라디오와 같은 단단한 소리가 나오지 않는 겁니다. 저는 소리가 좋아지면 사람들이 라디오를 들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여러 가지 방법을 궁리하고 있죠.”
김형호 기자는 라디오 수리도 직접 한다. 회사의 필요에 따라 무선설비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했는데, 그 덕에 기초 지식을 갖게 됐다. 그리고 수백 대의 라디오를 직접 고쳐보며 방법을 터득했다. 그는 오래된 라디오의 전원이 켜지게 하고, 주파수를 맞춰 라디오 방송이 스피커에서 나오게 한다. 블루투스 스피커 장치 연결로 휴대폰 음악 듣기도 가능하다. 세상의 변화는 때로 아주 사소한 움직임에서 시작되는 법이다. 좋은 소리를 좇아 라디오를 모으고, 수명 다한 라디오를 살려내기까지 하는 김형호 기자. 그 낭만의 나비효과가 어디까지 뻗어갈지 궁금증이 증폭된다.
“라디오가 사람들에게 친숙한 존재로 다가갔으면 좋겠어요. 현재 사람들은 라디오를 방송으로만 인식하고 있는데, 물건으로서 다가가면 또 다르게 평가할 수 있다고 보거든요. 제가 만든 것처럼 오래된 라디오를 블루투스 스피커로 활용할 수도 있죠. 오래된 라디오의 소리는 노래 부르는 사람이, 방송 진행자가 가까이 있는 듯한 느낌을 안겨줍니다. 일반 전자기기로 노래를 듣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죠. 오래됐다고 무조건 낡은 물건이 아닙니다. 숨을 불어넣어 주면 물건의 가치는 재탄생할 수 있습니다.”
여행에는 나이가 없다고 하지만, 실제 시니어들은 여행을 가도 될지 눈치를 본다. 늙어서 주책맞아 보이는 건 아닐까, 장기간 집을 비우면 손주는 누가 보살피나 등 걱정이 잇따른다. 그러나 정부에서는 여행하기 딱 좋은 나이라며, 60세 이상을 대상으로 여행자 양성 교육을 무료로 펼치고 있다. 1964년생 이상의 시니어라면 특히 주목해보자.
교육의 이름은 ‘꿈꾸는 여행자’로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고, 한국관광협회중앙회에서 주관한다. 총 7주간 교육생은 자신의 취향을 반영해 여행 계획을 수립하고, 조별로 실습 여행을 다녀온 후 결과를 공유한다. 디지털 기기 활용법도 배우며, 전문가 강연도 듣는다. 2018년 시작돼 현재 전국 17개 시·도에서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지난해까지 실 수료생은 2296명이다. 또한 총 7주간의 정규 교육 과정 외에도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올해는 △시니어 강사 과정(6월) △여행 인플루언서 과정(8월) △테마형 여행가 과정(9월) △영상 제작 과정(10월) 등을 순차적으로 오픈할 예정이다.
여행 커뮤니티 꿈꾸다
꿈꾸는 여행자 교육 위탁 운영사는 라이프맵(구 여행대학)이다. 정상근 대표는 2008년 ‘80만 원으로 세계여행’이라는 책을 낸 여행 작가이기도 하다. 책 제목처럼 80만 원만 들고 호주로 떠난 그는 그곳에서 1000만 원을 모아 1년간 자급자족하며 세계를 돌아다녔다. 그러면서 정 대표는 ‘우리의 부모님인 시니어는 왜 이렇게 자유여행을 하지 못할까’라는 안타까움을 느꼈단다. 시니어를 위한 여행 교육을 시작하게 된 배경이다.
꿈꾸는 여행자는 시니어의 삶의 질 개선과 국내 관광 활성화가 목표다. 특히 정상근 대표는 시니어가 은퇴 후 겪는 상실감, 우울감에 주목했다. 근본적으로 그들의 삶에 ‘나’ 자신이 없어 비롯됐다고 생각했다. 정 대표는 “고도 성장기를 거치며 평생 자식들을 위해 열심히 살아온 시니어들은 여행마저 자신을 위해 해본 적이 없다. 내가 좋아하고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여행을 즐기길 바랐다”고 말했다.
사실 시니어들 스스로도 자유여행의 장점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여행을 떠나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며, 돈 또는 시간이 없다는 핑계를 댄다. 정상근 대표 역시 시니어들이 왜 두려워하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왜 여행을 많이 하지 못했고, 무엇이 해결되면 여행을 할 수 있을지’ 조사를 통해 알아봤다. 그 결과 가장 큰 원인은 ‘함께할 사람이 없어서’로 도출됐다. 이에 따라 꿈꾸는 여행자는 지속 가능한 여행 커뮤니티로 발전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고, 조별 활동 위주로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실제로 2018년 1기 교육생 중 일부는 현재까지 만남을 이어간다고 한다.
시니어가 바라는 여행
꿈꾸는 여행자는 시니어가 여행 취향과 선호를 발견하고 주도적인 여행을 떠날 수 있도록 돕는다. 정상근 대표는 시니어들이 원하는 여행의 특징으로 “교육과 연계된 여행에 대한 수요가 높다”고 짚었다. 여행지에 숨은 역사적 배경을 알아보거나, 하나의 분야를 깊이 탐구하는 여행을 하거나, 여행 후 자신에게 무언가 남기를 바란다. 또한 취미를 확장해 여행으로 발전시키는 경우도 많다.
‘여행은 경험’이라고 말하는 정 대표는 “이동을 수반하는 모든 행위는 여행이 될 수 있다”면서 “평생 여행과 담쌓고 살았는데 갑자기 많은 돈과 에너지를 들여 여행을 가기란 쉽지 않다. 여행한다는 기분으로 어딘가 떠나보는 것을 시작으로 삼아도 좋다. 거창할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지리산 등산을 목적으로 남원에 간다면, 그 김에 인근 맛집에서 식사하고 광한루도 보고 오면 그게 여행이 된다는 것.
결론적으로 꿈꾸는 여행자 교육의 장점은 자신의 취향에 맞는 자유여행을 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여행을 함께하는 친구가 생기고, 여행 전문가가 되어 글을 쓰거나 강연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모든 과정은 궁극적으로 행복과 연결된다. 정상근 대표는 “시니어의 여행은 존중되어야 한다. 꿈꾸는 여행자는 새로운 문화를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해 사명감을 갖고 임하고 있다”고 전했다.
“여가의 사전적 정의란 일하지 않는 모든 시간을 말하더라고요. 액티브 시니어들이 여가를 행복하게 보내기 위해 투자하는 게 당연한 문화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행은 여가를 보내는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는 거죠. 수강생 한 분이 ‘우리 세대가 자식에게 물려줄 것은 돈의 유산이 아니라 경험의 유산임을 증명하겠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 말이 참 의미 있고 멋있다고 생각합니다.”
◇인터뷰 |‘꿈꾸는 여행자’ 수료생, 박수택 생태환경 평론가
“새 쫓는 여행, 배움의 미학”
2018년 SBS 기자로 은퇴한 박수택 평론가는 ‘꿈꾸는 여행자’ 교육을 들은 후 여행가로서 인생 2막을 살고 있다. 그는 워낙 환경과 관광 쪽에 관심이 많았다. 환경 전문기자로 유명했으며, 방통대에서 중국어, 환경·보건, 관광학 등 3개의 학사학위를 취득하기도 했다. 꿈꾸는 여행자 교육을 통해 그는 자신의 관심사를 녹여 자연 여행을 해야겠다는 해답을 얻었다. 특히 새의 매력에 푹 빠진 그는 전국과 해외 곳곳을 돌며 탐조(探鳥) 여행을 펼치고 있다.
“꿈꾸는 여행자 교육을 들으면서 공부가 많이 됐어요. 나만의 여행에는 테마가 있어야 하며, 공정 여행을 해야 한다는 걸 알게 됐죠. 공정 여행이란 여행지의 자연과 환경에 해를 끼치지 않고, 현지 문화를 존중하는 여행을 말합니다. 돈만 쓰고 관광지만 돌아다니는 여행과는 다르죠. 볼·먹·잘·놀·살·탈거리, 이 6가지가 알찬 여행을 결정한다고 생각합니다.”
박수택 평론가의 새에 대한 사랑은 실로 대단하다. 새의 발자취를 쫓는 그는 동년배 시니어들에게도 자연 여행을 추천한다. 친구, 친척, 환경단체 활동가, 탐조클럽 회원 등과 여행을 떠난 적도 많다. 주로 습지 여행으로, 국내 이천과 순천, 일본 훗카이도 구시로, 중국 장쑤성 옌청 등에 다녀왔다. 그는 “사람들과 같이 보고 느끼면 여행이 더욱 재밌다. 동시에 내가 알고 있는 정보를 공유하므로 생태관광 안내인 역할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탐조 여행을 하면서 자연을 함께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는 거죠. 그동안 우리 시니어들은 열심히 일하면서 경제적으로 많은 기여를 했잖아요. 이제는 미래 세대가 살아야 할 바탕인 자연환경을 지키기 위해 작은 노력이라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자연 속에 있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저 행복합니다. 이 아름다운 자연이 계속 보존되길 바라는 마음뿐입니다. 여행을 하면서 단순히 소모적인 즐거움만 누리려 하지 말고, 의미도 찾았으면 좋겠습니다.”
전국 200여 개 시·군·구를 죽기 전에 다 가보는 것이 목표라고 말하는 박수택 평론가. 김정호의 호를 따와 ‘고산자 계획’이라고 이름 붙였다. 지금까지 100여 개 지역을 다녀왔으며 갈 길이 멀다고 말한다. ‘여행은 배움’이라고 생각하기에 앞으로도 배울 것이 무궁무진하니 가슴이 뛴다.
“자발적으로 호기심을 갖고 주도해서 여행하면, 그 과정 자체에서 스스로 충족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새 이름을 새롭게 아는 것, 새로운 습지를 발견하는 것, 그 자체가 배움의 즐거움이 되는 거죠. 순천만에 흑두루미가 날아오는데, 번식지 찾기가 좀처럼 어려워요. 하지만 한번 도전해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 날아오는 독수리는 몽골에서 오는 것인데, 그곳이 어디인지 가보고 싶어요. 이처럼 하나를 알면 두 개를 알고, 두 개를 알면 네 개를 알게 되고… 가지치기가 됩니다. 뿐만 아니라 여행을 통해 글을 쓸 수도 있고, 자신이 프로그램을 짜서 사람들을 안내하는 일을 할 수도 있겠죠.”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23년 초중고 사교육비 총액이 약 27.1조 원에 달하며, 전년도 26조 원 대비 1조 2천억 원(4.5%) 증가했다. 특히 예체능 및 취미 사교육비는 6조 6천억 원에 이르지만, 이 중 75%가량이 학원 수강에 의존하고 있는 상황.
예체능 사교육 의존도가 높은 이유 중 하나는 수강생의 목표에 맞는 전문가를 찾기 어렵다는 것. 입소문에 의존하는 레슨 시장 구조로 인해 새로운 참여가 어려운 실정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호언장담한 기업이 있다. ‘월클플레이’는 맞춤형 예체능 레슨을 제공하는 서비스로, 학력 검증, 수업 문의 등 다양한 기능을 통합하여 간편하게 예체능 레슨 전문가를 찾을 수 있도록 한다. 현재 웹사이트에는 약 50여 명의 전문가들이 활동 중이며, 오늘 3일 앱 출시와 함께 가입하는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수수료 할인 프로모션을 진행할 예정이다.
또한 풍요로운 여가를 꿈꾸는 시니어들에게도 좋은 강사를 만날 수 있는 플랫폼 역할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월클플레이 측은 설명했다.
금융업계에서 42년 일하고 65세에 은퇴한 뒤 일본어 학교 교사로 새로운 커리어를 시작한 나가시마 에쓰코(永嶋悦子, 71세)씨는 진정한 행복을 느끼고 있다. 나가시마 씨는 일주일에 네 번 유학생을 대상으로 일본어를 가르친다. 결혼 후 출산을 망설일 정도로 일이 너무 좋았던 나가시마 씨의 이야기를 듣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42년간 금융업계 누빈 커리어우먼
나가시마 씨는 1975년 산와은행(三和銀行, 현 미쓰비시도쿄UFJ은행)에 입사했다. 산와은행에서 17년간 일하면서 긴자지점 지점장대리까지 승진할 수 있었다. 이후에는 계열 회사인 에스에이서비스(エスエサービス, 현 미쓰비시UFJ웰스어드바이저스 주식회사)로 자리를 옮겨 6년 동안 재무설계사로 일했다. 그러다 또 한 번의 전근을 경험하게 된다. 같은 금융업계라고 볼 수 있지만, 생각지도 못했던 연구소로 이동하게 된 것이다. 산와종합연구소(三和総合研究所, 현 미쓰비시UFJ리서치&컨설팅)에서 19년 근무하고, 2017년 42년간 몸담았던 금융계를 퇴직했다. 나가시마 씨에게 과거 금융업계에서 일했을 때 가장 재미있었던 순간을 묻자 연구소에서의 일화를 꼽았다.
“산와종합연구소에서 일했을 때가 가장 재미있었어요. 기업의 경영 상담도 하고, 관공서에서 수탁받은 조사 업무도 했죠. 가끔 금융 세미나 강사로 초청되기도 했어요. 무엇보다 리포트 작성하는 일이 적성에 맞았던 것 같아요.”
45세, 출산을 선택하다
나가시마 씨의 이력을 보면 선구적인 여성으로 정년퇴직까지 걸어온 커리어우먼이다. 그런 그녀에게도 힘든 순간이 있었다. 과거에는 금융기관 합병이 많았다. 이 과정에서 다른 회사에 소속되어 있던 사람들이 상사와 부하로 만나 다른 기업 문화와 성향 차이로 갈등을 겪기도 했단다. 또 같은 수준의 보고서를 내도 여자라는 이유로 질책받는 상황도 있었다. 그녀가 대학 졸업 후 은행에 입사했을 때만 해도 남녀고용기회균등법(1986년 시행)이 존재하지 않았다. 또한 출산 후에도 커리어를 지속할 수 있는 사회적 여건이 마련되지 않은 시절이었다. 그러다 나가시마 씨는 44세에 아이를 갖기로 결심했고, 45세에 첫 출산을 경험했다. 그럼에도 일이 너무 좋았던 그녀는 출산할 때까지 직장을 쉬지 않았다.
여성으로서 커리어를 이어가기 쉽지 않은 시절이었지만, 아버지와 사별 후 혼자 지내던 어머니가 나가시마 씨의 육아를 도왔기에 일을 지속할 수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크나큰 시련이 닥쳤다. 1986~1991년은 일본의 버블 경제 시기였다. 당시 부동산과 주식 시장의 투자 과잉으로 주택과 주식 가격이 나날이 높아졌다. 이 상황을 지켜보던 나가시마 씨는 그동안 저축했던 돈으로 아파트를 구입하고 대출을 받아 주식에 투자했는데, 이후 거품이 가라앉으면서 큰 손해를 보았다.
“재산을 모두 정리하고도 1억 엔 이상의 대출이 남아 있었어요. 살아갈 의욕이 나지 않았고, 나쁜 생각을 하기도 했죠. 경제 파산이 얼마나 큰일인지 경험했어요. 하지만 남편이 ‘그 돈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고 옆에서 설득했죠. 이후 7년 동안 월급과 보너스를 모두 은행 대출 갚는 데 썼어요. 두 번의 전직으로 받은 퇴직금도 고스란히 대출 상환에 썼죠. 이후로는 두 번 다시 투자에 손을 대지 않았어요.”
다시 시작한 커리어, 일본어 교사
금융업계에서 42년 일한 그녀는 어떻게 일본어 학교 교사로 커리어를 전환하게 된 걸까. 나가시마 씨는 연구소에서 퇴직 직전 정부 수탁조사 업무를 하다가 ‘일본어 학교 교사’라는 직업이 있다는 걸 알게 됐고, 흥미를 느껴 퇴직 후 바로 자격 시험에 도전했다고 한다. 일본어 교사 자격증은 문화청에서 추천하는 420시간의 강좌를 수강하면 취득할 수 있다. 2022년 11월 기준 전국 일본어 교사는 4만 1755명에 이른다. 독립행정법인 일본학생지원기구에 따르면 외국인 유학생이 일본어를 공부하는 일본어 학교는 약 600개가 있으며, 학생 수는 약 6만 명에 이른다.
나가시마 씨는 퇴직 후 6개월 정도 일본어 학교에 다니며 일본어 교육 강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이후 800명 정도의 외국인 유학생이 다니는 도쿄 기타구의 JCLI 일본어 학교에 취직했다. 나가시마 씨는 대학교나 대학원 진학을 희망하는 유학생반을 담당하고 있다. 비상근 강사로 일주일에 네 번 근문한다. 주 2회는 오전 11시 50분부터 오후 5시까지 일본어 지도를 하고 주 2회는 대학원 진학 희망자를 대상으로 오전 8시 30분부터 12시 30분까지 개별 수업을 진행한다. 연구계획서 작성법, 면접 연습, 소논문 지도를 담당한다. 이후 오후 2시까지는 추가 개별 지도를 한다.
“제가 담당하는 반은 진학이 목표여서 대부분 중국에서 온 유학생이 많아요. 초급반에는 네팔, 인도네시아, 베트남, 캄보디아, 필리핀 등 동남아시아 유학생이 많고요.”
과거에는 한국 유학생도 많았는데, 최근에는 중국, 베트남, 네팔 유학생이 많다고 한다.
“요즘 일본으로 유학 오는 중국 학생들을 보면 얼마나 상냥하고 착한지 몰라요. 중산층 자녀들이 일본으로 유학 오는 경우가 많은 것 같은데요. 중국이 한 자녀 정책을 할 때 태어난 아이들이라 부모와 조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서 그런 것 같아요.”
나가시마 씨를 만나러 JCLI 일본어 학교를 방문한 날, 학교 측에서 대학원 진학을 원하는 유학생들에게 특강을 해달라는 부탁을 받아 필자도 교단에 섰다. 나가시마 씨의 말처럼 중국 유학생들의 순수하고 해맑은 눈빛이 보였다. 특강 후 많은 질문을 받았는데, 장래에 대한 목표가 뚜렷하고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려는 열정이 엿보이는 시간이었다.
퇴직 후 얻은 보람
나가시마 씨에게 퇴직 후 일본어 교사 커리어를 선택해 어떤 점이 좋았는지 물었다.
“제가 열심히 지도한 학생이 좋은 대학이나 대학원에 진학한 후 저를 찾아와 ‘정말 고마웠습니다’라고 인사할 때 이 일을 하길 잘했다고 느껴요. 금융기관에서 40년 이상 일했지만 누군가에게 이렇게 진심으로 마음에서 우러난 감사 인사를 받아본 적이 없어요. 지금까지 제가 일한 경험, 인생 경험이 그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미래가 유망한 젊은 유학생들이 원하는 목표를 이루도록 돕고, 그동안 가르쳐주어 감사하다는 인사를 받는다면 교사로서 무척 뿌듯한 일일 것이다.
“대학원에 진학하려는 학생들과 연구 테마를 같이 고민하고 방향성을 탐색하는 작업은 최고로 즐거워요. 학생의 연구 테마를 보며 새로운 지식이나 관점을 얻게 되는 순간도 아주 설레고 신나죠. 그렇게 힘을 합쳐 대학원에 합격하고 뛸 듯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 가슴이 벅차오를 때가 많아요.”
학생들과 교류하며 보람을 느낀다는 점에서 나가시마 씨에게 교사는 무척 매력적인 직업이다. 또 하나의 장점은 긴 휴가가 있다는 점이다.
“3개월의 수업 기간이 끝나면 일주일의 쉬는 시간이 있어요. 그 시간에는 국내나 해외로 가고 싶었던 여행을 떠나요. 저에게는 너무 큰 즐거움이에요.”
노년에 잡은 행복의 파랑새
“지난달 은행 직원들 모임이 있었어요. 30여 명이 모였는데 여자는 저 혼자뿐이에요. 다들 70대가 됐으니 지금 뭐하는지 물었더니 절반 정도는 회사의 사외이사나 감사 일을 하고 있대요. 어떤 기업에 감사 관련한 일이 생기면 과거 금융기관에서 알고 지낸 동료나 선후배에게 소개한다더군요. 일종의 네트워크인데, 여자인 저에게는 그런 정보가 들어오지 않아요.”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나가시마 씨가 말했다.
“저는 금융과 전혀 관계 없는 일을 시작했지만, 오히려 재미있어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겠지만 저는 정년까지 했던 업무와 전혀 관련 없는 일을 하는 게 훨씬 즐거워요. 이 일은 취미를 살리는 일과 같아요. 한 달 평균 10만~15만 엔 전후로 큰 수입은 아니지만, 연금 외에 충분한 용돈 벌이도 돼요. 일본어 학교에 다니면서 사회와 연결돼 있다는 감각도 얻을 수 있고, 전철 타고 회사를 다니는 것도 건강에 좋다고 생각해요.”
나가시마 씨처럼 42년 동안 현역으로 근무하며 어느 정도 저축도 해두었고 퇴직금도 있으면서 연금도 매달 받는 경우라면, 무리하게 일하는 것보다 하고 싶은 일을 하는 편이 노후에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가시마 씨는 특히 여성 시니어에게 일본어 교사를 추천했다.
“여성에게는 일본어 교사가 최고의 직업이라고 생각해요. 정년 후에 큰 무리 없이 일할 수 있어서 좋고,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도 많지 않고요.”
현재의 직업에 만족하고 있는 나가시마 씨에게 앞으로의 꿈이 있는지 물었다.
“일본 국내 여행을 많이 다녔어요. 이제는 세계의 도시를 찾아 다니면서 혼자 한 달 살기를 해보고 싶어요.”
자립한 여성이라면 대다수가 원하는 꿈이 아닐까 싶었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가장 행복한 때가 언제냐고 묻자 “지금! 지금이에요!”라며 주저 없이 말하는 나가시마 씨. 활짝 웃던 그녀의 목소리가 취재를 마친 뒤에도 메아리처럼 들리는 것 같았다.
젊은 시절 일본의 버블 경제라는 파도에 휩쓸려 암흑과 절망의 시기를 지나온 그녀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 노년기에 이르러 젊은 유학생들의 꿈을 함께 실현하는 교사라는 행복의 파랑새를 잡았다면, 그것이야말로 정말 멋진 삶이 아닐까!